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칠월의 부드러움에 약하다부드러운 그의 부름에 안전선 앞에 얌전히 서 있다서로를 쓰러뜨려 포옹한 채 죽어 가고 싶은백주(白晝)의 결투 피하지 않을 것이다그가 나를 숨겨 두기 알맞은 크기로 접을 것이다부드럽게 접혀 있는 하얀 손수건처럼 녹아내리는슬픔을 완벽하게 빨아들이려는 자세로건너편 햇빛 속에 서 있는 그의 미소가 따듯하다직진하려는 버스가 출렁거린다 차창 밖에는휘파람을 부는 도시의 새들이 날아가고‘그’는 부드럽게 ‘나’를 부르며 길 ‘건너편’에 있다. ‘그’는 시인에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준다. 거리에 서 있는 그의 존재로 인해 도시 공간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버스가 출렁거”리고 “도시의 새들”은 휘파람을 불며 날아가는 것이다. 도시가 신생의 조짐으로 활기차다. ‘그’의 부름을 듣고 세상이 아름다움으로 상승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기에, 시인은 격렬한 죽음 충동 속에서도 삶의 의욕을 버리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2021-10-19
옷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을 때옷은 날아간다꽁지를 까닥거리다 연기가 된다옷은 끊임없이 시중을 원한다그래서 치맛자락이 길거나 자잘한 무늬로 틈을 보인다나는 벗겨주는 시중보다입혀주는 시중이 더 좋았다옷들은 저마다 기념일을 갖고 있었다아주 작은 옷에서 내가 나왔다그곳을 빠져나왔다고 할까그 옷을 벗었다고 할까점점 작아진 옷은 커버린 나를 잡고 칭얼거렸다옷장을 열어놓으면옷들은 자꾸 날아가려 한다위의 시에서 ‘옷’은 ‘나’를 치장하기 위한 한갓 도구가 아니다. 아니 마치 옷을 위해 ‘나’가 존재하는 것 같기까지 하다. 안은숙 시인은 사물에 대한 투시와 시적 사유를 통해 저 ‘옷’의 영혼을 인식하고, ‘옷’이 품고 있는 주체적인 욕망-날고자 하는-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 저 ‘옷’의 욕망에는 그 옷과 밀착되어 살아온 시인의 기억과 욕망이 스며들어 있다. 문학평론가
2021-10-18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해변가의 따스한 자갈들, 해초들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하얀 발가락으로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쌘드백을 껴안고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네가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지자 사랑과 윤리의 세계가 새로이 탄생한다. 그 윤리는 “나는 너의 잠을 지”키는 일로 나타나며, 사랑은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발가락을 깊숙이 집어넣는다는 에로틱한 행위로 표현된다. 그 행위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걸으면서 “서로의 존재를 포옹”하는 행위로 전이되며, 그 포옹은 고독과 땀, 그리고 좌절 속에서 이루어진다. 진은영 시인에 따르면 이 과정이 ‘연애의 법칙’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7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바다를 만났고, 秒針과 秒針 사이에서 삶을 배웠다.새벽, 나를 깨우는 저 초침소리나의 죽비다.결국 돌이킬 수 없는, 내가 살아온 저 시간의 심연.돌이킬 수 없으므로 돌이킬 수 없는 나를자꾸 뒤돌아보는 새벽.아 눈보라처럼지는 꽃잎처럼시간이 흩날리며 가고 있다.김성춘 시인에게 1초와 1초 사이는 바다와 같다. 그만큼 초와 초 사이의 순간에는 삶의 무수한 탄생과 스러짐이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바다가 있다는 말은 깊은 심연이 있다는 말과도 같다. 초와 초 사이의 심연에서 시인은 시간을 ‘뒤돌아’ 보고는, 시간이 ‘눈보라처럼’, ‘지는 꽃잎처럼’ 흩날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시간의 잔해들을 가시화하는 ‘초침소리’는 시인의 정신을 늘 깨어 있게 만든다. 문학평론가
2021-10-14
멀리 선 나무가 평화스러워 보여도몸을 만지면 상처투성이이네.바다가 멀리서 태평한 듯 보여도발을 디디면 파도가 그의 상처이네.강물이 조용히 명상에 든 것은굵은 비가 울고 간 후이고갈대가 하얗게 꽃을 흔듦은밤새 찬바람과 싸운 끝이네.자연은 슬픔을 꽃으로 피우네.사람만이 슬퍼서 병이 나네그리고 병이 깊을 때,그의 영혼은 그늘의 새순 같은 詩가 되네.시인에 의하면 자연은 평화롭지 않다. 상처투성이 나무, 바다의 상처인 파도, 굵은 비의 울음, 찬바람과 싸우는 갈대, 이 모두는 사람들처럼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산다. 하지만 자연은 병나지 않는다. 슬픔을 꽃으로 승화시키기 때문이다. 사람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병이 난다. 그러나 병이 깊어지면 사람의 영혼은 “그늘의 새순 같은 詩”가 된다는 반전이 일어난다. 시는 병들 수 있는 사람의 특권과 같은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3
수타산 중턱에서 커다란 적송 그루터기를 보았다아직 바닥에 흩어져 있는 송화빛 톱밥이숲으로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이제 소나무는200년의 생애를 밑동에 꾹꾹 눌러 담고나이테 속으로 사라졌다마음의 길을 가늘고 촘촘하게 새겨놓고 떠났다틈 없이 새겨진 나이테의 흔적에서소나무가 남긴 단단하게 여문 생의 기록을 보는 것 같았다(….)수타산 중턱 적송 그루터기는온 숲을 채우기도 하고 다시 비우기도 한다.이 지상의 삶을 끝내고 떠난 소나무는 하나의 ‘사원’과 같은 ‘생의 기록’인 나이테를 남긴다. “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깊어진 이 나이테는 ‘마음의 길’을 새겨놓은 시집과 같은 것 아닐까? 시에 따르면 소나무의 죽음은 “지상의 집 한 채”인 자신의 시집을 “완성하러 떠”난 것, 그 시집-나이테-은 더 깊어지는 삶을 스스로 살아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여, 소나무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낳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2
노루목으로 가려다가길을 잘못 들어 토끼봉에 올랐다.지도 펴고 다시 보니구름 한 조각지도를 덮었다.그렇다.노루목이든 토끼봉이든구름되어 자유로이흘러가면 그만인 것을.여행은 우연과 마주치게 해준다. 지리산을 오르면서 시인이 어찌 길을 잘못들 것을 예상했겠으며 구름 한 조각이 지도를 덮을 줄 예상했겠는가? ‘시인-여행자’는 이 우연한 마주침을 위해 여행한다. 그리고 그는 이 우연히 맞닥뜨린 자유의 순간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기화하기 쉬운 그 순간을 영속화하여 일상의 삶에 부착한다. 그 결과 우리들은 시를 읽으면서 그 자유의 순간을 추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0-11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기 전모든 것은 잠시 망설인다나비는 칸나의 빛깔과 코스모스의 향기 사이를주춤주춤 거리고잠자리, 잠자리는 허공의 자유와잘 데워진 탱자나무 울타리의 휴식 사이에서 머뭇거린다(….)햇살은 나팔꽃 줄기에 머물러 씨앗을 먼저 터뜨릴까마타리의 몸 끝에서 꽃의 눈자락을 틔울까 망설인다망설임, 비는 여름비와 가을비 사이를 망설이며 내린다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갈 때열기와 서늘함이 서로를 슬쩍슬쩍 건드리며닿았다 풀려갈 때나는 망설인다마음속의 마음을 전할까, 감출까사랑에 빠지기 시작한 마음은 흔들리고 설레며 망설인다. 이러한 사랑이 시작되는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다. 여름의 열기와 가을의 서늘함이 “서로를 슬쩍슬쩍 건드”리는 ‘계절이 바뀔 때’ 말이다. 사랑은 존재를 전환시킨다. 뜨거운 기대와 서늘한 실망의 마음이 사랑하는 자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사랑의 계절에서 사랑에 빠진 모든 것들은 망설임과 머뭇거림 속에서 존재 전화의 경계선에 놓인다평 문학평론가
2021-10-07
이 길은시간이 걸린다무심히 걸어야 한다비탈길 마른풀 사이사이에서조금씩 울음을 참다가그래도 사랑하려면유목민의 뼈로 갈아끼워야 한다절대 머무를 수 없게이별의 길은 비탈길이다. 그곳엔 습기가 부족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곳인지 마른 풀만이 있다. 그래서 멈추어 바라볼 꽃도 없다. 이곳은 이별한 자의 마음 속 공간일 터, 이별한 자의 마음은 이렇듯 황량하다. 이별한 자는 이러한 황량한 길을 ‘무심히’ 걸어가야 한다. 울음도 참아야 한다. 다시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게 어딘가로 계속 움직이는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시인에게는 사랑 자체가 유목적인 것, 즉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가능한 무엇일지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2021-10-06
한 입술이 한 입술과 겹쳐진다, 물뱀처럼 캄캄하다, 한 남자의 입술이 한 여자의 캄캄한 사랑을 누르고 있다(….)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을 때 아름다운 여자는 조금씩 사라졌다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 눈과 코를 지우고형용사처럼 혀를 버리는 것사라지는 여자의 눈썹이 서늘하다어느 쪽이 슬픔의 정면인지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이마당신과 내가 삼켜버린 낡은 입술들,한 입술과 한 입술이 쌓인다,고요하다 입술들은,울음과 울음이 겹쳐진다,캄캄하다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래서 삶의 파괴를 가져올 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사랑. 이러한 사랑을 시인은 개기 일식으로 비유한다. 달의 그림자가 세계를 캄캄하게 만들듯이 여자의 입술을 누르는 남자의 입술은 여자의 사랑을 ‘캄캄하’게 만들고, 하여 그 입술의 겹침은 “울음과 울음”의 겹침으로 전화한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불붙는” 이 사랑은 “하루가 백년 같은 뜨거운” 격정을 고요하게 품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10-05
햇볕 졸은 창가에다 선인장을 길렀겠다(….)물도 어쩌다가 생각나면 주면 되는 것이어서이 게으른 시인에게는 행복한 정물이 아닐 수 없다어라 시인, 오늘은 웬일인가 물을 다 주고왜 당장이라도 모랫길 허허한 사막으로 떠나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세수하고 얼굴 닦는 타올 갖고는 그 멋들어진 터번이 만들어질 리가 없지히히잉 히이힝 낙타울음 흉내까지 내보는 것이지만그래가지고서야 모래폭풍에 단숨에 먹혀버리고 말지다소 굴욕적이긴 해도온 몸을 가시 같은 그 무엇으로 덮어 보렸다.시인이 창가에 선인장을 두어 때때로 물을 주는 이유는, 이 세계가 삶을 삼키는 사막과 같은 곳이라는 진실을 환기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 세계를 견디며 살기 위해 선인장처럼 가시를 온 몸에 덮는 윤리적 결단을 계속하기 위해서이다. 선인장은 이러한 인식과 윤리의 삶으로 일상에 매몰된 삶을 자석처럼 끌어당길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강렬한 삶의 자세를 무심한 어조로, 유머와 장난기를 잃지 않고 진술한다. 문학평론가
2021-10-04
(….)사막에서 굶주린 소녀가 죽기만을기다리는 독수리 사진을 보라이 소녀는 가난 때문에,이미 하나의 예술 소재에 불과하다소녀를 먹고 독수리가 사는 것 역시자연의 법칙이다(….)베토벤의 교향곡은 허구여서 전파를 타고소녀의 귀에 들리기도 했으리라(….)많은 사람들은 남을 돕기 전에자신의 먹이를 주고 예술이라는 허구를 산다우리들은 독수리의 상징 혹은 동업자인 것이다그런데, 이 사진 작가는 소녀를 구하지 않았다는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자결했다고 전해진다(….)이 시는 독수리와 소녀, 사진을 찍는 사진가, 쥐와 뱀과 빵과 베토벤 등을 여러 겹으로 겹쳐놓으면서 우리를 숙고하게 만든다. 시인은 사진가에게 휴머니즘적 비난을 하지 않는다. 인간중심주의를 넘은 시각에서, 소녀를 먹잇감으로 보는 독수리와 먹이를 주고 독수리를 상징화 한 예술을 만드는 인간을 대조하면서, ‘싶체’가 아닌 상징을 추구하는 인류 문화 자체의 ‘의미’와 현대 문화 전반의 정당성을 묻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1-09-30
저것들은 내가 잃어버린 별이 아니지내가 잃어버린 별의 파편들이 아니지내가 갈아버린 금 부치는 더더욱 아니지해가 떨어지는 서해에서 보는 물결모서리마다 일렁이는 부스러기 빛내 몸으로는 더 이상 들어올 곳이 없지일렁이다 반짝이다 물결이 되는 부스러기 빛아이는 차돌을 집어던지지 차돌더미에차돌을 집어던지지 깨어진 차돌 속에서새로운 금속이 태어나 빛나지내 몸 속에 들어온 빛기억을 찾아 떠나가지어둠 속 차돌더미에꼬리를 감추고 스미는 빛현재 시인은 세계에서 시를 발견할 수 없으며, 그의 몸은 굳어버려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아이가 나타나면서 그는 단숨에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아이가 차돌을 집어던지자 시인의 마음 안의 “어둠 속 차돌더미”에 “꼬리를 감추”며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시인은 시 쓰는 능력-연금술사의 능력-을 회복하고 시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9-29
비가 내린다 늘 흐리거나 비가 내린다나무에선 열매 대신 눈물 구슬만한 빗방울이 맺힌다(….)따사로운 햇살의 추억을 간직했던 이주민은 곧바로 치매에 걸리고그렇게 시름시름 앓다 영안실에 안치되고선 구름 속에 묻힌다(….)갈 길이 막막해질 때면탑처럼 쌓인 적운(積雲)을 향해 기도를 올리거나굴뚝으로 인공 구름을 만들어 공양을 올린다그러나 새들은 언제나 낮게 날고저 출구의 소실점을 향해 치달리는 영혼은 너무나 축축하다아무도 터널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발밑에서 경적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은 환청일거라고 비웃었지만다들 구름에 갇힌 나무처럼 하얗게 질린 지 오래다‘터널’은 굴뚝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힘을 숭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을 상징한다. 이 시는 불모의 문명 속에서 내면마저 물신화되어 축축하게 부패해가는 우리의 삶을 고발한다. 이 ‘고발’엔 어떤 긍정적인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이 축축하게 젖어들며 죽어가는 삶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현대가 가공할만한 죽음을 빚어내는 세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주력한다. 문학평론가
2021-09-28
잠 속에서도 바다소리를 들었다눈 감은 동공 안으로 파도가 밀려왔다돌아누울 때 마다 지구 저 편도 뒤척이고 있었다가슴속에 바다가 넘실거리고내 몸은 해초처럼 너풀거렸다푸른 날개를 들고 헤엄을 쳤다소금기 절은 갯바람이흥건히 젖어있는 머리맡에수평선 하나를 그었다시인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밀려오는 파도를 눈 감은 동공 안으로 받아들이며, 가슴 속에 들여온 바다에서 “푸른 날개를 들고 헤엄을” 친다. 이러한 몽상을 단순히 현실 도피라고만 볼 수는 없다. 시인이 꿈을 꾸는 이유는 현실에 꿈을 틈입시키기 위해서, 즉 현실 세계의 머리맡에 “수평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 그리하여 현실을 꿈으로 “흥건히 젖”게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1-09-27
벌레가 내 요즘 화두다나는 원래 죽으면 흙 속에 묻히고 싶었다남의 살 많이 먹어둔 살덩어리벌레들에게 다 도로 돌려주고 싶었다한동안, 몸속의 욕심덩어리, 죄덩어리를벌레들에게 옮길까 봐 저어했으나 다 핑계거니마음을 굳혔다그런데 아내가 먼저 죽었다죽기 전에 매장할까, 화장할까차마 물어보지 못해서 황망 중에 화장을 했다요즘 그게 걱정이다나도 아내 따라 살덩어리를 불에 태우자니벌레들에게 미안하다내심으로는 벌레들에게 살덩어리 내어주기 싫어서서둘러 화장했다는 혐의도 없지 않다(….)인간중심주의 안에서의 반성은 철저한 반성이 아니다. 삶을 정말 반성하기 위해선 인간의 삶이 아닌 생명 전체의 관점에서 반성해야 한다. 자신의 죽음 이후를 벌레의 생명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박제천의 위의 시는 그러한 반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반성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겹치면서 심적 갈등을 낳는다. 생태 사상에 기반한 반성과 아내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정이 얽히고 있어서 또 다른 감동을 준다. 문학평론가
2021-09-26
발바닥에 묻은 먼지를 턴다. 발등에는 마른털이 누웠고 무릎에다 받쳐준 긴 뼈는 휘었다.아직 걷고 있는 사람은 오래 걸을 것이다. 며칠이 저물도록 느리게 걸어서 어둑한 들녘을 지나간 다음에는 어느덧 종적이 깜깜할 것이다.올해에 죽은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소식이 끊겼다. 없는 이의 안부를 묻고 간 사람이 있다.나는 남아서 어금니와 손톱을 씻는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였다. 종잇장인 듯 바삭대는 손바닥과 부러질 듯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다.찬비 내리고 (중략)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죽음을 살아가는 모순을 견뎌내야 한다. 위의 시의 화자는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으면서, 아직 어떤 이의 삶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비가 죽음으로 채워지고 있는 죽은 이의 삶을 장엄하게 승화시킨다. 이와 함께 비는 비탄을 대신하여 울음을 이 세상에 뿌리면서, 운명을 견디어내는 강인함으로 살아 있는 이의 삶 역시 끌어올린다. 문학평론가
2021-09-23
햇살 가득한 대낮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네가 물었을 때꽃처럼 피어난나의 문자“응”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오직 심장으로나란히 당도한신의 방너와 내가 만든아름다운 완성해와 달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시인은 “꽃처럼 피어난” “응”이란 문자에서 해와 달이 위아래에 누워 있는 “눈부신 언어의 체위”를 상상해낸다. 또한 ‘응’이라는 대답의 음성 속에서 사랑은 부드럽고 따스하게 완성된다. ‘응’을 반복해서 속으로 소리내보면, 이 ‘응’이 평온하고 에로틱하게 마음을 감싸면서 점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해와 달이 ‘응’이란 대답을 서로 나누며 살며시 포옹할 때처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09-22
인간의 길은 모두 바다로 가서 빠져 죽는다, 라고 쓴 엽서를 전해주고 우체부가 오후의 오솔길로 사라진다오솔길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른다 아직 어린 구렁이 새끼 한 마리 제 아름다운 몸을 오솔길처럼 구부렸다 폈다 황천행,수련중이다美行이다오솔길로 사라진 우체부, 그는 어디로 갔을까? 바다로 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가 전해준 엽서는 우체부 자신의 죽음으로 쓴 것이다. 그리고 그가 걸어간 오솔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하늘로 상승하는 듯한 오솔길은 ‘황천행’을 ‘수련’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모습은 구렁이의 몸과 같은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죽음과 삶이 꼬여 있는 회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현현하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위의 시는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09-16
늙은 느티의 다섯 가지는 죽고세 가지는 살았다푸른 잎 푸른 가지에 나고검은 가지는 검은 잎을 뱉어낸다바람이 산천을 넘어 동구로 불어올 때늙은 느티의 산 가지는 뜨거운 손 내밀고죽은 가지, 죽은 줄 까맣게 잊은 식은 손을 흔든다한 사나이는 오래된 그늘에 끌려들어가꼼짝도 않고부서질 듯 생각노니,나에게로 와서 죽은 그대들죽어서도 떠나지 않는 그대들바람神이 산천을 넘어 옛 동구에 불어와느티의 百年 몸속에서 윙윙 울 때그늘 속에서의 삶이란 죽음과 삶이 뒤섞여 있는 백년 가계가 “윙윙” 우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다. 그 소리는 죽음과의 동거로 인해 경험하게 되는 숭고함을 표현한다. 죽은 타인과의 동거는 고통스럽긴 하지만 타자와 공존하는 삶을 시작하려는 윤리적인 결단에서 비롯된다. 죽은 자-타자-를 사랑하고자 하는 그 윤리는, 숭고를 체험케 함으로써 기성의 자아를 허물어뜨리는 변화를 주체에게 가져 올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