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경판고지 권역 통일신라 ~고려 불교·기록문화사 중심 공간 초조 대장경 봉안처 확인… 명문 기와 체계적 조사 병행돼야
대구 팔공산 부인사가 초조대장경 봉안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잇따라 확인되면서 국가 사적 승격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대구 동구는 11일 대구경북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대강당에서 ‘팔공산 불교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우다 – 부인사지 사적 승격을 위한 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번 세미나는 초조대장경 봉안처로 확인된 부인사의 사적 승격을 추진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는 개회사·축사에 이어 기조강연, 주제발표, 종합토론 순서로 진행됐다. 기조강연은 한기문 경북대학교 명예교수가 ‘부인사의 역사와 위상’을 주제로 맡아 부인사가 한국 불교·기록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정리했다.
이어진 주제발표에서 한정현 세종문화유산재단 선임연구원은 “부인사 경판고지 권역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까지 이어지는 불교·기록문화사의 중심 공간”이라며 “이규보가 전하는 초조대장경 소장지가 현재의 부인사인가에 대한 의문을 불식시킬 실물 자료를 확보해 이곳이 초조대장경 봉안처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고 밝혔다.
한 연구원은 “경판고지 권역은 당초 경전과 교장을 보관하는 시설로 활용됐으며, 고려 중기에는 단순 보관을 넘어 인쇄 기능까지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문헌에서도 무신정권기 부인사가 꾸준히 등장하는데, 이는 이미 초조대장경을 보관하면서도 사세를 유지했음을 방증한다”고 설명했다.
최영희 강릉원주대 초빙교수는 “통일신라기 중판타날 선문기와·무학식 암막새, 그리고 황룡사지 급에서 확인되는 노구(露鉤) 전돌의 출토는 금당 불단 장식에 고급 재료가 쓰였음을 보여주며, 부인사가 일찍이 중심 사찰로 위상을 갖췄다는 증거”라며 “나말여초~고려 전기의 파상문 막새가 불지·경판고지 전역에서 대량 확인된 점은 중창과 사역 확장을 가리키며, 늦어도 10세기에는 경판고지가 본격 운영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또 “‘부인사’ 명문 기와는 단순 장식이 아니라 대량 발주·운반·관리의 표식으로 해석되며, 초조대장경 봉안 전후 사명 표기의 변동과 맞물려 위격 상승을 드러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인사지의 기와는 창건·중창·복원의 전 과정을 촘촘히 증언하는 1차 사료”라며 “사적 승격을 통해 부인사 전역 기와의 체계적 조사와 팔공산권 생산·유통 연구를 병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초조대장경은 고려 현종 2년(1011년) 거란 침입을 극복하기 위해 조판된 대장경으로 팔만대장경보다 약 200년 앞선다. 1232년 몽골 침입 때 부인사와 함께 소실돼 실체와 봉안처를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으나, 작년 대구 부인사지 요사채 철거부지 정밀발굴에서 문헌 기록과 일치하는 ‘符仁寺(부인사)’ 명문이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가 확인되며 논란은 사실상 마무리됐다.
글·사진/장은희기자 jangeh@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