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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졸업 축사

졸업 시즌이다. 마침 아들도 졸업하는 지라 오랜 만에 학교에 가게 되었다. 우리가 다닐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졸업식 분위기였다. 하 수상한 시절 탓인지 그때의 식 절차는 얼마나 까다롭고, 방식은 얼마나 딱딱했으며, 시간은 또 얼마나 지루했던가. 별 의미도 없는 사전 연습을 몇 번에 걸쳐 해야만 했다. 연단에 올라 졸업장과 상장을 받아 옆구리에 끼는 팔의 각도까지 담당 선생님이 정해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리허설을 되풀이하곤 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창의적이지도 않았고 운치도 없었다. 초대 손님의 축하 인사말은 겉도는데다 그 대상도 불분명하기 일쑤였다. 강당도 없는 운동장에서 그 길고 지루한 시간을 당연히 견뎌야 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한데 요즘 졸업식 풍경은 그때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우선 주인공인 졸업생을 충분히 배려하는 점이 맘에 들었다. 졸업장을 받은 학생들 한 명마다 선생님들은 어깨를 보듬고 덕담을 건네신다. 교장 선생님 훈화는 딱딱하지도 틀에 박히지도 않았다. 축하 인사를 건네는 손님도 교육계 인사라 현장성이 있었다.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담임선생님들의 격려 말씀 또한 현실적이고 유머가 깃들어 있다. 여기저기서 폭소가 터진다.여러 말씀 중 귀담아 들을 만한 것들이 많았다. 백두산에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을 아느냐고 한 선생님이 운을 떼신다. 비행기로 가는 것도, 헬리콥터를 타는 것도, 남다르게 보폭을 빨리 하는 것도 아니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는 것이 가장 빨리 백두산에 오르는 비법이란다. 좋은 사람과 함께 하면 한 시간이 일분처럼 느껴져, 지루할 틈이 없다나. 교장선생님은 사회에 나가면 꼭 존경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람 셋은 만들란다. 물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잊지 말란다. 두 분 다 사람이야말로 중요한 자산이란 말씀이렷다. 졸업 축사로 이보다 더한 구체성을 획득하는 것도 없다 싶다.시대 흐름에 따라 유연해진 졸업식 풍경에 훈훈해진 하루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14

타자의 욕망을 살다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본인 및 자녀 군필 유무는 그들의 국가관 및 도덕성을 판단하는 가장 가시적인 방법 중의 하나이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군면제 비율이 일반 국민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거기엔 저마다 합당한 사유가 있고, 우연한 결과일 뿐이라고 누군가 대변한다 해도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보도들이 이어지자 군대에 대한 명랑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아들이 말한다. 군면제 받은 당사자들은 군대 가는 것을 원했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그 말도 맞겠다. 군필자가 되고 싶지만, 주변의 강권이나 환경적 학습에 의해 안 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경우도 있으니.내 욕망은 따지고 보면 순수한 내 욕망이 아니다. 내 내면의 의지는 실제론 타자가 욕망하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의 타자성에 대해서 라캉은 `주체가 스스로를 발견하고 제일 먼저 느끼는 곳은 타자 속에서이다.`라고 통찰했다. 군 입대 면제를 받거나, 판검사가 되거나,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에 취직하는 것 등은 따지고 보면 내가 원해서가 아니다. 사회가 원하는 타자의 욕망 일순위에 그것이 있고 주변에서 원하니 따를 뿐이다. 명예와 안정이 보장되니, 마치 처음부터 그 길을 가려고 했던 것처럼 착각할 뿐이다.개별자의 자아는 스스로 형성되는 게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 다듬어지거나 만들어진다. 타자를 넘어서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회복하는 길은 쉽지 않다. 타자의 욕망, 즉 부모나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가면 실패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자의 길은 진정성이 담보된 길이 아니기에 갈등하게 된다. 그리하여 라캉의 말대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 날 수 있어야만`하는 사유를 낳는다. 그 누구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꾸릴 순 없다. 다만 타자의 욕망 속에서 끊임없는 자아의 욕망을 탐구하는 의지라도 있어야 내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13

존 레논에게 말(言)이란

말은 말로써 기능할 때 가장 말다운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편타당한 말의 태생적 효용을 구차하게 설명하려는 것일 뿐 실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말로써 제 말을 다 부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로 제 가슴 속의 말을 전하고자 안간힘을 써왔다. 그 산물로서 미술, 문학, 음악 등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한 때 아내였던 신시아에게 존 레논은 이렇게 말한다. 젊어서 성공한 것이 기쁘다고. 그들 곁에 아들 줄리안도 있었고, 적어도 겉으로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던 시절이었으니 충분히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겠다. 사람들은 평생 성공할 때를 기다리며 살지만, 그것을 얻었다고 만족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데도,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한 평생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직조하는 대부분의 우리를 향해 존은 서늘한 통찰의 한 마디를 던진다.존의 이 말이 내겐 성공한 자의 비애로 들린다. 존의 표현에 의하면 비틀즈는 애초에 큰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차트 정상에 올라보는 소박한 꿈이 있었을 뿐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결과 뒤에 환멸과 자기정체성의 혼란이 따라온 것. 성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내면의 갈등을 겪게 된다. 그때는 돈도 필요 없다. 존도 물질적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대가로 당연히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성공한 자인 존에게 말은 거추장스러운 그 무엇이었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기쁨을 맛보진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다정한 대화보다는 무례한 행동에 노출된 그로서는 대화만큼 요점 없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언어로서의 말은 가장 느린 대화의 형태였다. 진정한 대화는 음악일 수밖에 없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로 음악적 유폐를 고집했다. 가령 존의 생각을 알고 싶으면 존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페퍼 상사` 앨범의 한 곡을 듣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예술작품 그 자체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3-02-12

봄 오시네, 그 음악

지난 시간을 규정할 수 있는 자신만의 합당한 추억 매개물이 있다. 일기장, 편지, 액세서리, 책, 사진, 음악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요소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어준다면 지난 시간들을 그리는데 느꺼운 바탕이 되어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물리적 실체가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자의든 타의든 사라지기 쉽다. 그나마 무형의 산물인 음악은 원하기만 하면 시간여행의 고마운 친구가 되어준다. 내 청춘의 절정기인 80년대에도 음악이 곁에 있었다. 그땐 팝송이 대세인 시대였다. 김기덕도, 황인용도, 이종환도 팝송과 어울리는 라디오 디제이였다. 더러 취향에 따라 클래식을 곁들이는 이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그날의 클래식 입문기가 떠오른다. 단체 엠티를 가는 날이었다. 여장을 푼 누군가가 텔레비전을 켰을 때 흘러나온 음악이`루슬란과 루드밀라 서곡`이었다. 그 시절 공영방송 텔레비전의 주말 프로그램 안내에 깔리던 무척 익숙한 곡이었다. 제목은 물론 그날 알았다. 모두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분주히 들떠 있었기 때문에 배경 음악 따위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누가 알아서 먼저 쌀을 안쳤으면, 빨리 밥 먹고 카드나 게임 판을 벌였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그 와중에 한 아이가 말했다. 그 곡이 배경 음악으로서가 아니라 단독으로 얼마나 품격 높은 것인가에 대해서. 오페라의 서곡이며 작곡가는 글린카이고 푸시킨의 시가 단초가 되어 이야기로 만들어졌다는 얘기까지 조곤조곤 들려주는 것이었다. 야외 소풍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무심하게 하는 그 아이 눈빛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후 그 아이 안내로 자연스레 클래식에 입문하게 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생명이 약동하는 듯한 그 음악의 제목은 몰라도 그 시대를 건너온 누구라도 그 곡이 주말 방송 안내에 깔리던 것이라는 건 금세 눈치 챌 것이다.봄이 머지않았다. 봄기운과 어울리는 그 때 그 음악이 다사롭게 떠오르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08

오만과 허영

애덤 스미스의`도덕 감정론`을 펼치다 보면 그가 경제학자이기 전에 철학자라는 걸 알게 된다. 중등교육 과정을 거친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시장 경제의 원리를 전파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도덕 감정론`이나`국부론`에서 그것에 할애한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도덕적 본성 및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도덕 감정론은 인간의 이기심이 공감이라는 사회구성의 합의를 획득할 때 공공선이 될 수 있다는 논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이`오만과 허영`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오만한 사람은 표리부동하지 않다. 근거 없는 우월감의 확신에 차 있어 타인도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우월함을 타인이 느끼게 하기 보다는 그 우월감 때문에 타인이 비굴함을 느끼게 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 든다.반면에 허영이 많은 사람은 표리부동하다고 보았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신하진 않지만 타인이 그것을 인정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자신이 가진 색깔 이상으로 화려하게 타인이 봐줬으면 하고 바라는데, 이때 공정한 관찰자가 나타나 본래 색깔로 봐버리기라도 한다면 수치와 모욕을 느낀다. 애덤 스미스에 의하면 이 두 가지 결점은 동일한 캐릭터 안에 존재해, 오만한 사람이 곧 허영에 차 있고, 허영에 찬 사람은 흔히 오만할 수도 있단다.재미있는 것은 애덤 스미스는 지나친 비하 보다는 지나친 오만이 낫다고 보았다. 과도한 것이 부족한 것보다는 스스로와 공정한 관찰자 모두에게 덜 불쾌하다고 보았다. 자기비하와 자책에 비하면 허영과 오만이 훨씬 솔직한 감정이라고 보았다. 발전가능성만 보더라도 오만파가 자기비하파에 비하면 훨씬 높지 않겠나. 잘난척하는 밉상보다는 짜증나는 진드기가 훨씬 더 견디기 힘들다는 걸 이백여 년 전 애덤 스미스도 갈파한 것일까. 앞서 말한 인간 이기심이 사회적 공감을 획득한다면 다수의 선이 될 수도 있다는 논지가 여기에도 적용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07

불안

살다 보면 스스로에게 당황할 때가 있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과 맘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MRI 촬영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내게 경미한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건 여러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폐쇄공포증세에 비하면 그것은 천국이었다. 좁은 원통 속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고 문이 닫히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다. 그대로 40여 분을 꼼짝 않고 누워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과 마음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답답해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친 듯이 벽을 두드려 위급함을 알렸다. 탈출을 하고 나니 천국이 따로 없다. 이런 사람 제법 있다며 촬영기사가 위로를 해준다. 항불안제를 맞고 재촬영을 하겠느냐고 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좀 진정이 되자 멍청하고 창피하단 생각에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왔다.사전 설명 없는 가운데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서 그런 상황을 맞닥뜨린 것 같다. 좁고 폐쇄된 공간 자체의 위압감, 바깥과의 소통 단절에 대한 불안, 위급 상황이 생겼을 때 어쩌지 하는 걱정, 등 그 짧은 시간에 그토록 급작스런 불신감으로 불안해할 수 있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불안과 공포는 인간이 느끼는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한데 그것이 과하다 싶으면 스스로 당황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심리적·유전적 요인, 과거의 경험, 현재의 정보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불안을 일으킬 것이다. 하지만 그 원인을 내가 시원하게 모르니 더 불안하다. 이토록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불신이 깊었나, 이런 불안감을 스스로 자초한 건 아닐까, 객관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왜 몸과 마음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거지, 하는 혼란스러움이 한동안 휘젓고 다닐 것이다. 여기저기 불안의 시대를 살다보니 몸과 맘이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팽팽하게 부푼 풍선 같은 맘 걷어 내고 그 자리에 낭창거리는 버들가지 하나 내다는 연습을 해야겠다. 자고로 긴장은 불안을 낳고, 여유는 안심을 낳으리니./김살로메(소설가)

2013-02-06

시누이 자랑

전통적 가족 제도의 보편적 정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스스럼없기란 쉬운 게 아니다. `친동생처럼 대한다`는 시누이의 말은 `딸처럼 생각한다`는 시어머니의 말 만큼이나 공허할 가능성이 높다. 혈연으로 맺어진 감정과 사회적 계약 관계에 의해 생긴 그것은 심리적·정서적 출발부터 같을 수가 없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시누·올케 관계는 `스스럼없음`이 아니라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리라. 내게도 시누이가 한 분 있다. 손위인데 예의 친자매처럼 흉허물 없는 관계는 아니다. 나이 차가 있는 시누이를 내 쪽에서 어려워하고 존경한다면, 당신은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역할이다. 시누이 노릇 한답시고 내게 며느리로서의 의무감을 압박하거나 눈치 비슷한 거라도 준 적이 없다. 이십여 년 동안 한결 같은 배려와 관용으로 대하신다.통념상 해야 할 며느리의 도리마저 시누이가 저 만큼 앞서서 본보기를 보이신다. (실은 내가 안 하거나 못하니까 시누이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어머니의 물리적·정서적 지원자가 되는 것은 물론이요, 올케인 나의 정신적·심리적 상담자까지 자청하신다. 시누이로서 올케에게 왜 서운한 감정이 없겠는가. 한데 천사표 시누이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신 위주로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지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인정해버리면 서운한 것도 잠시다.` 라고 말하는 분이다.천성이 고운데다, 자기 수양의 모범을 보이는 분을 시누이로 만난 건 내겐 큰 복이다. 가끔씩 남편이 힘들게 할 때도 `아참, 내겐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시누이가 있었지` 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정도이다. 사람 관계는 상대적이다. 나처럼 까칠하고 칠칠치 못한 이도 시누이라는 바람막이 덕에 적어도 나쁜 며느리는 면하고 산다. 내 깜냥만으론 어림도 없다. 좋은 사람 곁에서 좋은 사람 흉내 내기란 얼마나 쉬운가. 내가 며느리로서 평균점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오롯이 시누이 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05

착한 사람 글쓰기

쓴다는 게 뭘까, 잠시 생각해봅니다. 형식 상 잘 쓰는 것과 내용 상 절절하게 쓰는 것은 다릅니다. 잘 쓴 글은 시샘을 유발하고, 절절하게 쓴 글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물론 잘 쓰면서 절절하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글쓰기는 작가들에게도 쉽지는 않겠지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잘 쓴 글을 좋아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글을 더 좋아합니다. 오늘 어떤 분을 급히 만나야 했습니다. 글쓰기 대회 입상자인데, 그 글을 활자화하기엔 비문이 많아 퇴고할 기회를 드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과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입상자 참 잘 뽑았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새벽마다 신문을 돌린다고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본보기도 될 겸 다이어트도 할 겸, 즐거운 맘으로 새벽 공기를 가른다고 합니다. 이것만도 대단하다 싶은데, 아직 받지도 않은 제법 많은 상금 전액을 기부하겠다고 모처와 약속을 했답니다.아주 세속적인 저는 그 상황이 이해하기 어려워 정중함을 가장한 오지랖을 떨어보았습니다. 글쓰기도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데, 상금의 일부분이라도 자신을 위해 쓰는 게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요. 어디 제 말이 씨알이라도 먹혔겠습니까. 그분 왈 “그 상금 제 것 아니에요. 글을 쓰게 한 주변 것이지요.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얼음주머니로 머리 한 대 맞은 듯한 명징한 떨림이 밀려왔습니다.그분에게서 새삼 확인했습니다. 잘 쓴 글은 기법상의 하자 없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깃든 내면의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글임을. 돌아오는 길 혼자 중얼거립니다. 착한 사람들이 정직한 비문(非文)으로 제 안의 나무에 꽃을 피울 때, 그렇지 못한 저는 경직된 완문(完文)을 찾아 저 밖의 태양을 좇고 있더란 겁니다. 그래도 욕망투성이 스스로를 보편적 인간이라 달래며 부끄러워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이분 같은 이들을 존경하고 칭송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제 안의 찌꺼기 하나를 털어내는 기분입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04

해바라기 스캔들

둘만 되어도 필연적으로 갈등하게 되어 있는 게 사람이다. 오죽하면 사르트르가`타인은 지옥`이라고 표현했을까. 적당한 거리 확보 없는 모든 관계는 실패하게 되어 있다. 평화를 가장한 전쟁, 미소로 위장한 침울, 침묵으로 포장한 폭발이 당신 곁에 맴돈다면 이는 틀림없이 적당한 거리의 법칙이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법칙에 가장 적절한 예가 예술가들일 것이다. 예민한 예술혼이라는 짐을 진 대신 `제멋대로`라는 면죄부를 얻은 그들의 관계는 더 쉽게 깨지고, 그 파국 또한 처절할 수밖에 없다. 고흐는 해바라기를 그렸다. 고갱도 해바라기를 그렸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심연을 후벼 파는 듯 격정적이고, 고갱의 해바라기는 자유분방한 듯 자신만만하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고, 고갱의 해바라기는 맘먹고 검색이라도 해봐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고흐의 해바라기는 더 아름답고, 고갱의 해바라기는 덜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두 해바라기라는 예술혼의 방식이 너무 다르다는 데 있다.고흐는 자신의 예술욕을 채우기 위해 고갱을 아를르로 불러들였다. 도도하고 지적이고 권위적인 고갱에 비해 고흐는 격정적이고 소박하고 성실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의 매뉴얼을 담당하는 건 인지상정. 둘 사이의 권좌 차지인 고갱은 소박한 의자에 앉아 매달리는 고흐가 성가실 뿐이었다. 참을 수 없었던 고흐는 광기를 핑계로 자신의 귀를 고수레라도 해야 상처받은 영혼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터였다.고흐의 해바라기는 예술혼의 결정체이다. 고갱의 해바라기도 그렇다. 너무 다른 자신만의 해바라기를 위한 것이었다면 그 둘은 만나지 않은 게 더 나을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각각 신경강박증과 오만방자가 없었더라면 누가 그들의 해바라기 은유에 대해 그토록 오래토록 기억해줄 것인가. 오늘밤도 몇 번씩 제 귀를 면도날로 오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해바라기 품는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으면./김살로메(소설가)

2013-02-01

한 호흡

내 하루는 언제나 다짐으로 시작해 결국 후회로 끝나지. 오늘 당신이 없는 사이, 누군가에게 당신에 관해 이야기할 것만 같았어.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한 호흡만 참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온당한 말은 세상이 먼저 수용하게 되어 있거든. 역시나 당신 모르게 나는 당신을 아프게 했어. 그렇게 치욕스런 하루가 지났어. 젊은 시인 박준은 이렇게 말하네.`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았다`고. 하지만 시인이 못되는 나는 그대 아프게 한 벌로 어깨뼈마디마디가 쑤시는 아픔을 견뎌야 했어.후회할 일은 언제나 한 호흡 사이에 일어나. 물 한 모금 들이켜거나, 침 한 번 삼키거나, 하늘 한 번 쳐다보거나, 입술 한 번 앙다물거나…. 그 짧은 시간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회하는 거지. 집을 나설 때 우리는 몇 가지 스스로에게 다짐하지. `유쾌한 대화는 즐기되 쓸 데 없는 말은 삼가자, 의견은 말하되 논쟁은 피하자, 비겁한 자기변명 따위는 사절하자, 말해서 허망할 일이라면 차라리 침묵하자` 등 숱한 경험들이 가르쳐준 자기만의 어록을 새기며 힘찬 발걸음을 내딛지.하지만 순간이야. 물 위에 뿌린 말처럼, 하늘에 새기는 글씨처럼 이 모든 다짐들은 너무 쉽게 사라지고 말아. 아무리 결연한 다짐도 그 영속성을 담보하진 못해. 애초에 다짐이란 건 밧줄처럼 길고 단단한 게 못되거든. 장난기 가득한 신은 다짐이란 말에 `잠재적 휘발성`이란 속성을 부여해놓았어. 당연히 다짐은 까먹기 위한 것, 후회를 위한 필요조건이 되고 말지.마음의 평화가 찰나에 흐트러지는 건 참아야 하는 한 호흡보다 반 박자 빠른 악마의 유혹 때문이야. 그 반 박자 빠른 유혹을 한 호흡 안에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만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 `내가 아파서 그대가 아프지 않`기까지 나는 아직 멀었어. 오늘도 당신을 아프게 한 나는 비굴한 자책으로 오후토록 아파야했어. 무서운 건, 내일 하루도 변함없이 다짐하겠지만 속절없는 후회로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야./김살로메(소설가)

2013-01-31

단 한 번의 연애

지금 대한민국은 스토리텔링 열풍 중이다. 교육, 역사, 문화·관광, 심지어 수학이나 과학에서도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고유 영역을 홍보하기에 바쁘다. 사람들 관심을 유도하고 나아가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이야기 형식보다 나은 게 없다. 순간의 미학인 방송 광고조차 등장인물과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 방식을 택했을 때 훨씬 더 구매욕을 자극한다고 하지 않는가. 각 지방자치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저마다 지역 알리기와 지역 관광 활성화에 적극적이다. 그 방안으로 스토리텔링이 주목받게 되는데, 각종 보도에 따르면 우리 지역에도 이런 방식이 도입되었다. `문화스토리발굴사업`의 일환으로 일억원의 창작 지원금이 지원되었는데, 성석제의 `단 한 번의 연애`는 그렇게 탄생한 포항 관련 소설이다. 이 소설이 많은 독자를 만날수록 포항에 대한 간접 홍보 효과 및 문화관광 콘텐츠로서의 활용 가치는 드높아질 것이다.고래잡이 딸을 사랑하는 해녀 아들 이야기가 중심축인데, 그 공간적 배경이 포항지역이다 보니 자연스레 간접 광고 효과를 바라게 된다. 구룡포에서 시작되는 그들의 행적을 따라 가다 보면 포항제철소가 나오고, 송도해수욕장이 보인다. 보경사를 휘돌아 마성까지 접수한 뒤 고래잡이와 먹거리를 살피다 보면 어느덧 순정한 한 남자의 연애사가 마무리 된다. 연애 소설, 후일담 소설, 풍물 기행기 등 세 박자가 어우러진 이야기로 읽힌다.한 발 주춤한 구성, 등장인물에 대한 일관성 부족, 스토리 전개에 대한 개연성 의문 등 몇 가지 독자로서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다. 작가로서의 최대한 자유의지가 담보되었다 해도 스토리텔링이라는 부담감을 완전히 떨쳐내기에는 좀 더 숙성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문화스토리와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다 바라는 건 독자로서 과한 욕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소설이 많은 독자들을 만나 우리지역에 대한 관심과 여행 욕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건 시민으로서 당연한 소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30

아브락사스

`데미안`의 소주제는 `알 깨고 나오기` 이다. 싱클레어가 보낸 새 그림 편지에 대한 답으로 데미안은 다음과 같은 쪽지를 준다.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신학교 시절 분신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시절 헤세는 선과 악, 신과 악마, 밝음과 어둠 등 이 세상을 이분법적인 세계로 나누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예민하고 조숙한 신학생은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 아브락사스를 끌어들였다. 좋은 생각, 신에 대한 의지, 도덕적 잣대 등이야말로 세상을 트집 잡기 쉽고, 인간 내면을 옭아매는 파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악덕의 세계 역시 다른 한 세계이고, 그 또한 인간을 지배하는 한 관념으로 보았다.금기에의 내면적 모든 도전은 아브락사스로 불릴 만하다. 저급한 욕망과 성스런 영혼 따위로 인간을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경직된 사고를 대신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계를 아브락사스에 담아내고자 했다. 젊은 음악가 피스테리우스를 만나 싱클레어는 그 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주고받는다. 피스토리우스가 음악을 하는 건 단지 음악은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싱클레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은 편할 테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험난할 거야. 그래도 한번 가보지 않을래?` 이렇게 아브락사스를 알리는데 급급한 피스토리우스 역시 낡은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싱클레어로서는 자신의 내면을 알아가는 게 더 급선무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다.싱클레어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실행하고자 했다. 길들여진 훈계, 윤리적 죄책감 등에 쌓여 있는 한 아브락사스는 영원히 만날 수 없다. 밝고 어둠, 신과 악마, 좋고 나쁨 이 모든 이분법을 버리고, 신인 동시에 악마인 세계를 향해 제 영혼의 날개를 단 모든 것들이 싱클레어에게는 아브락사스였던 것./김살로메(소설가)

2013-01-29

사회적 증거의 법칙

군중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대의에 따라 움직인다. 남들처럼 하면 적어도 손해날 일은 없으니 묻어가는 편리를 택한다. 인터넷 공간을 예로 들자. 같은 이슈라도 댓글이 없는 쪽보다는 댓글이 한 번 달리기 시작하는 쪽에 더 많은 댓글이 달린다. 또, 첫 댓글이 호의적이면 부정적일 때보다는 훨씬 많은 다른 댓글을 유도한다. 원글 자체보다 다른 댓글의 움직임에 따라, 쓰고자 하는 댓글이 영향을 받기도 한다. 마치 빨간 불인데도 바쁜 누군가가 횡단보도를 건너게 되면 너도나도 우루루 따라하게 되는 것과 같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통상 시장의 95퍼센트는 모방자이며, 단지 5퍼센트만이 창조자`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퍼센트의 창조자가 되는 위험을 감수하느니 95퍼센트의 모방자로 살아가는 편리를 택한다. 가끔 도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창조자에 의해 세상은 뒤집어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 혁명의 성공 뒤에도 여전한 나머지 95퍼센트의 모방자가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 물리적 상황이든 심리적 상황이든 대의를 좇을 확실한 군중이 있다는 것.인간의 이런 심리적 상태, 즉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믿는 경향을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라고 한다. 사이비 종교가나 정치꾼은 군중 심리를 잘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도덕이나 경건을 가장한 흰소리로 옳고 그름이 제각각인 군중들을 선동할 수 있는 것도 이 군중 심리를 백 번 활용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날 예언이 실패해 천국행을 가지 못해도 여전히 신도 수는 줄어들지 않고, 청문회 때마다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비열함의 꼼수가 넘치는 얼굴이 쉼 없이 등장하는 것도 군중보다는 언제나 창조자가 한수 위에 있기 때문이다.이런 현상의 원인에는 군중의 우매함도 있지만 특유의 `귀차니즘`도 한몫한다. 체념의 친구가 된지 오랜 군중은 웬만해선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한다. 군중의 피로지수가 높을수록 위대한 창조자를 만나기는 어렵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8

이름 이홍경

1900년대 초반까지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여성들은 공식적인 이름이 없었다. 하층민부터 상류층 여성까지 필요에 의한 호칭·애칭·별호 등은 있었겠지만, 결혼하면 이마저도 출신 마을에 빗댄 택호나 아이의 호칭에 붙어 누구 엄마로 불렸다. 상류층에서는 친정의 성씨를 따라 박씨 부인, 김씨 부인 등으로 지칭되는 것이 통례였다. 정약용의 부인은 홍씨 부인이고, 유희춘의 부인은 송씨 부인이 되는 식이다. 송씨 부인 호가 `덕봉`이라 해서 그게 공식적인 이름인 것은 아니었다. `송덕봉 부인`이나 `송덕봉 씨`로 불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한말 재야 지식인 황현이 남긴`매천야록`에 이러한 여성의 이름과 사회 진출에 관한 부분이 나온다. 을사오적 중의 한 명인 이지용의 아내가 일본 사교계에 진출을 하면서 `이홍경`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 여성 이름의 시초라고 황현은 적고 있다.국운이 기울면서 상류층 부인들도 저항파와 친일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나중에 독립운동을 돕게 되는 우국부인회와 이지용 부인 등이 소속된 친일부인회가 그 둘이다. 남편 따라 일본 나들이를 가면서 원래 홍씨였던 이지용의 부인은 자신의 성을 버리고 일본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이홍경`이란 이름을 썼다. `예부터 우리나라 부녀자들은 이름을 쓰지 않고 다만 아무개 씨라고만 했다. 이때 왜국 풍속을 본받아 저마다 자기 이름을 써서 사회에 진출했는데, 이홍경에서 시작된 것이다.`라고 매천야록은 기록하고 있다.이홍경은 품행 문란으로 매국하는데 앞장섰다. 일본 실무자들과 상대를 바꿔가며 연애를 했다. 질투를 느낀 하기하라에게 혀를 깨물리자, 장안 사람들은 `작설가`(嚼舌歌)를 지어 비웃었다. 기왕 여성으로서 제 이름이 불리길 원했다면 좀 더 당당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으면 좋으련만, 하필이면 매국의 사교장에서 그 첫 이름이 쓰였다니 아쉽기만 하다. 당시 여성 일각이 제 이름을 찾으려 맹렬히 나선 것은 응원할 만하나, 친일의 수레에 그 불명예의 이름을 싣게 되었으니 안타까울 수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3-01-25

카뮈와 사르트르

카뮈와 사르트르가 결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견해차이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다가간 사르트르는 공산주의와의 연합을 꾀했지만, 공산당에서 탈퇴한 뒤 도덕적 대원칙에 충실했던 카뮈는 사르트르의 이러한 노선에 염증을 느낀다. 사르트르는 어느 순간 카뮈를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으로까지 여기게 되었다. 카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간직할수록 자기 자신을 그와는 반대의 이미지로 규정하려 애썼다. 한 때 카뮈를 열렬히 부추겨주었던 사르트르를 생각한다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카뮈가 스승 그르니에의 저서`섬`재판 서문에서 `의식은 예외 없이 다른 의식의 죽음을 추구한다.`고 사실상 사르트르를 지적했을 때, 사르트르의 입장은 희곡`닫힌방`을 빌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고 맞받아치는 격이 되었다. 카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들에 많은 지식인들이 매혹되었다는 것을 사르트르에 빗대 경고한 것이었고, 빈정대기 좋아하는 사르트르는 이런 까뮈를 인정할 수 없었다. 추도사에서조차 사르트르는 `당신은 완전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카뮈에겐 모독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른다.노벨문학상을 거부한 사르트르의 표면적 이유는 그 상이 냉전의 도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었지만 다분히 카뮈를 의식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7년 앞서 카뮈가 `정의보다 앞에 있는 내 어머니`라는 수상 소감으로 그 상을 받고 상금으로 집을 산 것과는 대조적이다. 겉으로 보기엔 알제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카뮈와 파리의 유복한 가정 출신인 사르트르 딱 그만큼의 다른 행보이다.개인적으로 카뮈 쪽에 정감이 더 간다. 하지만 누가 더 옳은가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당대의 석학 둘이 이런 논쟁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갈등하는 맞수의 삶이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라는 데 묘한 위안과 쾌감을 느낀다. 위대하나 평범하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갈등하며 성장하는 존재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3-01-24

지아야, 지아야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은 웃음을 줄 때가 많다. 드라마는 습관이 되지 않아 지겨워서 못 보고, 텔레비전 영화는 작정하고 보는 것이 아니면 잠이 와서 포기하기 일쑤이다. 그나마 예능과 다큐멘터리에 쉽게 빠지는데, 예능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날리는데 그만이고, 다큐멘터리는 경험하지 못하는 여러 상황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주니 즐기게 된다. 요즘 신설된 예능`아빠, 어디가`덕에 웃다가 울다가 한다.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과 아빠들이 오지 마을 자연 속에서 여러 체험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우선, 등장하는 아이들이 하나 같이 순진무구하다. 어린이의 외관만 가졌을 뿐, 성인 연기자 저리가랄 정도의 탤런트 기질을 뽐내는 여타 프로그램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 시청자로서는 돈 들이지 않고 청량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랄까.얼굴만 귀엽고 천진한 게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다. 이유 있는 떼를 쓰다가도 의젓한 형 노릇을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넉살좋은 붙임성을 보여주는 아이도 있다. 청아한 모습으로 새침한 듯 무심한 매력을 발산하는 여자애가 있는가 하면, 애틋하고 난만한 모습으로 그 애를 따라다니며 보호하려는 아이도 있다. 그 어떤 가공된 연기 없이 아이들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그 중 윤후는 어린아이가 내뿜을 수 있는 좋은 캐릭터를 다 가지고 있다. 개구쟁이이면서 의젓하고, 호기심이 많으면서도 배려가 깊다. 이성에 대한 숨길 수 없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남자애들 사이엔 의리도 있다. 매순간마다 `지아야, 지아야`를 외치며 여자애를 챙기는 윤후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한 때 저마다 순수했을 어린 시절을 돌이키게 된다.살다 보면 세상이 동심을 잃게 하겠지만, 그 고운 천성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룻밤 기획으로 끝날 게 아니라 그 순수함이 시청자에게 통할 때까지는 살아남는 프로그램이 되어줬으면 한다. `지아야, 지아야` 외치는 투명한 동심이 큰 위로가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3

스치듯 스미듯

사랑은 어떻게 올까? 대개 찰나적이고 때론 서서히 다가오는 게 사랑이다. 캠퍼스 느티나무 그늘에서 희고 긴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고스톱 패를 돌리는 여학생의 특이함에 남학생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도무지 그 긴 손가락과 고스톱과 무심한 얼굴이 왜 떠오르는지도 모르는, 그 부조리한 상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단박에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 거기엔 이유도 조건도 없다. 반면에 몇 년 간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서서히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취업과 결혼을 해야 하고, 부모님과 2세 걱정도 하는 시기가 맞물려 사랑이란 감정이 자연스레 싹튼다. 이유와 조건이 충분한 사랑이다. 사랑의 흔한 두 예를 들어 보았다. 그 중 사랑의 염결성에 더 가까운 쪽은 찰나적 사랑이다. 적확하고 조리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즉흥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흐린 눈으로 봐야 첫눈에 반할 수 있다. 계산 없는 사랑은 `사랑을 하는 단계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후자의 필요에 의한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시작은 `찰나적` 사랑만큼 순도 높은 건 아니다.불교 용어 중에 돈오(頓悟)와 점오(漸悟)라는 말이 있다.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박에 깨치는 것이 돈오이고, 수행의 공을 쌓아 서서히 깨닫는 게 점오이다. 사랑으로 견주자면 돈오의 사랑이야말로 순수한 사랑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흔히 나이 들도록 사랑 한 번 못해 봤다고 말했을 때 이는 돈오의 사랑을 못해봤다는 의미이다. 점오의 그것은 타협의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그 시작이 돈오의 사랑만큼 강렬하지는 않다.돈오든 점오든 그 사랑의 시작은 창대하나 그 끝은 제 각각이다. 하늘과 부처가 아닌 이상 그 사랑의 유지와 책임은 오롯이 당사자들에게 있다. 한 눈에 반하든, 서서히 반하든 서로 물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과정에 필요하다. 깨지기 쉬운 사랑의 속성 앞에서 갈등하는 갈대로 스치듯 스미듯 살아가는 게 필부필부의 삶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2

수수가 붉어졌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홍까오량 가족`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강렬한 인상이 모옌의 원작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홍까오량`은 `붉은 수수`를 뜻하는데, 이 책 1,2장`붉은수수`및`고량주`부분이 영화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 `장이모우`와 배우 `공리`를 위한 것이었다. 관람객 입장에서 원작가인 모옌까지 주목하기는 쉽지 않다. 원작을 떠난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이기를 원하고, 개봉 당시는 모옌이 전 지구촌 작가도 아니었다. 웬만한 이슈가 되지 않고는 영화의 원작가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모옌은 행운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란 쾌거 하나로 장이모우나 공리 못지않게 `붉은수수밭`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연작 중편들로 이루어진`홍까오량 가족`은 항일 무장 투쟁, 애달픈 민중들의 삶, 한 가족의 애증사 등이 일렁이며 붉어가는 수수밭 사이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읽을수록 울림이 큰 것은 우리의 일제강점기 역사 또한 그 작품 속 궤도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서걱대는 수수잎에 손가락이 베일만큼, 익어가는 고량주에 온몸이 취할 만큼 아련하고 강렬한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조금 아쉬웠다.소설가를 이야기꾼과 문장꾼으로 나뉜다면 모옌은 전자에 속했다. 할 말이 넘치다 보니 구성이 산만해져버렸다. 중복되는 에피소드와 반복되는 묘사 때문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도 너무 잦으면 독자는 지루해진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작가이다 보니 곁가지치기를 덜한 것 같다.목마르다고 끊임없이 두레박질만 할 수는 없다. 효율적인 두레박질은 목을 충분히 축일 때까지 만이다. 선명한 이야기에 분명한 호흡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 두께가 조금 더 얇아도 좋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홍까오량 가족`은 이야기와 구성을 동시에 바라는 걸 버린 뒤에야 더 잘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21

괜한 걱정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걱정하는데 허비한다. 건강 문제부터 시작해 밑도 끝도 없는 온갖 걱정을 달고 산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오히려 걱정한다는 그 걱정 때문에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걱정이 많다. 가족들이 좀 더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식들 미래가 평탄하기를 원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욕망한다. 얼마나 현실적 이기심으로 가득한 걱정인가. 알고 보면 모든 걱정은 괜한 짓거리이다. 그 말 속엔 미래적 함의가 숨겨져 있다. 오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생각하는 것이니 비생산적인데다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과거를 말할 때 우리는 걱정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과거는 `후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걱정`할 대상은 아니다. 걱정이란 오롯이 현재 이후의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으니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한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끌어안고 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법륜 스님의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혜민 스님의 어록을 쉴 새 없이 밑줄 그어도 걱정해서 해방되기는 어렵다. 담백하게 자신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다. 어느 누군들 자유를 얻기 위해 팽팽한 삶의 밧줄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인가. 갖춘 종교인의 경지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걱정이란 일상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다.내가 하는 걱정은 타인에겐 사소하게 보일 때가 더 많다.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걱정은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지 긍정을 사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걱정을 이만큼 하고 있다` 는 자기 보상 심리 때문일 것이다. 소심한 자가 쓸데없이 걱정할 때 적극적인 사람은 보란 듯이 행동한다. 걱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꿈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8

예고할 때 지키기

몇 개월째 왼쪽 어깨가 아프다. 흔히 말하는 오십견이 온 건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데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 팔을 뒤로 젖히거나 위로 올리기가 힘들고, 밤에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욱신거린다. 병원 가는 걸 싫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병원을 찾는다. 석회석건염이란다. 어깨 힘줄 사이에 돌이 생기는 것인데 노화현상 중 하나란다. 뼈 사진을 보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석회석이 쌓여있다.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그 돌이 다른 조직을 긁어 대서 그렇게 아팠던 것이다. 빨리 왔으면 치료 기간을 줄일 수 있었을 거라고 담당의가 말한다.치료과정의 번거로움과 시간적, 물적인 부담에 앞서 부끄러웠다. 병원 가기가 귀찮거나 두려운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자가진단이라는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별 거 아닐 거야`와 `큰병이면 어쩌지?`사이를 왔다갔다하다 끝내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자기합리화를 꾀하고 만다. 그 시간에 병원 뛰어갈 것이지, 자가진단을 하고 처방전까지 스스로 써댄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황폐해진다.합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모순투성이인 게 사람이란 동물이다. 제 삼자의 일일 때는 대개 객관적이고 옳은 답을 아주 쉽게 내놓는다. 하지만 그것이`내가 처한 상황`으로 바뀔 때에는 모범적이고 지당하신 그 답안들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답안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미루고, 내 식으로 판단하다 일을 그르치고 만다.좋은 일은 예고 없이 와도 안 좋은 일은 예고 없는 게 드물다.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헤어지자고 하는 일은 없으며, 충분히 준비했는데 시험을 망치는 일은 없다. 인간에겐 직감이란 게 있어, 변심한 상대의 행동을 눈치 챌 수 있고, 덜한 공부로 생기는 심리적 불안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을 애써 무시하거나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일이 커진다. 모든 일은 예고할 때 빨리 대처하는 게 낫다. 미루어 판단하다 보면 너무 늦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