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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ㆍ특집

우리가 상납할거라곤 노루가죽 밖에 없었다오

1423년(세종 5년) 10월 초,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들판을 따라 한 선비가 장기로 유배를 왔다. 바로 그해 9월 26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최윤복(崔閏福)이란 사람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의주 판관으로 있었다.그는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윤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고려말 조선초 경상도 창원 출신 무신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참여한 원종공신(原從功臣)이었다. 그의 친형인 최윤덕(崔閏德)은 꽤 유명하다. 세종 때 김종서와 함께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여진족을 몰아낸 뒤 4군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잇는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선을 확정지은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무인 출신이었지만 정승까지 역임하고 세종으로부터 궤장(나라에서 국가에 유공한 늙은 대신에게 내려 주던 궤와 지팡이)까지 하사받았다. 괜찮은 가문의 엄격하고 인자한 형님 밑에서 자란 최윤복이었지만, 불미스럽게도 그는 ‘뇌물공여’ 사건을 저지르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다.세상 어디든 뇌물이 없는 사회는 없었다.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도 뇌물은 성행했다. 조선시대의 뇌물은 ‘분경(奔競)’과 함께 따라다녔다. ‘분경’이란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추구함’을 가리키는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이다. 즉 뇌물을 들고 권세가의 집으로 찾아가 청탁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관직 사냥이라고 하여 ‘엽관운동(獵官運動)’이라고도 불렀다.조선시대를 연 태조부터 적극적으로 뇌물 타파를 외치며 분경을 없애려고 했다. 태조는 뇌물로 관직을 사고파는 엽관운동이 고려 말부터 성행했던 것을 꼬집으며 이를 없애려 했지만, 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뇌물 수수가 만연했다. 정종(定宗)이 분경을 금지하는 교서(敎書)를 내렸는데도 실효성은 별로 없었다. 태종 때는 김점(金漸)의 뇌물비리가 조선천지를 떠들썩하게 했다.그는 후궁인 숙공궁주((肅恭宮主)의 아버지로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너무 많은 뇌물을 받아 문제를 일으켰다. 여러 고을에서 뇌물을 거둬들인 것은 물론 감형을 원하는 죄수들에게도 뇌물을 요구했다. 북경에서 사신과 함께 돌아오는 상인(商人)들에게는 뇌물을 받아야만 입국을 허락했을 정도였다. 이를 알고 김점을 문책하던 태종은 “숙공궁주가 그대로 궁중에 있으면 공정한 의(義)와 사정(私情)이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며 후궁을 궐 밖으로 내쫓았다. 이후 태종은 분경금지를 법제화한다.하지만 분경은 그 특성상 비밀스럽게 이루어지는지라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들이 한양으로의 출셋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앙 권력자들에게 줄을 대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바쳤던 것이다. 군대 징집이나 세금 면제, 형벌 감형을 청탁하는 뇌물도 많았다. 그렇게 주고받은 뇌물은 보편적으로는 은으로 만든 돈이나 토지문서, 노비 등이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확인해보면 특이한 뇌물도 있다. 더덕, 문어, 노루나 사슴가죽이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개고기나 잡채도 뇌물로 제공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느냐에 따라 뇌물의 종류가 달랐던 것이다.중종 때 김안로(金安老)는 아들 김희(金禧)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하게 되자 왕과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위세가 등등했던 김안로는 개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를 안 이팽수(李彭壽)란 사람은 봉상시(奉常寺:국가제사를 관장하는 관청) 참봉(종9품)으로 있으면서 김안로에게 개고기를 자주 상납했다. 그는 크고 살찐 개를 골라 견적(개고기 구이)을 해서 매번 김안로의 구미를 맞췄다고 한다. 이후 김안로는 그를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임금 비서실의 정7품)에 등용시켜 주었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라 부르며 비아냥거렸다. 가장(家獐)은 ‘삶은 개고기(烹炙犬肉)’를 가리킨다. 결국 이팽수는 ‘개고기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조선왕조실록에 남겼다.이팽수가 개고기 뇌물로 출세했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뜬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진복창(陳復昌)이란 인물이었다. 진복창은 한때 이팽수와 함께 봉상시 주부(정6품)로 근무한 적이 있던 직장동료였다. 그는 이팽수가 한 것처럼 개고기 구이로 김안로의 뜻을 맞추어 온갖 요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가 하면, 매번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자랑삼아 설명했다. 하지만 김안로의 입에는 진복창의 개요리가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김안로는 ‘이팽수의 개고기보다 맛이 없다’는 질책까지 하며 진복창의 청탁은 들어주지 않았다.실록에는 광해군 때의 ‘잡채 판서’ 그리고 ‘더덕 정승’도 기술되어있다. 광해군에게 잡채를 뇌물로 바친 사람은 이충(李沖)이라는 사람이었다. 이충은 갖은 채소를 볶아 만든 잡채를 광해군에게 올렸는데, 왕은 식사 때마다 반드시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곤 했다. 그 덕택에 이충은 호조판서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그가 길에 오가면, 삼척동자도 그를 알아보고 ‘잡채 판서’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그를 만나면 너나없이 침을 뱉고 비루하게 여겼던 것이다.더덕 정승은 더덕으로 좌의정까지 한 한효순(韓孝純)을 일컫는다. 옛날엔 더덕을 모래밭에서 나는 인삼이라고 해서 사삼(沙蔘)이라고 했다. 한효순은 이 더덕으로 꿀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쳐 총애를 입고 정승이 되었다. ‘사삼 정승의 권세가 처음에 중하더니, 잡채 상서의 세력을 당할 자가 없구나’라고 이들을 조롱하는 풍자시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실록에는 세종 때 대사헌이던 신개(申槪)가 강원도 고성 수령 최치(崔値)라는 자로부터 문어 두 마리를 뇌물로 받았다가 구설에 오르자 스스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도 보인다.이처럼 뇌물의 종류는 천차만별이지만, 최윤복이 뇌물로 쓴 물건은 노루 및 사슴가죽과 살코기였다. 조선시대 노루와 사슴고기는 왕실의 각종 제의에 중요한 제물(祭物)로 쓰였다. 사슴고기로 만든 것은 건녹포(乾鹿脯)라 하고, 노루고기로 만든 것은 건장포(乾獐脯)라 한다.최윤복은 이것들을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뇌물로 쓰고, 또 졸곡(卒哭) 전에 포(脯)를 서로 증정하였다는 것이다. 졸곡제사는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내는 것인데, 마침 이때가 태종이 죽고 아직 졸곡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의주목관(義州牧官) 창고에 있던 그 노루와 사슴 고기들은 공물로 받아 둔 것들이었다. 당연히 궁중에 써야할 것들이었는데, 이를 사사로이 뇌물로 제공했으니 사건이 더 커지게 된 것이다.왕실에서 쓰는 포육(脯肉)은 공물로 받는 것 외에도 왕실의 사냥인 강무(講武) 때 잡은 노루와 사슴으로도 마련하였다. 더러는 음식 조리를 담당하는 별사옹(別司饔)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직접 만들게도 하였다. 녹포로 만들지 않은 고기는 소금에 절여 숙성 시킨 녹해를 만들어서 제례에 사용하기도 했다.하지만 최윤복이 이것들을 뇌물로 쓸 세종(世宗)대에는 인구가 늘어나 산을 개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노루와 사슴이 매우 귀했다. 그럼에도 중앙의 각 관사(官司)에서는 사용량이 줄지 않아 지방관들에게 공납을 독촉했다. 이를 조달하지 못해 숫자를 감하거나 제외해달라는 충청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문서는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노루와 사슴 건포(乾脯)를 준비하기 위해 사냥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이 산과 들을 덮고 열흘 동안이나 사냥을 해도 잡은 짐승은 두세 마리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할당량을 조달하지 못하겠으니 공물에서 제외해 달라는 지방수령들의 다급한 상소가 빗발쳤음은 물론이다. 공급이 달렸으므로 궁중의 의료와 시약(施藥)을 관장하는 전의감(典醫監)에 바치는 녹각(鹿角)과 여러 도(道)의 군기(軍器) 장식(粧飾)에 사용되는 사슴뿔 한 척(隻) 값이 면포로는 한 필이 넘었고, 미곡으로는 20여 말(斗)에 달한다고 했다.이렇게 귀한 노루와 사슴고기가 마침 의주목 관아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의주 목사(義州牧使)는 김을신(金乙辛)이었는데, 그도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 생각은 않고 판관과 똑 같이 권력 있는 집과 호세(豪勢)한 곳에 공공연히 뇌물보내기에 급급했던 것이다.의주는 국경지역에 있었으므로 명나라로 드나드는 고관대작들이 반드시 머물고 가는 곳이었다. 관리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이조(吏曹)의 요직자나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정승들이 주로 사신으로 임명되어 이곳을 지나쳤다.이 사건에서 뇌물을 받은 사람은 형조판서 이발(李潑)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수(李隨)였다. 이들은 태종(太宗)이 돌아가신 것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한 부고사(訃告使)와 부사(副使)가 되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목에 들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목사와 판관이 모두 포수(脯脩:얇게 잘라서 말린 고기)를 뇌물로 제공했던 것이다.의금부에서 관리를 파견해서 감찰을 해보니 그동안 김을신이 관청 안의 가죽과 살코기를 뇌물로 쓴 장물(贓物)이 1백 89관이었고, 최윤복이 거들낸 게 13관이나 되었다. 1423년 9월 26일, 의금부에서는 이 사건의 죄책을 물어 김을신을 경상도 안음으로, 최윤복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그 뇌물로 쓴 물건들은 한성부로 하여금 추징하도록 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은 이발(李潑)과 이수(李隨)는 면직되는데 그쳤다. 요즘과 다르게 뇌물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사람을 더 가혹하게 처벌했던 이상한 시대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언제 자신들도 같은 처지가 되어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정자(爲政者)들의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이때 장기로 유배를 온 최윤복은 1년 4개월이 지난 1425년 1월에야 풀려났지만 바로 사망하였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관료 길에 들어서서 탄탄대로를 걷던 그였지만, 후회와 괴로움을 곱씹다가 인생을 마친 것이다. 사망 후인 1425년 11월 20일에야 사면이 된다. 공신의 아들임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뇌물과 청탁으로 권력을 획득하거나 이득을 취하려는 시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한 순간 잘못된 선택들이 후대의 냉혹한 평가를 받고, 역사에 우셋거리로 남아 회자된다는 사실을 이 사건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역사는 미래라고 하지 않았나. 역사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앞날을 예찰(豫察)하라는 귀중한 울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22

계절과 날씨 구애받지 않는 ‘영양 상추’ 대세 등극

더운 여름철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많은 이들이 휴가지에 가서 먹을 음식 메뉴 선정에 고민을 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잠시, 열에 아홉은 삼겹살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삼겹살 곁에는 늘 친구처럼 따라다니는 국민 채소, 상추를 준비하게 된다. 여름철 야외활동 시에는 빠지지 않는 필수 식재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상추도 여름철이 되면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 장마와 기습적인 폭우, 혹은 폭염이 겹치면 채소류의 출하량이 급감하게 되고, 휴가철과 맞물려 수요가 급증하게 되면 상추와 같은 신선채소류의 가격이 올라 ‘금추’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비싼 가격에 판매돼 마트에 들러 상추를 구입할 때면 쉽사리 손이 가지 못하게 된다. 주저함에 상추를 대신해 깻잎에 손이 가려는 찰나 상추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결국 한 손 가득 상추를 구입한 경험, 아마 많은 이들이 겪었을 것이다.이렇듯 상추는 특히 삼겹살과 최고의 궁합을 보인다. 특히 얼마 전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의약품 안전평가원에 따르면 “샐러리, 미나리, 양파, 상추, 계피, 홍차, 딸기 등 식품은 벤조피렌 체내 독성 저감률이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밝혔다. 즉, 삼겹살이나 소고기를 구워 먹을 때 상추나 마늘을 함께 먹으면 조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성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 발표로 삼겹살과 상추의 조합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셈이다.이렇듯 우리 주변의 고깃집에 들리면 어김없이 식탁 위에 자리하거나 젊은 층에서 많이 찾는 햄버거, 샌드위치 사이에도 꼭 들어가 있는 국민채소 상추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덩달아 영양에서 상추를 재배하고 있는 농가들의 손길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영양 상추’의 비결은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리 가까이에서 함께 해 온 국민채소, 상추예로부터 ‘복을 싸 먹는다’해서 육류와 함께 먹는 쌈 채소로 활용된 상추는 우리 역사를 거슬러 문헌에서 쉽게 발견될 정도로 친근하다. 대표적으로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 상추의 역사가 등장하는데 “고려국의 사신이 오면 수(隋)나라 사람들이 채소의 종자를 구하면서 대가를 몹시 후하게 줬다. 그래서 이름을 천금채(千金菜)라고 했다”라고 기록돼 있는데 지금의 상추를 말한다.또한 조선말기 양명학자 이건승(1858∼1924)은 “상추 잎은 손바닥 같고 된 고추장은 엿과 비슷하네. 여기에 현미밥 쌈을 싸 급하게 열 몇 쌈을 삼키니 이미 그릇이 다 비었네. 이것은 입을 속이는 법. 부른 배를 만지고 누웠으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라고 해서 많은 이들이 즐겨먹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최근 도시 농부 100만 시대를 맞아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는 것은 전원을 꿈꾸는 도시인들의 로망에서 벗어나 대세가 됐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파트나 공동주택에 거주하는 도시의 환경에서 작은 텃밭을 가꾸려고 하면 많은 수고와 노력을 들여야 하기에 쉽게 실행에 옮기기 어려움 것이 현실이다.그렇다고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본격적인 도시 농부의 삶을 시작하기에는 많은 부담이 따른다. 그런 어려움을 덜고자 자전거를 보관하거나 빨래를 말리던 베란다를 훌륭한 텃밭으로 개조해 상추며, 오이, 풋고추를 조금씩 키워 나가는 재미를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다.□ 국민 채소 대접을 받는 상추, 여름철엔 더 귀해상추는 재배시기만 지키면 비교적 잘 자라는 작물로 집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재배할 수 있다. 상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 우리나라는 봄, 가을이 상추 재배의 적기이다. 특히 생육기간이 짧고 연작피해가 없어 비닐하우스 시설을 이용하면 사계절 재배가 가능한 품종이다. 그래서 여름재배의 경우는 보통 5월에 파종하고, 6월 상순에 옮겨심기를 한 후 7월 상순부터 수확한다.하지만 여름에는 장마와 무더위, 태풍 등이 가장 상추 재배농가의 큰 근심거리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상추 수요가 급증하지만 재해 발생으로 공급에 차질을 빚어 가격이 상승할 경우 수요가 오히려 급감해 농가의 생산계획도 틀어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특히 생육기에 온도가 높아지면 추대가 생기고 쓴맛이 강해지는데 무더위가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시설재배의 경우 비닐하우스 지붕 위에 차광막 설치로 무더위를 피해보지만 노지 재배의 경우 마땅한 대책이 없어 자칫 기한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열에 약한 상추의 상품성이 떨어져 제 값을 받기가 어려운 고충이 있다.또한 상추는 비가 많이 내리는 장마철엔 수확과 운송 도중에 상하는 경우도 많아 여름 상추는 수확에서 유통까지 시간과 날씨와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도 감내해야 한다.□ ‘영양 상추’ 대세로… 식당에서 인기 상한가우리나라의 상추 생산량은 대략 11∼12만t 정도의 규모이다. 노지에서는 강원도 평창군이나 횡성군, 대구 북구, 충북 홍성군, 부산 기장군 등지에서 크게 재배되고, 시설상추는 주로 대도시 근교인 경기 남양주시, 광주시, 용인시, 이천시나 부산 강서구 등에서 재배되고 있다. 양상추로 통용되는 결구상추는 강원, 전남, 경남, 제주 등 전국에서 고르게 생산되는데 주산지는 남양주시와 하남시 일원을 중심으로, 비가림 하우스에서 연중 생산되는 것이 특징이다.영양군에서는 2018년 기준 노지와 시설상추를 합쳐 약 47㏊에 1천100t 정도 생산하는데 전국 생산량의 1%정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수비면이 45㏊에 700t 정도를 생산하고 있어 영양 상추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다. 수비면이 상추 재배를 많이 하게 된 이유는 상추 재배를 하기에 적합한 450m 이상의 고지대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고랭지 지대처럼 영양군의 다른 읍면보다는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고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의 영향으로 기후가 서늘해, 고온에 취약하며 낮은 온도에서 재배하는데 적합한 상추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져 상추 재배를 하는 농가가 하나씩 늘면서 점차 판로가 확보되고 수익이 크게 늘어 최근 몇 년 사이에 수비면에서는 상추 재배하는 농가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특히 영양의 상추는 계절과 날씨에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생산되어 공급하고 있는데 전문가들은 여름철이면 날씨가 더워 품질을 유지시키기가 어려워 재배를 포기하는 농가가 많은 것을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름철 고온에도 고품질 상추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은 농가들이 그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한 뛰어난 기술력과 노하우 때문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을 잘 견뎌 수확한 영양 상추는 장기간 유통과정에서도 타 지역 상추보다 우수해 통상 수확 후 3∼4일이 지나면 금방 시들어지는 타 지역의 상추와는 달리 영양 상추는 수확 후에도 약 1주 이상 보관을 해도 별 다른 차이가 없어, 입소문을 타고 많은 지역의 업체와 식당에서 구입 문의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에는 수확한 대부분의 상추를 직거래를 통해 납품을 하고 있어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되고, 농가에서는 안심하고 상추 재배에 나서 고수익이 보장되면서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이웃 농가들도 상추 재배에 관심이 높아져 상추 재배를 준비하는 농가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에 농가들은 기존에 납품하던 중소식당 뿐만 아니라 매출 규모가 큰 외식업체나 식품제조업체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해 새로운 판로를 개척함으로써 매출원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상추 재배농가 올해 시세는 좀 더 지켜봐야최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KAMIS)에 따르면 상추(적상추 기준)는 1만6천원∼2만2천원(4㎏)의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한 달 전에 1만3천원대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름 휴가철을 맞아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난해 이맘때에 3만4천원대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추 시세가 많이 하락했지만 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는 전년도 수준까지는 가격 상승 요인이 많지 않아 큰 폭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년도에는 긴 폭염의 지속으로 인한 무더위로 상추 수확량이 급감했지만 올해는 무더위가 덜해 상추 수확량은 최근 평년 생산량 이상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납품을 한 상추 재배농가들에 따르면 대체로 1만2천원∼1만5천원(4㎏)의 가격대를 받고 납품하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수비면의 상추 재배농가가 2배 이상 늘었고, 재해성 피해라고 말할 수 있는 무더위가 덜해 생산량까지 늘어 올해 상추 시세는 크게 높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영양의 상추 재배농가들은 본격적인 상추 출하시기를 맞아 납품시기를 조정하며 보관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이점을 살려 기존의 부산, 울산, 포항 지역뿐만 아니라 대구와 근방 지역으로까지 확대해 늘어난 상추 생산량의 납품량을 늘리고 최대한의 가격 경쟁력도 유지할 계획이다.□ 영양에 상추 재배를 확대하기 위해서는현재 영양군에서 상추 재배 농가에 지원할 수 있는 보조사업은 ‘특산물 포장재 지원사업’뿐이다. 영양군은 전통적으로 고추와 사과를 많이 재배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상추와 같은 신선채소류 재배 농가가 많지 않아 이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실정이다.수비면에서 상추를 재배하는 농가들은 보다 많은 보조사업의 지원을 바라고 있지만 아직 현실적으로 영양군에는 상추 농가가 많지 않아 지원을 확대하는 데는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특산물 포장재 사업은 납품 시 포장재 단체명을 명시하거나 지원하는 포장 매수가 한정돼 있어 상추 재배농가에서는 자비를 들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 농가들 입장에서도 상추재배 작목반을 조직하는 방안을 통해 공동 출하·납품 방식으로 상추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안에 나서고 있다. 또한 영양군에서도 영양 상추의 경쟁력이 확인된 만큼 보조사업 지원 분야를 늘려 상추 재배농가의 부담을 덜어 줄 예정이다.□ 상추를 많이 먹으면 계속 잠이 온다 ?상추는 주로 샐러드나 쌈 채소, 샐러드, 겉절이, 비빔밥 등 재료로 활용된다. 특히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해 빈혈 환자에게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상추를 많이 먹으면 잠이 온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일까? 상추 줄기에서 나오는 우윳빛 즙액에 락투세린과 락투신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진통과 최면 효과가 있어 상추를 많이 먹으면 실제 잠이 오게 된다고 한다. 이는 옛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다산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에서 “상추는 먹으면 잠을 부르지만 빼놓지 않고 먹어야 할 채소”라고 했다. 거꾸로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이는 일도 있었다. 옥담 이응희(1579∼1651)는 ‘옥담사집’에서 “상추는 들밥을 내갈 때나 손님 대접할 때 늘 준비한다. 상추 때문에 잠을 줄일 수 있는데 이른 새벽에 파종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해 상추가 잠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최근 영양군은 고추와 사과라는 전통적인 농산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물 재배로 농가 수익 창출에 노력하고 있다. 특히 배추, 상추, 수박, 아로니아 등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등 다품종 농가 고소득 창출로 영양군 민선 7기가 지향하고 있는 농가소득 5천만 시대를 연다는 계획이다.오도창 군수는 “경제활동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을 정도로 영양군은 농업에 기반을 둔 지역으로 농업경쟁력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적인 대세인 만큼 고부가가치 농산물 생산 유통을 구축하고 스마트영농과 더불어 청년 창업농 지원 등 경쟁력 있는 농업 육성으로 영양군 농업인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 하겠다”며 “영양의 지형적 이점을 살려 ‘영양 상추’ 처럼 강점을 보일 수 있는 농산물 재배로 농가 고소득 창출에 기여하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장유수기자

2019-07-21

야경과 불꽃과 아귀찜이 있는 포항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포항’이라고 발음하면 군대에서 덮고 자던 모‘포’가 떠오르고, 어린 시절 마당 장독대에서 햇살과 잠자리와 배추흰나비를 불러 모으던 ‘항’아리가 생각나 이내 따뜻해진다. 포항은 내게 따스한 항구 도시, 매년 겨울마다 몸과 마음을 쉬러 즐겨 찾는 여행지다. 주로 겨울 바다의 진객인 볼락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12월부터 2월까지는 왕복 750㎞의 장거리 운전도 마다않고 거의 매주 드나들 정도다.겨울 포항에 오면 늘 정해진 코스대로 움직인다. 새벽에 도착해 방파제에서 낚시하다 동해가 쏘아올린 황홀한 해돋이를 감상한다. 볼락을 꽤 잡았으니 구룡포에서 모리국수로 속을 얼큰하게 채우거나 죽도시장 장기식당에 가 소머리곰탕을 먹는다. 낮 동안엔 영일대 해수욕장의 볕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쩡쩡 얼어붙은 오어사 계곡 구경을 가거나 구룡포에 있는 호미곶온천랜드에서 낮잠을 잔다. 때로는 ‘철규분식’ 찐빵이나 죽도시장 호떡 군것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해거름에 다시 낚시를 하고, 밤엔 볼락 뼈회와 매운탕, 시장에서 산 대게 몇 마리 곁들여 만찬을 즐기는 식이다.그러고 보니 겨울 아닌 계절에 포항을 찾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영덕 강구항에서 출발해 장사항을 지나 포항 화진해수욕장에 접어드니 공기 빛깔부터 다른 여름 포항이 생경했다. 제철 농어의 은빛 지느러미 같은 아침 햇살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모공에 푸른 물이 들었다. 항구의 낮은 지붕들 사이로 언뜻 언뜻 비치는 초록을 보며 나는 저 무성한 신록이 내연산의 것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여름 포항의 첫 방문지는 내연산으로 정했다. 거기 보경사(寶鏡寺)가 있기 때문이다.보경사는 내연산의 관문이다. 신라 진평왕 때 승려 지명이 창건했다. 지명이 중국 진나라에서 유학할 때 어느 도인으로부터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받았는데, 그걸 이곳 내연산 연못에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웠다는 연기설화가 있다. 사방이 맑은 거울처럼 반짝이는 여름 아침, 보경사 일주문으로 들어서면서 복잡하고 괴로운 속세와 잠시 이별할 때 연기설화가 하나의 은유로 다가왔다. 거울은 곧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과 감정, 욕망들을 묻어버리는 순간 내면에서부터 평온함이 돋아난다. 외연(外延)이 아닌 내연(內延)의 세계로 향해 가는 걸음을 다람쥐와 청설모, 오색딱따구리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규모가 큰 보경사 경내, 단아하고 정갈하게 배치된 가람들 사이를 걸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그동안 볼락 잡는다고 포항에 와 얼마나 많은 살생을 저질렀던가? 범종각에 걸린 커다란 목어(木魚)를 보며 속이 뜨끔했다. 두 손을 모아 참회하고 볼락들의 극락왕생과 윤회를 빌었다. 5m 높이의 보경사 오층석탑 앞에서 그 웅장함에 또 한 번 기가 죽는다. 1층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올린 석탑의 네 귀퉁이는 하늘을 향해 약간 들려 있는데, 겸허히 그러나 확고하게 지상 위의 천상을 소망하는 모양새다. 돌 모서리마다 햇살이 투명한 연꽃을 피우고 있었다. 다시 경내를 산책하다가 이번엔 유명한 두 그루의 탱자나무와 만났다. 한 그루는 사찰 동쪽 흙돌담 앞에 있고, 다른 한 그루는 서쪽 빈터에 서 있다. 서쪽에 있는 것은 수령이 400년 넘은 고목이다. 탱자나무가 굽이굽이 뻗어 오르며, 마치 고흐의 ‘사이프러스’처럼 무성한 초록 불꽃을 공중으로 댕겨 놓는 오전 아홉시,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만났다. 더위가 벌써 오셨다.더위를 피해 내연산의 서늘한 품속을 파고들어 본다. 청하골, 내연골, 연산골로 불리는 보경사 계곡이 땀을 식혀준다. 내연산에는 12개의 폭포가 있다. 이 폭포들은 모두 제 모습을 스스로 먼저 내보이는 일이 없다. 깊은 숲길을 헤치고 찾아온 방문객에게만 앞섶을 풀어 빛나는 살결을 보여준다. 어디선가 우레 같은 물소리가 들리는데 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물소리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숨어사는 건 내 취미, 시원한 알몸 다 내놓고 나는 외로움을 노래처럼 불러. 언뜻 네 눈길이 나를 한번 붙잡았을 뿐, 나는 여기 왔다 간 적도 없어 내가 거기 있더라고 말하지 마, 그 순간 내 몸은 사라지고, 나는 햇빛 속에서 하얗게 타오르지”(이경교, ‘숨은 폭포’)라고. 귀가 먼저 달려간 저기 계곡 상류, 나란히 떨어져 내리는 두 물줄기가 보인다. 상생폭포다. 두 갈래 물이 몸을 합치는 폭포 아래 소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새카만 물빛, 쳐다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옛날에 어느 기생과 선비가 서로 사랑했는데, 이룰 수 없는 연을 비관하여 절벽에서 함께 폭포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상생폭포 위 절벽을 기화대(妓花臺), 물이 받치는 소를 기화담(妓花潭)이라고 부르는 연유를 알았다.“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천양희, ‘직소포에 들다’)다. 물소리를 쫓아 마음이 환해진 나는 목욕하는 선녀를 훔쳐보던 나뭇꾼처럼 보현폭포와 삼보폭포의 살빛을 겨우 엿볼 뿐이다. 두 ‘숨은 폭포’를 지나 소금강 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포항 바다가, 가까이는 기암절벽 위에 놓인 누각 선일대(仙逸臺)가 보인다. 골짜기가 멀리까지 손을 뻗어 바닷바람을 잡아당겼다. 등줄기에는 더운 땀이 흐르지만 마음에는 차고 맑은 이슬이 맺혔으니, 이만하면 됐다. 산을 내려가도 좋다.두 시간 남짓 산행에 꽤 지쳤다. 복날이 가까워선지 보양식에 구미가 당긴다. 하산길에 닭고기와 막걸리 생각부터 하는 나 같은 얼치기 등산객은 기를 쓰고 산에 가도 다이어트는커녕 살이 포동포동 오른다. 흥해읍 달전리의 ‘달전식당’은 내연산의 아담한 폭포처럼 ‘숨은’ 맛집이다. 방송이나 인터넷에 소개된 적 없어 아는 사람만 아는 집, 단골 장사만 해도 충분하다. 꽃나무를 가꾼 마당의 화사함이 내 허기에도 꽃물을 들인다. 단순한 배고픔이 미식에의 열망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마루 아래 신발을 벗어두고 방에 들면 한옥의 고즈넉함이 고단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주무른다. 퍼질러져 낮잠이나 자고 싶지만, 목은 이색의 후손이므로 체통을 지켰다. 잠시 후, 미리 주문해둔 옻닭백숙이 상에 올랐다. 밑반찬 담음새에 먼저 감탄할 수밖에. 초승달 모양 그릇에 담긴 장아찌와 김치를 바라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푹 삶은 옻닭 위에 부추를 수북하게 얹은 백숙을 한 입 뜯어 먹을 때마다 팔뚝과 종아리에 바로 근육이 붙는 느낌이 들었는데, 걷어붙인 셔츠 소매 단추가 터졌으니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석한 음식평론가 황광해 선생께서는 이 집 김치 맛에 반해 백숙이 다 사라진 후에도 김치를 향한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여름 입가심엔 역시 아이스커피가 제일이다. 칠포와 월포 바다 사이에는 젊은 여행객들에게 소문난 카페가 있다. 흥해읍 오도리의 ‘오도리오도시’는 그리스 산토리니의 타르베나(그리스 전통 레스토랑)를 연상시킨다. 하얀 외벽에 커다란 통유리가 눈길을 끄는 이곳 카페의 매력은 2층 루프탑에서 눈앞에 펼쳐진 흥해 바다를 보며 마시는 아이스커피 한 잔의 여유에 있다. 오도리오도시에서는 아이스커피를 머그잔이나 종이컵이 아닌 투명 페트 용기에 담아 캔 뚜껑으로 밀봉해 제공한다. 캔 뚜껑 손잡이를 따는 순간 톡, 하는 청량감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얼음을 이리저리 굴리며 커피를 마시는데, 곁에선 연인들의 사진 찍기 놀이가 한창이다. 동해안의 핫플레이스 카페들은 모두 젊은 연인들을 불러 모으지만 이곳이 특히 유명하다고 들었다. 보아하니 남녀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동안 수평선에 나란히 꽁꽁 묶여 ‘운명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전망 좋은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게 미안해서, 반쯤 마신 커피를 들고 일어섰다. 내가 일어서자마자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커플이 부리나케 자리에 앉았다.죽도시장에 들러 멸치와 디포리, 미역을 엄마 집에 택배 부치고, 호떡 한 개 집어 먹으니 어느덧 해질녘이 가깝다. 영일대 선착장으로 갔다. 영일만 크루즈는 평일에는 낮 2시에만 운항하지만 토요일에는 저녁 7시30분, ‘야경 불꽃 음악 크루즈’라는 프로그램으로 야간 운항을 하고 있다. 90분 동안 크루즈 유람선을 타고 포항시의 야경과 함께 화려한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어 연인, 가족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미리 예매한 승선권을 제시하고 크루즈에 올랐다. 저기 포스코의 불빛들이 영일만 물결 위에 춤을 추는 동안 여름밤의 바닷바람은 재즈 음악처럼 온몸을 나른하게 했다. 잠시 후 영일만 크루즈의 하이라이트인 불꽃 쇼가 펼쳐졌다. 펑펑, 폭음과 함께 커다란 불꽃들이 포항 밤하늘에 활짝 피었다. 부풀어 오른 달은 불꽃과 바다 사이에 육중한 몸을 끼워 넣고, 어둠마다 빛이 날아가 박혀 눈부신 야경을 이루는 저녁, 나는 화려한 불빛과 차분한 물빛이 음악 속에 반짝이는 포항을 오래 바라보았다.그런데 크루즈 위에서 내 마음은 엉뚱하게도 물회와 아귀찜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저녁 메뉴 고르는 것만큼 어려운 결정도 없다. 갈피를 못 잡는 나를 음식평론가 황광해 선생께서 당신이 직접 검증한 ‘착한 식당’으로 이끌었다. 죽도동의 ‘부산아구찜’은 싱싱한 생아귀만 사용하는데, 양념이 과하지 않고 맛을 내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해산물과 야채만 곁들여 맛이 깔끔하다. 아귀찜과 아귀간수육을 주문했다. 아귀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황광해 선생께서 예찬한 물김치를 한 술 떠먹으니 시원하고 아삭아삭한 새콤달콤함이 입 안에 폭포를 열어젖혔다. 침샘이 활짝 열려 온몸이 음식 맞을 준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아귀찜과 아귀간수육이 상에 올랐다. 아귀 살 한 점에 영일만 바다가 혀끝에서 파도치고, 아귀 간 한 점에 오색 불꽃이 입 안에 팡팡 터지는 행복,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노래 제목을 빌리지 않더라도 포항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야경과 불꽃과 아귀찜으로 여름 포항의 낭만은 완성된다. 밤늦도록 창밖 글썽이는 불빛을 보며 나는 스스로 밤이 되고 바다가 되다가, 영일만이 머리맡에 띄워 보내는 파도를 베고 누워 소라고둥처럼 적막한 잠에 들었다. 잠들기 전, 여름 포항에 자주 오게 되리라는 예감이 발끝에서부터 쇄골까지 부드러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시인 이병철

2019-07-21

풍류정신의 ‘멋·한·삶’·각각의 개성 융합한 ‘한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다

‘풍류도’라는 철학·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련했던 신라의 화랑들. 우리에겐 그들을 바라보는 선입견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문학작품과 영화에서 묘사되는 화랑은 그 유형이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신라가 멈춤 없이 발전하고 인근 국가들과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청년 리더인 화랑이 존재한다. 그들은 왕을 충성으로 섬기는 사군이충(事君以忠)의 정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잊지 않았고, 전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개로 무장한 강위력한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다.”지난 시절. 정통성과 합법성이 부족했던 독재 정권은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킬 필요성이 있었고, 황산벌 전투(660년)의 불리한 여건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전세(戰勢)를 뒤집은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 등을 ‘10대 애국 소년’으로 부각시키고자 했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자면 20세기 중후반 한국 소설에 등장하는 화랑의 모습도 이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이쯤에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신라의 청년 지도자들은 모두 ‘전투하는 기계(?)’에 불과했을까? 화랑이 ‘용맹’과 ‘애국심’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화랑을 지도했던 이념인 풍류도의 소프트웨어는 대체 뭘까?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16년 발행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의문에 답한다. 책은 이렇게 쓰고 있다.◆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해야 진정한 화랑‘화랑도의 교육 방법, 수련 방법은 철저하게 조화적·중용적 인간상에 맞추어졌다. 삼국 정립기에 창설되고 조직화했던 만큼 화랑도가 무(武)의 수련에 치중하였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에 못지않게 문(文)을 중시하여 문무겸전한 인재를 길러냈다. 또 인간의 정신과 육신을 함께 건전하고, 조화 있고,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야 된다는 정신을 이 땅에 뿌리 내렸다.’이 설명처럼 화랑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용맹한 애국심’ 하나만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신적 성숙과 학문에 매진하는 태도 역시 화랑이라면 가져야 할 기본이었다. 화랑의 생활양식과 교육 방법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기도 하고, 가악(歌樂)으로써 서로 즐기기도 하며,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아주 멀어도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를 보고 그들의 사정(邪正·그릇된 것과 올바른 것)을 알아서 그 가운데 좋은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였다.”김부식의 진술처럼 화랑의 이념적 근간이었던 풍류도는 육체와 정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인간을 지향하고 있었다. ‘도의로써 연마한다’는 것이 이성적 영역의 학습이라면, ‘가악으로써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감성적 범주에 해당된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이 신라의 화랑들을 ‘점잖고 조숙하며 피 뜨거운 청년’으로 만들었던 게 아닐까? 앞서 말한 ‘신라의 학문과 교육·과학·기술’은 이런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통해서다.“화랑들은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목숨을 초개(草芥)처럼 버리면서도, 인간 본래의 정감과 순수성을 잘 갈고 닦았기 때문에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화랑들은 자연환경이 빼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가악으로써 정감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토를 순례하면서 애국심을 높이고 개인의 정감을 문학과 예술로 승화시켰다.”◆ 풍류도는 오늘날 ‘한류(韓流)’의 뿌리?풍류도, 풍월도, 화랑도를 주제로 한 논문 여러 편을 검토하면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당수 역사학자들은 풍류도를 지도 이념으로 성장했던 화랑을 ‘흥이 넘치고 멋을 알았던 신라 청년들’로 묘사하고 있었다.이는 ‘풍류’라는 단어를 ‘신명’ 혹은, ‘신바람’이라 바꿔 사용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학계의 일부 주장과도 맞물려 있다. 이처럼 신라의 화랑도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탁월한 줄타기’를 보여준 선진적인 조직체였다.풍류도와 화랑도의 운영 체계를 살피다가 매우 흥미로운 논문 하나를 찾아냈다. 철학자 권상우가 2007년 ‘동서철학연구’에 발표한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이다. 권상우는 풍류사상의 특징을 멋, 한, 삶으로 파악했고 이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부연한다.“풍류의 ‘멋’에는 외형적인 멋과 내면적인 멋이 있다. 외형적인 멋은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현상이며, 내면적인 멋은 창의적이고 역동적이면서 개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한’은 여러 개성들을 어우르는 특징이 있음을 설명한다.또, 풍류에서의 ‘삶’이란 내세적이고 초월적인 가치관이기보다는 현실의 생활세계를 강조하고 있다.”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권상우는 1990년대 일본,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돼 현재는 미국과 유럽까지 전파된 한국 대중문화의 유행 현상, 즉 ‘한류’의 뿌리를 ‘풍류정신(풍류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논문 ‘한류의 정체성과 풍류정신’은 한류가 발생할 수 있었던 요인을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기법, 열정, 활력, 다양성, 개성 등에서 찾고 있으며, 이런 특징을 한국인의 문화적 기질로 파악하고 있다.“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연출자, 배우, 관객이 하나로 어우러져 제작되는 경우가 많고, 내용에 있어서도 독자성과 우수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어우러짐’이 한과 삶을 강조하는 풍류문화의 특징과 연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재 신채호 “화랑은 우리 민족의 얼”풍류도와 화랑이 가졌던 위상을 높이 평가한 사학자는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신채호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 그리고 부흥운동까지를 담아낸 저서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화랑을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대적 문장으로 풀어서 인용한다.“화랑은 신라 발흥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후세에 한(漢)문화가 발호해 사대주의파의 사상과 언론이 사회의 인심과 풍속, 학술계를 지배할 때 가까스로 ‘조선을 조선되게’ 한 정신이다. 어느 시기 이후 화랑의 말과 글이 연기처럼 사라져 비록 직접적으로 감화를 받은 사람은 드물지만, 그 유풍(遺風·후세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간접적으로라도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화랑의 역사를 모르고 조선사(朝鮮史)를 말하는 것은 골을 빼고 사람의 정신을 찾는 것처럼 우매한 일이다.”권상우는 단재의 문장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신채호 선생은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민족의 얼을 화랑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화랑은 인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정체성으로서의 ‘화랑도’ 또는 ‘풍류도’를 말한다.” 이에 더불어 권상우는 풍류정신을 한국 문화의 원형이라 추정한다.앞서 말했듯 풍류정신의 특징은 멋, 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창의적인 개성을 갖추고, 각각의 개성을 융합시켜 동시대가 처한 현실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려 했던 한류. 그 거센 바람이 처음으로 불기 시작한 때인 1990년대 중반. 일본과 중국, 베트남의 대중들은 한국 문화콘텐츠의 힘을 ‘명확한 테마’ ‘넘치는 활력’ ‘격렬한 율동’ ‘뜨거운 열정’ ‘개성의 강조’ 등에서 찾는다고 입을 모았다.당시 동남아의 젊은이들은 “미소년, 미소녀로 구성된 그룹이 빠른 음악에 맞춰 역동적인 춤을 추며 폭발적인 에너지와 힘을 드러내는 건 다른 어떤 나라의 가수나 그룹도 흉내 내기 어렵다”며 열광했다. 이는 고대의 풍류도가 가졌던 ‘감성의 힘’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현대 사회에서 발휘된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조금은 자의적 해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채호가 말한 바 ‘조선을 조선되게 하는 우리의 얼’인 풍류도(화랑도)가 세계 속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건 ‘한국인의 정신’이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가정(假定)이 근거 빈약한 자만이거나, 쇼비니즘(Chauvinism)이 돼서는 곤란하겠지만.◆ 풍류도 정신에선 ‘페미니즘’의 향기도….한류의 진화 과정을 이야기하자면 ‘보이 밴드(Boy band)’의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걸 그룹(Girl group)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의 여성 아이돌(Idol)들은 이 분야에서만큼은 일찌감치 양성평등을 이뤄냈다.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적지 않은 한국 여성 가수와 배우들이 아시아 전역 소녀들의 ‘롤 모델’이 된 형국인 것.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풍류도가 ‘여성 존중 의식까지 담고 있었다’는 학설은 독자들에게 좋은 차원에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이와 관련해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에는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신라 사회의 여성 존중 의식은 (유·불·선이 융합된) 고유의 신앙 풍류도 정신과 짝하고 있다. 풍류도를 실현한 구체적 표상인 화랑제도에서도 구성원의 시작은 소녀들인 ‘원화(源花)’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자. 이후 소년 화랑들로 조직이 변화되었을 때도 그들에게 화장을 시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게 한 것은 풍류도의 정신이 여성적 세계를 지향하는 심미적 영성(靈性)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는데 부족함이 없다.”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풍류도’는 파고들수록 그 오묘한 내적 시스템에 대한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신라의 통치 이념과 종교적 기반을 닦은 이들은 이미 1천500년 전 21세기의 ‘한류 열풍’과 바뀐 시대의 주류로 자리한 ‘페미니즘’을 예언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풍류도는 ‘미래학’의 범주에도 포함될 수 있을까?/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8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 종택, 그 지난한 세월과 마주하다

경북도 23개 시·군과 대구엔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관광지, 특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과 즐길거리, 맛봐야 할 요리와 특색 있는 음식점이 가득하다. 본지는 오늘부터 시작되는 기획연재 ‘경북을 하다’를 통해 기자와 맛칼럼니스트가 직접 체험하고 맛본 대구·경북의 ‘숨겨진 보물들’을 소개한다.‘종택 체험’ 100배 즐기기안동의 모든 종택과 고택이 관광객을 위해 대문을 열고 내부를 공개하는 건 아니다. 종택에서의 숙박도 마찬가지. 집 자체가 문화재급 기념물인 경우가 많기에 훼손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란 것이 개방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의 사생활 침해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 자칫 사람들의 실수로 종택의 유물이 파손될 경우 이를 보수·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형편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안동의 종손들이 자신의 집이 민박으로 사용되는 걸 저어하는 상황이 충분히 이해된다. 종택은 수백 년의 역사가 축적된 귀한 곳이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잘 경우엔 보통의 숙박업소에서 머무를 때와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아래 몇 가지를 소개한다.▲젊은 층이 종택에서의 숙박을 결정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게 있다. “내부에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있나요?” 답을 말하자면 각각의 종택마다 다르다. 농암종택 긍구당엔 방 안쪽에 폭 1.5m 정도의 조그만 화장실이 있다. 샤워도 가능하다. 하지만, 화장실과 샤워장이 외부에 있는 종택이라도 걱정할 건 없다. 대부분 현대식 시설로 개조해 말끔하게 관리되고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재미를 느꼈다는 관광객도 있다.▲건물 앞에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표지판이 세워진 경우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종택에서의 예의다.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살림살이 공간인 안채는 함부로 출입하지 않는 게 ‘점잖은 손님’으로 대접받는 노하우.▲종택과 고택은 단순히 돈 때문에 숙박객을 받지는 않는다. 종손과 종부의 자긍심에 상처를 주는 언행을 하지 않아야함은 당연하다. 여기에 비싸지 않은 조그만 선물 하나쯤 마련해 종부에게 슬쩍 건네는 센스를 발휘한다면, 아침 밥상의 반찬이 보다 화려해질 수도 있다. 종택을 지키는 이들도, 찾는 이들도 ‘주고받는 정’을 아는 똑같은 사람이 아닌가.▲마지막으로 자신이 묵을 종택이나 고택에 관련된 자료를 미리 읽어둔다면 안동에서의 여행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농암종택 별당 ‘긍구당’서 특별한 하룻밤을…풀벌레와 이름 모를 새의 울음만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섞여 적요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 가득한 도시에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할 농밀한 암청색 어둠. “진짜 밤은 검지 않고 푸르다”고 노래한 기형도의 시(詩)가 떠올랐다. 16세기 조선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한 농암종택(聾巖宗宅)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였다. 시내에서 30분만 차를 몰면 일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 속을 달리게 된다는 사실이 일생 번잡한 곳에서만 살아온 기자에겐 낯설고 생경했다.안동시 외곽에 자리한 농암종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이현보(1467~1555)의 숨결이 살아있는 곳이다. 연산군 앞에서도 ‘바른 소리’를 할 만큼 호방담대 했고, ‘어부가’와 ‘효빈가’ 등의 시조도 썼다. 안동부사와 성주목사로 봉직할 때는 청렴함을 인정받았고, 탁월한 문장으로 자연을 노래한 문인으로도 이름 높았다.종택을 지키는 이성원 종손은 잘 마른 수건 두 장을 긍구당(肯構堂) 마루에 놓아두고 일찍 잠을 청했나 보다. 예부터 집을 찾은 손님을 맞는 별당으로 사용된 긍구당은 경북유형문화재 제32호다. 문화재에서 잠드는 드문 체험에 마음이 설렜다. 깨끗하게 정돈된 보송보송한 침구를 보니 이곳이 손님을 귀하게 모시던 반가(班家)라는 게 새삼 느껴졌다.밝아온 다음날 아침. 종택과 분강서원, 강각, 예일당, 명농당, 농암사당까지를 천천히 돌아봤다. 옮겨와 복원한 건물들임에도 고풍스런 분위기와 드러나는 미적 감각은 만들어진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종택 앞을 흐르는 낙동강과 깎아 세운 것 같은 청량산 적벽이 밀려온 새벽안개와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했다. 농암이 정2품 벼슬인 ‘지중추부사’를 마다하고 고향에 머무르고자 한 이유가 짐작되는 순간이었다.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종손·종부와 마주했다. 그들은 종가와 종손으로서의 삶을 조용조용 들려줬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더없이 온화했다. 바로 그때다. 농암종택 사랑채 기와에서 부서지는 햇살에 놀란 까치 한 마리가 청옥빛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전화: 054-843-1202 홈페이지: http://www.nongam.com‘불천위’ 모신 학봉종택엔 보물지정 문화재만 500여점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15대 종손 김종길 씨 목소리는 겸손과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학봉을 포함한 선조들의 행적을 들려주던 종손은 “날이 밝으면 운장각과 사당의 불천위(不遷位)를 꼭 보라”고 조언했다.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위치한 학봉종택(鶴峯宗宅)은 들어서는 입구부터가 여타 고택과 달랐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와 나무, 거기에 기묘한 형상의 수석까지 즐비한 정원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안채와 사랑채, 별채와 사당, 학봉기념관과 유물전시관인 운장각까지 어디를 돌아봐도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권력 앞에 굴종치 않는 태도를 견지했기에 ‘조정의 호랑이’로 불렸던 학봉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한 탓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파직됐다. 이후 명예 회복을 허락한 왕의 명령으로 관군을 독려하고, 의병을 규합하는 경상도 초유사의 역할을 수행하다 전쟁 중 숨졌다. 학봉의 13대 종손인 김용한 씨는 파락호(破落戶)로 자신을 위장하면서까지 만주 독립군에게 거금을 보내는 용기를 보여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독립운동가.기자가 묵었던 풍뢰헌(風雷軒)은 학봉종택의 별채다. 초여름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음에도 바람이 자유롭게 오가는 한옥 특유의 구조 때문인지 새벽엔 이불을 덮어야 할 정도로 잠자리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종부가 차려준 다과상에 오른 다식은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예뻤다.묵직한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운장각엔 학봉의 친필 원고인 ‘경연일기’ ‘해사록’을 비롯해 ‘고려사절요’ ‘사기’ 등의 오래된 책과 왕의 명령서인 교서, 민화, 벼루 등의 유물이 가득했다. “이 건물 안에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 503점이 있다”는 게 김종길 종손의 설명.학봉종택 사당에선 난생처음 불천위를 눈앞에서 확인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인격 모두에서 유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의 위패인 불천위는 영원히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모셔 후손들이 제사 지내게 된다.학봉종택 불천위 제사에서 사용한다는 울향(蔚香). 그 내음이 아직 셔츠 깃에 남아있는 듯하다.전화: 054-852-2087 홈페이지: http://www.hakbong.co.kr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가 추천하는 ‘안동의 고택’ 임청각·의성 김씨 종택·수졸당·지례예술촌종택을 포함한 문화재 보호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안동문화지킴이 김호태 대표는 꼭 방문해야 할 안동의 고택으로 임청각, 의성 김씨 종택, 수졸당, 지례예술촌(지촌종택) 등을 꼽았다.임청각은 문재인 대통령 방문 이후 더욱 유명해졌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이곳은 ‘독립운동의 산실’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일제강점기 철도 부설로 철거된 건물의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다. 지척엔 ‘법흥사지 칠층전탑’과 탑동종택이 자리했다. 탑동종택은 현재는 개방하지 않고 있다.의성 김씨 종택이 자리한 임하면 내앞마을은 의성 김씨들의 집성촌.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도 500년을 꿋꿋이 자리를 지킨 의성 김씨 종택 역시 지금은 보수 중이다. 내앞마을에선 중요민속문화재 제267호인 귀봉종택과 독립운동가 김대락이 건축한 ‘백하구려(白下舊廬)’도 만날 수 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도 내앞마을에 위치했다.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의 종택인 수졸당은 종부가 만드는 건진국수 맛으로 유명하다. 처마 밑에서 시래기가 말라가는 풍경이 정겨웠다.젊은이들 사이에서 ‘인생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소’로 회자되는 지례예술촌엔 지촌 김방걸의 종택이 있다. 임하호의 푸른 물빛과 고택의 예스러움이 어우러진 풍광이 기가 막힌다.도산면 퇴계종택은 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34칸 한옥인 지금의 건물은 퇴계 이황의 13대 후손인 이충호가 192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 우측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 있다. 차로 5분 거리엔 도산서원이 자리했다. 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건립됐다.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연구했던 도산서당 영역과 그의 덕행을 기리는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뉜다.서후면 경당종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쓴 장계향의 친정이다. 지난해 장성진 종손와 권순 종부가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면서 종가의 음식을 맛보려는 손님들이 부쩍 늘었다. 팔순의 종부가 가져다준 식혜 한 잔이 더위를 시원스레 날려줬다.안동 여행에 나섰다면 풍천면 하회마을도 빼놓을 수 없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 제414호. 제자와 자손들이 서애의 유덕을 기려 지었다. 대문에 붙은 ‘國泰民安(국태민안)’의 서체가 미려했다. ‘하회마을의 양심적인 부자’로 존경받은 북촌댁의 정식 당호는 화경당. 석류나무, 모과나무, 탱자나무가 사이좋게 늘어선 정원이 인상적이다. 현재는 화재 위험 등으로 개방하지 않고 있기에 숙박은 불가능하다.이외에도 하회마을엔 양오당, 염행당, 양진당, 하동고택, 작천고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서애가 ‘징비록(懲毖錄)’을 쓴 옥연정사도 하회마을에 있다. 마을 입구에서 비포장길을 10여 분 달리면 서애와 그의 아들 류진을 배향한 병산서원이 나타난다. 만대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풍경이 아름답다.이밖에도 안동엔 미처 소개하지 못한 종택과 고택이 적지 않다. 관련된 정보가 궁금하다면 안동시청이 운영하는 문화관광 홈페이지(http://www.tourandong.com/main.htm)가 도움이 될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7

검소하지만 누추하지는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헛제사밥은 최고의 한식이다. 헛제사밥은 ‘가짜 제삿밥’이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음식은, 제사 모시고 손님 맞는 일의 중심이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면 “차린 것은 없으나 많이 드시라”고 말한다. 겸양이다. 주인으로서는 최대한 차린 밥상이다. 제사도 마찬가지. “차린 것 없으나 정성으로 여기시고, 흠향(歆饗)하시라”고 말한다. 역시 후손의 겸양일 뿐이다. 햇과일, 햇곡식, 가장 좋은 음식을 차린다.국가의 최고 음식은 종묘 제사상 음식이다. 궁중 조상이 최고의 제사상을 받는다. 국가의 최고 손님은 외국 사절이다. 중국, 왜, 오키나와 등의 사신에게 국가는 최고의 밥상을 차린다. 만찬(晩餐)이다. 국빈만찬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접빈객’의 음식이다.헛제사밥을 두고, “선비들이 맛있는 음식을 해 먹으면서 이웃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제사 모신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는 엉터리다. 조선의 선비, 유교, 한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조선의 사대부는 숨기고, 속이면서 구복(口腹)을 구하지 않았다. 제사는 엄중하다. 이웃에게 날짜를 속일 수 없었고, 속이지도 않았다. 한동네가 통째로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혀 있었다. ‘내 집안의 제삿날’은 마을이 죄다 알고 있다. 제사를 핑계로 맛있는 음식을 장만한다? 불가능하다.“차린 것 없으나 정성으로 드시라”헛제사밥이 안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남 진주, 밀양, 경북 상주, 대구 등에도 있었다. 오래전 대도시들이다. 향교가 있고, 벼슬아치, 선비, 반가들이 있었다. 제사를 모셨으니 헛제사밥이 있었다. 전통적인 제사를 오랫동안 고집한 안동의 헛제사밥이 남았을 뿐이다. 경북 안동에는 지금도 ‘불천위(不遷位)제사’가 많다. 높이 기릴 선조를 모시는 제사다. 불천위제사는, 몇 대가 흐르더라도 위패를 내리지 않고 계속 모시는 제사다.헛제사밥은 제사상 정도로 호화로운, 일상의 밥상이다. 민간에서는 오래전부터 헛제사밥을 먹었다. 제사상은 아니되, 제사상처럼 호화로웠다. 식재료가 비싸고 호화로웠다는 뜻이 아니다. 그 정성이 놀라웠다. 재료는 일상에서 흔하게 보는 것들이었다. 차린 것은 변변치 않더라도 ‘정성을 보고 드시라’는 음식이다.1980년대 안동댐 건너편에 관광단지가 생겼다. ‘안동관광촌’이다. 몇몇 음식점들이 문을 열었다. 안동 고춧가루 식혜(食醯), 간고등어 등을 내놓는 가게들이 자리 잡았다. 그중 헛제사밥 집도 있었다. 월영교 부근 ‘까치구멍집’의 서정애 대표는 “안동시의 추천으로 관광촌에 시어머님이 헛제사밥 집을 열었다”고 전한다. 오래지 않아 서 대표는 시어머니로부터 ‘까치구멍집’을 물려받았다. 가게를 물려받을 때 시어머니가 했던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한다. “번거롭더라도 음식 만드는 과정을 줄이지 마라. 헛제사밥은 편하게 만드는 음식이 아니다. 재료를 쉽게 바꾸지 마라. 음식 맛은 정성이다.”안동을 대표하는 음식인 헛제사밥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다. 인건비, 나물값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올랐다. 그래도 재료, 인건비 모두 줄이거나 바꾸지 못한다. 더하여 ‘안동사람’들은 헛제사밥 맛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한 숟가락만 먹어보면 바로 알아차린다. 어린 시절부터 일상으로 먹었던, 익숙한 맛이기 때문이다.헛제사밥의 특징 중 하나는 ‘나물 비빔밥’이다. 생채가 아니라 숙채(熟菜)다. 숙채는 말린 나물을 물에 불린 후 다시 삶고 양념을 더한 것이다. 말리는 과정에서 나물은 숙성된 맛을 더한다. 도라지, 고사리, 콩나물, 무나물, 시금치 등이 나물의 재료다. 간고등어도 있고, 북어 보푸라기도 놓는다. ‘상어 돔베고기’, 문어도 빠트릴 수 없다. 산적(散炙)과 배추전 등 각종 전(煎)도 주요 품목이다. 중심은 밥과 국 그리고 탕(湯)이다. 탕은 고기, 무, 다시마 등이 재료의 모두다. 양념을 하지 않는 으뜸 국물, ‘대갱(大羹)’이다.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한식의 길이고, 최고의 한식인 제사 음식이다.원조의 위엄 ‘맛50년, 헛제사밥’과 ‘까치구멍집’안동댐 건너편 관광촌의 헛제사밥 전문점들은 2000년 무렵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두 집이 원조, 유명 가게다. ‘맛50년, 헛제사밥집’과 ‘까치구멍집’이다. ‘맛50년, 헛제사밥집’이 한두 해 앞선다. 음식은 대동소이하다. 밥을 비벼보면 ‘맛50년, 헛제사밥집’의 비빔밥은 물기가 더 있다. 잘 비벼진다. 개인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갈린다.고춧가루나 고추장은 사용하지 않는다. 많은 손님이 고추장을 원하니 달라고 하면 내놓는다. 헛제사밥, 나물 비빔밥의 양념은 참깨 정도를 더한 간장이다. 고추장, 고춧가루는 제사상에도 놓지 않았다. 육회와 고추장을 더한 비빔밥은 우리 시대에 시작된 음식이다.헛제사밥상에는 안동사람들이 ‘톱 반찬’이라고 부르는 ‘반찬 상’이 하나 더 놓인다. ‘톱 반찬’의 시작은 음복상(飮福床)이라고 추정한다. 제사가 끝나면 제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밥상을 내놓는다. ‘봉제사’ 후 ‘접빈객’이다. 한식은 독상(獨床)이다. 혼자서 밥상을 받는다. 자연스레 생선, 고기, 전 등을 잘게 잘라서 놓는다. 문제는 그릇이다. 그릇이 귀하던 시절, 큰 그릇에 여러 가지 반찬을 모았다. 마치 ‘밥상(床)처럼’ 그릇 모양을 만들었다. 다른 그릇보다 높다. 그릇 테두리도 일반적인 그릇과 달리, 마치 밥상 같다. ‘톱 상’에는 대략 아홉 가지 반찬을 놓는다. 전 세 종류와 고기, 달걀, 생선, 두부 등의 다섯 가지다. 자반고등어, ‘상어 돔베’ 고기는 빠지지 않는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7-17

생갈비인 듯, 양념갈비인 듯… 식도락가들의 입맛 사로잡은

갈비는 두 부분이다. 갈빗살과 갈비뼈다. 뼈에 작은 고기 토막이 붙어 있다.안동 홈플러스(구 안동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골목에 10여 곳의 ‘안동한우, 갈비’ 전문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공통점은 숯불을 사용하고, 대부분 뼈와 살코기 부분을 분리하여 내놓는다는 점이다.가격은 낮고 고기는 싱싱하다. ‘접착갈비’는 없다. 덧대서 붙이지 않으니 갈비살이 모두 짧다. 갈비뼈에 우둔살을 붙이는 엉터리는 없다.가게마다 차이점도 있다. 살코기를 발라내고 얼마쯤의 고기(?)가 붙어 있는 뼈를 취급하는 방식이 다르다. 살이 조금 붙은 뼈에 된장 물을 풀고, 우거지 등을 넣은 다음 끓인 ‘갈비우거지탕’을 내놓는 집이 있고, 뼈에 버섯, 채소, 달고 매운 양념를 더해서 ‘갈비뼈 조림(찜)’을 내놓는 집도 있다. 몇몇 가게들은 탕과 찜을 동시에 내놓는다. 어느 것이 더 좋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개취’다.이것은 양념갈비인가, 생갈비인가?다른 지역 갈비, 갈비 음식과 안동 갈비의 큰 차이점은 양념 갈비다.관광객들은 “안동의 양념갈비가 생갈비와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에 놀란다. 양념갈비를 주문하고 고기를 받아든 다음, “어, 우리는 양념갈비 주문했는데요”라고 되묻는 경우도 많다. 대부분 양념갈비는 간장 등의 조미액에 푹 담근 다음 내놓는다. 안동의 양념갈비는 겉모양이 생갈비와 흡사하다. 주문을 받은 후, 약한 양념으로 바로 버무린다. 마늘 등을 더한 흔적은 있지만 물기가 거의 없다. 생갈비라고 오인하는 이유다.맛은 아무래도 양념갈비가 생갈비보다 강하다. 고기 특유의 맛을 원하면 생갈비를, 잘 조미한 강한 맛을 원하면 양념갈비를 고르면 된다.‘구서울갈비’는 이 지역의 노포로 알려져 있다. 인근의 ‘동부숯불갈비’ ‘시골갈비’ ‘구서울갈비’ ‘거창숯불갈비’ 등도 권할 만한 안동갈비 전문점들이다.양·가격·부위·품질 속일 수 없이 신선한 고기로 승부‘안동한우’ 브랜드는 탄탄하다. 가격이 높지 않으니 지역 주민들도 자주 찾는다. 고기의 양, 가격, 부위, 품질을 속이기는 힘들다. 신선한 고기를 사용한다. 가게를 사고 팔거나, 가게에서 일하던 이들이 나가서 인근에서 창업을 했다. 음식이 비슷한 이유다. 골목 안에 제법 큰 규모의 주차장을 공유하며, 10여 곳의 가게들이 오순도순 영업한다. 취향대로 고르면 된다.안동시 길안면의 ‘백두한우’는 안동갈비가 얼마쯤 ‘진화’했다. 육가공 공장에서 지육(枝肉, 큰 덩어리 고기)을 구해서 직접 육가공 공정을 거친다. 가격은 낮아지고 신선하다. 일부는 식육점에서 팔고, 일부는 식당에서 내놓는다. 식육식당이다. 이 집의 ‘옥수수불판’이 재미있다. 불판 곁에 옥수수를 소복이 넣어 두었다. 옥수수는 저절로 불 위로 떨어진다. 옥수수 태운 향이 고기에 단맛을 더한다.안동 시내의 ‘갈비둥지’는 쇠고기가 아니라 돼지고기 전문점이다. 외지인 대구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고기 문화가 발달한 안동에서 외지 브랜드가 뿌리를 내린 경우다. 안동에서의 업력이 이미 20년이다. 가격이 싸고 음식은 수준급이다.미슐랭이 선택한 크림치즈의 명가 빵집 ‘맘모스 제과’전국적으로 유명한 안동의 대표 빵집. 1974년 창업했다. 창업 초기, 현재의 인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이제, 블로거들은 군산 ‘이성당’, 대전 ‘성심당’과 더불어 ‘전국 3대 빵집’으로 손꼽는다.(누가 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빵은 두 종류다.‘식사 빵’과 단맛이 강한 ‘일본식 빵’이다. 식사 빵은 서구인들의 식사용이다. 달지 않다. 고기, 채소, 버터, 치즈, 단맛의 잼 등을 더한 다음 먹는다. 일본식 빵은 달다. 주로 간식용이다.‘맘모스제과’의 대표적인 빵은 ‘크림치즈빵’이다. 맛이 달다. ‘미슐랭가이드-블루가이드’에 소개되었다.    /음식평론가 황광해

2019-07-17

손에 잡힐 듯한 세체다봉의 날카로운 정수리가 눈앞에

대한산악연맹 경북도연맹(회장 김유복·경북산악연맹)은 지난달 26일부터 9일간의 일정으로 세계 3대 트레킹코스 중 하나인 이탈리아 북부알프스지역 돌로미티 산군 일대를 트레킹했다.경북산악연맹은 매년 연례적으로 해외 명산을 선정해 트레킹과 원정 등반을 하면서 세계적인 산군에 대한 정보를 얻고 연맹발전을 꾀하고 있다. 올해는 김유복 회장을 비롯, 13명의 회원이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돌로미티 산군 트레킹을 안전하게 마쳤다. 김유복 회장의 돌로미티 산군 트레킹 인상기를 세차례로 나눠싣는다.오랜 망설임 끝에 결정한 ‘2019 경북산악연맹 이탈리아 돌로미티(Dolomtes)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경북산악연맹에서 매년 실시하는 해외 명산 트레킹사업으로 2019년도 대상지를 세계 명품 트레킹코스인 이탈리아 동북부 알프스지역에 있는 돌로미티 산군(山群)을 택하게 되었다.지난달 26일, 인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편으로 이탈리아 ‘베네치아’까지 무려 11시간40분이 소요되는 장거리 비행에 13명 대원들이 무척 힘들었지만 새로운 미지(未知)의 세계를 향하는 눈망울들은 영롱하게 빛난다.한국과 시차가 7시간이나 되어 아직도 한낮인 오후 2시 30분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국제공항에 당도했다.그리 크지 않는 공항에서 짐을 찾아 버스에 오르니 유럽에 온 게 실감난다. 젊고 잘 생긴 ‘아이엘’이라는 이름의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가 멋져 보이는 것도 이국(異國)의 첫 모습 이었다.첫날 목적지인 돌로미티 지역 작은 산간마을 ‘산타 크리스티나’까지 4시간여를 가야한다. 외곽지 곧은길 양편으로 포도나무 밭이 넓게 펼쳐지고 드문드문 지어진 그림 같은 집들이 전형적인 유럽 풍경을 아름답게 꾸민다.차창 밖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버스 내에서 알리는 바깥 기온이 35도나 되는 한여름의 이탈리아가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가는 도중 휴게소가 별도로 없어 호텔과 레스토랑을 겸하는 곳에 주유소도 있고 쉴만한 장소도 있어 들렀다. 유럽에서의 화장실은 거의가 유료(有料)라고 알고 왔지만 여기는 무료다. 그런데 특이한 게 남자화장실에 소변기가 따로 없어 잠깐 난감한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바깥 날씨 탓에 진한 에스프레소커피에 시원한 생수를 타서 마신다.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곧장 달려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 쪽으로 접어드니 구불구불 굴곡진 도로가 연이어 지고 일행을 태운 버스는 운전하는 사람과 장단을 맞추며 매끄럽게 오른다.차창너머로 돌로미티 암봉(岩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였고 하얀 눈으로 뒤덮힌 고산(高山)의 모습에 가슴이 설렌다. 돌로미티는 이탈리아 북동쪽 오스트리아 국경지역 산악지대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이탈리아로 병합된 ‘남(南)티롤 알프스지역’으로 ‘이탈리안 알프스’로 불리며 이탈리아 ‘트렌티토 알토 아디제’ 자치주로 분리된 곳이다.18세기 이 산맥의 광물을 탐사했던 프랑스 광물학자 ‘데오다 그라터 돌로미외(Deodat Gratet de Dolomieu)’이름에서 유래 되었다는 정설(定說)과 백운암(돌로마이트 : Dolomite)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말도 있는 3천m 이상 고봉이 18개나 자리하고 무수한 직벽의 암봉과 빙하, 호수 등 총면적 5천500㎢의 거대한 기암절벽들이 있는 바위산군(山群)으로 전 세계 트레커들과 암벽등반 애호가들에게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이다.돌로미티는 백운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지각변동과 침식, 빙하작용 등으로 깎이고 조각되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풍광과 아름다움이 지질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된 곳으로 스위스 태생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건축물’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가히 ‘신(神)이 만든 조각품’이라는 칭송을 듣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걸작품이다.돌로미티는 이탈리아 언어 표현이고 ‘돌로미테’는 독일식 표현이라 이번 트레킹기(記)에는 ‘돌로미티’로 표기한다.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돌로미티에 빠져들고 있음을 알린다.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아찔한 암벽들이 우뚝우뚝 쏟아 난다. 멀리 보이는 만년설에 둘러싸인 고봉과 아래쪽 산허리에 무성한 녹색 침엽수림이 조화를 이뤄 장관을 연출한다. 이미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의 파노라마가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어 감탄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환상의 기암절벽들이 그야말로 조각품처럼 서 있고 ‘아이엘’의 버스가 그 속을 헤집고 들어간다.가쁘게 오르는 고갯마루를 지나 시야에 들어오는 작은 마을에는 그림 같은 예배당이 영락없이 동네 한복판에 우뚝 서 있고 목조건물들이 동화책속 그림처럼 여기저기 한낮에 졸고 있다. 창문마다 갖가지 꽃들이 가지런히 얼굴을 내밀고 불쑥 찾아온 이방인들을 반갑게 맞는다. 바람처럼 지나가면 또 다시 산길이 나오고 또 작은 산동네가 예배당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우리를 마중하는듯하다. 동네 한 쪽에 공동묘지가 있고 비석 아래 꽃들이 놓여 있는 또 다른 풍경도 볼 수 있다.돌로미티산군 파노라마를 보며 그림 같은 산동네의 풍경에 취해 목적지인 ‘산타 크리스티나(St Christina. 1428m)’까지 4시간을 어떻게 왔는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후 7시 30분이 되었는데도 대낮같이 훤하다.‘산타 크리스티나’는 돌로미티 산군중 ‘발 가르데나(Val Gardena)’지역에 위치한 꽤 큰 산마을이다. 우리 일행이 트레킹하는 돌로미티 하이라이트 코스(돌로미티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하는)의 시작점으로 제법 건물도 많고 사람들 왕래도 많다. ‘산타 크리스티나’의 ‘4성급+S’의 레벨이 붙은 ‘호텔 티롤(Hotel Tyrol)’에 도착했다. 내부가 고풍스런 목조 내장제로 만들어져 첫인상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 더욱 마음에 든다. 깨끗한 실내에서도 목재로 장식된 문이며 벽체, 침대 등 은은한 나무향이 감도는 아늑한 호텔방이 또 한 번 감동을 준다. 늦은 저녁을 위해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들어오기 전에 보아둔 ‘미쉐린(MICHELIN) 2019’라는 표지판 등급이 실감날 정도로 멋진 레스토랑 내부에 내심 놀랐지만 그 격에 맞는 요리들이 나온다. 이탈리아 요리가 세계적인 것은 알지만 처음대하는 요리들에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른다. 한 가지 흠이라면 음식이 너무 짜다는데 있다.필자로서는 짠 이탈리아 음식 때문에 엄청난 고행(苦行)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그때는 느끼지 못한 게 이번 트레킹에서의 가장 큰 실수(?)라 할 수 있었다.내일부터 시작될 트레킹 일정과 거의 하루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자고 이곳까지 온 피로 때문에 식사자리를 일찍 마치고 다들 방으로 돌려보냈다. 밤하늘의 별과 하얗게 높이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감싸고 있는 산골마을 ‘산타 크리스티나’의 밤풍경을 감상하고 들어가 잠을 청하지만 제대로 잠이 오지 않는다. 함께한 내자(內子)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여러 일들을 뒤돌아보며 뒤척이다 ‘이탈리아 알프스 돌로미티’에서의 첫 밤으로 스르르 빠져들었다.이튿날(6월 27일) 이른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일찍 일어났다.돌로미티 트레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첫날, 상큼한 공기를 들이키며 산골마을의 새벽을 살폈다. 일출과 함께 황금색으로 변하는 암봉과 푸른 하늘, 싱싱한 침엽수림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조용한 주택가 창문마다 예쁜 꽃들이 이방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아침이다. 갓 구운 빵과 신선한 야채, 달콤한 과일 등으로 아침을 먹고 오늘의 코스 ‘세체다(Seceda) 트레킹’을 위해 세체다 케이블카 탑승장이 있는 옆 동네 ‘오르티세이(Ortisei)’로 이동한다. 탑승장 가는 길에 보이는 리조트 수영장에서 이른 아침에도 여유롭게 수영을 하며 즐기는 모습에 유럽인들의 여유로운 삶이 엿보이고 동네 어귀에 만들어 놓은 예수그리스도상(像)이 이탈리아가 카톨릭 성지(聖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일행들도 경건한 마음으로 무사 산행을 빌기도 한다.두 번에 걸쳐 케이블카를 번갈아 타고 오르는 ‘세체다 후테’ 바로 앞이 고도 2천518m 세체다봉(峰)이다. ‘후테(Hutte)’는 ‘쉼터 또는 산장’이란 뜻으로 쓰인다. 케이블카에서 함께 오른 이탈리안 가족이 연신 웃으며 눈길을 준다. 일곱 살, 세 살 정도의 아들, 딸을 데리고 돌로미티 연봉을 오르는 부부가 퍽이나 행복해 보인다. 세체다 산장에서 보는 ‘오들(Odle)’ 산군의 엄청난 바위산 경관에 눈이 휘둥그레지지만 360도 돌아가며 펼쳐지는 파노라마 풍경을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산장 아래 넓게 펼쳐진 초원에 피어난 야생화가 시원한 바람과 함께 우리를 어서 오라 손짓한다.지천에 핀 노란 금영화(캘리포니아 양귀비), 민들레, 할미꽃 등 야생화 천국이 따로 없는 듯 어마어마한 바위 봉우리와 조화를 이루며 돌로미티 환상적 풍광의 세계로 빠지게 한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전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각 대원들의 안전 산행을 비는 단체촬영으로 파이팅을 외친다.드디어 돌로미티 트레킹 첫 걸음을 뗀다. 조금은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지천에 깔린 야생화 꽃길을 따라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선다. 손에 잡힐 듯 세체다봉의 날카로운 정수리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아래쪽으로 난 트레일을 따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쬐는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나아가는 자유분방한 모습의 유럽 트레커들 속에 우리도 점점 빠져들고 있다./김유복 경북산악연맹 회장

2019-07-15

오늘보다 내일이 나은 영주만들기 앞장

‘힐링중심, 행복영주’를 시정 목표로 다져온 영주시가 민선 7기 한 해 동안 연속성 있게 시정을 추진하면서 구체적인 성과와 결실을 맺고 있다. 장욱현 영주시장은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후보지 확정과 하이테크베어링 시험평가센터 건립 등 지역의 신성장 동력을 마련하는 데 공을 들였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유불문화란 특수성을 살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산업의 중심지로 성장시켜 나갔다. 현재 추진 중인 중앙선복선 전철화 사업과 테마파크 조성사업을 비롯한 추진형 사업 등을 통해 지역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취임 후 1년 간 어떤 사업에 주력했나?△새로운 100년을 위한 새로운 먹을거리를 만드는데 주력했다.지난 1년은 지역을 새롭게 이끌어 나갈 마중물이 될 사업이 가시적인 성과를 낸 한 해였다. 영주시가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후보지로 확정됐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건설 사업도 점차 가속도를 내고 있다.중부권 동서내륙철도 건설사업은 충남, 충북, 경북 등 3개 도와 서산, 영주 등 12개 시군에 걸쳐 총 330km를 연결하는 대규모 사업이다.서해안 신산업벨트와 동해안 관광벨트 연결로 국토의 균형발전은 물론 산업과 관광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게 됐다.또, 중앙선 복선전철화에 따라 영주역사 신축과 CY장 건립이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수도권과의 이동시간을 1시간 10분대로 단축할 수 있게 된다.-일자리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 다양한 사업들을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다.△영주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조성과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상당한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다.영주365시장(선비골문화시장) 육성과 신영주 번개시장 주차타워신축 등 전통시장의 환경개선을 통한 경쟁력 확보와 영주사랑 상품권을 발행하는 등 소상공인의 안정적 경영지원도 주요 성과의 하나로 꼽힌다. 바로마켓과 영주 한우 전문식당이 인천 문학구장에서 문을 열었다.이같은 새로운 유통체계 구축이 지역 농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특히 수출기업협의회와 통산전담조직을 구성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다. 다양한 판로 확충도 영주농업의 경쟁력을 강화했다.또, 농기계 임대사업을 확대하고 외국인 계절근로자 도입을 통해 부족한 농촌일손을 채웠다.영주사과, 영주 한우, 풍기인삼 등 영주시 3대 전략품목의 발전을 위해 품목별 혁신단을 운영한 것도 영주농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문화 인프라 확보에도 두각을 낸 한 해로 보이는데….△영주 근대역사체험관과 국내 최고의 목조건물인 한그린 목조관을 준공하는 등 지역의 특성을 살린 문화 인프라 확보에도 두각을 낸 한 해였다.세계 명상센터 참불선원과 한국명상수련원 건립을 협약했다. 자연과 문화가 어우러진 힐링의 중심도시를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도 차근차근 추진되고 있다.순흥면과 단산면 일원에 건립 중인 한국문화테마파크와 무섬 지리문화경관 조성,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 조성 등 성과를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힐링 하는 치유관광 도시를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부석사·소수서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의미는.△첨단산업은 물론, 지역의 강점이자 굴뚝 없는 공장이라 불리는 관광산업을 정비해 부석사, 소수서원 등 세계문화유산 도시에 걸 맞는 대한민국 대표 관광지를 만드는데 힘써 나갈 것이다.세계유산이란 그 나라의 정체성과 다양한 문화적 요소, 국민적 감성, 생활상,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유교와 불교를 숭상하는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문화가 공존하는 영주시의 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화엄종찰 부석사와 성리학을 기틀 한 영남학파의 중심이자 유고 문화의 중심인 소수서원의 세계유산 등재는 학술적, 역사적 배경 등 중요성이 더해지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이런 부분을 기반해 국내외적인 다양한 홍보와 이미지 전달을 통해 대한민국 대표 관광산업의 중심 도시로 이끌어 나가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한국 선비정신의 중심도시 건설 관련 성과도 들려달라.△유교문화발전과 선비문화 확산을 위해 성균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전국에서 최초로 대한민국 선비대상 조례와 선비도시조성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는 등 선비정신의 계승과 발전을 위한 기반도 마련했다.선비정신의 실천과 인성교육 강화는 민선 6기에 이어 민선 7기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해 온 정책 가운데 하나다. 시는 선비도시의 맥을 이어나가기 위해 전국 최초로 선비인성교육을 정규교과로 채택해 지역의 초중고에서 선비 인성교육을 실시하도록 하는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비정신의 중심도시를 만들었다. 또 국립인성교육원 설립유치, 코레일 인재개발원 건립 등 인성교육의 요람을 만들기 위한 계획도 성공적으로 추진 중이다.-복지와 안전분야에 대한 성과는.△영주적십자병원 개원과 치매 안심센터 개소, 생활 SOC 장애인 생활밀착형 국민체육센터 공모선정 등을 통해 사회안전망이 구축되고 있다. 다 함께 돌봄 센터 개소와 유아 숲 체험원 운영 등 경북 최초 유니세프 아동친화도시답게 아동을 위한 다양한 정책도 추진 중이다. 영주시민 안전보험과 자전거보험 가입을 통해 시민들이 불의의 재난안전사고로부터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해 원칙이 지켜지는 안전특별시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시민 중심 행정조직 개편, 시민과 소통만남의 날, 수요행복민원실, 월요 야간 민원실 운영, 민원처리기간 1/2단축 등 현장행정을 강화하고 소통행정을 펼치는 등 시민대상 행정서비스의 질을 높였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은 시민들의 시정참여를 확대하고 관심도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향후 각오도 들려 달라.△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오늘 보다 내일이 나은 영주를 만들기 위해 시민과 공무원 구분 없이 하나로 힘을 모아 ‘힐링중심, 행복영주’ 건설에 최선을 다 하겠다.영주/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

2019-07-15

임금 위에 상왕(上王)이 있다는 줄도 모르고…

홍여방의 장기현 유배가 결정된 날이 1420년 4월 26일이었으니, 여기 도착한 날짜는 아마 그해 5월 초순경이었을 것이다.대사헌은 사헌부의 수장(首長)으로 종2품이다. 지금으로 치면 검찰총장 격이다. 역할로 본다면 수사권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재의 검찰보다는 훨씬 권력이 막강했고, 간여하는 범위도 넓었다. 우선 정사를 토론하고 모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현재의 감사원의 기능이다. 또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며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업무도 사헌부의 일이었다.사헌부 관리는 대관(臺官)이라고 한다. 길에서 대관을 보면 왕족이든 대신(大臣)이든 먼저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위세는 대단했다. 이들은 국왕에 맞서 탄핵하고 간쟁도 할 수 있었다. 때문에 다른 관원의 모범이 돼야 했고, 요직이었기에 명망 있는 자들이 천거되었다.이런 사헌부의 최고 책임자인 홍여방(洪汝方)이 장기에 온 것이니 얼마나 떠들썩했겠나. 그냥 온 게 아니라 충의위(忠義衛)의 적을 삭제당하고 대사헌 직첩도 뺏긴 채였다. 충의위란 1418년(세종 즉위년) 개국(開國)·정사(定社)·좌명(佐命)의 3공신 자손들이 주로 소속되도록 만들어진 특수층에 대한 일종의 우대 기관이었다. 그 좋은 신분까지 삭탈당하고 먼 극변지역인 장기까지 유배온 것으로 봐서는 중앙에서 무슨 큰 일이 있긴 있었나보다. 도대체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여기까지 왔을까.1418년 8월, 태종은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며 방탕한 생활을 하던 장남 양녕대군의 세자자격을 박탈하고 경기도 광주로 물러나 살게 했다. 대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그리고 얼마 뒤 자신은 왕위에서 물러나고 충녕대군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줬는데, 이렇게 즉위한 임금이 그 유명한 세종이다.하지만 세종은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아버지 태종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 이유는 태종이 물러난 임금, 즉 상왕(上王)이 되었음에도 군사권과 국가 대사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종이 일찌감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이유는 자신이 살아있을 때 아들 세종이 마음껏 꿈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지지기반과 주변 환경들을 다져주기 위함이었다.그리고 얼마 뒤, 강상인의 옥사가 일어났다. 병조참판이었으나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사실상 병조의 수장행세를 했던 강상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태종이 분명 군사권은 자신이 맡는다고 선언했었으나 강상인은 태종을 무시하고 세종에게 군무(軍務)를 보고하고 일을 처리했다. 태종은 이를 지켜보다 그를 괘씸한 놈이라며 국문을 한 뒤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이 급작스럽고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 지나간 후, 태종은 개국공신 심덕부의 아들이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이 마음에 걸렸다. 고심 끝에 강상인의 사건을 다시 꺼내들었다. 강상인과 심온을 억지로 연루시킨 것이다. 심온이 영의정 신분으로 명나라 사은사로 떠날 때 요란했던 전별식이 빌미가 되었다. 강상인을 국문하면서 그의 입에서 ‘심온’이란 두 글자가 나오도록 고문을 했고,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강상인은 역모죄로 몰려 이번에는 사지가 찢겨지는 형벌에 처해졌다. 일단 처리된 사건은 다시 다루지 않는다는 법의 일반원칙인 ‘일사부재리 원칙(一事不再理原則)’도 그때는 통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영문도 모르고 명나라에서 돌아온 심온은 역모죄의 주범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었다. 강상인, 심온 등과 친한 이관 등 여러 관리들이 참형에 처해졌고, 그 일족들은 처형되거나 연좌제에 걸려 변방으로 유배를 갔다. 부인과 딸들이 관노가 된 것도 부지기수다.태종이 이런 일을 저지른 이유는 간단했다. 왕의 외척과 공신들이 권력을 농단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세력들을 미리 제거해준 것이다. 덕분에 세종은 손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성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공신세력과 외척세력들이 제거되었음에도 태종은 상왕의 신분으로 4년간 줄곧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며 국정을 감독했다. 그러면서 틈나는 대로 강원도 철원으로 나가 사냥을 즐겼다. 철원은 일찍부터 태종이 강무장(講武場)으로 자주 이용했던 곳이다. 강무장이란 임금이 사냥을 하거나 군대를 훈련시키던 무예 연마장을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세종 두 왕이 모두 21회에 걸쳐 97일간 철원 고석정(孤石亭) 일대에서 강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태종은 아들 세종뿐 아니라 때로는 손자인 문종을 대동하고 자주 이곳을 방문하였고, 강무를 마치고는 위로연을 베풀었다고 한다.사건은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1420년 4월에 일어났다. 모내기 철에 가뭄이 극심하여 농심마저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필 이때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이 철원으로 강무를 겸해서 나들이를 가겠다는 것이었다. 말이 나들이이지 임금보다 더 높은 상왕의 행차이므로 당연히 이를 호위하는 군사들과 시종들이 따라야 했다. 뿐만 아니라 강무에 필요한 철원평야 일대의 전답과 농민들이 동원되어야하는 성가신 행사였다.이때 정사를 토론하고 벼슬아치를 규찰하는 기능을 갖고 있던 사헌부 수장 홍여방이 나섰다. 그는 장령 송인산(宋仁山)·지평 허척(許倜)·집의 박서생(朴瑞生)·장령 정연(鄭淵) 등의 관리들을 모아 놓고 ‘상왕이 지금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가뭄에 군사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선다’며 그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병조의 영사(兵曹令史) 안유인(安有仁)이란 자를 직접 불러서 상왕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동향을 파악하라고 했다.홍여방은 조사를 마친 뒤, 허척을 시켜 임금(세종)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 상왕의 행차를 금지시키라고 했다. 사태를 파악한 세종은 태종에게 신하들의 의견이 이러하니 행동을 자제해 주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부탁을 하게 된다. 세종으로부터 사실상 ‘강무를 금지하라’ 는 명령을 들은 태종은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대노했다. 태종은 ‘그런 일이 있으면 엄연히 내 아들(세종)이나 대신, 또는 병조에 알려 나에게 전달하게 할 것이지, 상왕인 나를 마치 일반 신하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죄를 규탄하는 것처럼 절차를 취하며 임금에게 그런 행위를 못하게 하도록 재촉까지 한단 말인가’라며 길길이 뛰었다.태종도 강무 나들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뭄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들판에는 아직 파종도 하지 않아 농작물 피해도 없었으며, 마침 최근에 적은 비도 내렸다. 모든 응접 절차에는 농민들을 배제시켰기 때문에 그들에게 번거로운 폐가 없을 뿐더러, 군사는 단지 백 명을 거느리고 갈 작정이었다. 곡식이 없는 빈 땅에 3∼4일간 가서 사냥이나 즐기다 오려고 했던 것인데, 대신들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사헌이란 자가 자신의 허락 없이 병조의 관리들을 불러다 동태까지 조사를 했다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를 임금에게까지 고자질하여 문제를 삼으려는 행동까지 취했으니 상왕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고 생각했다.이 무렵 태종은 공신세력과 외척세력에 대해서는 심하게 알레르기를 갖고 있던 시기였다. 더군다나 병권에 대해서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털끝만큼도 허용하지 않을 시점에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었다. 화가 단단히 난 태종은 자신의 거둥을 제지한 신하들을 국문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결국 홍여방·송인산·허척·박서생과 정연 등은 모두 의금부 감옥에 하옥되었다. 의금부에서는 홍여방 등이 직접 병조의 서리를 불러 기탄없이 상왕의 거동을 취조하듯 물었으니,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예절에 벗어나는 것이고, 또 상왕을 시위하는 군사들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그 마음에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며 추달을 한 후, 이들 모두에게 대역죄를 적용했다.1420년 4월 26일 의금부에서는 홍여방을 경상도 장기현으로, 서생은 상주로, 송인산은 익산으로, 정연은 진산으로, 허척은 영천으로 각각 귀양을 보냈다. 이런 처분이 있었음에도 사간원에서는 이들에게 더 큰 처벌을 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진다.홍여방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그는 수양대군의 며느리인 인수대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판서를 지낸 홍길민(洪吉旻)이다. 홍길민은 이성계를 추대하며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훈된 개국공신이다.태종은 개국공신 집안인 홍여방을 홧김에 먼 바닷가 장기까지 내쫓고 나니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병조참의로 있으면서 왕에게 직언을 잘 하던 원숙(元肅)을 불러 ‘홍여방이 개국공신의 아들인데도 공신적(功臣籍)을 삭제당하고 멀리 귀양 가 있으니 노모가 아들을 무척 보고 싶어 한다. 진실로 불쌍한 일이다’ 며 세종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세종은 상왕의 내심을 읽고 1420년 9월 5일 선지(宣旨)를 내렸다. 이 조치에 따라 홍여방은 그해 9월 중순경에 장기에서 경기도 장단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422년 4월 10일 풀려난다. 그때 충의위(忠義衛)에 환속되고 직첩도 돌려받게 된다. 유배기간 중에도 그는 연주정(戀主亭)을 지어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을 표시하기도 했다.직첩을 돌려받고 얼마 후 그는 한성부윤이 되었다. 2년 후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한 번 장기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시와 술을 좋아하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나 직언을 잘하였다고 한다.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에 언양(彦陽)을 노래한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언양현조에 실려 있다. 또 청송을 순시할 때 찬경루(讚慶樓)에 올라 세종의 비 소헌왕후를 생각하며 기문을 지어 걸기도 했다. 그러나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시인 1430년, 임금께 예물(禮物)로 바치는 문어가 정결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기도 한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가 문어하나 때문에 관직을 잃었던 이유는, 당시 문어는 중국 황제에게도 바치고 따로 무역도 했으며, 임금이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는 중요한 진상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는 3년 후 다시 복귀되어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는 등 탄탄대로를 걷다가 1438년 술에 중독되어 죽었다고 한다. 홍여방의 죽음에 대해서도 조선왕조실록은 놓치지 않고 ‘이조판서 홍여방 졸기’를 기록해 두었다. 그가 죽자 세종은 조회와 시장(市場)을 정지하고 문상을 했으며, 부의를 보냈다. 시호를 문량(文良)으로 내려주었다.한편, 홍여방이 장기로 유배를 왔을 때는 그보다 2년 먼저 와서 터를 잡고 있던 유배객이 있었다. 바로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곳에 와 있던 이원강이었다. 이원강은 강상인 옥사에서 참형을 당한 이조참판 이관(李灌)의 숙부였는데, 그 집안과 홍여방과는 적대관계에 있었다.홍여방은 이곳으로 유배를 오기 10일전에 ‘2년 전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이관과 심온 등이 반역죄를 저질렀으니 그들에게 더 큰 벌을 내려 달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이 상소를 올린 지 10일 후, 그 자신도 대역죄의 죄를 뒤집어쓰고 장기로 유배를 오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운명의 장난처럼, 서로 싸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꼭 결정적인 순간에 마주칠 때가 있다. 천리 먼 길, 고개를 넘고 또 넘고 도착한 경상도 장기 땅, 물설고 낯선 장기 땅에서 이제는 같은 대역죄인 신분이 되어 맞닥뜨린 두 사람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둘 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온 것은 마찬가지다. 그때는 내가 왜 그랬을까. 오늘은 이랬지만 내일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15

어시장 난전 뽕짝과 고급 레스토랑 재즈 뮤직이 공존하는 영덕

파도가 새벽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꿈속 세상이 아늑했다. 요란한 스마트폰 알람시계 대신 바다를 가르는 뱃고동이 압력밥솥 소리를 내며 귓가를 두드렸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서 흰쌀밥 냄새가 부풀어 오를 때, 나는 빛과 소리와 냄새로 오는 영덕의 아침을 끌어안으려 기지개를 켰다.어제는 영덕 바다의 푸른색에 흠뻑 물들었으니 오늘은 내륙으로 가봐야겠다. 누구나 바다부터 떠올리지만, 영덕에는 바다 못지않게 아름다운 산과 계곡, 하천이 있다. 먼저 더덕, 황기, 산삼, 멧돼지, 철, 구리, 돌이끼 등 일곱 가지 보물이 가득하다는 칠보산(七寶山)에 올랐다. 금강송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에 숨 쉴 때마다 도시의 미세먼지와 술과 한숨과 세월에 찌든 몸속 때가 깨끗이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무성한 나뭇잎을 비집고 쏟아지는 초록 햇빛이 이마에 닿는 순간,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광합성을 시작했다. 숲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숲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무가 된다는 사실을.태백산맥 끝자락의 칠보산은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은 삼성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04년 이곳 칠보산에 개인 명의의 수목원을 조성하려 부지를 매입했는데, 수목원 대신 삼성전자 연수원이 들어섰다. 칠보산에 동식물과 광물이 풍부한 것은 땅의 기운이 좋기 때문이다. 좋은 땅에선 좋은 사람이 나는 법, 칠보산이 있는 영덕 병곡면은 예로부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내 마을 전체가 세금 면제 혜택을 받았다는 풍문도 있다.금강송 사이로 동해의 장엄한 일출을 볼 수 있는 칠보산자연휴양림, 소나무들이 투명한 스프레이를 들고 촉촉한 솔향을 뿜어대는 자연의 미스트에 얼굴은 물론이고 마음의 피부까지 싱그러운 탄력을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피부가 좋다. 금강송 껍질은 반들반들하고 바위는 반질반질하며 흙은 만질만질하다. 신발을 벗고 가벼운 맨발로 숲길을 걸었다. 걷다보면 저기 고래불 명사이십리 해안이 나타나고, 유난히 낮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태백능선의 장관과 마주하게 된다. 이 숲에서 하루 묵으면 얼마나 좋을까? 야영장에 텐트를 치고 새 소리와 이슬과 벌레와 사이좋게 누워 잠들면 땅의 좋은 기운을 받아 몸도 영혼도 다 건강해질 텐데.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숲을 나섰다.숲에서 나오자마자 숲의 상쾌함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이번엔 맑은 물을 찾아 다른 숲에 들었다. 달산면 옥계계곡은 팔각산 천연림과 동대산 기암절벽이 함께 빚어낸 깊은 협곡이다. 손때 묻지 않은 바위들 사이로 얼음처럼 차고 맑은 물이 수십억 개 구슬이 되어 굴러 내린다. 절벽에 움푹 파인 바위굴들마다 신비한 옛 이야기를 숨겨두고 있을 것만 같은 계곡, 에메랄드빛 물에 발을 담그니 발가락이 얼얼했다. 발끝에서부터 정수리까지 고드름이 열리는 듯한 차가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원도 양구의 파서탕(破暑湯)이 더위를 깨뜨린다는데, 옥계계곡도 파서탕 못지않은 자연의 냉장고, 너른 자갈밭과 소나무 그늘이 있어 여름 피서지로 더할 나위 없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라고, 함께 오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혼자라도 꼭 다시 오라고, 그때 마음의 신열을 서늘하게 내려앉혀 주겠다고 물소리가 내게 속삭였다.옥계계곡은 오십천으로 흐르고, 오십천은 다시 강구 바다로 흐른다. 낚시꾼인 내 마음은 강과 바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한다.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바닷물과 섞이는 곳을 기수역이라고 하는데, 영덕 오십천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수역 하천이다. 영덕은 바다낚시의 고장이지만, 오십천에서 즐기는 민물낚시는 낚시꾼에게 뜻밖의 손맛을 안겨준다. 바닷고기인 농어를 민물에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농어는 가을과 겨울 사이 기수역에 와서 산란을 하고, 부화한 치어는 점차 성장해 바다로 나간다. 기수역 농어는 루어낚시로 잡는다. 일반 농어 루어낚시보다 조금 가볍게 장비를 쓰는데, 바다낚시 못지않은 짜릿한 손맛을 만끽할 수 있다. 5월부터 농어 시즌이 되면 오십천에선 웨이더(방수복)를 입고 허리까지 잠기는 물에 들어가 부지런히 채비를 던지는 루어낚시꾼들을 볼 수 있다. 농어를 민물에서 만나는 것도 신기한데, 더 놀라운 것은 오십천에 민물고기의 제왕 쏘가리가 산다는 사실이다. 농어 루어 채비에 씨알 굵은 쏘가리가 걸려들어 금빛 표범무늬를 번쩍이며 끌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원래 쏘가리는 기수역에 살지 않는 어종이지만 치어 방류 사업으로 오십천에 자생하게 된 것이다. 농어와 쏘가리 외에도 오십천에선 민물고기인 꺽지, 붕어, 잉어, 바닷고기인 숭어, 황어, 감성돔, 심지어 우럭까지 낚시로 잡을 수 있다. 참, 은어를 빼놓았다. 오십천은 호남의 섬진강과 함께 우리나라 은어낚시의 양대 메카, 2009년에는 33.5㎝의 대물 은어가 잡혀 은어낚시 종주국인 일본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루어낚싯대를 꺼내 한 시간 정도 낚시를 해봤지만 잔입질 몇 번 받은 게 고작이었다. 기수역에서 바다로 가는 농어처럼 나도 낚시를 접고 강구항으로 향했다. 물고기 입질이 없으니 사람 입질이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강구항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대게빵을 집어 들었다. 강구항에서는 ‘울진대게빵’과 ‘영덕대게빵’이 또 각축을 벌인다. 울진대게빵은 게살을 갈아 넣은 빵에 호두, 블루베리, 슈크림 등 세 종류의 속을 골라 채워 먹을 수 있다. 대게 등딱지에 담아 파는 대게머핀도 별미다. 한편 영덕대게빵은 울진대게빵에 비해 작고 앙증맞다. 찰보리 반죽에 게살과 함께 껍질까지 갈아 넣어 게맛이 조금 더 강하다. 하여간 눈도 즐겁고 입도 즐거운 대게빵을 먹을 만큼 사서는 갈매기들이 내 빵을 노리는 위험한 항구를 살금살금 빠져나왔다.해파랑공원에 앉아 점점 붉게 익어가는 태양을 보며 대게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빵에서도 태양에서도 고소한 게 냄새가 났다. 먹음직스러운지 눈길을 떼지 못하는 꼬마에게 빵 한 개를 건넸다. 일요일의 공원은 붐볐다. 사람들은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개의 눈이 일제히 향한 곳엔 제 어깨 너머 무엇이 있는지 말해줄 듯 말해주지 않는 수평선이 고요한 입술을 옴짝달싹할 뿐이었다. 강구항은 1997년 방영된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의 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드라마 주제곡인 루 크리스티의 ‘Beyond the blue horizon’은 저 수평선 너머에 희망이 넘실거린다고 노래한다. “파란 수평선 너머엔 행복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어. 괴로웠던 날들은 이제 안녕.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라고. 바다에서는 비관주의자가 낙관주의자로, 염세주의자가 긍정주의자로 바뀐다. 거친 격랑이 일고 비바람 세게 몰아치는 삶의 바다를 벗어나 잔잔하고 부드러운 바다 앞에 선 사람들, 수평선 너머 내일에는 그들이 찾는 행복과 희망, 꿈과 사랑이 반드시, 반드시 있을 것이다.빵배와 밥배는 따로 있다. 배꼽시계가 저녁을 알렸다. 영덕의 먹거리라면 대게와 회, 물회, 곰치국, 물메기탕 등 수산물을 재료로 한 한식이 먼저 떠오른다. 북적거리는 항구, 항구를 조금 벗어나면 한적한 어촌마을, 항구의 어시장과 대게 식당, 어촌마을의 허름한 횟집…. 영덕을 찾는 사람들 누구나 그런 곳에 앉아 바다 위에 뜬 달을 보며, 은하수처럼 늘어선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며 저녁 먹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게 좀 식상하게 느껴져 뭔가 색다른 식사를 경험하고 싶었는데, 병곡면 해안도로가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리로 차를 몰았다. 레스토랑 ‘베르데’는 ‘하벳 풀빌라 앤 리조트’ 내에 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내부와 통유리창으로 시원하게 보이는 오션뷰가 인상적이다. 수준급 요리사들이 울진 후포항과 영덕 축산항, 영해 만세시장 등에서 공수해온 지역의 식재료로 다양한 이탈리아 요리를 만든다. 영덕 대게 파스타 등 동해의 수산물을 이용한 메뉴들은 물론 한우 스테이크, 콰트로 치즈 피자, 시저 샐러드 등과 함께 와인을 즐길 수 있다. 대표 메뉴인 대게 로제 파스타를 주문했다. 대게살을 듬뿍 발라 넣은 파스타를 한 입 먹을 때마다 면에 들러붙은 게살이 입안에 가득 씹혔다. 파스타와 함께 시원한 스파클링 와인을 곁들이며 통유리창 너머 어둠 내린 바다를 보는 저녁은 꽤나 낭만적이었다. 베르데에서 나는 영덕의 변화를 실감했다. 교통 오지였던 어촌이 이제는 동해안 관광의 중심지가 됐다. 어시장 난전의 뽕짝부터 고급 레스토랑의 재즈 뮤직이 공존하는 영덕은 옛것과 새것, 한식과 양식, 바다와 내륙이 함께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는 고장으로 변모 중인 것이다.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오니 하벳 풀빌라 앤 리조트가 캄캄한 밤바다 위에 화려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외관, 알고 보니 이집트에서 공수해온 돌을 하나하나 조각하여 쌓아올렸다고 한다. 이 럭셔리 풀빌라의 각 객실은 고래불 바다를 바로 앞에 두고 스파와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젊은 세대는 물론 가족 관광객들에게도 동해안 ‘호캉스(호텔에서 즐기는 바캉스)’의 명소로 각광 받는 중이다. 가장 저렴한 방이 1박에 38만원, 비싼 방은 89만원이다. 홀로 외로운 데다 가난하기까지 한 시인에게는 그림의 떡이라서 나는 하릴없이 리조트 주변을 한 바퀴 산책하며 이곳 스위트룸에서 함께 호캉스를 즐기고 싶은 이의 얼굴이나 그려보았다.고래불 해수욕장의 한 모텔, 시골 여관에서 씻고서 시골 밤거리를 홀로 걸으면 마음이 습해진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으로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당신과 나 사이는 지구에서 토성까지 만큼이라서 가까워지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는 고정된 이별의 거리, 이곳과 그곳의 시차는 영원히 그대로다. 그러나 하얗게 밀려왔다가 아득히 검게 밀려가는 밤바다 뒤에서 내일의 태양은 벌써 떠오르고, Beyond the blue horizon, 저 파란 수평선 너머 행복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기로 했다.      /시인 이병철

2019-07-14

1천300년 전, 돌에 목표·언약을 담아낸 청년 둘은 화랑이었을까?

경주시 석장동에 자리한 화랑마을을 찾아가던 날. 도시의 아스팔트와 지붕을 적시던 세찬 소나기가 그치고 올여름 첫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듯한 세련된 기와가 인상적인 화랑마을. 그곳 전시장에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보물 제1411호)’을 만났다. 30㎝ 길이의 돌에 화랑의 결의가 새겨진 비석. 거기 쓰인 일흔네 자의 글씨를 오늘날의 문장으로 쉽게 풀어 쓰면 아래와 같다.“임신년 6월 16일 우리 둘은 더불어 맹세하며 여기에 기록한다. 앞으로 3년 이후에도 충성스런 도리를 가슴에 새겨 이를 지키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만약 우리 가운데 하나가 이 다짐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이다.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이 크게 불안해진다고 해도 이 맹세는 지켜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지난날 약속했듯 다양한 책을 읽어 학업에도 정진할 것임을 다짐한다.”신라시대 청년들의 유교적 도덕성과 그 실천의지를 담아낸 ‘임신서기석’은 서두에 적힌 ‘임신(壬申)’이란 글자로 미루어 볼 때 임신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학설이 힘을 얻고 있다. 그렇기에 신라 진흥왕 시절인 552년, 또는 진평왕 때인 612년, 혹은 성덕왕 재위 기간인 732년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게 역사학자들의 견해다.다른 어떤 물질보다도 내구성이 강한 돌은 변치 않을 의지와 숭배의 마음을 담기에 좋은 재료였다. 세계관의 중심이 신(神)에서 인간으로 넘어오기 전인 르네상스(Renaissance) 이전 시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돌을 깎아 성당을 만들었다. 불멸한다고 믿는 신의 존재를 현실에서 보여주기에 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1천 년 전 캄보디아에선 크메르(Khmer) 왕조의 사원과 궁전을 미려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건축물들의 재료 또한 돌이었다. 수백km 거리에서 코끼리 수천 마리를 동원해 실어온 돌로 만든 석조건물은 자야바르만, 수리야바르만 등으로 불렸던 왕들의 권위를 더욱 강화시켰다.경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石丈寺)터 인근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의 청년 지도자였던 화랑들이 어떤 마음가짐과 비전을 가지고 생활한 것인지를 추측하게 해주는 귀한 사료(史料)”라고.◆ ‘풍류도’와 ‘임신서기석’은 어떤 관계가?다수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그간의 성과물들을 종합하면 화랑은 20세 이전의 신라 청년들이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보자면 겨우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좀 더 범주를 넓힌다고 해도 대학교 1학년이나 사회 초년생에 불과한 또래다. 소년에 가까운 이들이 어떤 이념과 규범에 의해 교육받았기에 ‘임신서기석’에 쓰인 문구를 쓸 만큼 조숙할 수 있었을까? 의문과 다소간의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역사학자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 이념은 풍류도”라고 주장했다. 절친한 두 명의 화랑이 자신들의 맹세와 다짐을 뜨거운 불과 세월의 풍화작용으로도 온전히 없앨 수 없는 돌에 명명백백(明明白白) 새겨 스스로를 다잡고자 만든 ‘임신서기석’.여기에는 둘을 매료시켰던 ‘풍류도’의 향기와 흔적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풍류도’가 역사상 최초로 언급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다.난랑(鸞郞)이란 이름을 가진 화랑을 기려 만든 비석을 해석한 ‘난랑비서’에서 유(儒)·불(佛)·선(仙) 통합주의자 최치원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다소 길지만 그 중요성을 감안해 현대적으로 해석된 문장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인용한다.“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라 한다. 가르침을 세운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삼교(三敎)를 본디부터 포함한 것으로서 많은 사람을 접촉하여 교화한다. 이를테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주지(主旨)와 같고,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 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宗旨)와 같으며,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敎化)와 같다.”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교, 도교, 불교를 효과적으로 융합하고 충돌 없이 조화시킨 ‘풍류도’가 바로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화랑들의 정신적 지향점이 된 ‘현묘한 도(玄妙之道)’라는 것.‘임신서기석’에 자신들의 향후 목표와 언약을 담아낸 청년들은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풍류도(풍류정신), 혹은 풍월도의 가르침에 근거해 비문(碑文)을 새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풍류도’란 단어가 생겨난 근원은…이처럼 신라사회와 그 사회를 주도했던 청년들의 조직 화랑도(花郞徒)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풍류도(풍월도)의 어원(語源을 찾아보는 작업은 의미가 작지 않을 터.철학자 한흥섭의 논문 ‘풍류도의 어원’은 주요 학자들의 견해를 치우침 없이 두루 소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한흥섭은 풍류도를 “고대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사상 가운데 하나”라고 정의하며, “한국 철학사에서 풍류도의 위상은 중국에서 유입된 유교, 불교, 도교와 비교해 초라하기 짝이 없다”며 안타까워한다. 그는 자료의 숫자가 적고, 신빙성 여부의 판단이 어려우며, 논리 전개에서의 객관적인 설득력 결여가 풍류도를 하나의 체계를 갖춘 학문적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풍류도의 어원’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풍류도의 본질과 뿌리를 찾아보자는 한흥섭이란 학자의 열정에서 출발된 것이 아닌가라고 짐작해본다. 그는 위에 언급된 논문에서 최남선(1890~1957), 안호상(1902~1999), 양주동(1903~1977)이 각기 주장한 풍류도의 어원과 그 의미에 관한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최남선 “풍류와 풍월의 어원은 부루”육당 최남선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다. 한흥섭에 따르면 최남선은 풍류도의 어원을 ‘부루’에서 찾고 있다.‘부루’란 예부터 존재한 고유 신앙이며, 그 신앙의 요지는 ‘하늘의 도(天道)’를 실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최남선의 주장. 더불어 최남선은 이 신앙이 유교와 불교에 앞서 있고, 유교·불교가 유입된 후에도 함께 존립했다고 봤다. 그렇다면 육당이 풍류도의 어원이라 칭한 ‘부루’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일까? 최남선의 저서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이 물음에 답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부루는 ‘밝의 뉘’가 이리저리 변하여 달라진 말이다. 대개 ‘밝’은 광명과 신(神)이요, ‘뉘’는 세계이니 ‘밝의 뉘’라 함은 광명세계, 곧 신의 뜻대로 하는 세상이란 의미다. 훗날 ‘밝의 뉘’란 말이 여러 가지로 변하고 또 이것을 한문으로 이리저리 쓰는 가운데 그 종교적 진면목이 일정 부분 가려지게 되었지만, 그 고갱이(핵심)는 꾸준하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위의 인용을 볼 때 최남선은 ‘풍류도’를 한국의 고대 신앙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 종교적 지향점이 ‘하늘의 도가 실현되는 밝은 세상’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한흥섭은 이 논지(論旨)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해 육당이 말한 바 ‘부루’ 즉 풍류도의 골자는 ‘홍익인간’이고, 주장의 연원은 ‘단군사화’라고 추정했다.◆ 안호상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이 풍류도”양주동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한흥섭에 의하면 사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은 “기본적으로 배달교(단군교)에 근거한 주체적 민족주의자”다. 그렇기에 단군의 가르침을 우리 민족 고유의 정통적 철학과 사상으로 믿었고, 그것을 배달길(風流道 또는, 화랑도)로 표현했다. 안호상이 정의하는 풍류도(풍월도)는 ‘배달길’의 이두문(吏讀文·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적은 것)이다. 아래 인용을 보자.“배달길을 풍월도라, 또 배달교를 풍류교(風流敎)라 번역한 것은 순전히 우리말의 음을 따라 이두문으로 적은 것이다. 풍월도의 풍(風)이 옛날엔 발함 풍자요, 또 바람을 배람이라고도 했다.또 풍월도의 월(月)은 달 월자다. 이들 ‘발’과 ‘배’와 ‘달’을 합쳐보면 풍월도는 ‘배달길’이란 말이다. 또한 풍류도의 류(流)는 흐를 류자인 동시에 달아날 류자임으로 풍류도 역시 ‘발달길’이 된다.”안호상은 신에 대한 숭배, 조상 공경, 인간 사랑이라는 배달교의 3가지 덕목이 풍류사상의 핵심 내용과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관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논문 ‘풍류도의 어원’에서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것은 ‘전설적 국문학자’ 양주동의 풍류도 관련 주장이다. 양주동은 사뇌가(詞腦歌·향가)의 해석 과정에서 풍류도와 풍월도가 우리나라 고대(古代) 종교사상인 ‘ㅂ道’를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빌려온 글자라고 말한다. 즉, 풍류와 풍월은 순수 우리말인 ‘ㅂ’에서 유래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ㅂ’과 ‘ㅂ道’는 뭘 의미하는 걸까? 이에 관해 한흥섭은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다.“양주동의 글자 풀이에 의하면 ‘ㅂ’은 광명(光明)이나 국토(國土)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ㅂ道’ 즉 풍류도는 ‘광명도’나 ‘국토도’가 되고, 이는 곧 태양 숭배나 자연 숭배 사상임을 뜻한다. 이러한 관점은 최남선이 말한 광명계의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적 종교사상과도 일치한다.”광명세계로 가고자 하는 의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자연을 대하는 겸양한 태도…. 기자가 판단하기에 풍류도는 이런 이데올로기의 집합체로 보인다. ‘임신서기석’을 뒤로 하고 화랑마을을 내려오는 길. ‘풍류도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자신과 나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홍안(紅顔)의 청년들이 떠올랐고, 문득 1천300년 전 두 화랑의 얼굴이 궁금해졌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7-11

“인구 10만 지킴과 증가를 동시에… ‘위대한 영천’ 만들 것”

영천시 민선 7기가 1주년을 맞았다.최기문 시장은 “지난 1년간 가장 큰 성과는 인구 10만 사수였다”며 “인구 10만을 지킴과 동시에 계속해서 증가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쏟겠다”고 밝혔다.시민과 함께 영천의 새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는 최 시장을 만나 소회를 들어봤다.-1년간 시정을 이끈 소회를 밝혀 달라.△시간이 어떻게 지나 간 지 모를 정도로 쉼 없이 달려왔다. 기자간담회 때 시정브리핑을 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지난 1년 동안 많은 일을 해냈다고 자신한다.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저를 믿고 힘이 되어준 영천시민들과 영천시 공직자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취임 1년 동안 많은 일을 해냈다고 했는데 취임 당시 영천시의 모습은?△제가 기억하는 영천의 모습은 경마공원, 야사지구, 화랑설화마을 등 대형 사업들의 추진이 지지부진했다.그 어느 때 보다 영천시 공직자들의 각성과 시민들에 대한 신뢰감 회복이 시급한 상황이었다.인구는 역대 최저치인 10만186명에 그쳤다. 10만이 곧 무너질것 이라는 여론도 지배적이어서 고향 영천을 일으키겠다는 의지는 누구 보다 강했지만 여러모로 어려운 현실이었다.-시민들과 소통을 통한 스킨십을 늘리는 이유는.△취임 후에도 시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발이 닳도록 뛰어다녀야 했다.매일 이른 새벽에 인력시장, 스포츠센터를 돌며 시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동시에 시민들의 가려운 곳이 어디인지 꼼꼼히 알기 위해 여러 단체를 초청해 민생 간담회를 이어갔다.그 결과 교통오지에 마을버스와 행복택시를 운영했다. 버스승강장 바람막이와 온열의자도 설치했다. 시민들이 참 좋아했다.지난해 영천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곳이었다. 그래서 올 여름엔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시원하게 생활하며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버스 승강장에 에어커튼을 설치했다. 살수차와 스마트 그늘막도 운영하고 있다.-공약사업들은 제대로 추진되고 있는지?△지난 11월 확정된 공약사업들도 정상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각계각층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평가단을 구성했다.체계적인 공약관리로 2019년도 전국 지방자치단체 공약 메니페스토 평가에서 ‘A등급’ 우수를 받아 다른 지자체의 귀감이 되고 있다. 22년 만에 사업이 재개된 야사지구토지구획정리, 자양면 상수도 공급사업, 대구경산 광역교통 무료환승시스템 구축, 망정 우로지 생태공원 명소화 등이 핵심 공약으로 현재 잘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도 시민들과 한 약속을 이행하는 데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기업유치에 남다른 애착이 있는 것 같다. 성과는.△영천시에는 산업부지가 매우 부족하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잇따라 기업 투자유치를 성공시키고 있다.지난해 8월 범시민 기업투자유치위원회를 출범시켰다. 11월에는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소기업 고부가가치 전환육성 MOU를 체결했다.강소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전국 방방곡곡으로 뛰어 다녔다. 1년 만에 10개사 767억원 유치라는 큰 성과를 얻었다.이러한 노력들이 바탕이 돼 고용률 67.6%(전국 3위, 도내 1위)를 기록해 2019 전국지방자치단체 일자리 대상에서 고용노동부 장관상을 수상했다.영천시에는 기업들이 물류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광역교통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지만 알짜기업들이 터전을 잡을 땅과 산업부지가 턱 없이 부족하다.지난 8일 국토부에서 남부동 일원에 투자 선도지구를 지정해 대규모 산업단지 조성에 232억원을 지원키로 했다. 화산면·중앙동 일원에 하이테크파크지구도 12월 착공될 예정이다.무엇보다 시장의 권한으로 10만 평 규모의 산업단지를 공영개발하고 있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2020년쯤이면 괜찮은 기업들이 들어올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지역 관광산업이 크게 활성화 될 것으로 기대 되는데.△지난 10년간 답보 상태였던 영천경마공원은 지난해 10월 5일 설계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7월 중순경에는 시민들과 약속된 44만 평 규모로 경마공원 조성용 구역 지정 및 실시계획 승인 신청을 할 것이다.시민들이 사업축소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지난 4월 행정안전부와 지방세 감면문제를 잘 협의했다. 영천경마공원은 원안 수준으로 사업이 잘 추진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지난해에는 한의마을을 열어 지역의 명소로 만들었고, 탐나라 공화국과 관광산업 발전을 위해 상생협약을 체결했다.보현산 별빛축제가 경북도 우수축제로 선정돼 도비 4천만 원을 지원 받았다. 이로 인해 올해 5만 명이 넘는 엄청난 관광객들이 방문해 지역 축제의 경쟁력을 한껏 높였다.이와 함께 영천시가 깨끗한 물과 맑은 공기를 가진 청정도시인 점을 십분 활용해, 장기적으로 보현산권 전역을 관광벨트화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스릴 넘치는 집와이어, 별빛테마마을, 보현산천문과학관, 산림목재문화 체험관과 함께 2020년 말에 보현산댐을 가르는 출렁다리와 둘레길, 여행자센터가 구축되면 남부럽지 않은 융복합 관광자원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전국이 인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영천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복안이 있다면.△수도권의 쏠림 현상으로 인해 지방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어 지자체 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취업난으로 결혼하고자 하는 청년들도 줄어들어 출생률도 덩달아 낮아지고 있다.영천도 마찬가지다. 자칫 사람들이 줄어들어 지역이 소멸할 수 있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많이 느끼고 있다.현재 영천시에서는 인구 늘리기를 핵심 현안으로 여기고 여러 지원책들을 펼치고 있다.지난해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분만 산부인과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분만 산부인과 설치가 추진 중에 있다. 출산양육지원금도 대폭 확대했다. 현재는 시의회와 다자녀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을 조율 중에 있다.특히 인구 유출의 가장 큰 원인은 교육여건이다. 이에 정부 계획보다 3년 앞당겨 초중고 무상급식을 실시해 인재들의 관외유출을 막아 내고 있다.금호 포은고등학교에 다목적강당 및 급식소를 신축하는 등 명문교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올해 신입생 모집에 정원 22명에 27명이 지원해 5명이 탈락됐다. 그중에 경산 무학중학교 출신 10명이 포은고에 입학한 것을 보면, 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이와 더불어 2020년까지 장학금 300억을 조성하고 장학지원도 계속 확대한다면 인재들의 유입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부자농촌 영천 만들기와 농가 일손난 해소 성과도 소개해 달라.△제가 취임할 때, 우리 영천 농산물이 맛도 최고, 품질도 전국 최고였다. 그러나 마케팅과 홍보가 아주 부족했다.가장 먼저 과일포장재와 영천별빛한우 브랜드 개발로 농축산물의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지난해 울산 농산물유통센터에서 영천과일 축제를 연데 이어 울산 남구 직거래장터, 대구 낭만한우축제 등 대도시 행사에 참가해 판매와 홍보를 극대화했다.농촌의 고령화로 인한 인력난 해소를 위해 지난 4월 완산동에 농촌인력지원센터를 개소했고, 현재 서부권, 남부권에 이어 동부권에도 농기계 임대사업소를 구축하고 있어 농가의 걱정을 덜어 주고 있다. 농업 인프라 구축을 위한 굵직한 공모사업들도 선정됐다. 농촌 융복합지구 조성사업 등 4건에 79억5천만 원을 확보했고, 체류형 농업 창업지원센터도 최근 사업을 완료했다.농산물 도매시장 현대화 사업도 2021년도 준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추진 중에 있다.-지난 1년간 가장 큰 성과와 향후 시정방향은.△인구 10만 사수가 가장 큰 성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영천시의 인구는 지난해 7월 역대 최저치인 10만186명이었다. 지난달(6월) 말 기준 인구는 10만2천154명으로 2천여 명이 증가했다.연초 상주시가 인구 10만이 붕괴돼 상복을 입고 출근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영천시는 인구 10만을 지킴과 동시에 계속해서 증가할 수 있도록 모든 역량을 쏟을 것이다.우리 시가 반드시 추진해야 될 과제는 대구지하철 1호선 연장과 하양에서 영천경마공원까지 6차로 확장이다. 특히 지하철 연장은 반드시 이뤄야 한다. 경기도 여주시는 지하철과 롯데아울렛이 들어오면서 5만 명이나 증가했다. 영천시도 지하철이 들어오면 엄청난 인구가 유입될 것으로 기대된다.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이 행복해 하고 위대한 영천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영천/조규남기자 nam8319@kbmaeil.com

2019-07-09

혈연이 채운 족쇄, 연좌제(緣坐制)

임금이 세종으로 바뀌었다는 바로 그 해, 1418년 12월 초순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는 길등재를 넘고 휑한 방산천을 따라 내려와 장기현에 도착한 초로(初老)의 한 선비가 있었다.그의 이름은 이원강(李元綱)이었다. 바로 이조참판이던 이관(李灌)의 숙부이다. 11월 26일 벌어진 강상인(姜尙仁)의 옥사(獄事)에서 이관은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이원강은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는데,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이원강이 여기까지 온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세종 즉위년에 피바람 몰아쳤던 그 강상인의 옥사에 대해 짚어봐야 한다.1418년 8월, 태종은 18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세자인 충녕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준다. 하지만 조선 임금 중 가장 정치력이 뛰어났던 태종이 그대로 물러 날리는 만무했다.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정적들이 제거되었으니, 이들의 잔여세력들이 공격해올 것이 분명했다. 또 세종은 장자가 아닌 셋째아들이다. 그것도 나이 스물두 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공신세력과 외척세력들에 의해 휘둘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임금 자리는 넘겨주지만 자신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병권과 국가적 대사는 직접 챙기겠다고 선언했다. 상왕이란 임금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을 때 물러난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실상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셈이었으니, 과연 정치력 9단의 태종다운 처세였다.그 무렵 중앙무대에는 공신인 강상인과 외척인 심온(沈溫)의 세력들이 버티고 있었다. 강상인은 태종의 최측근 가신(家臣)으로 태종 즉위와 함께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인물이다. 이후 순금사 대호군(巡禁司大護軍)을 거쳐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를 선언하기 직전인 7월에 병조참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참판이었지만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병조의 일을 총괄하고 있었으니 의심 많은 태종에게는 은근히 걱정거리였다. 심온은 개국공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기도 했지만, 세종의 장인이었다. 현직 영의정이고 왕비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이다. 그를 따르는 육조(六吏曹)의 관리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의 동생 심정(沈泟)은 군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도총제(都摠制)이면서 병조참판 강상인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 세력들이 태종에게는 항상 마음에 걸렸다. 태종은 강상인과 심온의 세력들이 제거되어야 앞으로 세종이 제대로 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태종이 벼르고 있던 참에 두 세력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1418년 8월 15일, 강상인과 도총제 심정 등이 궁궐을 수비하는 금위군의 편제를 보고도 없이 바꾸어버린 것이다. 금위군이란 궁중을 지키고 임금을 호위ㆍ경비하던 친위병을 말하는 것인데, 원래 한 개의 편제이던 군대를 둘로 분리하여 태종이 거처하는 수강궁과 세종이 거처하는 경복궁을 나누어 수비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은 당연히 병권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태종에게 보고하여 처리해야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세종에게만 보고를 하고 태종을 무시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태종이 전날 강상인에게 병조에 근무할 괜찮은 사람 하나를 천거하라고 했더니 보고도 없이 자기의 친동생 강상례(姜尙禮)를 채용하고 병조 사직(司直)이라는 벼슬을 줘버렸다. 사직은 서울의 각 문(門) 가운데 일부의 파수(把守) 책임을 맡는 등 군사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태종이 강상인에게 이 일의 자초지종을 캐묻자 강상인은 세종이 시켜서 한 일이다라며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다.왕권을 양위 한다는 뜻을 밝힌 지 보름도 안 되서 벌써 이들이 병권을 좌지우지하는 기류가 감지되자 태종이 진노할 일이었다. 태종은 그동안 믿고 병권까지 맡겼던 강상인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여러 가지 실험으로 그의 충성심을 관찰해보았다. 결국 태종은 강상인은 간사하고 자신을 속이는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강상인을 제거해야할 구실만 남아있었다. 이참에 강상인 뿐 만 아니라 왕실의 외척인 심온과 그를 따르는 병조(兵曹)와 이조(吏曹)의 무리들도 함께 제거할 작정이었다.태종은 곧바로 관련자들을 불러 보고도 없이 군대의 편제를 제멋대로 바꾼 일에 대해 심문을 했다. 일이 터지자 반대세력이었던 좌의정 박은(朴訔) 등은 정적들을 제거할 기회는 바로 이때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대세력들은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며 강상인을 비롯한 박습 등 병조 관리들을 모두 중죄에 처하라는 탄핵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 태종은 어떻게든 이 일에 심온을 끼워 넣어 그를 권력에서 배제시킬 방도도 찾았지만, 이 사건과 심온의 관련성을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서 태종은 관련자들이 원종공신이고 그 동안 자신을 섬긴 노고를 참작해 이번만은 경고차원에서 넘어가려 했다. 하여 강상인과 심정(沈泟), 병조판서 박습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이들을 모두 고향 근처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반대세력들은 이정도 처분으로는 분에 차지 않았다. 형조 판서 김여지(金汝知)·대사헌(大司憲) 허지(許遲)·좌사간(左司諫) 최관(崔關) 등이 연합상소를 올려 더 강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구했다. 태종은 이에 못 이겨 강상인을 다시 함경남도 단천(端川)의 관노(官奴)로 보내고, 박습과 병조정랑과 좌랑 등도 더 먼 극변으로 이배시켰다. 사건은 여기서 일단락되는가 싶었다.그런데,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해 9월 8일, 영의정 심온이 세종 즉위 사실을 명나라에 알리기 위해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중국으로 떠나는 날 연서역에는 실세인 그를 전별하러 나온 관리와 양반들의 마차가 한양거리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다.그 사실을 그해 11월경에야 알게 된 태종은 위기를 느꼈다. 외척에 대한 지지 세력이 크다는 것은 곧 왕권이 약해지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래서 태종은 일찍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공을 세웠음에도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죽여 없애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하들 중에는 앞으로 청송 심씨 일가의 세도를 염려하고 진작부터에 차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반대세력들은 이때도 놓치지 않았다. 평소 강상인과 심정에게 유감을 품고 있던 병조좌랑 안헌오(安憲五)가 태종에게 이들이 오래전부터 “군사는 마땅히 한 곳(세종)에 돌아가야 한다”며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해 왔다고 밀고했다. 격분한 태종은 이들이 병권을 이용해 역모를 모의했다고 몰아붙였다. 경남 사천에 유배 중이던 박습과 함경도 단천에서 관노로 있던 강상인을 압송해와 취조를 했다. 박습은 그런 일이 없노라고 부인했다. 강상인은 열흘 넘게 받은 압슬형(壓膝刑)의 모진 고문 끝에 자백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자백은 자신이 심정, 이관(李灌)과 같이 태종은 병권에서 물러나고 세종에게 모든 왕권을 넘겨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종이 바라는 자백은 이것이 아니었다. 외척의 우두머리인 심온과 관련된 진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태종은 강상인에게 또 압슬형을 가했다. 강상인은 고문에 못 이겨 심온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했다는 취지의 자백을 했다.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노하며 “주모자는 심온이다. 모든 역모는 심온에게서 나왔다” 며 외쳤다. 태종은 전 병조판서 박습을 다시 불러내어 더 모진 압슬형의 고문을 가해 강상인의 진술과 같은 취지의 자백도 받아냈다.이제 태종의 각본대로 모든 그림이 나왔다. 그 각본이란 게 강상인의 옥(獄)을 심온에게까지 연결시켜 심온도 함께 제거하는 것이었다. 1418년 11월 26일, 태종은 백관을 모아 놓고 강상인·박습·심정·이관은 모반대역(謀叛大逆)로 처단하라고 했다. 그때까지 심온은 명나라에 있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일부 신하들은 심온이 명나라에 있으므로 그와 공범들을 대질시켜 심온의 혐의 유무를 명백히 하고 처단해도 늦지 않다고 주장했으나, 박은은 대질심문 없이 심온을 모반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했다.의금부 관리들은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수레에 강상인을 묶어 사지를 찢어 죽였다. 강상인은 죽기 전 수레 위에서 ‘사실 나는 죄가 없는데 고문에 못 이겨 허위자백으로 죽는다’며 울부짖었다. 나머지 사람들인 박습·심정·이관 등은 서대문 밖 근교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태종은 심온이 명나라에서 수작을 부리고 돌아오지 않거나 아예 도망할 염려가 있으니, 의금부 진무(鎭撫)를 급파하여 압송해 오라고 했다. 심온은 사은사에서 돌아오는 즉시 의주(義州)에서 기다리던 금부진무 이욱(李勖)에게 체포 되었다. 압송 도중인데도 태종은 사람을 보내 수원(水原)에서 만난 그에게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죽기 전 심온은 금부진무에게 ‘명나라에 들어 간 뒤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무슨 일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태종을 한번만이라도 만나게 해 달라’고 청을 하였으나, 태종은 사람을 시켜 ‘이미 죽은 사람들인데 누구와 대면하겠다는 말인가’라며 냉정하게 거절했다.이게 강상인 옥사의 전말이다. 강상인의 옥사는 병권을 남용한 그의 개인적인 과오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태종의 병권에 대한 집념 및 외척 경계에서 빚어진 것이었다.‘기재잡기(寄齋雜記)’ 등 야사(野史)에는 심온이 사약을 받으면서 원수지간이 된 박은을 원망하며 자자손손 박씨들과는 혼인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심온의 신도비명에도 이러한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청송 심씨와 박씨가 서로 혼인을 하지 않는 가승(家乘)은 이래서 생긴 일이다.의금부 제조(提調) 유정현(柳廷顯) 등은 심온의 아내 안씨 또한 천안으로 유배를 보내 종으로 삼기를 청했다. 결국 안씨는 의금부의 여종이 됐다. 이들은 심온의 딸인 왕비 소헌왕후 심씨도 죄인의 여식이므로 폐위해야 한다고 주청을 했다. 그러나 세종이 극구 나서서 말렸다. 태종은 소헌왕후가 많은 자손을 낳았고, 세종과 금슬이 좋다는 이유를 들어 폐출은 시키지 않았다.이 사건은 외척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문종은 심온의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한편, 이 옥사에서 참형을 당한 이관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충청도경차관, 사헌부집의, 경기도관찰사, 이조참판을 지냈다. 아버지는 고려와 조선 초기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원굉(李元紘)이다. 이 사건으로 이관의 아들 이소인(李紹仁)은 울산(蔚山)으로, 형 이약(李鑰)은 통천(通川)으로 유배를 가 모두 관노가 되었다. 이관의 숙부 이원즙(李元緝)은 평해(平海)로, 조카 이말한(李末漢)은 거제(巨濟)로, 이백장(李伯長)은 장흥(長興)으로 귀양 갔다. 이때 숙부 이원강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것인데, 모두 범죄자와 일정한 친족관계가 있는 자에게 연대적으로 그 범죄의 형사책임을 지우는 연좌제(緣坐制)의 족쇄에 걸린 것이다조선시대에는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을 빌려 와 사용했다. 이 법은 ‘모반대역죄’를 아주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대역죄를 지은 본인은 능지처참하고 그의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목을 매달아 죽인다. 그의 16세 이하의 아들과 어머니·처와 첩·할아버지와 손자·형제자매 및 아들의 처와 첩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으로 삼는다. 또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며, 백숙부와 조카는 동거여부를 불문하고 유 3천리 안치형(安置刑)에 처하도록 되어있다. 다행히 강상인의 옥사에서는 태종도 도리에 어긋남을 알았음인지 관련자들의 아들들의 목숨만은 부지하게 배려를 했다.조선시대 초기부터 일단 모반대역죄가 발생하면 연좌제에 걸린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단종복위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시애사건의 경우는 연좌된 사람이 300여 명에 이른다. 길고도 가혹한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의 연좌법은 갑오개혁 때인 1894년에 와서야 폐지되었다.강상인의 옥사에 연좌되어 피해를 본 인천이씨 집안은 청송심씨 집안보다는 먼저인 1459년(세조 5), 이관의 손자 이우(李祐)의 상소로 신원이 되어 자손들도 관직에 출사 할 수 있게 되었다.역모자의 숙부라는 혈연의 족쇄를 차고, 왕권강화와 외척척결이라는 운명적 이유로 장기까지 온 이원강은 주거마저도 제한 된 ‘안치(安置)’였다. 그의 억울한 유배살이는 두고두고 장기 땅에 한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08

고래들이 헤엄쳐와 놀다가던 그 곳, 고래불서 넓은 바다로 자유 찾아 떠나는 꿈을 꾸다

누군가 내게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파란색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파란색 중에서도 어떤 파란색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바다의 파란색이라고 할 것이다. 세상의 그 많은 바다 중에서 어느 바다가 그토록 아름다운 파란색을 지녔는지 궁금해 한다면 나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영덕 바다에 가보라고 말할 것이다.영덕, 이라고 소리 내 발음하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체온이 조금 내려간다. 한 여름 무더위와 열대야로 고생할 때 써먹기 좋은 방법이다. 나는 종종 영덕으로 상상의 피서(避暑)를 떠나곤 한다. 영덕, 이라고 한 번 더 발음하면 푸른 향기와 함께 파도 소리가 밀려온다. 언제나 상상이 현실보다 풍요롭지만, 영덕에서는 전세가 역전된다.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다. 상상 속 푸른 향기는 바다와 마주하는 순간 구체적으로 분명해진다. 영덕 바다에서는 시원한 쿨워터 향수의 내음이 난다. 박하 성분이 들어간 샴푸 향기가 나기도 한다. 파도에서는 쌀 씻어 안치는 소리, 연극이 끝난 후의 박수소리가 들린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청포도의 온도와 쪽빛 실크 블라우스의 감촉을 지닌 영덕 바다에서 나는 죄 지은 것도 없이 죄인이 된다. 수평선을 훔친 내 눈이 푸른 수의(囚衣)를 입고 푸르디푸른 감옥에 갇힐 때,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싫은 자발적 유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덕에 가면 그 푸름에 그냥 눌러앉고 싶어진다.망망대해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의 꿈을 꿨다. 푸른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내 불완전한 욕망이 꿈에서 고래를 통해 이루어진 모양이다. ‘고래’는 오랫동안 희망의 메타포가 되어 왔다. 어민들에겐 지금도 ‘바다의 로또’로 불린다. 송창식은 노래했다.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고래 사냥’) 가자고. 1975년의 ‘고래’는 잡으려면 잡힐 것 같은 꿈이었다. 피땀과 눈물의 바다 위에 “잘 살아보자”는 뱃고동 소리가 메아리치면, ‘중동 건설 붐’이라든가 ‘수출 100억불’ 같은 신화들이 커다란 고래가 되어 잡혀들었다.그로부터 30년 후, 바비킴은 다시 노래했다. “파란 바다 저 끝 어딘가 사랑을 찾아서 하얀 꼬릴 세워 길 떠나는 나는 바다의 큰 고래. 이렇게 너를 찾아서 계속 헤매고 있나. 저 하얀 파도는 내 마음을 다시 흔들어 너를 사랑하게 해”(‘고래의 꿈’)라고. IMF라는 풍랑이 그친 바다에 ‘자수성가’라든가 ‘내 집 마련’이라든가 하는 고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04년의 ‘고래’는 뜬구름 같은 낭만과 사랑의 은유, 거대한 신화에서 작고 앙증맞은 동화가 되었다.그리고 2019년, 두 고등학생 래퍼(강민수, 이진우)는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정호승의 시 ‘고래를 위하여’를 랩으로 개사해 신나게 외쳤다. “넌 내 바다에 놀러와 매일 초음파를 보내. 별이 나를 보며 hello. 아무쪼록 필요해 더 많은 고래… 넌 마음이 너무 탁해. 너를 괴롭히는 시선들을 들춰놔 봐. I don‘t give up! 꿈을 찾아 떠나가 버려”라고. 오늘날 젊은 세대에게 ‘고래’는 타인의 시선이나 기성세대의 질서가 만든 ‘유리 수족관’을 벗어나 넓은 바다로 “꿈을 찾아 떠나”는 주체적 자아를 상징한다.강산이 네 번 반이나 바뀌는 동안 ‘고래’도 영덕도 다 변했다. 사실 영덕은 고래와 큰 관련이 없다. 물론 영덕에서도 저인망 어선에 밍크고래가 혼획되는 일이 가끔 있지만 과거 우리나라의 고래잡이는 울산 장생포와 포항 구룡포에서 주로 이뤄졌다. 장생포에는 고래문화마을과 고래박물관이 있고, 매년 고래축제가 열린다. 그럼에도 영덕 기행문을 고래 이야기로 연 것은 병곡면의 고래불 해수욕장 때문이다. 희고 고운 모래사장이 이십 리나 펼쳐진 그 해안에 대해 말하기 위해 송창식과 바비킴, 고등래퍼의 고래 노래를 들었다.죽변에서부터 봉평, 망양, 후포 해변을 지나 고래불로 가는 길, 포크에서 레게 그리고 힙합으로 장르가 변하는 사이 당진영덕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영덕은 ‘교통 오지’의 오명을 벗었다. 송창식이 ‘고래 사냥’을 노래한 때나 지금이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인 청춘, 다만 이제는 “삼등삼등 완행열차” 대신 KTX를 타고 서울에서 포항까지 2시간 30분, 포항역에서 다시 기차로 30분을 달리면 영덕에 닿을 수 있다. 영덕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대게지만, 먼 옛날 병곡 바다엔 대게만큼이나 고래가 우글거렸다.고래불이라는 지명은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李穡)에 의해 붙여졌다. 어린 시절 산에 올랐다가 바다에서 고래들이 흰 물줄기를 뿜으며 뛰노는 모습을 보고 “고래불”이라고 외쳤다 한다. ‘불’은 ‘뻘’의 옛말로 고래불은 고래뻘, 즉 고래가 드나드는 해안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고래가 놀지 않는 해안, 하지만 내 눈 앞에 펼쳐진 고래불 바다는 언젠가 돌아올 범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를 향해 싱그러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저 수평선은 푸른색의 고향일까, 물결이 끊임없이 새 파랑을 새파랗게 새파랗게 해변으로 밀어 보내면, 백설탕처럼 고운 모래가 파랑을 사랑으로 바꿔 해변을 나란히 걷는 연인의 발뒤꿈치를 달콤하게 적셨다.고래들이 헤엄쳐 와 넉넉히 놀다 가던 고래불에서 사람들은 모두 고래 분수처럼 시원한 웃음을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그 웃음이 바다를 더 파랗게 물들였다. 연인들은 해변을 걷고, 걷다가 모래 위에 하트를 그리거나 서로의 이름을 적고는 파도가 그걸 지울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그 모습을 부러워하며 해수욕장을 나서자 소나무 숲에 조성된 고래불국민야영장에는 형형색색 텐트들이 만화 ‘스머프’처럼 아기자기한 동화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어른들은 텐트 앞에 모여 앉아 바비큐 파티를 즐기고, 물놀이장에선 아이들의 물장구 사이사이로 무지개가 반짝였다. 연인과 가족, 친구들이 그려내는 여러 사랑의 풍경들이 고래불 해수욕장의 얼굴이다. 어느 책 제목을 빌면, 고래불에서 우리는 ‘바다의 얼굴, 사랑의 얼굴’(김얀)을 볼 수 있는 것이다.영덕군이 동해안을 따라 고래불에서부터 축산항, 대게 공원으로 이어진 해파랑길을 ‘블루로드’라고 이름 붙인 이유를 알겠다. 고래불에서 나와 대탄리의 ‘해맞이공원’으로 가는 내내 차창 너머로 푸른 그림들이 늘어선 화랑이 열린다. 자연이라는 거장의 작품들, 해맞이공원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풍력발전단지의 거대한 풍차가 푸른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몸이 떠오르고 등에서 날개가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영덕 바다의 푸른빛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수평선 끝까지 날아가고 싶게 만드는 아득한 신비감과 황홀감이 있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는 어디에도 없다.푸른 바다는 넓고 높은 사람을 낳아 기른다. 영덕은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동해와 닿는다. 북동쪽에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인 칠보산과 등운산이 솟아 있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어깨에 바다를 짊어지며 동해를 향해 달려가는 지형이다. 서부산지에서 발원해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과 송천 등 영덕 땅을 흐르는 물줄기들은 영해평야와 영덕평야, 금호평야를 이룬다. 이 천혜의 자연 속에서 목은 이색과 신돌석 의병장이 태어났다. 두 분 다 영덕 출신으로 영해에는 목은 이색 기념관이 있고, 축산에는 신돌석 장군 유적지 및 생가가 있다. 시를 6천 수나 짓고 “붓을 잡으면 곧 써 나가기를 마치 바람 불고 물 흐르듯 하여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던 천재 문장가와 일본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태백산 호랑이’의 자취와 숨결을 느껴보는 것 또한 영덕 여행에서만 얻을 수 있는 감동이다.신돌석 장군 유적지에 바윗돌 들기 체험장이 있는데, 제일 큰 돌을 들어 올린다고 객기를 부렸더니 허리가 뻐근했다. 휴식이 필요한 시간, 다행히 강구항으로 가는 길에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아름다운 카페가 있다. SNS에서 사진 찍기 좋은 곳, 연인과 함께 데이트하기 좋은 핫플레이스로 소문난 집이다. 노란색과 주황색으로 칠한 외관이 카리브해의 카페를 연상시키는 ‘카페 봄’에는 통유리로 된 포토존과 야외 데크가 있어 바다를 가까이서 만끽하며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기 좋다. 이곳 카페에 오면, 젊은 연인들은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거나 푸른 바다와 함께 보석처럼 빛나는 애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커피잔의 얼음이 녹는 줄도 모르고, 어느 노총각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에서 천불이 나 아이스커피를 원샷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봤다고 한다.헛헛한 속을 달래려 강구항의 한 노포(老鋪)를 찾았다. 청송식당은 1976년부터 장사를 했다. ‘할배 방앗간’과 ‘머리 만들기 미용실’, ‘마법의 빵’ 등 주변 가게들과 끼리끼리 정겹고 정다운 강구시장 안에 있다. 식당이 아니라 오래된 가정집을 연상케 하는 모습, 허름한 마당을 지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기억 속에 자리한 냄새가 풍기는데 그 옛날 시골 할머니 집에 갔을 때 나던 따뜻한 내음이다. 이 집은 미주구리회 전문이다. 경북 지역에서 물가자미를 미주구리라고 부르는데, 뼈회로 잘게 썬 것을 양념초장에 무쳐 먹는다. 주인 할머니께서 미주구리회 한 접시와 특제 양념초장을 내오셨다. 초장을 회에 몇 국자 부어 젓가락으로 부지런히 무쳤다. 한 젓가락 크게 집어 입안에 들이니 뼈회의 고소함과 양념초장의 새콤달콤함, 그리고 매운 고추의 알싸함, 쪽파와 양파의 아삭함이 한 번에 느껴졌다. 반쯤 먹고 나머지 반은 밥에 비벼 회덮밥으로 먹었다. 밥을 주문하니 “우리 집 반찬 좀 먹어보라”며 김치와 젓갈, 멸치조림, 감자 볶은 것, 된장국을 내어주셨다.카드 결제가 되지 않아 새마을금고에 가 현금을 인출하고 왔더니 주인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마른 등을 쓰다듬고 계셨다. 아까 보았던 고래불의 푸른 파도가 두 눈 가득 차오르는 순간, 시인은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정호승, ‘고래를 위하여’)라고 노래했지만, 나는 확실히 알았다. 영덕 바다는 사랑을 위하여 푸르다는 것을.      /시인 이병철

2019-07-07

‘격’과 ‘멋’ ‘풍치’를 갖춘 놀음… 1천500년 전 청년들은 대체 어떻게 놀았을까?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1818~1883)에 기대 설명하자면 이것은 ‘토대’인가 ‘상부구조’인가? 아니, 시간을 되돌려 150여 년 전 독일로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의 수많은 역사학자와 사상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은 분분하다.혹자는 “충효와 유희가 결합된 한국 정신의 뿌리”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미륵신앙과 밀접한 한국 종교사상의 주요한 흐름”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젊은 학자들 가운데는 “최근 아시아는 물론, 유럽 전역을 휩쓰는 한류(韓流)의 출발점”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이전 세대에선 화랑도(花郞徒)와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바로 ‘풍류도(風流道)’를 놓고 오가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면 사전적으론 풍류도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원불교 대사전’의 경우 “풍류를 닦던 신라의 청소년 심신수련 조직. 화랑도(花郞徒), 낭가, 국선도(國仙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신라 진흥왕대에 왕과 귀족의 자제로 조직된 이후 국가의 문무(文武) 인재를 이에서 취했다. 그 기원은 민족 고유사상으로 불교·유교·도교 등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유습은 고려 이후에도 이어져 문화·예술 및 풍속에 영향을 미쳤다”고 쓰고 있다. 비교적 구체적이고 상세한 설명이다.반면 또 다른 사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풍류란 속되지 않고 멋스러우며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풍류도라 함은 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하여 멋스럽게 노는 것을 말한다. 즉 노는 것을 ‘도(道)’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것을 이르는 것이다.” 이 주장은 이해가 어렵진 않지만, 다소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이와 같은 풍류도를 둘러싼 갑론을박(甲論乙駁)과 설왕설래(說往說來)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속돼왔고, ‘역사 관련 논쟁’이라는 특성상 어떤 학자도 선뜻 어느 한쪽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개인적 고백을 덧붙이자면 ‘풍류도’에 관해 쓴 몇 권의 책과 10편이 넘는 학자들의 논문을 꼼꼼히 읽고 검토했음에도 그 맥락과 핵심을 짚어내기가 힘겨웠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은 기자의 한계 탓이다. 하지만 이 난감함은 풍류도에 관해선 현재까지도 원체 다양한 이론과 견해가 충돌하고 있고, 아직까지 누구나 고개 끄덕일 ‘100%의 수긍’을 이끌어낸 학설이 없기 때문에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할 것이다.◆ 사학자 최광식 “풍류도는 화랑도의 지도이념”이처럼 복잡다단한 학계 풍경에서 구구한 부연 없이 ‘풍류도’에 관해 비교적 심플하게 정의하고 있는 역사학자 중 한 명이 고려대학교 최광식 명예교수다. 그는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라는 논문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신라시대에 활동했던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들의 지도이념이었던 풍류도는 신라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짤막한 문장을 통해 최광식은 풍류도가 토대가 아닌 ‘상부구조’였다고 설파한다.학자에 따라 토착신앙, 불교, 유교, 도교가 화랑도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는 각각의 견해가 분분한 가운데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이념, 즉 풍류도는 “그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사상과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신라 멸망 이후에도 풍류도와 화랑도는 명칭과 사회적 기능 변화의 과정을 거쳐 고려로 계승됐다는 것이 적지 않은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런 발전적 계승은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의 논거(論據)처럼 풍류도가 토착적 고유 신앙을 기반으로 해 외래 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에도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임으로써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지지기반을 획득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역사학자 김태준 “풍류정신은 화랑도의 바탕 사상”앞서 말했듯 최광식은 “화랑도의 지도이념이 풍류도”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다른 하나의 단어가 자연스레 부각된다. 풍류도 혹은 화랑도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풍월도가 바로 그것. 세간에선 ‘화랑도=풍월도’라고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사학자 김태준은 이런 시각을 아래와 같은 문장으로 요약·정리하고 있다. 그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을 통해서다.“화랑에 대한 기록이 영성하여 모두 뚜렷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가운데, 화랑의 사적을 전한 기록들이 반드시 ‘풍류’와 ‘풍류도’를 함께 전하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그런데 이를 ‘삼국사기(三國史記)’는 풍류라 하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풍월도’라 하였다. 같은 개념의 표현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이를 신라 당대의 상황에 맞춰 보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풍류도와 풍월도는 모두 화랑의 사상이자, 국선(國仙·화랑의 리더)의 정신이며, 동시에 나라를 흥하게 하고자 한 이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준은 여기에 이런 주장을 덧붙이고 있다. “유·불·선 삼교를 포함한 정신이며, 사람들을 교화해 인간다운 삶을 살게 만든 사상이 바로 풍류도”라는 것.김태준 역시 ‘화랑도와 풍류정신’에서 최광식과 유사한 어투로 화랑과 풍류도(풍류정신)의 관계를 요약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풍류정신은 화랑도의 바탕 사상이면서 화랑도를 일으킨 정신이었고, 지금껏 이어지는 민족정신의 바탕이기도 하다.”◆ ‘풍류도에 관한 연구’는 곧 화랑도에 관한 연구경주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역사와 문학에 관해 연구해온 강석근 박사는 최근 기자와의 만남에서 “풍류도는 그 개념의 정리부터가 어려운 문제”라며 “분분한 학설과 다양한 개별 학자들의 주장을 하나의 의미망 안에 묶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려줬다. 무시무시한(?) 어드바이스였다.하지만 어떤 난제(難題)에도 해답은 존재하는 법. 풍류도에 관한 독서와 논문 읽기, 학자들의 조력(助力)을 받으며 앞으로 이어갈 연재기사의 방향을 대략적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최광식과 김태준의 학설처럼 풍류도(풍류정신)와 화랑도는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그런 차원에서 접근을 때로는 거시화(巨視化), 상황에 따라 미시화(微視化) 해보기로 한 것이다.일단 가장 먼저 풍류도의 기원에 대해 살필 예정이다. 풍류도는 신라 진흥왕 시절 선발된 원화(源花)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일부 사학자들은 “풍류도의 역사가 원화에 앞선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이에 각각의 사학자들이 어떤 근거로 자신의 학설을 펼치고 있는지 소개할 계획이다.풍류도가 고대 신라에서 지녔던 위상과 종교와의 관계도 주요한 취재·탐구 대상이다. 신라는 씨족사회로 상호 협동하는 태도가 다른 어떤 고대국가보다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름다운 정신과 육체를 숭배하는 풍토도 강했다고 한다.대표적으로 가야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풍월주(風月主) 사다함은 육체와 정신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인재였다고 알려졌다. 이런 ‘아름다움에 관한 숭배’가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도 밝혀볼 예정이다. ‘풍류도’와 ‘화랑도’란 어원의 뿌리를 찾아보는 것도 과제의 하나다.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인이 변화해 풍월주가 됐다는 학설과 고조선의 고유 신앙인 부루교단이 풍류도의 모태였다는 주장 등이 이와 관련된 취재 대상이다.풍류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됐는지에 관한 궁금증도 풀어보게 된다. 운영 주체가 민간에서 국가로 변화함으로써 체계적 조직화를 이룬 풍류도는 무리를 이끄는 몇몇 리더 아래 여러 개의 문벌(門閥)을 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품과 함께 덕(德)을 지도자의 으뜸 자질로 본 풍류도의 이념도 더불어 취재하게 된다.‘풍류도’를 지도이념으로 신라사회의 리더로 활동했던 ‘화랑’이 자신들 행동의 금과옥조로 삼았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관해서도 살피게 된다.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요약되는 세속오계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풍류도, 화랑, 풍월도를 찾아가는 의미 있는 여행특정한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에 경도되지 않고 시대의 다양성을 포용함으로써 신라의 청년리더였던 화랑의 지도이념인 된 풍류도. 사학자 김태준은 ‘화랑도와 풍류정신’을 통해 풍류도와 화랑이 당대에 가졌던 위상과 지향을 이렇게 요약했다.“화랑은 20살이 못되는 젊은 소년들이 수련하는 무리였다. ‘국선’이나 ‘성인’으로 존중된 사례들이 역사 기록을 장식하고 있지만, 한편에서 보자면 단순히 젊은 무리들의 수련단체이기도 했다. (리더였던 준정과 남모의 갈등과 대립으로 인한) ‘원화’의 실패담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젊은 청소년의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으나, 사람을 감동케 하는 인격의 수련과 오랜 순례여행, 거기서 보고 들은 견문과 젊은이들의 우정이 화랑 풍류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었을 것이다”1천500년 전 신라를 해석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풍류도, 화랑도, 풍월도의 뿌리와 줄기, 꽃과 열매를 찾아가는 흥미로운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됐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애정 어린 비판을 기대한다.글/홍성식기자 hss@kbmaeil.com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2019-07-04

“경제·스포츠·문화가 공존하는 경산시 건설”

3선의 첫해를 마무리한 최영조 경산시장의 바람은 ‘더 큰 희망 경산의 완성’이다.국내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산업과 경제, 문화, 복지 등 전 분야에 걸쳐 성장하고 있는 경산은 경북 3대 도시의 위상을 확고히 하며 경산지식산업지구 등 대형국책사업의 성공적 추진과 경산발전 10대 전략으로, 미래 성장기반 구축으로 시민이 행복한 지자체를 만들고자 하는 최 시장의 목소리를 지면으로 옮긴다.-경산시장으로써 남은 3년에 꼭 이루고 싶은 일은?△국책사업도 중요하지만, 대구도시철도 1호선의 하양 연장과 하양~남산을 연결하는 국도대체 우회도로의 완공, 경산 센트럴파크(상방공원)의 조성이다.-이 사업들을 이루고 싶은 이유는?△대구도시철도의 1호선의 하양 연장은 하양권역의 경제 지도를 바꾸게 될 것이다. 시민의 교통편의 증대와 대구시, 영천시 등이 어우러진 광역생활권이 형성되고 경산지식산업지구, 하양택지지구 등 주변 환경과 맞물려 지역경제에 시너지 효과로 균형 있는 지역발전에 큰 힘을 보탤 것이다.하양~남산을 연결하는 국도대체 우회도로는 국도 4호선과 국도 25호선을 연결하며 장차 남천면까지 확장돼 지역의 유통경제에 한몫하며 좀 더 풍요로운 생활도 보장할 것으로 기대한다.여기에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인 상방근린공원 문제를 해결하고자 민간자본으로 개발할 경산 센트럴파크는 도시자연경관을 보호하는 애초 목적을 달성하고 시민의 건강과 휴양, 정서생활을 향상시키며 지역실정에 맞는 문화예술회관도 보유하게 되기 때문이다.이는 시민들이 원하는 경제와 스포츠, 문화가 어우러진 도시의 바탕이 될 것이다.-경산발전 10대 전략에도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급변하는 사회·경제적 환경변화에 선제 대응하고, 지역의 우수한 자원과 인프라를 극대화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 경산발전 10대 전략이다.10대 전략을 수행하고자 지난해 전문가 200여 명으로 구성된 ‘경산발전전략위원회’를 출범시켜 경산의 백년대계를 위한 미래지향적, 지속 성장 가능한 비전과 전략과제를 발굴하고 실행에 옮기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공직사회에 힘을 주는 것은 투명하고 정직한 인사정책이다. 앞으로 인사정책은 어떻게 실행에 옮겨지는가?△지금까지의 인사정책이 바뀌지는 않는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성실히 근무한 공직자를 우대하며 조화로운 인사로 일하는 분위기와 시민을 위한 행정서비스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조직사회를 운영할 것이다.-지난 4월 지역에서 개최된 제57회 경북도민체전은 지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다. 이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제57회 경북도민체육대회는 역대 최고의 대회로 평가할 수 있으며 평가를 받고 있다.차별화되고 특색 있는 ‘스포츠 융복합체전’에 700여 명의 자원봉사자와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높은 시민의식은 도민체전 성공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이러한 단결력과 추진력은 앞으로 경산시가 어떤 일이라도 추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시의 공무원 인재풀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이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단체장의 역할인데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경산시는 지난해 2018년도에 이어 2년 연속 경상북도 시군평가 최우수상과 지방재정개혁 대통령상을 비롯해 대한민국 지방정부 일자리정책 국무총리상, 아시아 도시경관상, 경상북도 민원행정평가 최우수 등 총 38개 분야에서 기관표창을 받으며 우수한 행정능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다.공직자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시민은 전반에 걸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다.자신의 실력은 남이 먼저 알아주고 감추어도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인재들을 때에 맞는, 역량에 맞는 부서에 배치해 활용할 계획이다. 그러나 인간성을 겸비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남은 3년도 애써주기 바란다.△현재 추진 중인 현안사업을 차근차근 마무리하고 새로운 미래, 더 큰 희망 경산을 준비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가 시민이 행복하고 살고 싶은 경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경산/심한식기자 shs1127@kbmaeil.com

2019-07-03

군민 모두 행복하고 소통하는 청송새 역사 쓰기위해 아직 더 달리겠다

“1년이 어느새 지난간지 모를 만큼 바빴다.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글쎄 군민들의 평가가 어떨지 궁금할 뿐이다”윤경희 청송군수는 취임 후 1년이 정말 빠르게 지난간 것 같다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 민선 7기 1년을 맞아 자신을 돌아보고 또 추스렸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군민이 주인인 1등 청송 만들기”를 제1의 목표로 삼고 달려왔지만 여전히 조심스럽다면서 앞으로도 군민들과 함께 더 고민하면서 발전방안을 수립, 집행할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최근 포항시와 자매결연을 체결하는 등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윤 군수를 만나봤다.△취임 후 군민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업을 5개 분야로 나누었다. 어떤 것인가.첫 번째가 농업인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희망가득 미래가 있는 부자농업’ 만들기고, 두번째가 군민들의 ‘행복나눔 맞춤복지’ 실현하기다. 세 번째는 군민과 관광객 모두가 행복한 ‘품격높은 문화관광’ 조성, 네번째는 전략적인 투자 유치와 일자리 발굴로 ‘살맛나는 지역경제’ 구현, 다섯 번째는 군민 중심의‘군민감동 열린행정’실현이다.△어느 정도 실현됐는지.아직은 갈길이 멀다. 그러나 열심히 가고 있다. 우선은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개선해가며 직원들과 군민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다. 민선 7기 기초단체장 공약 이행 실천계획평가에서 최우수등급(SA등급)을 받았는데, 작은 결과중 하나로 생각한다. 과시형·전시성 행정에 목매지 않고 주민들의 민생에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정책 실현에 더욱 중점을 불 방침이다.△ 지자체마다 요즘 맞춤복지가 한창이다. 청송군은….5대 사업중 한 분야가 ‘행복나눔 맞춤복지’ 실현이다. 지난 1년 동안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어르신들의 건강증진을 위해 목욕비를 지원하는 천원목욕탕 사업, 고령화 사회에서 증가할 수밖에 없는 치매의 예방과 관리를 위한 치매안심센터 건립,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고령의 참전유공자들의 명예와 품위를 드높이기 위한 참전명예수당 및 보훈예우수당 인상, 장애인에게 사회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고 나아가 어르신들이 정보를 공유해 화합할 수 있도록 설립한 현서면 장애인·노인 경제자립지원센터 등은 모두 청송군의 취약 계층과 더불어 살고자 추진한 맞춤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것들이다. 중·고등학교의 신입생 교복구입비를 지원함으로써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도 했다. 완공을 앞둔 LH 임대아파트는 저소득층의 주거 안정을 위한 행복 실현 차원에서 밀어부쳤던 사업이다.△청송은 아무래도 사과 등 농업이 주요 산업이다. 농정시책 추진 방향은.‘희망가득 미래가 있는 부자농업’만들기는 농업인들이 걱정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생산에서부처 가공, 유통까지 이어지는 6차 농업이 되도록 농업인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농산물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산지유통시설 지원을 비롯해 농산물 직거래를 활성화하고 지역 농산물 소비를 촉진하여 농가 소득을 증대시키고자 농산물 택배비 지원사업도 시작했다.청송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최고 품질의 사과 산지다.청송사과의 품질 향상은 물론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난해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열린 잠실구장에서 청송사과 홍보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청송황금사과’의 상표권을 출원해 브랜드를 선점하기도 했다. 남북평화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청송 고품질 사과 생산 기술이 농업교류에 기여할 수 있도록 남북 농업기술 교류사업을 선제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이에 힘입어 청송사과 브랜드가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7년 연속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청송 관광은….청송에는 관광자원이 많다. 주왕산을 비롯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국제슬로시티 등 글로벌 문화관광 브랜드가 적잖다. 지난해 관광객 540여만 명이 청송을 다녀갔다. 7년 연속으로 경상북도 최우수 축제로 선정된 청송사과축제는 지난해 용전천으로 장소를 옮겨 지역민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바 2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 축제는 지역 경제의 직접 매출 효과가 70억 원에 이르러 지역경제 활성화의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했다. 앞으로는 ‘산소카페 청송군’이라는 브랜드에 중점을 둘 것이다. 청송의 맑고 청정한 자연환경 이미지에 공간적인 색깔을 입히자는 것이 이 사업이 목적하는 바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다.△일자리와 투자 유치 시책이 궁금하다.전략적인 투자 유치를 최우선에 두고 있다. 얼마전에 국내 굴지의 레저 사업자와 1천억 원의 투자유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자연자원을 활용한 골프장을 조성해 체류형 관광휴양도시로 만들겠다고 한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지난 1년간 심혈을 기울인 결과다. 다른 분야에도 여러가지 투자 유치가 진행중에 있다. 다행히 청송은 자연환경이 국내에서 가장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문의가 많다.△ ‘군민감동 열린행정’의 실현 방향은.지역주민들의 뜻에 따라 지난 3월1일자로 ‘부동면’을 ‘주왕산면’으로 명칭 변경했다. 주왕산이라는 대표 관광지를 지역 명에 포함시킴으로써 청송 발전의 브랜드로 활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주민들의 염원이었던 청송소방서 유치를 확정해 2021년 개청을 앞둔 상태며, 군민안전보험 운영조례를 제정하고 보험을 가입해 일상생활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의의 사고와 재난으로부터 군민 모두가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지난 5월에는 포항시와 자매결연을 맺어 환동해권 물류 중심지로 도약하는 포항시와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동반 성장과 번영을 누림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나갈 수 있도록 상생의 길을 열었다. 청송읍 LPG배관망 사업을 완공해 군민의 에너지복지를 증진시켰고, 청송읍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비 180억 원을 확보해 지역의 잠재력과 고유의 테마를 살려 경쟁력 갖춘 농촌 발전의 거점 도시 또한 육성하게 됐다. 청송군 지방 상수도 현대화 사업비 250억 원을 확보해 주민들에게 보다 맑은 수돗물을 공급함으로써 군민 건강증진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행정 집행의 우선 순위 결정시 가급적 군민들의 의견을 받아 반영토록 하고 있다.윤경희 군수는 앞으로 직원들과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소통할 것이라고 말했다.그는 ‘2019년도 전국지방자치단체 평가’에서 현장중심의 소통행정, 농업 경쟁력 강화, 관광정책 등으로 높은 점수를 받아 농어촌 기초자치단체 82개 군 중 종합 2위를 차지한 것과,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가 4월에 주관한 민선 7기 기초단체장 실천계획평가에서 종합 최우수등급인 SA등급을 받은 것 등은 모두 직원들의 노력 덕분이라고 평가했다.윤 군수는 “남은 3년도 지난 성과와 발전 기반을 디딤돌 삼아 청송의 새로운 미래 청사진을 군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갈 것”이라면서 “솔직히 청송의 새로운 역사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다”고 각오를 피력했다. 그는 지난 한 해 마음을 모아준 군민들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앞으로 군민과 함께하는 행복청송이라는 대명제 아래 ‘미래를 열어가는 희망농촌, 함께여서 따뜻한 나눔복지, 문화로 꽃피우는 지역경제’의 3대 군정목표를 새로이 설정, 추진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김종철기자 kjc2476@kbmaeil.com

2019-07-02

토사구팽 된 외척과 공신(功臣)들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가는 1409년 10월 초순경,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공신(功臣)의 아들 한명이 포항 장기로 유배를 왔다. 10월 2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던 날만 해도 그게 어느 쪽에 붙어있는 땅인지도 몰랐다. 한양에서 말을 타고 영남대로를 따라 9일 반이 걸려 도착한 바닷가 고을은 한없이 빈한해 보였다. 살아갈 날이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형조정랑((刑曹正郞))이라는 중앙 관리였지만 지금은 유배객의 신분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승조(李承祚)였다. 바로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우의정이었던 이무(李茂)의 둘째아들이다.이승조가 장기로 유배 온 사연은 우선 태종의 정비(靜妃) 원경왕후 민씨, 제1·2차 왕자의 난, 민무구·무질의 옥사(獄事),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이무의 옥사에 대한 내막을 알아야 풀린다. 옥사란 반역, 살인 따위의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사건을 말한다. 옥사가 일어나면 관련자들은 대부분 대역죄로 효수되거나 사약을 받아 죽었고, 가족들은 연좌되어 먼 곳으로 유배를 떠나야만 했다.원경왕후 민씨는 이방원의 정치적 내조자이자 동지였다. 뛰어난 결단력으로 남편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된다. 1398년 8월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 때 민씨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몸이 불편한 태조 곁에서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자신이 복통이 심하다는 것을 핑계로 불러냈다. 그리고는 동생 민무구·무질과 함께 친정으로 빼돌렸던 무기와 사병을 내어주어 정도전· 남은을 기습할 수 있게 했다. 정도전·남은 등을 죽인 방원은 이성계가 기거하던 청량전으로 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세자빈 심씨, 방번, 경순공주 등도 모두 제거했다. 이 난을 성공하게 도와 준 민무구·무질 형제는 이래서 태종조 초기까지만 해도 최대 공신이자 외척으로 대우를 받았다.그런데 태종은 보위에 오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계속 늘리는가 하면, 자신의 즉위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원경왕후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불화는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후궁 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았다.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둘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결국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른다.민무구·무질 형제의 옥은 1407년(태종 7) 7월에 발생했다. 이들이 옥사에 연루된 이유는 원경왕후와 태종의 불화도 있었지만, 이들 형제들의 경솔한 입버릇과 방자한 행동들이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원경왕후가 낳은 양녕·효령·충녕·성녕의 4대군 중 양녕에게 의탁하여 권세를 탐했다.이들의 행동은 1406년(태종 6) 8월에 난데없이 일어난 선위파동(禪位波動)을 불러왔다. 선위라 함은, 군주가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군주의 지위를 물려주는 일을 가리킨다. 보통 같은 왕조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말한다. 태종은 1404년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 후, 건강상의 이유로 13세의 왕세자에게 선위 표명하고 신료들의 충성심을 시험했다. 이때 민무구 형제들이 태종이 놓아둔 덫에 걸려들었다. 민씨 형제들은 ‘태종에게는 세자가 있으니 다른 왕자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며 다니다가 협유집권을 도모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것이다.이들 형제들의 행동은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해갔다. 이 일로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고 하륜(河崙)은 책임을 지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6일 후 민무구 형제의 처벌을 청하는 이화(李和)의 상소로 이들도 결국 투옥되는 옥(獄)이 벌어지게 된다.태종은 교서에서 민씨 형제의 죄목을 10가지로 열거했는데 가장 중요한 죄목이 협유집권의 도모였다. 즉, 1402년 왕이 창종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은근히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신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했다는 것 등이었다. 두 형제는 대역죄인(大逆罪人)으로 몰려 연안(延安)으로 귀양 갔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원경왕후가 태종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친정아버지 민제(閔霽)와 연락을 주고받다가 그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태종은 민무구 형제들의 공신녹권까지 박탈해버렸다.태종은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장인 민제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들의 생명만큼은 보전해줬다. 1408년(태종8) 민제의 병이 위독해지자, 태종은 두 형제를 귀양에서 풀어 부자가 만날 수 있도록 했고, 태종도 직접 장인에게 병문안을 갔다. 하지만 사흘이 지난 1408년 9월 15일 민제는 노병으로 죽었다. 태종이 슬퍼하고 친히 상가에 찾아가서 치제(致祭)하였으나, 곧 민무구 형제를 체포하여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409년 10월, ‘이무(李茂)의 난언(亂言)’ 사건이 발생한다. 이무가 주위 사람들에게 “근일에 부산하게 민무구 형제의 죄를 청하는데,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하겠다. 안순(安純) 등의 무리가 붕당을 만들어 매번 민씨 형제의 일을 선동해 죄를 가하려고 하는데, 상감께서 이를 어찌 알겠는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섣불리 내뱉은 이 말이 태종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큰 문제로 확대되었다. 이무와 친한 관리들이 대부분 잡혀와 역모죄로 몰려 죽음을 맞게 된 것이다. 태종은 이 사건을 빌미로 1410년(태종10) 3월 17일, 민무구 형제도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려 처형하였다. 이를 이무의 옥사라고 한다.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1415년(태종15) 세자 양녕대군이 민무구의 동생인 민무휼·무회 형제를 고발했다. 내용은 두 형제의 언행이 불충하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의 불충한 언행이 사실로 밝혀지자, 태종은 1416년(태종16) 이 형제들에도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결국 원경왕후 민씨 집안은 4형제가 참혹하게 죽는 불운한 집안이 되었다. 경솔한 입버릇들이 태종의 무자비하고 의도적인 외척 숙청작업에 빌미를 제공하여 한때 누렸던 영화의 꿈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민씨 집안과 연관되어 피해를 본 이무의 집안은 또 어떠한가. 조선 건국과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방원은 처음에는 쿠데타의 주역들을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봉하여 우대했다. 그런데 이들이 새로운 권력집단을 형성하면서 왕권을 위태롭게 하자 태종은 어떤 방법이로든 공신들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역모로 몰아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이무(李茂)도 그 대상 중 한명이었다.이무와 이방원은 삽혈동맹(6B43血同盟)을 맺은 관계였다. 그런 이무는 1398년(태조 7년)에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여 정사공신에 오른다. 또 1400년(정종 2)에는 판삼군부사로서 이방원을 도와 2차 왕자의(난방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크게 기여하여 좌명공신에도 올랐다.태종이 이무를 죽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1차 왕자의 난 때 이무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중간에 서서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무가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 형제와 더불어 어린 세자를 세우려 하였고 그들과 같이 협유집권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분에 불과했다. 근본적인 이유는 태종이 그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무는 문무를 겸한 문신이었지만, 누구 편도 아니었다. 여말선초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그는 항상 이긴 자의 편이었다. 위화도 회군 후에 이인임의 무리라고 공격받았으나 회군공신이 되었고, 1392년 5월에 정몽주의 남은 무리로 탄핵받아 파직되기도 했지만, 조선왕조의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정사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본래 정도전, 남은 등과 좋았는데 중간에 서서 사태를 살피다 승자를 따랐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무의 이런 어정쩡하고도 승자지향적인 태도는 태종에게 불충으로 비쳤고, 왕권이 제도적으로 안정된 후에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 1호로 분류가 되었던 것이다.태종은 ‘장차의 반역을 말한 것도 반역을 실제로 행한 것과 같이 처벌해야 한다’는 ‘춘추공양전 금장(今將)의 의리’를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내세웠다. 이로써 공신들이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억지(抑止)하고 세자를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의 형성도 미연에 차단하려 했다. 병권을 오래 잡고 있던 이무가 태종에게는 큰 두려움거리였다. 문관으로 입신했으나, 문무를 겸비한 이무는 태조 초부터 죽임을 당한 그 해까지 오랜 기간 동안 병권에 간여하였다. 1396년에는 5도의 병선을 거느리고 왜구의 소굴인 일본의 이키섬(壹岐島)과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충성을 온전히 믿을 수 없는 이무가 병권까지 잡고 있으면서 세자의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태종으로 봐서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었다.언젠가는 이무를 죽여 없애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태종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409년 5월, 우의정겸 판병조판사(右政丞兼判兵曹判事)을 맡고 있던 이무가 태종에게 보고도하지 않고 병조의 인사에 개입하여 민무질 형제와 친한 이지성(李之誠)의 품계와 관직을 올려 줘버렸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병권에 대해 매우 민감해 하던 태종은 1409년 10월 2일 이무를 불러 이제까지 그가 잘못한 일들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창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것도 모자라 10월 5일 사람을 보내 쫓아가 이무가 안성군 죽주(현재의 竹山)에 이르렀을 때 목을 베어 죽였다. 결국 태종은 현직 우의정인 이무의 행동을 모반대역죄로 간주한 것이다.태종은 이 옥사에 다른 좌명공신과 원종공신 여러 명도 연루시켜 같이 참수(斬首)했다. 조희민·류기·조박·윤목·이빈·강사덕 등이 모두 이무와 같은 무리로 몰려 죽임을 당한 공신들이다. 이들의 가족과 친족들에게도 연좌죄를 적용했다. 이에 따라 1409년 10월 2일 어렵게 목숨을 부지한 이무의 아들들 중 둘째 아들인 이승조(李承祚)가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태종이 취한 왕권강화의 희생물인 이무는 뒤에 신원되면서 아들들의 귀양살이도 풀려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이승조는 태천군수, 온성부사, 가선대부 경상좌도수군 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남은 생을 마감했다.민무구 형제와 함께 이무를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간 난언(亂言)은 내용으로 봐서는 모반대역이 아니다. 단지 ‘막되고 잡된 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태종은 이를 빌미로 외척과 많은 공신들을 역모로 몰아 죽였다.이 사건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첫째는 입놀림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고들 한다. 아무리 조심해도 한번 내뱉은 말은 발 달린 말처럼 퍼져 나가 문제를 일으킨다. 평소 언행만 조심했더라면 이들이 목숨을 잃는 화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너무 높은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은 하지 말라’는 경주 최부자집 가훈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인 것 같다.최부자 집안에서는 왜 진사에 합격하고도 대과를 치르거나 관직을 받지 못하게 했을까. 그것은 정치나 권력자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는 꾸짖음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를 돌이켜보면,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치고 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다. 왕권도전으로 몰려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색당파에 휩쓸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원한과 재앙을 흩뿌렸다. 사회의 미덕과 가정의 평온도 훼손되기 일쑤였다.공신의 아들 이승조의 장기현 유배는 이런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떠나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

2019-07-01

차다못해 흘러넘치는 통통한 살을 그 단단한 껍질에 가두느라 게, 너도 참 힘들었겠구나

유년의 추운 겨울밤이었다. 그때는 눈이 참 예쁘게 내렸다. 하얀 스웨터를 짜 입은 아스팔트 골목에 가로등 불빛이 글썽거리고, 저기 모락모락 눈발을 부옇게 지우며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곳엔 어김없이 영덕게 용달트럭이 서 있었다. 술 한 잔 걸친 아버지가 게 몇 마리 담은 비닐봉지 들고 휘적휘적 눈길을 걸어 집에 오면 내복 차림의 나와 여동생은 입에 침을 번들거리며 방방 뛰었다. 층간소음이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 게 두어 마리를 아랫집에 가져다주고 밥통에서 지금 막 찐 야채호빵 여러 개를 받아 왔다. 가위로 자르고 젓가락으로 쑤시고 입으로 쪽쪽 빨면서 발라먹는 게살 맛은 정말 황홀했는데,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하고 또 달짝지근한 것이 쫀쫀하다가 몰캉거리다가 이내 입 안에서 사라지면 그렇게 안타까웠다. 엄마는 살 많은 부위를 우리에게 다 주고 뾰족한 끝마디만 입에 대곤 했다. 여섯 식구가 둘러앉아 양은쟁반에 부려놓은 붉은 게를 나눠 먹던 그 겨울밤이야말로 완전한 행복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서울 소년인 내게 대게는 특별한 먹거리였다.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금처럼 택배가 쉽지 않고, 수산시장에 가면 “바가지 쓴다”던 시절이다. 골목길 어귀에 찜통을 얹은 트럭이 서는 날에만 맛볼 수 있었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처럼 온 식구가 형광등 아래 앉아 게를 다 먹고 나면 엄마는 남은 껍질로 육수를 내 된장국을 끓였다. 참 알뜰하게 먹었다. 이제는 서울에도 대게 전문식당이 많이 생겼다. 수산시장에 가거나 산지에서부터 당일 택배로 받아 편하게 먹을 수 있다. 유통 시스템이 발전하는 사이 대게는 가족의 별미에서 친구들과의 술안주로, 연인과의 데이트 음식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다. 마룻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아 대게를 먹던 가족들은 흙으로 돌아가거나 요양병원에 눕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나만 홀로 옛 동네에 남아 반지하방 창틈으로 다시 오지 않는 영덕게 트럭을 기다린다.“삼춘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것들이다”(백석, ‘여우난곬족’)백석은 1920년대 평안도 지방의 명절 풍경을 시에 자주 그려냈다. 콩가루차떡과 고사리와 도야지비계 따위는 명절 때나 돼야 먹을 수 있는 별미였을 것이다. 모처럼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해 즐거워진 가족들은 “웃고 이야기하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는 놀이에 열중하며 “하로에 베 한필을 짜”고, “배나무접”을 하고,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느라 “눈물을 짤 때가 많은” 삶의 고락을 잊어버린다.백석의 시에서 국수, 무이징게국, 곰국, 달송편을 차려낸 식사가 그렇듯, 서울의 어느 가족에게도 대게를 먹는 일은 일종의 축제였다. 따끈한 김과 달큰한 비린내가 함께 피어오르는 쟁반 앞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행위는 특정한 외부 세계의 물질을 똑같이 몸속으로 들인다는 점에서 유대와 결속의 의미를 갖는다. 함께 울진이나 영덕에 가본 적 없지만, 대게를 먹음으로써 나와 부모 형제 몸속엔 붉은 피 말고도 동해의 물빛과 파도와 뜨거운 해돋이가 푸른 피가 되어 똑같이 흘렀던 것이다.‘대게’와 ‘영덕게’는 꽤 오랫동안 동의어로 여겨졌다. 많은 사람들이 대게 하면 영덕부터 떠올린다. 그만큼 영덕은 대게의 대명사로 일찍이 명성을 얻어 지금껏 대게 생산지로 제일 각광받아 왔다. 그 점 때문에 나는 영덕 대신 울진으로 대게 식도락의 걸음을 돌렸다. 시인이므로 기성의 권위와 질서, 상투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건 근사한 핑계고, 사실 단순한 이유에서다. 영덕 강구항은 너무 번성한 탓에 수선스럽다. 특히 네온사인을 칭칭 두른 대게 간판과 조형물들이 천지사방 가득해 여기가 지구인지 게에게 침공당한 ‘크랩톤 행성’인지 헷갈릴 판이다. 울진 후포항도 비슷하다. 사람 없고 조용한 곳을 찾다보니 그나마 덜 ‘게판’인 죽변항으로 흘러들게 되었다.큰(大) 게가 아니라 다리 생김이 대나무를 닮아 대게다. 박달나무처럼 속이 꽉 차 살이 단단하면 박달대게다. 즉 박달대게 한 마리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심겨진 셈이다. 영덕과 울진과 포항은 대게의 ‘메카’가 자기네 고장이라고 서로 주장한다. 자망어업으로 잡은 것만 박달대게로 인정할 수 있는데, 영덕과 포항 구룡포에만 자망협회가 있어 ‘협회’가 없는 울진의 대게는 자망으로 잡아도 ‘공식’ 박달대게가 아니라는 이상한 이야기도 들린다. 이처럼 대게 ‘원조’ 논쟁들이 대개 ‘게 소리’다. 한 바다에서 잡아 영덕에서 사들이면 영덕 대게, 구룡포에서 사들이면 구룡포 대게, 울진에서 사들이면 울진 대게가 된다는 것을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더는 다투지 말자.들숨에 게 찌는 냄새가 훅 들어오고, 날숨은 아까시 냄새에 흩어지는 죽변항을 천천히 걸었다. 죽변(竹邊)은 대숲의 기슭이다. 대게 식당들이 늘어서 있는데, 내 나름대로 깐깐한 조건을 두고 저울질했다. 그 조건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호객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 소위 ‘스끼다시’로 불리는 곁들임 음식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 셋째, 외관이나 장사 수완이 세련됨보다는 투박함 쪽으로 기울어질수록 좋다. 그런 식당이라야 상차림과 가격에 거품이 안 껴 생산지 대게의 참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식당이 세 조건을 충족하고 있어서 선택이 쉽지 않았지만, 상호명의 콩글리시가 정감을 일으키는 ‘대원대게센타’로 결정했다. 죽변항에서 꽤 유명한 집이다.가게 밖 수조에서 먼저 대게를 골랐다. 주인장이 울진 박달대게를 추천했다. ‘박달’ 완장을 차지 않은 ‘비공식’ 박달대게이지만 씨알이 크고, 살이 꽉 찼는지 배와 다리가 단단했다. 집게발을 거세게 흔들어대는 녀석의 등딱지에는 밤색 난낭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국산의 상급 대게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등딱지에 흰 석회와 따개비가 붙어 있는 것은 보통 러시아산이다. 박달대게 몸값을 익히 알고 있어 꽤 긴장했는데, 주인장은 내 예상보다 훨씬 싼 가격을 불렀다. 격하게 감동해서는 단 한마디 흥정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일일연속극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을 보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대게를 찌는 30분이 마치 30년처럼 느껴졌다. 기다림에 목이 말라 맥주 한 잔을 들이켰다. 기본 상차림은 단출하다. 미역줄기 볶은 것과 콩자반, 생선과 함께 익혀 시원한 맛이 일품인 김치, 도토리묵과 매실장아찌, 그리고 말린 도루묵 조림이 전부다. 경북 바닷가 식당에서는 말린 도루묵 조림이 흔한데, 이게 또 별미다. 천관녀 집으로 가는 김유신의 말처럼, 젓가락이 자꾸 도루묵으로 향하는 걸 겨우 멈추고는 맥주로 입을 헹궜다. 대게가 상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나 묵언의 수행자가 된다. 바깥의 찜통에서 몽글몽글한 김이 솟을수록 내 간절한 허기는 세월의 자욱한 안개 너머 그 옛날 영덕게 트럭이 서 있던 골목으로 달려간다. 허공에 흩어지는 저 희부연 김마저 달고 고소하구나. 찜통 앞을 지키고 선 사람은 주인장인가 내 아버지인가? “거룩하고 아름다운” 등대지기처럼 보인다. 냄새와 풍경, 추억, 그리고 게 찌는 이의 마음까지를 두루 음미할 때 비로소 게 맛을 알 수 있다. “너희가 게 맛을 알아?”라는 유행어는 그냥 우스개가 아닌 것이다.마침내 대게가 상에 올랐다. 은빛 스테인리스 쟁반 위 크고 아름다운 선홍빛 대게가 내 눈엔 수평선을 가르고 솟아오르는 태양보다 장엄하다. 일일드라마를 보던 며느리가 능숙한 가위질로 먹기 좋게 대게를 손질해주었다. 집게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살이 꽉 차다 못해 흘러넘쳤다. 이 통통한 살을 껍질에 가두느라 게도 참 힘들었겠다. 게 다리를 든 것인지 닭다리를 든 것인지 헷갈려 하면서 게살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달달하고 짭조름한 육즙이 입 안에 팡팡 터졌다. 누가 내 몸에다 게 삶은 육수를 바가지로 들이붓는 느낌이었다. 입 안에 몰아치는 육즙의 해일, 잘못하다간 입 밖으로 질질 흘리기 십상이라 나는 서둘러 ‘육즙주의보’를 발령해야만 했다. 앞니에 처음 닿을 때는 껌처럼 탄력 넘치던 속살이 두어 번 오물거림에 완전히 풀어져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그 어떤 키스도 박달대게와의 입맞춤은 이길 수 없다. 고소하고 담백하고 ‘단짠단짠’하며 슴슴하고 또 쫄깃쫄깃 탱글탱글 살살 녹는 게살 맛에 취해 음미고 뭐고 허겁지겁 게 다리를 빨아먹었다. 게살 한 입 먹고 소주 한 잔 마시다보니 어느새 테이블엔 게 껍질과 빈 소주병만 쌓여 있었다. 대게 등짝지에 눌러 담은 내장 볶음밥과 홍게 된장국까지 다 먹고서야 대게 탐미(耽味)와 탐식(貪食)을 마쳤다.먼 등대불빛을 보며 온 가족이 둘러앉아 게를 먹던 시절을 떠올렸다. 지난날을 추억해봤자 마음만 축축해진다. 동생에게 집게발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며 게 다리 개수까지 세어놓던 그 때가 뭐 그립다고. 귀한 박달대게를 혼자 배 터지게 실컷 먹으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코끝은 왜 시린 걸까. 바닷가 시골 밤거리를 홀로 걸으면 일찍 불 꺼진 간판들이 내 어느 한 시절 같다. 그리움은 게 찌는 냄새와 고장 난 네온사인으로 오고, 외로움은 아까시 향기와 냉동창고 수은등으로 온다. 죽변항 허름한 모텔을 향해 터벅터벅, 술 한 잔과 게살 한 점이 아쉬워 편의점 들러 맥주 한 캔과 인스턴트 게살을 집어 들었다. 늦봄의 항구에 달빛이 첫눈처럼 하얗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날 밤 꿈엔 영덕게 용달트럭이 대게 대신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가득 싣고 탈탈탈, 엔진 소리를 내며 기어왔다. 꿈속에서도 게 찌는 냄새가 나 코를 심하게 골았다. 잠귀로 들은 용달차 엔진 소리는 내 코 고는 소리였던 것이다.      /시인 이병철

2019-06-30

“대가야의 빛나는 전통·고령 새 역사 세우기 위해 열심히 달려”

고령군 민선 7기가 1주년을 맞았다. 곽용환 군수는 “지역 발전을 위해 성원을 보내주신 군민 여러분과 군 의회, 공직자들께 감사드린다”며 “중단 없는 군정추진으로 대가야의 빛나는 전통과 고령의 새 역사를 세우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고 지난 시간을 회고했다. 곽 군수는 향후 계획으로 “군민 중심시대로의 변화에 부응하고 행정과 사회 전분야에 대한 혁신을 통해 군민이 감동하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민선7기 1년을 돌아보며고령군 민선 7기 365일은 숨가쁘게 지나왔다. 지역 청년들과 일자리, 영농창업, 육아 정책에 대한 행복공감 토크를 시작으로 출발한 군정 1년은 각계각층과의 소통과 공감에 주력했다. 군정 방향으로 설정한 ▶활력있는 지역경제 ▶세계속의 문화관광 ▶희망나눔 맞춤복지 ▶소통하는 열린행정에도 역량을 집중했다.국가균형발전과 물류망 구축에 효율적인 남부내륙고속철도 고령역 유치도 추진하고 있다. 지난 2월엔 고령역유치추진단을 발족했다. 이들은 가장 경제적인 역간 적정거리, 철도간 연계효과 극대화, 인근 지역 접근성 용이 등의 당위성을 피력하며 고령역 유치에 노력 중이다.고령 경제의 큰 축인 낙동강 경제벨트 완성을 위해 동고령·월성·열뫼·송곡 지구에 60만평 규모의 일반산업단지가 조성 중이기도 하다.건강에 대한 관심과 여가시간 활용이 증가함에 따라 고령군의 레저산업도 각광받고 있다. 다산면과 우곡면에 다산 샤인힐 CC, 우곡 로얄파인 CC의 조기 완공으로 지역주민의 소득증대는 물론 세수확충을 통한 지역개발 촉진이 기대된다.창업·일자리 허브센터 설치, 공장 설립·등록 인허가 원스톱 서비스 확대, 중소기업 운전자금 확대 등을 통해 지역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지역경제의 재투자도 유도하고 있다. 지역경제의 버팀목인 고령 대가야시장은 2020년까지 16억원을 투입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육성해 나간다.△대가야의 세계화·대중화고령군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7 지역관광 발전지수 동향분석’ 결과 관광정책역량지수 부문에서 1등급을 받았다. 고령관광의 저력은 대가야의 빛나는 전통과 군민들의 단합된 힘이다.35만 명의 관광객이 다양한 체험을 즐긴 제15회 대가야체험축제는 ‘대가야의 화합’이라는 주제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의미를 담아 주목받았다. 537억원을 들여 9년에 걸쳐 완공한 대가야생활촌 개장은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가야사 국정과제의 중심인 고령군은 대가야 역사복원과 부흥을 위해 지산동 대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공동추진단 발족에 이어 지난해 8월엔 문화재청, 경남도, 전북도, 경북도, 김해시, 함안군, 창녕군, 고성군, 합천군, 남원시, 고령군 등 영호남 3개 도와 7개 시·군이 업무협약을 맺었다. 지난 3월엔 지산동 고분군의 작은 무덤에서 직경 5cm의 작은 토제 방울이 출토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고령군은 가야금을 통해 대가야의 세계화와 대중화를 열어가고 있다. 세계 현(絃)페스티벌은 지역의 대표적인 콘텐츠인 우륵과 가야금의 세계화를 위한 디딤돌로 고령군립가야금연주단과 서울대학교 국악과 초청 공연을 비롯한 그리스 전통현악기 연주, 폴란드 현악 4중주 공연 등을 선보여 가야금의 우수성을 널리 알렸다.대가야생활촌과 함께 박물관, 역사테마관광지, 농촌체험특구를 연계해 관광객뿐 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관광·여가활동 기반 마련에도 힘을 쏟고 있다.△농업과 농촌이 만들어가는 미래 고령농산물의 안정적 판로확보와 산지유통의 조직화·규모화·현대화를 위해 농산물종합유통센터를 확충하고, 농산물 저온저장 시설과 농기계임대사업소를 확대해 농가의 안정적인 소득과 농업의 생산성을 높여 나가고 있다.안전하고 깨끗한 영농 지원으로 쾌적한 농촌환경도 조성 중이다. 농업기반시설 정비사업을 위해 20억원의 사업비로 영농기반확충정비사업, 재해예방노후수리시설정비사업 등도 펼친다. 새로운 소득원 개발과 농업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다양한 교육과 컨설팅을 실시했다.고령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대가야농업기술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농업 발전을 선도적으로 이끌 소수정예 전문 농업경영인을 양성하는 과정은 새로운 농업기술 습득, 생산과 가공기술 발전, 6차산업에의 대비를 준비하고 있다.농림축산식품부가 주관하는 2019년 일반농산어촌개발 공모사업에는 총 5건의 사업이 선정돼 사업비 89억원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농촌거점기능 강화와 지역자원을 활용한 특색 있는 마을 조성으로 지역의 균형 개발과 살기 좋은 농촌 환경을 조성해 나갈 방침이다.△안전하고 쾌적한 도시 고령국토교통부가 실시한 2019년 도시재생뉴딜 공모사업에 대가야읍 중심지역이 최종 선정돼 사업비 133억을 확보했다. 도시재생 뉴딜사업은 현 정부 국정과제로 쇠퇴한 도시를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재활성화시켜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고자 하는 도시혁신사업이다.국지도 67호선 운수~용암 구간 조기 개통, 지방도 905호선 득성~나정 구간 확장, 개진 열뫼~박석진교~현풍 구간 광역도로 개설 등으로 사통팔달의 편리한 교통인프라를 구축도 준비했다.고령군 상수도 보급률은 96.3%(2018년 말)로 경상북도 군부 중 가장 높다. 40억원을 투입해 대가야읍 고아리~쌍림면 고곡리 구간에 관로 매설을 통해 상수도 사용에 불편을 겪는 1천842가구 3천500여명의 주민들에게 맑고 깨끗한 지방상수도를 공급할 방침이다. 또한 환경부 공모사업으로 선정된 소가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에도 총사업비 87억원을 확보했다. 소가천 생태하천 복원사업은 덕곡면 원송리에서 후암리에 이르는 6.5km 구간에 하천생태복원 시설을 정비하는 것이다.△모두가 더불어 잘사는 생활밀착형 복지2014년부터 시작한 대가야희망플러스는 지역연계 모금사업으로 고령군·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고령군지역사회보장협의체와의 협약을 통해 지역민의 기부금을 어렵고 소외된 복지 사각지대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또한 중증장애인과 거동 불편 저소득층 100세대를 대상으로 원격조정 LED 실내등 설치사업을 추진해 장애인들의 생활 속 불편 해소에 도움을 주었다.대가야읍에 영유아를 위한 교육·문화 복합건물인 ‘아이나라 키즈교육센터’는 영유아를 위한 장난감도서관, 놀이공간과 교육실을 설치해 부모와 아이가 교육, 놀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더불어 연내에 출산통합지원센터를 설치해 원스톱 출산통합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어르신들이 건강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책도 마련했다. 경상북도에서 가장 먼저 개소한 치매안심센터는 경증 치매환자를 대상으로 전문적인 인지재활프로그램과 돌봄을 무료로 제공한다.올해 400여 명이 참석한 다문화 어울림한마당 개최로 지역주민과의 소통 시간을 가졌으며, 다문화가족 5쌍이 군민들의 축복 속에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군은 이들의 안정적 정착과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방문교육서비스, 한국어교육, 다문화가족 공부방, 언어발달 지원사업 등을 추진 중이다. 이런 성과로 2018 의약관리사업 평가 우수기관에 올랐고, 도민건강증진사업에서 2년 연속 최우수기관이 됐다.△변화와 혁신으로 성장하는 고령고령군은 재정자립도 21.47%로 경북 23개 시군 중 8위, 군부 중 2위다. 국비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결과 고령군 개청 이래 최초로 예산 3천억 원 시대를 열기도 했다. 국·도정 협력을 위해 중앙부처를 방문해 군이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의 시급성과 당위성을 피력하고, 중앙부처와의 인적네트워크를 강화했다.고령군의 소통과 공감행정은 지역 현안에 대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책에 반영해 군민들의 만족도를 높이고 있다.고령군교육발전위원회는 군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로 목표액인 200억 원을 초과 달성해 교육환경 개선과 우수인재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지원사업을 추진 중이다. 또 진로진학 캠프 운영, 중국 청소년과의 상호교류, 미국 루즈벨트고·워싱턴 청소년재단의 홈스테이 운영으로 글로벌시대에 맞는 국제적 능력을 갖춘 지역 인재를 육성해 나갈 계획이다.이와 관련 곽용환 군수는 “거대한 변혁의 파도가 밀려오는 이때, 우리가 가진 통합과 발전의 핵심자원으로 이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며 “대가야의 찬란한 문화, 애민과 통합의 얼이 깃든 고령군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도록 군민 여러분의 성원과 지지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전병휴기자kr5853@kbmaeil.com

2019-06-30

초록에 맘 씻고, 바다에 땀 씻고… 이곳이 소·확·행

이탈리아 남부 도시 바리(Bari)와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Tirana)는 아드리아해(海)를 사이에 놓고 마주보고 있다.두 도시를 오가는 페리(Ferry)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채의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한나절이 훌쩍 넘는 시간도 지겹지 않다.그곳을 찾는 여행자들은 남부 이탈리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선 수영이나 해양 레포츠를 즐기고, 아드리아해를 건너 알바니아로 가서는 한적한 시골 마을 울창한 숲 속에서 일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힐링(Healing)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행의 패턴도 바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관광지를 선호한다. 이탈리아와 알바니아를 묶어서 여행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그렇다면 한국에서 ‘즐거움’과 ‘힐링’이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지역은 어딜까?여름 휴가철이 성큼 다가오면서 깨끗하고 넓은 해변과 초록빛 메타세쿼이아 수천 그루가 눈을 편안하게 해주는 숲, 여기에 명상을 통한 치유의 공간까지 갖춘 영덕군이 주목받고 있다.휴가지를 고민하는 독자들을 위해 ‘영덕 관광의 보석’이라 할 수 있는 고래불해수욕장, 벌영리 메타세쿼이아 숲, ‘새로운 인문힐링센터’를 지향하는 여명을 미리 찾아가봤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고래불해수욕장영덕군 병곡면에 길게 드러누운 짙푸른 바다는 볼 때마다 감탄사를 내지르게 만든다. 바로 고래불해수욕장.사파이어처럼 반짝이는 물빛의 아름다움이 이탈리아 남부 해변에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숙박 시설과 휴게 시설이 잘 정비돼 가족여행에 나선 노인과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해수욕장이니 수영과 해양 레포츠를 즐길 수 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 그 외에도 고래불해수욕장은 여러 매력을 지녔다.특히 2017년 개장한 고래불국민야영장이 가족과 연인 단위의 캠핑족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고래불해변은 야영장으로 인해 여름만이 아닌 사계절 내내 찾을 수 있는 관광휴양지로 변모하고 있다”는 것이 영덕군의 설명이다.푸른 바다와 울창한 소나무 숲이란 자연환경에 동물 모양의 귀여운 카라반(Caravan) 등 다양한 숙박 시설과 부대시설을 갖춘 고래불야영장은 상주-영덕간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입소문을 타면서 개장 1년 만에 6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불러들였다. 이를 통한 수입도 7억7천만 원. 지역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영덕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주말이면 하루 평균 500여 명이 방문해 인근 시장과 마트 등을 이용하고, 지역민 10명을 야영장 관리인으로 고용해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고래불야영장은 주차장과 샤워장 등을 유료 예약자 전용 시스템으로 운영해 편의성을 높였다. 해변과 소나무 숲을 따라 들어선 다양한 캠핑사이트는 엄마의 손을 잡고 영덕을 찾은 아이들의 웃음을 부른다.특히 각종 가전제품이 완비된 25동의 카라반은 성수기면 ‘예약 전쟁’이 벌어진다. 텐트장(110면)과 오토캠핑사이트(163면) 역시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게 고래불해수욕장의 여름 풍경이다.아동용 물놀이장과 유아 풀장의 인기도 높다. 여름 휴가 때면 최소 3만 명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이런 상황을 반영한 듯 주한 중국대사도 고래불야영장을 방문했고, KBS 등 방송국의 취재 열기도 뜨겁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5천여 명의 청소년이 참가한 ‘국제 청소년 캠페스트’도 열 수 있었다.자전거 타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대진해수욕장-고래불해수욕장-병곡면 백석마을’을 잇는 8km 길을 바람과 함께 달려볼 수 있다. 이 구간은 행정자치부가 선정한 ‘아름다운 자전거길 100선’에 포함되기도 했다.지난해 7월 고래불해수욕장을 찾았다는 지인은 “카라반이 이국적인 풍경을 선물해줬고, 소나무 사이로 들어선 색색깔의 텐트를 보면서 동화 속 풍경을 떠올렸다”며 “모처럼 아이들과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었기에 올해도 가고 싶다”는 방문 소감을 들려주며 웃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둔 현재 고래불야영장 관리사무소 전화기엔 불이 나고 있다. 매일 100여 통의 예약 문의 전화가 폭주하고 있는 것. 이처럼 인기 좋은 야영장이지만 영덕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적인 시설 보완과 이용객 편의 향상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다. 인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바닥분수대와 물놀이장을 해마다 깔끔하게 보수하고, 경관조명을 설치하며, 비를 피할 공간과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벤치를 만든 것이 바로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전국에서 많은 분들이 고래불해수욕장을 찾고 있으니, 영덕군 대표 관광지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도록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영덕군의 약속을 기억할 여행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메타세쿼이아 숲과 명상센터 ‘여명’고래불해수욕장에서 바다가 주는 행복감을 만끽했다면, 이제 영덕의 숲으로 가보자.영해면 벌영리 20만 평의 땅에 조성된 메타세쿼이아 숲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이 숲에는 메타세쿼이아 외에도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이 자란다.서울의 한 사업가가 조부의 묘 주위에 한 그루씩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시나브로 지금의 거대한 숲이 됐다.젊은 연인들 사이에서 ‘인생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핫 플레이스’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은 “조용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압권”이라는 방문자들의 평가를 받고 있다.게다가 별도의 입장료 없이 아름다운 숲을 거닐 수 있어 주머니 가벼운 데이트족들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좋아한다.사유지(私有地)라 별도의 안내판이 없기에 메타세쿼이아 숲을 찾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일까? 원래 길을 헤매는 ‘작은 모험’은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닌가.여행과 명상이란 단어를 결합해 만든 인문힐링센터 ‘여명’ 역시 영덕군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부상 중이다. “현대인의 황폐한 마음을 다스리는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한의학 원리에 기초한 기공체조도 경험할 수 있다”고 여명 관계자는 말한다.일단 힐링센터 여명에 들어가면 휴대폰, 인터넷과는 잠시 이별해야 한다.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 것은 물론 수신 자체가 불가능하다.하지만, 휴대폰 게임이나 인터넷 검색을 대신할 소소한 기쁨이 방문자들을 기다린다. 여명에선 음양오행에 맞춘 자연식 건강 식단이 제공되고, 전문 강사들은 몸과 마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노하우를 알려준다.울창한 숲 속에 포근히 안긴 듯 만들어진 한옥형 시설인 여명은 각종 워크숍과 세미나 진행도 가능하다.여명을 이용해본 경험자들은 “숲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평소엔 하기 어려웠던 명상을 해보고, 산길을 쉬엄쉬엄 걸으면서 삶을 돌아보는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라고 입을 모았다.영덕군 창수면에 또 하나의 ‘힐링 공간’이 탄생했다. 휴대폰과 텔레비전이 어지럽게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자극’으로부터 잠시나마 탈출하고 싶은 여행자들은 분명 이 소식을 반길 것이다.선비의 자태와 그윽한 기품 흠뻑병곡면 칠보산 자연휴양림영덕군이 소개하는 관광지는 고래불해수욕장, 메타세쿼이아 숲, 힐링센터 여명 외에도 많았다. 오염되지 않은 산과 바다가 준 선물들이다.1993년 문을 연 병곡면 칠보산 자연휴양림은 칠보산 동남쪽에 위치했다. 선비의 자태를 지닌 기품 있는 소나무 아래서 즐기는 휴식이 높은 만족감을 준다는 평가다.산 정상에 만들어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도 일품이다. 푸른 동해를 배경으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은 새로움과 희망의 메타포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칠보산에는 일곱 가지 보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기, 돌옷, 철, 구리, 더덕, 멧돼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뭘까? 그걸 직접 찾아보는 재미도 놓치면 서운하다.칠보산 자연휴양림은 산림문화관, 수련장, 등산로, 산책로, 어린이 놀이터 등을 갖췄다. 이곳을 찾는 나이 지긋한 관광객들은 근처에 있는 백암온천을 들르는 경우가 흔하다.고려의 빼어난 학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이 태어난 ‘괴시마을’도 한 번쯤 돌아볼 가치가 충분하다. 기와가 멋스러운 전통가옥들이 마을을 고풍스럽게 만들어주고 있다. 마을 이름을 지은 이색은 ‘고래불해수욕장’도 작명했다.망월봉(望月峰) 자락에 소담스럽게 자리한 괴시마을에선 ‘동해안 3대 평야’ 중 하나로 불리는 영해평야가 가깝다. 수려한 산세와 넓은 들을 두루 갖춘 살기 좋은 땅인 것이다.괴시마을의 집들은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200년 넘는 시간을 의연히 이겨낸 집은 하나의 ‘인격체’로 보이기까지 한다.괴정(槐亭), 영해 구계댁(邱溪宅), 영해 주곡댁(注谷宅), 물소와서당(勿小窩書堂) 등은 문화재이기도 하다. 모두가 알다시피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경험은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2019-06-27

“손으로 만든 음식은 입에 남고, 머리로 만든 음식은 몸에 남는다. 가슴으로 만든 음식은 가슴에 남는다.”

전회 고기, 국수 이야기에 이어,대구, 경북의 노포를 추가로소개한다.이 식당들 역시 ‘30년 이상 된노포들’이다.“손으로 만든 음식은 입에 남고,머리로 만든 음식은 몸에 남는다.가슴으로 만든 음식은가슴에 남는다.”30년 이상 된 노포의 음식은 우리마음과 가슴에 남았다.◇ ‘가슴에 남는 음식으로 기억될 식당들한식은 ‘국과 밥’이 주인공이다. ‘탕반음식(湯飯飮食)’이다. 탕 중에도 가장 귀한 것, 앞자리는 ‘대갱(大羹)’이다. ‘대(大)’는 ‘바탕’ ‘으뜸’이라는 뜻도 있다. 으뜸이 되는 국물, 가장 귀한 국물, 대갱은 고깃국물이다. 고깃국물 중에도 “매실이나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은 국물”이다. 맑은 곰탕이 대갱이다. 경북, 대구는 향교 제사와 손님 접대가 흔했던 곳이다. 곰탕은 늘 가까이 있었다. 전남 나주도 큰 도시였다. ‘나주곰탕’이 유명한 이유다. 곰탕집 옆에는 나주 관아와 객사(客舍)가 있다.영천 공설시장에는 곰탕 골목이 있다. 곰탕 노포들이 줄지어 있다. ‘포항할매집’은 3대 전승, 60년을 넘긴 노포다. 시장통의 허름한 건물이지만, 전국으로 택배도 하는 이름난 맛집이다. 서울 유명 설렁탕 노포들은 메뉴에 곰탕을 넣지 않는다. 곰탕과 설렁탕은 다른 뿌리를 가진 음식인 줄 알기 때문이다. 곰탕, 곰국은 제사에 사용하지만 ‘설렁탕 제사’는 없다. 영천 ‘포항할매집’의 곰탕은 변형된 곰탕이다. 메뉴에 ‘살고기(살코기)곰탕’이 있다. ‘살코기로 끓이지 않은 변형 곰탕’이 있다는 뜻이다. 곰탕은 원래 살코기로만 끓인 것이다.포항 ‘장기식당’의 곰탕도 ‘변형된 곰탕’이다. 머리 고기 등이 주류다. 정갈하게 손질한 머리 고기가 아주 좋다. 운이 좋으면 우설(牛舌)도 한두 점 맛볼 수 있다. 양이 푸짐한 편이고 국물 맛도 수준급이다. 역시 3대 전승, 60~70년의 업력을 자랑한다.‘박소선현풍할매곰탕’도 노포다. ‘현풍면’은 원래 ‘현풍군’이었다가 경북 달성군에 편입된다. 오래지 않아 달성군이 대구로 편입되면서 현풍면은 대구가 되었다. 현풍면 상리에 현풍향교가 있다. 고속도로 공사 당시 인부들을 위한 음식점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지만 역시 뿌리는 ‘향교, 관아 있는 곳의 곰탕’이다.대구 육개장 노포는 ‘국일따로국밥’이다. 업력이 70년을 넘겼다(1946년 창업). 곱게 다진 마늘이 육개장 그릇에 얹혀 있다. 상당히 많은 양이지만 ‘마늘 추가’하는 이들도 많다. ‘경상감영공원’이 지척에 있다.‘옛집식당’은 달성공원 부근에 있다. 업력은 70년을 넘겼다(1948년 창업).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을 며느리가 이어받았고, 지금은 3대 전승, 아드님이 어머니와 같이 운영 중이다. 고사리를 많이 사용하지 않고, 대파의 흰 부분을 사용한다. 푸른 부분을 제거한 대파는 단맛을 강하게 낸다. 인터넷에 ‘영혼을 울리는 맛’이라는 극찬이 있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방송 출연을 하지 않는다. 방송을 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오시는 손님 맞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야유회 등의 행사에 단체 주문을 하는 손님도 많다.‘만경관’ 옆에 있었던 ‘벙글벙글’ 집도 대구의 육개장 노포다. 업력이 50년을 넘겼다(1964년 개업). 시작은 의성 안계의 장터다. 국물이 달짝지근하고 세련된 맛이다. 반찬 중, ‘쪽파 김무침’은 압권이다. 부순 김 조금에 쪽파를 더하고 무쳐낸다. 반찬이지만 ‘시그너처 메뉴’다. 지금은 달성 화원읍 본리로 이사했다.안동 중앙신시장의 ‘옥야식당’은 육개장과 비슷한 음식이지만 반드시 ‘선짓국밥’이라 부른다. 메뉴도 딸랑 선짓국밥 하나다. 육개장에는 고사리, 토란대 등이 있어야 한다. 술꾼들을 위한 음식이라기보다 식사용이다. 이름은 ‘선지’지만 대파가 많고, 대파의 달짝지근함이 아주 좋다. 모녀가 운영하는데, 친절하고 푸근하다. ‘멀리서 왔다’고 하면 주차비로 1천원짜리 한 장을 되돌려주기도 한다.경주 ‘팔우정해장국골목’의 ‘팔우정해장국’도 노포다. 이 골목의 원조집이다. 주인 할머니의 연세가 많다. 몇 해 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조미료,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말린 모자반으로 맛을 냈던 집이다.◇ 바다 생선 귀한 곳의 민물 생선서해안은 멀고, 동해안은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안동 간고등어가 생긴 이유다.안동의 ‘물고기식당’은 이름부터 담백하다. ‘물고기’는 민물고기, 그중에서도 은어, 빙어, 피라미 등을 튀기거나 조림으로 내놓는다. 나이 드신 노부부가 운영하는데 음식 맛은 재볼 필요가 없다. 조미료, 감미료를 사용하기 전의 음식 맛이다. 반찬을 12가지 정도 내놓는데 하나같이 맛깔나다. 메뉴의 ‘피리’는 피라미다. 생선조림과 같이 내놓는 청국장도 일품이다.미꾸라지는 천대받던 물고기다. 가난한 시절, 추어탕은 괜찮은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대구 동성로의 ‘상주식당’은 미꾸라지 느낌이 없는 추어탕 전문점이다. 식당 마당 한쪽에는 늘 가지런히 손질한 배춧잎이 줄지어 있다. 미꾸라지를 곱게 간 다음, 걸러서 사용한다. ‘갈추’다. 추어탕이지만 미꾸라지는 찾아볼 길이 없다. 간장 베이스의 곱게 간 추어탕. 남매가 운영한다.다슬기는 이름이 많다. 충청도에서는 올갱이 혹은 올뱅이, 호남에서는 데사리라 부른다. 경북은 남과 북이 부르는 이름이 모두 다르다. 남쪽에서는 고디라고 부르고, 북쪽에서는 골부리, 꼴부리라 부른다.남쪽인 영천에는 ‘영천금호할매추어탕고디탕’이 있다. 고디탕은, 아마 금호강에서 잡은 다슬기로 만들었을 것이다. 추어탕과 다슬기 탕인 ‘고디탕’이 주력 메뉴다. 노포이니 실내는 어둡고 낡았다. 이른 아침부터 식사를 내놓는다. 밑반찬이 짭조름하고 먹을 만하다.안동 길안에는 길안천이 있다. 낙동강의 맑은 상류다. 작은 읍내에 ‘장터분식’이 있다. 가게 주인은 이영란 씨. 가게를 운영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다. 노포 중 하나로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이영란 씨의 골부리 채집 기간이 30년을 넘겼다. 건강 문제로 골부리 잡이를 시작했다. 인근 길안천 바닥에는 고운 자갈이 많다. 골부리 잡이를 하느라 돌을 디디고 다니는 사이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 세월이 30년이다. 비어 있는 ‘장터분식’을 인수했다. 직접 잡은 골부리로 국을 끓인다. 맛의 비결은 간장이다. 조선간장을 고집하고 다른 곳처럼 된장을 넣지 않는다. 간장의 예전 이름은 ‘청장(淸醬)’이다. 장을 담그면 맑은 장이 위로 뜬다. 아래에는 된, 뻑뻑한 장이 있다. 되다고 해서 된장이다. 청장은 맑다. 맛도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부추가 골부리 맛을 해친다고 아욱을 사용한다. 왜 아욱을 쓰느냐고 물었다. 그저 “고향(경북 영양 청기면)에서 그렇게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경산시 하양읍의 ‘중남식당’도 수준급의 집이다. 골부리무침과 한식 밥상을 메뉴로 내세웠다. 골부리 국 혹은 무침이 나오는, 30가지 정도의 반찬이 풍성한 한식집이다. 대단한 반찬이 없으면 ‘백반집’이지만 백반집으로 부르기에는 반찬 가짓수가 너무 많다. 가격도 싸고 음식도 수준급이다.경주의 ‘숙영식당’도 마찬가지. 보리밥 전문점임을 내세우지만 역시 백반집이다. ‘ㄷ’ 자 집의 마당 한가운데 작은 정원이 있다. 허술한 가정집인데 내부는 깔끔하다. 음식도 수준급으로 깔끔하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음식들의 간이 거친 듯하지만, 아주 좋다.50년의 업력을 자랑하는 안동 월영교 부근의 ‘까치구멍집’도 빼놓을 수 없다. 헛제삿밥이다. 제사 모시고 나서 먹었던 나물 비빔밥이 일품이다. 간고등어를 비롯하여 제사 음식들을 제대로 내놓는다. 음식의 중심은 곰탕(대갱)과 나물이다. 예전에는 댐 건너편 관광지구에 있었다.식당은 아니지만, ‘경당종택’의 아침 밥상을 개인적으로는 최고로 친다. 평범하지만 정갈한 밥상이다. 진귀한 식재료도 없다. 일상으로 만나는 식재료로 손님맞이 상을 내놓는다. 한식의 길이다. 종부 권 순 씨의 시집살이가 50년쯤 된다.중식은 이래저래 경북, 대구에서 사라지고 있다. 만두, 짜장면, 짬뽕 등은 중식의 서민 메뉴다.문경 점촌읍의 ‘영흥반점’과 대구 ‘진흥반점’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포다. 만두의 ‘대구 버전’인 납작만두는 미성당이 오래된 가게다. ‘영흥반점’은 탕수육이 유명하다. 튀김의 색깔은 희고, 소스는 맑다. 쫄깃한 찹쌀 탕수육이다. 탕수육 먹으러 왔다가 짬뽕 맛을 보고 놀라는 이들이 많다. 메뉴 중에 ‘야끼우동’이 있다. 화상노포(華商老鋪)다. 대구 ‘진흥반점’은 배춧잎 대신 김치 느낌의 채소를 사용한다. 국물 맛이 뛰어나다.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는다.‘미성당’의 납작만두는 만두 부침개다. 기름에 얇게 지진 만두가 재미있다. 50년을 넘겼다.포항 토박이들은 “물회 맛은 생선과 고추장 맛”이라고 단언한다. 맹물이나 얼음, 곱게 간 얼음으로 물회를 완성한다. 별도로 만든 육수는 피한다. 상당수가 사이다와 조미료 섞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물회 노포는 얼마 전 회, 물회 편에서 소개했다.영덕 강구항의 ‘청송식당’도 물회와 곰치국으로 유명한 노포다. 허름한 분위기와는 달리 음식은 정갈하다. 물회 맛을 가린다고 김 가루도 사용하지 않는다. ‘영덕미주구리(물가자미)물회’의 대표선수 격이다./황광해(맛칼럼니스트)

2019-06-26

숲에서… 온천에서… 바다에서 자연이 선사하는 푸짐한 ‘욕(浴)’ 즐겨볼까요

울진에는 다양한 즐거움이 있다.경북 북동쪽 강원도와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울진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순수한 자연과 다양한 매력을 가진 힐링의 공간이 있다. 또한 울진은 ‘욕(?)’을 즐기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울진에서 즐기기 좋은 욕(浴)은 산림욕, 온천욕, 해수(풍)욕으로 일명 삼욕(三浴)이라 일컬어진다.‘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으로 선정된 국내 1호 금강소나무 숲길과 더불어 울창한 산림에서 미세먼지 걱정없이 산림욕을 할 수 있고, 112km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동해에서 해풍(수)욕을, 입소문을 통해 효능과 효과를 인정받은 백암·덕구에서 온천욕까지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울진에는 명품 숲도 있다. 하늘로 곧게 뻗은 자태, 기존의 소나무와는 다른 곧고 붉은 줄기. 모양새부터 남다른 울진의 소나무 금강송이다. 금강송은 예부터 궁궐을 지을 때나 왕실의 관으로 쓰인 귀한 나무다. 특히 울진 금강송숲은 조선시대부터 황장봉산이라 하여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철저하게 보호·관리되었다. 울진에서는 금강송과 함께 할 수 있는 특별한 휴식이 기다리고 있다.◆ 울진군의 새로운 관광명소 ‘금강송 에코리움’대한민국 지자체 중 유일하게 금강송 숲, 바다, 온천이 공존하는 울진은 청정 자연을 기반으로 특별한 치유의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금강송 에코리움은 울진 금강송을 테마로 한 체류형 산림휴양시설로 금강송 테마전시관, 황토찜방을 비롯해 150여명의 숙식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인 펜션이나 콘도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에코리움은 숲을 통한 쉼과 여유 그리고 치유라는 콘셉트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금강송 에코리움은 울진금강소나무를 소재로 한 치유와 체험위주의 산림생태휴양을 테마로 ‘2011년 문화관광부 3대 문화권 문화·생태관광 기반사업’에 선정됐다. 울진군 금강송면 소광리(솔평지) 일원에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총사업비 421억원을 투입해 체류형 산림휴양시설을 조성했다.주요 시설로는 금강소나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금강송 테마전시관, 체험객의 안내 및 각종 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금강송 치유센터, 그리고 체험객의 편의를 위한 수련(숙소)동과 황토찜질방, 금강송숲 탐방로가 있다.금강송 에코리움은 체험과 휴식이 함께하는 수련시설로 금강송 테마전시관을 제외한 시설들은 프로그램 이용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울진군은 금강송 에코리움과 연계된 다양한 관광자원도 갖추고 있다. 아래 그것들을 소개한다.◆ 금강소나무숲길과 왕피천생태탐방로산림청이 국비로 조성한 1호 숲길인 금강소나무숲길은 자연 그대로를 살린 친환경적인 숲길이다. 금강소나무 원시림 보존지역으로 가장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세계 자연유산 등록을 추진할 만큼 보존가치가 있는 숲으로 그 중요성과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숲길탐방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수백 년 된 금강소나무의 피톤치드로 지친 몸과 마음에 건강과 활력을 불어넣는 에코힐링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매주 화요일은 휴무일이며, 산불조심 기간에는 산림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한다. 탐방 예약은 최소 3일전 홈페이지 (www.uljintrail.or.kr)를 통해서 하면 된다. 문의는 054-781-7118왕피천 유역은 자연자원과 생물다양성이 풍부해 2005년 환경부로부터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천연기념물인 산양을 비롯해 멸종위기종 하늘다람쥐, 수달 등과 고란초, 노랑무늬붓꽃, 꼬리진달래 등 다수가 서식·관찰되고 있다. 생태탐방로는 각각의 주제를 가진 4개 구간이 운영 중이며, 주변에는 농업과 임업을 생업으로 삶을 이어가는 주민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숨쉬고 있다. 또한 인근엔 천축산 고산습지와 국보를 간직한 불영사, 군립공원인 불영사계곡 등이 산재돼 산촌과 계곡의 특색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로 이름이 높다.◆ 아름다운 울진의 해수욕장112km의 해안선을 따라 조성된 울진의 해수욕장들은 소박하고 깨끗하다.흔히 알고 있는 여름 해수욕장의 분주함 대신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다를 즐길 수 있다. 또한 어느 해수욕장에서든 해수욕과 어항의 풍물, 그리고 배후의 절경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망양정해수욕장은 근남면 산포리에 위치한다. 450m 가량 길게 해변이 이어져 있다. 불영사 계곡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왕피천을 끼고 있으며, 해수욕장 바로 뒤 나지막한 언덕 위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자리했다.기성망양해수욕장은 하늘을 향해 시원스럽게 뻗은 해송과 4km에 가까운 백사장이 어우러진 곳으로 수심이 비교적 얕고 백사장이 완만한 것이 특징이다. 구산해수욕장은 우거진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백사장 길이가 400m쯤 되며 모래와 물이 깨끗하기로 소문난 해수욕장이다. 근처엔 관동팔경의 하나인 월송정이 위치해 있다.북면 나곡리에 자리한 나곡해수욕장은 아름다운 바위섬 경치가 해금강을 방물케 하는 곳이다. 20분 거리에 덕구온천이 있으며 규사 성분의 백사장이 600m 가량 넓게 펼쳐져 있다.후정해수욕장은 푸른 소나무와 모래밭이 매혹적인 해수욕장으로 죽변항을 끼고 있다. 봉평해수욕장에서는 야영도 가능하다. 2~3분 거리에 울진봉평신라비가 있고, 죽변항이 인접해 있어 싱싱한 해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후포해수욕장은 울진군에서 가장 남쪽인 후포면 삼율리에 위치했다. 깨끗하고 고운 모래톱이 인상적이며, 해수욕 외에 후포항에서 싱싱한 회와 어패류를 맛볼 수 있어 인기가 높다.◆ 해양레포츠의 천국 울진천혜의 자연 조건을 활용한 울진의 해양레포츠센터는 국내 최대의 스쿠버 풀로 해양스포츠 체험관광지인 동시에 교육훈련장이다. 초보자부터 전문가까지 쉽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문의는 054-781-5115. 후포 앞바다에 위치한 요트경기장은 해양레포츠의 중심에서 코리아컵요트대회, 전국윈드서핑대회 등을 개최했고, 앞으로도 각종 대회가 치뤄질 예정이다. 요트학교에서는 요트를 비롯한 해양레포츠 체험이 패키지로 진행되며,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된다. 예약 문의는 054-788-4777.후포 등기산스카이워크는 국내 최대 길이인 135m, 폭 2m, 높이 20m로 조성돼 있다. 강화유리 구간 밑으로 아찔하지만 아름다운 후포 바다를 볼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스카이워크 전망대에 설치된 선묘룡 조형물은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일화를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다. 또 등기산스카이워크가 위치한 등기산공원에는 등대 미니어쳐 공원과 신석기유적관도 자리하고 있다.◆ 빼놓으면 아쉬운 울진의 계곡들울진 덕구계곡은 응봉산(일명 매봉산)에서 온천이 있는 덕구리까지의 계곡으로 중간에 선녀탕, 옥류대, 무릉, 형제폭포 등이 자리했다. 특히 계곡 중간지점에 위치한 용소폭포는 용이 지나간 듯한 꿈틀거림의 흔적이 암벽에 새겨져 있으며, 그 위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린다.신선계곡은 백암산의 숨은 비경이다. 선시골 계곡이라고도 불리며, 소나무와 참나무가 울창하게 덮여있고 계곡 곳곳에 수십 개의 늪과 담이 있다. 물이 맑고 깨끗하며 갖가지 형상을 한 바위들과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자아낸다. 특히 일급수에만 서식한다는 도롱뇽 같은 생물도 간간히 발견할 수 있다.불영계곡은 행곡리에서 금강송면 하원리까지 15km에 이르며 기암괴석과 깊은 계곡, 푸른 물이 절경이다. 1979년 12월 11일 명승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여름철에는 계곡 피서지로, 봄·가을에는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겨울철 설경 역시 아름답다. 의상대, 창옥벽, 조계등, 부처바위, 중바위, 거북돌, 소라산 등 온갖 전설이 얽혀 있는 절경지들도 많아 관광객의 호기심도 자극하는 곳이다./주헌석기자 hsjoo@kbmaeil.com

2019-06-26

정몽주의 무리이니 경상도 장기현 유배를 명하노라

조선조 맨 처음 포항 장기로 유배를 온 설장수(偰長壽)는 위구르족(Uighur)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사람이다.원나라에서는 위구르를 고창(高昌)이라고 불렀는데, 설장수의 아버지인 설손(偰遜)은 고창 설(偰)씨의 후손이다. 원나라에서 중앙관료로 활동하였던 사람들 중에는 고창 설씨 가문이 막강했다. 이는 시조가 칭기스칸에 협조한 공로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문이 유학을 수용하고 자녀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시조인 위에린테무르(岳璘帖穆爾)는 무신이었지만 자식들에게 논어·맹자·사서 등을 공부시켰다. 때문에 그의 가문에서는 과거 합격자가 줄줄이 나왔을 뿐 아니라 설손의 3대 조부는 원사(元史) 열전 중 충의(忠義)편에 기록될 정도로 뼈대 있는 가문이 되었다.설손은 원나라 황실 교육기관인 단본당(端本堂)에서 황태자에게 경전교육을 담당했다. 이 때 고려 충숙왕 둘째 아들인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공민왕)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강요로 왕자를 원나라에 보내 일정기간 머물게 하고 원나라 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했다. 빠이앤티무르는 원 왕실에 숙위로 와 있는 신분이었으나 설손과 가깝게 지냈다.원나라는 순제(順帝) 치세로 내려오면서 정치적 혼란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설손은 이제 원나라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과거 공민왕과의 인연을 떠올렸다.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려로 왔다. 살길을 찾아 나선 망명이었다. 이때가 공민왕 8년(1359) 12월, 설장수의 나이 18세 때였다.반원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공민왕은 옛 친구이자 망명객인 설손에게 극진한 예우를 했다. 그에게 고창백(高昌伯)이라는 칭호는 물론이고 전답과 살 집을 마련해 줬다. 이로써 위구르 최고 명문가이던 고창 설씨의 종가(宗家)가 중국에서 고려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고려로 온 설손은 이듬해인 1360년에 설장수 5형제를 남기고 죽었다. 공민왕은 다섯 아들 중 맏이였던 설장수를 특히 아꼈다. 부친의 상중이었음에도 설장수가 과거시험을 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줬다. 1362년 치러진 과거시험에서 설장수를 포함한 총 33명이 합격했다. 합격자 중에는 조선 개국의 기초를 연 정도전(鄭道傳)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도전과 설장수는 과거시험 동기라는 인연으로 친하게 된다.한편, 설장수의 삼촌이었던 설사(偰斯)는 원나라가 망하자 1367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게 귀부(歸附)하였다. 이후 설사는 공민왕 18년(1369년) 4월과 19년(1370년) 5월 각각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 그는 반원정책을 추진하던 공민왕을 고려왕으로 봉한다는 주원장의 임명장과 옥새를 갖고 와 고려왕에 대한 책봉조치를 시행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공민왕은 명나라 조정 유력자를 숙부로 둔 설장수를 명나라에 보내 외교문서와 선물을 전달했다. 탁월한 외국어 실력과 인맥까지 갖춘 설장수가 원·명 교체기에 중국전문 외교관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피살되고 친원정책을 추진하던 이인임(李仁任)이 정권을 장악하자 설장수의 외교활동에도 검은 구름이 깔렸다. 이인임 일파는 우왕을 추대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18년 만에 다시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이인임 정권의 친원정책은 고려 개혁소장파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불러 왔다. 하지만 정도전·정몽주·이숭인·김구용·권근 등 개혁소장파들은 고려를 방문한 북원의 사신을 영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가 오히려 유배를 가게 되었다.개혁소장파와 뜻을 같이 했던 설장수도 중앙관계에서 밀려나 원주 목사를 역임하는 등 지방으로 전전했다. 그러면서도 반원파인 정몽주·김구용·박의중·이숭인·박상충·하륜· 정도전 등과는 자주 교류하면서 고려왕조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고려후기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李穡) 계열의 문인들이었다.1391년 설장수는 왕세자 석(奭)이 명나라 황제를 조현(朝見)하러 갈 때 사신으로 갔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친한 친구였던 설장수와 정도전이 결국 숙적(宿敵)으로 갈라서는 원인이 됐다. 이들의 우정이 지속되었던 마지막 시점은 대략 1391년 9월까지였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 등은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린 적이 있었다. 1391년에 와서 공양왕 옹립에 공을 세웠던 9명의 관료들이 ‘정난 9공신’으로 책봉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성계·정도전·정몽주·설장수 등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정란 9공신 동료였다. 그러나 정난공신으로 일시적 정권을 장악한 정몽주는 급진 개혁파인 이성계와 정도전을 정계에서 축출해버렸다. 그 무렵에 공양왕의 왕세자 석(奭)을 명나라에 조현(朝見)이라는 명목으로 보내면서 설장수를 특사로 딸려 보낸 것이다.세자의 명나라 조현은 이성계와 정도전이 각각 정계에서 축출됨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포함된 일이었다. 이 시기는 이성계 및 정도전 등 조선 개국세력과의 노선이 구분되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설장수의 외교적 성공은 곧 세자 및 공양왕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기여하는 행동이었으므로 이성계·정도전과는 입장이 다른 것이었다. 설장수의 이런 외교적 행위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보다는 기존의 고려왕조라는 틀 안에서 개혁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입장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이 일로 설장수는 정도전과 이성계에게 찍히게 되었고, 역성혁명의 대열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었다.이러던 차에 정도전 등과 끝까지 대립했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을 당해버렸다. 고려 왕조의 유지를 바랬던 설장수의 정치적 운명도 이때 바뀌게 되었다. 곧 그에게도 화가 미쳤다. 정도전으로부터 이색과 함께 정몽주의 당이라는 탄핵을 받았다.1392년 7월 30일, 이성계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왕조를 세우고 태조 즉위교서 반포 직후 설장수를 장기로 유배 보내버렸다. 이색·정몽주·우현보 등과 함께 도당(徒黨)을 지어 내란을 음모하였다는 혐의였으나, 이는 정도전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실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민개(閔開)를 사주하여 정몽주와 설장수를 탄핵토록 하였다. 민개는 탄핵문에서 설장수가 ‘간교하고 절조가 없는 자로 그저 재산을 불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데도 잘못 등용되어 경상(卿相)의 지위까지 올랐다’고 비판했다.장기에 온 설장수는 6개월만인 1393년 1월, 이성계의 부름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이곳을 떠나갔다. 유배에서는 풀렸지만 이후 그는 정도전의 지속적인 견제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정도전과는 생각이 달랐다. 설장수의 외교적 능력과 가치를 십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는 신왕조의 개창 초기 대명외교관계를 안정시킬 탁월한 외교관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이성계의 집권 이후 대명관계는 파란이 계속되었다. 1394년(태조 3) 명의 주원장은 표전문(表箋問)사건을 일으켜 정도전이 이 문서를 작성한 주범이라고 하면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하였다. 표전문은 핑계였고, 정도전이 추진하는 요동정벌론 등이 여러 가지로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이러한 난국에 이성계는 정도전의 견제를 물리치고 설장수를 유배지에서 불러내어 새로 설립한 외교기구인 사역원의 제조(수장) 자리를 맡겼다. 이때 설장수는 조선 500년간 이어진 사역원 운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역관 선발시험을 새롭게 개편하고, 역관들에게 외교실무 수행에 필요한 유교적 지식을 갖출 수 있도록 사서(四書)와 소학(小學) 교육을 이수토록 하였다. 그는 특히 역관들의 학문적, 인성적 기초로서 ‘소학’(小學) 교육을 중시하였는데, 이를 중국어로 풀어 쓴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직접 저술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역학교재로 오랫동안 사용된 명저였다.이런 설장수에게 이성계는 1396년(태조 5) 계림(鷄林,경주)을 관향(貫鄕)으로 삼도록 사성(賜姓)하였다. 이래서 설장수는 경주 설씨의 실질적인 시조(始祖)가 되었다.1398년 8월 26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태조에 이어 정종이 즉위하자 설장수는 그해 9월에 세자 책봉사절로 다시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의 양위를 고하였다. 명으로 가는 도중에 명 태조 주원장의 부고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진향사(進香使)로 임무를 변경하여 외교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동안 그는 8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이것이 마지막 외교임무였다. 1399년 6월에 귀국한 설장수는 건강이 악화되어 그해 11월 16일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정종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정지하고 제사를 내려 주었으며, 관(官)에서 장사를 지내주고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렸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며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고 전해지며 문집으로는 ‘운재집(芸齋集)’이 있다. 글씨도 ‘목은집(牧隱集)’에서 볼 수 있듯이 필법이 굳세고 힘차며 법도가 있다.설장수는 여말선초와 원명교체기라는 한반도와 중원의 역사 격변기에 8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훌륭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민족의 외교사에서 위구르 출신 이방인이 정치적 난민으로 귀화하여 이처럼 큰 족적을 남긴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이는 우리 민족 외교의 다문화성과 포용성, 개방성을 상징하는 큰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장기에서 6개월이라는 짧은 유배기간을 보냈지만, 유배기간 내내 그의 깊이 있는 유교적 식견과 사상은 장기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문에서 꼭 해야 할 일이며, 실력을 쌓아놓으면 죽음의 문턱에서도 살아 날 방도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유창한 외국어 실력과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완이 없었더라면 이성계가 그를 다시는 찾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장기에서 지은 시가 영일객관(迎日客館)의 북쪽 의운정(倚雲亭)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내용이 ‘영일읍지’(1832)와 ‘조선환여승람’(1938) 등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시에는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배객의 심정이 절절이 녹아있다.의운정(倚雲亭)설장수(偰長壽)山肴海錯托珍羞산나물 바닷고기 진수성찬 벌여놓고野榼村醪慰久留들바가지 촌막걸리 오랜 무료 위로하네半夜窮愁侵客夢한밤중 시름겨워 나그네 꿈 잠기는데一襟爽氣在譙樓한줄기 상쾌한 바람이 문루를 스치누나興來落筆詩篇重흥이 일면 붓을 놓고 시편 거듭 읊으며老去傷情涕泗流늙어가는 시름에 눈물자주 흘리네昭雪此寃終有望이 설움 씻을 희망 끝내는 있으련만皇天還肯濟吾不하늘은 나를 알고 구제해 주실런지/이상준(향토사학자)

2019-06-24

‘구비구비’ 청동물길 따라 ‘울울창창’ 초록협곡 지나니 오색연등 극락풍경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서 바다가 푸른 몸집을 불리는 동안 내륙의 금강송 군락은 거대한 초록 성채를 이루는 중이었다. 초록을 향해 걸어갈수록 나는 점점 바닷길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불영사 계곡이 있는 금강송면 하원리는 울진 바다로부터 불과 18km 떨어져 있지만, 천축산 소나무 숲의 울울창창함이 바다를 잠시 잊게 만들었다. 불영사 계곡은 광천과 몸을 합치고, 광천은 왕피천으로, 다시 왕피천은 동해로 흘러든다. 나는 바다와 기수역을 오가는 한 마리 은어처럼 불영사 계곡을 따라 흐르다 왕피천에서 눈을 씻고 망양 바다에 마음을 내어 말릴 작정이었다.그런데 불영사 가는 길, 금강송 군락이 발목을 오래 붙잡았다. 백두대간 소나무들의 침엽이 공중을 찌를 때마다 햇살인지 아까시인지가 톡톡 터지며 달짝지근한 꽃내음 뿜어내는데, 그 달콤한 향기에 취해 있는 동안 오후가 깊어지고 있었다. 바다를 잊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해수욕장과 대게를 떠올리며 울진에 왔을 행락객들은 이미 금강송 두꺼운 껍질이 촘촘하게 펼친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솔가지 사이로 불영사 계곡이 서늘한 빛을 내비치는 순간, 감탄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사람들은 하나같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느라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수 만년 솔잎을 삼켜 온몸이 에메랄드빛으로 물든 불영사 계곡, 15km에 달하는 청동거울 물길은 웅장함과 세밀한 아름다움을 함께 뽐낸다. 계곡은 그저 바위와 물이 아니라 여울 소리, 물 내음, 새 소리, 나무 그늘, 수면에 비친 하늘, 나비 날개, 돌 틈으로 숨어드는 물고기가 한 몸을 이룬 유기체적 우주다. 불영사 진입로 구간에서는 물가로의 접근이 제한되지만 불영사 일주문을 나와 계곡 중류로 내려가면 누구나 그 차고 맑은 우주에서 탁족과 천렵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살갗에 내려앉는 더위보다 마음에 쏟아지는 속세의 불볕이 더 따가웠기에, 나는 보석빛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는 마음의 피서를 위해 불영사로 걸음을 재촉했다. 부처의 그림자가 내 안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길 바라면서.길디긴 초록 협곡을 빠져나오자 불영사 너른 마당엔 흰 불두화와 붉은 철쭉이 꽃대궐을 차려놓고 방문객을 맞이했다.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호랑나비가 꽃덤불로 날아들어 마치 무위사(無爲寺)의 파랑새처럼 극락 풍경 한 폭을 완성하는 동안 나는 경내 한 바퀴를 천천히 걸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하루 앞둔 절 이곳저곳에 오색 연등이 걸려 있었다. 간절한 마음들에는 색(色)이 있어 금방 눈에 띄는 법일까. 울긋불긋한 저 소원들은 이미 부처에게 가 닿았을 테고, 내 마음은 당신에게 가지 못한 채 허공에 흩어지겠지. 범종이 걸린 범영루 앞 연못에는 부처의 그림자 대신 한 여인의 얼굴만 떴다가 졌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평온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부처가 꽃향기로, 햇살로, 약수 한 사발로, 소슬한 바람으로 내 안에 들어온 것이리라.불영사에서 나는 세 번 놀랐다. 우선 사찰 주변의 풍경에 감동했다. 조선 중기 문장가 임유후가 불영사에 머물며 남긴 14수의 5언 절구는 불영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삼각봉(三角峰), 좌망대(坐忘臺), 오룡대(五龍臺), 해운봉(海雲峰), 단하동(丹霞洞), 부용성(芙蓉城), 학소(鶴巢), 향로봉(香爐峰), 청라봉(靑螺峰), 종암봉(鍾岩峰), 금탑봉(金塔峰), 용혈(龍穴), 원효굴(元曉窟), 의상대(義湘臺) 등 14곳의 천혜비경을 노래하고 있는데, “푸른 계곡 반석은 여기 저기 놓여있고”(‘향로봉’) “구름은 금모래 위로 지나가”(‘단하동’)는 절경을 보노라면 누구나 마음에 아름다운 문장 하나씩 품을 수밖에 없겠다. 다음엔 그 규모와 단정함에 감탄했다. 깊은 산중에 그렇게 큰 사찰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풍경에 눈을 뺏겨 자꾸 멈춰 서긴 했지만 경내 한 바퀴를 걷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규모가 큰데도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점이 마음을 흡족케 했다. 미관을 해치는 현수막이나 공사 자재는 볼 수 없었고, 나무와 꽃, 채마밭을 가꿔놓은 섬세함만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두 번 놀라고 세 번째, 비구니 사찰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무릎을 쳤다. 구석구석 정갈함에는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특히 불영사는 사찰 음식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매년 가을마다 사찰음식축제를 열어 사람들에게 건강한 자연 밥상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불영사에선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드는데, 김치와 된장은 속인(俗人)들이 그 비법을 탐낼 정도라고 한다. 절의 회주인 일운스님은 사찰음식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스님께 절밥 한 그릇 얻어먹고 싶었지만, 미련한 중생은 주지육림을 향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한 채 불영사 일주문을 나섰다. 저녁엔 대게 다리를 빨며 소주를 마셔야 하니까.대게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자 그제야 잊고 있던 바다가 생각났다. 초록이 환하게 밝혀드는 천축산에서 나와 바다 쪽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다 이내 멈춰 섰다.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쳐가듯 낚시꾼인 나는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기 때문이다. 경북 민물고기생태체험관은 왕피천과 광천이 만나는 합수머리에 위치해 있다. 모든 하천은 본류와 지류의 합수머리에서 물고기들의 서식이 가장 활발한데, 체험관은 나름대로 터를 잘 잡은 셈이다. 경북 바닷길이 시작되는 동해안의 허리 울진에서 민물고기 구경이라니, 조금은 생경하지만 웬만한 유명 아쿠아리움 못지않게 공을 들인 수족관에는 형형색색의 우리 민물고기들이 애니메이션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군무를 추고 있었다. 황쏘가리부터 갈겨니, 피라미, 납자루, 어름치, 산천어, 각시붕어, 돌고기, 마자, 누치, 꺽지, 모래무지, 쉬리, 잉어, 금강모치, 동사리, 동자개 등등 아름다운 이름들 하나씩 부르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와 함께 금모래 반짝이는 강에서 족대질하던 어린 날의 작고 예쁜 친구들, 그 많던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기억에서 그 예쁜 이름들이 사라지는 것보다 이 땅의 하천에서 은빛 물고기들이 자취를 감추는 속도가 더 맹렬하다.반가움과 쓸쓸함이 뒤섞인 표정을 수족관 유리에 새겨두고 발길을 돌렸다. 불영사 계곡에서는 지상의 초록빛 축제를 감상했고, 민물고기생태체험관에서는 수중의 알록달록한 빛을 보았으니 이번엔 지하의 색을 만날 차례다. 성류굴은 천연기념물 제155호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관광동굴이다. 얼마 전 신라 진흥왕이 560년에 행차한 것을 기록한 명문(銘文)이 발견되기도 했다. 총 길이 870미터 중 약 270미터가 개방된 ‘지하의 금강산’에는 종유석과 석순, 석주 등이 까미유 끌로델의 조각상과 권진규의 테라코타가 흉내 낼 수 없는 기묘한 자연미를 뽐내고 있다. 머리가 큰 관계로 안전모를 정수리에 얹어두고는 좁고 축축한 동굴 내부로 내려갔다. 동굴 내부는 사철 섭씨 15도를 유지한다. 땅 속의 에어컨에 땀을 식히며, 머리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한 걸음씩 조심스레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동굴 탐방은 내게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 같은 모험심을 선사했다. 어둠으로 뒤덮인 지하의 색채는 검정이지만, 조명과 어우러진 신비한 빛이 젖은 몸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다 신기한 광경들, 특히 천장에서 동굴 내부의 호수로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ASMR(자율감각쾌락반응) 사운드였다. 종유석을 쓰다듬어보았다. 부드럽고 반들반들한 촉감이 마치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이의 살결 같았다. 땅 속에서 그리움의 깊이가 더 캄캄해지기 전에 나는 서둘러 동굴을 나서야만 했다.지상과 지하를 두루 다녀온 자에게 울진의 동녘은 차안과 피안이 무화된 세계를 보여준다. 이제 바다와 하늘의 색채를 볼 시간이 됐다. 바다 따로 하늘 따로 볼 필요가 없다. 울진에서는 바다와 하늘이 동색(同色)이기 때문이다. 망양정에 올랐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바다 밖은 하늘인데 하늘 밖은 무엇인가?”라고 노래한, ‘하늘의 끝’ 같은 바다가 울진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동해다. 망양정에서 망망대해를 보며 정철은 ‘세상의 끝’, 즉 우주와 저승에 대한 상상을 했던 것이다. 망양정에 오르니 파도가 끊임없이 아까시 향기를 밀어 올렸다. 술 마신 것도 아닌데 향기에 취했을까? 아무리 눈을 씻어도 수평선이 희미했다. 어느 것이 바다고 어느 것이 하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16년 전 스무 살 여름, 학과에서 망양정으로 ‘신라의 푸른 길’이라는 문학 답사 기행을 왔다. 푸른 바다 앞에서 그 아이의 웃음은 더 눈부셨다. 그때 미친 듯 짝사랑하던 여학생은 지금 두 딸의 엄마가 됐다. 내가 정말 그 시간을 살았었나? 모든 게 꿈만 같다. 망양정 너머 동해의 부윰한 분홍 저녁이 마음으로 스며들 때 비로소 알았다. 사랑과 미움이 한 몸이라는 것을, 그리움과 기다림도, 어제와 오늘도, 삶과 꿈도 모두 저 분홍 저녁 속으로 언젠가 사라진다는 것을.달이 뜨기만을 기다려 월송정을 찾았다. ‘만 그루 소나무 가운데’ 지어진 아름다운 누각이다. 월나라 소나무가 심겨졌다고 월송정(越松亭)이라는데, 달 속의 소나무 月松이 훨씬 아름답다. 달빛 윤슬을 반짝이며 은백색 파도를 밀어오는 바다, 달빛과 구름과 소나무 그림자가 수묵화를 이룬 하늘, 바람 불 때마다 소슬한 소나무 향기가 살갗에 와서 닿았다. 조선 임금 숙종이 “한번 올라 바라보매 흥겹기 그지없다”고 노래한 정자에서 처마 끝에 걸린 달을 한참 바라보니 내가 바로 세상의 왕이었다. 막걸리 한 잔 생각이 간절했으나 찢어진 청바지와 다 해진 운동화 차림의 거지 왕에게 술상을 차려줄 이는 없다. 월송정의 달빛을 한 겹 걸쳐 겨우 남루함을 가린 채 죽변항으로 향했다. 코끝을 찌르는 아까시 냄새보다 상상 속 대게 찌는 냄새가 더 진해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울진이 펼치는 황홀한 색의 축제는 죽변항에서 마침내 완성된다. 잘 익은 대게의 붉은 등딱지와 17.5도의 소주를 담은 초록 병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 이병철

2019-06-23

민선 7기 10개월 만에 살림 규모 사상 첫 3천억 시대 ‘견인’

취임 1주년을 맞은 오도창 영양군수는 그간 현장을 누비며 주민들과 만나 현장의 목소리를 청취했다. 지역주민들과의 소통을 통한 섬김 행정실천을 위해 소통하고 행동하는 ‘군민 최우선의 군정’을 이끌어 왔다.오 군수는 민선 7기의 다양한 공약 사업추진, 그리고 지역경제, 복지, 안전, 교육 등 영양군민의 삶과 생활에 직결되는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새로운 변화, 진정한 변화를 바라는 군민의 소중한 꿈과 희망이 이뤄지는 행복한 영양’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영양군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예산 3천억 시대와 생활밀착형 행정영양군은 민선 7기 10개월만에 살림규모가 사상 첫 3천억 시대를 맞이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이는 영양군정 사상 최초로 3천억 돌파로 영양의 미래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기반을 쌓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간 영양군은 열악한 재정을 극복하기 위해 교부세 확보와 국도비 보조금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이런 부단한 노력으로 2019년도 보통교부세 수요액이 전년대비 16억원 증가되었으며, 행정안전부 지방재정확대 분야에서 1억5천만원, 지방보조금 절감에 따른 27억원 교부세 인센티브 확보로 결실을 맺었다. 또 영양군은 민선 7기 필수 공약사업이자 생활밀착형 정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종합민원과 바로민원처리담당 신설과 함께 생활민원바로처리반을 운영하고 있다. 생활민원 바로콜센터(680-8585)를 통해 접수된 민원을 현장확인과 민원인 면담을 통해 바로 처리해주고 있다.■생활밀착형 행정과 소상공인을 위한 정책70세 이상 어르신 및 65세 이상 기초생활수급자 어르신을 대상으로 1인당 연간 12매(월 1매)의 목욕상품권을 지급한다. 관내 목욕업소 5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어르신들의 청결상태를 개선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는 측면뿐만 아니라 어르신들의 목욕업소 이용으로 지역상권 활성화 측면도 고려하여 추진하고 있다.지난 4월에는 경북신용보증재단, NH농협은행 영양군지부와 ‘영양군 소상공인 금융지원 업무협약’을 체결해 소상공인특례보증 및 이차보전 등 금융지원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실제 15억원 규모의 소상공인 특례보증 시행 1개월 만에 65건, 10억원의 신청을 받는 등 소상공인 재정 부담 완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나타났다.■지역경제 활성화와 축제를 통한 화합영양군은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적극적인 스포츠 마케팅과 직원 석회 개최로 직접적인 지원사격에 나서고 있다. 그 시작은 올해 1월 유도 종목의 동계훈련지 유치로 침체에 빠진 지역경제를 살리는데 크게 기여했다.영양군은 이번 기회를 계기로 1회성 이벤트 행사가 아닌 꾸준히 지속적으로 훈련 선수단 유치를 할 수 있도록 타 종목 협회와도 지속적으로 연계해 다양한 종목의 전지훈련을 유치할 예정이다. 또 도심 중심의 활력을 불어놓기 위한 대책의 또 다른 방안으로는 지난 2월부터 직원 석회를 마친 후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관내 소상공인·자영업자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제15회 영양산나물축제’는 영양 대표 축제를 넘어 전국축제로 발돋음하는 계기가 되었다. 4일간 총 16만명의 관광객이 찾았다. 영양군 축제 역사상 역대급 기록을 세웠으며, 약 56억원의 직접 경제효과 발생으로 침체된 지역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에너지 복지의 실현과 행복 영양을 위한 발걸음영양군은 LPG배관망 지원사업을 통해 군민들의 난방비 부담 경감으로 도시가스 미공급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군민에게 에너지 복지 실현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고자 올 하반기에 사업을 완료할 예정이다. 영양읍 일원 8개리(동·서부리, 현 1리, 황용리) 2천300세대에 LPG 공급을 목표로 30t 저장탱크 3기, 가스보일러(30평형) 설치, 금속배관 교체, 가스 누출 경보기, 타이머 콕 등을 설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살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영양을 만들기 위한 변화도 추진한다. 정이 넘치고 문화가 가득한 행복마을 조성을 위한 도시재생뉴딜사업 추진 등이다.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 조례를 제정해 도시재생전략계획 수립에 따른 사업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으며, 주민참여 활성화와 역량 강화를 위한 도시재생 아카데미 운영과 도시재생 코디네이터 양성과정을 통해 예비 코디네이터도 선발해 활동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 중견기업 교촌에프앤비(주)와 도시재생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해 100년 이상 운영되었던 우리나라 최고 양조장인 ‘영양양조장’을 재생해 지역 청년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의료 사각지대 제로화와 만성적 일손부족 해결육지 속의 섬 영양군 오지 마을의 의료사각지대를 해소하고자 영양군보건소에서는 보건 의료 혜택이 취약한 38개 리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오지마을 건강사랑방’을 운영하고 있다. 의료접근성이 떨어지는 의료취약지역으로 이동진료버스를 이용해 순회 진료를 하며 보편적 군민 의료권 보장이라는 틀 안에서 영양군 자체 사업으로 올해부터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오도창 군수는 전국에서 선도적으로 추진해 타 지자체의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 있는 계절근로자 사업을 올해부터는 확대해 추진하고 있다. 매년 사업의 규모가 확대되고 있으며 올해는 농가당 고용인원 증대와 참여 근로자 연령을 낮춰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 도움을 주고 있다.■부자농촌 건설과 체류형 관광 모색영양군은 땀 흘려 일한 가치를 가격으로 인정받는 영농 환경을 조성하는데도 노력하고 있다. 전국 최고 품질로 인정받는 영양고추를 최고의 가격으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근본적인 체질개선에 나서 기존 1회에서 2회로 수매 가격 결정 횟수를 늘려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강화했다. 또 출하장려금을 kg당 100원에서 금년부터 200원으로 인상함으로써 농가에 고정적이고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구축하는데도 힘쓰고 있다. 이외에도 농산물 공동브랜드 개발, 통합 유통사업단 발족, 로컬푸드 직매장 개설, 채소 전문단지 유통센터(APC) 건립 등 농정분야에도 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체류형 관광으로의 변신은 영양이 가진 청정자연과 인문학 가치의 연결로 시작한다. 지난 2018년 4월에 개원한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의 운영 방향을 새롭게 모색해 각종 편의시설 확충과 직원 서비스 역량강화 교육 실시, 표준화된 해설 매뉴얼 제공, 가성비 높은 저렴한 체험여행 상품 제공 그리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인 홍보마케팅을 실시하고 있다.특히 지난해 문체부로부터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대상을 수상한 ‘음식디미방’을 활용해 영양다움의 가치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소통과 공감을 향해 나서다오도창 군수는 6.13 지방선거와 과거 대규모 토목사업 등으로 나뉘어진 민심을 하나로 묶고 이를 발전 동력으로 삼기 위해 다양한 소통 방식 마련과 대민접점 확대에 심혈을 기울였다. 읍면 행정을 강화하고, 군정알리미 시스템 구축으로 신속하고 정확한 소통 행정을 구축할 예정이며, 구성의 민주성과 평가의 전문성, 참여범위의 다양성을 반영한 ‘영양군수 공약 군민평가단’ 위촉으로 군민 다수가 공감하는 정책 입안과 객관적 평가를 지향하고 있다.지난 1년간 영양군은 대내외적인 변화의 흐름과 영양이 지닌 지역적 특성을 살린 차별화에 역점을 두고 군정을 추진했다.이와 관련 오 군수는 “주민의 참여가 지역 발전의 성장동력임을 명심하고, 군민들과의 소통을 기본으로 시대의 흐름에 반하는 제도와 틀은 과감히 바꿔가겠다”고 약속했다./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2019-06-23

도심 곳곳 숲과 맑은 물… 다음 세대 물려줄 ‘색깔있는 변신’ 시도

포항시는 1948년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영일군에서 분리돼 시로 승격했다. 70년 전 포항은 일제 강점기의 형산강 제방공사로 만들어진 농경지를 경장하고, 정어리잡이 등의 농수산업이 주요 산업의 근간이었다. 이후 ‘영일만의 기적’이라는 포항제철이 들어서면서 급속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기반으로 형성된 도시형태가 70년 역사를 거슬러 새롭게 변화했다. 포항시는 우리나라 산업화와 근대화를 견인해 온 세계 제1의 철강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명실공히 경북 제1의 도시로 우뚝 선 포항은 최근 들어 새로운 변화를 꾀하고 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이 없어지고 도시 숲이 조성되는 등 녹색 생태도시를 꿈꾸며 도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그린웨이 (Green Way)전국적으로 웰빙(well-being)과 힐링(healing) 바람이 불고 있다. 쾌적한 생활환경을 누리며 건강을 도모하는 행복한 삶이 각광받으면서 포항시도 철강산업도시 이미지를 벗어던지려고 노력하고 있다.포항시는 도심과 숲이 어우러지는 친환경 녹색도시를 모토로 그린웨이 사업을 추진 중이다.땅을 일궈 정성껏 심은 나무 하나하나가 모여서 숲이 되고 그 숲에서 맑은 공기와 깨끗한 물이 생기는 생태도시를 최종 목표로,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그린웨이 프로젝트’로 이름 붙여진 이 사업은 친환경 녹색도시를 통해 시민이 행복하고 미래가 풍요로운 도시를 조성한다는 계획으로 사람과 도시, 생태와 문화, 그리고 산업경제가 하나의 정책으로 연결된 지속가능한 생태도시의 기반을 마련해 시민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이강덕 포항시장은 “공해와 무분별한 이용으로 시달려온 도시 자체를 생태적으로 건강하게 가꾸는 것이 도시의 경쟁력”이라면서 “회색 광장과 콘크리트를 맑은 물과 푸른 숲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바꾸는 한편,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숲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그린웨이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휴식과 건전한 여가활동을 즐길 수 있는 도심 속의 공원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다. 개발이 가져다주는 달콤함 때문에 자꾸 늘어나던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로 도심숲이 들어서면서 철강산업도시라는 딱딱하고 강한 이미지가 녹색도시로 점차 순화되고 있다.특히, 포항 효자역과 옛 포항역 사이 동해남부선 폐선부지가 100여 년간의 철도역사에 마침표를 찍고 도시숲으로 다시 태어났다.옛 포항역에서 효자역까지 4.3km 구간의 철길숲이 준공됨에 따라 먼저 도시숲으로 조성된 옛 포항역 북측 2.3km 구간과 더불어 6.6km의 도심 내 폐선부지가 전부 도시숲으로 변모하게 돼 포항시는 녹색생태도시를 지향하는 그린웨이 프로젝트의 완성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됐다.이 철길숲은 2015년 4월부터 2019년 4월까지 4년간 258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도시숲으로 조성됐으며, 한국철도공사 및 한국철도시설공단과의 협의로 철도부지 무상사용이 가능해짐에 따라 약 2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이와 함께 최근 준공된 송림 테마거리와 호미반도 해안둘레길, 오어지둘레길 등을 비롯하여 기존 ‘형산강 프로젝트’와 ‘도시재창조 프로젝트’, ‘해오름동맹’ 등과 연계한 30여개 사업이 점차 구체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그린웨이 프로잭트는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문화·여가 공간을 제공하고 도시재생 및 도심경관의 보전가치를 높이는 것은 물론, 자전거 활성화 및 녹색교통체계 구축, 도시열섬현상 및 각종 소음 완화, 대기오염물질 저감 등을 통해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성과는 각종 수상으로 이어졌다.‘2016년 매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상과 ‘대한민국 지방자치경영대전’ 최우수상을 받는 등 지방자치단체 ‘지역개발’ 분야의 우수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새 정부 공약인 ‘미세먼지 없는 푸른 대한민국’ 정책과도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앞으로 포항시는 지속가능한 도시발전의 저해요인으로 환경문제가 대두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지속가능한 생태도시의 기반을 마련하는데도 주력할 방침이다.우선 ‘스마트 에코시티’ 포항 건설을 위한 환경비전을 제시한 데 이어, 사람중심의 녹색생태도시와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선도도시, 기후변화에 강한 행복도시, 지속가능한 자원 순환도시 등 4대 목표를 설정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또 자연환경과 물 환경, 토양·지하수, 대기, 소음진동 및 유해물질, 폐기물, 산림녹지, 에너지, 기후변화, 연안환경, 건강 및 재난재해, 농수산, 환경정책 등 총 13개 분야의 122개 단위사업을 통해 100세 시대에 걸맞은 사람중심의 도시환경을 마련하고자 단계적으로 시민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친환경생태도시이강덕 시장은 평소 “과거 개발논리로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생태·문화적 자원이 이제는 사람이 모여들고 도시를 살리는 생명의 움직임으로 변화해야 한다”면서 “건강한 생태도시를 조성하여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하는 만큼 시민과 함께하는 환경행정이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강조한다.이 같은 이 시장의 신조에 따라 포항시는 미세먼지와 폭염으로부터 벗어나 건강한 숨을 쉴 수 있도록 ‘미세먼지 저감숲’과 ‘방재형 도시숲’ 등 도심 녹색 벨트를 확충해 나가는 한편, 갇혀버린 도심 물길을 되살려 도시재생은 물론 새로운 수변공간으로 자리 잡게 하는 ‘도심하천 생태복원’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이와 관련해 중금속 오염 논란이 일었던 형산강에 대한 생태복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우선 형산강 환경준설, 공단 유수지 준설, 시내하천 준설, 구무천 준설사업과 연계한 하수도 준설물 분리처리시설을 설치하고 형산강 수생생태계에 대한 모니터링도 지속적으로 실시할 방침이다.또한, 환경부로부터 통합집중형 오염지류 사업으로 선정된 3개 사업(완충저류시설 설치사업, 철강공단 하수관거 정비사업, 구무천 및 공단천 생태하천복원사업)과 함께 형산강 본류 하천복원 시범사업 역시도 차질이 없이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포항시는 이와 함께 ‘건강하고 안전한 지속가능한 미래 포항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미세먼지를 저감하는 실질적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지역의 주요 기업체와 ‘미세먼지 저감협약’을 체결한 데 이어, 해당 기업들은 주요 도로 담당구역을 정해 저감사업(Clean Road)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특히 전국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이동식 환경측정차량을 운행, 미세먼지 측정 사각지대를 제로화하고 고농도 미세먼지 발생 시 수시로 이동 측정해 환경관제센터 시스템과 연계 운영하기로 하는 등 민(民)·산(産)·관(官)이 상호 협력하여 미세먼지 발생량을 최소화하고 친환경 공단 추진, 시민건강 보호, 친환경 녹색도시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포항시는 이 밖에도 7곳의 환경측정소 확충, 전기자동차에 대한 획기적 투자, 노후 경유차 조기폐차 유도, 주요 도로변 진공청소 등 미세먼지 저감을 위한 선제적 대응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실제로 최근 포항지역 미세먼지 측정 결과, ‘보통’ 단계를 유지하는 등 ‘그린웨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도시숲과 녹색벨트 조성 등으로 인해 고농도 미세먼지의 저감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호평받고 있다./안찬규기자 ack@kbmaeil.com

2019-06-20

신진 등장·세대교체 등 승패 가를 변수 많아 하마평 무성

보수의 본산이라고 불리는 구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인 장세용 구미시장이 당선되는 대이변이 발생했다. 또 경북도지사 선거에서는 오중기 후보가 34%를 득표하며 선전을 벌였다. 대구지역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정국으로 인해 보수진영이 갈라져 여야4당(한국당 8석, 더불어민주당 2석, 대한애국당 1석, 바른미래당 1석) 구도가 됐다. 실제 한국당이 10석이었으나 조원진(대구 달서병), 유승민(대구 동을) 의원이 한국당을 탈당해 각각 대한애국당과 바른미래당으로 합류하면서 총 8석만 확보하고 있다. 대구, 경북에서의 21대 총선 관전 포인트는 한국당이 TK지역을 독식할 지, 아니면 정치적 다원주의를 구축, TK가 새로운 열린사회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다. 이는 TK가 보수의 텃밭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TK의 정치적 고립과 맞물려 있어 더욱 관심사다. 시류에 발맞춰 대구, 경북의 정치 세평도 점차 드세지는 분위기다. 특히 요즘 TK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속마음이 편치 않다. 중앙당에서 틈만 나면 뒤흔들고 있어서다. 실제, 중앙당이 인재 영입을 서두르고 있는 만큼 언제 어디서 판이 뒤집혀질지 아무도 모르는 법. 그래서일까. 지역에서도 신진들의 등장과 세대교체, 현역의원들의 생환 여부 등이 벌써 하마평이다. 경북매일에서는 창간 29주년을 맞아 TK지역 중 화제의 지역을 짚어 봤다.고령·성주·칠곡이완영 의원 의원직 상실에“한국당 공천 잡자” 신경전 치열인구 11만 칠곡 민심잡기 ‘관건’일단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이 선거구가 주목받는 것은 이완영 의원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와 무고 혐의 등으로 기소돼 의원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역이 사라졌다는 것은 신진에겐 더없는 ‘빅 찬스’다. 특히 지역적 특색상 이미 한국당 공천을 노리는 후보들이 줄을 서 있다.경찰서장과 재선 기초단체장을 지낸 후 현재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항곤 전 성주군수와 이 지역에서 3선을 지낸 이인기 전 의원, 칠곡 출신의 정희용 경북도 경제특별보좌관, 대구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성주 출신의 홍지만 전 의원, 성주 출신 김현기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분권실장, 전화식 전 성주 부군수, 최도열 국가발전정책연구원장 등이 하마평에 올라 있다. 칠곡이 고향인 송필각 전 경북도의회 의장 얘기도 나돈다. 특히 오는 28일 고령에서 특강을 할 예정인 김병준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고령·성주·칠곡에 출마할 지 여부도 관심사다. 그의 고향은 고령이다. 후보군들이 넘쳐나면서 물밑 신경전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당 황교안 대표와 가깝다는 친분과시다. 실제 모 인사는 황 대표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지역주민들에게 보여주면서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다른 인사도 ‘황 대표로부터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며 ‘황심’을 내세우고 있다. 모두 팩트를 알 수 없다보니 지역주민들 사이에서 정말 황 대표와 주고받은 메시지냐는 말까지 나온다.고지 달성은 칠곡 민심을 누가 잡느냐에 달려있다. 4월 기준으로 칠곡의 인구수는 11만8천명, 성주는 4만4천, 고령은 3만2천명이다. 한국당 중앙당 입장에서 볼 때 이곳은 맞춤형 공천이 가능하다. 현역의원이 없기에 당이 제시하는 정체성과 가이드라인에 맞을 경우 내려꽂기가 가능한 것이다. 지역에서는 미래 정치지도자로 키울 수 있는 청년층의 후보를 희망하는 소리도 자주 들리고 있다. 최근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백선기 칠곡군수도 여지가 남아 있다. 그는 칠곡군수를 3연임, 비교적 지지층이 두텁다.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장세호 전 칠곡군수가 총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장 전 군수는 지난 지방선거에서 백선기 칠곡군수에게 3.74% 차이로 아쉽게 패배한 바 있다. 민주당도 도내 다른 지역보다 이 선거구는 해볼만하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칠곡군수 선거 당시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역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하나의 근거로 들고 있다. 선거를 치러보니 자유한국당을 싫어하는 층들이 예상외로 많더라는 것이다. 실제 칠곡에는 구미에서 직장을 다니는 젊은 층들이 많은데, 이들이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상주·군위·의성·청송전·현직 의원, 현 당협위원장 격돌상주시장 재선과 맞물려 ‘이목’청송, 지역구 재편 가능성도 커도내 다른 지역처럼 이 선거구 역시 보수층 지지 경향이 높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한국당의 구도가 어떻게 짜여질지가 더 관심사항이다. 일단은 전·현직 의원과 현 당협위원장 간의 대격돌이 주목되는 격전지다. 현역은 3선의 한국당 김재원 의원과 비례대표인 임이자 의원이다. 초선인 임 의원은 얼마 전 상주로 주소를 옮긴 뒤 상주보 철거 문제와 의성 쓰레기 산 등에 관심을 쏟으며 뛰고 있다. 20대 총선에 당선됐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한 김종태 전 의원 또한 재도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두 명의 현역 의원에다 전직 의원이 있지만 현 당협위원장은 박영문 전 KBS미디어 사장이다. 이러다보니 현재 상황이 매우 복잡하다. 당연히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이 지역은 지난 20대 총선 때도 매우 시끄러웠다. TK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복잡하고 특이한 지역구도가 혼돈의 바탕이다. 20대 총선에서는 친박계 실세인 김재원 의원이 유리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상주 후보간에 단일화가 추진되면서 김종태 전 의원이 당선됐다. 이후 김 전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했고, 재선거에서 상주 출신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의성 출신인 김재원 의원이 고지를 탈환했다.그러나 3선의 김 의원은 박근혜 정부 당시 정무수석으로 재직할 당시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를 20대 총선 경선 관련 여론조사 비용으로 사용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후 당원권이 정지되면서 당협위원장 자리를 박영문 전 KBS미디어 사장이 꿰찼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김 의원이 1심과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면서 21대 공천 경쟁이 복잡 미묘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더욱이 김 의원은 최근 황교안 대표의 측근으로 부각되고 있고, 차기 예결위원장으로 거론되고 있다.지역 정가에서는 △김재원 의원의 거취 △황천모 상주시장 재판 △소지역주의 △보수결집 또는 분열 등에 따라 선거판이 출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항간에는 김 의원이 민주당 홍의락 의원의 지역구인 대구 북을로 지역구를 옮길 것이라는 소문이 본인과 무관하게 흘러나오고 있어 실제 성사될지가 관심사다. 김 의원이 거처를 옮긴다면 여기도 불꽃 튀는 접전이 예상된다. 이 선거구는 내년 총선 선거 때 시장 선거도 같이 실시될 수도 있다. 황천모 시장이 1심에서 당선무효형을 받았는데,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가 되지 않으면 재선거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현재 흐름으로 보아 내년 선거 전에 3심까지의 재판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총선과 시장선거가 맞물리면서 판을 후끈 더 달아오르게 할 전망이다.지역의 한 인사는 “내년 총선까지 후보들이 국회의원과 시장을 놓고 합종연횡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역대 어느 때보다 혼탁해지고 시끄러워질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내다봤다. 후보군 중 일부가 총선이 아닌 상주시장 선거로 방향을 틀거나, 상주시장에 출마했으나 경선에서 떨어진 후보들은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2018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김천시장 출마를 위해 한국당 공천을 신청했던 최대원 후보가 경선 패배한 뒤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500표차로 떨어진 것이 단적인 예다.여당인 민주당에서는 김영태 지역위원장이 재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대구에서 자랐지만 상주 출신인 김 위원장은 2017년 재보궐선거에서 17.58%의 득표율을 올렸다. 다만, 이 선거구는 현 지역구가 유지될지 여부가 불투명하다. 일부에서는 청송이 강석호 의원의 지역구인 영양·영덕·봉화·울진 지역구로 묶일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그럴 경우 이곳의 선거구는 상주를 중심으로 재편이 불가피, 지금의 선거구도가 다시 출렁일 수밖에 없다.포항 북, 포항 남·울릉리턴매치 성사 관심사 포항북김정재·오중기 특별법 날선 공방남울릉엔 3선도전 박명재의원과박승호 전 포항시장 신경전 치열포항북 지역은 리턴매치 성사 여부가 관심사다. 지난 총선 당시 한국당 김정재 의원과 무소속 박승호 전 포항시장, 민주당 오중기 지역위원장이 대결을 펼쳤다. 지난 20대 선거 결과를 보면 한국당 김 후보는 43.39%를 득표했고, 박 전 시장은 38.84%, 오 위원장은 12.71%를 받았다. 이후 박 전 시장은 최근 주변인사들에게 포항 남·울릉 출마를 시사해, 이번 리턴매치 때는 김 의원과 오 위원장 간의 맞대결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두 사람은 포항지진특별법 제정 문제를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이는 등 벌써부터 물밑경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특히 오 위원장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34.32%를 득표한 저력을 바탕으로 한 번 해볼만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김 의원 역시 지난 총선 당시 경쟁을 펼쳤던 박 전 시장이 포항 남·울릉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이상 재선에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보수의 텃밭인 만큼 김 의원은 1차적으로 당내 공천경쟁을 뚫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뚜렷한 경쟁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당내 인사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현재 허명환 강남대 석좌교수, 모성은 한국지역경제연구원장, 이상휘 세명대 교수 등이 김 의원 경쟁자로 거론되고 있다.포항남·울릉 지역은 박명재 의원의 3선 성공 여부와 박승호 전 포항시장이 박 의원의 아성을 뛰어넘을 지 여부에 관심이 쏠린다. 박승호 전 시장이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이 선거구 출마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두 사람의 지지측은 이미 신경전이 치열하다. 박 전 시장이 한국당 경선에 나갈 수 있을지 여부는 미지수다. 그는 현재 무소속이다. 박 전 시장은 포항북구당협에서는 몇 번에 걸쳐 입당 신청을 했지만 복당이 불허됐다. 따라서 한국당 복당을 점치기가 쉽잖다. 입당된다면 박 의원과 공천경쟁을 펼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지만 복당이 불허될 경우 무소속 신분으로 박 의원과 경쟁을 펼쳐야 한다.김순견 전 경북도 경제부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손발을 맞췄던 서장은 전 일본 히로시마총영사도 남·울릉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지역정가에서는 검찰 출신의 한 인사의 출마설도 나돈다. 김성렬 전 행정자치부 차관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포항시장 후보로 나선 허대만 지역위원장이 도전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지방선거 당시 이강덕 시장에게 불과 7.6% 차이로 패배할 만큼 나름의 인지도와 지지세를 자랑하고 있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2019-06-20

TK, 21대 총선 ‘보수 세력 독식 VS 다원주의 구축’ 관심사

21대 총선이 10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긴 시간 같기도 하지만 선거판 10개월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출마를 위해 움직이는 인사들의 총성 없는 물밑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할 수 있다. 선거제 개편안을 두고 앞으로 여야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의석수 확대 및 석패율제 등 다양한 변수는 남아 있다. 또 인구 하한선 미달로 지역구 조정이 필요한 지역도 예상되나, 현재로서는 어떤 지역이 어떻게 될지 가늠이 어렵다. 그러나 ‘승자독식 소선구제’의 총선 룰은 바뀌지 않는다. 총선 후보자들은 한 표 차이로 승리만 한다면 21대 여의도에 입성한다. 총선이 10개월 남았음에도 현역의원들이 지역구 관리에 올인하고, 후보자들이 지역에 얼굴을 알리며 인지도 쌓기에 나서는 등 벌써부터 총력전을 펼치는 이유다. 누가 뭐래도 대구·경북(TK) 정치권은 현재 보수 성향이 강하다. 자유당 시절만 하더라도 대구는 야도(野都)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수의 본산으로 자리 잡혔다. 대구, 경북에서도 경북은 정치성향이 좀 더 독특하다. 경북지역 13석 모두 한국당 의원들이 당선됐을 정도로 한국당 독점구조의 정치지형을 구성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정국에서도 현역의원들은 한국당을 지켰다.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경북의 정치 성문. 그러나 지난해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많이 열렸었다.북구을3선 도전 민주 홍의락 의원 맞서한국당 최소 5명 공천혈투 예고정의당·무소속 후보도 채비대구 북구을 지역은 더불어민주당 홍의락 의원이 터를 잡고 3선을 노리는 곳이다.한국당은 오는 총선에서 당차원의 전력투구를 해야 할 곳으로 거론되고 있다. 당내 경선에는 김재원 의원, 박준섭 한국당 법률자문위원을 비롯 주성영·서상기 전 의원 및 이범찬 전 여의도연구원 자문위원 등 최소한 5명이 출마태세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할 전망이다.여기에 정의당은 조명래 전 전국위원과 이영재 북구지역 위원장의 출마 거론되고 무소속의 황영헌 전 바른미래당 당협위원장도 출마태세를 가다듬고 있는 등 다양한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특히 대구시장 3선을 하지 않겠다고 알려진 권영진 대구시장이 대권 도전에 앞서 이곳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한때 나돌기도 했지만, 해프닝에 그쳤다.최근에는 권 시장 출마 대신 행정·경제부시장 중 한명이 북구을에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돌고 있어 한국당 당내 경선에만 최소한 6명이 도전하는 상황이 될수도 있다.김재원 의원은 북구을로의 지역구 변경설에 극구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북구을 지역 의성향우회 등을 중심으로 출마설이 꾸준히 퍼지고 있어 진위를 파악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과거 의성에서 상주로 주소를 옮길 때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된 바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당안팎의 관측이다.서상기 전 의원의 경우 일부에서 나이 등을 고려해 총선보다는 다른 쪽으로 선회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지만, 총선이 가까워져야 당내 경선 참여 여부가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주성영 전 의원은 북구을에 변호사 사무실을 두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 북구을과 고향 지역구 출마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두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박준섭 변호사는 그동안 북구갑 출마에 이름을 올린 상태이지만, 지역내에서 참신성을 가진 젊은 정치신인이라는 강점을 앞세워 북구을에 도전해도 당내 경쟁 후보는 물론이고 본선에서도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정의당의 조명래 전 전국위원과 이영재 위원장은 당내 경선을 통해 후보로 결정되는 인사가 출사표를 던질 가능성이 높고 반(反)한국당 정서가 강한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외연확대에 노력하고 있다.무소속의 황영언 씨는 유성걸 전 의원과 함께 한국당 입당이 유보되면서 다시 입당절차를 거치게 되면 당내 도전에 나서고 그렇지 않을 경우 무소속 출마도 고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수성갑차기 대권주자 김부겸의원 대항한국당 정치 1번지 탈환 사활김병준 비대위원장 차출 등중량감 있는 후보로 빅매치 예고대구정치 1번지인 수성갑 지역 역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의 지역구로 자유한국당 공략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다.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지역구 관리에 소홀했다는 평가가 나돌면서 어느 때보다 한국당 측 인사들의 도전바람이 거세어지는 분위기다. 김 의원은 장관직을 마치고 곧바로 지역구에 살다시피하면서 주민과의 소통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며 한국당 도전자들과의 일전채비를 갖춰가고 있다.한국당 당내 경선참여자로는 정순천 당협 위원장과 이진훈 전 수성구청장 등을 비롯, 남상석 전 한국당 대구시당 안보위원장과 김현익 변호사, 한국당 복당을 기다리는 김경동 전 바른미래당 수성갑지역위원장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특히 김병준 전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차출설도 꾸준히 나도면서 빅매치로 총선이 치처질 것으로 점쳐지는 지역이다.김 전 위원장은 2개월여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영남대에서 특강을 한데 이어 수성구 지역 관계자들과의 만남을 가져 수성갑 차출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또 성주에서 태어나 초·중·고교와 대학을 모두 대구에서 나온 김 전 위원장이 고향에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언급했지만, 항상 당을 위해 국민의 원하는대로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어 한국당 내 험지에 속하는 수성갑에 출사표를 던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만일 김 전 위원장이 출마한다면 경선이 아닌 전략공천을 통해 성사될 것으로 지역 정가는 보고 있다.이는 차기 대권을 노리는 김부겸 의원에 대적할 만한 인물로는 현재 당내에서 거론되는 인사들로서는 중량감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지적이 당 내외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미 출마준비를 해온 한국당 내 경선 인사 중 정순천 당협위원장과 이진훈 전 수성구청장은 그동안 수성갑 당선의 바로미터는 지역민과의 친밀감과 밀착력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과거처럼 낙하산 인사를 공천하게 되면 필패의 카드가 될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다.이러한 주장에도 당 내외에서는 수성갑은 대구 정치1번지라는 상징성과 대구·경북지역 판세에 미칠 영향 등을 감안하고 한국당 입장에서 반드시 탈환해야 하는 지역이고 여당 후보가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만큼 한국당에서 중량감 있는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중·남구초선 강세 전통에 물갈이 기대감10여명 후보군 출마 움직임재선 도전 곽상도 의원 대적한국당서만 5~6명 공략 나설 듯대구 중·남구는 그동안 지역 유권자들이 초선의원만을 배출할 만큼 재선 도전의 무덤으로 유명하다.현재 한국당의 곽상도 의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재선을 노리는 상황에서 당내에는 배영식 전 의원과 임병헌 전 남구청장, 이인선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 도건우 전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 임형길 전 홍준표 당 대표 특보, 강연재 홍준표 전 당대표 법무특보 등 5∼6명이 한국당 공천 도전자 그룹으로 알려지고 있다.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이재용 전 환경부장관과 김현철 전 남구의회 의장 등이 준비중이다. 바른미래당에서는 김희국 전 의원과 윤순영 전 중구청장 등이 출마할 것으로 예상된다.한국당 경선의 경우 최근 곽 의원이 당내 저격수 역할을 하면서 인지도와 지지도 면에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어 당협위원장직은 물론이고 당 공천에도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성사되리라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당 경선 참여 예정자들은 당 비대위 시절 당협위원장에서 배제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는 판단 아래 당협위원장직과 경선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이 중 배영식 전 의원은 황교안 당 대표와 대학 동문인 점이 강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생애 마지막 총선에 도전한다는 각오로 지역구 다지기에 나서고 있다. 임병헌 전 남구청장은 3선의 구청장을 역임하면서 누구보다 지역의 어려운 점을 가장 많이 알고 있어 지역민과의 접촉을 표심으로 연결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고 보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역민과 소통하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이인선 대경경자청장은 청장 임기를 다 채우고 지역 경제발전을 위해 노력하는데 매진하겠다며 불출마 의사를 분명히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지난번 총선때 당내 경선에서 지역구를 옮겨야 하는 아픔을 겪은 만큼 이번 도전을 통해 명예를 회복하는데 나설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도건우 전 대경경자청장은 권영진 시장의 후광을 업고 중·남구에 출마해 권 시장의 시정 행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사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당협위원장 공모에도 신청한 것으로 전해졌다.임형길 전 특보는 지난 지방선거 당시 당내 중구청장 경선후보로 나섰던 경험과 홍준표 전 당대표와의 인연 등을 강점으로 참신성을 내세우며 오는 총선에 반드시 출마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홍준표 전 당 대표키즈인 강연재 법무특보는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한 지역 출신으로 지난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 노원구병’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바 있어 중·남구를 공략할 것으로 예상된다.민주당 이재용 전 환경부장관은 지난 2004년 열린우리당, 지난 2008년과 지난 2012년 무소속으로 총선에 나선 경험이 있고 당내 중량감 있는 후보군에 포함돼 있어 항상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당이 차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바른미래당에는 김희국 전 의원과 윤순영 전 중구청장도 총선 출마를 저울질 중이다. 김희국 전 의원은 유승민 의원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면서 적극적인 행보를 통해 의원직 탈환을 노리고 있다. 윤 전 청장은 최근 사단법인 ‘여성과 도시’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김영태기자 piuskk@kbmaeil.com

2019-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