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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 자면 된다

만화 `미생`의 작가 윤태호의 인터뷰 기사를 읽는다. 자기 확신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지 그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가정생활도 있고, 일거리도 넘치고 어떻게 그 모든 작업이 가능하냐고 묻는다. 작가의 답은 간단하다. `안 자면 된다`이다. 금 간 핸드폰 액정을 갈아 끼울 새도 없단다. 수요일, 토요일 밤에만 자는 생활이 이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나. 안 잘 정도의 끈기와 오기와 체력이 있어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끈기와 오기를 키울 생각보다 먼저 앞서 자기합리화를 꾀하고, 체력을 다질 즉각적 행동은 미룬 채 몹쓸 체질 탓만 한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게 있던가. 윤태호 작가의 팬 층이 두터운 건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독자의 마음에 가 착착 달라붙기 때문이다. 겉돌지 않는 그의 대사와 내레이션은 지난했던 시간을 견딘 축복의 부산물로 보인다. 축포처럼 쏟아지던 `미생`에서의 몇몇 명대사들을 떠올려 보라.`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다. 명절은 가족이란 이름의 폭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잊지 말자, 나는 어머니의 자부심이다. 격식을 깨지 않으면 고수가 될 수 없다. 자꾸 사람을 판단하려고 애쓰다가는 자기 시야에 갇히고 만다. 정면을 봐. 남을 판단한다는 게 결국 자기생각을 투사하는 거라고. 그러다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거야.` 등등.만화는 그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하는 작가가 윤태호이다. 만화든 글이든 스토리를 무시하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숱한 실패로 그것을 알아낸 작가는 그림책을 미루고 시나리오 필사에 노력했다. 뭐가 중요한 지를 알아내는 것에는 실패란 스승이 필수이다. 거기에서 얻은 가르침을 오래 붙들고 앉아 있는 법을 익힌다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밤하늘에 쏘아 올릴 수 있다. 인이 박일 때까지 두려움 없는 실패와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는 것, 그것이 `안 자면 된다`의 정신일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7

레미콘 차를 보며

달리는 레미콘 차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 안에는 이미 섞인 콘크리트가 들어 있다. 모래, 자갈, 시멘트, 물 등 적절히 배합된 그들은 몸 섞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제 몸을 굴리지 않으면 내용물이 제대로 섞이지도 않을뿐더러 심하면 굳어버릴 수도 있다. 안착하여 타설될 때까지 돌고 돌아야 한다.레미콘 차 뒤꽁무니가 잘 돌아간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건설 현장 비리에 관한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관리가 잘 되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입구에 담당자가 나서서 레미콘을 점검한다. 불량 레미콘이 들어 있는 차를 발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되돌려 보낸다.반면 허술한 공사 현장에서는 퇴짜 맞은 그 레미콘 차를 형식적인 점검만 거친 채 그대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완공되었을 때 두 아파트에 대한 안전도는 극과 극이 될 것이다.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본질은 관계이다. 일단 잘 반죽해야 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배합률로 제 인생의 내용물을 반죽한다면 아무리 잘 돌려도 몹쓸 것이 되고 만다. 잘 굳은 축조물을 얻으려면 두 가지 다 충족해야 한다. 배합이 맞아야 하고 잘 섞을 줄 알아야 한다. 정치 구도, 문화 방식, 소통 의지 등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바탕에는 관계망이란 사회적 운명이 부여된다. 그 사회적 약속을 잘 배합하고 잘 융합할 때 굳건한 구조물을 얻을 수 있다.삶의 핵심은 인간 대 인간에게 있다. 일찍이 그것을 알아 낸 인류는 철학이라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학문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내 삶을 어떻게 반죽하고 돌릴 것인가에 따라 완공된 건축물이 달라진다.불량 반죽은 아무리 돌려도 불량일 뿐이다. 운 좋아 그 레미콘으로 층층이 타설한다 한들 부실 건축물이 되고 만다. 반죽은 굳기 마련이다. 문제는 잘 굳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단한 구조물로 남을 것인가, 부실한 건축물로 부서질 것인가는 기초인 반죽과 돌리기에 달려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6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상대의 목소리나 문자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어쩌다 상대가 건네는 한 마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든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아니 사랑에 빠져있다. 사랑에도 구별이 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에 덜 사랑과 더 사랑이 어디 있냐고? 천만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다.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버겁지 않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더 다치고 버겁기만 하다.사랑의 단상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자.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이다. 반면 사랑하는 자의 천직은 외곬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이다. 설거지하기 성가셔 싱크대 한쪽에 미뤄둔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창을 연 채 반쯤은 얼이 빠진 채 기다리는 것이다. 결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하지만 어쩌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겪기 전까지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환상으로 남을 몹쓸 그 사랑!/김살로메(소설가)

2013-08-23

군더더기 없는 삶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강조했다. 군더더기 없는 글의 매혹에 대해서. 고교 시절 그는 한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늙은 편집자는 그가 제출한 원고의 대부분을 지워서 돌려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킹이 처음에 하고자 한 내용 뿐이었다. 늙은 편집자는 어린 그에게 충고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스스로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라. 원고를 고칠 때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모두 없애라. 그렇게 하면 핵심만 남을 것이다. 같은 맥락의 얘기를 사진 기초를 배울 때도 들었다. 한 수강생이 제출한 사진을 선생님은 화면에 띄웠다. 호수 풍경이었다. 드넓은 호수 가운데 오리 한 마리가 노닐고 언덕 주변으로는 화사한 붓꽃이 만개했다. 남은 오리 떼는 물풀에 가려 보일 듯 말듯 했고 그것을 정원 삼아 전원주택이 원경으로 잡힌 사진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그 풍경 중 호수에 떠 있는 오리를 제외하곤 다 버리는 게 낫다고. 사람들은 핵심을 원하지 군더더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무엇을 듣고 싶은가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 대한 중심점은 하나이다. 이것저것 말하고 이리저리 보여주고 싶은 건 당사자 입장일 뿐이다. 어떻게든지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풍경도 많은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다. 다 알아 들을 마음도 없고, 다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지도 않는다. 타자화된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건 언제나 단순한 핵심 그것이다.글에서 군더더기를 버리는 것이나 사진에서 불필요한 풍경을 버리는 것만큼 삶에서 던적스러움을 버리는 건 어렵다. 단순한 핵심에 이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훈련을 필요로 한다. 복잡하고 거창하고 요란한 것은 내 안에 깃든 욕망의 실체일 뿐, 타자에게 비치는 그것은 피로와 지루함의 허상일 뿐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한 것 그 중심에 닿으려 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삶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2

도리스 레싱

상식과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도전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전통적 사고와 도덕적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굳건한 힘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한 알싸한 답을 주는 작가가 도리스 레싱이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강렬하고 통렬한 통점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작가인데 이번에 개봉하는 `투 마더스(두 엄마)`도 그녀의 작품이 원작이란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그녀의 메시지를 내 식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장미와 백합향이 향기롭다고 그것만을 삶의 가치로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시궁창 냄새나 쓰레기장 냄새도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평화로운 질서, 안온한 일상, 보장되는 미래 - 전통적 가치관과 건전한 윤리관에 충실한 젊은 부부는 이런 가정을 꿈꾼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그들의 신화는 무참히 부서진다. 가는 몸에 부서질 것 같은 사지, 거대한 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 괴물 같고 벌레 같은 외형에다 성격마저 괴팍한 벤은 중산층 삶에 대한 거리낄 것 없는 로망을 가졌던 부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몰아넣는다.행복의 기별로 가득했던 집안은 불행의 기운이 점령하고 만다. 파괴와 증오, 공포와 침울의 대상이 된 벤을 버려야 할 것인가. 가족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이란 그림을 위해 또 다른 가족인 벤을 포기할 것인가. 해결 난망의 숙제이지만 도리스 레싱의 전언은 분명하다. 벤이란 상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가치나 기준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이며 무너지기 쉬운가를 보여준다.관계 또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바늘 끝 같은 감각으로 감지해낸 도리스 레싱의 철학이 `투 마더스`에 와서는 어떻게 변주되는지 궁금하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적 시각의 영화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쌍방 친구 아들들과의 로맨스라니 막장 드라마로 빠질까 우려도 된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에서의 도리스 레싱을 기억하는 감독이라면 뭔가 선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까. 작가의 기가 전해질지 기대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21

잔소리

엄마 노릇 제대로 못하는 것만큼의 자율성을 아이들게 부여했다고 위안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들녀석이 말한다. `엄마, 잔소리가 뭔지 아세요? 엄마들이 하는 모든 말이 잔소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를 계속 하는 게 잔소리예요.` 한마디로 `엄마는 잔소리꾼`이란 얘기다. 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내 입장일 뿐, 아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를 테면 내가 아들에게 하는 레퍼토리는 이런 거다. `어학이 기본이다. 딴 건 몰라도 어학 공부는 게을리하지 마라.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학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또한 확실한 관심 분야를 개척하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으면 좋겠다. 현대의 중산층 개념이 뭔지 아나? 아파트 평수도, 명품 가방 살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그런 건 경제적 측면에서 본 것이고, 요즘은 문화적 잣대로 중산층을 가늠한다. 그러니 정신적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자기계발에 신경 써라.`아들 기준에 의하면 엄마가 이런 말을 두 번, 어쩌면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의 다양한 버전이 보통의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린다. 그 시절 나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것인가. 부모는 말하고 자식은 거부하고, 엄마는 한두 번밖에 말한 기억이 없는데 자식은 여러 번 들은 것 같은 게 잔소리의 속성이다.가만 보면 훈육 또는 길잡이라는 형식의 모든 군소리는 부질없는 것 같다. 물이 자정작용 하면서 흐르듯 인간 성장에도 그 법칙이 적용된다. 부모의 잔소리와 무관하게 아이들은 크면서 스스로 깨닫는다. 시기의 늦고 빠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인의 인생행로에서 어느 정도 자정능력을 발휘한다. 부모 스스로도 그리해왔다. 다만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의 시간과 횟수를 자식에게만큼은 줄여주고픈 맘에 잔소리를 하게 된다. 부모의 모든 옳은 소리는 아이들에겐 잔소리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모자식 간 천형이자 선물인 잔소리!/김살로메(소설가)

2013-08-20

플롯과 친구하기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원활한 소통과 한 대상의 전략적 홍보 수단 등에서도 스토리텔링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원래 스토리텔링은 문학적 성과, 특히 소설을 이루는 장치이자 재료로서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소설은 고전적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수하거나 의도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작가가 있어왔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 때 나는 글쓰기에서 플롯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았더랬다. 글은 플롯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에 의해서만 글의 흥미나 질이 판가름 난다고 믿었다. 근거 없는 편협의 우물에 갇혀 있었다. 하기야 스토리텔링 자체도 부질없고 소용없다고 여겼다. 오직 쓰는 자의 손가락 의지에 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등장인물의 외적 내적 묘사의 장악력만 있으면 플롯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착각했다.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플롯에 대한 신뢰감이 되살아난다. 단단한 플롯만이 독자를 만든다. 이야기의 뼈대나 구조를 플롯이라 하는데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의 개념을 넘어선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저 늘어놓는 것이 이야기라면 플롯은 그것에 더해 당위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힘이나 과정이 녹아 나야 제대로 된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그간 너무 등장인물의 내적 또는 외적 패턴에 의해서만 글을 쓰려고 했다. 이제 자세를 좀 바꿔보고 싶다. 플롯의 대가라 해도 좋을, 작가 딘 쿤츠가 말했다. `플롯이 없는 소설처럼 이 세상에 우스운 것은 없다. 누가 뭐래도 플롯은 소설의 으뜸 조건이다.` 태생적으로 광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면 플롯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실험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하지만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라도 기본에 충실한 것도 나쁘지 않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쓰라는 내면의 요청이 들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19

노익장(老益壯)

`노익장을 과시하다`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에 뒤지지 않는 노년의 굳건한 패기를 표현할 때 쓰는 관용구이다. `후한서` `마원전`에 나오는 고사성어로 노당익장(老當益壯)의 준말이다. 말 그대로 비록 늙었지만 기운이 더욱 씩씩함을 일컫는다. 후한 광무제 때의 명장 마원은 예순두 살, 지금 같으면 상노인에 해당하는 나이에 광무제를 도와 군대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하고 흉노를 토벌했다. 말 그대로 대기만성을 이뤘다.평소 친구에게 `대장부는 어려울수록 굳세어야 하고, 늙을수록 건장해야 한다`며 노익장을 역설했다. 굳이 역사서를 들먹이지 않아도 현실에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지인의 경우, 백수(白壽)였던 당신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사흘 전까지 일터에 나가셨고, 텃밭 가꾸기까지 거뜬히 하셨다고 했다. 내 친정 엄마도 마찬가지이다. 미수(米壽)가 멀지 않았건만 아직도 혼수방에서 일하신다. 천생이 부지런한 분이라 일 하지 않으면 못 견뎌 하신다.며칠 전 또 다른 노익장을 과시하는 분을 만났다. 일흔을 넘긴 그분은 매일 원고지 스무 장에 가까운 글을 쓰신다. 내 짧은 소견으로 힘들고 벅차지 않으시냐고 여쭈었다. 그렇긴 하지만 글쓰기가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견딜 만하다고 하신다. 원고를 채운다는 스스로와의 약속 때문에 맘대로 술도 못하고 여행도 못하지만 얻는 게 더 많단다.일반적으로 일을 접고 느긋이 여가를 즐기는 것이 노년을 잘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분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할 일이 있어야 늙지 않는단다.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거나,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노화는 걷잡을 수없이 빨라진다. 늙어서 일을 놓는 게 아니라, 일을 놓으면 늙게 되는 것이다. 젊다는 게 글 쓰는 데 유리한 건 사실이겠지만 나이 많다는 게 글 쓰는 데 불리한 것만도 아니다.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이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분처럼 열정이 넘치는 내 노년의 글쓰기를 그리며 오늘도 성심껏 자판을 두드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16

인류 탄생 이래 가장 힘든 숙제 중의 하나가 소통일 것이다. 부부끼리의 교감, 자녀와의 대화, 친구와의 교류 등에서 온전한 승리를 맛보기란 쉬운 게 아니다. 일기장이 왜 생겨났겠는가. 소통 부재로 자괴하는 자들의 쓰라린 꽃 무덤이 그곳 아니던가. 다행히 요즘은 소통 덕에 환희할 수 있는, 발랄한 꽃다발 역할인 SNS도 생겨났으니 그 둘을 적당히 활용하면 소통의 중용 마당이 어느 정도는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상처의 꽃 무덤과 환희의 꽃다발이 매순간 교차하는 게 우리 삶이기 때문이다. 상처에도 환희에도 혀가 관여한다. 혀를 통해 나오는 말은 보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그것을 갈파한 선인들이 이런 말을 지어냈다. `임금이 지혜로운 두 신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도록 명령했다. 두 신하는 각자 상자 하나씩을 가져왔다. 첫 번째 상자에도 두 번째 상자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다.`왜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을까? 생각이 다르다는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는 건 내 맘이니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타자에게 나를 똑 같이 대접해달라고 강제하기는 어렵다. 그건 타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무한대로 뻗어있는, 자유롭기만 한 타자를 내 식으로 규제하려 할 때 우리는 필연의 상처와 대면한다.상처를 옮기는 기본 도구는 혀(말)이다. 속으로야 나라님도 팔아먹고 전 우주도 바꿔치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뱉은 언어는 걷잡을 수 없는 상처라는 꽃 무덤을 만든다. 흔히 잘못 놀린 혀는 세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놀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 모두. 현명한 소통을 하는 자들은 타자를 향한 시선이란 끈을 느슨하게 잡을 줄 안다. 팽팽한 줄잡이야말로 상처의 근원이라는 것을 누적된 학습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혀 놀림도 훈련하면 줄일 수 있고, 소통의 문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열린다. 무더위를 이기는 것만큼 힘들지만 자기최면 걸듯 훈련과 노력은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1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소설은 문장이고, 번역도 창작이다. 평소 소설에 대한 내 지론이다. 좋은 소설은 좋은 문장으로 이뤄져있다. 외국 소설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외국 소설이 온전히 독자에게 전달되려면 제대로 된 번역자와 편집자를 만나야 한다.`롤리타`를 만났을 때 국내 유수 출판사 두 곳의 것을 비교하면서 읽은 적이 있다. 두 작품 다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더 발랄하고 좀 더 입체적이고 좀 더 비문을 덜 생산하는 쪽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섬세한 부분까지 독자를 배려하는 편집자와 번역자의 노력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재미삼아 본문의 첫 문장만 두 출판사 것으로 비교해본다. 하나는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이고, 다른 하나는`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다. 내 취향으로는 전자 것이 훨씬 섬세하게 다가온다. 시적인 원문이 후자의 번역에서는 풀어지고 삐걱대는 데 비해, 전자의 것은 섬세한 대구 구조에까지 신경을 썼다. 설사 원문에서는 그렇지 않았더라도 짧은 문구 하나에서도 문체 미학까지 염두에 둔 번역을 높이 사고 싶었다. 번역 문장 하나가 무에 그리 중요하나 싶겠지만 조금 다른 문장 하나하나가 모여 서로 다른 한 권의 번역서가 된다. 각각 완성된 번역본은 번역자의 창작물이 되고 그 두 책은 독자들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힐 수도 있다.섬세한 묘사와 불편한 통찰, 시니컬한 풍자와 반짝이는 해학이 어우러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에서라면 그 괴리가 더할 수도 있다. 감동이나 교훈에서 멀어질수록 진짜 소설이다. 롤리타가 그렇다. 순정남의 외관을 하면서 속으로는 `넌 나에게 읽혔어.` 뭐 이런 여유와 포스를 풍기는, 애인으로서는 빵점이지만 소설가로서는 백점인 이 소설가의 작품을 읽을 때 취향에 맞는 번역본을 만나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비교 번역 운운했지만 진실로 하고 싶은 한 마디는 이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장은 내게 `넘사벽`!/김살로메(소설가)

2013-08-13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

`바람의 풍경, 이창연 전`이 열리고 있다. 포항시립미술관이 기획한 선생의 유작전이다. 돌아가신 지 3년이 되었는데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선한 미소와 처연한 눈빛으로 남루의 풍경 끝자락까지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고, 생활과 그림이 별 다를 바 없이 소박한데다 유머가 넘치던 분이었다. 선생님과 인연이 있던 지인들과 전시회장을 찾았다. 생각보다 조촐한 규모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전시장의 크기가 선생의 입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마음만은 전우주적 공간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사모님의 안내 덕에 그림 속에 담긴 선생님의 예술혼과 가치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내게 선생님은 화가이기 전에 스승이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으로 먼저 만났다. `엄마 찾아 삼만 리`를 읽어주던 순정한 모습도, 화가로서 승승장구하던 모습도 모두 존경 받아 마땅했다. 어린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그림을 포기할 수 없어서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초중고 교과서에도 몇몇 그림이 실릴 만큼 선생님은 유명 화가가 되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담배가게`이다. 70년대 풍의 그 담배포 풍경에는 삶에 대한 철학이, 그림에 대한 예술관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런 선생님의 자세한 우주관은 유작 전시회 기념으로 출간된 시화집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르코 출판사에서 나온 이창연 화백의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는 `이창연 화가의 작가 노트`라는 부제가 딸린 시화집이다.그림을 삶의 꽃으로 비유한 선생님은 `그림이 그림이라면 그림이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삶의 현장 그 리얼리티를 보듬지 못하면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절대 고독의 에너지로 당신만의 예술적 행보를 내디뎠던 그 흔적이 지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아, 슬픈 노랫가락 같고 유쾌한 농담 같은 선생님의 작가노트 `저 바다의 끝은 어디일까`에 관심 좀 가져주시라./김살로메(소설가)

2013-08-12

오전과 오후 일 사이 약간의 공백이 있다. 집까지 다시 갔다가 나오기엔 먼 거리이고 무엇보다 그 때야말로 나만의 오롯한 휴식 시간이니 내 식으로 즐기는 편이다. 일터 근처 비빔밥집이나 분식점을 찾아 대충 끼니를 때우고 얼른 카페를 찾아 나선다. 대개 주문한 신간을 꺼내 읽지만, 피곤이 뒤따를 땐 구석자리에서 손수건 한 장 덮어쓰고 과감하고 짧은 낮잠까지도 청한다. 그야말로 나만의 황금 시간을 갖는다. 한 줄기 소나기라도 퍼부어준다면 바깥 풍광에 시선을 저당 잡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휴식이 된다. 이 집 저 집 떠돌며 과외를 하던 젊은 시절부터 혼자 점심 먹고 혼자 시간 때우는 일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혼자 노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렇게 쓰려는데, 우연히 내리 연속 지인들의 점심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고 글 길을 틀고야 마는구나. 혼자 먹는 점심도 나쁘지 않지만, 기막힌 타이밍으로 나를 찾아준 친구들이 구세주 같았다고.쏜살같이 달려온 지인들과 카페에 앉아 와플 세트 곁들인 천국표(?) 김밥을 먹는다. 그 와중에도 지인은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놓는 걸 잊지 않는다. 콩잎절임이란다. 도회지로 나온 이후, 처음 먹어본 콩잎절임의 오묘하고 경이로운 맛에 매료된 적이 있었는데 그 추억담을 기억한 지인이 부러 챙겨온 것이다. 섬세한 맘 씀에 괜히 울컥해지는 것이었다.그 잠깐 동안 `틈` 이란 말을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우정이다. 계단에 앉은 커플 사이에 놓인 물병,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 한 잔, 발 담근 너와 나 사이에 흐르는 계곡물 소리만큼의 틈을 인정해야 사람 관계는 건강하고 오래 간다.저 물병만큼의 여유, 저 찻잔만큼의 배려, 저 물소리만큼의 타자화 등이 서로의 것이 될 수 있을 때 모든 관계는 빛난다. 틈을 유보한 채 성급히 내달리거나, 적정 거리를 놓친 채 보채는 모든 만남은 구라거나 신의 영역 둘 중의 하나다. 구라도 신도 원치 않는다. 다만 한 호흡이란 `틈`을 새기고 새길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9

영화관이란 피서지

뭐니 뭐니 해도 최고의 피서지는 영화관이다. 피서지에 대한 합리적 대가인지는 차치하고 시원함의 호사뿐만 아니라 입 호사 눈 호사까지 누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이다. 땅 좁은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람들이 활동적인 여가를 즐기기는 쉽지 않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면서 보통 사람들은 영화관을 적절한 여가 장소로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그나마 편하고 경제적인 여가 활용 중의 하나가 영화 보기이기 때문이다. 한 영화당 관객 천 만 시대를 가뿐히 넘기게 된 것은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이런 여가 활용법도 한몫했다. 피서지로도 그만인데 영화가 좋으면 금상첨화이다. 신인감독 김병우의`더 테러 라이브`는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원래 분탕질이 심한 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해 영화 시작 십 분이면 졸기 일쑤다. 개연성도 없이 눈요깃감으로 쏘고, 부수고, 때리는 장면들이 어쩐지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감정 이입이 쉽게 되지 않았다. 한데 이번 영화는 달랐다. 실시간 속보라는 긴장감에다 비루함과 비열함이 뒤섞인 인간군상의 아이러니 앞에서 절로 서늘해졌다.고립된 스튜디오 안이 장면의 대부분인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테러리스트와의 대화를 중계한다는 독창적인 상황도 눈길을 끌었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이 긴장감으로 엮여 있어 더욱 딴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소박한 영상으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급 영화를 뛰어넘는 관객 시선 고정을 이끌어낸 것에 점수를 주고 싶다. 등장인물에 군더더기가 없고, 대사 처리에도 늘어짐이 없으며, 내용면에서도 과장이 덜 했다.다만 결론 부분이 약간 신파로 옮아간 것이 아쉬웠다. 파죽지세이던 감독의 진격에도 호흡이 달렸는지 다소 급하고 억지스러웠다. 90 여분 동안, 라이브로 중계되는 테러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다보면 관객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긴박감과 울분에 온몸이 저려온다. 더위 피하기 위한 잠시의 여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쐬었으니 이보다 더한 여름나기가 어디 있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8-08

비타민보다 운동

사람마다 체질과 체력이 다르다. 건강 체질에다 운동으로 몸을 관리한 사람들은 이 무더위에도 그리 지치지 않는다. 반면에 저질체력에다 운동마저 기피하는 나 같은 이들은 사계절 피곤의 연속이다. 체력에 비해 내가 가진 에너지와 기를 무리하게 쓴 날은 어김없이 탈이 난다. 채우지도 못했는데 퍼내 쓰니 쉬 지친다. 충분한 잠으로 보충해도 입술이 부르트고 잇몸은 부어오른다. 운동 부족이란 숙제를 해결하면 컨디션 회복에 도움이 되련만 쉽지가 않다. 모임에 나갔더니 간호사 지인이 비타민을 먹어보란다. 백퍼센트 비타민은 체력 유지에 도움이 될 거란다. 단맛과 각종 첨가물로 범벅이 된 무늬만 비타민인 제품과는 다를 것 같아 그미가 추천해준 비타민을 곧장 샀다. 너무 시고 제법 써 삼키기에 고역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더 신뢰가 가기도 한다. 혼자 먹기 미안해 온 식구를 끌어들인다. 지친 몸이 나쁜 쪽으로 금세 반응하는 나는 열심인데, 다른 식구들은 비타민에 별 관심이 없다. 청춘인 아들딸은 시큰둥해하고, 나름 운동으로 제 몸을 유지·관리하는 남편도 그리 반색하지는 않는다. 챙겨주면 먹기는 하지만 나처럼 진지하지는 않다.누구든지 경험하고 느낀 것만큼 반응한다. 제 몸에 이상 징후가 없으면 스스로 비타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믿기에 건강에 대해 그다지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반면, 감당하지 못할 몸 기운을 느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비타민 같은 의지처라도 찾게 된다.건강은 누구에게나 예측불허이다. 내 몸이 피로를 느끼면 마음까지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몸이 아무런 불편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고 건강을 자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 이상으로 `신체의 안녕`에 관한 건 영원한 숙제이다. 비타민 같은 활력의 정점을 찍으려면 당장 뛰쳐나가 운동부터 해야 한다. 백퍼센트 비타민에만 의지하며 뒹굴뒹굴 게으름을 피우는 건 아직 급하지 않다는 걸 말한다. 굳건한 의지로 규칙적 운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크게만 보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7

사랑의 속성

느지막이 영어 공부에 매혹당한 친구가 카톡으로 영어 문자를 보내왔다. 동양고전을 쉬운 영어로 풀어쓴 것을 하루에 한 문장씩 익히는데 영어도 늘고, 마음공부도 되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란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 과거에는 그가 살아있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그가 죽기를 바란다. 이거야말로 자기기만이다.` 이런 내용인데, 자신의 요즘 심경을 대변해주는 말 같아 맘에 새기고 있단다. 첫 문구를 보니 어딘가 익숙하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이란 글을 풀어 쓴 것 같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란 의미로 사랑에 관한 단상을 말할 때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고 장영희 선생의 수필에서 그 말을 처음 접하고 공감했던 기억이 났다. 출처를 찾아보니`논어`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애지욕기생`, 이 부분만을 인용해서 사랑의 충만함에 대한 메시지로 활용한다. 근데 따라온 뒷말을 보니 일종의 반전이 있었다는 걸 알겠다.원문과 해석을 찾아봤다. 덕 쌓기의 숭고함과 미혹의 어리석음에 대한 가르침을 주기 위한 예시 중에 나오는 내용이었다. `사랑하면 상대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죽기를 바란다. 이미 그가 살기를 바랐으면서 다시 죽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미혹이다.` 인간 사랑의 숭고함이나 낭만성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인간 심성의 간사함에 대해 공자는 통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사람의 마음을 경계하는 가르침인 셈이다.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 주고 상처 받기 쉽다. 상대를 그러안는 동안에는 모든 게 사랑스럽다. 하지만 미운 마음이 한 번 들기 시작하면 자제가 어렵다. 인간의 나약함을 선현들은 일찍이 갈파하고 있었다. 친구 역시 스스로를 단속하기 위해 이 경구를 새기고 있는 중일 게다. 사랑의 솔직한 속성은 할 때는 쉬워도 끊을 땐 비루해진다는 것이다. 그걸 뛰어넘으려는 안간힘을 가리켜 인간적이다라고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6

행복 유예

실로 다양화되고 다변화하는 시대이다. 한데 그 변화무쌍한 것들에도 일정 패턴이 있다. 한 해 발생한 트위터 문구 15억 건 이상을 모 소프트 회사에서 분석했다. 자료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행동에는 시간대별로 일정 패턴이 있단다. 예를 들면 커피 마시는 시간은 물론 마시는 행위도 유형화할 수 있다. 하루 세 번 특정한 시간에 `커피`라는 말이 등장하고 그 각각은 속성별로 모닝커피, 테이크아웃 커피, 카페 커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한 마디로 수집 분석 된 자료는 우리에게 적절한 `때`를 알려준다. 데이터 중 흥미 있는 부분은 요일별 감성 지수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떤 요일에 기분이 가장 좋을까? 월요일 최악의 상태였다가 금요일로 갈수록 기분 좋음의 최절정 상태를 맞이한다. 그러다가 토요일 저녁부터 급격하게 우울 모드가 된다나. 월요일 해야 할 일이 생각나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지 못한다.연구에 의하면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우리만큼 걱정을 앞당기지는 않는다. 그들의 토요일은 우리의 그것에 비해 훨씬 즐겁다. 미리 걱정하는 우리 정서로는 금요일 저녁이 기분 좋음의 절정이다. 오죽하면 `불타는 금요일`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토요일 저녁만 되면 월요병이 소급되어 텔레비전도 제대로 시청하지 못한다. 심지어 일요일 저녁에는 외식조차 꺼리게 된다. 다음날 맞닥뜨릴 일거리가 걱정되어 최대한 움츠리게 된다.행복을 유예하는 것도 일종의 문화적 관습 같다. 서구사람들은 일 년 번 돈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소비할 것인가를 구상한다. 한 달 간의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일 년을 일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그에 비해 우리는 하루 삶의 무게만으로도 벅찬데 제 평생의 삶을 미리 얹어 걱정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 정도는 유예하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미뤄진 행복이 먼 훗날에는 온다는 보장이 있기는 하던가. 다음날의 안녕을 위해 휴일 정서까지 방해 받는 소시민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는 말은 너무 먼 당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5

스미싱 주의보

`우리 준이가 태어난 지 벌써 일 년이 되었어요. 축하해주세요` 낯선 번호에 수상한 문자이다. 링크도 걸려 있다. 접속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잠시 한 호흡 쉬어가기로 한다. 주변에 돌을 맞는 지인도 없거니와 있다 해도 느닷없이 저런 형식으로 문자를 보낼 것 같지는 않다. 궁금한 건 포털 사이트 지식 창에 물어 봐, 라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얼른 검색을 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문자 피싱이다. 이런 신종 사기 문자를 `스미싱`(Smishing)이라 한단다. SMS(Short Message Service)와 피싱(Phishing)의 합성어인데 안내장, 무료쿠폰, 요금 명세서 등의 문자로 가장해 첨부된 링크에 수신자가 접속하도록 해 돈을 빼가는 수법이다. 링크된 주소를 클릭하는 순간 악성 코드가 깔리고 소액 결제를 유도하는 메시지가 뜬단다.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기성세대만 걸려들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전자기기에 능숙한 젊은 세대들도 피해를 당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바일 초대장이나 무료 쿠폰 문화 등에 익숙한데다, 이름도 그럴듯한 신제품 아이스크림 `악마의 쇼콜라` 무료 시식권을 다운받으라는데 어찌 유혹당하지 않을 것인가.스미싱 피해 사례가 점점 늘어나는 건 그 수법 또한 날로 진화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한 방법에 대처할만하면 다른 기발한 방법으로 유혹한다. 깊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순간적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새롭고 희한한 문구들이 등장한다. 알고도 당하고 모르고도 속는다. 소액 결제 피해액이라 당하고도 귀찮아서 넘어가기도 하고 요금 내역서를 제대로 보는 경우가 없으니 모르고도 지나는 경우도 제법 있을 것이다.근본적인 대책보다 그들의 교묘한 수법이 한 수 위이니 당분간은 스미싱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는 수상하거나 낯선 문자에 포함된 링크는 접속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그들의 낚시질에 휘둘렸다면 즉시 요금 결제를 막아달라고 통신사에 연락을 취하는 방법과 함께./김살로메(소설가)

2013-08-02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 제목이 있다. 불안에 대한 인간의 제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영화와는 상관없이 그 제목 한 번 멋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로 우리 삶은 불안하고 그 불안 때문에 영혼이 야금야금 잠식당하는 기분이 드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자족의 빛이 넘쳐나는 것만큼 불안의 그림자 또한 짙다. 불안과 친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한 예를 들자. 입시생 엄마들이 모이면 관심사 중의 하나가 `용한 점집 찾기`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풍경일 텐데 불안의 정서와 관계가 깊다. 자식의 앞날을 좌지우지하는 대학입시야말로 부모가 느낄 수 있는 최대의 궁금증이자 불안감일 수 있다. 수험생들 속 타는 것 이상으로 엄마들도 노심초사한다. 섣불리 허심탄회하게 드러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삭이자니 속병이 날 지경이다. 그 와중에 `잘 본다`는 소문이 도는 역술인들의 정보라도 얻으면 성지 순례하듯 길을 나선다. 내 불안을 위무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대부분의 한국인 정서 밑바탕엔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적 유전인자가 깔려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종교와 관계없이 입시철이 되면 역술인들을 찾는 사람들은 늘어만 간다. 우리식 종교 정서는 기복신앙에 가깝고 그 기복 대상 또한 내 가족, 내 핏줄이 우선이다. 내 자식의 앞날이 궁금하고 내 남편의 재복과 건강이 궁금한 것이지 거창한 주제인 인류공영 따위는 인심 쓰는 덤에 지나지 않는다.불안의 제일 원인은 욕심 때문이다. 사회는 급변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당연히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여유를 가질 시간이 없다. 오직 나와 내 가족의 안녕과 자족만을 삶의 목표로 삼기에도 벅찬 시대가 되어버렸다. 점집을 순례한다고 그곳에서 내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고 근본적인 불안이 해소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맘 잃고 헤매는 영혼들에게 그보다 나은 위안처가 없으니 사람들의 귀가 솔깃해진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니 그렇게라도 위로를 간구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8-01

해리엇 제이콥스

휴가는 게으르게 보내야 제격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빈둥빈둥 시간을 축낼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달콤한 휴가이다. 잠시 지루한 타이밍에 집어들 수 있는 책 몇 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다. 이번 휴가 때 가장 눈에 들어온 책은 해리엇 제이콥스에 관한 것이었다. 흑인 노예였던 그녀는 주변의 도움으로 `린다 브렌트 이야기`라는 가명 자서전을 출간할 수 있었다. 1861년 나온 이 책은 어린 주인의 재산으로 양도된 노예 제이콥스의 처절한 투쟁기이다. 그녀는 성적 괴롭힘을 당하지만 당당하게 맞섰고, 사랑 앞에서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고, 7년이란 긴 독방 생활을 처절하지만 잘 버텨냈다. 얘기에 쉽게 몰입되는 건 그녀의 글 솜씨도 한몫했다. 감각적이고 유려한 그녀의 문체 때문에 발간 당시에는 여성 편집자의 소설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받을 정도였다. 여주인의 배려로 글을 배울 수 있었던 건 노예인 그녀로서는 큰 행운이었다.그녀는 폭군 주인을 피해 사랑하는 백인 남자와의 사이에 두 명의 아이를 낳고 숨어서 지냈다. 그렇게 7년을 분투한 끝에 아이들도 되찾고 북부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여성 노예 신분으로 자신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이런 모습에 당시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단순히 제 처지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 건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노예들을 위해 힘이 돼줄 수 있는 깨친 여성들의 힘이 필요했다. 처절한 환경 속에서 속박받는 2백만 남부 여인들의 처지를 북부 여성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기본 인권에 대한 그녀의 정신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이후에도 여성권리신장으로 이어졌다.개인적 차원이라면 침묵해도 좋을 고난사를 그녀가 기록으로 남긴 건 인간 존엄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이었다. 그녀가 말한다. `오직 경험해본 자만이 악의 나락이 얼마나 깊고, 어둡고, 추악한지 깨달을 수 있다`고. 세상의 악행 앞에서 저항하는 모든 개별자들의 의지는 끝내 유의미하다는 것을 가르쳐준 제이콥스 여사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31

육추(育雛)

벗들이랑 계곡에 물놀이를 하러 갔다. 배려하고 솔선수범하는 마음들 모여 유쾌한 수다를 떨었다. 수다의 연장으로 산책하는 길에 재밌는 장면을 보았다. 장정 허벅지보다도 크고 긴 렌즈가 달린 카메라들이 일제히 한 나무를 가리키고 있다. 그 모습이 위압적이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말로만 듣던 단체 출사(出寫) 현장이다. 한데 무엇을 찍는지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호기심 많은 한 벗의 권유로 기어이 현장 구경을 하기로 한다. 호반새의 육추 장면을 찍는 중이란다. 육추란 말 그대로 `새끼를 기르는 것`이다. 조류의 경우 그것은 어버이새가 새끼새를 위해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을 말한다. 호반새는 관심이 필요한 등급에 해당하는 귀한 새로, 그 화려한 자태 때문에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궁금해 하는 불청객을 위해 사진가들은 몇 시간을 기다려 찍은 호반새의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단단하고 큰 부리부터 온통 주황빛인 호반새의 순간 포착 파노라마는 황홀경 그 자체였다.그들의 권유로 부모새가 둥지로 날아왔다 사라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순식간이라 눈으로는 그 움직임의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카메라에 찍힌 어미 호반새는 살찐 비단개구리를 입에 물고 있었다. 찰나의 손맛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해 사진가들은 조류 사진 찍기에 매료되나 보다. 새를 찍는 것은 돈이 생기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날랜 새들을 순간 포착하는데서 작은 기쁨을 누릴 뿐이다. `새 관찰자`들은 그 단순한 자족을 위해 며칠씩 야영하는 수고를 감내한다. 그들에겐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자유의 시간이다.아무리 짧은 순간이라도 자연은 거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먹이를 물어오고 받아먹는 새들의 입은 정직하다. 새를 찍는 그들은 그 자연에서 온갖 우주의 법칙을 발견한다. 일견 무의미하게 보이는 기다림의 짜릿한 미학, 육추의 순간을 포착하고 난 뒤의 저릿한 마음, 이런 숭고한 향연은 잠시나마 인간의 못된 분별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