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앞 개울도 한옥 뒤란의 대숲을 통째로 빼앗아 흐른다 그래도 그 집들은 그걸 돌려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싸운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는 평화, 개울물도 저희들끼리 부딪히고 엉켜 싸울지라도 넘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 아랫마을로 향한다갑자기 장끼 한 마리가 논두렁 위로 날아간다 백자가 파삭 깨져버린다 깨지는 순간은 언제나 처연하다 아니 찬연하다 누구의 눈부셨던 시절도 나타나 어리둥절해 한다시인은 백자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서 자연과 예술의 경계가 사라진 경지를 발견한다. 대숲과 개울, 집 한 채가 적요하게 놓여 있는 마을이 새겨진 저 백자는 자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언어를 전달한다. 백자에 새겨진 장끼도 진짜 장끼와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놓여 있다. 그래서 백자 바깥으로까지 날아갈 듯한 백자 속 장끼의 모습은 백자를 “파삭 깨”뜨리는 ‘처연’하면서 ‘찬연한’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2-06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강가로 나서고 없는 빈집도 한 땀,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이 시의 리듬은 밤에 보는 잔잔한 강물의 흐름처럼 고요히 어딘가에 스며들었다가 나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고요하게 흐르는 음악처럼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리듬을 통해 각각의 사물들은 서로 어우러지고 갈등 없이 공존한다. 강의 베갯머리에 수놓아진, 마을의 이 평온히 공존하는 사물들은 뒤척이는 강물을 편안하게 잠들게 하고, 강가 마을의 밤풍경은 시적인 무엇으로 승화된다. 문학평론가
2021-12-05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촛불이 켜졌다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나는 무릎을 끓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시인은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서 촛불도 없는 제단에 나아가 기도를 올렸다. 기도는 시인도 놀랄 만큼 ‘기적처럼’ 이루어졌다. 시인 자신이 촛불이 되어버림으로써 그 기도는 달성되었던 것이다. 절실한 갈망은 시인 자신을 존재 변이시켜 갈망을 이루게 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적’이지 않다. 팔이 양초로 변한다는 거짓말. 하지만 시의 세계에선 그 거짓말이 진실이 된다. 문학평론가
2021-12-02
몸과 마음을 버려야만 비로소 머물 수 있는 곳아내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와 시안에도 들렀다내 생의 마지막 투병하는데절두산 부활의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신혼 초 살림 장만하듯 아내와 반겼다절두산은 성지순례로 가족과 들렸던 곳낮은 나에게도 지상의 집을 사랑으로 주셨다머리가 없는목 잘린 순교의 산오, 나도 드디어 못 하나를 얻었다무두정(無頭釘)부활의 집 지하 3층에서망자와 함께 이제사 천상의 집 지으리라지금은 돌아가신 김종철 시인은 삶의 마지막을 순교 성지 절두산에 있는 부활의 집에서 맞이하려고 했던 것 같다. ‘절두산’은 대원군에 의해 천주교 신자가 목이 잘려 순교(병인박해)한 곳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 순교자들처럼 머리가 없는 무두정 같은 못을 마지막으로 얻게 되리라 기대한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위의 시를 통해 무두정의 이미지로 부활하여 살아 있는 독자들의 마음에 박힌다. 문학평론가
2021-12-01
비 맞은 사람의 사랑의 고백은 끝이 없고밀양 덕천댁 할머니와 김말해 할머니가 세월호 유족에게 편지를 쓰듯이또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월호 유족에게 편지를 쓰고프란치스코 교황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듯이5·18 엄마들이 4·16 엄마들에게 편지를 쓰듯이분홍미선, 상아미선, 푸른 미선아봄은 이어지고 이어져 우리 앞에 봄꽃들의 행렬은 끝이 없다,낙원도 이 땅이 버린 타락천사 같은 하얀 사과 꽃 같은미선나무 물푸레나무 쥐똥나무가 차례로 수북한 꽃을 피우듯이당신에게 못한 일인칭의 사랑의 말을오늘 나는 또 누군가에게 꼭 해야 한다“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사랑은 바로 저 밀양-위안부 할머니들-세월호 유족-프란치스코 교황-5·18 엄마들 사이에 이어지는 편지의 왕래로 비로소 이루어진다.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일인칭의 사랑의 말을” 담아 편지 쓰는 일, 그것은 이미 완료된 죽음을 아직 살아있음으로 연결하는 고요한 기다림이자 ‘아직’의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밀애이다. 사랑의 미래가 오기를 바라는 기도를 동반하는 밀애를. 문학평론가
2021-11-30
옹관의 생김새를 보면 참 이상야릇하다큰 옹관 속에 작은 옹관이 들어박힌 모양이꼭 남녀가 교접하는 장면 같다마지막 주검을 담는 옹관을 두고그 무슨 불순한 생각이냐고 할지 모르지만아무리 뜯어봐도 내게는 그렇게만 보인다모든 생명의 탄생이 거기서 비롯됐으니죽음도 그렇게 갈무리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그러한 상상이 전혀 불순하지 않다오히려 신성해서 마음이 숙연하기까지 하다때로는 타원형의 저 옹관이자궁이나 알이나 씨앗으로 보이는 것도그 속에 누워 있는 주검이 주검만이 아니라새로 태어날 생명도 함께 누워 있다는 것(….)죽음은 생명을 품기 때문에 생명 세계는 중단되지 않는다. 모든 생명들이 죽음을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생명 있는 존재들로 계속 유지되어 가는 것은 새 생명들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새 생명들의 탄생은 에로스의 즐거움으로 이루어진다. 저 “남녀가 교접하는 장면” 같은 모양의 옹 ‘관’은 바로 생명을 품은 죽음의 형상이다. 그래서 저 옹관은 “자궁이나 알이나 씨앗으로 보이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29
버리고 간 집들이 도시를 이룬가정오거리 재개발지구 루원시티어서오십시오 장터할인마트 팻말에도위험 접근금지 써 붙인 낚시집 선팅에도목련왕대포집과 정아호프 부서진 문에도책임중개 새시대부동산 건물에도, 있었다꽃나라 유치원 구름다리 앞개나리 이마 으깨어진 노란 줄이 쳐졌다안전망에 갇힌 빌딩깨진 유리창 안에서 굶주린 개들이 서로를 물어뜯고비전축복교회 뒷마당에서는 부러진 의자가 못을 버렸다드림빌라 사람들 모두 사라졌는데붉은 글씨. 전체공가(全體空家)이젠 ‘접근금지’의 노란 줄이 쳐진 저 가게들은 시인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갔던 장소들이었으리라. 하지만 재개발로 사람들이 철수한 ‘루원시티’의 풍경은 “굶주린 개들이 서로를 물어뜯”는 으스스한 모습이다. 굶주린 개들은 저 사람들이 내쫓긴 공가를 차지하려는 자본의 싸움을 상징한다. 위의 시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파괴된 장소를 포착하고 그 속에서 으깨어지고 있는 삶들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11-28
사랑은 넝쿨손입니다철골 철근 콘크리트 담벼락그 밑으로 흐르는오염의 띠 죽음의 띠시뻘건 쇳물녹물을녹물을 빨아먹고 세상을 한꺼번에 다끌어안고 사는 푸른 이파리입니다사랑의 힘은 생명을 낳고 되살린다. 그래서 사랑이야말로 죽음의 근대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죽음을 끌어안으면서 삶으로 전환시키는 저 작은 ‘푸른 이파리’야말로 생명의 근원이자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여린 이파리 한 잎, 이 한 잎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이기에 그것은 이 세계,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해준다. 위의 시의 저자인 조오현 스님의 구도(求道)와 시 쓰기는 바로 저 푸른 이파리와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함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25
주먹으로 얼굴을 닦아 내리듯 눈이 온다목마른 메아리도 함께 온다빈 기침이 첫눈의 배후로 남은 새벽서둘러 잠을 깨운 것들이 따로 있다잘 견디다 갔을까,구름 속의 고드름처럼눈을 감았다가 오래 감았다가위의 시의 제목은 첫눈이 내린 ‘어제부터’ 시인이 당신의 죽음과 함께 살아야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삶은 “목마른 메아리” 같은 죽은 이에 대한 기억 속에서, 마음의 빈 터에 새벽 눈을 받아 안으면서 사는 삶이다. 시인의 잠을 “서둘러 깨”운 ‘빈 기침’은 그로 하여금 죽은 이가 “구름 속의 고드름”과 같은 죽음의 순간을 “잘 견디다 갔을”지 염려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눈을 오래 감았다가 저 너머로 가는 그 순간을. 문학평론가
2021-11-24
1자세히 보아야예쁘다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2이름을 알고나면이웃이 되고색깔을 알게되면친구가 되고모양까지 알고나면연인이 된다아, 이것은 비밀.자세히, 오래 보기. 이는 시심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시의 말은 세계를 자세히, 오래 봄을 통해 형성된다. 세계에서 시의 말을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시심)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게 하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시의 말이 ‘풀꽃 2’의 ‘이름’이자 ‘색깔’, 그리고 ‘모양’이다. 이름과 색깔, 모양의 앎은 주체와 세계를 깊이 이어준다. 세계와 ‘연인’이 되기까지 이르는 과정은 ‘비밀’이지만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11-23
쑤지커(栗枝科)가 만든 나무숲은 석질점토질이다그 나무숲이 풍경소리를 낸다나는 그 나무숲에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는 생각을 한다여기가 저의 물이라고 여기가 저의 바다라고 지느러미를 흔든다는생각을 한다다랑어 새치 사루기 꽃피리,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지느러미를 흔들때마다 깊이 재웠던 기억들이 살아난다는 생각을 한다햇빛 내리비치는 여울에서 나뭇가지가 품고 있는 기억들이 살아난다는생각을 한다풍경이 소리를 이끌고 그 소리는 물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소리가 물꼬를 트는 것이다. 넘실거리는 물은 시인을 “깊이 재웠던 기억들”로 인도한다. 그 기억은 시인의 기억을 넘어 사물의 꿈으로까지 연결된다. 자연에서 물은 피와 같아서, 자연의 생명력은 이 물의 흐름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한 물은 돌 사이의 작은 틈까지 놓치는 법 없이 평등하게 스며들고 돌들의 숱한 삶을 물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준다. 문학평론가
2021-11-22
작은 새가 꽃잎 위에발자국을 남겼다바람은 불어서바닥 위에 놓인 꽃을어딘가로 몰고 가는데발자국을 간직한 꽃잎만날아가지 않는다입술을 떨다가바닥에 그냥 붙어 있다작은 새의 발자국이꽃잎을 눌러 앉힌 것인데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알면서도꽃잎은 눌러앉아 있다작은 새의 발자국을지지대로 삼고서우리는 타자와의 깊은 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시킨다. 위의 시의 꽃잎은 타자의 흔적을 자신의 삶에 깊이 받아들여 생의 무게로 전화시킬 수 있었다. 그 흔적이 그리움의 정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꽃잎은 작은 새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새에 대한 그리움이 꽃잎의 삶의 무게를 더해줄 것이며, 그 무게 덕분으로 바람에 흩날리지 않는 주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21
신축공사장 폐유드럼통을 널름거리던 불꽃도 잦아들고또 하루를 일당에 팔라버린 길은 갈 곳이 없다피눈물 나는 쌍소리 속으로 미친 꽃들은 피어나고차체부 이십년, 공장의 불빛은 지척인데웬일로 친구들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다얼굴을 가리고 있는 저 거대한 담벽그 너머 어두운 소문으로 몰려와 나를 부르는 소리길 위에 내 몸을 눕힐 수 있는 곳천막 농성장엔 아내가 있을 게다나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길 위에서라도 몸을 눕혀 살아가리라는 시인의 다짐은 목적지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런데 그가 몸을 눕히려는 곳은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장인 길 위의 집 아닌 집, 즉 천막이다. 그곳에는 그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다. 떠돌이의 사랑은 안정된 집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사랑은 행려의 흐르는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문학평론가
2021-11-18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수억 년이 흐르고새의 까치발을 딛고다시 텅 빈 하늘혼자서 보는 노을노랗고, 빨갛고, 까맣고어떤 슬픔도 가능할 것 같은 색깔을휙휙 뿌려대고지느러미 흔들며 검은 하늘 속으로 사라지는저 혼돈“수억 년이 흐”른 시간이자 눈 깜박한 시간 사이에서, 새는 슬픔의 색깔을 텅 빈 하늘에 퍼뜨리며 사라지고, 이어 하늘은 검게 변한다. 화자는 새가 사라지면서 빈 하늘에 뿌려댄 슬픔의 색깔들-노랑, 빨강, 검정. 짙어지는 노을의 색깔-이 남겨놓은 흔적들에 대해 ‘저 혼돈’이라고 지칭한다. 새의 사라짐이 한 세계의 사라짐이라고 할 때, 그 세계가 사라지고 텅 빈 공간에 남은 것은 혼돈스러운 슬픔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17
씻어야 할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샤워기를 틀면 습기 찬 저녁은 알몸뚱이를 거미줄같이 감싸고땅바닥에 흘린 물기를 걸레로 닦으며물 한 방울 마실 데가 없었을 너에 대해 반성했지나는 어쩐지 미안함을 느끼고 싶어, 방바닥에 붙어 눈감고침묵으로 거미의 울음소리를 돌보고 있으면이 밤이 벚꽃을 토하는 소리가 창을 넘어오고‘괜찮니?’ 혼잣말을 하면, 방 한구석에작은 물방울의 자세로 숨을 죽이는 감정 하나마음의 변태로나마 붙잡고 싶은 한 목숨이거미줄도 없는 허공에 매달려 아슬아슬 깊어진다화자는 ‘너’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마치 부재하는 ‘너’는 ‘나’를 거미줄로 감고 있는 것 같아서, 화자는 자신을 거미로 상상한다. 너의 부재로 인해 지옥이 되어버린 이 방, 방바닥에 꽁꽁 묶여 있는 이 방에서, 화자는 거미 같이 작은 한 방울의 의욕, “마음의 변태로나마” ‘한 목숨’을 붙잡으려는 의욕을 가진다. 자기에게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혼잣말로부터 비롯된 그 의욕은 어떤 삶의 전환을 가져오리라. 문학평론가
2021-11-16
높은 곳에 홀로 들어앉아세상이 어찌 돌아가는 지도 무심하게 듣고 흘리고내 안에 이는 세찬 바람도내 안에 흔들리는 망념의 잎사귀들도어느 결엔가 손 가는 대로걷어내고 걷어내어맑고 정갈한 한 채의 까치 둥지를아득히 먼 나뭇가지 사이에 걸쳐 두었구나지상의 삶이 다하면내 갈 곳이 바로 거기높고도 고결한 집에 나는 살고 싶다시인은 저 새들의 둥지처럼 말들을 통해 독자가 거주할 장소-시-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시인이 갖고자 원하는 둥지와 같은 시 작품은 어떠한 시일 것인가. “높은 곳에 홀로 들어앉아” 있는 ‘둥지-시’는 지상과 신이 계신 하늘 사이에 있다. 그래서 시인은 “지상의 삶이 다하면/내 갈 곳이 바로 거기”라고 말한다. 이 ‘둥지-시’는 삶을 흔들리게 하는 “망념의 잎사귀들”을 “걷어내며/맑고 정갈한” 모습으로 있다. 문학평론가
2021-11-15
날개가 없는 바위는멀리 산등성이를 기웃거린다복사꽃 핀 야트막한 언덕에서지평선을 기어가는 노을에 마음을 빼앗겼고수직으로 하강하는 한 줄기 햇살에도 설레었다꽃잎들의 함성을 듣지 못했고소나기에 젖은 들판을 뛰어보지 못했으나무논에 뜬 달을 무심히 바라보며대숲의 바람소리를 그리워했다먼 하늘 배회하는한 무더기 구름을 따라 떠돌기도 했다소중한 것은 곁에 있는 법풀잎들이 소곤거리며 뱉어낸 씨앗들바람에 떨어졌다 다시 살아나어여쁜 눈물을 나눌 때제 자리를 받아들이는 바위숨겨놓은 울음은 날개가 된다알다시피 바위는 한 자리에 붙박여 있을 뿐, 비상할 수 있는 날개가 없다. 하지만 자유로이 비상하여 날아다니고 싶은 열망은 가지고 있다.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위에게 날개를 제공해준 것은 바위처럼 땅에 붙박여 있어야 하는 풀잎들이다. 풀잎들과 눈물을 나눈 바위가 “제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때 “숨겨놓은 울음은 날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1-14
낮은 구름 한 무리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그날의 기억이 도착했다문득 뒤를 돌아보는 창으로부터강물 우는 소리를 들었다울음은 말이 되지 못한 눈물이었을까어제는 밥상을 끌어안고 숨을 참았다눅눅한 반찬으로 오래된 문장이 터질 것 같았다굳이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위의 시의 ‘도착’한 기억이 그러한 기억일 것이다. 이 기억을 전달받은 시인은 “문득 뒤를 돌아보”고, “강물 우는 소리를” 듣는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게 만드는 서러운 기억들. 이러한 말 못할 기억들은 마음 깊이 새겨진 “오래된 문장”에 스며들고, 그 슬픈 기억들이 터지려는 울음으로 전화되면서 그 문장 역시 폭발할 듯 팽팽해진다. 문학평론가
2021-11-11
거대한 밥에 대해서 생각하다가가스배관을 타고 오르는도둑의 머리 위에서, 홀로빛나는 스텐 밥그릇을 올려다본다그리고 먼 바다로 나가 밥알건져 올리는 어부들의 그물을 생각하다가,영어 단어 하나하나가 밥알인이민자들의 밥공기를 어루만지다가지구라는 거대한 밥그릇을 깨닫는다다닥다닥붙은 밥알이 우리라는 거서로가 서로에게밥이 되기도 한다는 거위의 시에 따르면, 세계는 거대한 밥그릇이며 우리는 그 그릇 속에 들어찬 밥알들이다. 우리는 밥을 먹기 위한 일을 한다. 도둑을 포함해서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해 어부가 길어 올리는 물고기도 밥알이며, 영어를 사용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민지들의 “영어 단어 하나하나” 역시 밥알들이다. 이 밥그릇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밥알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그 밥알을 먹으면서 살아갈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1-11-10
기다리던 편지처럼 왔습니다 십이월은눈 덮인 초원에 풀어놓은 양 떼온종일 머리를 박고 있었습니다(….)게르의 문 자주 여닫히고 사람들도 둥글게 모여듭니다한꺼번에 왔다 가 버릴 사람들이 드나드는 사이저녁과 함께 새끼 양을 안고 들어선 남자의 표정은 모든 것을 품습니다이것은 어떤 마음입니다새벽까지 난로의 불씨를 걱정하는,광야의 바람과 보이지 않는 짐승의 소리를 끌어와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꽁꽁 언 두 손이 흐미를 듣게 된 귀를 어루만집니다그날 밤 게르 밖의 별들도 둥근 모음으로만 빛났습니다저 초원에서 사는 자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다. 그래서인지 사람들과 동물들은 둥글게 서로 어울린다. 이들과 세계 사이에 분리는 없다. 새끼 양을 안고 들어와 두 손으로 귀를 어루만지는 남자의 모습은 그 ‘바람2212짐승2212흐미’의 리듬처럼 느릿하게 둥글다. “게르 밖의” 세계 역시 ‘흐미’의 리듬으로 운행되어서, 하늘의 “별들도 둥근 모음으로만 빛”난다. 둥근 리듬에 감싸인 세계의 광경은 따스하고 아름답다. 문학평론가
2021-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