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 낸 추억들이 밟히고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진눈깨비 뿌리던 날, ‘나’는 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에서 그는 “취한 사내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정거해 있는 ‘빈 트럭’을 본다. ‘구두 밑창’으로 “추억들이 밟히”는 소리와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밟히는 소리도 듣는다. 저 진눈깨비 내리는 거리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시인의 기억들을 불러온다. 외로운 빈 트럭과 쓸쓸하게 쓰러지는 취한 사내들에 대한 묘사와 시적 화자의 어린 시절들을 불러오는 회상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문학평론가
2022-02-13
나는 달의 감식가,평생 달을 맛보도록 되어 있다멀리 좁은 길들이 꿈틀거렸다나는 손을 뻗어 안 보이는 곳까지그들을 쓰다듬어주었다길들은 이내 온순해졌다둑을 핥으며 들불이 번지고 있었다둥근 달이 안개 속에 떠 있었다나는 달을 깊숙이 빨아들였다하늘이 캄캄해지고 길들이 어둠 속에서 낮아졌다몸이 환해졌다내가 둥글게 떠오르고 있었다‘나’는 밤의 세계와의 회통에 성공한 능수능란한 마녀 같은 이다. 그가 길들을 쓰다듬으면 이내 길들은 온순해지는 것이다. 길이 미래를 상징한다면, 이제 미래는 이 ‘나’의 것이다. ‘나’는 “달을 깊숙이 빨아들”이고는 역설적으로 새롭게 생명의 빛을 내뿜어 몸이 환해진다. 죽음을 들이마심으로써, 즉 주체의 해체를 감행함으로써, ‘나’는 세계와 동화되고 새로운 삶을 향해 달처럼 “둥글게 떠오”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2-10
산에서 내려와서아파트촌 벤치에 앉아한 조각 남아 있는 육포 안주로맥주 한 병을 마시고지하철을 타러 가는데아 행복하다!나도 모르겠다불행 중 다행일지행복감은 늘 기습적으로밑도 끝도 없이 와서그 순간은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하면서그 순간은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이다.시간의 기나긴 고통을잡다한 욕망이 낳는 괴로움들을완화하는 건 어떤 순간인데그 순간 속에는 요컨대 시간이 없다술 한 잔 하고 “지하철을 타러” 갈 때 ‘기습적으로’ 닥치는 행복감은 우리도 자주 경험하는 감정이다. 시인은 바로 그 순간이 “우주를 온통 한 깃털로 피어나게” 한다고 말한다. ‘시간의 궁핍’을 치유하는 것은 행복감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드는 어떤 순간이다. 이 “시간이 없”는 ‘순간’은 시간에 사로잡힌 삶을 치유한다. 그 순간은 우주를 가볍게 피어나게 하며, 우리들이 그 우주와 즐거이 교통할 수 있게 한다. 문학평론가
2022-02-09
비가 내린다.흠씬 젖는 육체와 정신이 없고그 사이가 흥건하다. 사랑이여 이대로사이와 사이만 남아 가시화하는거울과 거울의 대면 속으로내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펼쳐다오.난해한 육체의 꽃잎과 꽃잎과 또 꽃잎과겹쳐지는 꽃잎들과육체적인 정신의 꽃잎들과단 한마디, 등 뒤에 네 숨결과비에 젖은 육체와 정신이 사라지고 그 사이만 흥건히 남아 있다.시인은 사랑에게 청원한다. 거울과 거울의 사이와 사이, 그 대면 속에 “내 모든 것을 너의 것으로/펼쳐”달라는 청원. 이 ‘내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거울과 거울 사이에서,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겹쳐지는, “육체적인 정신의 꽃잎”이다. 사랑은 그 “내 모든 것”을 “등 뒤에 네 숨결”로 펼칠 수 있다. 이 꽃잎을 역사 또는 삶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문학평론가
2022-02-08
아이는 한 손으로 젖을 움켜쥐고넓은 들에서 하늘로 무너지는강을 보고 있다강에는 강물이 흐르고물속에서 날개가 젖지 않은새 한 마리가강을 건너가고 있다두개의 시선이 존재한다. 강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뒤의 연)과 그 아이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시선(앞의 연). 이 시는 대상 세계를 그림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읽어보면 기묘한 초현실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착란적인 느낌을 준다. 이는 “하늘로 무너지는/강”이나 “물속에서 날개가 젖지 않은”이란 모순적 표현 때문일 텐데, 이를 통해 이 시는 대상 묘사로서는 이룰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보이는 세계와 화해하거나 안주할 수 없는 시인의 고투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문학평론가
2022-02-07
아무도 모르게 달려온 시간들이들녘에 깔려 밤을 재촉한다길게 울며 언덕을 내려가는염소들은 이제 밤을 볼 것이다구름들은 추억을 볼 것이다더욱 급하게 시간들은 들을뒤덮고 염소와 나무들은어둠속에 있다 우리는모두 어둠속에 있다걸어온 길의 발자국을 기억하는데도우리는 숨가쁘다 대지는 신음으로가득하다 언제 우리는 밤과 함께독이 될 수 있으리오낮에서 밤으로 뒤바뀌는 시간, 이제 구름들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몸을 감출 것이다. 우리가 걸어왔던 흔적들인 발자국도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며 풍경은 그야말로 적막과 망각 속으로 빠져들어 갈 것이다. 시인은 새벽이 아니라 밤과 함께 더 깊어지는 시간, 우리가 독이 되는 시간을 기다린다. 종말에 대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위의 시는 밤으로 표상되는 정지된 시간을 전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2-06
때까치는 무리짓지 않는다혼자서 행동한다꽃이 있는 공간을 날지 않는다한 마리 새가잎 진 느티나무 아득한 우듬지외로운 높이에 이를 때까지투명한 가을 하늘 전부를가랑잎 뒹구는 스산한 계곡 캄캄한 깊이를노을에 물든 날개를 흔들며단독자처럼 혼자서 건너지 않으면 안된다이 시는 ‘혼자서’ “가을 하늘 전부”와 “계곡 캄캄한 깊이”를 건너고자 하는 시인의 강인한 의지와 포부가 단호하게 표명되고 있다. 시인이란 대상을 변용시켜 내면화하고 삶의 의미와 무의미를 감당해내면서 드러내는 이다. 그것은 ‘외로운 높이’에 이르거나 ‘캄캄한 깊이’에 들어가 보지 않으면 이루어내지 못할 일, 이 시는 시를 쓰면서 부딪치게 되는 ‘아득한’ 세계와 씨름하는 시인의 고독을 잘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2-02-03
받기로 한 돈이 입금되지 않은 날짧은 전화 한 통으로 약속이 깨진 날미안하다는 한마디로 인연이 다한 날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렸고끓어 넘칠 듯한 신열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고나는 문득어떤 굴욕에도 반응할 것 같지 않은물기 없는 고목들의 한숨을 상상했고그저 따신 밥 먹고 제 영혼을 이불 속에 가두어아직 철없는 아이들을 향해 끝내 유치한 뉴스를 향해입바른 소리나 해대는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나는 후회보다 끈질긴 습관이 싫은데오늘 하루 양심 없이 하늘만 청명했고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였고시인의 삶은 현재 “밤새 핀 줄도 몰랐던 꽃들이 죄 져버”린 시간에 놓여 있다. 삶의 꽃은 져버렸고, 그래서 삶은 “소심한 가장의 잔소리”만 아이들에게 해대는 습관이 지배하게 되었다. 즉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나”가 되었다. 하나 시인은 이 현실에 체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몸에 신열이 난 것은 그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굴욕에 반응하지 않는 ‘고목’과 같은 삶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2-02
몇백 년 된 은행나무가봄을 기다리고 있는 성황산 새로 난 산책길고목 같은 살갗을 뚫고 새순 내밀게 될(….)지금껏 헛살았던 길 되짚으며산바람 숨 깊이 들여 산이 주는 고요를 들었을 때아가야 나의 가지 길이 비로소사람 속으로 짱짱하게 뻗어나는 걸 알았단다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가시 많은 덤불 속에도아주 작은 새들이 살고 있는 모양을호주머니 속에 넣어와 가만 열어보기도 했단다그때서야 주린 정월을 채우고 간청설모가 오르내린 나뭇가지마다내가 살아야 할 길이 보이더구나시의 화자는 산책길을 걸으면서 새로운 생명이 고요히 “고목 같은 살갗을 뚫고” 조금씩 솟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죽음 주위를 맴돌았던 휘청거리는 ‘지금껏’ 삶이란 “헛살았던 길”이며, “사람 속으로 짱짱하게 뻗어나는” 생생한 삶의 장이 자신이 갈 길임을 깨닫는다. 산속 뭇 생명들-“아주 작은 새”나 ‘청설모’와 같은-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문학평론가
2022-01-27
동틀 무렵, 그렇게 우주가 사람의 마을로 손금처럼 내려오고 아직 저마다의 이름을 채 밝히지 못한 시간, 가난은 그래도 사람들을 먼저 깨워 이 시간을 온전히 지키라 합니다. 산을 내려오는 길과 저 산을 지나 우주 한 끝에 닿는 길을 당신이 먼저 걸어보라 합니다. 아마 그 몸에도 동이 트려나봅니다. 아직 잠든 식구들을 두고 시퍼런 눈으로 동트는 사람들, 그들이 한 우주가 아니겠습니까?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가난한 자들만이 이 동트기 직전의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붙잡아 지켜낼 수 있다. 이 동틀 무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걸어가 “우주 한 끝에 닿는 길”을 만들어내라고 권고한다. 식구들을 책임져야 하는 한 가장의 몸에도,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가난한 실업자들의 몸에도 역시 동이 튼다. 박명의 새벽이 시퍼렇듯이 그들의 몸도 “시퍼런 눈으로” 동이 튼다. “한 우주가” 깨어난다. 문학평론가
2022-01-26
씻어야 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샤워기를 틀면 습기 찬 저녁은 알몸뚱이를 거미줄같이 감싸고땅바닥에 흘린 물기를 걸레로 닦으며물 한 방울 마실 데가 없었을 너에 대해 반성했지나는 어쩐지 미안함을 느끼고 싶어, 방바닥에 붙어 눈감고침묵으로 거미의 울음소리를 돌보고 있으면이 밤이 벚꽃을 토하는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괜찮니?’ 혼잣말을 하면, 방 한구석에작은 물방울의 자세로 숨을 죽이는 감정 하나마음의 변태로나마 붙잡고 싶은 한 목숨이거미줄도 없는 허공에 매달려 아슬아슬 깊어진다시의 화자는 쓸쓸함과 미안함의 습기에 의해 거미줄에 걸린 먹이처럼 방바닥에 꽉 붙어 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을 거미로 상상하게 되는데, 침묵의 방 안에서 거미의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너의 부재로 인해 지옥이 되어버린 방, 방바닥에 꽁꽁 묶여 있는 이 방에서, 화자는 작은 한 방울의 의욕, 비록 그것이 변태적이라고 하더라도 ‘한 목숨’을 붙잡으려는 의욕을 거미처럼 가지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2-01-25
함부로 펴 볼 수 없는 기록은끝내 속내를 웅크리고가시를 피워내고야 만다. 속이텅 비어 있을 수도 있다. 한 번도물 주지 않았다. 그가 펴 본 책들도활자를 모두 지웠을지도 모른다속을 궁금해하지 말라는 듯 그도저 가시의 몸짓을 취하고 있었다나도 세상에 그냥 부어 오른 혹은 아니다선인장 같은 책을 쓸 거야 아무나잘라 볼 수 없는 식물만이모래와 돌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법이다그는 선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책은 눈물을 품었다 읽을수록(….)단호하게 푸른 가시들을 피워 올린 것이다.어떤 각오 없이는 함부로 속을 궁금해 할 수 없도록벤치에 누워 죽어간 사내의 웅크린 모습이 품고 있는 것은 “함부로 펴 볼 수 없는 기록”이다. 그런데 그 ‘기록’이 결국 가시를 피워냈던 것, 그것은 선인장처럼 “모래와 돌”과 같은 황량한 세계로부터 “물을 길어 올”림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시인은 저 선인장의 가시에서 글쓰기의 전범을 찾아내고, “눈물을 품”고 저 단호한 가시들을 피워낸 “선인장 같은 책을” 쓰리라는 의지를 갖는다.문학평론가
2022-01-24
여기서 한 생애를 건너가야 한다면누더기 걸치고 왔어도 마지막은 눈부셔야 하리햇살 한 입 베어 물고어깨 위에는 순한 바람망토 두르고별빛망울 같은 추억들 눈동자에 출렁이게 하고가시를 찾아 날고 있는 새나에게 오는 날은 언제인가무엇을 찾아 나는 날고 있는 것일까머리를 제쳐 하늘 쳐다봐도 길은 보이지 않고한 생애를 여기서 울다가야 한다면마지막에 우는 울음은 깊고 가장 맑아야 하리시인은 “마지막에 우는 울음”은 가시나무새의 울음과 같이 “깊고 가장 맑아야 하리”라고 희망한다. 가시나무새는 마지막을 눈부시게 해줄 울음을 울 존재다. 시인은 마지막이 오면 이 새가 자신을 찾아오길 바란다. 그리고 그때엔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채 여전히 길을 보지 못하고 날아가고 있는 자신의 현재 상황이 바뀔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시인에게 죽음은 완전한 끝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2-01-23
혀에서 가시가 돋는다가시 속에서 꽃이 핀다입은 커다란 정원꽃들이 길을 연다시인을 시 쓰기로 이끈 것은 가시로 돋아난 마음의 고통들일 것이다. 하지만 시는 그러한 고통의 토로로만 써지지 않는다. 시는 이 고통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가시 속에서 꽃이 핀다”는 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시는 써질 수 있다. 이 발견은 가시들이 돋은 입 안이 ‘정원’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낳는다. 고통 속의 아름다움-정원의 꽃-을 돌보다 보면 꽃들이 길을 열기 시작할 것이며, 그 길을 통해 비로소 시의 말들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될 것이다.문학평론가
2022-01-20
물길이 물길 열고그 물길이 또 물길 열어물밭 하나 이룬 곳물 뿌리가 만든 물의 열매들이물의 씨앗들 퍼뜨린 곳물새 떼 둥둥 퍼뜨린 곳위의 시는 물로 상징되는 자연이 어떻게 생명의 길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우포에서는 “물길이 물길 열”면서 자연스레 물길이 줄줄이 이어지고, 결국 하나가 된 물길은 ‘물밭’이라는 하나의 장소를 형성한다. 그 밭에는 물의 뿌리가 있고 그 뿌리에서 물의 열매가 달려 나오며 물의 열매는 물의 씨앗을 다시 물밭에 퍼뜨린다. 그리고 물의 씨앗들은 놀랍게도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물새 떼’로 비약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1-19
오늘처럼 해질 듯 젖은 날들도 방긋 몸을 풀고그 아슴한 봄날과 여름 냇가조계산이 이고 있던 흰 눈과 채석강의 노을까지한 톨씩 한 줌씩 풀려 나와세월의 아지랑이 흰 머리카락도 타고 올라봄 햇살로 뛰놀리라그 밤에는 꼬박 당신을 만나리라봄비가 사흘째입니다그만 오후에는 햇살이 들어주어야겠습니다시인은 시간의 흐름을 슬퍼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흰 머리카락이 생기더라도, 그 위에 피어나는 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당신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은, 시간이 흘러 청춘이 소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기대로 전화된다. 또한 그 ‘그리움-기대’는 봄을 이곳에 미리 당겨와 지금 시간을 봄 햇살 뛰노는 신생의 시간으로 전환시킨다. 그렇기에 시인은 당신과의 만남을 영원히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1-18
어제 애인과 헤어졌더라도슬픔은 바닥까지 환해야 할 것,함부로 발설할 수 있는 비밀이 늘더라도핏물 뚝뚝 떨어지는 상처는 꽃봉오리 맺어야 할 것,알 수 있는 한 가지는어제와 같은, 이라는 단서가 얼마나 비겁한 발견인지,햇살은 가장 개방적으로 걸어가고그 아래 숨어 걷는 그림자는 소심한 심장처럼 반짝거리지,눈 감아도 보이는 곳에,그러나 손잡을 수 없는 곳에,애인과의 이별로 인한 슬픔과 비밀스러운 상처가 늘더라도, ‘낭만주의적인 아침’은 그 어둠들을 긍정하고 극복하도록 이끈다.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이 이 햇살 앞에서 열리며 반짝거리기 때문이다. 하나 이 햇살은 “눈 감아도 보이는 곳에” 비추는 햇살인 것, 실제 현실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이상적인 이미지다. 그래서 시인은 알고 있다. ‘낭만주의적 아침’은 “손잡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2-01-17
상어와의 결투에서 이기고 상어의 이빨을 훈장처럼 내 잇몸에 끼운다 나를 게걸스레 물어뜯는 상어들, 나는 어디 갔어? 엽총을 어디에 두었더라?빈 바다에 바람이 바뀌고 나는 다시 배를 띄운다 아직도 작살을 손에 쥔 채 하루 종일 꿈을 좇고 있다 작살에 찍혀 언뜻언뜻 허연 아랫배를 드러내는 낯선 나와 사투를 벌이는 핏빛 시!시 쓰기는 바다 한 가운데 노인-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그 노인-이 상어와 싸우는 것과 닮았다. 시인은 상어와의 싸움에서 이겨서 “상어의 이빨을 훈장처럼 내 잇몸에 끼운” 시를 산출하지만, 곧 다른 상어에 의해 물어 뜯기고는 사라져버려야 한다. 그런데 격투 대상인 그 상어는 또 다른 “낯선 나”임이 마지막 구절에서 드러난다. 시인이란 그 “낯선 나”와 피비린내 나는 사투를 벌이는 사람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1-16
비 그친 사이고추잠자리 한 쌍 옥상 위를 빙빙 돌고 있다두 마리가 하나로 포개져 있다누가 누구를 업는다는 거업고 업히는 사이라는 거오늘은 왠지 아찔한 저 체위가 엄숙해서 슬프다서로가 서로에게 서러운 과녁으로 꽂혀서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땅에 닿을 듯 말 듯 스치며 나는 임계선 어디쯤문득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 있다앉는 곳이 곧 무덤일질주의 끝이 곧 휴식일 어느 산란처죽은 날개는 너무 투명해서 내생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위의 시에 따르면 사랑은 상대를 과녁 삼아 목숨을 걸고 꽂히는 화살이다. 그와 동시에 사랑에 빠진 이는 상대에게 자신을 개방하여 화살에 제공하는 과녁이 된다. 사랑하는 삶은 “맞물린 몸 풀지 못하고” 삶과 죽음의 임계선까지 화살 맞은 상처로 피 흘리며 다다르는 삶이다. 그런데 시인은 삶과 죽음의 임계선 너머인 ‘내생’까지 상상한다. 그 내생이 살아갈 무덤은 사랑의 질주가 끝에 다다른 “어느 산란처”다. 문학평론가
2022-01-13
뼈만 남은 사람이마지막 뼈를 들어내고 있다뼈만 남은 사람의 뼈가 마르고 말라눈 뜬 자들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마침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다뼈만 남은 사람들이 서로의 갈비뼈를 들고흔적 없이 썩은 머리와 버려진 사지를 쓸어 담아이미 오래전에 항전이 끝난 무덤으로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위의 시는 우리의 삶과 현실을 극한적인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제 뼈까지 말라버린 사람들. 뼈도 제대로 못 추리고 자신의 무덤 속으로 걸어가는 도저한 형상은 비극적이다. 시인은 극단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면서 우리의 실상을 충격적으로 제시한다. 즉 시인은 위의 시에서 어떤 절망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같은 현실을 극한의 이미지로 제시하면서 그 실상을 독자들의 마음에 각인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202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