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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간적이다

다산 정약용이 해배되자 본인만큼이나 기뻐했던 이들이 강진의 제자들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스승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 스승의 덕을 볼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다. 본가로 올라갈 스승과 강진에 남을 제자들은 영속적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다신계(茶信契). 모임을 조직한 이유 중에는 다산이 강진 유배 동안 마련한 토지와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원체 다양한 곳이 사람 사는 데인데, 다산을 둘러싼 인적 환경도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강진의 다산 토지를 잘 관리해주었다. 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났다 뿐, 다산은 노론이 득세하는 중앙 정계에서 든든한 끈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실망한 제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신뢰를 주지 못한 채 인간적인 한계를 보인 다산에게 제자들이 등을 돌린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신계가 무신계(無信契)가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이청(이학래)과의 결별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산의 수많은 저술에 지대한 편집자 역할을 했던 그는 의무만 강요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스승을 떠나 추사 김정희의 식객으로 자리바꿈하고 만다.스승과 제자는 많지만 참된 스승과 제자는 드물다. 스승은 제자를 키우고, 제자는 스승을 세운다. 키우고 세우는 일은 쌍그네를 타는 것과 같다. 스승이 무릎에 힘을 실어 그네를 띄우면 제자는 그 기를 받아 온힘을 모아 그네 키를 높여나간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태풍 앞이라면 그네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태풍이 견딜 만한 것인가 아닌가는 그네를 잇는 동아줄이 안다.스승으로서 자기 관리에 서툴렀고, 제자를 기르는데 미욱했던 다산을 보면서 슬픔보다는 위안이 되는 건 왜일까. 아마 학문적 깊이나 인품의 넓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약점 많은 인간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리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들, 오늘도 곳곳에서 위태로운 그네를 타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7

긴 줄 끝의 당신과 나

다 놓아야 오는 게 있다. 모든 걸 버린 뒤에야 짜릿하게 얻는 게 있다. 바로 자유다. 그토록 갈구하는데도 언제나 그것이 멀기만 한 것은 우리 일상 자체가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위한 연극 무대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위해 힘껏 고개 숙여야 하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크게 웃어야 하며, 벼랑이 두려운 나머지 단단히 밧줄을 잡아야 한다. 정말로 자유가 다급하다면 그 모든 걸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관계망이란 현상과 자유라는 본질을 동시에 얻으려는 모순된 굴레, 그런 인간 속성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줄 위를 오가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진 못해요.``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고용주인 `나`에게 저처럼 일갈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인 척해도 그것은 실제 자유와는 별 상관이 없다.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자유를 위해 제 인생 순간순간을 도박에 걸지는 않는다. 그토록 어리석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는 다르다. 벼랑에 몰리더라도 인간이 줄을 자르지 않으면 무슨 살맛이 나겠냐고 다그친다. 일상의 우리가 우물쭈물하며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소설 속 조르바는 과감하게 내려놓고 실천한다. 본능의 화신인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부렸다.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다. 그에게 과거란 없는 것이며, 미래는 미리 걱정할 게 아니었다. 오직 현재만이 유효한 놀이터였다.무지렁이 단순 일꾼 조르바는 안타까운 인간 굴레를 위무하기 위해 만든 작가의 꽃다발이 아니었을까. 살아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게 완전무결한 인간의 자유라는 걸 방증하기 위해 조르바란 꿈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조르바의 눈에는 팽팽한 긴 줄 끝에 있으면서도 끝내 그것이 자유라고,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게 인간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14

17자로 치유하기

한 줄도 너무 길다. 일본의 독특한 문학 장르인 `하이쿠`(俳句)를 가리킬 때 자주 듣는 말이다.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조와 비견될 수 있겠다. 글자 수로만 본다면 우리의 단시조 초장 수와 비슷하다. 독서클럽에서 하이쿠 모음집을 읽고 토론했다. 일본 문학을 깊이 공부한 이가 없으니 수박 겉핥기이긴 했다. 하이쿠는 총 17글자로 이루어진 5·7·5조의 일본 정형시이다. 지구상의 가장 짧은 시 형식 중의 하나이다.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해묵은 연못이여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첨벙` - 마츠오 바쇼의 이 하이쿠는 최고로 꼽히는데, 이게 왜 좋은 시라는 건지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하이쿠가 지닌 일본 특유의 정서를 살피다 보면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전통 하이쿠는 크게 세 가지 형식미를 갖는다. 앞서 나온 대로 열일곱 글자 내외의 정형성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계어(季語기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개구리, 장마, 기러기, 첫눈 등 누가 봐도 계절을 연상할 수 있는 낱말들이 하이쿠에 자주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절자(切子기레지)를 갖추어야 한다. 세 구 중 어느 한 곳에 여운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어미를 써서 시적 흐름을 끊어 주는 것을 말한다. 위의 바쇼 시에서 `해묵은 연못에` 하지 않고, `해묵은 연못이여`하고 한 호흡을 쉬어갈 때 훨씬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짧은 시가 주는 긴 여운이 신기해 우리식으로 17자 시 짓기 놀이를 해본다. 격조 높아 부담스러운 시조에 비해 접근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하이쿠 짓기 반응이 나쁘지 않다. 하이쿠의 묘미인 촌철살인엔 미치지 못해도 저마다 숨겨뒀던 발설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다. 시가 뭐 별건가. 제 안에 고였던 말들의 두레박을 짧은 호흡으로 건져 올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시가 되는 게 아니던가. 단순하고 절제된 언어의 치유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3

야생해당화

때론 야생해당화 가시처럼 뾰족하게 찌르는 게 삶이지. 덤불 무성하고, 희거나 붉은 꽃 소복할수록 그 가시 더 아프게 찔러대지. 절망을 노래하는 사람이나 답답한 현실을 온몸으로 견디는 초로의 여자나 그게 그거인 게 우리네 삶이지. 올리브라는 이름의 여자는 자신의 아픔으로 타인을 위로할 줄 알지. 네 아픔과 내 아픔이 다르지 않다고 무심한 듯 내뱉을 수 있지. 알고 보면 누구나 정상이 아니지. 하기야, 생의 경계에 정상과 비정상이 어디 있기나 하겠어. 원래 삶이란 게 달달하고, 환하고, 명쾌할 때보다 비리고, 우울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거든. 퉁명스런 기질 이면에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올리브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아. 살다보면 그렇게 누구나 올리브가 되는 거지. 코끼리 같은 몸집의 올리브가 누군가를 삶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고 있어. 먼저 아파 봤고 지금도 아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바닷가 절벽에 핀 야생해당화 향기가 코를 간질여. 누군가 고통스런 기억을 잊기 위해 그 꽃 꺾으러 발길을 옮기네. 아슬아슬한 그 흰 꽃 냄새 맡으려다 그만 가시에 찔리는 게 보여. 기어이 한 묶음의 꽃, 거실 테이블에 놓이는 걸 보며 올리브는 말하겠지. 슬픔이나 아픔을 견디기엔 꽃보다 나은 위무는 없다고. 가시 돋친 꽃일지라도 꽃이 주는 환희나 희망의 전언을 버리지 못하는 거지.야생해당화 덤불 속을 헤매는 게 우리네 한살이야. 찌르거나 찔리면서 엉긴 가지를 헤쳐나가지. 그리곤 희거나 붉게 피어나는 꽃을 보는 거지.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삶은 견뎌내는 것이지. 오늘도 그 삶의 무게 때문에 힘겨운 이들은 소설집`올리브 키터리지`를 곁에 두어도 좋겠어./김살로메(소설가)

2012-12-12

삼근계(三勤戒)

목표를 세운 사람의 성공 여부는 부지런함에 달려있다. 참으로 고전적인 말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소망이 결실을 맺는 데는 근면·성실보다 나은 게 없다. 부지런한 뒤에 운과 재능을 빌려도 늦지 않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에 관한 책을 읽는데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 이런 스승과 제자가 있을까. 깐깐한 스승과 우직한 제자는 찰떡궁합이다. 강진 유배 18년 동안 다산을 거쳐 간 제자는 많았지만 끝까지 남은 단 한 사람이 황상이었다. 스승은 만난 지 이레째 되는 날, 열다섯 더벅머리 황상을 따로 불러 공부에 힘쓰라고 당부한다. 황상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세 가지 문제점은 둔하고(鈍), 막혔고(滯), 어근버근한(?) 것인데, 그래도 문사를 닦을 수 있겠냐고 여쭤본다. 스승은 제자의 수줍은 질문에 이런 요지의 답글을 내린다. 재빠르고(敏), 날카롭고(銳), 빠른(捷) 게 전부가 아니라고. 재바른 천재보다 미욱한 둔재의 노력이 훨씬 무섭다고 깨쳐준다. 뚫으려면 어째야 하는가?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려면 어떻게 하는가?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황상은 늙어 죽을 때까지 스승의 이 면학문을 몸과 맘에 새겼다. 세번씩이나 부지런하라고 써준 스승의 말씀을 `삼근계`라 부르면서 평생 보듬고, 그 가르침을 실천했다. 다산이 죽은 뒤 다산의 아들 학연은 너덜너덜해진 황상의 삼근계를 보고 그 정성에 감복해 아버지를 대신해 다시 써주었다. 그 글씨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스승, 제자, 아들의 연결 고리 또한 애잔한 것 말고 달리 말할 길이 없다.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지런한 게 좋은 거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든 정보든 내게 부지런하라고 말할 스승은 도처에 넘친다. 다만 내게 황상 같은 우직함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한 그 우직함을 황상에게서 빌려오고 싶다. 스승 사랑 담뿍 받고 그 사랑 실천한 황상의 어진 맘을 분양 받고 싶은 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1

문장 털기

때론 시 자체보다 시인의 말이 더 시적일 때가 있다. 이정록 시인의 시집`정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멀리 있는 친구가 소설집 한 권과 함께 보내주었다. 시집을 읽을 때 나는 시인의 서시나, 추천자의 발문 등을 먼저 읽는 편이 아니다. 선입견이 생기거나 감흥이 깨질까봐 본문부터 읽어 내려간다. 한데 이번에는 왠지 맨 마지막 장의 `시인의 말`부터 눈에 들어왔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 거다. 그 마음 하나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았다. 바닥을 친 땡감의 상처, 그 진물에 펜을 찍었다. 홍시 너머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 전문을 옮겨 보았다. 독자와의 인사 격인 `시인의 말` 정도는 풀어써도 누가 뭐랄까. 한데 아무리 봐도 본문 시편들보다 더 시적이다. 말을 늘이지도 않고,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담백하고 간결한 몇 마디에 진한 여운이 남는다.이정록 시인은 문장 털기에 능하다. 말(言)들이 달린 나뭇가지를 마구 흔든다. 다 털려 나목의 상태여도 좋고, 잎새나 꽃잎 몇 장 달려 있어도 괜찮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은 말씀만 주워 담는다. 그것이 알짜배기 문장이다. 떨어진 잎과 날아간 꽃잎일랑 미련두지 말자. 그건 읽는 자나 쓰는 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필요한 형용사나 긴요한 부사는 숨겨뒀다 아껴 쓰자. 그래도 읽는 이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웃음을 말하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심장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 그것이 매혹적인 문장의 기본이다. 온갖 키치적 깃털로 장식하는 문장보다 담대하게 탈탈 털어버린 문맥들이 더 아름다울 때가 많다. 일견 무색, 무취, 무미하게 보이는 문장의 깊이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이미 `문장 털기`의 기분 좋은 노예가 되었다. 시인의 말을 옮겨 적는 내 손끝 역시 기분 좋은 예민함으로 떨리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0

아수라 (阿修羅)

어김없이 겨울이다. 문밖의 밤은 차고, 눈발마저 흩날린다. 산다는 게 얼마간은 고통스럽고, 다소간은 눈물겹다. 무서운 줄 모르고 놀린 누군가의 세 치 혀는 죄 없는 영혼의 문풍지를 온밤 내 떨게 하고, 상처의 심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몸과 마음엔 아수라들만 겹겹이 쌓인다. 하필이면 이런 날, 백석의 `수라`같은 시가 눈에 띌 게 뭔가. 차디찬 밤, 아무 생각 없었던 시인은 거미새끼 한 마리를 문밖으로 쓸어내 버린다. (얼마나 다행인가. 밟거나 쳐서 죽인 게 아니니!) 곧이어 큰거미를 같은 장소에서 발견한다. 고만 짠해진 시인은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큰거미를 밖으로 버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알에서 갓 깬 새끼거미가 그 자리에 또 아물거린다. 끝내 가슴이 메고 서러운 시인은 어린 새끼를 고이 종이에 받아 내어준다. 가족이 있는 찬 문밖으로. 따뜻하고 외로울 바엔, 바람 차더라도 함께 하는 게 낫겠네. 거긴들 수라의 세계를 벗어날까만.수라(修羅)는 아수라의 준말로 인도신화에 나오는 여덟 신(神)중 하나이다. 원래 착한 신이었지만 하늘과 싸우면서 나쁜 신이 되었다. 얼굴 셋에 팔이 여섯인 흉측하고 거대한 신인데, 증오심이 가득해`싸움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른 신에게 공격당해 아수라들의 시체가 즐비한 데서`아수라장`이란 말이 나왔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흐트러진 현장을 가리키는 말이다.시인은 일제강점기 때 민초들의 삶을 수라에 빗대 노래했겠다. 찬바람 속, 거미가족의 상봉을 통해`함께 하기`의 애상을 보여준다. 등 따뜻해도 서럽고 외로우니 수라이고, 어깨 기댈 수 있어도 발 시리고 손 차니 그 또한 수라로다. 하지만 바람 치운 밤거리로 내몰릴지라도, 이해받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두렵지 않다. 서러운 1930년대를 건너온 우리 민초가 그랬듯이, 시인의 눈물겨운 겨울이 그랬듯이, 상처 입은 누군가의 이 겨울도 함께 한다면 아수라쯤이야 거뜬히 걷어낼 수 있지 않겠나./김살로메(소설가)

2012-12-07

네 안에 답이 있다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지 학부모 모임도 잦다. 엄마들끼리 만나 밥 먹으면서 공감하는 시간도 무척 소중하기에 여건이 허락하는 한 참석하는 편이다. 아이가 어렸을 땐 적극성, 정보력, 경제력을 고루 갖춘 엄마들이 쏟아내는 각종 말씀들에 솔깃했다. 그들을 따라할 수도 없으면서 그때는 시샘서린 호기심으로 열심히 귀 기울였다. 아이들이 다 큰 지금은 그런 교육형 열혈 엄마들의 말씀은 숙지고, 생활의 지혜를 나눠주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엄마들 얘기에 주목하게 된다. 오늘 모임에서 한 어머니가 우스갯소리를 한다. 초등학교 이학년 바른생활 문제를 풀어보란다. 이사 온 이웃집에서 떡을 돌렸다. 한 집에서 엄마 대신 아이가 떡을 받았다. 뭐라고 답례를 할까. 아이는 `뭐, 이런 걸 다….`라고 답을 적었다나. 선생님은 당연히 틀린 답으로 처리했다. 정답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란다. 단답형 똑 떨어지는 답에 익숙한 우리의 교육 현실을 풍자한 것이겠지만 곱씹을수록 씁쓸하기만 하다.수학 문제를 풀어서 틀린 답이 나오면 그건 틀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에서, 원하는 답이 아니라고 틀렸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답일 뿐 틀린 답은 아니질 않나.핀란드식 교육법이 새삼 떠오른다. 답의 옳고 그름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교육면에서 세계적으로 내로라하게 된 것은 열린 학습 방식 덕택이다. 학생들 저마다 가진 창의력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준다. 시험에서 정확한 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적으면 된다. 정답을 얻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답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깨치게 하는 게 우선이다.자발성이 수용되고, 자율성이 보장될 때 그 집단은 진일보할 수 있다. 핀란드의 열린 교육정책을 보면 그들의 밝은 미래가 보인다. 이것이 정답이다 정해 놓고 그 답을 찾으라고 다그치는 대신, 정답은 `네 안에 있다`고 선언할 수 있는 날이 우리에게도 올 것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2-12-06

볼륨을 낮춰라

사람의 진심은 말보다 표정으로 나타난다. 꾸준히 몸과 맘을 닦는다면 좋은 표정을 절로 짓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 어디 그런가. 내 의지대로 말은 부릴 수 있지만 표정은 쉽게 그리할 수 없다.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표정으로는 천만 번 살인도 저지를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대선을 앞둔 요즘 정치권,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야권 대선 경쟁자였던 안철수 후보의 사퇴를 두고 양보냐 포기냐의 의견도 분분하다. 아름다운 양보인지, 어쩔 수 없는 포기인지를 두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해석이 엇갈린다. 정치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겐 그게 뭐 그리 중요할까 싶다. 하지만 앞날까지 내다봐야 하는 정치권 특성으로 볼 때 그 의미는 제법 중요한가 보다.아름다운 양보인지, 분노 서린 원망인지는 당사자가 가장 잘 알 것이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텔레비전에 나와 말한다.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알려면 목소리가 아니라 표정을 보면 된다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치인을 예로 들자. 일단 볼륨을 완전히 낮춘다.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표정으로만 읽는다. 그러면 그 사람이 기쁜지, 화가 나는지, 슬픔에 싸여 있는지, 분노하는지, 양보하는지 다 보인다. 정말 그런가 싶어 호기심에 실험을 해봤다. 영화나 인터뷰 화면 아무거나 볼륨을 낮춰보았다. 표정만으로도 화면에 비친 사람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거의 알 수 있겠다. 확실히 사람은 말보다 표정으로 더 많은 진실을 얘기한다.이런 학습 탓인지 누군가 포커페이스를 하면 움찔하고 긴장부터 한다. 자신을 억제하고 침착하게 사물을 대면하는 사람들일수록 정치권에 몸담으면 유리할 것 같다. 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을 부려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나 같은 다혈질은 감정을 다스리는 법부터 배울 일이다. 그나저나 볼륨을 낮추지 않아도 나 같은 하수의 눈에도 안철수의 표정이 읽히니 어쩔 것인가. 그가 완벽한 정치인으로 거듭 나려면 표정 관리부터 연습해야 할 것 같다. 정치권은 절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05

천연

식당용 화학조미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착한 식당을 찾아나서는 종방 프로그램에서 그 실체를 알고 적잖이 놀랐다. 오늘은 중국집에 관한 취재였다. 몰래 카메라가 주방을 비춘다. 4인용 짬뽕을 만드는데 얼추 여섯 국자의 화학조미료를 쏟아 붓는다. 값싼 업소용 조미료엔 감칠맛을 내는 핵산이 덜 들어 있으니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단다. 안 쓸 수 없다면 덜 쓰는 방법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인다. 요즘 웬만한 가정에서는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건멸치, 다시마, 표고 등 천연 식자재로 내는 육수는 인공 조미료가 내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국이다. 가난한 시절의 입맛을 대신하던 인공조미료를 쓸 이유가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식당에서 화학조미료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남는 게 없어서`일 것이다. 식당의 존재 이유가 이윤 추구이니 딜레마이긴 하다. 정해진 가격 안에선 웬만한 고객을 확보하지 않고선 천연 육수를 써서 이윤을 낼 수 없는 구조이다.가격에서만 자유롭다면 천연 식자재만 써도 충분히 중화요리를 만들 수는 있다. 착한 식당으로 선정된 한 중국집 사장의 인터뷰가 눈물겹다. 어떤 식당이든 오래 일할 수가 없었단다. 인공 조미료를 덜 쓰려는 자신을 좋아할 리 없는 업주와의 마찰 때문이었다. 원하던 대로 자신의 가게를 냈고, 천연 식자재로 짬뽕과 짜장면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사장의 진심이 시청자에게도 통했는지 방송이 끝난 뒤 그 식당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단다.양심마저 천연인 그 식당이 호기심 서린 반짝 경기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다소 비쌀 수밖에 없었던 짬뽕 값이 내릴 수 있으려면 적정 수의 손님이 찾아주어야 한다. 천연 식재료를 사용하는 착한 식당의 본보기로 안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건 그렇고 양심적으로 식당을 하기엔 사회적 여건이 어려운 것인지, 식당업을 둘러싼 여러 환경이 그렇게 부추기는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긴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04

아프리카제비꽃

식탁 위엔 아프리카제비꽃이 놓여 있었어. 그 옆의 카드 한 장, 아내 올리브가 턱짓으로 가리키네. 남편은 털썩 주저앉아 펜으로 봉투를 뜯네. 돋보기가 필요한 건 당연하겠지. 이십 여 년 전, 남편이 운영하던 약국에서 일을 돕던 데니즈에게서 온 엽서야. 몹시 사랑스러운 여자지만 아내 올리브에겐 패션 감각조차 없는 맹추로 기억되는 여자지. 남편은 그애를 몹시 사랑했지. 사랑이 뭐 별거겠어? 약품 매뉴얼을 들여다보는 안경 낀 모습이 귀엽게 보이고, 벙어리장갑을 떨어뜨린 그애를 위해 허리 숙여 장갑을 주워, 입구를 벌려 작은 손이 쏙 들어가는 걸 지켜보는 것. 뭐 그런 게 사랑 아니겠어. 너무 빨리 남편을 잃은 그애를 간호해주고 돌아오던 날, 남편은 차창을 짓누르는 어둠 속에서 생각하지. 먼 북쪽으로 가 약국을 열고, 작은 집에서 그애와 예쁜 딸을 낳고 살고 싶다고.하지만 현실 속 그애는 약품 배달원과 결혼을 하고 떠나지. 남편 생일 때마다 의례적인 카드가 날아들지. 단 한 번도 `사랑을 담아`라고 편지 끝을 장식하지 않는 그애. 하지만 마지막 소식이 될지도 모를 카드엔 `사랑을 담아, 데니즈`라고 적혀있지. 몹시 애잔하지. 사랑을 담아,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애의 감정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사랑에 빠졌을 땐 누구나 섣불리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지. 사랑을 놓아주고서야 우리는 쉽게 사랑이라 쓸 수 있지.이런 얘기가 다는 아냐. 아내 올리브를 주목해야 돼. 매사에 빈정대고, 퉁명스런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우유부단한 남편더러 이렇게 말하겠지. 과부 위로꾼아,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딨어?`올리브 키터리지`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야. 시작인`약국`편에서 주변인물로 나오는 올리브는 전형적인 주부상은 아냐. 독선과 상처의 심연 끝에 어떤 꽃이 피어날지 벌써 가슴이 따끔거려. 식탁 위 아프리카제비꽃, 그 청보라 꽃잎이 아직은 위태로워 보여. 자의식 강한 한 여자의 맵찬 삶이 저렇게 꽃잎 속에서 떨고 있어./김살로메(소설가)

2012-12-03

고삐

세상 일 혼자서 되는 게 없다. 서로 돕고 배려해야 매끄러운 결실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누구나 주변의 도움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는 못한다. 독선보다는 연민이, 이기심보다는 배려가 훨씬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제대로 거절하는 법을 배운 적 없으므로 착한 사람들일수록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떠맡는다. 그리곤 힘들어한다. 누구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 타인에게 비치는 내 모습과 내 안의 실체는 다르다. 그 둘은 같아서도 안 된다. 페르소나와 실체가 같다면 이 사회는 엉망이 되어 버릴 것이다. 부드러운 관계를 위해 누구나 조금씩은 가면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의 가면은 절대 부정적이거나 위선적인 게 아니다. 명랑 사회를 위한 윤활유 역할이다. 하지만 너무 착해서 굴레를 자초한다면 그것 또한 욕심이 아닐까.언제나 약지 못해서 힘겨워하는 후배가 있다. 스스로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타인의 요청엔 너그러우려니 몸과 마음이 고달프단다.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고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여러 관계망들에 지쳐간단다. 모든 걸 놓아버리기엔 그동안 쌓아온`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허락하질 않는다.소와 개의 우화가 떠오른다. 힘든 일만 반복하던 소가 개를 꼬드겨 탈출을 도모한다. 개는 목줄까지 벗어던진데 비해 소는 밧줄로 쓰겠다고 고삐를 달고 도망을 간다. 하지만 얼마 못가 돌덩이에 고삐가 걸려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다. 자유로운 개는 저만치 도망가는데 소는 주인에게 곧장 붙잡히고 만다. 고삐라는 길들여짐의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죄, 그게 소의 운명이다.절실하게 원한다면 과감하게 고삐를 버려야 한다. 욕심이란 고삐를 달고 달리니 제 풀에 넘어지고 돌턱에 걸리고 만다. 되잡혀 멍에를 지느냐 도망쳐 기회를 잡느냐, 이 명백한 답 앞에서 어리석은 자는 망설이고, 현명한 자는 뛰쳐나간다. 단, 아직 지치지 않았다면 어리석지 않았으므로 계속해서 멍에와 고삐를 친구로 둘 지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30

줄리앙

꼬불꼬불한 머리칼에 그윽한 눈매, 길고 뾰족한 코와 앙다문 입술, 비현실적으로 긴 목을 가진 미소년 상, 줄리앙 석고상이다. 그 이름도 모르던 학창시절부터 꼭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줄리앙은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 가의 청년상이다. 줄리앙은 프랑스식 이름이고, 이탈리아 식 이름을 되찾자면 줄리아노 쯤이 되겠다. 미켈란젤로의 메디치 가의 묘당을 장식하는 여러 작품 중 하나였던 줄리앙이 몇 백 년 뒤, 데생용 모델로 이렇게 사랑받게 될 줄 작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호기심에서 등록한 데생 기초반에서 그린 석고상 순서는 아그리파, 줄리앙, 비너스, 아리아스 등이었다. 단연 줄리앙을 그릴 때 몰입도가 가장 높았다. 하지만 재능 없는 열정은 호기심 충족이라는 선에서 만족하는 게 옳다는 걸 깨쳤을 뿐이다. 그림 배우기를 접은 건 후회하지 않지만 줄리앙을 다시 그릴 수 없다는 것은 조금 서운했다.누군가의 강연회에서였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눈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때 자료 화면으로 활용한 것이 줄리앙 석고상이었다. 한데 만날 보는 앞면뿐만 아니라 뒷면, 옆면까지 비교 배치한 사진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내가 본 줄리앙은 앞면 또는 고작해야 약간 비스듬한 옆면 정도였다. 단 한 번도 뒷면을 그린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기는커녕 줄리앙의 뒷면이 있다고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원래 전신상이니 미켈란젤로가 뒷면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사물의 이면을 보는 눈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진정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다 끝난다면 안타깝지 않을까. 줄리앙의 뒷모습을 더듬어본다. 주름 사이에 파고드는 고독과 우수, 뽀글거리는 뒤통수 머리칼 밑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원형 탈모, 이음새가 터져나갔을 등쪽 갑옷선 등을 살필 때 그것을 제대로 보고 그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귀티 줄줄 흐르는 줄리앙의 실체는 그의 목덜미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우리는 그 사실을 놓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9

괜한 걱정

학교 현장에 있는 친구 덕에 특강할 기회가 생겼다. 지난 두 달 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소박한 얘기로 공감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아이들과 나눈 주제는 `소중한 나`이다. 학업 못지않게 정신 건강도 중요하기 때문에 일선 학교에서는 이런 프로그램도 계획했을 것이다. 자아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단계 중 가족 간의 갈등 부분이 있다. 학생들은 비교적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출한다. 멍석만 잘 깔아주면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내어준 자료지에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쓴다. 가족에게서 들은 상처의 말들을 적어 보는 코너가 있다. 내가 엄마로서 뱉은 온갖 악행(?)들을 예로 들어가며 설명한 뒤, 자신들이 겪은 모욕적인 말들을 적어 보라고 하면 걸러지지 않은, 수위 높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흔하진 않지만 솔직함을 넘어 적나라한 가정사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대부분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부모에 대해 너무 심하다 싶은 자료지를 작성한 학생들이 있다. 언어폭력을 일삼는 부모가 있다는 반증이다. 부모가 내뱉은 상처 깊은 말 때문에, 불신과 원망으로 가득한 설문지를 작성한 아이들 앞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이것도 소중한 자아를 형성하는데 극복해 나가야 할 것들이라고만 말했다.걱정하는 건, 학생들이 작성한 그 자료가 혹시라도 진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재미로 썼는데 오해를 사서 상담의 대상이 된다면 괜히 미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오래 관찰한 담임선생님이 그걸 판단하지 못할 리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모두 소중한 나를 찾겠다고 기꺼이 나섰는데, 괜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사례가 된다면 이건 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소심증이 발동하는 것이다. 자료지 하나가 아이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겠지. 이래저래`나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8

명랑

`명랑`의 사전적 뜻은 `1. 흐린데 없이 밝고 환하다. 2. 유쾌하고 활발하다`이다. 한데 날씨가 명랑하다, 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걸로 보아 요즘에는 후자의 뜻으로 정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명랑`은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작가 소래섭 강연을 들은 후 그 사실을 알았다. 그의 몇몇 저서 중 단연 관심 가는 것은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이다. 작가에 의하면 적어도 일제강점기 때의 `명랑`이라는 낱말은 지금의 `유쾌하고 활발하다`라는 의미와는 좀 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오늘날의 `건전`, `모범` 등의 단어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숨은 뜻은 `체제에 길들임`, `불온함을 용납 못함`등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통치 권력의 입맛에 맞는 시민 길들이기가 당시의 `명랑`이란 말에 집약되어 있었다.당시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도시 명랑화`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들 기준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퇴치하는 것이 경성 명랑화의 주된 모토였다. 명랑한 것이 아니면 모두 없애야 할 것들이었다. 거리 방역사업에 몰두하고, 분뇨 정비 사업을 벌였으며, 이만 명이 넘는 걸인 퇴치에 사활을 걸었다. 그리하여 길들여진 모범 학생을 만들고, 대중매체를 통제했으며, 불온한 행위는 퇴출시켰다. 불온한(?) 경성 전체가 명랑화 사업에 동원된 것이다.강요된 건전과 부자연스런 절제가`명랑`이란 말로 포장되었던 당시 의식이 오늘날에 와서 완전히 고리를 끊었다고는 할 수 없다. 경성의 불온함을 허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개별자의 건전한(?) 불온을 허락지 않는 경직된 구조이다. 프랑스와즈 사강이 말했던가. 사회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통제를 위한 명랑이 아니라 개방을 위한 명랑일 때 `명랑`이란 말의 밀도 높은 진정성이 담보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랑이란 말이 그다지 명랑하게 쓰이지 않는다는 이 씁쓸함!/김살로메(소설가)

2012-11-27

공존의 방식

나는 숫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부류이다. 고등학교 때 미적분이 뭔지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는 과외 금지 시대였기 때문에 사교육 열풍도 없었다. 해서 몇몇을 제외하곤 다들 나처럼 고만고만한 수학 실력을 자랑(?)했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얘기다. 아직도 꿈속에선 수학 때문에 힘겨웠던 학창시절을 자주 만난다. 수학 또는 숫자에 대한 이런 내 트라우마를 이해 못하는 아들딸 때문에 가끔 서운할 때가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 숫자나 퍼즐 맞추기 게임이 나오자 아들과 딸은 신이 났다. 숫자나 도형의 조합을 위해 저토록 골머리 썩는 게 재밌다니 나로선 이해불가이다. 내가 유도하는 대화에는 시큰둥하다가 하잘것없어 뵈는 숫자 놀이에 몰입하는 걸 보니 영 마뜩찮다. 오랜만에 모였는데, 내가 낄 자리는 없다.오전에 참석했던 한 특강 중`3 +4 = ?`와`? +? =7`이 부분이 떠오른다. 어떤 이는 정답이 딱딱 떨어지는 사유체계를 좋아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답이야 비록 정해져 있더라도 그 길로 가는 여러 방식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전자의 경우 애매모호한 것을 못견뎌한다. 그들은 정답이 두 개 이상 있어 뵈는 언어 영역을 싫어한다. 정답이 시원하게 나와야 안심이 되는 수학 과학 같은 과목을 좋아한다. 나 같은 이는 그 반대다. 수학적, 과학적 사유 체계를 경험한 적이 거의 없으니 그런 건 생각만 해도 갑갑하고 두렵다. 대신 여러 생각이 가지치기하는 인문학적 책 읽기에서는 위안도 받고 소화하기도 쉽다.나와 성향이 완전히 다른 아이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들 또한 내가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일 게다. 가르치거나 강요한다고 성향이 굳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후천적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아무리 봐도 성향은 선천적인 게 더 강한 것 같다. 그 선천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명랑한 소통을 모색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하다. 식구끼리도 충분히 다를 수 있고, 그건 틀린 게 아니니까. /김살로메(소설가)

2012-11-26

17세

열일곱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이다. 소통할 상대가 어른이라면 열일곱은 참 애매한 나이이다. 단독자로 뭔가를 요청하기엔 시건방져 보일까 걱정하고, 단체로 뭔가를 어필하기에도 반항끼 있어 보일까 애태우는 나이이다. 되바라지지 못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기성 사회에 편입하는 과정이 쑥스럽고 불편스럽기만 하다. 한 아이를 상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심각한 고민은 아니고,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적응기를 지켜봐주기만 하면 된다. 전형적 모범생인 그녀 고민의 예는 이런 거다. 배가 고파 분식점에 들어간다 치자. 왠지 자리에 앉아 음식을 시키면 분식점 주인에게 버릇없게 보일까봐 스스로 주방까지 걸어가 조심스레 주문을 한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어른을 공경하라고 배웠고, 될 수 있으면 그녀 스스로도 모범생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으니까.그래놓고 본인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으면 괜찮다. 한데 뭔가 대접 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면 고민거리가 된다. 어른에게 모범생이고 싶은 욕구와 손님으로서 대접 받고 싶은 당당함이 상충한 것이다.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어른들에게 먹히는 것이 싫은데, 자신도 모르게 그들이 원하는 행동에 길들여져 버렸다.그래서 당당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부러 친구들과 삼겹살도 먹으러 가고, 물횟집에도 들러 본다. 뼈다귀해장국집 문도 열어 보고, 피자집에도 주문 전화를 넣어본다. 의연하게 소비자 역할을 시도해 본다. 의외로 아무렇지 않다. 어느 누구도 당당한 소비자 연습을 하는 열일곱을 질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어렵기만 하다면 그건 기성 사회의 잘못이다. 어른처럼 당당한 열입곱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억압된 위선의 부산물이 모범으로 비칠 수 있는 사회라면 그건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열일곱 살 그들에게 자연스런 당당함을 연습시키는 건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의연한 소통 방식을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그것은 플라톤을 배우고 공자를 익히는 것만큼 연습이 필요한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3

시집 읽기

인터넷 서점을 클릭하면 서재 코너가 있다. 누구나 원하면 자신만의 서재를 가질 수 있다. 그 서재의 여러 역할 중 가장 매력적인 것은 누구나 그곳에 독후감을 올릴 수 있다는 거다. 한데 그곳을 들락거리면서 의아했던 점은 타 분야에 비해 시집 리뷰가 드물다는 것이다. 인터넷 서재를 벗어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 문학 사이트나 개인 블로그에는 그야말로 시가 넘쳐 난다. 우리나라엔 시인만 해도 삼만 명이 넘는다니 그럴 만도 하다. 시인이 많은 나라이니 시집을 읽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들이 감상문을 올린다면 긴 글에 비해 더 많은 편수가 인터넷 서재에 등록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시집 리뷰가 드문 건, 시를 자기 식으로 해설한다는 게 쉽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온다. 예비 문학도들이 가장 예민해질 시기이다. 젊은 시절부터 신춘문예 당선시집은 웬만하면 사 모았다. 당선시들 중 내 취향에 맞는 작품들을 만나면 심사위원께 큰절을 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쩜 이리 탁월한 선택을 했을까 싶어서다. 풀썩이는 맘 자락에 단비를 주는 시를 발견하는 시안(詩眼)이라니.나아가 어쩌면 나도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늠해보곤 했다. 작은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절로 써지는 거다. 한마디로 그분이 오셔야 된다.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진 시인은 시인이라 불릴 수는 있겠지만 진짜 시인은 아니다.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생래적 시인이 못되는 사람은 좋은 시를 찾아 감상하면 된다. 시작의 고통을 덜 수 있는데다 영혼의 요기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데 요즘 유행하는 시들을 곁에 두고 읽자니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천상 시인인 사람들이 사라졌을 리는 없다. 문제는 내게 있다. 참신하고 재기발랄한 시들을 접수하기엔 내 문학적 상상력이 너무 늙어 버렸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2

모성 본능

가끔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다. 결혼했다는 것과 남편이 있다는 것까지는 입력이 되는데 `엄마`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루 종일 뭔가 얽힌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긴 하다. 그것이 자식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면 좋겠는데, 엉뚱한 사유들 때문이니 그게 문제다. 언제나 개별자로서의 자아가 모성을 가진 자로서의 나를 앞선다. 보통 `엄마`라면 어떤 상황에 있건 자식 생각이 우선이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족쇄가 되니, 한 번쯤 아이들에게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기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나는 엄마라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딸이나 아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그제야 아참, 내가 엄마였지, 하고 당혹해한다.아이들이 아프다고 하면 그 순간은 진심으로 맘이 짠하다. 그 맘이 하루 종일 지속되면 좋으련만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밤늦게 걱정하는 남편을 보고서야 화들짝 놀라 자책한다. 이쯤 되면 혼란스럽긴 하다. 내게 모성이 없는 걸까? 모성은 본능일까, 아니면 사회화 과정의 산물일까?스스로 생각해도 나는 살갑게 챙기고 알뜰히 보살피는 모성지상주의자는 아니다. 방임을 가장한 허용적인 엄마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시쳇말로 쿨한 척하는 엄마이다. 자식에게 밀착하지도 집착하지도 않는다. 엄마가 이래도 되나 싶을 때도 있다. 모름지기 엄마라면 그 무엇보다 자식을 최상의 자리에 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혼란이 오기도 한다.하지만 스스로 얻은 결론은 결코 나는 모성이 없는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사실. 모성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사회가 정해놓은 방식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고 모성이 없는 건 아니다. 모성을 천성이나 운명의 자리로 묶어두려는 사회적 억압 구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내 모성을 의심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성 신화를 버리고서야 다양한 모성 모델이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21

마들렌느 과자

학창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였다. 속지에 담긴 작가의 사진을 칼로 오려 간직한 적이 있다. 오늘 신문에서 나보다 더한 사람을 보았다. 고종석 작가의 고백인데 젊은 날 헌책방에서 책을 훔친 적이 제법 있단다. 강도 높은 고백인데, 당시엔 죄책감도 없었다나. 작가는 헌책방 주인을 계급의식 관점으로 본 듯하다. 싸게 손에 넣어 비싼 값으로 팔았을 터이니, 가난한 학생이 평생 대여(?) 좀 한들 어떠리, 하는 맘이었던 것 같다. 책 안의 주요 정보를 개인의 욕심 때문에 독점하는 행위는 부도덕하다 못해 파렴치하다.하지만 그 치기 역시 책에서 배웠으므로 내 죄 역시 반감돼야 마땅하다! 그 시절, 설익은 청춘들의 감성을 쥐락펴락했던 전혜린이란 에세이스트가 있었다. 그가 독일 유학시절 필요한 자료를 도서관에서 슬쩍해왔다는 고백을 읽으면서 나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때 오린 사진이 프루스트였다. 자책감보다 더한 치기어린 만족감이 있었음을 나도 고백해야겠다.하지만 빌린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작가 사진만 불법으로 쟁취한, 못다 읽은 책으로 남고 말았다. 한 마디로 지겨웠다. 만연체 문체 때문이었다. 끝날 줄 모르는 접속사로 이루어진 복문은 독자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한데 만화로 된 그 책이 있다는 걸 알았다. 당장 샀다. 그 유명한 장면인 마들렌느와 홍차 부분에서 마들렌느 과자 모양이 무척 궁금했다.홍차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식탁. 왼쪽 손에 홍차 한 스푼을 뜬 마르셀은 콧수염 가까이 들이대고 그 향을 음미한다. 접시에 놓인 마들렌느 과자 한 조각을 떼어 스푼 속 홍차에 찍는다. 그 순간, 온갖 오감이 발동해 마르셀은 의식의 흐름 여행을 하게 된다.만화로 된 이 책만으로도 프루스트를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단, 빌린 책이라면 마들렌느 과자 실체를 확인하고 그 모양이 탐나더라도, 절대 칼로 오리는 행위는 삼갈 것. 책 귀한 시대는 지났으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