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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랑의 속성

느지막이 영어 공부에 매혹당한 친구가 카톡으로 영어 문자를 보내왔다. 동양고전을 쉬운 영어로 풀어쓴 것을 하루에 한 문장씩 익히는데 영어도 늘고, 마음공부도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 과거에는 그가 살아있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그가 죽기를 바란다. 이거야말로 자기기만이다.` 이런 내용인데, 자신의 요즘 심경을 대변해주는 말 같아 맘에 새기고 있단다. 첫 문구를 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란 글을 풀어 쓴 것 같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란 의미로 사랑에 관한 단상을 말할 때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고 장영희 선생의 수필에서 그 말을 처음 접하고 공감했던 기억이 났다. 출처를 찾아보니`논어`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애지욕기생`, 이 부분만을 인용해서 사랑의 충만함에 대한 메시지로 활용한다. 근데 따라온 뒷말을 보니 일종의 반전이 있었다는 걸 알겠다.원문과 해석을 찾아봤다. 덕 쌓기의 숭고함과 미혹의 어리석음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예시 중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사랑하면 상대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죽기를 바란다. 이미 그가 살기를 바랐으면서 다시 죽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혹이다.` 인간 사랑의 숭고함이나 낭만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심성의 간사함에 대해 공자는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사람의 마음을 경계하는 가르침인 셈이다.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 주고 상처 받기 쉽다. 상대를 그러안는 동안에는 모든 게 사랑스럽다. 하지만 미운 마음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자제가 어렵다. 인간의 나약함을 선현들은 일찍이 갈파하고 있었다. 친구 역시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해 이 경구를 새기고 있는 중일 게다. 사랑의 솔직한 속성은 할 때는 쉬워도 끊을 땐 비루해진다는 것이다. 그걸 뛰어넘으려는 안간힘을 가리켜 인간적이다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6

행복 유예

실로 다양화되고 다변화하는 시대이다. 한데 그 변화무쌍한 것들에도 일정 패턴이 있다. 한 해 발생한 트위터 문구 15억 건 이상을 모 소프트 회사에서 분석했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행동에는 시간대별로 일정 패턴이 있단다. 예를 들면 커피 마시는 시간은 물론 마시는 행위도 유형화할 수 있다. 하루 세 번 특정한 시간에 `커피`라는 말이 등장하고 그 각각은 속성별로 모닝커피, 테이크아웃 커피, 카페 커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마디로 수집 분석 된 자료는 우리에게 적절한 `때`를 알려준다. 데이터 중 흥미 있는 부분은 요일별 감성 지수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떤 요일에 기분이 가장 좋을까? 월요일 최악의 상태였다가 금요일로 갈수록 기분 좋음의 최절정 상태를 맞이한다. 그러다가 토요일 저녁부터 급격하게 우울 모드가 된다나. 월요일 해야 할 일이 생각나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지 못한다.연구에 의하면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우리만큼 걱정을 앞당기지는 않는다. 그들의 토요일은 우리의 그것에 비해 훨씬 즐겁다. 미리 걱정하는 우리 정서로는 금요일 저녁이 기분 좋음의 절정이다. 오죽하면 `불타는 금요일`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토요일 저녁만 되면 월요병이 소급되어 텔레비전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한다. 심지어 일요일 저녁에는 외식조차 꺼리게 된다. 다음날 맞닥뜨릴 일거리가 걱정되어 최대한 움츠리게 된다.행복을 유예하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 관습 같다. 서구사람들은 일 년 번 돈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소비할 것인가를 구상한다. 한 달 간의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일 년을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그에 비해 우리는 하루 삶의 무게만으로도 벅찬데 제 평생의 삶을 미리 얹어 걱정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 정도는 유예하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미뤄진 행복이 먼 훗날에는 온다는 보장이 있기는 하던가. 다음날의 안녕을 위해 휴일 정서까지 방해 받는 소시민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너무 먼 당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5

스미싱 주의보

`우리 준이가 태어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어요. 축하해주세요` 낯선 번호에 수상한 문자이다. 링크도 걸려 있다. 접속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잠시 한 호흡 쉬어가기로 한다. 주변에 돌을 맞는 지인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느닷없이 저런 형식으로 문자를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궁금한 건 포털 사이트 지식 창에 물어 봐, 라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얼른 검색을 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문자 피싱이다. 이런 신종 사기 문자를 `스미싱`(Smishing)이라 한단다. SMS(Short Message Service)와 피싱(Phishing)의 합성어인데 안내장, 무료쿠폰, 요금 명세서 등의 문자로 가장해 첨부된 링크에 수신자가 접속하도록 해 돈을 빼가는 수법이다. 링크된 주소를 클릭하는 순간 악성 코드가 깔리고 소액 결제를 유도하는 메시지가 뜬단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만 걸려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전자기기에 능숙한 젊은 세대들도 피해를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바일 초대장이나 무료 쿠폰 문화 등에 익숙한데다, 이름도 그럴듯한 신제품 아이스크림 `악마의 쇼콜라` 무료 시식권을 다운받으라는데 어찌 유혹당하지 않을 것인가.스미싱 피해 사례가 점점 늘어나는 건 그 수법 또한 날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한 방법에 대처할만하면 다른 기발한 방법으로 유혹한다.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새롭고 희한한 문구들이 등장한다.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속는다. 소액 결제 피해액이라 당하고도 귀찮아서 넘어가기도 하고 요금 내역서를 제대로 보는 경우가 없으니 모르고도 지나는 경우도 제법 있을 것이다.근본적인 대책보다 그들의 교묘한 수법이 한 수 위이니 당분간은 스미싱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는 수상하거나 낯선 문자에 포함된 링크는 접속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그들의 낚시질에 휘둘렸다면 즉시 요금 결제를 막아달라고 통신사에 연락을 취하는 방법과 함께./김살로메(소설가)

2013-08-02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 제목이 있다. 불안에 대한 인간의 제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영화와는 상관없이 그 제목 한 번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로 우리 삶은 불안하고 그 불안 때문에 영혼이 야금야금 잠식당하는 기분이 드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자족의 빛이 넘쳐나는 것만큼 불안의 그림자 또한 짙다. 불안과 친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 예를 들자. 입시생 엄마들이 모이면 관심사 중의 하나가 `용한 점집 찾기`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풍경일 텐데 불안의 정서와 관계가 깊다. 자식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대학입시야말로 부모가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궁금증이자 불안감일 수 있다. 수험생들 속 타는 것 이상으로 엄마들도 노심초사한다. 섣불리 허심탄회하게 드러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삭이자니 속병이 날 지경이다. 그 와중에 `잘 본다`는 소문이 도는 역술인들의 정보라도 얻으면 성지 순례하듯 길을 나선다. 내 불안을 위무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한국인 정서 밑바탕엔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적 유전인자가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종교와 관계없이 입시철이 되면 역술인들을 찾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우리식 종교 정서는 기복신앙에 가깝고 그 기복 대상 또한 내 가족, 내 핏줄이 우선이다. 내 자식의 앞날이 궁금하고 내 남편의 재복과 건강이 궁금한 것이지 거창한 주제인 인류공영 따위는 인심 쓰는 덤에 지나지 않는다.불안의 제일 원인은 욕심 때문이다. 사회는 급변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당연히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유를 가질 시간이 없다. 오직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자족만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도 벅찬 시대가 되어버렸다. 점집을 순례한다고 그곳에서 내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근본적인 불안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맘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그보다 나은 위안처가 없으니 사람들의 귀가 솔깃해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니 그렇게라도 위로를 간구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1

해리엇 제이콥스

휴가는 게으르게 보내야 제격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빈둥빈둥 시간을 축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휴가이다. 잠시 지루한 타이밍에 집어들 수 있는 책 몇 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이번 휴가 때 가장 눈에 들어온 책은 해리엇 제이콥스에 관한 것이었다. 흑인 노예였던 그녀는 주변의 도움으로 `린다 브렌트 이야기`라는 가명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1861년 나온 이 책은 어린 주인의 재산으로 양도된 노예 제이콥스의 처절한 투쟁기이다. 그녀는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만 당당하게 맞섰고, 사랑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7년이란 긴 독방 생활을 처절하지만 잘 버텨냈다. 얘기에 쉽게 몰입되는 건 그녀의 글 솜씨도 한몫했다. 감각적이고 유려한 그녀의 문체 때문에 발간 당시에는 여성 편집자의 소설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을 정도였다. 여주인의 배려로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건 노예인 그녀로서는 큰 행운이었다.그녀는 폭군 주인을 피해 사랑하는 백인 남자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숨어서 지냈다. 그렇게 7년을 분투한 끝에 아이들도 되찾고 북부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여성 노예 신분으로 자신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런 모습에 당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단순히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 건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노예들을 위해 힘이 돼줄 수 있는 깨친 여성들의 힘이 필요했다. 처절한 환경 속에서 속박받는 2백만 남부 여인들의 처지를 북부 여성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기본 인권에 대한 그녀의 정신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성권리신장으로 이어졌다.개인적 차원이라면 침묵해도 좋을 고난사를 그녀가 기록으로 남긴 건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한다. `오직 경험해본 자만이 악의 나락이 얼마나 깊고, 어둡고, 추악한지 깨달을 수 있다`고. 세상의 악행 앞에서 저항하는 모든 개별자들의 의지는 끝내 유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제이콥스 여사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31

육추(育雛)

벗들이랑 계곡에 물놀이를 하러 갔다. 배려하고 솔선수범하는 마음들 모여 유쾌한 수다를 떨었다. 수다의 연장으로 산책하는 길에 재밌는 장면을 보았다. 장정 허벅지보다도 크고 긴 렌즈가 달린 카메라들이 일제히 한 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그 모습이 위압적이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말로만 듣던 단체 출사(出寫) 현장이다. 한데 무엇을 찍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호기심 많은 한 벗의 권유로 기어이 현장 구경을 하기로 한다. 호반새의 육추 장면을 찍는 중이란다. 육추란 말 그대로 `새끼를 기르는 것`이다. 조류의 경우 그것은 어버이새가 새끼새를 위해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말한다. 호반새는 관심이 필요한 등급에 해당하는 귀한 새로, 그 화려한 자태 때문에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궁금해 하는 불청객을 위해 사진가들은 몇 시간을 기다려 찍은 호반새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단단하고 큰 부리부터 온통 주황빛인 호반새의 순간 포착 파노라마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그들의 권유로 부모새가 둥지로 날아왔다 사라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순식간이라 눈으로는 그 움직임의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어미 호반새는 살찐 비단개구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찰나의 손맛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해 사진가들은 조류 사진 찍기에 매료되나 보다. 새를 찍는 것은 돈이 생기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날랜 새들을 순간 포착하는데서 작은 기쁨을 누릴 뿐이다. `새 관찰자`들은 그 단순한 자족을 위해 며칠씩 야영하는 수고를 감내한다. 그들에겐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자유의 시간이다.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자연은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먹이를 물어오고 받아먹는 새들의 입은 정직하다. 새를 찍는 그들은 그 자연에서 온갖 우주의 법칙을 발견한다. 일견 무의미하게 보이는 기다림의 짜릿한 미학, 육추의 순간을 포착하고 난 뒤의 저릿한 마음, 이런 숭고한 향연은 잠시나마 인간의 못된 분별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30

약자를 위한 연대

아침방송에서 한 중견가수가 우스갯소리를 한다. 부부가 함께 늙는다는 것에 대해 진솔한 얘기를 하던 중이었다.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은 송해씨란다. 아내 입장에서 보면 그는 구십 연세에도 돈을 벌어온다. 지방에서 녹화할 일이 많으니 집에서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일이 거의 없다. 귀가할 때에는 지역 특산물을 양손 가득 들고 온다나. 송해씨도 잘 알고 있다는 이 유머를 처음 듣는 순간 너무 공감 되고 웃기는 거다. 이 기발한 얘기를 남편에게 재전달했더니 언제 적 이야긴데 이제 와 웃느냐고 한다. 자조 섞인 그 유머를 남자들끼리 주고받으며 씁쓸해한지 오래란다. 남성연대의 상임대표가 한강 투신 이벤트를 벌이다 실종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상대적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정부 지원금을 받으며 운영되는 여성부 및 각종 여성단체들을 상대로 무일푼으로 싸워왔단다. 시민들에게 호소해 모자란 1억의 활동비를 빌리고자 이런 이벤트를 벌였다니 안타깝기만 하다.남성연대의 시각이 모든 여성을 적으로 본 게 아니라 약자 여성을 배려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여성부가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듯 남성연대도 여성에 대한 적대감보다는 연대의 대상으로 봐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여성부, 남성연대 이런 식으로 성 대결을 해가며 언쟁을 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는다. 배려의 차원이라면 세상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지어지는 게 아니라 강자와 약자로 나뉘어져야 한다.남자든 여자든 약자가 배려의 대상이어야 한다. 남자가 항상 강자이고 여자는 항상 약자인 세상도 아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무시당해도 좋을 이유가 없듯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배려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여성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고 남자의 권위가 살아있다곤 하지만 그 짐 역시 무겁기만 하다. 남자, 여자로서가 아닌 강자와 약자가 상생하는 게 조화로운 삶이다. 남성연대의 실종 사건이 단순 해프닝이길 바라며 약자를 위한 연대가 늘어나는 세상이길 바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29

짧은 만남 긴 우정

시간과 우정이 비례하는 건 아니다. 학창 시절의 친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서로 도움 주는 이웃사촌만 못하고, 종일 붙어 있는 직장 동료라도 마음 먼저 주는 멀리 사는 친구만 못하다. 한마디로 오래 알아왔다고, 자주 만났다고 무조건 우정이 깊은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공감지수이다. 서로를 향하는 진심이 통할 때 우정은 지속된다. 인터넷 서재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다섯 명 모두는 책을 좋아하고 사람을 귀히 여기며 섬세한 감각을 지녔다. 좋은 날 불쑥 각자 기차를 타고 청주나 부산 또는 경주나 대전 어디쯤에 모여 점심을 함께 한다. 읽은 책을 화제 삼고 가진 책을 나누며, 잘 쓴 글을 부러워하고 책 목록을 공유한다. 물론 책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자식 문제를 의논하며, 남편 흉도 보고 시댁 문화를 성토하기도 한다. 주어진 한나절의 시간이 짧다는 걸 알기에 오래 만나는 사람들 이상으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내곤 한다.이 매혹적인 모임은 책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한 친구 덕에 가능했다. 열정과 선함이 몸에 밴 그미는 나머지 네 명을 적극적으로 아우르고 배려하고 챙겼다. 그 덕에 전국 어디서나 자유롭게 모여 토론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 어떤 방해꾼도 없이 한나절을 오직 책만으로 즐거웠다. 그렇게 모임을 이끌던 그미가 멀리 떠났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식구 모두 LA로 가게 되었다.환송회가 있던 대전 모임, 그녀의 착한 남편은 손수 그린 그림 네 점을 들고 나타났다. 남은 우리를 위한 깜짝 선물이었다. 미술을 전공한 그녀의 남편은 또박또박 우리말로 아내의 좋은 친구가 돼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울고 웃었다. 감동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그랬듯 그곳에서도 그녀는 제 좋은 기를 나눠줌으로써 여러 사람에게서 사랑받을 것이다. 선한 열정을 가르쳐준 그녀를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년 뒤 그곳에서 만나자는 그녀의 진심어린 약속을 꼭 지키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26

절실하면 가식도 진심

사람에겐 기본적으로 인정의 욕구가 있다. 포만감으로 따뜻해진 배를 두드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SNS야말로 인간의 그런 욕구를 위한 대표적인 발명품이다. 그것의 속성은 `나를 알아봐 줘`이다. 당연히 허세와 겉치레가 친구로 따른다. `스프링컴레인폴` 카페에서 `새싹 곁들인 닭가슴살 샐러드`와 `두부 라이스`로 `브런치 타임`을 즐긴 것을 SNS에 올린들 내 삶의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현실은 개수대에 담긴 설거지거리와 바구니에 담긴 빨랫감들에 한숨짓는 내 모습이다. 나를 알리고 싶은 욕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그것들을 버리고, 과장된 일상일지라도 SNS에서 만이라도 자족감을 맛보고 싶은 것이다.그렇다고 일기장처럼 그곳에다 제 속내를 드러낼 수는 없다. 별 생각 없이 걸러지지 않은 말을 내뱉을 경우 `무개념`의 좋은 표본이 된다. 유명인들이 구설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SNS에 올린 글 때문이 아니던가. 최근 모 뮤지컬에 출연 중인 배우도 곤혹을 치렀다. “사인회 싫어, 사인회 싫어. 공연 끝나고 피곤 피곤한데 방긋 웃음 지으며 `재미있게 보셨어요? 성함이?` 방실방실, 얼굴 근육에 경련 난다.” 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곳에다 넋두리를 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사과하기에는 이미 늦다.누군가 말했다.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라고. 그 말에 완전 수긍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SNS는 필요악이나 계륵쯤은 된다. 과장된 자기 소개서와 진솔한 일기장 사이의 그 무엇이 SNS이다. 그러니 절실하거나 위안이 되거든 SNS를 계속하라. 다만 하거들랑 진심인 것처럼 하자. 절실하면 가식도 진심이 된다. 기부 천사 콘셉트를 유지하는 연예인도 언젠가는 진심 천사가 되는 날이 온다. 징징대고 투덜대는 것보단 건전한 가식이 한결 낫다. 캔디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은 건 눈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남몰래 운만큼 남 앞에서 씩씩해지는 거다. 가식도 훈련하면 진심이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25

이중섭의 아스파라거스

`아름다운 열정 박수근·이중섭`전이 한창이다. 경주 우양미술관이 기획전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 거장전을 마련했다. 동시대를 산 두 화가는 각각 서민들의 애환을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마티에르 기법이 우뚝한 박수근과 은지화로 개성을 구축한 이중섭은 한국의 미의식에 가장 맞닿은 작가군 중의 하나이다. 소박한 그림 속에 화가의 숨결이, 창작의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나오는 느낌이다. 입체적이고 풍성한 이야기가 소설의 재미를 보장하듯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전시된 작품 중 유독 웃음과 슬픔과 짠함 등 복잡 미묘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있다.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이중섭의 그림엽서 한 점이었다. `사랑`이란 제목이 붙은 그림은 여자의 가늘고 긴 발이 남자의 사타구니 사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자의 오른발 붉은 발톱과 남자의 왼손 붉은 손은 닿을락 말락 부드러운 긴장 상태를 유지한다. 그것을 쳐다보는 남자의 얼굴은 장난기와 진지함이 반반이다. 사랑의 진솔한 감정을 이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을까. 당연히 그림의 주인공은 이중섭과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였다.이중섭은 크고 긴 아내의 발을 `아스파라거스 군`이라 불렀고, 자신의 별호는 `아고리`라 칭했다. 생활고로 두 아이와 아내를 일본의 친정으로 보내야 했지만 누구보다 그들을 사랑했다. `아스파라거스 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가 화를 낼 거요.`라고 아내의 발을 의인화해서 엽서에 적을 정도이다.당신을 사랑하오, 이런 말과 하트 하나를 그렸다면 아무리 깊어도 그 사랑은 얕게 보인다. 하지만 아내의 발을 아스파라거스라 애칭하며 그 발을 그렸다면 아무리 얕아 보여도 그 사랑은 깊다. 작은 그림 하나가 온몸으로 들어와 저 먼 우주를 적시는 느낌이랄까. 사랑이 오면 사랑한다고 말해선 안 된다. 다만 자기만의 `아스파라거스 군`을 만들 일이다. 물론 가난하고, 지친 자의 그것이 더한 감동을 주는 것은 당연할 테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7-24

옳고 그름은 의심에서

정민 선생이 쓴 `오직 독서뿐`에는 옛사람 아홉 명의 독서 전략이 담겨 있다.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독서(학문)에 대한 선인들의 자세를 알 수 있다. 그 중 실학자 이익의 단상에 눈길이 간다. 성호사설을 비롯한 여러 저서 중에서 몇 가지 생각을 가져왔는데 통찰이 깊고 생각이 서늘하다. 정민 선생의 번역이 원체 군더더기가 없어서 그런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이익 선생은 학문은 반드시 의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의문 없는 학문은 내 것이 되어도 여물지가 않단다. 한 예로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의심이 생긴다나. 착한 사람은 너무 착하고, 악한 자는 너무 못됐단다.역사책을 쓸 때 권선징악을 염두에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안타까워한다. 착하게 그려진 사람이야 당연하다 해도, 악한 사람이 원래 지독했겠냐고 흥분하신다. 실제로는 선함 속에 악이 있고 악 가운데 선함이 있게 마련이라고 적었다.어디 역사에만 그럴 것인가. 모든 시시비비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기울어지는 쪽은 있어도 완전히 옳거나 아주 나쁜 건 없다. 시와 비, 선과 악은 언제나 함께 한다. 그런 시비와 선악이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니 학문하는 자는 끊임없이 의심(탐구)해야 한다. 선생의 비유에 의하면 복숭아나 살구를 먹을 때 살은 먹고 씨는 버린다. 반대로 개암이나 밤이 생기면 씨만 먹고 껍질은 버린다. 복숭아는 살이 맛있고 개암은 씨가 고소하다는 걸 혀의 의심(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만약 혀가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밤 껍질을 먹을 수 있다고 해도 그대로 믿고야 만다.세상은 필연보다 우연이 관장할 때가 많고 시비나 선악을 가릴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필연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하면 우리는 무딘 단정에 길들여지고 우연의 가능성을 열어두면 날카로운 핵심이 보인다. 역사든 현상이든 진실에 닿는 어려움을 통찰하는 이익 선생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일은 놓인 형세가 가장 중요하고, 운의 좋고 나쁨이 그다음이며, 옳고 그름은 가장 아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23

맏딸 콤플렉스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속담이 있다. 솔직히 한 번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오남매의 막내 입장이다 보니 맏이들이 느끼는 의무감이나 부담감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들이 느끼는 무게감 못지않게 막내들이 맛보는 피해의식이나 상실감 또한 크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맏딸 입장인 친구 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음주머니로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딸에 대한 서운함의 토로가 발단이었다. 내 입장은 오랜 만에 집에 온 동생 밥 한 끼 정도는 바쁜 엄마 대신 차려주고, 취직하면 동생 운동화 정도는 사 줄 수 있는 게 `누나` 아니냐고 했다. 그들은 정색을 했다. 그런 생각 자체가 딸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친정에서나 시댁에서나 맏딸 역할이 어떻다는 걸 알기에 그들은 맏딸더러 동생 밥을 챙기라거나, 농담으로라도 돈 벌면 동생 용돈 주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단다.가부장적 효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맏딸들은 자신들의 숙명을 익히 알고 있단다. 말하지 않아도 맏딸로서 느끼는 의무와 강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단다. 하기야 큰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이야말로 얼마나 폭력적이고 위압적이던가. 살림 밑천이 될 수 있도록 맏딸은 집안의 조력자가 되어야 했다. 맏딸이 가정 경제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산업 현장에 뛰어 든 예는 흔해도, 맏딸을 위해 동생들이 희생정신을 발휘했다는 얘기는 드물다.나아졌다 해도 아직 우리 유전 인자 속에는 맏딸들에 대한 기대치가 있다. 개별자부터 그런 시각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심리적 부당함을 느끼고 저항하는 사회는 건강하다. 오히려 힘들고 지치고 억울해하면서도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시각에 갇혀 있는 맏딸들의 불행한 시각이 문제이다. 그들이 행복하지 않는 것은 사회 인식 탓이다. 맏딸 콤플렉스를 강요한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당함은 함께 바꿔도 좋다고 설득하는 일이다. 이 무더위에 의무감과 강박에 시달리는 모든 맏딸들에게 응원을!/김살로메(소설가)

2013-07-22

무겁고도 가벼운 삶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소설 형식을 취했을 뿐 철학 에세이로 봐도 무방하다. 담백한 문체와 더불어 밀란 쿤데라 식 이러한 특징이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아왔다. 만약 쿤데라가 우리나라 작가이고 이 소설이 이 땅에서 처음 발표되었다면? 처음엔 홀대 받다가 전 세계가 열광한 뒤에야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지 않았을까. 지나치게 독자의 사유를 간섭하고 과도한 친절로 작가의 세계관을 강요한다고 생각해 부담스러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독자들은 쿤데라식 소설 문법에 익숙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스토리텔링에 충실하고 독자는 그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할 때 안심하는 경향이 있다. 주인공인 토마스와 테레사보다 훨씬 공감 가는 캐릭터는 사비나와 프란츠이다. 그들은 각각 가벼움과 무거움의 상징이다. 제목처럼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무거움`도 그만큼 언급된다.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과 운명의 소산물이다. 서로 동경하고 이행하며 상호 교류적이다.엄숙주의를 경멸하는 사비나의 삶은 한없이 가볍다. 데모대의 행진 대열에 끼는 삶이 그녀의 현실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와 민주화 운동 모두에 냉소적이다. 반면 유럽표 샌님인 프란츠는 서재에서 고뇌할 때 가장 현실적이다. 책상물림 프란츠 눈에는 운동, 혁명, 행진 등이 순수한 열정으로 비친다. 모험과는 거리가 먼 그에게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비나야말로 꿈의 세계이다. 사비나에게 몰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배반을 택하고 새로운 자유를 찾는 게 사비나 식 삶이다.사심 없이 가벼운 사비나의 눈에는 삶 이면의 불합리와 부조리가 너무 잘 보인다. 배반이 어울리는 사비나는 입버릇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투덜거린다. 끝내 사비나가 얻은 결론은 부조리한 키치적 삶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실하다는 것.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그 자체가 우연이며 영원회귀로의 행진이야말로 인간사의 영원한 숙제라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07-19

투명 프롬프터

얼마 전, 박 대통령의 방미 외교 때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미의회 연설이었다. 영어로 진행된 연설은 호불호가 엇갈렸다.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어조에 감동을 받았다는 이와, 국가원수가 모국어를 버리고 굳이 외국어 연설을 할 필요가 있냐는 이들로 나뉘었다. 둘 다 옳지만 나는 전자 편이었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 영어의 본무대에서 우리 대통령이 그 나라 말로 연설을 했다고 뭐 그리 자존심이 상할 것인가.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박 대통령의 발음이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일반 국민으로선 그 정도면 성실한(?) 연설을 한다 싶었다. 발음 가지고 시비 거는 이들은 반기문 유엔 총장더러 같은 시비를 거는 것만큼 이나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감동한 것은 대통령의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영어로 연설을 해서가 아니라 영어로 연설을 하는데도 어쩜 저리 기품 있고 부드러운 시선을 유지할까 싶었다. 의례적이라 해도 미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낼 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하기까지 했다.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그 비밀을 알았다. 연설을 돕는 투명프롬프터가 연설대 양옆에 있었던 것이다. 밑바닥에 텍스트를 놓고 빛의 반사 원리를 이용하면 투명 프롬프터에 선명한 글씨가 뜬다. 연설자의 눈높이에 맞게 양쪽에 투명 프롬프터를 설치하면 청중들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좌중을 번갈아 보듯 시선을 돌리면 감쪽같이 프롬프터에 뜬 연설문을 읽을 수 있다.내가 몰랐을 뿐, 투명프롬프터는 연설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문명의 이기란다. 오바마 대통령도 안철수 의원도 이것을 활용한단다. 괜히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곰곰 생각하니 이런 감정 또한 허세이다. 연설은 그 내용의 진정성에 있지 그걸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니질 않나. 연설문을 단순 낭독하는 지도자보다 연설 자체를 멋지게 하는 지도자를 원하는 청중이 있는 한 투명프롬프터의 진일보는 계속될 것이다. 달 자체가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8

귀태(鬼胎)

정치판은 말(言)들의 도미노 게임장이다.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한다. 사건이 터진다. 한쪽에서 물고 늘어진다. 별 다를 바 없는 한쪽 역시 자폭의 기회는 오고야 만다. 옳다구나 싶게 기회를 포착한 다른 쪽이 재반격한다. 싸움은 필수요, 동원되는 언어는 선택 사항이다. 그때의 언어는 무너질지라도 자극적일수록 좋다. 무너뜨림의 미적 쾌감이 궁극의 목표인 도미노 게임처럼 그들은 서로 무너뜨리고 무너지는 걸 즐긴다. 귀태 논쟁으로 한바탕 소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일본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귀태`이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귀태 후손`이라고 비하한 야당 대변인의 말이 발단이 되었다. 청와대와 여당의 격렬한 성토에 당사자와 민주당이 사과하는 선에서 진정 국면을 맞이했다. 귀태 발언에 여론이 호의적일 리가 없다. 정치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그 말 자체를 듣는 게 불쾌하고 불편하다.세상엔 몰라도 되는 말이 있는데 귀태야말로 그런 경우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 또는 불구의 태아 등의 의미로 그 말이 쓰인단다. 재일학자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에서 인용했다는 데 우리말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봤다. `두려워하고 걱정함` 또는 `나쁜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불길한 태생을 걱정하는 데서 오는 극심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다. 한데 일본에서는 더 극단적인 예로 쓰이나 보다.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는 없다. 철들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인간존엄에 관한 것이다. 개별자 고유는 모두 소중하다. 지위고하를 떠나 어느 누구도 제 태생이나 자존에 대해 위협받거나 조롱받을 이유는 없다. 비자의적 의지의 으뜸 사례인 탄생은 그 자체로써 존귀하다. 천사표 인간이든 악의 상징이든 태생 자체는 누구에게나 축복이다. 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말 필요 없다. 모든 태생은 귀태(鬼胎)가 아니라 귀태(貴態)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7

피할 수 없음에 대하여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자기합리화를 꾀할 수 있도록 방어기제가 되어주는 명언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긍정의 아이콘으로 변해 그 상황을 즐기는 게 낫다고 역설하는 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쩐지 인간 숙명의 한계를 보는 것 같고 패배의식을 자인하는 것 같아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피할 수 없으면 피해라, 피할 수 없으면 도망가라, 정도는 되어야 신념과 행동을 일치하는 주체자로서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때 묻지 않은 영혼이라면 합당한 이유 앞에서 고통이나 불이익이 따르더라도 그 상황을 피하면 되지 굳이 즐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사 어디 그리 호락호락하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도망가고 싶은 상황이 발생하고, 그야말로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만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행동과 태도가 불일치할 때 느끼는 심리적 정서이다.인지부조화 상태에 이르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변화시켜 인지 조화를 꾀할 수밖에 없다. 개인이 상황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에 대개 자신의 태도를 바꿔 합리화한다. 그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이 오는 건 당연하다. 뭔가 지푸라기라도 잡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이때 우리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말을 만들어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정신적 패배를 이렇게라도 위장해야 덜 씁쓸해진다.같은 옷이지만 친구보다 비싸게 산 내 옷이 더 좋은 것이고, 혹독한 군대 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애국자가 된다. 그 상황을 개인적 차원에서 되돌릴 수 없으니 긍정의 화신이 되어 내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다. 슬픈 현실이지만 그래야 견디는 걸 어쩌란 말이냐. 피하고자 했던 원인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은 생기고, 그것을 최대한 즐기라고 세뇌할 수밖에 없는 제 인간조건에 연민이 인다. 인지부조화의 조화를 위해 오늘도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모든 심리적 고뇌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김살로메(소설가)

2013-07-16

합리적 의심

`합리적 의심`이란 법률 용어가 있다. 피고인의 무죄 추정의 원칙에 활용되는데, 사실의 개연성에 논리적 의문을 제기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억울한 상황을 구제하기 위한 사유체계이다. 물론 합리적 의심이란 모든 의문을 포함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무조건 사물을 삐딱하게 보거나 모든 일이 불공평하다고 투덜대는 의심증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사회에서도 `합리적 의심`은 필요하다. 특히 각종 미디어를 접하는 우리의 눈은 건전한 의심과 가까울수록 좋다. 보도 매체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줄 때 우리는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간단한 예를 들자. 모 방송에서 인종차별에 대한 한국인의 실태를 몰래카메라로 보여준다. 화면만 보면 캐나다인 백인에게 피실험자들은 친절했고, 미얀마 출신 청년에게는 불친절한 태도를 취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개 합리적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문제는 이 실험에 참여한 사람의 생각과 그것을 분석한 방송 제작자의 시각이 다르다는 데 있다. 미얀마 출신 실험자는 친절하게 답변한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제작진에서 악의적 편집을 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제작진은 20퍼센트의 사람들만 불친절했다고 해서 인종차별이 없는 건 아니다, 백인에게는 모두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80퍼센트만 친절하다면 그것도 차별이다, 라는 시각을 견지한다. 상대적 불친절을 보여줬으니 문제 될 게 없다는 식이다.모든 현상에서 진실은 하나이다. 언제나 이쪽과 저쪽 사이에 그것이 있다는 게 문제이다. 미디어와 소비주체 사이, 너와 나 사이, 그들과 우리 사이에 그 진실은 있다. 뻔히 보이는 그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한쪽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 주고, 다른 한쪽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어느 한쪽에 길들여져 버리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합리적 의심`이다. 주체들의 객체성 확보를 위해 오감을 여는 것, 이것을 합리적 의심이라 부르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5

맞춤법 한 번 까탈스럽다!

홍길동이 제 아비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듯이,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적을 수 없었던 한때가 있었다. 된소리, 거센소리 추방하여 명랑시민 길러내자, 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흥하던 시절이었다. 군말 필요 없이 짜장면은 짜장면일 때 제 이름값을 제대로 한다. 매가리 없는 `자장면`으로는 어림도 없다. 백성들의 언어 습관까지 관장하려는 당국에 맞서 민초들은 일부러 `자장면` 대신 `짜장면`을 힘주어 외치곤 했다. 그 투쟁으로 짜장면은 온전한 제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자장면`이 품은 교양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당국은 겨우 자장면과 동거하는 수준에서 짜장면을 허락했지만 그쯤은 상관없다. 짜장면은 애초에 교양이나 지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서민적인 낱말이므로.글 모임에서 합평회를 했다. 그놈의 표준어규정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이번엔 짜장면이 아니라 `까탈스럽다`가 그 연민의 대상이었다. 규정에 의하면 그것은 `까다롭다`의 잘못된 표기란다. 표준어규정 제25항의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에 근거를 뒀다.하지만 `까탈스럽다`의 경우 그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까다롭다` 가 `까탈스럽다`보다 널리 쓰인다고 보기도 어렵고, `까다롭다`와 `까탈스럽다`는 쓰임새 자체도 다르다. 전자가 상황이나 조건에 쓰이는 말이라면 후자는 대상의 성격을 표현할 때 맞춤하지 않던가. 예를 들면 `문제가 까다로워 풀기가 어려웠다, 까탈스러운 그의 성격 때문에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다`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타당한 언어의 현장성이 우리말법이란 규제에 갇힐 때 언중은 혼란스럽다. 변하는 게 언어의 속성이다. 당연히 그 수용에도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변화와 규정이라는 그 정반의 줄다리기 속에서 호흡 곤란을 앓는 낱말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뒷전으로 밀려난, 합리적 수용 대상의 언어들이 하루 바삐 날개를 달 수 있었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2

늙어도 동심

연출한 사진은 아니었다. 멀리서 찍었지만 무척 자연스럽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깬 누군가는 창을 열고 무심코 놀이터를 내려다봤을 것이다. 그리곤 감동에 겨워 스마트폰으로 셔터를 눌러댔을 것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노부부이다. 놀이터엔 그들 외엔 사람 그림자조차 없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지금 동심(童心) 놀이 중이시다. 첫 장면은 나란히 그네에 앉는 장면, 두 번째 컷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탄 그네가 허공에 더 가깝다. 할머니의 무릎 관절이 더 좋거나, 아니면 더 신났음에 틀림없다.다음 사진, 지구 모형처럼 생긴 뱅글이 기구에 바투 붙어 있는 할머니가 보인다. 그네를 겨우 벗어난 할아버지는 시소와 뱅글이 사이에서 할머니를 주시한다. 등이 휜, 팔순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는 뒤처진 할아버지에게 어여 오라,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으리라. 마지막 네 번째 컷, 노부부 기어이 뱅글이 놀이기구에 올라 타셨다. 엉거주춤한 자세지만, 다리에 힘을 싣고, 팔에 기를 넣어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유쾌한 시간을 위해 기구를 힘껏 돌렸으리라. 뱅글뱅글 팔순의 동심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다.인터넷에 올라온 네 컷의 사진을 내 식으로 묘사해보았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해맑은 노부부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동심은 사라진 게 아니다. 다만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허리 아프고, 무릎 삐걱거려도 그 세계를 한 시도 떠난 적 없다. 산책에 나선 노부부가 서로를 보듬는 매개체로 놀이터를 활용하는 것은 어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던가. 겸양을 통해 스스로 자제하고, 체면을 빌려 어른인체 해야 하며, 세월의 옷으로 주책을 피해야 했던 것들을 잠시나마 거부하는 그 스릴에 우리는 감동하는 것이다.나이는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동심이다. 그걸 들키는 게 부끄러운 것도 쑥스러울 일도 아닌데 우리는 감추고 산다. 늙어도 동심임을 제 몸이 기억하건만 사회는 그것에 너그럽지 못하다. 발동하는 동심은 구르고 돌려야 제 맛이거늘!/김살로메(소설가)

2013-07-11

안네와 엄마

내 인생 최고의 책 중의 하나는 완전 판 `안네의 일기`이다. 그토록 어린 소녀가 그만치 진솔하고 통찰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암스테르담 여행 중 예정에도 없던 안네의 은신처를 들르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던 건 말할 필요가 없다.안네의 일기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묘사했다거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내용이 주가 아니다. 선전문구만 보면 그런 것이 주된 내용인 걸로 착각하기 쉬운데 시쳇말로 닥치고 읽어 봐라고 말하고 싶다. 한마디로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일기이다. 그런데 그게 보통 사춘기 여자애의 감수성이 아니라 몇 단계 뛰어넘는, 말하자면 감당하기 힘든 개성을 보유한 소녀의 기록이라는 데 그 매력이 있다.제한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과 생활할 수밖에 없던 안네는 불화의 아이콘이다. 고집불통에다 예민하며, 자기 주관적이면서 적극적인 안네는 아버지를 제외한 은신처 사람들 대부분과 부딪힌다. 그런 딸을 가장 버거워한 이는 당연 안네의 엄마였다. 은신 생활을 한 첫날부터 안네와 엄마는 긴장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썩 관계가 좋은 건 아니었다.모녀의 기질은 완전히 달랐다. 엄마 에디트는 겉보기에 지루해 보이는 차분함과 모성에서 비롯된 잔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딸 안네는 과도할 정도로 자기표현에 능한데다 울음과 흥분으로 제 기분을 표출하는 성격이었다. 모성의 안달과 사춘기의 예민함은 자주 충돌했다. 안네는 `엄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탓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면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하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때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다.안네의 엄마도 이해되고 사춘기 안네도 공감된다. 이러한 섬세하고도 진솔한 에피소드들이 안네의 일기에는 차고 넘친다. 위선이나 거짓 감정이 배제된 영특하고 발칙한 소녀의 기록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좋은 텍스트가 되는지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강조한다. 단, 안네가 실제 내 딸이라면 버거워서 사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