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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야생의 나날

장국영은 만우절날 죽었다. 시시껄렁한 거짓말로 하루를 눙치는 대신,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피는 꽃에도 우울과 몽상으로 4월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온통 그의 추모 특집이다. 천녀유혼에서 그의 눈빛은 여전히 순정하고 맑다. 그래도 어쩐지`아비정전`에서의 그의 어깻짓만은 못하다. 발 없는 새의 운명을 예감하고 추던 속옷 바람의 맘보춤, 엄마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뒤돌아보지 않던 그 발걸음. 그 궁극의 지점에서 언제나 그의 어깨는 흔들렸다. 젊음을 제 멋대로 탕진하는 자의 슬픔 같은 것이 그 어깨에 걸려 있곤 했다. 아비정전은 제목부터 관심을 끄는 영화였다. 아Q정전, 아비정전에서처럼 `정전`(正傳)은 `이야기` 쯤이 되겠다. 아비정전은 영어 제목에 와서야 제대로 빛을 발한다. Days of Being Wild라니. 내친 김에 프랑스 제목도 찾아 본 적이 있다. 프랑스판 DVD 제목은 Nos annees sauvages이다. 의미는 영어와 같지만 오감이 훨씬 열리는 느낌이랄까. 중화권의 아비정전 제목이 왠지 딱딱한 문어체라면, 서구식 제목은 구어체이면서도 날 것의 냄새이다. `야생의 나날`이라니!상처투성이 인간은 사랑을 쉽게 믿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인들까지 커다란 우물 같은 공허를 안기기 마련이다. `발 없는 새가 있다지. 날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에 꼭 한번 땅에 내리는데, 그때가 죽을 때지.` 아비의 이 독백을 떠올릴 때마다 발 없는 새의 휴식처가 `바람`이었다는 것이 못내 걸리곤 했다. 공허함의 정점에서 내딛는 지상의 발자국이 죽음이라니. 이 기막힌 메타포를 실험하기 위해 장국영은 서둘러 길 떠났나 보다.아비가 된 장국영은 천국의 꽃밭을 여행 중이고, 상처만 얻은 숱한 수리진(장만옥)은 이렇게 남아 원망 같은 벚꽃을 맞는다. 웬만하면 4월엔 뒤돌아보지 마라. 야생의 나날에 대한 기억의 회로 때문에 슬픔 많은 어깨들, 벚꽃 아래 울고 있으리니. 당신 또한 거기 그렇게 울고 있을 것이기에./김살로메(소설가)

2013-04-04

나이 든다는 것

아직까지는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크게 두렵거나 실망하지는 않는다. 이제껏 그러했듯이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산다. 다만 젊었을 때에 비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확실히 마음의 준비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삶과 가치를 연구해온 코넬대의 칼 필레머 교수가 그에 대한 조언을 해준다. 그의 저서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에는 결혼, 양육, 일, 여가 등에 관한 취재기적 충고가 나오는데 그 중`두려움 없이 나이 드는 5가지 조언`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우선 나이 드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다. 이 말은 중년의 생각이나, 여유, 감각, 포스 등이 얼마나 즐길만한 것인지 겪어보지 못한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 나이를 온몸으로 관통해봐야만 그 `괜찮음`의 의미를 알게 된다. 두 번째, 백 년을 쓸 몸 아껴라. 이 충고는 뼈저리게 새겨들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실천이 어렵다. 몸을 방치하면 나도 괴롭지만 주변 가족마저 고통스럽다. 그건 어리석은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다.세 번째, 미리 걱정하지 마라. 대부분 닥치지도 않은 미래나 죽음을 앞서 걱정한다. 걱정을 걱정하는 시간에 대비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는 말씀이렷다. 네 번째, 관계의 끈을 놓지 마라. 중년에 들면 의식적으로라도 관계의 장을 넓혀가란다. 이 역시 쉬운 건 아니지만 우울증이나 자괴감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노후의 거처를 계획해두라. 노후에 대한 현실적 주거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심신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 소박하고 구체적인 노후 환경 계획을 떠올리다 보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오지 않을 것 같은 미래인 노년이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그것에 대한 몇 가지 명시적 조언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의 반은 준비된 기분이다. 가장 지혜롭게 인생을 나는 방법은 끊임없는 자기 훈련에 있다는 것을 `두려움 없이 나이 드는 법`은 알려 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03

박병선의 집념

박병선 박사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를 구해본다. 적절한 걸 찾지 못하겠다. 박병선은 그냥 박병선이란 고유명사 단독으로 반짝였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부려본다. 허난설헌이나 신사임당이 앞뒤 어떤 수식어를 받지 않아도 그 이름이 고스란히 빛나는 것처럼.`KBS스페셜` 다큐에서 박병선 박사의 삶을 알게 되었다. 고인이 된 여사는 이십 년 이상,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 집념을 불태웠다. 한국전쟁 직후 33세에 프랑스로 유학 갔다. 역사학자의 뜻을 품고 떠나는 그녀에게 스승은 당부한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를 꼭 찾아보라고. 그렇게 의궤 찾기는 선생의 일생일대 목표가 되었다.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다 관계자에게 발탁되어 1967년부터는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다. 선생에겐 기회였다.각고의 노력으로 베르사유 도서관 지하창고에 버려지다시피 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할 수 있었고, 끝내 그것은 고국의 품에 안겼다. 그 과정에서 `직지`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금속활자 및 인쇄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직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직지의 대모`, `의궤의 어머니`는 그렇게 선생 앞에 붙는 별칭이 되었다. 한국의 스파이로 오해 받아 사서직을 떠난 뒤에도, 선생의 연구는 멈춤이 없었다. 정부·민간단체와 힘을 합쳐 의궤 반환운동을 전개했다. 2011년 5월, 297권의 외규장각 의궤는 14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의궤가 돌아온 지 반년 만에 선생은 세상을 떠났다.박병선 선생의 치열한 삶, 올곧은 조국애를 보면서 세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집념, 시간, 건강이 그것이다. 뚜렷한 목표(그것이 조국애이나 인류애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가 있다면 이 세 박자만 갖추면 두려울 게 없다. 박병선 박사가 존경스러운 건 조국애란 큰 물줄기를 잡아놓고, `집념`이란 의지로 매 `시간`을 자기화했다는 것이다. 건강이 허락한다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지는 게 아니니 더 숙연해질밖에./김살로메(소설가)

2013-04-02

행락의 키치

키치(Kitsch)는 한마디로 `저속함`을 말한다. 그 말의 본래적 태생을 떠나, 밀란 쿤데라 이후 그것은 `삶을 바라보는 가짜의 태도`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쿤데라 식으로 이해하자면 키치는 `싸구려 잣대로 공감대를 유도하는 유치한 놀음이자, 우연하고 당위적인 실체를 위선적인 미적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모든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지인들과 벚꽃놀이를 간다. 창밖 스치는 모든 것들은 봄빛에 조화롭다. 꽃과 나무들이 풍기는 시각적 향연, 들판에 솟구치는 대지와 공기 냄새, 이런 기대감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키치가 끼어들 틈이 없다. 백년 넘은 아름드리 꽃길에 들어서는 순간, 흐드러진 꽃가지가 아니라, 나무 사이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좌판대의 물결이 시야를 압도한다. 멀리서 바라봤던 벚꽃은 환상이나 거짓의 풍경으로 밀려나고, 가까운 좌판의 물결은 생존의 진실이 되어 앞을 가린다. 일차적 키치의 현장을 목도하는 순간이다.여기서 그치면 키치에 대한 쿤데라 식의 완전한 정의가 될 수 없다. 쿤데라는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야말로 키치라고 단언했으므로. 우리식의 정서적 친밀감이 서린 그 행락문화는 비록 관찰자의 피로와 염증을 수반하더라도 그 자체가 키치가 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런 풍경들을 보면서도 흐드러진 봄꽃 잘 봤다고, 역시 자연은 위대하고 경이롭더라고, 제대로 맛보지 못한 자연을 과장해서 전한다면 그것이 곧 쿤데라 식의 키치이다.일시에 많은 사람들이 향연을 즐기려니 온갖 물리적 야단법석이 좁은 땅 안에서 자행된다. 자칫 꽃구경은 힐링이 아니라 킬링이,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스트레스 해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해마다 꽃구경을 포기할 수 없는 건 염결한 생존과 관련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똥을 수반한다는 저릿한 스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오래된 절집 꽃구경 도중, 텃밭에서 피어오르는 똥 냄새야말로 삶의 근원적 속성임을 깨치게 되는 것. 키치로 전락하기 직전의 그 찰나적 짜릿함을 위해서 봄나들이는 필요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01

착하다는 것

착한 사람은 사랑을 정의하기에 가장 적절한 유형이다. 왜냐면 착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자신이 아닌 타자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넘어서는 타자라는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란 말이 성립된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타자에게 수렴되지 못하는 일방적 감정은 욕망이고, 나를 향한 사랑, 즉 자기애는 한낱 이기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분명 사랑의 대상은 타자인데, 몹쓸 사랑의 속성은 욕망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제 인격적 호의를 타인에게 베푸는 행위가 몸에 밴 경우 우리는`착하다`고 한다.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주부인 친구 세 명이 시장엘 갔다 치자. 마침 늙은호박 세 덩이가 떨이로 나와 있다. 한 친구는 작은 애호박 하나가 덤으로 붙은 것을, 다른 친구는 눈썰미를 발휘해 알뜰살뜰 따진 것을, 마지막 친구는 두 친구가 고르고 난 남은 것을 선택한다. 차례대로 허당인 사람, 현명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명명할 수 있겠다.애호박 덤이 붙은 호박을 산 친구는 그 속을 갈랐을 때 안이 다 썩었다고 했다. 따져가며 산 친구는 똑 소리 나는 살림꾼이긴 한데 인간미는 없다. 마지막 남은 것을 고른 이의 호박은 제일 작았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앞의 두 친구가 호박이라는 `물건`에 시선을 뒀다면 착한 친구는 타자라는`관계`에 눈길을 줬다.자신보다 타자에게 선의의 시선이 먼저 가는 사람, 즉 착한 사람은 관계 지향적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세상의 온도는 생각보다 따뜻하지 않다. 착함의 숭고함이 평가절하 되는 나날일 것을 착한 사람들조차 느끼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그다지 반기는 것 같지가 않다. 착하다고 말하는 것이 결례일 정도로 `영리한 현명함`을 강요하는 사회는 아닌지. 착하기보다는 현명하기를 학습시키는 사회가 바른 것인지 헛갈리기만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9

프라하의 요네하라 마리

쉽게 썼는데 깊게 읽히는 작품을 만나면 잠 못 이룬다. 요네하라 마리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천부적 재능을 갖춘 이가 독서력을 겸비했을 때 어떤 매혹적인 글쓰기를 보여줄 수 있는지의 좋은 예가 된다. 빼어난 유머 감각, 섬세한 관찰력, 놀라운 기억력의 조합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참신하기 그지없다. 소설체 문법을 차용한 이 논픽션은 단숨에 읽힌다. 1950년대 말 공산당 국제 교류기관의 편집자로 파견된 아버지를 따라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던 소녀 마리의 추억담이 주요 내용이다. 각 나라 공산당 핵심 간부들의 자녀로 이루어진 학교는 다국적 소수정예 멤버를 자랑한다. 인민의 평등과 해방을 위해 모였다지만 특권의식, 패권주의, 계급의식 등 부모 세대가 안고 있는 모순을 어린 마리와 친구들은 깊이 통찰하게 된다.레닌에 관한 전기 영화를 보면서 마리 친구인 리차는 `레닌은 꽤나 잘살았나봐`라고 속삭인다.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만 부각하다 보니 부르주아였던 생활상까지는 조작하지 못한 것을 어린 소녀의 눈은 잡아낸다. 레닌이 노동과는 거리가 먼, 소작료를 받아 생활한 지주 출신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다. 강의록은 연습장에 썼다가 노트에다 다시 정서해야 한다. `한 번 쓴 글은 도끼로도 못 깎아`내는 게 그들의 철칙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연필로 쓴 것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건 그들에겐 무례한 것으로 통했다. 지울 수 있는 것, 변화되는 것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그들을 지배했던 것일까.마리 여사의 경험담은 `다름`에 대한 수용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이국 먼 동유럽의 교육 방식과 문화는 일본의 그것과 다르며, 그들 유럽 각각의 역사나 민족의식 역시 고유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 다양성을 인정하는 일도 중요하고, 그것을 넘어 다른 것을 접한 뒤에야 자기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와 시대의식이 녹아 있는 그녀의 프라하 시절 추억담은 나와 타자를 둘러싼 삶의 여러 방식에 대한 지평을 넓히는 자극제가 되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8

표절 예방 교육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린 유명 배우가 학위 반납을 하겠다고 해서 화제다. 쿨하게 인정하고 발 빠르게 대처하는 걸 보고 언론에서는 신선한 충격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배우로서 난 사람인데 학위 하나 반납했기로서니 대학 강단에서 쫓겨나거나 밥벌이에 지장이 있겠는가. 이리 빼고 저리 변명하는 다른 혐의자들에 비해 즉각적이고도 현명한 대처를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렇다고 잘못이 잘못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표절이 개인만의 잘못일까. 우리나라만큼 어릴 때부터 도덕 교육을 철저하게 받는 나라도 없다. 인사 잘해라, 어른 공경해라, 자리 양보해라, 나라에 충성해라, 부모에게 효도해라 등등 도덕 교육의 절반 이상은 예절이나 충효의 덕목에 발목 잡혀 있다. 오죽하면 이러한 우리 도덕 교육의 현주소를 빗대 김상봉 교수는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라거나 `노예 도덕`이라고 일갈했겠는가. 그러면서도 정작 표절에 관한 교육은 받아 본 적이 없다.외국의 사례를 보면 그들은 `표절은 범법 행위`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유치원부터 철저하게 가르친다. 한 문구, 한 소절을 쓰면서도 남의 것인지 아닌지 습관적으로 점검한다. 따 온 문장의 경우 `인용`이나 `각주`는 필수다. 만약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왕따를 감수해야 한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표절에 관한 가르침을 들어왔는데, 범법자의 길을 간다니 주변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반면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우리 교육의 어떤 커리큘럼에서도 표절에 관한 것은 들어 있지 않다. 이럴진대 누가 개별자에게만 표절의 혐의를 씌울 수 있을 것인가. 대학원 논문 전체를 대상으로 엄격하게 검증한다면 표절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경우는 드물지도 모른다. 아직 늦지 않았다. 표절의 부당성에 대해 점진적으로 교육하는 환경이 필요하다. 과도한 파시즘적 교육 항목이 줄어든 자리에 표절에 관한 경종 같은 가르침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무지가 낳은 표절의 가시방석에서 온 국민이 자유로워졌으면./김살로메(소설가)

2013-03-27

진정한 이력서

타당한 증거로서 효력을 가지려면 발자취가 있어야 한다. 학교나 회사가 자기소개서나 이력서를 중요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로만 백 번`나 괜찮은 사람이니 뽑아주시오` 라고 해봐야 소용없는 메아리가 된다. 효율성과 객관성을 증거하기엔 서류보다 나은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조직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가장 합리적인 사람 뽑기 방식이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을 증명해줄 문서 하나를 위해 온몸과 마음을 쏟는다. 학문적 성과를 위해 대학원을 가고, 영어 공인 점수를 높이기 위해 학원을 드나들며, 그럴듯한 현장 스펙을 쌓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이 모든 것들은 문서화된 내 자료를 구축하기 위한 수단이다.졸업반인 딸아이도 자기소개서 준비 때문에 오는 봄이 부담스럽단다. 스트레스가 쌓이는지 부쩍 기숙사에서 집으로 오는 주기가 당겨졌다. 집밥으로 충전을 하고 가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젊은이들의 하루를 보면서 자기소개나 이력만큼 허울 좋은 겉치레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어떤 봉사 단체에서 한 청년에게 시쳇말로 꽂혔던 적이 있다. 갓 성인의 문턱을 넘은 앳된 그는 재바른 듯 침착한데다 야무지고 상냥했다. 누구나 곁에 두고 싶어했다. 신문을 나르고, 차를 타고, 편지를 정리하는 단순한 봉사를 하는 것뿐인데도 무슨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사람처럼 성실하게 임했다. 작고 섬세한 행동으로 신선한 주의를 끄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력이 될 정도였다. 문서화 되지 않은 진정성으로 자기증명을 해보이는 것이었다.자기소개서나 이력서가 한 사람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 섬세한 몸짓 하나가 훨씬 많은 이력을 보여준다. 진실로 믿을 만한 이력서는 그런 것들인데 우리는 그것을 간과한 채 살아간다. 그 견고한 이력이 무시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풍랑 앞에서, 제 이력서를 채울 스펙을 위해 내 딸 네 딸 할 것 없이 그들은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6

신중과 경솔

신중함이 고급한 미덕인 것만은 틀림없다. 애석하게도 나는 신중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대체로 급하고 다혈질이라 실수가 잦다. 젊은 한 때 환경적 요인에 의해 무척 신중한 시간들이 내게도 있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편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심하고 걱정이 많았다. 아마 그때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부러 신중함 앞에서 결례를 일삼는지도 모르겠다. 신중한 사람은 겸손하고, 과묵하며, 들뜨지 않는다. 경솔한 사람은 허둥대고, 오지랖을 떨며, 참지 못하고 앞선다. 신중한 사람은 소심하며, 무례하지 않고, 절제한다. 경솔한 사람은 대범하며, 적극적이며, 즉흥적이다. 신중한 사람은 견해를 자제하며, 판단하기를 주저하며, 통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경솔한 사람은 말이 앞서고, 판단에 서두르며, 의기투합하기를 즐긴다.써놓고 보니 하늘이 보시기에도 일견 신중한 사람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생겼다. 하지만 신중한 것이 좋고 경솔한 것은 나쁘다, 꼭 이런 얘기가 성립되는 것만은 아니다. 경솔의 실수가 신중의 갑갑함보다 인간적일 때도 많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도 참지 못하는 그들은 먼저 행동하고, 앞서 배려하며, 빨리 나아간다. 신중파에 비해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다소 거친 듯 에너지가 넘치는 그들 곁엔 사람들이 몰린다. 나부터 그런 사람들을 좋아한다. 실수나 과장이 주는 약점이 갑갑한 무결점 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는 게 본능으로 알기 때문이다.신중이 개별성에 함몰되면 지겹거나 매혹이 반감되고, 경솔로써 대중을 호도하면 밉상이 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극단적이지 않다는 전제 하에 신중과 경솔 중 누구를 친구로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택하겠다. 경솔이 인간적 미덕이 되는 딱 그 지점에서 추가 멈췄으면 좋겠다. 신중함의 불편 보다는 경솔함의 편리함, 즉 제 안에 갇힌 햄릿보다는 말 달리는 돈키호테가 훨씬 내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5

젠가 게임

다 컸지만 우리집 아이 둘은 아직도 젠가(jenga) 게임을 즐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마련한 그 나무 블록은 모서리가 닳아 반들반들하다. 몇 번의 이사를 거쳤고 아이들은 다 자랐는데도, 버리기 좋아하는 내 손에 그 장난감이 살아남은 것을 보면 아이들이 젠가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다. 각자의 기숙사에서 돌아온 딸과 아들은 스마트 폰과 친구하기도 지겨운지 젠가 게임을 시작한다. 3개씩 18층으로 블록을 올린 뒤 맨 위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의 블록을 하나씩 빼서 맨 위층에 다시 쌓아 올리는 놀이가 젠가이다. 블록을 제대로 빼지 못하거나, 제대로 쌓지 못해 탑을 무너뜨린 사람이 진다. 한 마디로 `잘 쌓은 것을 잘 지켜내야 하는` 게임이다. 새로 쌓거나 덧대는 게 아니라, 아무리 빼고 쌓아도 18층 높이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공든 탑이 무너지랴, 라는 속담이 무색할 만큼 순간의 실수로 블록을 잘못 뽑거나, 뽑은 것을 쌓을 지점을 잘못 선택하면 탑은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우리 삶도 그러하다. 아무리 제대로 쌓아도 지키는 데 무신경하면 무너지기는 쉽다. 무너지는 것도 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교양을 쌓고, 인맥을 넓히고, 지식을 거두며, 경력을 높이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비거나 모자란 채로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진다.하지만 실은 채우는 것보다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 위로 쌓고, 옆으로 넓히는 것 못지않게 본래적 심성이 갖고 있는 고유결을 지키고 재구성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잘 못 빼면 한 방에 무너지는 게 삶이기 때문이다. 보도에 의하면 한 방에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실행(失行)으로 추락하고, 실언과 실문(失文)으로 낭패를 당한다. 있는 것을 재배치하는 것보다 더 쌓으려는 욕심이 강하다 보니 실수 또한 잦게 된다. 쌓아온 자신만의 사명을 유지하고 성찰하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내가 가진 소박함의 품위, 그것을 지키려는 노력을 젠가 게임에서 읽는 저녁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2

간헐적 단식

인체의 신비는 어디까지일까. `간헐적 단식`이란 생소한 방식이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전파된 것인데, 서구에서는 제법 활용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간헐적 단식이란 일주일에 한두 번 16~24시간 정도의 배고픈 상태를 지속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삼 시 세 때 규칙적인 식습관을 갖는 것이 건강의 척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식생활 패턴은 우리 몸의 건강을 좀 더 잘 지켜줄 수 있음을 조심스레 입증하고 있다. 공복의 메커니즘은 단순한 다이어트 효과만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당뇨병, 치매, 암 등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수명까지 연장할 수 있단다. 임상의 의사들을 상대로 실험한 바에 의하면 배가 고프면 장수 유전자가 활성화 되고, 손상된 세포를 치유하는 시스템도 가동되며, 노화 속도를 늦추는 호르몬이 분비된다는 것이다.인류의 식문화 역사를 더듬어본다면 이런 결과들이 일견 타당하게 와 닿기도 한다. 유구한 인간 역사에서 먹을 것이 풍부했던 시기는 최근 백 년 남짓이란다. 오랫동안 우리 몸은 굶주린 상태를 견디도록 진화(?)되어 왔던 것이다. 이런 과학적 맥락은 간헐적 단식의 무해함을 증명해준다. 하루 두 끼도 겨우 먹던 인류가 이제 과식과 투쟁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 모든 현대 질병의 원인 중 으뜸이 `너무 먹어서 탈`인 지경에 이르다 보니 이런 프로그램에까지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간헐적 단식의 과학적 실증 유무가 결론이 나기까지는 과학자들의 연구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참에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팔랑 귀를 가진 나 같은 이는 간헐적 단식에 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 초연해도 되는 대부분의 건전한(?) 몸매를 지닌 사람들까지 이런 분위기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그간 유행처럼 쏟아지는 일회성 다이어트 비법과 건강법들에 너무 자주 신체를 저당 잡혀왔음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1

송덕봉의 유머 코드

조선시대에 활약한 빼어난 여성 문인들은 많았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황진이, 이옥봉, 이매창, 허난설헌 등이 있는데 송덕봉도 빠질 수 없다. 송덕봉은 16세기 초중반 활동한 주부 시인인데 인간적 재치와 유머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미의 문학적 성과 대부분은 남편인 미암 유희춘이 남긴 `미암일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인품과 학식은 믿을만했지만, 키가 작다는 이유로 가족은 미암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러자 편지로 미암에게 신행 올 때 버선발에 두꺼운 솜을 켜켜이 넣어 신고 오라고 충고했다. 우리나라 키높이 신발의 원조가 될지도 모를 에피소드가 덕봉에게서 나온 셈이다. 한편 장난끼 많은 미암이 부인에게 이런 시를 지었다. `부인이 문 밖에 나갈 때 코가 먼저 나가더라.` 콧대 센 부인을 놀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가만히 있을 덕봉이 아니었다. `남편이 길을 갈 때 갓끈이 땅을 끌더라.` 미암의 작은 키를 농으로 받아치는 여유를 발휘한다.오랜 귀양 생활 끝에 벼슬길에 다시 오른 미암은 고향에 남아 있는 덕봉에게 자신의 행실을 자랑하고 싶었다. 지난 몇 개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니 큰 은혜를 입은 줄 알라고 편지를 보낸다. 덕봉은 답한다. 늘그막에 홀로 지새는 것은 당신 건강에나 좋은 일이지 마누라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은 아니라고. 더구나 시모의 삼 년 상을 거두고, 귀양살이 때 먼 길 찾아 나선 것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나은 것이냐고 일침을 가한다.저토록 거침없는 화법과 진솔한 여성적 유머 코드가 용인된 당시 조선 사회는 확실히 여성에게 열린 사회였다. 논리적이고 담대하며 문학적 감수성 면에서도 결코 미암에게 뒤지지 않았던 덕봉 여사의 한 궤적도 남편인 미암의 배려 없이는 꽃피우기 힘들었을 것이다. 비 따라 봄 오는 오늘 같은 날, 봄꽃을 앞에 두고 덕봉과 미암은 어떤 시로 부부의 정을 나눴을까. 그미를 위한 온전한 시집은 사라지고, 미암의 기록만으로 그 시절을 되돌려야 하는 게 조금은 애석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20

마트로시카 속 비결

외적 인격 즉 페르소나의 긍정성을 옹호한다. 천성이 곱고 바른 사람들이야 겉과 속이 같으니 가면 쓸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오감이 발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상황에 따라 적당한 가면을 쓰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내면의 성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면 그건 잘못 없는 타인에게 무례한 일이고, 자신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학부모 모임에서 여중생 딸의 고민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다. 유독 한 아이가 `교복 치마를 왜 그렇게 길게 입어? 필기는 왜 그렇게 꼼꼼하게 해? 체육 시간에 뛰는 모습 진짜 웃겼어.` 이런 말로 딸에게 스트레스를 준단다. 누가 봐도 흠 잡을 데 없는 모범생에 대한 시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행하는 신조어 중에 `중2병`이라는 게 있다. 사춘기 또래가 지닐 수 있는 심리 상태의 한 유형인데, 한마디로 괜한 허세를 부리는 것을 빗대는 말이다. 그것은 나보다 잘 난 것에 대한 시샘과 피해의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위악과 허영심을 동반한다. 한데 그 중2병은 한 때로 끝나지 않고 성인에게도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두 친구가 각자 회사를 차렸지만 하나는 승승장구하고 다른 한 친구는 문을 닫았다. 실패한 친구가 찾아가 성공 비결을 물었다. 친구는 러시아 목각 인형인 마트로시카를 건네주었다. 그 안에 답이 있다고 했다. 믿는 둥 마는 둥 차례로 다섯 개의 작은 인형을 꺼냈고 가장 작은 마지막 인형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내가 성공한 이유는 항상 나보다 큰 사람을 곁에 뒀기 때문이야.`제 그릇 작은 줄은 모르고 타인의 멀쩡한 그릇을 탓하는 건 중2병만도 못하다. 나보다 큰 사람은 도처에 널렸다. 어딜 가나 그 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곁에 두려는 노력만으로도 일상은 풍성해진다. 마트로시카 다섯 개 인형이 뚜껑을 열수록 점점 작아지고, 가장 작은 것 안에 답이 있는 건 제 그릇 크기를 항상 되새기라는 깊은 뜻이 숨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9

자원봉사라고요?

가끔 흥분지수가 높아질 때가 있다. 가령 뮤지컬 `레미제라블`공연사의 자원봉사자 모집 공고 같은 것을 접했을 경우가 그렇다. 6개월간의 제작 현장 서포터를 구하는데 이력서는 기본에다 운전 가능자 우대란다. 주말 근무까지 하는데 처우는 교통비 지급, 식사 제공, 활동증명서 발급이 전부란다. 자원봉사자란 그럴듯한 계급 포장을 씌워 무급 노역자를 구하겠다는 심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상업적 공연 예술이다. 영리 추구가 목표인 기획품이지, 문화생활에 소외된 자들을 위한 무료 공연 작품이 아니란 말이다. 상업적 활동에 자원봉사자를 구한다는 것 자체도 말이 되지 않지만, 스펙 쌓기나 꿈 이루기에 목말라하는 젊은이들의 심리를 업체의 이기심에 활용하려 했다는 점에 화가 난다. `활동 증명서` 한 장과 신성한 노동을 맞바꾸기엔 너무 기운 계산법이질 않나.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엔딩곡이자 주제곡은 `사람들 노래소리가 들려요?`(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팔아서 돈을 벌기는 쉬워도 가난한 민중의 노랫가락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이 아이러니! 하기야 노동을 착취당하고도 일정 부분 제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함정에 자발적 형식으로 빠져든다.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사회는 인간의 그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든다.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자원봉사`나 `재능기부`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절박한 사람들의 마음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만만한 사람들에게 더 인색하고, 가진 쪽일수록 타인의 노동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나, 약자에 대한 연민이 없는 사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기부나 봉사란 자발적이라야 의미가 있고, 가진 자가 소외된 자들을 향하는 것일 때 더욱 가치가 있다. 못 가지거나 덜 가진 자가, 다 가지거나 많이 가진 자에게 노력 봉사하는 건 노예 생활이지 자원봉사가 아니다. 일상생활에 허덕이는 자들이 봉사나 기부에 동요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는 할 수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8

교양의 목적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된 흐름이 안나의 외도와 파국이라 할지라도 그건 작가가 설계한 미끼일 뿐, 실제 봐야할 게 너무 많아 완벽하게 읽어내기엔 벅찬 소설이다. 백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간 군상의 다양한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작가적 분신이 가장 많이 투영된 듯한 인물이 레빈인데 어떤 장면은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회적이고 자유주의자인 유부남 오블론스키와 시골풍에다 소심한 귀족 노총각인 레빈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태생적 생각이 다른 둘은 행동 양식도 다르다. 레빈의 생각은 이렇다. 부르주아들의 시간 보내기용 먹거리에 지나지 않는 굴보다는 치즈 얹은 흰 빵이 일용할 양식으로는 낫다. 시골에서는 일 하기 위해서 빨리 배를 채우려 하는데, 이곳 식당에서는 최대한 더디게 배를 채우기 위해 애쓴다.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 손톱을 기르고, 소맷부리에 접시만한 단추를 달고 다니는 게 못마땅하기만 하다. 시골 사람들에게 옷소매는 걷어 부치기 위해 있고, 손톱도 일하기 편하기 위해서는 짧게 자르는 게 낫다. 식당의 온갖 장식품도 충만한 영혼을 더럽히는 것 같고, 머리로만 일하는 인간들이 레빈에게는 야만스럽게만 다가온다.그때 도회 남자 오블론스키가 나선다. 모든 교양의 목적은 쾌락에 있으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쾌락적 충만의 실용성을 충고하는 오블론스키에게 레빈은 조금 마음이 열린다. 레빈이 모스크바에 온 목적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은 양심적 쾌락, 즉 충분한 교양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사랑은 온갖 자기혐오와 자기경멸을 넘어선 체험이어야 하지 고지식함이나 고상함에 머무는 망설임이어서는 안 된다. 레빈이 그 쾌락적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를 상상하며 읽는 것도 협의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5

다를 뿐 잘못은 아냐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안녕하세요`라는 토크 쇼가 있다. 전국의 고민남녀들이 출연해 자신의 고충을 방청객들에게 호소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이다. 때로는 코믹하게 더러는 진지하게 풀어놓는 사연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토록 공감되는 고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의 출연자 한 명은 특별했다. 전형적인 한민족 핏줄이건만 선천적으로 파란눈으로 태어나 놀림 받은 기억이 있는 젊은 엄마가 나왔다. 그녀의 어린 딸도 파란 눈동자를 가졌는데 벌써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불쾌한 경험이 있는 출연자로서는 커가는 딸이 받을 상처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모녀가 뿜어내는 파란 눈빛은 신비한 인형의 그것처럼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지만 특이하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고 있었다.내가 어렸을 적에도 예의 출연자보다 더한 신체적 `다름`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희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파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알비노 유전 현상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파란눈의 모녀와 마찬가지로 그건 질병도 전염병도 아니었다. 다만 남과 조금 다르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짓궂은 애들에게 수모를 당해야만 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나와 다름에 대한 관용의 시선은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다수가, 특수하고 특별한 소수를 홀대해도 괜찮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양인이 파란눈을 가졌으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동양인이 파란눈으로 태어났으면 무시의 대상이어도 좋을 근거는 없다. 다수라는 강압의 눈이 소수라는 연약한 눈을 제압할 이유 역시 없다. 그 무모한 눈빛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깨쳐주는 것은 우리 어른이 할 일이다. 모르고 해악을 끼치는 어린 영혼의 모든 잘못은 우리 기성의 책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4

숨그네를 탔어

몽환적이며 비약적인 문체로,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얘기를 쓸 수 있을까. 적어도 헤르타 뮐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녀가 쓴 `숨그네`를 읽기 전까지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끝 간 데 없는 고통과 헤어날 수 없는 허기의 순간을 저토록 낯선 말들의 조합으로 완성해낸 작가는 흔치 않다. 누군가 이 책이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고, 누군가 이 책이 좋은 책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라고 얼버무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 이 책을 소장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물론, 이라며 망설이지 않고 답하겠다. 불친절하고, 에두르고, 솟구치고, 앞서가는 문장들의 너울에 독자는 속수무책으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허공만큼 넓은 길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이랄까.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수용소에 붙들려간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취재기적 소설은 서늘한 산문시로 읽힌다. 사실적 경험담이 시적, 몽환적 기법의 옷을 빌려 입었기에 그 아우라가 제대로 발현되는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아프다고, 배고픔을 배고프다고 호소하는 건 진부하다. 아픔이 `숨그네`가 되고 허기가 `배고픈 천사`가 되는 메타포를 거치고서야 낯선 언어들이 펼치는 정직한 실존은 되살아난다.수용소 생활의 조각보 같은 일상이 구체적 이미지로 승화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난해하게 읽히는 게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그 책임을 작가에게만 지울 수도 없다. 극한의 생존 조건에서 굶주림과 수치심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는 온전한 형태의 문장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갇히고 길들여진 자의 통점이 확산되면 당연히 그 의식의 심연은 발작을 일으키고, 그 때의 글은 불친절한 수사나 애매한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 수사나 덫이 낳은 언어유희가 쉼없이 독자들을 끌었다 놓았다 하는 데, 묘한 그 이끌림 덕에 `헤르타 뮐러` 또는 `숨그네`는 오래 독서계에 남는 대명사가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3

사슴이 우네

고영민 시인의 시집 `사슴공원에서`의 표제시 덕에 `녹명(鳴)`을 알게 되었다. 기실 나를 울린 것은 `사슴 울음 소리`가 아니라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 놓았다`라는 구절이었다. 돌고 도는 계절엔 경계가 불분명하고, 나는 먼 곳에 있고, 내 앞의 당신은 침엽수처럼 무표정 하다. 그래도 언젠가 본 책 속의 사슴 공원처럼 우리는 사랑을 꿈꾸고 단비를 기원한다. 내게 시는 읽는 게 아니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 속의 저 신발을 돌려놓은 이 누구였을까를 생각하는 충만한 엔돌핀의 시간만큼 독자로서 미소 짓게 된다. 내가 벗어 놓은 신발을 누군가 돌려놓았든,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을 내가 돌려놓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을 포착하는 시인의 다사로운 눈썰미가 있었기에 사슴의 울음으로까지 확장되는 시구를 건질 수 있었으리라.시경(詩經)의 소아(小雅)에 녹명 부분 시가 나온다. 다북쑥 뜯던 사슴은 우우하고 제 기쁜 울음으로 먹이 있는 곳을 알린다. 거문고 켜고 생황을 부니, 광주리 받들어 주변 사람들도 몰린다. 나를 좋아해 (사슴은) 바른 도리를 일러준다. -이런 내용의 시이다. 사슴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먹이를 찾으면 기쁜 울음으로 주변에 알린단다. 어진 임금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런 시가 탄생되었으리라.사슴 울음소리를 내는 건 쉽고도 어렵다. 완고한 타자의 세계관 앞에서 뻗어가는 나의 실존이 울어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더구나 상황은 고정된 자아와 변화무쌍의 타자로 바뀌기도 한다. 따라서 사슴의 기쁜 울음은 온 우주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울음이 되기 십상이다. 강한 사자는 제외하더라도 여린 토끼나 비슷한 염소에게까지 울음소리를 할애하는 게 쉽지는 않다. 그 배타성의 한계를 일찍이 목도했기에 시인은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서둘러 사슴 울음소리 들으러 가야 한다고 다독이는지도 모르겠다. 약자라면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풀밭의 나날을 꿈꾸는 것 그것이 착한 시인들의 사명이런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3-12

산불

야속하게도 왜 산불은 동시다발적으로 오는지. 삼월 초의 날씨로서는 백여 년 만에 27도에 육박하는, 볕 좋고 바람 많은 날씨였다. 오후가 되자 도시는 멀리서부터 검회색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초여름 같은 수은주를 시샘하는 봄비가 오려나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 도시 남쪽과 북쪽에서 잇단 산불로 온 허공이 연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걱정과 우려와 공포가 뒤섞인 호기심 서린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삼십 오층 높이에서의 산불 현장은 한 눈에 잡혔다. 불꽃은 도심 가까운 산허리를 휘감았고, 오가지 못하는 차들은 비상 깜박이로 대로가 주차장화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형 물바구니를 달거나, 물탱크를 장착한 헬리콥터들은 쉼 없이 강과 현장을 오갔다. 남쪽의 또 다른 산불 현장의 헬리콥터들은 강까지 오지 않고, 근처 저수지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하늘 길에서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한 질서 같았다.헬리콥터는 강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해야만 물을 담을 수 있었는데, 강 표면에 이는 프로펠러 바람 동심원처럼 명치끝에 아찔한 파문이 일곤 했다. 호기심은 금세 사라지고 통증과 공포와 위기감만 온몸에 달라붙었다. 가파른 산과 주택 현장을 누빌 소방관들과 주민들, 관계자들의 수고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현관문 돌리는 아귀힘도, 신발을 쉬 벗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잠깐 봤음에도, 불과의 사투를 지켜보는 일은 맘 무거운 그 무엇이었다. 모든 말들의 무용함으로서만 이 산불 현장을 말할 수 있었다. 하물며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입술을 건너 간 말들은 화근(禍根)이 되고, 손끝에서 날아간 불티 역시 화근(火根)이 된다. 이때의 모든 부주의는 유죄이다. 화근의 원인은 순간이나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으니. 길고 힘겨운 불꽃과의 사투는 말줄임표 말고는 제대로 설명할 길 없다. 아, 새 아침이 왔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헬리콥터들의 공중 행렬은 계속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1

상추라는 푼크툼

독서 모임에 가면 책보다 더 유의미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친구가 말한 핵심 장면을 마음으로 찍어 들여다보면 짧은 생각 하나가 정리되곤 한다. 인화된 사진은 전원주택 집들이 장면이다. 근경으로 집이 보이고, 사진 중간의 야외 식탁엔 노란 앞치마를 두른 섬세한 안주인이 삼겹살을 굽는 중이다. 분주해진 안주인을 도와 누군가는 밥을 푸고, 다른 누군가는 낮 술잔을 챙긴다. 왼쪽 원경이 텃밭인데, 그곳에서 젊은 누군가는 상추를 따고 있다. 안주인의 바쁜 손길과 달리 눈길은 텃밭 상추 따는 친구에게 가있다. 순진한 도회지 얼굴의 그녀는 상추의 연한 윗대궁만 톡톡 딴다. 말리기엔 너무 멀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어 안주인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애매한 표정만 짓는다. 상추 따는 친구는 밑대궁부터 따는 것이 상추나 주인 심지어 자신마저 배려하는 것임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안주인의 저 표정에도 악의 없음이 증명되니까.이 사진에서 `전원주택에서의 친구들과의 다정한 점심 한때`만 읽는다면 일반적 보편적 시각인, `스투디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추 윗대궁을 따는 아무 생각 없는 친구와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안주인의 섬세한 표정을 읽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이 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푼크툼은 하나의 `세부요소`이자 `찌름`이니까.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나만의 생생한 영감의 세계로 이탈하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다. 친구들과의 단란한 점심 식사 장면의 일반성을 떠올리는 것보다, 연한 꽃대궁을 무심히 꺾어버리는 예견치 못한 친구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모티프가 된다. 눈치 못 챈 다른 친구들이 맘껏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일 때 여린 상추에 눈길을 주는 안주인을 읽어내는 것 역시 푼크툼이다. 푼크툼은 고상하고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 엉뚱하며, 은밀한 개별성을 지닌다. 너무나 비의지적인`찌름`인 푼크툼의 구체적 사례들에서 예술은 출발하는 게 아닐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