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2·28 민주화운동 산증인 포항출신 이광웅씨
“비겁하고도 포악한 부정선거가 학원의 자유조차 박탈했다. 우리가 일어서야 자유당이 망하고 침묵하면 나라가 망한다”
2.28민주화운동의 주역인 이광웅씨(74·영덕옥계솟대공원 대표)는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이었던 그날의 참상이 생생하다.
경북고 학생 800여명과구호 외치며 관사 앞 투쟁
빨갱이 누명에 모진 고문
유치장서 반성문 강요도
“민주화 주춧돌 역할 영광”
그는 경찰의 방망이 구타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됐지만 경찰서 유치장에서 반성문을 요구하는 경찰의 강요에 이 같은 글을 썼다가 실신상태에 이르기까지 고문을 당했다.
당시 경북고 2년생(경북중고 42회)이었던 포항출신의 이씨는 “당시 자유당 정권은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 박사의 선거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두려워해 투표권도 없는 학생들에게까지 일요일인데도 등교지시를 내리고, 하루전인 27일 자유당 유세에는 참석독려차 토요일인데도 2시간 단축수업을 하고 하교시켰다”면서 당시를 술회했다.
이씨가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포상신청서(2015)에 따르면 그는 당일 도지사 관사까지 경북고 학생 800여명의 데모대를 이끌고 진출,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빛들아` 등 구호를 외치면서 투쟁하다 부상을 입고 경찰에 연행됐다.
경찰서에서는 신원조회 때문에 빨갱이 누명을 쓰고 온갖 고문을 당했으나 소신대로 자술서를 쓰고 이틀만에 석방됐다.
졸업 후에는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2.28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받지못하자 실의에 빠져 학업도 만회할 겸 지금은 모두 작고했지만 당시의 동지 이대우(당시 학생대표, 건국포장 수훈)·하청일(2.28선언문 작성) 등과 경북 금릉군 청암사에 입산하는 등 파란만장한 역경을 감내했다.
이씨는 28일 대구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직후 “늦게나마 2.28민주의거가 국가적 행사로 격상되고 법제화 돼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한 본인으로서는 미력이었지만 긍지를 되찾게 됐고, 4.19혁명에 작은 주춧돌 하나를 놓은 지난날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럽다”면서 “다만, 그때 함께 한 동지들은 지금 역사적 인물로 쓸쓸하게 퇴장하거나 기력이 쇠잔해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창형기자 chlee@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