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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이 없으면

복도 끝 강좌실 앞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진다. 비 그친 뒤 더욱 선명해진 단풍잎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책 읽어 주는 임 선생님의 목소리이다. 조심스레 교실 뒷문으로 들어가 그 청징한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기분 좋은 숙연함이 밀려온다. 시각장애인들의 문예 활동 프로그램에서 만난 임 선생님은 그야말로 한결 같은 분이다. 약속된 시간보다 언제나 빨리 등장해 미리 온 회원들을 위해 예습 삼아 또박또박 교재를 읽어 주거나 책을 낭독해주신다. 그 모습을 가만 훔쳐보고 있노라면 공터 같았던 마음에 잔물결이 일곤 하는 것이었다.한시라도 웃지 않으면 입술에 가시가 돋는다는 마인드로 언제나 생글생글한 낯빛이다. 마주한 사람 누구든지 그 과장 없는 미소에 감염되고 만다. 각 강좌실을 오르내리는 장애인들의 손을 잡아주는 일부터 화기애애한 수업 분위기를 이끄는 것까지 선생님의 활동은 차분하면서도 구체적이다. 봉사하기엔 체력적 한계가 올 수 있는 연배인데도 끄떡없이 모든 일에 적극적이다.경청하는 회원들도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점자를 더듬어 선생님이 읽어 주는 대목과 보조를 맞추는 이가 있는가 하면, 큼직한 활자를 삼킬 듯이 얼굴 가까이 대고 읽어 내리는 이도 있고, 한 구절이라도 더 듣겠다는 듯 반듯한 자세로 선생님을 향해 귀를 한껏 여는 분들도 있다. 글을 읽고 쓰고 싶다는 열의가 그들을 그렇게 집중케 했다. 선량한 그들의 집념을 위해 선생님은 당신 가진 것 최선의 마음을 그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아침 뉴스로 유럽의 고위급 신부들의 비양심적이고 허영심 많은 처세가 구설수에 올랐다는 것을 접한 뒤라 더욱 선생님의 모습이 고귀하게 보였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을 위해 애쓴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무엇이든 마음에 없으면 진정성이 없고 진정성이 없으면 좋은 일을 하고도 손가락질 받는다. 임 선생님의 경우를 보면서 마음에서 우러난 모든 선한 행동들 덕에 사람들 낯빛이 환할 수 있고, 세상이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07

좁쌀 속 우주

창 너머로 보이는 공원에는 국화가 한창이다. 노랗거나 붉은 꽃무리는 드넓은 정원을 꽃이 불처럼 뒤덮었다. 가을꽃에 겨운 사람들의 움직임이 원경으로 보인다. 한껏 국화향에 취해도 좋을 그들의 품새가 어쩐지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성급한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처럼 일군의 무리들이 이리저리 휩쓸린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아마 `꽃보다 인증샷`에 몰두하느라 그럴 것이다. 꽃놀이가 목적이 아니라 꽃을 상대로 인증샷이 필요한 것이 그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은 이제 꽃 앞에서도 느긋할 여유가 없다. 먼 길 돌아온 `내 누님 같은 꽃` 옆에서도 맘껏 제 흥을 누리지 못하는, 빡빡하고 다급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느긋함과 평정심은 점점 우리 일상과 멀어져 가고 있다. 대신 보여주기 위한 짬, 위안이라는 말을 위로하기 위한 여유만이 우리 시간을 지배한다.자신을 들볶지 않고, 대상을 관조하는 삶이 필요하건만 쉽지가 않다. 닦달하지 않고 담백하게 제 일상을 꾸리던 황상이 떠오른다. 정약용의 제자였던 황상은 말년에 `일속산방`을 마련했다. `좁쌀 한 톨 같은 작은 집`이란 뜻의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선비의 삶을 꾸렸다. 세속이 욕망을 채우며 살라고 채근할 때 진정한 선비였던 그는 담백한 유유자적을 실천했다. 산수가 아름답다는 그의 기준은 큰 강과 산이 조화로운 곳이 아니라 좁은 시냇물과 자그마한 동산이 어우러진 곳을 말한다. 절벽이 기우뚱하고 바위 몇 점 있는데다, 눈을 환하게 열 수 있는 골짜기라면 그에겐 좋은 땅이었다. 그곳에 남향집을 지어 책꽂이 두 개에다 족할 만한 책을 꽂는 일 그것만으로도 그에겐 존재이유가 되었다.소박하고 느긋하게 산 황상의 삶에서 좁쌀 속 우주론을 발견한다. 급할 것도 아등바등할 것도 없는 세상이건만, 현실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핑계로 급하게 세파에 휩쓸린다. 황상은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좁쌀 속에 우주가 있나니, 작고 소박한 것에서 여유를 찾아라. 느림과 한가로움의 미학을 마음결부터 심으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3-11-06

다시 백석

통영 가는 길이 설레는 건 백석 시인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전에 통영을 찾았을 때는 수많은 여행 목적 중에 백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통영 출신이 아닌 백석에게 미처 관심을 두지 못할 만큼 다른 예술인들의 흔적과 볼거리로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통영 천희(처녀)`란`을 사랑한 시인이 통영과 관계된 시편을 여럿 남겼다는 사연을 안 이상 여행의 의미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의 아이돌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모던 보이` 백석은 시도 잘 썼지만 로맨스 또한 다양했다. 그 중 통영에 관한 시편들에 나타난 시인의 호흡법은 애절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로서는 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백석이 `란(蘭)`을 만난 건 친구 결혼식 피로연에서였다. 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절, 통영 출신 동료 기자 신현중에게서 그녀를 소개받았다. 란을 만나러 세 번이나 통영을 방문했지만 끝내 불발되었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간 마지막 방문에서는 여자 집안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몇 개월 뒤 란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상대는 다름아닌 신현중이었다. 시인의 일방적 사랑의 대가치곤 잔인한 결말이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의 사랑 덕에 독자는 그의 시를 원 없이 누리게 되었다.명정골 정당샘을 향하는 길목에 충렬사 계단이 있다. 그 돌계단에 앉아 백석은 날이 저물도록 사랑하는 이를 기다렸다. 혹시나 우물가에 빨래하러 오는 천희들 가운데 란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발된 사랑의 통점으로 시인은 `통영`이란 제목의 시 세 편과 `남행시초` 연작 등을 남겼다. 못 이룬 사연으로 시인은 시를 남겼고, 훗날의 독자는 시간을 더듬어 제 맘에 단풍길을 낸다. `흰 바람벽` 앞의 시인이 되어 한없이 애잔해지는 것이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05

웃는 연습

멀리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중고서점에 들렀다. 말이 중고서점이지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을 만큼 품질 좋은 책들로 넘쳐났다. 드넓은 서가를 오가며 눈요기하는 재미는 밖에 나가 단풍 구경하는 것 못지않았다. 눈에 띄는 대로 우선 책 두 권을 샀다. 한 권은 임상 진료에 관한 에세이인데 평소 구하고 싶었던 분야였다. 의사, 간호사, 환자 및 그들의 보호자들이 겪은 임상 경험을 풀어놓았는데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있었다. 삶의 뿌리로 내려가고 내려가면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환자가 되었든 의사가 되었든 아니면 그 누가 되었든 그들 이야기의 본질은 삶의 진정성에 닿고자 하는 자기 고백이자 노력에 관한 것이었다. 고통과 공감에 관한 그들의 에세이에는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고 있고 그 방식마다 고유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 나타나 있었다.다음 한 권은 세상을 아름다운 잣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한 남자의 일상에 관한 거였다. 일 하는 틈틈이 만나는 사람과 풍경에 관한 보고서인데 기대치 않았던 힐링을 선물로 주는 그런 책이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을 만큼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이 나를 압도했다. 그러고 보니 두 권 다 삶의 뿌리에 가닿으려는 사람들의 진정성 어린 시선에 관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전자가 고통과 번민을 풀어놓을 때, 후자는 환희와 미소를 노래한 것이 다르다.그 둘 다 삶의 실체들이다. 말하자면 고통을 발판으로 환희를 노래하는 마음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를 볼 때면 한없이 웃어 보이려 합니다. 이 또한 역시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지요. 낯빛은 환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하며, 입 꼬리가 솟는 것은 항시 온화한 마음을 찾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한 흔적입니다.` 이를테면 `통영은 깊다`에서 삶의 근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저렇다. 고통이든 환희든 `노력하고 노력한 흔적`으로서 웃음을 연습한다는 그 시선에 자꾸 마음결이 가게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04

베푸는 심리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빚지는 걸 몹시 싫어한다. 여기서 빚이란 물질적, 정서적 둘 다를 말한다. 빚질 일도 있고, 베풀 일도 많고 그런 게 인지상정일 터인데 혹시라도 민폐를 끼치거나 신세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벌써 마음끝자락에서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성격 좋게 빈대 붙거나 남의 호의를 호방하게 받아들이는 데는 익숙지 못하다. 굳이 따진다면 호의를 베푸는 쪽이 훨씬 맘이 편하다. 남이 내게 호의를 베풀면 그에 걸맞는 보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떻게 보면 갑갑한 부류이다. 이런 사고 형성의 배경엔 나쁘거나 아픈 기억들이 숨어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청춘 시절,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주변인은 용돈이 넉넉한 친구들이었다. 학업과 관계되는 곳 말고 `사교적 목적`으로 용돈을 깜냥껏 부릴 수 있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부모의 경제력 덕에 궁핍을 모른 채 마냥 해맑을 수 있는 그들의 느긋한 천진성을 질투했다. 가난한 우리를 대신해 스스럼없이 커피값이나 술값을 낼 수 있는 그 무덤덤한 여유가 신기하게만 보였다. 저토록 찬란한 제스처라니! 꿈에서라도 내게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자문하곤 했다.시간은 흘렀다. 돈 없어 고개 처졌던 청춘들도 결혼을 하고 저마다의 일가를 이루었다. 적어도 돈의 노예에서 벗어나 심리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맘만 먹으면 누구에게나 소박한 호의를 베풀 수 있게도 되었다. 누가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베풀고, 민폐를 끼치기 전에 먼저 도움 줄 수 있는 것, 그 정서적 쾌감을 만끽할 수도 있게 되었다.그랬다.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그것은 갑의 입장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호의를 받는 쪽이면 빚진 마음을 안게 돼 불편하지만, 호의를 베푸는 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맘의 여유를 느낀다. 수전노가 아니라면 베푸는 자의 쾌감은 그 어디에 비할 바가 아니다. 빚지는 자, 을이고, 베푸는 자, 갑이라는 심리적 경험을 거쳤기에, 그 때문에 자신의 지갑을 열겠다고 서로 실랑이를 벌이는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1-01

만날 사람 다 만나면

박경리 선생 일대기를 읽는 밤, 뜬 눈으로 지샜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토지`는 거저 나온 게 아니었다. 작가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안녕과 평화를 친구 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위대한 작가는 될 수 없다는 걸 알겠다. 좋은 사람이 되어 무난한 한살이를 사는 것보다 행복한 것도 없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고뇌 가득 찬 작가로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뚝 선 그날까지 선생에겐 편할 날보다 험한 날이 더 많았다. 부성(父性)으로부터 내침을 당한 어린시절, 너무 짧은 결혼 생활과 남편의 사망, 어린아들의 죽음, 병마와의 싸움, 사위의 감옥생활 등등 한 여자로서 겪어야 할 온갖 고통을 선생은 친구처럼 곁에 두었다.일상인으로선 감당하기 힘겨운 시간들이었겠지만 그 고통의 총화 덕에 선생은 작가로 거듭났다. 잔인한 말이지만 그 덕에 독자들은 평생 충만하게 된 셈이다. 살아생전 선생이 즐겨하지 않은 것 세 가지는 여행, 쇼핑, 기계사용이었다. 글 쓰는 사람, 더구나 많은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는 소설가는 글 이외의 것을 생각해서는 그 뜻을 이루기 어렵다. 원고지 십만매 채우기는 여행과 쇼핑에서 멀수록 가깝기 때문이다. 선생에게 유일하게 허용되는 문명의 이기는 몽블랑 만년필과 선풍기 두 대였단다. 힘들 때마다 사마천을 생각하며 썼다는 선생의 올곧은 작가정신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끌어안고 가는 불편함이 아니라 버릴 수 있는 홀가분함을 찬미할 수 있는 노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대부분 회한으로 어룽진 삶을 회고할 때 선생은 편안히 놓고 가는 삶을 노래했다. 구비 친 한 생을 꽃 피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다. 한 땀 한 땀 수놓았던 선생 행보에 아우라가 느껴지는 한 말씀, `오라는 데 다 가고 만날 사람 다 만나면 글은 언제 쓰노?` 굳건한 선생의 기상 앞에서 숙연한 아침을 맞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31

작은 몸짓 큰 관심

모든 사연은 작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거창한 성과나 큰 깨달음의 시초도 밀알 같은 소박함에서 출발한다. 삶 이래로 숱한 우연이 우리 곁을 스쳐갔다. 그것들 중 제 삶의 물줄기를 바꿀만한 순간의 경험과 환경의 영속성이 모여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지나치게 소심하고 주변머리 없는 아이가 있었다. 존재감 없는 그 아이는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 눈에 띄고도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마음 같지 않은 아이의 몸 신호는 언제나 `나도 저 아이들처럼 나를 말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어느 한 해 다행히 아이는 어질고 인내심 많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눈에 띄게 자신감 없는 아이를 위해 부러 발표를 시키고, 틈만 나면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질적, 환경적 제 한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성정이 쉽게 바뀔 리 없다는 걸 깨친 선생님은 방법을 달리했다. 의식적으로 뭔가 하도록 이끌기보다 그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우연히 만들기 시간에 아이의 손재주를 발견한 선생님은 지나치듯이 한 마디 칭찬을 했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심함을 가장한 칭찬 세례를 이어나갔다. 우물쭈물하고, 민숭민숭하기만 한 아이에게 맞춤한 접근 방식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제게 손재주 하나는 있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훗날 전통옷 만드는 일로 일가를 이루었다.제 소심함에 겨워 떨었던 몸짓을 섬세한 눈으로 지켜봤던 선생님을 추억하는 그 아이가 말한다. 무심한 듯한 선생님의 적극적인 낯빛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여전히 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재주가 없지만 여문 손끝으로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이가 강조한다. 모든 시작은 우연하고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제 작은 몸짓을 눈여겨 봐주는 세상 모든 이가 스승이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3-10-30

무좀 단상

겨울이 코앞인데 무좀이 도졌다.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가 찢어져 따끔거린다. 오래 전부터 각질이 벗겨지는 정도의 무좀증세가 있긴 했지만 온 여름내 멀쩡하던 발이었다. 맨발에다 샌들을 신던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어 무좀균이 숨어 있었는데 간절기를 맞아 양말을 신는데다 신발마저 부츠로 바뀌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제 역할을 잊고 있던 무좀균이 저 좋다고 활개를 친 것이다. 다행히 약을 발랐더니 금세 가라앉는다. 며칠 무좀약을 바르면서 이런저런 단상이 스친다. 무좀균은 박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 삼아도 좋을 위안이라고. 우리네 소소한 일상 자체가 무좀 앓는 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시련은 무좀 앓는 발에 비유할 수 없겠지만 웃고, 울고, 떠들고, 마시는 가운데 생겨난, 감당할 만한 모든 고충을 무좀균에 비유하고 싶다.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비의(秘義)는 가지고 산다. 아픔이나 상처의 옷을 입은 그것은 평소에는 비활성화 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있으면 표면으로 드러난다. 통풍에 문제가 없을 땐 잠잠하던 무좀균은 바람 쐬어 주지 않고 꼭꼭 싸맬 때 스멀스멀 피어나 발가락 사이를 갉는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뭔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에 무좀균이 생긴다. 그때 위로라는 약을 발라 상처를 달래는데 금세 낫는다. 그렇다고 무좀균이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들었을 뿐인 이때의 무좀균은 발이 발로 단련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경고 장치로 기능하니 그대로 두는 것도 괜찮다.그 어떤 약점에도 노출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산다는 건 환희라는 날개옷을 걸칠 때보다 고통이라는 갑옷을 두를 때가 더 많다. 수고로운 갑옷의 시간을 무좀 앓는 발이라 쳐두자. 그 성가신 쓰라림이 가슴 한켠을 찢어대기도 하겠지만 그건 모두 견뎌낼 만한 것들이다. 따라서 박멸할 필요도 없다. 혹시라도 완전히 없애버린 평범한 상처 그 자리에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나 번민이 들어찬다면 그보다 낭패스런 일도 없을 것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3-10-29

무급 노동

노동 시장이야말로 수요 공급의 법칙에 영향을 받는다. 일할 뜻이 있는 자는 많은데 일할 곳은 한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수요량보다 공급량이 넘치니 노동 가치는 당연히 떨어진다. 정책적으로 아무리 일자리 창출을 활성화한다 해도 노동 시장 구조 상 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일자리 프로그램 과정을 마쳤다고 바로 원하는 곳에서 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절실한 그들이 궁여지책으로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일단`봉사자`로 관련 일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유급 노동을 원하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않으니 봉사자 또는 재능 기부자 신분으로 일을 시작하며 후일을 도모한다. 봉사하다 보면 원하는 일자리가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들을 천사표 노동현장으로 내몬다. 운이 좋아 일거리를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일자리 얻기를 위한, 어찌 보면 불순한 동기의 봉사였기 때문에 그들이 받는 마음의 상처도 깊다.봉사라는 말에는 `타자를 향한 자발적 희생 의지`가 포함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생계유지나 현실적 필요에 의해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봉사가 그 일차적 목적이 될 수가 없다. 생업이 우선 목표이다. 그들에겐 남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을 미덕보다 돌봐야 할 가족을 위해 자신의 노동 가치를 보상해줄 사회가 더 절실하다. 어느 누구도 순수한 봉사를 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다.애석하게도 노동 공급이 넘치는 현실이다 보니 이름도 고상한 다양한 형태의 무급 노동이 넘쳐난다. 스펙과 경험을 쌓는다는 명분하의 일반 회사 무급 인턴사원에서부터 시민단체나 공익기관에서 일하는 무급 봉사자들, 나아가 개인적 차원의 관련 직종 무급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지난한 근로가 사용자들에 의해 악용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대체될 수 있는 또 다른 노동인력이 기다리고 있는 한 허울 좋은 노동 울력은 계속될 것이다. 절절하게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을 직간접적인 무급 노동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8

환기된 상처, 트라우마

예를 들어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에서 폭력에 노출된 어린 제제를 격하게 공감해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만의 장미꽃을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했던 `어린왕자`의 심적 번민이 제 것인양 안타까워하는 것 등은 일종의 트라우마다. 경험의 유사도가 높은 장면에서 독자의 기억은 쉽게 파문을 일으킨다. 터진 포대에서 밀가루가 흩어지듯이 아픔의 분자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개별적으로 축적된, 이러한 통점의 체험들은 유사 경험을 통해 기어이 심적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프로이트의 상담 내방자 중에 엠마라는 부인이 있었다. 그녀는 광장 공포증 환자였다. 엠마는 특히 옷가게에 들어가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를 열두 살 때 옷가게에 들렀을 때 점원들이 자신의 옷을 보고 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게를 도망쳐 나온 기억이 있는데 왜 그랬는지는 스스로도 알아내지 못했다. 이때 프로이트는 엠마의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사건 하나를 알아낸다. 여덟 살 때 어떤 가게에 들어갔다가 주인에게 추행을 당한 경험이다. 웃으며 옷 위로 추행하던 주인의 기억을 엠마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여덟 살은 성 정체성에 대해서 신념을 갖기엔 어린 나이였기에 그녀에게 그 사건은 애매한 그 무엇으로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잠재된 그 은폐 기억은 유사 사건을 만나 엠마의 의식을 괴롭혔던 것이다. 엠마에게 성추행 사건과 옷가게 사건은 유사점을 지닌다. 둘 다 옷과 관계있는데다 둘 다 사람들이 웃었다. 유사한 상황이 생기면 엠마는 최초의 나쁜 기억인 여덟 살 때 일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단순한 나쁜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지는 않는다. 최초 경험이 강렬하거나 나쁜 경험이 누적되면 잠재된 마음병이 된다. 그것은 유사 경험을 만나 뭉근한 아픔이 되어 한 영혼을 괴롭힌다. 그것이 트라우마다. 트라우마 없는 삶은 없다. 슬프거나 아픈 그것이 단단한 환희로 거듭날지 지속되는 부정의 정서로 남을지는 개별자가 처한 상황이나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5

알바트로스적 전환

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다면 내 개인사엔 `알바트로스적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어리바리한 나에 비해 독서로 무장한 후배는 세상을 향한 시니컬한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그미는 랭보와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등을 좋아했는데 치기로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 그런 시인들의 성향을 좇았다. 보들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시니컬한 눈으로 사물을 대했으며 세속적인 부르주아 근성을 혐오했다. 그미가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편안한 정신이었다. 그미는 고매하고 피로한 지적 노동자를 자처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고, 선하고, 밝고, 맑고, 소박한 것이어야 온당했다. 추하고, 악하고, 어둡고, 흐리고, 화려한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들이었다. 이유 불문한 당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후배의 사고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사유의 빈곤과 약점을 포착하고 세뇌하는 그미의 눈썰미가 불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상을 선명하고 명쾌하게 보는 그미의 통찰력이 부러웠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온 우주를 꿰뚫는 듯한 그 모습을 나는 높이 샀고 내 사유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너무 남다르고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보들레르의 시`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던 그미는 그야말로 고독한 큰새였다. 거대 알바트로스도 선원에게 잡힌 신세면 고역을 면치 못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거대 날개를 질질 끌어야 하고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기도 한다. 고매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보들레르는 시인인 자신의 운명으로 치환했겠는가. 지상으로 내몰린 남다른 생각의 소유자들은 운명적 고난자들이지만 타고난 개척자이기도 하다. 우뚝한 새가 평범함의 지상에 유배당했을 때 겪을 가혹한 정신의 웃자람을 그미는 태연히 즐겼고 나는 그것을 부러워했다.보들레르 시를 다시 꺼내 읽는 밤, 자꾸만 옛 생각이 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4

독립의 방해꾼 모성

집 떠난 자식은 독립한 것일까? 학업, 취업, 결혼 등의 이유로 자녀들은 일정 기간이 되면 부모로부터 떨어져나간다. 누가 봐도 독립이라 봐줄 만하지만 실은 이것은 물리적이고 현상적인 독립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의 홀로서기와는 한참 멀다. 아침저녁으로 체감 온도가 급격히 낮아진다. 간절기 겉옷이 필요할 터인데도 자식에게선 소식이 없다. 외로이 옷장에 걸린 자식의 외투를 보며 맘이 짠해진 엄마는 전화를 건다. 수업 중인지 받지 않는다. `옷 가지러 안 와?`문자를 보낸다. 두어 시간 지나도 답이 없다. `두꺼운 옷 갖다 줄까?` 그제야 답이 온다. `걱정 마세요. 좀 춥지만 견딜만해요. 주말에 가지러 갈게요.`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몹쓸 모성은 이제 `좀 춥지만`이란 자식의 문자에 자동으로 과민 반응하게 된다. 여간 추워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닐 것이라며 외투 없는 자식의 저녁 시간을 자청해서 자책한다. 그 밤에 외투를 들고 쫓아갈 판이다.정서적, 객관적으로 평정심을 잃지 않는 아버지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주책을 떠`는 이런 모성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견딜 만하다니 주말까지 참으면 될 것이고 그도 아니게 급하면 한 벌 사 입겠지. 다 큰 녀석이 제 앞가림도 못할까봐 걱정이냐고 짐짓 무관심을 가장한 위악을 떤다.흔히 볼 수 있는 집안 풍경이다. 다정도 병인양이라고 엄마들의 자식 걱정은 끝이 없다. 가만 보면 자식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분리될 준비가 되어 있거나 무덤덤한데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부모, 그것도 엄마 쪽이다.엄마가 노심초사하는 것만큼 자식들은 다급하지 않으며 엄마가 애면글면하는 것만큼 자식들은 힘들지도 않다. 자식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빨리 크고 앞서 간다. 뒷북치는 건 엄마 쪽이고 독립 못하는 것도 자식이 아니라 엄마다. 자식의 정서적, 심리적 홀로서기를 막는 가장 큰 적은 엄마 스스로다. 자식에게서 한 발자국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엄마, 그게 모성의 속성인 걸 어쩌란 말이냐./김살로메(소설가)

2013-10-23

모창의 품격

`히든 싱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다. 프로 가수와 아마추어 실력자들이 출연해 그 가수의 히트곡을 불러 원 가수를 가려내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부스 안에서 얼굴을 숨긴 채 똑 같은 조건으로 노래를 부른다. 한 사람이 한 곡을 다 부르는 게 아니라 한 소절씩 돌아가면서 부르기 때문에 목소리만으로는 원 가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가수와 경합할 출연자들 모두 준비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노래에 소질이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원 가수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숨소리와 발성법까지 완전히 익혔다. 어렸을 때부터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연습하고 연습했다. 이런 프로그램이 생길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그저 노래가 좋아서 열심히 한 우물을 팠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목소리로만 승부하고 얼굴을 끝내 내밀지 않는다면 원 가수보다 훈련된 아마추어 가수가 더 원 가수 목소리처럼 판정단에게는 들릴 수 있다. 일반출연자들의 충분한 연습량은 전성기 때의 목소리를 되찾기 힘든 가수의 절정기 목소리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 가수에게 불리한 그런 조건을 감안해서 경합 중반 이후에는 갇혀 있던 부스에서 나와 가수와 출연자들은 얼굴을 공개한다.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익힌 뒤에는 원 가수의 목소리를 맞히는 게 한결 낫다. 그래도 연습과 훈련으로 무장한 아마추어 출연자들을 쉽게 앞서지는 못한다. 이제껏 아슬아슬하게 원 가수가 진짜 원곡의 목소리 주인공으로 살아남긴 했다.한데 어제 신승훈 편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내로라하는 목소리를 지닌 그이보다 더 신승훈답다고 판정단이 한 출연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신선한 감동이었다. 가수는 출연자를 배려해 자신을 알리려는 그 어떤 무리수도 쓰지 않았고 출연자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했다. 한 우물을 파는 출연자의 집념도 대단하고 그 집념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프로 가수의 미소도 아름답게 보였다. 치열하게 준비한 자들, 그 모창의 품격은 숭고해 보이고 지켜보는 마음은 숙연해지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2

경험의 타인

위대한 철학자의 큰 사유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다.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한다. 한 사람의 디테일한 1퍼센트가 그 사람의 숨겨진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 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돌렸다.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사유에 언제든지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언제나 공감한다. 그의 사유를 한마디로 풀어 쓴다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감이 곧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어릴 적 체험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이후 한 번도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개인적 전쟁 체험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존재론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개별성과 고유성은 무시하고 타자를 집단 속에 묶으려 하는 그 방식에 염오증이 일었다. 이런 통찰의 아픈 뿌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내 영향권 아래 두고 맘대로 부리고자 할 때 국가주의, 전체주의 같은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긴다. 타자가 곧 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런 위험한 사고의 틀 안이라면 전쟁도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의 경험이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선명한 계기가 되었다.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이다. 나 이외의 것을 인정하고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무, 그것을 레비나스는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윤리학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21

점자(點字)

손가락으로 글자를 더듬는 그들의 품새에 자못 숙연해진다. 숨겨둔 보물을 어루만지듯 오래 못 만난 자식 얼굴을 보듬듯 손끝에 모은 촉감으로 한 자 한 자를 더듬고 있었다. 그들에게 글자는 눈으로 읽는 게 아니라 손끝으로 느끼는 그 무엇이었다. 점자 읽는 모습을 처음 봤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문예교실에서였다. 내가 넘긴 교재는 점자책으로 바뀌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글자를 손끝으로 읽는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한 분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하고 조심스레 점자에다 손을 대어 보았다. 오톨도톨한 것이 손끝에 잡히는가 싶더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야릇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그간 내게 글자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손끝으로 느낀다는 건 막연한 감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을 해결하고 내게 주어진 일상을 꾸리기에도 급급한 날들이었다. 나와 다른 방식의 삶이 다양하게 존재하고 때론 그 방식이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다. 이참에 그들을 만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에 대한 열정과 내공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편함은 그들에게 가서 적극적 긍정의 에너지가 되었다.한결같이 봉사하는 이들의 모습에도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사람들부터 조금 보이는 사람들까지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이부터 읽지 못하는 이들까지 장애의 정도가 다른 그들 곁에서 봉사자들은 청아한 목소리가 되어주고 다정다감한 손발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순간의 깨침이 오기도 했다. 그들에게 뭔가를 줘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이 무엇이든 끄집어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마련해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갑갑하고 지난했던 그들에게 필요한 건 일방적인 누군가의 말씀이 아니라 그들 얘기를 펼칠 수 있는 넓은 마당이었다. 잘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그들에게 마음밭 한 곁을 내어주고 싶다. 점자책을 해독하는 그들의 손끝에 내 마음도 만져질 수 있다면./김살로메(소설가)

2013-10-18

채찍과 당근

누구나 칭찬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칭찬만을 바라는 건 아니다. 거짓 칭찬은 안 한 만 못하다. 예를 들면 상급반 글 모임이 있다 치자. 쌓아온 글쓰기 연륜만큼이나 그들은 글을 보는 안목 또한 높다. 어떤 글이 매혹적인 것이며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인지도 잘 안다. 안다는 것과 쓰는 행위는 별개라는 것까지도 꿰 차고 있어,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안다. 해서 제 글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그 글에 대한 타자의 충고를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일 줄도 안다. 왜냐하면 진심어린 도반들의 한마디야말로 제 글을 살찌우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축적된 여러 활동을 통해 깨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료나 스승이 제 글을 칭찬해주면 기분 좋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쓴 소리를 한다고 특별히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약점을 본인이 잘 알고 있고, 그 약점을 넘어서려면 주변의 채찍이 꼭 필요하다는 걸 서로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하지만 이 경우는 어느 일정 수준에 도달한 부류의 예이고 입문자의 경우인데다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데 옆에서 충고랍시고 누가 한 마디 한다면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럴 수 있다. 글에 대한 객관적 눈이 뜨이기 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충고도 고깝게 들린다. 그 상황에서는 채찍의 방식 보다는 그가 원하는 당근의 방식을 취한 채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단련된 고수는 벌점을 달게 받지만 순수한 입문자는 가산점을 원한다. 고수가 당근을 겸연쩍게 여기기는 쉽지만 입문자가 채찍을 감당하기는 버겁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고수보다는 하수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당근과 채찍은 달리해야 하고, 달콤한 채찍도 충분한 당근이란 뿌리가 있은 뒤의 일임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17

시간 여행

시간 여행에 관한 영화는 많다.`백투더퓨처`, `시월애`, `프리퀀시`, `나비효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등 잘 알려진 것 말고도 수많은 작품이 있을 것이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영화의 계절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가을 정서와 어울리는 영화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추천하고 싶다. 소녀 취향적이고, 감성에 호소하는 이런 부류의 영화를 체질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담백한 것을 선호하는 내가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해던가, 가족 여행 중 차 안에서 딸아이의 권유로 접하게 된 영화였다. 별 기대 없이 봤는데 어느 순간 장면 하나하나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건 뭐지?`하는 야릇하고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신선함의 기운이었다. 감성적인 코드의 이야기도 다큐멘터리 식으로 이해하는 부류인 내가 온전히 가슴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나이 들면 유치해지고 느슨해진다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20년의 시간차를 두고 샹륜과 샤오위는 첫사랑을 앓는다. 그들을 연결해주는 매개물은 피아노이다. 샹륜은 피아노 소리를 따라가 샤오위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때 샤오위가 연주한 곡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는 셈이다. 그 비밀은 샤오위가 샹륜보다 이십 년 전의 사람이라는 것. 피아노를 통해 서로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지만, 샤오위로서는 자신이 처음 본 사람과만 만날 수 있다. 샤오위가 볼 수 있는 첫 대상이 늘 샹륜이라는 것이 보장되지 않기에 그들의 사랑은 오해와 안타까움의 연속이다.잘 알려진 `피아노 배틀` 장면은 연주의 예술성을 떠나 영화 자체에 몰입하게 하는 큰 동력이 되어준다. 쇼팽의 연습곡과 왈츠 등의 연주가 애틋한 시간차 만남의 매개물로 활용되는데, 격정적으로 빨라지는 연주 장면은 내재된 첫사랑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 같아 관객도 덩달아 호흡이 가빠진다. 가을 깊어질수록 순정한 가슴이 요청하는 격정의 한 순간에 초대받고 싶어진다. 그때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소년소녀처럼 시간 여행을 떠날 수만 있다면!/김살로메(소설가)

2013-10-16

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관계의 호불호는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내게 와선 비호감이 되는가 하면, 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지만 타인에겐 비호감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정답도 없다. 이것을 인정하면 관계의 피로감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한데도 인정의 욕구가 있는 인간은 모든 관계에서 환희만을 맛보기를 바란다. 해서 어색한 관계를 만나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하고 번민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니 가만 내버려 두면 된다. 첫인상에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는 찰나에 결정된다. 시간을 십 분이나 한 시간 연장시킨다고 그 찰나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의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감정을 유지하느냐 폐기하느냐는 상호보완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 근접성, 유사성, 친숙성, 상호성 등을 언급한다.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더 친해질 가능성이 높고,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해도 다가서기 쉽다. 원래 성격이 상냥하고 친밀한 사람이면 호감도가 높아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상호성이 사람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합당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관계는 교감 즉 서로 주고받음으로 형성되는데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 발짓, 눈빛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상대가 더 잘 안다. 내가 느끼는 만큼 상대도 느낀다.한 번 형성된 나쁜 인상은 다른 좋은 단서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내게 거슬린 언행을 하면 내 눈과 마음은 객관성에서 멀어진다. 내 프레임 안에서 상대는 부정의 영역에 머물고 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번 잘못 엮인 감정은 재고의 여지마저 꺾어놓기도 한다. 그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면 가만 두면 된다. 때론 인위적인 의지보다 자연스런 불편함이 훨씬 인간적일 때가 있다. 모든 이를 친구 삼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노력도 없을 테니./김살로메(소설가)

2013-10-15

글렌데일과 소녀상

LA 인근에 글렌데일 시가 있다. 지난 7월, 일본군 위안부의 비극적 사실을 되새기기 위해 그 도시의 시립 공원 한 편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모 한인단체 주도하에 시의회의 승인도 얻었다. 한데 이제와 데이브 위버 글렌데일 시장이 딴 소리를 한단다. 한 보수 우익 일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말벌집을 건드렸다, 소녀상을 세우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위버 시장은 소녀상 안을 의결할 당시에도 시의원 5명 중 유일한 반대자였다. 시립 공원 계획이 미완성인데다 무엇보다 글렌데일 시가 국제적인 논쟁에 휩싸이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했다. 인간적 감성으로 접근하면 괘씸하지만 한 도시의 수장으로서는 충분히 그런 고충을 가질 만도 하다. 하지만 소녀상이 세워진 지 두 달 이상이 된 지금에 와서 긁어 부스럼 식 인터뷰를 한 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글렌데일에 위안부 소녀상이 건립된 건 아픈 역사를 공감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역사의식 때문이었다. 인구 20만의 글렌데일시는 삼분의 일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역사도 우리만큼 핍박과 설움으로 가득하다. 1천년 이상을 페르시아, 동로마제국, 아랍, 몽골, 오스만 투르크 등의 지배를 받았다. 살아남기 위해 세계 각지로 흩어졌지만 끈질긴 민족성은 버리지 않았다. 일차 세계 대전 때 독립을 요구했다가 투르크 제국에 의해 강제 이주도 당한데다 인종 청소라는 대학살도 피해갈 수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미국으로 유입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이 글렌데일 시에 모여 살고 있다.이 도시의 핵심 구성원인 아르메니아인들이 소녀상을 세우는 데 적극성을 보인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아픈 역사에 대한 연대와 공감은 소녀상 건립 이상의 것도 가능케 할 수 있다. 소녀상에 대한 일본 우파들의 트집도 볼썽사납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시장의 대응방식도 세련되지 못했다. 피해자의 소리를 귀담아 듣는 가해자의 양심, 그것이 진정한 역사의 역지사지가 아니던가./김살로메(소설가)

2013-10-14

날갯짓

누구에게나 날개는 있다. 하지만 그 날개의 쓰임새는 천양지차이다. 약한 날개를 가졌으나 그 깃털을 보듬어가며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왕의 강한 날개로 태어났으면서도 그 기운을 뒷전으로 몰아내 퇴보의 빌미로 삼는 이도 있다. 서글픈 건 날갯짓을 일관성 있게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거다. 신은 인간을 핑계거리 많은 피조물로 만들었다. 해 봐도 안 되고, 하기 싫어서도 안 하고, 할 여건이 안 되어서 못하고 등등 갖은 이유로 우리들이 시도하지 않은 날갯짓에 대해 변명할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제대로 날갯짓을 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겸한다는 결심도 작심삼일이요,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쓰겠다는 구호도 허방이기 일쑤고, 독촉 받는 원고를 마감 시간에 맞추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이다. 주변인들이 뚝심 있게 제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만날 그 정신만은 벤치마킹한다. 하지만 여러 핑계 때문에 실천이 될 리 없다. 그 핑계의 전부는 알고 보면 게으름이다.뉴질랜드 은화를 보면 키위새가 나온다. 부리가 길고 후각이 발달한 그 새는 날지 못한다. 아주 오래전 먹을 것이 풍부했던 뉴질랜드 땅의 키위새에게는 천적이 없었다. 굳이 날아다니지 않아도 먹을 것 천지였다. 자연히 날개는 퇴화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땅을 접수하면서 키위새에겐 재앙이 따랐다. 인간과 함께 들어간 고양이, 들쥐의 먹이가 되고, 인간의 손쉬운 사냥감이 되는 바람에 한때 그 개체수가 멸종 위기 수준으로 줄었다. 키위새에게 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그리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천적 만들지 않는 삶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묵묵히, 또는 소란스럽게 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사는 모든 이들을 제 삶의 긍정적 천적으로 모실 일이다. 그들이 이끄는 일상의 방식에 내 영혼의 밥술을 얹어 조금이라도 자극을 받고 싶다. 퇴화하는 날개 끝에 얻은 안주는 무서운 습관이기 십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