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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정신과 열린 마음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

덕산코트랜 강환수 대표에 주목한 이유는 한 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림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장님요, 부족한 아들을 거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림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덕산코트랜을 방문한 날은 오랜 장마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위로 열어놓은 창문에는 빗소리가 요란했고, 인상 좋게 생긴 강 대표와의 인터뷰는 참으로 힘들게 이어졌다. 하나를 질문하면 하나만 답하면서 입을 다물고 또 하나를 질문하면 또 하나만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보기보다는 참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영업이 천직이라는 사람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법도 하건만 그에게서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어버이날이 되면 사장인 나는 고향 집에 가는데 직원들은 못 그러잖아요.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직원들의 부모님께 우체환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까 습관화되어서 아무런 감동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편지쓰기를 시작했죠. 부모님께 편지 쓰는 직원에게만 우체환을 보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직원들이 어버이날이 되면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전 거기에 우체환을 동봉해서 보냈죠.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님께 편지 쓰기가 어렵거든요. 그런데 직원들의 부모님들이 자식에게서 편지를 받고는 감사의 편지를 회사로 보내오시는 거예요.”그 그림의 내막은 그랬다. 작은 일이었지만 파급 효과는 컸다. 강 대표는 가정 내에서 인성이 좋은 사람이 직장에서 일도 잘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직원의 부모님께로 퍼져 나가고 지금은 덕산코트랜의 특별한 문화가 되어 있었다.보통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지만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강 대표는 직원들의 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좋은 사고 좋은 제품 좋은 신뢰’라는 사훈에는 회사의 이익에 대한 것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더 많이 드러나 있다.강 대표는 효 문화를 정착시키면서 사내에서 칭찬릴레이게임을 시작했다. 사람은 다면성을 가지는데 많은 모습 중에서 하나만 보면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칭찬릴레이게임을 하면서 직원 서로간에 더 잘 알게 되고 그들이 가진 장점이 더 부각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매주 2명씩 칭찬하기로 했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1달에 1명씩 칭찬하는 것으로 줄어들었다. 장기근속하는 직원들이 늘어나면서 서로에게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이다.강 대표는 기업문화의 하나로 ‘상경여빈’의 정신을 강조했다. 상경여빈이란 서로 공경하고 늘 손님처럼 대하라는 말인데 항상 보는 사람이라고 만만해지면 예의가 없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서로를 존중해주고 손님처럼 대하다 보면 갈등은 필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생산성 향상이라든가 좋은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는 중소기업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덕산코트랜은 2013년에 여성가족부 가족친화인증 국무총리 표창을 받게 되었다.어떻게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는지 궁금했다.“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죠. 그런데 동신유압이라는 기계회사에 영업직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어요. 기계에 대해서 아는 게 뭐 있어야지. 그래서 기계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영업을 해보니 이 영업이라는 것이 내 적성에 딱 맞는 거야. 천직을 찾은 거죠.”강 대표는 그렇게 기계 공부를 하면서 영업을 배워 나갔다.“나는 제품을 파는 것보다 인간관계를 먼저 맺어 나갔어요. 영업은 사람 중심이거든요. 아무리 내가 기계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더라도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면 영업도 실패예요. 그 다음은 서비스죠. 직접 나가서 서비스를 해줍니다. 수십 년 전의 기계를 지금도 쓰는 업체가 있어요. 우리도 깜짝 놀란다니까요.”강 대표는 청년들이 직장을 구할 때 1순위에 두어야 할 것으로 회사의 비전을 꼽았다. 회사는 사람과 함께 가고 사람은 회사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당장의 급여나 복리후생보다는 그 회사가 얼마나 비전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인재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회사가 인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육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특히 외부교육 수료의 기회를 많이 준다고 했다. 백 명의 직원 중에서 한 명의 직원이 회사를 살린다는 철학이 강 대표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않다는 신념으로 사람들을 대한다고 했다. 지금 부자들은 상속이나 증여 등의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지만 아무리 아껴봤자 어차피 50% 정도는 세금으로 국가에 바쳐야 하니까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그런 그에게 봉사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대답은 간결했다.“기억나는 게 없어요.” 봉사를 하지 않아서 기억나는 게 없는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강 대표는 봉사라는 말이 나오자 웃음을 지으며 자꾸만 감추려 들었다. 쑥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봉사를 하면서 봉사를 배우기 때문에 굳이 말할 만한 봉사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급식 봉사를 나가보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 음식을 담아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급식이 필요한 사람들임을 알아본다고도 했다. 그냥 집에 있기가 심심해서 나온 김에 급식 봉사를 받는 사람도 있고, 정말로 절실해서 급식 봉사를 받는 사람도 있는데 절실한 사람들은 다음 끼니를 위해서 음식을 봉지에 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음식을 담아 주면서 다음에도 꼭 오시라고 당부하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 복지의 그늘을 읽어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보다 봉사나 기부를 얼마나 했는지가 중요한 척도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봉사나 기부를 할 줄 모르는 부자는 진정한 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아직 5일제 근무가 정착되기 전에 직원들로부터 그런 요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머리를 썼죠. 전 직원이 한 달에 한 번 봉사를 하면 5일제 근무를 하겠다고요. 그런데 막상 봉사를 하려 해도 어렵더라고요. 단체에는 학생들이 전부 와 있고, 그래서 지속하지 못했어요. 마음 있는 직원들은 개별적으로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장애인 단체에 가보면 장애인이 오히려 비장애인에게 장애를 가졌다고 해요. 마음에 장애가 있다는 뜻이죠. 인정 안 할 도리가 없어요.”덕산코트랜은 대구의 스타 기업에 선정되면서 대구시로부터 이런저런 지원을 받았다. 코로나 사태가 터졌을 때 강 대표는 대구시로부터 받은 혜택을 돌려주기로 했다. 받았으니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움에 처한 대구시에 기부의 손길을 보태고 여기저기 기부를 늘려나갔다. 어려운 사람이 손을 내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주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독자적인 방식으로 영업을 하고 싶어서 창업한 회사는 어느덧 강소기업으로 떠올랐다. 덕산코트랜은 해외 유럽CE 인증 2건 추가 획득 등 다수의 우수특허인증서 및 특허를 30개나 보유하고 있다. 그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으로 보였지만 사업에서만은 추진력이 있고 창조적인 마인드를 드러냈다. 강 대표는 부유하게 살았던 부친이 보증을 서주면서 가세가 기울었는데 오히려 그런 부친에게 고맙다고 했다. 대구의 기업가들을 보면 90% 정도가 자수성가한 사람인데 만약 부친이 계속 부유하고 자신이 그 그늘에서 살았다면 덕산코트랜을 창립할 생각이나 했겠느냐는 것이다. 길은 무수하고 어느 길을 가느냐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지만 성공의 길을 가려면 도전적이고 개척적인 정신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사무실에는 ‘작은 것부터 신용을 얻고 더 큰 신용을 얻자’라는 글귀가 쓰여진 액자가 있었는데 자신의 길을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행보가 눈에 보였다. ‘운칠기삼’이라고 하지만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는다는 그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글 천영애

2020-07-29

꿈이 있으면 뒤돌아보지 않고 그 길 가야 후회 남지 않으리…

◇ 18개국 38,000킬로미터를 달려 집으로118일(2019년 5월 10일-8월 30일) 동안 38,000킬로미터를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체코-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벨기에-네덜란드-독일-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에스토니아(18개국)를 돌아 다시 러시아를 지나왔다. 오랫동안 꿈꾸었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왔지만 딱히 일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생업을 뒷전에 두고 다녀왔으니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고단하게 밥벌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한 번도 떠난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여행의 기억이 평생 자산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장엄한 시베리아와 북유럽의 자연 속을 마음껏 달린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다.처음 세웠던 계획, 유럽의 서점과 도서관을 꼼꼼하게 둘러보고 오겠다는 다짐은 흐지부지 되었고 그야말로 주마간산 달리기만 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없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아내와 아이들이 여행을 끝낸 모습을 보고 했던 말은 “몇 개월 동안 10년은 늙은 것 같아!”였다. 4개월 동안 많은 에너지를 썼고 한계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몸으로 밀어붙이는 건 더는 어렵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고, 철없이 집을 떠나 길을 헤매는 일이 예전과 다르게 힘들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언제까지 철없는 일에 매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행하는 동안 돌아가면 덜 소비하고 더 단순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것은 정리하고, 가진 것은 가능한 살려 쓰고, 능력 밖의 일은 쳐다보지 않고, 목적 없이 멀리 떠나지 않고, 사람 모으는 일에 힘쓰지 않고, 관심 없는 일에 허투루 에너지를 흩지 않고. 이번 여행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내가 가진 에너지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잘 바뀌지 않지만, 항상 경계하는 마음으로 ‘단순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항로가 다시 열리길여행을 다녀오고 1년이란 짧은 시간이 지난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난해 12월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한 이후부터 장기간 해외여행을 떠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여행 하는 동안 거쳐 간 국가들 대부분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고통 받고 있고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다. 사람도 물류도 오가기 힘들어지니 점점 항로도 해로도 오가는 비행기와 배가 줄고 있다. 당장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던 페리도 운항을 멈추었다. 예정되어 있던 포항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항로도 언제 열릴지 모르는 상황이다. 여행, 항공, 해운 등 많은 분야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직격탄을 맞았다. 2019년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전쟁이 아닌 바이러스가 세상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지난해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오토바이 대륙 횡단 여행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내일도 예측하지 못하는 게 사람 일이라 마음먹은 것은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는 걸 오래 전에 깨달았다. 마흔 이후의 삶은 상승의 변곡점을 찍고 내리막을 걷는 일만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뒤로 미뤄선 안 된다. 내일, 한 달 후, 내년에, 형편이 나아지면…. 하고 싶었던 일을 뒤로 미루면 결국 나중에 후회할 일만 남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일도 가족도 잠시 놓고 어디론가 떠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세상일은 모두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 다른 것을 거둘 수가 없는 법이다.대륙 횡단 여행, 오토바이 여행을 꿈꾸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딱 한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한다는 건 무리지만 여행하는 동안 절실히 느낀 건 ‘체력’이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중도포기하기 쉽다.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사를 보고 무릎을 쳤었다. 사범이 바둑판을 앞에 두고 담담하게 주인공 장그래에게 말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야하는 여행에선 첫째도 둘째도 체력이다.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의의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집중력만 잃지 않았다면 러시아를 벗어나며 미끄러졌던 사고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니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니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니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고마운 친구이자 독자였던 형주 씨를 기억하며사십 대에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버킷리스트는 이뤘으니 남은 3년 동안(난 마흔일곱이다) 오십 대에 해보고 싶은 것들에 대해 계획을 세워볼 생각이다. 지금까지 다녀왔던 긴 여행 대부분 준비 기간이 3년이었다. 이번 여행도 경비를 마련하고 오토바이 정비하는 법을 배우고…. 준비하는데 3년이 걸렸다. 지천명이 되면 오토바이를 두고 자전거로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는 게 꿈이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영감은 우랄 산맥을 넘다 만난 다이스케 씨에게 얻었다. 그는 3년 동안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여행했고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가 요트로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은 모든 걸 갖추고 떠난 이가 없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고, 기회가 왔을 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을 뿐이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책이나 다른 어떤 것보다 여행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아직 남았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나의 스승이었다고 생각한다. 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 더는 여행을 꿈꾸지 않을 것이다.여행을 다녀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 분들 중에 남형주 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형주 씨에 대해선 지난 1월 22일자 연재글에 동해항까지 마중 나온 일로 짧게 언급하기도 했다. 형주 씨를 처음 만난 건 2017년 여름이었고, 졸저 ‘오토바이로, 일본 책방’을 읽었다며 파주에서 찾아왔었다. 그렇게 오토바이를 좋아하는 인연으로 성수공고에서 진행됐던 오토바이 정비 수업도 함께 듣고, 형주 씨가 운영하는 펜션에서 북토크도 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책방을 찾아 여행하는 이야기를 누가 재밌게 읽어줄까 했었는데, 형주 씨 한 사람 덕분에 그 걱정을 덜었었다. 이태준 선생은 “목전에는 독자가 적어도 좋다.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슬플 것이 없다”고 썼지만 그건 거짓말에 가깝다. 읽는 이 없는 글을 쓴다는 건 고단하고 슬픈 일이다.형주 씨는 내게 소중한 친구이자 독자였다. 여행기도 꼬박꼬박 읽고 있다며 연락했었다. 그런 형주 씨가 사고로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 조만간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나겠다고, 지금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연락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었다. 형주 씨의 소식을 듣고 인생은 짧고 덧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났다 돌아오고 누군가에겐 꿈으로 남았을 뿐이다. 불공평한 일이다. 꿈이 있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 길을 가야 후회가 남지 않는다. 형주 씨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7개월 동안 서른한 번의 소중한 지면을 내준 경북매일과 부족한 글을 읽어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끝

2020-07-28

종택 정신 상징하는 누마루 사랑채의 ‘충효고가(忠孝古家)’

충과 효는 빛바랜 전통이라고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데 최소의 단위가 가족이라면 최대의 단위가 국가이다. 그 국가를 지탱하는 것도 가족과 사회이고 국가는 가족과 사회를 보호하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진면목이 나타난다. 원주 변씨들의 충과 효를 실천한 안동 동호정과 간재 종택을 살펴보자.#. 원주 변씨 시조 변안렬과 굴불가“내 가슴에 구멍 뚫어 동아줄로 길고 길게 메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감키고 찢길망정/ 임 향한 그 높은 뜻을 내 뉘라서 굽힐 소냐.”“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년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앞 노래는 대은 변안렬(1334~1390)의 불굴가(不屈歌)이고 뒷 노래는 너무나 유명한 포은 정몽주(1337~1392)의 단심가(丹心歌)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게 제국을 건설한 몽고가 세운 원나라에 고려는 부마국으로 90년을 넘게 이어오면서 고려왕은 원나라에 불모로 있다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고려왕이 된다. 그래서 충숙, 충혜, 충렬 등 7명의 ‘충’자가 붙는 고려왕들은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다. 공민왕(1330~1374)은 충혜왕 때 원나라로 가서(몽고 이름 백안테무르)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고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을 폐하고 왕이 되었다. 변안렬은 중국 심양 출신으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고려로 올 때 호위해와 원주 변씨 시조가 된다. 고려에 귀화해서는 홍건적을 물리치고 운봉에서는 이성계와 왜구를 격퇴하고 위화도회군 때는 이성계의 부장으로 함께했다.변안렬은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개혁은 찬성했으나 왕조를 무너뜨리는 이성계의 역성혁명에는 동의할 수 없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가(何如歌)로 마음을 떠본 이방원(태종)의 노래에 고려에 충성하겠다는 뜻을 정몽주는 직설적 은유의 표현이라면 변안렬은 구체적 언어로 표출했던 것이다. 특히 이성계의 아들 무안대군 이방번은 사위가 되어 이성계와는 친사돈이 되지만 가치관은 달랐다. 최영의 생질 김저(?~1389)는 여주에 폐위되어있던 우왕으로부터 이성계를 죽이라는 밀명을 받고 곽충보와 팔관회 참석 날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하고는 이성계에게 밀고하여 27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이때 변안렬도 연관되어 처형당한다. 정몽주와 이색, 이숭인, 사위 이방번이 슬픔의 제문을 짓는다. 이성계도 변안렬을 죽이기는 했으나 뒤에 사면하고 자손들에게는 벼슬을 준다. 조선 건국 뒤 변안렬의 아들 변이는 도총제, 손자 변상복은 정종의 부마, 변상복의 조카 변효순은 태종의 부마가 된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고려의 삼은(三隱)에, 대은 변안렬과 도은 이숭인을 포함하여 고려에 충성한 오은(五隱)으로 불린다. 변안렬의 충절은 정몽주에 뒤지지 않으나 역사에 크게 빛나지 않은 것은 무보다 문을 숭상하는 전통의 원인도 있을 것이다.이런 무인기질은 남호 변협(1528~1590)과 변양걸(1546~1610)이 이어받았는지 변협은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고 을미왜변 때 왜구를 격파하여 장흥부사, 제주목사, 포도대장, 공조판서가 된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지옥의 세상이었다. 왜군의 살육도 문제지만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구원온 명나라 군인들의 추태도 극에 달해 종로에서 술 취한 명나라 군졸이 토해낸 음식물을 굶주린 백성들이 게걸스럽게 핥아 먹었다. 명나라 군인들은 조선의 벼슬아치들을 능멸해도 대응하지 못하고 낙오병들이 때지어 다니면서 난동부리는 것을 무과에 급제한 변양걸이 막아내 훈련대장으로 복직되고 임진왜란 때 강화도를 지킨 공을 세웠고, 길주목사, 순천부사, 제주목사, 충청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동호 변영청과 동호정원주 변씨가 안동 서후면 금계리에 정착한 것은 변안렬의 6대손 변광이 안동 권씨 권철경의 사위가 되면서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때는 주로 처가살이 하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 큰아들 동호 변영청(1516~1580)은 금계에 살면서 동호파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셋째아들 변영순(1523~?)은 봉화 거촌으로 이사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수온당 종택 등으로 이어왔다.동호 변영청은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총명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명종(재위1545~1567)이 등극할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뒤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다. 주로 언관 등의 일을 보다 뒤에 남원부사, 대구부사, 청송부사 등의 외직을 보내면서 선정을 베풀고 청렴한 선비의 삶으로 살았다. 동호정(東湖亭)은 1551년(명종6년) 어린 명종을 수렴청정 하던 문정왕후의 친정 윤씨들의 전횡을 강한 어조로 상소하여 파직당하고 낙향한다. 처가가 있는 안동 동쪽 법흥리 고성이씨 임청각 언덕 낙동강이 보이는 곳에 동호정을 짓고 자신의 호도 동호라 한다. 이보다 19년 전인 1532년 중종(1506~1544)의 사돈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한 회재 이언적(1491~1553)도 고향 경주에 와서 나 홀로 즐긴다는 독락당(獨樂堂)을 짓는다. 독락당은 송나라 신종 때 급진적 개혁가 왕안석(1021~1086)의 신법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사마광(1019~1086)이 스스로 퇴임하고 낙향하여 독락원을 지었듯이, 회재도 독락원을 그리며 지었을 것이다. 동호 변영청도 북송의 인종 때 곽황후 폐립문제로 재상 여이간과 대립하다 쫓겨난 범중엄((989~1052)이 동정호에 ‘등악양루기’의 문구를 상기하면서 낙동강가에 동호정을 지었을 것이다. 동정호는 호남성에 있는 중국 최대의 호수로 중국의 내노라 하는 시인묵객들은 자신의 포부를 쏟아내었다. 시성 두보(712~770)도 ‘등악양루’시에서“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물에 떠있구나(乾坤日夜浮)”로 노래했고, 범중엄의 ‘등악양루기’의 마지막 구절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에 앞서 걱정하고(先天下之憂而憂),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후에야 즐거워한다(後天下之樂而樂歟).”의 마지막 구절은 모든 관료들이 가슴에 새겨들어야 할 명구다. 그래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가 중국 문명의 보배 같은 정신유산으로 범중엄을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극찬했던 것이다.동호 변영청이 죽자 임청각 처가에 살던 가족들은 선조의 터전이었던 서후 금계로 왔고 동호정도 퇴락하였다. 후손들이 선조의 자취를 보존하고자 1926년 후손들이 옛 터전금계로 옮겨지은 동호정을 찾았다. 학봉종택 건너 마을 산언덕에 있었다. 서산에 지는 햇살마냥 사람 떠난 동호정은 말없이 서 있었다.#. 간재 종택의 충과 효와 간재정동호정에서 대각선 건너편에 있는 간재 종택은 몇 달째 안동에 오면서 올해만 세 번째 찾았다. 언제나 차분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간재의 11대 주영숙 종부와 변성렬 종손이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종택 입구 연 밭 위에 거문고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금학정 정자는 근래에 세웠고 그 앞에 소나무 군상들이 정자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다른 종택과는 다르게 충과 효를 상징하는 정려각과 홍살문이 시선을 끈다. 간재 변중일(1575~1660)은 동호 변영청의 손자로 효심이 남달라 임진왜란 때 병든 조모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지극한 효심에 감동 받은 왜병이 병간호 잘하라며 다른 왜병이 해치지 못하게 징표로 칼을 주고 간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효자로 칭송받았다. 군량미 100석을 상주 진영으로 보내고 18세의 어린나이에 형 변희일과 곽재우 의병장 아래서 왜적과 싸웠고 정유재란 때도 의병으로 왜적과 싸워 충과 효를 실천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동쪽언덕에 검소한 간재정을 짓고 간재기를 쓴다. 사람을 평가할 때 입체적으로 분석해야 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 알려면 기문을 보면 알 수 있다.다산 정약용은 수오재기에서, 갈암 이현일은 갈암기에서, 간재는 간재기를 통해서 자신의 살아가는 삶의 방향을 나타낸다. “일찍이 군자의 도는 중도(中道)로 가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중도는 성덕(成德)이 아니면 할 수 없으나 치우치면 지향하는 사람이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감히 성덕자가 될 수 있는 것을 바라지 않지만 또한 지향이 없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간(簡)에서 뜻을 취한 까닭이 어찌 중(中)을 버리고 치우침에서 취한 것이겠는가로 자신의 뜻을 삼았다.종택의 본채와 이어진 누마루 사랑채는 예서로 묵직하게 쓴 충효고가(忠孝古家)가 간재 종택의 정신을 상징한다. 본체의 대들보가 자연스런 멋은 좋은데 너무 굴곡이 급반전하여 악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집 뒤에 불천위 위폐를 모신 사당을 둘러보고 외따로 떨어진 간재정으로 갔다. 백일홍이 충과 효를 실천했던 선비의 정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 간재정도 간재가 소박하게 지어 거문고를 곁에 두고 학문하면서 강학을 하던 곳이었는데 후손들이 줄여서 지은 것인데 단정한 맛이 난다.현대사회는 개인단위로 삶이 형성되어 있어 집안과 여러 문중이 함께 모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간재 종부와 종손이 구심점이 되어 매년 8월이면 9녀2남의 가족, 친지들과 외손, 안동의 여러 문중 분들을 모시고 만남으로 정을 쌓고 음식으로 기쁨을 주고받으며 화합하는 ‘열친회(熱親會)’는 본받을만하고 칭찬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28

경이로운 아름다움 그 자체…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중년들 중 경주에 관한 추억 한 조각 없는 사람이 있을까?분명 없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역시 마찬가지. 그는 1981년 경주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며 ‘서라벌의 보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목했다. 신라와 신라인에 대한 애정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원고를 아래 싣는다.필자인 박철화는 서울대 불문과와 프랑스 파리 8대학·10대학에 공부했다. /편집자 주고교 2학년 가을. 내가 경주 수학여행을 가기로 한 것은 불국사가 아니고 순전히 바다 때문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었다.강원도 내륙 도시 춘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때까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을 통해서나 불과 몇 달 전 시작한 칼라TV 방송에서 간접적으로 파란 바다를 보긴 했다.태어나서 내내 온 사방을 둘러싼 산을 보며 자란 내게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단순하고 명쾌한 풍경이었다. 상당한 시각적 충격이었는지 그 풍경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당시 감기 끝물에다 장염에 시달리던 내가 약을 복용하면서까지 수학여행에 참여하기로 한 이유는 그것이었다.가는 길은 지루했고, 중간에 들른 장소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다만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경주와 신라의 문화에 대한 선생님들의 소개가 있었다. 하지만 10대 후반 소년들에게 그 말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신비한 설화나, 하얀 피를 뿌리며 순교하여 이 땅에 불교를 받아들이는 전기를 마련했고, 그 불교문화의 찬란한 중심지가 바로 경주여서, 이번 수학여행의 목표가 그런 유적들을 둘러보는 것이라는 이야기 등등.그런데 대체 그게 시커먼 교복을 입고 한 반에 70명 넘게 구겨 앉아 있다가 풀려난 우리들의 청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떼로 몸을 뒤틀며 우리는 저녁 무렵 경주에 도착했고 여관에 짐을 풀었다. 첫날은 경주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불국사를 거쳐 감포 문무대왕릉과 울산 조선소 탐방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그런데 10대 후반의 고삐 풀린 청춘들이란 어디서나 본능적으로 이성을 찾아간다. 좁은 버스 안에서 몸을 비비꼬다가 간신히 풀려난 우리들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엇비슷한 시간에 버스에서 내린, 건너편 여관에 묵을 여고생들이었다. 전주에서 왔다는 그 여고생들에게 친구들은 선생님들 눈을 피해 수작을 걸었다. 키가 180cm 가까웠던 나는 얼굴마담 노릇하느라 앞에 섰고 ‘말빨’ 좋은 친구가 곁에서 여학생과의 약속을 받아냈다. 경주의 첫인상은 그러했다.문제는 내가 저녁을 먹자마자 약을 먹고 인솔교사 방에서 잠이 들어버린 거였다. 그 사이 친구들은 선생님들의 철벽 방어를 뚫고 몇몇이 몰래 나가서 여학생들을 만났는데, ‘신라의 달밤’이 신통치는 않았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컨디션을 회복하고 나타난 내게 책임지라며 투덜거린 것을 보면. 그 가운데 한 여학생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펜팔 요청 쪽지를 건네받았지만 그걸 간직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온 여행이었다. 아침 먹고 올라온 불국사 경내 어딘가에서 그 쪽지를 버렸다.그것은 황홀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배였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어서 절에 간 경험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아버지가 재직한 관할 면의 소양댐 안 청평사 정도에 가봤을 뿐이다. 그런 내 눈에 불국사와 석굴암은 놀라움 자체였다. 자연과 인위, 무심함과 정교함, 화려함과 절제, 위엄과 겸손까지…. 무엇 하나 보태고 뺄 것이 없었다.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기에도 가장 완벽한 미의 원형이었다. 내가 그 여학생의 쪽지를 버렸다는 말은 그러니 수정되어야 한다. 정신이 팔려서 아예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는 기억조차 못하고 잃어버렸다. 석굴암을 나와 부지런히 혼자 다시 찾아가 둘러본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불국사를 품고 있는 산부터 경주의 모든 것이 지워지지 않는 의미가 된 것이다.그날 아침 이후로 수학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바다가 뒷전이었다. 물론 처음 본 바다가 놀랍지 않을 리 없다. 모래, 바다, 하늘로 선이 그러진 3등분의 세계는 굳이 표현하자면 미니멀리즘의 극치였고,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추상회화의 원조 같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숨결이 들어 있지 않다. 인공낙원의 향취가 없는 것이다.그것보다는 가는 길에 본 감은사지 석탑 주변 쇠락한 삶의 자취, 인위적 흔적의 황량함이 더 인상적이었다. 감포 끝자락에서 본 문무대왕릉도 놀랍긴 했지만 이미 불국사와 석굴암에 마음을 빼앗긴 내게는 역사적 사연 가득한 자연물 정도였다. 그 점은 경주를 지나 울산 조선소에 가서 본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능가하는 배가 품은 산업화의 근대문명을 마주하면서 이번에는 그 과도한 인위에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불국사와 석굴암은 최선의 조화를 이룬 이상적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때로 생각한다. 예술적이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성장한 내가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왜 문학과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물론 타고난 기질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 기질도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그토록 두드러지게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돌이켜보면 1981년의 수학여행은 내게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동경을 심어준 계기가 아니었을까? 기질이 화약이라면, 불국사와 석굴암과의 만남은 영혼의 뇌관이었던 셈이다. 그 뒤로 경주는 늘 내 영혼의 처소 깊숙한 곳에 머물다 호출되곤 했다.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다가, 책을 뒤적이다가 경주가 나오면 나는 곧장 그 수학여행의 아침으로 되돌아가곤 한다.프랑스문학을 전공한 터라 대학을 마치고 유럽에서 몇 년 더 밀린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다. 현대시가 전공이었지만 미술과의 관계를 다루는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부를 핑계로 유럽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물론 유럽은 놀라운 곳이다. 근대문명을 만든 주인공들답게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 것을 능가하는 문화유산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고 내 핏속에는 우리의 역사와 자연에서 우러난 개별적 미의 원형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휘황한 문화유산 앞에서도 나는 기죽지 않고 당당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한가운데에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다.지금이야 많이 알려졌지만 1990년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동아시아 한구석의 크게 의미 없는 존재였다. 중국의 스케일과 일본의 경제력과 정교함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한국은 어떤 나라인지 거의 몰랐다. 우리가 한글이라는 독자적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에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도 가끔 한국을 궁금해하며 가보려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경주를 권했다. 내가 박가여서 신라 왕족의 후예라는 허풍 섞인 이야기까지 얹어주면 순진한 그들은 마냥 좋아했다. 그리고 돌아온 반응은 놀랍다는 것이었다.당시 한국까지 갈 정도면 아시아 문화와 예술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을 가진 유럽인이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라는 찬사가 거의 다였다. 경주 남산의 석불들, 대릉원, 곳곳의 폐사지들…. 그 가운데서도 압권은 불국사와 석굴암이었다. 유럽 문명의 후예로 그들 나름의 미적 기준을 갖고 있는 개성 중시의 외국인들에게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들의 반응은 단순한 이국 취향에 머물지 않았다.문학평론가 박철화.신라 천년왕국이 빚어낸 한국적 특수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는 이상적 아름다움의 뚜렷한 증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유럽에서 돌아온 뒤로 여러 번 경주에 갔다. 보문단지의 벚꽃, 감포 문무대왕릉, 찰주에 보름달이 걸리던 심야의 감은사지, 용장사곡 삼층석탑처럼 남산에 숨어 있듯 남은 다 닳은 석탑과 석불들….거기서 쇠락한 문화의 쓸쓸함에 전염되기도 했지만 나는 늘 불국사와 석굴암의 정돈된 아름다움, 인간의 세속적 삶을 넘어 종교의 영원한 성스러움이 번져나가는 그 자리의 끈질김과 단단함에서 영혼의 기운을 얻곤 했다.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거의 40년 전 아침, 불국사 마당에서 듣던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2020-07-23

“때 묻지 않은 청정자원 바탕, 영양군 새 미래 100년 준비”

‘살고 싶은 영양! 찾고 싶은 영양!’ 구태를 벗고 새로운 영양을 만들어 달라는 군민의 염원에 힘입어 영양군수 입성에 성공한 오도창 군수는 군민이 군수라는 군정운영 철학과 소통 행정으로 군민 모두의 행복이 있는 영양을 만들겠다는 군정지표로 민선 7기 영양군정을 이끌며 취임 2주년을 맞았다.오도창 군수는 “당장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성과보다는 군민이 주인 되는 군정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 영양의 문제점과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을 해결해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일에 노력한 시간이었다”고 전반기를 평가하고 “남은 2년도 군민을 섬기고 소통하는 열린 행정으로 영양군의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데 초점을 맞추겠다”고 밝혔다민선7기 취임 2주년을 맞은 오도창 영양군수에게 지난 2년간의 소회와 함께 남은 2년 동안의 계획에 대해 들어봤다.-초선 군수로 군민들과 2년을 보냈는데 소감은.△초선 군수로 취임을 했을 때 많은 분들의 우려와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2년의 시간 속에서 제 자신도 강해졌고 군민들의 시선도 기대와 격려로 바뀌었다. 다소 미숙한 부분으로 말미암아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소중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1만7천여명의 군민들을 지켜내야 하는 군수라는 무거운 책임을 결코 짐이라고 생각하며 외면하려는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자란 고향에서 모든 이웃과 가족들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영양을 만들자는 고민만 있었을 뿐이다. 이제 2년의 시간이 지나 반환점을 돌았다. 여전히 가야할 길은 멀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어 우리 앞에 놓인 어려운 숙제들을 함께 이겨나가길 기대한다.-민선7기 전반기 군수께서 생각하는 주요 성과가 있다면?△지난 2년 동안 대외적인 평가에서 ‘2019 대한민국 뉴리더 지방자치부문 대상’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대내적으로도 영양군 최초 예산 3천억 돌파, 영양산나물축제 역대 최고 인원인 16만명 기록, 생활민원 바로처리반 실시 및 어르신 무료 목욕상품권 지급, 장보기 배송서비스 실시, 국립멸종위기종복원센터 개원, 농산물품질관리원 경북지원 영양분소 개소, 새로운 영양군 농산물 공동브랜드인 ‘영양군 美듬직’ 확정, 영양고추 최고가격 대우, 군정알리미 시스템 구축, LPG배관망지원사업 완료, 영양소방서 신설 유치 확정 등과 같은 성과를 거뒀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지난 2년 군민들과 함께 많은 것을 이루었다고 자부한다.-민선 7기에서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유는.△변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재 영양이 처한 현실 속에서 모든 군민들의 행복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 나가자는 의미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보다는 퇴보하는 현 실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방안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만들어져야 한다. 갈라진 민심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한 첫 걸음 그것이 바로 하나된 영양이 될 것이다. 그리고 군민들은 2년의 시간 속에서 보여주었다. 할 수 있다는 모습으로 서로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것이 변화라고 생각한다.-저출산고령화가 지속되면서 다른 지자체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텐데…. 인구 2만명 회복을 위해 추진하는 핵심방안이 있다면.△인구 문제는 모든 자치단체의 고민이다. 저출산 고령화의 추세는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그렇기에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출산장려금이며 다양한 지원방안이 실시됐지만 인구 감소 추세는 빨라지고 있다. 그래서 영양군도 보다 현실적인 접근에 나섰으며, 이를 위해 지난해 군민들의 뜻을 모으는 자리를 마련했다. 아울러 ‘영양군 인구증가정책 지원조례’를 제정하고 전입 축하금 지원으로 인구감소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새둥지마을 조성사업과 소방서 신설, 귀농귀촌 장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여건 개선 등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돌파하고자 한다.-무엇보다 인구 감소를 위한 맞춤형 정책 추진이 절실하다. 민선 7기에서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 서비스 제공에 나섰다고 했다. 어떤 내용인가.△올해 안으로 인구증대를 위한 기본인프라 구축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 것이다. 출산과 양육의 정책을 총괄하는 민간공동 인구지킴이 대응센터와 지역 아동들의 건전한 성장과 발달을 도울 공립형 지역아동센터, 청소년들의 소중한 꿈과 희망을 키우는 청소년 수련관, 어르신들의 참여와 소통의 공간인 노인복지관이 연내에 완공된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지역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기반 구축으로 영양의 미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지나온 시간 못지않게 앞으로 남은 기간도 중요하다. 어떤 계획이 있는지.△남은 기간 동안 핵심 키워드는 재생, 환경, 미래, 소통, 혁신으로 말하고 싶다. 새롭게 짓는 건물과 집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과의 조화를 이루며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진행된다. 그것은 영양다움이 살아있는 도시의 변화를 재생이라는 단어로 재탄생될 것이며, 모두가 당연하게 누리는 자연이 영양에서는 차별화된 자원으로 만들어 질 것이다. 영양에서만 느끼고 즐기며 만끽할 수 있는 청정 공기와 자작나무숲이 대표적으로 거대한 자연에서 만들어지는 영양의 자연이 영양의 미래를 보여 줄 것이며 소멸 위험에 처해진 영양에도 새로운 탈출구가 만들어 질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특히 아직은 멀지만 조금씩 한 발짝 다가가는 영양의 발걸음이 올해 연말이면 시작을 알리게 된다. 국도31호선 4차선 선형 개량을 위한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게 되면 영양도 이제는 마음속에서부터 가깝다는 느낌이 들것이다.-끝으로 군민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사랑하는 영양군민 여러분!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의 행복한 삶을 위해 많은 것들을 이루고자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전반기 영양군정을 마무리하며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꾸준한 오늘이 있기에 내일은 무한하다’는 말처럼 여러분들의 무한한 내일을 위해 남은 기간 더욱 신중하게 여러분들을 위한 군정을 펼쳐나가겠다.또한 저를 비롯한 500여명의 공직자는 ‘마부위침(磨斧爲針·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의 정신으로 농민도 부자 되는 영양, 교육과 문화가 있는 영양, 더불어 함께 가는 영양, 대한민국 대표 웰니스 산림관광지 영양 실현을 바탕으로 모두가 부자 되는 영양을 만들어 나가는 동시에 행정의 신뢰도와 만족도를 높여 나갈 것을 분명히 약속드린다.코로나19라는 세계적 위기 속에서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같이의 가치, 함께의 힘’을 보여주고 있는 여러분 모두 수고가 많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다.앞으로도 영양군정을 향한 군민 여러분들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20-07-23

도전하는 자만이 성공… ‘경영·봉사’ 두 토끼를 잡다

정영만 제이아그로(주) 대표의 인생을 바꾼 것은 농우바이오라는 회사에 취직을 하면서였다. 이 회사는 종자 육종 및 육성연구를 하는 회사로 우리나라에서는 이 분야에서 굴지의 회사이다. 경남 의령에서 한지협동조합을 설립해서 한지를 생산하고 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생각했던 그의 인생은 이 회사에 취직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농우바이오에서는 그를 기업체 간부 및 사회적 리더를 양성하는 일본의 후즈노미야 양성학교에 유학을 보내 주었다. 그에게서 가능성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37살 때 농우바이오의 총괄본부장으로 취임했다. 그 회사에 다니는 동안 그는 외국의 선진문물을 견학하면서 안목을 넓혔고, 후즈노미야 양성학교에서 배운 리더십을 통해 빠르게 리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그러다가 사업을 하기 위해 그 회사를 퇴직했다. 농우바이오와 겹치는 종자육종 사업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였다. 자신을 키운 회사의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회사를 차린다는 것은 그로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는 윤리였다. 그러나 농사를 떠난 일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가 그때까지 배워 온 것도 농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고민을 하던 그는 시골의 땅이 농약과 화학비료 때문에 생명을 잃어가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 땅을 되살릴 결심을 했다. 땅이 살아야 지속가능한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농업인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정부나 농업인은 생산의 극대화에만 치우쳐 땅이 죽어가는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친환경에 주목했다.식물영양물질과 특수기능성 식물 생장 및 보호물질을 공급하는 기능성 농업제제 전문기업인 제이아그로(주)는 그렇게 창업되었다. 농업 생산량에 치명적인 위해를 가하던 해충들을 농약으로 손쉽게 해결하던 처방학이 만연해 있던 기존의 풍토에서 식물을 어릴 때부터 강하고 단단하게 키워 병 발생을 줄이고 수확량까지 늘릴 수 있는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예방학이 필요했다. 화학비료와 인체에 위험한 농약을 줄이는 것은 우선 땅을 살리고 농업인을 살리는 일이었다. 화학비료는 식물을 부쩍부쩍 자라게 해주고 농약은 온갖 해충을 박멸해 주었지만 그 대신 땅과 농업인은 병들어 가고 있었다.제이아그로(주)는 미국의 스톨러사, 이탈리아의 발아그로사, 일본의 하야시사 등 세계를 대표하는 농업제제 회사들과 기술 협력관계를 맺으면서 친환경 최첨단의 제제들을 농업인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농업인들의 삶과 가까이 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비록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을 팔아야 하지만 당장 눈앞의 매출에만 신경 쓰기보다는 진정으로 농업인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하고 공급해야 하는 것은 이미 농우바이오에서 배운 철학이었다. 정 대표 역시 그때 배운 마인드로 농업인이 먼저 사는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했다. 그 결과 그의 회사는 우리나라 농업회사 중에서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농업인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미네랄이 풍부한 기능성 고급 먹거리를 생산하는 것은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수입농산물을 이겨내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실천 가능한 친환경농업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2011년 친환경 농업유공자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또한 지식경영인 대상과 대한민국사회봉사대상을 수상하면서 정 대표는 선도적인 농업전문경영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회사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정 대표는 사회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농대학생과 다문화가정을 지원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정 대표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스톨러제이 재단에서도 지원을 해왔다.“봉사가 계속되면서 제일 걱정되는 게 봉사의 진실성을 잃고 겉멋에 빠져 들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잘한다고 칭찬하면 그 멋 때문에 원래의 의미를 잃게 되거든요.”그리고 그는 회사 직원과의 나눔에 나섰다. 회사는 자신 혼자 키운 것이 아니라 직원 모두의 힘으로 키운 것이기 때문에 성과도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식이 회사를 물려받았을 때를 대비해 회사 사규를 개정했다. 농업 분야의 회사를 둘러보면 창업주의 2세가 회사를 물려받아 성공한 회사는 거의 없었다. 이것을 보면서 그는 회사 사규를 아예 개정해 버렸다.“내 자식들은 내가 제시하는 조건에 동의해야만 주식을 받을 수 있어요.”어떤 조건인지 궁금했지만 회사의 운영에 대한 문제라서 그것까지는 묻지 않았다. 다만 그의 표정으로 봐서 자식이 그 회사를 쉽게 물려받아 자기 마음대로 운영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주와 직원의 관계 또한 사규 개정을 통해 보완했다. 정 대표는 주주와 직원이 평등한 관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를 원했다. 그는 회사 안에서 작은 혁명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이면서 직원 모두의 회사여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대화 도중 그가 말한 인디언 스틱은 흥미로웠다.“인디언들은 부족회의를 할 때 스틱을 받은 1인만 발언을 할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권위주의 문화가 강하고 토론문화가 발달되지 않아서 남의 발언 도중에 끼어드는 경우가 흔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회의 때 이 인디언 스틱을 활용합니다. 인디언 스틱을 가진 사람이 발언하는 도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일체 끼어들 수가 없어요. 어떠한 불평도, 항의도, 변명도 허용되지 않는 거죠. 인디언 스틱은 말하는 사람의 권리를 보장해 주고, 다른 사람들은 듣는 훈련을 하는 거죠. 그러면 인디언 스틱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나는 이 제도가 참 좋다고 생각해요.”회사나 단체는 윗사람의 발언이 길어지고 아랫사람의 발언은 종종 중간에서 제지를 당하는데, 그러다보면 충분한 의견 개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만으로 그가 얼마나 직원들이나 단체 구성원들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정 대표는 젊은 시절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현지에서 100여 차례 이상 체류하면서 국제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그 안목은 회사 경영에서도 드러나지만 그의 사회생활 이력에서도 드러난다. 대구경찰청 외사자문위원장을 하면서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은 부모의 모국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 이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낼 것이라고 본다.정 대표는 경찰청 외사협력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을 통해 2014년 자유총연맹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자유총연맹은 건전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정치적 중립을 선언한 단체로 그는 수석부회장을 맡으면서 이 단체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2019년 12월 대구지부 회장으로 취임하게 된 정 대표는 지부의 재정적인 안정과 회원들의 고령화 탈피를 최우선 과제로 꼽으며 조직 개편을 통해 ‘다문화가정 끌어안기 사업’과 회원들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유튜브 아카데미’를 개설해 평생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이미 봉사에는 어느 정도 이력이 쌓인지라 자유총연맹 회장의 역할도 그는 무겁게 받아들인다.“통일 준비는 인적, 물적 준비가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작은 일부터 실천할 수 있어야 해요. 국가기념일이 되면 태극기 달기 캠페인부터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마중물 사업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안보와 통일에 대한 작은 일을 하려고 해요.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취미교실, 장학사업, 김장 나눔, 고추장 나눔사업 등은 굳이 국가가 아니라도 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죠. 한반도 숲 가꾸기 운동도 추진하고 있는데 남북한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 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사업의 성공과 사회단체장의 역할은 맥을 같이한다. 한 번 성공해 본 사람이 다른 성공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가 자유총연맹에 가진 애착을 보면서 머지않아 그 단체 또한 그의 회사처럼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어 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졌다. ‘도전하는 자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격언이 생각난다. /글 천영애

2020-07-22

고령군, 지역 특산물 경쟁력 강화·효과적 마케팅에 총력

농촌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은 한두 가지의 특산물을 가지고 있다. 특산물의 경쟁력 강화와 효과적인 마케팅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도 맞닿아 있기에 각 지자체들은 내세워 자랑할 만한 특산물의 적극적 육성과 브랜드 강화에 힘을 쏟는다.수박과 딸기, 감자와 멜론 등 비교적 다양한 특산물을 생산해내는 고령군 역시 이런 흐름을 잘 알고 있기에, 판로 확보와 홍보, 품질 개량과 재배 농민 지원에 노력 중이다. 여기에 더해 농업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고, 귀농인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펼쳐나가고 있다.청정한 가야산이 선물한 맑은 물과 낙동강이 만들어낸 사질양토라는 좋은 조건 아래에서 대표적 특산물이라 할 수박, 딸기, 감자, 멜론 등 우수 농산물의 경쟁력을 높이고, 마케팅에 고심하고 있는 고령군의 오늘을 점검하고 내일을 예측해본다.◆ 규격화와 품질 균일화 통해 새로운 시장 개척고령군은 농산물의 안정적 판로 확보와 산지 마케팅 경쟁력 및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 지역 농협을 이용한 통합마케팅을 추진 중이다. 고령군 APC, 다산농협 APC, 쌍림농협 APC 등 산지유통센터를 통해 규격화와 품질 균일화를 이루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마케팅 행사는 기본이다. 산지유통 기반시설 확충과 유통조직 지원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임은 물론이다.또 농협 외 공동선별을 하는 생산자 단체에도 공동선별비를 지원하고, 지게차와 선별기 등의 유통장비도 지원한다. GAP 안전성 검사와 생산단계 안전성 검사로 농산물의 안전을 확보함은 기본이다. 특산물을 돋보이게 할 포장재 디자인 개발과 택배에 적합한 포장재 제작도 지원함으로써 유통·마케팅의 효율성도 높이고 있다.그간 고령군은 고령딸기, 우곡수박, 성산멜론, 개진감자를 지역 특화품목으로 육성하기 위해 고품질 농·특산물 생산기반을 조성해왔다. 관련 사업도 여러 개 진행했다. 시설원예 철재, 연질강화필름, 보온커튼, 보온덮개, 측창개폐기, 환풍기, 내부순환기, 양액재배시설 등도 지원했다. 이는 농업 관련 시설 현대화로 이어졌다. 땅심 회복, 수정벌 지원으로 친환경 농산물 재배 환경도 마련됐다. 더불어 각 품목별 기술대학 운영과 컨설팅으로 재배기술도 향상됐다.생산 과잉과 경쟁 심화는 농산물의 가격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농산물 소비 패턴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고령군은 단순히 고품질 농산물 생산만으로는 농가 소득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에 유통과 마케팅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그 실질적인 예가 농·특산물 홍보 및 직거래 활성화, 박람회와 축제 참가, 우곡수박·개진감자 직판장 운영 등이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고령 특산물이 되려면...특산물 브랜드 강화를 위해 고령군은 해외시장 개척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수출단지를 육성하고, 물류비와 해외 판촉행사 지원 등을 통해 러시아, 싱가포르, 미국, 대만,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특산물 수출을 확대하고 있는 것. 앞으로는 더 많은 나라 사람들이 고령에서 재배된 수박과 딸기, 멜론과 감자를 맛보게 될 전망이다.최근 5년 사이 재배 면적이 2배 이상 늘어나 고령 농가의 주요 소득원으로 자리 잡은 양파와 마늘의 유통구조 개선에도 힘을 쏟고 있다. 2021년까지 각 지역농협마다 10억 원 이상이 투자돼 산지유통시설이 들어설 예정.농산물 소비시장이 재래시장과 대형 마트 위주에서 편의점, 온라인, TV홈쇼핑으로 바뀌고 있다. 젊은 소비자의 취향이 가격보다는 안전·품질·편의성 위주로 변화하는 중이다. 고령군은 이러한 시장 변화의 흐름에 발맞추는 대응책 마련에도 고심하고 있다.현재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5% 이상이다. 이에 유튜브 등 SNS를 통한 마케팅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를 감안해 고령군은 ‘고령몰’을 통한 농산물 판매 증대와 SNS 홍보 강화에도 주력할 방침이다.유튜브는 지역의 우수 농산물을 홍보하고, 인터넷 쇼핑과의 연계가 용이한 효율적인 매체가 될 수 있다는 게 고령군의 판단이다. 소비자의 접근성을 높여 영상 시청과 구매가 즉각 연결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앞으로도 반가공, 소포장 선호 등 신세대 소비자의 요구를 충족시킬 상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농가 교육과 조직화, APC시설 등 인프라 확충에 힘쓰고, 차별화된 마케팅으로 SNS를 통한 판로 확보에 적극 나서겠다”는 것이 고령군의 계획이다.지속가능한 미래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후변화 대응 작물 개발로 미래농업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하다. 고령군은 이미 ICT 스마트 팜 생산시설 현대화와 6차 산업기반 조성으로 지역 농업의 활로 구축과 새로운 농가소득원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이를 위해 지역 특화품목 생산시설 개선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스마트팜 생산시설 현대화 사업, 새로운 소득 작목 생산과 노동력 절감시설 지원사업도 추진 중이다.또한 고품질 식량작물 기술 보급, 미생물 배양실 등 과학영농기반 구축,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ICT 융복합 스마트팜 시설 보급, 수경재배시설 현대화, 시설하우스 에너지 효율화 지원 등은 농업 경쟁력 강화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낼 기반이 되고 있다.◆ 귀농인들의 안정적인 정착에 도움 주는 정책들고령군은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대가야농업기술대학도 운영하고 있다. 지역 농업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전문 농업경영인을 양성하는 과정을 개설해 새로운 농업기술 습득, 생산과 가공의 효율성 강화, 유통·체험·관광·판매·서비스 등 6차 산업 전반을 교육하고 있는 중이다.또 농가경영 진단·분석과 처방에 따른 맞춤형 교육 컨설팅을 통해 생리 장애, 병해충 방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알려줌으로써 새로운 소득원 개발에도 진력하고 있다.고령군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조선 영조 때 현지 답사를 기초로 하여 저술한 지리서)에 소개될 만큼 ‘천혜의 조건을 갖춘 농촌’으로 알려졌다. 이를 증명하듯 예비 귀농 희망자 영농기초 교육과 재배기술 멘토·멘티 운영도 진행 중이다. 이런 노력은 귀농인들의 안정적 정착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그렇기에 고령에 뿌리를 내린 귀농인연합회 회원들은 주택 수리, 도색, LED 전등 교체, 독거노인 사랑나눔 봉사 등 재능기부로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최근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2020년 일반농산어촌개발 공모사업에 고령군 2개 지구(금천지구·우곡면)가 선정돼 사업비 80억 원도 확보했다. 이는 고령군의 기초생활 인프라 확충과 경관개선사업 등에 투자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안림지구 배수개선사업’은 여름철 풍수해로부터 군민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고령군은 “농·특산물 경쟁력 강화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와 효율적 농가 지원, 농업 환경의 개선을 위한 노력은 앞으로도 멈춤 없이 지속될 것”이라고 약속했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07-22

후회 없이 달려본 ‘길의 끝’… 여행의 깊이를 찾아가다

◇ 다시 시베리아를 달리다모스크바를 떠나 처음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오토바이든 차든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떠났던 이들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오지 않는다. 시베리아를 지나는 고생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가장 크고, 그 시간 동안 유럽에서 머무르며 여행하는 게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처음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계획했을 때도 여느 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최서단 포르투갈 호카곶까지 갔다가 스페인에서 오토바이를 배로 보내고 여유롭게 파리나 베를린 같은 유럽의 대도시에 가서 지내다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었다. 왕복한다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2018년 계획했던 여행이 러시아 월드컵으로 틀어지고(아예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편을 예약할 수 없었다.) 2019년 다시 떠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왕 다녀오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다녀오자고 마음먹게 되었다. 다시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건 힘들 테니 이번 기회에 후회 없이 달려보자 싶었다.처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할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담담했다. 느긋하게 무리하지 않고 달리며 처음 달릴 때 놓쳤던 걸 자세히 보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다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문제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때까지 8월 내내 러시아 곳곳은 이상기후로 몸살을 알았다. 유럽의 폭염을 벗어나니 시베리아에선 폭우가 자주 쏟아졌다.그리고 10년이 된 로시가 계속 문제를 일으켰다. 그동안 관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지만 나이와 짧은 기간 동안 달린 거리를 생각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일 수도. 모스크바에서 2천500㎞쯤 달려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했을 때는 그동안 예상치 못했던 문제들이 튀어나왔다. 진동을 흡수하는 뒷바퀴 고무 댐퍼와 베어링, 체인, 스프라켓 모두 교체해야 했다.노보시비르스크의 수리점을 찾아갔으나 당장 부품이 없어 일주일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만 듣고 고민에 빠졌다. 부품이 오길 기다렸다간 9월이 되기 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750㎞ 떨어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부품이 있다는 이야길 듣고 무조건 짐을 챙겨 출발했다. 다행인 것은 크라스노야르스크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 편에 있다는 것.◇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멈춰서다결국 크라스노야르스크 가는 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뒷바퀴 휠 베어링이 마모되어 파편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시베리아 허허벌판에서 또다시 난감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직전 미끄러져 오토바이가 크게 부서진 이후 또다시 큰 난관에 부딪힌 셈. 어떻게든 달려보려 했지만 이대로 주행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결국 오토바이는 길가에 세워놓고 타박타박 걸어서 근처 카페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영어도 통하지 않고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어서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 보여주었다. 오토바이가 고장 나서 싣고 갈 트럭이 필요하다고. 문자 이전에 그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런 상황에서 실감할 줄이야.카페 종업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앞 테이블에서 명함을 찾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가장 가까운 도시에 있는 견인트럭 기사에게 연락하는 중이었다. 가장 가까운 곳이 10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 캐메로보였다. 견인트럭이 오는 데만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견인비를 흥정하고(1500루블) 캐메로보까지 가는 데만 또 3시간(오토바이를 싣고선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캐메로보에 BMW 오토바이를 고칠 수 있는 곳을 찾느라 또 몇 시간을 보냈다. 정비소를 몇 곳이나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견인트럭 기사 아저씨(안타깝게도 통성명했으나 기억하지 못한다)가 아니었다면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가는 길이 험난했을 것이다. 예정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지 못했을 수도.그가 여러 곳 수소문해서 오토바이를 내려준 곳은 ‘FBR모토’였다. 여러 곳이 문제였지만 뒷바퀴 휠 베어링이 가장 큰 문제였다. 3개의 베어링이 들어가는데 2개는 규격품이 있지만 1개가 모자랐다. 미캐닉 빅토르 씨가 근처 자동차 수리점에 가서 딱 맞는 베어링을 찾아와선 나에게 “럭키 가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을 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난관에 빠질 때마다 항상 선한 사람들이 나타나 해결해주는 건 나의 복이다.국경을 넘어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마다 항상 그랬다. 단 한 번도 물건을 도둑맞은 적도 없고 누구에게 속은 적도 없다.◇ 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다‘FBR모토’에서 말썽이 생길만한 모든 부품을 교체하고 난 뒤 캐메로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진 날씨 외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온전히 달리는 것에만 집중했다.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를 약 3천㎞ 남겨둔 치타에 도착해서 느긋하게 여행하겠다는 나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일주일에 딱 한 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떠나는 배가 있는데 추석을 한 주 앞두고 떠나는 배가 취소되었다는 통관대행사의 메일을 받았다. 그 전에 떠나는 배를 타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하고 그 다음에 떠나는 배는 추석 귀경 행렬과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정이었다.푸틴 대통령이 참석하고 여러 국가의 고위 관계자가 참여하는 동방경제포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탓이었다. 딱 5일을 남겨놓고 치타에 도착했으니 통관대행회사에 오토바이를 입고하는 날을 따지면 무슨 일이 있어도 4일 안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야만 했다. 하루 700㎞는 무조건 달려야만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 4일 동안 거의 내내 비를 맞은 건 여행의 피날레 치곤 꽤나 스릴 있고 잔인했다.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니 마지막 힘까지 탈탈 털어서 쓰고 쭉정이만 남은 기분이었다. 처음 침대에 누운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종일 잠만 잤다. 숙소 근처 한국 영사관이 있어 지날 때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날이 기억났다. 면허증 번역 공증서를 받으러 갔을 때 영사님이 직접 나와서 “안전하게 다녀오라” 당부했었다. 2018년 떠났던 여행자가 횡단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이런저런 사고가 다반사로 일어나니까. 지난 100여 일이 꼭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 같다. 다시 출발하기 위해 숙소에서 쉬고 있는 기분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출발할 때 들떴던 감정은 사라졌고, 시원하고 섭섭한 마음과 마냥 헤벌쭉해서 달리다 (통장 잔고를 포함해) 탈탈 털려버린 것들을 어떻게 채워 넣나 하는 걱정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리 걱정한다고 뾰족한 수도 없으니 언제나처럼 내일 걱정은 내일, 모레 걱정은 모레 하는 걸로.아직 집에 돌아갈 일이 남았지만 건강하게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다. 100일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달린 거리가 약 3만8천㎞, 그야말로 ‘주마간산’이나 마찬가지인 여행이었다. 이런 여행에서 깊이를 찾는 건 무리가 당연하다. 처음 세웠던 계획은 어느 도시에 머무를 때마다 서점과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삶의 안목을 높이고 싶었다. 하지만 먹고, 자고, 달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빠듯한 경비를 아껴 쓰느라 무엇이든 마음껏 해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이제 불혹이 되었을 때 세웠던 1년 동안 여행자로 살겠다는 꿈(칭다오에서 싱가포르까지 7개월, 일본에서 한 달, 유라시아 횡단 4개월)을 이뤘으니 돌아가면 엉덩이 들썩대지 말고 뭐든 해야겠구나 싶다. 그런데 왜 시간은 언제나 돌아보기 무섭게 빠르게 흐르는지 모르겠다.     /조경국

2020-07-21

‘不事二君’의 절개…‘사육신’ 단계 하위지의 충절

사람이 숭고한 것은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신념이 자신보다 국가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라면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이다. 단계 하위지(1412~1456)는 사육신중의 한 명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최고의 가치인 불사이군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모든 가치기준은 시대마다 달라 그 시대상황을 우선 고려하고 지금의 시대와 견주어야 된다.그리고 멸문지하를 당했는데 후손은 어떻게 이어졌는가. 사육신 중 순천박씨 박팽년과 진주 하씨 하위지만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후손이 이어진다. 그 하위지를 모신 창렬서원은 후손으로 명맥을 이어온 종택 옆으로 옮겨왔다.#. 사육신과 단계 하위지“낳았느냐.”“낳았느냐”“낳았느냐.”이렇게 하늘에서 세 번 묻는 소리가 난 뒤 사육신의 대명사 성삼문(1418~1456)을 낳아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지만, 하위지를 낳자 집 앞의 계곡물이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흘렀다 한다. 피비린내 나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하위지는 자신의 호를 예사롭지 않은 붉은 계곡 단계(丹溪)로 했다. 지금 중국의 단동(丹東)은 옛 안동(安東)인데 마오쩌뚱(毛澤東)이 공산화 하면서 동쪽을 붉게 물들인다고 단동으로 바꾼 것이다.세종(1397~1450)도 20살(1418)에 왕이 되어 32년 동안 재위(1418~1450)하면서 우리 민족에 농업, 과학, 특히 한글창제 등의 빛나는 업적을 남긴다. 그리고 자신같이 학문은 좋아했지만, 병약한 첫째 아들 문종(1414~1452)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문종은 재위(1450~1452) 2년 만에 죽는데 불안한 마음에 어린 세자를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와 황보인 등에게 잘 보필하라고 부탁하고,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에게도 당부한다.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단종(1441~1457)은 불과 1년(1453)만에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계유정란) 영의정이 되어 실권을 쥐고, 동생 안평대군도 죽여 버려 조카 단종은 형식적인 왕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1455년 단종을 보필했던 중신들을 제거한 한명희, 권람 등의 강요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상왕이 된다. 특히 옥쇄를 세조에게 받칠 때 성삼문은 옥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자 세조(1417~1468)의 눈과 마음에 찍힌다.이때 집현전 학사들과 불사이군으로 무장된 신념에 가득 찬 뜻있는 신하들은 울분을 토하며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다. 거사 날을 미루자 함께하기로 했던 김질(1422~1478)이 겁에 질려 장인 정창손에게 밀고하여 주모자 17명의 거사주역들이 잡히고 사육신은 능지처참된다.하위지는 형 강지와 함께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공부에 몰두하여 1438년에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에 근무했으나 병약하여 사직을 반복한다, 그때마다 세종은 경상감사에게 그를 보살피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그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해버린다.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되어 그를 간곡히 불러 일단 부름에 응하여 예조참판에 승진한다. 그러면서 마음은 단종에 가 있어 세조가 주는 녹봉을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여 국문을 받을 때 세조가 재주를 아껴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하겠다 하자 “이미 반역의 죄명을 씌웠는데 죽이면 되지 무엇을 더 물어요.” 이처럼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성삼문은 불에 달군 쇠로 맨살을 지지는 작형(灼刑)을 당했고 유응부는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복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서생(선비)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중국사신 초청 연회 날 칼로 거사하려 할 때 그대들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획이 아니오’하더니 오늘의 화를 당했구나.” 일갈하면서 세조에게 “이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달군 쇠를 배 밑에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집어던지고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하위지는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가족은 연좌제에 걸려 쑥밭이 되어버린다. 조선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는데 모반죄나 대역죄는 능지처참하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16세 이상이면 목매 달아 죽이고, 15세 이하이거나 어머니, 딸, 아내, 할아버지, 손자, 형제, 자매, 며느리는 모반죄를 고발하여 공을 세운 자의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한다고 되어있다.고향에 있던 16살 하호, 14살 하박 두 아들이 사형을 받게 되었을 때 금부도사가 차마 죽일 수 없어 살아날 방법을 알려주자 어린 둘째 하박은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하고는 태연히 죽었다 한다. 형 강지, 동생 가지와 소지, 두 아들이 모두 죽어 절손되었다. 그러나 10세 미만이었던 미성년자 하분(형 강지의 아들), 하귀동(동생 히기지의 아들), 조카 하포는 살아남았다. 숙종 때 복권되면서 왕명으로 하귀동은 하원으로 개명하여 아들 자징(自澄 소지의 손자)으로 대를 잇게 했다.#. 초라한 종택과 쓸쓸한 창렬서원아침에 출발하여 안동 서후면 교리의 창렬서원에 도착했다. 송암 권호문의 종택과 창성서원이 옆 마을에 있다. 배산임수의 아늑한 전형적인 마을이 아니라 길옆 두어 채 집 뒤에 가파르고 경사진 산이 가난의 때가 졸졸 흐르는 외딴곳이다. 지난번에도 왔지만 문이 잠겨 있어 사진 찍기도 뭐하여 그냥 돌아섰던 곳이다. 집 앞에서 풀 뽑는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종부를 만났다. 서원보고 사진 좀 찍으려 왔다니까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경주에서 왔다 하면서 수오재 고택에 산다니까 어렴풋이 경북의 고택 종부들 특강할 때 나에게 강의 듣고 뒷 풀이 술 잔 나눈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종택 옆에 비탈진 서원입구에 높은 유의문(由義門)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충신의 위폐를 모신 서원이라고 이해하면서 들어갔다. 대문을 열어주시고 음료수를 갖고 오신다. 한사코 거절해도 권하여 받았다. 다리 수술하여 불편한 몸으로 돌아서면 자라는 풀과의 전쟁이야기, 사육신 하위지 선조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는 거사를 함께 하기로 한 안동김씨 김질이 고변하였다고 지금도 종손은 안동김씨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신단다. 세조가 김질을 불러 대질 신문하자 성삼문은 “이놈, 김질아! 너는 글깨나 읽었다는 선비 놈이 하루도 못되어 일신의 영화만을 노려 친구를 배반하느냐? 이 더러운 놈 같으니!”했던 김질이었다.종부에게 선조는 선산이 고향인데 어떤 연유로 안동에 정착하였는지 여쭤보니 하위지의 동생 아내(하위지의 제수)가 봉화 금씨라 봉화에 왔다가 안동으로 오게 되었단다. 서원은 비탈진 협소한 공간이라 경사가 급했다. 좋은 목재로 잘 지은 서원은 아니다 보니 건물 그 자체에서 주는 품격이나 권위는 없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다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온 가족이 몰살하는 비극을 당하고 이름만 충신으로 남게 된 서원이다. 지금의 종손은 건축업을 하여 1년에 관급공사 7개 정도 따다가 생활에 어려움은 없다하니 다행이다.생육신 남효온의 추강집 ‘육신전’에 하위지 인품을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이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했으니 침착 과묵한 엘리트 청백리였다.이 창렬서원은 1804년(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위폐를 봉안하고 1809년(순조 9년)에 안동 서후면 송야리에 창렬서원을 창건하고 그 뒤 사람의 중의로 서후면 이개리로 이전했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89년 서후면 교리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능지처참당하고 길가에 버려진 사육신들의 시신을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 한다. 민간에서만 전해오다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679년(숙종5년)에 왕이 노량에 군사검열을 가는 길에 육신묘의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을 위한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1691년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원래 4신(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만 있다 하위지, 유성원과 군사동원의 총책임자 김문기가 추가로 인정되어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死七臣)이다.뒷산에서 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있는 듯한 창렬서원과 송야천 위로 중앙선 고속화철도의 흉물스러운 다리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충신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가?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21

동탑·서탑 나란히 마주서 나라를 지키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생의 허무와 쓸쓸함이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밀어닥치는 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고,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혼자서 고요 속으로 침잠하고 싶은 날은 누구에게나 온다.그럴 때 당신에게 잠시잠깐이나마 위로와 편안함을 선물할 여행지를 알고 있다.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35km쯤을 달리면 닿을 수 있는 양북면 감은사지(感恩寺址).지척에서 바다가 출렁이는 이 ‘오래된 절터’는 주요 유물이 출토된 거대한 석탑과 금당(절의 본당)·강당(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학습장)터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청아한 소리로 우는 여러 마리의 새가 몰려드는 감은사지 뒤편 산속. 바람이 일으키는 파동에 따라 술렁이는 대나무와 소나무의 합창은 번잡한 도시에선 경험할 수 없는 평화로움으로 우리를 이끈다.장마와 폭염을 앞둔 7월 초 한가한 평일 오후. 감은사지를 찾아 2개의 석탑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고, 야트막한 산 아래 그늘에 앉아 1천300년 전 신라 사람들의 숨소리를 느껴봤다.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 한 구석이 트이는 기분이었다.‘서라벌의 숨겨진 보물’이라 불러도 좋을 감은사지는 주위 풍경이 기막힐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 있었던 곳이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감은사가 세워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동해안에 위치하고 신문왕 2년(682년)에 그의 아버지 문무대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하였다. 부근 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빈번히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호국사찰을 조영하던 중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이 승려 지의(知義)에게 ‘죽은 후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신문왕은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는 감은사 금당1950년대 감은사지 일대를 찍은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다. 1천년 가까이 지속된 천년왕국 신라. 그중에서도 삼국통일을 이끈 문무왕과 통일왕국의 중앙집권적 시스템을 축조한 신문왕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새겨진 그곳에 살던 70년 전 경주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어떤 걸 느꼈을까?자신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공간 옆에 자리한 역사의 현장. 매일 밤마다 신라를 지키는 용이 됐다는 문무왕과 아버지를 위해 용이 쉴만한 거대한 지하공간을 절 아래 만들었다는 신문왕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을지.그리고 2020년 오늘. 기자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이어폰을 통해 바그너(Richard Wagner)나 쇼스타코비치(Dmitrii Shostakovich)의 장엄한 음악을 들으며 감은사지에서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환희와 환멸을 두서없이 떠올린다.단조롭고 무심한 일상에 지친 이들에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선물 같은 여행지’가 돼준 감은사지. 여기서 본격적인 발굴·조사 작업이 시작된 건 60년 전쯤이다. ‘신라의 유적과 유물’은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간다.“1959년 시작한 감은사의 발굴은 우리나라 연구자들에 의한 최초의 사지(寺址) 발굴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3차에 걸친 발굴과 조사를 통해 유물을 수습하고 사지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작은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남아시아 힌두사원이나 페르시아 이슬람 유적처럼 입이 딱 벌어질만한 웅장한 규모도 아닌 감은사지. 하지만, 석탑을 포함한 유적·유물의 미학적 완성도는 다른 어떤 사찰에서 발견된 것들보다 높다는 게 역사학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2개의 탑이 마주 선 사찰인 감은사는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됐다는 것,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중회랑을 두었다는 것 등이 특이한 점이다. 2층으로 기단을 쌓고 기단의 각 면 중앙에 돌계단을 놓은 감은사지 금당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지면과 건물 사이에 꽤나 높고 넓은 공간이 만들어져 있는 것.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건축 양식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부합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비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흥미롭다.◆ 호국사찰인 동시에 예술적 사찰이었던 감은사지인의 자동차를 타고 화장된 문무왕의 뼈가 묻혔다는 봉길리 앞바다 수중릉을 만나고, 감은사지를 돌아보던 날. 인적 드문 그곳에서 1천300년 전 신라를 상상했다. 아버지의 애국심과 아들의 효심이 만들어낸 14세기 전 유적들. 아득한 시간이 부유물처럼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어디선가 돌탑을 깎고 다듬는 석공의 가쁜 호흡과 금당 서까래를 올리는 목공들의 기운 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절터에 돋아난 키 작은 풀들은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감은사가 만들어지던 그 시절과 다름없이. 들뜬 여행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히며.사실 감은사는 문무왕의 호국의지가 담긴 절이면서, 빼어난 불교 유물이 발견된 ‘예술적 사찰’이기도 하다.동국대 한정호의 논문 ‘감은사지 삼층석탑 창건 과정과 의장계획(意匠計劃)에 대한 연구’의 첫머리를 아래 옮긴다.“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문무왕과 신문왕 시기에 걸쳐 창건된 감은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감은사가 창건되던 시기는 삼국통일을 통해 한반도를 장악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흡수·통합하여 전제왕권을 강화해 나가던 시기로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통일국가의 위상을 표방하기 위한 왕실 주도의 조영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다. 이와 함께 신라의 불교미술에서도 전대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양식이 대두되는 일대의 변혁기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앞서 말한 것처럼 1959년 감은사지에 대한 발굴과 연구가 시작됐다. 그즈음 서쪽 삼층석탑을 해체·수리하던 사람들은 세상이 깜짝 놀랄 발견을 한다.신라인들의 예술적 감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함과 사리병 등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가 나온 것이다. 이것들은 1963년 보물 제366호로 지정된다.1996년엔 동쪽 삼층석탑의 해체·조사 과정에서 서쪽 석탑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사리장엄구가 발굴 팀에 의해 수습된다. 또 한 번의 ‘의미 있고 유쾌한 발견’이었다. 이와 관련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8권 ‘신라의 건축과 공예’에선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예술과 사리장엄구에 관한 서술을 확인할 수 있다.“삼국통일 전쟁이 끝난 후 통일신라에서는 안정된 문화가 발달했으며,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형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통일신라시대의 사리장엄구 역시 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 경에 가장 화려한 양식으로 구현됐다. 이 시기의 사리장엄구는 고신라의 문화적 전통과 새로이 전래된 당나라 문화의 영향이 결합돼 새롭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다.”◆ 삶, 예측할 수 없기에 희망도 있는 게 아닐지‘통일신라시대 초반의 뛰어나고 정교한 금속공예 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고 평가받는 감은사지 사리장엄구를 바로 눈앞에서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61년 전 그걸 처음으로 발견한 조사원의 심장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뛰었을까? 그리고, 1천300년 전 신라의 공예가는 자신의 예술품이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후손들과 만나게 될 것을 짐작이라도 했을까?우리 또한 까마득한 과거에 존재했던 신라의 예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하는 인간은 어느 시대, 어느 땅에도 없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누구도 앞날을 알 수 없기에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닐지.대숲과 솔숲에서 풍겨오는 향기 사이로 걷는 감은사지에서의 산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생각들이 허망함과 외로움을 떨쳐낼 작은 힘이 돼주니 고마운 일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7-16

대구 아파트 시장, 뛰어난 입지 ‘똘똘한 한 채’ 선호현상 뚜렷

지난해부터 대구 부동산 시장의 특징은 정부의 강력한 부동산 규제 탓으로 양극화 현상과 ‘똘똘한 한 채’에 대한 선호현상이 뚜렷해졌다.양극화 현상은 달구벌대로 라인의 브랜드 대단지 아파트는 조기 완판을 넘어 세자릿수의 평균 청약경쟁률을 기록하는 반면 도심 외곽지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점이다.올 상반기 분양한 △빌리브 스카이(134.96대 1) △청라힐스 자이(141.40대 1)△대구용산자이(114.62대 1) 등이 대표적이다.이는 대구지역 최고의 부동산 선호지역인 수성구가 투기과열지구라는 강력한 규제로 묶여 나타난 현상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그동안 각종 규제로 건설사들이 수성구에 공급을 기피하다보니 달구벌대로 인근의 중구에 그동안 공급물량이 집중됐다가 중구 역시 고분양가 관리지역이라는 규제를 받아 달서구 죽전역 인근까지 확대됐다.하지만, 오는 8월로 국토교통부가 예고한 분양권 전매 강화조치를 담은 시행령이 개정되면 대구 전역이 입주시까지 전매가 금지되기 때문에 수성구의 규제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집값 안정을 위한 정부 대책의 강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질 것을 우려한 실수요자들이 ‘똘똘한 한 채’만 보유하는 전략으로, 이왕이면 뛰어난 입지에 최고의 브랜드와 대단지를 선호하는 현상이 분양시장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해링턴 플레이스 동대구’신암뉴타운 핵심 입지 초품아·공세권 ‘동시’도시철도 연결로 예정 등 교통호재도 매력효성중공업(주)은 18일 ‘해링턴 플레이스 동대구’견본주택을 오픈하고 본격적인 분양에 돌입할 예정이다.코로나19 예방과 확산 방지 차원에서 오프라인 견본주택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되며, 사전예약 신청은 단지 홈페이지를 통해 가능하고 사이버 모델하우스도 운영된다. 이 단지는 대구시 동구 신암6구역 재개발지역으로 동구 신암북로 53-36 일원에 지하 2층∼지상 15층, 총 1천265가구 규모이며 이중 59㎡ 49가구, 74㎡A 138가구, 74㎡B 27가구, 84㎡A 296가구, 84㎡B 181가구, 84㎡C 49가구 등 모두 740가구가 일반분양 된다.오는 28일 특별공급 청약접수를 시작으로 오는 29일 1순위 청약, 오는 8월 5일 당첨자발표, 오는 5월 17일부터 5일간 정당계약을 실시한다.해링턴 플레이스 동대구는 동대구생활권에다 신흥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는 신암뉴타운핵심 입지에 조성되고 동부초를 품고 바로 옆에는 신암공원과 KNU 센트럴파크가 인접해 초품아·공세권을 동시에 지닌 단지로 조성돼 주목된다.단지는 KTX동대구역, 대구 1호선, 동대구터미널 등이 있는 동대구역복합환승센터가 가깝고, 대구도시철도 4호선(예정), 동대구로∼신암로 연결도로 확장(예정) 등 교통호재도 이어지고 있다.또 신세계백화점, 이마트, 평화시장, 대구파티마병원이 인접해 생활인프라도 풍부하다는 평가다.바닥분수를 포함한 갤러리정원을 비롯한 석가산이 구성된 진경산수정원, 힐링녹음정원, 솔숲정원, 대왕참나무정원, 향기정원 등 6개의 정원이 마련되고 어린이 물놀이터와 어린이 모래놀이터, 왕벚나무길, 느티나무길 등 특화 조경 설계가 도입된다.커뮤니티 시설도 휘트니스, 사우나, 독서실, 도서관, 다목적체육관, 당구장, 탁구장, 골프연습장, 키즈카페 등이 구성되며 경로당과 어린이집도 조성된다.분양관계자는 “해링턴 플레이스 동대구 단지는 신암뉴타운 핵심입지 위치하고, 전매 금지 규제 강화 전 마지막 기회라는 점에서 많은 문의와 관심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견본주택은 동구 동대구로 599에 마련된다.‘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웨스트’신암재정비 촉진지구 첫번째 분양단지3.3㎡ 당 1천400만원대 마지막 아파트17일 모델하우스를 공개하는 한진중공업 건설부문의 ‘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웨스트’가 전작인 ‘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이스트’분양기록을 넘어설지에 이목이 쏠린다.지난 5월 분양한 ‘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이스트’는 오픈 한 달여만인 지난 1일자로 100% 분양을 완료했다.‘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이스트’의 이 같은 조기완판 실적은 84㎡ 기준 확장비를 포함해도 4억원대의 착한 분양가로 소비자의 구매욕구를 일으켰고 뛰어난 상품성과 단지 쾌적성, 도시철도 1호선 동구청역 역세권 입지도 소비자들의 관심을 불렀다는 후문이다.‘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웨스트’는 대구 동구 신암동 680-27번지에 대지면적 5만6천686.6㎡, 지하 2층, 지상 15층 20개동 규모이며 전체 1천122가구 중 일반분양은 △51㎡ 10가구 △59㎡ 193가구 △76㎡ 293가구 △84㎡A 204가구 △112㎡ 1가구 등 모두 701가구다. 이 단지는 ‘신암재정비 촉진지구’의 첫번째 분양단지로 이름을 올리면서 미래가치를 선점하려는 소비자들이 대거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이는 착한 분양가와 높은 상품성, 단지를 둘러싼 4면 모두가 공원으로 조성되는 쾌적성으로 인해 ‘가성비 좋은 숲세권 대단지’라는 인식 때문이다.‘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웨스트’의 경우 3.3㎡당 평균 1천495만원의 착한 분양가를 적용해 사실상 인근지역 1천400만원대의 마지막 아파트에 속한다.한진중공업은 ‘동대구 해모로 스퀘어 웨스트’단지에 현 시점에서 가장 진화된 미세먼지 통합관리시스템인‘H-CATS’(Haemoro Clean Air Total System)를 도입하기로 했다.한진중공업의 분양관계자는 “이스트 935가구와 웨스트 1천122가구를 합치면 2천57가구의 브랜드 대단지인 해모로 타운이 동대구권에 조성된다” 며 “착한 가격에 뛰어난 품질의 상품을 공급해 ‘해모로’ 브랜드를 아껴주시는 지역민에게 보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델하우스는 동구 동북로 320에 위치한다.‘죽전역 태왕아너스’와룡로 알짜단지 일대 지상 41층 306가구서대구권 개발 호재 노리는 수요자들 ‘주목’죽전네거리와 본리네거리를 잇는 프리미엄 주거라인인 와룡로의 중심에 ‘죽전역 태왕아너스’가 오는 17일 모델하우스를 오픈하고 본격적인 분양에 나선다.‘죽전역 태왕아너스’는 미래비전과 주거가치가 높은 와룡로의 알짜단지에 속하는 달서구 본리동 1-4번지 일원으로 지하 4층∼지상 41층 규모로 84㎡A 162가구, 84㎡B 68가구와 오피스텔 84㎡OA 38실, 84㎡OB 38실 등 모두 306가구로 구성된다.정부의 전매제한 확대시행으로 7월 중 분양물량이 쏟아지는 가운데 서대구권 개발 호재로 인해 가치상승을 노리는 수요자들이 주목할 만한 단지다.대구시 신청사가 구 두류정수장 부지로 이전 확정되고 서대구 교통과 물류의 핵심이 될 서대구KTX역사가 이르면 내년 9월 개통을 앞두고 있다.대구도시철도 2호선 죽전역이 도보 거리에 있고 달구벌대로, 와룡로, 장기로와 남대구IC, 성서IC와 가까워 시내외 사통팔달을 자랑한다.도보 거리에 덕인초를 비롯한 새본리중, 효성중·여고, 대건중·고 등 교육환경도 우수하며 이마트 감삼점을 도보로 이용할 수 있고 홈플러스 성서점도 가까이 있으며 학산공원과 두류공원도 인접해 쾌적한 생활환경을 누릴 수 있다.‘죽전역 태왕아너스’는 특화된 평면과 시스템도 수요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말로 명령하거나, 스마트폰앱으로 움직이는 KT AI아파트 시스템을 도입해 스마트아파트를 실현했으며 미세먼지 등 다양한 오염물질을 차단해 주는 청정시스템을 도입했다. 각 가구 현관에 설치되는 에어샤워 청정기는 부유 미세먼지를 헤파필터로 제거하고 브러쉬 청정기는 흡착된 미세먼지를 흡입제거하여 오염된 먼지가 실내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해 주는 시스템이다.‘죽전역 태왕아너스’는 6개월 후 전매가 가능하며 1차 계약금 1천만원 정액제, 중도금 무이자, 발코니확장 무상 등의 분양조건도 수요자들에게 환영받을 것으로 보여 높은 청약률이 예상된다.모델하우스는 오픈 3일간 사전예약 방문제로 운영되며 오는 21일 특별공급을 시작으로 오는 22일 1순위, 오는 23일 2순위 청약을 접수하며 오는 29일 당첨자발표한다. 죽전역 태왕아너스 홈페이지는 http://jukjeon-honors.com. 모델하우스는 대구 달서구 달구벌대로 1390에 위치한다.‘동대구 2차 비스타동원’동대구 프리미엄에 수성구 교육까지 누려50㎡ 초미니 평형 포함… 신혼부부 등 관심8월 전매제한을 앞두고 대구지역에 여러 단지가 앞다투어 분양을 예고하는 가운데, 검증된 동대구 프리미엄에 수성구 교육까지 누릴 수 있는 ‘동대구 2차 비스타동원’이 오는 17일 오픈한다.‘동대구 2차 비스타동원’은 동구 효목동 637-1번지 일원에 지하 3층∼지상 15층, 12개동에 전용면적 50㎡ 86가구, 59㎡ 111가구, 76㎡ 218가구, 84㎡ 212가구 등 총 627가구 중 405가구를 일반분양한다.특히 전용면적 50㎡의 초미니 아파트가 포함돼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부담과 오피스텔 대비 향후 재산가치 상승 측면과 세금부담이 아파트로 적용돼 신혼부부와 투자자에게 많은 관심을 전망이다.이 단지 바로 옆 효목초의 경우 수성구 중학교 지원 가능하기 때문에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3040 학부모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동대구 2차 비스타동원’이 들어서는 효목동은 1·2동 모두 2학교군(수성구 전역)과 자유학군(3학교군∼동구 전역, 공산동제외)에 모두 포함된다. 이에 따라 수성구에 위치한 중학교 중 지원하길 희망하는 학교와 동구에 있는 중앙중, 동촌중, 신아중, 율원중, 새론중까지 수성구·동구 더블 학군을 누릴 수 있는 지역이다.단지 인근으로 동촌유원지, 망우공원, 아양기찻길 등이 있어 사계절 내내 쾌적한 주거환경을 누리며 공연 및 전시, 문화센터 등 레저스포츠를 즐길 아양아트센터도 가깝다.지난 2018년 기획재정부 재정평가자문위원회에서 대구도시철도엑스코선 건설사업이 예비타당성 조사대상 사업에 선정됐다. 이에 엑스코선(오는 2023년 착공 예정)과 함께 구시가지를 활성화할 수 있는 도시철도 4호선 순환망도 트램 도입 및 단계별 건설방안을 검토하며 중장기 과제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전매제한 강화 전까지 비규제 지역에 해당되는 ‘동대구 2차 비스타동원’은 청약통장 가입기간이 6개월 이상 된 만19세 이상이면 가구주, 가구원 모두 청약이 가능하며 대출 등 각종 규제에서 자유롭다.‘동대구 2차 비스타동원’ 분양관계자는 “초등학교가 바로 옆에 있고 수성구 중학교 지원이 가능한 단지라는 장점이 입소문이 나면서 3040가구를 중심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특히 오는 8월부터 대구전역이 전매규제에 들어가게 돼, 막차를 타려는 수요자들이 대거 몰릴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모델하우스는 대구 동구 동대구로 418번지, M/H컨벤션 1∼2층에 마련된다. /김영태기자 piuskk@kbmaeil.com

2020-07-15

포스트 코로나 시대, 영천시민과 함께 새 100년 그린다

최기문 영천시장이 민선7기 2주년을 맞았다.코로나19 위기 상황에서 드러난 최기문 영천시장의 리더십, 결단력 있는 행정추진과 ‘대구경북 최초 전 시민 재난긴급생활비 지급’은 모든 시민과 함께 아픔을 나누며 이겨내겠다는 그의 진정성 있는 마음이었다. 이 마음이 시민 화합을 이끌어 냈다.최 시장은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며, 지역 미래를 위한 크고 굵직한 사업까지 빈틈없이 챙기며, 지역 오랜 숙원사업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다.그의 지난 2년간 주요성과와 향후 시정추진 계획을 들어 본다.-취임 2주년 민선7기 후반기를 맞은 소회는.△벌써 2년이 지났다. 2년 동안 하루하루 열심히 업무를 추진했다. 시민들이 믿고 힘을 모아줘 생각보다 더 많은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든든한 지원군이 돼준 시민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늘 ‘초심’을 잃지 않고자 시민들이 있는 곳으로 먼저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어울렸고, 허심탄회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자 각계각층과 간담회를 갖는 등 시민들의 불편 사항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앞으로도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작고 세심한 것부터 지역의 미래를 위한 크고 굵직한 사업까지 꼼꼼히 챙겨 시민이 만족하고 지역이 발전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겠다.-코로나19 대응과 지역경제회복을 위한 계획은.△영천시는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입었다. 지역경제회복과 코로나19 이후에 달라지는 생활문화와 사회적 환경에 대한 대책마련으로 생활 속 방역, 비대면 문화 생태구축, 지역경기 활성화, 기업지원과 고용정책 등 중장기적인 종합발전계획수립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코로나 사태로 기업, 소상공인, 농민 등 모든 시민들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그래서 8개 분야 총 70여개의 대책을 수립해 분야별로 경제지원 대책을 마련했다.아울러, 코로나19로 무너진 지역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각계각층과 간담회를 수시로 개최해 어려움을 진단하고 피해 극복을 위해 △중소기업 16건 68억 △소상공인 14건 65억 △대중교통분야 3건 9억5천만원 △농업분야 13건 75억 △일자리분야 9건 10억, △관광분야 8건 2천500만원 등 총 65건 227억7천500만원을 투입해 경제 살리기를 추진하고 있다.대구경북 최초 전 시민 재난긴급생활비 지급은 어려운 시기에 시민들이 봉사와 재능기부로 보여준 따듯한 마음에 대한 보답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하는 시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재난 위기 속에서 시민 화합을 이끌어낸 모범사례로 주목받고 있다.-기업 투자유치와 일자리 창출을 위한 방안은.△최근 지역 언론사의 설문 조사결과를 보면 시민이 뽑은 영천시 최우선 과제는 ‘양질의 일자리 확보’이고, 영천시 장기발전과제는 ‘기업투자유치’로 꼽혔다.2018년 8월 각계각층의 전문가로 구성된 범시민기업투자유치위원회 출범과 함께 기업투자유치에 공을 들인 결과, 총 21건 2천192억원의 투자유치협약을 이끌어 냈으며, 고용률 67.3%(2018년 기준)로 시부 전국 3위를 달성해 2019년 전국일자리대상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수상했다.특히 우량 기업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한 편리한 교통로와 저렴한 투자부지 확보를 위해 지난해 한국도로공사와 경부고속도로 금호대창 하이패스IC 설치 협약을 체결했고 현재 실시설계 중에 있다.아울러 금호~하양 간 국도 4호선 6차로 확장사업이 국토교통부 병목구간 개선사업으로 확정돼 국비 250억을 확보했다.이와 더불어 중앙동·화산면 일원의 하이테크파크지구(스타밸리)는 지난해 12월 착수식과 함께 국비 82억원을 확보했다.금호읍 일원 8만5천평 규모의 영천일반산업단지 공영개발도 추진되고 있다. 현재 산업단지계획 수립 용역 중에 있다. 이에, 투자선도지구, 대창, 고경일반산업단지까지 조성된다면 123만5천평 규모의 산업부지를 확보해 더 많은 우량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인구증가와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조성을 위한 복안은.△지역 경쟁력 확보를 위해 임기 초부터 ‘인구증가’를 시정 최우선 과제로 강조해 왔다.2018년 7월 10만186명이라는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이후, 10만이 곧 붕괴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서도 꿋꿋하게 출생률과 인구증가를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대표적으로 지난해 출산양육지원금을 대폭 확대해 첫째아 300만원, 둘째아 500만원, 셋째아 1천만원, 넷째아 1천3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예식비 지원금을 3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대폭 확대했다.분만산부인과 병원은 이달 개원할 예정이며, 현재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지상 5층 규모로 분만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 산후조리원 등이 들어서 원스톱 출산지원 시스템이 가능해진다. 13년만에 다시 분만산부인과 병원이 문을 열어 임산부 정기검진과 출산을 위해 타 지역을 오고가야하는 불편을 크게 덜어줄 것으로 예상된다.장학지원도 대폭 확대했다. 성적 우수뿐만 아니라 글로벌 특기적성(어학연수, 역사탐방 등), 복지나눔(다자녀 등), 교육지원(연구비), 관내대학생(생활비) 지원 등 보다 많은 학생들이 장학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그 수혜범위를 확대해 교육비 걱정이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지난달 19일 한국폴리텍대학 로봇캠퍼스 설립 인가 확정으로 9월 신입생 100명을 모집해 내년 3월 개교가 가능해졌다. 향후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로봇분야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신 성장 산업구조에 알맞은 인재를 양성할 것으로 기대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 영천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계획은.△코로나19 사태로 잠시 주춤했던 현안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함과 동시에 포스트 코로나 시대 도래에 대비할 대응시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일반 시민 100명으로 구성된 범시민협의체를 구성하고 포스트 코로나 중장기 종합대책 수립을 위한 연구용역도 진행하고 있어, 향후 영천시의 미래를 시민들과 함께 새롭게 그려 가는 중이다.먼저, 대구도시철도 1호선 금호연장의 제4차 국가철도망구축계획 반영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지난 5월 국무총리와의 면담 석상에서도 대구도시철도 1호선 금호연장이 영천발전에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강력하게 건의 한 바 있다. 이 덕분에 현재 국토부에서도 이에 대해 적극 검토하고 있어 향후 결과가 기대되고 있다.금호~대창~진량 지방도 4차로 확장 추진도 시급하다. 현재 왕복 2차선 도로로 인근 대창일반산업단지 조성과 영천일반산업단지 공영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금호·대창 하이패스IC 설치시기와 맞추어 추진돼야 하는 만큼 관할기관인 경북도에 신속한 사업추진을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다.또한, 영천댐 상류지역 하수도시설 설치와 성내지구 공공주택 건립, 언하동 공업지구 활성화 시범사업, 금호 신월리 2천90세대 신도시 조성, 조교동 농산물도매시장 현대화 사업, 한방마늘 산업특구 지정, 북부지역 농기계 임대사업소 추가 개소 등 영천이 살기 좋은 도시로 거듭나도록 챙겨 가겠다.코로나19로 침체된 관광분야도 경마공원 정상추진, 보현산댐 인도교(530m)와 탐방로(2.5㎞), 구 자천중학교 녹색체험터, 여행자센터, 보현리 위치한 산림생태문화체험단지 등 보현산권을 아우르는 관광벨트를 조성해 볼거리, 즐길거리를 갖춘 영천만의 독특한 관광콘텐츠로 활기를 띠게 하겠다.시민이 행복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우로지 명소화 사업과 같이 생활 속 문화공간과 생활체육 인프라를 확충하고, 코로나로 침체된 지역경기 활성화를 위해 중장기적 비전을 마련하겠다.-앞으로 각오에 대해 한 말씀 들려 달라.△취임 후 현재까지 시민들의 생활 속 불편해소에 중점을 두고 그 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드렸다.이제는 영천의 향후 10년, 100년을 내다보는 중장기적인 안목으로 영천의 미래를 그리는데 더욱 힘을 쏟고자 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 영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영천의 미래에 대해 시민들과 더욱 소통 하겠다.시민들이 피부로 느끼며 영천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지역발전에 최선을 다하겠다./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20-07-14

이상적인 공산국가를 꿈꾸었던, 그들과의 만남

◇ 네바 강에서 펼쳐지는 러시아 해군의 관함식상트 페트르부르크 거리마다 군인들로 넘쳤다. 한눈에 봐도 해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건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군인들도 많았는데, 이렇게 해군들이 많은 이유를 함께 방을 쓰는 친구가 알려주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러시아 해군 창설 기념 관함식과 축제를 하기 때문에 러시아 해군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우호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 군인들도 많은 거라고. 겨울 궁전이 바로 보이는 네바 강변에는 여러 척의 군함과 잠수함까지 도열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평일부터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북적였다. 지금 이 시기가 어쩌면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가장 붐비는 시기일지도, 금요일이 되자 빈 침대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개의 침대 중 4개는 한 가족이 차지했는데 제대로 휴가를 즐기는 듯 저녁이 되면 그날 쇼핑한 것을 펼쳐놓고 정리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온 곳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3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첼랴빈스크였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우파로 올 때 머물지 않고 그냥 스쳐왔던 곳이다. 이렇게 온 가족이 휴가를 떠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 ‘국내여행’이지만 거리로 치면 국내여행이라 할 수가 없다. 러시아 해군 창설일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왔는데 자기들은 이 날짜에 맞추기 위해 무던히 애썼다고, 나에겐 운이 좋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딱히 이런 무기들을 늘어놓은 행사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저 무심히 구경할 뿐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 마지막 날, 일요일 밤엔 내내 네바 강과 전함들을 밝히는 화려한 불꽃놀이와 사람들의 함성이 이어졌다.러시아는 오랜 세월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을 확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해 제정 러시아 시대에 블라디보스토크를 태평양 함대의 군항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과거 표토르 대제가 발트해에 접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긴 것도, 현재 러시아 본토에서 동떨어져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국경을 거쳐 가야하는 항구도시 칼리닌그라드를 포기하지 않고 발틱함대 사령부를 두고 있는 것은 어떻게든 유럽을 견제하고 바다로 나가는 길을 열어 놓기 위함이다. 아무리 넓은 영토를 가졌어도 바닷길을 포기하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선 바닷길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발틱 함대는 태평양 함대와 흑해 함대에 비해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수도 모스크바와 가장 가깝고 가장 많은 물류가 오가는 유럽 항로를 지켜야 하니 임무가 가장 막중하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오는 길에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아직 공사구간인 곳을 제외하고 아주 여유롭게 모스크바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약 800킬로미터 거리인데 만약 일반 도로로 달렸으면 예정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속도로로 달렸음에도 쉬는 시간을 포함해 12시간이 걸렸다. 쉬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는데도 모스크바 시내에 들어와 정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나라에 와서 고속도로를 달리면 왜 우리나라는 오토바이의 고속도로 통행을 막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세계에서 오토바이가 고속도로를 달릴 수 없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정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는 한국이 유일하다. 배기량이 낮은 오토바이의 경우 통행을 제한하는 경우는 있어도 지금까지 여행한 국가 중에서 고속도로를 달리지 못한 나라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자동차 전용도로도 오토바이를 달릴 수 없게 만들어 ‘통행의 자유’를 제한한다. 오토바이와 오토바이 운전자에 대한 차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렇게 고속도로를 달리다 다시 돌아가 차별 받을 걸 생각하면 참으로 아쉽다. 오토바이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건 차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오히려 가해의 위험은 자동차가 더 크다. 오토바이든 자동차든 단지 이동의 도구일 뿐 모든 건 운전자에게 달린 것이라 생각한다.모스크바부턴 이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모스크바에 며칠 머무르는 동안 K 선생님 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K 선생님은 동향인데 모스크바에서 민박과 하숙집을 운영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편안하게 지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K선생님의 민박집은 아르바뜨 거리와 가까워 관광하기도 편했다.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시내와도 먼 곳에 숙소를 잡았고, 오토바이 부품을 구하느라 시간을 많이 쓴 탓에 제대로 시내 구경을 하지도 못했다. 이제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경험했던 길을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편안해졌다.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전혀 예상할 수는 없지만 처음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와는 다르게 조바심은 내려놓고 여유롭게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추위가 오기 전, 추석 전에 돌아가려면 무조건 마음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골목길에서 만난 엥겔스처음 모스크바에 왔을 때는 서점을 한 곳도 찾아보지 못했었다. 모스크바 대학 근처에 괜찮은 서점이 여럿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가보자 싶어 명소 위주로만 돌아다녔었다. 숙소 가까이 있는 돔 서점을 찾았다. 지하 1층, 지상 2층까지 규모가 큰 서점이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교보문고 같은 느낌이었다. 카페도 있고 장난감, 문구부터 모든 분야의 책을 모두 구할 수 있는 서점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훌륭했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2층에 팔고 있는 미니북이 탐났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50년의 역사를 가진(1967년 개점)만큼 책과 관련된 행사들도 자주 열리는 듯했다. 서점을 나와 아르바뜨 거리 남쪽에 있는 톨스토이 국립 박물관과 푸쉬킨 기념관을 찾아 골목길을 걸었다. 아르바뜨 거리에 있는 헌책 노점은 책을 찾는 손님의 거의 없었다.아르바뜨 거리 남쪽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흩어져 있다. 이리저리 골목길을 헤매다 톨스토이 국립 박물관 근처에서 엥겔스의 동상을 마주했다. 그는 마르크스의 평생 동지였으며,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는 동안 물심양면 도왔다. 산업혁명 이후 피폐해진 농촌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들어온 농민들은 노동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삶은 곤궁했다. 그는 독일 출신이었으나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던 영국 맨체스터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노동자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은 부르주아 계급이었으나 사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집안도 부유했고,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핍박받는 노동자의 삶을 기록하고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노동자들의 혁명은 성공한 적이 있으나 이상적인 공산국가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정밀한 이론도 인간의 욕망이란 변수 앞에선 꼼짝없이 길을 헤맬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다.모스크바를 떠나기 전 시 외곽에 있는 푸드시티에 다녀왔다. 러시아 전역에서 생산된 과일과 야채, 각종 농산품이 모이는 거대한 시장이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견과류가 굉장히 쌌다. 구역별로 나뉜 거대한 트럭 주차장이 그대로 시장이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트럭 뒷문을 열어놓고 자신이 가지고 온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농민과 상인들의 에너지가 넘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틀렸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자신이 살던 시대를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이론이었으나 세상은 하나의 이론으로 재단하고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당장 내일 닥칠 일도 알 수 없는 세상이다. 이제 모스크바를 떠날 일만 남았다.    /조경국

2020-07-14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겨울 청량산 기행 떠나는 송암

지금은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주는 돈만 주기 때문에 건축주 자신의 혼을 담은 집이라기보다 건축가의 작품이다. 옛날 사람들은 건축주가 건축가였다. 스승 퇴계가 5채를 직접 터를 골라 지었듯이 제자들도 스승을 닮아 송암 권호문(1532~1587)도 자신의 뜻대로 집을 짓는다.문학하는 선비학자로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면서 덕망이 높아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은 1608년(선조41)에 세웠다가 1767년(영조 4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는다.#. 청운의 꿈을 접고충과 효가 절대적 가치를 차지하는 조선시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최고의 효도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가는 입신양명이었다. 양명학이 심학을 중시한다면 주자학은 현실참여가 요체인데 조선은 주자학만이 정통이어서 특히 벼슬에 나가 가문과 집안을 살리고 주위에서 선망하는 만큼 부모의 기쁨이었다. 자연을 벗 삼기 좋아하는 농암 이현보가 당상관이 되자 농암의 어머님 권씨 부인은 종들에게 선반가 환영시를 지어 부르게 할 정도로 큰 기쁨이었고 최상의 효였다. 송암도 안동 권씨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 공부하기 위한 백 그라운드도 최상이었다. 어머니는 퇴계의 큰형 이잠의 딸이라 퇴계는 외종조부가 되기에 15살에 퇴계의 문하에 들어가 임종까지 지켜본 제자로 혈연과 학연이 연결된다.송암은 어릴 때는 아버지 권육에게 글을 배워 6살 때부터 글을 읽었다. 사람은 어릴 때 습관이 평생을 간다는 말이 있듯이 송암은 책을 들고 자신의 집을 감싸고 있는 청성산의 백운암, 분암 등의 절에서 독서를 하였던 문학소년이었다. 송암도 평생을 안동에 살면서 자연과 벗 삼아 학문과 문학에 매진하는 삶을 산 것이다. 옛 선비들이 글 읽기 좋은 장소가 절이었고 80년대까지 고시원 역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는 달라 당시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절에 가면 최고의 대우를 받고 스님을 종 부리듯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송암도 주위의 봉정사, 청량사, 도산서원, 소수서원 등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해갔다.18살(1949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살(1561년)에 어머님의 당부로 부(賦)와 시(詩)의 문예창작 능력을 보는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생원시, 진사시(사마시)에 합격한다고 벼슬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주어진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시묘 살이 하면서 죽만 먹을 정도로 슬픈 예를 다한다. 그때 “애당초 과거에 뜻을 둔 것은 어머니 때문인데 이제는 급제한들 누가 자랑스러워하며 과거공부해서 뭣하겠는가.”하였다.37살(1568년)에 무슨 갈등이 생겼는지 집 뒤 청성산에서 학봉과 과거공부에 몰두한다, 학봉은 합격하고 송암은 떨어져 이때부터 본격적인 자연과 벗하며 문인의 길로 접어든다. 퇴계가 심신 수양했던 청량산을 자신의 산(吾家山)이라 했듯이, 송암도 호를 청성산의 바위와 산 이름을 딴 송암, 청성으로 했다.1585년 학봉은 17년 전 송암과 과거 공부했던 청성산을 자신의 은거지로 생각했는지 “청성산의 절반을 저에게 기꺼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편지를 쓴다. 송암은 학봉에게 청성산 반을 떼어준다. 학봉은 석문정사를 지었고, 지금도 청성산의 소유권은 그때 그대로다. 보통사람은 하기 힘든 통큰 선비였다.#. 한서재를 짓고초야에 묻혀산 선비 송암 권호문이 살았던 안동 서후면 교리에 있는 송암 고택과 청성서원에 갔다, 우리나라 지명에 교리, 교촌은 향교가 있던 자리인데 여기도 고려시대 관학인 향교가 있었다. 입구에 두어 집 있고 막다른 골에 송암 종택이 외롭게 있다. 종택 입구에 송암이 20살(1551년)때 지은 한서재가 퇴락한 채 서 있다.여기를 선택한 한서재기(寒棲齋記)에는 “시냇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소나무 밑 아슬아슬한 바위모서리에 앉아서 멀리 바라보니, 충분히 깃들어 살만했다. 이에 산 능선을 깎아 초가를 지었다. 한 칸은 따뜻한 방으로 하고, 두 칸은 시원한 마루로 만들었다.…. 유유자적하며 물상을 찾아다니노라면 들판의 푸른 풀, 긴 제방의 파란 버들, 봄날의 안개와 가을의 비. 아침 햇살과 저녁 노을 등이 사시사철의 아름다운 흥취를 제공해주며 세속의 티끌 묻은 생각을 씻어준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즐기는 여덟 가지를 읊는데 고요한 밤, 그윽한 창가에서 책을 덮고 홀로 앉아 달그림자 비추면 거문고에 노래를 실어 회포를 푸는 대월음(對月琴)이 마지막 여덟째라 했다. 이곳을 보고 와서 이 글 쓰고 있는 지금의 경주 수오재에는 달 대신 밤비가 하염없이 내려 청마루에 나가 앉았다. 처마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소리와 개구리 울음이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송암은 달을 감상하면서 거문고에 노래를 불렀지만, 필자는 만물과 부딪힌 빗소리와 개구리 합창에 방해가 될까봐 단소는 불지 않자 온 몸에 소리가 스며드는 대우성(對雨聲)이었다. 절이 공부하기는 좋아도 일시적이지 장기적으로는 힘들고, 정자는 가유(可留) 지언정 불가거(不可居), 즉 머물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만의 창작공간이 필요하여 송암은 한서재를 지은 것이다. 여기서 송암은 끊임없이 내면의 이치에 몰두했다.#. 관물당과 청량산기행한서재 뒤에는 사람 살지 않는 종택이 좁은 골짜기를 꽉 메우듯이 앉아있다. 종택 안에 있는 관물당은 1569년 송암이 38살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송암은 관아당(觀我堂)이라 했는데, 스승 퇴계가 “사물을 관찰하면서 대상을 눈으로 보는 것은 마음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마음으로 보는 것은 이치로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의 관물당(觀物堂)으로 바꾸어준다. 송암은 25세 때 청량산을 유람하고 108운의 장편시를 퇴계에게 지어 올리자 퇴계는 “시를 자세히 보니 병폐가 적지 않다. 말을 길게 하고자 한 까닭에 지루하고 산만하다. 운을 가득 채우려고 어려운 문자를 끌어대다가 쓸데없이 길어졌다…” 이런 따가운 지적과 혹독한 비평은 퇴계의 수많은 제자 중에 문학을 이어받은 최고의 제자가 된 것이다.이 관물당을 짓고 다음해 1570년 39살 송암은 겨울에 한 달가량 청량산 기행을 떠나와서 기행문을 완성한다. 시도 1천700여 수가 있지만 기행문은 그 사람의 향기와 살아있는 진솔한 글이라 글쓴이의 내면을 알 수 있다. 기행작가인 필자도 선현들의 기행문을 아끼고 사랑한다. 송암도 겨울 청량산 기행을 계획하고 책과 지필묵, 벗과 퇴계에게 드릴 단술 두 항아리와 채소, 과일을 챙기고 떠나려하자 많은 사람들이 왜 하필 겨울 혹한이냐고 의아해 한다. 가다가 만난 지인들도 산은 봄, 가을이 좋고 겨울은 적합하지 않다 한다. 단 퇴계는 “그 산은 겨울 경치가 좋지, 다만 바람이 몰아칠 때는 숲이 흔들리면서 온갖 소리가 나고 다시는 잠잠해질 같이 않으니, 모름지기 남향으로 난 작은 암자가 있는 조용한 곳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청량산 유람할 때 스님들이 길잡이에 심부름하고, 절에 도착하면 늙은 승려가 엎어질 듯이 달려나와 맞이하는 당시의 하늘과 땅 차이의 신분을 여실히 보여준다. 송암은 술을 매우 즐겨 떠나올 때 술 챙겨왔고 만나는 지인과 밤새 마시고 시를 주고받는 낭만이 넘치는 선비였다. 술을 마시고 흥이나 스님 둘을 불러 술병과 벼루와 종이를 들게 하고, 치원대에 올라 쉬고 있을 때 안중사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이한다.밤에 늙은 승려가 “노스님께서 저녁에 돌아가셨습니다.”고 하자 송암은 “죽고 사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다. 천지 만물 가운데 오래 살며 죽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 슬퍼하랴.이런 객관적 입장이 숙소 벽에 붙어 있는 김계순(1534~1570)의 시를 보고 먹이 아직 마르지도 않은듯한데 먼저 죽어 손으로 이름을 어루만지며 한참동안 슬퍼한다. 청량산 기행 중에 퇴계의 위중을 승려들이 알려와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고, 시중든 사람이 70여 명이 있는 가운데 돌아가시자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니 그 슬픔을 어찌하랴 또 많은 눈이 내려 얼어 죽는 사람도 생기고 통곡은 이어진다.어젯 밤부터 진종일 비가 내리는 오늘은 검사, 인권 변호사, 시민운동가, 서울시장의 기득권을 가졌지만, 약자 편에서 많은 아름다운 일을 해오다 성 추행 의혹의 치욕적인 불명예를 죽음으로 사죄했지만, 새로운 불씨를 남긴 박원순 서울시장의 장례식이다.필자를 인터뷰하고 이틀을 우리 집 수오재에서 자면서 경주의 문화유적을 안내했던 인연으로 마음이 우울하고 먹구름이다. 그래서 세상 모든 죽음은 나와의 관계에서 슬픔의 강도가 달라진다.관물당을 나와 송암을 모신 청성서원으로 갔다. 1608년에 세워 176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09년 도내 유림들의 뜻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사람은 배우는 것보다 접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 길을 떠나야 세상이 보인다. 백두산기행을 남긴 당주 박종(1750~1793)은 험한 백두산을 떠날 행장도 준비 안 되었고, 아이도 앓고 있어 주위에서 만류하였으나 박종은 ‘만일에 근심걱정 다 가시고 행장을 갖추어 준비된 후에 가자면 평생을 기다려도 가볼 날이 없을 거라며 떠나듯이, 송암도 부인이 호랑이한데 물리는 일이 많아 걱정하자 “공부는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면서 청량산으로 떠난 것이다./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14

국책사업 유치·현안사업 해결 ‘미래 울릉 성장동력’ 마련

김병수 울릉군수는 지난 한 해 대형 국책사업 유치와 주요 현안사업 해결로 ‘미래 울릉 성장동력’을 마련했다.김 군수는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주민 정주여건 개선과 관광 특화 목표로 정부 공모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지역 주요 현안사업을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그 결과, 군 자체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대형 국책사업 공모 선정과 주민숙원사업의 단계적 해결이란 성과를 얻었다. 또, ‘코로나19’로 인해 침체된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다양한 분야의 지원 시책사업을 마련했으며 ‘코로나19 청정 울릉’도 사수했다.남은 임기 동안 김 군수가 추진해야할 과제와 울릉 발전방향에 대해 들어본다.- 울릉농업 6차산업 추진 동력 마련과 관련해 성과와 추진방향은.△낙후된 울릉 촌락지역 발전과 성장을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농촌 신 활력 플러스사업과 도시민 농촌유치 지원 사업에 공모해 선정됐다.울릉도는 육지 농촌지역과 달리 체계적인 발전이 어렵다. 이번 지원사업 선정은 울릉 농업분야에 새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 된다.울릉도 농촌 신 활력플러스 사업으로 총 70억 원의 사업비를 2023년까지 투입, ‘울릉 화산섬 비즈니스플랫폼 구축’이라는 비전 아래 울릉의 유·무형 자산과 민간 조직을 활용해 특화산업 육성, 일자리 창출, 지역경제 활성화를 추구하는 농촌형 지역혁신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고령화와 인구감소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울릉군에 미래 농업 인력 확보를 위해 2023년까지 총 6억 원의 국비를 지원 받아 안정적이고 내실 있는 귀농·귀촌의 프로그램 등을 마련할 방침이다.귀농·귀촌 지원사업의 프로그램도 농림축산식품부 공모에 선정돼 다양한 지원을 통해 귀농, 귀촌이 활성화 되도록 노력하겠다.- 울릉도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기반 구축사업을 소개한다면.△국토교통부 주관 공모에 선정된 ‘스마트시티 통합플랫폼 기반 구축 사업’은 자연재해 피해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지역주민과 안전한 여행정보가 필요한 관광객들에게 ‘스마트시티 도시안전 5대 연계 서비스’를 기존의 울릉 알리미앱 등에 연계, 주민생활과 관광객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총 12억원 규모의 사업이 완료된다면 기존의 방범, 교통, 재난 등 분산 운영되고 있던 개별 S-서비스의 통합 운영을 통해 서비스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생활에 치명적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자연재해에 대한 사전예방과 신속한 현장대응을 통해 피해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어촌항을 관광 복합형 항으로 개발해 풍요로운 어촌을 만들기 위한 방안과 관련 사업을 소개해 달라.△정부에서 주관하는 각종 지원 사업에 참여, 선정될 수 있도록 하겠다. 모든 사업은 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 받는 국책사업으로 추진토록 하겠다.2019년 울릉 천부항이 어촌뉴딜 300사업에 선정됐다.정부예산 150여억 원을 투입, 천부항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단일 항구 중 전국에서 가장 많은 예산을 배정받았다. 서면 태하항과 북면 웅포항은 2020년 어촌뉴딜300사업에 선정되는 성과를 얻었다.지역적 특수성을 살린 해양관광 명소로 개발하기 위해 태하항과 웅포항에는 총 182억 원을 투입한다.서면 태하항에는 총 사업비 89억원을 들여 해양심층수 체험센터, 황토구미 로드 등을 조성하고, 북면 현포 웅포항에는 총 사업비 93억원을 들여 친수레저 해양 체험 공간 조성, 소득기반 사업, 주민역량 강화사업 등을 추진, 어업과 해양레저의 복합화를 통한 어촌의 혁신 성장 인프라를 구축하게 된다.- 울릉도 주요 해안을 안정화 시키고 태풍 등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대책은.△몽돌이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등 해안선 잠식을 막겠다. 태풍 등 재해를 예방할 수 있는 제3차 연안정비기본계획에 10년간 총사업비 1천404억원을 투입하겠다.태풍·자연재해에 취약한 5개 지구의 연안보호를 위해서는 이안제를 설치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매년 반복되는 태풍 피해를 차단하겠다.해양수산부에서 공모·선정한 이번 사업들은 기본적 인프라 및 콘텐츠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잠재력을 발현시키지 못하는 울릉의 어촌지역에 혁신성장을 주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 어촌경제 활성화의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로 인해 지역 관광경기가 직격탄을 맞고 있다. 관광경기 활성화 방안은.△코로나19는 세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울릉도도 예외가 아니다.코로나19의 영향으로 작년 동기 대비 울릉군 방문 관광객의 수는 80% 가까이 감소했고, 관광 산업이 핵심 산업인 울릉군의 경제적 타격은 심각한 수준이다.이러한 코로나19의 심각성을 타개하고자 ‘울릉군 코로나19 총력대응 지역사회 지원과 경제활성화 종합대책’을 수립해 긴급 예산 지원, 소상공인 육성 자금 대출, 저소득층 한시 생활비 지원, 관광진흥 개발기금 특별 융자 등 다방면의 방안을 시행, 군민들의 경제적 피해를 줄이고 있다.코로나19 청정 지역유지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여객선 터미널 입도객 전수 체온 측정, 공공·민간 방역 물품 지원 등 방역에 최선을 다해 코로나19 확진환자가 0명인 ‘코로나 청정 지역’을 유지해 나가겠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관광객 유치 방안은.△개별관광 및 특화 관광프로그램 개발 등 다양한 방법으로 관광객모집에 나서고 있다.요즘 관광트렌드인 개별관광을 겨냥한 울릉(시티)투어패스 상품을 개발했다. 오프라인·모바일 티켓 검표 시스템을 통해 지역 관광자원과 주요시설을 하나로 엮어 관광객이 편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이다.특히 개별여행 관광객들의 만족도를 높일 맞춤형 상품이다. 유료관광지 할인, 맛집(가맹점) 할인율 적용 등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상품권(패스권) 구매 시 울릉공영버스를 활용한 5회 이용권 및 무제한 이용권을 통해 울릉도 시티투어 형태로 주요관광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기회도 갖도록 하겠다.국내·외 관광수요 주요 소비층인 20~50대의 개별관광객 만족도를 충족하기 위한 울릉visit 여행티켓을 출시해 여객선, 숙박, 렌트카, 유료관광지, 맛집 등을 할인받아 관광하는 상품 판매를 준비 중이다.단체관광 대상으로 ‘울릉힐링로드’프로그램을 개발, 울릉도의 특색을 살린 자연 속에서 오감을 힐링·충전할 체험형 관광상품도 계획하고 있다.이번 상품은 울릉도 개척 이후 선조가 다녔던 옛길로, 전체길이 3.8㎞인 내수전~석포길(울릉해담길)을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체험, 쉬어가는 여행트렌드에 맞는 투어다.울릉군에서 개발한 ‘울릉힐링로드’ 체험관광상품은 경북도 공모전에서도 선정, 예산을 지원받게 되면서 가을에 추가로 출시할 계획이다.2020 경북관광의 해를 맞아 스마트폰의 일상화와 인터넷 기술 발달에 따른 SNS시대에 맞춰 관광홍보용 영상 2가지를 컨셉으로 구성, 인플루언서들의 SNS(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을 통해 온라인 관광홍보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 다시 찾고 싶은 울릉을 만들겠다고 했는데.△발전 가능성과 역동적인 생태환경은 울릉의 무궁무진한 성장자원이며, 이러한 자원을 토대로 울릉군은 지속적으로 성장해나갈 것이다.대형 국책사업과 주요 현안 사업들을 적극 추진해 군민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정주여건 개선과 성장하는 지역경제에 뒷받침할 것이다.코로나19로 침체된 경기는 다양한 활성화 대책을 마련, 조속한 시일 내에 극복토록 하겠다. 울릉군은 지난 2년 동안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이제 새로운 변화가 실현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계속 돼 꼭 다시 한 번 더 찾고 싶은 울릉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2020-07-13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봉화 미래 100년 앞으로 ‘총력’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군민이 풍요로운 봉화 건설을 선언했던 민선7기 봉화군이 출범 2주년을 맞았다.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의 위기와 불안정한 농가소득, 침체된 지역경제 등 다양한 현안을 해결하길 바라는 군민의 부름을 받고 출범한 민선7기는 지금껏 혁신적이고 과감한 정책을 선보이며 봉화군의 저력을 대내외에 알렸다.민선 7기 반환점을 맞은 봉화군의 성과를 짚어보고 앞으로의 비전을 소개한다.□ ‘최초’ 키워드로 보는 민선7기 2년민선 1기와 2기, 4기에 이어 대구·경북지역 ‘최초’로 4선에 당선된 엄태항 봉화군수의 이력만큼 봉화군 민선7기 2년은 유독 ‘최초’ 타이틀이 많다.봉화군 민선7기 2년의 주요 성과를 ‘최초’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봤다.봉화군은 지난해 9월 경북 도내 최초로 농업인경영안정자금을 지급했다. 농업인들의 경영안정과 기본소득 확보를 위해 6천600여 농가에 50만원씩 33억원을 지급했고, 올해에는 40%를 증액한 연 70만원씩 봉화지역화폐로 지급해 농가경영안정은 물론 지역상인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또한, 경북도에서 최초로 에너지 전환정책 지방정부협의회 회원으로 가입하고 청와대 초청 재생에너지 사례발표 및 산학연과의 MOU체결 등 그린에너지 사업을 통한 지속가능한 미래 먹거리 창출에 앞장서고 있다. 태양광, 풍력, 수소, 바이오 등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그린에너지 사업을 추진해 정부의 그린뉴딜정책에 선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지난 6월에는 봉화군민 녹색에너지 협동조합 개소식을 통해 주민참여형 신재생에너지사업을 위한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대규모 국책사업 유치 성과도 눈에 띈다.전체면적 83%의 풍부한 산림자원과 인프라,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봉화군이 경북도와 중앙정부에 제안해 정부시책에 반영된 전국 최초 국가 주도의 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법전면 일원에 사업부지 약 21만㎡, 건축면적 9천 900㎡ 규모로 건립된다.문화재수리재료센터는 2018년 국회 예산심의를 거쳐 지난해 정부 예산 2억원을 확보하고 올해는 국비 18억원을 확보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아울러 여성가족부 주관 국립청소년산림센터 건립도 지난해 6월 착공에 들어갔다. 춘양면 서벽리 일대 약 10만여㎡ 부지에 사업비 243억 원을 들여 산림체험관, 청소년 및 가족생활관 등 건축 연면적 8천572㎡의 규모로 오는 2021년 준공될 예정이다.지난해 11월 착공한 봉화댐 건설도 큰 성과다.봉화댐은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단체가 시행하는 댐 건설사업이다. 홍수 조절이 주목적인 봉화댐은 높이 41.5m, 길이 266m, 저수용량 310만t 규모의 중심 코어형 락필댐으로, 총사업비 499억원(국비 90%, 지방비 10%)을 투입해 2024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이밖에도 민선7기 2년 동안 중앙정부 및 경북도 등 상급기관으로부터 38개 부문에서 표창을 받았다.2018년에는 농정평가 경북도 1위, 대한민국축제콘텐츠 대상에서 축제관광부문 대상, 2019년도에는 치매극복관리사업 최우수 기관상, 전국 기초단체장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상 수상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봉화퍼스트로 보는 민선7기 2년민선7기 봉화군정의 모든 정책과 사업들은 ‘봉화퍼스트’로 귀결된다.지난해 6월 ‘봉화군 봉화퍼스트 활성화 및 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봉화퍼스트 활성화를 위한 추진 근거를 마련했다.지난해 한산했던 전통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었던 ‘시장愛 불금축제’는 지역을 살리는 확실한 대안임을 증명하며 인근 시·군에서 벤치마킹을 다녀가는 등 봉화퍼스트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봉화퍼스트로 대변되는 민선7기 역점시책을 군민 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 측면에서 살펴봤다.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소비확산, 소비패턴 변화에 발맞춰 ‘봉화퍼스트샵’ 구축사업도 추진한다.봉화군의 음식, 문화관광, 특산품, 숙박 등 관내 모든 정보를 통합 제공하고 소비까지 연결하는 통합관계형 플랫폼으로 이용객의 편의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사람들 간 접촉을 최소화하는 언택트 문화도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언택트 ICT 콘텐츠 개발을 통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화관광 트렌드를 주도해 나간다는 구상이다.내성천 일원에 레이져 쇼, 드론 군집비행 등 ICT기술을 활용한 문화공연을 자동차 내에서 관람할 수 있는 드라이브파킹 스마트 공연을 추진하고, 스마트체험관광센터를 건립해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봉화군의 문화관광 체험을 즐길 수 있는 신개념 콘텐츠를 구축한다.그린에너지 사업과 연계한 테마 전원주택 단지 조성으로 도시민들의 귀농·귀촌 활성화와 인구유입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도 도모한다. 체육, 문화, 복지시설을 두루 갖춘 100개 마을 총 5천호 규모의 전원생활 특구를 조성할 예정으로 현재 1~2차 사업부지 선정을 마치고 본격 사업 추진을 앞두고 있다.입주민에게 소규모 농장 부지제공, 버섯재배사 부지 장기임대, 스마트팜·소규모 태양광발전시설 설치 지원 등 도시민들이 봉화 정착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시책을 연계해 전원생활도 즐기고 안정적인 노후도 보장받게 한다는 계획이다.봉화군을 대표하는 새로운 랜드마크 사업도 본격 추진된다. 내성천 경관타워는 내성천을 경계로 분리된 생활권과 상권을 연결할 복합문화공간의 인도교(길이 115m, 폭 9.6m)와 봉화의 대표 특산물인 송이를 기본으로 한 세련된 디자인의 높이 62m의 전망타워로 조성한다. 타워 정상부 1층은 전망카페로 조성해 내성천과 읍내 전체를 조망하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2층은 전망대 및 홍보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군은 남한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청량산 일대를 봉화군 관광산업 재도약을 위한 핵심구역으로 설정하고 청량산 명승둘레길 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한다.총 192억원의 사업비로 2021년 실시설계 용역을 시작으로 2023년말 준공을 목표로 추진 중이며, 기존 탐방로를 대체할 신규 탐방로 약 1.1km 개설한다.탐방로 내에는 세계 최장의 산악 출렁다리 조성도 포함되며 총길이 600m, 높이 170m로 건설되면 세계 최장의 산악출렁다리 기록을 갱신하게 된다.이와함께 올 하반기 완공예정인 농산물 종합산지유통센터와 농축임산물 전시판매장 건립을 통해 지역농산물의 판로확대를 강화하고, 군의 양대 축제인 은어·송이축제와 관광산업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고 전문적인 추진을 위해 봉화축제관광재단을 설립·운영해 전국 최고의 관광도시로의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다.엄태항 봉화군수는 “‘흙이 쌓여 산을 이룬다’는 적토성산(積土成山)이라는 말처럼, 봉화 미래 100년의 초석을 쌓는데 혼신을 다해온 2년이었다”며 “민선7기 반환점은 그저 절반의 의미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새로운 변화와 도전으로 초심을 잃지 않고 군민이 행복한 봉화군을 만들겠다’고 말했다./박종화기자 pjh4500@kbmaeil.com

2020-07-12

‘위기를 기회로’… 시민이 행복한 경산시 조성 위해 뛴다

새로운 미래로 함께하는 희망 경산을 목표로 민선 7기 전반기 경산시정을 이끈 최영조 시장이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위한 하반기 업무를 시작했다.최 시장의 전반기 시정평가는 올해 초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만나 지역과 시민이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이라는 평가다.경산지식산업지구와 경산4일반산업단지 조성을 차질 없이 추진해 산업단지 300만 평 시대를 열었다. 경산지식산업지구 내에 철도차량융합부품기술센터와 무선전력전송기술센터, 메디컬 융합소재실용화센터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할 6개 국책사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대구 안심역에서 경산 하양역까지 8.89km 구간의 대구도시철도 1호선 하양 연장사업을 2023년 개통하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등 대중교통망 확충과 경북권역 재활병원, 치매 안심센터, 경산사랑카드, 글로벌 코스메틱 비즈니스센터 등 경산의 미래 성장발판을 마련했다.최 시장은 시민에 대한 행정서비스와 시정은 제자리걸음이 아닌 진일보 해야 한다며 민선7기 후반기에도 시민의 삶을 질 향상을 더욱 매진해 나갈 것을 거듭 강조했다.-전반기 시정추진으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한 마디로 평가한다면.△저출산 시대에도 지역의 인구와 재정이 지속적으로 성장해 본예산 1조원 시대를 열고 서부2동 인구 3만, 남부동 인구 2만을 돌파하는 등 인구 2만 이상 읍면동이 7개에 이르는 등 산업과 경제, 문화, 복지 등 전 분야에 걸쳐 조화롭고 활력이 넘치는 도시로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살고 싶은 도시다.-현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다. 미래를 위한 준비는.△시민의 관심은 행복한 삶과 먹을거리가 보장되는가에 있다.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시민에게는 더 큰 행복을 주며 미래가 든든한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책을 추진한다.특히 코로나 방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경제회복을 조화시키고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올해 시정 목표인 △미래형 첨단산업을 선도하는 창의지식도시 △일자리 걱정 없는 풍요로운 경제도시 △도시와 농촌이 고르게 성장하는 균형발전도시 △사람중심의 건강하고 안전한 스마트 도시 △시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통도시 △품격 있는 문화체육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균형발전과 많은 일자리, 알찬 교육, 안전이 시민에게 행복감을 주고 먹거리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 줄 것이다.-이를 시민의 입장으로 설명해 달라.△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남산~하양 국도 대체우회도로 건설과 하대~옥천 간 도시계획도로 개설로 동서남북을 잇는 사통팔달 교통망을 구축한다.남산면 하대리에서 하양읍 은호리까지 9.8km를 잇는 국도 대체 우회도로는 삼성현역사문화공원과 반곡지, 반룡사, 동의참누리원, 글로벌 코스메틱센터 등 많은 관광자원과 경관을 자랑하는 자인·남산지구로 연결된다.또 시민의 정주권을 보장하고자 경산대임 공공주택지구, 중산지구 시가지 등 인구 40만이 살아도 넉넉한 명품 정주기반 조성에 나서고 구도심에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고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도 추진한다.특히 공공근로와 지역공동체, 희망 일자리 사업 등 직접 일자리 사업을 통해 코로나로 어려운 시민들에게 1만4천300여 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경력단절여성, 청년들을 위한 지역주도형 청년 일자리사업, 교육 강화, 일자리 매칭 등 수요자 맞춤형 일자리 사업도 확대한다.-경산은 도심악취가 문제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대책은.△도심의 확장성을 고려하지 못한 판단으로 대평동에 민원의 대상이 되는 폐수처리장과 도축시설, 분뇨처리장이 자리했다.이미 자리 잡은 시설의 악취를 절감하고자 공공하수처리시설의 증설과 클린에너지도시 프로젝트, 클린로드 시스템으로 악취와 불볕더위, 미세먼지로부터 안전한 도시환경을 조성하겠다.대평동의 악취는 그동안의 노력으로 많이 감소했으나 지속적으로 악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돼 생길 수 민원을 사전에 차단할 것이다.-관광사업은 미래의 최대 먹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지역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한 복안은 있는지.△경산은 상대적으로 관광자원이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관광자원을 창출하고자 꾸준히 노력하는 관광 활성화 정책을 역점을 두어 추진할 것이다. 먼저, 소규모 가족단위 여행객을 대상으로 지역 특유의 콘텐츠를 온라인에서 먼저 맛보고 현장을 찾는 가상관광과 랜선 여행 등 다양한 형태로 관광자원을 소개하고 지역 음식의 레시피를 제공하는 식도락관광도 생각하고 있다.2023년 준공될 경산 센트럴파크를 자연과 문화, 예술이 어우러진 명품공원으로 조성해 누구나 한 번은 찾고 싶은 명소로 만들 것이다.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팔공산 갓바위,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압독국의 유적 등 우리가 가진 관광자원을 하나로 묶는 관광벨트화도 적극 추진할 것이다. 스토리텔링도 하나의 방법으로 시민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반영할 수도 있다.-경산은 대구에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예속되어 있다는 평가다. 해결방안이 있다면.△대구라는 광역도시 때문에 지역의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로 인해 지역의 많은 젊은이와 시민이 문화를 즐기고자 대구를 찾고 있다.지역의 고유문화를 살리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이를 해결하려고 문화예술회관을 건립해 향토색이 문화를 계승·발전시키고 고품격의 공연유치, 시립도서관 증축, 인공암벽장과 오토캠핑장, 산림욕장 설치 등 시민의 문화욕구를 지역에서 해결할 방안을 찾을 것이다.-시민의 바람은 소통과 참여다. 어떻게 소통하실 건가.△찾아가는 주민 대화와 주민참여 예산제도 등 다양한 주민참여 시책으로 시민이 제안한 정책을 시정에 반영하고 동부동과 남부동 행정복지센터와 시청사 증축사업으로 최상의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겠다.-원활한 후반기 시정을 위해 공직자와 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큰 발전으로 이뤄내야 한다. 자치단체장은 큰 그림을 그리고 공직자와 시민이 그 그림에 입혀가는 것이 시정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성공하려면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 성공을 위해, 시민의 행복을 위해 모든 공직자가 가져야 할 자세다.시민과 약속한 공약사항은 반드시 실천하고 정부부처의 동향을 긴밀히 파악해 국·도정연계사업, 국가 공모사업 등 신규 사업 발굴에 나설 것이다.아무리 좋은 계획도 혼자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고 서로 협력할 때 가능하다.공직자는 시민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시민은 공직자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등 경산시를 먼저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0-07-09

고풍스런 기와·멋스런 초가, 때묻지 않은 풍광은 한폭의 그림 같아라

본문에 앞서 먼저 사적인 경험 한 토막.1970년대 초·중반. 영남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때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TV는 물론, 라디오와 전기밥솥도 없거나 드물던 곳. 모든 것이 지금과 비교하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그럼에도 벽촌 구석구석까지 인터넷이 개통되고, 여든 살 촌로들도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2020년 오늘보다 매력적인 게 분명 존재했다. 동네를 걸으면 콧속으로 스며들던 향긋한 아카시아 향기, 기와를 머리에 인 고풍스런 집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드물지 않게 멋스런 초가(草家)가 있었고, 장작을 때던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매캐했지만 더없이 낭만적이었던 마을. 이것들을 보고 느낀 기억이 4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렷하게 떠오른다.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위와 같은 경험을 해본 50대 여행자들에게 견딜 수 없이 아릿한 노스탤지어를 소환해준다. 어디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느낌이다. 기자 역시 그랬다.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 향수를 선물하는 양동마을은 젊은 세대들에겐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 나를 키워냈구나’라는 깨달음을 선사한다.◆ 초여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양동마을을 거닐다간헐적으로 쏟아지는 빗방울과 이르게 찾아온 더위가 반복되던 7월 초순. 양동마을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정거장에서 마을로 가는 길. 일찍 잠에서 깬 매미가 ‘너의 유년을 기억해보라’는 듯 청량하게 울었다.이곳은 조선시대 빼어난 학문적 업적을 이뤄낸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대를 이어 살아오는 집성촌(集姓村). 미려한 산세는 물론, 풍수학적으로도 빼어난 지세(地勢)라 예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살만한 지역’으로 이름이 높았다. 인재가 모여들고, 권세가 생겨날 만했다.201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등재된 양동마을. ‘서라벌의 주요 관광자원’을 소개하는 경주시는 이 마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가 모여 있다. 조선조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회재 이언적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주요 고택(古宅)으로는 회재 이언적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이 살던 관가정 등이 있다.”내려쬐는 햇살을 등에 지고 그 옛날 반가(班家)의 자손처럼 서두름 없는 발걸음으로 마을을 돌아봤다.높이 솟아 우뚝한 조선의 성리학자 이언적의 흔적은 무첨당(無堂·보물 제411호)에 남아 있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이 건물은 종가의 일부로 손님을 접대하고, 책 읽는 공간으로 사용된 일종의 사랑채다. 여강 이씨 문중에서 1560년경 건립한 심수정(心水亭)도 톡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무너진 것을 20세기 초반에 복구한 것인데, 정자와 행랑채 등을 원래 모습 그대로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가득했다.국가민속문화재 제23호인 서백당과 보물 제412호인 향단 역시 양동마을을 방문한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백당은 이언적이 태어난 곳이고, 향단은 조선의 양반집이 가졌던 일반적 건축 구조와 다른 형태를 지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경주와 인근 형산강을 품에 안은 형태로 조선의 청백리 손중돈이 분가해 살던 관가정(觀稼亭)과 ‘물과 같이 맑고 구름과 같이 허허롭다’는 담백한 뜻을 담아 축조된 정자 수운정(水雲亭) 또한 살피지 않으면 아쉬운 양동마을의 자랑거리다.◆ 시간을 잊고 천천히 돌아봐야 더 아름다운 공간양동마을이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빛나는 문화유산’이 된 건 비단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 때문만은 아니다.마을 곳곳에 자리한 초가와 한가롭고 때 묻지 않은 풍광은 방문객들을 조선시대 혹은, 1960~70년대로 데려간다. 마치 타임머신에 몸을 실은 듯하다. 여기선 여타의 여행지처럼 걸음을 빨리 해 유명한 고택 앞에서 이른바 ‘인증 샷’을 찍고, 서둘러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여행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리운 과거로 왔으니 그에 걸맞게 행동하는 게 좋지 않을까?기자를 포함한 여행자들은 소리소문 없이 은근슬쩍 찾아온 여름의 뜨거움을 핑계로 천천히 양동마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살폈다.흐르는 시간 따위 잠시 잊어버리고 천천히 마을의 안팎을 어슬렁거렸다. 모두가 쉽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며.설창산과 장태골, 성주봉과 안락천에 둘러싸인 한적하고 평화로운 양동마을은 오래 전부터 인심이 좋고, 후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경주연구’ 제21집 1호에 실린 신상구의 논문 ‘양동의 공간적 가치, 그리고 현실적 문제’는 ‘논어’ 이인편(里仁篇)을 인용해 양동마을이 인(仁·어질고 자애로움)의 덕목을 지켜낸 공동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서술이다.“양동마을은 600여 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름다운 가치(仁)를 지키며 살아온 마을이다. 600여 년 간을 한결같이 처음 마을을 형성하면서 지니고 있던 삶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보다도 더 숭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킨다는 것에는 그만큼 어려움과 번거로움을 인내해야 하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다. 양동마을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와 가치를 세계인이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므로 행복한 것이지만, 바꿔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역사·문화마을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이 마을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감내해 왔는가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보존 가치가 있는 전통을 간직하고 이어가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한다는 위 논문의 지적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인다.경주만이 아니라 안동시, 청송군, 봉화군 등 경북 지역엔 이름난 고택과 종가(宗家)가 적지 않다. 건물 자체가 문화재나 보물인 그곳엔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 그런데, 그곳들 중엔 지금도 후손들이 생활하는 집이 흔하다.남의 집에 들어설 때는 주인에게 허락을 얻는 게 보편의 상식. 그럼에도 양해를 구하지 않고 들어가 여성들이 거주하는 안채에서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고, ‘출입 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고택과 종가의 비밀스런 공간까지 함부로 돌아다니는 행위는 한국이 관광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다행히 갈수록 그런 몰지각한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전통문화의 속절없는 붕괴를 맛본 현대인들에게 양동마을이 주는 위로와 위안의 크기는 결코 작지 않다. 그걸 생각한다면 보다 세련된 시민의식이 관광객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지….◆ 양동마을을 벗어나 보다 먼 곳으로 산책을 권하며마을 입구에 자리 잡은 양동마을문화관에서 전시된 유물을 살펴보는 건 학생들에게 평소엔 접하기 힘든 좋은 공부가 된다.앞서 열거한 각종 보물급 고택과 문화재인 정자와 비각(碑閣), 강학당(講學堂)을 꼼꼼하게 둘러보는 것 역시 이 마을을 방문한 여행자의 즐거움임이 분명하다. 기자는 여기에 하나를 더 권하고 싶다. 바로 1~2시간쯤을 투자해 양동마을 주변을 산책해보라는 것. 그 옛날 선비의 마음가짐과 걸음걸이로.마을회관과 양동초등학교를 지나 이향정과 심수정을 거치면 두곡고택과 동호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지척엔 울울창창 고목이 반기는 장태골이 있다.관가정과 향단을 뒤로 하고 야트막한 언덕길을 오르면 영귀정과 물봉동산이 당신을 반기고, 조금 더 힘을 내 설창산을 향해 가면 경산서당의 미려함과 기쁘게 만날 수 있다.근암고택, 상춘헌, 사호당, 서백당, 낙선당, 창은정사, 내곡정으로 이어지는 ‘안골 방면 산책길’의 정취도 빼어나다.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만들어냈다는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양동마을. 그 진가를 발견해내는 길은 여러 가지다.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양동마을 여행의 기술’을 스스로 찾아보시길./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7-09

빛나고도 뜨거웠던, 곧은 충절·맑은 예술정신

맑은 공기와 조용한 도심 풍경이 인상적인 영천시. 거기서 태어나 역사 속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의 삶은 모두가 눈여겨 볼만하다. 학문적 성취는 물론 기개와 지조까지 지킨 포은 정몽주(1337~1392), ‘조선 가사문학의 큰 별’로 불리는 노계 박인로(1561~1642), 화약 개발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최무선(1325~1395). 이들 모두의 고향이 영천이다. 영천시는 세 사람을 지칭해 “우리 고장의 3선현(三先賢)”이라 부르며 그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정몽주, 박인로, 최무선의 삶을 살펴본다는 건 오늘날 우리가 잊고 사는 곧은 충절과 맑은 예술정신을 돌아보는 행위에 다름없다. 그렇기에 간략하게나마 ‘영천 3선현’의 생애를 요약하고자 한다.‘동방 성리학’의 큰 스승 정몽주고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한다.“포은 정몽주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충절을 지킨 지조 있는 학자였고, 시묘살이 3년을 두 번이나 거듭한 효자였으며, 명나라와 일본의 우리가 아는 외국의 전부이던 시절 두 나라를 7번이나 다녀온 빼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그러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포은의 스승 이색(1328~1396) 역시 “학문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했고, 뛰어났으며, 그의 논설은 어떤 말이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상찬을 내놓은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영천의 임고서원은 정몽주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됐다. 소실된 건물은 1965년 복원됐고, 1999년까진 성역화사업도 진행됐다.서원 입구엔 거대한 석비가 우뚝한데 거기 새겨진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라는 글귀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두말 할 것 없이 ‘동쪽 나라 성리학의 큰 스승’이라는 뜻.영천시 임고면 우항리에서 태어난 포은은 세 차례 이름을 바꾼다. 모친의 태몽에 난초가 나타났다 해서 몽란(夢蘭)이라 지어졌던 이름이 여덟 살 때 몽룡(夢龍)으로 바뀐다. 검은 용이 나무에 오르는 꿈을 꾼 게 개명의 이유였다. 우리가 아는 몽주(夢周)는 관례를 치르고 난 후에 얻은 이름. 앞서도 말한 것처럼 학식과 더불어 용기까지 출중했던 포은은 두둑한 배짱을 무기로 일본에 가서 인질로 사로잡혔던 백성 수백 명을 석방시킨 능력 있는 외교관이기도 했다. 1377년의 일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시조 단심가(丹心歌)를 통해 보여준 고려에 대한 변함없던 충성심은 이미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을 터.그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김인규의 논문 ‘포은 정몽주의 생애와 그의 학문관’은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5천여 년 우리 역사 속에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충신과 열사가 있었지만, 포은 정몽주 선생만큼 후세에 영향을 미친 분은 없으며, 그 위상과 영향은 구한말까지 면면히 이어져왔다.”영천에 간다면 임고서원은 물론, 일대에 조성된 포은유물관(주요 유물 소장)과 충효문화수련원(전통문화 및 예절 교육기관)에 가보길 권한다. 정몽주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영천시의 노력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예술가이자 무장(武將)이었던 박인로조선의 가사문학은 우리가 세계 속에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예술의 한 장르다. 바로 그 가사문학의 정점에 섰던 게 노계 박인로였다. 그는 송강 정철(1536~1593), 고산 윤선도(1587∼1671)와 함께 가사문학의 거두(巨頭)로 불린다.1561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난 노계는 총명함을 어린 시절부터 인정받았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게임이나 할 나이인 열세 살에 한시 ‘대승음(戴勝吟)’을 지어 동네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흥미로운 것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무예에도 관심이 적지 않았다는 것. 언필칭 문무겸전(文武兼全)했던 노계는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예술가가 아닌 무장으로서 나라에 힘을 보탠다.경전을 읽던 책상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공도 많이 세웠다. 그랬기에 원종공신이 되기도 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시를 쓰는 것은 멈추지 않았고, 고통 받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노계는 한음 이덕형(1561∼1613)과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오랜 시간 학문적 교류를 했고, 인간적 우의를 지켰다. 고향 영천으로 돌아온 노계를 한음이 찾아온 것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그가 쓴 ‘선상탄(船上歎)’은 전란으로 인한 수난과 그것의 극복을 기원하는 절창으로 남아 있다. 당시로선 드물게 여든을 넘겨 장수했던 노계는 그의 품성과 문학적 기량을 알아본 영천 인근 벼슬아치들의 행사에 조용히 가서 시조 한 수를 읊어주는 낭만을 지닌 로맨스그레이(Romance grey)이기도 했다.그의 생애를 짧게 약술한 손대현의 논문 ‘노계 박인로의 경제적 기반과 문학적 형상화’ 한 대목을 읽어보자.“노계 박인로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병자호란 등이 일어난 혼란한 시기를 살다간 사람으로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으로 참전하였고, 과거 급제 이후에는 무관으로서 활동하였으며, 향리에 은거한 이후에는 유학에 침잠하면서 시조와 가사를 비롯하여 한시와 부(賦), 전(傳), 기(記) 등 다양한 형식의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우리 문학사상 가장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됐다.”영천 노계문학관에선 박인로의 생애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바로 근처에 노계의 위패를 모신 도계서원이 있으니 거기도 빼놓으면 안 된다. 문학관 전시실에선 조선가사문학에 담긴 예술혼을 확인해 보시길.화약 무기로 왜구의 횡포 막은 최무선고려 말. 늘상 밀리던 왜구와의 싸움에서 장쾌한 승리를 거둔 진포해전(鎭浦海戰·1380)과 관음포대첩(觀音浦大捷·1383)의 스타 최무선을 정성희의 ‘인물한국사’는 이렇게 설명한다.“고려후기 사회는 왜구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무선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을 발명하고, 이를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친 과학자이자 무인이었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화약을 수입하여 고작해야 불꽃놀이에만 이용하곤 했던 시기에 선구자적인 안목과 노력으로 화약을 개발해 국산화에 성공했다. 고려는 그가 발명한 화약과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해마다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를 격퇴할 수 있었다.”병기학과 군사학에 관심이 컸던 선각자 최무선은 중국어 사용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자연과학과 언어학 모두에서 돌올했다. 그 또한 박인로처럼 문무 양쪽을 경계 없이 오갔던 청년.젊은 시절부터 국가를 위협하는 왜구의 약탈에 의분을 느끼던 최무선은 염초, 유황, 목탄을 혼합해 폭발력을 극대화시킨 화약에 주목했다. 그가 화약 분야 선진국이던 중국 배가 오가는 예성강 나루터를 헤맨 이유는 진토(塵土)에서 염초를 구워내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1376년 드디어 염초 기술자 이원(李元)으로부터 화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최무선. 바로 그 시점이 고려가 ‘화약무기 보유국’이 되던 순간이었다.그는 당시의 통치권자들에게 “무기용 화약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갖췄으니,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낼 관청을 세우자”고 간곡하게 청한다. 이런 최무선의 열정은 ‘화통도감’ 설치로 이어졌다. 화약무기의 개발과 실전에서의 사용은 앞서 말한 진포해전에서 100척의 배로 왜구의 전투선 500척을 불태워버리는 전과로 나타난다. 이어진 관음포대첩은 고려의 군사들이 일본에 대한 두려움을 온전히 떨쳐내는 계기가 됐다.최무선과학관은 영천시가 여전히 최무선을 기억하고, 그의 애국의지를 계승하려 한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최무선, 정몽주, 박인로. ‘영천 3선현’의 빛나고도 뜨거웠던 행적은 앞으로도 영천의 자랑이 될 게 분명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20-07-08

“경제·일자리·인구 집중,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만들 것”

고윤환 문경시장의 민선7기 전반기 2년은 전국 최고의 모범도시를 만들기 위해 열정과 집념을 쏟아온 시간이었다. 특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문경시는 매번 전국 최고의 위기 대응능력을 보여주고 있어 전국 최고의 안전 도시, 청정 도시, 건강 도시로 인정받고 있다.고윤환 시장은 “코로나19 선제적인 대응으로 우리 시를 잘 지켜냈던 것처럼 시민과 공직자 모의 뜻을 모아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고, 인구를 늘리는데 집중하겠다”고 전하며,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삼고, 열정과 집념으로 일하겠다”며 민선7기 후반기에 대한 강한 추진의지를 밝혔다.□ 코로나 청정 문경지난 1월 코로나19 국내 확진자가 발생하자 즉각 비상방역대책반을 가동하는 등 정부 대응에 한발 앞서 심각단계 대응체제로 전환했다. 대인소독기 운영과 음압시설 확충, 대중교통 감염예방 차단막 설치, 전 시민 건강 전수조사 및 마스크 쓰기 운동, 드라이브스루 도시락 도입 공공청사 구조개선 등 모든 행정력을 동원한 선제적 조치로 코로나를 넘어 감염병으로부터 안전한 청정 문경을 만들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장기화에 대비하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드라이브스루 경제살리기 추진본부를 3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BC(Beyond Corona-19) 경제살리기 범시민추진본부를 지난 5월 각 분야별 전문가 및 시민이 참여한 가운데 출범시켰다.지난 6월 발행한 문경사랑상품권은 현재까지 100억 여 원이 공급되었으며, 그 중 50억 원이 도·소매업, 음식점, 전통시장 등 가맹점에 사용됐다. 미로공원 등 지역 내 주요 관광지에 쿠폰으로 지급돼 2차 소비를 이끌었다. 상품권은 6월말까지 출시기념으로 10% 할인해 판매했으며, 지역경제활성화를 위해 당분간 특별할인기간을 연장한다.□ 20년 공모사업 12건, 사업비 103억원 확보2020년 7천270억원(일반회계 6천400억원, 특별회계 870억원)으로 출발한 문경은 감염병에 대비하고, 취약계층의 생계지원 및 경제활성화를 위해 기정예산 대비 640억원 늘어난 8천 20억원을 2회 추경 편성, 동시에 속도감 있는 예산 집행을 실시하고 있다.국비사업 확보와 관련해 고윤환 시장은 지역현안 해결 및 국도비 예산 확보에 총력 대응하고, 문경의 미래를 책임질 주요 사업을 차질없이 준비 할 것을 주문했다. 2020년에는 문경지역 영화창작스튜디오 구축사업(문체부, 35억원), 문경석탄박물관 실감콘텐츠 제작 및 활용(문체부, 10억원), 경북도 지역특화콘테츠 개발지원(문체부, 3억3천만원), 골목경제 회복 지원(행안부, 8억원),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문체부, 1억9천만원) 등 공모사업 12건에 국도비 등 사업비 103억원을 확보했다.□ 미래 성장동력 사업 추진지금 한창 공사 중인 수도권~문경을 잇는 중부내륙고속철도 등 주요철도 개통 후 늘어날 관광 수요에 대비하며, 기존 소재지인 점촌 지역의 도시재생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타워나 조형물 같은 건축물이나 구조물이 아닌 관광과 농업, 체험이 함께 어우러지는 랜드마크 조성사업을 추진해 지역 상공인과 농업인 등의 경제활동 터전을 마련하고, 관광객을 유치할 앞으로의 ‘문경의 새로운 미래 100년’을 위한 랜드마크 사업을 추진한다.문경은 그동안 사과, 오미자가 주된 소득원이었지만 열대·아열대 작목, 미나리 등 다양한 작물의 시범단지 조성으로 앞으로의 기후 및 과일 소비시장 변화에 대응한다. 이와 동시에 체험시설, 자생식물원, 미나리 및 산채작물 고기구이터, 영강 보행교 조성, 산책로 조성 등 점촌 시내에서 영강 주변으로 힐링 코스를 발전시킬 계획이다.□ 아이 웃음 소리 들리는 문경인구정책TF팀을 구성해 저출산과 인구감소에 대응할 실질적 정책인 ‘인구증가 5대 주요시책’을 발굴, 2019년부터 신혼부부 주택자금 대출이자 지원, 출산장려금 확대지원,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업 확대지원, 아이돌봄 서비스 확대지원, 문경시 장학회 다자녀가정 생활장학금 확대지원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특히 문경시에서 전국 최초로 시행한 다자녀 생활장학금은 3자녀 이상을 양육하는 관내의 모든 가정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2019년에는 1천 811명에게 14억 5천만원을 지원해 시민들에게 다자녀 가정의 자긍심을 가지게 했다. 또한 ‘맘편한 돌봄공부방’, ‘다함께 돌봄센터’ 등 돌봄시설을 확충하고 신혼부부 등을 위한 흥덕행복주택을 건립 추진하는 등 아이 키우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힘쓰고 있다.이러한 노력으로 2019년말 문경시 인구는 7만 2천 242명으로 전년 동기와 비교해 368명이 증가했고, 출생아수 또한 8년만에 감소세에서 증가세로 전환됐다.□ 명품 귀농·귀촌지최근 5년 동안 3천 880명에 이르는 귀농·귀촌인이 문경에서 새로운 인생2막으로 정착했고, 지난 한 해 동안 1천 51세대, 1천 350명이 전입하는 등 문경시만의 차별화된 시책이 큰 성과를 거뒀다.이는 귀농인 보금자리 확대, 맞춤형 정착지원 사업, 멘토·멘티 운영, 소득작물 시범 운영, 농장 임대료 지원, 연구회 운영 등 문경시만의 맞춤정착 시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또한 문경시는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시행하는 도시민 농촌유치지원사업 1, 2주기에 이어 3주기(2020년 ~ 2022년) 사업에도 연속으로 선정되어 국도비 3억 6천만원을 확보하는 성과도 올렸으며, 귀농인 소득작물로 미나리 재배 시범단지, 표고버섯 스마트 재배단지 등을 조성해 귀농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시책을 적극 추진 중이다.□ 지역 균형발전신기동 틀모산 저수지 도시 숲 조성(20년 6월), 하신마을 ~ 모전2지구간 연결도로 개통(20년 5월), 문경새재 야외공연장 앞 정비 및 비가림 시설 설치(20년 5월), 도심 주차장 조성 확대(18곳, 290면 조성), 모전지구 송전선로 지중화 사업 추진, 도시가스 확대 공급, 안심귀가거리 조성, 마을무선방송 시스템 설치 등 시민이 살기 편한 주거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청정도시, 살기 좋은 고장인구증가 5대 주요시책을 지속 추진하고, 귀농귀촌귀향 1번지 문경 건설을 위해 농촌주거환경개선 TF팀을 구성해 농촌의 주거환경을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건강 기능주택을 설계, 제작해 맞춤형으로 보급한다.또한 지역 청년들의 유출방지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지난 4월 시의회·문경대학교와 손잡고 지역정착맞춤형학과 설치·운영지원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20여명의 입학생에게는 등록금을 지원하고, 졸업 후에도 취업을 알선해 실제로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나갈 것이다. /강남진기자75kangnj@kbmaeil.com

2020-07-08

국경을 넘어… 상상 그 이상의 경험을 만나볼까

◇ 러시아 국경을 넘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드디어 러시아로 들어왔다. 꽤나 더운 날씨였는데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들어와선 대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피할 겨를도 없이 맞았다. 탈린에서 비 때문에 하루 더 쉰 보람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 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렸던 부츠도 슈트도 다시 물에 젖어버렸다. 말짱 도루묵!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려면 나바르라는 작은 국경도시를 지나야 한다. 그냥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면 될 줄 알았는데 특이하게도 검문소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차량 대기소에 가서 통과요금(2.5유로)을 내고 영수증과 접수증을 받아 검문소로 가야한다. 대기소는 어마어마하게 큰 주차장인데 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차량이 그만큼 많은 듯하다. 가능하면 기다리지 않고 최대한 빨리 통과하기 위해 아침 6시가 되기 전 탈린에서 출발했다. 탈린에서 나바르까지 가는 길은 포장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소련으로부터 1991년 독립하고 난 후 에스토니아는 러시아보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2004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한 후론 완전히 러시아와 관계는 소원해졌다.유럽으로 향하는 길과 러시아로 향하는 길의 포장상태만 봐도 그 관계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 그건 에스토니아뿐만 아니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도 마찬가지다. 8시 30분쯤 대기소에 도착해 수속을 밟고 러시아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3시간 남짓이었다. 500미터 남짓 국경을 넘는데 3시간이나 걸리니(거의 대기줄이 없었음에도) 자주 넘어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피곤할지.국경검문소를 넘을 때마다 그곳 직원들의 반복된 질문이 바로 ‘영문차량등록증’이 진짜냐는 것. 외국으로 오토바이(차량도 마찬가지)를 가지고 나가기 위해선 차량등록사업소에 가서(면 단위는 면사무소) 영문차량등록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직인만 찍혀있다 뿐이지 정식 공문서로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 그들 입장에선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원래 차량등록증도 마찬가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토바이나 차를 가지고 떠난 분들이 흔히 겪는 경험이다. 육지로 이동할 수 없는 섬이나 마찬가지인 우리에게 영문차량등록증이 필요한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극소수를 위해 제대로 만든 공문서 양식을 만드는 건 행정력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자유롭게 차량이 이동할 수 있는 시절은 아니지만 미리 이런 사소한 것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양식을 참고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고 자유롭게 아시아와 유럽을 다닐 날이 오지 않겠나. 에스토니아 검문소에서도 러시아 검문소에서도 차량등록증의 진위 여부를 가리느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통관 서류부터 보험 서류까지 모두 보여야 했고. 특히 ‘도큐먼트’를 중요시하는 러시아나 구 소련권 국가의 공무원들은 우리네 차량등록증의 수준(?)을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항상 의심 받는 영문차량등록증국경통과에 시간이 한참이나 걸리고 소나기까지 맞았지만 러시아에 오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많은 나라를 여행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성향이랄까. 러시아를 달리며 날씨로 고생한 것을 제외하곤 꽤 편안하게 다녔다. 러시아가 좋았던 이유는 역시나 물가가 저렴한 탓이었고,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토바이 여행자에게 친절했던 사람들을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만난 탓이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것도 마음이 편안 이유 중 하나겠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선 배를 개조해 만든 숙소에 짐을 풀었는데 1박에 7천 원 정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에 이런 가격으로 묵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일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들어오면서 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페트로 그라츠키 섬(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여러 개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으로 들어오면서 거리에 비해 꽤 비싼 통행료를 냈다. 러시아에선 유료 도로를 이용한 적이 없었는데 에스토니아의 국경도시 나르바를 통과해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180킬로미터로 짧은 거리였지만 국경을 통과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도심을 관통하는 길은 포기했다.만약 도심을 통과하면 예상보다 늦게 숙소에 도착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유료 도로를 벗어나 숙소를 찾기 위해 도심으로 들어오자마자 길을 잘못 들어 고생했을 뿐 아니라 숙소를 찾지 못해 또 길을 헤매느라 시간을 허비했다.네바강 지류에 떠있는 배가 숙소였던지라 배를 매어둔 선착장 입구를 찾지 못하고 그 주위를 계속 맴돌기만 했다. 오토바이를 세울만한 장소를 찾느라 또 이리저리 다니느라 녹초가 되어버렸다. 숙소 직원에게 길가에 주차된 오토바이 사진을 보여주며 괜찮은지 물었지만 문제가 생겨도 책임질 수 없다고 최대한 숙소 가까이 가져다 놓으란 이야기만 들었다. 하지만 더는 움직일 힘도 없어 그대로 방에 들어가 씻지도 않고 슈트를 입은 채로 누웠다.◇ 표트르 대제의 야망이 만든 도시, 상트 페테르부르크상트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13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그로부터 1917년 3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거쳐 로마노프 왕조가 끝나고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고 1918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러시아 제국의 중심지였다.표트르 대제는 유럽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네바 강의 하류, 핀란드 만과 접한 습지였던 이곳을 개발해 도시를 세우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들였다. 습지를 메워 건물을 짓기 위해 기반을 닦을 엄청난 석재가 필요했는데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과 배에 일정 무게 이상의 돌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표트르 대제가 모스크바를 두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수도로 삼기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그가 어린 시절 이복누이 소피아 공주의 쿠데타로 크렘린 궁에서 쫓겨나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았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그는 외국인 거주지에서 살던 청소년기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이주해온 기술자들과 교류하며 석공과 목공뿐만 아니라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데 열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변방으로 힘이 없었던 러시아를 어떻게든 유럽에 편입시키고 영토를 넓히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꿈은 그 시절부터 키웠던 것이고, 말년에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거대한 토목공사에 집착했던 이유는 낡은 것을 버린 새로운 러시아의 상징을 자신이 죽기 전에 남기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유럽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왕위를 물려받을 황태자를 죽음으로 몰고 수많은 반대자를 처형했으며, 토목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반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민중들의 고혈을 짜내 도시와 성을 만드는 토목공사는 결국 권력자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침대에 누워 지도를 보며 지금까지 달려왔던 길과 그동안 저질렀던 실수들을 천천히 복기했다. 이제 출발해서 달려왔던 1만㎞를 그대로 따라가면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오토바이를 받아 시동을 걸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80일, 3만㎞ 가까이 달렸다.러시아나 유럽을 제대로 보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는 게 두고두고 안타깝다. ‘주마간산’은 나 같은 경우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 /조경국

2020-07-07

“취임 초기 약속한 ‘더 큰 고령, 더 행복한 군민’ 완성 최선”

곽용환 고령군수는 민선 7기 후반기 군정목표로 코로나 극복과 살기 좋은 부자 농촌 건설에 매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곽 군수는 “코로나19가 불러온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성원을 보내준 군민 여러분과 군의회, 공직자들께 감사드린다”며 “세계적 위기상황 속에서도 모두가 힘을 합쳐 어려운 시기를 슬기롭게 이겨내자”고 역설했다.곽 군수는 이어 “향후 정부의 한국판 뉴딜 정책에 맞춰 전략사업의 내용을 수정·보완해 나갈 계획”이라며 “문화·교육·교통 등 일상생활에서 군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대책 마련에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곽 군수는 “취임 초기 약속한 ‘더 큰 고령, 더 행복한 군민’이란 슬로건의 완성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며 “초심을 지켜가는 자세로 주민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활력 있는 지역경제국가균형발전과 광역교통, 물류망 구축을 주도할 남부내륙 철도와 달빛내륙철도 고령역 유치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남부내륙고속철도 고령역사 유치 전 군민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고령역의 경제성과 연계성, 접근성 등 장점을 적극적으로 알릴 계획이다.군민 누구나 품격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문화체육, 보육의료, 복지시설 등 생활필수 인프라를 복합적으로 구축하는 생활SOC 사업도 추진한다. 생활SOC 복합화 시설을 통해 삶의 질 향상과 군민 소통·화합의 공간이 마련될 수 있도록 맞춤형 사업 발굴과 국비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령경제의 큰 축인 낙동강 경제벨트 완성과 레저산업의 활성화도 주요 과제이다. 공장 설립·등록 인허가 원스톱 서비스 확대, 중소기업 운전자금 확대, 지역 특화산업 육성으로 기업하기 좋은 환경도 만들어갈 방침이다. 사회적 기업 및 마을기업 육성사업과 도시청년 시골파견제 사업 등 공공과 민간부문에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도 소홀하지 않는다는 게 고령군의 각오다.□ 세계 속의 문화관광코로나19 사태의 어려움을 속에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합한 청정 자연관광, 열린 관광, 거리두기 관광 등의 환경을 두루 갖추기 위해 노력 중이다.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른 디지털, 비대면, 저밀도, 건강 등의 키워드에도 주목하고 있다.지산동 대가야고분군은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역사문화권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대통령이 공포하면서 가야사 복원 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경북 환동해시대를 맞아 대가야 국제교류에 대한 연구와 해양교류사 재조명사업을 통해 대가야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것도 군의 계획이다. 이는 대가야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역사문화클러스터 조성사업과 지역관광추진조직 육성지원 공모사업도 힘을 받고 있다. 야영장 활성화 프로그램 등 고령만의 독특한 관광상품도 지속적으로 발굴할 방침이다. 이에 더해 대가야문화누리와 다산면 행정복합타운을 중심으로 수요자별 맞춤형 문화체육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살기 좋은 희망농촌농산물의 판로 확보와 산지 마케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역 농협을 통한 통합마케팅을 추진한다. 고령군 APC, 다산농협 APC, 쌍림농협 APC 등이 앞장서고 있다. 각종 직거래장터와 박람회, 축제 참가를 지원하고 우곡수박·개진감자 직판장도 운영한다. 해외시장 개척에도 더욱 노력할 예정이다.양파·마늘 농가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밭작물 공동경영체 육성지원사업’에도 공모했다. 기후변화 대응 작물 개발로 미래농업의 성장동력을 확보하는 분야에서의 노력도 이어진다. 고품질 식량작물 기술보급, 토양검정실 미생물 배양실 등 과학영농기반도 중단 없이 구축되고 있다.쾌적한 농촌 환경 조성에도 관심을 쏟는다. 영농기반확충정비사업, 재해예방노후수리시설정비사업, 노후위험저수지정비사업 등이 그 실제적 사례다. 고령 농업의 부가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한 대가야농업기술대학 운영도 이어진다. 예비 귀농 희망자 영농기초 교육과 재배기술 멘토·멘티 운영도 고령군의 주요 농업정책 중 하나다.□ 공존하는 안전도시대가야읍 중심지역은 국토교통부가 실시한 2019년 도시재생뉴딜 공모사업에 최종 선정돼 사업비 133억 원을 확보했다. 앞으로 3년에 걸쳐 생활서비스 복합화와 상권브랜드 구축을 통한 도시경쟁력 강화사업이 진행된다.국지도 67호선 운수~용암 구간 조기 개통, 개진 열뫼~박석진교~현풍 구간 광역도로 개설 등 교통인프라도 새롭게 구축한다. 대가야읍, 다산면, 개진면 일원엔 연차별로 도시가스 공급이 확대되고 있다. 또한 권역별 마을 하수 처리시설 확대로 쾌적한 생활공간을 만든다.고령군은 환경부에서 공모한 노후상수도 정비사업에도 선정돼 올해부터 5년간 80억 원을 투입해 중점관리구역, 상습누수지역 등 교체가 시급한 노후 상수도관로 15.3km를 정비할 계획이다.여가와 휴식이 있는 삶을 위해 대가야읍 중화저수지에 생태습지, 생태관찰데크, 소리숲, 생태둘레길 등을 포함한 생태공원을 조성 중이기도 하다. 지난해엔 환경부 공모사업으로 소가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선정됐다. 이를 통해 덕곡면 원송리에서 후암리에 이르는 6.5km 구간이 생태복원을 추진 중이다.□ 희망·나눔 맞춤복지2014년 시작된 대가야희망플러스는 지역연계 모금사업으로 소외된 복지 사각지대 이웃을 위해 생계비, 의료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 대가야읍과 다산면엔 맞춤형 복지팀이 추가로 설치돼 주민의 복지체감도 향상과 복지사각지대 해소에 기여하고 있다. 8개 읍면에 총 4개의 맞춤형 복지팀을 운용해 ‘찾아가는 복지서비스’도 제공 중이다.지난해 12월 개관한 아이나라 키즈교육센터는 장난감도서관, 놀이공간과 교육실로 구성된 교육·문화 복합문화공간. 아동 복지환경 개선과 젊은 세대의 인구 유출을 방지하는데 기여한다는 게 고령군의 부연이다.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가임 여성의 비율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실에서 저출산 극복은 국가와 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고령 만들기’를 슬로건으로 보건소 1층에 마련한 출산통합지원센터는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원스톱 통합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2018년 경북에서 처음으로 치매안심센터를 개소한 고령군은 치매 예방은 물론 치매 환자와 가족들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다. 다문화가족의 안정적 정착과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서는 방문교육 서비스, 한국어교육, 다문화가족 공부방 운영, 이중언어강사 일자리창출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소통하는 열린 행정고령군은 경북 23개 시·군 중 9위, 군부 중 3위의 건전한 재정 운영을 하고 있다. 국비확보에도 총력을 기울여 예산 3천억 원 시대를 열었다.고령군의 공감행정은 지역 현안에 대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기에 군민들의 만족도가 높다.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 SNS, 웹진 등 뉴미디어도 적극 활용 중이다. 고령군교육발전위원회는 군민들의 참여로 교육발전기금 270억 원을 모금했다. 이는 교육환경 개선과 우수인재 유출 방지를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역량강화 프로그램의 추진과 관내 청소년 우호기업 발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단순한 직업훈련에 그치지 않고 실제 사업장에 투입돼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인턴십은 학교 밖 청소년들의 자립 동기 강화와 사회적응에 도움을 주고 있다.주민들에게 평생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읍면별 마을평생학습축제도 개최했다. 평생교육활성화 지원공모사업에 선정돼 덕곡면과 쌍림면이 각 마을당 사업비 2천만 원 지원받았고 현재 다양한 사업이 진행 중이다./전병휴기자 kr5853@kbmaeil.com

2020-07-07

부용대와 만송정, 그리고 이름만으로 가슴 울리는 하회

우리나라 수많은 마을 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마을이 안동 하회마을이다. 우뚝 솟은 절벽, 마을을 감싸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옛 마을의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명재상 유성룡이란 대스타 때문이다. 스승 퇴계가 건축에 깊은 애착을 가졌듯이 서애도 30살에 낙수(落水)의 서쪽 언덕 밑에 서당을 지으려 할 정도로 건축에 일가견이 있다.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호를 서애(西厓·서쪽 언덕)라 했다. 서애는 풍산에서 옮긴 병산서원 장소도 정해주었고, 원지정사도 지었으며 말년에 옥련정사도 지었다.#. 흐르는 강물, 부용대와 겸암정사하회, 이름만으로 가슴이 울리던 곳이다. 필자가 1985년에 처음 왔을 때 순수했던 하회마을은 눈물 나는 정겨움이었다. 그 뒤 많이도 와 보았지만 외부에 알려질수록 비례하여 점점 빤질빤질하게 망가져 지금은 철저히 상업화되어 자연 경관만 거시적으로 보고 미시적인 마을 구석구석은 보지 않는다. 오늘도 마을입구에서 마을을 피하고 강둑을 걸었다. 하얀 연꽃이 활짝 피어 여름의 서곡을 알리고 강둑의 벚나무도 세월이 흘러 굵은 나무에 잎이 무성하여 햇볕도 막아주고 바람도 일렁거린다. 하얀 백사장과 흘러가는 강물을 보니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눈물 나는 동요가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깊은 정서의 우물로 빨려 들어간다.하회마을의 압권은 강 건너 조용히 서있는 부용대 바위다. 마을이 속세라면 강과 부용대는 극락인데 만송정 솔숲이 속세와 극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예전에는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면 지금은 섶다리를 놓아 걸어가는 낭만도 있고 부용대 가기도 쉬워졌다. 고운 모래를 적시고 흘러가는 강물은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강물에 뛰어내리고 싶지만 마음만 강물에 적시고 부용대로 올랐다. 짜릿한 긴장감이 강물에 휘감긴다. 절벽 아래로 강물보다 넓은 백사장과 만송정, 기와집과 초가집이 적당히 어우러진 하회마을이 꿈결마냥 속삭이듯 고요히 숨 쉬고 있다. 올려다보는 앙시법(仰視法)은 우러러 보는 맛이 있지만, 이처럼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은 드라마틱한 아름다움을 던져준다. 부용대 절벽 산길 타고 적당히 내려가면 은자가 조용히 사색하며 학문을 펼칠 수 있는 겸암정사가 나온다. 서애의 형 겸암 유운룡((1539~1601)이 1567년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을 위해 지었고 하회마을 앞의 만송정 솔숲도 조성했다. 겸암은 16살 때부터 퇴계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31살에 또다시 향시에 합격하자 퇴계가 너무 연연한다고 나무라자 벼슬에 뜻을 접었다. 퇴계가 죽고 34살에 아버지의 권고로 고관의 자손에게 주어지는 음직(蔭職)으로 낮은 벼슬을 시작한다. 1584년, 46살에 동생 서애는 판서의 직위에 있을 때 인동현감을 6년 한다. 이때 목민관으로 경위표를 만들어 세금부정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선정비를 세워준다. 이 경위표에 힌트를 얻은 다산 정약용이 목민심서에서 새로운 경위표를 만들었다.명리를 떠나 민중을 위해 선정을 베푼 목민관으로 서애를 큰 인물로 키우는 뒷받침을 했고, 징비록 내용 일부는 겸암의 조언이 들어있다. 주인도 출타중이고 겸암도 떠난 정자에 올라 필자가 여러 번 여기에 앉아 특강했던 기억이 새롭고, 정자를 반질반질하게 잘 관리해놓은 후손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서애와 옥련정사겸암정사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화천서원을 지나 옥련정사에 갔다. 서애가 1589년에 지은 집인데 단단하고 기품 있게 잘 지었다. 지금은 담장을 수리 중이었고 휘어진 소나무는 옥련정사를 더욱 품격 있게 한다.지승유인(地勝由人),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명승지가 된다는 말이 있듯이 하회마을이 자연경관도 뛰어나지만 서애가 없었다면 하회의 명성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서애는 어떤 사람인가.“천자(天資)가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학문을 열심히 익혀 종일 단정히 앉아 있으면서 몸을 비틀거나 기댄 적이 없으며, 남들을 대할 적에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고 말수가 적었다.” 한편 “이해가 앞에 닥치면 동요를 보였기 때문에, 임금의 신임을 오래 얻었으나 곧은 말을 드린 적이 별로 없었고, 정사를 오래 맡았으나 잘못된 풍습을 구해내지 못하였다.” 이렇게 상반된 인물평을 ‘선조신록’에는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공통적으로‘총명하고 기상은 활달하였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박식하여 사람을 탄복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고 했다.서애는 외가인 의성현 사촌리에서 강원도 관찰사 유중영의 둘째로 태어나 21살 때 퇴계 문하에 들어간다. 그가 주자의‘근사록(近思錄)’을 들고 퇴계에게 요목(要目)을 물어나가자 퇴계는 “이 젊은이는 하늘이 낸 사람이다”며 칭찬하였다. 25살 때 별시문과 병과로 합격하여 과직에 나가 영의정 하는 51살 때까지 당쟁의 소용돌이에서도 난관을 잘 헤쳐 나가 27년간 고위관리로 순탄한 벼슬을 지냈다. 서애가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총괄하여 극복하였으나 전란 중 화의를 주장했다고 파직되어 이곳에 조용히 지내면서 전쟁 때 백성들의 고통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의 교훈을 적은‘징비록’을 완성한다.#. 전쟁의 참혹함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의 침략정보가 있었지만, 학봉 김성일이 일본의 침략은 절대 없다는 결정적 잘못된 보고로 전쟁대비도 제대로 못한 원인도 있지만, 속수무책으로 참혹하게 당한 것은 선조의 무능과 동, 서로 갈라진 당파싸움, 그리고 썩은 관료들 때문이었다.율곡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의 한 사람이면서 임진왜란 때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1천700여 명을 모아서 승병들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고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으로 향하다가 그의 전공을 시기한 관군의 방해로 대부분의 의병들이 해산되고 겨우 700여 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던 중봉 조헌(1544~1592)이 전쟁 중에 올린 상소를 보자. 1583년 북쪽 오랑캐가 침입했을 때 백성들로부터 신의를 잃은데 있다고 보았다.그때 상민은 양민으로 올려주고 벼슬길도 열어준다고 했고, 군량을 바치는 자도 서얼의 신분을 면해주고 벼슬길도 열어 주겠다고 하여 용기 내어 적의 머리를 베어왔으며, 군량을 가진 자들은 재산을 다 털어 먼 경원까지 실어와 바쳤다. 그러나 전란이 평정된 후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싸운 자의 공은 인솔 장수 정언신(1529~1591)에게만 돌아가 북도의 용사들은 배신감에 원한을 삭였다. 조헌의 길고 긴 상소문을 보면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그는 “하찮은 종이라도 공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어 우러러보는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소서.”라고 절규했다.같은 시대 조선 중기 한문 4대가로 정주학자인 영의정 신흠(1566~1628)도 “오늘날 벼슬아치들을 보면 거의가 뇌물을 쓰고 등용된 자이거나, 아니면 임금의 사랑을 받는 권력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권력자가 뒤를 봐주는 자들이다.” 뇌물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탐욕으로 끝나고, 권력에서 시작한 자는 항상 포악으로 끝난다 했다.임란 당시 서울의 참혹함을 서애는 “1592년(선조 25) 4월 30일 임금의 어가가 서울을 빠져 나가자 백성들은 맨 먼저 장예원과 형조(법무부)를 불태웠는데, 이 두 곳이 공,사 노비들의 문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을 불태워 궁궐이라고는 하나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리고 왕세자 임해군의 저택과 병조판서(국방부장관) 홍여순의 집이 불탔는데 모두 적들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백성들이 태웠던 것이다.” 잠시 떠났던 백성들도 돌아와 적들과 함께 물품을 매매하고 점포들은 사람들도 가득찼고, 적첩(신분증)을 주어 자유롭게 출입하니 적들의 노역에 순종했다. 심지어 “누군가가 적을 죽이려 계획하면 밀고하여 그를 잡아다가 종루 앞이나 숭례문 밖에서 참혹하게 불로 지져 죽였다.” 왜군들이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하룻밤에 성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려 얼마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백성 중에는 굶주림과 유행병으로 죽은 자가 열 명 중에 팔, 구명이나 되었다면서 “결국 우리 백성들은 더할 수 없이 큰 액운을 당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라지만 이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해 놓았다.서애의 이엽의 죽음에 관한 기록을 보자. 포로로 잡혀가서 수군대장이라고 하니 풍신수길이 매우 융성하게 대접해주고 은과 비단 등도 주고 큰 집을 주어 편히 살도록 했다. 이엽은 그 물품들을 일본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환심을 사고 붙잡혀온 백성 수십 명과 도망치려다 현상금 쌀 200석에 우리 백성이 밀고하여 이엽은 배를 찔러 자결하고 나머지는 다 붙잡혔다. 왜장은 죽은 이엽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풍신수길에게 보고 한 뒤 그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매어달고, 잡혀온 수 십 명은 산채로 불태워 매우 참혹하게 죽였다.당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조헌은 적과 화친을 주장하다가 적을 불러들인 서애를 진회보다 더 크다고 했고, 정여립 사건 때 수많은 인재들 1천 여 명이 옥사당할 때 동인을 구해주지 않았다고 비난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학봉을 잡아오라고 하여 압송되어올 때 서애는 적극적으로 변호하여 직산까지 잡혀오던 학봉을 경상도 초유사로 보내게 하고 그가 죽자“평생 동안의 지우는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통곡하는 뜨거운 우정도 있었다.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서애는 국난극복의 총 지휘자로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2020-07-07

“호국도시 칠곡으로… 혁신·변화로 살맛나는 도시 건설”

일명 ‘행정통’이라 불리우는 백선기 칠곡군수가 민선7기 2주년을 맞았다. 지난 2011년 10·26 재보선에서 칠곡군수로 당선돼 지금까지 3선에 성공하면서 칠곡군의 혁신과 변화를 이끌고 있다. 특히, 전국 1위의 채무도시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던 칠곡을 ‘일반채무 제로’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고 ‘칠곡 왜관 = 미군부대’라는 지역 이미지를 ‘칠곡군 = 호국도시’로도 바꾸는데 성공했다.- 민선7기 2주년을 맞은 소감은.△그동안 어떻게 달려 왔는데 이번 기회에 한번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공직자로서 맡은 일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보람된 일도 많았지만 부끄러운 부분도 많았다. 아직 부족한게 많고 더욱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군수 생활을 하면서 진정으로 군민들로부터 많은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게 됐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많은 생각과 감회가 있지만, 이제는 남은 2년을 어떻게 잘 마무리하는가에 역점을 두고 일을 진행하려 한다.- 칠곡군수로서 가장 보람된 일은.△아직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재정위기를 극복하고 군비부담 ‘일반체무 제로’를 달성한 것이다. 2011년 10월 군수로 취임을 하고 보니 칠곡군이 예산 대비 채무 비율이 21.1%로 전국 82개 군 중 최고 높았다. 말그대로 전국 1위였다.군 재정이라는게 가정살림이랑 똑같다. 가정주부가 알뜰하게 살면서 단돈 얼마라도 저축을 할 여유가 있어야 살림을 꾸려나갈 재미가 있는데, 빚 갚기에도 빠듯하니 정말 아찔했다. 지금처럼 금리가 1%대 라면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지만, 당시에는 이자 비율이 가장 저렴한 것이 6∼7%대 였다. 그러다보니 이자만 1년에 50억원 이상이었다.주민 1인당 채무가 60만원으로 전국 군 평균보다 2배나 높았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서 살림살이를 나아지도록 해야했다. 허리를 졸라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든 돈이 되는 사업들을 만들어야 했다.그러다보니 공무원들이 애를 많이 먹었다. 사업을 발굴하고 진행시키려니 일이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다.그래도 그런 사업들이 큰 성과를 냈으니, 공직자로서 보람이 클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인사를 해애할 분이 있다. 칠곡군의 채무제로의 가장 큰 공신은 사실상 김관용 전 경북지사이다. 호국관련 사업들을 한다고 했을때 김 전 지사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사실상 채무제로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가장 힘들었다기보다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바로 우리지역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였다. 다른 시설도 아닌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발병을 하다보니 여러 어려움과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당시 시설 관계자들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난 뒤 자연휴양림에서 2주동안 자체 자가격리를 하도록 했는데, 그때도 5명이나 재양성자가 나왔다. 만약 그때 자체 자가격리를 하지 않았다면 또다시 확산될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그 어려운 시기에 힘과 용기를 보내준 많은 군민과 국민들을 보면서 코로나19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됐다.- 부족한 예산에 대한 대책은.△민감한 사안이다. 칠곡군의 올해 교부세가 62억원이나 줄었고, 내년에는 73억원이 줄어든다. 중앙정부가 전체 예산을 줄였으니 달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재정상황이 안좋은 지방의 자치단체들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군 예산을 줄이기도 힘들다. 예산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은 매우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농업분야, 경제분야는 사실상 군 자체사업이 거의 없고, 대부분 중앙정부나 도의 보조금으로 이뤄진 보조사업이다보니 줄일 수가 없다. 사실 이 부분은 칠곡군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장군수협의회를 통해 대책을 찾으려고 한다.지난달 29일 ‘민선7기 후반기 경북시장군수협의회 회장’에 만장일치로 저를 추대해 주셨는데, 이는 제가 앞으로 선출직에 나갈 사람도 아니고, 그동안 쌓은 행정경험 등을 지역을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도비보조사업을 공론화 시켜 현실적인 방안을 찾으려고 한다.현재 국비보조사업의 경우 사업비 중 국비 50%, 도비 15%, 군비 35%의 매칭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국비보조금만 두고 보면 도비와 군비의 비율이 3대7의 비율인데 도비보조사업의 경우에도 국비보조금 사업과 같은 3대7의 매칭비율을 적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관행이다. 보조사업이면 보조하는 곳에서 최소한 사업비의 반을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국비보조사업도 50%를 부담하는만큼 도비보조사업도 최소한 50%는 부담해야 도비보조라는 의미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도의 재정도 녹록치 않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점을 그대로 유지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는 8월에 시장군수협의회 후반기 첫 회의가 열리는데 그때 이 사안을 적극 논의할 생각이다.- 경북시장군수협의회장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그동안 시장군수협의회는 각 시군에서 도나 중앙에 건의할 사항들을 결정하는 정도의 일만 해왔다.하지만, 이제는 진짜 도가 우리 시군의 애로사항을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하겠다. 그리고 도에서도 애로사항이 있다면 와서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되도록 하겠다. 시장군수협의회가 2달에 한번씩 열리는데 그동안 제대로 된 소통이 없었다.하나 예를 들면 코로나 발생 전 시도 통합문제에 대해 도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우리 시군과 한번도 논의하지 않았다. 이건 바람직하지 않다. 도가 일을 하기 위해선 23개 시군의 협조를 받아야 할 때도 있고, 시군도 도의 협조를 받을 일이 있다. 이런 소통부재는 시장·군수의 불만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시군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건의를 하면 도 실무자만 검토하고 위로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보니 도지사, 부지사 등과 시장·군수가 지역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가 있어도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시장군수협의회에서 건의된 사항들은 부지사까지 보고가 되도록 하겠다.도에서 오랜 근무한 경험과 지사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도와 시군이 서로 신뢰하고 소통하는 중간자 역할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앞으로의 계획은.△3선의 군수로서 남은 2년의 임기동안 진행되고 있는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다.현재 재정상태도 좋지 않은데 마무리를 잘 해놓지 않는다면 후임자가 애를 먹게 된다. 그래서 민선 7기 후반기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면서 현안 사업과 공약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할 생각이다.특히 U자형칠곡관광벨트 완성과 지속가능한 일자리창출 및 지역경제 살리기 집중, 군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안전도시 칠곡 건설, 소득과 삶의 질이 향상된 살맛나는 부자농촌 칠곡 완성, 군민의 복지 체감온도를 올리는 따뜻한 복지도시 건설, 군민 누구나 참여하고 공감하는 군정혁신 등을 주력해 나갈 계획이다.이 중에서도 U자형칠곡관광벨트는 본인의 공약사업이자 9년에 동안 추진한 역점 사업이다. 이 관광벨트가 완성되면 호국평화를 테마로 한 맞춤형 체험관광 산업으로 지역 정체성 확보와 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남은 2년 항상 그래왔듯이 군민들의 행복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0-07-06

“시민 중심 소통, 다양한 방식의 지속발전가능한 도시로”

경북지역 유일의 여당 시장으로 큰 관심을 받았던 장세용 구미시장이 임기 절반을 보냈다. 그동안 보수의 상징으로 불리우던 구미에서 진보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시장으로 구미시를 이끌면서 초반에는 말도 탈도 많았다. 하지만, 도시재생의 전문가답게 차츰 구미시를 재생시켜 나갔다. 전국 최초로 LG화학과 상생형 구미일자리를 구축해 추진하고 있고, 미래형 스마트산단,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또 무상급식, 출산축하금 확대 지원 등 보편적 복지체계도 구축했다. 민선7기 2주년을 맞아 다른 지자체장들은 새로운 사업들을 앞다퉈 발표하는 가운데 장 시장은 남은 임기동안 새로운 사업보다는 현재 진행 중인 사업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고 선언했다. 초선인 장 시장을 만나 그 이유와 앞으로 2년간 구미를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를 들어봤다.-민선7기 2주년을 맞은 소감은△솔직히 너무 힘들게 2년을 보냈다. 내가 원헀던 바가 아닌 것으로 괜한 오해와 억측, 그런 것 때문에 처음 속앓이를 많이 했다. 그로인해 불필요한 시간 낭비도 많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공격하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 정치에 많은 실망감으로 좌절도 했다. 하지만, 나를 끝까지 믿고 응원해 주시는 시민들이 계셨기에 그 모든걸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런 시민들을 보면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내가 구미시장이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시민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구미시민들로 인해 2년을 잘 버텨왔다. 앞으로 2년도 구미시민들을 위해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겠다.-2년 동안의 성과를 정리하자면△지난 2년간 중앙정부와 국회를 수시로 방문하면서 구미의 미래 먹거리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을 확충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상생형 구미일자리, 구미 스마트산업단지 조성, 경북 산단 대개조사업, 도시재생 혁신지구 국가시범지구사업, 홀로그램 기술개발사업, 푸드플랜 패키지 지원사업 등 정부의 대형 국책사업에 연이어 선정되면서 미래먹거리의 기반을 만들었다.또 1조2천억원 규모의 에너지센터 건설 투자협약 체결 등 국내외 투자유치 2조1천682억원을 달성하는 등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노력했다.이밖에도 5G기반 VR·AR 디바이스 개발지원센터 운영과 홀로그램 기반 기술개발 사업, 지역산업거점 스마트 특성화 지원사업, 로봇직업혁신센터 구축사업 추진으로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신성장동력을 꾸준히 확충했다.-경기침체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시민들을 위해 모든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우선 시민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하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고자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구미시는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 구미사랑상품권 490억원을 발행하고 가맹점 1만개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이차보전 지원을 확대하고 전통시장 이용 활성화를 위한 각종 특화사업을 추진하는 등 민생경제 활력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또 고용안정 선제대응 패키지 지원사업(7천명 고용창출), 지역거점형 콘텐츠기업육성센터 조성사업(청년일자리 2천500개 창출), 구미형 청년연구인력 지원사업 등 맞춤형 일자리 특화사업 추진으로 서민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밖에도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는데 노력할 것이다. 지난 1일 민선7기 3년차를 투자기업 3개사와 6천690억원 투자양해각서 체결로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전례 없이 차갑게 얼어붙은 구미공단에 단비와도 같은 소식이었다. 앞서 지난 1월에는 700억원 규모의 이차전지기업 투자유치, 4월에는 1조 2천억 에너지센터 건설사업을 유치했다. 기업투자 유치와 더불어 전통적인 건설과 토목사업도 진행해 나가도록 해 현금이 지역에 돌도록 할 계획이다.-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은△대구·경북 통합신공항 이전 문제라고 생각한다. 통합신공항이 당초 예정부지로 들어온다면 구미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에 속히 이 문제가 원할하게 해결되길 희망한다. 통합신공항은 사실 구미의 가장 큰 현안이라고 할 수 있는 5공단 분양 문제와도 직결돼 있다. 통합신공항 문제가 속히 해결이 된다면 그로 인한 여러 복합적인 교통편의와 인센티브 등으로 기업유치가 수월할 것이다. 또한 통합신공항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구미시와 군위군의 합병문제를 논의해 볼 계획이다. 통합신공항 이전 문제가 논의되기 전 군위군수를 만났을 당시 공항이전 문제가 결정 된 후 논의하기로 했었다. 만약 통합신공항이 결정되고 구미와 군위의 통합이 본격적으로 논의가 된다면 아직 계획이긴 하지만 6공단 설립도 추진할 것이다. 6공단은 현 군위지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시민들과의 소통은 어떻게△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구미시장을 되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구미시민이었다. 그만큼 시민들과의 소통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지난 1일 ‘온택트 시민공감 정책토크’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온택트는 비대면을 일컫는 ‘언택트(Untact)’에 온라인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On)’을 더한 개념으로, 온라인을 통해 대면하는 방식을 뜻한다.경북 최초로 실시간 방송을 통해 진행된 이날 행사는 시민들의 댓글, 사전질문에 본인이 즉문즉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400여명의 시민들이 참여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부족한게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고, 앞으로 개선해 나갈 계획이다. 지난 2년간의 시정 운영에 대해 개인적으로 반성할 수 있는 계기도 됐다.앞으로도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을 찾아 실천해 나갈 것임을 약속한다.-구미시장으로서 가장 힘들었던 점과 앞으로의 계획은△시장으로서 힘든 점은 너무 많아 다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웃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점이라면 구미시의 재정 문제을 꼽을 수 있다. 그동안 구미시는 재정자립도가 높다는 이유로 교부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본인이 처음 시장으로 취임한 2년 전 구미시의 교부세는 500억원이 되지 못했다. 지금은 1천억원까지 끌어 올렸지만, 만족할 상황이 못된다.또 구미시는 돈이 많은 지자체도 아니다. 값어치가 나가는 시유지가 없는 실정이다. 요지에 시유지가 있어야 정부의 주요 공모사업들을 가져 오기가 수월한데, 구미시는 어떻게 된 것인지 쓸만한 시유지가 거의 없다. 시장이 되고 나서 이런 사실에 놀랐고 실망스러웠다. 대한민국의 최고의 산업도시라고 자부하는 구미시의 현실이 너무 참혹했다. 그렇다고 불평만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정부의 돈을 많이 받아오는 방법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다. 지금은 정부가 그냥 돈을 주지 않는다. 공모를 통해 사업을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미에 대한 대내외적인 평가를 잘 받아야한다. 지속적인 발전가능성이 있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남은 2년동안 구미의 성격을 다양화 시키는데 총력을 모을 계획이다. 도시의 다양성이 기업의 유연화로 이어져 인구 50만 시대를 열 수 있도록 하겠다./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20-07-05

시내 한복판 담장 너머 거대한 능 수십 기… 역사를 품다

“벚꽃이 흐드러졌을 때 여기 못 와보셨죠? 아이고, 그때 오셔야 했는데…. 올해는 나라 전체가 바이러스로 난리가 나서 어쩔 수 없었겠지만, 내년에 꼭 한 번 다시 오세요. 아마, 풍경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릉원 돌담길로 가는 5분 남짓의 짧은 시간. 나이 지긋한 택시기사 아저씨의 자랑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게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일까? 웃음 섞인 그의 이야기가 듣기 좋았다.난분분 춤추는 벚꽃 잎으로 환히 불 밝히는 봄날의 대릉원 돌담길은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다른 계절의 아름다움이 그것만 못할까. 그렇지 않았다.장마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일기 예보에 우산을 챙겨 들고 나선 길. 다행히 굵은 빗방울과 만나지는 않았다.대릉원 후문에서 시작돼 500m쯤을 이어지는 돌담길. 여름날의 대릉원도 봄의 대릉원 못지않았다. 여행자의 취향에 따라선 오히려 인적 드문 길의 호젓함이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을 듯했다.‘경주를 경주답게 해주는 최고의 유적’이라 할 고분(古墳) 스물세 기가 높낮이를 달리하며 진기한 풍광을 만드는 대릉원. 그 정취를 만끽하며 걸을 수 있는 대릉원 돌담길.천마총과 황남대총, 미추왕릉은 물론, 철마다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이 어우러져 최고의 포토 존을 만들어내는 이곳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서라벌 최고 관광지’ 중 하나다.벚꽃, 목련, 백일홍이 그 자태를 뽐낸 후에는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여행자를 유혹하고, 날씨가 추워져 눈이 내릴 때면 설경(雪景) 또한 그저 그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매력이 각기 다른 ‘사계절 관광지’라는 말.일상을 벗어난 여유로운 오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대릉원 돌담길을 걸었다.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가끔씩 담 너머로 수줍게 고개를 내미는 고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담벼락에 새겨진 여러 편의 시(詩)를 읽으며,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벚나무 수백 그루와 동행했기 때문이다.◆낭만 넘치는 돌담길을 지나 대릉원 입구로대릉원 후문에서 시작되는 돌담길을 따라 느긋하게 10여 분을 걸으면 주차장에 인접한 정문이 나타난다. 입장권을 판매하는 매표소도 있다. 이쯤에서 대릉원이 어떤 곳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신라고분발굴조사단 심현철의 논문 ‘경주분지의 고지형과 대릉원 일원 신라 고분의 입지’ 도입부를 인용한다.“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지역에는 수백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고분들이 축조되었다. 이 중 신라의 최고 지배계층인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은 대단위 토목공사를 통해 완성된 거대한 토목구조물로서 현재까지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릉원 일원의 고분군에 대한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이 일대에 조영된 고분의 주 묘제가 적석목곽묘(신라 특유의 양식으로 지하에 구덩이를 파거나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사람 머리 크기의 자갈을 덮은 후 그 위에 흙을 입혀 다진 무덤)라는 것과 일부 석실묘, 그리고 그 하부와 주변에 목곽묘, 석곽묘 등이 축조되었다는 점이다.”시내 한복판에 작은 산처럼 거대한 봉분 수십 기가 솟아있고, 그 아래로 자전거를 탄 관광객과 시민들이 오가는 모습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경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놀라며 감탄사를 터뜨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망설이지 않고 사적 제512호인 대릉원 안으로 들어섰다. 대릉원이란 이름은 ‘미추 이사금을 대릉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지었다고 한다.아주 오래 전부터 서라벌의 역사를 지켜봤을 나이 많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황남대총의 웅장함과 거기서 미추왕릉으로 가는 흙길에서 풍겨오는 초여름 향기를 즐겼다.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대릉원이 위치한 곳은 1천500여 년 전에도 지금과 같은 묘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천년 역사의 아득한 저편을 떠올리며 걷는 연인 몇 쌍의 표정이 밝고도 진지했다.대릉원 일대의 유택들은 문자화된 기록(비석 등)이 없어 조성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다만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볼 때 대략 서기 4~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천마총, 고대 고분의 내부를 직접 보는 경험학업을 마친 후 20년 이상 경주에서 신라의 역사와 유적을 연구해온 한 선배가 “대릉원에 갔다면 천마총을 빼놓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경주시 역시 대릉원 관광의 노하우를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 있다.“12만6천500㎡의 대릉원은 그 규모가 작지 않다. 그중 5만 점이 넘는 유물이 나온 2개의 고분이 쌍봉낙타 등처럼 남북으로 이어진 황남대총과 함께 대릉원을 대표하는 고분이 천마총이다.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말이 지상에 내려온 듯 상서로워 보이는 천마의 그림, 말다래에 그려져 있던 ‘천마도’가 바로 이 무덤에서 나왔다. 천마총은 내부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덤으로,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꼭 찾아봐야 할 유적이다.”사실 기자가 천마총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고대를 살았던 신라인의 흔적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설렘과 감흥은 여러 차례 거듭된 방문에도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가슴 두근거림을 또 한 번 맛본들 어떠랴. 중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행자 세 명이 금관을 비롯한 전시물들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들도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그저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만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 분명하다.그들이 “천마총의 주인은 누구이고, 어떤 역사적 가치와 의미가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할까?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20권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구해 읽어보라는 답을 들려주면 될 것 같다. 거기 이런 문장이 나온다.“천마총에선 금관 등이 출토돼 왕릉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나, 규모나 여러 양상이 황남대총과 비교할 때 처지는 점에서 피장자(被葬者·무덤에 매장된 사람)를 왕에 버금가는 왕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황남대총을 중앙에 두고 같은 규모의 고분인 천마총과 90호분이 좌우에 배열돼 있어 피장자가 왕의 동생 등으로 추정된다. 축조 연대는 500년(지증왕 원년) 바로 전쯤으로 판단되고 있다. 단곽식의 적석목곽묘로서 지상식으로 분류되며, 신라 적석목곽묘의 발전상 가장 늦은 단계의 특징을 나타내는 전형적 고분으로 꼽힌다.”◆서양의 묘지처럼 삶을 돌아보는 유의미한 관광지로…동양 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을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삶의 소중함은 죽음을 통해 증명되는 경우가 흔하다.또한 그들은 ‘삶=빛·죽음=어둠’이란 단순한 이분법적 분리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그런 이유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이란 삶의 대극(對極)이 아닌 일부’라는 문장에 설득 당해 고개 끄덕인 독자들이 적지 않다.서라벌 가운데 자리한 대릉원은 현대인의 삶과 고대인의 죽음이 교차하고, 신라 사람의 사라진 꿈과 21세기 경주시민의 비등하는 꿈이 겹치는 공간이 아닐까? 결국 산다는 것과 사라진다는 것, 이 둘 모두는 인간 내부에 똬리를 튼 아주 오래된 욕망들.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에도 대릉원처럼 ‘관광지로 역할하는 묘지’가 있다. 지하에 만들어진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무덤 카타콤(Catacomb)과 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등 다수의 예술가가 묻힌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Pere Lachaise)가 그렇다.1년이면 수백만 명의 여행자들이 찾는다는 카타콤과 페르 라셰즈.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서양인들 역시 동양인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죽음 곁에서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새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해 질 무렵. 대릉원 천마총과 황남대총 위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15세기 전 죽은 그 옛날 신라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신은 짧은 삶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 이용선기자

2020-07-02

“현장 소통·공감 행정으로 역동적인 민생 청도 건설”

밝은 미래 역동적인 민생 청도를 슬로건으로 변화와 혁신의 군정을 펼치는 이승율 청도군수가 지난 1일 취임 2주년을 맞았다.이 군수는 지난 2년 동안 5만 군민과 함께 발로 뛰며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적극적인 공감행정 추진과 더불어 군민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열정적인 리더십으로 뚝심 있는 군정을 펼쳤다.청도읍 도시재생 뉴딜사업 선정과 아이쿱 영남권 자연드림파크 유치 투자협약 체결, 농축산물 가격안정 기금과 청도 인재육성장학금 및 노인복지기금 조성 등 군민 생활의 안정과 지역의 미래 발전을 위한 튼튼한 기반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지난 2년을 돌아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지난해 7월 개최한 100인 토론회다. 지역이 변하고 살려면 공무원부터 변해야 한다는 각오로 군민과 함께 청도의 미래를 설계한 소통의 장이었다.그 결과 지난해 중앙부처와 경북도 등이 주관하는 각종 평가에서 역대 최대인 40개의 기관상 수상과 동시에 상 사업비 3억4천만원, 시상금 5천300만원을 확보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특히 올해 정부의 새마을운동 50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돼 환경 분야 최고상인 대한민국 환경대상을 받은 것은 새마을운동 발상지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또 신규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지난해 공모사업으로 627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하고 올해에도 18건의 공모사업으로 92억원의 사업비를 확보했다.-하반기 청도 군정은 어떻게 추진되나.△청도군의 군정은 현장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들은 이후 싸울 방책을 정한다는 ‘문견이정(聞見而定)’의 자세로 소통행정과 공감행정으로 역동적인 민생 청도를 건설하겠다. 이를 위해 청정 도시와 부자 농촌, 지역경제 활성화, 살기 좋은 지역, 영남권 경제 거점화, 청도정신 계승 등을 추진할 것이다.- 청정도시 보존과 지역경제 활성화 대책은.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코로나19가 발생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청도의 자랑은 청정지역이다. 병원에 입원했던 환자 129명은 5월 21일 전원 완치됐고 3월 14일 이후 현재까지 확진자가 없는 청정지역으로 지켜가고 있다.청정지역을 활용한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휴업했던 관광시설들을 차례로 개장하고 SNS 홍보단 운영과 관광명소 소개, 다양한 관광 상품 개발과 단체 관광객에 대한 인센티브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도시재생과 도로정비도 청정 청도를 구축하는 데 한몫할 것이다.시가지 전선지중화 사업, 청도삼거리~청도교 4차로 확장, 도시재생 뉴딜사업, 공공임대주택 건설과 지역 생활 인프라 정비 등은 지역에 활력을 불어 넣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적극적으로 창출할 것이다.아이쿱 생협과 투자협약을 체결한 영남권 자연드림파크는 800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고 농촌 신활력플러스사업, 수제맥주교육센터 건립 등 농촌의 유·무형 자원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전통시장을 활성화하고 중소기업·소상공인 특례보증 지원 강화 및 청도사랑상품권 상시 할인판매를 통해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을 방지하고 지역 내 자금 순환을 촉진할 것이다.-청도는 농촌도시다. 농가소득을 위한 복안은.농특산물의 가격 폭락에 대비해 2023년까지 100억원의 농축산물 가격 안정기금을 조성하고 친환경 농업 육성 및 6차산업 활성화, 우수 농특산물 캐나다 등 해외수출 판로개척, 농산물 유통 다변화 추진 등 새로운 소득 창출과 판로 개척은 계속된다.이와 더불어 후계 농업경영인과 청년 농업인, 귀농·귀촌 농가 지원 등 미래농업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농작물 재해보험 가입, 농민사관학교와 농촌인력지원센터 운영 등 농업이 지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청도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 나은 고장을 만들 방안은.△살기 좋은 곳은 정주 여건도 중요하지만 2세를 위한 교육여건, 문화시설도 중요하다.쾌적한 정주 여건을 위해 전원주택단지 조성 지원 조례 제정과 귀농·귀촌 전담부서를 신설했고, 2세를 위해서는 친환경 안심놀이마당 조성과 책 꾸러미 사업, 찾아가는 가족문화공연, 가족캠프, 심리상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보건소 내 외래산부인과 운영,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 지원, 신생아 및 입양 영아 건강보험료 지원, 출산장려금 확대, 가족센터 건립, 공동육아나눔터, 민간어린이집 국공립 전환·운영, 학교급식 지원 등 다양한 출산장려 정책으로 젊은 층을 배려하고 있다.또 30억원의 노인복지기금을 조성하고 노인 맞춤형 돌봄 서비스, 치매 안심센터 및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으로 맞춤형 치매 통합관리서비스를 제공하고 복지 사각지대가 없는 사회안전망 구축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청도는 유·무형의 관광자원이 많다. 활용방안은.△관광자원은 지역을 살릴 수 있는 무한의 먹거리다.경쟁력 있는 문화·관광자원 콘텐츠 발굴로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이미 조성된 명소들을 관광벨트화로 시너지 효과를 높일 것인데 올해 개장하는 청도루지는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인근의 소싸움경기장과 용암온천, 프로방스, 와인터널 등과의 상호보완 효과가 기대된다.2021년 개장되는 청도자연휴양림은 비슬산 생태탐방로와 함께 치유와 힐링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것이고, 유교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을 위한 유림회관 리모델링과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청도복합문화센터건립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청도반시축제와 세계코미디아트페스티벌, 청도읍성예술제, 미스경북선발대회 등 다양한 축제도 열어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삼국통일을 이룩한 화랑정신과 조국 근대화의 한 축을 담당한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인 지역의 정신을 계승하고 새마을 환경축제와 새마을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청도의 위상을 높일 계획이다.베트남 토마을과 푸닌마을에 기초생활 인프라를 구축하고 인적 역량강화, 소득증대사업을 추진하는 등 새마을정신을 해외에 지속적으로 전파해 지역의 화랑정신과 새마을 정신을 배우고자 많은 사람이 찾도록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민선 7기 전반기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군민의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고 청도의 미래와 비전을 구체화하는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지난 2년간의 군정 추진을 바탕으로 5만 군민 모두가 살맛 나는 행복한 청도를 만드는 시기가 될 것이다.이러한 성과를 얻으려면 모두가 함께할 때 가능하다. 군민이 합심해 코로나19 사태를 이겨낸 것처럼 새마을정신 아래 하나로 뭉쳐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청도를 물려주자./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20-07-02

“새로운 관광흐름 선도, 청정 관광지로 떠오르는 청송군”

민선7기 임기 절반이 지났다. 청송군은 지난 2년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 청송’이란 군정 비전 아래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 농촌, 함께여서 따뜻한 나눔 복지, 문화로 꽃피우는 지역 경제’라는 슬로건을 실현시키고자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 결과 민선7기 공약사항 평가 2년 연속 최우수(SA) 등급 달성과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2관왕이라는 눈에 띄는 성과물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특히 8년 연속 대상을 받은 청송사과에 이어 산소카페 청송군브랜드도 첫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위상을 드높였다. 이에 힘입어 청송사과축제가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선정되면서 전국 농어촌자치단체 평가 종합2위, 주민만족도 9위(경북 2위) 등의 쾌거를 이룩하며 대외적인 각종 평가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인정받았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취임 당시 지역발전과 군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5대 분야 65개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주요 사업으로 농산물택배비 지원, 천원목욕탕 사업, 키즈카페·정신건강복지센터·골프장 조성, 청송사과축제 도약, 청송사랑화폐 유통 등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민선 7기 전반기의 성과를 되돌아봄과 동시에 남은 임기 중의 비전을 살펴보고자 한다.□ 농업의 미래를 제시하는 청송청송군은 농업군의 롤 모델 역할을 자처해 농업환경 전반을 대폭 개선했다.지역농산물 소비 촉진과 유통망 확대, 농가소득 증가를 위한 농산물 택배비를 지원했고 전국 최고 수준의 농민수당을 지급해 농업경영 안정을 도모했다.또한 명품청송사과의 재도약과 사과산업 발전을 위한 청송사과유통센터 운영 체제를 변경하고 농산물 공판장을 개장, 시장 선도적인 브랜드 ‘황금진’을 개발해 농업인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다양한 홍보 마케팅 활동과 유통시설의 개선 및 확충, 지속적인 브랜드 관리를 통해 농업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비밀 병기 청송“육아비용은 사치, 아이 키우기 좋은 고장이다.”이는 청송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엄마들의 즐거운 외침이다. 출산장려금의 인상 지급, 돌사진 촬영비 지원, 공립어린이집 확충 등의 정책을 편 결과다.인프라적 측면에서도 최근 진보면에 전국 최고 시설을 갖춘 키즈카페를 조성했다. 우수 인재들에게 인재육성장학회에 조성된 장학금을, 중고등학교 신입생들에게 교복구입비도 지원하고 있다.지역의 70세 이상 어르신들이라면 누구나 천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천원목욕탕은 건강증인사업의 일환이며 노인일자리를 대폭 증원해 노년의 활기찬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치매안심센터와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건립 또한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 사업이다.□ 새로운 여행 트렌드의 중심 ‘산소카페 청송군’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대한민국 대표축제에 지정된 청송사과축제는 단일 농산물 축제로는 독보적이다.취임 전부터 청송에 꼭 들어맞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윤 군수는 맑은 공기 청정쉼터의 의미인 산소카페 청송군으로 네이밍을 짓고 청송 고유의 색깔을 입혔다.또 “축제란 지역민이 먼저 흥을 돋우고 어우러져야 타 지역민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소신으로 축제 장소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청송읍의 용전천변으로 옮겼다.축제기간도 연장하고 축제장 주변 경관 정비와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산소카페 청송군, 황금사과의 유혹’이란 주제로 성공적 결과를 이끌어내 대한민국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하게 됐다.더불어 수려한 자연자원을 활용한 산림레포츠 휴양단지 조성사업과 산소카페 청송정원 및 핵심 공약사업이었던 골프장 설치를 위한 민자 유치를 이뤄내 체류형 관광지를 조성하는데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됐다.□ 군민 숨통을 틔워주는 경제정책청송군은 올해 260억 규모의 청송사랑화폐를 발행해 농민수당, 농산물택배비 등을 지원하고 있다.청송사랑화폐는 안정적으로 정착돼 실효성을 거둠으로써 지역화폐의 성공사례로 손꼽히고 있다.이는 코로나19의 다양한 지원금으로도 활용돼 소상공인과 소비자가 상생하는 지역경제 활성화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이밖에도 소상공인 특례보증 및 이차보전금 지원 등 지역경제의 뿌리인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다채로운 정책을 추진해 지역경제에 온기를 불어 넣었다.또 수많은 전국단위 엘리트 체육대회를 지속적으로 유치한 것도 지역경제 활력에 한몫을 했다.5년간 재유치한 청송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은 동계올림픽 정식종목 선정에 힘을 보태고 있어 향후 개최지로서 누리게 될 파급효과도 기대된다.□ 안전하고 쾌적한 청송2만6천 군민들의 안전보장을 위한 군민안전보험공제에 가입해 불의의 사고와 재난으로부터 대처할 수 있는 경로를 마련했다.내년 준공을 앞둔 청송소방서는 군민들뿐 아니라 540만 관광객들의 안전까지 책임질 수 있게 됐다.청송군지방상수도 현대화 사업비 250억을 확보해서도 군민들의 물 복지를 실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청송읍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 180억을 확보해 중심 시가지를 특화 조성, 경쟁력을 갖춘 농촌 발전 거점으로 육성할수 있게 됐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소통청송군은 지역 주민들의 뜻에 따라 단순 방위 개념으로 명명된 청송도호부의 동쪽 ‘부동면’을 ‘주왕산면’으로 변경해 지역명칭이 청송발전의 브랜드로 작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고 공약사업 군민배심원단을 꾸려 군민들에게 한 약속을 함께 이루어 나가고 있다.비효율적인 마을방송을 탈피하기 위해선 휴대전화를 통한 스마트마을방송 시스템을 도입해 군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이번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예방수칙을 비롯한 정보들을 빠르고 정확하게 전파해 지역 유입 확산을 차단하는데 기여했다.청송군 최초 민간위주 지역발전협의회를 구성해 집행부의 독단적인 의사결정을 지양하고 주민들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선제적인 코로나19 대응청송군은 코로나19의 즉각 비상체계를 갖추고 선제적인 대응으로 감염 전파를 최소화해 지역 내 전파자가 한명도 발생하지 않았다.치밀한 초동방역과 빈틈없는 방역시스템으로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철저히 한 결과이다.65세 이상 노령층과 취약계층에게 마스크를 제공하고 시장사용료 감면, 임대농기계 수수료 감면, 지방세 감면 등의 정책은 군민의 일상에 숨통을 뚫어 주었다.청송군 소상공인 특별생계지원비, 정부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속히 지원했고, 청송사랑화폐 특별할인 등으로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빠른 경기회복을 위해 힘쓰고 있다.□ 건강의 도시로, 내일을 말하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청정과 사과의 고장, 우리 청송이 이제 깨끗한 이미지를 넘어 건강 도시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도록 한층 업그레이드 할 것”이라며 “인구 소멸지수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고장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꼭 보여주겠다”고 의지를 밝혔다.윤 군수는 이어 “지난 2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왔고 과분할 정도로 많은 주목과 칭찬도 받았다”며 “현장에 문제가 있고 길이 있고 답이 있다. 앞으로도 발로 뛰는 소통행정을 통해 일신우일신 하는 청송의 담대한 미래를 그려나갈 것”이라고 당찬 각오를 덧붙였다./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20-07-01

울릉도의 소녀, 대구서 의료 예술의 장을 펼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면 친구가 두엇 보이지 않았다. 울릉도의 거센 파도에 배가 제때 뜨지 않아 패혈증이나 맹장염으로 죽은 친구들이었다. 파도가 치는 날이면 울릉도는 무엇이나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은 늘 이 파도에 저당 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서 살아남는 방법은 아프지 않는 것뿐이었다. 후에 대학을 결정할 때 박언휘(박언휘 종합내과 원장)는 주저 없이 의과대학을 선택했다. 어릴 때 죽어갔던 친구들과 이웃들을 보면서 박 원장이 생각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박 원장의 어머니는 법대에 가기를 원했지만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도 이기면 유능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싫었다. 옳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변호해야 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당시 박 원장이 다녔던 대구여고는 경북대병원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의사와 병원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머리가 좋았던 그녀에게 의사의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박 원장이 어릴 적에 읽었던 위인전 중에 퀴리부인이라는 책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자신도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연과학을 해서는 세상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박 원장은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어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하고 싶었다. 환경이 열악했던 울릉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늘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랐다. 그런 박 원장에게 봉사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첫 번째는 아픈 사람을 치료해 주는 일이죠. 나는 내 직업이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아픈 환자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통증에서 구해주는 일보다 더 큰 봉사는 없다고 생각하죠. 전 병원을 일요일에도 열어둡니다. 일요일이라고 아픈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그 다음이 주변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입니다. 우리 병원의 간호사들은 거의 장기근속을 해요. 17년씩이나 근무한 사람도 있어요. 주변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해지죠. 세 번째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청소년들을 돌보는 것이에요. 나도 어릴 땐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청소년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어요.”박 원장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직이다. 미국에서 10년 동안 생활하면서 배운 것이다. 그런데 의사가 정직을 강조하니 이상해 보였다. 이미 그 직업만으로 충분히 그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지 않은가.“그렇지 않아요. 같은 병에 쓰는 약이 많게는 수십 종이나 되는데 나는 가장 효과가 좋은 약을 쓰려고 하죠. 같은 병에 쓰는 약은 성분이 모두 같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다르죠. 환자들에게 좋은 약을 쓰고, 꼭 해야만 하는 치료를 하는 것이 의사의 정직입니다. 의사가 정직하지 않으면 환자는 좋은 약을 두고도 쓰지 못하죠. 다른 직업의 정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나는 주사 약이나 일반 약이나 가장 좋은 것을 쓰려고 합니다. 그게 내가 미국에서 배운 정직입니다.”박 원장의 말을 듣고 나니 새삼 의사라는 직업이 새롭게 보였다. 사람의 아픈 몸을 치료하는 의사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해야 할 직업 같았다.그녀는 지난 13년 동안 무려 15억 원어치의 백신을 요양원이나 독거노인에게 제공해 왔다. 노인들은 폐렴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폐렴백신이나 독감백신은 꼭 맞아야 하는 백신 중 하나다. 그녀는 그 일로 2018년 대구시민대상을 수상했다. 그 봉사를 어쩌다 한 해 쉬게 되었는데 그해 노인들의 사망률이 더 높아지는 걸 보면서 그녀는 다시 봉사를 시작했다. 백신은 종류가 많지만 박 원장은 평생에 한 번만 맞으면 되는 폐렴백신을 제공하고 독감백신도 최고로 좋은 것을 제공했다. 정직한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정직함도 중요하지만 봉사 정신도 중요하다고 그녀는 강조했다. 봉사란 나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의사는 늘 타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어야 했다.그렇게 의사 생활을 하면서 박 원장은 점자 약봉지를 개발해 특허 신청을 해놓았다.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바꿔먹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시각장애인 환자, 컴퓨터 전문가와 머리를 맞대고 점자 약봉지 개발에 성공했다. 이제 정부 지원을 받아 각 지역마다 공급되면 시각장애인들이 약을 잘못 먹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본다.박 원장은 ‘돈 나오는 곳은 피눈물 나는 곳’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몇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은 말은 돈을 많이 벌어야 봉사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버는 만큼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지금도 물만 보면 바다를 생각하고 고향을 떠올린다는 박 원장에게 울릉도는 꿈이 있던 섬이면서 눈물 나는 섬이었다. 어떤 때는 울릉도 해안까지 온 배가 파도 때문에 접안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열두 시간이나 배를 타고 가다가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울릉도는 아이를 낳으려면 육지로 나와야 하는 서글픈 섬이기도 했다. 그 섬은 박 원장에게 마음의 정처였지만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배가 뜨지 못하면 내일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 원장은 섬에 잘 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몸에 스민 섬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내과 의사인 그녀는 의학 이외에도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시 전문 잡지 ‘시인시대’ 발행인으로 있는 그녀는 문학이 치료의 또 다른 방법이라고 말했다.“엄마가 돌아가시고 6개월 정도 우울증이 왔었어요. 그때 글을 썼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문학이 치유가 되더라고요. 의사의 존재 이유는 환자의 치료입니다. 그런데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문학으로 치유하는 것도 치료죠. 나는 치유의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의대에서 10년 정도 강의도 했어요. 한의학이나 문학이나 양방이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해요.”문학의 치유를 경험하면서 박 원장은 전국의사시인협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시인시대’를 발행함으로써 시인들에게 발표의 장도 마련해 주고 싶었다.박 원장은 의학의 기본은 예술이라고 했다. 예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고통에서의 해방은 보이지 않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의사의 긍정적인 말과 사랑이 예술의 힘이라고 본다는 것.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는지 그대로 느껴지는 부분이었다.박 원장이 마음의 고향 울릉도를 통해 배운 것은 거센 파도를 타는 법이다. 파도를 이기려면 파도를 절대 거스르지 않고 순응해야 한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파도와 싸우며 파도 타는 법을 익힌 박 원장은 파도에서 얻은 지혜로 어떤 일이라도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그 힘은 정직과 실력, 사랑, 기도의 힘이다. 박 원장의 입에서 자주 흘러나오던 정직과 봉사, 사랑이라는 말이 헤어지고 나서도 오래 머리에 남았다. 박 원장은 현재 ‘슈바이처 나눔 봉사회’ 이사장을 맡아 의료봉사를 펼치는 한편 대구 봉사단체 참길회에서 소록도 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으며,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 54호 회원으로 가입했다. 가입 후 자신이 미처 몰랐던 분야의 봉사를 새롭게 할 수 있어 즐겁다고 했다. 대구의 ‘얼굴 없는 천사’라는 그녀의 별칭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울릉도의 소녀가 대구에서 봉사의 마당을 펼친 것이다.  /대담정리 천영애

2020-07-01

탈린에 관하여… 지식과 정보를 얻는 다양한 방법들

◇ 구글맵 안내를 무시한 걸 후회하다로시 데려와서 일본 일주를 다녀온 지가 4년이 지났다. 매년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정하고 그것만은 좌고우면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7년이 지났다. 이제 돌아가면 올해 마지막 버킷 리스트(책방 이사)를 마무리해야 한다. 불혹이 지나며 그 이전보다 시간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걸 실감한다.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진 집단은 아마 구글이 아닐까. 숙소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려고 구글맵을 열고 경로를 검색하니 빠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알려 준다. 무시하고 어제 왔던 빠른 길로 나가니 경찰이 통제 중이다. 구글맵이 안내를 믿어야 했다.인터넷만 연결되어 있으면 실시간 교통 정보를 반영해 길을 안내한다. 결국 처음 안내한 길로 돌아왔다. 안드로이드폰과 구글을 사용하는 모든 사용자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도 GPS나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으면 어디서 무엇을 찍었는지 기록이 남는다.얼마 전 재미삼아 구글 지역 정보에 올렸던 사진들이 조회수가 25,000회가 넘었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들은 이렇게 개인이 올린 정보를 바탕으로 더 몸집을 불리고 이익을 취할 것이다. ‘빅데이터’를 분석하는 능력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이다.구글은 어느 기업도 넘보지 못할 정보력을 이미 갖추었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기술에 엄청난 자본을 쏟아 붓고 있으니 구글을 뛰어넘으려면 새로운 ‘혁명’이 필요할 수도.2013년 7개월 동안 배낭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챙겼던 것은 ‘론니 플래닛’이었다. 고작 6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사이 정보를 얻는 방법은 책에서 인터넷으로 급속히 바뀌었다. 인터넷을 주로 사용하는 도구도 컴퓨터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동했고. 책의 가치가 변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해졌고 ‘실시간’ 나의 행동을 결정하거나 바로 쓰고 버리는(?) 가벼운 정보를 책으로 얻는 시대는 저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책은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는 고전을 재생산하고 영속해야 하는 지식만 담는, 책이 만들어진 시대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물건의 역할도 포함해야겠다. 어느 시대라도 수집욕을 떨치지 못하는 장서가는 존재할 테니. 이런 시대에 헌책방을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헬싱키에서 탈린행 페리를 타다헬싱키에서 탈린까지는 페리로 약 2시간 30분 거리다.(바이킹라인 오토바이 선적료 포함 편도 약 5만원) 페리가 하루에도 여러 번 왕복하고 그만큼 사람도 차도 물건들도 건너가고 온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올 때보다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많았다. 배 안으로 들어가 주차하고 고정줄로 묶는 작업을 마쳐야 객실로 올라갈 수 있다. 제주도나 일본으로 오토바이를 실어갈 때는 직원들이 대신했었다. 어제 한 번 해봤다고 다른 라이더를 도와주는 여유까지 부렸다.탈린은 이웃 리가와 비슷한 분위기다. 오자마자 부츠를 볕에 말리고 빨래부터 했다. 말뫼에서 이곳까지 거의 달리기만 하고 이틀 비를 맞았더니 꼬질꼬질하기가 상거지나 마찬가지. 탈린에선 여유롭게 며칠 지내다 가기로. 여기서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진 약 350킬로미터.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갈 일만 남았다.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500밀리리터 생수를 2유로를 주고 사마셔야 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선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물값 뿐만 아니라 기름값도 방값도 뭐든 다 비싸니 나 같은 여행자에겐 아주 가혹한(?) 곳이었다.탈린에 와선 마음껏 쇼핑을 즐겼다. 그래봐야 이곳에 있는 동안 먹을 식료품만 잔뜩 샀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숙소에서 끼니를 대부분 해결한다. 탈린의 체감 물가는 북유럽 국가의 1/3 수준. 우유, 식빵, 뮤즐리, 잼, 소시지, 토마토, 마늘, 고추절임, 치즈, 계란, 빨랫비누 등등을 샀는데 21유로가 나왔다. 3일 동안 충분히 먹을 양이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소시지에 P선생님이 주신 쌈장을 발라 먹었는데 먹을 만했다. 고추절임도 맵싸하니 괜찮았다.러시아에 들어가기 전에 로시 상태를 점검해야 했다. 체인 장력 조절하고, 에어필터를 꺼내 대충 먼지를 털어냈다. 다행히 큰 이물질은 없었다. 지난 번 바르샤바 패트롤 모터스에서 교환할 때 날벌레들이 필터에 끼어 있었다. 아마 다시 시베리아를 지나갈 때 같은 일을 겪을 듯해 공기흡입구를 아예 방충망을 구해 씌웠다. 체인과 스프라켓도 적산거리가 60,000킬로미터가 가까워 모스크바에 가서 교체해야 한다. 집에서 여기까지 달린 거리도 약 27,000킬로미터. 사용할 수 있는 거의 한계까지 온 듯. 그래도 자주 체인 오일을 바른 것이 효과가 있었다. 사고만 없었다면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하루 자고 나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숙소에서 체크아웃했다. 지금 묵는 곳은 주인이 자리를 지키는 곳이 아니고 청소하고 체크인 시간에만 잠시 들렀다 간다. 주차장에도 로시만 덩그러니. 아무래도 구도심에서 떨어져 있고 무료 주차장이 있는 곳이라서 차를 가진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듯하다. 우리 집인양 부엌도 샤워실도 사용할 수 있어 좋긴 한데 이렇게 휑한 분위기는 처음이다. 대부분 복작복작한 도미토리에서 지내다 큰 집을 전세낸 듯 있으니. 어제만 해도 거의 빈방이 없었다.◇ 시대 아우르는 건축물 가득한 탈린을 걷다탈린 구도심은 지금까지 들렀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옛 성벽이 일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성벽 안과 밖은 풍경이 딴판이다. 구도심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성벽 밖은 지나는 사람도 별로 없이 차분하다.탈린도 리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건물을 올리고 이곳저곳 공사 중인 곳이 많다. 탈린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발트해로 나갈 수 있는 전초지가 될 수 있는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국가와 러시아 사이에서 많은 부침을 겪었고,(구도심의 높은 성벽이 그 증거겠지.)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해가 1991년이니 신생 국가나 다름없는 셈이다. 외부로 나아가기 좋은 지역은 그만큼 외침의 가능성이 있으니 좋다 나쁘다 말하기가 어렵다.탈린 거리를 걷다보면 중세부터 현대까지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채롭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관광지인 구도심을 제외하곤 빠르게 개발되고 풍경이 바뀌지 않을까. 10년 후쯤 리가나 탈린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확실히 비교할 수 있겠지.숙소로 돌아오다 호텔 카지노 주차장에서 몸집 큰 두 남자가 차를 세우고 운전자를 윽박지르는 장면을 봤다. 그는 도박빚이 있는 것일까. 탈린으로 오는 페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카지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곤 놀랐었다. 스톡홀름에서 헬싱키로 넘어오는 페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리가에서도 시내 중심가에 많은 카지노들이 있는 걸 보고 놀라웠는데 오랜 세월 공산국가였기에 오히려 자본주의의 폐해에 쉽게 물들 수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아침부터 비가 내려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걸 하루 늦추었다. 느긋하게 하루 더 쉬어 가기로. 오늘도 나 이외 다른 손님은 없었고 짐을 최대한 줄일 생각으로 모든 음식 재료를 꺼내놓고 끼니마다 요리해 먹었다. P선생님이 주신 쌀로 마늘밥을 짓고 뜨거운 물에 쌈장을 풀어 된장국까지 만들었다. 쌈장국(?)은 의외로 먹을 만했다. 파만 있었어도. 이가 없으면 잇몸이니까 있는 걸로 뭐든 만들어 먹는다.나만의 여행 3원칙은 먹을 수 있을 때 먹고, 잘 수 있을 때 자고, 쓸 수(기록) 있을 때 쓴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나중으로 미루면 후회와 낭패를 동시에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쓰는 건 옵션으로 치더라도 먹고 자는 건 가능할 때 무조건 1순위로 둬야 긴 여행에서 버티기 쉬운 듯하다. 오늘은 내내 숙소에서 밥만 먹고 비 구경만 했다. 내일은 최대한 아침 일찍 출발해 러시아 국경을 넘을 생각이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

2020-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