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어야 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샤워기를 틀면 습기 찬 저녁은 알몸뚱이를 거미줄같이 감싸고땅바닥에 흘린 물기를 걸레로 닦으며물 한 방울 마실 데가 없었을 너에 대해 반성했지나는 어쩐지 미안함을 느끼고 싶어, 방바닥에 붙어 눈감고침묵으로 거미의 울음소리를 돌보고 있으면이 밤이 벚꽃을 토하는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괜찮니?’ 혼잣말을 하면, 방 한구석에작은 물방울의 자세로 숨을 죽이는 감정 하나마음의 변태로나마 붙잡고 싶은 한 목숨이거미줄도 없는 허공에 매달려 아슬아슬 깊어진다화자는 ‘너’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부재하는 ‘너’는 ‘나’를 거미줄로 감고 있는 것 같아서, 화자는 자신을 거미로 상상한다. 너의 부재로 인해 지옥이 되어버린 이 방, 방바닥에 꽁꽁 묶여 있는 이 방에서, 화자는 거미 같이 작은 한 방울의 의욕, “마음의 변태로나마” ‘한 목숨’을 붙잡으려는 의욕을 가진다. 자기에게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혼잣말로부터 비롯된 그 의욕은 어떤 삶의 전환을 가져오리라. 문학평론가
2021-11-16
높은 곳에 홀로 들어앉아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도 무심하게 듣고 흘리고내 안에 이는 세찬 바람도내 안에 흔들리는 망념의 잎사귀들도어느 결엔가 손 가는 대로걷어내고 걷어내어맑고 정갈한 한 채의 까치 둥지를아득히 먼 나뭇가지 사이에 걸쳐 두었구나지상의 삶이 다하면내 갈 곳이 바로 거기높고도 고결한 집에 나는 살고 싶다시인은 저 새들의 둥지처럼 말들을 통해 독자가 거주할 장소-시-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시인이 갖고자 원하는 둥지와 같은 시 작품은 어떠한 시일 것인가. “높은 곳에 홀로 들어앉아” 있는 ‘둥지-시’는 지상과 신이 계신 하늘 사이에 있다. 그래서 시인은 “지상의 삶이 다하면/내 갈 곳이 바로 거기”라고 말한다. 이 ‘둥지-시’는 삶을 흔들리게 하는 “망념의 잎사귀들”을 “걷어내며/맑고 정갈한” 모습으로 있다. 문학평론가
2021-11-15
날개가 없는 바위는멀리 산등성이를 기웃거린다복사꽃 핀 야트막한 언덕에서지평선을 기어가는 노을에 마음을 빼앗겼고수직으로 하강하는 한 줄기 햇살에도 설레었다꽃잎들의 함성을 듣지 못했고소나기에 젖은 들판을 뛰어보지 못했으나무논에 뜬 달을 무심히 바라보며대숲의 바람소리를 그리워했다먼 하늘 배회하는한 무더기 구름을 따라 떠돌기도 했다소중한 것은 곁에 있는 법풀잎들이 소곤거리며 뱉어낸 씨앗들바람에 떨어졌다 다시 살아나어여쁜 눈물을 나눌 때제 자리를 받아들이는 바위숨겨놓은 울음은 날개가 된다알다시피 바위는 한 자리에 붙박여 있을 뿐, 비상할 수 있는 날개가 없다. 하지만 자유로이 비상하여 날아다니고 싶은 열망은 가지고 있다.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위에게 날개를 제공해준 것은 바위처럼 땅에 붙박여 있어야 하는 풀잎들이다. 풀잎들과 눈물을 나눈 바위가 “제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숨겨놓은 울음은 날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14
낮은 구름 한 무리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그날의 기억이 도착했다문득 뒤를 돌아보는 창으로부터강물 우는 소리를 들었다울음은 말이 되지 못한 눈물이었을까어제는 밥상을 끌어안고 숨을 참았다눅눅한 반찬으로 오래된 문장이 터질 것 같았다굳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위의 시의 ‘도착’한 기억이 그러한 기억일 것이다. 이 기억을 전달받은 시인은 “문득 뒤를 돌아보”고, “강물 우는 소리를” 듣는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게 만드는 서러운 기억들. 이러한 말 못할 기억들은 마음 깊이 새겨진 “오래된 문장”에 스며들고, 그 슬픈 기억들이 터지려는 울음으로 전화되면서 그 문장 역시 폭발할 듯 팽팽해진다. 문학평론가
2021-11-11
거대한 밥에 대해서 생각하다가가스배관을 타고 오르는도둑의 머리 위에서, 홀로빛나는 스텐 밥그릇을 올려다본다그리고 먼 바다로 나가 밥알건져 올리는 어부들의 그물을 생각하다가,영어 단어 하나하나가 밥알인이민자들의 밥공기를 어루만지다가지구라는 거대한 밥그릇을 깨닫는다다닥다닥붙은 밥알이 우리라는 거서로가 서로에게밥이 되기도 한다는 거위의 시에 따르면, 세계는 거대한 밥그릇이며 우리는 그 그릇 속에 들어찬 밥알들이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한 일을 한다. 도둑을 포함해서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어부가 길어 올리는 물고기도 밥알이며, 영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민지들의 “영어 단어 하나하나” 역시 밥알들이다. 이 밥그릇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밥알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그 밥알을 먹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1-11-10
기다리던 편지처럼 왔습니다 십이월은눈 덮인 초원에 풀어놓은 양 떼온종일 머리를 박고 있었습니다(….)게르의 문 자주 여닫히고 사람들도 둥글게 모여듭니다한꺼번에 왔다 가 버릴 사람들이 드나드는 사이저녁과 함께 새끼 양을 안고 들어선 남자의 표정은 모든 것을 품습니다이것은 어떤 마음입니다새벽까지 난로의 불씨를 걱정하는,광야의 바람과 보이지 않는 짐승의 소리를 끌어와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꽁꽁 언 두 손이 흐미를 듣게 된 귀를 어루만집니다그날 밤 게르 밖의 별들도 둥근 모음으로만 빛났습니다저 초원에서 사는 자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둥글게 서로 어울린다. 이들과 세계 사이에 분리는 없다. 새끼 양을 안고 들어와 두 손으로 귀를 어루만지는 남자의 모습은 그 ‘바람2212짐승2212흐미’의 리듬처럼 느릿하게 둥글다. “게르 밖의” 세계 역시 ‘흐미’의 리듬으로 운행되어서, 하늘의 “별들도 둥근 모음으로만 빛”난다. 둥근 리듬에 감싸인 세계의 광경은 따스하고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2021-11-09
컹컹 짖는 언덕 아래와 건너다보이는 불빛과 나는조용한 삼각늦은 밤을 견디는 꼭짓점들이다소문은 잠들어남은 불빛을 당겨내가 다 써버렸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안경을 쓰는 것보다깜깜한 나를 환히 볼 수 있다미래를 보기 위해접질린 길은 한걸음 물러서야 보이고더 아파본 뒤에야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모두가 잠든 밤에 ‘나’는 저 “남을 불빛을 당겨” 써서 시를 쓴다. “한 걸음 물러서”서 세계를 읽어내는 이 시 쓰는 시간, ‘나’는 불빛이 비쳐 가시화된 언덕 아래 풍경을 통해 “깜깜한 나를 환히 볼 수 있”게 되며, “미래를 보기 위해/접질린 길” 역시 볼 수 있게 된다. 시 쓰기를 통해 가시화되는 별빛 아래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던 마음을 들추어내며 “빠져나갈 구멍”이 될 미래의 길까지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08
트럼펫의 마지막 코러스는내 육신의 껍데기137억 년 전의 까칠한 영상죽음을 잣아 올리는그물나는 원시의 리듬시간을 옥죄는 쇠사슬갈기갈기 찢겨진 시간의 먹이검은 수의를 입고 있는 나시인은 자신을 ‘원시의 리듬’으로 지칭한다. 그래서 그는 ‘네안데르탈인’이다. 그가 ‘원시의 리듬’일 수 있는 것은 그의 근원인 “죽음을 잣아 올리는” “137억 년 전의 까칠한 영상”과 만났기 때문이리라. ‘나’의 근원인 “원시의 리듬”을 되찾는 행위는 시간이 휘발되어 사라지지 않도록 “옥죄는 쇠사슬”로 시간을 감는 일이다. 또한 그것은 반대로, “시간의 먹이”가 되어 ‘내’가 “갈기갈기 찢겨”지는 행위이기도 하다. 문학평론가
2021-11-07
빈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저녁을 굶은 아이와 젖이 마른 엄마가 부둥켜안은 것처럼 둥근새벽에 울려 퍼지는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둥근항아리에 눈이 내린다운명이 없는 눈송이들이 항아리에 담긴다가장 멀리서 가장 깨끗하게 온 것들을 담아어떻게 이토록 자기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지빈항아리는 차곡차곡 눈을 쌓는다슬픔을 발효시키려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듯둥근 자세를 바꾸지 않고모든 기도를 다 드린 마음처럼 둥글게항아리는 비어있다‘빈 항아리’는, 결국 사라질 것이기에 “운명이 없는 눈”을 조건 없이 받아준다. 텅 ‘빈 항아리’는 비록 아무 것도 갖지 못한 가난한 존재이지만, 바로 그렇기에 눈처럼 이 지상에서 갈길 잃은 슬픈 이들을 엄마처럼 품어줄 수 있다. 그래서 그 항아리는 ‘둥근’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구원의 이미지를 지닌다. 곧 사라져야 할 눈송이들은 그 빈 항아리의 포근한 품속에서 순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기에. 문학평론가
2021-11-04
땅이 실금으로 갈라지고 있다구근이 사나워지고 있다바람에서 태어난 부리의 짓이다하나의 지평에서너머의 지평으로작년에 죽은 새들묘혈을 뚫어 다리를 세우고 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손을 향해팔색조 깃털이 날았다꽃의 허밍이 시작되었다“작년에 죽은 새들”이 봄에 재생하는 꽃처럼 묘혈 안에서 다시 “다리를 세우고 있”다. 새는 불사조처럼 시인 내면에 쌓인 지층을 갈라내며 땅 속으로부터 하늘로 떠오른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새는 저 “너머의 지평으로” 날아가려고 한다. 시를 쓴다는 일은 또 다른 지평으로 넘어가려는 새에 이끌려 사는 일, 그래서 이 시인의 시 쓰기는 자신의 삶을 “너머의 지평”으로 이행케 하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2021-11-03
발포비타민 아닌 구운 햇빛 알갱이를 달라는 건봄날의 주문까맣게 구운 손으로 은화를 구걸하는 이도 있다편의점 아줌마가 꺼내는 별모양 쿠키에는대추야자 씨앗을 닮은 초콜릿이 박혀있다강아지 콧등에서 하품이 구워진다간혹 밤의 라디오가 구워주는 음악편지가 빵 속보다 촉촉하다아줌마의 오븐바닥에 눌어붙기도 한다이 유리창은 젖은 것부터 먼저 구워낸다고빗방울 마른 얼룩이 불똥으로도 보인다고, 중얼거린다위의 시에 등장하는 편의점에서는 편의점 아줌마가 준 별모양의 쿠키도 공간의 환상적 변환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변환 속에서 놀랍게도 모든 것들이 구워지기 시작한다. 강아지의 하품뿐만 아니라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편지까지 말이다. 그곳에서 음악은 “오븐바닥에” 찐득하게 눌어붙는다. 이는 이 공간이 예술이 숙성하는 곳임을 의미하는 것일 터, 그래서 이곳은 시가 구워지는 장소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문학평론가
2021-11-02
서울역 뒷산에 아름다운 노을이 핀 적이 있습니다그때 당신은하얀 컬러를 목에 두르고 있던 소녀였습니다나무들은 없고 아파트만 언덕에 가득해능선과 하늘이 없어졌지만우리의 마음까지 없어진 것은 아니겠지요그 능선의 길은 어린 날의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도시를 내려다보며우리는 지금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이 뒷산에서살아가고 있습니다다시 그 민둥산 언덕에 오월의 바람이 불면빼곡한 우리의 나이테는 그 능선을 노래하죠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살게 된 “서울역 뒷산”에는 예전에 존재했던 삶의 향기인 “우리의 마음”이 남아 있다. 그것은 그 도시 뒷산 능선을 걸으며 함께 소년소녀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월의 체취다. 그 체취, “어린 시절의 향기”는 여전히 능선의 길에 배어 “빼곡한 우리의 나이테”가 되어준다. 그 나이테는 옛날 아름다운 시절을 노래하며 도시화가 삶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말소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11-01
나보다 내 몸이 더 정직하다는 걸 알고부터나는 몸의 길로 따르기로 했다아직도 경험하지 않은 ‘첫’ 이 너무 많은몸과 마음의 접경지대내 몸을 빠져나간 달, 그림자만 남아폐경이 배경으로 보이는내 몸의 비무장지대나 다시 월경을 꿈꾼다- ‘越境하는 밤’ 전문‘첫’이 일어난 사건은 새로운 일들을 불러일으켜 다른 삶이 도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든다. 하여, ‘첫’이 일어난 “몸과 마음의 접경지대”-‘비무장지대’-에서 시인은 “아직도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꿈을 꾼다. 그에게 첫 폐경은 “그림자만 남”은 ‘배경’이 되어 (나이의) 경계를 넘어가는 ‘월경(越境)’을 꿈꾸도록 이끄는 사건이다. 시인은 이렇듯 폐경 이후에도 더욱 새로운 삶을 꿈꾸리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문학평론가
2021-10-31
(전 략)피가 고인 스테이크를 포크와 나이프로 써는 순간에도 오는지난밤 먹다 남은 치킨 조각을 한 입 물고 등교하는아이들과 함께 게으른 식탁을 뛰어넘어가는난민의 가방 속에 화약 냄새와 함께 머무는지극한 평화, 지독한 평화언젠가 사진에서 보았던 마더 테레사의 눈빛을 닮은평화는 흰 손이 아니라 검은 손, 애타는 검정클로이를 연주하는 열대 지방 사람의 검은 손에서피어나던 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검정색은 통상적으로 죽음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 검정색은 평화를 상징하는 색으로 전환된다. 평화는 평온한 것만이 아니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고통 속에서 평화는 온다. 평화는 고요하면서도 뜨거운, 소용돌이 속의 태풍의 눈처럼 강렬한 것이다. “클로이를 연주하는 열대 지방 사람의 검은 손”처럼 고난을 딛고 피어오르는 예술에서, 그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를 꽃에서 평화는 자신을 검게 드러낸다. 문학평론가
2021-10-28
밭을 매다 보면미처 파내지 못한 돌멩이를 만날 때가 있다언젠가 영역 밖으로 밀려날 운명임을 알면서도흙의 멱살 꽉 그러쥔 채 놓아주지 않는다겉으로 드러낸 부분만으로도얼마나 환한 상처인지 알 수 있지만어둔 햇빛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파면 팔수록 더 깊이 제 모습 드러내는,내 가슴에도 단단히 박힌 상처 하나 있다늦은 밤 취기에도 풀어 놓지 못하는, 그래서 더사랑은 재미없는 게임이었을 게다(….)돌멩이 하나 파낸 자리밭의 배꼽 같다위의 시에서 실패한 사랑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는 상처는 밭에 박혀 있는 돌멩이로 비유된다. 그러니 밭은 시인의 마음을 비유한다. 그래서 “돌멩이 하나 파낸 자리”가 “밭의 배꼽 같다”는 진술은 상처를 파낸 자리가 마음의 배꼽 같다는 말이겠다. 어머니의 탯줄이 잘린 흔적이 배꼽이니, 시인에게 마음의 어머니는 상처인 것. 상처가 시인의 마음을 어머니처럼 키웠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27
나뭇잎은 나무의 고통이다. 나무는 뿌리에서 길어 올린 눈물의 유전자를 가지마다 매달린 익명의 이파리들에게 은밀히 주사한다. 실핏줄 속을 흐르는 붉은피톨들, 하지만 쉽사리 들키지 않게, 고통의 무늬는 뒷면에 양각으로 맺힌다. 나뭇잎은, 저려오는 아픔을 참아가며 여름 내내 써내려간 문장들. 가을이면 나무는, 더는 참지 못하고 나뭇잎을 붙잡았던 손을 놓아버리지만, 온 산이 핏빛으로 물드는 순간에도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나무에게 나뭇잎은 기억 같은 것 아니었을까? 결국 소멸할 운명에 처한 사랑의 아픈 기억…. 그런데 나뭇잎은 나무의 시이기도 하다. 뒷면에 “고통의 무늬”가 “양각으로 맺”히는 고통의 시. 그래서 탈고 직전 단풍 든 나뭇잎은 ‘핏빛’이며, 그렇게 핏빛 시를 떨어뜨리는 나무는 굳건한 시인이다.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주사한 기억-시-을 고통스럽게 떠나보내면서도, 나무는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26
하는 수가 없어 나는배를 가른다가른 배를 마리나 앞에 열어 보인다 마리나는 토한다하는 수가 없어 나는 갈비뼈를 톱질한다섬벅섬벅 뛰는 심장을꺼내마리나의 손에 쥐여 준다 마리나는 기절한다달은 여태 푸르고 마리나는 깨어나지 않고 여태 나는살아 있다 등 뒤에서 목을쳐 주기로 한당신은언제 오는가?이 시의 ‘마리나’를 시의 독자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화자의 자해 행위는 시 쓰기를 의미하며, 위의 시는 화자 자신의 시 쓰기가 시의 독자에게 이해되거나 사랑받지 못했다는 우울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해로는 자신의 목숨을 끊지 못하는 법, 목을 쳐줄 당신이 시인의 시 쓰기를 끊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당신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시인은 시 쓰기를 계속해나간다. 문학평론가
2021-10-25
풀을 베다가몸통 반이 날아간맹꽁이를 발견했다무릎을 꿇고수풀을 뒤져달아난 살점 반을 찾았다무릎을 꿇고민들레 옆에 구덩이를 파고냉이 잎을 깔았다비로소 제자리에 놓인 살점들박새가 둥지를 허물고 있었다- ‘숲은 왜 오월을’ 전문“몸통 반이 날아간” 맹꽁이의 시신을 발견한 시의 화자는 구덩이를 파서 냉이 잎을 깔고 그 위에 살점 반을 찾아 시신을 수습해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숙연만 마음으로 애도를 표한다. 어떤 존재의 죽음이든지 모든 죽음에 대해서는 책임감과 엄숙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박새가 둥지를 허물고 있었”던 것도 맹꽁이의 시신 위에 덮을 것을 마련하여 그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아닐까./문학평론가
2021-10-24
허공에 거적을 펴고시를 써온 것이 몇 년인가햇빛 오고 바람 불어 좋은 날새로 핀 벚꽃꽃눈보라 와작히 내리는데내 눈에선 자꼬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이는 지상에 발을 대고걸어가는 때문죽는 날까지도 그러리라시인이 거적을 펴는 허공은 백지 같은 공간이다. 백지는 비어 있지만 바탕이 실재해서 그곳에 시를 써넣을 수 있다. 그러나 허공은 지상의 현실이 아니다. 중력의 지배를 받는 지상은 마음대로 상상력을 따라 날아갈 수 없는 곳이다. 아름다우나 허망하게 지는 벚꽃이 지상과 허공 사이에서 살아가는 시인을 아프게 한다. 허공에 쓰는 시와 지상의 현실과의 낙차 때문에 시인은 눈물을 흘린다. 문학평론가
2021-10-21
어제부터 가게는 조금도 들썩이지 않았다저녁 무렵 길고양이 한 마리 어김없이숯불바베큐집 통유리 문 앞에 기웃거린다먹다 남은 닭 뼈의 추려낸 살신문지 깔아놓은 차 밑으로 가져다 놓던두툼한 안경렌즈를 낀 그녀의 둥그런 등이며칠째 보이지 않는다(….)앞발을 납죽이 뻗어 기다림을 펴본다통유리 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한참을 유리문에 비쳐 본 후옆 담을 넘어 주차된 차 밑으로그림자를 말아 넣는다닫힌 문 앞喪中그 위로 어둠이 지나간다자신에게 밥을 주던 숯불바베큐집 주인의 죽음을 알지 못한 채 가게 문 앞에서 한참 그 주인을 기다리는 길고양이의 모습이 안쓰럽고 서글프다. 고양이는 문 앞에 쓰인 ‘喪中’이라는 글자를 알지 못하는 ‘문맹’. 고양이는 닭 뼈에서 추려낸 살을 주던 여주인의 “둥그런 등”을 보기 위해 가게 문 앞을 계속 기웃거릴 것이다. 길고양이의 안쓰러운 처지에까지 미치는 시인의 따스한 눈길이 느껴지는 시다. 문학평론가
2021-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