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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톱밥은 계란이다

예술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당위성의 가치를 당연한 듯 태연하게 얘기하는 걸로는 종교서적이나 좋은 생각 같은 잡지 하나면 충분하다. 휴지는 휴지통에, 불난 데는 물길을, 가난한 자에게는 연민을 뭐 이런 얘기와 멀수록 예술가에는 가깝다. 예술가들은 생래적으로 아웃사이더 기질이 선명한 자들이다. 콜린 윌슨은 평론집 `아웃사이더`의 자전적 후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웃사이더의 근본 문제는 일상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이며, 그 일상의 세계가 무언가 지루하고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데 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사람이 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이라고 믿으면서 먹고 있는 것처럼.`톱밥을 계란이나 베이컨으로 생각할 정도로 몽롱한 상태가 되어야 아웃사이더의 대열에 낄 수 있고, 그럴 때 그들은 진정한 예술가의 반열에도 오를 수 있다. 이십대 초반의 노동자 콜린 윌슨이 처녀 평론집 하나로 온 세계를 강타한 것은 그 자신이 오롯한 아웃사이더였기에 가능했다. 그 어떤 정치적, 사회적 여건에 휘둘리지 않고 읽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방대한 기록에 매진했다. 그 자신이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면 이뤄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카뮈에서 니진스키에 이르기까지 실재했던 아웃사이더를 연구하는데 젊음은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었다. 쾌락의 유혹과 가난의 절망을 동시에 이겨내며, 저토록 이른 나이에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해 필사적으로 제 청춘을 투자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불가사의한 예술가로 각인된다.아웃사이더들은 세속적인 성찰을 거부한다. 자발적이고도 정신적 노역을 즐기는 그들에게 이 세상은 무가치해서 저항할 만한 사유가 된다. 시인이나 사상가들이 평범함을 넘고, 실재하는 세계를 거부하는 몸부림을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에게 일상적인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표류이다. 떠도는 바다 위의 군중을 본래적 단독자의 삶으로 환원시켜야 한다는 의무가 강할수록 그는 아웃사이더에 가깝다. 톱밥이 계란으로 보이는 아웃사이더들의 저항이 거셀수록 예술은 발전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10

백전백패하면서도

토니오는 급우 한스를 사랑했다. 한스는 토니오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토니오는 그런 한스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다.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이며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소박하고도 가혹한 교훈을 토니오는 벌써 열네 살에 깨쳤다. 토니오는 그 경험을 실용적으로 활용할 강단조차 없었다. 다만, 학교에서 주입하는 지식보다 이런 체험적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 있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토니오는 금발의 잉에를 사랑했다. 웃고 있는 길쭉한 푸른 두 눈에 빠졌고, 수많은 웃음소리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구별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잉에 역시 토니오를 고려해본 적 없었다. 그녀는 같은 부류인 한스와 사랑에 빠졌다. 잉에와 한스 같은 안정되고, 평화롭고, 정돈된 치들은 애잔한 단편소설 따위는 읽지 않고, 그런 작품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토록 아름답고 무심하고 명랑할 수 있다. 그것이 토니오의 슬픔이다.앨리스는 남자 친구 에릭을 사랑했다. 자신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그 남자의 행동에 좌절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그것을 최선의 경우로 해석하려 했다. 그것이 그녀 사랑의 증거였다. 남자가 짜증을 내면 과로 때문이라고 받아들였고, 말이 없으면 배가 고파서 그럴 거라 믿었다. 내 탓은 아닐 거야. 마음의 상처 때문에 화를 내는 걸 거야. 퉁명스런 남자의 태도를 수줍음이나 환경 탓으로 돌렸다.개뿔! 앨리스와 토니오의 사랑법은 상처의 개인사이다. 한스와 잉에와 에릭은 그 둘을 덜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엔 공평한 저울추가 없다. 더 사랑해서 패배하거나, 덜 사랑해서 상처가 없거나, 무관심해서 추억조차 없을 뿐이다. 그래도, 그래도 우리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랑에 빠지는 건 그 순간만은 승리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엔돌핀이 백만 배는 솟구친다. 백전백패하면서도 사랑이란 문밖을 서성이는 이유다. 토마스 만과 알랭 드 보통도 그쯤은 알고 있었으렷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9

어머니, 진화를 거듭하셨다

어버이날이다. 홀로 계신 시모와 친정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매뉴얼은 해마다 똑 같다. 바닷가에 산다는 핑계에다, 두 노인이 회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횟감을 떠서 방문하지만 실은 이보다 편한 먹거리 효도도 없다. 현금이야말로 가장 좋은 선물이라는 풍문을 위안삼아 푼돈 몇 푼 민망하게 내밀지만 그 역시 반 이상은 아이들 용돈으로 되돌아온다. 아무리 창의력이 바닥난 중년의 일상이라지만 의지만 있다면 이런 식상한 어버이날을 뛰어넘어 뭔가 그럴듯하게 두 노인에게 더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으련만 언제나 마음뿐이다. 후회하고, 반성하고, 사죄하며, 자책하는 모든 회고적 모성의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들에 그토록 염증을 내면서도 정작 그 부류에서 나 또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간사한 인간의 한계를 스스로 체험하는 셈이다.팔순 중반을 넘어선, 각각 고관절과 무릎 관절이 좋지 않은 두 노인은 보조 수레나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걷지도 못한다. 그 몸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즐거이 성당 나들이에 나선다. 마리아께 제 몸과 마음을 의탁해 평화를 갈구하고 내세를 간청하는 것이, 당신들 스스로 다복하다고 자부하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노친네들은 진작에 알고 있다.`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 / 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 더 걸어 들어가지 않고 / 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 / 엎드려버리신다(중략) / 관절이 시큰거려 / 얼른 안겨 / 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 (중략) / 할머니,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문인수 시인의`해녀`를 대하면 신 앞에 철벅 엎드리고 마는, 관절 시큰거리는 두 모성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무릎에 스치는 순간, 의탁하고픈 물결이 있다는 것에 무심한 자식들은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다복하고 거칠 것 없는 자식을 둔 것도 죄인양 두 할머니 오늘도 마리아께 오롯이 제 모든 걸 맡기러 저 언덕배기 넘어 간다. 구루마 밀며 지팡이 짚고서 웃으며 간다. 오늘은 어버이날!/김살로메(소설가)

2013-05-08

질문의 기술

어떤 가게의 과일이 맛있을까? 동네 시장엔 대여섯 군데의 과일 가게가 있다. 처음 몇 번은 그게 그맛이려니 해서 눈에 띄는 아무데나 들른다. 한데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한두 군데만 정해놓고 가게 된다. 그 집 과일이 가장 싱싱하고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곰곰 생각하면 그 가게 주인의 응대 방식이 과일을 맛 들게 했다. 소비자로선 이 과일 싱싱해요? 맛있어요? 등의, 하나마나한 질문들을 습관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그때 하수인 주인은 살짝 짜증을 미간에 심거나 심할 경우 싱싱하고 맛있는지 만날 먹어보고 사오는 것도 아닌데 자신인들 어떻게 알겠느냐고 손님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고수일 경우 주인은 준비된 맛보기용 과일을 권하며 순한 낯빛과 부드러운 말로 긍정의 대답을 유도한다. 그 가게 과일이 맛있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다. 실은 퉁명스런 집이나 친절한 집이나 그 과일이 그 과일일 뿐인데도 말이다.대개 논쟁은 쓸모없다. 상대 입장에서 `네`라고 답하게 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아끼는 최선의 방법이다. 맨발로 다니고 40살 넘어 대머리가 된 뒤에야 어린 신부를 만난, 일상생활에서는 젬병이었던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설득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련한 그는 `아니오`라는 말보다 `네`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 화법을 썼다. 상대편이 충분히 신뢰할 수 있도록 동의를 이끌어내는 질문을 했다. 상대가 극구 반대하던 사안도 어느새 긍정의 화답을 할 수 있도록 상대의 입장이 되어 동의를 구하는 질문을 했다.내 맘속의 안달은 언제나 상대가 틀렸다고 고집부린다. 하지만 실제 대부분은 상대가 옳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심리적 간극을 메우려면 맨발의 소크라테스를 기억하는 것도 괜찮다. 부드럽게 질문하면 `네` 하고 상대는 동의하게 되어 있다. 그 단순한 방법을 고수는 실행하고 하수는 거부한다. 맛있는 과일은 과일 가게 주인에게 달려있지 과일 자체와는 별 관련이 없다. 무맛 나는 참외도 꿀맛 나는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 사람의 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7

위대한 개츠비

처음 번역해서 안착한 제목은 원작이 지닌 본래의 뜻을 왜곡하는데 일조한다.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도 그런 의미에서 살짝 아쉽다. 개츠비의 일생을 쫓다보면 애초에 기대한 위대한 개츠비는 어디에도 없다. 사나이 개츠비의 허망한 순애보만 있을 뿐이다. 그 짠함을 일러 반어법으로 위대하다고 말해도 나쁘지는 않지만 썩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내게 개츠비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바보 같은 사람, 말리고 싶은 사람, 친구이고 싶은 사람 등으로 각인된다. 하기야 이런 걸 통칭할 때 `위대한 사람`보다 더 나은 것도 없으니 최선의 번역일 수도 있겠다.재즈 유행, 도덕 해이, 불법 난무, 주가 폭등. 1920년대 초반의 이런 뉴욕 분위기를 이해해야만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물질적 풍요와 세련미와 교양이 전수된 롱아일랜드 해협의 이스트에그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당시 사회의 상징 코드로 봐도 좋다. 1차 세계대전 직후 꿈조차 버거운 젊은이들은 파티와 술, 음악과 자동차 등으로 대변되는 `재즈 시대`를 살았다. 돈과 환락의 시대였다. 확실성이 보장되지 않은 그 시절,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사랑을 위해 물질적 성공을 거두고야 만다.물질적 풍요 앞에서 사랑은 쉽게 무너지고, 허영심으로 제 턱 끝을 장식하는 사람들은 순정을 백 번이라도 배반한다.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 사랑을 제 희생으로 마감함으로써 허무에 이르는 개츠비도 있고, 그것을 안타까이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닉 캐러웨이 같은 사람 또한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근본은 다르지 않다. 모든 것이 넘쳐나는 시대, 사랑도 물질도 소비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조급한 오늘날 내레이터 닉 캐러웨이가 되어 어느 술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라. 허영심으로 더욱 예쁜 데이지를 못 잊어 연신 술잔을 기울이는 착한 사람 개츠비를 만날 수 있으리니. 누군들 개츠비를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 있으리. 끝내 버리지 않은 순도 높은 꿈과 환상만으로도 개츠비는 위대하구나./김살로메(소설가)

2013-05-06

노동이란 말

우리 사회는 불온한 혐의를 지닌 것들을 못 견뎌한다. 개인의 욕망이나 취향보다 집단의 결속이나 합일이 더 중요하게끔 오래도록 길들여지다 보니 (권력) 집단이 용인하는 것이 아니면 그른 것이 되기 일쑤다. 그 적절한 예로 `노동`이란 말을 들 수 있겠다. 단순한 그 말에 깃들인 불온의 혐의 때문에 전지구촌이 5월1일을 `노동절`이라 부를 때 우리는 `근로자의 날`이란 희한한 용어로 대체해 부르고 있다. 우리는 노동이란 말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노동당, 노동투쟁, 노동자와 사용자 등의 예에서 보듯이 `노동`이란 말이 품고 있는 사회정치적 의미가 강경하거나 불온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몇 번의 혼란 끝에 노동절의 날짜는 5월 1일로 정착했지만 오죽하면 그 기념일 이름은 `근로자의 날`에 붙박여 꼼짝도 하지 못하겠는가.근로와 노동의 차이는 무엇일까? 근로는 `부지런히 일함`을 의미하고,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라고 정의되어 있다. 노동절이 근로자의 날이 된 데는 사전적 뜻과는 무관한, 단순히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겠지만 따지고 들자면 불쾌한 면도 없지 않다. 낱말의 의미대로라면 부지런히 일한 자만을 위한 날이 근로자의 날이 되고 만다. 그에 비해 본래의 노동절로 되돌릴 경우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날이라고 확장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노동이라는 말 자체는 원래 신성하기 그지없다. 한데 왠지 노동은 노예 또는 종속의 개념으로 이해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노동절이란 말도 씁쓸하게 와 닿는다. 주인의 생산성을 위해 이만치 일한 대가로 그날 하루만큼은 쉬어도 좋다는 시혜의 느낌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자발적 유희의 노동이나 자신의 개발을 위한 노동이라면 타의에 의해 노동의 휴식을 명받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싱그런 오월을 맞으면서 `노동`이란 고매한 가치의 낱말이 이래저래 휘둘리는 걸 보니 아직 내 마음의 오월은 맞을 채비가 덜 되었나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3

회고 미학

시인 김수영은 수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 열 개로 꼽았다. 그 낱말에는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뒷말이 머리끝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향수에 어린 말들은 (중략) 진정한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 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회고 미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한 기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글 몇줄 쓰려한다. 오늘날 우리 수필은 재미없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신춘문예 공모에서조차도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숙제해라고 아무리 엄마가 고함질러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이는 빈 공책에 낙서만 하다 잠들고 만다.좋은 수필의 전형이라고 하는 글들을 보면 대개 면죄부 얻은 과거의 상투적 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모성의 희생은 위엄 깃든 필수요, 부성의 패악은 낭만적 양념이며, 툇마루에 대한 추억은 당연한 선택이다. 처음 한두 번은 마음결을 다독여주고, 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이런 글에 마음이 간다. 두세 번 읽다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하는 반발심이 생긴다. 사람들은 으레 수필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되고 종내는 그들만의 잔치로 머물고 만다. 김수영식 대로 고작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것이다.우리 의식은 좀 더 현재적 보편성에 가깝게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쌈박한 개별자의 개성이 저만치 앞서가는데, 어쩌면 이런 것이 새로운 보편의 패러다임에 가까운데, 언제까지나 의고적이고 훈계적인 말들로 향수를 포장하고 열거하는 데만 머물 것인가. 무려 50년 전에 이런 회고 미학의 경계성을 단언한 시인의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2

봄비 또는 안개

이런 날은 이성(理性) 따윈 버리는 게 제격이지.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처럼 빗소리 들렸지. 저 멀리 산마루엔 저들끼리 홀리는 안개 가득했어. 누군들 센티멘탈에 빠져들지 않겠어. 온몸으로 파고드는 감성의 춤사위, 와이퍼에 내다 걸고 희희낙락 저 고립무원 안개 고지를 향해 점진하는 거야. 애인하고 함께일 필요는 없어. 우인(友人)이 제격이야. 단 둘 보다는 한 차 가득 젖은 빨래처럼 출렁댈수록 좋은 거지. 단, 운행 속도는 줄여야지. 미친놈 고쟁이 자락 빠진 듯 더러워진 흙신발로 발판을 뭉개진 않았으면 좋겠어. 저 산허리만 지나면 무중력 상태인 안개의 나라거든. 거기선 흙신발일수록 환영 받아. 역맛살의 혐의가 짙을수록 외계인이나 신선의 대열에 선발되기가 쉽거든.드디어 안개나라에 잠입했어. 여기선 겨드랑이에 숨겨둔 저마다의 이름 하나 발설할수록 매혹적이지. 젖은 추억을 팔거나 절벽 같은 시간을 풀어도 괜찮아. 지독히도 은밀한 한 생애를 고해하고 공유한 공모자가 되는 순간이야. 원래 사는 건 시시하고, 막막한 거거든. 그 비루한 삶을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기 위해 안개비를 꿈꾸는 거지. 말할 수 없는 내 불안과 네 공포가 두렵지 않은 자 어디 있겠어. 점점 푸르러가는 계절에 걸맞게 그것들도 증식하지. 진초록 짙어오기 전, 한 호흡을 갈무리 하듯 빗줄기 머금은 저 산정의 밀지(密地)를 만나러 가는 거지. 선계에 선뜩 내닫지 못한 창밖으로 빗소리 들려오고, 산 높고 깊은 곳의 안개는 제 겹을 늘여갔지.환한 날의 밋밋한 우정보다 안개비 속의 축축한 인정은 다음 만남을 잡기에도 유리했어. 다음번엔 안개비 대신 솟구치는 물마루를 만나러 갈지도 몰라. 분수처럼 솟구치는 인공 물마루 넘어 햇살 받은 쌍무지개는 황홀한 바람을 닮았대. 벌써 그 장면이 어룽거려. 아쩜 사는 게 시시하고 막막할 때 아름드리 버짐나무 아래 섰던 그대들이 떠오를 거야. 그땐 이성을 버리고 오직 센티멘털의 전송법으로 편지를 쓰겠어. 그럼 된 거지. 뭘 더 바라겠어./김살로메(소설가)

2013-05-01

바람 쐬고 약 줘야

일주일이 지나도록 배탈이 낫지 않는다. 꾸룩꾸룩 장 뒤틀리는 소리 요란하고, 가스 찬 배를 두드리면 수박 두드릴 때처럼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욱신거리는 배를 다독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병원 가는 게 성가셔 약국에서 응급약만 지어 먹었다. 그래도 차도가 없어 결국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단순 장염이지만 염증은 심해졌을 거란다. 아픈 순간 빨리 병원부터 찾는 게 순선데 자가 처방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배탈 따위는 하루만 참으면 절로 낫는다는 자신감 같은 게 그간 내 안에 있었다. 음식 버리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엄마는 흔히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어른들이 그러듯 쉰 콩나물무침도 씻어서 기어이 드시는 분이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비교적 건강한 소화기관을 자랑하는 당신의 산교육(?) 영향인지 나도 위와 장은 튼튼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환경이 바뀌면 나를 바꾸거나 대상을 바꿔줄 줄도 알아야 한다. 기존을 고집하면 탈이 날 경우 더디게 회복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쌀밥덩이처럼 몽실몽실한 흰꽃을 사들인 적이 있다. 싸리꽃 닮은 `아리삼`이란 일년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꽃색이 흐려지며 생기를 잃는 것이었다. 끄떡없이 두 달은 꽃구경 할 수 있을 거라던 꽃집 주인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바람과 물과 영양제까지 맞으며 무리지어 생육환경에 맞게 자라다가 고립무원의 아파트로 옮겨오니 꽃도 소화계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자주 환기를 시켜 바람과 별빛의 기를 씌었더라면 꽃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들어가는 초기에 꽃집에 들러 조치를 취했더라면 초기의 싱싱함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 때는 아프더라도 하루 만에 거뜬히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면역력이나 소화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론 건강할 때의 잣대로 자신의 몸을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하루 가던 장염이 한 달, 아니 일 년을 끌기 전에 현명한 조치가 우선임을 뼈저리게 맛본 한 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30

언어유희

싸이의 `젠틀맨`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음악성 자체보다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풍자 깃든 춤, 언어유희가 섞인 노랫말 등이 지구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음악 정서를 충분히 자극해주고 있다. 특히 `나랏말쌈`에서 자유로운 말장난 같은 가사의 전략적 배치도 노래의 파급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처럼 언어유희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매개물이다. 진은영의 시 `대학시절`은 맛깔나는 말장난을 전면에 내세워 청춘의 지난한 현실을 노래한다. `내 가슴엔/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살고 있어/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비슷한 말들의 소란을 빌려 이십대를 회상하는데, 같은 경험을 거친 독자라면 그게 더한 신뢰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명랑발랄해서만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멜랑콜리`의 정점을 맛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단순한 우울이나 비애로 설명할 수 없는 세련된 우울의 정서인 멜랑콜리를 이십대 때의 시인은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염소 한 마리`로 정의하고 있다.청춘의 염소는 종일토록 종이만 먹어치우며,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시`만 토할 수밖에 없다. 앞선 친구들의 속도감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감과 멀게 태어난 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빈둥빈둥 빈센트 반 고흐`처럼 보장된 바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며 시간을 축낼 뿐이다. 누군들 아프지 않을 청춘이었을까. 누군들 멜랑콜리하지 않을 이십대였을까. 하지만 누가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유희로 자신의 멜랑콜리한 청춘을 `화끈하고 말끔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젠틀맨`을 들으며 제 청춘에 말장난 걸어본다. 알랑가몰라 아리까리한 그 시절./김살로메(소설가)

2013-04-29

섬이 되어야

알베르 카뮈는 스승 장 그르니에의 철학 에세이 `섬`에 붙여 다음과 같은 헌사를 던진다.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 성찬의 의미에 동참하고자 책을 펴들었다. 웬걸, 처음부터 난공불락이다. 내게 장 그르니에의`섬`은 카뮈의 헌사가 더 나은 책, 카뮈의 헌사로 기억될 책, 카뮈의 헌사가 호들갑스런 책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암시와 독백으로 가득한 그르니에 식 사유의 독창성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였다. 아무리 카뮈가 말한 대로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맡기려 해도 속만 더부룩해져올 뿐이다. 소화 안 된 묵직한 배로 뭔가를 더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랄까.원문의 난해함 때문인지 번역본은 비문을 쏟아낸다. 아무리 독자의 예를 다하려 해도 부분에 따라선 쓸 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기분이다. 글이 글로서 제 기능만 다해주면 좋으련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문을 구해서 비교하면서 읽고 싶다. 읽기에 껄끄러운 건 번역의 문제이지 원문의 문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스승의 현학허세나 자기만의 말놀이를 위해 카뮈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헌사를 날렸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군데군데 심오한 철학과 명징한 단상들 덕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고무, 또는 찬양의 독후감들은 이 책 전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분적으로 빛나는 사유들에 대한 몫이리라. 남들 다 좋다고 하는 책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 불충한 독해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섬이 되지 않고서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다. 섬이 되어야 섬에 닿을 수 있는, 막막하고도 먹먹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섬`./김살로메(소설가)

2013-04-26

멘첼에게 묻기

온 세상, 자기계발이 화두다. 책이든 강연이든 `자기계발`란 타이틀만 달면 시쳇말로 반은 그냥 먹힌다. 처음 한두 번은 솔깃하다가 나중에는 똑 같은 얘기 같아 시들해지는 게 또 자기계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꾸준히 회자되는 건 그만큼 자기 계발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두 권의 계발서, 한두 번의 강연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자신만의 모델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해서 각종 자기계발 관련 정보에 대해 가졌던 편견, 이를 테면 상투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거나 나아가 뻔한 얘기라는 생각을 접어보기로 했다. 원하는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니 오히려 그것에 대한 모든 정보들에 애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최근 참석한 모 특강도 그랬다. 욕심보다 최선이 먼저라는 깨우침을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데 하루 종일 그것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돌프 폰 멘첼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그 거장에게 청년 작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성품이 급하고 그림 실력은 그럭저럭한 이였다. 초조한 표정의 젊은 화가는 멘첼에게 물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리는데, 파는 데는 왜 일 년도 넘게 걸리느냐고. 멘첼이 대답은 명쾌했다. 하루 만에 그리던 것을 일 년에 걸쳐 그려보라고. 그러면 금세 그림이 팔릴 거라고. 멘첼의 충고를 받아들인 청년은 태도를 바꿨다. 욕심을 버리고 기초부터 다졌다. 하루의 치기를 일 년의 노력으로 대체했다. 청년의 그림이 한나절 만에 팔린 것은 당연지사였다.바라기 전에 갖추고, 갖추기 전에 버려야 길이 보인다. 욕심을 미루고 기본을 쌓는 것보다 나은 자기계발은 없다. 멘첼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있는 거실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계발 강사가 말한다. 거장의 붓질을 기억해라. 저 흰 커튼의 펄럭이는 생동감과 저 마루를 내리찍는 광선의 각도를 위해 얼마나 숱한 붓질이 있었는지를. 그 맘이어야 하룻밤 새 팔릴 그림을 꿈꿀 수 있다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4-25

생각하는 대로 된다

살다보면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해 괴로울 때가 있다. 남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데 내게 오면 헝클어진 실타래가 되고, 암담한 벽이 되는 그런 상황들에 처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만족할만한 사안인데도 내가 보기엔 미흡해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한다. `나 같은 여자와 사는 내 남편이 불쌍해요. 전 쓸 데 없고, 무능한 여자예요. 전 남편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제가 그를 떠나주면 그는 자유로워질 거예요. 저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맘껏 할 수 있고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펼쳐나가게 되겠죠.`프로이트는 위의 예를 들어 만약 자기 비난이 지나칠 경우, 사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고 분석한다. 나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비난은 곧 타자에 대해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자책하는 건 상대에 대한 비난이 방향만 바뀌어 내 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의 이런 분석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 있는 사람이 아무리 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다 해도 섬세한 시각으로 보면 그건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건전한 정신 건강을 위해선 부족한 자아를 다독여, 이만하면 괜찮다고 후한 점수를 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 대해 대책 없이 만족할 필요는 없지만 그 불만족을 자랑처럼 떠벌일 이유도 없다. 피폐해진 영혼은 죄 없는 타자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마가릿 대처 여사는 아버지가 해준 다음과 같은 말을 맘에 새겼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곧 나의 자화상이다. 내 안에 녹아든 모든 것들이 기왕이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이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라도 긍정의 제스처가 아닌 실제 긍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되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4-24

배 타도 산에 오를 수 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말은 매우 빨랐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그녀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번역 자막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눌변인 경우가 많다는 속설은 그녀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광풍처럼 몰아치기만 한 언변에 유머와 재기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호의적인 청중들의 웃음소리를 한 호흡 쉬어가는 발판으로 삼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만 했다. 성급한 내레이션,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굿윈은 링컨 연구자의 권위자이다. 10년 동안 링컨에 관한 연구와 자료 수집으로 한 권의 책을 집대성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권력의 조건`은 그녀의 링컨에 대한 오롯한 헌사이다. 책 속의 링컨도 위대하고, 책을 쓴 그녀도 대단하다. 한 사람의 집념은 여러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정치가로서의 링컨이 그러하고, 글쓴이로서 굿윈 역시 그러하다.방대한 내용 안에서 그녀가 링컨을 가장 잘 살린 대목은 정치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들에서였다. 링컨의 강점은 적들도 내 편으로 만드는 건실한 가치관이었다. 때로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더러는 해돋이 같은 미소로 불편한 정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권모술수나 이해타산이 아니라 건전하고도 도덕적인 접근법이었다. 유능한 라이벌들을 내각에 등용시키는가 하면, 뛰어난 화술과 친절한 마음씨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사로운 비난과 웬만한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우정을 고수했고, 동료들의 실수마저 끌어안았다. 자기훈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던 링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저자 도리스 컨스 굿윈도 링컨만큼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링컨의 정치적, 사적 행보는 바지런한 작가의 발품과 손품에 의해 정치적 욕망과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인간적 신뢰감으로 변주된다. 이런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라면, 즉 링컨과 굿윈의 안내라면 배 타고도 능히 원하는 산에 오를 수 있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23

봄 나목을 보며

봄이 깊어간다. 사방천지가 푸름의 향연을 위해 제 몸을 부풀린다. 창밖을 본다. 벚나무 한 그루에 잎이 나질 않는다. 주변 가로수가 날 다르게 푸른 숨결로 제 가지를 키울 때 그 나무는 헐벗은 듯 꼿꼿한 듯 제 온몸으로 봄바람을 마주하고 있다. 겨우내 다 같이 나목으로 있을 땐 몰랐는데, 꽃 피우고 잎 나기 시작하니 주변 나무와 다른 게 표가 난다. 어떤 이유에서든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는 곧 잊힐 것이다. 오뉴월이 와 무성해진 잎들이 다른 가지를 넘나들 때면 그 나무는 완전히 주변에 잠식되고 말 것이다. 있으되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뿌리가 약하거나, 강한 기 때문에 쉽게 그 땅에 안착하지 못하는 나무는 봄이 와도 나목으로서의 제 수치를 감내해야만 한다. 기실 그 나목은 죽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밑둥치 잘려나갈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사람의 나무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문 앞에서 정의를 내리거나 명답을 얻는 건 무척 어렵다. 거기서 최선이나 차선의 길을 수용할 때 우리는`순리를 따른다`고 한다. 순한 이치나 도리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세상과 타협한다.그 타협조차 받아들일 의지가 없거나 그 타협보다 자의식이 강할 경우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그 명제 앞에서 내 힘이 받쳐주지 않거나, 내 강박이 우선이면 쉽게 나무들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섬이 되었다, 바람이 되었다 하는 게 사람의 나날이다.내 안의 핍진이나 질곡, 내 안의 거품이나 고집, 이 둘 다를 버리지 못할 때 봄 깊은 저 사람의 마실에서 쓸쓸히 나목이 되어 제 수치를 견뎌내야 한다. 혼자 부는 바람도 없고, 홀로 크는 숲도 없다. 혼자 푸른 언덕도 없고, 홀로 꽃 피우는 나무도 없다. 한 호흡의 양심, 한 손길의 애정, 한 눈길의 의심, 한 모금의 불안, 이 모든 것들이 삶을 이루는 주체이다. 세상만사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최선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봄은 오고 계절은 저리도 깊어만 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22

인지 부조화

솔직하다는 말의 함의에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이거나 약점을 묘파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추녀더러 `넌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무례한 솔직함인데, 솔직함이 타자를 향하는 나쁜 예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나는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내 약점을 고백해 공감을 유도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누군가 솔직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타자를 향하는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의 약점을 객관화하는 것일 때 공감하기 쉽다. 하지만 참으로 솔직하기 힘든 게 사람이다. 여우와 신포도 이솝 우화가 그 좋은 예이다. 너무 높이 열려 따먹을 수 없는 포도는 여우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일거야. 못 먹는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급기야는 정보를 왜곡해버린다. 비겁의 커튼 뒤로 숨어 자기 위안을 도모한다.이런 일은 수없이 겪는다. 내가 추천한 맛집의 위생 상태가 엉망인데도 `음식이 깔끔하다`고 설레발을 치는가 하면, 내가 읽자고 한 책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도 `밤새 눈시울을 적셨다`고 거짓 감상을 유도한다. 내가 산 냉장고가 더 비싼 데다 소음도 심하지만 디자인이 좋고 실용적이라고 떠벌인다. 저 직장을 포기하고 이 직장을 선택한 것이 후회스럽지만 저 직장은 분명 복지 혜택이 부족할 거라며 자기 위안을 한다.이 모든 건 스스로의 약점이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방어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행동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의 태도나 신념을 바꿔버리는 경향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외적 당당함과는 달리 내면적 갈등을 야기한다. 한편 인지부조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동 수정을 한다면 이 또한 너무 이른 자기 성찰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솔직해도 자책에 빠지기 쉽고, 스스로를 너무 보호해도 자기기만의 우물에 허덕일 수 있다. 솔직과 포장의 적당한 경계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게 만만찮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9

어떻게 쓰냐구요?

고뇌하는 방식과 고민거리는 달라도 글 쓰는 자로서의 괴로움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오늘도 님을 비롯한 몇 분들이 제 고민을 보고 공감해오시는군요. 제 번민이 곧 님들의 것임을 알고 위로 겸 위안 차 그렇게 찾아주시는 거겠지요.저도 님처럼 글을 쉽게 쓰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남들 한 시간이면 끝날 쓸 거리도 밤새 잡고 있을 때도 있어요. 이승우 작가가 한 말이라고 님이 제게 전해주셨지요. `글은 한 번도 내게 쉬웠던 적이 없었고 만만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질린 적도 없기 때문에 여태껏 쓰고 있다`라고. 그렇습니다. 자발적 고통에 발 들여놓은 이상 운명처럼 그냥 쓰는 겁니다. 질리도록 글에 휘둘려보지도 않았으면서 곧잘 징징댔던 저를 반성합니다. 진실로 쓰는 자는 그 시간마저 묵묵히 손가락끝을 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글 잘 쓰시는 님, 겸손하게도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냐고 물어오신 님, 님이 답을 알지 못하듯이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는 말에 가장 적용하기 쉬운 예가 글쓰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쓰기는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노력에 비례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정직한 손자취` 만큼의 앞날을 예고한다고 믿습니다. 무심코 쓴 헐렁하고 삐걱대는 글, 아무 훈련 없이 뱉어낸 숱한 문구들, 별 고민 없이 직조한 어설픈 문장들. 이들이 얼마나 비경제적이며 비문학적인지는 글쓰기 관련 책들이 깨쳐줍니다. 이 기본 단계만 넘겨도 글쓰기는 한결 수월해집니다.문장의 경제성, 문체 미학의 예술성, 문장의 밀도 등이 온몸에 착착 감기도록 쓰는 작가는 부지기수입니다.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문구 하나로 제가 전전긍긍할 때, 매혹적인 고수들은 그것을 버리면서도 살아있는 글을 씁니다. 절망이자 희망인 그들을 보면서 힘을 내봅니다. 님께 너무 주제넘은 얘길 했지요? 용서 바랍니다. 이 넋두리는 님께 보내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은 제게 하는 말이랍니다. 부디 좋은 글 쓰시고, 저에게도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8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비

`아흔 세 살까지는 살 것이고, 듣지 못해 미칠 것이며, 간호사가 해칠까봐 앙탈을 부릴 것이다. 가족들에게도 끝없는 괴로움을 안겨 줄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노년에 대해 비관적으로 서술했다. 어릴 적 보았던 자신의 할머니의 노년기를 고스란히 자신에게 투영했다. 스스로의 악담대로 그녀는 노년을 맞았다. 차츰 정신을 잃어갔고, 간호사의 도움을 거부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어두운 내부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목사관 살인 사건`, `패팅턴 발 4시50분` 등 아가사 크리스티의 몇몇 작품에 나오는 아마추어 탐정 이름은 `미스 마플`이다. 마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뜨개질이나 수다로 하루를 보내며 늙어가는 노처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관찰력과 경험에서 오는 직관의 힘 때문이다. 미스 마플을 접할 때마다 아가사 크리스티 자신이 투사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곤 하는데, 그녀의 간단 평전을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불꽃 같이 산 그녀지만 크고 작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 된, 자작극 성격의 실종과 그로 인한 기억을 놓아버린 일은 결점과 균열투성이 그녀 인생의 상징적 코드가 되어버렸다. `멋지게` 인생을 탕진하고 죽은 아버지, 가난 속에서 집착적 사랑을 쏟는 엄마, 예견된 결핍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가 아니었을까.평화로운 세상을 원했으나 욕망 또한 완전히 놓아버릴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웠다. 어린 시절 누군가 산 채로 잡아서 모자 깃에 꽂아준, 몸서리치는 나비의 날갯짓을 기억하는 일, 그 섬세한 통증 하나하나를 지우기 위해 작가는 플롯을 짜고, 등장인물을 만들고 마침내 미스 마플 같은 매혹적인 해결사를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현실적 삶이 굴곡 많았기에 책 속의 미스 마플은 그토록 빛날 수 있었다.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빛나는 인물은 창조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7

합평하는 시간

글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각자 쓴 글에 대해 합평하는 시간을 가질 때도 있다. 그때마다 느낀다. 써온 작품에 대해 애정을 담아 한 말씀씩 해주는 그 과정이야말로 제2의 창작 시간 같은 것이라고. 웬만한 `자뻑` 환자가 아니라면 구양수·소동파 급 문장가도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기 때문이다. 익히 선인들이 백 번 이상의 퇴고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잘 모르는 초보일 때는 쓴다는 자체가 신기하고 재밌을 수가 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오직 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참으로 행복한 시기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글쓰기에 이력이 붙은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다. 글을 보는 눈은 깊고 넓어졌는데, 쓰는 능력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친다. 괴로운 나날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해놓고도 안절부절못한다. 제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합평이다.찜찜한 글을 그러안고 있으면 완벽한 내 글이 될 수 없다. 부끄럽지만 동료들 앞에 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다. 적어도 쓰는 능력보단 읽는 능력이 앞선 다수의 글동무들은 적확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 좋은 말들은 대개 글쓴이가 제 글에서 느낀 여러 문제점들을 재확인시켜준다.불필요한 설명을 없애라, 주인공에게 생동감을 불어 넣어라, 주제를 상징하는 장면에 부연 묘사가 필요하다, 사실적 취재로 장소를 구체화 시켜라. 이 모든 충고는 글쓴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다. 하지만 맘과 달리 한 번 만에 그런 약점 없는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합평의 장에 나를 내놓고 채찍질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문제점들을 점검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제2의 창작에 들어선 거다. 좋은 글은 공감을 전제한다. 혼자 쓰고 혼자 고치기보다, 혼자 쓰고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글 살을 찌우기에는 좋은 방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6

소설 쓰기의 어려움

글쓰기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확고한 의지 없이는 제대로 된 한 편의 글을 내놓기 어렵다. 주변인과의 약속도 미뤄야 하고, 스마트폰의 유혹도 이겨야 하며, 쏟아지는 잠도 극복해야 한다. 내 안에서 풀어진 나를 다독이지 않으면 절대로 가시적인 생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제 안의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라야 글로서 우뚝 설 수 있다. 왜 극소수의 작가만이 살아남았겠는가. 그들은 스스로 부딪치며 견뎠고, 끝내 싸워서 이긴 자들이다. 쓰는 글이 소설인 경우, 쓰는 자는 시간과 노동이란 이중고를 겪어내야 한다.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도 더더구나 아니다. 머리는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생각하는데 필요하고, 가슴은 활자화된 소설 앞에서 일어나는 여러 정서적 반응 기제의 확인처로서 기능한다. 소설 쓰는 데는 애오라지 묵직한 엉덩이와 예민한 손끝만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쓰기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두 가지를 끝내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건이 안 되고 시간이 부족한 핑계가 마련되어 있는 한 점점 소설 쓰기는 멀어진다.위의 얘기는 내 것이기도 하다. 시간은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이 없고, 글쓰기의 노동 강도 앞에 저질 체력은 언제나 무너졌다. 날마다 고군분투한 것 같지만 언제나 악마의 승리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다. 이 모든 건 핑계다. 묵직하게 의자에 앉아 있질 못하고, 예민하게 손끝을 놀리지 못한 자의 자기변명일 뿐이다.삶이 빈약하니 사유가 빛날 리 없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만 있고, 그것을 받쳐줄 철학이 없다보니 초조하게 시간만 보낸다. 내 안에 제대로 된 심지 하나 없어 독자에게 가더라도 공명하지 못할 소설, 이런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쉬이 써지질 않는다. 지나친 자기연민이나 자기성찰은 소설 쓰기의 제일 방해요소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책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오직 써라. 그 판단은 잠시 미뤄도 괜찮지 않겠나. 이렇게 스스로를 힐링하는 나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