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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교양의 목적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된 흐름이 안나의 외도와 파국이라 할지라도 그건 작가가 설계한 미끼일 뿐, 실제 봐야할 게 너무 많아 완벽하게 읽어내기엔 벅찬 소설이다. 백여 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역사적·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하고, 인간 군상의 다양한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작가적 분신이 가장 많이 투영된 듯한 인물이 레빈인데 어떤 장면은 영화를 보지 않았는데도 마치 스크린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회적이고 자유주의자인 유부남 오블론스키와 시골풍에다 소심한 귀족 노총각인 레빈이 식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태생적 생각이 다른 둘은 행동 양식도 다르다. 레빈의 생각은 이렇다. 부르주아들의 시간 보내기용 먹거리에 지나지 않는 굴보다는 치즈 얹은 흰 빵이 일용할 양식으로는 낫다. 시골에서는 일 하기 위해서 빨리 배를 채우려 하는데, 이곳 식당에서는 최대한 더디게 배를 채우기 위해 애쓴다.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 손톱을 기르고, 소맷부리에 접시만한 단추를 달고 다니는 게 못마땅하기만 하다. 시골 사람들에게 옷소매는 걷어 부치기 위해 있고, 손톱도 일하기 편하기 위해서는 짧게 자르는 게 낫다. 식당의 온갖 장식품도 충만한 영혼을 더럽히는 것 같고, 머리로만 일하는 인간들이 레빈에게는 야만스럽게만 다가온다.그때 도회 남자 오블론스키가 나선다. 모든 교양의 목적은 쾌락에 있으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쾌락적 충만의 실용성을 충고하는 오블론스키에게 레빈은 조금 마음이 열린다. 레빈이 모스크바에 온 목적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이고 그것은 양심적 쾌락, 즉 충분한 교양의 목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사랑은 온갖 자기혐오와 자기경멸을 넘어선 체험이어야 하지 고지식함이나 고상함에 머무는 망설임이어서는 안 된다. 레빈이 그 쾌락적 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지를 상상하며 읽는 것도 협의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는 재미의 하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5

다를 뿐 잘못은 아냐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중에`안녕하세요`라는 토크 쇼가 있다. 전국의 고민남녀들이 출연해 자신의 고충을 방청객들에게 호소하고 공감을 유도하는 내용이다. 때로는 코믹하게 더러는 진지하게 풀어놓는 사연들을 보면서 세상에 저토록 공감되는 고민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의 출연자 한 명은 특별했다. 전형적인 한민족 핏줄이건만 선천적으로 파란눈으로 태어나 놀림 받은 기억이 있는 젊은 엄마가 나왔다. 그녀의 어린 딸도 파란 눈동자를 가졌는데 벌써부터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의 불쾌한 경험이 있는 출연자로서는 커가는 딸이 받을 상처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모녀가 뿜어내는 파란 눈빛은 신비한 인형의 그것처럼 이국적이고 매력적이었지만 특이하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되고 있었다.내가 어렸을 적에도 예의 출연자보다 더한 신체적 `다름`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희기만 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파란색이 아니라 붉은색이었다. 선천적으로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알비노 유전 현상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파란눈의 모녀와 마찬가지로 그건 질병도 전염병도 아니었다. 다만 남과 조금 다르게 태어난 것뿐이었다. 그 때문에 짓궂은 애들에게 수모를 당해야만 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나와 다름에 대한 관용의 시선은 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다수가, 특수하고 특별한 소수를 홀대해도 괜찮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서양인이 파란눈을 가졌으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동양인이 파란눈으로 태어났으면 무시의 대상이어도 좋을 근거는 없다. 다수라는 강압의 눈이 소수라는 연약한 눈을 제압할 이유 역시 없다. 그 무모한 눈빛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깨쳐주는 것은 우리 어른이 할 일이다. 모르고 해악을 끼치는 어린 영혼의 모든 잘못은 우리 기성의 책임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4

숨그네를 탔어

몽환적이며 비약적인 문체로, 직설적이고 사실적인 얘기를 쓸 수 있을까. 적어도 헤르타 뮐러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니 그녀가 쓴 `숨그네`를 읽기 전까지는 그런 의문을 가졌다. 끝 간 데 없는 고통과 헤어날 수 없는 허기의 순간을 저토록 낯선 말들의 조합으로 완성해낸 작가는 흔치 않다. 누군가 이 책이 재미있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고, 누군가 이 책이 좋은 책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라고 얼버무릴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 책에 밑줄을 긋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말할 것이고, 누군가 이 책을 소장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물론, 이라며 망설이지 않고 답하겠다. 불친절하고, 에두르고, 솟구치고, 앞서가는 문장들의 너울에 독자는 속수무책으로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다. 허공만큼 넓은 길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이랄까.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수용소에 붙들려간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취재기적 소설은 서늘한 산문시로 읽힌다. 사실적 경험담이 시적, 몽환적 기법의 옷을 빌려 입었기에 그 아우라가 제대로 발현되는지도 모르겠다. 아픔을 아프다고, 배고픔을 배고프다고 호소하는 건 진부하다. 아픔이 `숨그네`가 되고 허기가 `배고픈 천사`가 되는 메타포를 거치고서야 낯선 언어들이 펼치는 정직한 실존은 되살아난다.수용소 생활의 조각보 같은 일상이 구체적 이미지로 승화되었음에도 부분적으로 난해하게 읽히는 게 이 책의 약점이다. 그럼에도 그 책임을 작가에게만 지울 수도 없다. 극한의 생존 조건에서 굶주림과 수치심을 경험한 사람의 심리는 온전한 형태의 문장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갇히고 길들여진 자의 통점이 확산되면 당연히 그 의식의 심연은 발작을 일으키고, 그 때의 글은 불친절한 수사나 애매한 덫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그 수사나 덫이 낳은 언어유희가 쉼없이 독자들을 끌었다 놓았다 하는 데, 묘한 그 이끌림 덕에 `헤르타 뮐러` 또는 `숨그네`는 오래 독서계에 남는 대명사가 될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3

사슴이 우네

고영민 시인의 시집 `사슴공원에서`의 표제시 덕에 `녹명(鳴)`을 알게 되었다. 기실 나를 울린 것은 `사슴 울음 소리`가 아니라 `누가 벗어놓은 신발을 돌려 놓았다`라는 구절이었다. 돌고 도는 계절엔 경계가 불분명하고, 나는 먼 곳에 있고, 내 앞의 당신은 침엽수처럼 무표정 하다. 그래도 언젠가 본 책 속의 사슴 공원처럼 우리는 사랑을 꿈꾸고 단비를 기원한다. 내게 시는 읽는 게 아니라 오래 들여다보는 것이다. 시 속의 저 신발을 돌려놓은 이 누구였을까를 생각하는 충만한 엔돌핀의 시간만큼 독자로서 미소 짓게 된다. 내가 벗어 놓은 신발을 누군가 돌려놓았든,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을 내가 돌려놓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을 포착하는 시인의 다사로운 눈썰미가 있었기에 사슴의 울음으로까지 확장되는 시구를 건질 수 있었으리라.시경(詩經)의 소아(小雅)에 녹명 부분 시가 나온다. 다북쑥 뜯던 사슴은 우우하고 제 기쁜 울음으로 먹이 있는 곳을 알린다. 거문고 켜고 생황을 부니, 광주리 받들어 주변 사람들도 몰린다. 나를 좋아해 (사슴은) 바른 도리를 일러준다. -이런 내용의 시이다. 사슴은 다른 짐승들과 달리 먹이를 찾으면 기쁜 울음으로 주변에 알린단다. 어진 임금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런 시가 탄생되었으리라.사슴 울음소리를 내는 건 쉽고도 어렵다. 완고한 타자의 세계관 앞에서 뻗어가는 나의 실존이 울어주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더구나 상황은 고정된 자아와 변화무쌍의 타자로 바뀌기도 한다. 따라서 사슴의 기쁜 울음은 온 우주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울음이 되기 십상이다. 강한 사자는 제외하더라도 여린 토끼나 비슷한 염소에게까지 울음소리를 할애하는 게 쉽지는 않다. 그 배타성의 한계를 일찍이 목도했기에 시인은 `사랑이 식기 전에, 밥이 식기 전에` 서둘러 사슴 울음소리 들으러 가야 한다고 다독이는지도 모르겠다. 약자라면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풀밭의 나날을 꿈꾸는 것 그것이 착한 시인들의 사명이런가./김살로메(소설가)

2013-03-12

산불

야속하게도 왜 산불은 동시다발적으로 오는지. 삼월 초의 날씨로서는 백여 년 만에 27도에 육박하는, 볕 좋고 바람 많은 날씨였다. 오후가 되자 도시는 멀리서부터 검회색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초여름 같은 수은주를 시샘하는 봄비가 오려나 싶었다. 그게 아니었다. 도시 남쪽과 북쪽에서 잇단 산불로 온 허공이 연기에 휩싸이고 있었다. 걱정과 우려와 공포가 뒤섞인 호기심 서린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삼십 오층 높이에서의 산불 현장은 한 눈에 잡혔다. 불꽃은 도심 가까운 산허리를 휘감았고, 오가지 못하는 차들은 비상 깜박이로 대로가 주차장화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대형 물바구니를 달거나, 물탱크를 장착한 헬리콥터들은 쉼 없이 강과 현장을 오갔다. 남쪽의 또 다른 산불 현장의 헬리콥터들은 강까지 오지 않고, 근처 저수지 물을 퍼 나르고 있었다. 하늘 길에서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한 질서 같았다.헬리콥터는 강에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해야만 물을 담을 수 있었는데, 강 표면에 이는 프로펠러 바람 동심원처럼 명치끝에 아찔한 파문이 일곤 했다. 호기심은 금세 사라지고 통증과 공포와 위기감만 온몸에 달라붙었다. 가파른 산과 주택 현장을 누빌 소방관들과 주민들, 관계자들의 수고와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집으로 들어오려는데, 현관문 돌리는 아귀힘도, 신발을 쉬 벗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잠깐 봤음에도, 불과의 사투를 지켜보는 일은 맘 무거운 그 무엇이었다. 모든 말들의 무용함으로서만 이 산불 현장을 말할 수 있었다. 하물며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겪는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입술을 건너 간 말들은 화근(禍根)이 되고, 손끝에서 날아간 불티 역시 화근(火根)이 된다. 이때의 모든 부주의는 유죄이다. 화근의 원인은 순간이나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으니. 길고 힘겨운 불꽃과의 사투는 말줄임표 말고는 제대로 설명할 길 없다. 아, 새 아침이 왔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헬리콥터들의 공중 행렬은 계속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11

상추라는 푼크툼

독서 모임에 가면 책보다 더 유의미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 친구가 말한 핵심 장면을 마음으로 찍어 들여다보면 짧은 생각 하나가 정리되곤 한다. 인화된 사진은 전원주택 집들이 장면이다. 근경으로 집이 보이고, 사진 중간의 야외 식탁엔 노란 앞치마를 두른 섬세한 안주인이 삼겹살을 굽는 중이다. 분주해진 안주인을 도와 누군가는 밥을 푸고, 다른 누군가는 낮 술잔을 챙긴다. 왼쪽 원경이 텃밭인데, 그곳에서 젊은 누군가는 상추를 따고 있다. 안주인의 바쁜 손길과 달리 눈길은 텃밭 상추 따는 친구에게 가있다. 순진한 도회지 얼굴의 그녀는 상추의 연한 윗대궁만 톡톡 딴다. 말리기엔 너무 멀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좋은 분위기를 망칠 수도 없어 안주인은 웃지도 울지도 못할 애매한 표정만 짓는다. 상추 따는 친구는 밑대궁부터 따는 것이 상추나 주인 심지어 자신마저 배려하는 것임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이어야 한다. 그래야 안주인의 저 표정에도 악의 없음이 증명되니까.이 사진에서 `전원주택에서의 친구들과의 다정한 점심 한때`만 읽는다면 일반적 보편적 시각인, `스투디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상추 윗대궁을 따는 아무 생각 없는 친구와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안주인의 섬세한 표정을 읽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이 된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푼크툼은 하나의 `세부요소`이자 `찌름`이니까.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는 나만의 생생한 영감의 세계로 이탈하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다. 친구들과의 단란한 점심 식사 장면의 일반성을 떠올리는 것보다, 연한 꽃대궁을 무심히 꺾어버리는 예견치 못한 친구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모티프가 된다. 눈치 못 챈 다른 친구들이 맘껏 웃으며 소주잔을 기울일 때 여린 상추에 눈길을 주는 안주인을 읽어내는 것 역시 푼크툼이다. 푼크툼은 고상하고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 엉뚱하며, 은밀한 개별성을 지닌다. 너무나 비의지적인`찌름`인 푼크툼의 구체적 사례들에서 예술은 출발하는 게 아닐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3-08

바넘 효과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독서 지도 프로그램을 짜면서 내 식으로 만든 `바넘 효과` 실험 문항의 일부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성향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 특성으로 여기는 것이 바넘(Barnum) 효과이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 타로점, 철학관 사주 등을 믿는 현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오늘 첫 시간에 무작위의 수강생을 상대로 이것을 적용시켜보았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난 독서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제시한 스무 개 항목 전부가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한 사람이 있을 만큼 대체로 바넘효과가 증명되었다. 하지만 겨우 여덟 개 항목에 체크한 이도 있었는데, 순간 번쩍하고 깨알 같은 깨침이 지나갔다.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김살로메(소설가)

2013-03-07

칸막이 학구파는 되지 마

입학 시즌이다. 신입생인 아들도 자신의 시간표를 메일로 보내왔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긴밀한 연락에 참고가 될까 하는 작은 배려이리라.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표는 영어를 빼면 온통 수식과 기호만이 가득한 과목들뿐이다. 저 딱딱하고 재미없는 학문에 청춘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그건 이과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 나의 편견일 뿐, 어쩌면 아들은 인문학 책 읽고 독후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보다 실험 및 계산 결과를 도출하는 그 과정에 더 흥미를 느낄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이라는 게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사고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간접 경험과 폭넓은 교양의 기초가 되는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맘에 아들에게 보내줄 책을 책장에서 고른다. 남편이 읽던 자기계발서에도 눈길이 간다. 아들에게 도움 될 책인가 싶어 훑어보는데, 흔한 말로 `살아 있네` 하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망설일 필요 없이 보낼 책의 목록에 끼운다.아이비리그 기숙사 학생감 생활을 오래한 저자는 그곳에서 만난 학생 둘을 비교한 일화를 소개한다. 활발한 성격인 단짝 여학생들은 시험 기간만 되면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나. 한 명은 칸막이 도서관에 둥지를 튼 채 일체 기숙사 모임과는 발을 끊는다. 다른 한 명은 시험 기간이 아닐 때와 마찬가지로 스터디를 조직하고, 자료를 공유한다. 모여도 공부 반 잡담 반일만큼 천하태평이다.누가 성적이 좋고, 나아가 누가 옳은가를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트레스 지수만큼은 활발한 사교파에 비해 칸막이 학구파가 더 심할 것이다. 공부 자체가 매번 즐거울 리는 없지만, 다크서클 드리운 채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공부에 집착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공부하겠다고 유폐를 자처하는 부류보다는 사회적 소통을 공부만큼이나 중요시 하는 학생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 보인다. 보내준 책을 읽는 아들도 이런 마음을 알아챘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06

롤리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수록 좋은 소설일 때가 있다. 섣부른 작가의 입김이 책이란 유리창에 서리거나, 책갈피를 넘기는 독자의 손끝에 작가의 손길이 자꾸 부대낀다면 이는 독자를 배려한 소설은 못 된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기만 하면 되는 소설. 의도하는 바 없기에 변명할 필요 없고, 바라는 바 없기에 훈수 둘 일 없는 소설. 쓰는 작가는 단지 그것을 끝낼 궁리를 하고, 읽는 독자는 묵묵히 마지막 장을 덮기만을 바라는 그런 소설.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답할 필요 없고, 설사 질문 하더라도 판단유보로서 독자의 권리를 곱씹을 수 있는 소설. 이런 소설은 나를 매혹시킨다.`롤리타`가 내겐 그랬다.롤리타는 소설을 빙자한 산문시이고, 험버트를 가장한 작가 나보코프의 심미적 고백록이다. 흠잡을 데 없는 산문적 글쓰기는 시종일관 균질한 농도로 독자를 사로잡는데, 소설은 메시지가 아니라 문장으로 승부한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작가로서 부도덕한 작가 의식에 대한 세간의 혐의를 의식했을까. 전통적 액자 기법으로 그 혐의를 피해가려 한 것은 독자로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설계도가 필요 없을 만큼 첫 글이 다음 글을 몰고 가는 글 장단이 독자를 압도하는데 소심한 부채감, 이를테면 작품성에 대한 일말의 회의를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작가 입장에서는 소설은 시작하면 끝내야 할 심리적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노동의 범주에 넣을 만한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심연의 경계에서 폭발하는 무질서한 심상을 무한 발설하는 욕구에 휩싸인다. 그것이 단순한 욕구로 끝나지 않고 예술성을 확보하려면 독자보다 심리적·심미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 거기엔 독자를 가르치려는 위선도 자신을 과장하려는 위악도 필요 없다.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작가의식만 있으면 된다. 도덕과 교훈과 감동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입체적 인생의 질문지, 소설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롤리타는 썩 매혹적인 소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05

공감과 동정

공감과 동정은 우정이나 애정을 둘러싼 여러 환경에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크게 보아 공감과 동정을 같은 범주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공감과 동정은 별개의 감정이다. 심리학에서의 공감(empathy)은 객관성을 담보한 이해의 감정이다. 당사자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 사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이해하되, 나의 입장과 관점을 버리지 않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동정(sympathy)은 주관적 심리 상태의 자기 반영이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고, 같은 기분이라는 직접적 감정으로 상대에게 쉽게 동화되는 상태를 말한다.한 예를 들어보자. 직장 상사에게 서류철을 패대기 당하고 뺨까지 맞은 남자가 있다 치자. 공감하는 여자라면 남자의 서류철 정도를 챙기고, 남자가 자신의 억울한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남자의 하소연에 맞장구를 치되 객관성을 잃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다. 반면 동정하는 여자라면 남자보다 자신이 더 흥분하고 감정이입 되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상사에게 덤빌지도 모른다. 난처하고도 억울한 남자의 입장이 곧 나의 감정이 되어 중심을 잃고 동화되어 버린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앞서 여자의 태도에 더 당황하게 된다.수치심이나 열패감 또는 슬픔에 휩싸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공감을 원한다. 동정은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공감은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공감하느냐 동정하느냐는`감정의 객관화`에 달려 있다. 오늘밤 술 취한 친구가 슬픔이나 분노로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동정하고 싶다면 친구보다 더 취한 목소리로 친구 편을 들자. 당황한 친구는 퍼뜩 술이 깬 나머지 다시는 당신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면, 공감하고 싶다면 친구 얘기에 그저 옳다고 맞장구 쳐주며 들어주자. 비록 취했지만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친구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공감하는 당신은 동정하는 당신보다 향기롭고 미덥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3-04

한국식 교육

`데모크라시 프렙차터 스쿨`은 뉴욕 빈민가의 자립형 공립학교이다. 고등반 졸업생 45명 전원이 평균 7개의 대학에 합격한 기적을 이뤘다. 이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건 한국식 교육을 모토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이년 전부터 우리의 보도 채널들은 이 학교 소식을 전해왔는데, 젊은 교장 세스 앤드류는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 받아 참석했단다. 저소득층에, 한 부모 자녀가 대다수인 이 학교는 2005년 설립한 이래 `열심히 공부하자, 대학에 가자,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교훈으로 한국식 교육을 실천해왔다. 앤드류의 교육 방침은 우리나라에서의 현장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십여 년 전 원어민 교사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앤드류는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할렘 같은 지역의 공부 분위기 쇄신을 위해선 `한국식 오기와 열정`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부만이 살 길이이다, 공부해서 남 주나` 같은 현실적 가치와 사제지간의 돈독한 정 등 전통적 교육 가치가 합쳐져 한국식 교육 이념이 탄생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코리안 프로그램으로 프랩 스쿨은 최하위 학교에서 최우수 학교로 변모했다.이런 소식에 자부심이 일다가도 마음 한 쪽이 무거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제일의 교육 열풍을 자랑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 장밋빛이 아니질 않던가. 왕따문제, 학교 폭력, 주입식 교육, 타율적 강제, 공부지상주의 등 숱한 문제들이 잠복해있다. 현명한 해결 방안 없이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지쳐가고, 학부모들 역시 제 교육 문제에 부담을 안고 있다. 우리 교육의 낭패한 이런 모습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은 없으니 다행인 것일까.어느 나라 교육이든지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교육의 긍정적 측면을 도입해 그들 현장에 접목한 만큼 성과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식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자율과 창의성으로 대표되는 그들식 교육이 조화를 이뤄 한국식 교육의 참 결실이 세계만방으로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28

헵번의 옆모습

요즘 젊은 연예인들의 얼굴은 똑 같다. 갸름한 달걀형 라인에 이마는 봉긋하고 콧날은 오뚝하며 눈은 앞트임을 곁들인 쌍꺼풀이 대세이다. 눈썰미 젬병인 나 같은 이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 갑갑하기만 하다. 아이돌의 노래나 춤을 보면서 활력을 얻고 싶은데,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되니 재미가 반감 될 수밖에. 개인적으로 나는 달걀형 얼굴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목구비가 아무리 뚜렷해도 턱 선이 곱지 않으면 내 기준의 미인 목록에서 탈락시키곤 했다. 이마 좁고, 광대뼈 나오고, 턱 선이 발달한, 전형적인 몽골리안 계통의 내 얼굴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한데 무개성한 브이자 얼굴이 유령처럼 뒤덮는 세상을 보면서 조금 달라졌다.인물사진의 대가 유섭 카쉬(Yousuf Karsh)가 찍은 오드리 헵번의 옆모습을 오래 들여다 본 적이 있다. 흠잡을 수 없는 오드리 헵번이지만 예의 내 기준에 의하면 그녀가 미인일 리 없었다. 사각 턱에 가까운 얼굴형 때문이었다. 그녀가 현재 우리 연예계에 진출했다면 턱 선 교정은 피할 수 없는 강요가 되었을 것이다. 한데 들여다볼수록 무한 애정이 생긴다. 발랄한 듯 기품 서린 오드리 헵번의 숨은 `강단`이 그녀의 턱 선에서 보이는 것이다. 진주 품은 조가비처럼 어금니 꽉 깨문 외유내강이 그녀의 턱 선에서 읽히는 것이다.배우로 이룬 꿈을 유니세프 친선대사라는 사회적 가치로 환원한 그 행보가 각진 턱에서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명성을 개인적 목표보다는 사회적 이타심과 결합하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건전한 결정이 아무리 즉흥적이라도 해도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전제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헵번식 사유의 출처를 나로서는 그녀의 강인한 턱 선에서 찾고 있었던 것. 그녀가 세상을 뜬 지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우아하고 결단력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누군가의 내면을 자극하는 강단 있는 매개물이 되어 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27

코트의 진실

델포이 아폴론신전 진실의 벽엔 탈레스 혹은 킬론이 말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다. 이 금언이 대중성을 확보한데는 자신의 철학 근간으로 이 말을 애용한 소크라테스의 공이 크다. 어쨌든 탈레스에 의하면 남에게 충고하는 일은 쉽고,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들다고 했다. 프로이트 역시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나보다 타인이 나를 잘 알고 있으며, 역으로 이웃보다 내가 이웃을 잘 아는 수가 있다고 했다. 대체로 인간은 나 자신보다 타인을 분석하는데 탁월한데 이는 반쪽짜리 분석일 뿐이라고 보았다. 나를 포함한 분석이어야 제대로 된 정신분석이 되기 때문이다.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가는 프로이트 자신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여름휴가 때 한 청년을 알게 된 프로이트는 그와 친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청년은 곧 산책 가자는 프로이트의 제안을 거절했고, 아내가 오기로 했으니 저녁마저 먼저 먹으라며 피했다. 다음날 부부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프로이트는 들뜬 맘으로 청년의 식탁으로 갔다. 부부 자리 맞은편에 의자 하나가 마련되었는데, 그곳엔 두툼한 코트가 걸쳐 있었다.분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러했다. `나는 이제 당신이 필요 없고, 여긴 당신 자리가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이 사례는 `정당한 오해`에 대한 진실을 보여준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에 그 어떤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해도 당한 쪽에서는 상대방의 속을 다 읽어낼 수 있다. 이 경우 진실을 밝히기라도 한다면 청년은 모욕을 느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를 `내적 부정직함`이라고 불렀다.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프로이트. 하지만 타인에 앞서 나를 알려면 이 정도의 따끔거림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자신이 걸쳐 놓은 코트 때문에 상대를 아프게 하는 나는 상대가 눈치 채기 전, 가만 의자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코트 걷은 그 자리엔 상처 받은 프로이트의 엉덩이를 데울 방석을 깔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26

용서의 시효

누구나 실수한다. 실수나 상처가 당사자들에게 큰 아픔이긴 해도 그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 후가 더 중요하다. 사람이란 게 간사해서 받은 상처는 잦고 깊고, 준 상처는 드물고 얕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용서는 쉽게 받고 싶고, 용서 하기는 어려운 이유이다. 내가 준 상처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건 건 얌전한 모범생을 순간의 판단 잘못으로 자전거 도둑으로 몬 경우였다. 그 아이와 부모의 눈빛이 나를 용서하지 않았기에 그건 아직 미완의 사죄로 남아 있다. 그들의 분노와 응어리가 현재진행형이라면 당연히 내 사죄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용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역시 내가 판단할 것은 못 된다.영화 `밀양`에서는 신이 용서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를 또 한 번 수렁으로 빠뜨리고, `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공소시효가 면죄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와 관계자를 농락한다. 출옥한 범인이 `봐라, 법과 대중이 날 이렇게 용서하는데, 당사자인 너희들만 용서하지 못하고 있잖아.` 라는 뻔뻔함으로 용서의 칼자루마저 자신이 가지려 한다.용서의 시효는 가해자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용서의 아버지는 시간이다. 정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면 피해자가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주는 게 양심 있는 자의 태도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잘못을 해놓고도 용서의 시효마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자숙 기간이나 용서의 시효는 한 사흘쯤이면 충분한 것일까. 용서의 기간이 단축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몰라 반문하기까지 한다.법적용서는 공소시효가 정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신이 용서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엔 시간이 용서한다. 그 시간을 정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피해자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성찰할 일이다.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피해자인척 하는 건 상처 입은 자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25

왼손잡이 로망

중학교 2학년 때 내 짝지는 왼손잡이였다. 상냥하고 눈치가 빨라 선생님들께 귀여움을 받았다. 그녀가 선생님들께 관심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왼손잡이에 대한 시선이 썩 호의적인 시절이 아니었다. 왼손잡이라도 글씨만은 대부분 오른손으로 썼기에 짝지의 상황은 희소가치가 있었다. 공책을 오른쪽으로 90도 각도로 돌려놓고, 짝지는 옛사람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글씨를 썼다. 오른손잡이처럼 노트를 놓고 쓰면 왼손바닥에 연필 자국이 새까맣게 묻을 뿐만 아니라 노트 글씨에도 얼룩이 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지휘봉으로 짝지의 꺾인 노트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얌마, 오른손으로 바꿔 써!`하곤 한마디씩 하곤 했다. 훈계나 시비를 위한 것이 아닌 애정과 관심을 향한 것이었다. 짝지는 그 상황을 즐길 만큼 마음이 여유가 있었고,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사춘기가 오던 시절이었기에 남자선생님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한데 남선생님들의 관심은 왼손으로 글씨 쓰는 짝지에게만 가 있었다. 나도 짝지처럼 되고 싶었다. 짝지 따라 노트를 비스듬히 놓은 채 왼손 글씨를 써보기까지 했다. 왼손 글 솜씨는 늘지 않았고, 여전히 남선생님들의 관심은 짝지에게 가 있었다.왼손잡이가 못 된 나는 아직도 왼손잡이에 대한 로망이 남아 있다. 해서 아들과 딸이 왼손잡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은근히 서운하기까지 했다. 한때의 경험 한 자락이 평생 자기 인생관에 녹아날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다. 지금도 새로운 왼손잡이를 만나면 `글씨도 왼손으로 써요?` 라고 묻는 버릇이 있다. 상대의 대답이 아니라고 하면 괜히 실망하게 된다.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녀가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건 예쁘고 상냥한데다 영민했기 때문이지 결코 왼손잡이어서만이 아니다. 그래도 왼손잡이에 대한 긍정적인 로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22

인사

술을 못 마시더라도 술잔을 들어야 할 경우는 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작은 행동 때문에 더 좋아진 적이 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그분은 건배가 있을 때마다 내가 든 술잔 높이보다 낮은 높이로 자신의 술잔을 부딪는 것이었다. 우리사회처럼 은연 중 위계질서가 몸에 밴 곳도 없는데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분이 내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재미로 그러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몸에 밴 자연스런 제스처였다. 조그만 데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나는 세 번째 잔부터는 무조건 그분보다 낮게 들었다. 그분이 눈치 채지 않게 속으론 끙끙댔다. 한 편의 코미디 같은 그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동판화 중에 `인사`라는 작품이 있다. 키가 크고 군살이라곤 없는 두 남자가 서로 낮게 인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허리를 있는 힘껏 앞으로 꺾어 바닥과 친구가 될 정도다. 하지만 얼굴은 서로의 옆모습을 향해 치켜들고 있다. 서로 계급이 낮다고 생각해, 한껏 고개를 숙이긴 하는데 상대를 의식하고 눈치를 보느라 차마 얼굴까지는 숙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까지 낮아진 게 아니라 몸만 낮아지는 인사의 겉치레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관계란 상대적이다. 상대 쪽에서 `적의 없음, 배려할 것임, 군림할 의향 없음, 낮아질 것임, 친구가 되고 싶음` 이런 신호를 보내오면 내 쪽에서도 당연히 더한 우호와 존경으로 상대를 대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클레의 그림처럼 형식적인 것이 되지만 맘이 원하는 대로의 배려는 무척 자연스럽다.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눈높이는 상대와 맞추고 술잔은 낮게 들어보자. 단, 고개를 지나치게 숙일 필요는 없다. 비굴을 감춘 게 들키거나, 과장된 마음이 드러나면 명징하던 술잔소리도, 맞춤한 눈높이도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니. 술잔 낮게 들고, 눈높이를 상대에 맞추러 오는 세상의 모든 친구들과 건배를!/김살로메(소설가)

2013-02-21

돌아오지 않을 것들

일반적으로 여행의 끝은 `돌아옴`에 있다. 그 덕에 우리는 당장이라도 여장을 꾸려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 돌아 올 희망의 기미는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온전한 힘이다. 하지만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라면? 맥없이 너털거리는 발자국이요, 오래 쌓인 무덤 속 먼지다. 그런 여행이라면 행선지도 궁금하지 않고, 행장 꾸리는 손끝은커녕 콧노래도 곁에 두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행을 두고 돌아오지 않는 눈부심이라고 비에 젖은 꽃잎처럼 말하는 시인이 있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 첫 여자도 첫 키스도 첫 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 얼마나 눈부신가 / 안 돌아오는 것들`. `여행`이란 편도 차표를 끊은 이진명 시인은 사그라지는 것들의 씁쓸한 찬란함에 주목한다. 차표 쥔 시인의 손끝에 매달려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새벽을 맞는다.모든 만남은 여행의 다른 이름이다. 반짝이는 모래알, 뭉툭한 자갈돌, 설레는 무지개, 번득이는 번개처럼 여로의 꽃은 피고 진다. 애초에 질 꽃이라면 씨앗 심지 않으면 좋으련만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순정한 영혼들은 만남이란 꽃을 피운다. 하지만 꽃의 길은 필연적으로 희거나 검은 상처를 드리운다. 돌아오지 않거나 돌아올 수 없는 그 흔적들이 뭉쳐져 삶을 단련시킨다. 첫 슬픔이거나 첫 매혹이었을 그것들은 때가 오면 담담하게 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여행이란 꼭 돌아와서 좋은 것이긴 하지만 가끔은 돌아오지 않아서 찬란하기도 하기 때문이다.의혹으로 흔들리는 누군가의 눈빛을 읽는다거나, 닿을 수 없는 협곡 같은 절망이 그대 입술에 맺힌다면 이제 당신들은 여행을 끝낼 시점이다. 돌아오지 않을 그 꽃잎일랑 놓아주고, 새로운 씨앗을 틔우는 여행을 꿈꿔도 좋은 것. `첫`이라는, 안 돌아오는 것들의 묵직한 축복을 위해 시가 있고, 씁쓸함이 있고, 잠 못 드는 새벽은 온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20

더는 연습

소학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 하는 것이 그 첫 번째요, 부모형제의 권세를 빌어 좋은 벼슬을 하는 것이 두 번째 불행이며, 재능이 높아 문장을 잘하는 것이 세 번째 불행이다. 소학 말씀대로라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세 가지 불행의 이유에 하나도 닿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행할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고 행복한 건 아니다. 때론 불행해도 좋으니 저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해 봤으면 하는 맘이 든다. 특히 세 번째 구절, 문장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이룰 수만 있다면 불행이 오기 전 자기 관리를 잘 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면 되지, 하는 싱거운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하지만 옛말 그르지 않다고 전적으로 소학의 저 말씀을 신뢰한다. 어린 나이에 성공하면 편한 일상은 누릴지 몰라도 정신적 황폐를 곁에 두기 쉽다. 이른 성공을 이룬 예술가들이 이 요절하거나, 말로가 좋지 않은 경우가 하 얼마이던가. 집안 배경 덕에 이룬 표면적 성공 역시 본받을만한 건 못된다. 재벌가의 볼썽사나운 이권 싸움이 가십거리가 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문장 재주가 좋아도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내면 수양에 소홀한 채 자신의 능력에만 기댈 경우 시샘의 상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존경의 대상은 될 수 없다.이제껏 내 허영심 때문에 문장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고픈 바람을 버리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이룬 적 없는 그 욕심을 내려놓도록 연습해야겠다. 맛 나는 요리엔 많은 재료가 필요한 게 아니다. 훌륭한 맛을 내려고 이것저것 재료 욕심을 내다보면 네 맛도 내 맛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재료라는 욕심을 뺄수록, 잘 쓰겠다는 허영을 버릴수록 원재료에 가까운 담백한 맛을 얻을 수 있다. 음식이든 글이든 더해서 얻어지는 맛보다는 덜어서 내는 맛이 더 진실에 가깝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19

아니 에르노

수치심을 감추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가령 `열두 살 무렵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어요`라고 누군가 진지하게 말한다면 듣는 이는 왠지 모를 부담감을 안게 된다. 누군가의 수치심은 곧 타인의 거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위의 예는 작가 아니 에르노의 실제 경험에서 따왔다. 일반적으로 부끄러움 앞에서 글은 솔직할 수 없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식 글쓰기는 그걸 해낸다. 작가는 경험하지 않은 모든 글은 허구라고 단정 짓고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 경험의 최고 수위에 부끄러움으로 명명되는 그녀의 수치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부끄러움`이라는 작품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2년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다른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이 문장 하나 만으로도 에르노식 글쓰기의 실체를 알 수 있다. 작가는 정신적 외상이 된 일련의 체험들을 까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당돌하고 진솔한 글쓰기를 통해 인간 본연에 대해 성찰한다.알고 보면 글이란 게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영덩어리인가. 내 부끄러움, 내 수치, 내 껄끄러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수치심이나 증오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체험들을 객관화시켜 글로 쓴다는 게 얼마나 힘들 것인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내 약점을 방어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진실한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나 충족감만큼이나 수치심을 경험하며 산다. 하지만 충족감은 발설하기 쉽고, 수치심은 감추기에 쉽다.부끄러움과 수치심의 경험치가 많아서인지 그미가 쓴 `부끄러움`을 제대로 읽고 싶어졌다. 바로 검색했더니 절판이다. 중고판매를 알아본다. 육천 원이던 책값이 적게는 이만 원에서 많게는 십만 원까지 불어났다. 남의 부끄러움엔 시쳇말로 돌 직구를 날리기 쉽지만 내 부끄러움을 글로 까발리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걸, 귀해진 중고책값이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김살로메(소설가)

2013-02-18

사람이 지나갔다

책꽂이에서 시집 두어 권과 그 외 몇 권의 책을 골랐다. 시와 소설을 공부하는 이에게 보내려던 참이었다. 누군가 내게 책을 선물한데 대해서 릴레이로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책 선물을 즐기는 편이다. 책장에 넘쳐 방치되느니 친구들과 나눠서 좋은 게 책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책방에 꽂혀 있다 뿐, 내 책은 체계적으로 분류되어 있지는 않다. 급하게 읽어야 할 책을 찾지 못해 다시 주문하거나 빌릴 때도 있다. 정리정돈을 제대로 못할 바에는 집안으로 물건을 들이지 않는 게 좋다. 하지만 어찌된 건지 내 깜냥으로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책만은 다달이 사들인다. 책꽂이는 한정되어 있으니 주변과 책을 나누면 책방도 깔끔해지고 마음도 달달해지니 일석이조가 아닌가.박스 포장을 하기 전 책을 한 번씩 쓰다듬어 본다. 시집 한 권에 손길이 오래 머문다. 처음 펼치던 순간 헐거웠던 심장이 조여지는 듯한 그 느낌이 다시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나갔는지 마당이 어지러웠다 -싸리비로는 어쩌지 못했다, 바닥이 잃어버린 부력을 그늘로 눌러놓은 이곳.` 젊은 시인 신용목의`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는 이처럼 사람 사이의 여운이 감지된다. 비망록에 새겨둔 바람 같고 물풀 같던 마음결이, 머리가 아니라 손끝이나 가슴으로 읽힌다.사람이 지나간 마음자리는 어지럽기 마련이다. 싸리비는커녕 손부채 한 번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부력 잃은 그 자리엔 그늘이 눌러 채운다. `걸음이 찍어 놓고 간 발자국마다 감잎이 앉아 있었다 어깨가 아팠다`라고 시인은 마치 독자의 마음 끝을 낚기라도 하듯 끝까지 눈썰미라는 낚싯대를 놓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가면 그 발자국마다 감잎이 앉아 어깨가 아프긴 하다. 그 감잎 줍기 위해 날개를 너무 꺾기 때문이다.시집을 받을 순한 이는 마당이 어지럽지도, 부력을 잃지도, 어깨가 아프지도 않기만을. 그저 `사람이 지나갔다`에서 시인을 뛰어 넘는 무한 발산의 발랄한 상상력을 채워갔으면./김살로메(소설가)

201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