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옆 옥녀봉 동쪽, 경주시와 포항시 경계지역의 산동네 이름이 `우복(愚伏)`이다. 세종 시절 김상여 삼도병마절제사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며 단종을 옹위하다가 화를 당했다. 그 손자 김예중은 당시 장악원 주부였는데, 세조의 행악을 보고는 벼슬을 던진 후 연일현으로 낙향,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바보처럼 엎드려 산다`란 뜻으로 스스로 `우복`이라 불렀다. 지금 그 이름이 동명이 되었고, 김현룡 같은 후손들은 국난 때 창의의병장이 됐다.
세조의 계유정란때 화를 당한 황보 인 영의정의 손자 `단`은 충비 `단랑`에 의해 목숨을 건졌고, 대보면 구만리 집신골에 숨어들어 황보씨의 대를 이었다. 그 후손은 성동리로 이주했고, 그곳에 `광남서원`이 섰다. 그 인근 중산리에는 `중양서원`이 있다. 세종시절 자헌대부이조판서를 지내던 서섭(徐涉) 선생은 집현전 학사들과 뜻을 같이한 절의선비였고, “이 아이(단종)을 잘 보살펴달라”는 고명을 세종으로부터 받았다. 세조를 비판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중산리로 숨어들어 사육신의 순절을 기리며 후학을 양성했다. 1784년 정조(正祖)는 `중양서원`을 지어 그의 충절을 기렸다. 정조는 계유정란 피해자들과 사육신을 신원 복권시킨 왕이다.
지금 `중앙서원`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구룡포읍, 동해면, 장기면 일원 187만 평이 국가산업단지로 지정 개발되니 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서원도 예외없이 철거될 운명이다. 지정문화재라면 공금으로 이전이라도 되지만 중양서원은 비지정문화재여서 아무 혜택도 없다. 사업 주체인 포항시도, LH도 모두 나 몰라라 한다. 서원을 관리하고 있는 달성서씨 문중과 지역 유림들은 결사저항을 하지만 법을 뛰어넘기 어려워 답답하다. 땅값과 건물값만 보상받고 말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양희제 교수는“중양서원은 삼현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 건축양식이고, 보존상태가 양호해 유형문화재로 등록될 가치가 충분하다. 비지정문화재라 해서 마구 철거해선 안된다”고 했다. `건축양식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 속에 스며 있는 `정신가치`는 더 위대하다. 불의에 저항했던 꼿꼿한 선비정신의 정수가 바로 중양서원이고, 광남서원이다. 이런 건축물은 영구히 그 자리에 남겨 `곧은 정신`의 표상으로 삼아야 한다. `산업단지 속의 서원`은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공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