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자꾸만 우리 집 맞은편에 있는 창으로 간다. 한 달도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전등불이 켜져 있다. 빤히 보이는 불빛 때문에 나의 여름밤이 더 덥다. 에어컨을 켜려면 실외기실 창을 열어야 한다. 아마 집 주인은 창을 열면서 전깃불 끄는 건 잊었나 보다. 가로등 불빛만이 아파트 마당을 밝히는 시간에 그 불빛은 마치 달처럼 떠 있다.
나는 빛 하나 없는 방에 누워 남의 집 전깃불 걱정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져야 꺼지려나. 실외기실 창을 닫아야 하니 그제야 불이 켜져 있었다는 것을 알겠지? 그때까지 눈 감아야 하나? 관리실에라도 얘기해야 하나. 생각의 꼬리를 물다, 필요하지 않은 전깃불에 내가 유독 예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원인을 따라가 보니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간다. 아버님 어머님과 형님네 식구들 시누이까지 대식구였다. 시끌벅적한 식구들 틈에서 나는 새로운 환경을 익히려고 온 신경이 곤두 서 있었다. 그 많은 것 중에 전깃불 끄는 것이었다. 저녁 설거지가 끝나고 부엌을 나오기도 전에 잊지 않고 불을 껐다. 욕실에서 세수하다 방에 뭔가를 가지러 갔다 오면, 불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꺼져있었다. 마루의 작은 등이 꺼지는 날은 식구들이 일찍 다 들어온 날이었다. 방의 창마다 텔레비전 불빛만이 새어 나왔다.
여름날이었다. 안방에 늦은 저녁상을 차렸다. 땅거미가 방에도 내려앉았다. 컵을 들고 들어오다, 전원스위치로 가던 손이 멈칫했다. 반찬이 보이지 않을 만큼은 어둡지 않았다. 아무도 어둡다고 하지 않아 나는 그냥 내 자리에 앉았다. 방 안은 숟가락 움직이는 소리 속에 어린 조카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건너다녔다. 늦게 밥상머리에 앉은 나는 주위에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앞에 놓인 반찬만으로 밥을 먹기 바빴다.
고요 속에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방안에 있는 스무 개도 넘는 눈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뭐지? 왜? 내가 뭘 잘못했지? 눈을 둥그렇게 뜨고 퍼뜩 남편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눈에 불이 켜진 것 같았다. 늑대의 눈빛이 그러했을까.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마치 낯선 방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숙모, 불” 일곱 살배기 조카가 손가락으로 내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제야 내 뒤에 전원 스위치가 있어서라는 것을 알았다.
그 밤, 나는 숨죽여 울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어이없어했고, 나는 무엇보다 부드러운 말 대신 눈 화살을 쏜 남편이 야속했다. 불 켜라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모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는 사실에 괜히 억울했다. 내 마음대로 불도 못 켜고, 세탁기를 두고도 뻣뻣한 청바지까지 손으로 빨아야 하는 날들이 서러웠다. 어머님의 눈을 피해 재바르게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다 잠들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불을 끄고 다닌다. 얼마 전, 딸이 손자들을 데리고 왔다. 꼬맹이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가 된다. 욕실에 들어갈 때면 전원스위치를 있는 대로 다 켠다. 변기 쪽과 환풍기만 켜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없다. 딸도 아들도 마찬가지다. 낮에도 식탁에 앉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등부터 켠다. 밤에도 등 하나만 켜곤 하는 거실에 낮에도 등이란 등은 다 켜 놓는다. 따라다니며 불을 끄다 내뱉는 내 말은 언제나 잔소리가 되고 만다.
어둠 속에 있어 본 사람만이 밝은 빛의 소중함을 안다. 호롱불 밑에서 자란 할머니가 아껴두었던 전기가 아쉬운 게 없는 아이들 손에서 흘러넘친다. 맞은편 창의 불빛처럼 꺼지지 않는 아이들의 전깃불. 지금 있다고 마냥 있는 것은 아니다. 끄지 않아 다시는 켜지지 않는 날이 올까 두렵다. 나도 한때는 전깃불 하나 켜는 일에도 눈치를 보며 살았으니, 아이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창의 불도 꺼지고, 아이들도 언젠가는 스스로 스위치를 내리기를 기대한다.
나는 애써 맞은편 창을 보지 않으려고 안막 커튼을 친다. 내일 관리실에 얘기해야 하나 다시 고민하면서.
/윤명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