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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안녕`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김살로메(소설가)

2014-01-02

한 해를 보내며

사람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말(글)로 내뱉는다. 왜 인간 곁에는 생각과 말이 있는 것일까? 근원적인 이런 질문에 골똘하다보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 번민 혹은 번뇌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민거리가 생각과 말을 풍부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좋은 일이나 단순한 사실에는 그리 큰 사유가 필요치 않다. 그 자체를 즐기거나 인정하면 된다. 반면 나쁜 일이나 복잡한 사실 앞에서는 사유라는 필연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일례로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은 심각한 상황에나 어울리지 단순명쾌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번민 있는 곳에 생각 돋고, 생각 끝에 말은 사용된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는 이것을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각을,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고. 올 한 해도 무사히 건넜다. 수많은 생각과 말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들머리에서 보듯 모든 생각과 말은 영혼을 잠식한다. 가벼워지고 담백해지려면 그 둘은 놓을수록 좋았다. 해서 올해의 내 개인적 화두는 `생각과 말에서 자유로워지기`였다.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건 수행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고, 될 수 있으면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생각과 말의 감옥을 뛰어넘는 무심함에 노닐고 싶었다.그리하여 `마음 놓아버리기`라는 실질적 목표를 두고 무심히 강을 건넜다. `편히 나누고 누리자`라는 실천 요강도 마련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늘 맘에 새겼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이 세 가지 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 보시를 실천하려 애썼다. 마음에 주인이 없으니 걸림이 없고 머무름 또한 없는 그 경지! 하지만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그 단계를 맛 볼 것인가.일 년이 지난 지금, 내 마음의 주인은 여전히 나이다. 집착 없이 베풀고 소박하게 누리자, 는 내 모토는 실패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래도 아주 실패한 건 아니다. 목표를 향해 갈고 닦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 반은 성공했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고마웠다, 2013년!/김살로메(소설가)

2013-12-31

자기합리화

자기합리화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숭이도 자기합리화를 한단다. 심리학자가 여러 색의 초콜릿알로 원숭이에게 실험을 했다. 예컨대 조건이 같은 빨강, 파랑, 녹색 중 임의로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빨강과 파랑 중 빨강을 골랐다면, 남은 파랑과 녹색 중에서도 녹색을 고르게 될 확률이 높단다. 파랑에 대한 거부감은 처음에 빨강을 골랐던 자신의 행동이 옳았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인 셈이다. 신념과 행동이 충돌했을 때 후자인 행동의 결과물로 우리는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춥고 귀찮아서 종량제 봉투에 그냥 넣어 버린다 치자. 이때 원칙과 내 행동 사이에서 갈등한다.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우리는 자기합리화를 한다. 물기 있는 음식물이 아니라 사과껍질이나 썩은 당근 조각이니 괜찮을 거야, 옆집 아줌마는 나보다 더하던 걸, 등의 핑계를 갖다 댄다. 이미 한 제 행동을 바꿀 수 없으니 생각 자체를 바꿔서 두 상황을 일치시키려 하는 것이다.원숭이의 경우도 실은 파랑색 초콜릿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지만 일단 한 번 거절했기 때문에 그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파랑색 초콜릿의 선택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합리화를 한다. 하지만 자기기만으로 말해도 좋을 그것에 반성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인지부조화 현상을 연구한 레온 페스팅거가 말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인간은 합리를 추구하지만 합리에 온전히 가닿을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중용이 될 수 없는 그 합리는 어느 한쪽에게는 여전히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이은 도발적 행보는 주변국에게는 당연한 불합리로 보인다. 한데도 그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지극한 합리로 보이나 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인 스스로를 그토록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인지./김살로메(소설가)

2013-12-30

실천하지 않는 욕망은

누구나 욕망한다, 그 무엇을. 하지만 아무나 그것을 위해 실천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개인 견해를 밝히자면 실천을 방해하는 두 요인은 단연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이다. 심지어 그 둘을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그것에다 겨울 담요 같은 포근한 자기합리화까지도 부여한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도 이 겨울 지날 때까지는 그냥 빈둥거릴 거야. 당연히 그런 생각은 오산이다. 세상은 넓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신나게 달린다. 의지박약이나 의기소침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신뢰하고 제 미래를 확신한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보다, 재지 않고 저질렀을 때의 성취감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자기긍정과 자기 확신, 그 대척점에 있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 이 모든 것은 습관의 산물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전자의 신념을 행동으로 축적한다. 자연스레 성과도 높고 만족감도 높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불투명한 동기부여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자일수록 후자에 얽매여 시간만 낭비한다. 내게 재능이 있을까. 난 왜 이 정도밖에 안되지. 이런 쓸 데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게 무기가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자고로 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는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은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니까.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주관적 당사자이자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 그 둘을 감당하자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욕망을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공정성을 스스로에게 먼저 묻게 된다. 욕망이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욕망하는 자는 겸손하기 보다는 뻔뻔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욕망하기 때문에 번민하는 이 아이러니한 삶!/김살로메(소설가)

2013-12-27

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 `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6

이해는 순간에

어린 시절 시골에서 대처로 나왔을 때 많은 것이 달랐다. 그중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중의 하나가 `으`와 `어`발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그런 현상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무척 당황했다. 새로운 친구들은 이층을 `이청`으로, 음악을 `엄악`으로 발음했다. 멀쩡한 이름인 이은진도 `이언진`이라고 바꿔 불렀다. 심지어 `언진(은진)이가? 언진이가?` 하면서 내가 듣기에 똑 같아 뵈는 발음으로 `으, 어`의 표기법을 구별하는 질문까지 하는 것이었다. 기이하기만 했다.철들고 난 뒤 단지 그것이 언어습관 이하도 이상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사투리가 그렇듯 윗세대가 그렇게 전수하니 아랫세대도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처음 겪은 내게만 그것이 이상한 것이지 원래 그렇게 적응해온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문젯거리조차 되지 않았다.오랜만에 전국구 친구들을 만났다. 수다 중 `thanks to`라는 말이 나왔다. 내가 `생스투`라고 발음하자 친구들이 마구 웃었다.`땡스투`지 `생스투`가 뭐냐는 것이었다. 어릴 적 도회지 친구들이 `으`와 `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내 심정이 그들 심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영어 발음으로 할 것도 아닌데 나로선 생스투나 땡스투나 그게 그거 같아 보였다.궁금한 나머지 집으로 돌아온 나는 thanks to를 우리말로 (영어발음이 아닌!) 어떻게 표기하는지 검색하기에 이르렀다. `땡스투`나 `생스투`나 그게 그거였다. 그렇다면 단순히 땡스투냐 생스투냐의 발음 차이가 아니라 경상도식 발성법의 미묘한 뉘앙스 때문에 그들이 웃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단상 하나가 퍼뜩 스쳤다. 어릴 적 내게 이상하게만 와 닿았던 발음 건이 그들에겐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게 나로선 이상했듯이, 그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내 발음이 내겐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역시 이상할 수도 있다는 사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상이 나보다 옳은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12-24

예쁜 것과 추한 것은 하나

연말이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다. 그 모든 자리가 내게 맞춤할 리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있고, 가야만 하는 곳도 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은 가고 싶은 곳과 가야만 하는 곳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내 마음 한 끝에 달렸다. 굳이 구별하자면 내 마음이 그 둘의 상태를 분리해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석가의 유명 제자 중에 아난다가 있었다. 아난이라고도 하는데 `환희, 기쁨`이라는 뜻을 지녔다. 외모가 빼어나고 설법이 깊은 그를 여자들이 좋아했다. 백정의 딸인 프라크리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아난이 탁발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인들의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프라크리티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자신은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아난은 부처의 가르침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아난의 출중한 외모와 자비심에 반한 그녀는 매일 탁발 나오는 아난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른 아난이 왜 날마다 자신을 기다리느냐고 프라크리티에게 물었다. 스님 눈이 무척 예뻐서 그렇다고 그녀가 답했다. 아난은 주저 없이 자신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파서 그녀에게 주었다.우리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본 것의 실체는 알고 보면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아니 시신경과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아난의 파헤쳐진 눈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가 추하고 더럽다고 멀리하는 똥의 실체 역시 똥 자체일 뿐이다. 어쩜 거름으로 거듭나 푸성귀 맛을 북돋아 주는 역할이 똥의 실체일 수도 있다. 사물과 대상은 불변의 성격으로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적당한 상표를 붙이는 건 `내 마음`이다. 있고 없고, 예쁘고 추하고의 경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아난다의 눈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무엇이든 맘먹기에 달렸다. 하나인 실체를 두고 어떤 맘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게 우리가 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맘먹기의 장이 `환희와 기쁨`으로 거듭나라고 연말연시 모임은 해마다 되풀이 되나 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3

관찰자의 하루

모처럼 한가하다. 그렇다고 책이 손에 잡히거나 글이 써지는 것도 아니다.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이 아깝다. 카페에서라면 집중이 될까 싶어 책 두 권과 노트북까지 챙긴다. 웬 걸, 집만 못하다.`동양 고전의 바다`에도 빠질 수 없고,`사랑의 단상`도 더 이상 눈에 잡히지 않는다. 읽을 수 없다면 쓰기라도 하자. 쓰다 만 소설 카테고리를 찾아 노트북을 편다. 한 단락도 채우기 전,`꼰대의 위선`어쩌고 하는 어절 앞에서 커서만 깜박인다. 댐에 갇힌 물처럼 몸과 맘에 갇힌 문장은 출렁일 뿐 흘러내리지는 못한다. 번잡한 머릿속을 뚫고 옆자리의 수다만이 잘도 들어온다. 이렇게 된 바, 타인의 말에나 귀를 열어놓기로 한다. 혹시 뭐 하나 건질 수도 있으니. 역시, 엿듣기보다 나은 소설도 없다. 방관자나 관찰자의 자리란 얼마나 부담 없고 매혹적인 곳인지.친구 두 명을 상대로 부동산업을 한다는 여자가 인간관계론을 설파한다. 듣자니`직설법의 무죄`에 관한 것이다. 누군가 -아마 사업상 불필요한- 사무실로 찾아와서 커피 한 잔 하자고 하는 바람에 성가셔 죽는 줄 알았단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도 눈치 없는 상대는 기어이 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가더란다. 저녁엔 신생 사무실을 낸 동료가 술을 사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단다. 딱히 만나고 싶지 않아 고맙지만 안 챙겨줘도 된다고, 시작한 사업에나 더 신경 쓰라고 대답했다나. 어렵게 전화를 건 호의를 무시하는 거 아니라며 상대방은 전화를 끊어버리더란다.자신이 뭘 잘못했냐고 여자는 열변 섞인 동의를 구한다. 에둘러 말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커피가 싫다느니, 사업이나 잘 챙겨라느니 이런 식의 다소 무례한 어법을 연출할 필요는 없을 텐데. 상대의 호의가 귀찮다고 일방적으로 상대를 무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덕에 우리는 괴물이 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각설하고, 이것이 소설의 한 장면이 될 수 있을까. 이런 부질없는 생각으로 커피만 홀짝인 한나절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0

삶의 본질은 부조리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 아닌 것들의 뜻대로 되는 게 더 많다. 내 의지대로 될 수만 있다면 살맛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위험한 발상도 없다. 천하가 제 것인 줄 알고 휘두르던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저 높은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상사 잘잘한 것에서도 내 뜻보다 상황에 휘둘리는 사안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나라의 술이 묽으면 한단이 포위된다.`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선왕이 제후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때 이웃한 노나라와 조나라는 술을 바치는 게 관례였다. 노나라 술은 매우 묽었고, 조나라 술은 무척 진했다. 조나라가 좋은 술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에게는 선물꾸러미 하나 주지 않자 초나라의 담당 관리는 앙심을 품었다. 노나라의 묽은 술을 조나라의 것이라고 바꿔서 선왕에게 바쳤다. 노여움이 폭발한 선왕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공격했다.노나라로서는 당황스럽고, 조나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초나라 선왕을 향해 외쳤다. 쑥대밭이 된 조나라 백성의 자존심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초나라 술 관리는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양심 상 상처 받은 한단 사람들을 물고 넘어질 수는 없었다. 방향을 바꿔 애초에 묽은 술을 제조한 노나라 잘못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구경꾼 놀이가 없어질까 심심하던 초나라 사람들은 술 관리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 현자가 나타났다.`세상일은 노나라나 조나라 뜻대로 되는 게 아니노라. 막강대국 초나라 뜻대로 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 세상일은 되는 대로 되는 것이노라.`이 고사를 현대 철학용어로 빗대면`부조리`쯤이 될 것이다. 길 가다 보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수도 있고,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을 수도 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의해 `들었다 놨다` 요동질을 당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희망의 향연은 내 의지지만 상황의 심술은 신의 장난이다. 신이 즐기는 부조리라는 개그콘서트 덕에 인간은 그나마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9

같은 꽃을 보고서도

그녀는 예뻤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그 소리를 안 들으면 허전하고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어느 날 낯선 옷가게에 들렀다. 웬일인지 주인은 그녀더러 예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늘 들어오던 말을 못 듣게 되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뭐가 잘못 됐지? 오늘 내 화장이 이상했나? 간만에 쓴 털모자가 안 어울리는 걸까?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자신이 왜 옷가게에 들어갔는지조차 잊은 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희한하고 한심한 경험이라며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해가 간다. 예쁜 사람들은 자신이 예쁜 줄을 안다. 해서 익숙해진 예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못 듣게 되면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나 싶어 그때부터 뒤죽박죽 엉망인 심사가 된다. 어찌 모든 이로부터 예쁘단 소리를 듣고 살겠는가. 말수가 적거나, 무심하거나, 혹은 미의 기준이 남다른 옷가게 주인을 만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잘못 없는 그들 앞에 저 혼자 흔들린 심리상태를 보상하라고 할 수는 없다.`예쁜 사람, 멋있는 사람` 등 인정에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번민한다. 요즘 인기 있는 법륜 스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도 대개 이런 문제들로 고민한다. 인정받지 못해 내면과 갈등하는 소시민에게 스님은 이런 요지로 답한다. “내 존재를 제대로 알면 칭찬에 우쭐댈 일도 없고 비난에 신경 쓸 일도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 상대의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걸 알면 내가 그 말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같은 꽃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말이 없는 꽃 보고도 서로 다른 표현을 하는데 각자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하는 말에 내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이런 명답을 새기다보면 예쁘단 말 듣지 않아도, 넌 왜 그 모양이냐고 눈총 받아도 의연해질 수 있다. 내 심지 곧고 굳은 게 상대 감정보다 우선이다.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것만큼 내면을 갉아먹는 것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8

꽃시 한 권

언제 밥 한 번 먹자. 흔히 내뱉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우리는 그런 말로 제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다. 뇌에서 걸러 낼 틈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말의 대부분은 흰소리가 되고 만다. 그 속뜻은 `너와 밥 먹을 마음은 진심이지만 지금 당장이나 혹은 내일은 곤란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밥 먹을 그 `언제`가 언제인지를 재야 사회학자가 `언제` 발표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겠나. 밥 한 번 먹자는 그 말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분명 들어있다. 하지만 자기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험성 멘트인 것도 사실이다.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금세 잊어도 좋을 체면치레용 말로 활용되는 것이다.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가 애매하게 내뱉은 그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불쾌해하거나 맘 상하지도 않는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 `언제`의 약속일지라도 냉랭한 무관심보다는 한결 낫기 때문이다.`언제` 꽃에 관한 모음시 한 권을 주시겠다는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그 말을 나는 흘려들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처럼 상투적 멘트로 이해했던 것이다. 우연히 시인을 만났을 때 한 권 남은 시집이라며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많이 감동했다.시인으로선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한정본으로 손수 제작한 맑고 투명한 꽃시집을 오래 쓰다듬는다. 글자 하나, 레이아웃 하나 전문 편집자처럼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꽃에 관한 시를 모으셨을까, 바쁜 가운데 언제 이토록 정갈하게 갈무리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흐른 뒤 내 머리와 가슴은 처음으로 돌아간다.`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지는 꽃 같은 삶, 얼마나 얕은 꾀와 무신경한 말들로 타인에게 내 겸양을 구걸했던가.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실은 내 체면과 안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보험성 멘트를 날렸던가. 공허한 그 말 대신 실천할 수 있는 말들의 꽃을 피우라고 이렇게 눈시울 적시는 `꽃시`는 내게 왔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7

버드나무껍질 반지

`주석달린 월든`(현대문학)을 산 건 행운이다. 별다른 해설 없는 숱한 `월든` 중의 한 권을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읽어야한다는 강박이 먼저 작용했던 그때는 그 깊이나 가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과 벗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한때 경이로웠던 기록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해결해야할 숙제처럼 대하느라 그 진가를 미처 몰라봤다. 소로처럼 외딴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자급자족할 맘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고 내면을 살찌우는 기록물이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가 `문학적 성과`로 출렁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촘촘한 일상을 풍부한 관찰력과 서정적인 감각으로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구체적이고 섬세해 목이 멘다.`집에 돌아오면 방문객이 들렀다 남긴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 다발의 꽃이나 상록수로 엮은 화관, 혹은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나뭇조각에 연필로 써놓은 이름이다. 좀처럼 숲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는 길에 숲의 작은 조각들을 취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반지를 만들어 내 탁자에 올려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189쪽)청년 소로는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2년여의 자급생활을 하면서 기록물을 남겼다. 숲으로 가 온전히 제 뜻에 살며 삶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소중한 삶, 제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독자로서는 거창해 뵈는 그 소명의식보다 기록물이 주는 잔잔한 감동 덕에 소로가 위대해 보인다. 물질문명을 거부한 그는 유유자적의 `팔자 좋음`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했다. 그런 그가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굽은 잔가지`나 `짓눌린 잔디`, `한 움큼 뽑힌 풀`이나 `은은히 남은 시가 담배향`으로 짐작하는 서정적 붓대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시 보일 수밖에.삶과 사색을 실천하는 작가가 문학적 감수성까지 빛나기란 쉽지 않다. 구구절절 마음 끄는 문장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 누군들 오두막 지으러 제 마음의 숲으로 떠나지 않을 것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3-12-16

안과 밖

모든 사람에게 맞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가족끼리도 서로 맞추기 어렵지 않은가. 누군가의 독서 메모장에서 이런 글을 봤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하인에게는 보통사람이다.` 서양 속담인데 몽테뉴의 수상록이 원 출전이다. `후회에 대하여` 부분에서 `가족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일갈했다. 프랑스 어로 말한 몽테뉴의 그 말이 영어 식으로 바뀌어 위의 속담으로 정착한 모양이다. 명쾌한 이 한 마디 말로도 고전은 공감의 온상지요, 서늘함의 확인처라는 걸 알겠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바깥에서는 제 주어진 역할을 무리 없이 감당한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면 조금 달라진다. 그건 긴장감의 차이일 것이다. 평판이 두려워, 체면이 깎일까봐, 좋은 인상을 얻기 위해 등등, 사람들은 집밖을 나서면 최소한의 페르소나(가면의 인격)를 연기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돌아간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와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면 너무 완벽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나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의 나는 야무지지 못하고 일을 잘 벌인다. 허탕도 잘 치고 허튼짓도 많이 한다. 주책 부리고 실수하는 것은 내 담당이요, 주워 담고 뒤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나 아닌 가족이다. 예를 들면 게르마늄 찜기는 당연히 직화 방식으로 불을 쏘이면 안 된다.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먹다 남은 갈비찜이 든 그 도자기 재질 찜기를 가스레인지 불 위에 곧바로 올리고 말았다.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용기는 퍽, 하고 파열음을 냈다. 도자기 파편과 내용물로 범벅이 된 주방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낼 힘마저 놓아버렸다.이럴 때 눈썰미 강한 몽테뉴의 사색을 빌리면 된다. `아내와 하인이 보기에도 눈에 띄는 허점 없이 사는 자는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사람들에게 추앙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인격의 가면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경구인지. 제 안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3

넬슨 만델라

지난 10일 넬슨 만델라의 추모식이있었다. 비 내리는 요하네스버그 월드컵경기장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일관한 한 생애 앞에 드리는 찬사와 존경의 물결이었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로하니 이란 대통령 등 내로라하는 각국 정상들도 참석했다. 한 인권지도자의 추모식 앞에서는 니 편 내 편의 경계가 필요치 않았다. 적대와 연대를 아우르는 평화의 기치, 그것은 넬슨 만델라가 추구한 궁극의 목표였다. 인권 전도사였던 그의 죽음 앞에 겨우 화합과 우의의 그림을 연출할 수 있다니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 한 것인지. 만델라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우연히 한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했다.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수감되기를 몇 차례, 종신형을 선고 받아 삼십 년 가까운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1990년 석방된 그는 인권지도자로 돌아왔다.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온건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종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도 진저리를 쳐야했다. 그 상황에서도 백인 정부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아야했다. 민주 선거를 관철시켰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9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결은 물론,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의 핵심적 리더가 되었다.추모식장에서 만델라의 오랜 비서를 지낸 이가 말했단다.“적대적 관계였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는 모습을 만델라도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의 전언은 곧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서로 손 잡는 것,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만델라를 떠나보내면서 깨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2

사람이 우선이다

하반기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끝나간다. 독서 방법이니 논술의 개념이니 하며 회원들과 열 올려가며 공부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우리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희망`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어느새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자리엔 사람의 훈기로 가득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다사로운 분위기를 아무도 말하는 이는 없지만 서로 감지하게 된다. 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아기 손잡고 오는 것도 모자라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분, 남들보다 먼저 와 원탁 대형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분,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챙기며 관심을 가져 주는 분, 유머와 생활의 지혜로 주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주는 분 등등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들을 우리는 만났다.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공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세부 목표 중의 하나는`짧은 글로 힐링하기`였다. 각자 추천한 그림동화 한 편씩을 매주 돌아가면서 읽었다. 한정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보듬기엔 그림동화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동화를 낭독하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감탄사나 탄식의 한숨이 섞여 나오곤 했다.`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낭독하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 올바른 자녀관을 갖는다는 것 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말썽을 부려도 내 아이, 기쁨을 선사해도 내 아이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로 자식은 엄마에게 존재하고, 그런 자식에게 한결 같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상징적 존재로 엄마 또한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 늙은 엄마 앞에서 어른이 된 아들이 불러주는 자장가 앞에 서면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희망이며 사랑이 곧 삶의 의미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사람 모이는 궁극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1

신춘문예 단상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한때 그것은 문학청년의 로망이었다. 출판 매체가 다양하지 않고, 신인 등용문이 넓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다. 요즘은 굳이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는 길은 널렸다. 성실한 열정으로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사가 먼저 알고 작가가 되도록 도와준다. 신춘문예라는 등단 제도가 꼭 필요한 시대는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면 쓰는데 관심이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춘문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한 분야에 몇 백 명이 응모하는데 달랑 한 명만 뽑는 신춘문예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게임과 같다. 게다가 완전무결하게 공정한 것도 아니다. 최종심에 안착한 작품들이 모두 좋아도 한 편만 뽑아야 되니 심사자의 성향과 주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운 있는 자가 당선이란 왕관을 쓰게 된다. 출판 매체들이 내거는 신인상 쪽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출판사 쪽보다 나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신춘문예에 사람들이 몰린다. 왜일까?신춘문예 제도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새해 첫날, 제 이름 자가 박힌 작품이 버젓이 지면에 실릴 수 있는 영광을 얻는다. (그것도 메이저급 신문이라면!) 일회성일지라도 쓴 글에 대한 보상 치곤 쏠쏠하다. 두 번째로 문단에서 신예작가로 인정해준다지 않는가. 새해 첫날부터 새로운 작가 탄생을 신문사에서 홍보해주니 생각할수록 꿈만 같다. 마지막으로 두둑한 상금이다. 짧은 소설 한 편에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고액의 고료를 준다니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어디 있겠나.하지만 이게 함정이다. 잔치는 끝났다. 대개 머잖아 잊힌 이름이 되고 만다. 신춘문예 당선 자체는 작가의 길과 무관하다. 작품 없는 작가에게 신춘문예란 타이틀이 무슨 소용인가. 단발성 등단 절차가 아니라 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십이월이다. 그 진지함의 제일 순서는`부지런히 쓰기`라는 건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10

목소리의 진실

흔히 착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목소리와 상대가 받아들이는 내 목소리의 느낌이 같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공기 중에 퍼지는 내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몸주체가 각각 나와 상대로 다르니 목소리도 달리 들릴 수밖에 없다. 비염 목소리를 달고 사는 나는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주로 오해를 산다. 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디 아프냐, 감기 걸렸냐, 자다 일어났냐`고 상대는 조심스레 확인한다. 아프기는커녕 혼자 빈둥거리며 잘 노닐고 있을 때 주로 상대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혼자 있다 보면 말에 노출될 기회가 없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 톤은 낮아지고 분위기도 가라앉게 된다. 여기다 오래 앓아온 비염 때문에 발성 기관마저 왜곡되니 처량한 아픈 목소리로 들리나 보다. 감기 걸렸냐고 상대방이 되물을 때마다 `멀쩡한데 비염 목소리 때문에 그래요.`라고 변명하려니 스스로 한심해질 때도 있다.그럴 때마다 사람 고유 목소리의 진실은 어디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구나! 김중혁의 에세이 `모든 게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짜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생각한 내 목소리는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공기라는 중재 과정과 상대 청각이란 거름망을 거쳐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와 상대방 모두 진실을 말하고 듣지만 그건 온전한 진실이 아니다. 진실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전달되기 전, 공기 중을 통과하는 그 찰나에만 존재한다. 그 짧은 순간을 찾아 헤매는 과정, 그것이 삶이란 생각이 들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9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과 남쪽의 소도시 통영은 다소 생뚱맞은 조합이다. 하지만 백석의 연애사가 통영과 관련 있기에 사람들은 백석과 통영을 함께 떠올린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덕에 우리는 통영에서의 백석 행장을 상상으로나마 그려 볼 수 있다.통영 `천희`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처녀`를 천희라고도 불렀나 보다. 동료 기자의 소개로 백석은 통영 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蘭)`(박경련)을 만난다. 시인이 24살 때였다. 란의 부모에게 청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란과 결혼한 사람은 바로 백석과 란을 연결해준 그 친구였다. 시인은 큰 상처를 얻었지만 그 덕에 우리는 바람결 같은 그의 통영 관련 연시를 낭송할 수 있게 되었다.시인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란 시에서 란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 대한 서운함을 언급한다.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나지막한 집에서 지아비와 어린 것 옆에 끼고 대굿국으로 저녁을 먹는다고 노래한다. 통영에 와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단 한사람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외로이 대구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통영`이란 제목의 시 두 편을 연결하면 백석의 `란`에 대한 그리움의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날,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 도시에서 미역오리 같이 마르고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한 처녀를 객줏집 마루방에서 만난다. 처녀는 `명정골 정당샘` 근처에 산다고 들었다. 물 긷는 여인네들 가운데 혹시 `란`을 만날까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바닷사공이 된 심정으로 길 건너 정당샘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만나지 못한 사랑은 시가 되었다. 백석의 로맨스를 알고 통영에 가는 이라면 명정골 정당샘과 충렬사 계단을 무시로 지나치지 못한다. 먼 타향 사람 백석마저 붙잡아 놓는 힘 이것이 통영, 아니 사랑이 위대한 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6

불러주는 데 있더나?

곽경택 감독의 `친구2`는 단순 조폭 영화로 읽히지 않는다. 삶에 관한 여러 은유적 메시시를 담고 있다. 전작이 주는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네티즌들의 평가는 접어두련다. 조오련이랑 바다거북이랑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삶이란 이런 비루한 질문의 연속이고, 그런 질문들에 괜찮은 답이 있을 리 없다는 걸 말해주는 영화이다. 폼 나게 살고 싶지만 결코 폼 나지 않는 삶의 비애를 조폭 군단의 형식을 빌려와 들려준다. `어른 남자가 내 편 들어준 게 그때가 처음입니더.` 동수의 아들 성훈(김우빈)이 준석(유오성)에게 고백할 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독한 격랑의 생채기만 쌓아온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을 얻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천국을 만난 기분이 된다. 사람은 많아도 내 편은 드물다는 것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후회할 선택만 하고 사는 게, 그게 건달이라고 준석은 읊조린다. 어찌 건달만 그렇겠는가? 삶 자체가 후회라는 선택의 연속이다. 후회 없는 삶이란 후회하지 않기로 한 그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삶 자체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때 그 시간에 열심히 할 걸,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등등 후회로 점철된 시간이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건달이 쪽팔리면 되겠나,고 준석은 말한다. 건달만 그러할까. 누구나 쪽팔리면 얼굴 들기 힘들다. 건달에게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솔직한 멋이라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용기조차 없기 때문에 더욱 쪽팔림을 감수해야 한다. 저 대사를 뒤집으면 보통 사람들은 쪽팔림을 쉽게 팔면서 산다는 말과 같다.모든 걸 잃은 뒤, 어디로 가겠냐는 부하의 말에 준석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를 던진다. `나를 불러주는 데가 있더나?` 늙으면 아픈 재미로 산다는 페이소스 강한 준석의 말에 빗대자면, 변방으로 밀리면 외로운 재미로 산다. 그게 삶이다. 한때는 치열하게, 더러는 울컥하며, 끝내 외롭게 스러져 가는 것, 삶의 허무를 영화는 조폭이란 그림을 빌려와 극적으로 보여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5

영화보다 현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영화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건 현실을 그리지만 현실에서 어느 정도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와 현실이 같다면 굳이 영화로 그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다. 숱하게 제작되는 로맨틱 코미디는 현실보다 과장된 에피소드를 반영하고, 그것도 모자라 웬만하면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현실처럼 밋밋한 이야기의 나열에다 지리멸렬한 결말이라면 누가 영화관을 찾겠는가.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은 그 무엇에 기대고 싶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관을 찾는다. 오랜만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다시 봤다. 이 영화는 위에서 말한 현실이 아닌 현실을 기대하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리얼리티 최적화`가 그 목표인 것처럼 과장된 장면과 억지결말을 유도하지 않는다. 노회한 감독은 관객이 영화 속 인물과 호흡하고, 영화 속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철저히 계산된 앵글을 들이댄다.액자 영화를 표방하는 이 영화에서 우연히 새신랑 역을 맡게 된 호세인은 특정 장면에서 자꾸만 NG를 낸다. 마을 지진으로 죽은 사람의 수를 대본에 써져 있는 것보다 훨씬 줄여서 말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화 속 장면이라지만 죽은 사람 숫자까지 속여서 현실을 왜곡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를 찍는다는 표면적 설정은 신부 역을 맡은 테헤레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호세인의 마음을 전하는 데 맞춤하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절절하고, 더 애틋하고, 더 사무치고, 더 고통스럽다는 것을 과장 없이 담아낸다.현실을 벗어나 위로를 얻고 싶을 때 영화를 보러 간다. 하지만 반대로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음을 확인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기도 한다. 구불구불 올리브 나무 사이로 멀어져 가는, 화답 없는 테헤레의 여정을 뒤쫓는 호세인의 다급한 발걸음은 곧 현실 속 관객의 것으로 바뀐다. 빽빽한 올리브나무 사이에 길이 있고, 저마다의 절절한 희비극을 안은 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길을 간다. 아련하고 애틋한 그 사연은 왜곡 없이도 가뿐히 영화의 명장면이 되어주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