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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의보다 지혜

정의는 옳지만 인심이 묻힐 수 있고, 지혜는 그를 수 있어도 사람을 구한다. 가령 소셜 네트워크 대화방에서 있을 수 있는 소란을 중계해보자. 옷 장사 하는 A가 제 하루 일과를 이렇게 보고한다. 오늘 넘 힘들었어. 자꾸만 에누리하려는 손님들 때문에 밑지고 팔다 보니 남는 게 없어.이때 A를 응원할 겸 평소 원칙에 충실한 B가 나선다. 올바른 상도덕을 위해 의류정찰제가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그때 C가 나타나 의류정찰제만이 능사는 아니며, 정가제를 한다고 상도덕이 지켜지는 건 아니라며 반박한다. 기분이 상한 B는 자신은 A에게 한 이야기인데 왜 C가 나서서 물을 흐리냐고 재반박을 한다.이해할 수 없다는 듯 C는 단체방에서 하는 얘기는 누구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니 당사자가 아니라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흥분을 한다. 이때 평소 방관자였던 D가 나타나 B가 틀린 말 한 건 아니니 이해하라며 슬쩍 B편을 든다.역시 방관자였던 E도 뒤질세라 제 의견도 맘대로 못 내놓을 것 같으면 단체대화방이 왜 필요하냐고 C를 두둔한다. B는 A를 위로하려는 제 진심이 왜곡되었다며 단체방을 탈퇴한다. 결국 분란이 생기는 대화방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방을 개설한 F는 단체 계정을 폭파한다. 그 다음 끼리끼리 모여 대화방을 재개설한다. 그렇다고 평화가 오나? 천만에! 그 안에서 또 새로운 분란은 지속된다. 그렇게 삶은 정반합 계속된다.과장되게 소셜 네트워크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예를 들었지만 이는 대화법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특히 정치인들을 둘러싼 알레고리로는 이보다 나은 예도 없다. 그들이 흘리는 말은 보기에 따라 언제나 옳거나 항상 그르다. 옳거나 그른 그 말에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면 대화의 방식이다. 위 예에서도 보듯이 내용만 보면 그들 역시 다 옳다. 하지만 형식면에서 보면 그들 모두 그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정의를 지혜로 실천할 수 있는 타협의 방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9

예술적 취향

작년 개봉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영화관에서 못 본 건 아쉬운 일이었다. 어젯밤 교육방송에서 심야영화로 방영해주는 걸 봤다. 우디 앨런 식 유머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다. 약혼자와 파리로 떠난 소설가 `길`이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 큰 흐름이다.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콕토와 헤밍웨이, 피카소와 달리, 마네와 고갱 등등 파리 거리를 누볐던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영화 자체에 빠지거나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상기하는 것도 재밌지만, 잘 몰랐던 대중 예술가를 눈 여겨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주인공 `길`은 술집에서 혼혈 흑인 무희를 만난다. 조세핀 베이커이다. 흰 드레스에 깃털을 휘날리는 그녀는 고국인 미국이 버렸지만 파리 사교계에서 부활한 실존 인물이다. 불우한 환경과 뉴욕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은 파리로 진출한 그녀에게 단단한 무기가 되었다. 날렵한 몸매, 매혹적인 표정, 깃털 같은 경쾌함, 천진난만한 분위기 등으로 그녀는 단번에 블랙아메리카 열풍의 핵심이 되었다. 새로운 것, 특히 아프리카적인 것과 재즈 등에 환호했던 파리 상류층 기호에 그녀는 멋지게 화답했다.파리는 그녀에게 열광했다. 여성들은 베이커처럼 피부를 그을리고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틀어 올렸다. 뉴욕에서의 상처를 기억하는 그녀는 그 열풍을 만끽했다. 대신 파리에 대한 고마움을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갚았다. 전후에는 민권 운동과 고아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5년 그녀가 죽었을 때 장례식이 프랑스 전역에 중계될 정도였다. 파리와 조세핀 베이커는 궁합이 맞았던 셈이다.`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모든 현재는 모든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그 답은 현재에 있다이다. 속살거리는 그 유머에다 내 식 깨알 같은 후기를 더하련다. 진정한 자긍심은 이국적이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너그러움에서 나온다고. 따라서 파리 사람들의 문화적 오만은 열린 시각에서 온 예술적 취향이니 용서할 만하다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7-08

이오덕 일기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방식은 한마디로 `쉬운 말로 쓰자`였다. 권정생 선생과 더불어 그는 `국민학교만 나와도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우리글 바로쓰기`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책이다. 쉽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아야 한다고 일깨우는 그 책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쉬운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문장에서조차 우리말을 고집해 문장이 어색해지는 선생의 방식을 제외하면 나는 여전히 선생의 글쓰기 방식을 존경하고 따르려 하고 있다. 올해로 선생이 떠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그를 기리는 지인과 출판계의 뜻으로`이오덕 일기`가 출간되었다. 다섯 권으로 추려진 이 책이 나오기까지 2년8개월이 걸렸다. 앞 두 권은 교사로 살았던 24년 세월을, 뒤쪽 두 권은 사회활동을 하던 13년의 기록을 담았다. 마지막 권에는 충주 무너미 마을의 마지막 5년 생활이 실렸다.그 중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 장면이 인상 깊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권정생 선생은 아프다는 핑계로 시상식에 못 간다고 했다. 여비가 없을 것으로 짐작한 이오덕 선생은 당신이 갖고 있던 원고지와 돈을 두고 나온다. 두 분의 우정이 오래 지속된 계기가 된 만남이었다. 이오덕 선생의 발품은 가난한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전체 일기가 아닌 부분만 읽어도 선생이 뿌린 생각의 씨앗이 얼마나 영글고 올곧은지 알겠다. 어린이와 노동자와 농민 등 가장 낮은 이들과 호흡한 선생의 숨결이 오롯이 살아 있다. 교육과 글쓰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회 혁신으로까지 신념을 확대해간 선생의 노고가 일기 안에서 되살아난다.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 몸과 맘을 연 선생의 한살이가 이 일기집으로 인해 더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5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 단상

국정원판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되었다. 앉은 자리에서 들쳐볼 수 있으니 웬 횡재인가 싶다가도 솔직한 심정은 `이래도 되나`이다. 기밀사항인 정상회담록마저 온 국민이 열람할 수 있다면 자료가 공개될 것을 의식해 회담에서 깊은 대화들이 오갈 수 있을까 하는 기우가 이는 것이었다. 중편소설 분량보다 많은 대화록은 주로 노 대통령이 대화를 주도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화답을 하는 분위기이다. 방문객 입장인 노 대통령은 많은 의제를 쏟아내기에 바빠 보였고, 김 위원장은 회담을 의례적 행사로 보거나, 아니면 나이 탓인지 피로감 깃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원본과 국정원이 공개한 이 전문이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입맛에 맞게 약간의 윤색이 가해졌다 치더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노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나 `굴욕적 외교` 운운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다만 민족자주와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욕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의적 해석의 빌미가 되고, 악의적 왜곡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대화록에 담긴 노 대통령의 모든 말이 옳거나 공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원수로서 정상회담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의 경계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접대용 발언이라 해도 개성에 이어 해주까지 경제특구로 주려고 했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수위가 더 강도 높아 보였다. 북한에서야말로 이 회의록이 공개된다면 군부나 인민들은 굴욕적 회담이라고 성토하지 않을까 싶었다.민감한 안보사항을 경제논리나 평화 무드의 해법으로 바라보려 한 것은 노 대통령의 과잉의욕으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이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헤드라인으로 잡은 `NLL 바꿔야,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는 사실상 NLL 포기 발언 맥락으로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소동이 국정원의 정치개입 국정조사 전 물 타기 전략이 아니기를 바라며 궁금한 이들은 회의록 전문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른 답이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4

내 방에 잠들 착한 사람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착한 사람을 재웠던 게 언제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밤에 나는 창문을 닫고 물을 끓이고 손으로 이부자리에 묻은 머리칼을 떼어냈을 것이다.` 김도언의 `불안의 황홀` 중 어느 오월에 쓴 일기 전문(全文)이다. 오래토록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런 기억을 떠올린 지 오래 되었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왜 이런 단상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탄식이 지나갔다. 과외로 연명하던 청춘 시절, 낮잠 자고 음악 듣고 글쓰기를 해도 시간은 넘쳤다. 그렇게 남는 시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모여 놀았다. 착하지만 뜻대로 안 되었던 우리는 좁은 골방에 틀어 앉아 청춘을 둘러싼 제 환경을 성토했다.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자주 내 방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나는 곡예를 즐기듯 그 시간을 즐겼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호떡과 설탕 듬뿍 넣은 커피를 앞에 두고 에어 서플라이나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친구를 위해 간이침대 밑 먼지를 훔치고 창문을 여몄으며, 물을 끓이고 홑이불의 머리칼을 떼어냈다. 그렇게 음습한 수다의 환희로 청춘의 정점을 찍었다. 불안한 미래였기에 뭐든지 불온하게만 받아들였고, 부족한 현실이었기에 무조건 불편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세월은 흘렀다. 불안도 결핍도 덜한 나날이 되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더 이상 친구를 위해 요령부득의 호떡을 굽느라 부산을 떨지도 않고, 설탕 듬뿍 넣은 촌스런 커피를 내놓지도 않는다. 문자 한 번이면 오리구이집이나 물회집에서 편리하게 만날 수 있다. 불안의 황홀 대신 편안의 불손이 유머로 먹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내 방에 잠든 착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는 만큼의 감칠맛 나는 입맛을 기억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오늘 하루쯤은 마음으로나마 오랜 친구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도 좋겠다. 어딘가 묵어있을 에어 서플라이의 당신이 사랑한 사람, 밤이 깊을수록 등의 테이프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김살로메(소설가)

2013-07-03

필요한 덕목

어제 오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모 중견 기업이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지난 주말 방영된 시사교양 프로그램`그것이 알고 싶다`와 무관하지 않다. 모 살인사건 주모자의 파렴치한 후일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주모자가 그 기업 회장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나 역시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전해주는 여러 정황들에 그간 관심을 뒀었다. 이번 방송에서는`사모님`인 가해자의 병원 특실 생활 고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재에 대한 강력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관한 우리들의 자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돈 있고 배경 있으면 죄 없는 사람 죽여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우리 사회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형집행정지라는 합법적(?) 근거로 병원 특실에서 나머지 형기를 보낼 수도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방송은 나아가 사법 적용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고발한다. 한마디로 그들만의 세계란다. 같은 법이지만 그들의 법 집행은 돈과 권력에 좌지우지된다. 일반 서민들과 특수층을 대하는 그들의 법 해석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 검은 고리에 연결된 인물들은 한결 같이 사회지도층이다. 의사, 검사, 변호사, 경찰 등으로 이뤄진 그들에게 `가진 사모님`을 위한 `형집행정지` 정도는 너무 쉬운 심부름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구린 돈이 빠질 리 없다. 의사는 수상쩍은 진단서를 발급하고, 검사는 당당하게 형의 정지를 허가하고, 변호사는 뻔뻔하게 형 집행 신청을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돈이 힘이다. 당연히 가해자에게 그 심부름 값은 껌값에 지나지 않는다.돈으로 제 안위를 사고도 활개 치는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안전 불감증 못지않게 양심불감증도 우리 사회를 좀 먹는 불쾌의 정서이다. 언제까지 법보다 돈, 돈보다 권력인 사회를 인정하라고 자기체면을 걸 것인가. 그들 지도층들에게 바라는 서민적 정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적 덕목이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돈이 그보다 훨씬 좋은 이유되시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2

문화의 방식

누구나 제 눈으로 타자와 풍경을 읽는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여행의 감흥이 다른 이유이다. 유럽 여행 중 가장 큰 정서적 충격은 센느 강변의 젊음들이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강변 풍경은 인산인해이다. 평일 저녁인데도 둔덕이나 보도마다 몰려나온 청춘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인구 밀집형 도시가 아닌 파리에서 이토록 많은 청소년들이 강변으로 쏟아져 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다니. 서머타임 기간이라 해가 늦게 져 시간이 많은 그들이라 해도, 우리식 문화에 길들여진 나에겐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 청소년들은 평일 저녁, 강변에 떼로 몰려나올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대학입시에 밤 시간을 저당 잡힌 지 오래다. 설사 자유가 주어져도 그들은 강변에서의 수다 삼매경은 택하지 않는다. 피시방이나 노래방 등 폐쇄적인 공간을 선호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러닝맨이나 개그콘서트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것이다. 통째의 젊음이 강변을 점령해 저들만의 소통으로 낭만을 즐기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최첨단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서 그럴까. 스마트폰만 죽어라 들여다보는 청소년들도 거의 없다.세대는 다르지만 문화적 관습은 대를 잇는다. 수다 문화, 고상하게 말해 토론 문화가 발달되다 보니 대를 이어 그게 당연히 학습된 걸까. 흔히 프랑스를 수학과 철학의 나라라고 한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도 수학과 철학에 가산점을 줄 정도이다. 답 자체보다 답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이다 보니 모여서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런 모양이다. 주입식 사고와 오지선다형 학습에 익숙한 우리의 청소년 상황이 떠올라 괜히 심란해지는 것이었다.고통 없고 방황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밤물결을 일렁이는 바람 앞에 제 청춘을 부려놓을 여유가 있는 것과 그 바람의 존재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청춘은 다르지 않을까. 문화적 관습으로만 그들의 낭만성을 치부하기엔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7-01

힌트는 짐

이십 대 초반 동아리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험한 산을 며칠에 걸쳐 종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인 등반 채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뜬 나머지 이것저것 꾸러미만 늘렸다. 이틀째였던가. 급경사인 등산로 앞에서 나를 비롯한 여학생 몇은 그만 울음보가 터졌다. 체력은 바닥인데 무거운 배낭마저 어깨를 짓누르니 설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배웅 나왔다가 엉겁결에 뾰족 구두 차림으로 합류한 후배조차 의연한 모습이었다. 너그러운 남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주량도 모른 채 마신 한 잔 소주에 취해 다음날에야 깨어났던 사건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괴와 민폐를 불렀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정글의 법칙` 같은 다큐에서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마구 존경심이 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 자신을 알자`는 말을 자주 새기게 되었다.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테랑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하다는 여행전문가의 충고는 내 경우 옳았다. 그 옛날 지리산 종주에서 겪었던 낭패감을 떠올리며 짐을 줄이고 또 줄이라는 그 말을 무조건 신봉했다. 최대한 가벼운 짐을 꾸렸다. 얼마나 줄였는지 공간이 남아돌아 가방을 움직이면 덜컥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그러면 가벼운 짐 싸기만 옳은가. 그럴 리가! 때에 따라 무거운 짐은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가셔하면서도 근시와 돋보기용 두 개의 무거운 안경을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저격수는 대통령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하지만 총알이 주머니 속 강철 안경집에 굴절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짐이 무겁다고 느끼는 자는 덜고, 그 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챙겨서 떠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전세 아니면 월세, 선택의 연속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6-28

제라늄이 있는 창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여행은 반쪽짜리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그들 삶 안에서 부대껴봐야 여행의 참맛을 알 수 있다. 바람결에 제 흰 뒤태를 맘껏 까불던 은사시나뭇잎의 당당함, 그 아래 푸르거나 흙빛으로 휘돌던 냇물의 도저함, 늦봄의 아쉬움을 달래며 만개하던 아카시아의 친근함, 그 뒤에 묻어나는 삶의 실체를 호흡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드넓기만 한 평원은 고요를 지나 적막하기만 했고, 문 닫힌 대문 안 울타리는 상상으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연에서 경험하지 못한 간접 체험은 사람을 대하면서 조금 할 수 있었다. 곤돌라 내부가 더러워질까 예민해지던 뱃사공의 시선, 타성에 젖은 노랫가락으로 제 피곤을 연주하던 악사들의 낯빛, 휴지 하나 버리자는 데도 손사래 치던 점원의 이맛살. 작은 관찰만으로도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겹고 피로한 것인지 알 것 같다.그들 목가적 원경의 평화와 위대한 축조물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무던히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평화와 위용은 껍데기일 수도 있다. 견문의 대상을 그들 삶의 현장으로 치환한다면 어떨 것인가. 원경의 평화도 삶 안에서는 곤고함이 도드라질 것이고, 건축물의 위대함도 노동 현장이 되면 신산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원래 멀리서 보면 청맹과니 평화요, 가까이서 보면 천리안 전쟁터 같은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니.그 신산하고 지리멸렬한 것들로부터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작은 여유를 찾는다. 창가의 제라늄 화분이 그 좋은 예가 될까. 유럽의 창밖 베란다마다 붉은 제라늄이 지천이다. 춥지 않은 날씨 덕에 오래 꽃을 볼 수 있는데다 잎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은 해충 퇴치에도 도움이 된단다. 관상용 꽃으로는 그만이다. 제라늄의 잔영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소박한 데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 심성의 공통점 때문이리라. 굳은 결의 또는 그대가 있어 행복이네 등의 꽃말을 지닌 제라늄이 핀 창가는 한동안 내 안에서 쉬 떠나지 못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27

타자를 안다는 것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번지`라는, 내가 보기에 무척 예쁜(?)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우스갯소리를 붙이자면 그의 자는 자지(子遲)란다.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학식이 높았던 이는 아니었으리라. 총명하고 똑똑한 제자는 아니어서 엉뚱한 질문, 예컨대 채소 가꾸는 법 따위를 물어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듣곤 했다. 영민함과 재치와는 거리가 멀었겠지만 순박함과 성실함으로 공자를 보필한 제자였을 것이다. 그의 관심 분야는 앎(知)과 어짊(仁)에 관한 것이었다. 번지가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했다. `어짊이란 애인(愛人)이고, 앎이란 지인(知人)이다.`라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안연에게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요, 중궁에게는 남에게 원치 않은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 사마우에게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라 답할 만큼 그때그때 달랐다. 하지만 가만 보면 공자의 여러 답변은 결국 한 가지였다. 다름 아닌`타자에 대한 이해`이다.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흔히 만나는 두 나무가 사이프러스와 우산소나무이다. 전자는 밑이 넓다가 위로 솟구칠수록 뾰족한 긴 삼각형 모양이고, 후자는 나무둥치가 뻗어가다 윗부분 잎맥에 이를수록 핵 분열하는 것처럼 둥글게 퍼지는 형태이다. 각각은 직선과 곡선, 첨탑과 돔, 뾰족함과 둥글함, 자제와 허용 등의 이미지를 풍긴다. 한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나무가 연출하는 거리의 풍광이야말로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아가 그 다른 사람마저 밑둥치와 잎맥이 지닌 성질은 다를 수 있다. 다변적인 인간의 성정을 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자마다 다른 답변을 줄 수 있었다. 사람 따라 달랐던 공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숨은 가르침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인간 보편성에 대한 균질하고도 다양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06-26

시청박(視聽搏)의 여행

`시지불견(視之不見) 청지불문(廳之不聞) 박지부득(搏之不得)`이란 말이 있다. 도덕경에서 도(道)를 설명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보아도 제대로 못 보는 것, 들어도 제대로 못 듣는 것, 잡아도(겪어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은 도뿐만 아니라 여행에도 적용된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곳을 휘돌았을 때 그것은 `시청박(視廳搏)`에 머문 것이지 `견문득(見聞得)`에 이른 것은 아니다.냉정하게 보면 차 탄 채 풍광을 보다가 내려, 낯선 축조물과 거리를 배경으로 빛의 속도로 사진을 찍고 밥 먹고, 다음 장소로 옮겨 잠자는 것, 이것이 여행의 전 과정이었다.패키지여행의 한계였다. 여행에서 가장 필요한 자발적 의사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뭔가를 깊이 새긴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합리적인(?) 비용만큼의 합당한 결과였으니 당연한 얘기이긴 하지만.인증욕이 발동해 셔터만 바쁘게 눌러댔을 뿐 그들 삶 자체를 들여다 볼 기회는 좀처럼 가지지 못했다.이국의 문 닫힌 여염집안의 티타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에서의 농사꾼의 망중한, 마을을 흐르던 푸르거나 흙빛 시냇물의 감촉 등을 새기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토록 날 좋았던 이국 밤하늘의 별 한 번조차 쳐다보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주마간산 식 여행은 견문득과는 한참 멀다. 그렇다고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비록 시청박에 머물렀지만 그 또한 여행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로, 듣자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로 정의하고 있다.이희미(夷希微)는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실체가 아니다. 도가 그러하듯 여행에도 완벽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닿을 수 없는 한 지점을 향해 바람 맞으며 떠나보는 일, 그 과정에서 삶을 이해하려는 열린 자세 그것이 여행 궁극의 목표 아니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6-25

젊은 어깨동무

`오, 삶이여. 삶 그것은 바깥에 있다는 것 / 활활 타는 불꽃 속의 나 / 나를 아는 자 아무도 없다` 임종 때 남겼다는 릴케의 이 시구는 여행의 목적에도 맞춤하다. 왜 사람들은 저마다 떠나기를 꿈꾸는 것일까. 왜 누군가는 기어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마는 것일까. 삶이란 내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바깥 어딘가로 향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 밖을 넘보는 욕망,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활활 타는 불꽃, 그 정념의 뿌리를 찾아 우리는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청춘인 여행객 셋. 둘은 쌍둥이 자매였고, 하나는 우연히 포항에서 같이 출발한 아가씨였다. 셋 다 직장 생활을 하는 커리어우먼이었는데 휴가를 내고 여행에 동참한 경우였다. 사회생활에서 터득한 지혜 덕이었을까.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하나같이 성숙하고 사려 깊은 삼인방이었다. 흔히 기성세대들이 우려하는 젊은이 특유의 철없음도 없었고, 혼자만 잘났다는 이기심과 무관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온다.카드를 분실했다고 울먹거리다가도 위로의 말에 해맑게 웃던 모습, 약속 장소를 넘겨짚는 바람에 한참 숨바꼭질을 했을 때, 기다리던 우리는 그마저 소소한 재미로 생각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진심으로 미안해하던 모습, 귀찮을 법한데도 티내지 않고 환한 미소로 사진기 셔터를 눌러주던 밝은 심성 등 그들이 뿜은 매혹적인 아우라 덕에 여행은 한층 즐거웠다. 두고 온 걱정거리가 많은 주부들에게는 2주의 여행 기간이 적당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그들로선 못내 아쉽기만 하다고 했다.바깥의 삶을 내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데는 젊음, 그것도 어깨동무한 젊음보다 나은 게 없다. 여행이란 꿈꿀수록 이루기 쉽고, 덜 심사숙고할수록 기회가 온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한시라도 젊었을 때 경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자. 내 안에 머문 나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이 되도록./김살로메(소설가)

2013-06-24

함께라는 말

잘잘한 해프닝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이다. 단체여행에서의 수위 높지 않은 실수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여행의 잔재미를 선사해준다. 겪는 당사자로서는 아찔하고 당황할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마저 좋은 추억담이 되어준다. 일찍 잠에서 깼다. 말로만 듣던 파리 시내 관광, 그 중 에펠탑과 센느강을 볼 수 있다는 설렘에 마음은 절로 달떴다. 외곽의 숙소를 떠나 버스는 시내로 달렸다. 한참 가고 있는데 전화를 받는 가이드의 얼굴빛이 심상찮다. 두 명의 일행을 숙소에 둔 채 신나게 달려왔던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설마 자신들을 두고 떠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 초기 여정이라 여행객들끼리 통성명조차 없어서 서로를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인원 체크는 당연히 가이드 몫이라고만 생각했다.아뿔싸, 두고 온 멤버는 전날 밤 내게 자신들의 곁잠자리를 내어준 그분들이란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가이드보다 내가 더 미안해졌다. 주변을 돌아볼 생각 없이 나만의 여행에만 몰두해있던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일었다. 버스는 이미 삼십 분 이상을 달려왔다. 운전대를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없이 그들은 택시를 타고 뒤따라 와야만 했다. 에펠탑 광장에서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잠시의 이별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괜히 민망해졌다. 섬세한 마음자리까지 이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했다. 둘이였다 해도 낯선 이국의 택시 안에서 그들은 얼마나 불안에 떨며 노심초사했을 것인가. 함께 하는 여행은 서로 챙기고 다시없을 위안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깨치게 해주는 해프닝이었다.`우리가 그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들이었어?`라고 안전지대에 당도했음의 여유를 귀여운 눈 흘김으로 대신하던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랬다. 누가 파리까지 와서 택시 일주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겠어요? 어느 누구도 쉬 경험하지 못할 파리의 추억을 그대들은 간직한 걸요./김살로메(소설가)

2013-06-21

따뜻한 바닥잠

길 떠나면 뜻 하지 않은 사건 하나쯤은 생겨줘야 제격이다. 여행담은 평범하지 않을수록 오래 기억되고, 그 기억의 갈래들은 깨어지는 삶의 리듬에 윤활유가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고, 심하게 로망에 젖었던 파리에 대한 첫인상은 실망감이었다. 대책 없이 자유로운 도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도로에 흩어진 각종 비닐봉지, 휴지, 꽁초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단정했던 런던 거리와 자꾸만 비교되는 것이었다. 겨우 한 번 스친 눈썰미로 이른 실망에 닿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내게 파리의 첫인상은 기대 이하였다.그에 대한 파리의 보복이었을까. 도시 외곽 호텔에 짐을 풀었다. 잠시 밖에 나오면서 카드키를 방안에 둔 채 문을 닫아 버렸다. 자정 즈음이라 호텔직원들은 퇴근했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꼼짝없이 한뎃잠을 자야 할 신세였다. 우리 일행을 운전해주던 버스기사 아저씨 두 분도 나처럼 카드키를 방안에 두고 나왔단다.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들 방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아무리 여유 공간이 있다 해도 쉽지 않은 선의였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잠시나마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며 내 입장을 변명하던, 민폐를 자초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한 순간이 떠올라 복합적으로 울컥해지는 것이었다.그날 밤, 가이드가 동분서주하며 구해준 여유이불을 바닥에 깔고 잠을 청했다. 내 방이 아니고, 침대 위도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따뜻한 잠자리였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가이드 역시 곁방 잠을 잤단다. 운전기사 두 분께 잠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가이드 방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내 문제로도 피곤했을 텐데 잠자리까지 편치 않았던 가이드에게 미안하기만 했다.여행을 하다보면 순간의 실수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그 민폐를 보듬어 안는 것 또한 개인의 몫인데 쉬운 일은 아니다. 잠자리 내어준, 모녀처럼 다정하던 직장 동료사이라던 두 분께 지면이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20

유럽에서의 공중화장실

2주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귀갓길 택시 안, 짐 꾸러미만으로도 먼 길 떠났다 온 것을 알아 본 기사분이 갑자기 흥분하신다. 외국여행은 할 게 못 된단다. 특히 유럽 여행이 그런데, 화장실 갈 때도 돈 내고, 호텔 나올 때도 팁 줘야 하고, 물마저 사먹어야 한다더라며 결론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데가 없단다. `우리나라 좋을씨고`, `내 집이 최고지`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끔 길 떠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유럽의 화장실 문화나 팁 예절, 공짜가 아닌 음용수에 대해 딱히 불만이 있는 쪽은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 않은가. 다만 공중 화장실에 대한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유료인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런 화장실조차 드물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식 화장실 문화에 길들여진 여행객으로서는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매장에 딸린 화장실 입구에는 칸막이 봉까지 설치해 놓았다. 무표정한 검표원이 동전 투입구 앞에 서서 물건 살 때 화장실 사용료만큼 할인해주는 쿠폰을 발행해 준다.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은데 왜 저런 시스템을 고집할까 싶다. 그들 조상들의 위대한 축조물 앞에서 연신 감탄하다가도 미로 속 같은 무료 화장실을 찾아 헤맬 때나, 푼돈을 낚아채 가는 유료 화장실을 보면서, 그들 문화 스케일의 양극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더럽힌 자, 품위 있게 그 비용을 지불할 지어다. 그런 마인드라면 화장실 개수도 늘이고 그 품격이라도 높여야 하지 않는가. 화장실 관리 명목, 노숙자 접근 금지라는 이유 등으로 유료 화장실을 고집한다지만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화장실이 그리 깨끗한 것도 아닌데다, 공중화장실마저 노숙자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디서 볼일을 보나? 이참에 선진화된 우리 화장실 문화를 유럽에다 전수하면 어떨까. 아니면 우리도 관광대국이 되어 느긋하게 화장실 앞에서 돈 내놔라고,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나을까. 아서라, 생각만 해도 멋쩍고 볼썽사납구나./김살로메(소설가)

2013-06-19

참을 수 있는 존재의 위안

우리 삶은 환희와 명랑과 광채로 들썩이는 날보다 굴욕과 절망과 고립의 나날일 때가 더 많다. 아니 어쩌면 그 둘 현상은 비슷하게 벌어지는데, 우리가 겪는 감정의 여운이 후자가 더 길게 가는지도 모르겠다. 기억해도 좋을 감정보다 잊고 싶은 감정이 우리 내부를 더 많이 휘젓고 다니기 때문이다. 간단하지 않은 이 삶에서 우리가 위로받을 곳은 어디일까. 이 세상 모든 비난과 절망에 대한 위안처는 친구이다. 다정한 존재 하나가 온 우주를 커버할 만큼 큰 위력을 발휘한다. 알랭 드 보통이 말했다. 친구란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에 대하여 더 적극적으로 정상이라고 판단해줄 만큼 친절한 사람을 일컫는다고.만난 지 십 년도 훨씬 지난, 멀리 사는 친구가 불쑥 찾아왔다. 서로가 몹시도 보고 싶어 했었다. 그새 남편은 병으로 먼저 떠났고, 이 년 전에는 그녀마저 암 선고를 받았다. 꾸준한 치료 덕에 이제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식당을 하는 그녀는 휴무일을 맞아 무작정 먼 길을 운전해왔다.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야속함, 시댁에 대한 서운함, 자식들에 대한 불안감과 기대감 등을 털어 놓는 그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 앞서 울고 그녀 뒤에 웃는 것밖에 없었다.못 보던새, 내 몸피는 그녀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굵어졌고, 그녀의 등짝과 허리는 그 옛날보다 날렵하기만 했다. 눈곱조차 떼지 못한 나를 안으며 그녀가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어. 그렇고말고. 몸은 변해도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는 게 사람이지.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건 상대방이 친절하고 배려심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서로가 이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로에게서 완벽을 찾는 게 아니라 상대의 결핍이나 과잉마저 인정할 때 우정은 지속될 수 있다. 내게 비합리적 양상이 벌어졌을 때, 그런 친구라면 무조건 내게 긍정의 신호를 보내주기 마련이다. 이 실팍한 세상에 친구보다 나은 약은 없다. 참을 수 있는 존재의 위안, 그것이야말로 친구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8

백석 시인과 젊은 화가

누군가를 몹시 좋아하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들다. 김영진이란 젊은 화가이자 저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쓴 `백석 평전`은 우연이자 운명적으로 내게 왔다. 인터넷서점에서 알게 된 전국구 독서친구들이 있다. 일명 오공주파인 우리 다섯은 비정기적으로 만나 우의를 다진다. 그 중 책 나누기 이벤트도 있는데, 이번 모임에서 내 손에 온 책 중에 가장 눈에 띤 게 이 책이었다. 일반적으로 평전이라면 객관성은 기본으로 깔린 채 저자 특유의 해설이 붙는데 이 책은 아무리 봐도 일방적 백석 헌사에 가깝다. 검증된 자료로 시인과 시를 분석을 한 게 아니라 주관적 감정적 판단으로 백석 시인을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도 저자의 노고와 진정성이 배어나와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책 제목처럼 평전이라 불리기는 뭣하고 백석에 관한 저자의 모든 관심 정도로 읽히면 무방하겠다.젊은 화가이자 저자인 김영진은 어릴 적부터 병약해 5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러던 그가 백석 시를 알게 되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그에게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근원을 아는 것이었다. 저자에게 그것은 다름 아닌 백석이었다. 당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한 시인의 시를 읽고 또 읽어 심장과 영혼에 새겼다.저자는 시인이 사용한 언어를 알게 되고, 시인의 삶을 유추하게 되고, 당시 시대 상황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시는 저자의 몸과 마음에 체화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어렵다. 사물이나 사람을 좋아하면 무작정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하거나 따지는 건 고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책은 백석평전이란 제목은 붙이기 곤란하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쓸쓸한 시인의 삶이 화가의 가슴에 들어가 한 편의 글이란 그림으로 완성된 것만으로도 저자는 뿌듯해 해도 좋으리라./김살로메(소설가)

2013-06-17

말 달리는 아버지

김혜순 시인의 시 중에 `델리카트슨`이 있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길렀다/ 당연히 잡아 먹으려고` 이렇게 시작하는데 시인은 영화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보고 이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는 질곡의 부성(父性), 부성의 패악과 연민 등으로 읽힌다. 불편한 진실의 따끔거림, 옛날에는 이런 시들도 괜찮다 느꼈는데 요즘은 이런 것보다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시들에 더 마음이 간다. 이 시를 대하면 어떤 연유에서인지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이 떠오른다. 분위기는 비슷한데 그 맛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등장하는 건 같지만 두 아버지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빠른 피아노 반주와 어우러지는 `마왕`은 음으로만 듣는 게 아니라 얘기로 이해하는 음악이다. 슈베르트가 열여덟 살 어린나이에 광풍에 휘말리듯 작곡한 이 곡은 괴테의 시`마왕`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절절한 부성이 전해지는 이 곡을 들을 때면 이미 알고 있는 노랫말 덕에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밤늦게 아버지 말 달리신다. 사경을 헤매는 아들을 팔에 안고서. 아들의 눈에는 헛것이 보인다. 옷소매 당기는 마왕이 보이지 않느냐고 아버지께 보챈다. 아버지는 아들을 달랜다. 아들아, 저것은 안개의 춤사위고, 마른 잎에 바람 부는 소리란다. 마왕은 유혹한다. 예쁜 꽃과 황금 옷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자고. 아들은 공포에 떨고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달랜다. 아버지는 아들을 안고 힘껏 말 달리지만 결국 마왕은 아들의 죽음을 거둬간다.한 성악가가 각각 내레이터, 아들, 마왕, 아버지가 되어 변주를 한다. 북유럽 어딘가의 설화를 시로 재해석한 괴테도 대단하고, 단번에 이런 시에서 영감을 얻어 가곡을 만든 어린 슈베르트도 위대하다. 대개의 아버지는 말달렸고, 무심한 자식들은 회한만 남아 이렇게 노래로써 부성을 추억한다. 자식은 아버지를 파먹고 자랐고,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그저 말 달렸을 뿐이다. 이 가곡, 나로서는 `마왕`이 아니라 `말 달리는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4

산처럼 무겁게, 깃털처럼 가볍게

우리 영화 `아나키스트`를 오랜 만에 다시 보았다. 1920년대 상하이를 무대로 실제 있었던 의열단 멤버들의 독립 투쟁기가 소재이다. 당시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두 축을 이룬 가운데 제 3의 세력인 무정부주의자들도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역사는 은연중에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강요하였다. 김구나 안창호 등 상해임시정부 측근들이 주도한 민족주의 진영의 독립투쟁사를 정통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도저도 아닌 제3의 입장인 아나키스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운다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행동주의자들이다. 그 단순한 목표 때문에 그들의 상처 또한 깊다.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둘러싼 제 상황과 힘겹게 싸웠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끝날 때쯤 그들이 본질적인 허무주의자가 되어 있음을 관객들은 눈치 챈다.독립에는 소모품으로 쓰이고, 조직에는 별 도움이 못 되는 세르게이는 적이 아닌 같은 단원에게 죽음을 당하고 만다. 무의미한 투쟁이라는 걸 멤버들도 알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아나키스트를 설명하는 말을 영화 곳곳에 장치함으로써 감독은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스어로 `아나르키아`는 `선장 없는 선원`을 뜻한다. 그들은 지배자가 없는 진정한 평등사회를 꿈꿨다. 일할 수 있는 만큼 일하고 먹을 만큼만 가진다는 그들의 모토는 일견 사회주의자들의 그것과 상통한다. 하지만 권력투쟁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순수한 의미의 아나키스트와는 거리가 멀다.애석하게도 아나키스트들이 꿈꾼 대로 역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 서로 간의 굴욕적인 투쟁의 기록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우울한 허무주의자들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삶은 산처럼 무거우나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다` -그들은 살아서 허무하고 쓸쓸했으나 진정 죽어서 깃털처럼 가벼운 희망이 되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3

스마트폰 세상

스마트폰 천국이다. 나남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세상이다. 아직 갖추지 않은 이가 있으면 그게 더 신기하고 존경스러워 보일 정도이다. 스마트폰의 순기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그게 그다지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스마트폰을 통해 교류를 하다 보니 인성이 메말라 간다. 모든 게 스마트폰 안에서 해결되니, 굳이 옛날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오죽하면 모든 답은 스마트폰 안에 있다는 말이 나올까. 스마트폰과 함께 크는 요즘 아이들에게 그것은 가장 편리하고 재미난 장난감이다. 유치원생들에게조차 이보다 나은 놀이도구는 없다고 한다. 실제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보여주면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단다. 모든 게 클릭 한 방으로 해결되는 줄 아는 아이들에게 책은 먹기 싫은 떡이나 성가신 장난감 같은 게 되어가고 있단다. 예를 들어 토끼나 원숭이 그림이 나오면 아이들은 그걸 먼저 클릭부터 하고 본단다. 그래봤자 반응 없는 동물들이니 자연스레 책은 스마트폰보다 재미없는 것으로 밀려나게 된단다. 우스갯소리 같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문명의 이기만큼 미래 사회를 두렵게 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인형이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 눈동자는 초롱초롱하고 입말은 발달한다. 그에 비해 스마트폰에 익숙한 아이들은 특유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중얼거림이 덜하다. 스마트폰에 자주 노출된 아이들은 소위 말하는 `멍 때리는 표정`이 압도적으로 많단다. 외부의 자극에 적극 반응하거나 그것을 수용하려는 게 아니라 수동적 미온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아이들에게 첨단을 경험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정서적 감성적 사고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다. 자극적 즉흥적 정보에 노출될수록 황폐한 가슴에 구멍이 뚫릴 여지도 높다. 오늘도 아이들은 스마트폰에다 눈길을 고정시키고 열심히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스크린을 터치한다. 클릭의 중독성과 더 친해지기 전에 아이들에게 진짜로 필요한 게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