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느끼는 기분`을 심기(心氣)라고 한다. 상대의 심기를 너무 헤아려도 진상이요, 그 심기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면 밉상이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 입지를 높이려 욕망하는 자는 은근히 권력자의 심기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백성 입장에서는 둘 다 똑같아 뵌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지난 달 박 대통령이 영국 방문을 했을 때 런던의 모 극장에서 한국영화제 특별시사회가 있었단다. 애초의 영화제 개막작은 `설국열차` 또는 `관상`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숨바꼭질`로 바뀌었다나. `설국열차`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빗댄 계급 투쟁 이야기라서 안 되고, `관상`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 찬탈을 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안 된다는 식이다. 인사차 들러 예고편 2분을 보고 떠나는 VIP를 위한 배려치고는 너무 심한 자기검열이다.실제 대부분의 권력자는 나무라지 않고 핀잔하지도 않는다. 심기 불편할까봐 주변인들이 알아서 기는 게 문제다. 재외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보태는, 의례적 행사 참석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지나친 헤아림`이 도리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화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물론 반대로 죄 없는 가진 자에게 도발을 감행해 심기를 자극하는 주변인도 많다.세상일은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남 뜻대로 될 때가 훨씬 많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남이 옳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 가진 자나 권력자들이 그들 맘대로 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주변인들이 앞서서, 그들 말이 다 옳으니 그들 심기만을 살피겠다고 한다면 못 가진 자, 안 가진 자의 심기는 누가 보살피나? 언제나 타인은 옳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진 자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심기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있다. 도발해서도 눈치 봐서도 안 되는 오묘한 심리가 인간의 `심기`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3
`과잉교정(overcorrection)`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강제로 책임지게 하기 위해 특정 행동을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게 해 문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심리학 용어인데 문제 행동이 수정될 때까지 강제로 반복시키는 방법이란다. 잘못된 행동이 지나치게 일어날 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 말은 행동 주체나 교정 조력자 양측 다 `지나친` 부분이 있을 때 쓰이는 것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음식을 흘릴 경우 단순히 흘린 음식을 치우는 것을 넘어 바닥 전체를 닦게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놓을 때까지 반복해서 제 자리에 정돈하게끔 하는 것도 과잉교정에 해당된다. 이것의 단점은 지나친 반복으로 반항심이나 적대감 등을 키울 수 있고, 강압적 훈련으로 인한 윤리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흔히 `오버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잉교정 용어 자체의 뉘앙스에서 보듯이 뭐든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과잉교정이란 말에서 파생되어, 네티즌 사이에서 회자되는 용어가 `과잉교정인간` 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이는데 표준어, 맞춤법, 띄어쓰기 등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이거나 이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한다. 잘못된 언어를 쓰는 게 좋을 리는 없지만 `과잉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콕콕 집어 교정하려는 태도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음을 꼬집는 것이리라.말의 규범을 지키는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기본자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말의 노예가 되어 시시콜콜 그 잘못을 지적하려 든다면 피곤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영역이 언어 분야이다. 생활이 바뀌는 것만큼 언어는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언어의 사회성을 인정하는 융통성과 언어 규범을 지키려는 원칙,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 자체가 `오버`인 게 우리 언어 활용의 현 주소인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02
프로이트가 진단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러 강박증을 지녔다. 해부도에 능한 다 빈치였건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릴 때, 남자 몸은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여자 몸은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렸다. 다 빈치가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다 빈치는 또한 어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강박적이리만큼 세부적 회계 방식으로 기록했다. 얼핏 어머니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냉혈한 같아 보이지만, 괴로움을 표출하는 다 빈치의 다른 방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조차 이성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서자로 태어난 다 빈치는 계모에게 입양되는데 생모와 함께 했던 기간 동안 모자 관계는 무척 돈독했다.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의 교제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프로이트는 추측한다.`모나리자`의 미소가 불가해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잡을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며 모나리자 속에서 어머니의 미소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가 미완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소유욕이 강한 어머니 밑에 자란 아들은 강박증을 가지기 쉽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들이 완벽하기를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빈치의 경우 그런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림을 왜곡하거나 미완으로 남긴 셈이다.프로이트의 눈에 비친 그는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모성과 분리되지 않은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강박적 집착이 다 빈치의 예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감성과는 멀어 보이는 치밀한 계산과 과학의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내면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강박의 소산물일 수도 있다는 게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강박 증세를 품고 있다. 예술가는 그것으로 꽃을 피우고, 범인들은 그것이 꽃이 되는지조차 모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9
조정육 선생의 `행복한 그림읽기`라는 블로그가 있다. 담백하면서도 분명한 논지의 글이 올라와 내 취향에 맞춤하다. 여러 카테고리 중에 그림으로 읽는 공자, 라는 코너가 있다. 공자의 활동 상황이 그려진 고전 그림을 제시하고 관련 고사 성어를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시리즈물이다. 내 짧은 소견으로 다른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관련 그림을 찾아내는 수고도 대단한데다 그것으로 독자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 중 오늘 읽은 `인번거노`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공자가 정치할 때 장사치는 저울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을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자 덕에 강해지는 노나라에 위기를 느낀 이웃 제나라가 계책을 꾸민다. 미인계를 써 노나라 군주가 미혹에 빠지면 공자가 충언을 할 테고, 충언을 멀리하게 된 군주에게 환멸을 느낀 공자가 결국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제나라가 원하는 대로 노나라 군주는 환락에 빠졌고, 자로가 스승인 공자더러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공자는 `주군이 하늘에 제사 지낸 뒤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인번거노)`라고 답한다. 고기를 받지 못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난다. `그깐 제사 지낸 고기 못 받아 삐쳐서 떠나는 놈`으로 떠날 구실을 만든 것이다.그건 공자의 진심이 아니었다. 공자가 달리 공자이겠는가. 어차피 떠날 몸, 구차하게 군주가 싫어서 떠난다고 핑계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짐을 졌다. 남은 군주를 위한 배려로 위악을 떤 셈이다. 너무나 공자다운 생각이다. 충언이 통할 때까지 계속 설득하면 좋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멈추고 떠나는 수밖에 없다. 떠나는 와중에도 주군을 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선한 자를 위한 방패막이가 아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던가. 공자가 아니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김살로메(소설가)
2013-11-28
전국시대의 굴원은 초인의 노래인 초사(楚辭) 문학에 능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어부와 굴원이 나눈 대화체 이야기를 되새길 때마다 굴원보다는 어부의 말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무래도 어부가 현실적인 인물이라서 그럴 것이다. 굴원만큼 강직한 사람은 문헌 속에서나 흔하지, 일반적으로는 작품 속 어부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청렴결백한 굴원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굴원의 죄라면 완전무결함이 가장 큰 죄였다. 잘못하지 않음이 죄가 되는 건 잘못 많은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제 그의 할 일은 수척해진 몸으로 강호에서 시나 읊는 것이었다.어부가 물었다. 큰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굴원이 답한다. 혼탁하고 취한 세상에 홀로 깨끗한 채 깨어 있다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어부가 충고한다.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 따라 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모두 탁한 물이면 진흙탕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고, 모두 취했으면 싸구려 술을 마시면 되지 고매한 처신으로 추방을 자처할 일이 무엇이냐고. 굴원이 응한다. 머리를 감았다면 관을 털어 쓰고, 목욕을 했다면 반드시 옷을 털어 입어야 한다고.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그럴 바엔 강물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겠다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순 없다고. 지친 어부가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다.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타협을 강조하는 어부의 삶과 대조적으로 굴원의 강직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이란 강물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어부가 부른 창랑가처럼 한 세상 둥글게 살아가는 게 범부(凡夫)의 일상이라는 것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해 굴원은 제 강직한 삶을 빗대어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범부 부처되기가 위대한 건 그렇게 된 분이 오직 부처 한 분이기 때문이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3-11-27
다시 수전 손택이다. 1961년 어느 봄날의 일기에서 그녀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루에 스무 번씩 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시린 무릎에 전율이 일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다. 온통 나라가 시끄럽기만 하다. 한쪽에서는 NLL 포기 발언에 대해 물고 늘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거품을 문다. 민생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안을 두고 지겹도록 몇 달째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들어 보면 모두 옳다. 일을 벌이는 쪽에서는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고, 꼬투리 잡는 쪽에서는 그 입장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단다.정치가 시끄럽고 관계가 뒤틀리는 건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그를 수 있고,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왠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니, 그게 두려워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과격한 삿대질을 곁들이는 것이다.이런 인간의 치졸한 속성을 파악했기에 젊은 수전 손택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하루에 스무 번씩이나 가슴에 새겼으리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긍정의 효과를 발휘하는 썩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 타인도 귀하게 대접한다고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이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고, 정치 현실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다 보니 서로 배려하는 미덕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흠 잡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너무 확고하면 아집이 생기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최소의 겸허 모드를 곁에 두었기에 손택은 그토록 진솔한 자기성찰에 가닿을 수 있었으리라. 진정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일수록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걸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6
의외로 대중들이 잘못 알고 쓰는 외래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크`(chic)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 단어를 내 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뭔가 도도하고 무심해 타인의 의사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더러 `시크하다`고 표현해왔다. 우연히 인터넷 게시물을 보다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당황했다. 당장 사전을 검색해 봤다. 시크하다 - `세련되고 멋있다`라고 되어있다. 도도하다, 차갑다, 등 소위 `쿨하다`는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잘못 알고 쓴 경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크란 말은 패션용어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독일어로 세련되고 맵시 나는 경우를 일컬을 때 쉬크(schick)라고 한단다. 프랑스어(chic)를 거쳐 영어로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선 시크란 신외래어로 쓰이는 모양새다.화려한 원색이 아니라 흰색과 검정색 톤의, 차분하면서도 도회적 감각을 추구하는 패션을 두고 시크하다는 표현을 썼다. 세련되고 멋있다, 라는 패션 용어와 도도하고 차갑다는 성격 이미지는 묘하게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을 규정할 때도 시크하다는 표현을 하게 된 모양이다.시크란 말이 무심하고 도도하다는 의미로 쓰인 건, 비슷한 단어인 `시니컬`(cynical)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냉소적인 데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이 시크와 비슷한 발음인데다 어쩌면 시크의 어원이 시니컬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더러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 사람 시크해”라고 말해왔다. 한데 그 원뜻이 그 사람은 세련되고 멋있어, 라는 것이었다니 위로가 된다.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인 도회풍 사람들이 멋있고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니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크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이 순박한 성격을 지녔다면 어딘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약간은 시니컬한 사람이 적당히 시크한 패션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니 시크한 자 시니컬해도 용서하련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5
뜨는 드라마 중에 `응답하라 1994`가 있다. 시대상에 맞지 않는 일일드라마나 재벌과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루는 미니시리즈와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내용이라서 꼭 챙겨본다. 거기서도 우리식의 위계질서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씁쓸하면서도 공감을 하게 된다. 같은 나이인줄 알았던 대학 동기가 두 살이나 어리다는 걸 알게 되자 등장인물은 다짜고짜 누나 행세를 한다. `나이도 어린 게 누나 앞에서 까불고 있다`는 사회가 가르쳐준 고정관념을 내세워 우위를 점하고자한다. 상대남의 멱살을 잡고 수직 관계를 인정하라고 윽박지른다. 언어는 형식을 낳고,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소통 부재를 경험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모순된 언어 형식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말의 형식은 세밀한 등급까지도 규정한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할게, 해줄게` 등이 뜻하는 바와 같이 말꼬리 형식에 따라 타자와 나의 계급은 분명하게 규정된다.대학입학 후에도 자기소개를 할 때 몇 학번인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밝힌다. 새내기인지 재학생인지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내가 어떤 계급 구조를 형성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탐색자료로서 그 학번놀이가 필요한 것이다. 따르고 거둔다는 명목으로 선후배의 선을 가르지만 실은 위계질서에 자연스레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사회에서부터 굳어진 이런 불문율은 사회에 나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행여나 이런 질서에 저항이라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너 몇 년 생이야? 민증 까 봐.`, `새파란 것이, 니 애비랑 내가 친구다.` 등등의 익숙한 언어폭력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숫자놀음으로 예시되는 이런 위계 체제가 진솔한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이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구축되어온 세계관이 불편할지언정 질서유지에는 더할 나위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 불편보다는 질서 유지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언어형식의 노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2
거의 매일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너무 어려 격정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칼날로 스스로를 베거나, 세상을 향한 분노나 원망이 주된 내용이었다. 청춘이 괴로워 그저 기록함으로써 심리적 해방을 맛보던 시절이었다. 돌아서 들쳐보는 일기장은 회한과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누가 볼까 부끄럽고, 스스로도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일기장은 모두 불쏘시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을 일기로 읽는다. 일군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고 태울 때 누군가는 내밀한 일기장을 남겨 잊고 지냈던 과거나 사유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손택의 `다시 태어나다`는 총 3권으로 기획된 그녀의 일기 중 첫 번째 책인데, 사춘기 시절부터 청춘 부분을 다루고 있다.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랑, 결혼 생활의 갈등과 환멸, 사물과 대상에 대한 거침없는 눈썰미 등의 보고서로 읽힌다.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는 그녀의 공적인 책들과 비교해 격정과 수치와 회한의 옷섶을 풀어놓은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사람살이는 참으로 비슷하구나, 하는 위안을 받는다.동성애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두 여자에게서 느낀 자신만의 수치심과 모욕과 고통과 자괴를 지나치리만큼 진솔하고 가혹하게 고백한다. 개인적 정념을 넘어 그녀가 보통 사람과 달랐던 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기 확신과 끊임없는 열정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넘어 그녀에게는 지적 갈망이라는 거대 우물이 있었다. 스스로 판 그 우물에 문학과 음악과 영화와 비평이라는 샘물이 흐르도록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모든 열망은 오로지 작가로 거듭나겠다는 꿈 하나로 연결되었다.손택 자신의 청춘 보고서는 사적인 일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번지고 무너지는 자아를 다잡아 어떻게 창의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준다. 누가 뭐래도 욕망은 다양하고 자아는 개별적이다. 육체적 욕망과 지적 욕구를 스스럼없이 발산해 나간 그녀의 젊은 내면이 그녀가 남긴 인문학적 저술의 예술혼이었음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21
맵찬 바람이 몰려왔다. 늦저녁 마지막 손님이 되어 미용실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푸석이고 뻗치는 머리칼에도 겨울 채비가 필요했다.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퍼머를 하겠다며 급하게 외투부터 벗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머리칼이라도 손질해야겠다고 했다. 마감 직전에 막무가내로 들이닥친 고객을 보며 주인은 난색을 표했다. 단골이라 할지라도 주인 입장에서는 불청객일 터였다. 진종일 바투 선 채 남의 정수리를 거두는 일은 멀쩡한 심장을 진창에 빠뜨렸다 건져 올리는 것만큼 힘들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 여자가 먼저 말했다. 오늘 하루 허방에 발 디뎠다고. 맥박 뛰고 팔 저린 하루였단다. 관절 뻣뻣해진 손가락은 구부려지지 않았고 화덕처럼 달아오른 가슴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일 있는 곳에 말이 붙고, 이름 붙는 집에 흠집 먼저 보인다며 초점 잃은 눈으로 거울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일 만들지 않고 덕 쌓지 않는 것이 처신의 수칙이라며 머리칼을 마구 헝크는 것이었다. 급할 것 없던 나는 여자에게 먼저 자리를 내어주었다. 뛰는 심장에 가위질을 할 수 없다면 젖은 머리칼이라도 찢어 발겨야만 숨통 틀 것 같다던 여자는 금세 의자 안에서 편안해졌다. `뚫어뻥` 같은 주인의 가위질이 이리저리 막힌 여자의 물길을 싹둑싹둑 뚫고 있었다.산다는 건 던적스러운 사다리 건너기와 같았다. 칸과 칸 사이 그 좁은 곳에 허방이 있었다. 그곳에 발 내딛는 횟수가 잦거나 그 헛발질의 강도가 셀 때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표현했다. 한 잔 술로도, 한 바퀴 달음질로도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남은 화를 삭이러 여자들은 미용실로 향한다.싹둑싹둑 설움의 휘파람처럼 검은 별 뭉치가 바닥으로 흩어진다. 굳었던 손가락도, 조여오던 심장도 제 자리를 찾아가는지 여자는 와불처럼 고요하다. 자르고 둥글어진 머리칼만큼 낯빛은 깊어진다. 예고 없이 스트레스 절정에 닿는 날이면 몇몇의 여자들은 미용실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자르고 휘감으면서 내려앉는 평화./김살로메(소설가)
2013-11-20
마음이 아픈 아이들은 잘 웃지 않을뿐더러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아이들이 눈 맞추기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닿고 싶은 별과 오르고 싶은 나무와 맞대고 싶은 바람에 대해 그 아이들도 누군가와 눈 맞추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른들의 시선은 대체로 태생적으로 웃음이 많거나 담백한 명랑함을 지닌 아이들에게 먼저 가닿았다. 마음 깊이 앓아보지 않은 그들 그룹은 실은 누군가 애써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는 나무가 될 터였다. 잘 웃지 않는 아이들은 `평온한` 그들이 부러웠다. 관심 받지 못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상처가 되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눈빛에 고인 사연은 절절해졌다. 외면에 지친 아이들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사랑 받지 못했고, 사랑 받지 못하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패감이 그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단순한 패배감이 아니라 고착에 가까운 자기포기처럼 보였다.명랑한 아이들이 가벼운 랩 리듬처럼 슬리퍼를 끌며 지날 때 웃지 않는 아이들은 슬리퍼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곁을 지났다. 더욱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왼쪽 목덜미의 사마귀마저 가리느라 한껏 움츠린 자세가 되는 것이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은 이 세계야말로 모순적인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공정한 눈 맞추기를 할애하지 않은 어른들의 잘못이었다.그 맘을 열어주는 데는 끊임없는 눈 맞추기 말고 아무 것도 없었다. 여백조차 없는, 마음의 얼음성을 쌓는 아이들과 눈길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눈치만 웃자란 그 아이들에게 가식과 형식은 금물이었다. 그들 마음에도 빨주노초파남보 풍선은 부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맘속의 풍선이 맘껏 날 수 있도록 누군가의 눈 맞추기는 계속될 것이다. 눈 맞추기는 상처를 아는 자가 상처 입는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일 터였다. 누군가의 상처를 안다고 말하기 전, 가만 다가가 그 아이와 눈을 맞추는 당신이라면 당신도 상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19
한 친구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칭찬이 자신더러 `착하다`고 하는 것이라고. 학창시절 과 야유회를 갈 때 그 친구는 이십인 분의 김밥을 자취방에서 홀로 쌌는가 하면, 오갈 데 없는 친구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쌀독은 자주 비었고, 좁은 방엔 친구들이 흘리고 간 머리카락들이 뒹굴곤 했다. 잦은 방문에도 쌀 한 줌 밑반찬 하나 챙겨오는 이 없었고, 머리카락 뭉치 한 번 치워주는 이 없었다. 자신이 좋아서 베푼 호의였지만 사람이기에 갈수록 서운한 맘이 들었다. 어느 날 그런 고민을 다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 친구의 충고는 이랬다. “걔들, 친구 아니야. 당장 끊어. 니가 베푸는 친절이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면 그건 좋은 게 아니야.” 그 이후로도 친구는 소위 `빈대붙는` 그 부류들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친구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어찌 친구일 수 있겠는가. 친구사이일수록 예의와 양심에서 멀어져서는 곤란하다.태생적 성정이 착한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착하다. 하지만 누가 자신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착하다는 말 속에는 `너는 착하니 어지간히 만만하게 대해도 괜찮지?`라는 숨은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나를 적절하게 연기하며 살아간다. 저마다 페르소나라는 예의의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천성이 착한 사람은 자신이 그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착한 사람은 진짜 나와 가짜 나의 경계가 덜하다. 하지만 대중에게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진짜와 나 사이의 싸움으로 내면의 기를 탕진한다. 착한 사람은 상처받기 쉽고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에너지 낭비에 휘둘린다. 둘 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이다. 하지만 `세상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김살로메(소설가)
2013-11-18
한 방송작가를 두고 일부 시청자들이 퇴출 운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의 임성한 작가가 50회 분의 연장 방송을 요구한 것이 발단이란다. 시청률이 좋다는 것을 볼모로 작가는 방송사를 상대로 슈퍼 갑 행세를 하고, 방송사는 광고 완판을 보장해주는 작가의 눈치만 본다. 문제는 개막장 드라마를 쓰더라도 시청률만 높으면 그만이라는 방송가의 생각들이다. 시청률에 집착한 작가는 작가정신이나 작품성은 물론 시청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도 생각지 않는다. 관심 끌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에피소드라도 적극 활용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느닷없이 중도하차 시키는가 하면, 개연성 없는 죽음으로 이끌어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만든다. 기이한 장면들과 대사들도 빈번하게 동원한다. 유체 이탈에다 귀신 출몰은 예사이고, 기괴한 시집살이 장면은 애교를 넘어 실소를 부른다. 이해할 수 없는 총체적 현상들이 드라마를 지배한다. 그래도 시청률은 높다. 아니, 그래서 시청률이 높다.대중의 심리는 묘하다. 정돈된 드라마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정신줄을 놓게 된다. 작가와 방송사는 그것을 십분 활용하고 시청자는 불편한 내용인 걸 알면서도 단순한 호기심에 같이 놀아난다.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 시청률 높은 작가는 광고 완판을 부르고, 콧대 높아진 작가는 집필부터 캐스팅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작가 앞에서 방송사는 윤리고 양심이고 따질 겨를이 없다.품위를 버린 그들이 쌍으로 돈의 노예가 될 때 시청자가 나서면 되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막장 드라마 따위는 안 보면 그만이라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만큼 시청자의 심리를 대변하는 말도 없다. 비상식적이고 말 안 되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욕하고 분노하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게 일반대중의 역할이다. 시청률을 무기로 슈퍼갑이 된 작가는 대중을 우롱하고, 방송사는 직무유기로써 그 책임을 회피한다. 대중은 욕하면서 그 시청률을 높여준다. 이것이 삶의 속성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15
이기호 작가가 말했다. 잘 쓰는 자가 아니라 오래 쓰는 자가 결국엔 작가가 된다고. 오라는 데 많은 재주꾼들은 절실함이 사라져 쓰는 데 전력투구하지 않는다. 반면, 글재주가 덜한 이들은 불러주는 곳이 많지 않아 쓰는 것 말고는 별 달리 할 게 없다. 절치부심 그저 쓰고 또 쓸 뿐이다. 그러다 보니 작가가 되어 있더란다. 우직하게 쓰는 자 앞에 장사 없다. 제대로 쓴다는 전제가 붙긴 하겠지만, 쓰다 보니 빛이 보이더라는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제대로 쓴다는 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묘사가 살아있는 글은 잘 된 글이다. 그걸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말하지 않고 보여주기` 기법이라고 한다. 그림으로 글쓰기를 하는 식이다. `글쓰기 만보`에서의 안정효 작가 식 보여주기의 예를 보자. “`더러운 남자`는 어느 정도 눈에 보인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목요일쯤이면 항상 몸에서 걸레 썩는 냄새가 나는 남자`라고 묘사하면, 일요일에 대충 목욕을 한 다음 전혀 몸을 돌보지 않는 남자를 연상하고, 그런 남자가 기거하는 방이나 집이 얼마나 지저분할지도 눈에 선하다.”설명이 아니라 묘사의 달인이 될 수 있다면 글쓰기 고지의 반을 넘은 거나 마찬가지다. 풍경과 내면이 어우러진 한 폭 그림을 나만의 글로 그릴 수 있다면 반은 성취한 셈이다. 문장 수련과 더불어 묘사하기의 습관은 글을 쓰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 중의 하나이다. 올곧은 작가정신과 더불어 이런 기본기를 갖추기만 한다면 글쓴이로서는 날개를 단 거나 마찬가지다.글쓰기에 비결은 따로 없다. 잘 쓰는 이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는 것도, 옹골찬 자기 확신도 도움이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책상 앞에 앉는 일이다. 자판 위에다 손을 얹고 무조건 타이핑해야 된다. 마음이 아니라 몸, 그것도 손가락을 움직여 쓰는 순간만이 글쓰기의 진정한 비결을 말해준다. 자판에 누른 글자가 늘어날수록 글쓰기 비법을 터득하는 시간은 짧아진다. 답을 알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니 나부터 안타깝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14
타고난 성정은 어찌할 수 없어도 인품은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다. 훈련이나 노력 여부에 따라 자신과 세상이 원하는 인격에 가 닿을 수 있다. 다만 그 실천이 너무 어렵다는 게 문제다. 그 어려움 때문에 품격 높은 사람들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링컨도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링컨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의 그는 비난쟁이였다. 남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을 좋아했다. 편지나 시로 남의 약점을 적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두기도 했으며 변호사로 개업한 이후에는 신문투고로 상대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허세 부리는 상대 정치인을 망신 주는 원고를 썼다가 결투장까지 갈 뻔한 사건도 있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링컨은 비호감 인물이었다.그런 그도 끊임없는 자기 훈련과 몇 번의 깨달음 끝에 인품자로 거듭 났다. 남북전쟁 때 강물이 불어난 틈을 타 남부군을 일망타진할 기회가 있었다. 특사를 보내 전투를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부하장군은 응하지 않았다. 격노한 링컨은 부하에게 엄중한 질책성 편지를 썼다. 부하장군의 비효율적 부대 통솔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링컨은 그 편지를 부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비밀 서류함에서 편지는 발견되었다.링컨이 얻은 깨침은 `비판을 받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 또한 비판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 뒤 누군가가 상대를 힐난할 때면 링컨은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역지사지하면 나 역시 그 비난의 대상일 뿐이니까. 비난하기 좋아했던 링컨은 경험을 통해 그 비난의 부질없음을 체화한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킨 그 덕에 그는 대통령이 되고 노예해방의 물꼬를 틀 수 있었다.완전한 인격체가 아닌 우리는 제 기준에 따라 남을 비방하거나 비판한다.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남에게는 약점이 될 말을 뱉고 나면 하염없는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일찍이 링컨이 경험에서 우러난 인격 도야를 했듯이 매사에 신중한 언행을 곁에 둘 일이다. 갈고 닦아도 어려운 게 인품이지만 그래서 더 매력 있는 그 길을./김살로메(소설가)
2013-11-13
시험점수 하나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고, 한 인간의 운명까지 결정하는 이 원시적이고 해괴한 시험제도가 `수능광풍`이다. 수능 전에는 `행운 부적 열풍`이 불고, 끝나면 상인들이 학생들을 유혹한다. 어머니들은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가 부적을 산다. 점수 한 점 더 얻겠다고 거금을 날린다. 수능이 끝나면 `수능선물`로 승용차를 사주는 일도 있다. `수능성형`도 성행한다. 수능이 끝나면 소비자보호원이 바빠진다. 교활한 상인에 의한 수많은 수험생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수능이라는 괴물이 숱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수능을 앞두고 점집들은 부적값을 평소보다 10배 이상 올렸다고 한다. “목욕재계하고 치정을 드린 후에 쓴 부적”이라 선전하며 장당 100만원을 부르는 곳도 있다. 부적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는 블로그도 있고, `만사형통 부적`이라는 책을 만들어 비싸게 파는 자들도 있다. 백운산 역술인협회 중앙회장은 “부적의 가장 큰 효과는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인데, 돈을 많이 준다고 부적의 효과가 좋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학생과 학부모의 마음이라 그 심리를 이용하는 상인들의 대목이다.수능이 끝나면 고생한 수험생과 학부모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할인행사를 여는 업체가 많다. 코레일은 30~50% 할인행사를 하고, 신발업계도 20% 할인해서 팔고, 어떤 업체는 장학금을 주는 이벤트까지 한다. 록음악 경연대회를 열어 1등을 한 팀에는 20만원 상당의 악기 교환권을 주는 업체도 있다. 수험생에게 주는 혜택이 이렇게 푸짐하니 수험표를 사고 파는 해괴한 현상까지 벌어진다. 한 온라인 중고매매 사이트에는 수능이 시작되기도 전에 수험표 판매 게시물이 올랐다. 5만원부터 경매를 하겠다는 것도 있고, 15만원에 판다는 게시물도 있었다. 수능이 필요치 않는 일부 수시합격자들은 수험표를 얻기 위해 시험접수만 하고, 시험을 보지 않는 해괴망측한 일까지 벌인다.수능철에는 성형외과의 선전물이 폭주한다.“자녀에게 빛나는 미래를 선물하라”는 식이다. 이것이 `수능성형`인데, 눈+코+V라인`패키지 상품`을 내놓기도 하고, 수험생+엄마 패키지도 있다. 또 여러명이 모여서 오면 단체할인도 해준다. 얼굴을 뜯어고쳐서 더 예쁘지는 경우도 있지만 버려놓는 경우도 많다. 인기 연예인의 얼굴과 판박이로 닮아 개성을 죽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다들 예뻐졌다는 착각에 빠진다.대구시 소비생활센터는 수험생을 대상으로 한 길거리 화장품 판매, 어학교재 등 텔레마케팅, 대학교 방문판매, 전자상거래에 따른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순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수능 끝난 해방감이 상인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가정과 학교에서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영웅이 겸손하기는 어렵다. 영웅이란 말 속에는 약간은 거만해도 용서되는 것 같은 어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영웅일수록 겸손하고 낮아지는 법이다. 가령 핫이슈 인물 중의 하나인 `곽은경`같은 사람이 그런 깨침을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줄 것이다. 그녀는 국제 NGO 활동가이다. 25년간이나 열악하고 소외된 세계 현장에서 일해 왔다. 아비규환이 넘치는 곳,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이나 인도의 달리트(불가촉천민) 지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격리 지구 등이 그가 몸담아온 일터였다. 열악하고 형편없는 그런 곳에서 그녀는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인권 유린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해왔다. 운명처럼 묵묵히 국제연대활동가의 길을 걸어왔다.그녀의 치열한 현장 기록인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곽은경·백창화, 남해의봄날)를 펼치면 그녀 삶의 훌륭한 이력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난 그녀의 겸양 때문에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다. 세계 비극의 절정지를 향해 있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일이 영웅담으로 비칠까 저어한다. 그녀를 이끄는 정서는 자긍이나 의협심 같은 것보다 부끄러움이나 인간적인 절망감에 더 가깝다. 제 상황 앞에서 온몸으로 절규하는 그녀에게서는 물러섬 없는 진정성이 배어 난다. 약자를 위한 그녀의 몸과 입은 소통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부지런히 진격에 진격을 한다.인권과 평화를 말하는 그녀 이야기가 남다른 감동을 주는 건 우정으로 빛나는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 삶을 전적으로 응원하는 친구이자 작가 한 명이 책 속에 등장하는데 바로 백창화 작가이다. 젊은 날 같은 꿈을 꿨지만 한 명은 해외에, 한 명은 한국에 남아 각자의 행보를 만들어 갔다. 각각 특별한 삶에 동조하고 소박한 삶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우정을 보면서 산다는 것의 신성함에 대해 자꾸만 되새김질하게 된다. 제 가치관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 그 겸양이 세상을 움직이는 올곧은 힘이란 걸 알게 되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12
너무 어이없으면 할 말이 없어진다. 언론에 보도되기 전까지는 `박은선`이란 유명 축구 선수가 있는지조차 몰랐다. 여자 축구 선수라면 여민지나 지소연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다. 따라서 박은선이란 이름이 각종 매체에 오르내릴 때 박 선수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인 줄 알 정도였다. 박은선은 국내 여자 실업 리그에서 맹활약 중인 선수이다. 개인적, 환경적인 문제로 긴 방황의 터널을 건너기도 했다. 무려 8년간 선수다운 선수 생활을 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이유라 했지만 그 방황 속에는 여자로서 당해야했던 수치심도 있었을 것이다. 180cm의 키에다 70kg이 넘는 몸무게 등 웬만한 장정 저리가라 할 정도의 외적 조건은 관계자들로 하여금 그녀의 성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구실이 되었다. 하지만 일찍이 국제대회 참가 때 확실하고도 객관적인 검증을 거친 사안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아픔을 극복하고 뒤늦게 축구에 올인한 그녀의 성적이 올해 너무 빼어난 게 문제가 되었다. 경쟁 팀 감독들은 박은선의 성별 검사를 요구하다 못해 그들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내년 시즌을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은 것이다. 여자축구연맹에 공문까지 발송했다니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타국에서가 아니라 국내 리그의 경쟁팀 감독들이 똘똘 뭉쳐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나부터 살고보자는 이기심이 이런 한심한 발상을 낳았다. 뒤늦게 변명과 사과를 했지만, 선수가 받을 마음의 상처는 누가 책임져 줄 것인가.자국 선수를 보호하자는 거창한 애국 차원이 아니라 기본 인권 문제로만 돌아가도 분노가 인다. 분명 그녀는 그 문제로 젊은 나이임에도 잦은 상처를 받아왔다. 남들과 다른 외적 조건 때문에 수많은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 성별 검사라는 수모와 수치를 견뎌내면서 의지 하나로 성과를 냈다. 남과 다른 것은 이해의 대상이지 오해의 대상은 아니다. 이해해야할 사람을 가까운 사람들이 더 오해하는 현실이 어디 이런 경우이기만 할까./김살로메(소설가)
2013-11-11
의사소통에 관한 우스개 테스트지를 보고 웃은 적이 있다. 예를 든 항목마다 소통 능력별 점수를 매겨 놓았는데 평가기준점이 몹시 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고민 많은 상대가 당신에게 상담 요청을 한다. 이때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의사소통 능력은 0점, 삼십 분 이상 들어주면 5점, 비슷한 당신의 경험담으로 연대감을 형성하면 50점, 딴 생각하다가 `알았어.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내가 뭐해주면 될까?` 이렇게 말하면 마이너스 100점, 상대 이야기를 자장가로 착각해서 잠이 들면 마이너스 500점이란다. 세련된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꼬집는 예시이다. 제대로 된 의사소통에 이르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해주는 예시 같다. 인간은 예민한 동물이다. 상대가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닌지 상대의 말을 들어보지 않고도 곧바로 알아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십분의 일초의 판단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한 마디 말 이상의 몸짓이 우리 자신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부지불식간의 몸짓 언어는 상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어린이와 부모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독 의사소통이 부자연스런 한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찌개를 끓이면서 아버지가 뭔가를 묻고, 곁에서 돕는 아들이 대답하는데 부자는 서로의 눈을 피한다. 눈 맞추지 않고 나누는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다. 찌개가 넘칠까 걱정 되고, 파에 묻은 흙을 털어내야 한다 해도 서로의 눈을 마주보지 못할 정도로 틈이 없는 건 아니다.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한, 습관처럼 굳어진 소통 방식으로 보인다. 다만 그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당사자나 시청자나 느낌으로 알기는 한다.몸과 입으로 다 말하는 인간의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는 그 둘을 인식하는 노력만으로도 소통에서 오는 불편함을 덜어낼 수 있다. 소통의 달인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상대의 작은 몸짓, 하찮은 말에도 귀 기울이다 보면 신뢰할 수 있는 소통의 길은 열릴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08
복도 끝 강좌실 앞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진다. 비 그친 뒤 더욱 선명해진 단풍잎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책 읽어 주는 임 선생님의 목소리이다. 조심스레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 그 청징한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기분 좋은 숙연함이 밀려온다. 시각장애인들의 문예 활동 프로그램에서 만난 임 선생님은 그야말로 한결 같은 분이다. 약속된 시간보다 언제나 빨리 등장해 미리 온 회원들을 위해 예습 삼아 또박또박 교재를 읽어 주거나 책을 낭독해주신다. 그 모습을 가만 훔쳐보고 있노라면 공터 같았던 마음에 잔물결이 일곤 하는 것이었다.한시라도 웃지 않으면 입술에 가시가 돋는다는 마인드로 언제나 생글생글한 낯빛이다. 마주한 사람 누구든지 그 과장 없는 미소에 감염되고 만다. 각 강좌실을 오르내리는 장애인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부터 화기애애한 수업 분위기를 이끄는 것까지 선생님의 활동은 차분하면서도 구체적이다. 봉사하기엔 체력적 한계가 올 수 있는 연배인데도 끄떡없이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경청하는 회원들도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점자를 더듬어 선생님이 읽어 주는 대목과 보조를 맞추는 이가 있는가 하면, 큼직한 활자를 삼킬 듯이 얼굴 가까이 대고 읽어 내리는 이도 있고, 한 구절이라도 더 듣겠다는 듯 반듯한 자세로 선생님을 향해 귀를 한껏 여는 분들도 있다. 글을 읽고 쓰고 싶다는 열의가 그들을 그렇게 집중케 했다. 선량한 그들의 집념을 위해 선생님은 당신 가진 것 최선의 마음을 그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아침 뉴스로 유럽의 고위급 신부들의 비양심적이고 허영심 많은 처세가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을 접한 뒤라 더욱 선생님의 모습이 고귀하게 보였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애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무엇이든 마음에 없으면 진정성이 없고 진정성이 없으면 좋은 일을 하고도 손가락질 받는다. 임 선생님의 경우를 보면서 마음에서 우러난 모든 선한 행동들 덕에 사람들 낯빛이 환할 수 있고, 세상이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