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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회고 미학

시인 김수영은 수필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에서`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을 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말 열 개로 꼽았다. 그 낱말에는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뒷말이 머리끝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이런 향수에 어린 말들은 (중략) 진정한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아무리 많이 열거해 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는 되지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회고 미학`이라는 용어를 발견한 기쁨이 사라지기 전에 얼른 글 몇줄 쓰려한다. 오늘날 우리 수필은 재미없다는 비난을 종종 듣는다. 신춘문예 공모에서조차도 슬그머니 사라지기도 한다. 왜 그럴까? 말이든 글이든 행동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숙제해라고 아무리 엄마가 고함질러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이는 빈 공책에 낙서만 하다 잠들고 만다.좋은 수필의 전형이라고 하는 글들을 보면 대개 면죄부 얻은 과거의 상투적 회고에 지나지 않는다. 모성의 희생은 위엄 깃든 필수요, 부성의 패악은 낭만적 양념이며, 툇마루에 대한 추억은 당연한 선택이다. 처음 한두 번은 마음결을 다독여주고, 내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이런 글에 마음이 간다. 두세 번 읽다보면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 하는 반발심이 생긴다. 사람들은 으레 수필은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흥미를 잃게 되고 종내는 그들만의 잔치로 머물고 만다. 김수영식 대로 고작 `회고 미학에 떨어지고 마는`것이다.우리 의식은 좀 더 현재적 보편성에 가깝게 점진적으로 변형된다. 쌈박한 개별자의 개성이 저만치 앞서가는데, 어쩌면 이런 것이 새로운 보편의 패러다임에 가까운데, 언제까지나 의고적이고 훈계적인 말들로 향수를 포장하고 열거하는 데만 머물 것인가. 무려 50년 전에 이런 회고 미학의 경계성을 단언한 시인의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5-02

봄비 또는 안개

이런 날은 이성(理性) 따윈 버리는 게 제격이지.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처럼 빗소리 들렸지. 저 멀리 산마루엔 저들끼리 홀리는 안개 가득했어. 누군들 센티멘탈에 빠져들지 않겠어. 온몸으로 파고드는 감성의 춤사위, 와이퍼에 내다 걸고 희희낙락 저 고립무원 안개 고지를 향해 점진하는 거야. 애인하고 함께일 필요는 없어. 우인(友人)이 제격이야. 단 둘 보다는 한 차 가득 젖은 빨래처럼 출렁댈수록 좋은 거지. 단, 운행 속도는 줄여야지. 미친놈 고쟁이 자락 빠진 듯 더러워진 흙신발로 발판을 뭉개진 않았으면 좋겠어. 저 산허리만 지나면 무중력 상태인 안개의 나라거든. 거기선 흙신발일수록 환영 받아. 역맛살의 혐의가 짙을수록 외계인이나 신선의 대열에 선발되기가 쉽거든.드디어 안개나라에 잠입했어. 여기선 겨드랑이에 숨겨둔 저마다의 이름 하나 발설할수록 매혹적이지. 젖은 추억을 팔거나 절벽 같은 시간을 풀어도 괜찮아. 지독히도 은밀한 한 생애를 고해하고 공유한 공모자가 되는 순간이야. 원래 사는 건 시시하고, 막막한 거거든. 그 비루한 삶을 서로 위무하고 격려하기 위해 안개비를 꿈꾸는 거지. 말할 수 없는 내 불안과 네 공포가 두렵지 않은 자 어디 있겠어. 점점 푸르러가는 계절에 걸맞게 그것들도 증식하지. 진초록 짙어오기 전, 한 호흡을 갈무리 하듯 빗줄기 머금은 저 산정의 밀지(密地)를 만나러 가는 거지. 선계에 선뜩 내닫지 못한 창밖으로 빗소리 들려오고, 산 높고 깊은 곳의 안개는 제 겹을 늘여갔지.환한 날의 밋밋한 우정보다 안개비 속의 축축한 인정은 다음 만남을 잡기에도 유리했어. 다음번엔 안개비 대신 솟구치는 물마루를 만나러 갈지도 몰라. 분수처럼 솟구치는 인공 물마루 넘어 햇살 받은 쌍무지개는 황홀한 바람을 닮았대. 벌써 그 장면이 어룽거려. 아쩜 사는 게 시시하고 막막할 때 아름드리 버짐나무 아래 섰던 그대들이 떠오를 거야. 그땐 이성을 버리고 오직 센티멘털의 전송법으로 편지를 쓰겠어. 그럼 된 거지. 뭘 더 바라겠어./김살로메(소설가)

2013-05-01

바람 쐬고 약 줘야

일주일이 지나도록 배탈이 낫지 않는다. 꾸룩꾸룩 장 뒤틀리는 소리 요란하고, 가스 찬 배를 두드리면 수박 두드릴 때처럼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욱신거리는 배를 다독이며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병원 가는 게 성가셔 약국에서 응급약만 지어 먹었다. 그래도 차도가 없어 결국 병원 신세까지 졌다. 그새 일주일이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단순 장염이지만 염증은 심해졌을 거란다. 아픈 순간 빨리 병원부터 찾는 게 순선데 자가 처방만 믿은 게 화근이었다. 배탈 따위는 하루만 참으면 절로 낫는다는 자신감 같은 게 그간 내 안에 있었다. 음식 버리는 것에 극도로 예민한 엄마는 흔히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어른들이 그러듯 쉰 콩나물무침도 씻어서 기어이 드시는 분이다. 팔순을 훨씬 넘긴 연세에도 비교적 건강한 소화기관을 자랑하는 당신의 산교육(?) 영향인지 나도 위와 장은 튼튼하다고 자부하던 터였다.환경이 바뀌면 나를 바꾸거나 대상을 바꿔줄 줄도 알아야 한다. 기존을 고집하면 탈이 날 경우 더디게 회복될 수도 있다. 얼마 전 쌀밥덩이처럼 몽실몽실한 흰꽃을 사들인 적이 있다. 싸리꽃 닮은 `아리삼`이란 일년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꽃색이 흐려지며 생기를 잃는 것이었다. 끄떡없이 두 달은 꽃구경 할 수 있을 거라던 꽃집 주인의 말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바람과 물과 영양제까지 맞으며 무리지어 생육환경에 맞게 자라다가 고립무원의 아파트로 옮겨오니 꽃도 소화계에 탈이 난 모양이었다. 자주 환기를 시켜 바람과 별빛의 기를 씌었더라면 꽃탈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들어가는 초기에 꽃집에 들러 조치를 취했더라면 초기의 싱싱함을 되찾았을지도 모른다.사람도 마찬가지다. 젊은 혈기 때는 아프더라도 하루 만에 거뜬히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면역력이나 소화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론 건강할 때의 잣대로 자신의 몸을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하루 가던 장염이 한 달, 아니 일 년을 끌기 전에 현명한 조치가 우선임을 뼈저리게 맛본 한 주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30

언어유희

싸이의 `젠틀맨`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음악성 자체보다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 풍자 깃든 춤, 언어유희가 섞인 노랫말 등이 지구촌 사람들의 보편적인 음악 정서를 충분히 자극해주고 있다. 특히 `나랏말쌈`에서 자유로운 말장난 같은 가사의 전략적 배치도 노래의 파급력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고 본다. 이처럼 언어유희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좋은 매개물이다. 진은영의 시 `대학시절`은 맛깔나는 말장난을 전면에 내세워 청춘의 지난한 현실을 노래한다. `내 가슴엔/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우울한 염소가 한 마리/살고 있어/종일토록 종이들만 먹어치우곤/시시한 시들만 토해냈네/켜켜이 쏟아지는 햇빛 속을 단정한 몸짓으로 지나쳐/가는 아이들의 속도에 가끔 겁나기도 했지만/빈둥빈둥 노는 듯하던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던 시절`.비슷한 말들의 소란을 빌려 이십대를 회상하는데, 같은 경험을 거친 독자라면 그게 더한 신뢰감으로 다가오는 거다. 청춘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명랑발랄해서만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멜랑콜리`의 정점을 맛보기 때문이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멜랑콜리에서 매력을 뺀 게 우울증`이라고 했다. 단순한 우울이나 비애로 설명할 수 없는 세련된 우울의 정서인 멜랑콜리를 이십대 때의 시인은 `멜랑멜랑한 꼬리`를 가진 `염소 한 마리`로 정의하고 있다.청춘의 염소는 종일토록 종이만 먹어치우며, `시시하기 이를 데 없는 시`만 토할 수밖에 없다. 앞선 친구들의 속도감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실감과 멀게 태어난 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빈둥빈둥 빈센트 반 고흐`처럼 보장된 바 없는 미래를 생각하며 `담담하게 담배만 피우`며 시간을 축낼 뿐이다. 누군들 아프지 않을 청춘이었을까. 누군들 멜랑콜리하지 않을 이십대였을까. 하지만 누가 이처럼 매혹적인 언어유희로 자신의 멜랑콜리한 청춘을 `화끈하고 말끔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젠틀맨`을 들으며 제 청춘에 말장난 걸어본다. 알랑가몰라 아리까리한 그 시절./김살로메(소설가)

2013-04-29

섬이 되어야

알베르 카뮈는 스승 장 그르니에의 철학 에세이 `섬`에 붙여 다음과 같은 헌사를 던진다. `이 책은 끊임없이 나의 내부에 살아 있었고 이십 년이 넘도록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다. 오늘에 와서도 나는`섬`속에, 혹은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 속에 있는 말들을 마치 나 자신의 것이기나 하듯 쓰고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 나 자신에게는 더없이 좋은 행운이었다.` 너무 늦지 않게 그 성찬의 의미에 동참하고자 책을 펴들었다. 웬걸, 처음부터 난공불락이다. 내게 장 그르니에의`섬`은 카뮈의 헌사가 더 나은 책, 카뮈의 헌사로 기억될 책, 카뮈의 헌사가 호들갑스런 책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암시와 독백으로 가득한 그르니에 식 사유의 독창성은 그야말로 뜬구름 잡기였다. 아무리 카뮈가 말한 대로 `우리들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맡기려 해도 속만 더부룩해져올 뿐이다. 소화 안 된 묵직한 배로 뭔가를 더 먹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느낌이랄까.원문의 난해함 때문인지 번역본은 비문을 쏟아낸다. 아무리 독자의 예를 다하려 해도 부분에 따라선 쓸 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기분이다. 글이 글로서 제 기능만 다해주면 좋으련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문을 구해서 비교하면서 읽고 싶다. 읽기에 껄끄러운 건 번역의 문제이지 원문의 문제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왜냐면 스승의 현학허세나 자기만의 말놀이를 위해 카뮈가 그토록 호들갑을 떨며 헌사를 날렸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군데군데 심오한 철학과 명징한 단상들 덕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고무, 또는 찬양의 독후감들은 이 책 전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부분적으로 빛나는 사유들에 대한 몫이리라. 남들 다 좋다고 하는 책도 한 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독자로서 불충한 독해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섬이 되지 않고서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제대로 이해하긴 어렵다. 섬이 되어야 섬에 닿을 수 있는, 막막하고도 먹먹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섬`./김살로메(소설가)

2013-04-26

멘첼에게 묻기

온 세상, 자기계발이 화두다. 책이든 강연이든 `자기계발`란 타이틀만 달면 시쳇말로 반은 그냥 먹힌다. 처음 한두 번은 솔깃하다가 나중에는 똑 같은 얘기 같아 시들해지는 게 또 자기계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것이 꾸준히 회자되는 건 그만큼 자기 계발이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두 권의 계발서, 한두 번의 강연에서 자기계발에 대한 자신만의 모델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해서 각종 자기계발 관련 정보에 대해 가졌던 편견, 이를 테면 상투적이라거나 상업적이라거나 나아가 뻔한 얘기라는 생각을 접어보기로 했다. 원하는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니 오히려 그것에 대한 모든 정보들에 애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최근 참석한 모 특강도 그랬다. 욕심보다 최선이 먼저라는 깨우침을 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는데 하루 종일 그것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돌프 폰 멘첼은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이다. 그 거장에게 청년 작가 한 사람이 찾아왔다. 성품이 급하고 그림 실력은 그럭저럭한 이였다. 초조한 표정의 젊은 화가는 멘첼에게 물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리는데, 파는 데는 왜 일 년도 넘게 걸리느냐고. 멘첼이 대답은 명쾌했다. 하루 만에 그리던 것을 일 년에 걸쳐 그려보라고. 그러면 금세 그림이 팔릴 거라고. 멘첼의 충고를 받아들인 청년은 태도를 바꿨다. 욕심을 버리고 기초부터 다졌다. 하루의 치기를 일 년의 노력으로 대체했다. 청년의 그림이 한나절 만에 팔린 것은 당연지사였다.바라기 전에 갖추고, 갖추기 전에 버려야 길이 보인다. 욕심을 미루고 기본을 쌓는 것보다 나은 자기계발은 없다. 멘첼의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있는 거실 그림을 보여주며 자기계발 강사가 말한다. 거장의 붓질을 기억해라. 저 흰 커튼의 펄럭이는 생동감과 저 마루를 내리찍는 광선의 각도를 위해 얼마나 숱한 붓질이 있었는지를. 그 맘이어야 하룻밤 새 팔릴 그림을 꿈꿀 수 있다고./김살로메(소설가)

2013-04-25

생각하는 대로 된다

살다보면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해 괴로울 때가 있다. 남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인데 내게 오면 헝클어진 실타래가 되고, 암담한 벽이 되는 그런 상황들에 처하게 된다. 남들이 보면 만족할만한 사안인데도 내가 보기엔 미흡해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옭아매기도 한다. `나 같은 여자와 사는 내 남편이 불쌍해요. 전 쓸 데 없고, 무능한 여자예요. 전 남편의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제가 그를 떠나주면 그는 자유로워질 거예요. 저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맘껏 할 수 있고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펼쳐나가게 되겠죠.`프로이트는 위의 예를 들어 만약 자기 비난이 지나칠 경우, 사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고 분석한다. 나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비난은 곧 타자에 대해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자책하는 건 상대에 대한 비난이 방향만 바뀌어 내 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과 같다. 프로이트의 이런 분석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 있는 사람이 아무리 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다 해도 섬세한 시각으로 보면 그건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건전한 정신 건강을 위해선 부족한 자아를 다독여, 이만하면 괜찮다고 후한 점수를 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에 대해 대책 없이 만족할 필요는 없지만 그 불만족을 자랑처럼 떠벌일 이유도 없다. 피폐해진 영혼은 죄 없는 타자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마가릿 대처 여사는 아버지가 해준 다음과 같은 말을 맘에 새겼다.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내 생각과 말과 행동은 곧 나의 자화상이다. 내 안에 녹아든 모든 것들이 기왕이면 스스로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이기를 바란다. 이제부터라도 긍정의 제스처가 아닌 실제 긍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되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4-24

배 타도 산에 오를 수 있다

도리스 컨스 굿윈의 말은 매우 빨랐다. 우연히 인터넷으로 그녀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번역 자막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눌변인 경우가 많다는 속설은 그녀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광풍처럼 몰아치기만 한 언변에 유머와 재기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호의적인 청중들의 웃음소리를 한 호흡 쉬어가는 발판으로 삼았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기만 했다. 성급한 내레이션,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 굿윈은 링컨 연구자의 권위자이다. 10년 동안 링컨에 관한 연구와 자료 수집으로 한 권의 책을 집대성했다. 팔백 페이지가 넘는 `권력의 조건`은 그녀의 링컨에 대한 오롯한 헌사이다. 책 속의 링컨도 위대하고, 책을 쓴 그녀도 대단하다. 한 사람의 집념은 여러 사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정치가로서의 링컨이 그러하고, 글쓴이로서 굿윈 역시 그러하다.방대한 내용 안에서 그녀가 링컨을 가장 잘 살린 대목은 정치적인 면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들에서였다. 링컨의 강점은 적들도 내 편으로 만드는 건실한 가치관이었다. 때로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더러는 해돋이 같은 미소로 불편한 정적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권모술수나 이해타산이 아니라 건전하고도 도덕적인 접근법이었다. 유능한 라이벌들을 내각에 등용시키는가 하면, 뛰어난 화술과 친절한 마음씨로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 사사로운 비난과 웬만한 모욕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과도 우정을 고수했고, 동료들의 실수마저 끌어안았다. 자기훈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표피적으로만 알고 있던 링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연구에 몰두한 저자 도리스 컨스 굿윈도 링컨만큼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링컨의 정치적, 사적 행보는 바지런한 작가의 발품과 손품에 의해 정치적 욕망과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인간적 신뢰감으로 변주된다. 이런 믿음을 주는 사람들이라면, 즉 링컨과 굿윈의 안내라면 배 타고도 능히 원하는 산에 오를 수 있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23

봄 나목을 보며

봄이 깊어간다. 사방천지가 푸름의 향연을 위해 제 몸을 부풀린다. 창밖을 본다. 벚나무 한 그루에 잎이 나질 않는다. 주변 가로수가 날 다르게 푸른 숨결로 제 가지를 키울 때 그 나무는 헐벗은 듯 꼿꼿한 듯 제 온몸으로 봄바람을 마주하고 있다. 겨우내 다 같이 나목으로 있을 땐 몰랐는데, 꽃 피우고 잎 나기 시작하니 주변 나무와 다른 게 표가 난다. 어떤 이유에서든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한 나무는 곧 잊힐 것이다. 오뉴월이 와 무성해진 잎들이 다른 가지를 넘나들 때면 그 나무는 완전히 주변에 잠식되고 말 것이다. 있으되 없는 나무가 되고 만다. 뿌리가 약하거나, 강한 기 때문에 쉽게 그 땅에 안착하지 못하는 나무는 봄이 와도 나목으로서의 제 수치를 감내해야만 한다. 기실 그 나목은 죽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밑둥치 잘려나갈 운명이 예고되어 있다.사람의 나무도 다르지 않다. 어떤 의문 앞에서 정의를 내리거나 명답을 얻는 건 무척 어렵다. 거기서 최선이나 차선의 길을 수용할 때 우리는`순리를 따른다`고 한다. 순한 이치나 도리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세상과 타협한다.그 타협조차 받아들일 의지가 없거나 그 타협보다 자의식이 강할 경우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다수가 옳다고 하는 그 명제 앞에서 내 힘이 받쳐주지 않거나, 내 강박이 우선이면 쉽게 나무들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섬이 되었다, 바람이 되었다 하는 게 사람의 나날이다.내 안의 핍진이나 질곡, 내 안의 거품이나 고집, 이 둘 다를 버리지 못할 때 봄 깊은 저 사람의 마실에서 쓸쓸히 나목이 되어 제 수치를 견뎌내야 한다. 혼자 부는 바람도 없고, 홀로 크는 숲도 없다. 혼자 푸른 언덕도 없고, 홀로 꽃 피우는 나무도 없다. 한 호흡의 양심, 한 손길의 애정, 한 눈길의 의심, 한 모금의 불안, 이 모든 것들이 삶을 이루는 주체이다. 세상만사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이 최선의 아름다움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봄은 오고 계절은 저리도 깊어만 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22

인지 부조화

솔직하다는 말의 함의에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이거나 약점을 묘파하는 것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추녀더러 `넌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그건 무례한 솔직함인데, 솔직함이 타자를 향하는 나쁜 예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나는 못생겼어.`라고 말한다면 이는 내 약점을 고백해 공감을 유도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누군가 솔직하다고 말할 때 그 대상은 타자를 향하는 비난이 아니라, 스스로의 약점을 객관화하는 것일 때 공감하기 쉽다. 하지만 참으로 솔직하기 힘든 게 사람이다. 여우와 신포도 이솝 우화가 그 좋은 예이다. 너무 높이 열려 따먹을 수 없는 포도는 여우에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저 포도는 분명 신맛일거야. 못 먹는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급기야는 정보를 왜곡해버린다. 비겁의 커튼 뒤로 숨어 자기 위안을 도모한다.이런 일은 수없이 겪는다. 내가 추천한 맛집의 위생 상태가 엉망인데도 `음식이 깔끔하다`고 설레발을 치는가 하면, 내가 읽자고 한 책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도 `밤새 눈시울을 적셨다`고 거짓 감상을 유도한다. 내가 산 냉장고가 더 비싼 데다 소음도 심하지만 디자인이 좋고 실용적이라고 떠벌인다. 저 직장을 포기하고 이 직장을 선택한 것이 후회스럽지만 저 직장은 분명 복지 혜택이 부족할 거라며 자기 위안을 한다.이 모든 건 스스로의 약점이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적 방어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부조리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행동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의 태도나 신념을 바꿔버리는 경향을 `인지부조화`라고 한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는 외적 당당함과는 달리 내면적 갈등을 야기한다. 한편 인지부조화를 거치지 않고 바로 행동 수정을 한다면 이 또한 너무 이른 자기 성찰로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솔직해도 자책에 빠지기 쉽고, 스스로를 너무 보호해도 자기기만의 우물에 허덕일 수 있다. 솔직과 포장의 적당한 경계가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게 만만찮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9

어떻게 쓰냐구요?

고뇌하는 방식과 고민거리는 달라도 글 쓰는 자로서의 괴로움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오늘도 님을 비롯한 몇 분들이 제 고민을 보고 공감해오시는군요. 제 번민이 곧 님들의 것임을 알고 위로 겸 위안 차 그렇게 찾아주시는 거겠지요.저도 님처럼 글을 쉽게 쓰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남들 한 시간이면 끝날 쓸 거리도 밤새 잡고 있을 때도 있어요. 이승우 작가가 한 말이라고 님이 제게 전해주셨지요. `글은 한 번도 내게 쉬웠던 적이 없었고 만만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질린 적도 없기 때문에 여태껏 쓰고 있다`라고. 그렇습니다. 자발적 고통에 발 들여놓은 이상 운명처럼 그냥 쓰는 겁니다. 질리도록 글에 휘둘려보지도 않았으면서 곧잘 징징댔던 저를 반성합니다. 진실로 쓰는 자는 그 시간마저 묵묵히 손가락끝을 놀릴 것이기 때문입니다.글 잘 쓰시는 님, 겸손하게도 어떻게 하면 더 잘 쓸 수 있냐고 물어오신 님, 님이 답을 알지 못하듯이 저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안 되는 일 없다`는 말에 가장 적용하기 쉬운 예가 글쓰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쓰기는 다른 예술 분야와 달리 노력에 비례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정직한 손자취` 만큼의 앞날을 예고한다고 믿습니다. 무심코 쓴 헐렁하고 삐걱대는 글, 아무 훈련 없이 뱉어낸 숱한 문구들, 별 고민 없이 직조한 어설픈 문장들. 이들이 얼마나 비경제적이며 비문학적인지는 글쓰기 관련 책들이 깨쳐줍니다. 이 기본 단계만 넘겨도 글쓰기는 한결 수월해집니다.문장의 경제성, 문체 미학의 예술성, 문장의 밀도 등이 온몸에 착착 감기도록 쓰는 작가는 부지기수입니다. 아까워 버리지 못하는 문구 하나로 제가 전전긍긍할 때, 매혹적인 고수들은 그것을 버리면서도 살아있는 글을 씁니다. 절망이자 희망인 그들을 보면서 힘을 내봅니다. 님께 너무 주제넘은 얘길 했지요? 용서 바랍니다. 이 넋두리는 님께 보내는 형식을 취했지만 실은 제게 하는 말이랍니다. 부디 좋은 글 쓰시고, 저에게도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8

아가사 크리스티의 나비

`아흔 세 살까지는 살 것이고, 듣지 못해 미칠 것이며, 간호사가 해칠까봐 앙탈을 부릴 것이다. 가족들에게도 끝없는 괴로움을 안겨 줄 것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노년에 대해 비관적으로 서술했다. 어릴 적 보았던 자신의 할머니의 노년기를 고스란히 자신에게 투영했다. 스스로의 악담대로 그녀는 노년을 맞았다. 차츰 정신을 잃어갔고, 간호사의 도움을 거부했으며, 제멋대로 행동했다. 자신의 어두운 내부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목사관 살인 사건`, `패팅턴 발 4시50분` 등 아가사 크리스티의 몇몇 작품에 나오는 아마추어 탐정 이름은 `미스 마플`이다. 마을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뜨개질이나 수다로 하루를 보내며 늙어가는 노처녀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날카로운 관찰력과 경험에서 오는 직관의 힘 때문이다. 미스 마플을 접할 때마다 아가사 크리스티 자신이 투사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보곤 하는데, 그녀의 간단 평전을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불꽃 같이 산 그녀지만 크고 작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남편의 바람기가 원인이 된, 자작극 성격의 실종과 그로 인한 기억을 놓아버린 일은 결점과 균열투성이 그녀 인생의 상징적 코드가 되어버렸다. `멋지게` 인생을 탕진하고 죽은 아버지, 가난 속에서 집착적 사랑을 쏟는 엄마, 예견된 결핍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글쓰기가 아니었을까.평화로운 세상을 원했으나 욕망 또한 완전히 놓아버릴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고통스러웠다. 어린 시절 누군가 산 채로 잡아서 모자 깃에 꽂아준, 몸서리치는 나비의 날갯짓을 기억하는 일, 그 섬세한 통증 하나하나를 지우기 위해 작가는 플롯을 짜고, 등장인물을 만들고 마침내 미스 마플 같은 매혹적인 해결사를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현실적 삶이 굴곡 많았기에 책 속의 미스 마플은 그토록 빛날 수 있었다.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빛나는 인물은 창조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7

합평하는 시간

글과 관련되는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각자 쓴 글에 대해 합평하는 시간을 가질 때도 있다. 그때마다 느낀다. 써온 작품에 대해 애정을 담아 한 말씀씩 해주는 그 과정이야말로 제2의 창작 시간 같은 것이라고. 웬만한 `자뻑` 환자가 아니라면 구양수·소동파 급 문장가도 자신이 쓴 글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글은 없기 때문이다. 익히 선인들이 백 번 이상의 퇴고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 지 잘 모르는 초보일 때는 쓴다는 자체가 신기하고 재밌을 수가 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겨를 없이 오직 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참으로 행복한 시기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글쓰기에 이력이 붙은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행복 끝, 불행(?) 시작이다. 글을 보는 눈은 깊고 넓어졌는데, 쓰는 능력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친다. 괴로운 나날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해놓고도 안절부절못한다. 제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합평이다.찜찜한 글을 그러안고 있으면 완벽한 내 글이 될 수 없다. 부끄럽지만 동료들 앞에 내놓고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다. 적어도 쓰는 능력보단 읽는 능력이 앞선 다수의 글동무들은 적확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 좋은 말들은 대개 글쓴이가 제 글에서 느낀 여러 문제점들을 재확인시켜준다.불필요한 설명을 없애라, 주인공에게 생동감을 불어 넣어라, 주제를 상징하는 장면에 부연 묘사가 필요하다, 사실적 취재로 장소를 구체화 시켜라. 이 모든 충고는 글쓴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다. 하지만 맘과 달리 한 번 만에 그런 약점 없는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합평의 장에 나를 내놓고 채찍질 할 수밖에 없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문제점들을 점검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제2의 창작에 들어선 거다. 좋은 글은 공감을 전제한다. 혼자 쓰고 혼자 고치기보다, 혼자 쓰고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글 살을 찌우기에는 좋은 방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6

소설 쓰기의 어려움

글쓰기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확고한 의지 없이는 제대로 된 한 편의 글을 내놓기 어렵다. 주변인과의 약속도 미뤄야 하고, 스마트폰의 유혹도 이겨야 하며, 쏟아지는 잠도 극복해야 한다. 내 안에서 풀어진 나를 다독이지 않으면 절대로 가시적인 생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제 안의 악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자라야 글로서 우뚝 설 수 있다. 왜 극소수의 작가만이 살아남았겠는가. 그들은 스스로 부딪치며 견뎠고, 끝내 싸워서 이긴 자들이다. 쓰는 글이 소설인 경우, 쓰는 자는 시간과 노동이란 이중고를 겪어내야 한다. 소설은 머리로 쓰는 게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도 더더구나 아니다. 머리는 어떤 소설을 쓸 것인지 생각하는데 필요하고, 가슴은 활자화된 소설 앞에서 일어나는 여러 정서적 반응 기제의 확인처로서 기능한다. 소설 쓰는 데는 애오라지 묵직한 엉덩이와 예민한 손끝만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 쓰기에 안착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두 가지를 끝내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건이 안 되고 시간이 부족한 핑계가 마련되어 있는 한 점점 소설 쓰기는 멀어진다.위의 얘기는 내 것이기도 하다. 시간은 한 번도 내 편이 되어 준 적이 없고, 글쓰기의 노동 강도 앞에 저질 체력은 언제나 무너졌다. 날마다 고군분투한 것 같지만 언제나 악마의 승리로 아침을 맞았다. 그렇다. 이 모든 건 핑계다. 묵직하게 의자에 앉아 있질 못하고, 예민하게 손끝을 놀리지 못한 자의 자기변명일 뿐이다.삶이 빈약하니 사유가 빛날 리 없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만 있고, 그것을 받쳐줄 철학이 없다보니 초조하게 시간만 보낸다. 내 안에 제대로 된 심지 하나 없어 독자에게 가더라도 공명하지 못할 소설, 이런 것에 대한 부담 때문에 쉬이 써지질 않는다. 지나친 자기연민이나 자기성찰은 소설 쓰기의 제일 방해요소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책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그래도 오직 써라. 그 판단은 잠시 미뤄도 괜찮지 않겠나. 이렇게 스스로를 힐링하는 나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5

열하일기 단상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다양한 버전의 해설서로 먼저 만나는 게 이해하기가 쉽다. 맛보기 해설서로는 고미숙의`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을 추천할 만하다. 그린비 출판사에서 2003년에 출간된 이래 개정판을 거듭하면서 꾸준히 읽힌다. 연암의 삶과 열하일기 둘 다에 관해서 쉽게 풀어썼다. 한마디로 시대를 조롱하고 틀에 박힌 삶을 거부한 자유인 박지원을 재조명하는 책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열하일기를 웃음과 역설이 그치지 않는 한 판의 마당놀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유목, 리좀, 클리나멘, 재영토화 등의 서양 철학 개념을 열하일기와 접목해 알기 쉽게 풀어놓는다. 말하자면 저자는 현대 철학이론으로 근대의 매력남이었던 박지원을 만나게 해준다. 열하일기 광팬인 저자는 연암의 빛나는 유머와 뜨거운 패러독스를 어떻게 하면 널리 알릴 수 있을까만 고민한 것 같다. 그 고민의 산물로 작가는 고전 평론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저자는 연암의 사유를 경쾌하면서도 깊게 중첩시킨다. 연암의 기질과 세계관, 문체반정의 의미, 연암의 호기심, 연암의 유머 코드, 연암의 철학적 사유 등을 차례로 언급한다. 부록의 재미도 지나칠 수 없는데 연암의 일정을 지도로 간략하게 보여주고, 열하일기의 등장인물을 코믹하게 소개하는 `캐리커처`도 싣고 있다. 곳곳에 배치된 웃음과 역설 때문에 틀에 박힌 여행기가 아니라 통쾌한 여행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수행원인 하인 장복과 창대 두 커플이 보여주는 순진한 기행, 주변 지식인들에 대한 조롱, 중국 현지인들과 나눈 우정의 필담 등을 통해 당대 주류 담론에 대한 일침을 가한다. 웃음과 도전이 넘쳐나는 한 자유인의 유쾌한 행보를 상상하며 작가 고미숙은 박지원의 광팬이 되었을 것이다. 시절이 하 수상한 요즘이야말로 유쾌한 웃음과 역설이 필요한 때이다. 더디게 변하던 조선 양반 사회에서 시대를 앞서 자유롭게 살다간 한 지식인의 발자취를 안내 받고 싶으면 고미숙의 이 열하일기 입문서를 권하고 싶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2

데이지의 노래

봄이 왔을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꽃집에 들른 일이었다. 겨우내 방치했던 빈 화분에다 물오른 아젤리아며, 꽃대를 올리기 시작한 서양란을 심었다.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는 일년생 꽃인 데이지 모종을 옮겨왔다. 흰색, 연붉은색, 홍자색 등 다양한 색깔의 데이지는 볼수록 정겹고 소박하다. 빈 화분을 채운다는 건 명분일 뿐, 내가 꽃집을 찾은 진짜 이유는 이런 데이지를 맘껏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언제부턴가 내 마음의 꽃이 되었다. 잎은 낮게 깔리고, 줄기는 곧게 뻗고, 꽃받침은 둥근 꽃 아래 숨어 있다. 꽃과 주변의 경계가 뚜렷해 깨끗하게 피고 진다. 꽃과 잎과 꽃받침이 마구 뒤섞여 너저분한 인상을 주는 팬지 같은 봄꽃에 비해 깔끔하고 소담스럽다. 화려하거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들고 남`의 경계가 확실하다. 잎은 잎이요, 꽃은 꽃인 채로 제 소박함을 드러내는 꽃이 데이지다.좋아하는 꽃이다 보니 위대한 개츠비의 마음을 앗아간 못된 여주인공 이름이 데이지인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리곤 했다. 꽃에 얽힌 전설 때문에 피츠 제럴드는 데이지를 주인공 이름으로 차용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숲의 님프인 유부녀 베리디스는 오매불망 그녀만을 원하던 과수원의 신과 남편 사이에서 방황했다.`차라리 꽃이나 되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랐는데, 소원대로 호숫가에서 데이지꽃으로 피어났다. 으뜸 미녀가 환생한 꽃이니 데이지의 꽃말이 `미인`인 것은 당연하겠다. 또, 전쟁미망인이 된 여자가 유복자인 아들마저 병으로 잃게 되자 소녀들이 `데이지의 노래`를 부르며 꽃으로 위로해줬다는 전설도 있다.두 전설 모두 기품과 비장미가 있으면서도 담백하고 깔끔한 데이지의 정서와 어울린다. 뚜렷한 경계가 있으면서 소박한 기품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내 안에서 이상화된 그 데이지는 잠시 접어두고, 데이지의 꽃말에 `희망과 평화`도 있다니 그 말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이상이든 위안이든 어쨌거나 나는 봄이면 데이지를 보러 꽃집으로 달려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1

고통을 보는 자세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이 언제나 연민이나 배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그것은 유흥거리로 전락해 이미지 조작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전쟁터의 육체적 고통이 가십거리가 되고,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음을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경고한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우리는 타인의 시련과 고통이 담긴 피사체를 유희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본다. 왜냐면 그것들은 나와 먼, 한 편의 영화 같은 볼거리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녀는 인간 고통의 대표적 현장인 전쟁의 불필요성을 강조한다.인류는 전쟁의 역사였다. 그것은 남성성의 욕망 속에 전쟁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손택은 보고 있다. 전쟁의 참사 현장을 찍은 어떤 사진들은 사실성을 보여줄지는 모르지만 진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인의 고통마저도 소비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극적 전쟁 이미지들은 관음증적인 소비 주체자들의 구미를 끌어당긴다.로버트 카파 같은 유명 전쟁 종군 기자도 사진 이미지를 조작한다. `사진 없는 전쟁, 즉 저 뛰어난 전쟁의 미학을 갖추지 않은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손택은 말한다. 전쟁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특히 아군의 육체적 고통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강화에 한몫한다. 갈기갈기 찢기고, 피 흘리는 피사체가 내 편이라면 분노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인지상정의 정서를 이용하는 쪽은 다름 아닌 집권자들이다. 국민들의 순수한 분노야말로 집권 이데올로기적 연대에 큰 보탬이 된다. 이런 순수한 분노야말로 무지하고 천박한 것임을 손택은 통찰한다.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단순 욕망이 영혼을 갉아 먹는 동안, 우리는 전쟁 참상의 심각성을 놓쳐버리게 된다. 모든 전쟁은 모든 고통을 양산할 뿐이다. 세상 갈등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소통을 모색해나가려는 시도야말로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이다. 전쟁은 불가피한 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든 불필요하다고 수잔은 낮은 목소리로 역설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10

청소 단상

얼치기 주부로 살다보니 집안일은 뭐든지 대충이다. 지저분해진 집을 보며 남편은 한 번씩 말한다. `우리집에 손님 올 때 안 됐나?` 방문객이 있어야 그나마 정리정돈 된 집안을 볼 수 있다는 남편 식 완곡어법이다. 해서 남편은 누군가 집에 놀러 온다고 하면 반색을 한다.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며칠은 쾌적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에. 멀리 사는 지인들과 경주 벚꽃놀이를 하기로 했다. 내친 김에 가까운 우리집에서 커피 타임도 갖기로 했다. 사람 오는 건 좋은데 청소가 문제다. 냉장고에는 뭔가 채워져 있긴 한데 실속(먹을거리)이 없고, 거실은 허전해서 깨끗해 보이지만 실은 먼지투성이다. 방이며, 화장실도 다를 바 없다. 필수품은 여기저기 널브러져있고, 제때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는 쌓여만 있다. 손 댈 엄두도 나지 않고, 치울 자신도 없다. 불쌍한 척, 힘든 척해가며 남편을 청소 현장으로 초대한다.그렇다고 너털웃음 지으며 묵묵히 청소해줄 남편이 아니다. 청소기 손잡이를 잡는 것이 큰 시혜라도 베푸는 것인 양, 의기양양 잔소리도 많다. 제대로 바닥을 치우지 않아 청소기 미는 손맛이 안 난다나. 평소 말이 없는 남편인데, 청소할 때만큼은 말이 많아진다. 자칭 주부 점수 과락인 걸 인정하지만 좀 심하다 싶다. 대거리할 만한 명분이 없어 귀마개를 낀 듯 꾹 참고 만다. 듣기 싫은 노래 끝나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나대로 부엌 청소만 열심히 한다. 마음 잠시 불편하고 몸 편한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잔소리는 됫박으로 안았지만 깨끗해진 집안을 보니 참기를 잘했다 싶다. 적어도 사흘은 이 쾌적한 상태가 유지되리라. 그 안에 못 부른 친구들을 초대해 차 한 잔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날려야할 판이다. 오늘의 핵심, 잔소리 듣기 싫으면 평소에 치우고 살자. 아니, 그게 아니다. 잔소리 좀 들어도 함께 하는 청소는 유용한 것. 금세 어지럽혀지더라도, 집 치우고 친구보고, 밥 안 먹고도 (잔소리로) 배부르니 그야말로 도랑치고 가재 잡고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4-09

간담상조

며칠 앓았다. 게을러서 미루기만 했던 일을 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코 안이 헐고, 입술은 부르트고, 목은 따끔거렸다. 통증·발열·두통이 몰려왔고 온몸은 선인장 가시를 두른 듯 쑤셨다. 해삼처럼 몸이 바닥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휴식보다 나은 치료는 없는 법. 한나절이라도 쉬고 싶었다. 아파서 공부 선약을 지킬 수 없게 됐다고 양해를 구했다. 대충 빨랫감만 치워놓고 드러누우려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택배기사인가 싶어 얼른 문을 열었다. 양해 구하는 문자를 받은 친구들이 들이닥친다. 문병이란 건 핑계였다. 얼마나 재바른 손인지 그 바쁜 아침 시간에 이것저것 챙겨서 공부하러 가는 길에 부려놓는다. 차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금세 사라진다. 곰국, 미역국, 레몬차, 복숭아효소, 물김치 등 아픈 사람 기운 돋게 하는 먹거리 앞에서 울컥하다 못해 망연자실하고 만다.우정을 얘기하는 고사성어 중에 간담상조(肝膽相照)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간과 쓸개를 꺼내 보일 수 있는` 흉허물 없는 사이를 말한다. 당나라 때 어려운 처지에서 더 어려운 친구를 생각한 유종원의 우정을 기리는 묘비명에서 따온 말인데, 간담상조하기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의미도 있으리라. 평화로운 나날에는 웃고 떠들고 기뻐하며 친구 되기도 쉽다. 하지만 막상 이해득실에 얽히면 눈 돌리고 고개 틀어 서로 모르는 얼굴이 되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그만큼 친구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간, 쓸개 내놓고 사귀는 극단의 우정까지 갈 것도 없다. 심심하고 덤덤한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건 큰 힘이 된다. 관계란 언제나 상대적이다.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친구가 되어주면 된다. 우정이 없다고 신세타령할 시간에 우정을 찾아 나서면 된다. 단, 평화로운 날에도 힘든 날에도 한결 같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착한 친구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간담상조는 좋은 친구가 되려는 진심어린 노력이다. 우정 분야에서도 하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를 돕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4-08

마음의 복사꽃

복사꽃이 피기 시작한다. 봄 언덕을 온통 분홍으로 휘감는 복사꽃은 제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는 꽃이다. 꽃은 꽃이기를 자랑할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된다. 복사꽃이 좋은 이유는 비슷한 시기에 숨어 피는 다른 꽃에 비해 제 화사하고 선명한 자태를 한껏 드러내기 때문이다. 피는 복사꽃 더불어 마음의 복사꽃도 이맘때면 맡을 수 있다. 장애인예술제에 출품된 문예작품들을 감상하는 일이 그것이다. 시, 수필, 서예, 그림, 사진 등의 종목에서 자신들의 기예와 진정성을 겨루는 이 잔치에 초대되는 것을 나는 `무릉도원 가는 길`이라고 명명하곤 한다. 복사꽃 피는 봄마다 작품을 만나는데다, 눈물콧물 범벅인 채로 감상하고 나면 마치 무릉도원을 지나온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때문이다.올해도 어김없이 무릉에 배 저어간다. 작년보다 더 많은 작품들이 응모되었다. 근육 경련을 참아가며, 땀내 풍겨가며, 허리 끊어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생산해낸 창작품들은 저마다 고유하고 구체적인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복사꽃 만발한 셈이다. 아프지만 달달한 향기는 글 계곡 가득하고 사연이란 꽃잎은 바람에 흩날린다.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뒷전에 숨어 어린 딸의 공연을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눈물, 비록 말을 하진 못하지만 좋은 음악으로 현실의 고통을 긍정의 아이콘으로 승화시키는 아가씨,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사고만은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몇몇 분들의 문학적 감수성. 꿈결인 듯 동굴 깊숙이 빨려 들어가다 보면 환한 빛이 보이는데 그게 바로 별천지다.인생은 고통이자 곧 환희다. 가슴 한 쪽이 통점으로 짓눌러대는가 싶다가도 그 고통을 유머나 긍정의 화답으로 이끄는 찰진 정신력에 이르면 읽는 이의 마음도 어느새 복사꽃처럼 환해진다. 고통과 고뇌 없는 삶의 꽃밭이 어디 있으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오는 그것들을 끌어안아, 끝내 복사꽃밭으로 만들고야 마는 그들의 단단한 내면. 겨우내 제 고통 농밀했기 때문에 그 언덕 저토록 화사한 절정을 맞는 게 아니던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