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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포닌의 바리케이드

모든 혁명은 미완이다. 영원히 성공한 혁명이라는 건 애초에 있을 수 없다. 혁명의 속성은 지속적인데다 언제나 희생을 요구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혁명은 일어나고, 누군가는 혁명을 꿈꾼다. 혁명은 민중들 삶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낭만적 자기 구원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에서 실패한 혁명인 1832년의 공화파 청년들의 봉기 사건을 소설적 모티프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 열풍에 편승해 최근 개봉한 영화와 국산 뮤지컬 둘 다를 보았다. 수많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애정이 가지만 감정이입이 가장 잘 되는 인물은 단연 에포닌이었다. 그녀는 짝사랑하는 마리우스를 대신해 죽음을 자처한다. 하지만 마리우스의 애도는 애석하게도 인간애적 연민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맘에 코제트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 간의 사랑이 될 수 없었던 것. 영화와 뮤지컬에서 에포닌의 경우, 지고지순한 사랑과 희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설과 달리 아무래도 감동을 얻어내기 위해 미적 장치를 극대화 한 것 같다.혁명과 사랑을 동시에 꿈꿨던 에포닌이란 바리케이드가 없었다면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이 이루어졌을까. `불쌍한 사람들`의 대표 아바타이자 장발장의 마스코트인 코제트 보다 에포닌에게 더 눈길이 가는 건 그녀의 캐릭터야말로 아름다운 민중의 표본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높은 곳의 생각이 아니라 낮은 곳의 행동으로 그 임무가 완수된다. 혁명과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으면서도 그걸 최대의 행복이라 여긴 에포닌을 충분히 애도해주고 싶다.비가 오면 도로는 은빛으로 반짝일 테고, 강물엔 도시 불빛이 아롱진다. 별빛에 나무는 빛나고 아침이 올 때까지 에포닌은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에포닌의 상상일 뿐, 세상은 낯설고 마리우스는 잘 살 것이며 혁명 또한 계속 될 것이다. 죽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녀의 빗속 아리아 `on my own`이 계속해서 환청으로 들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8

나목에 걸린 인형

간만에 친구랑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였다. 식당 안은 한갓졌다. 방학인데다 한파까지 이어져 나 같은 아줌마들이 칩거를 하는 바람에 그런 모양이었다. 서너 테이블 밖에 안 되는 손님들은 그나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근데 좀 전부터 가족끼리 온 옆 좌석에 자꾸 신경이 쓰인다. 티 나게 냉랭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문한 음식을 앞에 두고 여자는 불편한 눈빛이 역력했고, 뒷모습만 보이는 자녀 둘은 어깨를 움츠린 채 고개를 접시에 박고 포크질을 한다. 남자는 꽁한 얼굴로 제 앞의 접시를 여자 쪽으로 밀어낸다. 건너오는 말을 조합하자면 남자는 무슨 일로 조금 늦게 합류한 것 같았다. 아이들 식성에 따라 여자가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늦게 온 남자는 그게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 하니 고역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접시를 남자 쪽으로 다시 밀어주자 남자는 곁가지로 나온 밥만 시위하듯 먹기 시작한다.저 식구는 왜 레스토랑에 왔을까? 처음부터 남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키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종업원이 우리한테도 그랬듯이 은근히 같은 메뉴를 주문하기를 권유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바람에 여자는 메뉴를 통일했을 수도 있겠다. 남자도 그렇지. 이왕 그렇게 된 것 자식들과 여자를 위해 즐겁게 먹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주눅 든 채로 어린 아이들이 음식에 코를 박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아리다.우리가 주문한 음식도 나왔다. 육즙 반지르르한 스테이크가 차려지는데도 식욕이 돋지 않는다. 창밖을 내다본다. 나목이 된 자작나무 가지에 바람에 실려 가던 것인지, 누군가 일부러 던진 것인지 모를 비닐 인형이 걸려 있다. 가려줄 잎 하나 없이 매달린 저 인형, 몹시 추워 보인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저 나목에 걸린 인형처럼 보인다. 덩달아 인형이 된 내 속내를 감추고자 친구 앞에서 퍼뜩 어색한 입 꼬리만 올린다. 겨울일수록, 추울수록 따습게 보듬어야 할 저마다의 인형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7

도덕 교육의 현실

유가 사상의 최대 목표는 체제 유지였다. 그 정당성을 부여 받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 충효란 덕목이었다. 충효의 보조 항목으로서 예의와 도덕이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논리였다. 다시 말하면 예의와 도덕은 높은 자를 위한 헌사에 필요한 것이지, 낮은 자를 위한 배려로서 그리 매력적인 도구는 되지 못했다. 학교 현장에서의 도덕 교육도 그런 현실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김상봉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도덕 교육은 참된 자유인을 위한 게 아니라, 노예를 위한 그것이다. 체제 유지에 원활한 시민을 기르는 게 우리 도덕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이 되어버렸다고 김 교수는 우려한다. 자유와 개인적 가치, 세계관과의 갈등 등은 국가와 집단, 위계질서 앞에서는 언제나 나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때의 예의와 도덕은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마땅한 종속의 액션이 되고 만다.창의력이 배제된 각종 국제 대회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고 있으니 불온하지만 우리 도덕 교육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권력자와 집단의 부당성은 힘없는 자와 개별자의 정당성 위에 군림한다. `몹쓸 놈, 예의도 모르는 자`는 약자에 해당되는 것이지 강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더 무서운 것은 약자이고, 피해자이던 그 길들여진 시민들이 집단이 될 때는 똑같이 권력자가 된다는 것이다.군 복무에 충실해야 할 유명 가수가 국민 미녀 배우와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질투심에 불타는 군중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노예 교육에 길들어져왔는가는 깡그리 잊은 채, 그의 잦은 휴가에 대해 핏대를 올리게 된다. 연예 병사의 휴가 시스템이 어제 오늘 도마에 오른 것도 아니건만 집단이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그 정당성과 도덕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곤 그 시스템과 개별자를 향해 분노한다. 하지만 그 집단이란 명분이 헛다리를 짚는데 더 재능을 발휘할 때가 많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 이것조차 착한 노예를 키우는 우리 도덕 교육의 병폐라면 너무 자조적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1-04

강 건너는 꽃잎처럼

꽃잎 한 장 저 먼 강을 건넜다. 가만 속울음만 내었다. 강 아주 건너기 전, 그 꽃잎의 숙명은 마을마다 웃음꽃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웃음보란 깃발을 단 나룻배가 강어귀마다 정박할 때 많은 들꽃들은 그 꽃잎이 내려놓을 웃음보따리보다 앞서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잘 웃지 않던 꽃들도 그 꽃잎이 머무는 동안엔 콧잔등에 실팍한 주름 만들어가며 어금니가 보이도록 웃어젖히곤 했다. 꽃잎 한 장이 뿜어내는 웃음 바이러스에 모두 감염된 덕이었다. 그 꽃잎 이름은 황수관이다. 그의 추모 특집 방송을 보았다. 웃기 위해 천만 번쯤은 노력했을 그의 안면 근육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신바람 지수가 높아지면 가끔씩 호흡이 달리는 것 같았지만 그것조차 물에 젖은 토란잎 같은 목소리가 되어 시청자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세 번만 생각하면 오해도 이해하게 되고, 두 번만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심오한 철학을 주는 강연이 아니라 생활 속의 짜릿한 발견을 주는 이런 말씀이 피로에 쌓인 나 같은 이에겐 무척 도움이 되었다.오늘만 해도 그렇다. 사진 한 장 편집하는데도 컴맹인지라 너무 자주 물으니 남편은 지쳐 나가 떨어졌고, 딸내미는 그나마 연민이 이는지 침착하게 다시 가르쳐 준다. 황 박사가 말했다. 늙은 부모가 까치란 새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세 번 되묻자, 아들은 `까치라니까, 몇 번이나 말해야 돼요?` 라고 쏘아 붙였다나. 하지만 그 아이 세 살 때, 스물 세 번이나 까치, 라는 새의 이름을 군말 없이 가르쳐준 이는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귀찮게 하는 자식마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묘사할 수 있는 이가 부모인 것.황수관 박사의 이런 촌철살인하는 위트와 따뜻한 유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서럽다. 살짝 건네는 쪽지 같고, 걸터앉기 편한 의자 같던 웃음 전도사를 새해부터 추모해야 한다는 게 너무 가슴 아프다. 문태준의 시처럼 `나 혼자 꽃 진 자리에 남아 시원스레 잊지도 못하고` 며칠을 앓게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1-03

느낌표를 꿈꾸며

2013년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다. 귀밑머리 쓸어 넘기고 옷깃 여민 채 해를 맞는다. 두꺼운 구름 사이로 우주의 붉은 기운이 서린다. 이른 빛은 언제나 아침노을로 먼저 오신다. 가까운 바다 냄새와 먼 산을 배경으로 마침내 태양이 그 위용을 드러냈을 땐 눈물이 핑 돈다. 어느 새해 아침을 이토록 경건하게 맞이한 적 있었던가. 비의를 품은 듯, 신비함을 실은 듯 새 아침의 아우라는 제 존재를 충분히 발산했고, 모든 물상들은 평화로운 풍경이 되어 그 빛을 수렴하고 있었다. 해가 솟자마자 교교했던 아침은 신기하리만치 빠르게 그 빛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한다. 언제 솟는 해를 기다렸냐는 듯 환하고 밝은 기운이 금세 세상을 점령하고 만다.내 온몸의 기를 풀어 둥근 해에 의탁한다. 저 새 빛, 가슴을 데우는 메아리 같은 말씀으로 화하기를 기도한다. 새해에는 느낌표 같은 날들이 많아지기를.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날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절망하는 가운데도 살아있다는 느낌을 얻고 싶고, 희망하는 가운데도 그 살아있음이 배가되는 날을 꿈꾼다. 눈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눈 감고 있다고 못 보는 것도 아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오감을 열어보겠다. 기왕이면 가슴에다 감수성의 손길을 오래 머물게 하겠다. 그리하여 대상마다 고귀한 느낌표 하나씩을 달아주겠다. 내 무딘 감각의 어혈이 풀려 이제껏 보아온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다.제대로 된 느낌표를 얻기 위해 한 호흡마다 말줄임표 하나씩도 분양 받으련다. 누웠던 감흥들이 느낌표로 살아나려면 진중한 사색의 낯빛도 필요하겠다. 숨어 희생하는 말줄임표를 빌려 꿈틀거리는 많은 느낌표를 건져 올리겠다. 따옴표나 의문부호는 잠시 미뤄두겠다. 숱한 말들의 희롱이거나 잔치일 따옴표 대신, 느낌표의 극대화에 이바지할 말줄임표 하나만 벽에 붙여두겠다. 쌈박한 느낌표를 갈망하는 새해 아침 설레기만 한다. 아직은 꿈꿔도 좋을 새해인데다 일출을 본 덕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1-02

한 해를 꾸린 것

바래지는 풀잎처럼, 스러지는 눈발처럼 또 한 해를 보낸다. 저리고 아쉽기만 한 나날들. 새해 아침이 밝아오면 달뜬 나머지 희망의 단춧구멍을 터무니없이 넓게 뚫는다. 옷의 종류나 활용도 등은 고려치 않고, 일단 계획이란 단춧구멍부터 뻥 뚫어버린다. 구멍에 맞는 단추를 찾아, 온 열두 달을 헤맸지만 끝내 제대로 된 것 하나 구하지 못했다. 한 해의 끝, 큰 구멍에 맞지도 않는, 자그맣고 어설픈 단추 몇 개만 구한 꼴이다. 해마다 거창한 계획에 미미한 결과라니! 계획 실천 유무를 따지는 연말이라면 안 그래도 치운 가슴 더욱 찬바람만 들겠다. 해서 내 곁을 맴돌던 두 단어를 떠올리면서 한해를 마무리해야겠다. 우선 `힐링`이란 말을 되뇐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마음 둘 곳 많지 않아 우왕좌왕한다. 당신과 나, 툭 터놓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외롭고, 어디서나 힘들다. 무엇을 하든 상처 받기 쉽고, 언제나 마음은 흔들린다. 이런 나약한 속성을 지닌 우리에게 필요한 게 치유의 연대감이다. 위로의 주체이자 대상인 개별자끼리 공감하다 보면 진심으로 치유에 맞닿게 된다. 힐링은 연대의 감정이지 폐쇄적 구원은 아니다. 골방의 치유보단 사람 곁이 한결 낫다. 상처이지만 이내 구원이기도 한 사람, 그 자체가 내겐 힐링이었다.`깨달음`도 있다. 생활의 발견이랄까. 깨알 같고 바람결 같은 생각들이 내면을 키운다는 것을 알았다. 소박한 깨침이 온 우주를 들썩이게 할 만큼 신선한 충격을 줄 때가 있다. 생의 근원을 뒤바꿀 수 있는 큰 깨달음보다 제비꽃 같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발견이 더 감동스런 법이다. 지면 상 다 얘기할 순 없지만, 더 많이 내어주고, 더 많이 보듬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베풀라고 몸과 마음으로 가르쳐준 이들께 감사한다. 잡다한 생각들이 온몸과 마음을 휘감을 때 저릿하고 따뜻한 그들의 한 호흡을 떠올린다. 안 그런 척 하면서 내 부실한 나무뿌리를 슬쩍슬쩍 다독여준 모든 이에게 감사장을 대신한다. 내 어설픈 한 해가 감사로 아롱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31

아들과 어머니

한 어머니, 아들 전화 받고 서울 나들이 가신다. 임신한 며느리 힘드니 아이 둘을 보살펴 달라는 요청이다. 고향 떠나 사흘 밤도 잔 적 없는 어머니, 난생 처음 일주일 예상으로 서울행 기차에 오른다. 아들의 핏줄이 아닌, 며느리가 데리고 온 두 아이가`할머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옛날 수학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동료 교사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와 아들에게 자주 신경질을 냈다. 잘못했다는 소리를 절대 하지 않는 어머니는 아들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첫 결혼에 실패한 것도, 그 후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도 다 어머니 탓이다. 이혼 전문 사교 모임에서 두 번째 아내를 만났고, 상처 많은 두 영혼은 상담의사의 도움으로 정신적 자립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오죽하면 상담의를 따라 서울로 이사 갔을까.어머니, 사흘 만에 짐을 싸신다.`할머니` 소리가 듣기 싫어서도, 아들의 냉정한 시선 때문도, 며느리의 맹한 태도 때문도 아니다. 어머니를 서울로 오게 한 아들의 진짜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들 부부는 `용서하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머니를 초대했던 것이다. 심리 치료 모임에서 의사 앞에서 이 모든 걸 재연할 아들에게 분노가 인다. 아들의 트라우마 극복 미션에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수치심에 어머니는 치를 떤다. 여기 나오는 어머니는 소설`올리브 키터리지`에서 뉴욕 가는 올리브의 서울 행 버전이다.용서에 대해 생각한다. 용서하거나 용서받는다는 건 지극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용서하는 자는 준비가 필요하고, 용서 받는 쪽 역시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이 편하고자 성급히 용서를 바라도 안 되고, 용서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는 섣불리 그것을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급하면 체한다. 주고받는 용서의 방식은 어느 누구의 일방적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 상호 합의에 도달했을 때 가장 명쾌하다. 당사자 둘 다 만족하는 이기심이어야 하는 용서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시간만이 그것을 해결해준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28

이제 집으로 갑니다

깊은 밤 자다가 깨면 무심코 텔레비전을 켠다. 다시 잠들 때까지 수면제 같은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데 며칠 전 새벽에 본 고공 자유낙하 다큐멘터리는 무척 강렬해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치 한 번 만났을 뿐인데도 치명적인 매혹을 주는 그런 사람을 만난 느낌이랄까. 지난 10월 오스트리아인 펠릭스 바움가르트너는 고도 39킬로미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했다. 헬륨 가스 기구에 달린 캡슐을 타고 지구 성층권까지 올라가 단숨에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기압과 공포를 이기지 못해 펠릭스의 눈빛이 두어 번 흔들리긴 했다. 지상 관제소에서는 펠릭스의 결정을 차분히 기다려줬다. 인류 최초의 높이에서 점프하기에 도전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는 펠릭스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마침내 초정밀 우주복을 입은 그가 캡슐 문을 열고 까마득한 지상을 향해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높은 곳에 올라와 봐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 이 멋진 한 마디와 함께 캡슐에서 뛰어내렸다. 자유낙하는 거침이 없었고 수초 만에 음속을 돌파했다. 최대 낙하 시속은 1100킬로미터가 넘었다. 낙하 초반, 의식을 잃고 마치 바람에 종잇장이 흔들리듯 펠릭스의 몸이 이리저리 허공을 휘돌기도 했다. 하지만 뉴멕시코주 한 사막에 허무할 정도로 안착했다.극한 도전 중에 하나인 고공 점프를 생각해내고 실천한 인간 의지력에 무한한 경외심이 인다. 작은 일에도 힘겨워하고, 어려워하고, 마침내 포기하기 일쑤인 스스로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높고 넓은 무대에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평소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인간사 아귀다툼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따라서 내 삶의 현재가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느낀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의 근원을 찾아 지상 최대 낙하를 꿈꾸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말 - `나는 지금 집으로 갑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27

고랑과 이랑

누군가가 쓴 텃밭이란 제목의 글을 합평하는 자리에서였다. 평소 글을 잘 쓰시는 분이라 글 자체에 대해서 조언을 할 만한 것은 크게 없었다. 오히려 좋은 글을 계기로 농사 관련 단어 몇 개를 확실하게 알게 되어서 유익한 날이었다. 먼저 `사래`라는 말의 정확한 뜻이 궁금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남구만의 그 유명한 시조에 나오는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냐` 할 때 나오는 그 말이다. 앉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랑의 길이`나 `이랑의 옛말`을 일컫는단다.`사래 긴 밭`이란 관용구가 예문으로 쓰이는 걸로 보아 `사래`는 이랑이 좀 길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란 걸 알겠다.그 다음 자연스럽게 `이랑`과 `고랑`에 대한 차례가 되었다. 차고 넘치도록 들어온 말이지만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 않던 용어였다. 이랑은 `고랑 사이에 흙을 높게 올려서 만든 두둑`을 일컫는 말이고, 고랑은 `두둑한 땅 사이에 길고 좁게 들어간 곳, 이랑에 상대한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그제야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해풍에 일렁이던 보리밭에도, 무서리 맞으며 단단해지던 배추밭에도 이랑과 고랑은 있었다. 다만 농사를 모르니 한 번도 그걸 의식해본 적이 없었을 뿐. 배수와 통풍의 길인 고랑이 없다면 씨앗과 열매의 길인 이랑도 보장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농사라면 고랑 없는 이랑도, 이랑 없는 고랑도 없다. 둘이 맞물려야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그러니 지금 처한 상황이 고랑이라고 의기소침할 일도, 이랑이라고 의기양양할 일도 아니다. 이듬해 이른 봄, 밭갈이 한 번이면 기왕의 이랑과 고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새로운 이랑과 고랑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현명한 조상들은 이런 속담을 남기지 않았던가. `고랑도 이랑 될 날 있다.`고.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고. 이 한 밤, 이랑 드높이기 위해 저마다의 고랑에서 숭고한 호미질을 하고 있을 모든 이에게 평화가!/김살로메(소설가)

2012-12-26

유진의 골목

1985년 생 유진은 달동네 골목 돌담에 엄마랑 서 있다. 1960년대 산(産)인 유진엄마의 이름은 `말숙` 또는 `복남` 같은 것일 게다. 엄마의 트레이닝복 무릎은 낡고 불룩하다. 무심한 햇살은 애완견에다 그늘 한 번 드리우고, 서울 중림동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유달리 하얀 엄마의 손등에 가서 박힌다. 미간이 넓은 네 살의 유진은 `짜가`상표가 붙은 엄마 바짓단에 매달려 천진한 미소를 짓는다. 그 골목의 사진 한 장은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그 어떤 사전 정보 없이 열두 살에 도시로 떼밀려왔을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우주 빅뱅 그 이상이었다. 이사 간 동네는 당시로서는 신도시였다. 넓은 골목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아스팔트 위에다 분필로 모형을 그리고 돌차기 놀이를 했다. 맨땅이 익숙한 나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고무줄놀이도, 돌차기도 내 눈에는 부자연스럽고 생경하기만 했다.문화충격은 위로부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지난한 도시 골목은 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골에서는 아예 골목이란 개념이 없었다. 여러 집이 돌담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어도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 역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별히 비루하거나 남루하다는 느낌 없이 시골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부르주아였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 골목에서는 삶의 신산한 냄새들과 소리들이 지글거렸다. 아스팔트 골목과는 다른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때 어렴풋이 계급의식 같은 걸 자각한 것 같다.유진은 3,4년 간격으로 세 번 더 골목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마지막 사진은 일산의 어느 아파트 앞일 수도 있겠다. 남루한 도시 뒷골목을 떠나 번듯한 아파트 청소년으로 자랐다. 유진의 골목 찰나를 끈덕지게 따라잡은 이는 김기찬이다. 그의 두꺼운 사진집 `골목안 풍경 전집`에는 수십 명의 유진들이 나온다. 비리고, 질퍽이는 삶에서 순간의 미소를 찾으려는 누군가에게 이 사진집은 서럽고 따가운 위안이 돼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24

데이지꽃이 전하는 말

좋아하는 꽃 중에`데이지`가 있다. 색깔별로 키우던 데이지를 누군가의 창 앞에 놓아주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까만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소박한 데이지를 보기 위해 봄이면 화원 근처를 서성이곤 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창문 앞에 놓인 적 없는 나만의 데이지였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환상을 유지함으로써 실체를 맛보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 데이지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못 다한 혼자만의 데이지꽃 이야기를 만들어본다. 저 먼 언덕에 파수꾼이 있었지. 호밀밭 가장자리엔 데이지 만발하겠지. 어린아이는 언제나 언덕을 향해 비행기를 날리곤 했어. 해풍 부는 언덕을 향해 머릿결을 쓸어 올리거나, 덧니가 드러나도록 순진무구한 미소를 날리곤 했지. 파수꾼은 행복했지. 어느 날 지천으로 피어난 데이지를 뜯어 파수꾼은 어린아이에게 건넸지. 꺾인 데이지꽃다발을 보고 어린아이는 파랗게 질려 울음을 터뜨렸지. 어린아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린 대상은 파수꾼이 아니었어.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아득히 일렁이는 데이지 잔물결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비행기라도 날려 응원하고픈 맘뿐이었거든. 하지만 파수꾼은 어린아이의 작은 몸짓, 환한 미소가 자신을 향했던 거라고 착각했던 거지.언제나 환상과 실체의 경계에서 우리 삶은 진행된다. 그 둘은 눈곱만큼의 교집합도 이루지 않을 때에만 서로의 존재 가치가 인정된다. 환상이 내 생각대로 남아줄 때까지만 활력이 되고 믿음을 준다. 데이지는 저 먼 언덕 끝에서 바람에 살랑일 때 아름답고, 어린아이의 천진한 미소는 파수꾼 자신을 향한 것일 때에만 행복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환상은 언젠가는 실체라는 자명한 괴물 앞에 무너지게 돼 있다.착각에 빠져 있으면 미욱한 일상이 따르고, 실체에 놀라면 피폐해진 영혼이 날을 세운다. 환상과 실체 그 경계를 넘나드느라 까진 무릎의 생채기가 오늘 따라 도드라져 보인다. 그래도 절망하지 않으련다. 데이지꽃이 전하는 말은 `희망과 평화`이려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21

스펙 또는 휴학

매일 짧은 생각 하나씩을 글로 옮긴다는 게 쉽지는 않다. 이런 내 맘을 읽었는지 딸내미가 말한다. `휴학`에 대해서 한 번 써보란다.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차안에서 딸내미와 입씨름 한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친구들 대부분이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 졸업하기 전에 한 번 이상은 휴학을 한다나. 자신도 그러고 싶다는 우회적 표현임을 금세 알아차리겠다. 딸내미에게 고리타분한 기성세대로 비치는 걸 원치 않지만 이럴 땐 나도 어쩔 수 없다. 학교를 쉬어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는 순간, 이미 딸내미의 표정은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학연수, 인턴, 봉사활동 등 스펙 쌓기란 이유로 대학가의 휴학은 일종의 유행처럼 되어가고 있다. 취업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유예시키고, 공부만 하는 청춘을 잠시라도 놓아주고 싶은 욕구 때문이리라. 대학생이란 신분이 주는 암묵적 보호 그늘을 조금이라도 늘여 사회로 진출하는 시간을 그만큼 미루고 싶어 한다. 취업하기 어려운 이유가 가장 크겠고, 대체로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세대라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성장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려 하는 것도 있다.상대적으로 덜 여문 이십대를 양산한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학력·학점·토익점수·어학연수·자격증 등으로 청춘을 줄 세우는 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줄을 늦게 서는 걸로 저항하는 수밖에 없다. 스펙은 이 땅을 사는 청춘들이 안아야 할 커다란 부담이다. 기기나 시스템의 성능 제반을 말할 때 씀직한 스펙이란 말이 인간에게도 접목되는 걸 보니 참으로 비인간적이라는 생각만 든다.인간 상세 설명서를 메우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더러 휴학까지 생각하는 청춘들에게 뾰족한 답을 줄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계적인 이력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창의적인 사고를 실현하기 위한 휴학이라면 백만 번이라도 좋으련만. 어미로서 할 수 있는 말이란 게 고작, 휴학은 안 돼, 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20

남당사(南塘詞) 16수

책을 읽을 때 나는 여성적 시각을 좀체 버리지 못한다. 대부분의 고전이 남성적 시각을 견지하는지라 여성이 등장하더라도 변변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게 왜 그리도 안타까운지. 평소 여성이라서 맛보는 자부심보다 여성이기에 느끼는 피해의식이 더 크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스밀 것이다. 요즘 다산 정약용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데 다산의 소실이었던 남당포 여인 장면에서 또 연민이 인다. 다산의 유배 시절 뒤늦게 소실이 된 그미는 홍임을 낳고, 해배된 다산이 본가로 돌아갈 때 따라간다. 하지만 부인 홍씨에 의해 내침을 당하고 모녀는 강진으로 되돌아온다. 그 후 모녀의 삶도 평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홍임 모녀에 관한 시가 바로 `남당사 16수` 이다. 남당포에서 온 여인의 애상을 읊은 시인데 다산이 쓴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시편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홍임엄마가 되어 본다. 베 짜기와 바느질에 제대로 손댈 수 없다. 옷 입은 그대로 닭 울음 그치고서야 벽에 기대 혼자서 신음한다. 어린 홍임은 늙은 아비인 다산이 보고 싶어 보채다 곤히 잠들었을 것이다. 눈물로 얼룩져 화장은 엉망이 되고, 그리움에 진저리치다 보니 비녀마저 떨어져 있다. 긴 밤 지새다보면 다정한 낭군이 꿈속에나마 반쪽 침상을 찾아든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산의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데바람에 오래 떤 여성의 시각으로 보면 다산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부인 홍씨는 왜 오랜 세월 기다린 보람도 없이 소실 때문에 맘고생 해야 하며, 홍임모 역시 무슨 죄로 그토록 모진 칼바람을 견뎌야만 했을까. 여성적 시각에서 다산을 둘러싼 일상사를 엮는다면 어떠할까. 깊은 우물 속 두레박을 내려도 물 한 모금 얻을 수 없는, 차마 처연한 슬픔의 장이 되지 않을까. 한 남자 때문에, 한 세월 때문에 지난했을 세 여자를 그려본다. 마른 눈물이 난다. 할 수 없이 나도 여자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9

덕담의 효용

왜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아린 피멍을 느낄까. 왜 덤덤하기만 한 저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까. 왜 노래하는 저 파도가 내겐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칠까. 세상사 맘먹기 달렸다고? 그러니 뭐든지 담대하게 툭 털어버리라고? 그런 건 무책임한 말을 뱉고도 좋은 말을 했다는 뿌듯함을 얻고 싶은 자의 립 서비스일 뿐, 실제 소심하고 예민한 소시민인 우리는 그런 충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이 제일 힘겹고, 내가 당한 일들이 가장 분노할만하다고 단정 짓는다. 자학하거나 피해를 자청함으로서 자기위안을 얻으려한다. 우리 일상은 두루마리 휴지 풀리듯 술술 풀리는 게 아니다. 실크 블라우스에 붙은 껌 딱지를 떼 내는 것처럼 성가시고 힘들 때가 더 잦다. 이미 이어온 날들은 불만족스럽기만 하고, 앞으로 이을 날들 역시 두렵기만 하다. 산다는 것 자체가 망설임과 회한의 기록들이다.이런 이야기가 기억난다. 부모를 여읜 청년이 돈 벌러 서울로 떠나기로 한다. 앞일이 걱정스러운 청년은 이장에게 덕담을 부탁한다. 서예에 능한 이장이 써준 말은 `두려워하지 마라` 였다. 그러면서 살아가는 비결은 두 마디면 충분한데 나머지 한 마디는 다음에 알려주겠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청년은 성공했지만 그건 자신의 참모습은 아니었다. 30년 전 그 이장을 다시 찾았다. 세상 뜬 이장이 남긴 나머지 덕담은 `후회하지 마라` 였다.두려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이 두 마디만 새겨도 덜 피곤한 삶이 펼쳐진단다. 하지만 여린 바람에도 잿빛 피멍을 느끼고, 무던한 가방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고, 발랄한 파도가 울음 섞인 아우성으로 비치는 날들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 짧은 두 마디는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일 뿐이다. 두려워 망설이고, 건너고선 후회하는 게 인생의 강물 아니던가. 그래도 삶이란 동네엔 이장의 저런 덕담이 필요한 거다. 상처 많은 인간을 위한 덕담의 효용은 실천에 있는 게 아니라 위무에 있으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2-18

인간적이다

다산 정약용이 해배되자 본인만큼이나 기뻐했던 이들이 강진의 제자들이었다. 자유의 몸이 된 스승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중앙 정계에 복귀하는 스승의 덕을 볼 수 있으리라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다. 본가로 올라갈 스승과 강진에 남을 제자들은 영속적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다신계(茶信契). 모임을 조직한 이유 중에는 다산이 강진 유배 동안 마련한 토지와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관리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원체 다양한 곳이 사람 사는 데인데, 다산을 둘러싼 인적 환경도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제자들도 강진의 다산 토지를 잘 관리해주었다. 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났다 뿐, 다산은 노론이 득세하는 중앙 정계에서 든든한 끈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실망한 제자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신뢰를 주지 못한 채 인간적인 한계를 보인 다산에게 제자들이 등을 돌린 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신계가 무신계(無信契)가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이청(이학래)과의 결별에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산의 수많은 저술에 지대한 편집자 역할을 했던 그는 의무만 강요하고 신뢰를 주지 않는 스승을 떠나 추사 김정희의 식객으로 자리바꿈하고 만다.스승과 제자는 많지만 참된 스승과 제자는 드물다. 스승은 제자를 키우고, 제자는 스승을 세운다. 키우고 세우는 일은 쌍그네를 타는 것과 같다. 스승이 무릎에 힘을 실어 그네를 띄우면 제자는 그 기를 받아 온힘을 모아 그네 키를 높여나간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태풍 앞이라면 그네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태풍이 견딜 만한 것인가 아닌가는 그네를 잇는 동아줄이 안다.스승으로서 자기 관리에 서툴렀고, 제자를 기르는데 미욱했던 다산을 보면서 슬픔보다는 위안이 되는 건 왜일까. 아마 학문적 깊이나 인품의 넓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약점 많은 인간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미쳤기 때문이리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들, 오늘도 곳곳에서 위태로운 그네를 타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7

긴 줄 끝의 당신과 나

다 놓아야 오는 게 있다. 모든 걸 버린 뒤에야 짜릿하게 얻는 게 있다. 바로 자유다. 그토록 갈구하는데도 언제나 그것이 멀기만 한 것은 우리 일상 자체가 버릴 수 없는 것들을 위한 연극 무대이기 때문이다. 밥벌이를 위해 힘껏 고개 숙여야 하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크게 웃어야 하며, 벼랑이 두려운 나머지 단단히 밧줄을 잡아야 한다. 정말로 자유가 다급하다면 그 모든 걸 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관계망이란 현상과 자유라는 본질을 동시에 얻으려는 모순된 굴레, 그런 인간 속성을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줄 위를 오가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진 못해요.``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고용주인 `나`에게 저처럼 일갈한다.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인 척해도 그것은 실제 자유와는 별 상관이 없다.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은 자유를 위해 제 인생 순간순간을 도박에 걸지는 않는다. 그토록 어리석을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진정한 자유인 조르바는 다르다. 벼랑에 몰리더라도 인간이 줄을 자르지 않으면 무슨 살맛이 나겠냐고 다그친다. 일상의 우리가 우물쭈물하며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소설 속 조르바는 과감하게 내려놓고 실천한다. 본능의 화신인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부렸다. 춤추고 싶으면 춤추고, 떠나고 싶으면 떠났다. 그에게 과거란 없는 것이며, 미래는 미리 걱정할 게 아니었다. 오직 현재만이 유효한 놀이터였다.무지렁이 단순 일꾼 조르바는 안타까운 인간 굴레를 위무하기 위해 만든 작가의 꽃다발이 아니었을까. 살아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게 완전무결한 인간의 자유라는 걸 방증하기 위해 조르바란 꿈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조르바의 눈에는 팽팽한 긴 줄 끝에 있으면서도 끝내 그것이 자유라고, 행복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게 인간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2-14

17자로 치유하기

한 줄도 너무 길다. 일본의 독특한 문학 장르인 `하이쿠`(俳句)를 가리킬 때 자주 듣는 말이다. 하이쿠는 우리나라의 시조와 비견될 수 있겠다. 글자 수로만 본다면 우리의 단시조 초장 수와 비슷하다. 독서클럽에서 하이쿠 모음집을 읽고 토론했다. 일본 문학을 깊이 공부한 이가 없으니 수박 겉핥기이긴 했다. 하이쿠는 총 17글자로 이루어진 5·7·5조의 일본 정형시이다. 지구상의 가장 짧은 시 형식 중의 하나이다.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땐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예를 들면 `해묵은 연못이여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첨벙` - 마츠오 바쇼의 이 하이쿠는 최고로 꼽히는데, 이게 왜 좋은 시라는 건지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하이쿠가 지닌 일본 특유의 정서를 살피다 보면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전통 하이쿠는 크게 세 가지 형식미를 갖는다. 앞서 나온 대로 열일곱 글자 내외의 정형성을 갖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계어(季語기고)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개구리, 장마, 기러기, 첫눈 등 누가 봐도 계절을 연상할 수 있는 낱말들이 하이쿠에 자주 쓰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번째는 절자(切子기레지)를 갖추어야 한다. 세 구 중 어느 한 곳에 여운이나 감탄을 나타내는 어미를 써서 시적 흐름을 끊어 주는 것을 말한다. 위의 바쇼 시에서 `해묵은 연못에` 하지 않고, `해묵은 연못이여`하고 한 호흡을 쉬어갈 때 훨씬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짧은 시가 주는 긴 여운이 신기해 우리식으로 17자 시 짓기 놀이를 해본다. 격조 높아 부담스러운 시조에 비해 접근하기가 쉬워서 그런지 하이쿠 짓기 반응이 나쁘지 않다. 하이쿠의 묘미인 촌철살인엔 미치지 못해도 저마다 숨겨뒀던 발설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겠다. 시가 뭐 별건가. 제 안에 고였던 말들의 두레박을 짧은 호흡으로 건져 올리는 것, 그것만으로도 시가 되는 게 아니던가. 단순하고 절제된 언어의 치유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3

야생해당화

때론 야생해당화 가시처럼 뾰족하게 찌르는 게 삶이지. 덤불 무성하고, 희거나 붉은 꽃 소복할수록 그 가시 더 아프게 찔러대지. 절망을 노래하는 사람이나 답답한 현실을 온몸으로 견디는 초로의 여자나 그게 그거인 게 우리네 삶이지. 올리브라는 이름의 여자는 자신의 아픔으로 타인을 위로할 줄 알지. 네 아픔과 내 아픔이 다르지 않다고 무심한 듯 내뱉을 수 있지. 알고 보면 누구나 정상이 아니지. 하기야, 생의 경계에 정상과 비정상이 어디 있기나 하겠어. 원래 삶이란 게 달달하고, 환하고, 명쾌할 때보다 비리고, 우울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더 많거든. 퉁명스런 기질 이면에 슬픔과 아픔을 간직한 올리브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아. 살다보면 그렇게 누구나 올리브가 되는 거지. 코끼리 같은 몸집의 올리브가 누군가를 삶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고 있어. 먼저 아파 봤고 지금도 아프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바닷가 절벽에 핀 야생해당화 향기가 코를 간질여. 누군가 고통스런 기억을 잊기 위해 그 꽃 꺾으러 발길을 옮기네. 아슬아슬한 그 흰 꽃 냄새 맡으려다 그만 가시에 찔리는 게 보여. 기어이 한 묶음의 꽃, 거실 테이블에 놓이는 걸 보며 올리브는 말하겠지. 슬픔이나 아픔을 견디기엔 꽃보다 나은 위무는 없다고. 가시 돋친 꽃일지라도 꽃이 주는 환희나 희망의 전언을 버리지 못하는 거지.야생해당화 덤불 속을 헤매는 게 우리네 한살이야. 찌르거나 찔리면서 엉긴 가지를 헤쳐나가지. 그리곤 희거나 붉게 피어나는 꽃을 보는 거지. 시간은 흐르는 것이고, 삶은 견뎌내는 것이지. 오늘도 그 삶의 무게 때문에 힘겨운 이들은 소설집`올리브 키터리지`를 곁에 두어도 좋겠어./김살로메(소설가)

2012-12-12

삼근계(三勤戒)

목표를 세운 사람의 성공 여부는 부지런함에 달려있다. 참으로 고전적인 말이긴 하지만, 크고 작은 소망이 결실을 맺는 데는 근면·성실보다 나은 게 없다. 부지런한 뒤에 운과 재능을 빌려도 늦지 않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제자 황상에 관한 책을 읽는데 눈시울이 절로 붉어진다. 이런 스승과 제자가 있을까. 깐깐한 스승과 우직한 제자는 찰떡궁합이다. 강진 유배 18년 동안 다산을 거쳐 간 제자는 많았지만 끝까지 남은 단 한 사람이 황상이었다. 스승은 만난 지 이레째 되는 날, 열다섯 더벅머리 황상을 따로 불러 공부에 힘쓰라고 당부한다. 황상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세 가지 문제점은 둔하고(鈍), 막혔고(滯), 어근버근한(?) 것인데, 그래도 문사를 닦을 수 있겠냐고 여쭤본다. 스승은 제자의 수줍은 질문에 이런 요지의 답글을 내린다. 재빠르고(敏), 날카롭고(銳), 빠른(捷) 게 전부가 아니라고. 재바른 천재보다 미욱한 둔재의 노력이 훨씬 무섭다고 깨쳐준다. 뚫으려면 어째야 하는가?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려면 어떻게 하는가?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부지런해야 한다.황상은 늙어 죽을 때까지 스승의 이 면학문을 몸과 맘에 새겼다. 세번씩이나 부지런하라고 써준 스승의 말씀을 `삼근계`라 부르면서 평생 보듬고, 그 가르침을 실천했다. 다산이 죽은 뒤 다산의 아들 학연은 너덜너덜해진 황상의 삼근계를 보고 그 정성에 감복해 아버지를 대신해 다시 써주었다. 그 글씨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스승, 제자, 아들의 연결 고리 또한 애잔한 것 말고 달리 말할 길이 없다.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지런한 게 좋은 거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든 정보든 내게 부지런하라고 말할 스승은 도처에 넘친다. 다만 내게 황상 같은 우직함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한 그 우직함을 황상에게서 빌려오고 싶다. 스승 사랑 담뿍 받고 그 사랑 실천한 황상의 어진 맘을 분양 받고 싶은 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1

문장 털기

때론 시 자체보다 시인의 말이 더 시적일 때가 있다. 이정록 시인의 시집`정말`을 두고 하는 말이다. 멀리 있는 친구가 소설집 한 권과 함께 보내주었다. 시집을 읽을 때 나는 시인의 서시나, 추천자의 발문 등을 먼저 읽는 편이 아니다. 선입견이 생기거나 감흥이 깨질까봐 본문부터 읽어 내려간다. 한데 이번에는 왠지 맨 마지막 장의 `시인의 말`부터 눈에 들어왔다. `쓰는 게 아니라 받아 모시는 거다. 시는, 온몸으로 줍는 거다. 그 마음 하나로 감나무 밑을 서성거렸다. 손가락질은 하지 않았다. 바닥을 친 땡감의 상처, 그 진물에 펜을 찍었다. 홍시 너머 푸른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사랑의 주소는 자주 바뀌었으나, 사랑의 본적은 늘 같은 자리였다.` - 전문을 옮겨 보았다. 독자와의 인사 격인 `시인의 말` 정도는 풀어써도 누가 뭐랄까. 한데 아무리 봐도 본문 시편들보다 더 시적이다. 말을 늘이지도 않고, 감성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담백하고 간결한 몇 마디에 진한 여운이 남는다.이정록 시인은 문장 털기에 능하다. 말(言)들이 달린 나뭇가지를 마구 흔든다. 다 털려 나목의 상태여도 좋고, 잎새나 꽃잎 몇 장 달려 있어도 괜찮다. 그렇게 끝까지 살아남은 말씀만 주워 담는다. 그것이 알짜배기 문장이다. 떨어진 잎과 날아간 꽃잎일랑 미련두지 말자. 그건 읽는 자나 쓰는 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필요한 형용사나 긴요한 부사는 숨겨뒀다 아껴 쓰자. 그래도 읽는 이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웃음을 말하지 않는데도 입꼬리가 올라가고, 심장을 쥐어짜지 않는데도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 그것이 매혹적인 문장의 기본이다. 온갖 키치적 깃털로 장식하는 문장보다 담대하게 탈탈 털어버린 문맥들이 더 아름다울 때가 많다. 일견 무색, 무취, 무미하게 보이는 문장의 깊이와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이미 `문장 털기`의 기분 좋은 노예가 되었다. 시인의 말을 옮겨 적는 내 손끝 역시 기분 좋은 예민함으로 떨리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