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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당신의 꿈 색깔

꿈의 색깔은 흑백일까 컬러일까. 당신이 꾸는 꿈이 흑백인지 컬러인지 말해달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황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지만 분명한 대답을 하긴 쉽지 않다. 수면심리학 분야의 한 연구자가 꿈 색깔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16년간의 공백기를 두고 두 번의 조사를 한 결과, 30세 미만의 젊은 층에서는 대부분이 꿈을 컬러로 꿨으며, 60대 이상에서는 대부분이 흑백으로 꾼다고 대답했단다. 흥미 있는 결과이다. 급변하고 다양한 색깔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컬러 꿈을 꾸고, 상대적으로 색깔의 변화에 덜 노출된 시대를 산 사람들이 흑백 꿈을 꾸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내 꿈 색깔은 어떨까. 꿈을 자주 꾸면서도 꿈에도 색깔이 있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지나간 꿈속에서 계절이나 색채를 떠올리거나 그 분위기를 감지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과거의 단편적 회상들이 비논리적으로 이어지는 게 꿈이다 보니 그 진행 자체가 들쑥날쑥해 색깔이 끼어들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꿈이 선명한 색깔로 승화되기는 어렵다.하지만 특정 꿈을 꿀 때는 총천연 시네마스코프가 될 때가 있다. 내 경우 유독 스무 살 시절의 회상 장면이 꿈에 나타나면 그렇다. 단풍 든 느티나무 군락, 친구의 자주색 카디건, 주인이 분명하지 않은 빛바랜 갈색 가방,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달려가는 푸른색 버스 등이 꿈속에서나마 선명하게 보이곤 한다.젊은이들은 컬러로 꿈을 꾸고 노년층으로 갈수록 흑백 꿈을 꾼다는 보고가 내겐 맞지 않는 말이 되는 셈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특정 젊은 날의 회상은 컬러로 나타나고, 다른 일반적인 꿈에서는 색깔이 큰 변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청춘의 추억만 유독 꿈속에서 총천연색으로 등장하는 건 그만큼 못 다한 꿈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지배한다는 뜻일 게다. 사랑이든 열정이든 청춘의 이력이 분명한 색깔로 복기되는 한 희망의 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1

행복지수 높이기는 어려워

누구에게나 양면성이 있다. 사람은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면 나도 더한 깊이로 상대를 공감하고 배려하게 된다.`사심 없다`는 말이 그야말로 사심 없이 성립될 수 있는 관계가 늘어날수록 일상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하지만 모든 일상이 그런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다. 어린이 논술 강좌에서 가끔 내 한계를 시험당할 때가 있다. 과자 파티하자는 아이들의 요청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신이 난 아이들은 자제심을 잃는다. 한참 자유로울 시기에 저들도 얼마나 힘들까. 잠시나마 해방구를 만들어주자 싶어 참기로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다. 뒷정리 장면에서 실망이다. 책상과 의자를 바로 돌려놓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과자부스러기와 음료 빈 통을 휴지통에 넣는 녀석도 물론 없다. 교육적 차원(?)에서 같이 치우자고 말해보지만 쇠귀에 경 읽기다. 정리정돈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부산스레 움직이고 떠들 뿐이다.순간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된다. 심리분석가들의 고백 중에 `거기 돈 많은 환자, 당신은 그냥 영원히 아프세요.`라는 내용이 있다. 분석가는 한 여자를 치료했고 그녀는 이제 휴양지에서 며칠 쉬어도 좋을 만큼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는 휴양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하며 `이제 남은 것은 그녀가 툭툭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실언한다. 이것은 심리분석가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한 무의식적 소원이었다. 말하자면 부자인 이 여자를 계속 치료했으면 하는 무의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실제 의식으로 떠올랐다면 분석가는 그것을 세게 부정했을 것이다.최선을 다해도 상대가 몰라줄 때 혹시 상대를 아픈 환자 취급하며 현실과 타협하게 되지나 않을까 살짝 두려워진다. 인간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심 없는 행복 지수가 영혼 없는 현실보다 백만 배는 소중하다. 따라서 행여 그런 포기하는 맘이 무의식중에라도 생기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0

배고프고 어리석기

스티브 잡스는 죽었지만 그의 어록은 세상에 남아 빛을 발한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사랑하는 거라고 그가 말했다. 그것도 배고프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일상이 시시한 건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눈치 보며 하거나, 억지로 하는 일은 다만 고된 노동일뿐이다. 타성에 젖은 하루가 초조하기만 할 때 스티브 잡스의 진솔한 연설문은 채찍이자 위안이 되어준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한 그의 연설문 요지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것이다. 대학원생이었던 그의 생모는 대학을 나온 부부가 그를 입양하고 대학까지 교육시켜주기를 바랐다. 그의 양부모는 대학을 다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만 스티브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히려 대학을 자퇴한 것은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일찍이 사업을 구상할 수 있었으니 인생의 전환점을 극적으로 잘 활용한 경우였다.두 번째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의 성격은 괴팍했다. 고집불통에 안하무인인 그는 주변과 불화했고 결국 그가 만든 회사인 애플사에서 공공연히 쫓겨났다.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린 참담한 시기였다. 하지만 기회를 위기로 삼아 다시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고, 그의 주도하에 개발했던 기술 덕에 다시 애플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삶이 내 인생을 벽돌로 내리칠 때 기회는 온다. 그때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일을 사랑할 수 있었기에 다시 설 수 있었다.나머지 하나는 죽음에 관한 것이다. 암을 경험한 그로서는 매 순간마다 죽음에 대해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이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본능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다. 스탠퍼드에서의 그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늘 배고프라, 늘 어리석어라.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꿈꾸고 이루려는 자, 다만 배고프고 어리석을 지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07

침팬지의 바나나

살다 보면 여러 문제에 부딪친다. 시간이 가도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 땐 난감하기 그지없다. 그때 필요한 것이 통찰력이다. 통찰은 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을 만난다고, 경험이 다양하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순간의 영감처럼 탁, 하고 튀어오르는 것이다. 일회성 경험인 통찰학습에 대해 심리학자 쾰러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우리 밖에 바나나를 두고 침팬지 곁에는 막대기 하나를 비치했다. 침팬지는 바나나를 집으려고 손을 내밀어보지만 허사였다. 녀석에게 바나나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침팬지는 연구자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무심한 연구자가 도움을 줄 리 없다. 이윽고 침팬지는 옆에 있던 막대기를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거리까지 바나나를 막대기로 끌어 당겼다. 바나나를 손에 넣은 순간 침팬지는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침팬지가 바나나를 잡을 수 있었던 건 시행착오의 결과물이 아니었다. 즉, 반복 학습이나 점진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지적 체험이 아니었다. 사태를 파악하는 눈과 문제를 해결하는 통찰을 어느 한 순간에 깨친 것이었다. 목욕하다 유레카를 외치며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아르키메데스나, 떨어지는 사과 앞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이런 통찰의 순간을 설명하기에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통찰은 온 우주와 대면하는 나만의 고유 방식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변화를 시도하는 한 지점이 있다. 자신의 심적 상태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힘이 제대로 발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사물이나 사람을 많이 경험하고, 다양한 독서를 한다고 통찰이 깊어지는 건 아니다. 내 안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내공이 쌓일 때 문제 해결의 직관이 생긴다. 한데 그 순간이 쉽게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저마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보이는 바나나를 앞에 두고 일희일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본질이다. 그런데도 통찰의 눈썰미는 멀기만 하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6-05

푸른 하늘

분주한 아침, 물기가 가시지 않은 머리칼을 매만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아끼고 존경하는 지인 왈, 갖고 싶은 책 있으면 이야기하란다. 책 주문하는 김에 내게도 선물해주겠단다. 정을 나누는데 책보다 나은 선물이 어디 있으랴.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싶은 책 두 권을 문자로 보냈다. 한 권은 최근 소설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집이고, 다른 한 권은 철학 입문서였다. 어느 날 그미의 사무실에 들렀을 때 빈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꽃과 시를 무척 좋아하는 이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새로 꽃을 채울 시간조차 내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저 빈 화분을 내가 채워줘야지 하고 생각했었다.지난번 다시 들르게 되었을 때 나는 빈 화분을 챙겨 화원에 들렀다. 신경 쓰이는 업무가 많은지 그녀는 요즘 들어 머리가 아프고 호흡기도 안 좋아졌다고 했다. 로즈마리를 키워 상쾌한 기분을 맛보고 싶다고 했다. 네댓 개의 화분에다 로즈마리, 선인장 등의 화초를 채웠다. 그 중 선인장 화분은 다시 그녀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화초를 좋아하면서도 키우는 재주는 없는데 선인장이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다. 물 줄때마다 그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책 주문을 마쳤다는 그녀가 말한다. 로즈마리 잎을 살짝살짝 건드려 향을 맡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허브향 덕분인지 머리도 덜 아프고 기분도 한결 나아졌단다. 매사에 열성적이고 긍정적인 캐릭터가 매력인 그녀가 그렇게 말하니 덩달아 나도 상쾌해진다.저녁 무렵, 역시 좋아하고 아끼는 다른 지인으로부터 이런 문자가 날아든다. 낮에 누군가로부터 받은 문자인데 내게도 꼭 전해주고 싶었다고. `오늘은 아무 생각 없고 / 당신만 그냥 많이 보고 싶습니다 - 김용택의 `푸른 하늘`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시가 이토록 묵직한 선물로 느껴지는 건 왜일까? 오늘 하루는 `정`에 대해서만 생각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알겠다. 그 정감 릴레이를 당장 그녀에게로 이어가야겠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푸른 하늘만 보고 싶다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6-04

행복 총량에 기여하기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남을 대접하라.` 인류 탄생 이래로 이 말 만큼 인간관계에 대한 명답도 없다. 무심코 행하는 언행이 상대에게는 상처가 되거나 불쾌감을 줄 때가 있다. 예를 들자. 어린 아내가 아무 생각 없이`요즘은 연하남을 만나는 게 대세인데 당신은 나보다 여덟 살이나 많으니 억울해.`라는 말을 했다 치자. `그렇게 자신 있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젊은 남자 만나 살아.` 라고 그날따라 남편은 발끈한다. 점점 훤해지는 이마와 늘어나는 뱃살에 신경이 쓰이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부담담도 밀려오던 차에 젊은 아내로부터 그런 소리를 들으니 감정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 가끔 이런 문자를 받는 경우가 있다. `내일 오전 시간 있어요?`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일 뿐만 아니라 당황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내일 오전 시간 있으면 같이 산책할래요?` 라거나 `내일 오전 시간 있으면 제 숙제 좀 도와줄래요?` 정도로 문자한 목적은 밝혀줘야 한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이다. 사람 마음을 시험하는 듯한 저런 문자를 대하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의도라해도 당하는 입장에선 그리 유쾌하지 않다.`인간관계론`에서 카네기는 시종일관 이렇게 말한다. 상대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상대를 먼저 배려하라고. 빌딩 안내 직원이 카네기에게 성실한 자세로 지인의 사무실 위치를 안내해줬을 때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다 말고 되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제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이 굉장히 훌륭하군요. 답변이 매우 깔끔하고 분명했습니다. 이런 예술적 수준의 대답을 듣는 건 쉽지 않지요.” 사소하게 보이는 일에도 상대를 칭찬한 일, 카네기는 이를 두고 `인류의 행복 총량`에 약간이나마 기여를 하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인류 행복 총량에 보탬이 되는 길은 크고 거창한 게 아니라, 작고 하찮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먼저 나가는 내 말이 상대를 대접할 때, 돌아오는 대답은 더한 배려로 돌아오게 되어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03

`굿바이`는 따뜻하다

E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심야 영화를 보고 남편은 감동을 받았단다. 다른 일을 하느라 영화를 함께 보지 못했는데 꼭 챙겨서 보란다. 대충 들어보니 나도 충분히 좋아할 영화였다. 우연히 다른 친구가 또 그런 말을 한다. 일본 영화`굿바이`는 아끼는 영화 목록 중에서도 최고에 끼우고 싶다고. 그 영화 덕에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길을 스스로 단장해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가까운 사람 두 명이 동시에 추천하니 미룰 수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가서 당장 디브이디를 빌려왔다. 잘 나가던 첼리스트 다이고는 악단 해체로 실직을 한다. 백수가 뭘 가리겠는가. 연령 무관, 전공 불문, 고수익 보장이라는 여행 가이드 구인광고를 발견하고 면접을 본다. 바로 합격이다. 하지만 인생사 쉬울 리 없다. 여행사인줄 알았던 회사는 `납관`일 즉, 시신을 염하는 곳이다. 고상한 첼리스트에서 초보 납관 도우미가 된 그에게 모든 것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거북하면서도 묘한 이 일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선배 납관사 이쿠에이의 정성 깃든 태도가 찡한 울림을 선사했던 것.첼로를 만지던 손과 시신을 만지던 손이 어찌 같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끝내 그 두 손은 같은 손이 된다. 이 숭고한 손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구의 몸을 염습하는지를 지켜보는 순간, 누구나 그만 감정선을 놓치고 퍼질러 울게 된다. 모든 영화가 스케일이 크거나 반전이 있거나 눈요기를 담보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좋은 영화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먼저 파고든다.누군가 좋다고 권한 영화가 내게 와서도 똑 같이 좋은 느낌을 줄 때는 이 역시 로또를 맞은 기분이다. 착한 영화, 따뜻한 영화,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 이런 것들이 대중 영화에 밀려 덜 관심 받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마니아 층이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죽음과 가족과 눈물과 애증과 사랑에 대한 수많은 단상이 가슴으로 퍼지는 것을 원하는 자에게 썩 어울리는 영화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5-31

소요하기

`장자`는 독서모임에서 강신주식 버전으로 두세 번 접했다. 그래도 부족해서 그림 곁든 해설서와 전공 학자들의 관련 글도 찾아 읽었다.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해설의 뉘앙스가 조금씩 다른데다 저마다 자기 식 해설에 대한 자긍심마저 있으니 독자로서는 혼란스러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원래 고전 강독이란 게 첫 문구 하나만으로도 학자들끼리 논쟁할 만큼 범우주적 범위를 자랑한다. 그러니 일반 독자가 고전 해설서를 접하면서 느끼는 갑갑함은 당연지사이리라. 장자 사상의 기본은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 잘 나타나 있다. 소요유는 말 그대로 이리저리 자유롭게 노닐며 거닌다는 뜻이다. 목적지도 없고 이유도 없다. 그저 한없이 한가한 행보를 할 뿐이다. 하릴없이 거니는 것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진정 자유로운 자만이 그것이 가능하다. 장자가 말하려 한 것은 궁극의 자유, 절대의 자유, 자유 너머의 자유였을 것이다. 인간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인간을 규정하는 그 어떤 질서나 규범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여러 예시로 보여준다.큰 가죽나무 한 그루를 보고 혜자가 말한다. 줄기는 울퉁불퉁하고 가지조차 구불구불해 쓸모없이 크기만 한 나무라고. 장자는 이렇게 대꾸한다. 쓸모없이 큰 나무에 대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너른 들판, 큰 나무 곁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그 아래 누울 생각은 왜 하지 않느냐고. 목재로서 쓰임새 없다고, 폐가 되거나 해를 끼치는 건 아니라고.실용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둥치 굵고, 가지 곧은 나무보다 좋은 건 없다. 하지만 그건 장인의 입장에서 본 것일 뿐 다르게 본다면 제멋대로 자란 나무야말로 `쓸모있는`것이 될 수 있다. 좋은 목재로 거듭나는 게 큰 나무의 가장 좋은 쓰임새라는 생각이야말로 한정적 견해이다. 소요하는 인간의 조화로운 파트너가 되는 일도 가죽나무의 나쁘지 않은 쓰임새가 될 수 있다. 주어진 합의나 정해진 틀에 안주하지 않고 궁극을 향해 소요하는 자유의 참맛을 깨치는 장자는 읽을수록 매혹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30

변해간다

각국 미녀들이 출연해 수다를 떠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을 알 수 있고, 우리나라에서 그들이 겪는 애환 등에 공감할 수 있어서 재미있게 봤었다. 다양한 에피소드를 접하면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게 그나마 문화충돌을 최소화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일본 출연자가 나와 식사예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한일 양국의 식사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밥그릇과 국그릇을 밥상에 고정시켜 놓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 내용물을 입까기 운반한다. 한데 일본은 그것들을 손에 받쳐 들고 식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숟가락을 잘 쓰지 않는 일본 문화이다 보니 밥알을 흘리지 않으려면 밥그릇을 입 가까이 들어야 하고, 국도 그릇째 들고 마실 수밖에 없다.밥상문화에 대한 한일 간의 차이를 생각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저 흥미롭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한데 이어지는 말에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에서는 밥상에 밥그릇을 붙이고 먹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데 개나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는 요지였다. 묘하게 울컥했다. 아무리 양보해도 내 쪽에서는 숭고한 밥그릇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먹는 방식이 더 야만으로 보이는데 그쪽에서는 밥상에 밥그릇을 붙이고 먹는 쪽이 더 야만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문화의 다양성에 관한 좋은 예라 하겠다.어느 한쪽에 길들여지면 다른 쪽보다는 내 것이 옳거나 더 나은 방식이라고 믿거나 우기게도 되는 게 문화의 속성이다. 각설하고, 요즘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의 식사 장면을 보면 밥그릇을 들고 먹는 젊은층이 제법 보인다. 짱구 만화나 일본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일본 밥상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전파된 영향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턱대고 우리 것만 좋은 것이라고 고집하는 쪽은 아닌데도 받아들이기에 살짝 버겁다. 변화는 빠르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미세한 혼란을 느끼는 것, 그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9

색깔 있는 사람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 언변에 능한 이는 자공이었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자주 회자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자공이 묻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하냐고. 공자가 대답한다. 좋은 사람 아니라고.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떠한지 여쭤본다. 공자는 다시 답한다. 역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연스레 인간관계에 많은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청소년 시기에 왕따 때문에 극단적 행위를 하거나, 사회에 나가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건 그만큼 관계망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얽히고설킨 현실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긴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이라면 그는 정치꾼이거나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만의 색깔이냐 향기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걸 애써 숨기려 하기 때문이다. 애매모호한 중립의 도덕성을 내세워 `나는 이쪽이다` 대신 `나는 기회주의자입니다`라는 비겁의 실리를 택한다.나만의 견해가 있다는 건 뭐든 좋다는 식의 꼼수부리는 것보다는 진솔하다. 비록 당파성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더라도, 좋은 걸 좋다하고 나쁜 걸 나쁘다 말하는 건 공자가 바라던 바였다. 가장 나쁜 예는 좋은 것은 좋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나쁜 사람에게 욕 좀 먹으면 어떠랴.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고, 나쁜 사람으로부터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건 명예스런 일이다.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절대다수이다. 악덕한 사람들이 내는 나쁜 소리 정도는 거부할 수 있어야 공자가 말한 좋은 사람 대열에 낄 수 있는 것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5-28

가장 어려운 것

하는 일의 특성 상 주부들을 만날 일이 많다. 그들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자식에 관한 것이다. 자녀가 어리면 어린대로, 사춘기면 사춘기대로, 청년기면 청년기대로, 혼인해 분가하면 분가한 대로 부모는 자식 걱정으로 편할 날이 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흔한 말로 우리는 자식에게 바라는 게 별로 없다고 말한다. 기본만 해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초등학생 학부모의 경우 내 아이가 영민해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고,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는 아이가 그 무섭다는 `중2병` 정도는 거뜬히 넘기고 공부에만 몰두해줬으면 좋겠고, 청년기 자녀를 둔 부모는 내 자식의 취업기나 연애사가 무난하게 진행되었으면 좋겠고, 결혼한 자녀를 둔 부모일 경우 그들이 별 탈 없이 자식 낳고 살림살이가 빨리 나아졌으면 하고 바란다.하지만 부모의 이런 바람이 기본이 아니라는 게 문제이다. 실은 내 욕망을 한껏 자식에게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기본 희망`을 지닌 자식이 못되었으므로 내 자녀만큼은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게 된다. 마치 부모인 자신은 스마트폰을 한 시도 손에서 내려놓지 않으면서, 자식만은 그것을 적당히 즐기는 절제심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심리와 같다.좋은 부모 되기 관련 자료나 서적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부모자식 관계의 정답은 텍스트 안에 있는 게 아니다. 저마다 처한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경험에 빗대 서로 위안하자면 바라는 게 없을수록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이다.다소 비겁한 방법 같지만 내 욕심을 버릴 때 자식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정작용처럼 그들 스스로 제 갈 길을 모색하고 있을 터인데, 너무 부모가 앞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가만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 아니던가. 오늘도 자식 걱정이란 나비 수천만 마리가 각기 부모 머릿속을 휘젓고 날아다니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7

민주화라는 말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아이돌 그룹의 모 멤버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뱉은 한 마디 말 때문에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단다. 의심할 바 없이 기성세대인 나는 논리적 오류로 이어진 저 말 뜻도 모르겠고, 왜 사람들이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개성을 존중하는데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장난을 해석하느라 골머리만 아팠다.추이를 관망한 이제야 무슨 말인지 감을 잡겠다. 민주화라는 말이 특정 집단에겐 그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부정적이고 치졸한 의미로 쓰인단다.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란 숭고하고 긍정의 의미인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 성향을 지향하는 한 사이트에서는 그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상대를 비하하거나 시비걸때 `민주화`라는 말을 쓴단다. 조롱의 의미로 `저 녀석 민주화 당했네`, `이 자식 민주화시켜야 겠어` 라고 하거나, 네티즌 글을 `비추천`할 때도 `민주화`란 말로 대신한단다.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화 운동은 조롱거리로 전락시키고, 인권 유린마저 유희로 생각하는 집단들의 사이트가 활발히 운영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민주화된 사회를 증명하고도 남는데, 왜 그들은 비겁하게 `민주화`라는 말을 그토록 폄훼할까. 온갖 불합리와 각종 비리와 말할 수 없는 비열함의 세계를 엮어가는 기성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은 너무 쉽게 생을 환멸이나 유희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화이건만 왜곡된 그것은 이제 내 편이 아니거나 내 뜻과 다른 것일 때 비하하는 말로 전락하게 생겼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실체는 전혀 민주화되지 않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몸짓은 전혀 정의롭지 않은 현실이 그들을 저토록 극단적인 생각의 장으로 내몰게 한 건 아닐까. 숭고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전파하지 못한 기성의 한계에 대한 반발이 이런 현상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곱씹을수록 머리만 무거워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4

장그래의 선물

5월은 감사의 달, 마음을 주고받느라 바쁘다. 특히, 젊은이가 중년이상에게 할 선물 때문에 고민한다면 만화책`미생`을 추천할 만하다고 한 선배가 말한다. 당신 아들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연작인 그 책을 한두 권 선물하면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부담을 갖지 않으면서도 만족하게 된단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로 나뉘게 되겠지만, 대개 받은 쪽은 나머지 시리즈 권을 사거나 검색해서 읽게 된단다. 공감이 절로 된다. 좋은 만화는 좋은 사색을 낳고 나아가 좋은 사람까지 낳을 터이니. 한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미생은 어린나이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꿈꿨지만 실패하고 평범한 인턴사원이 된 `장그래`의 직장 생활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바둑에 빗댄 에피소드이지만 고수가 등장해 직장인의 처세에 대해 훈계하거나 세상을 향해 단순 일갈하는 내용은 아니다. 좋은 어른의 가치, 개별자의 존귀함, 나아가 공감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완전한 삶을 향해`아직 덜 살아있는` 나를 깨쳐가는`미생`에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 캐릭터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가장 큰 이유라고 작가 윤태호는 말한다. 누군가의 싸움 현장이 창밖으로 보이면 호기심에 구경할 순 있다. 나와 무관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싸움의 대상이 내가 아끼는 사람인데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사건 현장으로 뛰쳐나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불안과 공포가 곧 만화의 캐릭터가 되는데 독자들이 장면마다 스며드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살아있네`라고 독자가 느끼는 건 플롯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 때문이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 주변이 보이고 만물 안에 든 내 모습도 보인다. 작가는 신출내기 직장인 장그래를 통해 그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데 배움이 있고 훈계하지 않는데 깨달음이 있고, 각 인물의 미세한 인과관계까지 독자와 호흡하려는 그 캐릭터 때문에 사람들은`미생`을 지지한다. 곧 영화도 개봉한다니 설렘만으로도 족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3

관심의 크기는 언제나 다르다

덜 가진데다 피해의식마저 있는 악동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대처할까? 객관적 영향력이 큰 대상을 물고 넘어지면 된다. 제 이름을 드날리고 싶은 신진학자가 흠 있는 학계의 대가를 공략 대상으로 삼거나, 나 혼자 덤터기를 쓰기 싫어 약점 있는 거물급을 물귀신 작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하루라도 관심을 끌지 못하면 배알이 꼴리는 스타일이다. 핵 카드와 로켓포 발사로 세계의 정세가 자신에게 멀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며,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로 주변국을 긴장으로 몰아넣는 몽니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을 조장하는 이슈를 담보로 그의 인민을 통제하고 길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곧 그의 치욕을 의미한다.이번 한미동맹 60주년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은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부각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도에 의하면 그 시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 상태보다는 시리아 사태에 더 집중한 걸로 되어 있다. 실무책임자 존 케리 국무장관은 시리아 사태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러시아로 날아가 버렸다. 이스라엘에 저항해야 한다는 아랍권의 대동단결이 그들에겐 더 큰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온전히 한반도 문제에 그 질문이 할당된 게 아니라 시리아 사태와 미군 내부의 성폭행 문제도 언급될 정도였다. 우리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다.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관계는 신뢰의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 국제협력 등 21세기형 글로벌동맹으로 발전했다고 청와대는 자체 평가한다. 이런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한쪽만의 일방적 메아리이기 때문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무심하고 그것이 상처인지조차 모르는 한쪽이 자화자찬하는 사이, 관심을 빼앗긴 김정은은 소위 열을 받았나 보다. 사흘 연속 동해로 미사일을 쏘아대며 제 몽니를 뉴스 한 줄로라도 장식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이래저래 관심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라는 생존 본능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2

뒷모습 넘어 마음

뒷모습이 때론 앞모습보다 많은 걸 보여준다. 그걸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뒷모습보다는 앞모습만 신경 쓴다. 예뻐진다면 친구랑 똑같은 얼굴이어도 좋으니 제 개성을 팔아 미모 지상주의에 편승하고, 돈이 된다면 잘난 인간들 앞에서 비굴해도 좋으니 제 품위를 죽여 물질 만능주의 곁자리를 예약한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도서관에서 `위대한 개츠비` 독서 및 영화 토론수업을 했다. 가치관이나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청소년 초입 시기라 접근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원작 번역 소설도 그들에겐 버거울 수 있는데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신작 영화는 나이 제한에 걸려 개봉관에서 볼 수도 없었다. 책은 축약본을 읽어도 좋다고 타협하고, 영화는 디브이디를 활용하기로 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그런지 기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었다. 그 중 원작에 충실한 로버트 마코비츠 감독 것을 택했다.책과 영화를 접한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개츠비가 답답해죽겠단다. 반어법이라면 몰라도 제목대로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인정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은밀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그토록 빠른 부를 축적한 것도 다른 부도덕한 등장인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단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한 여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돈으로라도 여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뒷모습까지 순수한 사랑을 한 사람이란다.상처나 파멸과 친구하는 건 누군가의 뒷모습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본 앞모습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제 지고지순함으로 사랑하는 이의 약점마저 끌어안은 개츠비야말로 갑갑하지만 위대한 남자였다. 그는 제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넘어 심성마저 다사로운 사람이었다. 전상보다 후상, 후상보다는 심상이라 했다. 개츠비가 전상과 후상을 넘어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마음결 때문이다. 보이는 앞, 안 보이는 뒤보다 더 중요한 건 속 깊은 성정이라는 걸 개츠비는 씁쓸한 죽음으로 증명한 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1

`보통`은 영어로 쓴다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 때문에 국적을 오해 받는 작가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알랭 드 보통`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읽히는 작가군 중의 하나인 그는 스위스 출신 영국 작가이다. 비록 프랑스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긴 했지만 그것이 그가 프랑스 작가라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이름 자체가 워낙 프랑스식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가 프랑스인이라고 착각한다. 꽤 알려진 서평가조차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 중 하나로 알랭 드 보통을 꼽았는데, 부주의하게도 시종일관 그를 프랑스 작가로 믿고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 작가의 문학적 토대는 철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또 한 번 확인한 셈`이라며 알랭 드 보통을 알게 된 후 다시 프랑스 작가에게 열광하기 시작했다고 실언할 정도이다.작가의 국적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작가의 국적과 언어는 떼려야 뗄 수 없다. 프랑스인이면 프랑스어로 작품을 발표할 것이고, 영국인이면 영어로 작품을 발표한 가능성이 높다. 영어로 쓰인 작품과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은 각기 그 글맛이 다르다. 따라서 이름에서 풍기는 어조만으로 한 작가의 출신과 쓰는 언어를 단정해버리면 독서할 때 편견이 생길 수 있다. 영국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이 영어로 글을 쓰는 건 자연스럽다.남녀의 심리를 이해하고,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해 대중성을 획득한 그의 작가적 취향은 프랑스식이 아니라 영국식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한 작가가 어떤 언어로 글을 쓰는가는 섬세한 책 읽기의 필수 정보가 되어준다. 취리히 출신으로 옥스퍼드와 하버드에서 학문한 런던 시민 알랭 드 보통. 그가 프랑스 사람인 것처럼 독자들에게 어필되는 건 득일까 실일까. 그만의 고유 문학적 정체성과 실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다.한 작가의 국적은 그가 어떤 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다. 보통 글에 열광하는 독자들아, 그는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로 쓰는 영국작가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20

지상 낙원 지키기

자원은 유한하다. 이 명백한 명제를 실감하기 어려운 인류는 오늘도 지구 표면 이곳저곳을 삽질해 제 욕망을 채운다.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자원의 잔존량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데, 석유의 경우 불과 50년만 지나면 고갈된다고 했다. 삼십 년도 훨씬 지난 일이니 그때 기준이라면 석유자원은 이제 20년 정도 밖에 생명력이 없다. 하지만 우린 그때 배운 기억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부족한 자원에 대한 불편함이나 그로 인한 고통을 일상에서 절실하게 맞닥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자원의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한 인간의 파괴적 욕망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예시의 땅이 여기 있다. 그것은 성찰 없고 무분별한 우리의 미래를 보여준다. 여의도 크기의 두 배 남짓한 조그만 섬 나우루.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일만여 명 남짓한 주민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다. 이곳 사람들은 천국에서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의 비극적 실상은 구미 열강들의 자원전쟁이 도화선이 되었다. 백 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지상낙원을 팔아 부를 경험했지만 이내 나락으로 떨어졌다.나우루는 인광석이란 자원을 발견한 열강들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1968년 나우루가 독립국이 되면서 고급비료의 원료인 그것은 주민들의 특혜 산업의 원동력이 되었다. 직수출 자원이 된 인광석 하나로 그들은 하루아침에 부를 손에 잡았다. 삽질을 재촉할수록 돈이 쌓였다. 그 좁은 땅에 외제차가 굴러가고 먹거리는 풍부해졌으며, 해외로 나간 주민들은 맘껏 돈을 뿌렸다.하지만 무한한 자원은 없다. 인광석이 고갈된 현재의 그들 생활은 지옥이 따로 없다. 각종 질병이 난무하고 게을러진 국민성과 수입 감소로 최빈국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 지구온난화까지 겹쳐 해수면 상승까지 도래한 그들의 처지는 인류의 미래를 경고하는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나우루의 실상을 보면서 자원의 유한은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경험적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우루는 세계화를 외치는 인류의 불편한 자화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6

잠의 유혹

지인 중에 기면증으로 당혹해하는 이가 있다. 운전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외곽으로 나갈 때면 누군가 동석을 해야만 안심할 정도이다. 자신도 모르게 졸음이 쏟아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옆에서 말동무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녀의 차를 타고 볼일 차 다른 도시로 간 적이 있는데 연신 하품을 했다. 잠을 개관하는 신경물질의 장애로 인한 일종의 해리상태가 기면증의 증세라니 본인의 의지와도 상관이 없다. 나로서는 옆에서 끊임없이 말을 거는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운전석에 내가 바꿔 앉으면 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라고 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걱정도 되고 공감도 되었다. 기면증까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잠이 많다. 호흡기도 좋지 않은데다 운동을 싫어하니 기초체력이 많이 달린다. 자연히 모자라는 체력을 잠으로 보충하게 된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기면증이 타고났거나 체질이듯 다면증 역시 타고난 체질과도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중년에 접어들면 점점 잠이 없어져 잡생각이 많아진다는데 나로선 남는 시간엔 잠으로 체력 보충을 하느라 잡생각이 끼어들 틈조차 없다.젊은 시절부터 유독 잠이 많았다. 수업 마친 뒤 버스 타고 집에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그대로 뻗어 잠든 기억이 숱하다. 두통과 근육통이 몰려오며 극도로 피로해진 신체는 오직 잠만을 불러댔다. 한밤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때부터 신체적 약점을 알고 기초체력을 다졌으면 많이 좋아졌을 텐데 그 노력도 없이 잠으로 모든 에너지를 보충하려고만 했다.이번 휴일에도 내리 잠만 잤다. 한번 자면 그것도 얕은 잠이 아니라 깊은 잠을 잔다. 남들은 불면증으로 고생한다는데 너무 잠이 쏟아지니 이 또한 정상은 아닌듯 싶다. 찜찜하고도 불필요한 낮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혼자 하는 말 - 뭔가 이루지 못했다면 팔 할이 잠 때문이다. 체력 보충제로 활용하는 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한 그 자책은 붙어 다닐 것이다. 나쁜 습관은 자책을 낳고 자책은 또 다른 잠을 낳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5-15

각주 없이 담백하게

한 사건이 터진다. 실상이 공개된다.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그것은 발 없는 말이 되어 천리를 달린다. 피해자는 말이 없고 뒤늦게 나타난 가해자는 억울하다며 남 탓하기 바쁘다. 치졸한 응원군까지 얻으면 자신의 안위가 걱정된 가해자는 진솔한 사과 대신 구질구질한 변명을 택하고 만다. 아인슈타인은 인류 역사에 빛나는 논문 몇 편으로 과학계의 지존이 되었다. 에너지와 질량과 빛의 관계를 도식화한 그의 방정식은 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 관계를 말하는 이 식은 쉽게 말해 물질에 갇혀 있는 에너지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평균 체격의 성인은 대형 수소 폭탄 서른 개 정도가 터질 정도의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다만 그 힘을 활용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란다.그의 특수상대성 이론은 내용면에서 가장 빼어난 논문이기도 했지만 형식면에서도 남달랐다. 각주나 인용문이 없었고, 수식도 거의 없었다. 자신의 연구에 영향을 주었거나 앞선 연구에 빚진 논문도 없었다. 다만 직장 동료의 도움만 있었다고 말했을 뿐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 온전히 자신의 생각만으로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성과를 이뤄냈다.어떤 이론에 각종 주석이 달리고 인용문이 너덜너덜하게 붙는 건 그만큼 자신의 생각이 독자적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말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싶거나 자신의 생각을 인정받고 싶을 때 선각자의 말들을 빌려온다. 검증받은 사람들의 말에 슬쩍 기대어 제 말의 부족함을 채우려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신보다 더 나은 객관적 자료는 없었기 때문이다.과학자의 논문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각주 없는 삶일수록 좋다. 모자라도 설명하지 않으며, 부족해도 갈구하지 않으며, 불편해도 불평하지 않는 삶. 그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임을 깔끔한 논문처럼 증명하는 삶. 특히 잘못했을 땐 변명 따위의 각주보단 진솔하고도 담백한 본문이 매력적인 그런 삶을 꿈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4

갑을관계 소묘

`갑을` 관계가 화젯거리이다. 몇몇 우월적 입장을 앞세운 자들의 막말이나 횡포가 상식을 넘어서자 억압되었던 갑을 문화에 대한 불만 표출이 집단적으로 온라인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부담스러운지 공공기관과 백화점 등에서 갑을 관계 표기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본질과는 먼 대처 방식이라 별로 달갑지 않다. 갑을이란 용어는 처음엔 단순한 익명의 표기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와 나`이면 어떻고 `A와 B`이면 어떻고 `사과와 오렌지`면 어떻고 심지어 `나와 너`이면 어떻단 말인가. 임의로 출발했을 그 용어가 우리 사회 밑바탕을 관장하는 계급의식으로 점차 왜곡·변질된 것에 씁쓸할 뿐이다.우월적 지위와 아쉬운 입장으로 대변되는 갑을 관계는 따지고 보면 기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매순간 의식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 삶 자체는 갑을 관계의 총화이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여러 관계망에다 유교적 관습 및 상부하달식 기업문화 등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단 한시라도 자유인이 된다는 건 어렵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가 `을`이라고 생각한단다. 당연한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우월적 입장이 되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아쉬운 입장이 되어 서운하고 갑갑한 일을 당하다 보면 피해의식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약자에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부당함은 언제나 약자의 것인데다, 그 부당함의 배에 언젠가는 나도 탈 수 있다는 보험 심리 때문이다.`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고 윈윈하는 관계여야 한다. 사회구조상 완벽하게 동급이 될 수 없다면 더 약자에게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진정성과 효율성이 담긴 인격 수양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기업에도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