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유럽문화의 정신적 뿌리로 등극하다
그리스는 1814년에 독립을 위한 비밀결사가 ‘헤타이리아 필리케’가 조직되고 1821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펼쳐진다. 그리스 독립은 유럽인들의 관심도 지대했다.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 압제에 신음하는 그리스는 유럽 역사와 문화, 더 나아가 정신적 뿌리로써 반드시 독립시켜야 할 땅이었다.
그 이면에는 오래전 콘스탄티누스대제가 비잔티움 천도를 계기로 그리스어가 표준어가 되면서 동로마가 오스만제국에 멸망하기까지 1100년 넘게 그리스어를 사용한 것도 한몫했다. 서구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를 최초의 유럽으로 여기듯 그리스와 로마는 자신들 문화와 태생적 정신적 뿌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1822년 1월, 그리스는 독립을 선언하고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오스만제국이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이때 서구사회는 예술과 문학은 물론, 과학기술 발전에 진일보하면서 전쟁 무기까지 상상을 초월했고,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트루크 두 제국의 넓은 영토가 식욕을 자극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신성 강국으로 떠오르는 프로이센까지 두 제국에 압박을 가해왔다.
기세에 밀린 오스만제국은 점점 쪼그라들었으며, 넓은 영토를 차지한 오스만제국으로서는 서아시아 나라들과 페르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지중해 곳곳에서 터지는 전쟁도 모른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실신 일보직전에 그리스가 독립을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리스 독립에 더욱 힘이 실린 것은 때마침 18세기 말부터 유럽에는 낭만주의란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고전적 엄격함과 사회 규범을 중시한 신고전주의에 대항해 떠오른 낭만주의였다. 일파만파, 유럽에 미치는 낭만주의 사조는 ‘그리스 사랑 운동’으로 이식되면서 그리스 독립이 가장 중요한 정치적 화두가 됐다. 그리스 독립이라는 이 영웅적인 명제에 자발적으로 전쟁 비용을 쾌척하는가 하면,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 등 스스로 전쟁에 참여하려는 젊은이들이 발칸으로 몰려들었다.
독립전쟁의 횃불을 높이 든 그리스는 ‘자유냐 죽음이냐(Eleutheria e Thanatos)’구호 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스 독립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연합했고, 자발적 용사들이 그리스로 몰려들자 탄력을 받으면서 1827년 독립의 꿈을 이룬다. 그해 10월 20일 지중해를 접한 그리스 나바리노(필로스) 전투에서 오스만군대가 궤멸당하다시피 하면서다. 그리고 1829년 그리스가 국제사회에 정식국가로 인정받으면서 여타 민족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용기를 안겨준다.
1832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참석한 런던회의에서 비잔티움제국 핏줄이면서 독일 남동부 바이에른 출신 왕자 오톤(Othon)을 그리스 초대 국왕에 앉혔다. 전제군주국가가 된 그리스로서는 좋다 싫다 할 여유가 없었다. 비잔티움 핏줄로 왕위 계보를 이었으니 정통성을 강조한 진골 중의 진골을 환영했다.
17세 젊은 왕자는 바이에른 출신 조력자와 3천5백여 명 군인을 배에 태워서 그리스에 입성했다. 이후 영국 차관은행의 높은 이자율은 그리스 국민의 허리를 휘청거리게 했다. 더구나 그리스 정교를 믿는 나라 국왕의 종교가 로마 가톨릭이었다. 이렇게 되자 국민들로부터 위엄은커녕 군부 지지도 받지 못했고, 어느 한 구석이라도 존경받을만한 요소라곤 없었다.
덧붙이자면, 1836년 발칸반도에서 민족주의가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던 때 프랑스인이 그리스를 여행한 후에 한 말이다.
“투르크족의 노예로 살아가던 그리스 사람들 모습은 실로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독립 후의 그리스는 끔찍하기만 했다. 절도와 폭력, 방화와 암살이 그리스인 삶이자 취미가 되어 있었다.”
한편 오스만터키와 오스트리아 역시 식민국가에서 불길처럼 번지는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와는 반대로 유럽 각국이 두 제국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전력투구했다. 부동항 확보라는 러시아의 오래된 꿈이 서진으로 이어지며 발칸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러시아가 흑해를 둘러싼 발칸지역을 기습적으로 침략하자 깜짝 놀란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만제국을 돕기 위해 나섰다. 잠시 적의 적은 아군이었다. 프랑스는 물론 영국으로선 인도로 가는 무역길이 막혀버리기 때문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1853년 러시아가 두 강대국에 의해 주춤주춤 발칸반도에서 후퇴를 거듭하자 이에 만족하지 않은 프랑스와 영국은 크림반도까지 따라가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점령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 땅에서 남의 군대끼리 치고 박는 모습을 지켜만 보던 오스만제국은 나약하기 짝이 없는 허울뿐인 존재로 국제사회에 낙인찍힌다. 조선 구한말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두 전쟁을 경험한 우리로서는 그 심정이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박필우스토리텔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