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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새마을운동의 참 의미 ‘봉사’로써 세대간 격차 줄어들 수 있기를

△ 새마을알뜰벼룩장터를 만들다구미시 새마을부녀회장을 2006년 맡게 된 이후 당시 남유진 구미시장의 권유로 알뜰벼룩장터를 만들게 됐어요.재사용이 가능한 물건들이 너무 쉽게 버려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보자는 취지였죠. 한마디로 ‘아나바다’운동이죠. 그런데 남 시장님이 물건 가격은 무조선 1천원 이상은 안된다고 못을 박았어요. 가격이 너무 저렴하니까 사실 하기가 쉽지 않았죠. 시장님과 가격 절충을 해야했어요. 다른 곳에서 열리는 벼룩장터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대구 두류공원, 서울 뚝섬 같은 곳에 다녀왔었어요. 그 곳에서는 전부 가격이 자율에 맡겨져 있더라구요. 그런 내용들을 몇번이나 시장님에게 건의했는데 정말 씨알도 안먹혔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2007년 처음으로 새마을알뜰벼룩장터를 열었어요. 제법 괜찮은 물건들도 나왔어요. 그런데 괜찮은 물건도 조금 못한 물건도 모두 1천원이니까 파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거에요.국수 같은 음식도 1천원, 옷도 1천원, 장남감도 1천원이니 파는 사람들이 힘들어하죠. 국수를 팔기 위해서도 면을 뽑고 육수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3일은 걸리는데 말이에요. 나중에 알았는데 그래서 새마을부녀회에다 그 일을 맡긴거에요. 다른 단체에서는 그렇게 못하니까. 손해보면서 누가 하려고 하겠어요. 오롯이 봉사라고 생각하고 해야하는 일이에요. 처음 그렇게 고생했어도 계속 열리고 하니까 어느정도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더라구요.지금도 매월 둘째주 토요일에 시청 후면 주차장에서 열리고 있어요. 구미에 오면 꼭 한번은 가봐야 하는 곳으로 추천하고 싶어요.새마을운동으로 단 한푼도 벌어본 적 없어잘못된 언론 이야기로 젊은 세대들이 오해젊은 지도자 나와 기성세대 이끌어줘야젊은이들에게 지도자의 기회를 줘야새마을운동이 더 활기차게 될 것△ 아무리 어려워도 남 탓은 하지말자부녀회장이 되고 나서 해외에도 몇 번 나가게 됐어요. 당시 새마을세계화운동이 한창이었거든요.간혹 해외 나가서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가 놀러가는게 아니잖아요. 정말 안가보면 몰라요. 얼마나 열악한 곳에 가는지를. 한번은 몽골 수와바트라에 가는데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로 13시간을 이동해요. 그런데 길도 비포장이고, 먼지가 버스 안으로 막 들어와요.버스 안에 있는데 바닥에서 먼지가 막 올라오더라구요. 당시 하얀옷을 입고 갔었는데 아주 까맣게 되기도 했어요. 천으로 입도 가리고 가야할 정도였죠. 그렇게 어렵게 도착하니 밤이 됐더라구요. 근데 허허벌판에 길 위에서 잠을 자야했어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맨 땅바닥에 누워 자는거에요.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머리는 먼지로 다 엉켜있고.처음에는 ‘나를 이런 곳에 대체 왜 데려왔지’라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 힘드니까 남 탓을 했던거죠. 그러다 하늘을 봤는데 정말 별이 곧 쏟아져 내릴 것만 같더라구요. 그렇게 한동안 별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여기 온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남 탓을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생각한 ‘남 탓을 하지 말자’가 지금 저의 좌우명이에요. 내가 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으면 내가 노력을 더 해서 끌고 가면 되는거다. 그렇게 믿고 살아가고 있어요.아무튼 그때 그런 마음이 생기니까 불평불만도 없어지고, 일을 더 열심히 했어요. 당시 말도 안통하고 무엇부터 해야할지 몰라 허둥대기도 했지만 뭐라도 하려고 하는 나를 보면서 그 사람들도 마음을 열어주는게 느껴졌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나에겐 큰 가르침을 받게 해 준 고마운 곳이에요.△ 젊은 세대에게 새마을운동의 기회를 주어야언젠가 언론에서 새마을은 지금까지 장사를 많이 했으니 이제 내려놓을 때가 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봤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잘못된 말이에요. 나부터 새마을운동으로 단돈 100원도 벌어본 적이 없어요. 구미시부녀회장 할적에 500만원, 경북도부녀회장 할적에 1천만원의 돈을 내면서 했어요.언론에서 알지도 못하면서 막 떠들어대니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새마을운동을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어떻게 새마을운동에 대해 알 수 있겠어요.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리고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은 옆에서 누가 교육한다고 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요.새마을운동 자체가 생활이 되어야하는 거죠. 새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식구들은 새마을운동에 대해 잘 알아요. 옆에서 항상 보는 거니까. 새마을운동을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모르죠. 그런 와중에 기성 세대라는 사람들은 “옛날에 우리는 어떻게 했다.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라고 말을 하는데 그걸 경험하지 못한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마지못해 듣고 흘리는거지.새마을운동이 앞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잘 전달이 되려면 기성 세대가 생각을 열어야해요. 젊은 세대들에게 기회를 주어야해요.젊은 세대들이 봉사를 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거에요. 사실 부녀회장만 해도 어른들, 즉 나이든 분들만 하게끔 하거든요. 젊은 사람들에게 지도자의 자리를 주어야한다고 생각해요.그래야 새마을운동의 지도자로서 책임감도 가질 수 있을 거고, 직접 해 봄으로서 새마을운동이 이런 것이라는걸 알게 되겠죠.새마을지도자가 꼭 나이가 든 사람이 할 필요가 없어요. 항상 앞장서서 누구보다 열심히 해야하는 자리니까 젊은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면 지금보다 더 활기찬 새마을운동이 될거라 믿어요.그렇다고 기성 세대가 물러나라는 소리는 아니에요. 옆에서 조언을 해주면 되는거니까. 이제는 젊은 새마을지도자가 나이 든 회원들을 이끌면서 봉사하는 그런 모습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 있다면 새마을운동의 종주도시인 구미에서 그런 모습이 제일 먼저 나오길 바래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해 주고 싶은 말이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에요. 옛날에는 배고픔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잖아요.전 배고픔을 아는 세대는 아니지만, 지금보다는 풍족하진 못했다는 거에요. 저보다 앞의 세대가 배고픔을 겪은 세대죠.그런 세대들이 힘들게 노력한 덕분에 저의 세대는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고, 지금의 세대는 먹는거에 있어서는 넘치는 세대가 된거죠. 하지만 사람이 먹는것만 해결된다고 사는게 아니잖아요.요즘 젊은 세대들이 혼족이니, 혼밥, 혼술을 한다고 들었어요. 혼자 하는거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그렇더라구요.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 아니잖아요. 사회적 활동을 해야만 하는 동물이고, 그래야 성취감도 생기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젊은이들이 이젠 그만 인터넷 가상세계 이런 곳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왔으면 해요. 그리고 그 사회로 나오는 길목에 새마을운동이 있었으면 하구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제 젊은이들이 지도자가 되어 어른들과 함께 손잡고 지역사회와 국가를 위해 봉사를 하면서 이 사회를 이끌어 주었으면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젊은이들의 뜻이 갈 수 있는 길이 새마을이었으면 해요.그러기 위해서는 기성세대들도 많은 것을 내려 놓아야하구요. 새마을운동이 뭐에요. 국민운동이에요. 누구나가 할 수 있는거에요. 젊은이들도 새마을운동이 나쁘다 좋다 말로만 하지말고 몸소 한번 실천을 해보고 새마을운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되는 거에요.새마을운동이 봉사로 세대간의 격차를 줄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새마을운동의 옛 구호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처럼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24

비단 주고 산 언니의 꿈으로 왕비가 된 문희… 1천년 전에도 사랑은 뜨거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으로부터 최소 1천 년 전을 살았던 신라 사람들도 21세기 우리와 똑같이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다. 까마득한 과거 서라벌에도 비극적인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청년이 있었고, 매력적인 사내와의 결혼을 꿈꾸며 노심초사하던 처녀가 있었다.‘삼국유사’ ‘삼국사기’ ‘화랑세기’ 등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고문헌을 읽다보면 드물지 않게 ‘러브 스토리’가 등장하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것은 재미있고 웃음을 부르는 반면,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슬프고 애절하다.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라의 여인들도 오늘날의 여성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에 애태우고, 근사한 남성과의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꿈꾸곤 했다.그중 일흔 살의 왕이 사랑했던 열여섯 살 소녀의 이야기와 ‘꿈을 거래한 덕분’에 왕비가 된 김유신의 여동생 이야기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회갑 넘긴 소지왕, 16세 소녀 벽화를 만나다“통치하는 기간 내내 백성의 삶을 가까이서 살폈고, 무엇보다 민생을 중시했다”고 평가받는 소지왕(재위 479~500).자비왕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겸손한 태도를 가졌기에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다.재위 기간에도 고구려와 일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나라가 곤경에 빠지는 걸 막았고, 서라벌 곳곳에 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했다.행정 시스템을 개선하고, 백성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정치력을 극대화시킨 것도 눈길을 끈다. 신라에서 최초로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관도(官道·국가가 관리하는 길)를 보수한 것도 소지왕의 업적이다.여기에 더해 사람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왕궁의 곳간을 기꺼이 열었고, 고생하는 군사들을 직접 찾아 따뜻한 겨울옷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고통 받는 고아와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로했다니 분명 자애롭고 좋은 왕이었다.그런 소지왕이 생애 단 한 번 ‘좋지 못한 소문’에 휩싸인 적이 있으니, 열여섯 소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삼국사기’에 실린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회갑을 넘겨 일흔이 가까워오던 소지왕이 신라의 북쪽 국경마을 날이군(捺已郡·현재의 영주 지역)으로 순시를 나갔다. 왕을 맞이한 그 마을 유력자가 자신의 딸 벽화(碧花)를 치장해 바쳤다. 겨우 16세 소녀였다.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며 돌아왔지만 얼핏 본 소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녀 또래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이후 소지왕은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복(變服)하고 날이군을 찾아 여러 차례 벽화와 통정했다. ‘왕이 신중하지 못하게 처신한다’는 고약한 풍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남들의 손가락질도 그의 정열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벽화를 왕궁으로 불러들인 소지왕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기도 했다.”때때로 사랑은 노인을 ‘철없는 소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보편적이지 않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견딜 수도 없는 연애의 감정은 1천500년 전 신라에도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 문희, 비단을 주고 언니의 꿈을 사다앞의 에피소드에선 남성(소지왕)이 적극적이었다면,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능동적인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겠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걸 간략하게 소개한다.“신라의 장군 김유신에겐 보희와 문희라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언니 보희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문희에게 들려줬다. ‘서라벌 높은 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시내가 온통 물바다가 돼버렸다’는. 당시 신라에선 꿈과 별자리로 미래를 점치곤 했다. 그 꿈이 상서로운 것임을 눈치 챈 문희가 비단 한 필을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며칠 후 김유신의 집에 풍채 좋은 김춘추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사소한 사고로 옷이 찢어진 김춘추는 보희를 대신해 바느질을 해주러 온 문희를 눈여겨보았다. 오래지 않아 사랑에 빠진 문희와 김춘추는 밀애를 시작했고, 연이어 문희가 임신을 함으로써 김춘추와 혼인하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춘추는 후에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되는 인물이다.”겨우 비단 한 필로 ‘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문희의 일화는 어떤 측면에선 농담처럼 재미있고, 또 달리 보자면 낭만적이기도 하다.하지만 이 ‘러브 스토리’를 당시 신라의 정치·사회적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역사학자들도 다수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에선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 이면에 자리한 김유신의 야심(野心)을 이렇게 쓰고 있다.“김유신은 누이동생인 문희를 김춘추와 혼인시켰다. 또 자기 자신도 김춘추의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여 김춘추 가문과 중복적인 인척 관계를 맺었다.이는 진골로서 그 가문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김유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유신 집안은 신라 왕실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굳히고, 진골로서 신분적 위치도 확고히 할 수 있었다.”둘의 결합은 문희가 우연히 언니의 꿈을 사서 얻은 행운이거나, 김춘추의 애정 공세가 만들어낸 극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자기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려 한 김유신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을까?지금도 이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내놓을 사람은 없다. 당시로 돌아가 문희와 김춘추, 김유신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기 전엔.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신라 시대나 오늘날이나 사랑을 차지하고 결혼에 이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적극적인 능동성’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학계로부터 “음탕한 동시에 무능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신라의 진성여왕. 시인 김선향이 “권력자가 아닌 여성으로서 가졌을 진성여왕의 고뇌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시 한 편을 본지에 보내왔다. 역사 인물에 대한 문화적 해석을 독자들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진성여왕을 위한 변명경문왕과 문의왕후의 딸너는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다음란과 방탕, 신라 멸망의 원흉너에게 찍힌 낙인을 지운다오라버니 정강왕의 유언으로 너를 기억한다만(曼)은 총명하고 민첩하여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옛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처럼그녀를 왕으로 받들라즉위 다음해 숙부이자 애인 위홍이 죽자너는 큰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밤낮으로 남자들에 탐닉한다이미 신라는 바람 앞의 등불서라벌에 흉년이 들고 해가 뜨지 않는다근년에 백성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는데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이제 숨어 있는 어진 자 요(嶢)에게 왕위를 물려주노라너는 비단옷을 버리고 탐스러운 머릴 자른다여왕이 아닌 여자가 되어홀연히 순례를 떠난 너는그해 겨울 영원히 세상을 버린다그 무엇도 아닌 본래의 너로 돌아간다.◆ 시를 쓴 김선향 시인은…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2005년 문학계간지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된 후 창작 활동을 본격화했다.2016년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문학적으로 탐구한 시집 ‘여자의 정면’을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수원시 다문화센터에서 여성 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오랫동안 했었고, 시 쓰는 모임 ‘사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8-24

민원 ‘Zero’ 승차 불안 ‘Zero’ 대기 시간 ‘Down’ 포항버스는 대변신 중

일반적으로 도시의 버스노선체계를 살펴보면 시내 구석구석을 연결하는 수많은 노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 도시의 시민이라도 해당 지역에 살지 않고서는 선뜻 노선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확실하게 아는 노선이 아니면 대중교통인 버스를 이용하기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물론 남들에게 대중교통의 이용을 권하기도 어렵다.버스가 택시나 승용차와 경쟁하려면 이들을 앞서는 장점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버스를 타면 승용차처럼 편히 앉아서 문 앞까지 갈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불편하지는 않아야 하며, 가능하다면 승용차만큼이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다. 포항시는 교통여건 변화에 맞춰 시내버스 노선개편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 2008년 시내버스 노선 전면개편 이후 교통여건 변화에 따라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지역주민의 이용 편의와 이용자 중심의 대중교통체계 구현하고자 지난해 2월 노선개편 사업에 착수했다. 올 하반기에는 주민설명회 등을 통해 시민의견을 수렴할 계획이다.작년 2월 개편 착수, 올 하반기 주민설명회 개최도심 환승센터 확보·급행좌석 버스제 도입양덕·문덕지구 등 신규 주거지 순환버스 검토철도역·터미널·공항 등 교통 거점시설 연계 등심도있는 분석 통한 최적의 대안 마련 ‘기대’버스수송 분담률 등 각종 통계지표 파악 안돼현실과 동떨어진 결과 나올까 우려도 커□ 노선 개편에 대한 우려노선 개편이 추진 중이지만 일부에서는 이번 개편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포항시의 버스이용객이 해마다 줄고 있어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인 가운데, 특히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등으로 시내버스의 경영난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어서 적자 노선에 대해 예산을 지원하고 있는 포항시의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이런 가운데 버스 수송 분담률과 같은 교통량 사용 분석을 가늠하는 각종 통계지표 등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주먹구구식 대중교통 정책을 펴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최상위 정책인 포항시 도시기본계획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아 하위 개념의 인구 추계 통계는 물론, 버스 수송 분담률과 같은 통계도 나오지 않고 있다. 관련해서 포항시는 내년 하반기 전면적인 버스 노선 개편을 위해 용역을 의뢰해 대중교통 문제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등 시민들의 편의와 수요에 적합한 대중교통 정책을 펴기 위해 전문가 자문 등 다방면으로 최선의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노선개편 어떻게포항시의 이번 버스노선체계 개편은 무엇보다 도시 팽창과 교통여건 변화로 대중교통의 핵심인 시내버스에 대한 시민들이 요구사항이 날로 증대하고 있어서 이에 따른 시내버스 노선개편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또한 그동안 교통카드 결제시스템 도입, 무료 환승제 실시, 버스도착 예고시스템 도입, 그리고 읍·면 오지지역중심으로 공영버스 도입·운영하고 있지만 오히려 버스 이용객은 해마다 줄고 있는 점을 심각하게 판단했다는 후문이다.포항시는 이밖에도 ‘더 빠르고, 더 편리하고, 더 저렴한’ 대중교통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목표로 막바지 준비에 총력을 쏟고 있는 가운데 최근 교통안전의 주요 키워드로 꼽히는 ‘보행자’와 ‘고령자 안전’ 등 생활지역에서의 보행자 안전증진에 대한 고려도 함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특히 버스노선체계의 개편을 앞두고 예측되는 문제점 및 시민, 관광객 등 이용자들의 혼란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모아 시행 초기 예상되는 혼선과 민원 등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대책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중교통정책이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는 못하지만 서민의 발을 자처하는 대중교통을 서민들이 바라는 시간대에 시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노선에 대한 편리함 등을 꼼꼼하게 챙기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포항시의 이번 노선체계 개편에는 △도심 환승센터 신규확보 및 간선·지선노선 운영방법 재정립 △배차간격의 적정성 검토 및 죽도시장 경유노선 시장주변 분산운영 △급행좌석 버스제 도입 검토(국도 7호선, 국도대체 우회도로 운행) △포항형 교통카드 도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신규 주거지 순환버스 도입 검토(양덕, 문덕지구 등) △교통 거점시설 연계방안 마련(철도역, 터미널, 공항, 여객선터미널) 등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최적의 대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시민 의견 최대한 반영포항시는 앞서 노선개편 초기 단계에서부터 시민들의 다양한 의견 반영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용자 중심의 대중교통체계를 만들기 위해 시민 참여단을 모집한데 이어 참여단의 아이디어를 시내버스 정책개선에 적극 반영할 계획이다.이강덕 포항시장은 “이번 버스노선체계 개편은 민원 ‘0’, 승차불안 ‘0’, 기다리는 시간 ‘짧게’를 목표로 시민을 비롯한 이용자 중심의 체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노선의 효율성과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를 위한 노선체계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관련해서 포항시는 단순히 시민들만을 위한 노선체계가 아닌 지역적 특성과 외지인 유입 등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개방적, 미래적 노선체계 나아가 대중교통체계를 마련한다는 방침이다.버스는 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말 그대로 ‘시민의 발’이다. 개인 중심이 아니라 대중이 중심이 돼야 하며, 서로가 조금만 배려하고 양보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모두가 이용하는데 편리한 대중교통이 될 것이다. 포항시의 버스노선체계의 개편이 가야 할 방향이다. 이용객 감소로 위기맞은 포항버스깊어지는 버스업계 노사 갈등부족한 동·서축 연결도로 등산적한 문제점 우선 해결돼야포항시에는 지선 94개, 간선 15개의 노선에 총 200대의 버스가 운행 중이다. 지선은 파란색 버스로 좁은 지역안에서 많은 곳을 다니며 간선버스 등으로 쉽게 환승할 수 있고, 간선은 초록색 버스로 시 외곽에서 도심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시내버스는 ‘시민의 발’로서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대중교통수단이지만 과거의 위상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코리아와이드 포항’에 따르면 버스 이용객 숫자는 2016년 2천680만명에서 2017년 2천56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올해는 월평균 이용객 180만명을 바탕으로 추산하면 2천370만명 수준으로 더욱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포항시의 차량등록대수는 2016년 24만8천281대, 2017년 25만4천292대, 2018년 25만8천713대로 해마다 늘고 있다. 더구나 주 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으로 촉발된 버스업계 노사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포항 버스업계의 임금·단체협상이 결렬돼 파업의 먹구름마저 드리우고 있다.이 외에도 드러난 문제점은 많다.우선 동서축을 연결하는 버스 노선이 부족하다. 대부분의 노선이 남북축을 연결하고 있는 실정으로, 인구 7만5천여명이 거주하는 경북지역 최대 동(洞)인 장량동의 경우 자가용이나 택시를 이용할 때 포항역까지 10여분 정도 걸리지만 시내버스를 이용할 경우에는 환승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최소 30분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되는 현실에 처해 있다. 인접한 흥해와 장량동을 오가는 버스노선도 상황은 비슷하다.일부 지역의 인프라 부족도 이슈다. 일례도 북구 흥해읍 학천교차로 정류장에 드나드는 버스는 고작 배차 간격 20분의 175번 버스가 전부로, 875세대 삼도뷰엔빌과 779세대 학천삼도미래타운1차 및 360세대 삼도뷰엔빌스마트 등 총 2천세대가 넘는 아파트단지가 몰려 있는 곳 치고는 너무 열악하다. 더구나 그 흔한 버스정보시스템(BIS) 하나 없으며 인도도 없어 바로 아래 하천 부지와 도로 사이의 1m 남짓한 폭이 버스를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 안전사고 문제까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가운데 포항시의 버스 노선 개편에 시민들이 거는 기대가 크다. 즉, 포항시가 기본적인 대중교통 인프라와 시민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열린 행정을 펼치기를 시민들은 바라고 있다. ‘자가용 없이 살기 어려운 포항’의 대중교통 상황을 방치하는 것은 인구유출 등의 근본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포항시 버스 노선 개편이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끝

2018-08-23

협찬받은 무대복 입고 전국대회 ‘장려상’… 최선 다한 결과 가슴 벅차

▲ 김선애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이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김선애(56) 전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은 1962년 11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성에서 새마을부녀회장을 하던 모친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봉사와 새마을운동을 접했다. 1985년 결혼을 한 후 대구에서 살면서도 봉사활동에 참여했다.이후 남편 직장때문에 구미로 이전한 뒤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시작으로 새마을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2006년 구미시새마을부녀회장을 6년간 역임하고 2012년부터 올해 2월까지 경상북도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2년동안 구미시와 경상북도 새마을부녀회장을 역임하면서 알뜰장터와 새마을대청소 등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올해 2월 경북도새마을부녀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지역 봉사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구미 새마을여성합창단장 시절보조금 없어 발품팔아 단원 구색 갖춰단원들 자비로 전국대회 출전도베트남서 첫 해외공연… 열악한 조건에도땀 흘리며 마치자 끊임없는 박수세례△봉사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다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어요. 어릴적 기억에 어머니가 새마을부녀회장을 오래 하셨어요. 지금은 임기가 있어 임기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하지만, 당시에는 부녀회장을 하면 임기라는게 없었던 것 같아요.시골이었으니까 더 그랬겠죠. 그리고 우리집이 구판장을 했으니까 당연히 어머니가 부녀회장을 하신거 같아요. 시골동네여서 그런지 어머니가 부녀회장이고 다른 아주머니들은 모두 부녀회원이었어요. 동네 전체 아주머니 모두가 부녀회원이었죠. 내 기억으로는 동네에서 무슨 일만 있으면 어머니를 비롯해 동네 아주머니 모두 모여 일을 했어요.지금 생각해도 그땐 단합이 참 잘되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매우 적극적인 성격이셨기에 동네 잔치, 동네 청소 등 모든 일에 적극적이셨어요. 내가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 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하시는 일들을 옆에서 보면서 자랐죠. 제가 조금 철이 들고나서는 어머니가 하는 일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리 열심히 일을 하는지 몰랐거든요.나중에 알았죠. 그게 봉사였고,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을. 사춘기 시절 어머니께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물어 본 적이 있었요. 그때 어머니는 웃으면서 “봉사는 댓가를 바라고 하는게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는데 그 말이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새마을정신이 아니었나 싶어요.△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맡다결혼하고 대구에서 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 직장문제로 구미로 오게 됐어요. 대구에서도 봉사활동을 했었으니까 구미에 와서도 봉사활동을 계속했죠.지역에서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다보니 여러사람들을 알게됐어요. 그러다 어느날 한 지인분이 새마을여성합창단장직에 나를 추천하셨어요. 난 합창단원을 한 적도 없고, 합창단에 대해 솔직히 아는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거절을 했죠. 거절은 했는데 너무 신경이 쓰이는 거에요.그래서 여성합창단에 대해 조금 알아보기 시작했어요. 이게 원래는 송정어머니회 합창단이었다가 나중에 없어지면서 새마을합창단에 편입이 되었더라구요.근데 보조금이나 이런게 없다보니 사실상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그러니 활동하기가 많이 어려웠던거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어요.합창단에 대해선 모르지만 대외적인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또 부단장이 있으니까 내부적인 일은 부단장이 하고 외부적인 일은 단장이 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장을 하기로 결정했죠.근데 막상 합창단을 보니까 힘든 점이 한 둘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내가 합창단에 대해 잘 모르고, 외부인이다보니 보이지 않는 텃새 같은 것도 조금 있었구요. 그런건 사실 별 문제는 아니었고 진짜 문제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어요.합창단원들이 무대에 서려면 그래도 무대복이라도 변변한게 하나 쯤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그래서 발품을 팔았죠. 돈이 없으니 발품이라도 팔아야 했어요. 다행히 대구에서 생활할때 아시는 분이 섬유공장을 하고 계셔서 무대복을 만들 수 있는 천을 협찬을 받고, 무대복을 만드는 것도 전부 협찬을 받았어요. 구두도 협찬을 받고.그분들에게 그냥은 못가니까 연락해서 점심이나 하자고 약속을 잡고 밥 먹으면서 부탁을 했죠. 그렇게 발품을 팔아 단원들의 복장을 다 갖출 수가 있었죠.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면서 맺은 인연으로 그분들이 도와주신거죠. 지금도 그때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하죠. 참 고마운 분들이었어요. △전국합창대회에서 장려상을 받다합창단이 어느정도 구색이 갖추어진 뒤로 여러 무대에 오를 수 있었어요. 매년 두 차례 정기연주회와 각종 행사에 특별출연을 했죠. 그래도 구미시새마을여성합창단이니만큼 구미를 알릴 수 있는 합창단이 되고 싶었어요.좀 더 전문적인 합창단이 되어야했죠. 하지만 재정적으로 열악하다보니 전문가를 모시기가 사실 어려웠어요. 지역 대학에는 음대가 없다보니 다른 지역에 계신 분들이 오셔야 하는데 교통비 드리기도 빠듯한 실정이었으니 사실상 어려웠어요.사실 반주자와 지휘자는 전문가가 해야하는 거에요. 시에서 보조금을 주긴 했는데 사실상 그분들에겐 너무 적은 금액이었죠. 사실상 봉사개념으로 봐야 했어요.그래도 그런 분들이 계셔서 전국대회에 나갈 수 있었어요. 보조금은 전부 그분들에게 줄 수 밖에 없으니 단원들은 모두 자비로 했어요. 연습하고 난 뒤 밥이나 간식 같은 건 모두 단원들이 자비로 했죠. 그만큼 합창단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어요. 그런 열정으로 전국대회에 나가게 됐어요.내가 단장을 맡고 처음 나가는 전국대회가 바로 제주도에서 열리는 탐라전국합창경연대회였어요. 2004년도에 열린 대회에 우리가 참가했어요. 그때 장려상을 수상했어요. 비록 1등은 아니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어요. 그래서인지 당시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주었어요.신문에 우리가 장려상을 탄게 보도가 많이 되었죠. 새마을여성합창단이 새마을운동의 발원지인 구미를 전국에 알렸다며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도 가슴 한켠이 뜨거워 지는게 참 고맙고 대견하게 생각해요. 그 일을 계기로 많은 행사에서 우리를 찾아주셨어요.환경연수원의 숲속음악회, 금오공대 총동창회 축하공연, 길거리 공연 등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에는 꼭 우리 새마을여성합창단이 함께 했죠. 참 행복했어요. △해외 공연으로 새마을운동을 알리다전국 대회에서 입상을 한 뒤 해외 공연까지 가게 됐어요. 제일 기억에 남는 해외 공연이 처음으로 간 베트남 공연이었어요. 첫 해외 공연이라 사실 기대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너무 시설이 열악한 거에요. 정말 너무 놀랐어요.공연장이라고 마련된 곳이 그냥 천막이 쳐진 곳이었고, 그 더운날에 냉방은 전혀 안되어 있었어요. 대형 선풍기가 있었는데 그건 또 관람하는 사람들 쪽으로 되어 있었죠. 그래도 공연을 하러 간 이상 공연을 무사히 마쳤죠. 정말 열심히 했어요. 무대에 조명 장치가 없어 단원들이 노래를 하면서 손전등을 돌려가며 노래를 불렀으니까요.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진지했어요. 정말 좋은 공연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진심으로 공연을 열심히 하니까 통하더라구요. 그사람들도 우리가 무대복을 입고 땀을 줄줄 흘려가며 공연을 하니까 감동을 받았었나봐요.박수가 끊임없이 나왔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열정적인 박수를 받은 사람들은 아마 우리 합창단원밖에 없을 거에요.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게 새마을운동이잖아요. 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우리 단원들은 공연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 것이라고.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23

전시회·예술교육·체험까지 ‘원스톱’ 복합문화예술공간 세계 예술산업 새 기준점 제시

글 싣는 순서 1. 밀라노 예술가들의 성지 ‘토르토나’의 탄생2. 이탈리아 넘어 세계 최고를 꿈꾸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3. ‘두마리 토끼 한 번에’ 순천 문화의 거리4.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에서 가능성을 보다5. 자생적 문화생태계 구축을 향해 가야할 길□ 토르토나 지구를 문화예술지구로 만들다이탈리아 밀라노는 화려한 패션과 명품거리로 대변되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다.여느 성공한 도시와 마찬가지로 패션 1번지 밀라노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존재했다.밀라노라는 도시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패션 1번지였고 100년, 200년 뒤에도 아무 노력없이 패션 1번지 자리를 사수할 수 있다면 언급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다.이처럼 오늘날 밀라노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기업이 있다.이탈리아 최고의 문화예술기업 슈퍼 스튜디오 그룹(Super Studio Group)이다.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1983년 슈퍼 스튜디오 13(Super Studio 13)이라는 이름으로 토르토나 지구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슈퍼 스튜디오 13은 오픈당시 사진작가, 미술감독, 패션디자이너, 홍보전문가 등 문화예술산업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춘 사진스튜디오 13개로 구성됐다.독립적인 시설인 개별 스튜디오에 의상실, 분장실, 음향장비 등을 갖췄고 작품제작, 사진촬영, 홍보활동 등 모든 작업이 한 번에 가능했다.불과 2∼3년 만에 유명세가 퍼지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 스튜디오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슈퍼 스튜디오 13은 세계 예술산업에 새로운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슈퍼 스튜디오 그룹 공동창업자인 플라비우 루치니(Flavio Lucchini)씨는 “처음에는 단순히 밀라노에서 유명한 사진작가를 모아 이들을 키워내기 위한 장소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며 “그런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밀라노를 국제적인 패션도시로 만드는데 마중물이 되기로 하고 또다른 벽을 넘어서는 도전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 복합문화예술공간 ‘슈퍼 스튜디오 피우’슈퍼 스튜디오 13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전시회, 예술교육, 체험활동이 가능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됐다.슈퍼 스튜디오 그룹 공동창업자인 플라비우 루치니와 지셀라 보리올리(Gisella Borioli)는 패션, 커뮤니케이션, 창조영역의 필요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공간을 밀라노에 제공하고자 했다.이에 그들은 슈퍼 스튜디오 13에서 200여m 떨어진 장소에서 생산공장을 가동했던 미국계 전기조명업체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이 떠난 폐공장부지 1만7천㎡를 매입해 슈퍼 스튜디오 피우(Super Studio Piu)를 만들었다.슈퍼 스튜디오 피우는 현대적이고 다재다능하고 횡단하는 멀티 장소이자 패션, 예술, 디자인, 커뮤니케이션, 문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활발한 사람들과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또한 밀라노 패션 위크(Milano Fashion Week),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o Design Week)로 대표되는 각종 행사, 전시회, 컨벤션, 박람회 등 대규모 행사 개최장소로 활용되고 있다.뿐만 아니라 사내 파티, 동호회 모임, 댄스공연 등 비공식적이고 소규모로 치러지는 행사를 위한 장소로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크기가 다른 공간들은 가구, 자동차, 광고 영화, TV촬영 등 어떤 종류의 서비스든 넓고 편안한 공간이 필요한 곳에 딱 맞는 공간이며 트럭형 입구 형태라 접근하기도 용이하다. □ ‘세계적 기업이 한 곳에’ 지상 최대 디자인 쇼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매년 4월 개최되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Milano Design Week)에서도 자신들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약 1주일간 진행되는 이 전시회에서 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지난 2015년부터 슈퍼 디자인 쇼(Super Design Show)라는 단독행사를 마련해 디자인 위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슈퍼 디자인 쇼는 예술과 디자인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크고 작은 글로벌기업의 제품을 새롭게 디자인하며 상품가치를 창출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회다.이탈리아 자국 기업 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중국, 프랑스, 덴마크, 일본, 벨기에, 영국 등 세계 20여개국에서 각 나라를 대표하는 글로벌기업들이 저마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작품을 출품하고 있다.한국에서도 삼성과 LG가 슈퍼 디자인 쇼에 참여해 국가 위상을 드높였다.시대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이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2천명이 넘는 기자와 1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행사장을 찾고 있으며 불과 4년 만에 지상 최대의 디자인 쇼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치아라 페렐라 팔다(Chiara Ferella Falda) 슈퍼 스튜디오 홍보팀장은 “세계 트렌드를 이끄는 이탈리아 밀라노이지만 변화를 위한 지속적인 노력없이 결과를 기대한다면 그 상태 그대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며 “지금까지도 충분히 성공적인 쇼를 보여줬지만 앞으로도 더욱 뛰어난 쇼를 만들기 위해 인도, 러시아, UAE 등 이전까지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의 기업을 유치하는데 주력할 계획이다”고 밝혔다.지셀라 보리올리슈퍼 스튜디오 그룹 창업자 인터뷰비전과 진심을 팔아라장기적 투자 바탕으로창작활동에 매진하라포항 꿈틀로,한국의 밀라노로재탄생할 것모두가 안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불가능해 보였던 도전을 성공적인 결과로 이끌어낸 그들은 이제 신화로 남게 됐다. 이탈리아 최고의 문화예술기업 슈퍼 스튜디오 그룹(Super Studio Group) 공동창업자인 지셀라 보리올리(Gisella Borioli·사진) 대표와 남편 플라비우 루치니(Flavio Lucchini)씨의 이야기다.이탈리아의 유명 잡지 클래스(Class)가 선정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으로 꼽힌 보리올리 대표를 만나 인터뷰를 나눠봤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의 창업배경은△남편이 패션잡지 보그(Vogue)의 창간인이자 편집장이었고 나 또한 패션관련 리포터로 근무하고 있어 패션, 예술,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패션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머리를 맞댄 결과 작품제작, 사진촬영, 전시회, 예술가양성 등 모든 과정을 한 곳에 모은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좋은 아이디어였지만 실행을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주어진 돈이 많지 않았는데 밀라노 도심의 건물은 입주비용이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적당한 공간을 찾다보니 토르토나(Tortona)라는 옛 공장지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폐허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근처에 기차역이 있어 교통이 좋았고 건물임대료도 매우 저렴했다. 그리하여 슈퍼 스튜디오 그룹의 원조인 슈퍼 스튜디오 13(Super Studio 13)을 설립했는데 이곳에는 사진촬영공간, 의상실, 예술인 양성학교 등이 마련됐다. - 슈퍼 스튜디오 그룹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문화예술기업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1999년 토르토나 구역 내에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공장 부지가 매각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정원과 테라스, 야외공간, 사무실, 창고가 있는 1만7천㎡의 넓은 공간이었지만 매각대금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은행에 대출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비즈니스 계획이 없다며 거절당했다.고민 끝에 투자설명회를 열어 당시 3천만유로라는 많은 투자금을 모았다. 우리는 투자자들에게 비전을 팔았고 그 진심이 통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매입한 건물에는 슈퍼 스튜디오 피우(Super Studio Piu)를 세웠다. 단순히 예술활동 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예술, 패션,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등이 모두 가능한 복합예술문화공간이 탄생했다.슈퍼 스튜디오 피우가 설립된 이후 토르토나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르마니(Armani), 펜디(Fendi) 등 유명 패션브랜드들이 줄지어 이곳에 쇼룸을 만들었고 크고 작은 공방들도 들어왔다. 오직 토르토나 만을 위해 일하는 컨설팅업체 토르토나 로케이션스(Tortona Locations)의 역할도 토르토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 슈퍼 스튜디오 그룹의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포항 ‘꿈틀로’에 조언을 부탁드리자면△슈퍼 스튜디오 그룹을 처음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4가지가 있다.엄격한 작품선정, 최상의 품질, 혁신적인 요소, 미적인 아름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의 가장 끝부분에 연결돼 있는 단어는 예술이다. 아무리 뛰어난 쇼여도 예술적인 요소가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더라도 이를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은 밀라노를 제작의 공간에서 창조의 공간으로 바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장기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인내심을 갖고 창작활동에 매진한다면 꿈틀로도 포항이라는 도시를 창조의 공간으로 충분히 탈바꿈시킬 수 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8-08-21

새마을금고 저축했던 女직공, 고향에 선물한 소 한마리로 ‘장관 표창’

나이 어린 10대 여직공들 위해새마을운동 교육·절약정신 심어줘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고기잡는 법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어려움 딛고 일어서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어린 직공들을 선도하다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 근무하는 80%이상이 미혼 여성이었어요. 대부분 나이가 어린 10대 여성들이었죠. 그 애들도 참 고생을 많이 했어요. 힘들었을 거에요.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당시 동구방직과 코오롱 회사 안에 고등학교가 있었어요. 시내에 한 곳도 있었구요. 초창기에는 대부분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까 어린 애들이고 하니 그런것이었지만 월급도 오르고 하니 하나 둘씩 노는데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어요.촌에서 자라 이곳에 와서 돈을 제법 벌게되니 씀씀이가 커지기 시작한거죠. 그렇다고 여긴에선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어렵게 번 돈이니 절약하며 아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어요. 회사에는 일만 잘 시키면 되지 그런것까지 간섭을 하려 들지 않았구요. 또 어린 여자애들이 돈이 있다는 소문이 나니까 야간에 그 여자들을 꼬시려는 남자들도 생기고. 풍기가 문제가 되기 시작했어요.그냥 가만히 둘 문제가 아니었어요. 그도 그런것이 이런 안좋은 소문들이 나기 시작하니까 시골 가족들이 딸을 공장에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거에요.당시에는 유교적인 사상이 강해서 안그래도 딸을 객지로 보내 일을 시키는것을 꺼려하는데 풍기 문제가 생기니까 더욱 안보내려고 했어요. 이런말을 하는게 좀 그렇지만 당시 구미공단에 딸을 보내면 시집은 못보낸다는 소문까지 있었어요.일단 사람이 있어야 공단이 돌아가니까 시골 면장과 사전에 이야기를 하고,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 구직 설명회를 가졌어요. 그 설명회는 일을 하는 당사자가 아닌 그의 부모들에게 하는 거였죠. 월급은 얼마나 주고, 밥과 기숙사 시설은 어떻고, 올바른 교육을 시키기 위해 이런 교육 등을 한다고 설명했죠. 그리고 회사측의 배려로 그 부모들에게 공장 견학까지 시켜주었어요. 그랬더니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좀 해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어린 여성 근로자들을 선도하기 위한 새마을운동 교육을 함께 진행했어요.일단 풍기 문제는 당시 구미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매일 야간에 순찰활동을 벌였죠. 또 1976년부터는 구미경찰서와 선도교육을 실시했어요. 처음에는 반응이 좋지 않았어요. 그도 그럴것이 야간 쉬는 시간에 잡아두고 이런저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교육이었으니 좋아하지 않았죠. 하지만 120여회 정도 반복적으로 하니까 풍기문란 행위는 거의 사라졌어요.그때 구미경찰서 손승락 보안과장과 같이 일을 했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정말 물심양면으로 많은 걸 도와주었지요. △절약정신을 심어주다풍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나서는 사치와 낭비를 추방해야 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번 돈을 함부로 쓰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건전소비생활교육이란 것을 5년동안 300여차례에 걸쳐 진행했어요. 저축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는 방법을 주로 교육했어요.어린 직공들어었지만 미래 설계에 대한 관심을 굉장히 높았어요. 지금보다 미래에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다들 있었으니까요. 저축을 하기 위해선 돈을 맡길 곳이 필요했죠. 그래서 1979년 3월 회원 45명에 출자금 6만5천원으로 새마을금고를 발족했어요.당시 새마을금고 담당하는 여직원 한명과 둘이서 모든 업무를 봤죠. 힘들었어요. 내 일은 하면서 금융업무도 봐야했으니. 힘들었지만 보람도 있었어요. 공단 내 근로자 90% 이상이 새마을금고 회원이 돼 저축을 하게 됐으니까요. 거기에 사업자금, 농사자금, 주택자금, 학자금 등을 필요할 때 언제든지 빌려 쓸 수 있게 됐으니까요.그리고 그냥 돈만 모으도록 교육하지 않고, 충효 교육도 같이 했어요. 어렵게 번 돈을 미래의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맞지만 키워 준 부모에게도 보답을 해야한다고 가르쳤어요.그러다 어느날 한 어린 여직공이 공단에서 3년 정도 일을 했는데 처음으로 고향에 갈 일이 생겼는데 부모님께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지 물어보는 거에요. 고향이 강원도 인제라고 했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니 소를 한마리 사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죠. 그래서 큰 소를 하나 선물했나봐요.거기에다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경로잔치까지 열어 주었더라구요. 그 소식을 듣고 잘했구나 생각했는데 며칠 후에 그 마을 동장이라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이 여 직공이 마을 사람들에게 새마을운동 교육으로 저축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있고 있다는 설명을 했나봐요. 편지에는 ‘선생님 이런 험악한 세상에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힘이 나더라구요. 많이 고마웠어요. 그래서 새마을 운동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 이 여 직공의 이야기에 대한 공적조서와 마을 동장 편지를 함께 제출했어요.그 후 1년 뒤에 여 직공이 당시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게 됐어요. 그 소식이 또 고향마을에 알려지게 됐구요. 마을에서는 내무부 장관 표창을 받은 사람이 처음이라며 잔치까지 열어주었다고 하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고 고마워요.△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맡기까지구미국가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에서만 새마을 운동 지도자 활동을 했는데 열심히 하다보니 그게 소문이 났나봐요.한번은 공단동에서 날 찾아와 새마을동협의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에요. 당시 국가공단 전체를 맡아달라는 거였어요. 그때가 1978년 이었으니까 지금처럼 국가공단이 크진 않았어요.섬유관련 업체가 대부분이었고, 전자 관련 기업들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였어요. 낮에는 나의 고유업무를 봐야하고 저녁에는 새마을교육을 나가야 하고 정말 힘들었지만,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맡기로 했어요. 앞에서 이야기 한 것들을 공단 전체로 확대해 일을 진행했죠.그러다 1981년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맡게 됐어요. 사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아시겠지만 새마을협의회장은 돈을 받고 하는게 아니라 돈을 내고 하는 자리에요.월급쟁이인 저에게는 사실 부담이었거든요. 그래도 동협의회장들이 회의를 거쳐 추대한 것을 못하겠다고 할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죠. 당시 집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새마을교육을 한답시고 집에 붙어있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에서 돈을 내고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을 한다고 하니 좋아할 리가 없었죠.그래도 집사람이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했어요. 싫은 기색은 있었지만 말은 하지 않더라구요. 지금 생각해도 고맙죠. 내가 새마을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말없이 날 도와 준 집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니까요.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새마을운동당시에는 검소하고 절약하고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다면 지금은 모두가 더불어 잘 사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혼자 잘 산다고 되는게 아니거든. 더불어 잘 살아야하는 거지. 내가 좀 잘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베풀줄도 알아야한다는 뜻이에요.사람은 베풀 줄도 알아야하고 남을 도울 줄도 알아야해요. 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나도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구요. 내가 생각하는 새마을운동은 바로 이런거에요.가끔 메스컴에서 보면 복지정책이라고 여러가지 나오던데.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사람들이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라고 생각해요.가끔 주위에 받는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어요. 도움을 받는데 익숙해진 사람들. 난 그건 잘못된 거라 생각해요.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지금이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이 가장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새마을운동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내 말에 수긍할 것이라 믿어요. 그 믿음을 가지고 새마을운동과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래요.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17

빼어난 미색의 두 여인 준정과 남모… 질투로 얼룩진 죽음의 스캔들

동서양을 불문하고 ‘여성의 질투’가 가져온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한 문헌이 적지 않다. 프랑스의 왕비와 황제의 내연녀였던 백작의 부인, 남아메리카 예술가와 그가 사랑했던 몇 명의 여성들이 만들어낸 추문은 문학작품이나 음악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그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 중 하나가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아내와 첩이었던 ‘여태후(呂太后)와 척부인(戚夫人)의 사연’이다.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에 기록된 이 일화는 너무도 끔찍해 그대로 옮기기가 어려울 정도다.“여태후는 유방의 조강지처다. 그와의 사이에서 혜제(惠帝·한나라의 2대 왕)와 노원공주를 낳았다. 유방이 초나라 항우와의 싸움에서 고전할 때 힘을 다해 도왔으나, 정작 한나라의 왕이 된 유방은 여태후가 아닌 척부인과 그녀에게서 낳은 아들을 더 아끼고 사랑했다.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유방이 죽자 여태후는 척부인의 아들을 독살하고 무딘 칼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잘라버렸다. 그것으로는 화가 다 풀리지 않았던지 벌겋게 달아오른 숯을 억지로 먹였고, 눈과 귀를 멀게 한 후 오물 가득한 돼지우리에 척부인을 던져 넣어 굶겨 죽였다.”이처럼 호러 영화 수준의 두려움을 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질투가 부른 무시무시한 스캔들’은 신라에서도 발생했다. 화랑(花郞)이 생기기 전 신라의 청년들을 이끌던 전위 조직 원화(源花)의 리더였던 준정(俊貞)과 남모(南毛)가 바로 그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먼저 원화가 어떤 조직이었는지 살펴보자.◆ 여성 둘의 뒤를 따르던 수백 명 신라 청년들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는 원화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진흥왕은 천성이 어질고 신선(神仙)을 숭상해 민가의 낭자 중 아름답고 예쁜 사람을 택해 원화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아 인물을 뽑고 그들에게 충성과 효도, 우애와 신의를 가르쳐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다. 이에 준정과 남모, 두 원화가 선택됐는데 둘을 따르는 청년들이 무려 300~400명에 이르렀다.”‘삼국사기’의 김부식 역시 원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런 것이다.“진흥왕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그에 걸맞은 벼슬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개개인의 능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걱정 끝에 젊은이들을 함께 모여 즐기게 하고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 발탁해 쓰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 필요에 의해 준정과 남모가 원화로 뽑혔다.”‘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적힌 문장을 쉽게 해석하면 어린 나이에 왕좌에 앉은 진흥왕은 인재 발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향후 신라의 발전을 이끌 젊은이들을 필요로 했다.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청년들이 기꺼이 따를 수 있는 아름다운 두 명의 여성 준정과 남모를 내세웠던 것이다.역사학계에 따르면 준정과 남모는 원화의 리더 역할과 동시에 당시 신라의 왕이 수행했던 종교의식을 곁에서 돕기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지금으로부터 1천500여 년 전. 서라벌 최고의 미모를 가진 준정과 남모, 거기에 빼어난 용모의 귀족 청년들 수백 명이 말을 타고 풍광 수려한 곳을 찾아다니며 몸과 마음을 닦던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시원스러움을 제공한다.그러나 원화의 결말은 아름답지도 희극적이지도 못했다. 다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인용한다.“준정과 남모, 두 여인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질투했다. 이에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불러 억지로 독이 섞인 술을 권했다. 준정은 술과 독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모를 깊은 연못으로 끌고 가 익사시켰다. 남모를 따르던 무리들은 슬퍼하며 준정의 음모를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그 노래는 진흥왕과 진흥왕의 어머니 귀에까지 들어갔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자 준정도 사형을 피해갈 수 없었다.” ◆ 남모의 죽음은 단지 준정의 질투 탓?서강대학교 사학과 조범환 교수는 ‘한국고대사탐구(韓國古代史探究)’에 발표된 논문 ‘신라 원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비록 원화가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하고 화랑도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지만, 화랑도가 생겨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사실 한국 사학자들의 화랑(남성) 연구에 비하면 원화(여성)에 대한 연구는 극히 미흡한 수준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는 단순히 사료(史料)가 부족했던 탓일까?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우리의 연구 성과가 미약했기에 일제강점기 일본 역사 연구자들은 원화를 창기(娼妓·몸을 파는 기생) 정도로 격하시키거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인물로 치부하기도 했다.이와 관련 조 교수는 “원화의 신분이라든가 원화 아래에 있었던 청년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조언하며 “남모에 대한 준정의 질투가 원화의 폐지를 가져왔다는 단순한 해석에서 벗어나 원화 해체의 이면적 배경을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원화 신분과 ‘해체의 본질적 이유’ 연구해야앞서 언급한 논문 ‘신라 원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삼국시대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주목의 첫 번째 이유는 원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신분이었는지 알려준다는 점이다.“원화는 단순히 미모의 여성이 아닌 화랑과 같은 진골(眞骨)이었고, 왕실의 제사를 보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이는 과거 일본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해석이다.또 하나. 조범환 교수의 논문은 원화의 폐지가 단순히 ‘준정과 남모의 스캔들’ 즉, 여성의 질투만이 이유가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원화의 해체는 당대 신라가 처한 시대적 상황, 체제 내에서 벌어진 왕과 귀족의 권력 다툼, 약화된 이념 구조의 보완을 위한 차원에서 진행됐을 가능성도 있다”는 조 교수 견해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원화’ 폐지하고 ‘화랑도’ 설치‘가장 아름다운 절’ 불국사 중건한 지소태후사연과 곡절 많은 삶이라면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只召太后· 574년 이후 사망 추정)도 어느 신라 여성 못지않다.‘이차돈의 순교’라는 사건을 통해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공인한 법흥왕과 보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지소태후는 당시 풍속대로 여러 명의 왕족·귀족과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낳은 자식이 6~7명.신라 24대 왕인 진흥왕과 함께 미실의 첫 번째 남편인 세종(조선 4대 왕인 세종과는 다른 인물)도 지소태후의 아들이다. 딸 역시 여러 명이었다.540년 가을이 깊어갈 무렵 법흥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진흥왕은 겨우 만 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세상사 이치와 법도를 명확히 분간하기 힘든 나이. 어머니인 지소태후의 걱정은 당연했다. 그런 이유로 진흥왕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섭정(攝政·임금을 대신해 통치하는 행위)이 시작됐다.지소태후의 섭정 시기에 대해 역사학계는 비교적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그녀는 빼어난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사부(異斯夫), 거칠부(居柒夫) 등의 조력을 받아 아들이 수행해야 할 통치자의 역할을 큰 실수 없이 해냈다.545년엔 국사(國史) 편찬을 지시했고, 경쟁 관계에 있던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밀리지 않는 뚝심을 보여줬다. 불심이 깊었던 부친 법흥왕의 뜻에 따라 흥륜사를 완공하는 등 불교 중흥에도 공을 세웠다. 지소태후의 섭정은 10년 가량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지소태후는 574년 불국사를 중건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시기에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과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만들어졌고 이는 불국사에 봉안(奉安)됐다.이를 볼 때 그녀는 아버지 이상으로 불교에 기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도 불국사는 “가장 크진 않지만 가장 아름다운 절”로 이름이 높다.‘화랑세기’에 의하면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준정이 남모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소태후는 망설임 없이 원화를 해체하고, 원화를 따르던 무리들을 화랑으로 재편성했다.서강대 조범환 교수는 ‘원화 해체-화랑도 설치’라는 지소태후의 결정이 가진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새로운 인재 발굴을 통해 어린 아들(진흥왕)이 법흥왕 시절 이루어진 여러 가지 변화를 계속 추진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 것이며, 사상의 변화 과정에서 그것을 수용하고 새로운 종교적인 변화를 이끌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8-17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경쟁 아닌 협동, 같이 살아가는 동지’ 깨달아

이헌영(88)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은 1930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인 1952년 배고픔이 싫어 자원해서 군에 입대했다. 8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1971년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될 당시 구미로 왔다. 공단 내 직물협업단지의 공장을 관리하는 직물협업회 상무이사로 근무하면서 새마을운동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진해 새마을운동 지도자 교육을 받은 이 전 회장은 당시 직물공장에서 근무하는 나이어린 근로자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새마을운동 교육을 시작했다.직물협업단지에서 시작한 그의 새마을교육은 이후 공단전체로 확대됐다. 이후 공단동 새마을협의회장을 거쳐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과 경상북도새마을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 전 회장은 90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1973년 28개 구미 직물공장 관리당시 경쟁 심했던 각 공장들 설득해‘새마을체육대회’ 개최직장윤리·애사심·협동심 크게 고취△ 전쟁통에 배고픔이 싫어 군에 자원입대난 안동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랐어요. 당시 어릴때는 남들이랑 다 똑같아요. 시골이다 보니 모두가 힘든 시기였어요. 어릴적 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어요. 배고팠던 기억밖에 없으니까요. 그 배고픔이 싫어 군대에 입대했어요. 6.25가 한창이던 1952년에 입대했어요.군에 가면 밥을 많이 준다는 말만 믿고. 그 당시에 굶어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별반 다를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배가 고팠어요. 군에 가니까 정말 밥은 많이 주더군요. 전쟁 중이라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지만, 악착같이 살아 남았어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군에 있었어요.지금 사람들은 이런 말하면 웃을지 모르지만, 난 당시 끼니 걱정하기 싫어서 군에 남았어요. 8년 간 군생활을 했죠. 제대 후에는 대구에서 직장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구미에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구미로 가게 됐어요. △국가산업단지 조성을 위해 구미에 첫 발을 딛다군 제대 후 대구에서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1972년 6월 구미로 가게 됐어요. 당시 구미에 국가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있었는데 산업단지 내 직물협업단지를 조성하는게 나의 일이었어요. 당시 산공부에서 직물업체를 관리하도록 구미직물협업회를 조직했는데 내가 상무이사로 있었죠.공단에 중소기업들을 유치해 수출품을 만들려고 했기에 체계가 잡히지 않은 중소기업들을 관리하는 조직이 필요했던거고, 그게 바로 직물협업회였어요. 그 일을 맡아하기로 하고 처음 구미에 왔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와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황무지였어요.주민들이 살고 있는 자연부락만 군데군데 있을 뿐이었어요. 자연부락의 주민들도 공업단지 조성으로 이주하기에 바빴어요.그때 9만5천평의 공장부지를 조성하는게 나의 주 업무였는데, 건물 철거에서부터 묘지 이장, 정지작업 등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너무 힘들었어요.당시에는 변변한 이동수단이 없어 조성되는 공단을 걸어다녀야 했고, 밥을 먹고 잠을 잘 곳도 마땅치 않아 여간 힘든게 아니었어요. 그래도 참고 일을 하니까 결국 공장이 하나 둘 들어서고, 산업단지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하더라구요.1973년 하반기부터는 일부 공장이 가동을 시작해 수출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뜨거워지는게 감격스럽고 뿌듯했어요. 그때 그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어요.△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기로 결심하다국가산업단지가 조성이 되고 직물협업단지에는 28개의 직물공장이 입주했어요. 지금은 자동화나 기계화가 되어 있으니 일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당시에는 직기 하나에 사람 1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구미로 왔어요.직물협업단지에 28개의 공장이 있고, 그 공장에 직기가 6천여대가 넘게 있었으니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죠. 전국에서 한꺼번에 4천여명이 공단에 들어왔어요. 이 중 80%이상이 미혼여성이었죠. 아무래도 천을 짜는 일이라 어린 여성들이 많았어요.배고픈 시절이라 처음에는 끼니만 해결되면 월급을 주지 않아도 된다며 공장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래도 어떻게 월급을 주지 않을 수 있겠어요.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가산업단지인데. 직물공장이 대부분 영세업체이긴 해도 수출품을 제조하는 공장이어서 많지는 않지만 월급은 줄 수 있는 기업들이었어요.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이 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곧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죠. 새롭게 만들어진 공장이고 직원 대부분이 경력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다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경력이 쌓인 여성직공들의 이직이 많아진거에요.그 이직이라는 것이 바로 옆에 있는 공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구요. 그러니 업체간에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기껏 기술을 가르쳐 놓으니까 옆 공장에서 월급 조금 더 올려주고 빼내가니 사이가 좋아질리 없잖아요.공장이 28개뿐이니 처음에는 사장들도 서로 잘 지냈는데, 기술자를 빼가는게 문제가 되어 사장들의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고, 공장마다 다른 공장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어요. 그러니 자연히 생산능률도 떨어졌구요.공단을 관리하는 나로서는 가만히 보고 있을수만은 없없어요. 그러던 중 공장새마을운동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공장 사장들을 찾아가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어느누구도 하지 않으려 했어요.그래서 내가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되기로 한 거에요. 1975년 4월 사비로 상공부 제2 새마을연수원 지도반에 입교해 교육을 받았어요. 그게 저와 새마을운동의 첫 만남이었죠. △단합만이 살길이다막상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받고 돌아왔는데 어느 업체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새마을운동은 행동이고 실천이다라는 교육까지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우선 공장새마을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경영자와 관리자가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했어요. 그래서 24개 업체의 사장들로 구성된 새마을 산업시찰단을 조직해 우수새마을업체였던 한일합섬 등 12개 업체를 차례로 시찰하고 추진사례를 듣도록 했어요. 큰 기업의 업무추진사례 등은 중소기업에게 큰 도움이 되다보니 새마을 산업시찰단은 잘 운영이 되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경력직들의 이직으로 인해 사장들의 관계는 좋지 않았어요. 사장들의 관계가 좋지 않으니 당연히 직원들도 다른 공장직원들과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죠.난 이런 문제가 직장윤리와 애사심이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공단에 있는 전 사원들이 참여하는 단합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추진했어요. 예상은 했지만 반대가 무척 심했어요. 겉으로의 반대 명분은 회사가 하루 쉬면 손해가 막대하다는 거였어요. 또 체육대회를 하고 나면 그 다음날 힘들어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반대하는 이유였어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거였죠. 다른 공장직원들과 한 자리에 두게 되면 이직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계속 찾아가 설득하는 방법 이외에는. 계속 찾아가니까 나중에는 만나주지도 않는 사장까지 생겼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요.그러다 끈질긴 설득에 지친 13개 업체가 참여하는 새마을체육대회가 결국 열리게 되었어요. 2천여명이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회사 선수들을 응원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었어요. 참가한 직원들도 사장도 모두가 만족하는 대회가 됐어요. 체육대회 이후 직원들이 애사심을 가지게 되면서, 무단으로 전출하는 일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그러니 당연히 생산성도 크게 향상되었구요. 체육대회는 그 후 1976년 17개 업체가 참여했고, 1978년에는 21개 업체에서 3천여명이 참가하면서 아주 큰 행사가 되었어요. 다른 공단에서도 부러워하는 연례행사가 된 거죠.자연히 사장들도 사이가 좋아졌구요. 서로 경쟁만하는 사이가 아니라 협동해 같이 살아가야하는 진짜 동지가 된거죠. 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16

신속한 피해 수습… 無에서 有를 창조하다

경북 제1의 도시 포항에 큰 상처를 가져 왔던 11·15 포항 지진. 지진은 지역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그리고 이를 겪으며 축적된 경험을 통해 하나하나 지진 대응책을 만들어 가며 포항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고 있다. 포항시는 우선 피해를 입은 시민들을 위해 전국 최초로 지진 전담부서인 ‘지진대책국’을 신설해 운영하고 있으며, 단순히 지진피해 복구와 수습을 넘어 지진에 강한 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선제적 지진방재 대책 △피해지역 특별도시재생 및 재건 △이재민들의 안정적 주거실현에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특히 포항만의 지진대응 대책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포항형 365 선제적 지진 종합대책’ 4대 플랜(예측·예방, 사전대비, 지진발생 시 대응, 조사·복구)을 마련해 지진으로부터 시민들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방재안전도시로 도약하고 있다. 또한, 지진 피해지역에 국가방재교육공원과 다목적 대피시설, 트라우마 치유센터 등 방재인프라를 구축하고, 현장센터를 통한 시민들과 소통으로 특별도시재생 뉴딜사업과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다.市, 전국 최초 지진전담부서 신설영일도서관 등 학교·도서관 11곳에스마트지진방제시스템 구축재난구호소·국가방재교육원 등방재선구도시 도약 교두보 마련도시재생뉴딜사업도 ‘잰걸음’□ 포항형 365 선제적 지진방재 종합대책 수립포항시 지진대책국은 ‘포항형 365 선제적 지진방재 종합대책’을 현실화시켜 시민들이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편안하게 일상에 전념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먼저 주목할 것이 첨단 ICT기술을 접목한 ‘스마트 지진방재시스템’이다. ‘스마트 지진방재시스템’은 ‘포항형 365 선제적 지진방재 종합대책’의 주요시책 중 하나로, 광·무선통신을 이용한 광센서가 시설물의 주요부분에 설치돼 지진이나 여진으로 인한 미세한 진동과 균열을 감지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통한 조기경보로 학생과 시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첨단시스템으로, 흥해 영일도서관에 전국 최초로 운영되며 추가적으로 포항시 피해지역 총 11곳의 학교와 도서관에 설치된다.이를 위해 포항시는 앞서 KT와 ‘스마트 지진방재시스템 구축 업무협약’을 체결했으며 시스템 준비기간과 현장 조사를 거쳐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시스템 구축에 들어가 오는 8월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이 시스템이 구축되면 각 시설마다 설치된 감지센서들의 데이터 값이 포항시 지진대책국과 각 학교 교무실, 당직실 등에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되고 위험단계의 진동이나 흔들림이 감지되면 즉각 대응할 수 있어 앞으로 첨단기술을 활용한 지진교육과 대피훈련을 통해 학생들이 지진 발생 시에도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질 것으로 기대된다.또한, 흥해읍 일원에 ‘다목적 재난구호소’가 건립되면 평상시에는 주민 체육 및 여가공간으로 활용하고 지진이 발생하면 재해요원활동과 구호물자 수송 등 핵심시설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더해 역사적 가치와 지진방재전문가 양성, 실질적 방재 시스템을 갖춘 ‘국가방재교육원’을 설립해 대한민국 대표 ‘방재선구도시’로서 우뚝 일어설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할 예정이다.‘국가방재교육원’은 우선 역사적 가치 보존을 위해 파손된 일부 건축물을 선별 전시해 현세대는 물론 미래세대에 지진에 대한 위험성을 전달함과 동시에 재앙에 대비할 수 있도록 경각심을 느끼도록 할 것이며, 실질적인 방재대책과 체험시설 등을 완비해 타지역과 차별화된 체험형 방재시설로 만들어진다.또 지진뿐만 아니라 화재 및 태풍과 같은 풍수해, 지진해일까지 연구 분야를 확장해 고차원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재난을 이해하고 극복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방재전문가’ 육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이 밖에도, 포항시는 지난 5월에 보건복지부로부터 국비 3억4천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흥해 보건지소를 리모델링하고 10명의 정신건강전문요원을 채용해 ‘포항시 재난 심리지원 센터’를 개원했다. ‘포항시 재난 심리지원 센터’는 지진과 여진으로 인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로 일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주민들의 심리 회복을 돕는 등 정신건강증진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센터는 추후 재난 발생 시 긴급하고 체계적인 심리지원으로 심리적 고통을 경감시키고 재난 전 일상으로 빠른 회복을 위한 각종 마음건강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며, 이와 함께 포항시는 정부 100대 국정과제인 ‘국립트라우마치유센터’ 포항 유치에도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 도시재생 뉴딜(New Deal) 사업 추진지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포항 흥해지역에 대한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국내에서 처음 추진되는 ‘특별재난형 도시재생사업’으로 포항시가 중앙정부에 강력하게 건의한 사업이다. 앞서 포항시는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가 피해현장을 방문했을 때 ‘도시재생 뉴딜사업’특별지역 지정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과 총리는 모두 적극 검토를 약속했고, 정부는 후속조치로 대규모 재난피해를 입은 지역을 대상으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특별재생지역 제도’를 신설해 근거를 마련했다.이어서 김정재(포항 북구) 국회의원은 흥해읍이 특별재생지역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도시재생특별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난 3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개정된 도시재생특별법으로 흥해읍을 중심으로 한 포항 지진 피해지역은 특별재생지역으로 지정돼 LH(한국주택공사)와 함께 용역을 실시하고, 그 결과가 나오면 하반기부터 도시재생 사업에 박차를 가할 전망이다. 총 사업비는 국비 2천145억원과 지방비 489억원, 민간과 공공기관 3천866억원 등으로 6천500억원 이상이 투입된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일반 도시재생사업과 비교해 볼 때 가장 큰 차이점은 기존 개발이익 중심의 전면 철거방식을 원칙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이다.‘도시재생 뉴딜사업’은 도시공간을 혁신적으로 활용해 삶의 질 향상 및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마련됐다. 특히, 주민과 지역이 주도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가면서 공동체 회복 및 사회통합에 이바지할 수 있으며, 노후 주거지를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정비하고 쇠락한 구도심을 혁신 거점 공간으로 조성해 지역 기반의 도시재생으로 지역경제 생태계 회복과 함께 상가 내몰림 현상(젠트리피케이션 부작용)에도 적극 대응할 수 있다.이러한 흐름 속에서 포항시도 흥해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 ‘흥해 도시재생 주민협의체’에 참여할 주민을 공개 모집하고 있다.이들은 뉴딜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주민 대표로서 주택정비와 도시 재생 활성화 방안 등 두 분야로 나눠 지역 주민이 주체가 돼 추진하는 상향식 모델이며, 정부와 포항시가 주민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한다.또한, ‘주민참여컨설팅단’에 소속된 도시재생분야 전문가들이 직접 흥해읍 주민들과 만나 도시 부흥에 대한 의견을 수렴해 지역 주민들이 직접 ‘새로운 흥해’를 설계하도록 돕고 있다.이밖에도 한동대나 포항대, 선린대 등 지역 대학생들의 집합체인 ‘흥해 아이디어 발굴단’을 통해 대학생들이 보고 느낀 아이디어를 수집해 도시계획에 반영한다. 아울러, 이강덕 포항시장은 지난 6월 28일 지역주민이 원하는 특별재생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흥해 주민들과 만나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당면 문제를 함께 풀어가기 위한 소통 간담회를 마련했다. 이는 한신·아와지(고베) 대지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자체 및 주민들의 협력이 이뤄지면 소통을 통한 당면 과제 순차적 해결과 주민 의견 적극 반영으로 성공적인 도시재건은 물론 지역의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지역주민의 공동체 의식이 높아지기 때문. 이를 통해 도시경쟁력이 높아지고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지난 연말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 시범사업’의 대상지역으로 선정된 중앙동 일원 지역 도시재생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중앙동은 지역경제에 새 바람과 함께 지역발전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올해부터 5년간 국비와 지방비, 기금 등 1천176억이 투입될 예정이어서 흥해읍과 함께 총 7천700여 억원의 사업비를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투자할 수 있게 됐다.중앙동 일대는 전통적으로 포항시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으나 인구가 도심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도심공동화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침체돼 온 지역으로, 지난 11.15 지진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은 북구청사를 비롯해 일부 공공기관 건물과 노후 주택들이 붕괴가 우려될 정도로 피해를 입으면서 함께 도시재생 사업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역이다. □ 지진 피해 극복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지난해 11월 15일 지진 이후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포항시는 지진이라는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키고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도심재생 뉴딜사업’을 통해 전국 제일의 ‘안전한 도시 포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민선7기 출범과 함께 더욱 가속화 될 전망이다. 특히,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흥해 일원의 급속한 도시공동화와 서민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특별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이재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한 주택정비와 공급, ‘지진방재 종합대책’ 수립 등 실질적 방재계획들을 착실하게 추진해 전국 최고의 안전한 도시를 만듦과 동시에 새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포항시 지진대책국 관계자는 “이미 지진전문가 3명을 채용했으며, 하반기에는 방재직 공무원도 추가할 계획이다”며 “단국대와의 관학 협력을 통해 건축물 리모델링을 통한 내진성능 향상 기술을 개발해 접목하는 등 지진 대응을 위한 신기술 개발과 도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시민과 학생들에게도 체험형 교육과 훈련을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실시해 지진에 대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끝

2018-08-16

폐허가 된 공장에서 꽃 피는 예술… 세계 문화예술 허브로 재탄생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2차 산업인 철강산업을 기반으로 수십년간 성장하다 최근 철강산업 성장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포항도 4차 산업을 재도약의 기회로 판단하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세계에서 3번째로 구축한 4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신약개발, 질병원인 분석, 신에너지 개발 등 부가산업을 창출할 전망이고 포항 수중로봇복합실증센터에서 개발 중인 수중로봇, 국민안전로봇 등은 산업뿐만 아니라 실생활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새로운 먹거리 산업 중 하나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문화예술산업이다. 인류 역사상 문화와 예술은 대중의 소비 속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어왔다. 오늘날 이러한 문화예술적 콘텐츠를 산업화시킨 것이 바로 문화예술산업인 것이다.포항시도 지역에 문화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 지난 2016년부터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조성에 나서고 있다.아직까지는 시작단계에 불과하다는 평가가 많지만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인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에 꿈틀로가 선정되면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본지는 이번 기획시리즈를 통해 문화예술이라는 콘텐츠를 활용해 침체된 구도심과 지역경제 회복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 이탈리아 밀라노, 전남 순천 등 타지역 사례를 살펴보고 철강도시 포항이 문화예술도시로 재도약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해본다.글 싣는 순서 1. 밀라노 예술가들의 성지 ‘토르토나’의 탄생 2. 이탈리아 넘어 세계 최고를 꿈꾸다 ‘슈퍼 스튜디오 그룹’3. ‘두마리 토끼 한 번에’ 순천 문화의 거리4.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에서 가능성을 보다5. 자생적 문화생태계 구축을 향해 가야할 길□ 19세기 밀라노의 대표 공업지역이탈리아 북부지역 최대 도시이자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경제를 이끌어가는 양대 축인 밀라노는 ‘패션의 본고장’이라는 수식어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자랑하고 있다.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평가받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20년 가까이 지내며 ‘최후의 만찬’을 포함한 수많은 작품을 남긴 도시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오랜 세월동안 세계의 문화와 예술을 선도하고 있는 밀라노이지만 정작 밀라노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지구 조나 토르토나(Zona Tortona)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이탈리아어 ‘조나(zona)’는 영어 ‘존(zone)’과 같은 의미이며 조나 토르토나는 곧 토르토나 지구를 뜻한다.밀라노 서남부에 위치한 토르토나 지구는 1865년 포르타 제노바역(Porta Genova)이 들어선 이후 외곽의 농촌에서 도심시가지 중 하나로 급성장했다.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농경지와 과수나무들이 자리잡고 있던 자리는 공장과 주택가가 대신하게 됐다. 토르토나 지구는 나빌리오(Naviglio)와 올로나(Olona) 두 하천에서 공업용수를 원활히 공급받을 수 있고 포르타 제노바역에서 유럽 전역에 화물운송이 가능하다는 뛰어난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1960년대 말까지 약 100년간 밀라노를 대표하는 공업지역으로 유명세를 떨쳤다.이 시기 철도회사인 안살도(Ansaldo), 생수업체 비슬러리(Bisleri), 조명업체 오스람(Osram), 식가공업체 네슬레(Nestle) 등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토르토나 지구에서 생산공장을 운영했다.그런데 1960년대 말 생산체계의 급격한 변화와 에너지 위기로 인해 토르토나 지구에 자리잡고 있던 기업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살도는 대부분의 생산라인을 제노바로 옮겼으며 많은 회사들이 다른지역으로 생산공장을 이동시켰다.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며 석유가격이 최대 4배까지 오르는 오일쇼크 사태가 발발하자 남아있던 공장들 마저도 문을 닫거나 해외로 생산시설을 빼냈다.토르토나 지구를 가득채웠던 거대한 공장 부지는 순식간에 폐허나 다름없는 공간이 됐다. 수만평에 이르는 부지가 한꺼번에 산업유휴시설화 되면서 일대는 우범지대로 전락했다.사람들이 떠난 거리는 낮에도 밤처럼 어두웠고 각종 범죄가 급증하며 암흑도시처럼 변해갔다. □ 폐허로 변한 공장지역, 예술가들의 성지로 재탄생하다도무지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토르토나 지구에 구원의 손길이 뻗친 것은 1983년.이탈리아의 유명 패션잡지 편집장 플라비오 루치니(Flavio Lucchini)는 패션전문기자이자 자신의 부인인 지셀라 보리올리(Gisela Borioli)와 함께 토르토나 지구를 찾았다.10년이 넘도록 폐건물로 방치된 포르타 제노바역 인근 옛 상들리에 제조공장을 살펴본 그들은 임대료가 저렴하고 접근성이 뛰어난 이곳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문화예술과 관련된 제품을 사진으로 촬영해 잡지, 광고, 홍보물 등에 활용하는 사업으로,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업이었다.사진작가인 파브리시오 페리(Fabrizio Ferri)도 사업에 참여하며 슈퍼스튜디오(Super Studio)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업체는 오늘날 토르토나 지구가 밀라노를 넘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지구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1985년에는 유명 사진작가인 카를로 오르시(Carlo Orsi)가 비아 토르토나(Via Tortona)에 스튜디오를 마련하며 문화예술사업을 시작했고 같은해 루시아노 포르미카(Luciano Formica)도 비슬러리 제조공장의 일부를 개조해 자신의 작업장으로 만들었다. 1987년 또다른 사진작가인 지오바니 가스텔(Giovanni Gastel)은 자신의 작업실인 가스텔 앤 어소시에티(Gastel Associati)를 비아 토르토나(Via Tortona)로 옮긴 후 세계적인 패션작가로 거듭나게 됐다. 밀라노시는 1990년 철도회사인 안살도(ansaldo)가 사용했던 2만㎡ 규모의 대형공장 건물을 매입했고 이곳을 이탈리아에서 가장 웅장한 오페라하우스라 평가받는 스칼라극장(Teatro alla Scala)의 무대제작실로 활용하고 있다.대장장이, 목수, 세트 디자이너, 경치 기술자, 조각가, 의상 디자이너 등 150여명이 근무하는 이 무대제작실은 세트디자인, 의상디자인, 세트조립, 기계작업 뿐만 아니라 오페라 출연자들의 합창연습실과 공연 리허설을 위한 무대공간도 마련돼 있다.이밖에 1991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 ‘최후의 만찬’을 복원한 예술작품 복원전문가인 피닌 브람빌라 바르실론(Pinin Brambilla Barcillon)도 토르토나 내 비아 사보나(Via Savona)에 작업실을 마련하며 수많은 예술작품을 재탄생시켰다.유명 예술가들이 토르토나 지구에 하나 둘씩 입주하면서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젊은 예술가들도 덩달아 토르토나 지역에 입주를 희망하기 시작했다.오래된 공장 건물은 예술가들이 창의성을 발휘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고 노동자들이 출퇴근길로 이용하던 철도 선로는 패션모델의 런어웨이 무대가 됐다.근래에 들어서는 아르마니(Armani), 제냐(Zenga), 토즈(Tods)와 같은 글로벌 브랜드가 토르토나 지역에 쇼룸을 설치하고 안도 타다오(Ando Tadao),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이 지역 건축물을 새로 짓거나 리모델링하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토르토나 지역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예술문화 중심지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 세계 문화예술 허브 ‘토르토나’ 토르토나 지구는 2000년대 들어 세계 최대 규모의 디자인 전시회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브레라(Brera), 람브라테(Lambrate) 등 밀라노의 또다른 시가지와 함께 분산 개최하고 있다.토르토나 디자인 위크로 불리기도 하는 이 행사는 2004년 설립된 컨설팅업체 토르토나 로케이션스(Tortona Locations)의 주도 하에 매년 4월 열리고 있으며 전세계 160여개국에서 30만명이 넘는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행사 주관업체인 토르토나 로케이션스는 디자인 위크를 포함해 토르토나 지역에서 연간 10여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시기에 맞춰 점포 임대를 희망하는 기업 또는 개인에 대한 종합적인 카운슬링을 하며 토르토나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4㎡에 불과한 작은 가판대에서부터 3천㎡에 달하는 옛 공장건물에 이르기까지 입주 희망자들이 원하는 컨셉에 맞춰 짧게는 1주일에서 길게는 수개월 동안 작업공간을 임대해주고 있다.여기까지는 우리나라 부동산 중개업소들이 하는 일과 매우 흡사해 보일 수 있으나 토르토나 로케이션스는 단순히 건물을 임대해주는 것으로만 자신들의 업무를 끝내지 않는다.토르토나 지구에 입주한 사업자들이 사업설계, 세트디자인, 설비구축 등을 위해 지구 내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컨설팅업체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토르토나 지구 내 업체들 사이에서는 인적교류가 활발히 이뤄졌고 자연스레 예술가로 구성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이렇게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 토르토나 지구는 최근 또 한 번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토르토나 지구와 150년을 함께한 포르타 제노바역은 예전만큼 기차가 많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 100m 거리에 포르타 제노바 지하철역(Porta Genova FS)이 개통되며 기차역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대부분 기차가 인근 기차역인 산 크리스토포로역(San Cristoforo)에 멈춰서기 시작했다.밀라노시는 역 주변 공간을 공원으로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토르토나 지구의 흥망성쇠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토르토나 지구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조프(Zoff)씨는 “토르토나 지구는 산업단지를 문화예술지구로 변모시켰다는 역사적인 배경과 나빌리오 운하와 같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인접해 있는 장점 등이 복합돼 관광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며 “최근 밀라노 내 타지역에 토르토나 지구와 같은 문화예술지구를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토르토나 지구 만이 지닌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기간 동안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글·사진/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8-08-14

지진으로 틀어진 이해관계, 도시 재건으로 화해해야

단 한 번의 지진에서 파생된 상황은 수백이 넘는다. 피해 주민 개개인마다 상황과 피해규모 등이 달라 이를 최대한 만족시킬 해결책이 필요하다. 다양한 이해관계 조정이 시급한 이유다.11·15 포항지진으로 진앙지 인근인 포항시 북구 일대는 건물이 기울어지고 일부가 파손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상대적으로 포항시 남구는 혼란이 적었다. 또 북구에서도 흥해읍과 인접한 장성, 양덕동 일대에 피해가 집중됐다. 전파 판정을 받은 건축물이 대부분 흥해, 필로티 구조의 악몽을 떠올리게 했던 곳이 바로 장성, 양덕동이다. 양덕동에는 신축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던 고층아파트 외벽에 심각한 균열이 일기도 하는 등 지진의 직격탄을 맞았다.포항시는 지진 발생 초창기 수많은 민원과 신고 전화로 혼선을 빚고 업무가 마비되는 등 적절한 대처를 못했다. 지난 2016년 경주 지진을 겪은 포항시였지만 ‘간접적’이었을 뿐이었다. 대외홍보성 지진정책 발표와 달리, 막상 지진을 겪었을 때 준비된 무엇 하나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이는 중앙정부나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포항지진 복구포항시는 지진이 발생한 뒤 응급복구 작업으로 시작으로 항구 복구대책을 추진해오고 있다.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지진의 예측과 예방, 사전대비 및 지진발생시 대응, 지진피해조사 및 복구 등의 계획을 수립했다.그 중에서도 현재 피해지역에 대한 항구적 복구 대책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시는 4급 국장을 비롯한 3과 8팀 27명으로 지진대비 전담조직인 ‘지진대책국’을 신설해 △선제적 지진방재 대책 추진 △교육·훈련 △방재 인프라 구축 △트라우마 치유 △피해지역 도시재생 △이재민 장기 주거지원 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시는 이와 함께 지열발전소 공동연구단 구성을 통한 철저한 원인규명, 건축물 내진보강 국비지원, 피해보상 현실화를 위한 특별법 제정, 중소기업·소상공인 지원 확대, 이재민 장기 주거대책 마련 등의 종합적인 대책을 추진 중이다.무엇보다 폐허가 되다시피한 지진피해지역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냐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흥해도시재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지만 여러가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합치된 의견으로 모아갈지가 최대 과제가 되고 있다. 문제는 정부나 기초자치단체의 지진 피해복구과정에 대한 불신이 깊이 패여 있어 조정이 쉽지 않아 보인다. 애초 지진 피해 조사와 판정 부실, 피해보상을 위한 법규미비 등에서 불신이 시작됐다. 사상 초유의 강진에 대응하는 사전 메뉴얼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곳곳에서 대혼란이 일어났다.지진 피해주민들의 불만은 가장 큰 혼란은 재난지원금의 지급에서 나타났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라 건물의 피해정도를 전파, 반파, 소파로 구분했다. 이를 두고 가구마다 천차만별로 다른 상황을 단 3가지로 구분해 기준을 적용했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20평형 아파트와 70평형 주택에도, 그 반대도 전파 기준에 따라 모두가 획일화된 900만원의 재난지원금을 지원받는다. ‘복지행정’이 아닌 ‘행정상 편의’를 위한 법령으로밖에 볼 수 없다. 가구 수부터 건물 규모 등 이재민들의 상황이 다름에도 ‘재난법’에 이재민들의 상황을 끼워 맞추는 식이다. 양방향이 아닌 ‘일방통행 행정’에 지진 피해 이재민들은 오히려 행정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다. 기존 재난지원금이 실제 주택 보수 비용과 동떨어진다는 지적에 따라 정부는 지난달 24일 정부는 자연재난 복구비용 산정기준을 기존보다 44% 인상했다. 그러나 꾸준한 물가상승과 비교해 재난지원금은 아직 ‘주고도 욕먹는’ 수준이라는 반응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평당 1천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고층아파트부터, 높은 지대를 유지하고 있는 시가지나 번화가 일대의 땅값과 비교했을 때 지금과 같은 재난지원금은 현실과의 괴리가 남아있다. 백분율을 활용해 전파는 매매가격의 최대 30%까지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등의 더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법령의 제정을 이재민을 바라고 있다.흥해읍 이재민 A씨는 “평수가 넓은 단독주택이 평수가 작은 아파트와 같은 기준을 적용받았다”며 “모두가 같은 이재민이라도 각자 복구비용부터 자재값, 주변 환경 등 조건이 다 다르다. 지금의 재난지원금은 현실과 동떨어진 선심성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해관계 조정산적한 과제 중에서도 선결돼야 할 1순위는 피해주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어떻게 아우를 것이냐이다.지난해 11·15 포항 지진 이후 각 읍면동에 접수된 사유시설 피해신고건수만 4만5천여 건에 달했다. 4만여 건이 소파에 해당했고, 상가건물에서도 3천여 건의 신고가 접수됐다. 포항 인구 대비 지진으로 약 1/10 정도가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셈이다.아직까지도 이재민 중 일부는 지자체와 갈등을 빚고 있다.전파 판정에 포함되지 않은 한미장관맨션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불만의 큰 줄기는 ‘현재의 집에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전파나 반파나 파손 유무가 동일한 상황에서 불안감 등으로 더는 집에서 살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미 수차례의 민원과 집회 개최 등 행정기관과 이재민 사이에 갈등의 골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건설적인 방향으로 도시를 재건하기 위한 ‘중간자’역할이 필요한 시점이다.주민들과 가장 가까운 시의원과 지역구 국회의원을 필두로 한 민·관·정계 대타협 조정기구를 구성해 현재 포항지진과 관련해 산재해 있는 각종 사안을 집중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흥해읍 개발구역에서 제외된 일부 가구들 사이에서는 벌써 뒷말이 나오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기준안부터 하나씩 설정해가면서 묶인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한다.□ 일본의 지진피해 복구엄밀히 말하자면, 일본은 지진으로 파손된 사유재산 보상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이는 행정기관 주도의 정책 등 그 나라의 문화에서 비롯한다는 분석이다.방재 선진국으로 강력한 지진을 비롯한 각종 풍수해 등 재해·재난을 수차례 겪은 일본의 방재정책은 무엇보다 ‘자조’와 ‘풀뿌리’에 충실해 있다.최악의 지진으로 기억되고 있는 ‘한신·아와지대지진(사망 6천434명, 부상 4만3천792명. 우리에겐 고베지진으로 더 잘 알려졌다)’이 발생한 이후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파괴된 항만, 철도와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을 원상 복구 수준 이상으로 재건했다.도시 재생과 재개발·건축 등 주거지를 중심으로 한 피해복구는 시민 주도로 이뤄졌다. 각종 협의체와 추진위원회가 구성돼 의견을 모았으며, 공공의 이익에 목적을 뒀다.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건 시민단체들이었다. ‘한신·아와지대지진’ 직후부터 전국에서 몰린 자원봉사자들이 구조작업부터 복구작업까지 함께하면서 공권력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로 소개된다.특히, 자원봉사활동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지진 이후 약 10년 뒤인 지난 2006년에는 고베시가 있는 효고현 내 NPO(특정비영리활동)법인이 1천개를 넘어서면서 전국 6위를 기록하기도 했다.정부역할과 시민의 역할이 정확하게 분리돼, 전국에서 몰린 자원봉사자들과 시민단체 등 민간 주도의 정책적 방향이 ‘허물어진 도시 고베’를 새로운 관광지로 재창조했다. 지진 이전 일본 최대의 물류항이었던 고베시는 지진을 겪고 나서 전 세계적으로 지진을 극복하고 이겨낸 일본 최고의 방재도시가 됐다.일본은 현재도 자주방재시스템 구축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자율방범대, 유·소년, 부인방재클럽 등 지역별 자주방재단체를 조직해 생존교육을 이어가고 있다.일본 오사카시 소방국 관계자는 “지진이 났을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살아있는 것이다. 생존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문제다. 이를 위해 국가에서 방재교육을 의무화하고 있다. 우리(소방국)가 할 수 있는 건 지진 이후 생존자들을 최선을 다해 구조하고 2차 피해를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8-08-14

모두가 협동해 재난을 이겨내는 것이 ‘새마을 정신의 본 가치’

△ 고철 모으기로 환경보호까지당시에는 새마을행사라고 해서 여러가지 행사들이 많았어요. 그 중 고철 모으기가 있었는데 우리 비산동이 구미 27개 읍면동에서 1등을 한 적도 있어요.비산동이 공단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큰 고철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고철을 치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장정 1∼2명으로는 옮길 수 없는 것들이 많았거든요. 중장비를 동원할 수 없으니 모두 사람의 힘으로 옮겼죠.물론 동네 몇몇 분들이 고철을 실을 수 있는 차량 등의 협찬은 있었지만, 차량에 옮기는 것은 모두 사람 힘으로 해야만 했어요. 지금은 고철이 돈이 되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어요. 그냥 쓰레기와 똑같았죠. 그러다보니 고철 덩치가 크면 그냥 버리고 가는 거에요. 그걸 그대로 방치하면 고철에서 나오는 녹 등으로 환경오염 문제도 있을 것 같아 정말 열심히 치웠어요.특히 이 동네는 공단 부근이다보니 공사하다가 버린 고철부터 시작해 타다가 버린 자전거 등 고철이 정말 많았어요. 거기에 비라도 한번 많이 오면 강변에 떠내려오는 고철도 상당했어요. 물론 쓰레기도 많았지만 고철도 상당했어요. 아마도 비산동이 지대가 낮으니까 비가 많이 오면 이 곳으로 쓰레기 등이 다 떠내려 오는 것 같아요.지금은 정비가 되서 그렇진 않지만 당시에는 침수가 자주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리 주민들은 단순히 고철만 모은 게 아니에요. 정말 자신들이 사는 삶의 터전을 깨끗하게 가꾸기 위해 자발적으로 고철을 모으고, 쓰레기를 치운 거에요.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새마을운동이라고 생각해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당시 고철을 비산동에서만 70여t 정도 모았어요. 모두 사람의 힘으로만. 그래서 비산동이 구미에서 고철 모으기 1등을 한거에요.내 삶 터전위해 마을 주민들 자발적 봉사오로지 사람의 힘으로 고철 70여t 모아젊은이들의 새마을운동 외면 아쉬워인성·예의·지혜 배울수 있는 ‘ 정신운동’△재난도 새마을정신으로 이겨내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비산동은 지대가 낮아 장마철 침수가 많은 곳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비산동이 그리 잘 사는 동네가 아니였어요. 판자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죠.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 곳 토박이가 아닌 일자리를 찾아 여기로 온 나같은 외지인들이었죠. 열악한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다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마음 만큼은 따뜻한 사람들이었어요. 2004년인가 2005년인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때 물난리가 크게 한번 났었어요. 당시 새마을협의회는 복구작업을 하고 부녀회는 끼니 때마다 라면을 끊여주었어요. 몇 날 며칠을 작업에 매달리면서 정말 힘들었어요. 마을 안쪽까지 완전 침수가 되서 정말 힘들었어요. 강변에 있던 식당들은 더했어요. 남아 있는게 별로 없었으니까.힘든 시기였지만 새마을협의회 말고도 다른 단체에서도 발 벗고 도와주어서 힘이 많이되었어요. 힘든 일이 닥치니까 모두가 하나가 되더라구요. 이 동네가 당시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찾아 모인 사람들이다보니 약간의 서먹함이랄까 그런게 있었거든요. 아무래도 고향도 다르고 그러니까. 그랬던 사람들이 매일 진흙범벅이 되서 같이 일하니까 그런 서먹함들이 없어지더라구요. 모두가 협동해서 고난을 이겨낸거죠. 그게 새마을운동 정신이라고 생각해요.그리고 그때부터 각자의 고향은 달라도 제2의 고향은 구미인 사람들이 남았어요. 같은 공통분모를 찾은 거죠. 당시 비산동사무소 직원들도 주민들이 하나가 되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복구작업이 끝나면 공무원들이 막걸리 같은 걸 가지고 와서 같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했거든요. 어떻게 보면 물난리가 고향이 각기 다른 우리 주민들을 하나로 만들어 준 것 같아요.△새마을운동은 인성교육내가 새마을운동이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새마을운동은 인성교육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지금이나 예전이나 젊은 사람들은 윗사람 이야기를 잘 안들었어요. 안 듣는 강도의 차이가 있을뿐이죠. 저도 어릴적에 부모님 말씀 안들었어요. 그렇게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전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부모님의 삶을 존중했고 그분들의 충고는 마음에 깊이 새겼어요.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어른들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더욱 강해졌어요. 그 분들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삶의 지혜 같은 걸 배웠거든요. 그분들을 통해서 사회생활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규범 등을 배웠어요. 조금 잘났다고 어깨에 힘주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마음으로 대하는 방법 등을 배웠어요. 이런 건 절대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이에요. 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새마을운동에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다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거든요. 지금의 젊은이들은 동네 이웃에 사는 사람이 누군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그러면 자신이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을 하기가 어렵죠. 서로 같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젊은이들이 이웃주민을 잘 알았으면 해요. 그렇다고 강제할 수는 없겠죠.다만 새마을운동이 좀 더 대중화가 된다면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요.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새마을운동을 너무 괄시하는 것 같아요. 새마을운동은 그런 게 아닌데. 새마을운동은 사람들이 서로 같이 살아가는 걸 도와주는 정신운동이에요. 새마을운동 자체가 인성교육이에요. 우리 사회가 그걸 좀 제대로 알았으면 해요.△새마을운동가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면새마을운동가를 활동하다가 지금은 봉사활동에만 참여하고 있는데 느낀 점이 많아요. 나의 젊음을 새마을운동과 같이 했는데 지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조금 섭섭한 마음이 있어요. 나뿐만 아니라 이전에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거에요.그렇다고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좀 알라달라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지금 이 사회가 새마을운동을 폄하하지 말고, 제대로 인식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지금 젊은이들은 새마을운동이 무슨 정치조직 정도로 아는 것 같아요. 새마을운동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더라구요. 그건 옳지 않은 거잖아요. 새마을운동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면 새마을운동가를 자연스럽게 존중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 믿어요. 그리고 새마을운동 조직에서도 새마을운동가 원로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구미에는 새마을운동가 원로들이 참여하는 새마을후원회라는 것이 있어요. 난 새마을후원회 사무장을 4년동안 했어요. 초대 회장은 박병군 전 구미시새마을협의회장님이 하셨고, 이후 저도 회장직을 4년동안 했어요. 임기는 2년인데 연임해서 4년을 했죠.▲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이 비산동주민센터 앞에서 예전과 달라진 동네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락현기자회원 자격은 구미시 27개 읍면동 협의회장, 부녀회장을 했던 사람들이에요. 새마을운동을 했던 지도자들을 모아 지금 새마을운동을 지원하기 만든 조직이에요. 우리가 주축이 되지 않고 지금의 새마을협의회가 하는 봉사활동을 뒤에서 보조해주는 역할이죠. 새마을 한마음 대회라든지 연말 평가대회 등을 도와주기도 하고, 여름철 금오산 야영지 휴지줍기 등도 하고 있어요. 알뜰 벼륙시장에서는 직접 솜사탕 기계를 가져가 아이들에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팝콘도 만들어주곤 해요. 큰 일은 아니지만 새마을운동 지도자로서 끝까지 이 지역을 위해 작은 봉사를 하고 싶은 거에요. 우리 새마을운동가들은 정말 진심으로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에요. 제발 사회가 우리를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로가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 우리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 열심히 봉사를 할 수 있으니까요./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10

대형 지진 컨트롤 타워, 지자체 역량으론 ‘한계’

‘11·15지진’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지진에 무관심했는지 그 민낯을 가감없이 보여줬다. 지진발생 수 분이 지나서야 도착하는 재난문자, 어디에서도 정보를 찾을 수 없는 재난대피소, 내진(耐震)과는 동떨어진 필로티 구조 건물 등 많은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시민들은 분노했다. 논란이 컸던만큼 가이드라인과 대책 마련이 나름 신속하게 진행됐고 현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많은 개선이 이뤄졌다.반면, 아직 상대적으로 성에 차지 않는 부분도 있다. 바로 복구와 관련된 분야다.‘재난 예방 및 대처’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면 ‘재난 복구’는 소도 잃고 부서진 외양간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격이랄까.지진 전문가는 많아도지진 수습 전문가는 태부족광역단체급 전담 조직 필요짧은기간·적은인원이 피해 파악불공정·부실조사 개선책 마련 절실◇지진의 특수성을 간과한 피해 진단과 복구“옆집은 소파 판정이 났는데 우리집은 왜 안 되는 건가요. 누가 보더라도 우리집이 피해가 더 심한데 제대로 진단한 것이 맞나요?”“퇴근은 잊고 살고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요. 원래 업무에 지진 업무까지 더해져 과부하 상태입니다.”지진이 발생하고 복구와 관련해 피해 조사를 진행하는 단계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지진관련 법규가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줬다.지진이 홍수 및 산사태 등과 동일한 자연재난에 포함되어 있는 법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 규정에 따라 2주 안에 국가재난정보관리시스템(NDMS)에 피해 현황 입력을 마쳐야 한다.현실은 어떨까. 진앙지에 근접해 가장 피해가 컸던 흥해읍을 포함하고 있는 북구의 피해조사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구청 소속 2인 1조의 6개 팀이 2주라는 짧은 기간에 모든 조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각 지역에서 300여명의 전문가가 파견돼 업무를 도왔지만 이들은 급한 대로 거주 가능 여부만 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최종 판단은 포항시가 내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접수된 피해조사 건수는 총 2만여건. 2주 전부를 오롯이 조사에 집중하더라도 하루에 1천400여건을 처리해야 하는 업무량이다. 이를 팀당으로 나누면 230여건이 된다. 하루 24시간을 꼬박 조사해도 시간당 10건 정도에 이른다. 이동시간을 포함해 가구당 6분만에 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주민들의 부실 조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피해 파악을 포항시는 어쨌든 해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규모 4.6의 여진이 또다시 발생했고, 피해신고는 4만건이 넘었다. 이번에도 같은 절차가 역시 반복됐다.◇복구 관련 광역단체급 전담 조직 필요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포항시는 이재민 관리부터 주거안정, 응급복구, 대피소 운영 등 모든 복구 관련 사항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처리해나가며 지진 복구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가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전담조직인 ‘지진대책국’을 신설했다. 상황 발생 시 상황실 운영 등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전문 인력도 임기제로 채용했다.하지만, 포항시의 이러한 대처는 인구 52만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지자체라 가능했다는 평가다.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것이 자연재해이기 때문에, 현 상태와 같이 지자체에 모든 것을 전담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 미래는 참담하다는 것이 지진 관련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즉, 만약 인구가 수만명에 불과한 소규모 지자체에 지진이 발생할 경우 이를 해당 지자체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고베지진이 발생했을 때는 도단위 광역지자체인 효고현(兵庫縣)이, 오사카지진 때는 마찬가지로 광역지자체인 오사카부(大阪府)에서 나섰다. 광역지자체가 내진설계와 자가발전이 가능한 위기관리실을 운영하고 있다. 복구와 관련해 피해 지역으로 파견할 수 있는 30여명의 운용 가능 전문가도 보유하고 있다.포항시 관계자는 “지진 복구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재민의 재건축과 재개발 등에 짧게는 10년, 길게는 15년이 걸린다”며 “기업이나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18-08-10

聖과 惡 경계를 뛰어넘는 신라여인 미실, 21세기로 데려오다

아득한 옛날 서라벌. 선덕·진덕·진성 등 3명의 여왕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 큰 권력을 누렸고, 수로부인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웠던 신라 여성’으로 손꼽히는 사람. 외형적 미와 함께 내면의 지혜까지 갖췄기에 생의 어느 한 순간도 사랑받지 않았던 적이 없는 여자. 바로 ‘미실’이다.논란과 주목, 부러움과 질시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여성을 ‘화랑세기’라는 책에서 세상 밖으로 꺼내놓은 이는 소설가 김별아(49).제1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장편소설 ‘미실’의 작가인 그녀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폭염이 지속되던 7월 말 서울에서 만났다.오후 4시쯤 시작된 인터뷰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겨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김별아는 ‘6세기 신라 사회’와 ‘일찌감치 능동적 삶을 실천한 여성 미실’ 여기에 더해 ‘역사소설 쓰기의 어려움과 즐거움’ ‘21세기 페미니즘 운동의 바람직한 방향’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줬다.가장 신라적이자 가장 현대적 여성여성작가의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세상 앞에 당당했던 미실의 욕망오늘날 여성에게 시사하는 바 있어-당신은 6세기 말과 7세기 초를 살았던 신라 여인 ‘미실’을 21세기 사람들의 관심 속으로 끌어들인 작가다. 어떤 매력이 미실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는가.△ 미실은 역사에 없었고 기존에 알려진 여성 전부를 뛰어넘는 캐릭터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박힌 여성에 대한 이분법 즉, 성녀/악녀, 어머니/요부라는 규정을 훌쩍 넘어서는 존재다. 선악으로 분별할 수 없고, 아름다움을 무기로 거침없이 사랑을 쟁취했으며 스스로 권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처럼 가장 신라적인 여성이자 시대를 건너뛴 현대적 여성에게 관심이 갔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장편소설 ‘미실’은 1억 원의 상금을 내걸었던 세계문학상의 첫 번째 수상작이다. 역사, 좀 더 미시적으로 말하자면 ‘역사 속 여인’을 소재로 문학상 응모작을 썼던 이유가 있는지.△‘미실’은 내가 역사를 소재로 쓴 첫 번째 소설이다. 등단 후 10년간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작업하다가, 자기 고백을 넘어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소재를 다각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역사는 이야기의 보물창고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역사는 남성과 승자의 기록이다. 여성과 약자의 이야기가 합해져야 온전한 역사가 되지 않을까? 기존의 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들 또한 주로 남성 작가에 의해 쓰였기에 나 자신이 여성 작가로서 새로운 시각으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미실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화랑세기’ 필사본은 아직도 ‘진위 논란’ 속에 있다. 그 논쟁과 별개로 이 책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보는가.△‘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갇힌 고대사의 지평을 넓혀줬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유교가 장악하기 전 고대 신라의 사상과 문화와 풍속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유불선(儒佛仙)을 뛰어넘은 ‘풍류’라는 현묘한 도의 실체가 드러나 보이는 것도 매력이다. 학계의 고고학적 연구가 보강돼 진위 논쟁이 학문적 지평을 넓히고 고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몇몇 논문을 보면 미실이 살았던 신라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권’이 신장되고, ‘성적’으로도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지.△중요한 건 고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현대의 기준, 윤리와 제도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여권’이나 ‘성적 개방’이 지금 쓰는 말뜻 그대로였을 리 없다. 생산성이 낮았던 고대엔 열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생존과 번식을 위한 생명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남녀의 분별이나 도덕적 질서만을 내세워서는 후손인 우리들이 지금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 아닌가. 신라는 그런 원초적이고 자연적인 에너지를 국가적 힘으로 활용했다고 본다.-단편적인 자료와 고문헌의 몇 줄 문장을 토대로 장편소설을 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실’을 집필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은.△역사를 소재로 한 소설이었기에 사료를 찾아 공부하고 정리하는 게 가장 복잡하고 어려웠다. 특히 고대사는 자료 자체가 많지 않아 신라뿐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중국과 일본의 연구서까지 뒤져봐야 했다. 최대한 정사(正史)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내 나름의 창작원칙 때문에 소설에 쓰지 못할지라도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썼기에 더 애착이 간다.-위의 질문과는 반대로 예술가에게 창작 과정은 희열과 환희의 체험이기도 할 것이다. 즐겁거나 행복했던 기억도 분명 있었을 텐데.△자료가 적다는 게 어려운 문제이긴 했지만 소설적 상상력을 펼치는 데는 유리한 조건이었다(웃음). ‘화랑세기’는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우리가 알던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신세계였기에 문학적으로 보수적인 내가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미실’을 쓴 그해 벽걸이 달력에 ‘화랑세기’를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비교해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연대표를 만들었는데, 그 빽빽하고 나달나달한 달력이 창작의 기념품이 됐다.▲ 소설가 김별아가 서울 망원동 한 카페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제공 구창웅-당신이 만난 ‘미실’은 어떤 여자, 아니 어떤 인간이었나.△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모든 억압과 약속까지도 뛰어넘으려 했던 여자다. 현대를 사는 비겁하고 둔중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기도 했다.-미실은 왕과 귀족, 화랑 등 많은 남성들과 육체적으로 교접하고 정신적으로 교류했다. 그중 미실이 가장 신뢰했고 사랑했던 사내는 누구였을까.△처음으로 정을 준 화랑 사다함과 마지막을 함께한 설원랑이 아니었을까? 사다함은 순수의 표지이면서 미실의 운명을 바꾼 남자다. 힘을 갖지 못하면 힘에 지배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설원랑은 지고지순한 동시에 신뢰와 의리의 사내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 색이 바래듯 사랑도 흐려지기 마련이라는 이치를 거스른 남자이기에 매력적이다. 병든 미실을 대신해 죽기를 하늘에 빌고 먼저 떠난 것은 로맨틱하기까지 하다.-10년 넘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고 관련 공부를 하며 작품을 쓰고 있다. 미실 외에 당신이 주목하는 ‘신라의 또 다른 여인’이 있는지.△신라의 여왕들은 특이한 고대사의 인물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여왕의 존재를 공격의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세 나라 중 신라만이 여왕을 옹립하고 통치를 수용했다면 그만큼의 진보성과 순혈주의가 강조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드라마 ‘선덕여왕’은 활동 시기가 거의 겹치지 않는 미실과 선덕여왕을 동시대에 놓고 꾸며낸 일종의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렇게 소비되기엔 선덕여왕의 존재가 너무 크다.-신라부터 조선, 근대까지를 오가며 ‘역사’를 소재로 작품을 쓰고 있다. 현재 집필하고 있는 소설이 있는가.△얼마 전 출간한 ‘구월의 살인’ 이후 현재는 쉬고 있다. 소설이라는 서사 장르가 현대에 적합한지 근본적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하면 너무 거창한가(웃음)? 목소리를 대신하고픈 중세와 근대의 인물이 몇몇은 남아있다. 하지만 누가 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들어줄지는 의문이다.-1천 년 전 신라사회건 오늘날 한국사회건 여성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가 분명 있을 것 같다. 뭐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문제의 해결 방안은 뭔가.△요약하면 투쟁과 조화가 아닐까. 남성들의 오랜 영토 속에서 식민지로 착취당하지 않고 투쟁하며 여성의 영지를 개척해야 한다는 건 인류사적 과제다. 동시에 인류를 보존하는 파트너로서 이성(異性)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협력할 것인가도 고민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과 AI의 시대에 여성과 남성이 만든 전선(戰線)이 고착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런 낙관이 온당한지는 잘 모르겠다.-이른바 ‘페미니즘 논쟁’이 가속화되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어떤 것인지.△현재 페미니즘 운동을 주도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생각과 감성을 갖고 있다. 그들의 운동은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다. 변화를 위한 모든 운동에는 급진성의 단계가 있고, 의미와 함께 폐해도 있기 마련이다. 때로 싸움이 엉뚱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이는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 젊은 여성과 남성 중 어느 쪽도 강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기자는 ‘미실’을 시대를 뛰어넘는 ‘자립과 자존의 여성성’이란 키워드로 읽었다. 동의하는가. 또 신라 사회에서 미실이 가졌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미실이 자립하고 자존할 수 있었던 힘이 동시에 그녀의 한계였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권력이 된 근거가 그다지 근대적이지 않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닌가. 또한 미실이 행사하는 정치권력이 새로운 ‘여성 권력’이 아니라 기존의 ‘남성 권력’과 크게 변별되지 않는 형태를 보인다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자신의 욕망에 당당하고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했던 미실의 삶은 오늘날 여성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김별아는…196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국문과에서 공부했고, 1993년 문예계간지 ‘실천문학’에 ‘닫힌 문 밖의 바람소리’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20대엔 ‘자아 발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했다. 30대 중반 이후로는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 관심은 ‘역사소설 집필’로 이어졌다. 장편 ‘미실’과 함께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백범’ ‘채홍’ 등이 그 시기에 쓰인 소설들이다.“멈추지 않고 꾸준히 쓰는 성실한 작가”로 문단 안팎에서 인정받는 그녀는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이 또한 지나가리라’ 등의 산문집으로도 주목받았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8-10

흙탕길 정비·골목청소 등 작은 손길 모여 마을 자체가 변화 ‘큰 보람’

▲ 배병희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 회장이 비산동 강변 나룻터 축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배병희(60) 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은 1958년 부산에서 4남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산 동희공고에서 전기과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고향인 부산에서 직장을 구하기 힘들어 작은 형님이 있는 구미로 왔다. 전기와 관련된 자격증이 있어 당시 대우전자에 입사해 처음 새마을운동을 접했다.직장새마을에서 받은 새마을 교육으로 새마을운동에 눈을 뜨고 난 뒤 2001년부터 비산동새마을협의회장을 8년간 했다. 그 기간동안 구미시 새마을회 총무를 겸직하기도 했다.비록 구미시 새마을회장이나 경북도 새마을회장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지역에서는 가장 열심히 새마을운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했던 인물로 꼽힌다. 2017년 1월까지 구미시 새마을 후원회장을 맡아오다 지금은 봉사활동만 하고 있다.대우전자서 새마을운동 처음 접해2001년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 맡아낙후된 마을 개선, 동네축제도 열어△직장을 찾아 구미로고향은 부산이에요. 부산 사상구에서 살았어요. 내 기억으로는 그 곳은 도시도 아니고 촌구석도 아닌 그런 곳이었어요. 도시와 촌이 반반씩 공존했다고 할 수 있죠. 우리집은 평범한 가정이었어요.전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어요. 어릴적부터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공부는 솔직히 못했어요. 그래서 공고로 진학해 전기과를 전공했어요.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들은 대학에 갔지만 전 바로 공군에 입대했어요. 남들보다 일찍 군대를 다녀왔죠. 그래도 군대를 일찍 다녀오니 자신감 하나는 충만해 있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겁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거에요. 제대하고 나서 직장을 가지려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당시 부산에서는 직장을 구하기는 힘들었어요. 하지만 구미는 산업화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좋은 일자리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구미로 갔어요.그때가 내가 제대한 직후였으니 1980년도였어요. 작은 형님이 먼저 구미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형님을 보니 구미에서 직장을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형님 공장에서 일을 했었어요.전기와 관련된 일을 했죠. 대략 3년정도 근무했어요. 그러던 중 아버님이 젊은 나이에 대기업에서 일을 해야되지 않겠나라고 하셔서 대우전자에 입사신청을 했어요. 운이 좋아서인지 바로 대우전자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하게 됐어요.그때가 1984년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새마을운동이란 걸 알게 됐어요.△난생 처음 학생장을 맡다1984년 대우전자에 입사를 했는데 직장새마을회에 가입을 하라고 하더라구요. 전 처음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어리기도 했었고 부산 출신이라 구미에서만큼 새마을운동을 접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 같아요.일단 직장새마을회에 들어가니까 4박5일 동안 새마을연수를 보내더군요. 우리 회사에서는 나를 포함해 20명이 연수를 다녀왔어요.연수를 받은 사람들은 우리 회사 사람들을 포함해 대략 100여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교육은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모두가 잘 살기 위해서는 회사에서도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새마을정신으로 난관을 극복해야 한다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새마을지도자라는 분들도 나오셔서 성공담을 들려주시기도 했구요. 연수를 받으면서 새마을운동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했어요. 사실 당시 젊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죠.어린 나이에 돈을 버니 자칫 돈을 함부로 쓰거나 나태해 질 수도 있었는데 처음부터 그런 교육을 받으니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겠다는 생각하고 실천에 옮겼으니까요.몰랐던 새마을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니 수업이 너무 재밌는거에요. 학창시절 그렇게 수업 듣기가 싫었는데 그 곳에선 내가 열심히 하는 게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였었나봐요. 학창 시절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학생장을 나에게 맡기더라구요.짧은 연수기간이었지만 100여 명을 대표하는 학생장을 맡았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에 최선을 다했어요. 난생 처음 장을 해본 것이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남들은 웃을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그 짧은 4박5일간의 학생장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에요. 다른 사람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처음 알게 됐으니까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준 학생장 시절이에요.△동네부터 깨끗하게대우전자에 입사한지 10년만에 개인사업을 하고 싶어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어요. 회사를 그만 두기 전까지 직장새마을회에서의 활동은 충실하게 했어요. 하지만 직장새마을회의 일이란게 그리 많지가 않았어요. 물론 당시에는 회사에도 구미시청처럼 새마을과가 있었어요. 하지만 일이라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출근해 공장 내부를 깨끗하게 청소한다던지 인근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한다던지 그런 일이 대부분이었죠.그러다 퇴직 후 개인사업을 하다가 내가 살던 비산동 새마을협의회장을 맡게 됐어요. 그때가 2001년도 였어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8년간 했으니까. 비산동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대이다보니 여름에는 모기도 많고, 마을길은 항상 진흙탕이었어요. 또 6.25 당시 격전지이기도해서 많이 낙후가 되어있었죠.그래도 산업화로 인해 공단이 들어서니까 주말이면 공장 근로자들이 데이트하러도 많이 오고, 낚시를 하러도 왔었어요. 지금은 낚시를 못하지만 당시엔 낚시를 할 수 있었거든요. 주말에 사람들이 북적이니까 동네에 활기가 생기더라구요. 유명한 매운탕집도 생기구요.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기 시작하니 문제점들도 생기기 시작했어요.동네가 원래 지저분하다보니 오는 사람들도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기 일쑤였고, 당시 차가 많은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아무 곳에나 주차하는 차량들로 민원이 생기기 시작한 거에요. 그래서 새마을협의회가 나섰죠. 당시 동네에 저를 비롯해 젊은 친구들이 많았어요. 한마디로 힘좋은 청년들이 많았다는 거죠.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항상 의욕도 넘치고, 무슨 일이든 혈기왕성하게 했어요. 우선 동네부터 깨끗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시에서 조금 지원을 받아 동네 골목길 정비 등을 시작했죠. 매일 새벽 청소도 하고, 주말에는 강변에서 차량통제도 하구요. 동네가 깨끗해지고 교통정리도 되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동네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청소를 하고 동네를 정비하더라구요. 동네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많은 보람을 느꼈어요. △동네 특색을 축제로주말이면 사람들이 많이 찾기는 했지만 그걸로 만족하기는 뭔가 부족했었어요. 우리 동네만의 특색을 살릴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를 했어요. 비산동만의 특색이 무엇인지 고민하다보니 나룻터 생각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매년 비산동 강변 나룻터 축제를 열기로 했어요.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반응이 좋으니 시에서도 지원을 해주더군요. 축제를 한번 하기 위해선 주민들이 10여 일 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야했어요. 아무 대가도 없이 일만 하는 게 마음이 걸려 축제기간에는 동네주민들에게는 공짜로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했어요.어차피 동네주민들이 하는 축제니까 그 정도의 혜택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동네주민들도 좋아했고, 더 열심히 축제를 준비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더군요. 또 지역특산물을 전시하면서 팔 수 있도록 했어요. 당시 축제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공장 근로자들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직장을 찾아 구미에 온 사람들었으니 구미 특산물을 알리기도 하고 판매도 할 수 있으니까요. 이것도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나룻터 축제에서 특산물 판매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정기적인 바자회를 열기로 하고, 2년에 한번 바자회도 열었어요. 비산동새마을협의회가 주축이 되긴 했지만, 비산동의 다른 단체에서도 많은 지원과 참여를 했었어요. 특히 새마을부녀회가 만든 국밥이 제일 인기가 있었어요. 구미시청 직원들도 점심 때 일부러 국밥 먹으러 오기도 했으니까요. 축제는 축제였어요. 동네주민들에게는 축제 기간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 모두 축제였던 것 같아요./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09

주인 잃은 보금자리… 갈 길 먼 복구작업… 뒤숭숭한 여름

‘11.15지진’직후 ‘기울어진 아파트’로 유명세를 탄 대성아파트는 9개월이 지난 동안 많이 변해 있었다. 7일 찾은 현장은 주인들이 모두 떠나고 건물에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유령의 집’처럼 적막했다.출입이 통제된 D·E·F동은 풀색만 짙어가고 있었다. 화단에는 사람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아 강아지풀 등 잡초만 무성했다. 한켠에는 누군가가 버리고 간 소파와 의자가 널려있고, 넓은 주차장은 남은 것 하나 없이 텅 빈 상태다. 무엇하나 정상이 아니었다.지진 이후 초창기 정·관계 인사들과 건축 전문가들로 북새통을 이뤘지만, 현재는 흡사 전쟁통에 방치된 폐허처럼 을씨년스럽기만 하다.아파트 입구에서 출입을 통제하던 경찰이동초소에도 주인이 사라진지 오래다. 무너져내린 담장 주변으로는 출입금지를 알리는 ‘폴리스라인’만 뒤엉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인근의 경림뉴소망타운 역시 마찬가지. 우거진 풀숲 너머로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주차장에는 누군가가 버리고 간 장롱, 이불, 옷가지 등만 널브러져 있다.지진으로 기울어진 ‘아파트’버려진 물건들·텅빈 주차장에인적 끊기고 잡초만 무성‘유령의 집’ 연상 폐허 방불정부·지자체 참여 뒷전 속전파 5곳 주민들 새단장 준비‘필로티 구조’ 안전성 논란에9월부터 3층이상 건축물 대상시공과정 영상촬영 의무화 추진市, 이재민 전기요금 감면 연장“예고없는 지진에 철저한 대비를”대성아파트 인근 주민 김모씨는 “초창기에는 짐을 가지러 몰래 들어가는 주민들이 더러 눈에 띄곤 했는데, 최근에는 이런 모습도 보기 어렵다”며 “인적이 끊긴 지 오래”라고 말했다.최근 이곳은 또다른 우범지대로 전락한 실정이다.사람의 발길이 끊긴 틈을 타 이곳에서 이재민들이 남겨둔 물품 등을 훔치던 좀도둑이 경찰에 붙잡혔다. 일당 두명은 새벽시간을 틈타 경림뉴소망타운과 대성아파트에 들어가 에어컨 구리케이블을 훔쳐 달아나다 붙잡혔다. 100여 만원도 되지 않은 피해였지만, 장기간 방치해 둘 경우 또다른 범죄가 발생할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이재민들은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건축물에 대한 활용방안이 구체적으로 계획된 것이 없는 점이 걸리는 대목이다. 큰 틀에서 흥해지역 도시재생 뉴딜사업과 관련한 재개발·건축으로만 논의되고 있을 뿐, 최종 합의가 도출된 단계까지 접어들지 못했다. 저당잡힌 집이 있는 등 각 세대마다 소유관계가 달라 실제 건물 철거 합의를 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재민들이 짧게는 2년, 길게는 수년 동안을 기약없이 무주택자로 살아야 할 처지다.포항지진으로 안전성 논란에 휩싸인 ‘필로티 구조’ 건물도 여전히 그대로다.필로티는 주차장 확보를 위해 1층을 비운 채로 기둥만 세우고 2층부터 건물을 짓는 방식이다. 지진 이후 장성동 일대 필로티 구조의 건물 기둥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구조 안전성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건물 기둥이 으스러지면서 붕괴위험까지 생겨 경찰관이 배치돼 주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크리스탈 원룸은 지진 발생 이후부터 현재까지 휀스로 둘러쳐져 접근이 막혀 있다.다행히 지진 당시 피해를 입었던 장성동 일대 필로티 구조 건물은 대부분 1층 기둥을 두껍게 추가 시공하거나 기둥 수를 늘리는 등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피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대다수의 건물들은 여전히 추가 시공없이 그대로 남아있다. 앞으로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지진에 대한 대비가 없는 셈이다. 특히, 설계도면과 다르게 시공해 나중에 부실공사의 의혹이 생기더라도 ‘잃어버렸다’는 식으로 잡아 때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노리고 있는듯하다. 복구작업은 이제 첫 삽을 뜬 걸음마 단계다. 갈 길이 멀다.느린 걸음이지만 지난해 11월 15일 규모 5.4 지진으로 피해가 난 공동주택 가운데 처음으로 철거되는 곳이 나왔다. 지난 6일 지진 피해로 사용 불가 판정을 받은 포항시 북구 환호동 대동빌라 철거에 들어갔다. 주민이 구성한 재건축사업추진위원회가 지난달 26일 포항시와 협의를 거쳐 건물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대동빌라는 지진으로 건물 전체가 심각하게 파손돼 사용 불가 판정을 받아 그동안 건물 출입이 통제됐다.전파 판정은 대성아파트와 경림뉴소망타운, 대동빌라, 해원빌라, 대웅파크 등 5곳에 내려졌다.정부나 지자체가 아닌 주민들의 주도적인 참여로, 폐허나 다름없는 건물이 지진 이후 약 9개월만에 새단장을 준비하고 있다.추진위는 주택을 담보로 금융권에 설정한 근저당을 스스로 해지하는 한편, 조합설립을 진행해 앞으로 자신들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조합설립인가 이후부터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참여형 주택정비사업을 할 예정이다. 약 1억1천만원으로 알려진 공동주택 신축비용은 주민이 부담한다. 주택도시기금 저리융자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고, 철거비나 주민공동이용시설 설치비를 국비로 지원받는다. 포항시는 주민 분담금을 줄이기 위해 설계비 30% 감면과 원가 수준의 시공비로 맞춰 이재민들의 새 보금자리 마련에 발맞출 계획이다. 필로티 건축물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국토교통부는 건축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을 지난 5일 입법 예고했다. 이르면 오는 9월부터 3층 이상 필로티 건축물 시공 과정을 동영상으로 남기도록 의무화한다는 내용이다.포항 지진을 겪은 뒤 구조전문가들의 안전점검에서 설계도면과 다르거나 철근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등 부실 시공 정황이 드러난 점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다. 이번 개정안으로 특수구조 건축물은 매 층이 올라갈 때마다, 3층 이상 필로티 건축물은 기초공사와 기둥, 바닥부재의 철근 배치를 끝낼 때마다 동영상을 촬영해야 한다.3층 이상 필로티 건축물은 설계·감리 과정에서 건축구조기술사의 확인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조항도 신설됐다.현행 건축법에는 5층 이하 건축물은 건축사가, 6층 이상 건물을 건축구조기술사가 설계토록 하고 있다. 건축구조기술사는 건축사와 달리 안전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조항으로 필로티 구조 안전성을 더욱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이와 함께 시공사가 공사 과정에 따라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해 보관하고 감리·건축주에게 제출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 조항도 검토 중에 있다. 동영상 촬영이 ‘의무화’됐지만 조항을 어겼을 때 처벌 규정이 따로 없다. 이 외에도 필로티 건축물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국토부는 ‘필로티 구조설계 가이드라인’을 제작·발간했다.이재민들의 여름나기는 관계기관의 협조로 조금 수월해졌다.한국전력은 우선적으로 산업통상자원부와 협의를 거쳐 포항 지진피해 이재민 임시주거시설의 전기요금 감면 기간을 3개월 연장한다고 밝혔다.포항지진피해지역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서 한전은 ‘재난지역 특별지원 기준’에 따라 이재민 대피장소인 임시 가건물의 전기료를 복구 기간 최대 6개월까지 감면해주고 있었다. 최근 일부 임시주거시설의 전기요금 감면 기간이 만료됐고, 폭염으로 전기사용량까지 늘면서 이재민의 요금 부담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포항시는 겨울철부터 한전과 수차례 협의를 진행, 추가 전기세 감면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요청해왔다. 한전은 이에 지진피해 복구의 경우 주택 재건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포항 임시주거시설 이재민 대부분이 고령자와 저소득층인 상황을 고려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특히 최근 폭염에도 전기료 부담 때문에 이재민이 거주하는 임시 가건물의 냉방시설 사용을 자제하고 있어 이같은 조처를 했다.한전 관계자는 “포항시 홍해읍 등 지진피해 이재민이 임시 거주하는 시설을 개별 방문해 특별재난지역 선포에 따른 전기요금 감면 기간 연장 안내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이바름기자 bareum90@kbmaeil.com

2018-08-08

망각에 묻힌 아픔… 하는 일도 되는 일도 없는 현실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제곱에 반비례한다.”19세기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가 16년간 연구한 ‘망각곡선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망각은 학습 후 10분이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1시간 뒤에는 50%, 하루 뒤에는 70%, 한 달 뒤에는 80%를 망각하게 된다. 아무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바로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우리 주변에는 생존을 위협하는 변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매년 교통사고, 폭행, 테러 등에서부터 지진, 태풍, 화산폭발과 같은 자연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사고가 현실세계에서 발생하고, 이 때문에 많은 소중한 생명이 사라져간다. 사건·사고가 발생한 이후에는 늘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잠시동안일 뿐, 이내 ‘망각’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건·사고에 대한 기억은 잊혀진다.포항지진이 그렇다. 포항시민은 물론, 전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대형지진이 발생한 지 불과 9개월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게 지진은 수년, 수십년 전의 희미한 기억의 한 조각 정도에 불과하다.쉽게 잊혀진 만큼 후속조치도 흐지부지되는 모양새다.수백가구가 보금자리를 잃었고, 일부는 현재까지도 이재민 생활을 하고 있지만 수습의 책임은 오롯이 포항시와 피해주민들에게만 전가되고 있다.정치권과 중앙정부 인사들이 지진발생 직후 수없이 쏟아낸 지원방안들은 대부분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지난해 11월15일 발생 9개월째피해지역 일부 아직도 ‘이재민 생활’끊이지 않던 정치권 인사들 발길 ‘뚝’갈라지고 무너진 위험천만 속 수습은포항시·피해주민들 책임만으로 ‘답답’포항, 특별재난지역 선포 후…정부·정치권 지원·협력 약속마저 무색입법안 13건 중 ‘도시재생’ 법안만 통과주택 전파 관련 복구비 지원 확대 등‘재난·안전관리 기본법’ 등 개정안 시급市 “피해 지역민들에 관심과 희망을”◇그 많던 정치권 인사들 발걸음 뚝포항지진이 발생한 다음날인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정치권과 중앙정부의 수많은 인사들이 피해현장을 찾았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조속한 피해복구와 재정적 지원 등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더불어민주당 우원식 당시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재난지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특별지원금과 교부세 등을 지원하기 위해 당정이 협의에 앞장서겠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시 대표는 당 차원의 ‘포항지진특별지원대책팀’을 긴급 구성해 피해실태 조사를 비롯해 피해복구, 이재민 지원 등 분야별 지원에 나서기로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당시 대표도 지진관련 예산문제를 초당적 협력을 통해 진행해 주민피해를 최소화하겠다고 약속했고, 바른정당 유승민 당시 대표도 포항시 재정에 도움을 줘서 피해복구가 빨리 이뤄지도록 돕겠다고 다짐했다.정부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포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8개월여가 지난 현재, 이들의 약속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다.피해주민들이 실질적으로 체감하는 혜택은 정부가 관련법에 근거해 전달한 지진피해 주택복구 지원금(최대 900만원)과 국민들이 직접 모금한 지진피해 성금에 따른 의연금(최대 500만원)을 제외하면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태산동명 서일필(泰山動鳴鼠一匹)이란 말처럼 계획과 약속은 거창했지만 결과는 보잘 것 없는게 현실이 되고 있다.먼저 국회 재난지원특별위원회는 지진이 발생한지 9일 뒤인 지난해 11월 24일 재난안전대책특별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출범했다.더불어민주당 변재일(충북 청주 청원) 의원을 위원장으로 총 18명의 위원으로 구성돼 포항지진, 제천화재 등 재난안전에 대한 국민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입법, 예산 등 국회 차원의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지난 5월 29일까지 약 6개월간 활동한 재난특위는 21개 기관의 정부부처를 대상으로 4차례의 업무보고, 1차례의 공청회 등을 거쳐 7건의 입법안을 공동발의했으나 현재까지 단 1건도 소관 상임위 상정조차 하지 못했다.자유한국당이 자체적으로 구성키로 한 포항지진특별지원대책팀도 2명의 포항지역 국회의원을 제외하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아 뚜렷한 성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지원과 협력을 약속한 나머지 정당들도 지진복구보다는 정쟁에 집중했고 포항을 향한 발길과 관심을 뚝 끊어버렸다.정부가 포항지진이 발생한지 5일만에 선포한 특별재난지역도 지자체 재정에는 일부 도움을 줬지만 주민들이 피부에 와닿는 지원책은 되지 못하고 있다.이렇다보니 피해지역 주민들의 불만만 커지고 있다.포항지진 최대 피해지역인 흥해에 거주하는 주민 김모(61)씨는 “처음에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는 너나할 것 없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듯이 떠들더니 지금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며 “애초에 약속이나 하지 않았으면 상실감이 덜할텐데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생각하니 우롱당한 기분”이라고 하소연했다. ◇입법안 13건 중 통과는 고작 1건지진을 비롯한 국가적인 대형 재난을 지원·수습하기 위해서는 국회 입법을 통한 법률적 근거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시급한 과제인 예산확보를 위해서는 관련 법률을 제·개정하는 작업이 수반돼야 하기 때문이다.포항지진의 경우 지난해 11월 20일 이후 9건의 법령을 13차례에 걸쳐 제·개정하자는 제안이 발의됐으나 현재까지 공포가 완료된 법안은 지역구 의원인 자유한국당 김정재(포항 북) 의원 등 10명이 발의한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일부 개정안 1건이 전부다.나머지 12건 중 11건은 아직도 각 상임위 법안심사소위에서 계류 중이다. 지난 2월 1일 유일하게 상임위에 상정된 ‘긴급복지지원법’일부 개정안도 6개월이 넘도록 법안통과를 위한 후속절차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현재 피해주민들이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법안은 지난해 11월 20일 김정재 의원 등 13명이 발의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일부 개정안과 지난해 11월 27일 김정재 의원 등 30명이 발의한 ‘지진재해로 인한 재난복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안 등 2건이 꼽힌다.‘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일부 개정안은 자연재난 중 지진으로 인한 주택 전파와 관련된 복구 부담액을 최대 3억원으로 높이고 국비 부담률을 80%로 상향조정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현행법령은 지진에 의해 주택이 전파될 경우 최대 900만원을 복구비로 지원하도록 하되, 내진설계 반영 여부에 따라 국고, 융자 및 자기부담 등의 부담률을 달리 정하고 있다.개정안은 “주택 전파는 주택 주요 구조부가 50% 이상 파손돼 개축하지 않고는 사용이 불가능해 막대한 복구비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는데 900만원이라는 상한액은 현실을 반영치 못해 보완이 요구되고 있다”고 제안이유를 설명하고 있다.‘지진재해로 인한 재난복구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제정안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을 발의한 김정재 의원 등은 기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 지진이라는 특수한 재난에 대한 지원 및 복구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기보다는 풍수해 전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지진으로 인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지역에 한정해 풍수해보험가입 지원, 국고보조 등 지원책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법안의 주요 내용으로는 현행 ‘자연재난 구호 및 복구 비용 부담기준 등에 관한 규정’이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주택의 파손 정도를 소파, 반파, 전파 3등급으로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2등급으로 구분해 지원토록 하고 있다.지원규모는 50% 이상 파손돼 개축이 필요한 주택은 최대 3억원 한도로 국가가 80%를 부담하고, 파손정도가 50% 미만이지만 수리가 필요한 주택은 최대 1억원 한도로 국가가 전액 부담토록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피해주민들은 이 2건의 법안이 지진복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아직 위원회 심사조차 열리지 않고 있는 두 법안이 본회의 상정을 넘어 최종 공포까지 이르려면 넘어야 할 산이 한 두개가 아니다.만약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소급 적용이 가능한 지에 관한 문제가 또 하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앞서 지난 5월 24일 행정안전부가 포항지진시 나타난 미비점을 보완한 ‘지진방재 개선대책’에서 자연재난 복구비용 산정기준을 기존보다 44% 인상했지만 정작 포항지진에는 소급 적용되지 않은 사례를 비춰볼 때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지더라도 소급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포항시 관계자는 “지진이 발생한 지 9개월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피해지역 주민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며 “재난 발생 초기 정부와 정치권이 보인 관심의 10분의 1이라도 신경을 써준다면 피해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박동혁기자 phil@kbmaeil.com

2018-08-07

콩 심은데 콩 나는 ‘農心진리’ 이 시대 젊은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길

▲ 김교상 회장이 젊은 세대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새마을운동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중국 명성촌에 ‘명선 새마을회관’을 지어 준 이후 새마을운동을 다른 나라에서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계 어딜가든 못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요.어려운 사람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한다고 생각했죠. 선산군과 구미시가 통합이 된 후 내가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을 하게 됐으니 세계화 사업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그러다 1995년 7월 새로운 구미시장에 김관용 시장이 당선됐어요. 김 시장도 새마을세계화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명선 새마을회관 이후 2000년에 베트남에 보건소를 지어주었어요.2000년에 착공해 2002년 3월 보건소를 준공했는데 당시 준공식에는 남유진 구미부시장도 함께 했었어요. 당시 새마을운동은 이들이 필요한 부분에 돈을 주고 만들게 하는게 전부였어요. 그러다보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죠.우리가 새마을회관이나 보건소 같은걸 지어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운영을 해야하는데 그렇게 못하는 거에요. 시설 운영비를 우리에게 요구했었어요.처음에는 낡은 시설을 고쳐주고 했었는데, 그건 진정한 새마을운동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거죠. 새마을운동은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거니까. 그때부터 새마을세계화 운동이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 생각하면 새마을운동이야말로 계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해요.새싹처럼 항상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니까요. 새마을운동가들은 항상 어제보다는 오늘을, 오늘보다는 내일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았어요. 저도 그랬구요. 요즘 젊은사람들이 예전 우리처럼 어떠한 고난에도 내일에 희망을 찾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새마을운동에 대한 갖은 오해와 폄하지도자들이 적극 나서 바로 잡아야‘오늘’보다 ‘내일’을 생각하는 봉사가새마을운동의 참된 정신△새마을운동에 대한 오해는 항상 있었다선산군과 구미시가 통합이 되긴 했어도 새마을운동에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오로지 봉사만 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니까 갈등 같은게 생기지 않았던거죠.하지만 분위기는 그리 좋지 못했어요. 아마 내 기억으론 김영삼 대통령 때 새마을운동 분위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찬밥 신세였죠.하지만 1995년도에 김관용 시장이 다른 곳은 몰라도 구미에서만은 새마을운동을 해야된다고 했어요. 새마을운동 창시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에서마저 새마을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였죠.나를 포함해 새마을운동가들도 똑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때 김 시장이 아마 시청 사회진흥과를 새마을과로 바꾸었어요. 과 명칭은 정확하게 기억이 안나지만, 새마을과가 맞을 겁니다. 과의 명칭을 바꾸고 구미체육관을 박정희체육관으로 이름을 바꾸니까 여러 곳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어요. 금오공대, 사회시민단체 등이 반발했었죠. 반대가 심했어요. 지금 새마을운동테마공원을 반대하는 것처럼 말이죠.하지만 당시 새마을운동가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지 않았어요. 우리가 직접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 설득했어요. 구미체육관을 박정희체육관으로 변경하기 위한 글도 썼어요. 그리고 전국적으로 왜 구미가 새마을운동을 이어가려고 하는지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유치하려고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새마을지도자 대회가 서울에서만 열렸어요. 한번도 지방에서 열린적이 없었죠. 지방에서 어떻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할 수 있냐고하는 말들이 많았지만, 결국 해냈어요.2002년일거에요. 그때 구미시가 최초로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열었어요. 정말 구미시가 왜 새마을운동을 해야하고, 그 정신을 이어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결과물과 같은거였어요.지금은 광역단체까지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연다고 들었어요. 기초단체 중에는 유일하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국 행사를 연것으로 만족해야겠죠. 하지만 전국 새마을지도자 대회를 단순히 구미에서 열었다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에요. 왜 구미에서 열렸는가가 중요한 것이죠.사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오해는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왔어요. 새마을운동가라면 그 오해를 풀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아쉬운것은 지금은 그러한 노력을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보세요 지금도 새마을운동을 폄하하고 공격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그렇다면 새마을운동가들이 그들에게 새마을운동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을 해야해요. 그래야 새마을운동이 지속될 수 있어요.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게 아니잖아요. △지도자가 왜 중요한지 알려준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것을 솔선수범해 하는 것이에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하고, 거기에 돈을 받고 하는 것도 아닌 것이 바로 봉사라는 것이죠. 또 그 봉사를 찾아 하는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구요. 하지만 남들이 다 하기 싫어하는 일에 사람들을 동참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죠. 그래서 지도자가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죠.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운동이나 캠페인 같은게 많아요. 하지만 실제 빈곤에서 탈피하게 해준 운동은 새마을운동이 유일하죠.이유는 바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예전에 TV광고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금성사에서 나온 TV선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광고에서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라고 나와요.지도자를 잘 선택해야만 그 나라가 잘 살 수 있듯이 새마을운동도 마찬가지에요. 대통령은 국민들이 선거라는 제도로 뽑는 것이지만, 새마을운동 지도자는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다른점이긴 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이웃동네를 비교하게 되죠. 그러면 주민들이 먼저 알아요. 윗동네가 왜 더 빨리 발전하는지, 자기동네가 왜 뒤쳐지는지를.새마을운동은 주민참여 운동이에요. 지도자 혼자 할 수 있는게 아니죠. 즉 지도자는 그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역할이에요.공동체 의식을 갖도록 만들어주고, 할 수 있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지도자에요. 새마을운동은 전 국민들에게 지도자는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교육해 왔어요. 하지만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새마을운동 지도자들이 제 위치에서 일을 하지 못하다보니 지금의 이런 사태까지 온 것 같아요.지도자는 항상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잘 판단하고,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면서 계획을 잡아가야 하는데 그게 잘 이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한 사람의 지도자의 임기가 끝나면 다음 지도자는 전임자의 활동을 받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하는데 이상하게도 단절이 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렇다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창출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구 지도자들이 모여 현안문제에 대해 논의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젊은 세대들이 농심(農心)의 뜻을 알았으면요즘 젊은 세대들은 보면 안타깝죠. 우리는 배고픔으로 힘들어했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들의 힘든 점은 너무 복잡한 문제들로 엮여있는 것 같아요.내가 한가지 조언을 한다면 초대 새마을운동 중앙회 회장을 하신 김준 박사가 쓴 농심(農心)이란 글이 있는데, 그 농심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래요.농심의 내용은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라는 단순한 진리에요. 농사꾼은 자신이 심은 걸 알고 어떻게든 그걸 잘 가꾸려고 노력하죠.콩을 심어 좋은 콩이 나오길 바라면서 모든 노력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 농부꾼이죠. 하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은 콩을 심어놓고 금이 나오길 바라는 것 같아요.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흙은 싫어하면서 땅은 좋아하는게 보여요. 젊은이들이 농심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래요. 젊은이들이 농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한 운동이 바로 새마을운동이라는 것도 알았으면 하구요. 새마을운동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오늘보다는 내일을, 내일보다는 미래를 생각하며 일하는 것이에요.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미래를 위해 노력하면서 자신의 열매를 잘 가꾸어 나가길 바랍니다.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03

‘냉혹한 권력자’ ‘순정한 여인’ 꽃들도 질투한 신라 절세미녀 미실의 두 얼굴

먼저 얼핏 보기엔 ‘난잡한 여성의 남성 편력기’로 오해될 수도 있는 기록부터 옮긴다.“14살에 황후의 아들과 혼인한 그녀는 첫 남편의 곁을 떠나 신라의 전쟁영웅 중 하나였던 화랑 사다함(斯多含)과 뜨거운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한 사내 옆에 머무는 것을 신라의 지배자와 귀족들은 견디지 못했다. 진흥왕과 진평왕을 비롯해 금륜태자와 화랑 설원랑까지….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남성들이 귀애한 그녀는 5명의 왕·왕족·귀족 사이에서 8명의 자녀를 낳았다.”궁금증이 생긴 이들이 ‘대체 그 여성이 누구냐’는 질문을 해올 게 빤하다. 미실(美室·549~606 추정). 외형적 아름다움과 내면에 잠재한 정치력으로 6세기 말 신라를 자신의 치마폭에 가둔 여걸.한국여성문학연구회장을 지낸 정영자(77)는 미스터리와 비밀 속에 존재해온 미실을 이렇게 정의한다.“3명의 왕과 왕자들, 화랑 사다함을 비롯한 숱한 호걸영웅을 미색으로 녹였고 왕실의 권력을 품었던 여성, 욕망에 솔직하면서도 자유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당당하고 지혜로운 여자”였다고.◆ 세상의 모든 여성이면서 그 모두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정영자가 평론가다운 정제된 문장으로 미실을 표현했다면, 소설을 통해 그녀를 21세기 한국사회로 불러낸 장본인 김별아(49)의 서술은 좀 더 드라마틱하다. 읽어 보자.“이러저러한 매체를 통해 이제는 세간에 그 이름이 제법 알려진 미실은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이다. 성녀와 악녀, 어머니와 창부의 바탕을 한 몸에 가진 그녀이기에 누군가는 그녀에게 매혹되어 열광하고 누군가는 질시하며 비난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미실은 세상의 모든 여성이면서 그 모두를 뛰어넘은 어떤 존재다.”혹자에겐 ‘미색을 무기로 권력의 정점에 섰던 여인’으로,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겐 ‘고대(古代)를 살았던 희귀한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미실.그녀와 관련된 가장 많은 기록이 담긴 건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記)’다.그 책에 따르면 미실은 왕가의 사내들은 물론, 귀족과 화랑들을 자신의 품에 넣고 좌지우지하며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미실의 출생에 관해 ‘화랑세기’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신라 왕족과 귀족에게 색공(色供·높은 신분의 사람에게 제공하는 성적 서비스)을 바쳐 자신의 권세를 유지했다. 출중한 아름다움과 함께 학식도 가졌던 여인으로 외할머니는 초대 풍월주(風月主) 위화랑의 딸 옥진이었다. 미실의 아버지는 2대 풍월주인 미진부다.”역사학자 신재홍의 논문 ‘미실과 사다함, 송사다함가와 청조가’에는 미실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등장한다.“미실은 용모가 절묘했다. 풍만하고 도톰함은 외조모를 닮았고, 마음까지 밝고 총명하면서도 오묘했으니 온갖 꽃들이 그녀를 질투할 정도였다.”하지만, 미실과 ‘화랑세기’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태어난 날과 사망일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미실. 필사본 ‘화랑세기’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미실은 실존했던 여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 과연 미실은 권력만을 탐했을까?아득한 옛날의 사건이나 인물을 놓고 벌어지는 학계의 ‘진위논쟁(眞僞論爭)’은 별스런 것이 아니다. ‘화랑세기’와 ‘미실’에 얽힌 사학자들 간의 설왕설래 역시 그런 차원에서 보면 될 터.필사본 ‘화랑세기’를 부정적 관점이 아닌 긍정적 시각에서 해석한 하현진의 논문 ‘화랑세기에 나타난 신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활동’엔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까지 미실이 가졌던 정치권력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서술이 눈에 띈다.“미실은 색공을 통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대(代)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 신라 왕실에 큰 힘을 발휘했다. 미실이 정치 일선에 있으면서 왕의 즉위와 폐위에 관여했을 정도니 얼마나 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미실의 삶을 통해 신라 사회에서는 여성도 권력을 지닐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쯤에서 자연스레 질문 하나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미실은 오로지 정치적 권력만을 탐한 여자였을까?아래 인용하는 향가(鄕歌·향찰로 표기된 신라시대의 노래)인 ‘송사다함가’(학자에 따라 ‘풍랑가’ 혹은 ‘송랑가’ 등으로도 부른다)’는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읽힌다.바람이 분다고 해도랑 앞에 불지 말고물결이 친다고 해도랑 앞에 치지 말고어서 빨리 돌아와다시 만나 안아 보기를마주 잡은 손만으로도 좋은데우리 행여 헤어지진 않겠지‘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실이 썼다고 전해지는 이 향가는 신라가 대가야와 전투를 벌일 때 참전한 연인 사다함에게 노심초사의 애틋함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송사다함가’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쟁터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야 하는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TV 드라마를 포함한 대중문화 매체에선 미실을 성적 기교와 미모를 무기 삼아 수많은 남성들 위에 군림한 ‘냉혹한 여성 권력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그게 미실의 본모습일까?그런 사람이 과연 위와 같이 ‘따스한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어쩌면 미실은 우리의 선입견과 달리 여러 사내들의 마구잡이식 사랑이 아닌, 한 남성의 완전하고 오롯한 사랑을 받고 싶었던 ‘순정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미실을 역사 속에서 불러낸 책 ‘화랑세기’“인간의 상상 밖에 존재하는 바다 풍경을 묘사했다”고 평가받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白鯨)’. 그 작품의 주인공은 ‘크기를 짐작할 수 없을 만치 거대한 고래’다.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의 과정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로 전락한 이들의 서러운 풍경을 빼어난 문장으로 형상화한 황석영의 수작(秀作) ‘삼포 가는 길’의 주인공은 타락과 순수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걸어가는 작부 백화.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화랑의 리더 풍월주들의 전기’로 기술했다고 전해지는 책 ‘화랑세기’의 주인공은 ‘미실’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화랑세기’는 7세기가 끝나갈 무렵 ‘신라의 문장가’로 이름 높던 김대문이 썼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원본은 소실돼 전하지 않는다. 다만 필사본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1989년과 1995년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필사본을 베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일제강점기 일본 왕실 도서관에서 일한 박창화(1889~1962).다수의 사학자들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두고 “상상력으로 만든 창작품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다른 쪽에선 “여러 정황과 사실 묘사의 핍진성으로 볼 때 위서(僞書)로 보이지 않는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어쨌건 ‘진위 논란’과는 별개로 ‘화랑세기’의 진정한 주인공이 ‘문제적 신라 여성’ 미실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에 관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를 쓴 김태식은 이렇게 부연한다.“‘화랑세기’를 대중문화의 영역으로 치고 들어가게 만든 신호탄은 소설가 김별아의 ‘미실’이다. 소설이 주인공으로 삼은 미실은 ‘화랑세기’가 아니면 영영 매몰되었을 인물이었다. 김별아는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여성을 문학으로 극화해냈다.”조선시대 때부터 “이미 사라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풍문처럼 전하는 책”으로 평가절하 된 ‘화랑세기’.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화랑과 당대 신라 귀족들의 성 풍속을 거침없이 드러냈기에 유학이 지배했던 사회가 ‘화랑세기’를 배타적으로 대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어쨌건 필사본 ‘화랑세기’가 지닌 가치와 의미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1천400년 전 아득한 기억 속 서라벌을 들었다 놓았다 했던 매력적인 여성 미실에 대한 ‘대중적 주목’은 ‘화랑세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8-03

중국 오지마을에 회관 건설… ‘새마을운동 세계화’의 첫 시작이었죠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농업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요인이 있겠으나 그 중 하나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가 한국의 경제성장 성공의 기적 뒤에 새마을운동 정신이 있었음을 알고 그 정신을 배우려 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을 홀대하고 있다. 새마을운동기록이 지난 2013년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 사실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인 요인으로해서 시비의 대상이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 시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던 새마을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새마을운동의 정신과 가치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제 새마을운동은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새마을운동이 과거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새마을운동은 지금의 세대로 넘어오면서 새마을 정신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본지는 이웃을 위해 묵묵히 새마을운동에 전념해 온 5명의 새마을운동가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세대들에게 새마을운동과 그 정신을 전달하고자 한다.김교상(77) 전 구미시새마을회 회장은 1942년 영주에서 2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학업비를 스스로 벌어 학교를 다녔다. 학업비를 벌기위해 고등학교는 강원도 원주로 가야했다.어렵게 공부해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진학한 뒤, 건설사에서 근무했다. 군 복무 시절 공민학교에서 한글을 가르친 것이 인연이 돼 제대 후 새마을문고 일을 도왔다.이후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새마을운동 구미시 지회장을 역임했고, 2008년부터는 경상북도 민방위 강사로도 활동했다. 1987년 내무부장관 표창, 1991년 대통령 표창, 1997년 새마을 훈장 근면장, 법무부장관 표창, 2002년 자랑스런 구미사암 대상, 2004년 자랑스런 도민상을 수상했다.군에서 문맹퇴치 위해 한글 가르치다마을문고 일하며 새마을운동 참여1995년 시작으로 2003년까지17년간 새마을회 회장직 맡아△ 공부를 위해 안해본 일이 없었던 학창시절비록 농사를 짓은 가난한 집안이었지만, 아버지의 교육열은 남다르셨어요.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확고한 신념 같은게 있으셨어요. 하지만 당시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자식들 학비를 감당하기는 어려우셨어요.그래서 어릴적부터 인삼재배하는 일을 도우면서 공부를 해야했지요. 영주니까 인삼재배를 하셨거든요. 순흥초등학교와 소수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진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어요. 그러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독립을 했지요. 돈을 벌어야했으니까.영주에서 아버지 농사일을 돕는걸로는 고등학교 학비를 마련에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일자리를 찾아 강원도 원주까지 가게 됐어요.어린 나이에 혼자 생활하는게 쉽지 않았죠. 공부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했으니까. 원주에 있는 육민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새벽엔 신문배달, 낮에는 구두닦이를 했어요.그러다 과자공장에서 일을 하게됐어요. 공장에 다니면서 몸은 힘들었지만, 규칙적인 생활이 가능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하고싶지 않은 그런 생활인데, 당시에는 공장에서 규칙적으로 일하고, 월급도 꼬박꼬박 나오는게 너무 감사했던 시절이었어요.그렇게 어렵게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한양대학교 건축공학과에 들어갔어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학비를 벌기위해 일은 해야했지만, 즐거웠어요. 대학 다니면서 취업이 됐으니까.당시엔 기업들이 인재를 구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학비를 대납해 주는 조건으로 졸업 후 일정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게 하는 것이 있었어요. 저도 그런 조건으로 대선건설이라는 기업에 들어갔었어요. 보통은 졸업 후에 회사를 다녔지만, 전 생활비도 벌어야했기에 학생 신분으로 기업에 들어가 일했어요. 일찍 제 전공분야 현장에 들어간 것이죠.공사현장 일도 하고, 밤에 경비같은 것도 서고하면서, 창고같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했어요.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즐거운 청춘시절이었어요.△군에서 한글 가르친 인연 새마을문고로 이어져대학생활을 하다 군대에 가게됐죠. 그때가 1962년 4월에 군에 입대했어요. 당시엔 한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군대에도 한글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었는데 그걸 공민학교라고 했어요.주로 교관이나 장교들이 가르쳤는데, 나 같은 대학생이 들엉오면 조교로서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도록 했어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보람된 일이라는 걸 그때 깨달었어요. 사회에 나가서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제대를 하고 나서 보니까 마을문고라는 것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마을문고 일을 시작했어요. 당시 마을문고 일이라는 것이 일종의 문명퇴치운동과 비슷했어요. 본래는 농촌지역에 책을 보급하는 것이 마을문고의 일이긴 한데 한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글을 가르쳐 주고, 책을 읽도록 했어요.그러다 마을문고가 새마을회와 통합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그때부터 새마을문고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마을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죠. △가장 오랫동안 근무한 새마을회 회장제대 후 대선건설사에서 근무를 하다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그만두게 됐어요. 그래서 대구의 화성산업에서 일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는 내가 건설회사를 직접 만들어 운영을 하기도 했고요.지역에 내려와서도 새마을문고 일을 계속 했었요. 그러다 1982년에 선산군 새마을문고 회장을 했어요. 4년동안 새마을문고 회장을 한 뒤 1986년 3월 22일부터 선산군 새마을 지회장을 맡았어요. 선산군 지회장을 하고 있는 도중 1994년에 선산군이 구미시와 통합이 되었어요.통합이 되면서 내가 1995년 1월 1일부터 구미시 새마을회 회장이 됐어요. 그런데 내가 잘해서 한게 아니었어요. 당시 구미시 회장은 이용원씨 였는데, 그 분이 양보를 해준거죠. 친구이기도 했으니까.그 친구의 양보로 새마을문고 회장 4년을 빼고도 17년동안 새마을회 회장을 하게 됐죠. 2003년 4월 2일까지 회장을 했으니 아마도 최장기간 회장직을 한 사람일거에요.△최초로 새마을세계화 운동을 시도새마을회장직을 오래도록 한 만큼 많은 일을 했고, 많은 일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최초의 새마을세계화 운동을 한 것이에요.내가 선산군 회장일때 중국 길림성 화룡시 투도진 명성촌이란 곳에 새마을 회관을 하나 지었주었어요. 1992년에 공사를 시작해 1994년도에 완공했죠.당시엔 국제 새마을화를 생각도 못하고 있을 때였어요. 그런데 그걸 우리 선산군 새마을회가 한 것이죠.당시 600만원이라는 돈을 모아서 명선 새마을회관을 지었어요. 중국 명성촌의 ‘명’자와 선산의 ‘선’자를 따서 ‘명선’이라고 이름을 지었었요. 당시 준공식에 많은 지도자들이 와서 축하해 주었어요.그렇게 새마을운동 세계화를 시작했죠. 그런데 여기에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중국과 수교가 안된 1992년 중국을 통해 백두산에 가는 거였는데, 버스가 비포장 도로를 달리다 중간에서 고장이 났어요. 차를 고치지도 못하고, 다른 차를 기다리자니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가까운 마을로 일단 가게 됐는데 그 곳이 바로 명성촌이었어요.한 250세대가 사는 마을이었는데 주민 수는 1천명이 넘었어요. 대부분 조선족이어서 한국말을 잘 하더라구요. 그런데 한국말을 사용하면서 누가 만든 줄은 모르더라구요. 그래서 이 곳에 회관을 하나 지어주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회관이 있으면 책도 가져다주고, 교육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죠.사실 문고를 지어주고 싶었는데 문고는 허가가 안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인회관을 지어준다하고 새마을회관을 지은거에요. 그런데 명성촌이 백두산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들이 회관에 걸린 새마을기를 보고는 이 마을을 방문하기 시작했대요. 새마을운동 홍보도 되고, 마을 수입에도 좋은 영향을 준 사례라고 할 수 있죠.구미/김락현기자 kimrh@kbmaeil.com

2018-08-02

꿈틀로 철수와 목수 문화반상회 문화품앗이

포항시의 문화적 도시 재생 정책 일환으로 문을 연 포항문화예술창작지구 꿈틀로.포항시 북구 중앙로에 위치한 이곳은 지역 예술가 21개팀이 입주한 창작예술촌으로서 공예, 사진, 회화, 연극 등 다양한 창작활동과 아트프리마켓, 거리축제 등이 펼쳐지는 등 포항의 새로운 문화 거점이 되고 있다.2016년 꿈틀로 사업초기만 해도 4~5 점포 건너 문을 닫은 빈 점포가 즐비하던 노후한 골목이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하나둘씩 채워지면서 예술가의 창의성이 덧입혀진 예술간판과 조형작품이 설치되고 공예, 사진, 회화, 연극 등 다양한 창작활동과 아트프리마켓, 거리축제 등이 펼쳐지는 등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 공모사업인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에 꿈틀로가 선정되면서 도시재생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문화와 더불어 도시성장을 견인할 포항시 도시재생 정책의 추진방향과 문화적 도시재생의 의미, 발전방향 등을 알아본다.다양한 장르 예술가들 입주문화 체험·젊은 예술가 ‘허브’로도심에 불어넣는 문화 성장동력주민_입주 예술가 결속상인에 간판 만들어 주고작가 활동땐 자원봉사함께 ‘밥’ 먹으며 상생 공동체 형성1:1 결연해 서로 도움주며함께 살아가는 ‘삶터’로 인식단발적 지원금에 의한시스템 아닌지속적 생명력 갖춘 공간 ‘과제’△사람중심의 문화공간으로서의 문화적 도시재생최근 문재인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로 전국의 낙후지역 500곳에 매년 재정 2조원의 예산을 들여 도시활성화를 도모하는 도시재생뉴딜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면서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 보다 뜨겁다.특히 지난해 11월 지진이후 재난지역으로 지정된 포항시의 경우 물리적 정신적 재건의 도시재생이 그야말로 절실한 상황이다.도시재생은 급격한 산업화가 이뤄는 과정에서 도시공간의 재편에 따라 나타난 도심공동화 현상을 막고 침체된 도심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공간활성화 전략으로 국내에서는 2013년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됨에 따라 도시재생사업의 변화 양상이 가시화됐다.도시재생이란 단순히 기존의 것을 허물고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개발사업이 아니다. 1960년도 이후 진행돼온 도시개발사업의 물리적 개발방식에서 탈피, 지역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공간적 특성과 경제·사회·물리·환경 등의 비물리적 측면을 고려해 재생해 가는 도시재생 패러다임으로 변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도시의 원형을 보존하면서 사람중심의 문화공간으로서의 도시재생을 추진하는 것이 최근의 주요 트렌드가 되고 있다. 특히 유휴지나 폐공간을 박물관, 갤러리 등 이색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매개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어 도심을 활성화시키고 관광산업으로까지 확대시킨 사례는 너무나 많다.최근 몇 년사이 국내에서도 서울주택도시공사의 역사문화마을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라든가 공연과 푸드 패션 분야의 콘텐츠를 접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플랫폼 창동 61 등 문화를 접목한 도시재생으로 성공시킨 사례가 늘고 있다.이처럼 도시재생에 있어 문화중심의 장소성 복원과 커뮤니티 활성화는 도시재생을 관통하는 핵심 아젠다가 되고 있다.1970년대 북미대륙에서부터 문화예술을 활용한 새로운 의미의 도시정책에서 시작된 문화주도의 도시재생 정책은 198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 더욱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공예와 민속예술 분야의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지정된 일본 가나자와, 세계 최대의 광산 지역을 산업시설과 도시환경을 문화적으로 재생시킨 독일 루르지역, 20년간 방치된 화력발전소를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변모시킨 영국의 테이트모던 등 산업화 이후 침체되고 낙후된 도시들의 새로운 성장동력은 바로 ‘문화’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또 단순히 문화적 색깔을 덧입히는 방식에서 나아가 문화산업 육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과 관광산업을 견인하며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성장시켰다.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017년 도시재생특별위원회 심의를 거쳐 국가지원 도시재생지역 선정사업이 시작되면서 도시재생이란 의미가 피부에 조금씩 와 닿기 시작했다.올해 첫 시행된 문재인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시범지역으로 전국의 68개의 지자체가 선정된 가운데 포항시에서도 국토부가 주관하는 도시재생 뉴딜사업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문화적 도시재생사업 대상지로 각각 선정되면서 도심 활성화에 기대감을 주고 있다.이 가운데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도시재생사업과 연계를 통해 도시공간을 문화적으로 활용해 도심과 공동체의 활성화는 물론 문화적앵커로서의 장소구축사업을 펼치는 사업이다. △포항시의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의 중심 꿈틀로포항시의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지난 2016년부터 포항시가 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해 오고 있는 꿈틀로를 거점으로 이뤄진 다양한 문화적 활동이 기반이 돼 공모에 선정됐다.꿈틀로에는 현재 올해 6팀의 신규작가를 추가로 공모·선정해 총 27팀의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입주해 있으며 그램책 마을과 꿈틀갤러리 등 소규모 문화공간이 자리하고 있다.2016년 꿈틀로 사업초기만 해도 4~5 점포 건너 문을 닫은 빈 점포가 즐비하던 노후한 골목이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하나둘씩 채워지면서 예술가의 창의성이 덧입혀진 예술간판과 조형작품이 설치되고 공예, 사진, 회화, 연극 등 다양한 창작활동과 아트프리마켓, 거리축제 등이 펼쳐지는 등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이러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지난 2월 문화체육관고아부 공모사업인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에 꿈틀로가 선정되면서 도시재생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됐다.포항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올해 1년간 총사업비 2억5천만원이 투입돼 도시재생 뉴딜사업과 연계를 통해 예술가와 주민, 지역 문화리더, 시민이 상호 거버넌스 구축을 통해 꿈틀로의 장소성 회복과 커뮤니티 활동, 장소디자인 구축 사업을 펼치게 된다.그러나 꿈틀로 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은 경관 위주의 물리적 재생보다 장소성이 가진 서사성을 살리고 주민 공동체가 자발적 중심이 된 사회적 재생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주민과 입주예술가가 결속이 돼 언제 닥칠지 모르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에 대응하고 제대로 된 간판조차 갖추지 못한 영세 상업자들에게 입주작가들이 간판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반대로 주민이 작가들의 활동에 자원봉사를 하는 ‘문화품앗이’ 등의 상생의 과정을 통해 삶터로서의 관계성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다. 기존 외관 중심의 도시재생사업과는 차별성을 둔 것이다.△2018년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포항시의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및 작가협업 프로그램으로 ‘철수와 목수’‘문화반상회’‘문화품앗이’‘주민영화제’ 등이다.이 중‘철수와 목수’는 철공과 목공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지역사회 자원활동가가 주민(상인)이 필요한 간판이나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면서 꿈틀로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문화공작소 기능을 담당한다. ‘문화반상회’는 음식이라는 매개체가 가져다주는 ‘소통과 연대’의 효과에 착안해 주민과 입주예술가가 정기적으로 함께 밥을 먹으며 주민과 예술가의 문화간극을 좁히고 서로 소통하며 공동체 형성을 돕는 프로그램이다. 꿈틀로 조성사업에 있어 주차문제, 공간조성 등 현안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주민과의 소통은 매우 중요한 지점을 차지한다. 결국 거주자가 아닌 정주자로서 주민과 입주예술가가 ‘우리 동네’라는 삶터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서로 함께 현안을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문화품앗이’는 꿈틀로 작가와 주민(상인)이 1:1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에게 필요한 도움을 나누며 공동체적 삶을 영위해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구제옷가게, 소규모 양품점, 분식집, 세탁소 등 꿈틀로의 영세 상업체 대부분은 제대로 된 간판이나 사람의 발길을 끄는 세련된 실내 인테리어를 갖추지 못했다. 이처럼 하루하루 벌어서 겨우 살아가는 꿈틀로의 상인들에게 입주작가들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통해 이색적인 간판을 만들어 주거나 실내 인테리어를 단장해 주고 혹은 식기나 찻잔을 제작해 주면서 영업에 활력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반대로 주민들은 꿈틀로에서 펼치는 문화행사때 자원봉사를 한다거나 음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서로 상생해 나간다.이러한 상생의 기반을 위해 수차례 주민과 입주작가가 식사자리와 간담회를 가졌으며, 지난 6월 개최한 ‘꿈틀로 여름날의 소소한 축제’에서 주민과 입주작가 자치회가 중심이 돼 차없는 거리를 요청하고 함께 문화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문화적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포항문화재단 문화도시TF팀은 이런 사회문화적 재생에 방점을 둔 주민, 입주작가간 커뮤니티 활동을 정례화하고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을 위해 꿈틀로 내 구 아카데미 극장 부지에 ‘문화공판장’을 조성 중에 있다. 또 1960년대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문화사랑방이었던‘청포도 다방’을 재현해 다양한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주민과 입주예술가들이 함께 마을 발전궁리를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계획이다.또 주민의 일상과 꿈틀로의 모습을 기록해 함께 영화를 제작하고 상영하는 ‘주민영화제’ 개최와 지역의 이슈를 그들만의 유쾌한 방식으로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여러 가지 방안들도 모색해 나갈 예정이다. △지속적인 생명력 갖춘 공간으로 거듭나야 이처럼 문화가 매개가 된 커뮤니티 중심의 도시재생사업 방식은 시간이 더디 걸린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보다 지속적이고 영속성을 가진다.장기불황에 따른 경기침체에 지진이라는 악재를 겪으면서 재난상황이 직면한 포항은 현재 사회적 관점의 도시재생이 절박한 시점이다.수 백억을 투자해 대형 신축건물을 짓고 갖은 편의시설을 조성하는 천편일률적인 백화점식 개발사업 형태의 도시재생의 관점에서 보다 나아가 도시의 철학을 세우고 사람이 중심이 된 인문적 도시재생방안에 대한 연구가 보다 깊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실례로 수년간 30억원이 넘는 사업비를 들여 조성했지만 올해 사업비 지원이 끝나게 되어 입주작가들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과 투자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창동예술촌의 사례는 향후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포항이 중요하게 되짚어봐야 할 사안이다.지역의 한 인문학자는 “도시재생사업이 단발적인 지원금에 의해 사업의 성패가 좌지우지 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생명력을 갖춘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는 철학적 베이스가 된 사업추진이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황상해 포항문화재단 문화도시TF팀장은 “문화적 도시재생 사업이 사회문화사적인 도시철학을 바탕으로 도시에 문화가 관통하고 시민의 삶을 바꾸고 지속가능한 도시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기존의 문화도시 조성사업과 각종 부처연계사업을 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8-08-01

소 풀 먹이고 초롱불로 공부하던 시골소년의 ‘회장 되겠다’ 막연한 꿈, 36년만에 현실로

제 9대 포스코 회장으로 선임된 최정우 회장은 1983년 포스코에 입사한 뒤, 재무실장, 정도경영실장, 가치경영센터장, 포스코건설 경영전략실장, 포스코대우 기획재무본부장 등 다양한 경력을 쌓았다. 회계, 원가관리부터 심사분석 및 감사, 기획 업무까지 제철소가 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핵심 업무를 두루 경험하며 현장 구석구석에 대해 누구보다 밝은 눈을 가지게 됐다.공정 간 물류는 어떻게 관리되고, 공정 간 가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실수율은 어떠한지 등의 현장 프로세스를 손바닥 보듯 해야 원가든 심사든 감사든 주어진 업무를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 경험이 36년간 고스란히 쌓여 ‘철강업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경남 고성 구만초등학교·회화중학교 전교 1등 우등생1983년 포스코 입사, 동기회장 맡으며 ‘회장 되겠다’ 결심포스코켐텍서부터 준비한 ‘경영 아이디어 노트’ 로100년 기업 포스코에 ‘준비된 적임자’ 이미지 얻어여기에 포스코건설, 포스코대우를 거쳐 포스코켐텍에 이르는 그룹사 근무 경험은 철강 이외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경력이 그를 ‘철강 그 이상의(Steel Beyond)’ 100년 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는 포스코에 딱 맞는 적임자로 만들어 주었다.2015년부터는 포스코그룹의 컨트롤타워 격인 가치경영센터를 이끌며 그룹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그룹 사업재편과, 재무구조 강건화 등 새로운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리튬, 양극재, 음극재 등 신사업을 진두 지휘함으로써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포스코의 100년 미래성장 토대를 마련했다.그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비핵심 철강사업은 매각했으며, 유사한 사업부문은 합병시켜 효율성을 높이고, 낭비를 제거했다. 저수익, 부실사업은 과감히 정리해 부실확대를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이로써 한때 71개까지 늘어났던 포스코 국내 계열사는 38개가 됐고, 해외계열사는 181개에서 124개로 줄었다.2015년 포스코 해외생산법인의 실적은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당시 최정우 가치경영센터장은 해외법인의 고부가제품의 생산 판매 확대, 현지 정부 및 철강사와의 협력강화를 통한 사업환경의 구조적 개선, 포스코와 해외법인간 협력체제 강화 등 전사적 활동을 전개해 해외생산법인의 생존력 확보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전교 1등 산골 소년의 야망경남 고성 구만면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란 최정우 회장은 구만초등학교를 거쳐 회화중학교를 나왔다.당시 구만면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좀 더 큰 면 소재지인 회화면으로 매일 6km씩 걸어서 등교했다.가난한 농가 형편에 배불리 먹어본 기억이 없는 작은 체구의 아이였지만 초등학교 6년 내내 전교 1등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고 중학교에 진학할 때에도 수석 입학을 할 정도로 다부진 우등생이었다. 고등학교는 부산으로 다녔다. 부모님께서 매달 보내주시는 쌀 한 말로 큰 집에 신세를 지며 수학했고, 동래고등학교를 거쳐 부산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다들 넉넉하지 못했던 시절인데다 농사 밖에 모르시던 부모님 밑에서 학업에 매진하기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가 끝나면 소 풀 먹이러 산으로 들로 다녀야 했고 소가 풀을 뜯는 동안 짬짬이 책을 보거나 밤에 초롱불을 켜두고 공부했다. 힘들게 자라온 어린 시절 기억은 지금까지 남아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단돈 천원이라도 주고 가야 마음이 편했다.# 최정우를 쓰다듬던 손, 포항제철소 착공식 버튼 누르다1970년 3월 경남 고성군 회화면 회화중학교 입학식날 운동장으로 흙먼지를 날리며 헬기 한대가 내려앉았다. 고성의 자랑 김학렬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가 온 것이다. 바로 수석 입학생에게 상장을 주기 위해서였다.얼굴이 까맣고 키 작은 최정우 소년은 당시에는 짐작도 못했지만 포스코와의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김학렬 부총리는 최정우 소년에게 상장을 준 그 손으로 한달 뒤 포항제철소 착공식 버튼을 누른다.김 부총리는 포스코 전신인 포항제철의 산파역을 맡았다. 한일각료회담 참석차 일본으로 가는 김 부총리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포철 자금이 합의 안 되면 돌아오지 말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대일 교섭 초창기 일본 관료들이 한국의 신생 제철소를 ‘쓰루제철소’라고 불렀는데, ‘쓰루’란 학(鶴)의 일본말로 김학렬 부총리의 ‘학’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신입사원 최정우, 사진 속 김학렬 부총리와 재회1983년 1월 대학 졸업을 앞두고 포항제철에 입사한 최정우는 홍보센터에 걸린 커다란 흑백 사진 속 낯익은 인물을 보고 머리를 쿵하고 얻어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자신의 우상이었던 김학렬 부총리가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과 함께 당당하게 포항제철소 착공식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이었다.13년전 중학교 입학식때 상장을 받은 인연으로 여름방학이면 군내 우수 학생들과 함께 ‘뉴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고향집에 초대해 합숙훈련도 시켜준 고마운 분이었다.‘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부산에서 다니면서 잠시 잊었던 자신의 우상을 여기에서 만나다니… 10여년전의 인연이 필연이 돼 자신을 여기로 이끈 것은 아닐까?’신입사원 최정우는 자신의 어깨를 누르는 중압감과 알 수 없는 책임감으로 연수원의 첫 밤을 고스란히 지새웠다. #포스코 회장을 꿈꾸던 신입사원1983년 입사할 때만 해도 경기가 좋은 편이라 친구들은 주로 종합상사나 건설회사에 취직을 많이 했다.당시 포항제철은 봉급은 많지 않았지만 복지정책이 좋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소문이 났고, 국가 기간산업이라 부모님들도 은근히 권유했다.그의 입사 동기생은 75명이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는 학생장이 다른 동기생이었으나 부서에 배치받은 이후 동기회에서 동기회장을 하겠다고 했다.아무래도 앞장을 서야할 것 같았다. 동기회장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중에 회사 회장이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금까지 동기회장을 맡고 있는데 동기생들은 말이 씨가 됐다며 “회장이 되겠다고 하더니 진짜 회장이 됐다”고 놀라움으로 축하를 대신해 줬다.#사외이사 마음 움직인 2권의 노트지난 4월 18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권오준 회장이 사임한다고 했다.포스코 역사상 한번도 임시주총을 한 적이 없던 터라 충격적이었다.그날 밤은 입사첫날 때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회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나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불현듯 틈날 때마다 메모해뒀던 노트가 생각났다. 올해 초 포스코켐텍 사장으로 명령이 났을 때 본인의 생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로부터 걱정과 위로를 들었다.고마운 일이지만 정작 본인은 겸연쩍었다. 포스코켐텍은 포스코그룹이 차세대 먹거리 사업중 하나인 에너지저장소재를 책임지는 회사인데다 평판도 아주 괜찮은 회사라 그 회사의 대표는 모사 사장만큼이나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지난 3년 가까이 그룹내 구조조정에 심혈을 기울이다보니 심신이 지친 측면도 있고, 또 참모로서 한 분야를 깊이있게 보는 것보다 작은 규모지만 대표로서 회사 전반을 총괄하는 경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포항에서 등산도 하면서 체력도 보충하고 CEO로서 안목도 넓혀볼 참이었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포스코에 36년을 몸 담으면서 각 분야에 개선했으면 좋은 점, 최근 회사를 둘러싸고 있는 우려에 대한 해결책, 타사에서 배웠으면 하는 점을 매일매일 정리했다. 이대로 계열사에서 직장생활을 마감한다면 포스코켐텍 사장 후임자에게 전해줘도 좋고, 포스코로 다시 돌아가거나, 더 큰 기회가 온다면 업무에 큰 도움이 될 성 싶었다.그러나 갑자기 권오준 회장이 사임을 발표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포스코를 잘 이끌어야 하고 어려울 때 힘을 보태려면 아이디어 노트도 완성도가 높아야 할 것이었다.그때부터 외부 출입을 자제하고 포스코의 시대적 소명과 비전을 좀 더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경영쇄신방안, CEO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조직문화, 사업계획, 대북사업, 사회공헌 등 분야별로도 전략안을 만들었다.포스코켐텍으로 옮긴 지 4달여, 권 회장 사임 발표 후 2달여 지난뒤 최정우의 경영 아이디어 노트는 더 두껍고 촘촘해졌다. CEO후보추천위원회에서 면접대상자로 결정되었을 때 사외이사들의 마음을 움직인 2권의 노트가 완성된 것이다.#건강한 리더, 건강한 리더십90년대 초반 주말도 없이 일에만 파묻혀 지내다보니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된 적이 있었다. 고지혈증이 찾아와 간경화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것이다.‘이런 몸 상태로 일이나 계속 할 수 있겠나’하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그 길로 매일 아침 북부해수욕장 모래사장을 뛰었고 지금도 건강관리라면 누구보다 철저하다. 등산, 자전거 등 건강한 취미 생활도 하나 둘 만들었고, 사무실까지 계단을 이용해 오르내리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건강관리를 혼자만 하지 않는다. 임원들이나 그룹장, 팀장들과 주말 등산을 함께한다.올초 포스코켐텍 사장으로 옮겨간 후 “리더가 건강해야 현장 곳곳을 다니며 직원들의 안전을 지킬수 있다”면서 연말까지 계획을 짜놓고, 매월 1회 전 임원 및 그룹장들과 등산을 해왔다.리더가 건강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리더십은 말할 것도 없고 아예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쳤기에 직원들의 건강 관리에 발벗고 나서게 된 것이다.#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어디서든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게. 최정우 회장의 36년 철강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할 수 있다.어떤 조직에서 어떤 일을 맡게 되든 주인의식을 가지고 사명감과 책임감을 다하면 내가 있는 위치가 진리, 참된 것이라는 뜻이다.최정우 회장이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준점으로 삼아 온 좌우명이자, 신조다.어느 회사든 비슷하지만 과거에는 모기업에서 계열사로 이동할 때는 낙담하고 계열사에 있다가 퇴사할 것으로 생각하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정우 회장은 처음 계열사 포스코건설로 발령이 났을 때에도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보자고 생각해서 건설분야 공부에 매진했다.당시 최 회장은 포스코건설의 경영전략실장으로 부임했는데, 모든 임원들과 친분을 쌓기 위해 임원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참석했다. 본인이 마음을 열어야 다른 임원들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건설화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2년 후 기회가 돼 포스코에 돌아왔고 4년 뒤에 포스코대우로 발령이 났을 때도 같은 마음으로 포스코대우화되기 위해 팀장이상 부장들과 자주 소통했다.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 회장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직장인의 자세며, 후배들에게도 그런 리더가 되기를 주문하고 있다./김명득기자 mdkim@kbmaeil.com

2018-07-30

神들도 탐한 절세미녀 수로부인 그녀가 곧 꽃이었다

역사와 문학 연구자들로부터 ‘신라의 대표적 시가’로 지목받는 ‘헌화가’와 ‘해가’. 숭실대학교 국문과 이경재 교수가 여기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신라 여성 ‘수로부인’이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 김동리(1913~1995)의 소설과 서정주(1915~2000)의 시에서 어떻게 묘사·해석되고 있는지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독자들을 위해 가감 없이 게재한다. /편집자 주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935년까지 992년간 존속했던 왕조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왕조 중 유일하게 1000년을 지속한 신라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그 이야기의 가닥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여성들의 다양한 활약상이다.신라시대에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세 명의 여왕(선덕·진덕·진성)이 존재했고, 화랑의 전신(前身)으로 이야기되는 원화(源花)들이 활동하기도 했다. 여러 연구들은 성리학에 찌든 조선시대보다 신라 여성들의 삶이 더욱 활기찼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신라 시대 여성들 중에서도 한국문학에서 자주 호출된 이로는 신라 33대 왕인 성덕왕(재위 702~737) 때 사람인 ‘수로부인’을 들 수 있다.대표적인 신라시대 시가로 꼽히는 ‘헌화가(獻花歌)’와 ‘해가(海歌)’의 배경 설화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편’에 등장한다. 남편 순정공(純貞公)이 태수로 임명된 강릉으로 가던 수로부인은 일행과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한다.이때 수로부인은 천 길이나 되는 절벽 위에 활짝 핀 철쭉꽃을 발견했고 “꽃을 꺾어 바칠 사람 그 누구 없소?”라고 외친다. 순정공을 포함한 모든 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암소를 끌고 지나던 한 노인이 꽃을 꺾어서는 노래까지 지어 바친다.그때 노인이 꽃과 함께 지어 바친 노래가 4구체 향가 중 절창으로 꼽히는 ‘헌화가’다.자줏빛 바윗가에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니,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이틀 후에는 임해정(臨海亭)에서 수로부인이 바다의 용에게 납치당한다. 모두가 어쩔 줄을 모를 때, 한 노인이 나타나 사람들이 모여 막대기로 언덕을 치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 부인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이 말을 따랐더니 실제로 수로부인이 다시 나타났다. 이때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해가’다. 이후에도 자태가 빼어난 수로부인은 깊은 산이나 큰 연못을 지날 때마다 신(神)적인 존재들에게 납치당하고는 한다.‘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동리와 서정주에 의해 작품화된다.김동리는 1977년 출판사 지소림(智炤林)에서 ‘김동리 역사소설(신라편)’을 발간한다. 여기 수록된 16편의 소설은 석탈해, 최치원, 장보고, 눌지 왕자, 왕거인, 강수 선생, 우륵, 김명, 최치원, 김현, 엄장, 기파랑, 미륵랑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중에는 수로부인을 다룬 ‘수로부인’이라는 단편도 있다.이 작품에서 수로부인은 한마디로 ‘신명에 취한 여인’이다. 용모가 빼어나고 가무에 재주가 남다른 수로부인은 열세 살에 나을신궁의 신관(神官)이 된다. 이후 펼쳐지는 수로부인의 사랑, 결혼, 이후의 행적은 모두 신적인 존재인 ‘검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화랑 응신의 피리 소리에 이끌려서 그와 만나게 되는 것도 검님의 뜻에 따른 것이고, 이후 순정공의 청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초월적인 힘에 이끌린 결과이다. 남성들과의 관계도 육체성은 배제된 정신적인 것으로 그려진다.응신과 수로부인이 만날 때도, 응신은 피리를 불고 수로부인은 그에 맞추어 가무(歌舞)를 할 뿐이다. 수로부인은 결혼 이후에도 제단을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검님을 배례하며, 제단에 올렸던 음식만 먹는다.“항상 신명에 취해 지내는” 수로부인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검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수로부인에게 절벽의 꽃을 꺾어다 바친 노인도, 나라에서 제일가는 도사인 이효 거사가 후일의 대업을 위해 보낸 것으로 그려진다.작품의 마지막은 나라에 큰 가뭄이 들자, 이효 거사가 주관하는 기우제에서 월명 거사가 된 화랑 응신이 피리를 불고 수로부인이 춤을 춤으로써 비를 불러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도 결국은 신명의 뜻과 응감에 따른 것으로 그려진다.이 작품에서 수로부인은 검님이라는 자연의 질서와 하나가 된 성스러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김동리의 친구이자 문협정통파(文協正統派)로서 순수문학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미당 서정주 역시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라는 시를 통해 수로부인을 형상화하였다.이 시는 1961년 정음사(正音社)에서 간행된 ‘신라초(新羅抄)’라는 서정주의 네 번째 시집에 수록돼 있다. 제목에도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이 시집은 신라시대의 인물과 각종 설화 등을 주요한 제재로 다루고 있다.불교 정신을 중심으로 한 신라에 대한 관심은 다음 시집인 ‘동천(冬天)’까지 지속된다. 신라에 대한 탐구는 미당 시의 중심 줄기를 형성하는 한국의 전통과 영원주의 탐구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노인헌화가’는 제목처럼 암소를 끌고 절벽 위의 꽃을 따다 수로부인에게 바친 노인을 화자(話者)로 내세운다. 이 시는 서정주 특유의 능청과 넉살로 노인을 둘러싼 온갖 형이상학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걷어내고 있다. 노인이 꽃을 바친 행위는 심플하게 “이것은 어떤 신라의 늙은이가/젊은 여인네한테 건네인 수작이다”라고 간명하게 정리된다. 노인은 신적인 존재도 무격(巫覡)도 아닌 사랑의 달콤함에 어깨가 들썩이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기의 흰 수염도 나이도 다아 잊어” 버리고, “남의 아내인 것도 무엇도 다아 잊어” 버리고, 심지어는 벼랑의 그 높이도 “다아 잊어” 버리고, “꽃이 꽃을 보고 웃듯이 하는 그런 마음씨”로 꽃을 따다 바친 것이다.이 시에서 ‘헌화가’는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남의 집 할아비가 지나다가 귀동냥하고 도맡아서 건네는” 작업 멘트가 된다.이러한 노인의 성격에 걸맞게 수로부인도 인간의 정감에 충실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서는 “아이그마니나 꽃도 좋아라/그것 나 조끔만 가져 봤으면”이라고 지극히 인간적인 목소리를 낸다.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꽃에게론 듯 사람에게론 듯 또 공중에게론 듯” 발화된다는 것이다. 수로부인은 자신의 남편과 동행자에게만 꽃을 따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미지의 대상(공중)을 향해서도 꽃을 따 달라고 하는 것이다.꽃이 가진 중의성까지 덧보태져 이 작품의 수로부인 역시 암소를 끄는 노인만큼이나 인간적 욕망에 충실한 상태임이 드러난다.‘노인헌화가’는 노인과 수로부인을 둘러싼 공기(空氣)가 “그들의 입과 귀와 눈을 적시면서/그들의 말씀과 수작들을 적시면서/한없이 親한 것이 되어가는 것을/알고 또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로 끝난다. 어느새 수로부인과 노인은 같은 공기에 적셔진 친한 사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수로부인 이야기가 수록된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 시절 보각국사 일연(一然·1206∼1289)이 지은 책이다. 이 저서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역사서이자 신화집이며 동시에 빼어난 문학작품집이기도 하다.그렇기에 여기 실린 이야기들은 해석의 폭이 넓고도 깊다. 수로부인 이야기도 마찬가지여서, 이 작품의 수로부인은 水路라는 이름처럼 물로 대표되는 자연과 소통하는 신화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바다로, 산으로, 못으로 수시로 불려 다니는 그녀는 사실 자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한국 현대문학사의 거장인 김동리와 서정주는 바로 수로부인이 지닌 이 자연과의 일체성에 공통적으로 주목하고 있으나 그 자연을 해석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김동리에게 천지자연은 하나의 유기체이며, 그 유기체의 원리 속에서만 인간은 온전한 존재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수로부인’에서 그 유기체의 원리를 인격화한 것이 검님이고, 수로부인은 그 검님의 신명과 감응에 따름으로써 ‘생의 구경(究竟)적 형식’을 완성하게 된다.서정주가 파악하는 자연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에의 끌림에 충실한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자연에 비하자면 나이니 지위니 하는 것은 성가신 인공의 장식품에 불과하다.수로부인은 과감하게 그 장식품을 떼어낼 줄 아는 여인이고, 그렇기에 결국 “맑은 공기” 속에서 암소를 끄는 노인과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김동리와 서정주가 형상화한 신라 여인 수로부인의 모습에는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숨 쉬고 있다.문학평론가 이경재‘매혹적인 신라 여인’ 수로부인. 서정주와 김동리는 자신들의 문학에서 이 여성을 어떻게 그려냈을까?이 궁금증에 답하는 원고를 본지에 보내온 문학평론가 이경재는 1976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한설야 소설의 서사시학 연구’.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돼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문예지 ‘문학수첩’의 편집위원을 지냈다.비평집 ‘단독성의 박물관’과 ‘끝에서 바라본 문학의 미래’를 등을 썼으며 ‘한설야와 이데올로기의 서사학’ ‘한국 현대소설의 환상과 욕망’ 등의 연구서를 펴내 주목받았다.지난해 출간한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는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공간의 이해를 통해 문학의 주제에 접근한 독특한 저작”이라는 호평을 얻어내기도 했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7-27

韓~러 연결 통로서 환동해 물류·관광활성화 견인 기대

갈 수 없는 지역을 곧바로 이어주는 매개체, 바로 다리(교량·橋梁)이다.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다리와 마주한다. 냇가에 놓인 징검다리부터 산과 산,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잇는 다리까지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많은 다리를 오가며 살아갈 것이다. 다리는 의식주에서부터 물적·인적 교류를 통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많은 분야의 연결통로가 돼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이렇듯 다리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골든게이트교는 차고 거센 조류와 안개가 많은 날씨, 그리고 수면 아래 지형이 복잡해 건설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됐지만 4년 만에 완공돼 미국 토목학회에서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교 역시 마찬가지로 샌프란시스코 특유의 거친 물살, 강풍, 토양조건, 물의 깊이, 기술적 문제 등으로 인해 건설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됐지만 예르바부에나섬을 중심으로 베이 브릿지를 건설하면서 많은 건축자재와 인건비를 최소화해 결국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대형 교량들은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건설돼 각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그렇다면 경북은 어떨까. 경북 동해안의 교통허브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포항을 보면 포항∼영덕 고속도로 건설 사업의 일부 구간으로 영일만 대교 사업이 있다. 하지만 이 사업은 사업 제안 이후부터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현재는 추진이 지지부진한 상태. 그러나 위기가 지나면 기회가 다시 찾아오듯, 북방외교의 활성화로 영일만 대교가 다시 주목받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 필요성과 기대효과에 대해 알아본다.포항시, 주요 관광명소 접근성 높이고 울산간 국도대체우회도로 이용 줄여 물류비 절감 기대경북도, 부산~유럽 아시안하이웨이 연결 도로망 구축된다면 북방교류 협력 선점 효과 커중앙정부, 영일만항 거점으로 북방외교 성공 이끌 교두보 기대·U자형 국토균형발전 역할도□ 영일만 대교 추진될까포항시가 영일만항 물류수송 및 해양관광 활성화를 위해 추진하고 있는 영일만대교 건설 사업이 경제성과 환경문제 등으로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던 가운데 ‘판문점선언’ 등 남북경제협력의 확대 분위기로 인해 그 필요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영일만대교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과 북구 신항만을 연결하는 전체 길이 9.1㎞의 구간으로 포항∼영덕 고속도로 건설 사업의 일부 구간이다. 영일만대교가 건설되면 네트워크형의 교통순환체계가 이뤄지면서 블루밸리를 비롯한 국가산업단지와 영일만항, 철강산업단지와의 접근성이 한층 좋아지게 된다. 당연히 물류비용이 획기적으로 절감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물류수송 수단인 철도와 고속도로 건설이 필수요건이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남북경제협력을 위해서는 영일만대교의 건설 추진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문제는 예산이다. 영일만대교 건설은 수조원이 투자되는 사업으로 수익성과 예산확보 등의 문제로 최근까지 실질적인 사업진척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하지만 포항시는 영일만대교 건설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특히 최근 남북관계 호전에 대한 기대감으로 사업 진척에 파란불이 켜졌다는 평가이다.관련해서 포항시는 영일만대교 건설을 비롯해 국제여객부두 조성과 포항 수출물류(가공)단지 조성, 자유무역 지역 조성, 콜드체인(Cold Chain·저온유통체계, 즉 냉동 ·냉장에 의한 신선한 식료품의 유통방식) 구축, 북방항로 및 북극항로 개척 등 관련 사업에 대한 연계 추진 등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이강덕 포항시장은 “포항이 명실상부한 환동해중심도시로 거듭날 수 있는 사업으로 미래 경북의 100년을 위한 사업이기도 한만큼 민·관이 체계적으로 역할 분담을 하고 협력해 나가겠다”면서 “영일만대교 건설을 통해 영일만항 활성화를 비롯해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일만 대교 사업의 역사총 사업비 1조7천700억원의 대형 국책사업인 영일만대교는 지난 1992년 초 포스코에서 발표한 ‘영일만 광역권 개발 기본구상’에서 출발했다. 서울대학교에 용역 의뢰해 만들어진 이 기본구상에는 영일만 해상도시(인공섬)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다. 영일만에 인공섬을 조성해 국제공항과 항만시설, 주거지역, 위락시설 등을 입주시키고 이 인공섬과 육지 양쪽을 교량으로 연결시키는 방안이 제안됐다. 영일만대교는 이처럼 포항의 새로운 희망으로 힘차게 출발했지만, 이후 정치권의 변화에 따라 정부의 정책이나 평가주체, 평가시점이나 방법 등에 따라 다른 추진 해법이 나왔다. 특히 예비타당성조사에서 국토균형발전론을 내세운 정치권의 영향으로 서해대교를 비롯해 호남지역의 대부분의 섬들은 교량으로 연결됐지만, 영일만대교에는 경제성 분석의 잣대가 적용돼 매번 사업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그러던 중 영일만대교는 2011년 말 국토해양부의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당초 서쪽 육지로 계획된 포항~영덕구간 일부가 영일만을 횡단하는 동쪽으로 변경되는 안이 확정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에 포항시 역시 민자유치를 통해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했고, 2015년에는 국회 본회의를 통해 ‘기본계획수립용역비’ 20억원이 반영됐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와 국토부 타당성조사까지 마쳤음에도 지난 2017년 사업계획 적정성 재검토가 진행되는 등의 시련을 겪었고, 이번 정부 들어서는 아예 국정과제에 포함되지 않으며 현재 사업추진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 영일만 대교의 필요성그렇다면 경북도와 포항시는 왜 경제성이 떨어지는 영일만대교의 건설을 고집하는 것일까? ‘해양경북의 랜드마크’가 될 영일만대교가 완성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날까?우선 포항시의 입장에서는 영일만대교가 완성되면 호미곶을 비롯한 주요 관광명소의 접근성이 높아진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가장 철(鐵)을 많이 생산하는 포항과 국내에서 가장 철(鐵)을 많이 소비하는 울산간의 물류가 국도대체우회도로를 이용하지 않아도 돼 물류비가 크게 절감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포항∼울산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국도대체우회도로와 국도 7호선의 교통량이 증가해 심각한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영일만대교가 완공되면 이 문제도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영일만대교 건설과 영일만항 활성화를 시작으로 영일만관광특구 지정으로 이어지는 물류산업과 해양관광산업의 육성을 통해 다음 세대를 위한 먹거리를 발굴한다는 측면도 중요하다.경북도의 입장에서도 영일만대교는 북방교류협력을 선점하는 차원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포항에서 영덕, 울진, 삼척으로 이어지는 동해안고속도로를 부산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연결되는 아시안하이웨이와 연결한다면 북방진출의 대동맥을 경북에서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 동해안 유일의 국제 컨테이너항만인 영일만항을 북방진출의 거점항만으로 육성해 나간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데 영일만대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중앙정부 차원에서도 환동해경제권의 물류·관광산업의 활성화를 위해서 영일만대교의 건설은 미룰 이유가 없는 사안이라는 분석이다. 부산에서 시작해서 울산과 포항, 영덕, 울진, 삼척, 나선특급시 등을 거쳐 러시아의 하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도로망이 구축될 경우, 영일만대교는 환동해권의 도시연대를 통한 물류·관광 활성화에도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할 것이라는 평가이다.또한 영일만대교는 L자형 국토개발 형태에서 U자형 국토균형발전에 기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영일만항은 우리나라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이다. 현 정부가 공을 들이고 있는 북방외교를 성공시킬 수 있는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될 곳 역시 영일만항이다. 영일만대교는 북방물류거점항만으로 건설된 그 영일만항의 남쪽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 영일만항과 포항철강산업단지, 울산공업단지, 부산항을 연결하는 중요한 물류수송 기능을 하게 된다. 이제는 정치논리나 지역 차별성에서 벗어나 영일만대교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고 냉정한 판단이 내려지기를 바란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2018-07-26

경북 최초 ‘같이 모여 함께 일하는 창업공간’ 준비된 청년 CEO 육성

청년인구 유출과 실업난의 해결방법으로 기존 산업 체계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업종에서의 일자리 창출이 요구되고 있다. 그 중심에 ‘청년창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정부와 자치단체들은 이를 위해 각자 청년창업을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혁재 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 본부장은 “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자에게 최고의 접근성과 최대의 인프라 제공을 통한 창업 허브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본지는 안동시가 추진 중인 청년창업지원 사업과 성공·우수사례를 소개하고 앞으로의 청년 일자리 사업과 사회적 경제 활성화 방안, 향후 추진방향 등을 조명해 본다.경북도, 청년일자리 정책 추진창업투자생태계 조성에 88억지역정착지원형에 59억 투입청년 취·창업 다양한 기회 제공청년창업가 ‘코워킹 공간’ 제공전문적 교육·마케팅·판매까지기술·지식·6차 산업 창업 지원최고 접근성·최대 인프라 제공◇ 청년층 지방 유도·산업인력 창출통계청이 발표한 ‘5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15∼29세) 실업률이 역대 최고치인 10.5%를 기록했다.체감실업률을 보여주는 청년층 고용보조지표는 23.2%로 통계 작성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이처럼 사상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청년 실업률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안동시와 경북도가 추진 중인 ‘청년 일자리 정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행안부는 지난 5월 일자리추경에서 확보된 831억원(국비 기준)을 활용해 전국 1만480명의 청년에게 취·창업 기회를 제공하고, 70곳의 창업 공간을 조성해 청년 친화적 취·창업생태계를 조성한다는 방침이다.이에 따라 경북도는 지역정착지원형에 59억원(국비 26억원)을 투자해 중소기업 및 사회적 경제기업 등에 390개의 청년일자리를 제공하고 도내정착을 도울 계획이다.특히 창업투자생태계조성형에 88억원(국비 27억)을 투입, 경북에 창업하는 도시청년 100명에게 1인당 연간 최고 3천만원의 창업자금을 지원하고 창업 공간 4개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앞서 안동시와 경북도는 ‘경북도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를 안동에 설치하고 본격적인 청년층의 지방 유도를 위한 신성장 산업 및 일자리 창출에 나섰다. ◇청년창업지원센터가 하는 일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는 낙후된 경북 북부지역의 특화분야 청년 창업자를 발굴·육성해 청년 취·창업 활성화 및 우수 청년 창업자와 기업 배출을 목적으로 지난 5월 16일 안동시 옥정동에 위치한 안동도시재생센터 3층에 문을 열었다.지난해 6월 착공해 이날 개소한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는 청년 창업가들에게 효율적인 창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지원하고 ‘같이 모여 일한다’는 의미를 가진 경북 최초의 청년 창업가를 위한 코워킹(Co-working)공간이다.올해 도시재생센터 3층 359.84㎡, 내년엔 4층 269.4㎡ 공간에 4억7천여만 원을 들여 청년창업지원센터를 구축할 계획이다. 이곳엔 북 카페, 라운지, 공연장 등 청년문화 친화공간으로 활용된다.이 센터는 2021년까지 34억2천여만 원을 들여 안동·영주·문경시와 예천·의성·봉화·영양·청송군 등 8개 시·군의 청년 예비창업가를 대상으로 도내 협력기관들과 유기적 협업을 통해 장기적인 창업 보육 모델을 구축한다.이어 초기 창업 과정을 지원받은 심화 창업자를 위한 실무 중심의 효율적인 사업을 지원한다.특히 경북 북부권역 산업과 연계한 지역 강점인 6차 산업, 문화자원 등 사업 아이템을 가진 예비창업자를 중점 지원하고 있다.예비 창업가들에게는 실전형 창업교육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와 실행, 전문가 자문, 시제품 제작 등 창업 전 과정을 지원한다.교육 수료 이후에도 안정적인 경영정착을 위해 경북도와 협업을 통해 판로개척, 마케팅 디자인 제작지원 등 사후 관리도 한다.이곳에선 청년 창업가들에게 창업 활동비를 지원하고, 8개의 다양한 창업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청년CEO들의 창업 및 취업 활동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코워킹 공간(Co-Working Space)·청년창업 지원청년 창업가에게 창업공간을 제공하는 ‘코워킹 공간’ 지원은 청년창업 지원센터 입주자 대다수가 외부 사업장을 운영하거나 1인 창업기업으로, 고정적인 공간 필요한 기업을 제외 나머지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창업활동비의 뚜렷한 목적성을 위해 업무추진비 및 여비, 소모품, 기타 경비 목적으로만 사용하되, 높은 금액이 소요되는 특정 목적의 사업화 지원은 창업 분야별 요구에 따라 선택형으로 지원한다.학생 직업 역량 및 청년 일자리 부족과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한 ‘청년 강소기업 창업 인턴제’는 6천970여만 원을 투입해 청년 기업에는 맞춤형 특화 인재와 인건비 약 70%를 지원한다.청년 인턴에게는 인턴 필수교육 지원과 인센티브 지급한다.청년 강소기업에게 지원하는 인건비의 경우 월 1인 100만원 한도로 고용 계약서 기준 월 봉급액의 52.7%, 국가근로장학금 21%를 지원한다.지원기간은 선정일로부터 6개월간이다. 인턴에게는 사업 종료 후 1개월 이내, 1인 100만원 한도로 지급한다. 이 밖에 기업에는 청년 친화적 기업 인증을, 인턴에게는 경력증명서를 각각 발급한다.청년CEO 지원에 따른 규모 있는 사업화 지원금을 지급하는 ‘청년 Biz-up 프로그램’은 단일 제품을 판매하는 청년기업의 특징을 감안해 기술집약적 제품을 개발하고, 고부가가치를 융합한 새로운 표준의 제품 혁신이 목표다.이에 9천200여만 원을 투입, 청년CEO 20명을 선발해 이들에게 500만∼3천만 원까지 지원한다. 특히 지역특화, 기술 집약·혁신, 지역문화 덧대기 지원 등을 통해 지역특화 청년CEO양성, 기술 혁신 제품 창출, 고부가가치 창출을 기대하고 있다.◇농식품 창업·6차 산업-경북 문화 브랜딩 지원농식품 분야 청년 창업가를 위한 지원사업인 ‘농식품 창업 성공 DNA 과정’은 농식품 창업의 까다로운 제조공정을 전문 기관의 특화지원과 체계적인 전문가 양성 교육을 통해 조기 사업화와 제품의 시장 상용화를 돕는다.전문 기관으로 참여하는 경북바이오산업연구원은 시험 생산과 실험분석 지원, 제품검사, 인증 지원을 담당한다.경북바이오벤처프라자는 제품 공정과 품질 장비, 제품성분, 품질관리 등을 지원한다.교육과정을 마친 청년기업 중 직접 생산을 희망하는 기업 중 생산 공장을 설립하기 어려운 기업에는 경북바이오벤처프라자의 아파트형 공장 입주도 지원한다.6차 산업은 농촌에 존재하는 모든 유·무형의 자원을 바탕으로 농업과 식품, 특산품 제조가공(2차 산업) 및 유통 판매, 문화·관광·체험·서비스(3차 산업) 등을 연계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이런 농업의 6차 산업에 경북의 문화콘텐츠를 접목한 사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6차 산업-경북 문화 브랜딩 지원’은 콘텐츠와 제품 간의 관련성이 인증될 때 해당 콘텐츠를 제품에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또 이 제품의 콘텐츠를 다각화해 6차 산업의 새로운 브랜드 마케팅 수단으로 지원한다.세무 및 회계 신고기간에 맞춰 단기특강을 지원하는 청년기업 실무 교육 및 멘토링 지원사업은 청년CEO 기업의 애로사항 및 시장 개척을 위한 교육을 진행한다.청년기업의 지속적인 사업 영위와 기업 규모 증대에 따른 세무·회계·법률 중심의 교육 및 멘토링 커리큘럼 구축한다. 또 판로 개척을 위한 우수 청년 기업의 직·간접적인 수출 교육 및 상담회를 시행한다. ◇청년기업 우수제품 세일즈·투자 오아시스 발굴‘청년 기업 우수제품 세일즈 프로모션’은 판매 스피치 프로그램 운영, 청년 창업가 플리마켓과 판매전 등을 개최하는 제품 판매 활동이 취약한 청년 기업을 지원한다.이론에서 벗어나 실제 실현 마케팅 중심의 지원 프로그램을 구축해 청년기업의 우수 제품이 시장에 상용화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지원 체계는 1단계 청년기업 세일즈 시피치, 2단계 센터 및 학내 청년기업 플리마켓 운영, 3단계 도내 청년기업 팝업 스토어 설치, 4단계 유통·판매전 참가, 5단계 오프라인 스토어 개점, 끝으로 해외 수출까지 총 6단계로 나눠 지원한다.투자를 원하는 기관 또는 개인과 투자를 받고 싶어 하는 청년기업의 수요는 많으나 기업 검토와 투자 협상을 거쳐야 하는 복잡한 단계 아래서 많은 투자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이에 센터는 투자자와 청년기업간의 정기적인 만남(데모데이)의 장을 마련한다. 아울러 투자 유치의 중요성을 청년 기업에 인식시키기 위해 후원성 크라우드 펀딩 텀블벅과 굿 펀딩, 인큐젝터 등과 연계해 청년 기업의 투자 유치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준비된 창업가 발굴해 청년CEO 육성경북 도내 청년창업지원센터는 각 시·군, 지역 대학교 창업보육센터와 기관들이 협력해 청년CEO 육성사업을 펼친 결과, 1천774팀이 창업에 성공하는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더욱 주목할 점은 창업유형이 소위 치킨점으로 대표되는 생계형 창업에서 벗어나 기술·지식·6차 산업 창업 등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창업의 양적 성장보다 정착지원에 중점을 두고 좋은 창업, 준비된 창업가 발굴에 초점을 맞춰 추진한 정책이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다.특히 지난해 안동시와 위탁 기관인 안동대학교는 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를 운영해 20명의 청년CEO를 양성했다.이들은 18억원의 매출과 34명의 고용 창출 성과를 거뒀다.이들 가운데 곤충 ‘페로몬’을 활용한 친환경 해충방제 기업인 (주)에이디(대표 권기봉)는 지난해 기업 및 제품 인증 5건 획득에 특허 출원 등록까지 마치면서 우수사례로 꼽히고 있다. 권기봉 대표는 “경북 북부권 청년창업지원센터로부터 창업초기 시제품을 개발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창업공간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재정적인 면에서도 많은 혜택을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손병현기자why@kbmaeil.com

2018-07-25

추문·비난에 얼룩진 신라 마지막 여왕 진성, 그 빛과 그림자

지금으로부터 1천130년 전인 아득한 옛날 서라벌. 신라의 궁궐에서 시작된 소문이 저잣거리를 술렁이게 했다. 이런 내용이었다.“여왕이 자기 아버지의 동생인 숙부 위홍(魏弘)과 추문을 일으키더니, 그가 죽고 나서도 음심(淫心)을 참지 못하고 젊고 잘생긴 사내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밤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 이 나라 미래가 어찌될 것인지….”이뿐 아니었다. 세간을 휩쓰는 풍문 중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도 있었다.“여자가 왕에 오르고 나서 해괴한 일이 자꾸 일어난다. 사철 솟구치던 우물이 마르고, 하늘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비를 내려주지 않고 있다. 각처에서 도적이 들끓고, 조정(朝廷)의 충신은 씨가 말라 간신만이 활개치고 있다.”이처럼 맹렬한 공격과 원망의 대상이 된 사람은 신라, 아니 한국 봉건시대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재위 887~897)이었다.“음란한 것은 물론, 정치 감각도 없었다”는 꼬리표는 진성여왕을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다. 그런데 그건 공론(空論)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진실일까?가뭄·홍수로 고통받는 백성 위해즉위 즉시 조세면제 정책 펼치고어려운 백성 직접 돌보기도이미 국가통제력 상실된 신라말기진성의 정치력으로는 통제불가◆ 아버지와 오빠 둘에 이어 왕좌에 오르다먼저 그녀가 어떤 경로를 통해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인지 살펴보자.진성여왕의 아버지인 경문왕은 ‘왕의 직계 혈통’이 아니었다.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장인 헌안왕의 유언 때문. ‘삼국사기’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헌안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이 없고 딸만 있다. 옛날 선덕과 진덕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유사하므로 본받을 일이 될 수 없다. 나의 사위 응렴(膺廉·경문왕)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성숙한 덕을 갖추었으니,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라. 그러면 훌륭한 왕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왕이 될 수 있는 사람’에서 여성을 배제한 헌안왕과 달리 경문왕의 아들이었던 정강왕은 요즘 말로 하면 ‘페미니스트(Feminist)’의 면모를 보인다.역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나의 병이 위중하니 이제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기가 힘들 것이다. 그런데 내겐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다. 누이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그 뼈대가 남자를 능가하니, 그대들은 선덕과 진덕의 옛 일을 본받아 그녀를 왕위에 옹립해 성심으로 받들라.” 진성여왕 직전에 신라 왕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은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경문왕은 진성의 부친이고, 헌강왕과 정강왕은 오라버니였다. 진성여왕은 겨우 1년 남짓 통치권을 행사하다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오빠’ 정강왕의 의지 덕택에 왕좌에 앉을 수 있었다.사학자 이기봉은 그의 논문 ‘신라 진성여왕대의 재이(災異·괴이한 일과 재앙)와 농민 반란’에서 이와 관련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진성여왕은 경문왕가(王家) 성립 이후의 왕권 강화정책과 왕실의 신성화 노력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이에 더해 이기봉은 진성여왕 시기의 신라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도 요약해 알려준다. 아래와 같은 진술이다.“진성여왕은 즉위 이후 곧바로 조세 면제 조치를 취했다. 계속된 서라벌 일대의 가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엔 이미 신라의 국가통제력이 상실되는 상황이었고, 이듬해 조세를 독촉하자 농민들의 반란까지 일어났다.”실제로 그랬다. ‘통일신라’의 번영을 몇 대에 걸쳐 제대로 누렸던 서라벌은 9세기를 넘어서며 위기를 맞고 있었다.반복되는 홍수와 가뭄은 민생을 곤궁에 빠뜨렸고, 귀족들의 욕심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당연한 수순처럼 신라 각지에서 민란(民亂)이 발생했다. 진성여왕 한 사람의 잘못 탓만이 아니었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발행한 조경철의 논문 ‘신라의 여왕과 여성성불론’엔 이와 관련된 서술이 등장한다.“진성여왕은 국내외적 상황이 어려움에도 나름대로 정치를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했다. 진성여왕 시기에 조세와 공물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도적이 들고 일어났지만, 신라의 상황은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이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진성여왕대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욱 어렵게 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왕이 다스렸다 해도 몰락으로 기울고 있는 신라를 어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진성여왕이 보여준 ‘긍정적인 면’도 살펴야조경철의 지적처럼 9세 말 신라에 닥쳐온 위기상황이 진성여왕의 실정(失政) 하나만으로 야기된 것은 아닐 터.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음탕함’과 ‘정치 감각의 부재’라는 진성여왕의 ‘그림자’에만 주목하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에게도 ‘환하게 빛나는’ 일화 역시 없지 않다. ‘삼국사기’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진성여왕 시절 서라벌에 살던 처녀 지은(知恩)은 서른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고, 장님인 어머니를 모시는 일에만 온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여자 혼자의 몸으로 모친을 제대로 공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지은은 부잣집에 자신을 여종으로 사달라고 읍소한다. 지은의 어머니는 딸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소식을 들은 진성여왕은 집을 마련해 모녀를 편히 살게 해주고, 군사를 보내 둘을 지켜주기까지 했다.”이 에피소드는 진성여왕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에 더해 진성여왕은 권력의 무상함을 일찍 깨닫고 자신의 조카인 요(嶢·효공왕)에게 왕위를 기꺼이 물려주기도 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겨우 20대 후반이었다. 욕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간행한 ‘신라에서 고려로’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실렸다. 이는 진성여왕의 ‘그림자’만이 아닌 ‘빛’도 함께 살피자는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진성여왕에 대한 비난은 대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남성우월주의의 편향된 시각에 기인한 바가 많다. 국가 멸망의 원인을 지배층의 무능과 실책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보편적인 경향이라 하겠지만, 그것을 여자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거기에 음란과 방탕이라는 올가미까지 씌워 비난하는 것은 가혹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적절하지 못한 비판이나 오명을 덮어쓴다는 것은 마땅치 않다. 신라 쇠퇴의 원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엄정한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7-20

울진 바다·숲·온천… 三色 매력에 심장이 쿵

일상을 훌훌 벗어 던지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은 열정의 계절, 여름이다.작열하는 태양, 코발트 빛으로 유혹하는 바다, 눈부시도록 환한 은빛으로 펼쳐진 모래밭, 싱그런 녹음으로 뒤덮인 계곡이 그리운 여름이다. 동해안에 자리잡은 ‘생태문화관광도시’, 국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삼욕(三浴;해수욕·산림욕·온천욕)의 고장 울진에서 올 여름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올해로 8회째 맞는 ‘2018 울진 워터피아 페스타’가 바로 그 것. 울진 워터피아 페스타는 ‘생태문화관광도시’ 울진의 대표적인 여름 축제로 여름 휴가가 절정에 이르는 오는 28일부터 8월 5일까지 9일간 울진 염전해변과 왕피천, 엑스포공원, 망양정해수욕장, 금강소나무숲 일원에서 화려하게 펼쳐진다.이번 울진 워터피아 페스타의 슬로건은 ‘바다·숲·온천 울진에 푸욱 빠지다’다. 낮에는 시리도록 투명한 바다와 모래밭, 맑고 깊은 왕피천에서 물놀이 체험프로그램과 모래조각 체험, 은어반두잡이·후릿그물체험, 놀싸움, 뗏마타기, 윈드스핑, 카누·카약, 워터바이크, 워터 제트 등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족 중심 체험프로그램이 숨가쁘게 진행된다.해변의 밤은 노래와 춤과 마임, 매직과 모래밭 토크쇼가 어우러진 환상의 콜라보레이션이 연출된다. 축제가 진행되는 9일 동안 염전해변과 왕피천, 망양정해수욕장은 힐링과 열정의 공간으로 변한다. 28일부터 8월5일까지 9일간염전해변·왕피천·엑스포공원·망양정해수욕장 등곳곳에서 다양한 축제장 펼쳐져낮에는 물놀이와 체험 프로그램밤에는 공연·마술·토크쇼 등지루할 틈없는 한여름의 울진 ‘유혹’◇모래밭에서 펼쳐지는 한국청소년댄스경연대회축제를 주관하는 울진군축제발전위원회(위원장 남효선)는 이번 축제에 청소년들의 위한 킬러콘텐츠 하나를 더 마련했다.올해 첫 선을 보이는 ‘한국 청소년 댄스 경연대회’가 그 것이다. 이번 대회에는 전국의 청소년 댄스동아리 50여개 팀이 출전해 기량을 겨룬다.축제 오프닝 퍼포먼스를 겸해 펼쳐지는 경연대회는 참가팀이 ‘울진대게춤과 대게송’을 주제로 한바탕 신명나는 플래시몹을 펼친다. 모래밭에 펼쳐지는 경연 자체가 열정의 무대다.축제발전위원회는 이번 청소년 댄스경연대회를 마련한 배경으로 젊은 층 참여를 통한 워터피아페스타 이미지 확장과 축제 변별력 강화를 내세웠다. 참가자격은 청소년(13~19세) 4인 이상으로 구성된 팀이면 가능하다. 참가 분야는 B-Boy, 팝핀, 힙합, 방송댄스, 창작댄스 등 댄스 전 장르이다. 상금도 푸짐하다. 참가신청은 울진군청 홈페이지의 워터피아페스타 홈페이지나 울진군축제발전위원회(054-789-5485~6)로 하면 된다. ◇모래밭과 왕피천이 선사하는 놀이의 세계축제장인 염전해변과 왕피천은 모래조각 체험장과 가족 단위로 함께 즐길 수 있는 물놀이와 은어잡기·구이체험장 그리고 수상레저 체험장으로 운영된다.모래조각 체험장은 지난해와 달리 그 규모와 체험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했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모래작가와의 만남은 물론 유아들이 맘놓고 놀이판에 빠져들 수 있도록 체험장을 다양하게 마련했다. 물놀이 체험장은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물놀이 기구를 구비해 그야말로 물놀이 천국으로 운영한다. 또 어른들이 즐길 수 있는 워터장애물 놀이장의 규모도 대폭 늘여 운영한다.수상레저 체험장으로 운영되는 왕피천은 교육을 겸한 윈드스핀 체험프로그램과 카누, 카약, 수상바이크 등 다양한 수상기구를 즐길 수 있도록 진행한다. 또 하늘로 치솟는 워터제트의 체험은 짜릿한 스릴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선사한다.특히 지난해 처음 선 보인 ‘놀싸움’과 ‘뗏마체험’은 울진지방 전통 문화의 진수를 직접 체험하는 소중한 기회를 안겨준다.이와 함께 왕피천과 염전 앞 바다에서 진행되는 ‘후릿그물던지기 체험’은 울진지방 전통어로 기술을 직접 익히는 프로그램으로 쏠쏠한 재미를 안겨준다. 여기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과 울진 남대천 은어다리를 잇는 해파랑길 걷기 체험프로그램과 세계적 명품 ‘울진금강소나무숲 생태탐방’은 버스킹과 함께 최고의 힐링을 선사한다.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 참가하는 ‘수중배구’, ‘수중풋살’, ‘수중줄다리기’는 경기 방식으로 진행해 긴장감과 묘미를 더한다. ◇망양정해수욕장, 여름밤이 펼치는 품격 높은 공연축제 이튿날인 29일 망양정 해수욕장을 배경으로 ‘청소년 댄스 경연대회’와 플래시몹으로 막을 여는 야간 프로그램은 ‘관과 현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콜라보레이션인 ‘망양정 블루스’, ‘모래밭 섬머파티’, ‘하이퍼마스크댄스’와 유명 연예인과 지역 연예인이 함께 어우러지는 무대 공연, 마임과 매직 등 다양한 장르로 전개된다.특히 문학, 사진, 미술 등의 주제로 모래밭에서 진행되는 ‘모래밭 토크쇼’는 뜨거운 여름밤을 훈훈한 감성으로 식혀주는 격조 높은 축제의 진수를 보여준다. ◇‘축제 밴드제’ 지역 경제 살리는 ‘일석이조’축제장인 염전해변과 왕피천을 무대로 운영되는 모든 체험 프로그램을 비롯 축제 체험프로그램은 모두 ‘축제밴드제’로 운영된다.축제장에 마련된 ‘축제밴드(1개당 1만원)’ 판매소에서 반드시 밴드를 구입, 착용해야만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축제밴드를 착용하면 축제장 전역에 마련된 모든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체험프로그램에 참여한 밴드는 재활용된다. 축제장에 마련된 다양한 먹거리 부스나 울진지역 농수임특산물 부스에서 재활용(밴드 1개당 5천원)하면 된다.축제장에 마련된 체험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축제참가밴드를 1만원에 구입하고 체험을 모두 즐긴 뒤 축제장에 마련된 먹거리 부스나 농수임특산물 부스에서 1개당 5천원으로 재활용 되는 방식이다.축제도 즐기고 울진지역 특산물도 구입해 축제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선순환적 프로그램인 셈이다.남효선 축제위원장은 “올 워터피아 페스타는 종전과는 달리 프로그램을 대폭 강화하고 특히 울진군민이 직접 축제판을 짜고 운영하는 주민참여형 축제와 울진이 보유하고 있는 자연을 고스란히 담아 격조 높은 힐링 프로그램으로 구성했다”며 “물놀이 중심의 ‘낮’ 프로그램과 ‘가족 중심의 따뜻한 감성과 공연’을 담은 ‘밤’ 프로그램으로 특화해 울진을 찾는 피서·관광객들에게 또다른 볼거리, 즐길거리를 선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울진/주헌석기자 hsjoo@kbmaeil.com

2018-07-16

7척의 키에 풍만하고 아름다운 모습용인술·외교력까지 갖춘 진덕여왕

서기 649년. 백제는 은상(殷相)을 선봉장으로 하는 7천여 명의 군대를 신라로 보내 7개의 성을 동시에 공격한다. 태풍 앞에 세운 촛불 같아진 나라의 운명. 왕은 궁궐로 대장군 김유신(595~673)을 불러들인다. 목숨을 건 수많은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김유신은 신라의 군권(軍權)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인물인 동시에 정치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거물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왕의 카리스마는 김유신을 압도했다.“병사를 내어줄 것이니 속히 전장으로 달려가 위기에 빠진 이 땅과 백성을 구하라. 패배는 용납하지 않겠노라.”휘하의 장수 수천 명을 도열시킨 김유신이 답한다.“명을 받들어 기필코 승전(勝戰)의 소식을 주군께 전하겠나이다.”다소의 상상력이 더해진 이 장면에 등장하는 왕은 누굴까? ‘천하의 김유신’을 쥐락펴락한 이는 예상 외로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선덕여왕의 사촌동생이자 신라의 28대 왕인 진덕(재위 647∼654).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진덕여왕은 그 풍모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던 진덕여왕은 키가 7척(尺)에 이르렀다. 또한 늘어뜨리면 팔이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경주대학교 이강식 교수는 성신여자대학교 경영연구소가 발행한 논문 ‘신라 세 여왕의 삶과 경영’에서 아래와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진덕여왕의 이름은 승만(勝曼)인데 이는 ‘특별히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7척을 신라 때의 당척(唐尺)으로 계산하면 207.9cm가 되니 당시로나 지금으로나 사실 거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대한 자태도 등극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큰아버지인 진평왕이 신체가 장대한 것에서 유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전쟁에는 김유신 앞세우고정치에는 김춘추 활용삼국통일 완수의 큰 발판 만들어◆ 수차례의 외침을 극복한 용기 있는 여왕사실 고대의 역사를 기록한 문헌이나 예술작품엔 크건 작건 과장이 섞여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는 어지간한 10대 청소년의 몸무게와 맞먹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가벼운 나무젓가락 다루듯 한다. 뿐인가. ‘수호전’의 무송은 맨주먹으로 거대한 식인 호랑이의 머리뼈를 부숴버리는 초인적 괴력을 보여준다.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연출한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4대 왕 크세르크세스(Xerxes·재위 BC 486∼BC 465)는 키가 진덕여왕의 2배쯤 되는 4~5m로 그려진다.하지만 그 옛날 왕이나 영웅호걸에 대한 묘사가 마냥 과장스럽기만 한 것일까? 진덕여왕의 경우를 꼼꼼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앞서 언급한 649년 침공 외에도 진덕여왕은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 고구려 군대의 끊임없는 공격에 맞서야 했다.진덕여왕이 명령하고 김유신이 실행한 방어작전은 성공적이었다. 647년에는 무산성과 감물성을 포위한 백제군을 격퇴했고, 이듬해에도 서라벌 서쪽을 노리는 백제 무장 의직(義直)으로부터 신라의 10개 성을 지켜냈다. 이강식 교수는 위의 논문에서 “사촌누이를 반대한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겪으며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진덕여왕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신라 국정을 개혁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다져야한다는 주요한 과제를 안고 탄생했다”고 쓰고 있다. 안으로는 반란의 잔당을 진압하고, 밖으로는 여러 차례의 외침을 효과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에서 진덕여왕의 용기와 군사적 능력에 후한 점수를 주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여왕의 관심은 군사조직의 정비에까지 이어져 651년에는 왕궁의 호위를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했고, 652년엔 궁병(弓兵)들이 주축이 된 부대를 만들기도 했다.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선 진덕여왕이 김유신과 김춘추(604~661)가 ‘허수아비로 세워놓은 왕’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그러나 7세기 중반 신라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어떤 잣대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 주장은 힘을 얻을 수도, 잃을 수도 있다. 아래와 같이 정반대로 말하는 학자도 존재하니까.“선덕여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안목을 키운 진덕여왕의 상황 판단능력과 정치력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전쟁에는 김유신을 앞세우고,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 적극 활용했다. 이것만 봐도 진덕여왕의 용인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외교’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 보여줘백제와 고구려의 침탈에 용기 있게 맞선 통치자였던 진덕여왕은 ‘외교’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보였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강식 교수의 논문 ‘신라 세 여왕의 삶과 경영’은 진덕여왕의 외교 전략을 ‘자주화’와 ‘대당 외교의 병행’으로 요약한다.“진덕여왕은 즉위 원년(647년) 연호를 태화로 고쳤다. 그리고 같은 해 초겨울 신궁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신라의 천신교 의례를 수행함으로써 자주성을 표방한 것이다.”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자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제화 전략도 필요했다. 이를 위해 진덕여왕은 ‘중국(당나라)과의 외교’라는 방법을 선택했다.이 교수는 신라와 당나라가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에 시달렸던 신라와 고구려 원정에 두 번이나 크게 실패한 당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결과다.” 여기에 이런 문장도 덧붙이고 있다.“진덕여왕의 대당 외교 성공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통일을 완수하게 되는 발판을 만들었다.”8년의 재위 기간 동안 국방과 외교 분야에서 진덕여왕이 이룬 일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녀에 관한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신라를 읽는 또 하나의 키워드 ‘골품제’뼈에도 품격이 있다?신라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타고난 혈통과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부모를 통해 얻게 되는 지위가 평생을 지배했다. 언필칭 골품제(骨品制)다.골품제의 최상위 계급은 성골(聖骨). ‘성스러운 뼈’로 해석 가능한 성골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왕의 핏줄을 가진 사람을 지칭했다. 신라의 두 번째 여왕인 진덕은 성골 출신의 마지막 왕이었다.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골품제는 신라의 역사와 사회를 들여다보고 살피는 창(窓)과 같은 역할을 한다.동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비슷한 시대의 외국에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신분제였고, 신라 사회를 살아갔던 많은 사람들의 정치·사회 활동과 일상생활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던 법제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랬다. ‘성골-진골(眞骨·부모 중 한 사람이 왕족의 혈통인 사람)-6두품-5두품-…1두품’으로 나뉜 골품제 아래서 자신의 계급이 확정되면 오를 수 있는 벼슬의 상한선에서부터 입는 옷, 사용하는 생활용품, 집을 지을 수 있는 규모까지가 함께 정해졌다.심지어 여성들의 속치마와 장신구 색깔에까지 골품제가 끼어들었다. 현대인의 상식으론 이해가 힘들다. “너는 성골이 아니라 6두품이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샤넬 립스틱을 쓰면 안 된다”고 한다면 21세기 여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중앙집권제 국가로 성장하던 신라가 지역 토호들의 세력을 흡수하며 만들어진 골품제는 많은 폐단을 낳기도 했다. 능력과 노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출신 성분’을 인간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몇몇 역사학자들은 신라 멸망의 원인을 ‘골품제가 야기한 차별’에서 찾기도 한다.인도의 ‘카스트(Caste)제도’는 신라의 골품제와 여러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카스트제도 역시 사람을 브라만(Brahman·성직자), 크샤트리아(Ksatriya·귀족과 군인), 바이샤(Vaisya·평민), 수드라(Sudra·천민)의 네 가지 계급으로 나누고 각 계급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정해주는 건 물론, 결혼까지 같은 카스트끼리만 하도록 허락했다. 현재 법적으로는 카스트제도가 폐지됐다. 그러나 아직도 인도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이 제도의 그림자가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생생한 사례를 인도를 여행한 몇 해 전 목격하기도 했다.기자가 묵은 남부 인도의 호텔 주인은 브라만이었는데, 남이 입었던 옷을 절대로 만지지 않는다고 했다. 인도에서 빨래는 천민 계급인 수드라가 한다.뭄바이에선 더 황당한 일을 겪었다. 브라만 계급인 택시기사가 목적지로 가던 중 갑자기 차를 세우고 태양을 향해 기도 올리는 걸 본 것이다.이처럼 골품제와 카스트제도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기엔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런 사회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 옛날 신라와 인도를 해석하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8-07-13

에어포항, 저가항공사로 규모 키워다양한 하늘길 여는 영남권 대표항공사 만든다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리에 위치한 포항공항. 포항공항은 포항시청에서 약 11.5㎞, 포스코에서 구룡포 방향으로 5㎞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난 1970년 포항공항에 민항시설이 설치된 이후 48년의 세월 동안 시민의 발로 그 역할을 해왔다. 지난 2014년 6월부터는 약 2년간 활주로 및 항행안전시설을 전면 개보수하고 새롭게 문을 열기도 했으며, 올해 2월 7일에는 포항시를 기반으로 한 지역항공사인 ‘에어포항’이 첫 취항을 시작했다. 초기 자본금 100억원으로 시작한 ‘에어포항’은 50인승 이하 규모의 항공기 2대를 도입해 포항을 거점으로 한 김포 및 제주노선 운영을 시작했으며, 향후 인천을 비롯해 울릉공항 개항을 대비해 울릉도까지 연결하는 노선을 계획하고 있다.경북도 주도 내년 3월 지역항공사 설립 추진… 7월까지 에어포항 법인 합병키로광주공항 등 ‘동서 노선’ 개설·울릉공항 거점공항 육성 등 다양한 발전방안 모색포항, 지역발전·일자리창출 ‘두 토끼’ 잡고 북방교류협력 전초기지 자리매김 기대□에어포항의 도전포항시는 지난 2016년 4월, 포항공항 활주로 공사를 마치고 대형항공사들의 취항을 기다렸지만, KTX 개통으로 수요가 줄어들면서 기존 항공사들이 적자를 이유로 운항을 꺼리는 상황에 맞딱트렸다. 이에 포항시는 시 차원에서 지출하고 있는 적자보전금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새로운 지역항공사 설립에 적극 나서게 됐다.포항시가 기존 항공사에 기대지 않고 새로운 지역항공사를 설립한 결정은 사실상 KTX 개통으로 인해 국내선 항공편의 운항횟수나 항공편 이용승객이 크게 줄고 있는 현실을 반영해서다. 하지만 여기에도 해법은 있다. 제주노선의 경우 해마다 폭발적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실제로 한국공항공사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5년도 6월 대비 대구-제주노선의 운항편수와 이용객 수는 각각 11.9%와 20.6%가 증가했다. 2014년 6월에 비해 운항편수는 15.7%, 이용객 수는 35.2%가 늘어난 수치다.국내를 제외한 국제 항공 여객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이는 엔저와 유류할증료 부담 완화에 따른 내국인의 일본관광과 중국인의 국내관광 수요 증가, 그리고 저가항공사(LCC)의 해외 근거리 신규노선과 운항 확대 등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이런 가운데 지역을 기반으로 한 소형항공 사업은 유럽과 미국은 물론 가까운 일본만 보더라도 관광산업 부문을 중심으로 항공수요 창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좌석 수가 50인 이하인 항공기로 운영되는 소형항공사는 제주에어(제주), 에어부산(부산), 이스타젯(전북), 티웨이(서울) 등의 저가항공사(LCC)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다.최근 국내에서도 이러한 소형항공사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지방을 거점으로 한 소형항공사는 에어포항에 이어 지난달 말에 취항한 광주공항 기반의 에어필립이 운항 중에 있고, 인천의 에어 프레미아, 강원지역의 플라이강원, 충북지역의 에어로케이가 취항을 추진하고 있다.이강덕 포항시장은 “증가하는 항공여객 수요에 발맞춰 하늘길을 꾸준히 확대해 포항시민은 물론 인근 경주와 영천, 영덕, 울진 등의 지역민들이 제주와 김포 등으로 가기가 한결 편리해질 것”이라면서 “더 나아가 지방 거점공항 확보를 통해 지방도시간 항공교통망을 구축해 포항공항 활성화를 도모하는 한편, 소형항공사로 시작하지만 이른 시일 안에 저가항공사(LCC)로 회사 규모를 키울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역항공사를 위한 경북도와 포항시의 노력에어포항은 현재의 노선에 이어 인천, 여수, 울릉도, 흑산도 등으로 국내 노선을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또한 향후 중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등 국제노선도 취항한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어, 포항시는 에어포항을 통해 말 그대로 ‘환동해중심도시 포항’으로 도약하는 또 하나의 계기를 마련한다는 방침이다.이런 가운데 경북도가 에어포항의 안정적인 운항과 포항공항의 활성화를 위해 지역 항공사 설립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북도는 포항시와 함께 각각 자본금 20억원을 출자해 내년 3월 지역항공사를 설립하고 7월까지 에어포항 법인과 합병한다는 내용이다.지난 3월, 경북도에 보고된 ‘경상북도 지역항공사 설립 타당성조사 연구용역’ 결과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가 전체 400억원 규모의 자본금 중 10%인 40억원을 출자하면 비용보다 편익이 높아 경제성 확보가 가능한 것으로 분석됐다.출자방식은 지자체가 시설법인을 설립하고 나서 이미 설립된 에어포항을 합병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 지자체가 출자한 항공사 사례로는 제주항공과 에어부산, 이스타항공 등 3곳의 항공사가 있다.이 경우, 경북도와 포항시가 출자하고 에어포항과 합병하게 될 지역항공사는 설립 후 5년간 약 2천446억원의 생산과 약 584억원의 부가가치, 약 574명의 취업 등 경제유발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됐다.다만, 보고서는 출자시점을 에어포항이 국제항공사 면허를 취득해 B737 항공기(189석 규모)의 운영이 가능하게 되거나, 2022년 이후로 예정된 울릉공항이 개항하는 시점이 적절하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에어포항 성공할까에어서울, 에어부산, 제주항공처럼 지역의 이름을 따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항공사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에어포항에 거는 지역의 기대는 크다. 항공업계는 에어포항이 기업의 규모를 키우고 취항 노선을 늘린다면 동해권역은 물론 영남권을 대표하는 항공사로 자리매김하고 지역의 이미지와 브랜드도 크게 선양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특히 지방도시 간의 하늘길을 개척함으로써 지역민의 항공 이용편익을 늘리는 데도 크게 기여하는 한편, 에어포항이 보유한 인프라를 통해 지역발전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포항공항의 시장성을 높이는 데에도 에어포항이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이에 따라 포항시와 포항공항, 그리고 에어포항 등은 향후 지속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KTX와의 차별화를 비롯한 다양한 발전방안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포항공항과 호남의 광주공항 등 동서(東西)를 연결하는 노선의 개설이다.우리나라 영호남의 주요 도시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최소 4시간 이상이 걸리는 육상교통의 불편으로 인해 인적·물적 교류의 장애는 물론 지역화합도 사실상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동서를 잇는 항공노선을 마련하자는 것이다.이와 함께 포항공항은 앞으로 들어서게 될 울릉공항의 거점공항으로 육성하는 한편, 인근에 천년고도 경주와 영일만관광특구 조성에 따른 관광수요를 활용한 활성화 전략 역시 필요할 것이라는 지적이다.이 밖에도 교통약자를 배려하는 서비스 제공과 검색대 확대 등 시설확충, 최적의 항공스케줄 구성 등 항공서비스 경쟁력 강화 등은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다.이강덕 포항시장은 “에어포항은 국제종합물류항만인 영일만항과 함께 포항이 지속발전 가능한 환동해중심도시로 나아가는데 디딤돌이 될 것”이라면서 “이를 바탕으로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의 개최를 계기로 포항이 북방교류협력의 전초기지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데 발 벗고 나서겠다”고 밝혔다./전준혁기자 jhjeo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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