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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바틀비의 화초

화초에 물을 준다. 같은 아침 햇살을 받건만, 산세베리아나 고무나무 등은 무작정 생기발랄하기만 한데, 앤슈리엄이나 옥잠화는 사시사철 풀이 죽어 있다. 새치름하니 생기 잃은 화초들은 그렇다고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신경이 쓰여 물 더 주고, 자리 바꿔 가며 통풍에 신경 써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도리어 `활기 찾을 의향 없음`이란 표시로 제 잎맥을 늘어뜨린 채 애간장을 녹인다. 삶이란 뭉근한 연민과 은근한 저항의 관계망일 때가 있다. 허먼 멜빌은`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이러한 피로한 연민과 수동적 저항의 알레고리에 대해 짚어냈다. 수동적 저항만큼 열성적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지만 그 저항에는 악의가 없고, 저항을 감당하는 자 역시 상대를 이해하려 애쓴다고.온건하게만 보였던, 자신이 고용한 필경사가 사흘째부터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말로 글씨 쓰기를 거부한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잘못을 따지는 적극적 반항이 아니라, 이유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저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는 소극적 저항을 고집한다.`하고 싶지 않아요`가 아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는 말은 소시민 이하의 삶을 사는 필경사 을이 변호사 갑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 의사 표현인지도 모른다. 변호사가 당황하게 되는 건 갑의 입장이 아니라 보편적 정서 상 필경사를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해고 통보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는 바틀비를 피해 변호사가 사무실을 떠나는 지경에 이르고, 바틀비는 결국 구치소에서 식음을 전폐하다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변호사의 입을 통해 작가 멜빌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까. 필경사는 가엾은 사람일 뿐 나쁜 사람이 아니며 악의 또한 없다고.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고 변호사 역시 훌륭하지만 서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는 각자의 영역이 있고, 어떤 경우라도 남의 영혼에 완벽하게 가닿지는 못한다. 한쪽은 연민하다 지치고, 다른 한쪽은 제 아픔을 소극적으로 어필하다 쓰러진다. 나와 화초도 그렇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7

히스꽃

캐시, 히스꽃이 만발한 저 성에서 우리 사랑을 영원히 지켜나가야지, 죽으면 안 돼! 히스클리프, 저 들판 무수히 핀 히스꽃을 한아름 안겨 줘. -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히스꽃 이미지로 넘실대는 작품이다. 작가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적재적소에 소도구를 장치한다. 그 소품들이 없다면 소설은 밍밍한 이야기에 그치고 만다. `폭풍의 언덕`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소품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히스꽃이다. 야생마 같은 캐서린과 야생초 이미지의 히스클리프를 대변해주는 꽃이기 때문이다. 음울한 구름, 매서운 바람에 이어 폭우가 쏟아지면 반쯤 미친 히스클리프와 제 멋에 겨운 캐서린은 온통 히스꽃 천지인 들판을 맨발로 쏘다녔다. 히스꽃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갖지 않았던 사춘기 시절, 내 머릿속의 히스꽃은 김유정 소설의 동백꽃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다.까맣게 잊고 있던 히스꽃을 검색해 본 적이 있다. 절대고독이자 광적인 카리스마를 상징하는 히스클리프란 이름도 실은 히스꽃과 관련이 깊다. `절벽에 핀 히스꽃`이란 뜻에 어울리려면 뭔가 강렬한 포스를 풍길 거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확인해 본 히스꽃은 실망스럽게도 폭풍의 언덕이 아니라 여염집 울타리와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폐한 언덕 풍광과 궁합이 맞는 꽃이란 걸 인정하게 된다. 음울한 구름과 거센 바람을 견디려면 화려하기보다는 키 낮고 소박하지만 강인한 꽃이 제격일 터였다.히스꽃은 에밀리 브론테가 죽는 순간에도 함께 했다. 서른의 그녀가 죽어갈 때, 언니 샬롯 브론테는 구릉에서 꺾어 온 보랏빛 히스꽃을 그녀에게 건넸다. 히스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뿐만 아니라 브론테에게도 어울리는 꽃이었던 셈이다. 한 번이라도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 무어를 여행하고 싶다. 바람 부는 황량한 언덕에 서면, 드넓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고 거기엔 온통 연보랏빛 히스꽃이 만발하겠지. 무리 진 히스꽃 덤불을 배경으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은 여전히 맨발인 채로 저들만의 격정을 발산하고 있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6

SNS 단상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가 급속도로 확대되던 초창기, 팔로어 수가 자랑이던 때가 있었다. 넷 상에서 누가누가 더 넓은 인맥을 가졌는가를 내기하는 마당 같았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인 등 유명인들일수록 팔로어 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SNS 본래의 목적인 소통보다 허세와 자기만족에 더 치중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자연히 혀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도 늘어났다. 축구 선수, 아이돌 가수 등이 차례로 구설수에 올랐다. 만 천하에 공개되는 글이란 점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걸 무시한 결과였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지, 한 마디 말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고, 그것이 사회적 공분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이런 시행착오 때문인지 요즘의 SNS는 공개적인 것 못지않게 폐쇄적인 것도 활성화되고 있다. 관계망에만 치중하는 그물 치기식 확장보다는 구설수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모임방 식 폐쇄형도 인기가 많다. 소위 그들만의 밴드를 만들어 조촐하나마 진솔한 소통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소통 갈증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피상적인 인맥 대신 소규모지만 내실을 선택하는 현상이라 볼 수 있다.열린 공간과 폐쇄적 공간의 장단점은 있다. 전자에서는 모든 것에 솔직할 수가 없다. 솔직해서도 안 된다. 사적인 감정은 일기장으로 갈 것이지 공개된 SNS에 올라올 일이 못 된다. 원활한 관계망을 위해 사회 규범이 있는 것이니, 적당한 페르소나로 그 규범과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배려와 신중을 팔아 깊이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후자에서는 소위 우리끼리 모였으니 비교적 솔직해도 좋다. 일기장에 버금가는 말들의 폭포수로 스트레스도 날리고 진솔한 마음의 창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우리 삶 자체가 공개와 비공개의 연속이이고, SNS는 그 삶의 축소판이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게 두려우면서도 제 맘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운명적 속성이다. 이 팍팍한 세상, 약점 많은 SNS이지만 잘만 활용하면 그것은 작은 위안이 되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5

고졸미(古拙美)

우리 고전문화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던 딸아이가 묻는다. `고졸미`가 뭐야? 방송을 보지 않고 있던 나는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되묻는다. 시청하지 않은 핑계도 있지만 실은 나도 처음 듣는 말이니 그 되물음은 나도 모른다는 뜻과 같다. 어감만으로는 뭔가 고결하거나 고상함이 넘치는 단계를 표현하는 말 같다. 그세 딸내미는 스마트폰으로 사전 찾기를 한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란다. 완전히 내 생각을 벗어났다.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일까. 그쪽 방면에선 널리 쓰이는 `고졸미`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어봤다. (어쩜 상식의 문제인데 나만 몰랐을 수도 있다!)고졸미라는 한자를 보는 순간, 헛갈리기만 했다. 오래되었다는 뜻의 `고`(古)는 그렇다 치고, `졸`(拙)의 한자를 보는 순간, 왜 이게 `소박하다`는 뜻이 되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졸렬하다, 옹졸하다, 고 말할 때 쓰는 졸(拙)자만 떠오를 뿐, 다른 뜻으로 쓰이는 한자어 예는 한 단어도 연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사전 찾기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졸(拙)이란 말은 `옹졸하다, 졸렬하다` 라는 뜻 말고도 `둔하다, 어리석다, 질박하다, 수수하다, 서툴다, 불우하다, 곤궁하다`등의 뜻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그제야 서투루지만 빠른 것을 뜻하는 `졸속`이란 낱말도 떠올랐다.의문이 해소되고 나니 `고졸미`라는 말을 몰랐다는 부끄러움보다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어렵고 잘 쓰이지 않는 고졸미, 라는 말보다 비록 같은 한자어일지라도 흔히 쓰이는 `소박미`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라의 얼굴무늬수막새나 조선의 달항아리, 나아가 김정희의 세한도를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말 중의 하나가 `고졸미`라는 것을 깨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겠다. 남들 다 아는 말을 뒤늦게 익혔으니, 개인적으로 애정이 가는 단어는 아니지만 `고졸미`의 현장 학습을 위해 이른 가을 여행이라도 떠나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4

대체 행동

갈등하고 욕망하는 인간은 불안을 친구하기 십상이다. 이때 불안은 무의식적인 행동을 수반한다. 면접을 앞둔 수험생이 시계 잠금 장치를 풀었다 잠갔다 하거나, 수술실 앞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보호자가 의자에 앉았다 섰다 하는 행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인간 행동을 관찰한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을 빌리면 `쓸데없는 동작을 전혀 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한 자세로 본래적 의지대로만 하는 사람은 지배적인 사람이거나 갈등을 초월하거나 소외된 사람`이라고 보았다. 일반인의 전형에서 벗어난 이런 사람들은 예외로 치고 대부분은 저런 상황이 되면 침착성을 잃고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이처럼 내면의 정서적 혼란을 숨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어떤 동작을 골라서 행하는 것을 `대체 행동`이라고 한다.사람이 모이는 곳 어디에나 대체 행동이 있다. 추석도 그 좋은 예이다. 친척들이 몰려온다. 우선 손님을 맞는 맏며느리, 긴장과 불안의 징후인 대체 행동이 빠질 리 없다. 더 이상 치울 것 없이 정돈된 주방 앞에서 접시를 놓았다 들었다하고, 뜸 잘 든 밥솥 앞에 괜히 코를 들이밀며 밥 익는 냄새를 체크한다. 동서들 역시 푸짐한 음식 앞에서 형님에 대한 최대한의 공치사로, 돕지 못한 제 마음의 불안을 떨쳐내려 한다. 청년층은 오지랖 넓은 어른의 취업 걱정, 연애사 훈수가 자신을 향할까봐 아예 스마트폰에 눈길을 고정시킨다. 할머니는 빳빳한 새 돈이 든 지갑을 부여안고 각방에 흩어진 손주들을 순례하며 당신 건재를 증명한다. 이 모든 게 대체 행동이다.대체 행동이야말로 인간적이다. 자질구레하고 쓸데없는 이런 행위야말로 인간 이해의 필수 영역이다. 불안한 심리의 도피처인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궁지에 몰리지 않고,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 자신의 손바닥을 자꾸 부비거나, 머리칼을 자주 쓸어 넘긴다면 그 사람도 나만큼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체 행동으로 제 불안을 해소하는 중이니 가만 연민할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23

애덤 스미스의 공감

경제학자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정부의 규제를 철폐하고 경쟁을 촉진하면 풍요롭고 부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경제 활동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반하는 건 아니라고 보았다. `국부론`에서 보여주는 이러한 개인주의 관점도 실은 타인과의 공감을 전제한다. 그것은 그의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전에 철학자였음을 상기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면서도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지 않는 것은 사회화 과정에서 생기는 공감지수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고립적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다. 이를 두고 애덤 스미스는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이와 상반되는 천성이 존재한다`라고 표현했다.사람은 타인이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의 감정에 공감하려는 본성이 있다. 이를 근거로 개인은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요구에 맞게 행동하려는 경향을 띈다. 애덤 스미스는 바로 이러한 도덕 감정의 신호 체계 안에서 각자 경제적 이익을 최대화하려 할 때 건전한 시장이 작동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 도덕감에 의해 형성되는 정의를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간주했다. 즉, 사회를 떠받치는 토대는 정의지 자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자혜는 바람직한 권장 사항인 것으로 만족해도 되지만 정의는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보았다.이때도 공감이라는 보편 정서가 전제된다.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객관적 잣대가 아니라 오히려 개별자 내부의 공평한 관찰자 시선이 요구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성숙했느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공감 의지에 달려 있음을 스미스는 강조했다. 정의와 자혜를 규정하는 기본 정서에도 공감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은 그야말로 공감하기 좋은 독서거리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7

독자가 우선이다

유려한 만연체 문장이 아니라 피로를 불러일으키는 숨은그림찾기였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독자를 피곤과 짜증으로 몰아넣는다. 어쩌다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너무 잦으니 이해심에도 한계가 인다. 섬세한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작가와 편집자에게 화가 난다. 구병모 작가의 장편 `파과`를 읽은 소감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작품인데 개인적으로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너무 고역이었다. 작가의 부주의한 문장 때문이었다. 달디 단 포도 한 알을 급하게 삼키려다가 목구멍에 쏙 들어갈 경우 우리는 캑, 하고 뱉어낸다. 순간적 낭패감과 찜찜한 다행스러움이 목구멍과 입안에서 오래 맴도는 기분이랄까. 내용을 떠나 문장에서 그런 느낌을 받으니 쉽게 몰입이 되지 않는다.뜬 달을 중요시 여기지만 가리키는 손끝도 무시하지 않는 나쁜(?) 책 읽기 습관을 가진 나 같은 독자는 작가가 구사하는 문법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만연체를 구사해서도 호흡이 가빠져서도 아니었다. 너무 잦은 작가 특유의 비문의 진격 앞에서 인내심을 시험당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단정한 문법이, 깔끔한 문장이 전부라고 얘기할 마음은 전혀 없다. 만연체를 구사하든 단문을 엮어가든 그건 작가의 자유다. 한데 너무 독자를 의식하지 않거나 배려하지 않는 작가만의 웅얼거리기 식 문법에 당황스럽기만 하다. 생각 외로 독자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소설이란 무엇인가? 예술인가 아니면 단순한 구어체 발성법에 지나지 않는가?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착잡하고도 기본적인 질문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깊고 서늘한 우물 같은 통찰이 있고, 숨긴 칼날 같은 눈썰미가 있고, 냉장고 속 파과 같은 연민이 흐르면 그건 소설로서 충분한 것일까?모든 문학적 소설이 예술성까지 담보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메시지와 주제가 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소설이 되는 것도 아니다. 총체적 항목에서 어느 정도는 독자를 만족시켜야 안심하고 읽어 내려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소설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6

조정래와 정글만리

어지간히 공부하셨다. 신문이나 잡지의 중국 관련 기사를 6년이나 스크랩했다. 자그마치 90권 분량이다. 그다음 중국에 관한 책이라면 `중국 통사`를 비롯해 80여 권을 독파했다. 여기까지도 놀라운데 그게 끝이 아니다. 그 책들 가운데 소설 집필에 필요한 책 20권을 골랐다. 입시생처럼 줄 치고 메모지를 붙여가며 내용을 익혔다. 마지막으로 취재를 했다. 그 노트가 또 20권이다. 그러니까 중국 관련해서 선생이 준비한 노트만 110권이 된다. 이 모든 게 `정글만리` 집필의 원동력이 되었다. 조정래 작가의 세 권짜리 이 소설은 각 서점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금세 차지했다. 과도한 선인세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도, 요즘 소설계에서 뜨거운 존재감을 확인시키고 있는 정유정의 `28`도 제칠 정도이다.선생은 칭다오를 중심으로 여덟 번이나 취재 여행을 다녀왔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중소기업인도 만났고, 양해를 얻어 소설의 실제 모델로 삼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중국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과 친화하고 융화해야 한다. 그들을 진심으로 이웃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그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현실적인 인물을 소설 속에 고스란히 재현했다.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한 경제 소설이란 게 특별하게 보인다. 그에 대한 작가의 답변이 그가 쓴 작품만큼이나 새길만하다. 작가들의 시선이 문제란다. 말하자면 시야가 좁으면 좁게 쓰고, 넓게 보면 넓게 쓰게 되어 있단다. 소설은 인생 총체를 말하는 것이니 겁낼 필요도 없고, 못 건드릴 영역이 없다는 말씀이렷다!중국을 우리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들 시선 또는 적어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소설 같다. 선생의 인터뷰 기사만 보고 책을 주문했다. 아직 손에 들어온 것도 아닌데 반쯤은 읽은 이 기분은 뭘까? 그 옛날 `태백산맥`을 읽을 때의 감동을 이 책에서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3-09-13

거꾸로 가는 시간

이 글로벌한 세상에 유독 우리 현실만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이석기 사태를 둘러싼 정치권 및 언론의 여러 행태는 유행 지난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통진당 수뇌부의 `과대망상적` 발언이나 국정원의 `내란 음모`카드나 일반국민에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구태의연한 두 과거가 그들만의 레퍼토리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국민들은 귀 후비거나 코 파는 지겨움으로 그것을 구경할 뿐이다. 두 쪽 다 신선하지도 않고 21세기 정서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국정원이 통진당 수뇌부를 향해 내란예비음모죄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석기 의원 및 통진당 쪽은 예상대로 날조, 왜곡이라고 맞선다. 이석기 그룹의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몇몇 움직임이 내란음모에 해당된다는 것이 국정원의 입장이고 처음엔 모임 자체를 부정하던 통진당 쪽은 단순한 당내 모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기본 틀에다 변주만 가한 형태인 이런 공안 정국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레퍼토리이다.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와 어울리기 보다 마음이 병든 자에 가깝다. 이미 그들 그룹은 국회에 입성할 때나 대선 과정에서 희한한 행보를 거듭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동정의 대상이지 위협적 존재는 못 된다.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내란예비음모 증거 자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을 그 죄목으로 엮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그들의 정체가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고, 국민을 호도할 만큼 위협적인가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다. 법조계나 언론의 분위기도 그들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볼 정도로 명백한 목적과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쪽이다.마음이 병든 자는 치료의 대상이지, 교화의 대상이 아니다. 비뚤어진 정치색이나 고착된 이데올로기는 가두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선 개입이란 악재를 벗어나기 위한 국정원의 전환용 카드인지, 진짜로 내란예비음모를 할 만큼 그들이 통 큰 그룹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에 씁쓸해질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2

창의력이 필요해

하루 종일 단세포생물이 된 기분이다. 시쳇말로 뇌가 너무 청순해진 나머지 또릿또릿한 행보와는 거리가 먼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실수투성이 일상을 꾸리는 건 내게 흔한 일이다. 우선 독서모임에서 활용한 CD를 기기 안에서 빼내지 못해 허둥거렸다. 몸집이 큰 전문 기기였다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금세 CD 플레이어의 위치를 찾을 것인데 내 눈엔 그 데크가 그 데크 똑 같아 보인다. 기계치다 보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저녁에는 약속 장소를 찾느라 또 헤맸다.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주변 조명이 바뀌니 이 길이 아닌가 싶어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고 있는 거다. 당황하다 보니 선물로 준비한 책을 전하는 걸 깜박하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그건 바람일 뿐이다. 집에 돌아 올 때는 식구들 간식을 사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기다리던 식구들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은 거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한두 가지에 몰두하게 되면 나머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신경이 덜 쓰인 것들이 떠오르면 챙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창의적이지 못한 일상이 아쉽기만 하다. 이참에 우스갯소리나 한 번 해야겠다. 곧 죽을 할머니, 내 생명을 구해준 오랜 친구, 꿈꾸던 이상형 여자(남자) 등이 급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로 지나던 나는 오직 한 사람만 태울 수 있다. 누구를 옆자리에 앉힐 것인가? 단순 세포형인 나는 망설임 없이 오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력 만점인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답을 내는 이도 있다. 자동차 키를 친구에게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게 한 뒤, 자신은 이상형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탄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은 차치하고라도.두려워서, 당황해서, 예민해서 등의 핑계가 붙은 습관성 어리바리함을 벗어나고 싶다. 빠릿빠릿한데다 창의적이기까지 한 전천후 멀티플 인간형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내 현실은 멀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11

개와 돼지

일찍 잠이 깬데다 운이 좋았다. 유선 방송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그토록 보고 싶었던 `돼지의 왕`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거다. 폭력, 자살 등 수위 높은 장면이 많아 청소년 금지용이지만 정작 이 영화는 청소년기가 그 배경이다. 학교 폭력이 주는 씻을 수 없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자, 어린 나이에 계급의식을 인식하고 인정해야만 했던 우리 자화상에 관한 통렬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찜찜하다. 불편하기만 한 진실이기에 당혹스럽고 갑갑한 느낌이 이 영화의 본질이다. 중1 어린 나이에 약한 이들은 악한 그들에게 철저하게 신체적 인격적 유린을 당한다. 돈 있는 집, 공부 잘 하는 집, 힘 있는 집 아이들은 개에 비유되고, 돈 없고, 존재감 없는 데다 힘마저 없는 아이들은 돼지에 비유된다. 그들 때문에 이들은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고 끝내 너무 가슴 아픈 반전의 비밀을 갖게 된다.어느 누구도 어린 그들 간에 계층이 정해져 있다고 가르치지 않지만 그들은 교실 현장 속에서 이미 계급의식을 자각하게 된다. 가난해서 서럽고, 소심해서 두렵고, 힘없어서 무서운 아이들은 폭력과 정서적 학대에 노출되기 쉬운 캐릭터들이다. 무력해서 절망하는 아이들은 내가 무시당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뼛속 깊숙이 맛보지만, 유력해서 희희낙락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호사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의 아픔을 돌볼 근본적인 계기조차 그들에겐 마련되지 않는다. 개와 돼지의 갈등에서 개의 필연적 우위가 예견될 수밖에 없다.`돼지의 왕`은 너무 날카롭고 매워서 눈과 혀를 돌리고 싶은 현실을 고발한다. 부드럽고, 달콤한 것들만 보기에도 아까운 날들인데 감당하기 벅찬 실상을 들여다보고 받아들이려니 쓰리면서도 안타깝다. 하지만 섣부른 낙관주의와 때 이른 온정주의의 순진성을 경계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는 이런 영화는 불편하지만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은 대개 따뜻하고 포근하지만, 그 이면의 차갑고 거친 공기 속에서 돼지의 왕을 꿈꾸는 서글픈 현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므로./김살로메(소설가)

2013-09-10

눈물

눈물샘에서 만들어진 눈물은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밖으로 표출된다. 바람 또는 알레르기 현상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환경적 요인의 눈물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 이해 받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인 눈물은 그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띤다.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이 토크쇼에 나와 차례로 눈물을 보인 것이 이슈가 되었다.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자신의 연애사를 들먹이며 사회자들이 약을 올리자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옆자리의 동료 아이돌도 뒤질세라 배턴을 이어받았다. 애교를 보여 달라는 주문에 난감해하자 한 사회자는 숫제 맡겨 놓은 돈 뺏어가듯이 윽박을 질렀다. 겁에 질린 아이돌 출연자는 넘치는 애교 대신 그 누구도 원치 않은 눈물을 보여주고 말았다.프로라면 두 경우 모두 농담으로 맛깔스레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아이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자연발생적인 환경적 요인의 눈물처럼 심리적 요인의 눈물도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중들은 그렇게 이해심이 넓은 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아직은 어린 그녀들을 이해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거고, 그래야만 프로라고 생각하는 자체도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덜 이해하는 데서 오는 단정적 언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정리 되지 않고 복잡 미묘한데다, 잦은 스케줄로 스트레스 지수마저 높은데, 멍석도 깔아 주지 않고 내키지 않은 것을 하라니 서러운 눈물만이 솟구칠 수도 있다.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적절히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이십대 때의 여성 감성이 가장 섬세하고 다치기 쉬운데 현 상태가 얼마나 힘겹고 난감할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린 여자의 눈물이 다 연민하고 동정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의 눈물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요청하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주는 이도 필요하다. 누구나 청춘의 강을 건너왔고, 건널 터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3-09-09

본질은 다양하지만 단순해

노트북 워드프로세서 기능이 내 의지대로 먹혀들지 않는다. 복사도 잘 안 되고, 파일 저장도 몇 번이나 클릭을 해야 겨우 될 정도이다. 평소에 인터넷도 느리게 뜨는데다 자판키도 변덕이 심하다. 내 생각엔 노트북이 오래되어 그런 것 같은데, 식구들은 내가 기계치인데다 컴맹이라 활용을 제대로 할 줄 몰라 그렇단다. 오늘도 노트북은 내 맘대로 되지 않았다. 불필요한 문장에다 검은 옷을 입혀, 지우기를 해야 하는데 원하는 부분만 선택되는 게 아니라 자꾸만 모든 문장에 검은 옷이 입혀진다. 몇 번 클릭을 해야 겨우 한 번 성공할 정도이다. 그도 잠시, 저장하기 위해 파일 버튼을 누르면 목록이 떠야 하는데 목록 자체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어쩌란 말이냐. 시간은 없고, 마음은 급하고.출근하느라 바쁜 남편 손목을 끌고 컴퓨터 앞에 앉힌다. 한두 번 시도해보더니 말없이 마우스 패드를 다른 것으로 바꾼다. 어라, 마법에 걸린 공주가 잠에서 깨어나듯 글자가 살아나고, 원하는 문구 위에 척척 검은 장막도 드리울 수 있다. 그토록 애 먹이던 파일 목록도 잘만 뜬다.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다! 나로선 노트북 자체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 단 한 번도 마우스패드가 낡아서 접촉 불량일 수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마우스에라도 이상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도 이르지 못했다. 오로지 컴퓨터가 잘 안 되는 건 컴퓨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어떤 문제의 본질은 너무 단순해 문제 자체가 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거창한 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는 손가락이 아플 뿐인데, 나는 지레짐작으로 그 상대의 오장육부까지 관장하려 든다. 달을 가리키는 손과 달이 있을 때 언제나 저 달만이 답일 거라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때론 달을 가리키는 손끝에 답이 걸려 있을 수도 있다. 삶의 본질은 내가 바라고 원하는 곳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의 다양하고도 단순한 모습으로 존재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06

타인을 배우고

모든 초고는 걸레다. 헤밍웨이가 한 말이다. 무언가를 처음 완성했다는 건 스스로에겐 자부심이 될 수 있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허섭스레기일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그 `걸레`가 전혀 쓸모 없는 건 아니다. 퇴고를 거듭하면 고급 비단으로 다시 태어난다. 문제는 걸레조차 만들지 않거나 만든 걸레를 방치하는 거다. 걸레를 낳아 비단으로 변모시키는 에너지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박수를 받을 만한 일도 없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도 걸레 초고를 썼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절박한 궁핍, 절절한 외로움이 그녀의 초고를 천문학적인 재산으로 바꿔놓았다. 이혼과 육아, 설상가상으로 실업까지 겹쳐왔지만 끝내 초고의 끈을 버리지 않았기에 성공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만나는 사람 모두가 스승이다. 그들 중엔 헤밍웨이가 말한 걸레를 걸레로만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진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무기력과 피곤의 줄타기를 오르내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기계적,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생활리듬에 지칠 때 세상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 덕에 큰힘을 얻는다.하반기 각종 강좌가 시작되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자기소개 시간마다 진진하게 쏟아지던, 사람 냄새 나는 얘기들을 듣는 것 자체가 큰 공부가 되었다. 가을 소식 전하는 바람보다 빨리 서늘한 감동이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늦깎이라 더딘 깨침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 자녀와 자아 계발을 위해 독서 기법을 연구하는 이들, 몸과 마음을 살찌우기 위해 네일 아트에서 심리 상담까지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 등등 도처에 스승이 포진해 있었다.피곤하다는 이유로, 편해지고 싶다는 욕구로 스스로를 방치하려던 마음 끝에 다짐이란 줄을 세워본다. `어제를 배우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꿈꾸어라`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을 인사말로 시작하던 강좌 센터장님의 말을 살짝 패러디해야겠다. `타인을 배우고 오늘에 적용하면 내일의 꿈은 이루어진다`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9-05

모든 것의 빌미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배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의 치유 프로그램이 어느 한 쪽만 일방적인 혜택을 보는 경우는 없다. 공감대라는 공통분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끄는 쪽이나 따르는 쪽이나 서로 배우게 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마음상함`에 관한 주제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상처의 근원지인 가족과의 마음 상함에 대해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상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알래스카에 사는 생면부지의 아저씨와는 상처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다. 타인의 풍성한(?) 사례에 비해 비교적 다행한(!) 제 상처에 위안을 삼는 모습은 어디나 같다.안에 있는 그들이나 밖에 있는 우리나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뜻하지 않게 우리는 유행가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 내 영혼에 흠집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때 언제나 눈물짓는 피해자는 나이고, 몹쓸 가해자는 상대방이다.(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라고, 자신의 잣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대는 내 영혼을 교란시키고 내 심장을 후벼 판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나도 상대의 뺨을 갈긴다. 순차적으로 쌍방의 영혼에 펑크를 내고 만다.그 와중에 멋진 결론을 내 주는 한 분이 있다. 모든 상처의 빌미는 스스로에게 있단다.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생각만 많아졌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고 `나` 아닌 원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단다. 옆 사람이 날 모욕하는 건 내 작은 교만의 턱짓 때문이다. 옆집 아줌마가 내 눈빛을 거절하는 건 오늘아침 그미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바쁘단 핑계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모든 것의 빌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마라. 이 편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 마음 상함 때문에 타인을 단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한 말을 받아 적는 이 순간이야말로 `힐링`이란 말이 가장 어울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04

잡스라는 아이콘

스마트폰이 빠르게 세계로 확산된 데는 애플사의 `아이폰`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배경에 스티븐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뜬 뒤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전기문을 읽었다. 괴팍하고 특이한 그의 성정 이면에 버림받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추진력 뒤에는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양부모와 절친 사업 동료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잡스에 관한 영화가 나온다고 했을 때 기대감에 들떴다. 전기문을 넘어선 뭔가 강한 한 방이 있을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영화로 옮겼을 때의 말할 수 없는 지겨움 같은 게 화면에 흘러나왔다.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 경우였다. 세상을 뒤집어버린 천재 괴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도, 하다못해 혼잣말이라도 들어볼 수 없었다. 버려진 자식으로서의 상실감, 도덕과 불화하는 내면의 혼란, 선불교와 인도에 관심이 많던 히피족으로서의 젊은 잡스, 까다로운 채식성과 어울리지 않는 다혈질 등 섬세하게 짚을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뽑아내지 못했다.인간 잡스를 그리지 못한 영화는 실패작으로 보였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꾸렸다면 이만한 실망감에서는 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전에 잡스에 관한 정보가 없거나 잡스 전기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잡스로 분한 애쉬튼 커처의 연기력이었다. 그것으로 커버하기엔 감독의 한계가 빤히 보였다.잡스라는 아이콘은 너무 선명하고 그 콘텐츠 역시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영화에 와서는 흐지부지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별나거나 희한한 짓을 하면 흉보거나 손가락질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미친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런 내용의 내레이션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영화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9-03

가을 편지

시인 원재훈은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고 담담하게 읊었다. `한때 나는 편지에 모든 생을 담았다 / (중략) 창문이 열리듯, 낙엽은 하늘을 듬성듬성 비어 놓았다 / 그것은 상처였다 / 언제부턴가 내 삶의 간이역에는 기차가 오지 않아 / 종착역이 되었다 / (중략) 별들이 애써 하늘의 아픔을 가리고 있었다 / 그 아래에서 서성거리는 나의 텅 빈 주머니에는 / 그대에게 보낼 편지가 없다 / 우체통에 넣을 편지가 없다`하늘빛은 한층 차분해지고, 땅의 열기도 많이 숙졌다. 열린 창으로 다급히 들어오는 바람의 숨결에 가을 냄새가 확연하다. 이때쯤이면 가을 편지 한 자락이 생각나야 제격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손 편지를 주고받기 드문 시대를 살고 있다. 기억을 살리기조차 아득하다.편지지 위에다 내 의지의 손으로 연필을 움직인다는 건 온몸으로 쓴다는 거다. 때론 에두르고, 더런 질러가며 하고 싶은 말들의 호흡을 가다듬던 그 불면의 흔적들. 상처의 갑옷을 입거나 환희의 날개를 달았던 그 까만 사연들은 쓰는 순간엔 상대를 넘어 우주 끝까지 가도 좋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편지 한 통에 기가 다 빠져 다음날을 꼬박 앓아눕고 나면 유치찬란했던 간밤의 실상이 제대로 보여 그 편지는 찢기기 일쑤곤 했다. 그래도 숙명처럼 편지를 즐겨 쓰던 시절이 우리에겐 있었다.친구들에게 받은 오랜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 잊고 지냈는데 십대와 이십대를 추억할 수 있는 좋은 매개물이 되어준다. 받은 게 쇼핑백 가득이니, 편지 쓰기 좋아했던 내가 보낸 건 그 두 배는 족히 되리라.갑자기 그것들의 운명도 궁금해진다. 편지 하지 않는 지금의 세대는 감성이 메말라서라기보다 대체할 것들이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모르는 것 많아 눈이 바쁘고, 너무 빨리 돌아가 따라갈 수 없는 지금 세상이, 느린 손 글씨와 침 발라 붙이던 우표와 어울리기나 하던가. 그래도 가을 온다는 바람의 영근 전언을 한 번쯤은 손 편지로 배달하고 싶다. 한데 그 많던, 편지 받을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9-02

자업자득

방과후 문예 활동 시간에 `내 방`이란 소재로 열 줄 글쓰기를 했다. 제한된 시공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글쓰기 지도 방법 중의 하나가 `열 줄 쓰기`이다. 한 학생의 글에서 눈에 불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에 대한 전적인 애정과 신뢰가 묻어나왔는데, 처음엔 부러움이 일다가 나중엔 부끄러움이 퍼지게 하는 그런 글이었다. `내 방은 여관이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에 벌써 긴장했다.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학생 생활이다 보니 `내 방`이란 현실은 잠만 자게 되는 공간이다.그런 방도 밤새껏 어지럽혀 놓고 나오기 일쑤인데 저녁에 집에 들어가 보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단다. 마치 여행할 때 섬세한 곳까지 신경 쓴, 깨끗한 잠자리를 만난 것처럼 잘 치워져 있단다. 좀 더 쾌적한 밤을 보내라고 엄마는 아침마다 딸이 나간 뒤 방청소를 한다. 엄마의 그 정성을 알기에 딸은 `내 방`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 대신 `모정`에 대한 감사를 표한 것이다.그 학생의 엄마가 부러우면서도 스스로는 몹시 부끄럽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자식이 부모 생각하는 마음 역시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엄마 스스로 모범을 보이면 딸은 자연스레 보고 배운다. 물 맑아 손으로 떠 마실 것인지, 탁한 물에 코를 풀 것인지의 열쇠는 엄마에게 달려있다.한석봉 엄마가 맹자 엄마보다 위대한 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열악한 환경에서도 제 성실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것 해라, 저것해라 지시하는 엄마보다 묵묵히 실행하는 엄마가 자식에겐 더 나은 본보기가 된다.방 한 번 제대로 청소해 준 적 없으면서, 치우라는 무언의 한숨이나 짓는 나 같은 엄마를 둔 딸들은 제 방 문을 쾅 닫은 채 무엇을 할 것인가. 엄마에 대한 애틋한 헌정사를 쓰는 대신 잘못 만난 엄마를 원망하는 랩 가사를 쓰고 있으리라.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 했다. 딸 맘을 얻으려면 먼저 모범을 보이는 모성이어야 한다. 베풀지 않고 바라는 건 과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30

네 잘못이 아냐

사춘기 때 그녀는 집을 나갔다. 없는 살림에다 마마보이인 그녀의 아버지는 피해의식에 절어 있었다. 괜한 자격지심으로, 이웃한 큰집 식구들 앞에서 그녀와 그녀의 엄마를 벌레 취급했다. 생활비를 받지 못한 모녀는 나란히 도벽이 생겼고, 사랑 받지 못한 외로움으로 지칠 대로 지쳤다. 중2 소풍날이었다. 보란 듯 그녀의 아버지는 또래의 사촌에게는 소풍 용돈을 쥐어주면서 그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아니 아버지를 버릴 때가 되었다고. 신작로를 벗어나 보리밭에 퍼질러 앉아 엄마가 싸준 소풍 도시락인 멸치 주먹밥을 눈물로 삼켰다. 학대와 모욕을 덩이 째 주던 아버지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이 희망의 날갯짓처럼 다가왔다. 몇 십 년이 흘렀다. 자신과의 설운 약속대로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 이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상처와 맞바꾼 그녀의 승리였다. 전언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진 않지만 여전히 자책 중이라고 했다. 상처의 수렁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며, 옛 친구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네 잘못이 아냐.` 그녀를 만날 수만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다. 믿고 의지해야 할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보다 쓰리고 아픈 건 없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에게 버림 받은 상처투성이 천재 윌에게 숀 교수가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한 사람의 특별한 행동 그 이면을 가슴으로 이해한 자만이 건넬 수 있는 심연의 말이다. 눈빛을 맞추고 목소리 톤을 조절해가며 열 번 이상 진심을 다해 말한다.가족은 환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상처의 근원이기도 하다. 어떻게 천륜인 아버지를 배반할 수 있냐는 꼰대 같은 발언보다 그녀가 매도당할 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변호하는 쪽에 손을 들게 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가족이 주는 상처 때문에 힘겨워 하는 모든 이에게 오늘 저녁 건네고픈 치유의 말은`네 잘못이 아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9

예의라는 폭력

제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크게 보인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하여 `잘 아니까 똑바로 말해주는 거야` `뒤끝은 없으니 서운해하지마`라며 상대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맞는 말처럼 들리는 저런 어법이야말로 불편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것을 고려치 않은 채, 제 눈의 들보 든 지도 모르고 충고랍시고 권력자들은 남의 약점을 캐는데 일가견이 있다.선인들이 타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를 조심하라고 가르친 건 제 안에 더한 그 왈가왈부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리라. 말하지 않는 약자는 타인의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예의 상 알 뿐이다. 자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선인들은 가르쳐왔다.하지만 예의 또는 예절이라는 게 동양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복종의 기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다른 이를 존중하면 모욕당할 일이 없다`고. 애초에 그 말은 지위상하와 관계없이 태어난 말일 게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예계에서 선배에게 깍듯이 인사하지 않는 것은 큰일날일이지만 먼저 상대를 발견하고도 선배가 후배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난다고 흥분하는 사람은 없다. 구석구석 살피면 예절은 언제나 약자 또는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권력 가진 자가 예의 부족 구설에 오른 예는 단연코 들어본 적이 없다.예절은 마음의 진정성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갑의 위치라 해서 진정성과 형식을 표현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옛말에 `인사에 선후 없다`라고 했다. 예절에도 선후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예절은 언제나 강자 앞에서 표하는 약자의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잘 안다는 이유로, 뒤끝 없다는 핑계로 갑은 을에게 폭력적 언사를 일삼는다. 예절에서 인간 동격 개념을 적용하기엔 무리인 세상을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