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였다.광장 어딘가에가느다란 두 다리로 서 있었다.무릎이 시린 날이었다.사람들이 모였다.땅을 뚫고 올라오는 저녁의 파처럼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사람들이 모였다.생각들이 모였다.누구 하나 아프지 않다고?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더 내고 있었다.사람들이 모였다.옆에 서 있는 사내의 흰 머리칼이어디를 가리키는지생각들이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진정한 민주주의는 가난하고 권력 없는 사람들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이루어진다. 위의 시의 “가느다란 두 다리”의 이미지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권력 없는 이들임을 보여준다. 하나 그들의 두 다리는 땅을 뚫고 나올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위의 시는 사람들의 생각이 교류되는 어떤 무형의 공간이 마련되며, 그 공간이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광장임을 말해준다. 문학평론가
2022-01-11
하는 수가 없어 나는배를 가른다가른 배를 마리나 앞에 열어 보인다 마리나는 토한다하는 수가 없어 나는 갈비뼈를 톱질한다섬벅섬벅 뛰는 심장을꺼내마리나의 손에 쥐여 준다 마리나는 기절한다달은 여태 푸르고 마리나는 깨어나지 않고 여태 나는살아 있다 등 뒤에서 목을쳐 주기로 한당신은언제 오는가?마리나를 시의 독자로 치환하여 생각한다면, 화자의 자해 행위는 시 쓰기를 의미한다. 위의 시는 시인의 그간의 시 쓰기가 독자에게 자신의 실재적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인 육체 훼손이자 자살 행위였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자해로는 자신의 목숨-시 쓰기-을 끊지 못한다. 목을 쳐줄 당신이 시인의 시 쓰기를 끊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나타나지 않고 시인은 시 쓰기를 계속한다. 문학평론가
2022-01-10
서귀포에서는 누구나 섬이 된다.섭섬, 문섬, 범섬이 새섬 같은 섬이사람의 배후여서세연교 난간에 한 컷의 생을 걸어놓은 사랑은섬으로 건너가는 일몰이 된다.서귀포에서는 누구라도 길을 묻는다.바다를 향해 흘러내리는길 위에 서서 여기가 폭포냐고,서 있는 곳을 묻는다.당신이 서 있는 거기서부터 서귀포는언제나 서쪽이다.서귀포는 죽음과 연결된 장소다. 그곳에서 “생을 걸어놓은 사랑은” “섬으로 건너가는 일몰”이 된다고 하니 말이다. 서귀포에서의 사랑은 일몰, 즉 죽음을 통과하면서 타인-다른 섬-에게로 건너갈 수 있다. 서귀포는 사람들을 섬으로 만드는 동시에 세계가 점점 어두워지는 일몰에 빠뜨리기에, 누구라도 “길 위에 서서” 길을 묻게 되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 묻게 된다. 문학평론가
2022-01-09
버스를 타고 거리의 소음보다 더 시끄러운 내 속을 이리저리 뒤적이다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짧은 파마머리에 즐겨 입던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뒷모습이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어머니 앞에 서는 찰나 내 머리 속으로 환하게 뜨는 북두칠성 별자리가 보였습니다 창가에서 새를 부르는 청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노을이 제 몸에 붉은 물을 듬뿍 들이고 나서야 천천히 새의 입을 열어 울음 한 점 꺼냈습니다진달래꽃, 오롯이 내 안에 물들고 있었습니다어머니의 목소리에 이끌려 시인은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인 “울음 한 점”을 “새의 입을 열어” 꺼낸다. ‘새’는 시인 내면에 유폐되어 있는 영혼을 의미한다. 그래서 “새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시인의 영혼을 꺼내려는 호출이었으며, 이에 대해 시인의 영혼-새-이 입을 열어 꺼낸 응답은 노을과 같이 붉은 울음이었다. 이 ‘울음’은 김소월 시에서의 ‘진달래꽃’처럼 이별의 통한을 담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2-01-06
타림 강가에서 목을 축이고 떠나가는 여정이 어스름, 어느 먼 곳에 정복할 땅이 있어새들은 떠나가고 있을까새들이 떠난 자리 누워있는 풀들이 몸을 가누고 있었다여전히 강물은 흐르고어디선가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마른 가슴뼈 속으로 하룻밤 묵어갈 바람의 영혼이 찾아들었다타클라마칸 모래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나는 가슴뼈 게르 속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바람의 영혼”을 가슴으로 맞이한 시인은 새들의 둥근 가슴뼈처럼 생긴 “게르 속에서 하룻밤 묵어가”리라고 결심한다. 이 결심은 저 강가에서 뒹굴고 있는 철새들의 가슴처럼 그의 가슴도 바람으로 부풀어 올랐음을 의미한다. 그 ‘게르’는 봉분을 연상시킨다. 죽음에 다다를 새들의 둥근 가슴뼈는 곧 그 새들 자신의 무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덤은 적막하지 않다. 바람의 영혼과 함께 할 테니까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2-01-05
기차보다 은밀한 창을 달고기차보다 먼저 기적을 울리고기차보다 먼저 흔들리고기차보다 먼저 괴로워하고기차보다 공격적인,기차보다 다분히 혁명적인,개나리꽃들이간이역 철길 위에급진적으로 피어 있다시인은 막대한 힘과 속도를 보여주는 기차 옆에 피어 있는 평범한 개나리꽃의 존재가 ‘혁명적’이고 ‘급진적’이라 말한다. 근대가 낳은 기차보다 저 꽃이 하나의 생명으로서 이미 존재해 있었기 때문이리라. 즉 봄은 언제나 먼저 있었기에, 기차는 아무리 해도 개나리꽃이 펼쳐내는 생명의 선재성과 위대성을 따라갈 수 없다. 이에 따르면 혁명이란 무엇보다도 항상 앞에 있었던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평론가
2022-01-04
윗저고리 벗어 던져놓고우물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박씨 할머니달빛 흐르는 등가죽이 투명하다속에 것 다 빠져나간 듯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배꼽이 분화구처럼 깊다소슬바람조차 걸려들지 않는 거미줄달빛이 슬쩍 건들기만 해도금방 허물어질 것 같다처마 밑 알전구가 뿜어내는 거미줄에바람이 걸린다응시는 어떤 기존의 틀로 대상을 규정지어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드러낼 때까지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목욕을 하고 있는 박씨 할머니”의 몸을 응시한다. 그 몸은 “달빛 흐르는” 투명한 등가죽, “분화구처럼 깊”은 배꼽, “등에 붙”은 뱃가죽 등의 이미지로 드러나면서, 그 말라빠진 사지와 몸통은 “금방 허물어질 것 같”은 거미줄의 이미지로 전환되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2-01-03
(….)봄날에 꽃이 핀다는 건세상의 금기 같은 것을 깬다는 것깨고 일어선다는 것오랜만에 찾아간 친구 집그 집 작은딸이 신발을 거꾸로 신고논둑을 폴짝거리며 뛰어가듯흙 묻은 맨발로 안방을 걷듯,그렇게 작고 여린 것 하나를 거역하는 것.베란다 화분 흙을 다 갈아 치우며 흔적을 털며그렇게 옹색하게 다시 살림을 차리는 것.그늘 쪽에 있던 화분 몇 개를 양지 쪽으로 옮기며내년에는 오래 산 이 낡은 집을 이사하고 싶다고말하는 아내의 펑퍼짐한 등짝을 보며(….)꽃이 진다는 건생을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는 벅찬 말씀.꽃이 핀다는 사실은 그전까지 유지되어온 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사건이다. 그것은 “흙 묻은 맨발로 안방을” 걸으면 안 된다는 작은 금기를 ‘거역’하면서, 이사하듯 다른 삶을 조용하게 시작하는 일이다. 그래서 꽃이 핀다는 사건은 ‘금기-예전 삶’의 죽음을 전제로 하며, “꽃이 진다는 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벅찬’ 사건이다. 문학평론가
2022-01-02
마들에 나가들판 끝 본다눈 끝의 새 본다들풀에도 새가 앉네새는 가벼우니까들판의 새보다 더 가난한 게 있을까가난은 가도 가도 가벼운 것가벼운 것이 들 한쪽 몰고어둔 구름에서 나온 번개같이날아간다 거침없이허공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고경고라도 하듯 거침없이가난해서 가벼운 새는 가진 것이 없어서 저 빈 들판의 가냘픈 들풀에 가벼이 앉았다 날아가곤 한다. 하나 이 가벼움은 무력하지 않다. “들 한쪽 물고” 번개같이 날아갈 수 있는 비상력을 새는 가지고 있다. 가난한 새는 가벼운 만큼 거침없이 허공 속으로 비상할 수 있다. 시인은 저 새의 비상에서 “허공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자신을 따라 허공을 향해 비상하면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읽는다. 문학평론가
2021-12-30
내 손은 나도 몰래 죽은 나무를 만지고 있었다죽은 나무는 여인의 몸처럼 부드러웠으나내 손이 닿자마자 앗 소롯해지는 것이었다그녀의 몸속에서는 예쁜 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나는 나도 모르게 은밀한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죽은 나무가 죽은 채로 서 있어야 하는 이유는사랑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이파리와 꽃과 열매와 헤어졌다 해도죽은 나무는 온종일 서서 기다리다 죽은 나무는기다림이 벌레로 태어나 나비가 될 때까지내가 죽어도 당신을 잊을 수 없음을 알 때까지죽은 나무는 죽은 나무가 아니었다 (….)불꽃이란 무엇인가. 솟아오르는 생명이 지글거리고 있는 것, 그것이 불꽃일 것이다. 시인은 저 부드럽게 죽어 있은 나무속에 마치 불꽃처럼 ‘예쁜 벌레들이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들은 태초의 식물인 이끼처럼 나비로 되는 새로운 삶을 기다리고 있다. 그 신생의 잠재성이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누군가를 향한 ‘기다림’-사랑-이 “나무의 살 속에서” 꼬물거리는 벌레를 낳았으므로. 문학평론가
2021-12-29
나무는 연주를 마칠 때마다 몸 속에하나씩 나이테를 그린다나무 몸 속에 매미와 뻐꾸기태양과 별의 숙명이 머물고나무는 명상한다. 정적과 혼돈 뒤섞인끝없는 생명에 대하여 한 알 과일을 먹은 뒤 오래도록우리 입 속에 남는 과일의 향연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과즙이여나무 악기의 음률이여오래도록 행복해지는 우리여나무 악기의 빛, 나무 악기의 어둠허공과 영혼을 소진하고, 시간을 금빛으로 소진하고이 세계의 생명으로 스며드는 침묵의 탄주여대지로부터 하늘로 치솟는 악기의 소용돌이여나무가 자기의 온몸으로 일하여 맺은 한 알 과일 안에는 온 우주의 드라마가 들어가 있다. 그 과일이 선사하는 감미로운 미각은 나무가 “허공과 영혼을 소진”하면서 온몸으로 연주하는 음악의 음률이다. 그 달디 단 음악에 ‘우리’는 “오래도록 행복해”진다. 저 하늘에 떠 있는 “태양과 별의 숙명”이 바로 그 우주의 음악일 터, 우리는 과즙을 먹으며 그 음악에 참여하면서 하늘로 상승하고 별과 태양을 맛본다. 문학평론가
2021-12-28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아닐진대그것은 경이로운 것단단한 보습으로 파낼 수 없는날카로운 환도로도 자를 수 없는아, 불이(不二)의 운명바람이 지나가면서 시인의 몸과 맞닿은 ‘바람의 옷깃’은 “파낼 수 없”고 “자를 수 없는” ‘불이의 운명’을 시인으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다. 모든 존재자들이 운명적으로 둘이 아니라는 진리는 경이롭다. 이러한 경이로운 깨달음은 만물에 대해 마음을 쏟고 세심하게 바라보며 그 만물의 생명력이 펼치는 장 속에 자신을 놓을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만물 하나하나의 생명이 모두 자신의 생명과 공존하고 있으며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1-12-27
호박꽃도 밤에는 잠을 잔다.한 번도 옷 벗지 않고 깊은 잠을 잔다.어둠을 이불 삼아 별들의 자장가를 듣는다.그 잠 속으로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지.세상의 어떤 유혹으로도 그 방문 열지 못하고두드리다가 흔들다가 제 풀에 지치고 말지.어떤 나비도 어떤 벌도 밤에는 제 집을 지킨다.어떤 바람도 깊은 밤에는 문패를 읽지 못하지.쓸쓸히 거리를 떠돌다가 존재도 없이 사라지고 말지.호박꽃은 밤이 되어야 꿈을 꾼다.밤새도록 꿈을 꾸어야 아침의 사랑이 시작된다.눈부신 사랑을 위하여 그 밤의 깊은 꿈은 아름답지.시에 따르면 밤의 호박꽃은 절대로 자신의 방을 열지 않는다. 꿈을 잘 꾸기 위해서. 호박꽃이 잠을 방해받지 않고 꿈꾸고자 하는 것은 “아침의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하여, 눈부신 사랑을 위해 꾸는 꿈이니, “그 밤의 깊은 꿈은 아름답”다. 위의 시의 호박꽃은 사물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붙잡으려는 시인의 투시에 의해 얻게 된 시적 형상이다. 그 형상은 사랑의 꿈이 지닌 아름다움을 눈부시게 발산한다. 문학평론가
2021-12-26
접두어 ‘첫’은번번이 나를 명중시켜 왔지.과녁을 맞힌 화살의 깃이 그러하듯‘첫’ 것들은 떨림을 매달았고그들이 일으킨 소용돌이를키우거나 소멸시키는 것이성숙의 궤적이었네.얼굴 흐려진 어느 연령에선가더 이상 오지 않던 녀석들,주검인 양 존재 없더니긴 세월을 돌아 다시 날 흔드네.중년의 손가락이 다독이는경련의 눈두덩, 나를 관통한수많은 ‘첫’것들이 묻힌시인에게 중년이 오면서 새로운 ‘첫’것들은 ‘나’를 방문하지 않게 되었고 그의 마음에서 키워졌던 것들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나 마음의 무덤 속에 묻힌 그것들은 어느 날 “긴 세월을 돌아 다시” 살아나고 젊은 시절의 ‘나’의 심장을 명중했던 ‘첫’것들처럼 ‘나’를 뒤흔든다. 무덤 속에서 ‘첫’것들이 부활하고자 들썩거리고 있음을 감지하면서 이 시인의 시작(詩作)은 이렇듯 새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2-23
대나무는 날지 못하는 새들의 영혼대숲은 날지 못하는 새 떼들의 망명지나라 없는 영혼처럼 대나무가 운다이미 뼛속을 다 비웠으니 곧 날아가리라지난여름에도 기대하였으나올해도 대숲에 와서 다시 새소리를 듣는다날지 못하는 새,망명지의 영혼,피리처럼,슬픈 피리 소리처럼,이미 뼛속을 다 비웠으나 날아가지 못한새소리를 듣는다. 대숲에 와서.대나무는 “날지 못하는 새”의 뼈이자 영혼이다. 그래서 대숲은 “날지 못하는 새 떼들의 망명지”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들이 내고 있는, “슬픈 피리 소리”와 같은 울음소리는 올해도 날지 못해 우는 ‘새소리’와 같다. 시인은 그 새소리가 바로 자신의 울음소리와 같다고 여긴다. 시인 역시 날고 싶어서 뼛속을 비웠으나, 저 대나무처럼 여전히 날지 못하고 있다. 하여, 그는 시를 쓰며 울고 있는 ‘대나무-새’다. 문학평론가
2021-12-22
늙은 아이가 소풍을 왔다땅에 엎드려 지문을 찍을 때마다둥글게 자라는 무덤다시 품어보겠다는 양다시 들어가겠다는 양엄마는 다시 배가 부르다위의 시에서 ‘엄마’의 무덤은 새로운 생명을 품는 엄마의 자궁이 된다. 즉 죽음의 공간이 새로운 탄생의 씨앗을 품는 것이다. 바로 “늙은 아이”인 시인 자신이 그 씨앗이다. ‘늙은 아이-시인’은 지문을 통해 엄마의 무덤에 연결되면서 무덤의 품에 안긴다. 그리하여 죽음의 방은 재생의 뱃속으로 변모한다. 다시 죽은 엄마의 “배가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시는 무덤에서도 존재할 모성의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 세상을 견뎌내려는 시인의 희구를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2021-12-21
재건축 현장흙을 파헤치는 곳마다도난당했던 내 기억의 늑골이 발굴된다매립되었던 꿈의 모서리가 노출되고뾰족한 기억으로부터 물길이 치솟는다공사에 동원된 인부의 이름이 기록된 수첩과낱장의 설계도, 바람 섞인 햇살부러진 손톱과 핏방울이 말라있는 기초의 순장거대한 뿌리가 햇빛에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시인은 자신의 ‘기억’이 중장비에 의해 파헤쳐지는 현장에 서 있다. 그 현장을 보고 있는 시인은, 동시에 자신의 기억 역시도 파헤쳐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시인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던 “거대한 뿌리가” 지상에 드러나는데, 그렇게 드러난 ‘기초’들이 조명되는 시간은 짧다. 하지만 시인은 그 다시 매립될 시인의 꿈과 기억으로 이루어진 삶의 뿌리들, 그 ‘기초들’을 포착하여 시화(詩化)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2021-12-20
가난을 움켜쥐고 살았다(….)빈 박스와 폐지 따위가노파의 굽은 키를 기분 좋게 넘길 때나터무니없이 모자라 텅 빈 리어카조차 무거울 때면저울 눈금이 노파의 근심을 조절해왔다노파가 평생을 져 나른 궁핍그러나 궁핍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적은 없어 보였다리어카의 걸음을 힘들게 했던 궁핍의 무게 또한 얼마나 될까몸져눕게 된 노파는 리어카를 떠올리며, 서로가 실컷 끌어주고도서로에게 짐이 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신앙심이 한풀 꺾인 텅 빈 리어카마저맥없이 주저앉아혼자 일어서지 못한다“가난을 움켜쥐고” “궁핍을 평생 져” 날랐을 뿐인 저 노파에게는 자신의 노동과 항상 같이 했던 리어카가 삶의 유일한 동반자다. 그래서 리어카가 의인화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노파는 무거운 짐만 지게 했던 리어카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반면 리어카는 노파가 몸져눕게 되어 텅 빈 상태로 있게 되자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신앙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맥없이 주저앉아” 버린다. 슬픈 엇갈림이다. 문학평론가
2021-12-19
저녁노을이/ 제 몸을 홀라당 태우고/ 사라져가듯이/ 죽을 때까지/ 뜨겁게 사랑하고 싶다황소바람 부는 겨울에도/ 가슴 한켠에/ 꽃망울 밀어 올리고/ 오래오래 속닥이고 싶다떠나야 할 때 오거든/망망대해에 배 한 척 띄우듯이/ 꽃잎 같은 목숨/ 가만히 가만히/ 허공 속에 뿌리게 하리라/ 그리하여/ 허공 속에서 노를 젓는 나비가 되어/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리라죽을 때까지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것은 노을처럼 “제 몸을 홀라당 태우고 사라”지면서 사는 삶이다. 그렇게 사랑으로 삶을 태우기 위한 불쏘시개가 시 아닐까. 시인은 시의 힘으로 중력을 이기고 꽃망울처럼 자신의 삶을 하늘로 밀어 올리게 될 것이다. 그의 삶이 사랑으로 다 소진되어 지상을 떠나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중력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는 나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2021-12-16
겨우내 춥고 어두웠던 골방 창틈으로 누군가인기척도 없이 따스한 선물 밀어 넣고 간다햇살 택배다감사의 마음이 종일토록 눈부시다인기척도 없이 햇살을 선물하고 있는 세계. 햇살로 인해 그 방은 따스하고 밝게 변할 것이다. 춥고 어두웠던 골방은 시인의 마음이기도 할 터, 그러니 감사의 마음이 종일토록 눈부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선물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세계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즉 시심(詩心)이 있어야 세계를 공짜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