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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요량의 철학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예교실에서였다. 연세 지긋한 한 분이 밤새 써온 글을 발표하신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잘 보이던 젊은 한 때, 좋아했던 여성분이 선물해준 책 한 권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박목월 시인의 수필집`밤에 쓴 인생론`이란 책인데, 그 안에 나오는 어떤 한 장면이 평생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 장면을 생각하노라면 자연스레 책을 선물해준 여성분도 연상이 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애틋해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요량의 철학`이란 소제목이 달린 부분이 재미난 한 장면인데, 식모 `요량댁`은 요량이란 말을 요량 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다.어린 딸을 잃은 아픔을 누군가 위로할라 치면 “시집 간 요량하지요.”라고 너스레를 떤다거나, 돈지갑을 잃어버렸을 때에도“약값으로 쓴 요량하지요.“ 라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안다. 아픔이나 슬픔을 체념이나 달관의 경지로 승화시킬 줄 아는, 털털한듯하지만 강단 있는 요량댁의 좋은 이미지를 글쓴이는 평생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책을 선물해준, 고왔을 그 여자분에게서도 요량댁과 비슷한 인생관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작품을 낭독하던 봉사자 한 분이 그 책을 녹음해드리겠다고 자청하신다. 녹음도서가 완성되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리겠지만 기꺼운 목소리로 봉사하시겠단다. 그것이 지난 주 일이었다. 오늘 문예교실에 글쓴이는 예의 그 수필집을 들고 오셨다. 녹음해 주시겠다던 봉사자의 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1960년대 말에 출간된 책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편집된 데다 글자 크기도 겨우 8포인트를 넘길 정도였다. 유행 지난데다 조악해 보이기까지 한 책인데 들여다보자니 까닭모를 뭉클함이 몰려왔다. 그새 나도 요량의 철학에 감염되었나 보다. 일상의 힘든 고비를 만날 때마다 이제 “냉수 목욕한 요량하지요.”라며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으려나. 나아가 젊은 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의 그 섬세한 떨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려나./김살로메(소설가)

2014-06-26

노력하기

그림을 잘 그리려면 타고난 손재주가 있어야 하고, 노래를 잘 부르려면 물려받은 목청이 좋아야 한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른다 해도 각각 천부적인 화가와 선천적인 가수와는 견줄 도리가 없다. 선천적인 재능과 미적 완성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대개의 예술이 타고난 재능과 순간의 영감 그리고 개별자의 노력으로 완결된다고 보았을 때, 선결조건인 재능이 충족되지 않으면 후자의 두 조건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노력하는 살리에리가 타고난 모차르트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포기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된다.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문학을 하거나 글을 쓴다는 행위를 예술의 영역에 빗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재능이라는 면만 따로 떼서 보자면 글쓰기는 재능과는 멀어져도 큰 상관이 없다는 쪽이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노동이다. 다른 예술 분야처럼 재능이 있다면 노동의 길이 쉬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없다고 지레 포기해서도 안 된다. 예술에 앞서 노동인 글쓰기는 노력만으로도 그 한계를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재능은 타고 나야 한다는 말 속에 숨은 공허한 울림을 이해하고 나면 재능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은 옳다. 사실 재능은 낡은 신발만큼이나 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재능을 지니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도러시아 브랜디 여사의 `작가 수업`추천사에 나오는 말이다. 글쓰기에도 재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술과 음악 등의 분야만큼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설사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해서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것까지는 없다. 글쓰기는 노동에 속하고 그 숙련도는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는 것도 어렵고 노래 부르는 것 역시 만만찮다. 글쓰긴들 다르겠는가. 하지만 글쓰기에서만큼은 노력이 곧 재능이라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예술을 포기한 자리의 신산한 노동이 그래야 희망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25

한 호흡에 실어보내기

길게 보아 우리 삶은 한 호흡이다. 숨 한 번 쉬고 돌아서면 사라지는 덧없는 삶. 거의 모든 것의 원리가 호흡 하나로 모아진다고 생각하면 숨 한 번 들이켜고 내쉬는 일이 새삼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알겠다. 사람답게 사는 여러 경구 중 “좋은 친구가 되고 싶으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는 말과 “베풀 수 있으면 베풀어라. 그런 다음 잊어버려라.”라는 말을 새기곤 한다. 좋은 친구 되기는 저 말처럼 그리 어렵지 않다. 호감을 가지고 진솔함으로 먼저 다가가면 되니까. 흔히 친구가 없다고 푸념하거나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선인들의 저 말씀을 새겨듣지 않거나 알고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먼저 다가간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자존심에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해 제 호감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원하기만 하면 이것도 훈련에 의해 극복할 수 있다.문제는 `베풀었으면 깨끗이 잊어버려라.` 단계이다. 어린왕자가 장미꽃에게 물을 주고 고깔을 씌워주듯, 여우가 황금빛 밀밭을 보면 어린왕자의 금발 머릿결을 떠올리듯,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맘먹은 이상 우리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다. 한데 그것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시혜일 경우에는 그 상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어린왕자가 장미꽃에게 서운함을 느껴 제 별을 떠났듯이 인간적인 번민으로 갈등하게 된다. 마냥 베풀고도 태연무심해지기엔 우리 심리 기저에는 여전히 `내 맘을 알아봐줬으면` 하는 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기실 이런 욕망들은 베푼다는 것의 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럴 때 한 호흡의 원리를 떠올리면 좋다. 빚도 베풂도 한 호흡에서 나온 한 갈래 숨결이다. 고마움을 몰라주거나 모른 척하는 당신이, 그래도 베풀지 못해 불편한 내 마음보다는 낫지 않던가. 어쩌면 고마움을 몰라줘서가 아니라 당신 눈에 담기고 싶은 내 욕심이 베풀고도 끝내 깨끗이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 설워말자. 한 순간, 한 호흡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은 실려 가고 말 것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6-24

동정, 연민 그리고

동정과 연민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동정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풂`이라고 되어 있다.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사전적으로 `동감`이라는 의미에서는 두 말이 비슷하게 묶여 있지만 정서적으로 풍기는 뉘앙스는 서로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숲길 초입에 상수리나무 한 그루 가지가 부러진 채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치자. 최근 들어 비바람이 몰아친 적 없으니 자연재해는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나무둥치엔 대못 몇 개가 박혀 있다. 멧돼지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려다 그랬는지, 운동 기구를 설치한 흔적인지 연유는 알 수 없다. 길섶의 부러진 생나무는 오가는 등산객의 발길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밟힌다. 둥치에 박힌 대못을 눈 여겨 보는 이조차 드물다.동정은 널브러진 나뭇가지를 치우고 둥치에 박힌 못을 빼주는 행위를 말한다. 연민은 거기에다 감정이입이 되어 그 나무가 불쌍하고 가엾기 그지없는 맘을 일컫는다. 동정은 적극적 동감을 요구하진 않는다. `저 나무가 나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라는 맘이 전제로 깔린다. 연민은 `저 나무가 곧 나여서 눈물이 나.` 라는 감정 상태이다. 동정이 실행의 의지에 바탕을 둔다면 연민은 마음의 발로에 영향을 받는다. 이 두 감정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자신의 세계 안에서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사랑이란 감정과 비슷해 보인다. 따라서 이 둘을 사랑과 혼동하기도 한다.하지만 동정과 연민은 사랑과는 구분되는 감정이다. 안타깝고 가여워서 나오는 행동과 마음은 잉여의 감정이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던질 수 있는 맹목의 감정은 아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기만할 때 흔히 동정과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연민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사랑일 리가 있겠는가. 무엇을 위해 손 내밀 수는 있지만 그 무엇을 위해 다 던질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동정하고 연민할 틈조차 없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23

피로의 시간

피곤의 끝을 경험해봐야 여유 한 자락이 얼마나 소중하고 달콤한지 알게 된다. 피로는 대개 순간으로 오는 게 아니라 누적되어 나타난다. 천둥번개나 폭풍우처럼 티 나게 오는 게 아니라 물방울처럼 이슬비처럼 시나브로 온다. 예를 들어 백 킬로미터를 달렸다고 더 피곤하고 십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덜 피곤한 게 아니다. 앞에 어떤 물리적 심리적 방어물이 있느냐에 따라 피곤도가 달라진다. 운전을 할 때 시속 백 킬로 미터로 끊임없이 달리는 것보다 시속 십킬로 미터로 가면서 빨간 불 신호마다 서게 되는 게 훨씬 피곤한 것과 같은 이치랄까. 피로가 정점에 쌓이고 그것이 폭발할 때까지는 온몸과 마음이 피곤에 절어 있다는 걸 잘 눈치 채지 못한다. 볼일을 마치고 들어오니 그 다음 약속까지 한 시간의 짬이 남았다. 어쩐지 하루가 몹시 피곤했다. 하품이 나고 발뒤꿈치가 당기고 눈꺼풀이 감긴다. 피곤하면 생기는 신체적 현상이다. 나도 몰래 쌓인 피로가 한 순간에 터지고 있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 충전을 해야만 했다. 한데 그 잠깐이 잠깐이 아닌 게다. 눈을 떠보니 약속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침 닦을 새도 없이 허둥지둥 뛰쳐나갔다. 비몽사몽간이라 늦다고 연락할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늦어서는 안 되는 자리라, 오직 더 늦지 않아야겠다는 생각만 꽉 차오른다. 오다가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던 멤버들 앞에서 자다가 늦었노라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창피함 때문에 피곤증이 확 달아났다.“인생에서 가장 피곤한 것은 불성실한 것이다. 사람들은 가면을 써서 사회생활이 피곤하다”고 앤 머로 린드버그가 말했다. 피로는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것이 아니라 밤 도둑처럼 조심스레 다가온다. 린드버그 식으로 주석을 붙이자면 폭풍우에는 가면이 없지만 밤 도둑에게는 복면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삶이 점점 피로해지는지도 모른다. 적당한 인간적 가면이 피로를 앞당기는 건 맞다. 하지만 그 피로가 불성실 때문이 아니라 성실하고자 하는 자기 검열에서 오기 때문에 더 피곤한 건 아닌지. 이래저래 피곤은 연민을 부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20

육반(肉飯)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독후감 수상작을 감상하다가 위의 문장을 만났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독후자가 책 내용을 인용한 문장이었다. 저 문장 하나만 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읽은 책이지만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육반`이라는 낱말에다 한자를 병기했다면 혼란을 줄일 수는 있었겠지만 그래도 밑도 끝도 없는 저 문장 자체는 해독불가였다. 사전을 찾아봐도 육반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질 않는다. 번역자 임의로 만든 말인 게다. 검색엔진을 몇 번 돌린 끝에 인용문의 앞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지금 나는 닭고기와 계피 뿌린 육반을 생각하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갓 쪄낸 육반처럼 김이 무럭무럭 납니다. 먼저 먹읍시다. 먼저 배를 채워놓고 그 다음에 생각해봅시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요.” 이렇게 앞 문장을 제 자리에 찾아 넣으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설령 한자를 표기하지 않았다 해도 맥락만으로 `육반`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현재를 살고,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며, 내숭과 과장이 없는 조르바를 설명하기 위해 저 첫 문장을 인용했다는 걸 알겠다.자유인 조르바는 담백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양념이 섞인 언사나 복잡한 사색은 질색한다. 맛난 고기가 앞에 있으면 우선 즐겨 먹고, 내일 갈탄광에 나가야 하면 그 걱정은 내일 하는 인물이다. 조르바에게 고급한 영혼 앓이는 사치다. 진정한 자유인은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느끼는 자기 때문이다. 그 인과관계를 알면 저 첫 인용문을 이해하게 된다.그렇다. 중요한 건 맥락이다. 한 문장 안에 진실을 다 담을 순 없다. 답은 앞뒤 연결 고리 안에 있다. 따라서 아귀 맞지 않는 단편적 사실 앞에서는 그 어떤 판단도 유보 상태여야 한다. 궁하면 구하고, 구하면 해결 된다. 상황을 그르치기 전에 먼저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라도 할 것. 그것이 `육반` 에피소드가 내게 준 소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19

자기긍정의 자세

포도밭의 저 청포도, 실까 달까? 따서 먹어봐야 알겠지만 분명 달다. 이솝 우화 속 여우는 끝내 그 단 포도를 입 안으로 넣지 못했다. 군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저 포도는 분명 실 거야. 먹지 않은 게 다행이야.` 하면서 금세 포기해 버렸다. 여우가 포기한 것은 너무 높은 포도나무 가지가 아니라 가늠할 수 없으리만큼 낮아진 자신감이었다. 손 뻗어도 닿지 않은 가지라면 점프하면 된다. 점프해도 만질 수 없는 포도라면 주변이라도 둘러봐야 한다. 농원 한쪽 지지대로 쓰던 허드레 막대기라도 있을 것이고, 가지치기하다 세워둔 사다리라도 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다른 여우를 만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친구와 합심해 목말을 타면 그 포도 그리 어렵지 않게 손에 쥘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뒷전에서 씁쓸히 자기합리화의 자괴에 빠지는 것보다 앞에서 당당히 자신감의 노를 저을 수 있어야 한다.저 말처럼 쉽다면 이솝 우화가 생겨났을 리 없다. 대부분의 우리는 이솝이 말한 `신 포도의 여우` 모습으로 살아간다. 나머지 십 퍼센트 미만의 사람들만이 신 포도를 극복한 `단 포도의 여우` 모습을 보여준다.눈앞의 저 포도, 달디 달다는 것을 뻔히 안다. 하지만 환경적 물리적 요건이 얽힌 데다 자기확신이 없으니 필요 이상으로 심적 위축감을 맛본다. 해서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지레짐작으로 쉽게 포기하고 만다. 시도도 않은 채 도망부터 가버린다.뭔가에 일가를 이루고 싶다면 좀 더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 할 수 있다는 자기 긍정의 주술도 나무랄 게 아니다. 같은 일을 해도 결핍의 낯빛으로 억지를 연출하는 것과 충만의 화사함으로 자기 긍정을 견지하는 것은 그 결과에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안온한 자기 확신을 실천하고 싶어도 결정적 순간에 무기력한 자괴감이 방해꾼으로 등장하곤 한다. 저 포도는 신 포도가 아니라 분명 단 포도이다. 우리가 먹지 않고, 먹지 못하기 때문에 신 포도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일상의 단 포도를 영접하기 위해 내 당장 버려야 할 것은 가시철망 같은 자기 부정의 자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18

필요선

피톤치드 가득한 편백나무 숲에 들었다. 물총새의 날갯짓을 신호로 일순간 숲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금세 빗줄기가 굵어졌다. 난 데 없는 소낙비에 나뭇잎들은 될 대로 되라는 듯 제 몸을 물방이질에 맡기고 있었다. 맞을 바에는 제대로 맞는 게 나을 것이었다. 빗줄기라는 불가항력의 회초리를 빌려 잎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렇게 단련된 그들은 물을 머금어 더 푸르고 싱싱해질 것이었다. 비 내리는 숲속 나무처럼 사람 숲에도 `말`이라는 비가 내린다. 사람 있는 곳에 말 있고 말 있는 곳에 오해가 생긴다. 오해는 필연적 상처를 남기고 그것이 아무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비 맞은 숲이 더 푸르러지고 무성해지듯 말 비를 맞은 사람도 한층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렇게 숲이 우거지듯 사람도 정반합의 성장을 거듭해간다.사람 사이는 생각하기에 따라 필요악일 수도 필요선일 수도 있다. 폐쇄적 인간관계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전자라 여길 것이고, 개방적인 관계를 바라는 사람은 후자라 생각할 것이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인간관계이긴 하지만 적어도 비관적인 관계론만은 피하고 싶다. 사람 곁에 있을 때 얻는 게 훨씬 많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가 아무리 성가시다해도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위안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람 없는, 사랑 없는 일상이 가당키나 한가.누군가 말했다. 우리에겐 삼만 명의 행운 천사가 있다고. 한 사람을 알면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 네트워크를 작동하면 끝내 삼만 명의 사람과 맞닿는다고 한다. 비록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연결하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이 과정을 무시해도 좋은 건 아니다. 사람 없이 사람 살 수 없다. 더구나 우리 관계는 이 삼만 이라는 숫자 안에서 나고 핀다. 내게 행운과 불운을 주는 사람 역시 이 숫자 안에 포함 되어 있다는 말이다. 행운을 바란다면 누구에겐들 함부로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삼만의 숫자만큼 행운을 가질 것인가, 불운을 취할 것인가. 사람 사이가 필요선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17

모 아니면 도?

흔히 `인생은 모 아니면 도`라고 말한다. 오늘따라 저 말이 새삼스럽다. 여행지의 대형 윷가락 모형 앞에서 친구가 말한다. “인생, 모 아니면 도라고? 당장 윷가락을 던져 봐. 나올 확률이 높은 건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니고 `개`지.” 맞는 말이다. 여러 변수는 젖혀 두고 경우의 수로만 생각한다면 `개`가 나올 확률이 가장 높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생 모 아니면 도, 라며 극단적 자조로 스스로를 몰아치곤 한다. 인생은 윷놀이 한판이다. 기대와 설렘으로 우리는 저마다의 윷가락을 높이 던지는 중이다. 모 나오라고 목청껏 추임새를 넣어 보지만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행운을 내줄리 없다. 그렇다고 기대에 못 미치는 도가 나왔을 때 `아니면 말지.` 하고 돌아서는 것도 쉽지는 않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인생은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물리적이고 산술적으로만 따지자면 윷판에 가장 자주 보이는 말은 `개`이다. 물론 다양한 변수 이를 테면 윷가락의 모양과 재질, 깎는 정도, 던지는 방향과 세기 등까지 따진다면 확률은 조금 달라진다. 그렇다고 해도 경우의 빈도수가 높은 `개`를 넘어서는 윷말은 나오기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을 즐겨한다. 사는 게 강퍅하니 인생 뭐 별 거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이어져 자포자기의 극단적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인생 윷판에서 자주 나오는 것 역시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니다. 개와 걸이다. `다섯 칸이나 갈 수 있는 모와 한 칸밖에 갈 수 없는 도` 라는 상극의 길이 나오는 건 매우 드물다.그저 별일 없고 마냥 하릴없는 개와 걸이란 말이 우리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밋밋하고 심심한 걸음새가 모여 진실한 삶이 된다.아주 많이 가거나 아주 적게 가는 것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두 걸음, 세 걸음 평범한 행보라도 꾸준하면 모가 되고, 그 걸음이 쓸 데 없다고 여기면 도가 되고 만다. 평범한 `개`걸음이라도 곧장 나아가면 그것이 곧 `모`의 길이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16

순간이 행운인 것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고 말할 때 곁점은 당연히 `예술`이란 낱말에 찍힌다. 찰나 같은 허망한 인생에 견주어 예술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저 말을 달리 바꾸고 싶다. 예술은 길지만 인생은 짧다고. 정말이지 인간사 너무 짧다. 길어봤자 백여 년이다. 욕심 없이, 거짓 없이, 거리낄 것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그 기간도 충분히 길다며 감사히 여길 것이다. 하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회한이, 내려놓지 못한 갈증이, 부대끼는 번민이 많은 나 같은 이는 사람의 한살이가 너무 짧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짧은 삶이라고 아껴둘 수 없고 유예할 수도 없다. 그렇게 보니 영구적 생명을 가진 예술보다 짧디 짧은 인생이 더욱 존귀하게 다가온다.가까운 사람의 생사를 다투는 투병 소식에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하지만 특별히 선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너무 이른 시련이 닥치는 것에는 지켜보는 이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죽음을 앞두고 가까운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은 인생 이기적으로 살겠다고. 역설적인 그 말을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남을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삶을 꾸려나가는 것, 제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백번 온당하다. 남을 위한 삶, 보여주기 위한 삶, 체면치레를 위한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 내가 행복한 삶, 있는 그대로의 삶, 소박하게 즐기는 삶 이런 진솔한 태도가 필요하다.인생의 반 이상을 돌아든 지금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오니 맘자리를 다잡게 된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 것인가. 인연이 아닌 것에 연연하지 않되 누구에게나 성심을 다할 것. 천치로 전락하는 정도만 아니라면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 것. 일부러라도 유머와 다사로움이 곁에 머물도록 할 것. 생계를 위협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작은 것부터 먼저 배려하고 베풀 것. 별 것 아닌 짧은 생애, 순간이 곧 행운인 것을. 예술은 못 남겨도 담백한 맘 자락 하나는 제대로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나./김살로메(소설가)

2014-06-13

린드버그의 충고

비행사이자 작가인 앤 머로 린드버그 여사가 말했다. “수집가는 눈가리개를 하고 다닌다. 수집하는 물건 외에는 아무것도 못 본다. 획득의 본능과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자세는 공존할 수 없다.” 이 말을 나는 친구가 보내온 `혼자 사는 즐거움`이란 책에서 만났다. 이 책을 지은 사라 밴 브레스낙은 한때 머그컵 수집에 열광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린드버그 여사의 저 말을 읽을 즈음 그녀는 머그컵 모으는 일이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설렌 마음으로 처음 샀던 컵은 이미 연필꽂이로 방치되고 있었다. 그녀가 진실로 원했던 것은 머그컵 수집하는 일이 아니었다. 대자연이 선사하는 경이로움, 이를 테면 파도 위로 부서지는 햇빛과 나뭇결을 간질이는 바람, 맨발에 닿는 곱디고운 모래 등의 정서를 제대로 느껴보는 것이었다. 뭔가를 모으는 즐거움에 빠져 그녀는 정작 맛보아야 할 다른 것, 즉 감상하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머그컵 개수를 늘이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린드버그의 충고에서 배웠다.진실로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친 브레스낙은 린드버그 여사를 만난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간 수집했던 머그컵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기로 맘먹었다. 컵 하나에 추억 깃든 메모를 곁들여 좋아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나누는 즐거움이 그러모을 때의 애틋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뭔가를 가지려는 본능과 아름다움을 느끼려는 자세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수집가의 눈은 한 꺼풀 가려져 있다. 심한 경우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수집품의 진정한 가치가 보일 리 없다. 오직 수집하고픈 물건 자체에만 머물러 있기에 그의 안목은 그 속에 담긴 의미나 미의식까지를 접수할 틈이 없다. 이 책을 보내온 친구 역시 우리가 수집할 것은 수집품 자체가 아니라 함께 할 추억이란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머그컵을 나눈 브레스낙처럼, 책을 선물해준 친구처럼 나 역시 책 선물 릴레이를 펼칠 참이다. 수집의 본능을 넘어선 자리에 아름다움의 본질이 들어찰 것을 알기에. 린드버그의 충고는 내게 와서도 옳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12

당신이라는 바람

자고로 시인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 공감 가는 시 한 편을 만날 때마다 저런 생각을 한다. 찬사와 시샘을 동시에 표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천생` 시인일 수밖에 없는, 독자들을 기분 좋게 홀리는 시를 읽다 보면 이 땅에 좋은 시인들이 많다는 게 그저 고마울 뿐이다. 조금 센티멘털해지면 어떠랴, 조금 유치해지면 또 어떠리. 애상의 시간을 불러 모으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 한 구절을 만날 수 있는 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특권이자 행운이다. 한 편의 시에서 우리는 시간이란 강물을 거슬러 오르기도 하고, 아련한 불빛을 만나기도 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심장의 따끔거림을 만나기도 한다. 감상적인 시, 애잔한 시 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잠 못 드는 밤이라면 이런 시에 누군들 홀리지 않을 것인가.“전부 당신 같아서 붐비는 빛 한 올도 허투루 받을 수 없습니다 / 천지사방 당신이니 암만 발버둥 쳐도 나는 당신한테 머뭅니다 / 그래요, 당신 만난 날부터 나는 속수무책입니다 (중략) / 헤픈 봄볕을 한줌도 자루에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되지 않을 일임을 압니다. 그런데도 비워도 비워도 다시 당신이 들어차는 내 속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김해민 시인의 `안부` 일부이다. 붐비는 빛 한 올에 우주가 있고, 그 우주 속 천지사방은 당신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에게나 한 가지씩의 당신은 존재한다. 발버둥 쳐도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 같은 당신이 존재한다. 욕심이자 모순이며, 절망이자 바람인 당신. 번민으로 가득 찬 `간절한 바람`인 그 당신을 위하여 오늘도 잠 못 드는 이 얼마나 많은가. 무릇 평화, 그저 안정, 다만 웃음일 뿐인, 당신 없는 삶이란 얼마나 지루하고 무의미할 것인가.“내 마음 읽으시거든 보리누름에는 걸음해주세요 / 난출난출 보리잎 보며 어디쯤에 오시는 줄 알고 가만히 눈감겠습니다 / 보리보다 노랗게 내 속 익기 전에 부디 당신이 먼저 와 주세요 / 볕이 여간 흔전하지 않습니다 ” 보리누름에 읽기 좋은 이토록 흔전한 시 한 편의 위안이라니. ”김살로메(소설가)

2014-06-11

키치도 예술이다

키치도 예술이다. 수요 있는 곳에 공급 있다. 모두가 고급 예술을 지향하는 건 아니다. 대다수의 대중은 무난한 자극, 풍성한 인간미, 따뜻한 정서에 기초한 쾌락을 원한다. 한때 이발소 그림이란 게 있었다. 어린 시절 `가리야개`라는 단발머리를 하기 위해 이발소에 가면 실제 그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소녀의 기도나 밀레의 저녁종 같은 모사품이 걸려있을 때도 있었고, 북유럽 풍 침엽수가 호위하는 호수가 나오는 풍경화가 걸려 있을 때도 있었다. 이발소 유리벽 위에 그들이 걸려 있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유는 명백했다. 찾는 손님에게 쾌락과 위안을 주기 위함이었다. 마치 고속버스 운전수가 틀어놓은 뽕짝 음악에 누군가는 정서적 충만으로 여행이 즐거워지는 이치와 같다.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이발소 그림과 고속버스 내의 뽕짝음악은 `키치`이다. 키치는 보편적이고도 대중적인 감성에 호소한다. 과격과 과잉을 거부하며 침체와 허약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달콤하며, 영속적이고, 불변하며, 일상적이며, 수평적인 것을 영접하려는 속성이 키치이다. 무리한 것은 대중적일 수 없고 키치와도 멀어진다. 대중에서 멀어질수록 예술성과 가깝다. 예술성과 키치는 상극의 관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충하는 면이 있다.누구나 예술성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키치적 속성을 지녔다고 해서 그것을 폄하하거나 극복해야 한다고 목소리 낼 필요도 없다. 사람은 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성장한다. 대중성을 예술적 취향 쪽으로 끌어당길 수는 없다. 모든 건 물 흐르듯 해야 한다. 인간적 설득이나 인위적 노출에 의해서 예술성이 획득되는 건 아니다. 키치적 감흥이 주는 긍정성을 다 겪고 난 뒤에 어느 순간 몰려드는 정신적 자족감. 이런 순간을 어떤 이는 맛본다. 설사 그것을 놓쳤다고 잘못된 건 아니질 않나.이 모든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다. 키치적 정서가 예술이 못 된다고 설레발치거나 설득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반성한다. 모든 키치적 정서는 순정한 사람들이 거치는 기본 감성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06-10

참 쉽죠?

십여 년도 훨씬 전, 밥 로스라는 아저씨가 인기 있은 적이 있었다. 한결 같은 멜빵바지와 풍성한 뽀글 퍼머를 한 화가는 토요일 저녁마다 EBS 화면에 나왔다. 그림을 그립시다, 라며 넉살좋은 웃음으로 시청자들을 매혹했다. 일인치 붓과 그림용 나이프를 든 밥 아저씨가 시청자를 향해 속삭인다. “자, 이 왼쪽 공간이 심심해보이죠? 벤다이크 브라운을 이용해 나무 한 그루를 그려 넣어볼까요? 티타늄 화이트를 살짝 덧발라 주세요. 나이프로 이렇게 몇 번 긁어 주시면 완성!” 팔레트를 든 그의 손길이 빈 캔버스에 닿으면 금세 한 폭의 풍경화가 탄생했다. 마술 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곤 했다. 붓질 몇 번 하고 나이프로 긁어주고 덧붙질로 갈무리했을 뿐인데, 희한하게도 앙상한 나무에 잎이 돋고 숨어 있던 호수가 살아나며 밋밋했던 오솔길이 깊어지곤 했다.이 모든 과정이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림을 완성한 뒤 밥 아저씨는 꼭 이런 멘트를 남겼다. “참 쉽죠?” 시청자를 약 올리는 듯한 묘한 이 말에 사람들은 중독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 너도나도 붓을 들었다. 누구나 아저씨처럼 소매 걷어붙이고 팔레트를 들기만 하면 쉽게 그림이 그려지는 줄 알았다. 아저씨가 그토록 예찬해 마지않는 벤다이크 브라운과 티타늄 화이트 그리고 올리브 그린을 사용해 저마다 풍경화에 도전했다. 밥 아저씨처럼 될 리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자조했다. 쉽기는 개뿔!전문가에게나 쉬운 일이지 초보자에게 쉬운 게 어디 있겠나. 보거나 말하거나 듣기에나 쉽지 뭐든지 손수 겪어 보면 쉬운 게 세상에 어디에 있나. 적어도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루려면 그만한 시간과 노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걸. 너무 쉬워 보이는 밥 아저씨의 그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흉내 낼 때나 별 것 아니게 보이지, 실제 캔버스 앞에 앉는 순간 아득한 절망감에 몸서리치게 된다. 쉬워 보이는 한 가지 길엔 재능과 함께 언제나 땀이란 수고가 따라다닌다. 참 쉽죠? 이 말 뒤에는 부단히 노력했죠. 라는 답이 숨겨져 있음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9

정치가의 운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지금도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주인 그는 운이 좋아야 성공한다고 믿었다. 94세까지 산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인생 3대 행운에 대해 밝혔다. 첫째 조실부모했다는 것. 열 살 때 돌아가신 부모덕에 남들보다 15년이나 일찍 철이 들었다. 둘째, 몸이 약했다는 것. 몸 돌보는 것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장수할 수 있었다. 셋째, 초등 4년이 정규 학력의 전부였다는 것. 누구에게든 배움을 청해도 걸림이 없었기에 누구든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행운은 평범한 사람에겐 불운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사람`은 불운을 행운의 기회로 바꿀 줄 안다. 6·4 지방 선거가 끝났다.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당선인들이 대거 정치무대로 등장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은 선거판에 어울리는 말 중의 하나이다. 다른 후보자들보다 특별히 인품이 훌륭해서, 특출한 정치 감각을 지녀서, 대민 의식이 보다 투철해서 당선인이 된 게 아니다. 운명과 우연이라는 행운이 그들 손을 들어줬을 뿐이다. 다른 후보자 그 누구도 운이 좋았다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연구에 의하면 성공 기업인 1천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계획적으로 노력해 성공을 거뒀다`고 주장한 사람은 2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75퍼센트는 `우연한 기회에 성공의 길로 들어섰다`고 응답했다. 또한 미국의 포브스 선정 대부호 천여 명을 대상으로 성공 요인을 분석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은 4가지로 압축됐다. 승부욕과 경쟁심, 타이밍 그리고 행운이었다.당선자들도 이 네 가지 공통점의 세례를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니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운은 언제나 반반으로 온다. 행운인 것처럼 보이지만 금세 불운으로 뒤집히고, 불운으로 다가오지만 행운으로 바뀌기도 하는 게 사람 일이다. 주어진 운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쓸 것인가. 마쓰시다 고노스케의 행운론에 기대어 당선자들은 겸허한 자세라는 기본만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6

몸이 곧 마음

몸은 곧 마음이다. 몸이 말을 들어야 맘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 아무리 심오한 영혼도 시작은 사소한 몸이다. 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마음마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만다. 마음만 저곳을 바라보면 뭐하나. 몸 지쳐 여기 쓰러져 있는데 마음 드높이려면 몸 단련이 먼저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더우면 땀범벅이 되고, 추우면 콧물 범벅이 된다. 바람 불어 꽃가루 날리면 재채기는 멈출 줄 모르고, 바람 잦아들어 건조해지면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진다. 땀, 콧물, 재채기, 눈물 사종 범벅 세트는 그나마 참을 만하다. 조금만 경사 진 곳을 올라도 숨이 금세 차오는 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어렵다. 내 젊은 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지금의 나 역시 거기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몸은 정직하다. 특히 몸의 외피는 그렇다. 평소 얼마나 관리를 했느냐에 따라 멋진 몸매와 그렇지 않은 몸매로 나눠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몸매와 건강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보기 좋은 몸이 꼭 건강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꾸준한 운동으로 몸을 다져온 사람도 하루아침에 건강을 잃는 경우도 있고, 운동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사람도 건강을 유지하는 사람도 많다. 운동 유무에 관계없이 건강은 함부로 자신 할 수 없다.건강은 체질과도 관계가 있다. 조상이 어떤 유전 인자를 물려줬느냐에 따라 건강 체질과 허약 체질로 나뉜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허약한 체질로 헤매는 사람들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단순히 운동을 하지 않아,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건강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인정한다. 그렇지만 건강 체질을 지닌 사람들이 하는 노력의 열 배를 더해도 근본적으로 그들의 좋은 유전 인자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럴수록 노력해야 하는데 잘 되지 않는다. 언제나(운동하지 않을) 핑계는 많고, (운동해야 할) 절실함은 부족하다.몸이 곧 마음이다. 몸 부실한 자 마음 단단할 리 없다. 조상 탓도 소용없다. 내 마음을 위해 몸 반성부터 할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5

여우의 선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다양한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알레고리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말하는 방식이다. 동화적 발상으로, 때로는 우화적 기법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삶의 지혜를 넌지시 제시하는 이 작품은 인생지침서 이자 생활철학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빛나는 장면은 여우가 어린왕자를 만나 제 `비밀`을 가르쳐 주는 긴 대화 부분이다. 사과나무 아래 있던 여우는 어린왕자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넨다. 어린왕자도 쓸쓸하던 차에 같이 놀자고 화답한다. 그렇지만 여우는 `길들여지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이때부터 여우와 어린왕자는 선문답을 주고받는다. 길들인다는 게 무어냐고 어린왕자가 재차 묻자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여우가 답한다.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곧 길들여짐이란 걸 알게 된 어린왕자는 크게 깨우친다. 자신의 별에 두고 온 장미 한 송이가 지구에 피어난 수천 송이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어린왕자와 여우는 그렇게 서로를 길들인다. 여우에게도 이제 밀밭은 단순한 밀밭이 아니다. 그동안 밀밭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는데, 어린왕자와 관계를 맺은 이상 밀밭은 `금빛 도는 어린왕자의 머리칼`로 치환된다. 이별이 가까워졌을 때 여우는 선물로 비밀 하나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세상을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 덧붙여 어린왕자가 장미꽃에 바친 시간 때문에 그 꽃이 그렇게 중요하게 된 거라고 일러준다.여우가 어린왕자에게 들려준 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길들임은 관계를 맺는 것이요,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시간을 바친다는 것이다. 시간을 바친다는 것은 끝내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이 모든 과정에는 비밀이 있다. 바로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 중요한 것일수록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그 엄청난 사실은 독자의 마음속에서 또 하나의 비밀로 자리 잡는다. 그렇게 생텍쥐페리의 알레고리 향연은 지속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4

그 모든 스무 살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에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나오는 공감 가는 문장이다. 스무 살을 온몸과 맘으로 건너온 청춘이라면 작가의 저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일상은 지리멸렬하기만 했다. 공부는 어려운데다 현실성이 없었고, 진전 없는 청춘사업은 허깨비가 되어 눈앞을 어지럽혔다. 고뇌와 번민의 길은 온통 내게로만 몰려오는 것 같았고, 경제적 궁핍은 스무 살 특유의 빳빳한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저 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몰입하다가도 이 길밖에 없을 것 같아 타협하는 현실의 나날이었다. 실은 몰입도 타협도 모두 내 영역 밖의 일이었다.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쏠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스무 살 시절에 배운 웃자란 운명론이었다. 모든 게 불분명하고 모든 게 부주의했으며 모든 게 부조리하다는 것 또한 그 시절이 깨우쳐준 시니컬한 인생론이었다.그렇게 스무 살 시절이 지나자 모든 게 분명해졌다. 새로운 인연도, 새로운 학문도, 새로운 미래도, 여하튼 새로운 것이라면 그 무엇도 새롭지 않다는 사실. 스무 살 겪어야 했던 삶은 경이로울 정도로 역동적이었지만 그 가운데 대책 없이 아팠고, 주책없이 깊어지려고만 했다. 하필이면 스무 살 즈음에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화인처럼 맘속에 새겨져 있기에 스물에 모든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믿게 된다.그렇지만 삶은 스물 이후로도 한참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 삶은 진행 중이다. 스물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느꼈던 그대로의 삶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더 깊어지고, 더 관대해졌으며, 더 충만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인생 스무 살은 계속되지만 결코 그때의 스무 살과 같을 수는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3

건강에 대하여

오랜만의 휴일, 남편이 기획한 트레킹에 따라나섰다. 왕복 15킬로미터, 피톤치드 가득한 숲길 걷기란다. 기관지가 좋지 않고, 기초체력마저 약하지만 산행이 아니라 숲길 걷기라니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힐링 코스이니 힘들면 쉬엄쉬엄 가면 되겠지 하고 편하게 맘먹었다. 그런 생각이 대책 없이 낭만적이었음이 금세 증명되었다. 안내를 맡은 분은 고희는 넘어 보였는데 급한 성격에 걸음새 또한 날렵하다. 스무 명이 넘는 조원들의 선봉에는 장정들이 포진해 있다. 뒤따르는 여성들 걸음새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몇 걸음 따라 떼는데 이건 내 페이스가 아니다 싶다. 한마디로 속보 경쟁이다. 힐링 체험이 아니라 누가 튼튼한 다리와 호흡기를 지녔는지 자랑하는 대회인 것 같다. 너무 빠른 행보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정작 나 말고는 모두 잘도 따라 붙는다. 출발해서 재 두 개를 넘고 나니 이미 일행과 나는 한참 멀어져 있다.숨은 곧 멎을 듯하고 기침은 계속 나오고 머릿속은 샛노랗다. 처음부터 이러면 무리니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안내자가 말한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창피했지만 한편 울컥했다.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다. 다행히 남편이 나서서 적극 변호를 한다. 오르막에서만 이렇지 평지에서는 따라갈 수 있으니 걱정하시지 말라고. 저렇게 말하는 남편 속은 얼마나 쓰릴까. 뒤처진 마누라를 묵묵히 당기고 밀고 하느라 고생한 남편 보기에도 부끄러웠다.하늘 한 번 쳐다볼 겨를이 없는 트레킹이 더 이상 즐거울 리 없다. 오직 한 방향이라도 성공해야겠다는 간절한 바람만 있을 뿐이다. 밥 차가 보이는 반환점에 이르자 그나마 해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버렸다. 겨우 8킬로미터를 걷는 선에서 체력의 한계와 타협해야만 했다. 패잔병처럼 차에 실려 하산하는 신세가 됐다. 몸이 곧 정신이고 정신은 곧 그 사람이다. 몸과 정신은 함께 건강해야 한다. 어느 한 쪽의 건강만으로 인생이란 트레킹을 완주할 수 없다. 덜 다진 몸으로 정신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 하루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02

거짓말 단상

거짓말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양하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남자는 하루 평균 6회, 여자는 3회 정도 거짓말을 한단다. 다른 연구에 의하면 남녀 하루 평균 200회씩 거짓말을 한다고 되어 있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한 시간에 13회, 5분에 한 번 꼴이다. 두 예의 공통점은 어쨌거나 인간은 거짓말을 자주 한다는 사실이다. 오죽하면 `거짓말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겠는가. 거짓말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얀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얀 거짓말은 선의를 전제한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적극적으로 배려하기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경우이다. 새빨간 거짓말은 타자를 해하기 위한 것이다. 타자를 흠집 내기 위한 명백한 저의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이 외에도 내 멋대로 두 개의 거짓말에 색깔을 입혀 보았다. 이름하여 초록 거짓말, 이는 일상에서 흔히 보는 단순한 거짓말을 말한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거짓말을 말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을 때 `초상집에 간다`거나 `손님이 방문했다`고 둘러 대는 것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런 거짓말은 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심각할 게 없다. 거짓말이라도 해서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 것이니 딱히 나쁘다고 할 순 없다. 또 하나는 푸른 거짓말이다. 처세의 거짓말인데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약자가 강자에게, 을이 갑에게 해야만 하는 거짓말이다. 살아남아야 하는 자의 자괴감이 묻어나는, 씁쓸하고 슬픈 느낌의 상황이라서 푸른 거짓말로 이름 붙여 보았다.현상이 있는 곳에 말이 있고 그 말에는 필연으로 거짓이 뒤따른다. 누구나 진실만을 말하며 살 수는 없다. 페르소나라는 적당한 가면을 쓰는 것이 사회적 예의이듯, 적재적소의 색깔에 맞게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물론 타인을 해하기 위한 거짓말인 새빨간 거짓말만은 안 된다. 잠 잘 때도 일할 때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굴레. 기왕 해야 하는 거짓말이라면 타자를 배려하는 하얀 거짓말 횟수를 늘이는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