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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을 뿐

학교 때 가정 시간, 가구의 조건에 대해 공부할 때였다. 침대의 길이는 180센티미터라며 그것을 교과서 아랫부분에 적어 넣으라고 선생님께서 말했다. 혹시라도 대입시험에 나올까봐 보충교재에 나오는 그런 내용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시절이었다. 몇몇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키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도 많은데, 왜 그런 쓸 데 없는 내용까지 적어야 하나. 시험에 이런 터무니없는 것이 나올 리도 없는데. 뭐 이런 불만들이었을 게다. 물론 `침대 길이는 180센티미터`라는 선생님의 지시사항을 적지 않고 군소리로 반기를 든 학생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다음 수학 시간, 선생님은 일명`빡빡이`라 불리는 숙제를 검사했다. 연습장 앞뒤로 빡빡하게 몇 장씩 수학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었다. 역시 몇몇 학생들은 일찌감치 숙제를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숙제를 해온 학생들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온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습관처럼 참고서 풀이 내용을 앞뒤로 빡빡하게 베꼈을 뿐이었다.이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사부일체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다. 좀 부당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이며, 나아가 애국 시민이라는 논리였다. 앞선 두 시간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뿌듯한 심정이 된다. 가정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이 불합리하고 부당한 건 인정하지만 그분들의 지시사항을 따르는 건 학생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뭐 이런 취지의 뿌듯함이다. 그들은 순간적이나마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라는 느낌마저 받는다.하지만 그날 오전 집단상담 시간에 그들의 개인적 가치를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손바닥 맞은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도덕적이라고 자부한 건 아니었다. 불합리한 상황을 따르게 되었을 때 그것에 적당한 응원이 실릴 경우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포장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비도덕과 도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인간적인`존재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는 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3

통제라는 시선

가끔 텔레비전 국제 뉴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지역에 주민들 소요 사태가 생긴다. 건물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고 거리엔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꼭 남의 물건을 약탈해가는 군상들이 있다. 무단이나 불법으로 취한 그 물건들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나날들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질서와 규범이라는 합의 체제 안에서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합의 체제에 조그만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비양심적 근성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만다. 위의 장면은 인간의 온전한 양심이 얼마나 유지, 발휘하기 어려운가를 말하는 좋은 예시가 되어준다.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인간 스스로 `통제`를 부르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인간의 행동 양식이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재해 앞에서, 또는 질서 유지가 전제된 공공 서비스에 혼란이 오면 인간 세상에는 약탈과 폭력이 급증한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혈안이 되고 안달을 한다.들킬 염려가 적거나 처벌 받을 확률이 낮을수록 일탈 행위에 가담하는 횟수나 강도가 높아진다. 멀쩡한 배기통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정비사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로 거스름돈을 덜 줬다는 걸 알고도 가게 주인은 그냥 넘기며, 거리에 휴지를 버리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강력한 통제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게 그 어떤 동물보다 통제나 강제된 규율을 싫어하는 게 인간이란 피조물인데 막상 통제가 없거나 그것이 느슨한 경우에 양심 불량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양심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기에 통제라는 사회적 규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양심 불량이 되는 인간 심리의 오묘함./김살로메(소설가)

2014-01-22

춥지 않아도 떨리는 것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디어 라이프`의 한 단편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이다. 가령 아래와 같은 이야기라면 앨리스 먼로의 그 선언에 충분히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핵 요양원의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토론토에서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열한 살의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의미 부여보다는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그곳이 지리멸렬하지만 숨통 틀 곳은 있다.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흉곽 수술을 전담하는 외과의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결혼 의사를 번복한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심정으로 나는 그곳을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기차 안에서 우연히 메리 일행을 만난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기차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언젠가 그와 마주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토론토 북적대는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덤덤히 얘기하지만 그곳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격한 울음도 없고,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지만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사랑의 감정이 시간이 흘렀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 한때의 사랑!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짐 앞에서 어느 한쪽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발뺌을 하게 되리라.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잊힐리가.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차안의 심정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현실이지 사랑했던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1-21

함께 가기

뒤꿈치가 갈라졌다. 부옇게 각질도 일었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불청 현상이다. 물기 부족한 뒤꿈치는 잎맥처럼 잔금이 서리고 부스스한 가루마저 날린다. 심한 곳은 골이 푹 파였다. 뒤꿈치가 거칠어지고 지저분해진 데는 짧은 시간만이 필요했다. 연화용 화장품만 제때 발라주면 되는데 귀찮다고 방치했던 것이다. 겨울에 대중탕에 가면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면도칼로 도려낸 뒤 그 돌에다 대고 문질렀다.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각질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번 목욕탕에 갔을 때는 전보다 더한 강도로 뒤꿈치를 문질러야만 했다. 그렇게 악순환이 이어졌다.젊었을 때는 그런 풍경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생기지도,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 모여 당신들 발을 거칠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노동하지 않고 가만있어도 뒤꿈치가 망가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이건 열심히 산 흔적이 아니라 단순한 노화 현상 중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게을러서 방치했던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하룻밤 새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연화제 화장품은 각질을 없애는 원리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겠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는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삶의 흔적이 내 것이 아닌 건 아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없애려 하는 것보다 달래서 함께 가는 게 더 합리적이다. 도려내고 문지른다고 근본적으로 내 삶의 각질이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 나아가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찾아오는 그것을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이물질이 내 안에 자리 잡게 된다. 삶의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라는 것을 말랑말랑해진 뒤꿈치가 말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20

슈퍼 안팎의 관계

인간관계에 이상적인 궁합은? 충고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관계일 때가 가장 이상적이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옳은 말은 아낄수록 좋다. 하지만 어쩌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서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더할 나위없다. 이때도 원칙은 될 수 있으면 바른 말은 아껴야 한다는 것. 정답은 이미 너나 나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옳은 말을 하는 친구가 아니라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모든 이로부터 옳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스트레스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빈틈없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충고의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나아가 제 말에 심드렁한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구와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어딘지 맹탕이고, 알고 보면 허당인 범부들에게 자중자애하거나 완벽한 사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흔히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면 나는 슈퍼에 갇힌 피의자이고, 상대는 투명 창을 사이에 둔 슈퍼 주인 같다는 느낌. 이것은 상대적인 감정이라 내가 피의자 역할일 때도, 상대가 피의자 역할 일 때도 있다. 물론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쪽은 아무래도 갇힌 자 입장일 때다. 왜냐면 슈퍼 주인 입장일 때는 사방 천지가 열려 있으니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갇힌 자 입장 일 때는 온통 벽에 가로막혀 있으니 답답하고 갑갑할 수밖에 없다.슈퍼 주인은 경찰을 부를 기회만 엿본다. 슈퍼 안 물건에 손댈 의향이 전혀 없던 피의자는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갇힌 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슈퍼 안 물건에 눈을 돌린다. 진열된 과자나 음료수를 먹기 시작해 슈퍼 안의 모든 물건을 해치우기에 이른다. 그때 슈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봤자 때는 늦다. 쌀 다 퍼먹은 독안의 쥐가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슈퍼 안팎의 관계일 때는 맹렬히 맞설 자신이 없으면 서서히 정리하는 게 맞다.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맞는 사람 만나기에도 생은 너무 짧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7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퍼뜩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서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히는 게 좋다는 것을 깨치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르고 싶다.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낸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절실한 나날이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6

소크라테스의 질문

누가 뭐래도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 `대화편`이다. 본격적으로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주인공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말하자면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1-15

존 롤스의 케이크

사람마다 처한 정의의 개념은 다르다. 부자는 부자의 논리에 따라, 빈자는 빈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모순을 없앤 정의의 원칙으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이를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장애자일지 건장한 사람일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계급장도 떼고, 지갑도 없앤 채 발가벗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합리적 생각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지녀야 한다. 존 롤스는 이를 평등의 원칙과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동동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라면 사회적·경제적인 차등 분배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원칙이다. 단, 불평등의 전제조건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보장될 것`을 강조한다.쉬운 예로 케이크를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존 롤스의 답은 이렇다. “칼을 잡고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 칼자루 쥔 자가 케이크를 많이 가져가는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가진 자들이 최소 수혜자, 즉 약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전제하의 차등 분배를 인정하겠다는 존 롤스의 이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인간의 선택된 능력이나 조건이 우연의 산물이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게 존 롤스의 생각이다. 필연이 아닌 시대나 상황이 만들어준 `칼자루 쥔 자`는 자신의 케이크를 약자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 때문에 누군가는 차디찬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찬바람 맞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1-14

이해와 소통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인문학 열풍을 타고 여기저기 좋은 강좌들이 넘쳐난다. 더 이상 의식주 해결만이 목적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 느꺼운 호사! 신나고 감사할 일이다. 내게 관심 있는 주제거나 입소문이 난 강사의 강의는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된다. 바지런을 떨어 강연장을 찾을 때도, 메모했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때도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경우는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게 된다. 내용에서 명약관화니 그 명성이 명불허전임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쩜 하나 같이 저리도 똑떨어지면서도 유쾌한 강의를 하는지. 사실 인문학 강좌라 해서 특별히 어려운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이나 학술을 위한 강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목소리다 보니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쉽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 인문학이란 게 결국 `소통과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 소통과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나온 예시들만으로도 훨씬 공감도를 높일 수 있다. 사람답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험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지 거창한 이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그래서인지 요즘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대중 강연에서 성공적 데뷔를 하는 일반인(?)들이 많다. 그 중 유명세를 타는 분 중에 김창옥 강사가 있다. 변변한 스펙조차 없이 `언변과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로 이 업계에 뛰어든 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미니 특강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어떤 격조 높은 인문학 강좌 못지않게 울림을 준다.앞에서 말했듯이 인문학은 결국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 학문이란 미로로 이끄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현실과 접목시켜 숨통 트게 하는 역할은 김창옥 같은, 이제는 전문 강사가 된 이들의 몫이 되어도 좋다. 노래길 보다는 말길이 트여버린 그의 쉽고, 유머 깃든 말들의 향연 앞에서 너무 편안하게 `위로`라는 선물을 받아가는 게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루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13

감정 동물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녔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동물이다. 이성이란 갑옷으로 아무리 무장을 해도 부지불식간에 감정이란 빨간 내복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고, 괴물은 본능을 관장한다. 그러면 그 중간인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는 순간적 능력이 뛰어난 동물일 뿐이다. 짐승은 아예 번민이 없고, 괴물은 타자로 하여금 번민을 유발할 때 인간은 그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능 억제 능력이 영구적이 아니라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빙자할 뿐 결코 이성적인 동물은 못 된다. `감정`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정당화하는 조작적 능력이 뛰어난, 이성적인 체하는 피조물일 뿐이다.그 책임은 하느님도 면키 어렵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조차도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당신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 피조물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이성보다 당신의 감정에 따라 그 잣대를 들이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기준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결코 완벽히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 하느님의 말씀은 솔직한 건지도 모르겠다.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흔히 `감정 섞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성이 항상 실천적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성적 판단은 결국 감정을 덜 섞는 타협으로 행동화될 뿐 이성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착각한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행불행을 관장하는 인간적인 단어, 그 이름 감정!/김살로메(소설가)

2014-01-10

풍경을 읊는 재미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을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김살로메(소설가)

2014-01-09

찔레엔 가시

찔레덩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보편적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게 핀 찔레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에 오줌소태나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이라면 빨간 찔레 열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식이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어른들이라면 그 효험을 상기하며 일찌감치 찔레뿌리라고 맞받아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찔레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찔레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꽃과 열매 뿌리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가시`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성가시고 위협적이라서 부러 피했다고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찔레의 화를 돋우는 일이다. 찔레 입장에선 가시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될 터이니. 질곡의 환경에서 제 한 몸 유지 보존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가시는 필요했다.쌍둥이 소녀가 엄마랑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찔레덩굴 앞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여긴 이상한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왜 그러냐고 엄마가 물었다. 흰 꽃을 둘러싼 가시가 성가시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대답을 놓치자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여긴 참 좋은 곳이라고. 엄마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묻자 동생이 답했다. 가시 사이에 흰 꽃이 피었지 않느냐고.긍정의 자세, 선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런 비유가 진부하거나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뭐든 한쪽 시선으로만 보면 교훈이나 길들이기 식이 되어 버린다. 좋은 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은 칼등에 우선한다. 칼날이 위험하다고 칼등으로 스케이트를 탈 순 없다. 마찬가지로 멧돼지 앞의 찔레는 제 가시가 꽃보다 우선한다. 가시가 따갑다고 찔레꽃으로 멧돼지를 막을 순 없다. 찔레에겐 가시도 필요하고 꽃도 필요하다. 찔레덩굴에서 흰 꽃만 보는 건 제대로 본 게 아니다. 숨은 가시의 의미까지 보듬어야 제대로 보는 거다. 약자에게 가시는 위협용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의 방식일 뿐이다. 왜 정치하는 사람들만 그걸 모를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1-08

나이 든다는 것

때론 피곤한 게 인간관계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만남은 미루고, 웬만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곳에는 끼려들지 않는다. 혼자인 자유는 얼마나 축복받을 만한가.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배달된 책을 순서 없이 읽다가, 베란다에 나가 풀죽은 로즈마리 화분에 물을 주는 것. 짜릿한 쾌감을 보장하는 이런 순간은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는 소소한 염증을 위무하고도 남는다. 접대용 멘트도 필요 없고, 정돈된 언행의 자기 검열에서도 자유롭다. 이보다 더한 기꺼움이 어디 있으랴. 누구에게나 현실은 힘겹고, 일상은 따분하고, 관계는 피로하다. 그건 내 안의 감옥 못지않게 타인의 감옥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계없는 일상이 가당키나 한가?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타인 없는 일상 또한 지옥인 것은 마찬가지다. 시게마츠 기요시의 `허수아비의 여름휴가`에 나오는 중년의 라이언 선생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라이언 선생 같은 사람에겐 결코 타인이 지옥이 될 수 없다. 아니, 타인이 이미 지옥인 것을 일찍이 알아채고 그것을 넘어선 경지를 보여주는 건지도 모른다.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먼저 오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회한에 사무치는 게 삶이라며, 산전수전 다 겪은 라이언은 타인의 감옥 너머 있을 타인의 천국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타인과의 꽃밭 누리를 알기에 타인의 감옥을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중년 삶의 이러한 성숙함에 대해 시게마츠 기요시는 느긋하게 풀어헤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감정의 절제도 배울 때이고, 그저 그런 내용의 별자리 운세를 보며 광분하기도 하고, 타협과 굴종의 얼굴로 지리멸렬한 일상을 견디기도 하며, 명퇴의 상처로 소심한 뒷방 가장이 되어 자식에게조차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허수아비 신세의 중년이지만 인간에 대한 희망마저 잃은 건 아니다. 이 모든 게 타인의 감옥을 천국으로 승화한 중년의 미덕이다. 라이언 선생이 말한다. 타인 없는 세상이야말로 감옥이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4-01-07

수많은 밥

내 행동과 말은 내가 한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궁궐을 지었지만 상대는 초가를 보고, 발 없는 말일수록 천리를 내달린다. 무지개란 진실은 하나로 뜨지만 그걸 전하는 자나 해석하는 자는 각자 다르게 말한다. 내 의도와 상대방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도는 하나이다. 꽃을 꽃이라고 말할 땐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은 삶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빗대 말하는 그것의 최종 목표도 결국은 진실 그 하나이다. 하나인 진실을 두고 말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자 각자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그 둘 사이엔 완벽한 심상의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다. 말하는 자는 돌려 말하고 이해하려는 자는 의중이 담긴 그 수수께끼를 제 식으로 해석한다.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마지막 신에서 송강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다. 명대사 중의 명대사로 뽑히는 이 말을 두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한 수로 그 의미를 해석했다. 형사 역할인 송강호가 유력한 용의자 역할이었던 박해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한 말이란 게 당시 관객의 대체적 정서였다. 지난 가을 영화 개봉 십 주년 행사 때 송강호가 그 대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았다. 자신의 의도는 터널 속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 하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의미로 한 애드리브 였다고 했다.`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돼도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라는 덧붙임 말이 눈길을 끈다. 내가 한 언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다. 내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이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이다.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06

아직 멀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어제 뜬 태양이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솟고,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그대로 겨울 나목에 스친다. 마음가짐이야 조금 달라졌겠지만 새해라고 별달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으니 갑자기 일상이 변할 리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한 것 없는 새 하루가 지나간다. 그저 누군가 신년 메시지를 희망차게 전할 때 다른 누군가는 절망의 장탄식을 호소하는 것,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점진과 급속이란 완급의 페달을 조절하며 우리 삶은 그렇게 나아간다. 가끔씩 잔잔한 파문 같은 뉴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단신 기사 하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생도를 퇴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도덕적 한계를 위반했다는 이유 등으로 임관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받은 피고가 일반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자 소를 제기했다. 위법 판결이 내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한데 학교 측 반응이 가관이다.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한 피고의 퇴학처분은 정당하다며 상고할 계획이란다.기사만 보자면 학생은 퇴학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다. 성폭행을 한 것도, 교내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주말 외박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퇴학당할 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주·금연·금혼 등 이른바 `3금 제도`위반자에게 내린 육사의 퇴교 조치를 인권침해로 규정해 개선 요구를 했다. 중요한 건 이것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성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규제하는 웃지 못 할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기본 인권까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온당한 것일까. 재판부의 말처럼 `국가가 내밀한 성생활 영역을 간섭하고 제재하는 건 개인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1-03

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안녕`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았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였다.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김살로메(소설가)

2014-01-02

한 해를 보내며

사람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말(글)로 내뱉는다. 왜 인간 곁에는 생각과 말이 있는 것일까? 근원적인 이런 질문에 골똘하다보면 어느 정도 답이 보인다. 번민 혹은 번뇌 때문이다. 쉽게 말해 고민거리가 생각과 말을 풍부하게 하는 일등 공신이다. 좋은 일이나 단순한 사실에는 그리 큰 사유가 필요치 않다. 그 자체를 즐기거나 인정하면 된다. 반면 나쁜 일이나 복잡한 사실 앞에서는 사유라는 필연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일례로 `생각 좀 하고 살아라.`라는 말은 심각한 상황에나 어울리지 단순명쾌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번민 있는 곳에 생각 돋고, 생각 끝에 말은 사용된다. 프랑스 작가 볼테르는 이것을 좀 더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사람은 오직 자신의 불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생각을,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말을 사용한다.`고. 올 한 해도 무사히 건넜다. 수많은 생각과 말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들머리에서 보듯 모든 생각과 말은 영혼을 잠식한다. 가벼워지고 담백해지려면 그 둘은 놓을수록 좋았다. 해서 올해의 내 개인적 화두는 `생각과 말에서 자유로워지기`였다.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건 수행자들에게나 가능한 것이고, 될 수 있으면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생각과 말의 감옥을 뛰어넘는 무심함에 노닐고 싶었다.그리하여 `마음 놓아버리기`라는 실질적 목표를 두고 무심히 강을 건넜다. `편히 나누고 누리자`라는 실천 요강도 마련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늘 맘에 새겼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이 세 가지 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 보시를 실천하려 애썼다. 마음에 주인이 없으니 걸림이 없고 머무름 또한 없는 그 경지! 하지만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그 단계를 맛 볼 것인가.일 년이 지난 지금, 내 마음의 주인은 여전히 나이다. 집착 없이 베풀고 소박하게 누리자, 는 내 모토는 실패한 프로젝트인 셈이다. 그래도 아주 실패한 건 아니다. 목표를 향해 갈고 닦는 것 자체가 중요하니 반은 성공했다고 위로해주고 싶다. 고마웠다, 2013년!/김살로메(소설가)

2013-12-31

자기합리화

자기합리화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심지어 원숭이도 자기합리화를 한단다. 심리학자가 여러 색의 초콜릿알로 원숭이에게 실험을 했다. 예컨대 조건이 같은 빨강, 파랑, 녹색 중 임의로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 빨강과 파랑 중 빨강을 골랐다면, 남은 파랑과 녹색 중에서도 녹색을 고르게 될 확률이 높단다. 파랑에 대한 거부감은 처음에 빨강을 골랐던 자신의 행동이 옳았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인 셈이다. 신념과 행동이 충돌했을 때 후자인 행동의 결과물로 우리는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춥고 귀찮아서 종량제 봉투에 그냥 넣어 버린다 치자. 이때 원칙과 내 행동 사이에서 갈등한다. 인지부조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우리는 자기합리화를 한다. 물기 있는 음식물이 아니라 사과껍질이나 썩은 당근 조각이니 괜찮을 거야, 옆집 아줌마는 나보다 더하던 걸, 등의 핑계를 갖다 댄다. 이미 한 제 행동을 바꿀 수 없으니 생각 자체를 바꿔서 두 상황을 일치시키려 하는 것이다.원숭이의 경우도 실은 파랑색 초콜릿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지만 일단 한 번 거절했기 때문에 그 행동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파랑색 초콜릿의 선택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합리화를 한다. 하지만 자기기만으로 말해도 좋을 그것에 반성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인지부조화 현상을 연구한 레온 페스팅거가 말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는 존재”라고. 인간은 합리를 추구하지만 합리에 온전히 가닿을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중용이 될 수 없는 그 합리는 어느 한쪽에게는 여전히 불합리할 수밖에 없다.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연이은 도발적 행보는 주변국에게는 당연한 불합리로 보인다. 한데도 그들 입장에서는 그것이 지극한 합리로 보이나 보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인 스스로를 그토록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인지./김살로메(소설가)

2013-12-30

실천하지 않는 욕망은

누구나 욕망한다, 그 무엇을. 하지만 아무나 그것을 위해 실천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개인 견해를 밝히자면 실천을 방해하는 두 요인은 단연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이다. 심지어 그 둘을 극복할 자신이 없으니 그것에다 겨울 담요 같은 포근한 자기합리화까지도 부여한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닐 거야. 다른 사람들도 이 겨울 지날 때까지는 그냥 빈둥거릴 거야. 당연히 그런 생각은 오산이다. 세상은 넓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신나게 달린다. 의지박약이나 의기소침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신뢰하고 제 미래를 확신한다. 머뭇거리며 시도하지 않았을 때의 실망감보다, 재지 않고 저질렀을 때의 성취감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자기긍정과 자기 확신, 그 대척점에 있는 의지박약과 의기소침. 이 모든 것은 습관의 산물이다. 동기부여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전자의 신념을 행동으로 축적한다. 자연스레 성과도 높고 만족감도 높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불투명한 동기부여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자일수록 후자에 얽매여 시간만 낭비한다. 내게 재능이 있을까. 난 왜 이 정도밖에 안되지. 이런 쓸 데 없는 고민으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자신을 너무 잘 아는 게 무기가 되어 스스로를 찌른다.자고로 장기판이나 바둑판에서는 구경꾼이 판을 더 잘 읽는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들은 구경꾼을 의식하지 않는다. 판을 아무리 잘 읽는다 해도 구경꾼은 구경꾼일 뿐이니까. 하지만 자기연민에 갇힌 사람들은 스스로 구경꾼이 되어 버린다. 주관적 당사자이자 객관적 관찰자의 역할 그 둘을 감당하자니 힘겨울 수밖에 없다. 주관적 뚝심으로 제 욕망을 밀고 나가기보다 객관적 공정성을 스스로에게 먼저 묻게 된다. 욕망이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욕망하는 자는 겸손하기 보다는 뻔뻔할 지어다. 스피노자의 통렬한 한 마디 -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그걸 하기 싫다고 되뇌는 것과 같다.”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욕망하기 때문에 번민하는 이 아이러니한 삶!/김살로메(소설가)

2013-12-27

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 `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