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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열정이 중요해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시골에서는 피아노 교습소가 있는지도 몰랐다. 고작해야 어깨너머로 배운 풍금으로 기본 화음을 넣어 `꽃밭에서` 정도를 치는 정도였다.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도시로 나왔을 때는 한 반에 예닐곱 정도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 같았다. 역시 부러웠다. 하지만 한 번도 부모님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웃자란 눈치가 알아서 욕망을 제어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건 관심과 열정 부족 때문이었다. 간절히 바랐다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다른 길도 있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 경제력이 확보되었을 때라도 배우면 그만이었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그 환경을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간절히, 열렬히 원하면 이루게 되어 있다. 그 가난하던 시절, 열성적인 남자 동창은 엄마를 졸라 피아노를 배웠고, 끝내 성악가가 되었다. 진실로 원한다면 환경은 문제가 될 수 없다.그렇더라도 그 옛날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하고 싶었던 걸 못했다는 소리를 자식에겐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방학 중인 아들녀석이 무에타이와 드럼, 영어와 일어를 배우고, 여행과 헬스도 하겠다고 했을 때 `무조건 오케이`라고 답했었다. 하지만 방학 전의 욕망은 다만 희망 사항이었을 뿐, 막상 아들은 그 어느 것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방구들 한 쪽을 차지하고 그 동안 못했던(?) 게임만 즐긴다. 그토록 원했던 건전한 활동(?)들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겨우 영어 공부한다고 제스처를 취하는데 마뜩잖기만 하다.언제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기 쉬운 게 사람이다. 간절함이 없는 시도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를 이루는 데는 환경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피아노를 끝내 배우지 못한 것은 부모 탓이 아니라, 내 바람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6

애도의 방식

누군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내가 아는 한 그미는 효녀였다. 오랜 병구완을 한 이도, 임종을 지킨 이도 그미였다. 나는 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 곁에서 이미 숱하게 울었기 때문에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 눈물과 애도는 크게 상관이 없다.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애도가 깊은 것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애도가 얕은 것도 아니다. 애도의 양상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애도란 그 대상과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심리적, 정서적 상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도 단상집이다. 사진으로 어머니를 추억한 `밝은 방`을 읽었을 때 이상으로 신선한 충격이다. 스물셋에 전쟁 과부가 되어 일흔넷에 죽은, 그의 모든 것이었을 어머니를 작가는 애도한다. 노트 네 조각 낸 메모지에다 마음 깊이 어머니에 대한 단상을 이어간다. 2 년에 걸친 그의 일기는 어머니에게 다가가고자하는 작가의 내밀한 어록이다.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형태의 문학적 완성품을 생각하면서 메모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 글이 문학이 될까봐 경계하다가도 결국 문학이 될 거라는 모순을 예감하기도 한다.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라고 적는다.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애도일기는 문학적 성과물로 재탄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한 가지 안심인 것은 애도일기가 그 어떤 다른 형태의 문학 작품으로 가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죽음이 앞당겨지지 않았더라면 그의 애도 일기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이 되는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문학작품보다 때로는 날것의 육성이 더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 온전히 일기로만 살아남은 애도일기를 읽는 것은 독자로서는 행운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5

안케도 알지요?

▲ 이경우 편집국장제 18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11일 중소기업청의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정권 인수 수순을 밟아가자 이 지역 민심이 바닥부터 서서히 부글부글 끓고 있다. 도대체 80-80(투표율 80%와 득표율 80%)의 대가가 뭐냐는 것이다.새정부 출범의 막중한 임무를 맡은 인수위에 지역 인사들의 참여가 예상외로 저조하자 나온 여론이다. 물론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기간은 물론 당선 후에도 인선 기준으로 `대탕평`과 `국민대통합`을 강조했다. 청와대와 정부 조각 등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러나 대선에서 보여준 지역의 역할을 생각하면 예상을 너무나 벗어나는 초라한 성적표라는 불만이다.박 당선인은 지난 1998년 15대 총선 당시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부터 지난해 4월 19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그동안 `선거의 여왕`으로 불릴 정도로 선거에서 초능력을 발휘한 박 당선인은 선거때면 정작 당신의 지역구보다는 늘 다른 후보 지원유세에 열중했다. 선거 뒤면 지역민들은 “우리가 무엇을 보고 박 당선인을 선택했는지 박 당선인도 알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적어도 당선인이 지역민들에게 심적 부채의식은 갖고 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다.박 당선인은 국회의원시절 지역구였던 달성군에 선거 때나 신년교례회 등 행사가 있을 때 찾긴 했지만 공식 일정을 마치면 곧장 숙소에서 칩거 상태에 들었다는 것이 지역 기자들의 전언이다. 물론 기자들과 식사를 한다거나 별다른 소통이 없었다고 한다. 지역민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무관심한 사촌`이었다. 지역의 한 서울주재 정치부 기자는 국회의원 박근혜를 직접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물론, 전화 통화조차도 어려웠다고 실토한다.박 당선인이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에 무관심했다는 지역민들의 반응과는 달리 지역구의 현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많이 챙겼다는 것이 당 쪽의 해명이다. 역사를 가정할 수는 없지만 지역 일각의 “다른 후보를 선택했더라면 달성군 발전을 10년은 앞당겼을 것”이란 비난을 해명하면서다. 지금 달성군은 대구의 과학전진기지로 부상하고 있다. 현풍면에 1조9천억원이 투입된 대구테크노폴리스가 올 6월 완공되고 구지면에는 1조7천억원이 투입되는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조성중이다. 문희갑 전 대구시장 당시 큰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긴 하지만 달성군에 엄청난 예산이 퍼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포항지역이 굵직굵직한 국책 사업들을 많이 펴고 있는 데는 현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 이상득 전 의원의 공이 절대적이란 사실은 다 아는 비밀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에서조차 “형님 덕분에 포항이 상대적으로 역차별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중앙에서 포항의 현안을 설명하고 예산을 챙기려 했다가도 야당의 `형님예산`이라는 한 마디에 모든 공작들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얘기다. 차라리 선거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떳떳이 포항 몫을 챙겼을 것이라는 욕심에서일 것이다.박근혜 당선인은 후보시절 지역 언론사 간부들과 식사를 하면서 지역 표심을 “안케도 알제”라고 표현했다. “말 안해도 속으로 모두 공감하는 박 당선인에 대한 지지”가 표로 연결된 것이 이번 대선의 결과였다. 그 표심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 시절, 비록 당신의 지역구는 팽개쳐놓고 남의 선거 지원유세를 벌였더라도 예산에서는 지역구를 챙겼다고 지역민들은 믿고 싶어한다.비록 인수위와 정부 조각 등에서 지역 인사를 배제하더라도 박 당선인이 지역 현안만은 챙겨 줄 것이라 지역민들은 기대한다. 그것이 지역민들에게는 특정인을 청와대나 정부 고위층으로 뽑아올려 출세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지역민들은 당선인이 “안케도 알제”를 배신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것이 무관심한 사촌에서 옆집으로 이사온 사촌이 되는 길이고 심적 부채를 청산하는 방법이다.

2013-01-14

오랜 강도 흐른다

그 여자 까칠하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착하디착한 남편에게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답례를 할 겨를도 없이 남편은 저 세상으로 떠났다. 대범하고, 빈정대는 이면에 여리고 따스한 여자는 그 성격대로,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 여자에게 남편의 죽음보다 더한 슬픔은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무관심이다. 우울증 앓는 아들은 재혼한 아내와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담당의는 이 모든 상처는 엄마로부터 기인한다는 진단을 내린다. 여자의 악다구니, 매질, 냉소적 태도가 아들의 트라우마가 될 줄 그때는 아들도 엄마도 알지 못했다.우연한 계기로 여자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하버드대 출신의 남자는 잘난 척에다 오만한 것으로 마을엔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데이트를 거듭할수록 남자에게 끌린다. 단 한 번도 그 잘난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걸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역시 겪어보지 않은 모든 것에는 판단 유보가 필요해, 라고 여자는 중얼거린다. 동성애자인 딸과 절연한 사연을 털어놓는 남자에게 여자는 깊이 공감한다. 여자 또한 삐걱대는 모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던가.여자의 유일한 희망은 죽을 때 숨이 금세 끊어지기를 바라는 일. 남편의 죽음과 희망 없는 아들과의 관계 앞에서 그녀가 바라는 건 그 뿐. 하지만 남자를 만날수록 생의 활기를 얻는 것은 어쩔 것인가. 의외로 보수적 정치 성향인 남자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아픈 남자가 여자를 기다릴 땐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정서적 심리적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노년의 남녀 눈빛은 적요하고 따스하다.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은 두 손이 필요한 것. 여자는 아직은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다. 늙은 소도 쟁기질 할 수 있고, 오랜 강은 안으로 깊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여자 나이는 일흔 넷이고, 이름은 올리브 키터리지. 통찰 깊은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동명 소설의 주인공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1

머그컵 철학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그 주체와 대상은 오직 `나`에 관한 것이었다.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을 대표하는 이 명제는 모든 생각을 `나`란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전제한다. 그 사유 안에는 타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내 문제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타자를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느라 타자로까지 사유 영역을 넓히지는 못했다. 이러한 자아 귀환형 외곬 사유가 전체주의를 낳았다고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편협한 전체성을 낳는 자아와는 별개로, 타자는 운명적으로 무한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와 무한`이란 개념으로 정리했다. 타자의 무한성은 결코 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나의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그 타자를 나비 잡듯이 내 손아귀에 넣겠다는 그 지점에서 세계관은 충돌한다.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지인의 집들이 선물로 영국제 찻잔을 사들고 간다 치자. 그 집의 주방엔 사은품으로 받았음직한 머그컵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다. 사은품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 머그컵이 우아하거나 고급스러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해 집주인은 그 컵을 애용한다. 한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 온 찻잔으로 바꿔. 하기야 이 유명 브랜드 찻잔을 알기나 하겠어?이 경우 영국제 찻잔의 우위성에 점수를 주는 `나`의 전체성은 사은품 머그컵을 애용하는`타자`의 무한성을 침범한 경우가 되겠다.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면 브랜드 찻잔과 실용성 머그컵 사이는 취향의 차이 딱 그만큼이다. 한데 존재론적 전체성에 함몰된 우리는 내 영역 밖의 타자에게 내 식으로 문화 코드를 바꾸라고 충고하고 무시한다. 엄연한 폭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에 의하면 윤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물론 여기서 윤리란 타자 앞에서 갖춰야 할 `나`의 도덕관을 말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10

자기계발서의 힘

관심 끄는 자기계발서 한 권을 만났다. 반값 판매 도서를 사면서 함께 주문했던 책인데 `마흔, 당신의 책을 써라`이다. 저자 김태광은 솔직히 처음 들어본다. 첫 책을 낸 이래 몇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냈단다. 마흔이 되기 전에 110권의 책을 써 기네스북에도 등재가 되었다나. 수많은 그의 책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은 무척 고무적이다. 독자의 나태한 생활을 질타하고 정신무장을 독려한다. 시간이 나야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내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돼야 책을 내는 게 아니라, 책을 내야 작가가 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글에 미친 사람들의 특징은 글 관련 이외의 활동에는 자제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글쓰기, 강연, 글 가르치기, 독서 외에는 그 어떤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나처럼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거나 술잔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자아실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게으름과 핑계란다. 성공하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할 수밖에 없다.일상이 평화롭기만 하거나 성공할 마음이 없는 사람, 성공했거나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 등은 자기계발서가 별로 필요치 않다. 춥고, 배고프고, 열망하는 자들만이 자기계발서를 펼친다.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계발서 한 권 쯤은 읽어도 좋을 계절이다. 앞서 욕망을 실현한 사람들이 보내는 채찍과 동기부여에 조금이나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여기서 잠깐, 자기계발서 작가들엔 두 부류가 있다. 성공해서 책을 낸 부류와, 성공하기 위해서 책을 낸 부류. 김태광 작가는 후자이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아리송하긴 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서의 현실적 목적은 물리적 성공이고, 궁극적 목적은 자아실현이니 독자로서 둘 다 옳다고 해두자.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두 그룹 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본받을 만하지 않은가. 자기계발서는 책 내용보다 그 저자의 정신력을 눈여겨볼 때 더욱 유익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9

에포닌의 바리케이드

모든 혁명은 미완이다. 영원히 성공한 혁명이라는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다. 혁명의 속성은 지속적인데다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혁명은 일어나고, 누군가는 혁명을 꿈꾼다. 혁명은 민중들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낭만적 자기 구원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실패한 혁명인 1832년의 공화파 청년들의 봉기 사건을 소설적 모티프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 열풍에 편승해 최근 개봉한 영화와 국산 뮤지컬 둘 다를 보았다. 수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이 가지만 감정이입이 가장 잘 되는 인물은 단연 에포닌이었다. 그녀는 짝사랑하는 마리우스를 대신해 죽음을 자처한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애도는 애석하게도 인간애적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맘에 코제트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 간의 사랑이 될 수 없었던 것. 영화와 뮤지컬에서 에포닌의 경우, 지고지순한 사랑과 희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설과 달리 아무래도 감동을 얻어내기 위해 미적 장치를 극대화 한 것 같다.혁명과 사랑을 동시에 꿈꿨던 에포닌이란 바리케이드가 없었다면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이루어졌을까. `불쌍한 사람들`의 대표 아바타이자 장발장의 마스코트인 코제트 보다 에포닌에게 더 눈길이 가는 건 그녀의 캐릭터야말로 아름다운 민중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높은 곳의 생각이 아니라 낮은 곳의 행동으로 그 임무가 완수된다. 혁명과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으면서도 그걸 최대의 행복이라 여긴 에포닌을 충분히 애도해주고 싶다.비가 오면 도로는 은빛으로 반짝일 테고, 강물엔 도시 불빛이 아롱진다. 별빛에 나무는 빛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에포닌은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에포닌의 상상일 뿐, 세상은 낯설고 마리우스는 잘 살 것이며 혁명 또한 계속 될 것이다. 죽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빗속 아리아 `on my own`이 계속해서 환청으로 들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8

나목에 걸린 인형

간만에 친구랑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식당 안은 한갓졌다. 방학인데다 한파까지 이어져 나 같은 아줌마들이 칩거를 하는 바람에 그런 모양이었다. 서너 테이블 밖에 안 되는 손님들은 그나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근데 좀 전부터 가족끼리 온 옆 좌석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티 나게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여자는 불편한 눈빛이 역력했고, 뒷모습만 보이는 자녀 둘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접시에 박고 포크질을 한다. 남자는 꽁한 얼굴로 제 앞의 접시를 여자 쪽으로 밀어낸다. 건너오는 말을 조합하자면 남자는 무슨 일로 조금 늦게 합류한 것 같았다. 아이들 식성에 따라 여자가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늦게 온 남자는 그게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 하니 고역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접시를 남자 쪽으로 다시 밀어주자 남자는 곁가지로 나온 밥만 시위하듯 먹기 시작한다.저 식구는 왜 레스토랑에 왔을까? 처음부터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종업원이 우리한테도 그랬듯이 은근히 같은 메뉴를 주문하기를 권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바람에 여자는 메뉴를 통일했을 수도 있겠다. 남자도 그렇지. 이왕 그렇게 된 것 자식들과 여자를 위해 즐겁게 먹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주눅 든 채로 어린 아이들이 음식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리다.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다. 육즙 반지르르한 스테이크가 차려지는데도 식욕이 돋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본다. 나목이 된 자작나무 가지에 바람에 실려 가던 것인지, 누군가 일부러 던진 것인지 모를 비닐 인형이 걸려 있다. 가려줄 잎 하나 없이 매달린 저 인형, 몹시 추워 보인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저 나목에 걸린 인형처럼 보인다. 덩달아 인형이 된 내 속내를 감추고자 친구 앞에서 퍼뜩 어색한 입 꼬리만 올린다. 겨울일수록, 추울수록 따습게 보듬어야 할 저마다의 인형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7

도덕 교육의 현실

유가 사상의 최대 목표는 체제 유지였다. 그 정당성을 부여 받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충효란 덕목이었다. 충효의 보조 항목으로서 예의와 도덕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 다시 말하면 예의와 도덕은 높은 자를 위한 헌사에 필요한 것이지, 낮은 자를 위한 배려로서 그리 매력적인 도구는 되지 못했다. 학교 현장에서의 도덕 교육도 그런 현실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김상봉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도덕 교육은 참된 자유인을 위한 게 아니라, 노예를 위한 그것이다. 체제 유지에 원활한 시민을 기르는 게 우리 도덕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김 교수는 우려한다. 자유와 개인적 가치, 세계관과의 갈등 등은 국가와 집단, 위계질서 앞에서는 언제나 나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의 예의와 도덕은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마땅한 종속의 액션이 되고 만다.창의력이 배제된 각종 국제 대회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고 있으니 불온하지만 우리 도덕 교육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권력자와 집단의 부당성은 힘없는 자와 개별자의 정당성 위에 군림한다. `몹쓸 놈, 예의도 모르는 자`는 약자에 해당되는 것이지 강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더 무서운 것은 약자이고, 피해자이던 그 길들여진 시민들이 집단이 될 때는 똑같이 권력자가 된다는 것이다.군 복무에 충실해야 할 유명 가수가 국민 미녀 배우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질투심에 불타는 군중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노예 교육에 길들어져왔는가는 깡그리 잊은 채, 그의 잦은 휴가에 대해 핏대를 올리게 된다. 연예 병사의 휴가 시스템이 어제 오늘 도마에 오른 것도 아니건만 집단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정당성과 도덕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곤 그 시스템과 개별자를 향해 분노한다. 하지만 그 집단이란 명분이 헛다리를 짚는데 더 재능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이것조차 착한 노예를 키우는 우리 도덕 교육의 병폐라면 너무 자조적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1-04

강 건너는 꽃잎처럼

꽃잎 한 장 저 먼 강을 건넜다. 가만 속울음만 내었다. 강 아주 건너기 전, 그 꽃잎의 숙명은 마을마다 웃음꽃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웃음보란 깃발을 단 나룻배가 강어귀마다 정박할 때 많은 들꽃들은 그 꽃잎이 내려놓을 웃음보따리보다 앞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잘 웃지 않던 꽃들도 그 꽃잎이 머무는 동안엔 콧잔등에 실팍한 주름 만들어가며 어금니가 보이도록 웃어젖히곤 했다. 꽃잎 한 장이 뿜어내는 웃음 바이러스에 모두 감염된 덕이었다. 그 꽃잎 이름은 황수관이다. 그의 추모 특집 방송을 보았다. 웃기 위해 천만 번쯤은 노력했을 그의 안면 근육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신바람 지수가 높아지면 가끔씩 호흡이 달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조차 물에 젖은 토란잎 같은 목소리가 되어 시청자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세 번만 생각하면 오해도 이해하게 되고, 두 번만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심오한 철학을 주는 강연이 아니라 생활 속의 짜릿한 발견을 주는 이런 말씀이 피로에 쌓인 나 같은 이에겐 무척 도움이 되었다.오늘만 해도 그렇다. 사진 한 장 편집하는데도 컴맹인지라 너무 자주 물으니 남편은 지쳐 나가 떨어졌고, 딸내미는 그나마 연민이 이는지 침착하게 다시 가르쳐 준다. 황 박사가 말했다. 늙은 부모가 까치란 새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세 번 되묻자, 아들은 `까치라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돼요?` 라고 쏘아 붙였다나. 하지만 그 아이 세 살 때, 스물 세 번이나 까치, 라는 새의 이름을 군말 없이 가르쳐준 이는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귀찮게 하는 자식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이가 부모인 것.황수관 박사의 이런 촌철살인하는 위트와 따뜻한 유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서럽다. 살짝 건네는 쪽지 같고, 걸터앉기 편한 의자 같던 웃음 전도사를 새해부터 추모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문태준의 시처럼 `나 혼자 꽃 진 자리에 남아 시원스레 잊지도 못하고` 며칠을 앓게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3

느낌표를 꿈꾸며

2013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귀밑머리 쓸어 넘기고 옷깃 여민 채 해를 맞는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우주의 붉은 기운이 서린다. 이른 빛은 언제나 아침노을로 먼저 오신다. 가까운 바다 냄새와 먼 산을 배경으로 마침내 태양이 그 위용을 드러냈을 땐 눈물이 핑 돈다. 어느 새해 아침을 이토록 경건하게 맞이한 적 있었던가. 비의를 품은 듯, 신비함을 실은 듯 새 아침의 아우라는 제 존재를 충분히 발산했고, 모든 물상들은 평화로운 풍경이 되어 그 빛을 수렴하고 있었다. 해가 솟자마자 교교했던 아침은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그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언제 솟는 해를 기다렸냐는 듯 환하고 밝은 기운이 금세 세상을 점령하고 만다.내 온몸의 기를 풀어 둥근 해에 의탁한다. 저 새 빛, 가슴을 데우는 메아리 같은 말씀으로 화하기를 기도한다. 새해에는 느낌표 같은 날들이 많아지기를.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날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하는 가운데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고 싶고, 희망하는 가운데도 그 살아있음이 배가되는 날을 꿈꾼다. 눈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눈 감고 있다고 못 보는 것도 아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감을 열어보겠다. 기왕이면 가슴에다 감수성의 손길을 오래 머물게 하겠다. 그리하여 대상마다 고귀한 느낌표 하나씩을 달아주겠다. 내 무딘 감각의 어혈이 풀려 이제껏 보아온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제대로 된 느낌표를 얻기 위해 한 호흡마다 말줄임표 하나씩도 분양 받으련다. 누웠던 감흥들이 느낌표로 살아나려면 진중한 사색의 낯빛도 필요하겠다. 숨어 희생하는 말줄임표를 빌려 꿈틀거리는 많은 느낌표를 건져 올리겠다. 따옴표나 의문부호는 잠시 미뤄두겠다. 숱한 말들의 희롱이거나 잔치일 따옴표 대신, 느낌표의 극대화에 이바지할 말줄임표 하나만 벽에 붙여두겠다. 쌈박한 느낌표를 갈망하는 새해 아침 설레기만 한다. 아직은 꿈꿔도 좋을 새해인데다 일출을 본 덕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1-02

한 해를 꾸린 것

바래지는 풀잎처럼, 스러지는 눈발처럼 또 한 해를 보낸다. 저리고 아쉽기만 한 나날들. 새해 아침이 밝아오면 달뜬 나머지 희망의 단춧구멍을 터무니없이 넓게 뚫는다. 옷의 종류나 활용도 등은 고려치 않고, 일단 계획이란 단춧구멍부터 뻥 뚫어버린다. 구멍에 맞는 단추를 찾아, 온 열두 달을 헤맸지만 끝내 제대로 된 것 하나 구하지 못했다. 한 해의 끝, 큰 구멍에 맞지도 않는, 자그맣고 어설픈 단추 몇 개만 구한 꼴이다. 해마다 거창한 계획에 미미한 결과라니! 계획 실천 유무를 따지는 연말이라면 안 그래도 치운 가슴 더욱 찬바람만 들겠다. 해서 내 곁을 맴돌던 두 단어를 떠올리면서 한해를 마무리해야겠다. 우선 `힐링`이란 말을 되뇐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 둘 곳 많지 않아 우왕좌왕한다. 당신과 나, 툭 터놓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외롭고, 어디서나 힘들다. 무엇을 하든 상처 받기 쉽고, 언제나 마음은 흔들린다. 이런 나약한 속성을 지닌 우리에게 필요한 게 치유의 연대감이다. 위로의 주체이자 대상인 개별자끼리 공감하다 보면 진심으로 치유에 맞닿게 된다. 힐링은 연대의 감정이지 폐쇄적 구원은 아니다. 골방의 치유보단 사람 곁이 한결 낫다. 상처이지만 이내 구원이기도 한 사람, 그 자체가 내겐 힐링이었다.`깨달음`도 있다. 생활의 발견이랄까. 깨알 같고 바람결 같은 생각들이 내면을 키운다는 것을 알았다. 소박한 깨침이 온 우주를 들썩이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줄 때가 있다. 생의 근원을 뒤바꿀 수 있는 큰 깨달음보다 제비꽃 같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발견이 더 감동스런 법이다. 지면 상 다 얘기할 순 없지만,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보듬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베풀라고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준 이들께 감사한다. 잡다한 생각들이 온몸과 마음을 휘감을 때 저릿하고 따뜻한 그들의 한 호흡을 떠올린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내 부실한 나무뿌리를 슬쩍슬쩍 다독여준 모든 이에게 감사장을 대신한다. 내 어설픈 한 해가 감사로 아롱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31

아들과 어머니

한 어머니, 아들 전화 받고 서울 나들이 가신다. 임신한 며느리 힘드니 아이 둘을 보살펴 달라는 요청이다. 고향 떠나 사흘 밤도 잔 적 없는 어머니, 난생 처음 일주일 예상으로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아들의 핏줄이 아닌, 며느리가 데리고 온 두 아이가`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옛날 수학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동료 교사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아들에게 자주 신경질을 냈다. 잘못했다는 소리를 절대 하지 않는 어머니는 아들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것도, 그 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도 다 어머니 탓이다. 이혼 전문 사교 모임에서 두 번째 아내를 만났고, 상처 많은 두 영혼은 상담의사의 도움으로 정신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상담의를 따라 서울로 이사 갔을까.어머니, 사흘 만에 짐을 싸신다.`할머니`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들의 냉정한 시선 때문도, 며느리의 맹한 태도 때문도 아니다. 어머니를 서울로 오게 한 아들의 진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들 부부는 `용서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머니를 초대했던 것이다. 심리 치료 모임에서 의사 앞에서 이 모든 걸 재연할 아들에게 분노가 인다. 아들의 트라우마 극복 미션에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수치심에 어머니는 치를 떤다. 여기 나오는 어머니는 소설`올리브 키터리지`에서 뉴욕 가는 올리브의 서울 행 버전이다.용서에 대해 생각한다. 용서하거나 용서받는다는 건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용서하는 자는 준비가 필요하고, 용서 받는 쪽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편하고자 성급히 용서를 바라도 안 되고,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섣불리 그것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급하면 체한다. 주고받는 용서의 방식은 어느 누구의 일방적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상호 합의에 도달했을 때 가장 명쾌하다. 당사자 둘 다 만족하는 이기심이어야 하는 용서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시간만이 그것을 해결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28

이제 집으로 갑니다

깊은 밤 자다가 깨면 무심코 텔레비전을 켠다. 다시 잠들 때까지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데 며칠 전 새벽에 본 고공 자유낙하 다큐멘터리는 무척 강렬해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한 번 만났을 뿐인데도 치명적인 매혹을 주는 그런 사람을 만난 느낌이랄까. 지난 10월 오스트리아인 펠릭스 바움가르트너는 고도 39킬로미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헬륨 가스 기구에 달린 캡슐을 타고 지구 성층권까지 올라가 단숨에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기압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펠릭스의 눈빛이 두어 번 흔들리긴 했다. 지상 관제소에서는 펠릭스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려줬다. 인류 최초의 높이에서 점프하기에 도전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는 펠릭스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마침내 초정밀 우주복을 입은 그가 캡슐 문을 열고 까마득한 지상을 향해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높은 곳에 올라와 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 이 멋진 한 마디와 함께 캡슐에서 뛰어내렸다. 자유낙하는 거침이 없었고 수초 만에 음속을 돌파했다. 최대 낙하 시속은 1100킬로미터가 넘었다. 낙하 초반, 의식을 잃고 마치 바람에 종잇장이 흔들리듯 펠릭스의 몸이 이리저리 허공을 휘돌기도 했다. 하지만 뉴멕시코주 한 사막에 허무할 정도로 안착했다.극한 도전 중에 하나인 고공 점프를 생각해내고 실천한 인간 의지력에 무한한 경외심이 인다. 작은 일에도 힘겨워하고, 어려워하고, 마침내 포기하기 일쑤인 스스로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높고 넓은 무대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평소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인간사 아귀다툼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따라서 내 삶의 현재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느낀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의 근원을 찾아 지상 최대 낙하를 꿈꾸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 - `나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27

고랑과 이랑

누군가가 쓴 텃밭이란 제목의 글을 합평하는 자리에서였다. 평소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 글 자체에 대해서 조언을 할 만한 것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글을 계기로 농사 관련 단어 몇 개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서 유익한 날이었다. 먼저 `사래`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 궁금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남구만의 그 유명한 시조에 나오는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할 때 나오는 그 말이다.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랑의 길이`나 `이랑의 옛말`을 일컫는단다.`사래 긴 밭`이란 관용구가 예문으로 쓰이는 걸로 보아 `사래`는 이랑이 좀 길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란 걸 알겠다.그 다음 자연스럽게 `이랑`과 `고랑`에 대한 차례가 되었다. 차고 넘치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던 용어였다. 이랑은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두둑`을 일컫는 말이고, 고랑은 `두둑한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 이랑에 상대한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그제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해풍에 일렁이던 보리밭에도, 무서리 맞으며 단단해지던 배추밭에도 이랑과 고랑은 있었다. 다만 농사를 모르니 한 번도 그걸 의식해본 적이 없었을 뿐. 배수와 통풍의 길인 고랑이 없다면 씨앗과 열매의 길인 이랑도 보장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농사라면 고랑 없는 이랑도, 이랑 없는 고랑도 없다. 둘이 맞물려야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그러니 지금 처한 상황이 고랑이라고 의기소침할 일도, 이랑이라고 의기양양할 일도 아니다. 이듬해 이른 봄, 밭갈이 한 번이면 기왕의 이랑과 고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새로운 이랑과 고랑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현명한 조상들은 이런 속담을 남기지 않았던가. `고랑도 이랑 될 날 있다.`고.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고. 이 한 밤, 이랑 드높이기 위해 저마다의 고랑에서 숭고한 호미질을 하고 있을 모든 이에게 평화가!/김살로메(소설가)

2012-12-26

유진의 골목

1985년 생 유진은 달동네 골목 돌담에 엄마랑 서 있다. 1960년대 산(産)인 유진엄마의 이름은 `말숙` 또는 `복남` 같은 것일 게다. 엄마의 트레이닝복 무릎은 낡고 불룩하다. 무심한 햇살은 애완견에다 그늘 한 번 드리우고, 서울 중림동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유달리 하얀 엄마의 손등에 가서 박힌다. 미간이 넓은 네 살의 유진은 `짜가`상표가 붙은 엄마 바짓단에 매달려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그 골목의 사진 한 장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열두 살에 도시로 떼밀려왔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우주 빅뱅 그 이상이었다. 이사 간 동네는 당시로서는 신도시였다. 넓은 골목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아스팔트 위에다 분필로 모형을 그리고 돌차기 놀이를 했다. 맨땅이 익숙한 나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고무줄놀이도, 돌차기도 내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생경하기만 했다.문화충격은 위로부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난한 도시 골목은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골에서는 아예 골목이란 개념이 없었다. 여러 집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도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 역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히 비루하거나 남루하다는 느낌 없이 시골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부르주아였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 골목에서는 삶의 신산한 냄새들과 소리들이 지글거렸다. 아스팔트 골목과는 다른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계급의식 같은 걸 자각한 것 같다.유진은 3,4년 간격으로 세 번 더 골목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지막 사진은 일산의 어느 아파트 앞일 수도 있겠다. 남루한 도시 뒷골목을 떠나 번듯한 아파트 청소년으로 자랐다. 유진의 골목 찰나를 끈덕지게 따라잡은 이는 김기찬이다. 그의 두꺼운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에는 수십 명의 유진들이 나온다. 비리고, 질퍽이는 삶에서 순간의 미소를 찾으려는 누군가에게 이 사진집은 서럽고 따가운 위안이 돼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24

데이지꽃이 전하는 말

좋아하는 꽃 중에`데이지`가 있다. 색깔별로 키우던 데이지를 누군가의 창 앞에 놓아주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까만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소박한 데이지를 보기 위해 봄이면 화원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창문 앞에 놓인 적 없는 나만의 데이지였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환상을 유지함으로써 실체를 맛보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데이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못 다한 혼자만의 데이지꽃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저 먼 언덕에 파수꾼이 있었지. 호밀밭 가장자리엔 데이지 만발하겠지. 어린아이는 언제나 언덕을 향해 비행기를 날리곤 했어. 해풍 부는 언덕을 향해 머릿결을 쓸어 올리거나, 덧니가 드러나도록 순진무구한 미소를 날리곤 했지. 파수꾼은 행복했지. 어느 날 지천으로 피어난 데이지를 뜯어 파수꾼은 어린아이에게 건넸지. 꺾인 데이지꽃다발을 보고 어린아이는 파랗게 질려 울음을 터뜨렸지. 어린아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린 대상은 파수꾼이 아니었어.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아득히 일렁이는 데이지 잔물결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비행기라도 날려 응원하고픈 맘뿐이었거든. 하지만 파수꾼은 어린아이의 작은 몸짓, 환한 미소가 자신을 향했던 거라고 착각했던 거지.언제나 환상과 실체의 경계에서 우리 삶은 진행된다. 그 둘은 눈곱만큼의 교집합도 이루지 않을 때에만 서로의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환상이 내 생각대로 남아줄 때까지만 활력이 되고 믿음을 준다. 데이지는 저 먼 언덕 끝에서 바람에 살랑일 때 아름답고,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는 파수꾼 자신을 향한 것일 때에만 행복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상은 언젠가는 실체라는 자명한 괴물 앞에 무너지게 돼 있다.착각에 빠져 있으면 미욱한 일상이 따르고, 실체에 놀라면 피폐해진 영혼이 날을 세운다. 환상과 실체 그 경계를 넘나드느라 까진 무릎의 생채기가 오늘 따라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으련다. 데이지꽃이 전하는 말은 `희망과 평화`이려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21

스펙 또는 휴학

매일 짧은 생각 하나씩을 글로 옮긴다는 게 쉽지는 않다. 이런 내 맘을 읽었는지 딸내미가 말한다. `휴학`에 대해서 한 번 써보란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차안에서 딸내미와 입씨름 한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 졸업하기 전에 한 번 이상은 휴학을 한다나. 자신도 그러고 싶다는 우회적 표현임을 금세 알아차리겠다. 딸내미에게 고리타분한 기성세대로 비치는 걸 원치 않지만 이럴 땐 나도 어쩔 수 없다. 학교를 쉬어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순간, 이미 딸내미의 표정은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학연수, 인턴, 봉사활동 등 스펙 쌓기란 이유로 대학가의 휴학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가고 있다. 취업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유예시키고, 공부만 하는 청춘을 잠시라도 놓아주고 싶은 욕구 때문이리라. 대학생이란 신분이 주는 암묵적 보호 그늘을 조금이라도 늘여 사회로 진출하는 시간을 그만큼 미루고 싶어 한다. 취업하기 어려운 이유가 가장 크겠고, 대체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세대라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성장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려 하는 것도 있다.상대적으로 덜 여문 이십대를 양산한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학력·학점·토익점수·어학연수·자격증 등으로 청춘을 줄 세우는 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줄을 늦게 서는 걸로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스펙은 이 땅을 사는 청춘들이 안아야 할 커다란 부담이다. 기기나 시스템의 성능 제반을 말할 때 씀직한 스펙이란 말이 인간에게도 접목되는 걸 보니 참으로 비인간적이라는 생각만 든다.인간 상세 설명서를 메우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더러 휴학까지 생각하는 청춘들에게 뾰족한 답을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계적인 이력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를 실현하기 위한 휴학이라면 백만 번이라도 좋으련만. 어미로서 할 수 있는 말이란 게 고작, 휴학은 안 돼, 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20

남당사(南塘詞) 16수

책을 읽을 때 나는 여성적 시각을 좀체 버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고전이 남성적 시각을 견지하는지라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변변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게 왜 그리도 안타까운지. 평소 여성이라서 맛보는 자부심보다 여성이기에 느끼는 피해의식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스밀 것이다. 요즘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다산의 소실이었던 남당포 여인 장면에서 또 연민이 인다. 다산의 유배 시절 뒤늦게 소실이 된 그미는 홍임을 낳고, 해배된 다산이 본가로 돌아갈 때 따라간다. 하지만 부인 홍씨에 의해 내침을 당하고 모녀는 강진으로 되돌아온다. 그 후 모녀의 삶도 평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홍임 모녀에 관한 시가 바로 `남당사 16수` 이다. 남당포에서 온 여인의 애상을 읊은 시인데 다산이 쓴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시편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홍임엄마가 되어 본다. 베 짜기와 바느질에 제대로 손댈 수 없다. 옷 입은 그대로 닭 울음 그치고서야 벽에 기대 혼자서 신음한다. 어린 홍임은 늙은 아비인 다산이 보고 싶어 보채다 곤히 잠들었을 것이다. 눈물로 얼룩져 화장은 엉망이 되고, 그리움에 진저리치다 보니 비녀마저 떨어져 있다. 긴 밤 지새다보면 다정한 낭군이 꿈속에나마 반쪽 침상을 찾아든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산의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데바람에 오래 떤 여성의 시각으로 보면 다산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부인 홍씨는 왜 오랜 세월 기다린 보람도 없이 소실 때문에 맘고생 해야 하며, 홍임모 역시 무슨 죄로 그토록 모진 칼바람을 견뎌야만 했을까. 여성적 시각에서 다산을 둘러싼 일상사를 엮는다면 어떠할까. 깊은 우물 속 두레박을 내려도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차마 처연한 슬픔의 장이 되지 않을까. 한 남자 때문에, 한 세월 때문에 지난했을 세 여자를 그려본다. 마른 눈물이 난다. 할 수 없이 나도 여자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9

덕담의 효용

왜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아린 피멍을 느낄까. 왜 덤덤하기만 한 저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까. 왜 노래하는 저 파도가 내겐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칠까. 세상사 맘먹기 달렸다고? 그러니 뭐든지 담대하게 툭 털어버리라고? 그런 건 무책임한 말을 뱉고도 좋은 말을 했다는 뿌듯함을 얻고 싶은 자의 립 서비스일 뿐, 실제 소심하고 예민한 소시민인 우리는 그런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이 제일 힘겹고, 내가 당한 일들이 가장 분노할만하다고 단정 짓는다. 자학하거나 피해를 자청함으로서 자기위안을 얻으려한다. 우리 일상은 두루마리 휴지 풀리듯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실크 블라우스에 붙은 껌 딱지를 떼 내는 것처럼 성가시고 힘들 때가 더 잦다. 이미 이어온 날들은 불만족스럽기만 하고, 앞으로 이을 날들 역시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망설임과 회한의 기록들이다.이런 이야기가 기억난다. 부모를 여읜 청년이 돈 벌러 서울로 떠나기로 한다. 앞일이 걱정스러운 청년은 이장에게 덕담을 부탁한다. 서예에 능한 이장이 써준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였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두 마디면 충분한데 나머지 한 마디는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청년은 성공했지만 그건 자신의 참모습은 아니었다. 30년 전 그 이장을 다시 찾았다. 세상 뜬 이장이 남긴 나머지 덕담은 `후회하지 마라` 였다.두려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이 두 마디만 새겨도 덜 피곤한 삶이 펼쳐진단다. 하지만 여린 바람에도 잿빛 피멍을 느끼고, 무던한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발랄한 파도가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치는 날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 짧은 두 마디는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일 뿐이다. 두려워 망설이고, 건너고선 후회하는 게 인생의 강물 아니던가. 그래도 삶이란 동네엔 이장의 저런 덕담이 필요한 거다. 상처 많은 인간을 위한 덕담의 효용은 실천에 있는 게 아니라 위무에 있으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