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연구개발비 삭감하면서 의사과학자 양성한다고?

유영희 작가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 고전 한 구절 인용하는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울림을 주는 묘한 매력이 있다. 며칠 전 ‘논어’ 한 구절을 읽다 보니, 역시 단순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맛이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 개의 수레를 보유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는 신중한 태도로 백성의 형편을 잘 헤아려 정책을 실시하고,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서 백성에게 믿음을 주며,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백성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2024년 예산안은 여러 분야에서 삭감되었는데, 삭감된 내용을 보면 더 놀란다, 현 정부 출범 당시 중점 육성하겠다고 한 반도체, 인공지능, 양자, 우주, 데이터 분양까지 삭감되었기 때문이다.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예산 15억원을 비롯하여 과학기술 인력 양성 사업 전반에 걸쳐 940여 억원이 삭감되었다. 이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RD 이권 카르텔 한 마디에 빚어진 사태다. 9월 5일, ‘국가 과학기술 바로 세우기 과학기술계 연대회의’가 출범해 과학기술기본법에 있는 절차도 무시했다고 항의하며 예산 지키기에 나섰지만 얼마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낙관하기 힘들다.그런데 한편에서는 대통령의 한 마디로 의전원이 설립이 가시화되고 있다. 지난 2월 윤석열 대통령이 카이스트에서 의사과학자 육성 대학원 설립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보낸 후 카이스트의 의전원 설립이 속도가 붙었다. 포스텍도 2028년을 목표로 의전원 설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의사과학자의 필요성은 두 말이 필요가 없다. 화이자에서 mRNA 백신을 개발하여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를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독일의 우구르 사힌, 외즐렘 튀레지 박사 부부가 바로 의사과학자이다. 오랜 기간 과학계의 mRNA 연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여성 과학자 카탈린 커리코는 드류 와이즈만과 함께 mRNA가 면역 체계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발견하여 백신 개발에 기여한 공으로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이처럼 중차대한 의사과학자가 우리 사회에서 양성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과학자에 대한 홀대 때문이다. 카이스트가 미래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의사과학자를 배출한다고 해도 진료하는 의사의 평균 연봉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로 과연 계속 이들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이 의사과학 연구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지금도 과학고등학교 졸업생의 의대 쏠림 현상이 노골적인데, 의전원 졸업생을 의사과학자로 붙들어두기는 더 어렵다. 현재 배출된 의사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더 절실하다는 반대 의견이 타당하게 들리는 이유다. 게다가 기초의학을 가르칠 교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카이스트나 포스텍에서 설립할 의전원에서 얼마나 내실 있게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가 하는 비판도 많다.무엇보다 연구개발비는 삭감하면서 의사과학자를 양성한다니, 믿음이 가지 않는다. 어떤 정책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신중한 절차를 거쳐 백년을 내다보는 정책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다가온다.

2023-10-09

민생과 민심

유영희 작가 언제 끝날지 암담하기만 했던 코로나19가 지난 8월 31일 인플루엔자와 같은 4급 감염병으로 전환됐고, 그 이후에도 안정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번 추석에는 대규모 이동이 일어날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일가친척이 서로 만나기 어려웠으니 오랜만에 마음 놓고 회포를 풀 것이다.친한 사람과는 정치와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정치 이야기가 빠지기 어렵다.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대통령에 당선된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 지난 1년 반 동안 얼마나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찬반이 분분할 것이며, 최근 단식을 감행한 이재명 제1야당 대표에 대한 의견도 극과 극을 오갈 것이다.정치는 어떤 사안이라도 정당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향이 많고, 일반인에게 전달되는 정보도 왜곡되거나 제한적이라 소통하기가 참 어렵다. 자기가 즐겨 듣는 미디어에만 의존하다 보면, 자기와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듣지 않게 되고, 그만큼 양쪽 입장의 골은 깊어지고 대화는 끊어진다.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현대 사회에서 민심은 미디어에 의해서 세뇌될 가능성도 많다. 그러니 민감한 정치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들리는 대로만 듣지 말고 조심스레 탐색하는 태도가 필요하다.최근의 가장 큰 이슈는, 지난 21일 제1야당 대표 이재명 의원에 대해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일일 것이다. 지난 2월 16일 대장동 등의 문제로 기소된 체포동의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된 후 백현동으로 다시 기소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이 많았고, 이렇게 쪼개서 기소하는 검찰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 대표에 대한 일부 국민의 피로감은 이재명 때문이라기보다는 검찰의 전략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대장동 관련해서는 곽상도와 박영수의 혐의만 일부 증명되었을 뿐이어서 더 그렇다. 게다가 이번 체포동의안 가결이 비명 계열의 위기감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결과가 백현동 문제나 대북 송금 등의 혐의 때문인지 친명·비명 통합에 실패한 리더십 부재 때문인지 혼란스럽다.다른 한편, 이재명 대표의 대응이 선뜻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상에 보장된 불체포 특권을 먼저 포기한다고 해놓고 이번에 체포동의안 부결을 호소한 것은 모순으로 보이는 데다 지난달 31일부터 단식에 돌입한 행보도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의 강한 권고로 성과도 없이 24일간의 단식을 중단하고 보니, 방탄용이었느냐는 의심을 해소하기도 어렵다. 다만, 단식이 좋은 전략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 혐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지금 정말 중요한 것은 경제다. 지난 6월 OECD는 세계 경제 성장률을 전망하면서, 3월의 2.6%에서 2.7%로 올린 반면, 한국은 1.6%에서 1.5%로 내려잡으면서, 취약계층 직접 지원과 재정건전성을 높일 것 등 여러 가지 권고했다. 이것은 대부분 정치력이 필요한 사안들이다. 민생이 해결되면, 민심은 돌아온다.

2023-09-24

이런 청문회를 보고 싶다

유영희 작가 지난 13일 윤석열 정부는 2차 개각을 단행하면서 국방부 장관에 신원식, 문체부 장관에 유인촌, 여성가족부 장관에 김행을 임명했다.신원식은 홍범도 흉상 철거 논란을 촉발한 인물로, 2021년에는 홍범도 장군을 찬양했다가 2022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의 주역이라며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에 불을 지폈다. 유인촌은 이명박 정부 때 문체부 장관을 하면서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과 기자를 향한 막말 영상으로 문화계의 수장 자격을 의심받고 있다. 김행 역시 박근혜 정부 대변인을 지낸 인물로, 최근에는 입시와 관련된 킬링 캠프 허위 뉴스를 인용하여 망신을 당했다.그러나 유상범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윤석열 정부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보여주기식 개각을 지양하고 오직 국민과 민생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에서는 “우리 사회에서 속도감 있게 이끌어가야 할 필요성이 있는 부분에 고삐를 당겼다”고 논평했다. 이번 개각의 키워드는 ‘효율성’과 ‘속도감’인 셈인데, 이번 인선을 두고 실전형이니 전투형이니 하는 평가와 통하는 말이다.그러나 세 인물의 과거 행적을 보자니, 이념 논쟁으로 국가 에너지를 탕진할까 걱정되고, 자유가 가장 보장되어야 할 문화계의 질식이 눈에 보인다. 헌재가 인정한 낙태권을 반대하는 신임 여성가족부 장관이 여성의 권리 향상에 어떤 역할을 할지도 의문이다.이런 개각에 2주일 넘게 단식을 이어가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민 삶을 돌보지 않는 정권만을 위한 개각이라면서, 국민이 용납할 수 없는 ‘개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민주당에서도 MB 시즌 2라면서 ‘구한말 인사’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어떤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다. 먼저, 이들이 말하는 국민은 같은 국민이 아니다. 국민의힘이 위한다는 국민과 더불어민주당이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국민은 다른 사람이다. 이미 자기편을 지지하는 국민을 전제로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두 번째 구한말 인사라는 비판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구한말은 대한제국 시기를 말하는데, 당시 고종 황제가 구성한 관료들은 왕실 측근 세력 등 보수파였는데, 이때 등용된 이완용, 민병석, 박제순, 고영희, 이병무, 한규설 등은 을사오적이나 정미칠적, 경술국적 명단에 올랐다. 이런 역사를 고려하면, 이번에 임명된 세 인물을 구한말 인사라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의문이다. 단순히 구시대적 인물이라는 뜻이라 해도 주관적인 평가로 치부될 수 있다. 이런 태도로 청문회에 임한다면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것이다.장관 임명이 대통령 소관이라고 해도 청문회에서 얼마나 설득력 있게 비판하느냐에 따라 영향은 충분히 줄 수 있다. 호통치고 삿대질하는 청문회로는 자질을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 전 국민에게 중계되는 청문회이니만큼, 더 많은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냉철하고 엄정하게 검증해서 의미 있고 생산적인 청문회 문화를 보여주기 바란다.

2023-09-17

책맹인류와 독서 예산 삭감

유영희 작가 지난 토요일 동네 도서관에서는 9월 독서의 달을 맞아 김애란 작가를 초대해서 ‘소설, 삶을 담은 그릇’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애란 작가의 말 중에, 소설이란 한숨 같은 소리를 말로 바꾸고 그 이야기에 지위를 주는 것이라는 말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약한 사람, 소외된 사람에 대한 존중과 대접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작가와의 대화는 독서를 자극하고 삶의 의미와 관계 맺음에 대한 통찰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독서율이 낮아지는 상황에서 이런 책 문화 프로그램은 단비 같은 역할을 한다.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우리나라 독서율이 꼴찌다. 19세 이상 성인 중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 사람이 절반이 넘는다. 이런 문제를 인식하고 EBS에서는 8월말부터 9월말까지 5주에 걸쳐 ‘책맹인류’를 10부작으로 방송하고 있다. ‘책맹인류’란, 문자는 해독했으나 긴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지난 수요일 방송된 ‘책맹인류’ 3부 ‘우리는 왜 읽지 않는가’에서는 세계적으로 독서율이 낮아지는 이유를 분석하고 일본이나 핀란드에서 독서율을 높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여러 사례를 들어 소개하고 있다. 이날 방송에서는 주로 개인이나 민간 차원의 노력을 소개했는데, 후속 방송에서는 미국, 영국,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호주, 일본. 많은 나라들이 국가 정책 차원에서 ‘읽기 능력’ 향상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소개할 예정이다.그런데 우리 정부는 독서율을 높이는 데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 정부는, 올해 약 60억 원이던 ‘국민독서문화증진 지원’을 전액 삭감했을 뿐 아니라, 아예 예산 코드 1433-308을 없앴다. 결국 내년 독서 관련 예산은 ‘독서대전’, ‘지역독서대전’, ‘책읽는도시협회지원’ 등 일부 사업들을 위한 10억 원가량뿐이다. 체육기금을 활용하는 ‘책 읽어주는 문화 봉사단’ 예산 2억 원을 합해도 12억 원이라, 올해 독서 진흥 예산 약 114억 원에 비하면 10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이 사라져서 작은 서점에서 진행하던 작가와의 대화나 문학 행사를 내년에는 하지 못하고, 영유아를 위한 북스타트, 청소년 독서를 위한 전국청소년독서토론한마당, 성인을 위한 독서동아리 지원, 장병을 위한 병영독서 활성화 지원도 모두 할 수 없게 되었다.이 중에서 병영 독서는 2년 간 참여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더 관심이 간다. 구독자 100만이 넘는 북튜버 김송은 어려서는 책을 읽지 않다가 군대에 가서야 지인 추천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군대에서도 독서는 청년들에게 꿈을 꾸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데, 내년에는 전면 폐지되었으니 안타깝다.다행히 오늘 도서관 행사는 자치단체 예산이라 내년에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책 문화 행사가 많아지면 독서율이 올라가고 독서율이 올라가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줄 알게 된다. 정부는 내년 독서 예산안을 재고하기 바란다.

2023-09-10

안다는 믿음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유명 소아정신과 전문의의 sns에서, 요즘은 질문은 없고 대답만 있다는 글을 보았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자신의 답에 확신하며 질문하지 않는다는 세태가 안타깝다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정확한가, 나의 선택과 행동은 얼마나 일관성 있을까, 하는 문제에 자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수시로 자신의 뇌에 속기 때문이다.닉 채터는 ‘생각한다는 착각’에서 여러 실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2010년 스웨덴 총선거를 앞두고 실험을 했는데, 실험자는 응답자가 선택한 것과 반대되는 대답을 했다고 바꿔서 보여주었다. 좌파 성향의 응답자에게는 그들이 낮은 소득세나 건강보험에 민간 개입 등 우파 성향의 답에 공감했다고 알려주고, 우파 성향의 응답자에게는 그들이 넉넉한 복지와 노동자 권리 선호 등 좌파 성향의 답에 응답했다고 바꿔서 알려주었다. 이때 평소 4분의 1만이 실수로 잘못 응답했다면서 답을 수정했고, 나머지 4분의 3은 바뀐 답에 맞게 그것이 자기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그 입장을 옹호했다고 한다.응답자에게 여러 인물의 카드를 보여주고 매력 있는 인물을 선택하라고 했을 때도 그가 고른 것과는 다른 카드를 내밀며 당신이 고른 카드라고 속여도 대부분 못 알아채고 자기가 왜 그 카드를 선택했는지 열심히 설명한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을 옹호하는 현상을 ‘선택맹’이라고 한단다.질문 문항이 500개가 넘는 다면적 인성 검사 MMPI에는 같은 질문이 여러 번 나온다. 체크한 답이 정말 자기 생각인지 일관성 있는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단다. 나도 해본 적이 있는데 같은 질문이라는 기억은 나면서도 몇 번에 답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니 같은 질문에 다른 답을 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닉 채터의 말대로, 우리의 뇌는 순간순간 마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지각과 인식과 기억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붙잡는 경향이 많다. 나의 지각과 기억과 인식이 확실하다는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관찰하고 질문하는 수밖에 없다.사도시마 요헤이는 ‘관찰력 기르는 법’에서 사람은 모호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일정량의 지식이나 경험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가설을 떠올리고 그에 따르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관찰하면 이런 자동적 행위를 의식하게 되고, 가설에 따르려는 본능에 저항하게 된다면서, 세상과 자신을 관찰하려면 용기도 필요하고 질문과 가설의 순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지난주에 쓴 칼럼과 근거 자료를 여러 채널에 올려서 의견을 받았다. 그 의견을 모아 ‘방류하면 안 된다’, ‘방류해도 무방하다’로 표현을 바꾸어 다시 정리하였다.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나의 가설을 내놓고 의견을 받으니 질문하는 힘이 성장한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이 나날이 심각해져 간다. 관찰하고 질문하는 문화가 정착하는 데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좋겠다.

2023-09-03

사실과 믿음

유영희 작가 지난 24일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에서 나온 오염처리수를 방류하기 시작했다. 이미 2021년에 방류를 결정했고, 올해 1월에 구체적인 방류시기를 예고한 터라 그 동안 이 문제로 찬반양론이 분분했는데, 방류가 시작되고 나니 인터넷이 더 뜨거워졌다.후쿠시마 원전에서 오염수가 쌓이게 된 것은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일과 지진으로 후쿠시마 원전의 냉각 시스템이 파괴되어 원자로 노심이 과열되면서 시설 내 용수가 고농도 방사성 물질로 오염되었다. 이 원자로 연료봉을 식히기 위해 냉각수를 투입하고 있어서 원전에서 매일 오염수가 생성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올림픽 수영장을 500개 넘게 채울 수 있는 양이 1000여 개 탱크에 저장되어 있는데 한계에 다다라 2021년에 방류를 결정하고 이번에 첫 방류를 시작했다. 하루 약 460톤씩 17일간 7,800톤을 방류하고, 내년 3월까지 같은 방식으로 세 번 더 방류한다고 한다. 현재 저장된 오염수를 모두 방류하는 데 30년을 잡고 있다.문제는 이 오염처리수에 삼중수소라는 방사능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제 기준에 맞게 희석시켰다고는 하지만, 이 위험물질에 대한 불안이 해소되지는 않는 실정이라 많은 시민이 반대하고 있다. 내 지인들은 대부분 반대 의견이라 반대에 기울다가도 문제가 없다는 의견에 반박할 거리가 마땅치 않다. 반대하는 입장의 논거는, 일본이 한국과 가까우니까 위험하지 않겠느냐거나 막연히 안전하지 않다고만 할 뿐인데, 문제가 없다는 주장에는 논거가 분명하기 때문이다.삼중 수소가 자연에도 있다는 사실, 방류기준이 리터당 1만 베크렐(삼중수소 등 핵물질의 방사능 측정 단위)인데, 현재 방류하는 물의 삼중 수소 농도는 그보다 6배 낮은 1500베크렐이라는 사실, 해류의 흐름으로 보면, 방류된 물이 한국으로 바로 오는 것이 아니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과 캐나다 쪽으로 갔다가 한국 근해에 오는 데는 3년 이상 걸린다는 사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방류를 반대하기가 쉽지 않다.게다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후쿠시마 원전이 지진과 해일로 ALPS처리 되지 않은 방사능 물질이 많이 방류되었는데, 그 후 10여 년간 태평양의 방사능 물질 농도와 수산물을 조사 결과 위험한 변화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사실을 다 알아도 불안이 다 해소되지 않는다.가장 근원적인 불안의 실체는 원자력에 대한 불안이다. 그러나 원자력을 반대하는 것과 방류를 반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지금 국면에서 시급히 해결할 과제는 일본과 한국 정부에 대한 비호감과 불신이다. 믿음에는 사실뿐 아니라 감정도 포함되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말하면 믿고 싶고, 미워하는 사람이 말하면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정부가 여러 실책으로 비호감을 쌓아온 것이 무엇보다 큰 문제다. 국민의 오염처리수 불안을 해소하는 지름길은 국민을 위해 정부가 책임감 있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날이 꼭 오기를 바란다.

2023-08-27

진짜 공부

유영희 작가 경제적 여유도 많아지고 수명도 늘어나면서 평생 학습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자연스럽게 퇴직 후에도 계속 배움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어쩌면 배움에 대한 갈망은 나이를 들면서 오히려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렇게 배움을 찾아다니다 보니, 무엇을 배워야 할까? 배움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도 꼬리를 잇는다. 그런 의문에 화답이라도 하듯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책이 많고, 이와 관련된 영상도 많다.공부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의 목적을 자아 찾기에 두고 있다. 어떤 이는 공부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설레는 여행이라 하기도 하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라고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아란 내 마음속, 또는 나의 뇌 어딘가에 자리 잡고 앉아 발견을 기다리는 나의 본질일까, 그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일까, 진정한 자아와 거짓 자아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상상력은 허용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꼬리를 물고 나온다. ‘자아’의 의미가 사람마다 다르고 막연하기 때문이다.그러니 자아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감정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 더 실질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맹자는 그 옛날에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은 사단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의 불행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나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같은 네 가지 도덕적인 감정을 들어 성선설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렇듯이 감정은 인간에 본질이 있다는 가정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다.그런데 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감정에 대해 새로운 견해가 나온다. 배럿에 의하면, 감정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속성이 아니라 뇌의 신경망이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같은 인간을 놓고도, 순자는 맹자와는 다르게 인간의 감정이 이기적이라면서 성악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배럿이 본질주의에서 벗어나자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정을 인간이 타고난 본질이라고 한다면 모든 문화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인식되어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본질주의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생각과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 무력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다.자아 역시 본질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자신의 개념으로 구성한 실재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설계한 자아를 발견하고 향유하는 것은 자아의 확장일 뿐이다. 자아가 확장되어 비대해지면 다른 사람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서로 자신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진짜 공부란, ‘자아’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구나 하는 인식을 향해 가는 여정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내가 구성한 개념일 뿐이고, 그런 ‘나’가 인식하고 느끼는 것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깨달음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완고함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와 대화하고 협력하게 된다. 청소년 시절에는 어려울 수도 있으나, 이런 공부는, 나이 들수록 절박하게 해야 하는 진짜 공부다.

2023-08-20

치매는 치매가 아니다

유영희 작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병을 꼽으라면 누구나 치매를 들 정도로 치매는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치매에 걸리면 벽에 똥칠한다는 소문으로만 치매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치매를 두려워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치매라는 명칭 때문이다. 치매는 ‘어리석을 치’, ‘어리석을 매’ 두 글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나치게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 환자의 증상과도 동떨어져 있다. 치매 환자의 인지 기능이 낮기는 하지만 어리석지도 않고 증상의 범위도 넓기 때문이다.지난 6월부터 노후 준비 차원에서 치매를 공부하고 있다. 사회교육기관에서 치매 강의를 같이 들은 동료들과 모임을 만들어 학습을 이어가고 있는데, 아무리 중증 치매 환자라도 자기주도권에 대한 의식은 끝까지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알고 숙연해진 적이 있다.신경과 전문의 양현덕은 치매 환자 진료에만 머물지 않고 치매 전문 출판사와 인터넷 신문을 발간하고 있는데, 2021년 ‘디멘시아 도서관’을 개관하여 치매 인식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그는 ‘치매 정명’이라는 책에서 ‘치매’라는 단어의 뜻을 알기만 해도 이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며,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명칭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미 대만은 2001년에 실지증으로, 일본은 2004년 인지증으로, 홍콩과 중국은 2010년과 2012년에 뇌퇴화증으로 이름을 바꾼 상태다.우리나라에서는 이들 나라보다 조금 늦게 2006년부터 보건복지부에서 치매 명칭 개정을 추진했고, 2017년에는 ‘인지장애증’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기 위한 국회 입법안이 발의되었지만, 병명 개정보다 사회적 인식 개선이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계류된 이후 최근까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다행히 작년 말부터 다시 개명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간질은 뇌전증으로, 정신분열증은 조현병으로, 나병은 한센병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많이 감소한 사례가 있다. 막연히 예쁜 이름으로 바꾸자는 말이 아니다. ‘치매 정명’에서는 새 명칭의 조건으로 질병의 본질이 잘 반영해야 하고, 과학적 타당성이 있어야 하며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현재 84만 명으로 추정되는 치매 환자는 2030년에는 136만 명, 2050년에는 3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치매에 대한 무지로 이들을 불편하게만 생각한다면, 그 부담은 우리 모두가 같이 질 수밖에 없다. 초기에 발견하지 못하여 악화되면 시설에 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환자에게도 고통이고 비용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조기 발견할 수 있고 잘 관리하면 자기 집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난다.그러기 위해서는 명칭 개선이 급선무다. 그동안 후보에 오른 ‘인지장애증’와 ‘인지저하증’, ‘신경인지장애’ 중에서 선택해도 좋다. 이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치매라는 단어를 썼지만,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바란다. 치매는 치매가 아니다.

2023-08-13

질서 있는 삶

유영희 작가 “우리의 소유와 필요를 확대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운과 역경의 타격에 부닥친다. 욕망의 길은 한계를 지어 제한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자기 힘에 맞게’라는 말은 대단히 알찬 말이다. 정신의 위대함은 위대함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정신의 가치는 높이 올라가는 데 있지 않고, 질서 있게 살아가는 데 있다.”이 글은 몽테뉴의 ‘에세’에 나오는 몇 구절을 붙인 것인데, 이승연의 ‘살고 싶어 몽테뉴를 또 읽었습니다.’에서 골랐다. 이 문장 중에서 특히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신의 가치를 높인다는 말에 눈길이 꽂힌다. ‘질서 있는 삶’이란 남과 비교하지 않고 명분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않으며 자신에게 충실한 소박한 삶을 말한다. 이런 질서 있는 삶의 모델 중에 이나가키 에미코도 포함될 것이다.이나가키 에미코는 그의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책에서 아사히 신문사를 50살에 퇴사한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여기서 그는 회사의 후광을 믿고 자신을 회사와 동일시하는 ‘회사 인간’으로 살면서 소비를 탐했던 이야기, 그러다가 10평짜리 집에서 단촐한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진솔하게 서술한다. 결과만 보면 객기어린 낭만적인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여서 무척 공감이 갔다.이나가키는 명문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이 즐비한 데도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사고 온갖 요리책을 사서 화려한 음식을 먹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전기를 흥청망청 쓰는 소비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우동으로 유명한 다카마쓰라는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돈 없이 생활할 때의 기쁨을 경험한 것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10여년의 준비 끝에 퇴사하고 나서 그는 에어컨은 물론, 냉장고나 전기밥솥조차 없이 휴대용 버너로 냄비 밥을 하고 10분 만에 끓이는 국을 곁들여 맛있게 먹으며 여러 가지 즐거운 일을 한다. 옷은 서랍장 하나로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행복한 삶의 질서를 발견하고 마을을 내 집 삼아 회사 사회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넉넉하게 살아가고 있다.그의 삶이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싱글라이프이고, 28년간의 직장 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 모은 돈이 있으며, 글 쓰는 능력도 남달라서 적은 원고료나마 수입을 가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정신의 가치이다.얼마 전, 집이 작은데도 정신이 너무 산만해서 공간을 재구성했는데, 버릴 것이 다섯 박스가 나왔다. 특히 옷걸이 50개로 사계절 옷을 다 걸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가해지고 정신이 고양되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저 ‘자기 힘에 맞게’ 소유하고 일상을 질서 있게 가꾸어가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다. 올해는 더워도 너무 덥다. 이런 일상을 살다 보면, 기후 변화도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을까?

2023-08-06

세대 모임을 찬양함

유영희 작가 “안녕하세요? 제가 운영자님이 상상하시는 것보다 나이가 많은데, 참가해도 되나요?” 이제는 어느 모임에 가도 내가 최고령인 경우가 많아서 점점 조심스러워 사전에 나에 대한 정보를 알리게 된다. 선생으로 젊은이를 대한 적은 있어도 참가자로 젊은이들과 함께 한 자리는 많지 않은데, HOLIX라는 플랫폼의 모양새를 보니 젊은이들이 많을 것 같았다.그래도 과감하게 용기를 낸 것은 올해 특별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동네 도서관에서 ‘감정과 뇌’라는 주제로 뇌 과학 책만 읽는 독서동아리를 운영하고 있는데, 15명의 참가자 나이 구성이 20대부터 60대까지다. 도서관을 통해 신청을 받고 보니, 나이 구성이 40년에 걸쳐 분포하게 된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주로 생협에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모임을 해왔기에 이런 다양한 연령대의 모임은 약간 낯설어 긴장했지만, 젊은이와 늙은이 사이에 허물없이 서로 잘 배우고 있다.그러나 HOLIX에서 알게 된 영화 모임은 아무래도 더 젊은이 중심인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역시 운영자도 30대이고 대부분 20~30대였다. 그래도 며칠 전 세 번째 모임에는 60대로 보이는 한 여성 참가자가 왔는데, 그 역시 나이가 많은데 와도 되나 많이 망설였다고 한다. 이런 나이든 사람의 망설임에는 늙은이에 대한 사회적 개인적 편견이 한 몫 한다.신경과 전문의 김진국의 책 ‘기억의 병’에서는, 사람들은 ‘늙음’에서 고집, 욕심, 무뚝뚝함, 괴팍함과 같은 부정적인 편견과 가까이 가기 싫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떠올린다고 한다. 이런 글을 보니, 젊은이들이 늙은이들을 불편해할까 두려워했던 내 염려가 기우는 아니었구나 싶다. 이런 부정적 편견은 만나야 해소될 수 있다. 나 역시 장거리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은 80세 노인이 노트를 꺼내 그림 그리는 것을 보고 노인에 대한 편견이 깨진 적이 있다. 대화를 하면서 알고 보니 60세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이어서 김진국은 나이 들면 불안과 우울이 많아지고, 그러면 치매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서 불안과 우울을 줄이기 위해서는 속물적인 행복을 지양하고 개성 있는 주체로서 행복을 누리는 경험을 많이 하라고 조언한다. 나이 들었다고 집안에만 들어앉아서 자식들만 바라보면 불안과 우울이 침범하기 쉽다. 뇌세포와 심장세포는 늙지 않는다고 하니 나이 들수록 교류 범위를 넓혀 동네 독서 동아리에 참여해보자. 조금은 낯선 SNS 클럽에서 공부하는 것도 주체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두 모임을 겪어보니, 젊은이들의 생각과 마음씀씀이가 예상보다 깊고 여유가 있다. 영화 모임에 온 어느 젊은이는 또래끼리만 어울리면 생각이 좁아진다며 우리를 반긴다. 세대 간 교류는 젊은이들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서로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고 생각의 폭도 넓혀준다. 또래모임도 편안하고 좋지만, 세대모임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젊은이들이 싫어할까 지레 겁먹지도 말고 젊은이들에게 자존심도 세우지 말고 배우는 마음으로 어울려 보자.

2023-07-30

오은영과 서천석

유영희 작가 초등교사가 6학년 학생에게 폭행을 당해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뒤이어 학부모 갑질 때문으로 짐작되는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을 접하고 나니, 착잡하기 그지없다. 어느 기사를 보니,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초등교사 사망자는 74명으로, 그 이전 4년 동안 46∼55명 사망에 비해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교원 죽음에서 극단 선택 비율도 전체 사망자의 11%라고 한다. 교원단체는 초등교사 사망 급증이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과 극단선택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실증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흘려 들을 일은 아니다. 교사의 정신적 안녕은 교육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난데없이 금쪽이 상담으로 유명한 오은영이 소환되었다. 네티즌들은 상처받은 아이의 마음을 돌봐야 한다는 오은영의 해법이 교사가 훈육을 제대로 못하게 했고 학부모 갑질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서천석이 힘을 보탰다. 서천석은 오은영의 방송이 몇 번의 상담으로 아이의 문제가 개선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다고 비판한다. 그는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이는 상담이 아니라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아이들의 치료를 뒷받침할 법과 제도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방송을 가만히 보면, 오은영은 방송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영상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금쪽이와 부모의 일상까지 관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도 밀착해서 관찰한다면 짧은 기간이라도 문제 원인과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출연자의 문제는 해결된다 해도, 시청자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오은영이 감정 가라앉히는 방법으로 제안한 ‘생각하는 의자’는 많은 부모가 방치의 수단이나 체벌의 형태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책이나 방송만 보고 적용할 때는 오남용 여지가 많다.얼마 전, 집이 너무 어수선해서 정리 팁을 얻으려고 유튜브 영상을 수십 개를 봤지만 문제와 해결책을 발견하기 어려웠는데, 컨설팅 업체를 불러 30분 상담하니 다 해결된 경험이 있다. 집 정리 같은 단순하고 물리적인 문제조차 이런데, 인간의 마음처럼 복잡한 문제를 영상을 보고 도움 받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교사에게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힌 초등학생은 작년 5월부터 정서행동장애로 하루 1시간 특수반 수업을 듣고 주 2회 상담수업을 받고 있었고 평소에도 상담 수업에 가기 싫다면서 교사를 여러 번 때렸다고 한다. 현재 이 문제를 교권 침해로 접근하여 엄벌을 청원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치료의 적절성을 더 문제 삼아야 할 것 같다.서천석의 말처럼 정신적 문제를 가진 아이는 적극적인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오은영 방송이 상담에 환상을 심어준다는 서천석의 비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아이들의 정신적 문제는 적극적 치료와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부모와 정책 입안자들이 경청해야 한다. 그래야 무너진 교권도 회복될 수 있다.

2023-07-23

재앙이 아닌 패션을 위하여

유영희 작가 지난 10일부터 12일까지 국회의원회관에서 ‘옷, 재앙이 되다’ 행사가 열렸다. 패션회사가 팔지 못한 재고를 소각하거나 폐기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법안 마련을 위한 자리였다. 이 법안이 필요한 이유는 팔리지도 않은 엄청난 양의 새 옷이 소각되거나 매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엘렌 맥아더 재단이 2017년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에서 2015년 사이에 의류 생산이 2배 증가해서 2015년에는 1천억 벌의 옷이 생산되었으며 그중 73%가 소각되거나 매립되는 등 폐기되었다고 한다. 국내 의류 폐기물 발생량 역시 심각해서, 2020년의 폐의류 발생량은 약 8만 t이 넘고, 공장의 폐섬유 발생량은 3만 t 가까이 된다. 우리 헌 옷을 수입한 나라에서도 재사용되지 못한 옷이 쓰레기 산을 이룬다.이러한 생산 증가가 단순한 인구 증가 때문이거나 삶의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2018년 유엔 조사에 따르면 의류 산업의 탄소배출 비중은 10%나 되고, 폐수 발생 비중은 20%를 차지할 정도로 옷 생산에 환경 부담이 크다. 청바지 하나에 물 7천ℓ, 섬유 1t 생산에 물 200t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이렇게 의류 폐기물이 급증한 데는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려는 의류 산업의 상술과 재고 보관에 비용이 든다는 이유도 있지만, 패스트 패션의 유행도 한 몫 한다.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는 계절에 따라 1년에 4번 기획하고 생산하지만, 패스트 패션 브랜드는 1~2주마다 새로운 의류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류 산업 차원에서 대규모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이 아무리 중고 마켓을 이용하고 재사용을 위해 힘쓴다고 해도 개인의 힘이 닿지 않는 영역이 있다.의류 폐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생산자에게 책임을 지워야 한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재고 의류 재사용을 법제화했고, 벨기에나 독일은 재고 물량을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법안으로 제정했다. 한국에서도 2022년에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이 제정되기는 했으나 의류 폐기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한국의 헌 옷 수출량이 미국·중국·영국·독일 다음으로 많은 세계 5위로, 인구를 고려하면 1인당 버리는 옷의 양은 세계 1위인 셈이니, 어느 나라보다 법안 제정의 필요성은 절박하다. 그런 이유로 이번 ‘옷, 재앙이 되다’에서 재고 의류 폐기 반대 법안에 서명해줄 것을 호소한 것이다.아무리 의류 산업이 환경 부하가 크다고 해도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패션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3, 4년 전까지만 해도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작은 집으로 이사 오면서 옷을 다 정리하고 나니 좋은 옷이란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 옷을 장만할 때는 더 신중해지고 나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옷 몇 벌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잘 맞는 패션을 아는 것도 패스트 패션의 광풍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3-07-16

자전축이 기울다니요

유영희 작가 지난 6월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 서기원 교수 연구진이 엄청난 논문을 발표했다. 지구물리학 연구 회보에 발표한 논문에서 연구팀은, 1993년부터 2010년까지 인류가 퍼 올린 지하수가 2조1천500t이라고 추정하면서, 이렇게 인위적으로 대량의 물이 이동하면서 지구 자전축이 기울었다고 한다. 연구에서는 이 정도 양이면 해수면이 6.24mm 상승할 만하다고 덧붙인다.이 뉴스에 이어서, 며칠 전에는 환경 단체 ‘멸종 저항’이 스페인 전 지역의 골프장의 홀컵을 시멘트와 채소 모종으로 메웠다는 기사가 나왔다. ‘멸종 저항’은 지구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2018년 영국에서 결성된 단체인데, 유명한 청소년 기후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멸종 저항’은 ‘스페인 전역에서 437개의 골프장에 매일 대는 물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합한 인구가 사용하는 양보다 많다’고 주장하면서 유례없는 가뭄에도 인구의 0.6%만이 즐기는 운동을 위해서 물을 이렇게 많이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더 찾아보니, 이 단체는 2022년에도 프랑스에서 골프장 홀을 시멘트로 메운 일이 있었다. 기사로 추측하건대, 올해는 시멘트로 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채소 모종도 심은 것을 보면 운동 방법이 진화한 것 같다.시멘트로 골프장 홀 컵을 메우는 직접 행동으로 ‘멸종 저항’이 벌금을 물거나 체포되지 않았을지 걱정은 되지만, 그 홀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많은 물을 쓰는지 안다면 이들의 직접 행동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미국 골프 협회(GCSAA)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골프장은 매일 물 1억7300만 리터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약 58만 명의 미국인이 하루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한국 통계를 보면, 2020년 전국의 1만 여개 홀에서 거의 45만 리터를 썼다니, 하루 약 300 리터를 쓰는 한국인 기준으로 150만 명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지구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나 역시 소박하나마 물을 덜 쓰고 오염을 줄이려고 나름대로 애써왔다. 1회용품은 안 쓰거나 재사용하는 것은 물론, 2년 전부터 비누로 머리를 감고 있고, 수십 년간 손빨래를 했다. 세탁기가 물 사용량도 많고 합성세제 때문에 물을 오염시킨다고 해서다.그러나 아무리 수질 오염에 생활하수의 비중이 60%에 달한다고 해도 개개인의 실천에는 한계가 있다.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질 정도로 지하수 퍼내는 일을 줄이는 것, 골프장의 물 공급을 제한하는 것은 대대적인 정책으로만 가능한 일인데, 이런 소소한 개인의 실천은 자기만족이 될 가능성도 있고, 손가락에 병이 나거나 다른 사정이 생기면 손빨래를 계속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그렇다고 개인의 실천을 멈출 수는 없다. ‘멸종 저항’ 같은 정치적 직접 행동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자기 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생수 덜 사먹기, 세탁기나 에어컨 덜 쓰기를 하는 것도 여러 사람이 함께하면 의미가 있다. 인간이 자전축을 기울였으면 인간이 멈출 수도 있다.

2023-07-09

누가 미괄식을 쓰는가

유영희 작가 칼럼을 쓰기 시작한 지 4년이 되어 가건만, 칼럼의 첫 번째 독자인 딸에게 아직도 핵심 문장이 맨 끝에 찔끔 나온다고 지적받는다. 어떤 때는 의식의 흐름대로 가다가, 어떤 때는 남의 말만 중언부언 인용하다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맨 끝 한 문장일 때도 있다. 미괄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능숙하지 못하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두괄식과 미괄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국어 지식이다. 두괄식은 논점이나 중요한 내용을 앞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미괄식은 핵심을 맨 뒤에 두거나 숨어 있다는 것, 두괄식은 직설적이고 간결한 반면, 미괄식은 간접적이고 복잡하다는 것, 두괄식은 정보 전달에 효과적이고 미괄식은 소설이나 시나리오 같은 장르에 적당하다는 것과 같은 사전적인 지식은 알고 있어도 글을 쓸 때는 제멋대로 흘러버린다.왜 이런 습관이 생겼는지 돌아보면, 논문 쓰던 버릇이 너무 깊게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학술 논문은 미괄식이라 앞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 결론을 낸다. 그래서인지 학회에 가보면, 많은 교수가 발표 시간을 넘겨서 결국 결론을 서두르거나 말하지 못하고 끝낸다. 힘 있는 사람의 글이 길기 쉬운데, SNS조차도 문화 권력자들의 글은 길고 핵심은 맨 끝에 나온다.그러나 이런 미괄식 전달방식은 디지털이라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뉴스 미디어 기업 ‘악시오스’ 창업자 짐 벤더하이 등 세 사람이 같이 쓴, ‘스마트 브레비티’를 보면, 현대인이 인터넷에서 콘텐츠 하나를 읽는 데 평균 26초 걸리고, 클릭한 것이 마음에 드는지 결정하는 데는 0.017초 걸린다고 한다. 이들은 현대인들의 이런 읽기 습관을 고려하여, 독자가 200 단어만 읽는다면 200 단어가 그들이 읽어본 중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단어가 될 수 있게 전달하자고 한다. 이 책의 예시문을 보면 평소 우리가 얼마나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장황하게 말하고 쓰는지 반성하게 된다.유튜브라는 매체 역시 환경 변화의 중요한 요소이다. 2022년 10월 ‘모바일인덱스’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1%인 4천183만 명이 유튜브 앱을 사용하며, 매월 32.9시간을 시청한다고 한다. 2019년 통계에 의하면, 1분에 400시간 분량의 영상이 올라온다고 하니, 시청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핵심을 짧고 간결하게 표현해야 한다. 고급 지식 콘텐츠라도 제한된 시간 안에서 짧고 굵게 보여주는 유튜버는 구독자가 많다.나는 힘도 없고 문화 권력자도 아닌데 미숙한 미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미괄식 습관을 고치려고 일부러 신문 기사의 맨 앞에 나오는 리드 쓰기 연습을 여러 번 해보았다. 역량이 부족한지 여전히 부족해서 갈 길이 멀다. 힘이 없는 사람은 두려워서 미괄식을 쓰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미괄식을 쓴다. 이제 미괄식은 소설가에게 넘기고, 정보 전달에는 계급장 떼고 두괄식을 활용하여 짧고 간결하게 표현하자. 인기 있는 교장 선생님은 훈화가 짧았다.

2023-07-02

삶의 격, 죽음의 격

유영희 작가 요즘 주변의 지인들에게서 노화의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냥 나이만 들면 좋으련만, 수명이 늘어나면서 병원 신세 질 일도 많아지고 치매도 증가 추세다. 하루에도 한두 건, 많을 때는 네 건씩 배회중인 어르신 찾는 문자가 오고, 엄마도 파킨슨 병 합병증으로 치매를 오래 앓다가 돌아가셔서 치매는 특히 신경 쓰인다.2022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 897만 명 중 치매 환자가 90만 명으로 추정 치매 유병률이 10%이다. 2040년에는 65세 이상 인구가 1천700만 명이 되는데 이 계산대로 하면 170만 명이 치매에 걸릴 것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런저런 질환으로 장기요양 등급을 받게 될 인구 추정치는 300만 명이라고 한다. 2040년이면 내 나이도 80세이니 치매에 걸리지 않거나 장기요양등급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다가온다.이런 환자를 관리하는 비용도 어마어마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환자 본인과 가족들이다. 인지 기능이 떨어진 치매 환자도 고통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엄마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이면서도 삶이 고통스러워 15층에서 뛰어내리려고 베란다까지 나가셨던 적도 있다.아무리 생명 연장술을 연구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죽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현대 의료의 발달로 살아있지만 살아있다고 하기 어려운 상태로 생명을 연장하면서 환자와 환자의 가족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현대 의료 시스템은 환자가 아무리 고통 받아도 죽는 그 순간까지 치료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것은 환자나 그 가족도 마찬가지다. ‘왜 나는 75세에 죽기를 바라는가’를 쓴 미국 의사 에스겔 임마누엘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 노인 5분의 1가량이 죽음의 마지막 달에 외과 수술을 받는다고 하니,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인식을 바꾸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그러나 이제 평화로운 죽음을 맞는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케이티 잉겔하트의 ‘죽음의 격’은 노년은 물론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사람들이 어떻게 존엄한 죽음을 준비하는지 취재한 기록이다.그가 어떤 죽음이 품격 있는 죽음인지에 대해서 직접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존엄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 바로 괄약근 조절능력을 잃었을 때 그런 결정을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전해준다.아무리 훌륭한 의사도 죽음을 치료할 수는 없다. 죽음은 질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나 자기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 순간에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노년을 상상하면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탐색하고, 죽음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마음의 준비도 꾸준히 해야 한다. 한 달 전부터 몸 상태를 기록하는 ‘몸 일기’를 매일 쓰고 있다. 2040년 80세를 맞는 어느 하루, 나의 몸을 상상하는 일기도 써봐야겠다.

2023-06-25

나의 사정을 다 말해야 하는 이유

유영희 작가 지난 6월 14일, 4년 만에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했다.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19로 못 갔고, 작년에는 내 사정으로 못 갔다. 이 행사는 해마다 주제가 있는데 올해 도서전의 주제는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라고 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강조했다고 한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취지문을 읽어 보니, 비인간은 인간이 아닌 자연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예년에는 남녀 섞어서 세 명이던 홍보대사 인원을 일곱 명으로 늘리면서 모두 여성 문인만 내세운 것을 보니 아무래도 비인간이란 남자가 아닌 존재, 여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이런 주제 때문인지 발걸음이 멈추는 곳마다 여성이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 시를 전문으로 내는 파시클 출판사의 박혜란 대표의 북토크에도 참가하여 디킨슨 이야기도 들었고, 여성들의 자기 이야기가 담긴 책도 몇 권 샀다.출판사 핌의 ‘어쩌면 너의 이야기’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 만난 주부들의 동화 에세이 모음집인데, 동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말하는 독특한 형식이었다. 직접 글과 그림을 다 작업한 참여자도 있고, 딸이나 남편이 삽화를 그린 글도 있었다. 자상한 시간에서 펴낸 ‘감정愛쓰다’는 그보다는 직접적으로 자기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 글을 올린 참여자들 역시 모임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나누며 글을 썼다. 담다 출판사의 ‘3923일의 생존 기록’은, 저자 김지수가 불안, 공황, 우울장애와 더불어 생존해온 기록이다. 최근 암 생존자 여성의 투병기 ‘엉망인 채로 완전한 축제’도 읽었는데, 사회 통념상 암보다 더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의 병이라서 김지수의 고백은 더 인상 깊었다.‘파레시아’라는 희랍어는 ‘세상을 향해 다 말하다’라는 뜻이다. 본래 파레시아는 정치적 의미가 강하여,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까지 이끈 파레시아를 ‘대담한 저항’이라고 요약했는데, 플라톤은 여기에 행복의 의미를 덧붙였다고 한다. 당시 독재자였던 디오니소스 1세가 플라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했을 때 소크라테스라고 대답하여 독재자에게 추방당했다고 전해진다. 플라톤의 대답에서 우리는 ‘다 말하는 것’이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파레시아를 원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억압받는 사람이거나 사회적 약자일 것이니, 이들의 말하기는 민주주의와도 통한다.황현산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내 사정은 나만 알고 있는 것이라서 사소해보이지만, 글을 쓰다 보면 그 사정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되고 결국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나 역시 여성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면서 글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는 연결을 체험하고 있다.여성 문인만 홍보대사가 된 것에 대해 어느 남자 시인은 책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런 목소리를 잠재우는 방법은 여성들이 용감하게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움츠리지 말고, 나의 사정을 사정없이 써보자.

2023-06-18

ChatGPT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유영희 작가 두어 달 전 어느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 구성원은 다섯 명이었는데, 명상 안내자와 상담 전문가도 있고, 책을 한두 권 이상 출간한 작가도 두세 명이다. 그런데 그중 작가 두 사람이 ChatGPT를 활용한다면서, 한 사람은 아예 유료로 결재해서 이용한다고 한다. 그동안 ChatGPT 관련 뉴스를 많이 보았어도 인문 분야에서 활용하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고, 게다가 인문학의 최첨단이라고 할 만한 명상 전문가들이 글을 쓰면서 인공지능을 활용한다고 하니 낯설었다.마침 6월3일 한국사고와표현학회의 춘계 정기 학술대회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 사고와 표현 교육의 방향과 과제’여서 참여했다. 인문학 교수와 게임학 교수의 입장 차이가 아주 볼만했다. 인문학 교수는 인공지능이 학습하거나 사고하거나 추론하거나 성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코딩도 배우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뒤이어 발표자로 나선 게임학 교수는 국가의 정책 목표가 전 국민이 인공지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주장했다. 학술대회가 종료될 때까지 참여하지 못해서 어느 쪽이 우세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인공지능을 둘러싼 이런 논쟁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사실 인문학자뿐 아니라 일론 머스크 역시 애플 공동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액, 미국의 정치인 앤드류 양 등과 함께 미래생명연구소 명의로 AI 시스템 개발을 멈추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인공지능 열풍을 보면서 정말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던 터라 인공지능에 반대하는 입장이 솔깃해진다.그러나 AI판 러다이트 운동이라고도 하는 일론 머스크의 이런 주장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영국의 기계 파괴 운동이었던 러다이트 운동도 실패로 끝났으니 말이다. 1876년 영국이 중국에 놓은 오송 철도를 철거했던 청나라도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철도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유럽 각국도 앞다퉈 철도를 깔았으니,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 고대의 노자는 철기 문명의 문제를 비판하며 문자 없던 시대로 돌아가자 외쳤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컴퓨터를 쓰지 않겠다는 미국 시인 웬델 베리의 선택은 개인의 삶의 방식으로 존중할 가치가 있지만, 그것을 사회 전반에 적용하기는 어렵다.신기술이 나올 때마다 부작용을 우려하는 신중한 입장은 충분히 경청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술 발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역사를 보아도 실현 불가능하다. 인터넷이 처음 나왔을 때도 우려가 많았고 부작용도 해결되기 어렵지만,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AI 사용 능력 격차와 그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다. 인문 정신의 존재 이유는 기술 발전 속에서 어떻게 사회 통합을 이루고 인간성을 보호할 것인가를 탐구하는 데 있다. 두어 달 전 모임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ChatGPT를 잘 활용하여 명상을 보급하고 저술 활동 하는 데 도움 받기를 바란다.

2023-06-11

중고 거래의 딜레마

유영희 작가 옳고 그름을 무 자르듯이 딱 자르기 어려운 경우는 많지만, 절약이나 친환경 같은 이슈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옳음의 범위에 속한다. 제리 스피넬리의 ‘돌격대장 쿠간’은 초등 고학년이 읽을 만한 동화책인데도, 그 안에 담긴 주제는 비폭력, 친환경, 성 평등 등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 옳음이 무엇인지 편안하게 보여주어서 재미있게 읽고 주변에 많이 추천하기도 했다.주인공 존 쿠간은 언제나 새 옷을 입고 고기를 즐겨 먹으며 특유의 적극적 성격으로 학교에서 ‘핵인싸’다. 그런데 전학 온 펜 웹은 중고 옷만 입고 온 가족이 채식주의자인데 남다른 친화력으로 금세 여자아이들한테도 인기 많은 ‘핵인싸’가 된다. 쿠간은 그런 웹을 싫어하지만 웹이 쿠간의 할아버지를 위해 자기가 너무나 아끼는 흙을 기꺼이 내어주자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그토록 혐오하던 중고 물건을 사며, 백화점 건립 반대 운동에 참여한다. 이 책에는 소비를 반대하는 메시지가 듬뿍 담겨있다.나 역시 당근마켓이라는 중고 거래 사이트를 자주 이용한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당연히 가장 먼저 들어가 보는 곳이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이 없어도 슬그머니 들어가 본다. 작은집으로 이사하면서 많은 물건을 판매한 곳이기도 하다. 새 것을 살만큼 여유가 없기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는 착한 소비를 한다는 자부심도 조금은 있다. 옷만 가지고 보면, 2019년 기준 생산량은 대략 1천300억 개, 이중에 버려지는 옷이 최소 920만 톤 이상이라고 한다. 그 중 일부는 소각되는 과정에서 대기가 오염되고, 소각하지 못한 옷은 쓰레기 산을 이룬다고 하니, 나 한 사람이라도 중고 옷을 이용하면 옷 생산량이 줄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요즘 들어 현실에서는 중고 물품 이용이 정말 옳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나처럼 중고 마켓 물건이 싸다고 쉽게 사다가 물건이 쌓이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고 마켓을 믿고 소비를 많이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제 유튜버의 말을 빌리면, 사람들이 중고 마켓에 내다 팔 생각에 옷이나 물건을 많이 산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중고 물품을 이용하는 것이 친환경적이거나 절약이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필요한 것도 없는데 괜히 검색하느라 시간 버리는 것도 문제다.중고 물건 이용의 또 다른 문제는, 분명히 자기 물건을 샀는데도 중고 마켓에 팔기 위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책도 마찬가지다. 새 책을 사도 나중에 팔 생각에 마치 빌린 책처럼 밑줄도 못 긋고 메모도 못한다. 이러다 보니, 내 책인데도 읽기가 불편하고 읽은 것 같지 않다. 중고 거래를 위해 물건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기이한 소비 현상이 벌어지니, 중고 물품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질문하게 된다.옛사람들이 만든 오래된 그릇이나 가구를 보면, 은근한 감동이 밀려온다. 그 정도의 품질은 아니더라도 나만의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오래 쓰는 것이 환경도 보호하고 삶의 질도 높인다는 오래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2023-06-04

‘마처 세대’를 위하여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우연히 SNS 친구의 담벼락에서 노후 빈곤에 대한 고민을 읽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월급만으로는 노후대비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투자를 해야 한다.’는 재테크 유튜버의 말을 인용하면서 투자의 위험이 만만치 않으니, 과연 투자가 답일까?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딱히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미 작년 집값 상승 시기 무리하게 주택을 구입하여 고통 받는 영끌족도 많고, 빚투한 사람들도 주식 하락으로 영혼이 털리고 있다. 게다가 회복 기회가 적은 중장년에게 투자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SNS를 보며 다른 사람 따라하지 말고, 할인한다고 사지 말고, 주식이나 코인 같은 투자도 하지 말고 오로지 저축으로 1억을 모으라는 돈쭐남 김경필의 조언이 더 실속 있어 보인다.이렇게 돈 벌기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이유는 현재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노후에 대한 불안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2020년 국민연금연구원 조사와 2022년 신한미래설계보고서에서를 보면, 노후 필요자금으로 가장 많은 응답은, 퇴직 후부터 30년 정도 더 살 것을 가정하고 5억에서 10억이었다고 한다. 최소한 5억이 있으면 어느 정도 노후가 안전해질 수 있겠지만, 그것이 최선일까 의문이 든다.아버지는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13년간 투병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웃공동체가 없었던 것을 더 힘들어하셨다. 물질적 궁핍은 절약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웃공동체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노력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노년이 되면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사례도 많다.노년 1인 가구의 급증 역시 노년의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2021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체 가구에서 1인 가구 비율이 33%이고, 그 중 60세 이상의 1인 가구 비율이 35%라고 한다. 그런데 2050년에는 전체 가구의 40%가 1인 가구이고, 그중 60세 이상의 가구가 59%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전 연령대에 걸쳐 1인 가구가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취약한 상황이니, 노년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서는 사회 안전망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가는 제도적으로 사회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사회 안전망 못지않게 사회 연결망도 중요하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부모를 봉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봉양 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라고 이름지어진 ‘마처 세대’에게 적절한 크기의 사회 연결망은 노년의 어려움 해결에 도움이 된다. SNS를 잘 활용하면 생활에 활력이 된다. 혼자 있는 법을 익히는 것만큼이나 적절하게 사회관계를 유지할 줄 아는 것도 노년의 지혜이다. 국가는 사회 안전망을 탄탄하게 갖추고, 개인은 자기에게 맞는 사회 연결망을 유지할 수 있다면 노후의 공포는 줄어들 것이다. 이런 일에 기여하고자 지난겨울 동네 통장에 지원했다. 4대1의 경쟁률에 탈락했지만, 그 자체로 사회 연결망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어 의미 있었다.

2023-05-21

공자와 법륜

유영희 작가 며칠 전 어버이날이 지났다. 작년에 아이들에게 어버이날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지만, 귀가하는 사람들 손마다 카네이션과 케이크가 들려 있는 것을 보면서 꼭 그럴 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유교 문화의 뿌리가 참 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교는 사상을 넘어 생활문화로 깊이 자리잡고 있지만, 이제는 애증이 교차하는 딜레마가 되어가고 있다.사실은 두어 달 전부터 브런치스토리에 ‘주주금석 논어생각’을 매일 한 편씩 올리고 있다. 김도련의 저서 ‘주주금석 논어’를 내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주주금석’에서 주주는 주자의 해석이고, 금석은 정약용의 해석을 중심으로 저자가 풀이한 것인데, 브런치스토리에서는 두 해석을 비교하면서 내 생각을 덧붙이고 있다. 학창 시절 때 ‘논어’를 읽으며 느낀 감흥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그때는 보지 못했던 부분이 새롭게 보여서 또 다른 재미가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효에 대한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공감하기 힘들다.‘논어’에 나오는 효에 관한 유명한 구절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그 뜻을 살펴보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실을 살필 것이니,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어야 효라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이 문장에 대해 금석이 주주와는 풀이가 약간 다르지만, 자식이 부모 뜻을 따라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다.그러나 이런 공자의 이야기를 현대에 적용하기는 힘들다.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는 부모 자식간의 갈등은 자녀에게 부모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데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자녀의 진학이나 진로 선택에 부모가 강하게 개입하는 경우도 있고, 결혼했거나 집 떠난 자녀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요구하거나 주말마다 찾아오기를 바라는 부모도 있다.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은 방청객의 고민을 즉석에서 풀어주어 인기가 많다. 방청객 사연 중에는 부모와 자녀의 갈등 문제도 자주 등장하는데, 주로 자식에게 서운한 부모나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진 자녀의 이야기다. 법륜 스님의 답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은 의무이므로 착한 행동은 아니다. 대신 자녀가 스무 살이 되면 독립시켜라. 이제 부모와 자식은 모두 성인이므로 자신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자녀가 부모를 돌보는 것은 의무가 아니므로 착한 행동이다. 착한 행동은 하면 좋지만 안 한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부모의 외로움은 스스로 해결해라.’유교 사상에 비추어보면 말도 안 되는 답변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생활환경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유교가 지배하던 농경사회에서는 경험 많은 부모의 뜻이 옳은 경우도 많았고, 부모가 죽기 전까지 재산은 모두 부모의 것이었다. 반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부모의 경험은 무용지물이기 십상인데다, 자녀 또한 부모와 독립하여 재산을 가질 수 있어서 온전히 성인으로 독립할 수 있다. 유교의 ‘중용’은 때에 맞게 한다는 ‘시중’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논어’는 많은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지만, 가족 윤리에서는 ‘시중’의 의미를 찾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3-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