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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도층의 표심이 두렵지 않은가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제22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야 모두에게 사활이 걸린 선거다. 여당이 과반을 얻지 못하면 국정의 동력을 잃고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불가피할 것이며, 야당이 대선·지선에 이어 총선까지 패배한다면 최후의 버팀목인 입법 권력마저 상실하기 때문이다.누가 승리할 것인가? 캐스팅 보트(casting vote)를 쥐고 있는 중도층의 표심을 잡는 정당이 이긴다. 총선은 결과가 뻔한 영남과 호남, 그리고 여야 각각 30% 안팎에 묶여 있는 콘크리트 지지층이 변수가 되지는 못한다. 총선의 승패는 전체 지역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도권에서 갈릴 것이며, 이 때 30%에 달하는 중도층의 선택이 결정적 변수가 될 것이다.중도층은 어떤 사람들인가? 레이코프(G. Lakoff)는 “이슈에 따라 보수적 또는 진보적으로 투표하는 이중개념주의(biconceptualism) 소유자”라고 했다. 이들은 ‘이념이 아니라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스윙보터(swing voter)’들이며, ‘무지한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현명한 실용주의자’이다. 정치팬덤들과는 달리 진영정치에 구속되지 않고 이슈와 상황에 따라 합리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그럼에도 여야의 정치적 극단주의(political extremism)는 갈수록 태산이다. 윤 대통령은 여당 연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역설했고, 국무회의에서는 장관들에게 ‘전사’가 되어서 “싸워 달라”고 주문했다.대통령이 요구한 ‘이념전쟁’에 지지층이 동의할지는 모르지만, ‘실용’을 중시하는 중도층은 비토(veto)그룹으로 돌아설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한국갤럽, 2023년 9월22일) 중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평가(59%)가 긍정평가(32%)의 2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야당의 극단주의는 또 어떤가? 이재명 대표 역시 ‘개딸’에 의존하는 팬덤정치로 일관해왔다. 자신의 사법 리스크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체포동의안 통과에 격분한 개딸들은 비명계 의원들에게 욕설은 물론 살해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팬덤에 편승하는 극단의 정치가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는 있겠지만 중도층의 마음을 잡을 수는 없다.이처럼 대통령의 이념 리스크와 야당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모두 총선에 부담요인이 되고 있다. 중도층은 사법 리스크에 기대어 반성 없는 여당도, 이념 리스크에 기대어 성찰 없는 야당도 싫어한다. 권력자의 입만 쳐다보는 ‘친윤’과 ‘친명’의 똑같은 편향적 행태, 그리고 지지자들의 목소리만 듣는 ‘뺄셈의 정치’로서는 중도 확장이 불가능하다.따라서 총선을 앞둔 여야는 중도층을 잡기 위한 혁신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여당은 ‘용산의 하청업체’로 전락한 당정관계를 재정립하는 동시에, 이념보다 실용을 모색해야 하고, 야당은 ‘친명’과 ‘비명’의 갈등을 극복하는 한편, 팬덤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 문제는 총선 공천권을 쥐고 있는 여야 최고 권력자의 목에 누가 먼저 ‘혁신의 방울’을 달아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2023-10-09

낙동강물과 신공항은 公共材임을 인식하길

대구취수원 오염문제와 TK신공항 물류단지 논란으로 촉발된 대구·구미간의 갈등이 심각한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대구시는 지난주 구미5국가산업단지 내 공장에 무방류시스템을 도입하지 않으면 환경부에 시설가동 중지명령을 요구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곳에 입주한 양극재 기업과 협력업체에 “공장 가동 시 낙동강 유역에 수질 오염물질이 배출되지 않도록 객관적 검증이 가능한 방법으로 무방류시스템을 도입하라”는 내용의 등기를 발송했다. 대구시의 이러한 조치는 구미시와의 취수원 갈등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4월 대구시와 구미시는 구미 해평취수장을 거친 하루 30만t의 물을 대구시에 공급하는 협약을 체결했었지만, 두달 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구미시장이 바뀐 후 이 협약이 파기됐다. 구미시는 이와 관련 지난 8일 보도자료를 내고 “대구시가 법적 근거도 없이 실효성이 떨어지는 무방류시스템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불법적”이라며 비난했다. 구미시는 “무방류시스템 도입없이도 수질오염물질을 기준에 맞게 농도를 낮추어 배출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최근 대구시와 구미시는 TK신공항 물류단지 조성문제를 놓고도 부딪혔다. 구미시가 반도체 등 지역 산업 발전과 기업유치를 위해 신공항 건설과 별개로 물류단지 조성과 고속도로 건설을 단독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자, 홍준표 대구시장이 SNS를 통해 “구미시장이 물 문제로 분탕질을 치더니 이번에는 대구경북 100년 사업까지 분탕질치고 있다”며 비판한 것이다.지난 1995년 민선단체장 시대가 개막한 후, 각종 사안을 둘러싼 인근 지자체간의 분쟁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지역발전을 위한 경쟁이라는 긍정적 측면으로도 볼 수 있지만, 사실상 대부분 ‘지역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갈등이다. 낙동강 취수원이나 TK신공항 물류단지는 이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미래가 달린 중요한 공공재다. 낙동강물이 어떻게 특정 지자체의 소유가 될 수 있나. 이런 공공재를 두고 지자체간에 유불리를 따지며 갈등을 보이는 모습은 대구경북 미래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23-10-09

포항공무원 횡령사고, ‘내부통제 빈틈’이 원인

후진국 관공서에서나 일어날 법한 포항시 공무원의 횡령사건과 관련해, 공직사회 내부통제시스템 부실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포항시 6급 공무원 A씨는 시유지를 감정 평가액보다 적은 금액에 매각하는 방법으로 수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지난달 26일 구속됐다.포항지역사회에서는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실무직원이 혼자서 어떻게 거액을 횡령할 수 있느냐는 의심을 하고 있다. 결제라인을 거쳐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공무원이 임의대로 공인감정가보다 낮은 가격에 시유지를 매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경찰도 혼자서 범행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포항시의 경우 공유재산 매각 업무는 과장 전결이다. 시유지 감정가는 공인감정평가사 2명이 평가한 후, 산출 금액들의 평균가로 정하게 돼 있다. A씨는 시유지 감정가가 38억1천여만원으로 산출됐지만 30억6천여만원에 매각했다. 7억4천여만원이나 낮은 가격에 매각한 것이다.또 다른 의혹은, A씨가 포항시 계좌로 입금된 매각대금 가운데 5억6천여만원을 어떤 방법으로 착복할 수 있었느냐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보면 포항시 회계시스템의 경우, 담당 공무원이 마음만 먹으면 시 계좌에 입금된 돈을 인출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회계관리시스템이 총체적으로 허술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수사결과 A씨는 지난 2017년부터 5년간 시 재산 매각 업무를 담당하면서 비리를 저질렀지만, 상급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부서 내 감시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이번 횡령사건으로 포항시정에 대한 시민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다. 공직사회의 도덕불감증이 위험 수위를 넘어섰고, 내부통제시스템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외부통제와는 달리 내부통제는 자율적인 통제방법이다. 그래서 어떤 집단이든 내부통제가 허술하면 조직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비리행위가 발생할 수 있다. 포항시는 이번 횡령사고에 대해 철저히 분석해서, 과학적이고 실효성 있는 내부통제 시스템을 새로 만들길 바란다.

2023-10-05

한글주간, 우리말 정체성 회복의 시간으로

문화체육관광부는 4일부터 10일까지 일주일간을 ‘한글주간’으로 정하고 각종 행사를 벌이고 있다. 한글날을 기념하고 세계인이 참여하는 문화축제를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다.경북도도 같은기간 동안 ‘경북도 한글사랑 주간’을 운영하면서 경북도 한글대잔치, 한글문예대전, 한글유적지 탐방 등의 행사를 벌이고 있다.올해로써 한글은 창제 577돌을 맞는다. 세종대왕 25년인 1443년에 완성된 한글은 3년간 시험기간을 거쳐 1446년 반포됐다. 우리 문자가 없어 남의 글자인 한자를 빌려 쓰던 백성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세종대왕의 각고 노력으로 만들어졌다.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독창적인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 문맹율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한글의 간결함과 과학성 때문이다. 컴퓨터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한글은 일본어나 중국어보다 7배 빠르다. 글자가 없으면 지식의 축적이나 문화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중국 한자를 빌려 쓴다는 것은 불편뿐아니라 각자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가 없다. 생활의 불편과 더불어 문화발전에도 큰 장애다.한글의 우수성에도 우리 생활 속에서는 여전히 외래어가 판치고, 잘못된 한글 사용으로 우리나라 말의 정체성이 크게 훼손되는 사례가 많다. 글로벌 시대라는 이유로 꼭 외래어를 써야하는지 한글날을 맞아 되돌아볼 문제다.코로나 팬데믹이나 위드코로나를 대유행이나 공존 등의 우리말로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거리의 간판이나 아파트명, 심지어 국제화란 이유로 회사명에도 외래어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또 비속어나 신조어 등으로 한글의 정체성이 훼손되는 일도 잦다. 중고생 10명 중 6명이 습관적으로 줄임말과 신조어를 사용한다는 조사도 있다. 청소년의 잘못된 한글 사용이 장차 우리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아찔하다.한글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한글 존중이 더 필요하다. 나라의 정체성은 언어와 문자에서 비롯된다. 한글의 날 반짝 한글 사랑으로 끝나지 말고 한글 사용에 정부의 더 적극적 노력이 있어야겠다.

2023-10-05

민심이 천심이라고?

홍석봉 대구지사장 고염무(顧炎武)는 천하와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분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은 그 군주와 신하가 민생을 위해 일을 도모하면 되지만 천하를 지키는 것은 지체가 낮은 필부에게 책임이 있다(天下興亡 匹夫有責)’고 했다. 고염무는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던 혼돈의 시기에 활동하던 사상가다. 당시 관리와 귀족들은 청나라의 점령과 악행에 분노했다. 반면 일부 식자층에선 명나라의 멸망에 대해 보다 본질적인 문제점을 찾기 위해 인문학적 성찰을 시작했다. 그 화두의 중심이 고염무의 ‘천하흥망 필부유책’이었다. 중국 사회의 자각운동의 시작이었다.영국 출신의 마이클 브린 전 외신기자 협회장은 ‘조작 여론조사가 먹히는 요지경 나라’라는 책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법이 아닌 야수가 된 인민이 지배한다’고 설파했다. 한국은 민심에 따라 정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민중에 대한 경고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죽인 이도 무지한 민중들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조익순 전 고려대교수는“과거 조선은 양반들 때문에 망했으나 지금은 민중이라는 탈을 쓴 좌익 빨갱이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그리스, 로마와 같은 한때 세계 최강의 나라들이 멸망한 이유도 바로 내부로부터의 붕괴 때문이었다고 했다. 정신적 타락과 사회질서의 붕괴로 자기결정 능력을 상실한 것이 그 근본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독일의 한 경제신문은 최근 “오염처리수가 과학적으로 문제가 없음에도 많은 한국인이 공포에 떨고 있고 야당인 민주당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광우병, 사드 전자파, 후쿠시마 오염수 괴담으로 우리 사회가 심한 홍역을 앓았다. 좌파 세력의 선동이 원인이다. 그 피해는 엄청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지지율이 줄곧 30%대에 머물고 있다. 좌파와의 싸움을 밀어부치고 타협하지 않는 정치력 탓이 크다. 하지만 좌파 세력들의 선동 및 시위와 무관하지 않다. 나치 독일의 선전가 괴벨스는 “분노와 증오는 대중을 열광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했다.중국 축구를 응원한 포털 다음과 드루킹 사건에서 보듯 네티즌과 정치세력에 의한 여론조작이 심각하다. 거짓과 진실이 혼재된 상황 속에 거짓 정보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필부들에겐 더욱 어렵다. 필부는 부하뇌동하기 마련이다. 절제되지 않고, 무책임한 민중과 민심은 자칫 망국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집단 광기까지 더해진다면 위태롭기 짝이 없다. 한때 TV를 바보상자라고 칭한 적이 있다. 민중의 정치에 대한 관심을 돌려놓고 무디게 만들어 놀이와 유흥에 빠지도록 했다. 정치인에게 민중의 각성은 위험하다.여론조사 전성시대다. 하지만 정치 여론조사는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 없다. 침묵하는 다수의 여론은 반영되지 않는다. 여론조사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이유다. 그저 추세만 확인하는 데 그치는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민심은 천심’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민심은 곧 정의’라는 믿음이 허망하게 깨지고 있는 요즘이다.

2023-10-05

청소년 비만

우정구 논설위원 비만이란 체내에 지방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질병을 일컫는 말이다. 체중이 정상 범위보다 높지만 근육량이 많고 체지방률이 낮은 경우는 비만이라 하지 않는다.과거 먹을 것이 부족했던 사회에서는 비만인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비만 자체가 부와 여유로움의 상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나라도 1970년대까지만 해도 살이 찐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으로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인 비만율은 1998년에는 26% 정도였다. 이것이 2005년 30%를 넘어섰고, 2020년에 38.3%였으나 코로나 영향으로 2021년에는 37.1%로 감소했다. OECD 기준으로 볼 때 한국의 비만인구는 OECD 평균의 4분의 1수준으로 매우 낮다.한자 문화권으로 분류되는 한국과 중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국가들은 서구에 비해 비만 정도가 낮다. 채식위주 식습관을 가진 베트남은 세계적으로 비만이 가장 낮은 나라다.문제는 비만이 불러오는 질병에 있다. 고열량 저영양 가공식품이나 음료 등을 즐겨 마시면 당뇨나 고혈압 등의 만성질환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서구화된 식생활에 익숙해지면 고도비만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우리나라 청소년의 비만이 늘고 있어 부모들의 경각심이 요구된다는 소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비만으로 진료받은 중학생이 4년전보다 3.1배 늘었고, 또 같은 기간 20대 청년층에서는 당뇨 환자수가 4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인의 대표적 길거리 음식인 고당분의 탕후루같은 식품류가 청소년의 건강을 위협한다고 한다. 청소년기 비만 가볍게 보다가는 큰코다칠 일이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0-05

‘같아요’ 증후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언제부턴가 말끝마다 “같아요”를 남발하는 말버릇이 유행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 요즘 젊은이들은 대다수가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너무 슬픈 것 같아요”, “너무 맛있는 것 같아요” 따위의 말투를 입에 달고 있다. 자신의 감정이나 체험을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 습관도 문제지만 어법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이 일반화 되는 것은 일종의 증후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같다’는 말은 ‘다르지 아니하다, 전과 변함이 없다’는 뜻의 형용사다. 그리고 ‘~ㄴ 것, ~는 것, ~ㄹ 것, ~을 것’ 등의 뒤에 쓰여서 추측이나 불확실한 단정을 나타내기도 하고, ‘미루어 생각할 때나, 생각이나 느낌을 듣는 사람의 감정이 상하지 아니하도록 부드럽게 표현하고자 할 때’도 쓰인다. 그렇듯 어엿한 우리말이지만 부적절하게 남용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너무 좋은 거 같아요”는 어법에 맞지 않는다. ‘너무’라는 부정적 의미의 부사도 적절치 않지만, ‘아주 많이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는 말에는 ‘같아요’라는 추측이나 불확실한 짐작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 말이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통용된다는 것은 우리말에 대한 상식적인 수준의 인식도 없다는 걸 의미한다.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의 교양과목으로도 국어를 배우면서 우리말에 대한 그 정도의 상식도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국어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같아요’라는 말투가 젊은이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제주대학교 김재왕 교수는, 첫째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단정적으로 잘라 말하는 것은 각박하다는 생각 때문이고, 둘째는 젊은 세대들의 자신감 상실·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자세·책임을 피하려는 성향 등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가 있고, 셋째로는 사고력의 퇴화를 그 원인으로 꼽고 있다. ‘넘쳐나는 인터넷 정보, 참고서 수준의 알찬 교과서, 유려한 영상교육, 풍부한 참고서 등 학습 환경의 개선으로 표면적인 문제해결능력이나 수리능력은 향상되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리분별능력, 응용능력 및 언어표현능력 등은 오히려 퇴락한 것’이라는 설명이다.사회적·심리적 요인이 언어의 혼탁을 가져오는 것이지만, 역으로 혼란스럽고 천박한 언어가 청소년들의 정서나 심성에 미치는 영향도 막대한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언어생활이 중요하다. 올바른 언어가 올바른 생각을 갖게 하고, 올바른 생각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기 마련이다. 공기의 오염, 토양의 오염, 바다의 오염 못지않게 언어의 오염도 우리 삶을 해치는 공해라는 각성이 일어야 한다.특히나 요즘은 좌파 정치인들과 동조하는 극렬 팬덤이 쏟아내는 온갖 거칠고 사악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그런 말들에 오염되지 않고 올바른 언어습관을 갖도록 교육현장에서 각별한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한글날을 앞두고 해보는 쓴소리다.

2023-10-05

장묘 문화가 바뀌고 있다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이번 추석에도 가족묘를 찾아가 술 한 잔씩을 정성스레 올렸다. 조모님은 파주의 묘지에, 부모님은 대구의 공원묘원에, 그리고 1년 전 귀천한 동생은 의왕의 납골당에 모셔져 있어서 한 바퀴 순회하듯 마음 경건히 둘러보았다. 그런데 추석 연휴가 길어서인지 성묘객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아 조용한 분위기였다. 기일(忌日)이나 한식날에도 찾아보려 했었지만 추석에 한 번 찾아가는 것도 어려워 묘지관리는 맡기고 있다. 덕분에 산소는 깔끔하게 벌초가 되어 있어 고마웠다.우리의 장묘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유교문화를 전통으로 한 매장(埋葬)도 90년대부터 변하기 시작하여 요즘은 화장(火葬)이 90%를 넘고 포항지역만 해도 81.4%라고 한다. 화장 후에도 납골당에 정갈하게 봉안하기보다는 수목이나 잔디밭에 묻는 자연장(自然葬)이 더 많다고 하니 후손들의 관리 불편에 따른 심정이 조금 묻어있는 것 같다. 산에 봉분을 만드는 일반 매장은 유족의 경제적 부담과 함께 1인 가구와 핵가족의 증가, 고령화 등으로 인해 1년에 한 번도 성묘하지 못하는 죄스러움도 있을 것이고, 수해의 우려와 교통편 등을 생각하더라도 넓은 추모 공원 등에 안치하는 것이 좋아서 앞으로의 장묘문화가 될 것 같다.우리나라의 묘지 면적은 국토의 약 1%이고 매년 20여만 기의 묘가 만들어지고 있어 10년 이내에 묘지공급의 한계가 우려되는 장묘 대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예측도 있다. 2001년 제정된 장사(葬事) 관련 법은, 매장은 국토를 잠식하고 자연환경을 훼손한다는 관점에서 화장과 봉안, 자연장을 장려하며 묘지 조성은 허가를 받도록 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는 약 1천800만 기의 묘지가 있으며 그중 3분의 1 정도가 무연고 묘로 조사되어 각 지방자치단체는 분묘 개장과 이장을 권고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산행하다 보면 산 능선과 아늑한 계곡에서 많은 무덤을 보게 되는데 거의 다 벌초도 되지 않고 손상된 방치 묘소로서 버젓이 큰 비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잘 나가던 집안이었던 같은 데도 돌보는 후손이 없는 듯하며 마음이 아프다. 명심보감에서 읽은 ‘살아서 백 년간 몸을 보전하기 어렵고 죽어서는 백 년 동안 무덤을 보전하기 어렵다(難保百年墳)’는 글귀가 생각난다. 무덤은 명당이어야 한다며 배산임수니 좌향이 어떠니 하며 풍수를 보곤했지만 이제는 세상도 바뀌어 명절 때 벌초하고 성묘하기 위해 교통이 편리하고 경관이 좋은 곳이 명당이 되겠다.점점 화장이 증가하는 추세를 따라 포항시는 2021년에 친자연적 장례문화를 구축하고 편리한 장사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으로 추모공원 설립지를 공모했었지만 반응을 얻지 못하였다가 올해 다시 모집한 결과 남부의 장기면을 비롯한 7개 지역이 참여 의사를 밝혀 추진력을 얻고있다. 약 10만 평 규모에 80%는 공원화하고 20%는 화장시설, 봉안시설 등을 갖추어 2025년 3월 개원을 목표로 포항지역의 대표적 명승지로 만들려고 한다.우리의 장묘문화도 시대의 흐름과 국민의 사회적 의식 변화로 바뀌어가겠지만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만은 마음에 한껏 안고 가야 할 것이다.

2023-10-05

글로벌 수변도시 금호강르네상스, 첫발 뗐다

포항시 죽장면에서 발원한 금호강은 여러 하천이 영천호에서 합류하고 경산을 거쳐 대구시계로 들어온다. 이 강은 수성구와 동구, 북구, 서구, 달서구 등을 끼고 흐르다 남류해 달성습지 부근에 있는 낙동강과 합류한다.낙동강이 영남의 젖줄이라면 금호강은 명실상부한 대구시민의 젖줄이라 하겠다. 기록에 의하면 금호강은 강변에서 바람이 불면 갈대밭에서 비파(琴) 소리가 나고 호수처럼 잔잔하다고 하여 금호(琴湖)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이렇듯 원래 깨끗하고 잔잔하던 강물이 한 때는 낙동강 수질오염의 주된 오염원으로 지목될 만큼 수질 오염이 심각했다. 1970∼80년대에는 제대로 된 환경규제가 없어 성서지구와 북구 일대 공장에서 흘러나온 오폐수로 강물이 크게 오염됐다. 이후 대구시 등의 정화 노력으로 전국 오염하천 중 수질개선율 최고의 실적을 달성해 지금은 붕어와 잉어 등이 살 수 있는 3급수로 바뀌었다.대구 도심을 둘러싸고 있는 금호강 주변을 개발해 대구를 글로벌 내륙수변도시로 조성하고 시민에게는 가장 친숙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사업이 금호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다. 대구경북 신공항이 지역의 미래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경제사업이라면 금호강 르네상스는 대구의 얼굴을 바꿔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환경친화적 사업이다. 이 사업에만 5천400억원이 들 것으로 시는 예상하고 있다.GRDP 전국 꼴찌의 대구 불명예를 벗고 옛 명성을 되찾겠다는 홍준표 대구시장의 핵심 공약사업의 하나란 점에서 시민의 기대감도 크다.대구시가 계획한 금호강 르네상스 사업의 3개 선도사업비가 내년도 정부 예산에 반영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제 이 사업은 내년이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된다. 대구시는 확보된 예산으로 동촌유원지일원 금호강하천조성공사, 금호강 국가생태탐방로 조성사업, 디아크 문화관광활성화 사업을 내년에 바로 착공키로 했다. 특히 금호강 르네상스 사업을 시민들이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대구의 얼굴을 바꾸는 이 사업의 성공적 완성을 기대한다.

2023-10-04

세리머니의 쓴 맛

홍석봉 대구지사장 농구의 버저 비터는 경기종료를 알리는 버저소리와 함께 성공된 골을 일컫는 말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농구경기에서 버저 비터로 승부가 뒤집히는 일이 적지 않다. 축구 경기에서도 종료 직전 터진 골이 승부를 되돌려 놓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관중과 팬에겐 짜릿한 감동을 선사한다. 특히 연장전 종료 직전 터지는 골은 더욱 극적이다.1970년대 고교야구의 명문인 군산상고는 9회말 역전극의 대명사였다. 1971년 황금사자기 결승전의 짜릿한 역전우승은 군산상고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의 절체절명의 상황에 극적인 안타를 터뜨려 역전 우승의 기적을 만들었다. 여기서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가 탄생했다. 이후 군산상고는 고교야구 메이저 대회를 석권하면서 여러 차례 1점 차 역전승을 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했다.육상 경기와 스케이트 경기에서도 막판 불꽃같은 질주로 승부를 뒤집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처럼 스포츠 경기에서 막판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하는 뒤집기 승부는 그만큼 팬들에게 감동과 기쁨을 준다. 상대방으로 봐선 막판 방심했다가 천려일실이 된다. 그런 일이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벌어졌다. 막판 1위를 자신하고 세리머니를 하다가 뒤따라온 선수에게 지고 마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한국 남자 롤러스케이팅 대표팀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3000m 계주에서 결승선 통과 직전 우승을 확신한 만세 세리머니를 하다 간발의 차로 대만에 추월 당해 금메달을 놓쳤다. 딱 0.01초 차이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점을 잊고 방심한 탓이다. 계주 마지막 주자의 방심의 결과는 메달 색깔을 바꿔놓았다. 매사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값진 교훈을 남겼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04

우리 글엔, 자존심도 없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여기서부터 원스푸드(Once Food)거리입니다’. 무슨 말일까. 관광지로 제법 이름난 국내 어느 도시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이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글이라 읽을 수는 있었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군민 플로깅챌런지’라 큼지막하게 적은 현수막도 보인다. 영문자의 도움도 없어 아예 그 뜻을 가늠조차 못하겠다. 어느 병원은 아예 ‘Moocheok Joeun Hospital’이라 상호를 내걸었다. 찬찬히 읽어 ‘무척좋은병원’이라 새기겠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글인가 영어인가. 한국인가 미국인가. 민족의 명절 추석을 지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아연해 졌다.‘Special Live Dinner Buffet’라고 광고를 하거나 ‘Forest Camping BBQ’라 버젓이 적어 알린다. ‘프레시랍스터’와 ‘핑크새먼디쉬’가 맛있는 집이라며 손님을 모은다. 그런 표현을 보면서도 별 생각없이 이해하고 넘기는 소비자들도 문제가 아닐까.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우리글과 우리말이 무너져 내린다. 언젠가 로스앤젤레스 등 외국의 거리를 한국말 간판으로 물들인다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우리말이 사라져 간다. ‘원스푸드’가 음식점에서 음식물을 두 번씩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니 그 뜻은 오히려 고맙다. ‘플로깅’도 운동을 하면서 쓰레기도 줍는 캠페인이었다니 곱지않게 보았던 마음이 오히려 미안하다. 관광지라지만 이왕 한글로 적을 거였다면, 보다 새기기 쉽게 표현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한가위 명절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글날이 다가오는데, 중국글자 한자(漢字)를 힘들어 했던 백성들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던 세종 임금의 마음도 다시 새겨본다. 우리가 우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말과 한글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업수이 여길 때 남들은 우리를 또 얼마나 하찮게 여길까. 멋진 우리말을 버젓이 두고 외래어와 외국표현에만 익숙해지면, 우리말과 우리글은 또 얼마나 빠르게 사그라들까. 때로 습관과 태도는 의지적으로 지켜야 한다. 대상이 우리만의 것이었을 때, 그걸 지킬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세계화와 글로벌이 대세라 해도, 우리만의 고유한 멋과 맛은 소중하게 간직하며 지켜낼 때 빛이 나지 않을까.한가위 보름달은 어디에도 떴지만, 온겨레가 명절로 섬기기는 우리뿐이 아닐까. 정겹고 아름다운 전통은 지켜야 하고, 몸에 배어 습관이 된 문화는 키워야 한다. 밖으로부터 흘러든 문화와 영향도 어렵지 않게 받지만, 우리의 모습과 부딪힐 땐 잘 생각해야 한다. 때로 우리보다 나은 무엇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문화 안에 깃든 정서와 흐름은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무엇이라도 함부로 가벼이 여겨 쉽사리 팽개치는 잘못은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지만 문화적 정체성과 경제적 영향력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중히 여기고 다루어야 한다.

2023-10-04

대통령측근 TK총선 출마, ‘落點’은 안돼

추석 연휴가 지나자마자 대구·경북(TK) 정치권이 총선 모드로 접어든 것 같다. 내년 4·10 총선을 6개월여 앞두고 국민의힘 공천과정에 주요변수가 될 대통령실 TK출신 참모들의 출마설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 대통령실에서 내부조사를 한 결과, 30명 정도의 참모진이 총선 출마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TK지역에선 이병훈 행정관(포항남울릉 출마설)과 김찬영 행정관(구미 출마설), 조지연 행정관(경산 출마설) 등이 거론된다. 유동적이긴 하지만 이들은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고 지역 기반이 약하기 때문에 일찌감치 사직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수석 비서관급이나 최측근 참모들은 10월 국정감사와 11월 예산안 처리 일정이 있기 때문에 내년 1월까지 순차적으로 사직할 것으로 점쳐진다. 공직자가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할 경우 총선 90일 전인 1월 11일까지 사직해야 한다. TK지역에선 강명구 국정기획비서관(구미을 출마설), 강훈 국정홍보비서관(포항북 출마설), 전광삼 시민소통비서관(대구 북갑 출마설)이 출마 후보군이다.추경호(달성) 경제부총리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총선 출마를 공식화할 수 있다. 내각에선 추 부총리 외에 한동훈 법무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원의 출마가 유력하다.역대 정권에서도 총선을 6개월쯤 앞둔 시점이 되면 내각이나 대통령 참모들의 출마설이 이슈가 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통령 측근들의 출마설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 여소야대 정국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보수진영에서 자칫 ‘용산 리스트’를 둘러싼 파열음이 커질 경우 총선 국면의 대형 악재로 비화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대통령실은 “용산참모들이 TK지역에 출마하더라도 전략공천은 없다”고 밝혔지만, 여당 내부에선 대통령실과 여의도 간 공천 갈등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여당의 TK지역 전략공천은 자칫 전국적인 쟁점으로 비화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관리돼야 한다.

2023-10-04

병원 순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뭐 딱히 심각하게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아프진 않다고 할 수도 없다. 큰 병을 진단 받은 것도 아니다. 죽을 때까지 복용해야 할 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누웠다 일어나면서 아이고 소리를 낸다든지, 허리 다리 머리, 릿자로 끝나는 몸 어딘가는 다 조금씩 성치 않다. 날씨로 치자면 쾌청하지 않은 구름 좀 낀 흐림. 가장 좋은 처방은 열심히 운동하는 거라는데, 그게 잘 안된다. 집 가까이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은 마음이 눈꼽만치도 없다. 아파트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책로가 잘 닦여있다고 하는데, 글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남편이 운동하라고 사준 자전거며 운동기구도 3일 만에 구석자리 차지다. 그러니 그저 아프면 병원엘 간다. 게으름을 탓해야 하겠지만 아직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크게 아프진 않아서인가. 어쨌든 늙었으니 성치 않은 구석이 하나둘씩 생기긴 한다.얼마 전 어지러움증이 있어서 병원엘 갔더니 이석증이란다. 아침 6시 30쯤 갔더니 예약 마감. 다음 날 아침 5시에 가서야 겨우 접수를 할 정도로 용하다고 소문난 병원이라선지 매주 정기진료시간을 예약해도 보통 2시간은 기다려야 진료를 본다. 심하진 않지만 장기치료를 해야 한다고 해서 매주 가고 있다. 스무 개도 넘는 치료실 병상에 누운 환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부산, 김천, 봉화에서 전날 밤에 와 대기실에서 쪼그려 밤새워 기다린 분도 있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대구 아들딸네 집에 묵고 왔다는 노인들이 허다하니 운전해서 10여 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나는 명함도 못 내민다. 집 가까이 믿을 만한 병원이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2년마다 하는 정기검진이 나이가 들면서 항목이 더 추가된다. 골밀도 검사를 하니 뼈 나이가 실제 나이보단 젊지만 예방 차원에서 열심히 운동하라는 처방이 내린다. 열심히 햇볕 쬐며 운동하면 될 터이다. 게을러터진 나는 운동 대신 비타민D 주사를 3개월마다 맞으러 병원엘 간다. 치과 진료도 일 년에 두 번, 나의 달력엔 이렇게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아야 할 병명과 예방주사 주기가 눈에 띈다. 다음 달엔 고령자 독감 예방주사를 맞아야 하나보다.생로병사. 인간이라면 반드시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인생사고(人生四苦). 나서 세월과 함께 늙음은 자연스럽다. 그저 추하지않게 늙으려 노력할 따름이다. 죽음 또한 거스를 방법이 없다. 네 가지 고통 중 세 가지는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70 가까운 나이 되어 병원 순례를 하게 되니 제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병고(病苦)가 아닌가 싶다. 병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살면 무병장수할까마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병원 가는 일이다. 의술 좋아졌겠다 병들면 고치면 되고, 보험 들어있으니 돈 걱정도 크게 하지 않아도 되니 지금은 유병장수시대라고들 한다. 병 있어도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인데 난 싫다.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무병하다면 차라리 단명하고 싶다. 병치레는 싫다. 그럼 무조건 걸으며 운동해야 할 텐데 어쩔래? 자문한다.

2023-10-04

시월 속으로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추석연휴에 임시휴무까지 더해져 장장 6일간의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지니, 가을맞이가 한결 넉넉해진 것 같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고유한 민속명절인 추석과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이 개국한 날을 기념하는 개천절까지 연휴가 이어져서, 사람들의 이동과 활동이 많아지고 만남과 어울림의 모습들이 분방하게 보인다. 하지만 영세 사업장이나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에게는 황금연휴를 보장받지 못하는 ‘남 얘기’로 휴식권의 사각지대가 발생돼 아쉽고 마음 편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시월이 열리면서 정갈한 햇살 아래 오곡백과가 무르익어가고 초목의 빛 어림이 나날이 짙어가는 본격적인 가을날로 접어들고 있다. 억새는 긴 목을 뽑아 은빛 환호를 하고, 잎새는 바람결에 차츰 황록색을 띠거나 홍조의 빛깔로 손 흔들며 가을을 반기고 있다. 쾌청한 날씨에 기온마저 적당하니 어디를 가거나 누구를 만나더라도 조요(照耀)하고 푸근하기만 하다. 긴 연휴에 한동안 뜸했던 곳을 찾아 적조했던 사람들과의 해후와 소통은 반가움을 넘어 인연의 소중함을 보듬는 각별함이 아닐까 싶다.‘꽃 피고 지는/아름다운 세상에서/살아있는 모든 날이/기쁘고 감사하지만//10월의 하루 하루는/더없이 행복한 시간,/차츰 단풍 물드는/나뭇잎들을 바라보며//내 작은 가슴도/고운빛으로 물들어 가고/높푸른 하늘 우러러/마음은 겸손이 평안하다.//거저 받은 목숨이니/아무런 자랑도 교만도 없이/인생길 소풍가듯/즐거이 걸어가다가//이 몸 또한/한 잎 낙엽 되면/그 뿐인 걸’ - 정연복 시 ‘10월의 노래’ 전문조금은 느긋해진 마음으로 바람따라 길을 나섰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쑥부쟁이가 흐드러진 들길을 지나 발길 닿는대로 찾아가서 반가운 분들을 두루 만났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사람 만나는 것 또한 좀체 물리지 않은 일이라 해도, 늘 무엇인가에 쫓기 듯 다급하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주변의 친인척이나 친구, 지인 등과의 연락이나 안부를 제대로 못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다반사가 돼버린 듯하다. 하지만, 너무 뜸하거나 소원해지면 수풀 우거진 오솔길 마냥 교감의 길목이 막히거나 끊어질 수도 있기에 적당한 소통과 왕래가 있어야 마음의 다리가 줄곧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모처럼 만나고 대면하는 모든 분들은 정겨움과 오붓함이 한결 같았다. 추석인사를 겸해서 이런저런 근황과 정담을 나누고 담소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굴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서먹함을 털고 살가움을 누리기에는 충분했다. 더욱이 재회의 증표(?)마냥 근사한 팔찌를 선물로 주거나 향기로운 차에 다식(茶食)을 내주고 손수 농사 지은 고구마를 선뜻 건네주는 인정 어린 마음은 두고두고 미덥고 고맙기만 했다.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은 저절로 찾아오기 마련(近者說遠者來)이다. 가까울수록 신의를 지키고 배려와 아량으로 챙겨주게 되면, 교분은 더욱 두터워지고 정의(情誼)는 시월의 단풍마냥 색조 곱게 물들 것이다. 세상만사 자신이 하기에 달린 것이다.

2023-10-04

경신일주(庚申日柱)

육십갑자 중 오십일곱 번째는 경신(庚申)이다. 천간(天干)의 경금(庚金)과 지지(地支)의 신금(申金)은 모두 금(金)의 기운으로 단단하고 거대한 바위며, 강직한 쇳덩어리며, 가을기운이다. 동물로는 원숭이다.경신일주는 자존감이 강하고 고집이 세며 의협심이 남다르기 때문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다. 무슨 일이든 한 번 결정하면 즉시 시행하여 밀고 나가는 뚝심이 있다. 추진력이 좋아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어 내려는 성향이 강해서 자수성가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혈기왕성하고 사회생활에서도 중심에 서서 크게 권위를 떨치며 성공하는 일주로 재물복도 좋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강한 기세에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안하무인이 되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지나친 행동으로 남의 눈 밖에 나서 왕따 당하기 때문에 잘나갈 때 더욱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항상 마음을 수행해야 한다.경신은 양에서 음으로 넘어온 기운이며, 열매를 맺고 낙엽이 지는 쓸쓸한 가을에 해당한다. 금(金)의 속성이 있어 차갑고 단단하고 견고한 성질을 가진다. 그러기에 쇠는 용광로를 통해 화려하게 재탄생하는 창조적인 힘을 겸비하고 있다. 모든 일에 경쟁의 논리로써 일을 추진해 내는 강한 힘이 있다. 승부욕이 뛰어난 혁명가의 기질도 겸비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일주라고 볼 수 있다.그리스신화에서 철을 잘 다루는 불과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제우스와 헤라 사이 에 난 아들이다. 신이 다리를 저는 데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가 태어났을 때 너무 못생겨 헤라가 올림포스에서 내던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제우스와 헤라의 부부싸움에 헤라 편을 들다 제우스가 걷어차서 렘노스섬에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테티스와 에우리노메의 보살핌을 받으며 대장장이 기술과 제련기술을 연마했다고 한다.헤파이스토스는 어머니 헤라에게 황금의자를 선물했다. 의자에는 잠금장치가 있어 거기에 앉은 헤라는 일어날 수 없었다.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결혼을 약속하고 올림포스로 데려왔다. 모자는 화해하고 올림포스에서 살게 되었다. 헤파이스토스의 아내 아프로디테(일명 비너스)는 사랑을 상징하는 신이다.헤파이스토스는 아름다운 아내 아프로디테보다 대장장이 일에만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밀회를 나눈다. 이 사실을 아폴론이 헤파이스토스한테 귀띔해준다. 그는 밀회장소에 청동을 가늘게 짠 보이지 않는 그물을 만들어 움직일 수 없게 하여 여러 신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준다.그는 제우스의 황금 옥좌, 왕홀, 제우스의 벼락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갑옷, 포세이돈의 삼지창, 헤라클레스의 갑옷, 아르테미스와 아폴론의 화살 등도 만들었다. 신이든 인간이든 만들어 달라고 하면 뚝딱뚝딱 만들어 주는 그리스신화의 최고 대장장이 신이다. 그는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최초로 여성 판도라를 만들기까지 했다. 마치 인공지능(AI)같은 존재다. 창조가 문명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었다.경신일주의 남자는 자신의 강하고 독단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럽고 여유로운 배우자를 만나면 평탄하다. 자신의 색정과 독선적인 성격을 자제하지 않는다면 해로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여성은 본인이 가정을 꾸려가는 여장부 스타일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솔직담백하지만 무뚝뚝하고 무심한 성격이 많다. 이를 잘 받아주는 남자를 만나야 순탄한 생활을 할 수 있다.경신일주의 신(申)은 동물로 원숭이다. 재주 많고 심술궂은 원숭이는 말도 잘하고 성격도 쿨하고 화끈하며 놀기도 잘한다. 남으로부터 인정과 칭찬받는 것을 좋아한다. 자유분방하지만 배짱 하나는 좋은 편이다. 자기과시를 너무 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으니 경거망동은 삼가는 것이 좋다.옛날에 경신일에 하는 경신기도(庚申祈禱)가 있었다. 도교(道敎)에서는 이날 아무런 형체도 없이 사람의 몸에 기생하는 삼시충(三尸蟲)이 사람이 잠든 사이에 외출한다고 믿었다. 외출한 삼시충이 곧장 하늘로 올라가 상제에게 그 동안의 죄상을 고해바치는 것이다. 상제는 죄질에 따라 벌을 주는데, 벌은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방해하기 위해서 밤새도록 술 마시고 놀았다고 한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경신일에는 잠을 자지 않아야 하는데, 이상한 것은 이날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잠을 안자고 견디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밤새도록 악기를 연주하거나 염불하는 관습이 행해졌다. 도교신앙에서 비롯된 경신수야(庚申守夜)는 원래 중국 송나라에서 행해지던 풍속을 고려도 받아들였는데,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고려 때는 60일에 한 번씩 일 년에 여섯 번 밤샘 축제를 벌였던 것이다.조선에서도 성종17년(1486년) 11월19일 경신 날에 왕이 대신들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잔치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신연회가 없어진 것은 영조 33년(1759년)이었다. 밤샘을 금지시키는 대신 등불을 밝히고 근신하면서 밤을 새우도록 명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경신일에 밤을 새우는 전통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지금도 수행자들 사이에서 간간히 행해지고 있다고 한다.전통이란 참으로 끈질기다. 도교적 전통에서 시작된 경신수야는 고려를 거쳐 조선 영조 때까지 600년 가까이 이어져왔다. 시작은 종교적 이유였지만, 나중에는 온 백성이 즐기는 풍속이 되었다. 생활에 지친 백성들은 일년에 여섯 번은 고된 삶에서 해방이 되는 그들만의 축제로 생각했을 것이다. 마치 크리스마스이브에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까지 덩달아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을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023-10-04

엄마의 밥상

윤명희 수필가 친구가 떡 봉지를 펼쳤다. 친정엄마 제사라며 떡을 주문하고, 전 부칠 재료들을 챙겨 큰오빠네 갔던 그녀다. 다음 제사에는 식판을 사가야겠다고 한다. 제사에 식판이라고? 그녀는 또 뜬금없이 효도는 셀프,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오빠 넷에 세 명의 언니를 둔 그녀가 친정제사 음식을 도맡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멀리서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조카들이 제삿날에 옥수수 알맹이 빠지듯이 한 것은 벌써 몇 해 전부터의 일이다. 큰오빠가 부모 제사는 자식의 몫이니 앞으로 아랫대는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한 것이 코로나가 시작되던 해였다.시부모님 따라 간 넷째 올케를 빼고도 며느리가 셋이 있지만 제사음식을 준비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간병 일을 하는 첫째 올케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집에 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평소에 잘 오던 둘째마저 직장에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셋째까지 가게 일에 매여 꼼짝을 못한다고 하니 변명 한마디 못하고 작은 언니와 둘이 제사를 맡게 되었다. 그래, 올케들이 머리 허연 오빠들 건사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그녀는 팔을 걷어붙였다.다행히 언니와 손발이 잘 맞아 전 부치고 나물 장만하고 고기까지 익히는데 한나절에 끝났다. 추석이 코앞이라 벌초 길에 나섰다. 부모님은 집터를 큰오빠에게 물려주고 당신은 뒷산에 터를 잡아, 가는 길은 멀지 않다. 일찍 제물 준비를 마친 그녀는 장화를 찾아 신고 오빠들을 따라나섰다.뒷짐 진 큰오빠를 선두로 엄마에게 간다. 연년생인 셋째와 넷째오빠는 아직도 토닥거리고, 그녀는 그런 오빠들에게 어릴 때 불렀던 별명을 크게 불러본다. 그녀는 뱀이라는 넷째의 장난소리에 장화가 벗겨지도록 엄마를 부르며 뛰었다. 마을이 한 눈에 든다. 올케들 눈치 안보고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이 순간이 큰오빠가 장가가기 전의 나이로 되돌아 간 것 같다. 타성(他姓)없이 오롯이 형제들만 모이는 것도 참 새롭다. 그녀는 올케랑 조카며느리한테 기대지 말고 우리 부모 우리가 모시자며 의기양양했다.늦은 밤 제사를 모시고, 거실 가운데 음복 상 앞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상을 차리느라 오빠들의 비빔밥 그릇이 빌 때까지 앉지를 못했다. 과일까지 깎아내고는 막 자리에 앉는데 넷째가 빈 전접시를 내밀었다. 전을 다시 담아 내놓고는 자리에 앉았다. 밥숟가락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탕국을 좋아하는 셋째가 빈 그릇을 들고 불렀다. 삐걱거리는 무릎을 곧추세우며 바닥에 손을 짚고 일어서는 일이 여간 곤욕이 아니다. 여기서도 ‘숙아’ 저기서도 ‘숙아’ 부르는 터에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셀프!, 셀프! 내 나이도 낼 모레 환갑이라고, 옛날 숙이 아니라고요.”막내가 환갑이라고? 모두가 머쓱한 얼굴이다.칠순이 넘은 둘째오빠가 시부저기 일어나 떡을 접시에 담았다. 떡 접시를 상 위에 놓으며 말했다.“그래, 평소 집에서 하는 행동들을 여기서 하면 안 되지. 우리 막내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요새는 그렇다는구먼. 효도도 셀프고 밥 먹는 것도 셀프시대라고. 내 밥은 내가 찾아 먹어야 한단 말이지”오빠가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았다. 눈치를 살피던 뺀질이 오빠가 앞으로는 뷔페식으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먹고 싶은 거 자기가 알아서 챙기면 환갑이 다 되어가는 막내도 힘들지 않을 거라는 말에 웃음보가 터졌다.다음 제삿장 볼 때 꼭 식판도 사야한다는 그녀의 말 뒤로, 예전 엄마가 차려주었던 밥상이 떠오른다.엄마는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게 가장 보기 좋다고 했는데. 늦었다고 빈 입으로 나가는 나를 대문까지 따라와 입에 넣어주었는데. 엄마는 그 많은 도시락을 챙기면서도 힘들다고 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1년에 한 번, 엄마 제사상 차리는 것도 힘들다. 친구가 내민 떡이 가슴에 먼저 얹힌다.

2023-10-04

‘여당바람’ 일으킬 총선전략이 안 보인다

심충택 논설위원 경북매일신문이 추석연휴 직전 대구지역 유권자 1천 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부정평가가 39.9%(긍정평가 54.3%)에 달했다. 정권의 최대 지지기반인 대구에서 부정 평가가 40%에 육박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대구뿐 아니라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국민 삶이 고단해지면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강해지고 있음을 대변해 주는 조사결과다. 내년 총선을 의식해 정부나 여당이 추석민심을 챙겨봤겠지만, 서민들의 경우 요즘 물가는 다락 같이 오르는데 수입은 되레 줄어들면서 전에 없던 ‘사회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TK지역 정치인들도 이런 민심을 피부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국민의힘은 총선을 불과 6개월여 앞둔 현시점에서도 민심은 뒷전인 것 같다. 오직 이재명 민주당 대표 공격에만 총력을 쏟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국민은 ‘이재명’ 이름 석자만 나와도 TV채널을 돌린다. 이제 정부여당은 이재명 블랙홀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서민정책을 펼 때가 됐다.우선 물가를 잡는데 총력을 쏟아야 한다. 중도층 민심의 핵심이 ‘장바구니 물가’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2020년부터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 이후 물가는 서민의 목줄을 조이고 있다. 여기에다 ‘추석 물가’까지 겹쳤으니, 서민들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아질수록 민심은 집권당으로부터 멀어진다.총선전략에서도 여당의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윤 대통령의 국정동력 확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내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야 한다. 여소야대 의석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지금 너무나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총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지만, 중도층 민심을 사로잡을만한 이벤트 하나 나오지 않는 것은 당 지도부 리더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지난 21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수도권에서 참패를 당했다. 지금쯤이면 내년 총선에서 패배를 만회할 전략이 나와야 할 때다. 그런데 아직까지 수도권 출마 도전자 중 국민의 눈길을 끌 만한 후보자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실 핵심참모나 당 중진 모두 여당의 지지기반이 강한 양지(陽地)만 찾아 다니는 모습이다.국민의힘이 중도층으로 외연을 확장하려면 지금쯤 내각 주요장관이나 스타 정치인이 전면에 나서 당의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예를들어 원희룡 국토부 장관, 대통령실 김은혜 홍보수석, 윤희숙 전 의원 같은 인물이 민주당 핵심인 정청래·안민석 의원 지역구에 일찌감치 출마선언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총선이 임박해서 이런 인물들을 험지(險地)에 배치해 봤자 판세를 뒤흔들만한 바람을 일으킬 수 없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대권 잠룡’ 오세훈이 버티고 있던 서울 광진을에 정치신인 고민정을 공천했고, 4선의 나경원 지역구인 서울 동작을에 판사 출신 이수진을 공천해 바람을 일으킨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23-10-03

대구 총선民心, 박근혜 ‘맑음’ 이준석 ‘흐림’

내년 대구지역 총선 판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적잖은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대구지역 출마설이 나도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 대한 유권자 지지도는 20%대에 그쳤다. 이러한 결과는 본지가 추석연후전인 9월 20∼21일 대구지역 유권자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났다. 질문내용 중 ‘박 전 대통령이 총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항목에 ‘지지하겠다’는 응답자가 32.9%, ‘잘 모르겠다’며 유보적 입장을 보인 응답자가 23.9%에 달했다. ‘지지하지 않겠다’는 응답자는 43.2%였다. 그의 총선개입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유권자 비율이 크긴 하지만, ‘친박’후보가 출마하는 지역구의 경우 ‘박근혜 정서’가 당락에 변수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국민의힘과 민주당, 친박후보가 3파전을 치른다고 가정하면 여당으로선 힘에 부치는 선거전이 된다.‘이준석 전 대표가 출마할 경우 지지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47.4%가 ‘지지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TK지역을 대상으로 날을 세우고 있는 그에 대한 대구 유권자의 부정적 민심을 반영하고 있다. 그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자는 29%에 그쳐, 대구지역 민주당 지지율과 비슷한 경향을 나타냈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최근 공개행보에 나선 박 전 대통령은 친박후보 지원설에 대해 “선거에 나서면서 제 사진을 내걸고 ‘저의 명예 회복을 위해 출마하는 것’이란 얘기는 더이상 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단호하게 선거와 거리를 두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박근혜 정서는 이 지역 총선판세에 주요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전 대표의 경우에는 서울 노원병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여당 공천에서 배제되면 대구에 출마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이번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대구 민심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여전히 우호적이지만, 이 전 대표에 대해서는 싸늘한 것으로 정리된다.

2023-10-03

노인 家長

우정구 논설위원 노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노인 가장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노인 가장이라 하면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지만 노인+가장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된다.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사회적으로 통상 은퇴연령으로 여겨지는 60대 이상인데도 직장에 나가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노인 가장이 100만명을 넘어섰다. 피부양자가 있는 60대 이상 직장가입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로, 이 숫자는 10년 전 보다 약 두배 가량이 늘어난 것이다.내년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인구가 1천만명을 돌파한다. 갈수록 증가하는 노인인구로 노인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겠지만 노인 가장이 증가하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젊은이의 취업이 활발해지고 노인들은 은퇴 후 생활을 즐기는 것이 선진복지 국가의 패턴이기 때문이다.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일하는 노인이 가장 많다. 65세 이상 인구의 3분의 1이 일터에 나가 있다. 은퇴 후 노후를 즐겨야 할 나이에 일을 해야 할만큼 경제사정이 좋지 않다는 뜻이다. 도로교통공단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버스, 택시, 화물차 등 전체 사업용 운수종사자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이 20.8%를 차지했다. 택시의 경우는 종사의 40%가 고령층으로 밝혀졌다.은퇴 후에도 일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인의 대다수가 생계문제로 일을 하고 있기에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다. 이는 우리나라 노인들에 대한 복지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의미다.2일은 노인의 날이다. 노인 가장이 늘어나는 현실에 대처할 정부 차원의 대책이 서둘러 나와야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0-03

연휴 후 치솟는 물가, 서민경제 불안하다

추석연휴가 끝나면서 그동안 억눌렸던 물가가 줄줄이 인상될 조짐이다. 우유업체들이 원유값 상승을 이유로 이달부터 유제품 가격을 3∼13%를 올렸다. 대형마트에서 1L 우유가 3천원을 육박한다. 그 여파로 빵과 아이스크림, 커피 등 유제품 가격도 덩달아 오르는 밀크레이션 우려가 점차 커지는 상황이다.이번 추석은 과일값이 폭등하는 등 크게 오른 물가 탓에 추석 차례상을 간소화한 가정이 늘었다. 게다가 지속 오르는 기름값 때문에 모처럼 맞은 황금연휴를 두고도 외출을 자제한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국내 소비자물가는 코로나19와 글로벌 경기에 영향을 받아 지난해 7월 6.3%까지 올랐다가 올 6월 2.7%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지난 8월 3개월 만에 다시 3%대로 올라서 물가 불안이 재연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이가 많다.통계청 국가통계포털 자료에 따르면 지난 8월 대표적인 먹거리 물가지표인 외식물가가 27개월째 물가 상승률을 웃돌았다. 또 가공식품도 전체 평균을 넘어선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의하면 서민들이 즐겨 찾는 대표외식 메뉴인 자장면은 55.4%가 올라 9년새 가장 많이 오른 품목으로 꼽혔다.올들어 이상기후로 과일과 채소류 가격이 여전히 높은 시세를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문제는 유류가격이 우리 경제를 지속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와 러시아가 감산 연장을 밝히면서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를 넘어 고공행진 중이다. 국내 휘발유값은 12주 연속 L당 1천700∼1천800원선에 머물러있다.잘 알다시피 우리 경제는 유가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전기료와 교통비 등 유가와 연관되지 않는 물가가 없기 때문이다. 고물가는 서민들에게 가장 고통을 준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물가 안정에 전력해야 한다. 정부는 우리 경제가 상반기는 저조하나 하반기부터는 살아날 것이라는 상저하고의 전망을 냈다. 하지만 물가 안정없이는 경제전망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추석연휴 이후 불안한 조짐의 물가 안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2023-10-03

어린 날의 글쓰기

최근 SNS에서 학교생활 기록부를 인증하는 열풍이 불었다. 그간 생활기록부 발급 절차가 조금 복잡했던 것에 비해, 최근부터는 정부 24 홈페이지 또는 앱을 통해 간단한 인증 절차만으로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SNS에서 주로 자신의 생활 기록부를 캡쳐해서 업로드 하는 부분은 ‘행동 특성 및 종합 의견’항목이다. 학창시절 ‘생활 태도’와 ‘장점’, ‘성장 가능성’등 담임선생님의 시각으로 바라본 개인적인 평가를 적어 놓는 문항인데, 이 부분을 통해 자신이 학창시절 어떤 사람으로 비춰졌는지 대략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성적은 물론 수상내역, 봉사 활동, 생활 태도 등 학교생활의 전반에 대해 디테일하게 알 수 있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재미도 있을뿐더러 SNS에선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걸 인증하고 공유하기 위해 더욱 주목을 받았던 듯싶다. 그도 그럴게 생활기록부 발급 유행이 시작되었던 지난 9월엔 이용자 증가로 정부 24 홈페이지가 마비되기도 했었고, 작년 7~9월 발급 건수 대비 올해 발급 건수는 3배 이상 달했을 정도라 한다.하지만 내겐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어 본다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소멸을 향해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들을 보면 어쩐지 낯선 객지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쓸쓸한 기분이 든다. 내 과거의 기억이 아닌, 타인의 과거를 어렴풋이 훔쳐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하지만 과거의 ‘나’는 어쩐지 궁금해지는 법, 점심을 먹으며 휴대폰으로 몇 번 간단한 인증을 했더니 정말 바로 발급받아 볼 수 있었다. 조심스레 열어보니 의외로 나는 학창시절에 공부하라는 선생님의 말을 안 듣는 소심한 말썽꾸러기가 아닌, 이타적이고 논리적이며 감수성이 발달하여 글쓰기에 소질 있는 아이로 비춰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나의 학창시절 모습이라 그런지 조금은 낯설어 멋쩍은 웃음만 지었다.나의 학창시절을 잠시 되돌아본다면, 나는 다소 조용했으나 웃음소리가 크고 밝은 친구들을 좋아해서 주변엔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공부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주로 교과서 속에 책을 숨겨 읽었고, 담임선생님이 책을 그만 읽으라고 하면 외려 더 숨어서 책을 읽곤 했다.도서관에 숨어 만났던 책들은 주로 신경숙, 박민규, 이성복, 기형도의 책들이었고 그때 처음 문장 속에서 자유로이 유영하는 법을 배웠다.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쉽게 할 수 없었던 환경에서 글이 주는 자유로움과 날 것으로 드러나는 타인의 세계와 삶의 형태가 얼마나 놀랍던지. 그래서 읽기에 빠져 들었고, 자연스레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도 쓴다는 말이 어색하게 여겨져서 늘 ‘메모 한다’, ‘일기를 쓴다’라고만 글쓰기를 표현하고 정의했다. 쓴다는 것은 어딘가 부끄럽고 멋쩍기도 하고 또, 소중해서 타인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고 해야 할까.읽고 쓰는 것 외엔 흥미도 없고 잘 하는 게 무엇인지 몰라 문예창작학과를 택했고, 글을 읽고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그러면서 어린 나는 쓰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던 듯싶다. 글쓰기로 충만감도 느꼈고, 성취감도 얻었고, 화도 났고, 무력함도 느꼈으니 말이다.꽤 열정적이었던 것에 비해 현재의 나는 어딘가 정말 중요한 중심을 잃어버린 것만 같다. 과거의 열정을 부정하면 할수록 현실적인 부분에 있어 더 생산적인 역할과 몫을 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여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눈은 퀭하고, 자주 화가 나 있으며, 복잡한 사유는 멈추고,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며, 나쁜 식습관으로 몸은 엉망이다. 어린 날의 나에 비해, 생의 의문과 더불어 따라오는 몇 가지 질문에 점점 더 비겁해지며 미성숙한 사고를 택하기에 따라오는 씁쓸함은 부정할 수 없다.최근 이사를 하며 아직 미처 정리 하지 못한 책들이 쌓여 있다. 이사 오기 전 많은 책들을 처분한 탓에 이제 내가 가진 책들은 100여 권도 안 된다. 멋대로 쌓인 책의 형태를 바라볼 때면 허무함이 느껴져 외면하곤 했으나, 이젠 이 쓸쓸한 부채감이 아주 어린 날부터 쭉 시작되어 왔으며 쉽게 끝나지 않음을 안다. 그렇기에 슬슬 책의 자리를 찾아주려 굳게 닫힌 옷장 문을 열어 본다.

2023-10-03

사랑이라는 서투름

명절이면 아버지 계신 서산에 간다. 동문동 동부시장 가서 장 보고, 미리 해온 음식 데우고, 전 부치고, 저녁에 한 상 차려 먹는다. 갈비찜, 잡채 등에다 설에는 새조개와 굴, 추석에는 꽃게와 대하가 함께 오른다. 거창한 밥상이지만 식사는 30분 안 돼 끝난다. 상 치우고 동생네는 안방에, 엄마는 작은 방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거실에서 종편을 본다. 살가운 대화 같은 건 딱히 없다. 가족애라는 것을 다들 가지고는 있는데, 표현에 서투른 탓이다. 어색하고 민망하다. 사랑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한지도 모른다.할아버지는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처자식을 버렸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공장 다니며 장애인인 할머니와 삼촌들을 먹여 살렸다. 먹고 살 만해지니까 할아버지가 돌아왔는데, 응어리가 져 평생 용서하지 못했다. 미워하면서도 모시고 살았다. 장남은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내 유년을 돌아보면, 퇴근한 아버지가 거실의 할아버지는 본체만체 안방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리던 냉랭함이 먼저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랑 받지 못해서 사랑 주는 법을 몰랐다. 무뚝뚝하고 엄했다. 게임기 사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나는 아버지가 무서워 삼켰다.바캉스를 가고 외식을 해도 행위만 있지 그 안에 다정함 같은 건 희미했다. 가장의 의무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마저도 아버지 공장이 부도를 맞고 나서는 추억이 됐다. 지방을 전전하는 아버지를 사춘기 지나 성인이 될 때까지 보기 힘들었다. 그 10년은 참 괴로운 시절이었다. 더 작은 집으로 여러 번 이사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박스를 줍고, 엄마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집에 오면 나는 컴퓨터 게임만 하고, 아버지는 내 등 뒤에서 무슨 말 하고 싶지만 못한 채 가만 서 있곤 했다. 내가 장교 임관훈련을 받던 여름 내내 아버지는 교육대 인터넷에 편지를 썼다. 10년 동안 못한 말들을 거기 열심히 적었다. 말로는 못하는, “아빠는 병철이가 자랑스럽다” 같은 문장들.이런 내력 때문에 나는 남들이 가족 여행을 가고, 동영상 속에서 함께 장난치며 웃고, 각종 기념일을 챙기는 화목함이 신기하고 낯설다. 가족은 다 우리 같은 줄 알았다. 오래전 애인의 아버지가 매년 10월 31일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연주되는 라이브카페에 가족들을 데리고 가 시월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걸 보면서 놀랐다.지난 설, 서산 바닷가 가서 비싸고 좋은 음식 먹자고 했다. 해가 갈수록 아들 마음은 조급해진다. 억지로라도 화목한 그림 하나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다들 내 맘 같지 않아서 그냥 동네에서 먹기로 했다. 앞장 선 아버지가 시장 좁은 골목 백반집 문을 열었다. 다 앉기도 전에 아버지는 6천원짜리 백반 여섯 개를 시켰다. 한 자리에 못 앉아 두 테이블로 나눈 것을 내가 주인아주머니께 몽니를 부려 합쳤다. 나물, 파래, 김치, 된장국에 나는 거의 손도 안 댔다. 그 사이 아버지는 밥을 다 드시고 일어났다. 혼자 빨리 걷고 빨리 먹는 아버지한테 짜증이 났다. 눈치 챘는지 아버지는 집에 가 새조개 먹겠느냐면서 5만원 지폐를 내밀었지만, 뿌리쳤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평생 미워했다. 할아버지는 늘 복덕방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할머니를 평생 부끄러워했다. 할머니는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더러 “닭띠니까 곡식을 먹고 살아라” 했다. 유언이었다. “아빠가 할아버지 무덤에 갔대” 귀에 대고 소리치자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됐나보다” 했다. 아버지는 출포리로 매일 마실을 간다. 보청기를 끼고 부동산에 가 한나절 앉아 있다 온다. 뒤란에서 닭들이 벌레를 쪼고 메주가 푹푹 삭을 동안 평생 미워한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나는 그러면 안 되는데, 아버지가 돼선 안 되는데….나이 들수록 후회가 많아진다. 동부시장 ‘지곡밥집’에서 짜증 부렸던 일이 속상하다. 이번 추석 또 서산에 간다. 다시 그 밥집에 가 밥 두 공기 먹고 싶다. 아버지는 제철 꽃게를 잔뜩 사는 것으로 아버지 노릇을 하려 할 테고, 나는 무엇으로 아들 노릇을 할까. 가끔 하는 통화도 30초를 안 넘는데, 살가운 말 몇 마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어려운 마음도, 백반 여섯 개를 서둘러 시키는 급한 성미도, 밥 한 끼 먹으러 일 년에 두 번 모이는 수고로움도 다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2023-10-03

이 가을, 한 권의 책

윤희정 부국장대우 2017년 이후 6일이라는 가장 긴 추석 연휴를 보냈다. 전국이 모처럼의 고향 방문에 즐거운 표정을 짓는 가족 단위 귀성객들로 내내 활기가 넘쳤다. 전통시장은 추석선물이나 차례 용품을 사려는 지역민들로 붐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처럼 푸근한 인심을 나눠야 할 시간에, 존속 간 다툼과 살인이 벌어지는 안타깝고 딱한 뉴스도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관계는 오묘하고 복잡하다. 서로 다른 모양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 원인일까.머슬러는 인간은 본능적인 욕구를 갖고 태어난다고 했다. 욕구는 인간을 성장하고 발달하게 하며, 인간 자신을 실현시키고, 성숙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심리적 건강과 성숙을 향한 인간의 잠재 능력은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얘기다.반면에 천주교 교리는 ‘인간 성숙은 그 시초부터 완성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삶의 한순간 갑자기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용의 자세로 끊임없이 추구하는 이상적 목표로서,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성숙을 위한 여정에 있을 뿐’이라고 했다.인격은 인간 성숙에 기반한다. 인성, 성품, 품성, 성격, 기질, 개성, 사람됨 등으로 설명되는 인격은 개인이 자기 자신을 유일한 특정적인 자아로 생각하는 작용이자 자아의식이다. 브리태니커 세계 백과사전은 ‘인격적인 사람’을 도덕적 행위의 주체이자 진위,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율적 의지를 지닌 존재로 정의하면서 성격에 도덕을 추가한 것이 인격이라고 했다.성숙한 나의 실현은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겸허하게 긍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인격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은 바로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능력을 개발할 줄 아는 사람이다.인간은 누구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때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건강과 행복은 간과하고 각종 질병과 불행에 괴로워한다. 그것이 단지 외생변수 때문이 아니라 만약 자신의 가치 상실이나 성격상의 문제라면, 개인의 정체감 확립이 당면과제다.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름 속을 방황하는 이상주의자처럼 되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 주변인들에게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과 불안과 괴로움에 빠질 때도 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묘사해주는 명료한 언어들을 만나게 되면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막연하고 모호하기만 했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된다.가을이 깊어간다. 요즘 서점가를 휩쓰는 ‘슬로 텐션(slow tension)’ 소설도 좋고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하는 에니어그램 관련 도서도 좋다. 나와 이웃, 더 나아가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직관학으로 변화와 성숙이라는 삶의 묘미와 진수를 경험하게 하는 에세이들도 괜찮다. 그런 책들은 읽을수록 마음을 편하게 한다. 분주한 일상도 내려놓고, 긴장도 풀고, 나만의 삶의 속도를 되찾아 줄 한 권의 책을 손에 쥐어보는 여유를 찾아보자.

2023-10-03

팔꿈치 통증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팔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은 꼭 한번은 겪는 질환이 있다. 외상과염이라고 하는 팔꿈치가 아픈 병인데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에게 많이 발생해서 테니스 엘보라고 한다. 테니스 만이 아니라 배드민턴, 골프를 치는 사람에게도 생기고 팔을 많이 사용하는 직종에서는 꼭 한번은 걸리는 질환이라고 보면 된다.손목의 신전근 그룹의 힘줄들이 팔꿈치 상완 외상과 부위에 부착되는데, 반복된 동작으로 팔뚝의 근육이 뭉쳐 팔꿈치 부착부의 뼈와 힘줄 부착부 손상이 누적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반복적 견인 손상과 조직의 변성이 원인이다. 초기나 심하지 않은 경우는 팔을 움직일 때 약간의 통증이 오고 이를 무시하고 과다 사용을 하는 경우 손상이 누적되어 심한 경우는 팔꿈치에 부착된 힘줄의 손상으로 약간의 움직임도 힘들다. 심하지 않은 경우라도 기본적으로 팔의 사용을 제한해야 하고 치료에 전념하는 것이 좋다. 잘 낫는 병이 아니라서 치료를 하지 않고 사용하다 보면 금방 만성으로 진행되고 팔꿈치의 손상이 심해진다.한의원에서의 치료는 부항으로 피를 뽑아 압력을 줄이고 혈액순환을 돕는다. 침과 약침으로 주변 근육을 풀어 주고 염증을 줄이고 회복을 높이는 방법을 쓴다. 다른 곳에서 치료 후 잘 낫지 않아 오는 경우라도 한방 치료를 꾸준히 받게 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기본 치료는 한달을 기본으로 해서 들어가야 한다. 몇 번 치료로 효과를 보기 힘들다. 그래서 환자들이 몇 번 치료를 했는데 효과가 없다는 소리를 한다. 이는 당연한 결과로 꾸준하게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 달 정도를 치료를 해줘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들도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절대 엘보우는 몇 번 치료로 완치되긴 힘든 것을 알아야 한다.그리고 엘보우가 심한 경우는 팔꿈치만 봐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어깨 목까지 같이 봐줘야 한다. 오래되고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는 팔꿈치 어깨 목이 조금씩 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럴 때는 목 어깨 팔꿈치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잡아야 치료가 된다. 침치료 뿐만 아니라 추나치료로 목 어깨 팔꿈치를 같이 하면 확실히 빠른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 시간단축이 필요한 사람은 필수적으로 같이 해야 한다. 치료 속도의 차이가 많이 난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팔의 사용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인이 팔의 과다 사용으로 인한 팔꿈치 힘줄의 손상이라서 팔을 계속 사용한다면 치료 효과와 회복은 더딜 수밖에 없다. 그리고 꾸준히 치료 해야 한다. 단순 염좌처럼 근육이 뭉치거나 인대가 늘어난 것이 아닌 힘줄의 손상이라 몇 번의 치료로 완치되기는 힘들다. 꼭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테이핑이나 파스 등의 처치를 하고 팔꿈치 보호대를 해야 한다.일이 없을 때는 절대 휴식을 취하고 아래팔 팔꿈치 근처의 근육을 온찜질과 더불어 본인 손으로 꾹꾹 눌러 마사지를 해주면 도움이 된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해주고 2주 정도 해주면 팔꿈치 주변 근육들이 덜 아파진다. 주변 근육들이 풀리면 팔꿈치에 부착된 힘줄의 자극도 줄어 들고 혈액순환도 전보단 원활해져 치료에 도움이 된다.

2023-10-03

포스코, 지역균형발전 힘 보태야

이재훈 (전)경북테크노파크원장 ‘균형(均衡)’을 영어로‘밸런스(Balance)’라고도 하지만, ‘이퀄리브리엄(Equilibrium)’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후자는 물리학이나 경제학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로, ‘회복력’ 또는 ‘지속가능성’에 초점을 둔 좀 더 적극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이제 ‘지역균형발전’의 개념도 이와 같이 확장할 필요가 있다.진정한 균형발전이란 각 지역의 자원과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회복력’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이를 외면한 채 계속해서 수도권 집중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지방소멸을 가속화 해 결국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할 것이다.과거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주로 항만·도로·철도 등 대형 SOC사업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한 지금은 기존 정책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여러 정부 부처 간 협업을 기반으로 지역이 주체가 되어 기업 및 대학과 협력하여 지방소멸 극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그런 점에서 포항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의 롤 모델이 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갖춘 도시라 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포항은 포스코 그룹과 함께 철강산업을 기반으로 대한민국 근대화와 산업화에 기여해 왔고, 철강을 넘어 친환경 미래소재의 시대가 도래 한 지금은 차별화된 RD 인프라를 기반으로 이차전지, 바이오, 수소산업 등 미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여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포항은 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 등 세계 최고의 이차전지 선도기업이 자리 잡고 있으며, 포스텍을 비롯한 포항가속기연구소, 막스플랑크한국 포스텍연구소(MPK) 등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우수한 연구기관 및 시설을 다수 보유한 그야말로 산(産)·학(學)·연(硏)이 총 망라된 지역이다.최근에는 ‘이차전지 양극재 산업 특화단지’ 선정과 ‘수소연료전지 발전 클러스터 구축사업’의 예비 타당성 조사 최종 통과를 비롯해 국내 최초 ‘육양국 연계 글로벌 데이터센터 캠퍼스’조성 MOU 체결로, 명실상부 포항이 미래 첨단전략 신산업의 최적지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한 바 있다.아울러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이 최근 제정됨에 따라 기회발전특구 지정 등을 통해 기업에 대한 규제 특례, 세제 혜택 등 국가 차원의 다양한 행·재정적 지원이 기대되는 한편, 수요지 인근에서 전력을 생산해 소비하며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도입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 제정은 기업이 지방에 정착해 지속가능한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는 획기적인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미래 첨단 기술력이 곧 경제이자 안보인 시대, 이제는 수도권을 넘어서 각 지역을 기반으로 첨단 기술을 특화하고 육성하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는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대안이 된다. 특히 포스코가 철강을 넘어 미래신소재인 이차전지로의 구조전환에 성공한 것은 포항기반 우수 연구 인력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포스코 그룹이 현재 추진 중인 미래기술연구원의 수도권 분원 설립은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처사로 재고가 필요하다. 포스코 그룹은 간판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미래기술연구원 포항본원 구축으로 우수한 인재유지와 나아가 영입을 통해 지역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아울러 포항시는 국제학교, 스마트병원 설립 등 교육, 의료를 비롯한 다양한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더욱 힘써 인재들이 모여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새로운 미래 100년, 그 장미빛 여정의 시작을 ‘글로벌 기업 포스코 그룹’과 ‘미래 신산업 도시 포항’이 함께 손잡고 열어가기를 희망해 본다.

2023-09-26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교육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올해 들어 둘째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환경과 관련한 교육이 늘어났다. 아이는 환경보호를 주제로 한 도서 읽기, 쓰레기 재활용 마크 교육, 10분 동안 소등하기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편 우리 대학은 2022년 환경부 ‘그린 캠퍼스 조성사업’에 선정되어 ‘지속가능발전센터’를 조직하고 탄소중립을 위한 실천 과제를 마련했으며, 지난 9월 11일부터 22일까지 ‘그린 캠퍼스 탄소중립 실천 확산 캠페인’을 실시했다. 중고등학교에서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대한 교육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지속가능발전’에 대한 교육계 전반의 관심이 매우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지속 가능한 발전을 환경보호 수준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2015년 제70차 유엔총회에서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이라는 슬로건과 함께 5개 영역 17개 목표와 169개 세부 목표로 이루어진 지속가능발전목표(SDGs)가 발표되었다. 17개 목표에는 ‘기후변화와 대응’ ‘에너지의 친환경적 생산과 소비’ 등과 같이 환경 문제도 있지만, ‘모두를 위한 양질의 교육’ ‘성평등 보장’ ‘빈곤층 감소와 사회안전망 강화’ 등과 같은 교육과 경제 영역의 목표도 존재한다. 요컨대 지속 가능한 발전은 환경보호라는 과거의 인식이 아니라 정치, 경제, 환경, 교육 등 다양한 영역의 연결성을 확인하고 새롭게 재편하려는 문제의식이 담긴 것이다.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이렇게 시야를 확대하고 우리나라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초등학교 선생님의 연이은 극단적 선택이나 젠더 갈등을 떠올리면 지속 가능한 발전은 요원한 일로 보인다. 하지만 환경부 지속가능발전위원회에서 발간한 2022년 ‘국가지속가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모두를 위한 양질의 교육’과 ‘성평등 보장’ 항목은 모두 ‘맑음’에 해당한다. ‘취학률’‘고등학교 이수율’‘피임 실천율’ 등의 지표로 해당 목표를 평가하기 때문이다.근본적인 문제는 ‘지속가능발전’이란 개념에 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은 근대화 과정에서 ‘경제성장’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를 여전히 ‘경제성장’을 포기하지 않으며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모순이다. 2023년 상반기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0으로 바닥을 모르고 내려가고 있다. 모두가 출산율 위기를 말하지만, ‘NO KIDS ZONE’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현상이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가령 기후 위기와 학벌주의는 어떤 공통된 토대에서 벌어진 현상일까? 이대남·이대녀 문제와 갑질 학부모는 어떻게 연결될까? 등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란 17개 목표를 연결할 수 있는 인식력을 갖출 때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2023-09-26

세계서예잔치, 눈부신 筆墨의 비상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가는 구름이 시시각각 움직이며 온갖 모양을 드러내고 있다. 아직은 청청한 산과 들의 언저리로 넓게 펼쳐진 가을하늘의 캔버스에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며 시나 소설을 쓰는 듯 알듯 말듯한 몸짓으로 세상을 내려다 보면서 사연을 전하고 있다.그러다가 전북 진안군에 이르러 마이산 주변을 지날 때는 말(馬)의 귀(耳)같은 암마이봉·숫마이봉을 흡사히 닮은 두 개의 구름 봉우리 형상으로 변신하기도 하니, 과연 빛과 바람으로 빚은 자연의 수묵화가 따로 없을 정도다.어쩌면 하늘에서 펼쳐지는 바람의 붓질 같은 구름의 천변만화는, 화선지 위에서 각양각색으로 피어나는 붓과 먹의 무진한 변화의 조화로움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추분 무렵 차츰 물들고 변해가는 초목과 열매는 정갈한 가을볕을 받아 저마다의 빛과 색을 더해 익어 가듯이, 날을 거듭할수록 붓놀림과 서예 궁구의 내공이 깊어지는 손길은 결 고운 단풍잎 마냥 심오하고 유장한 필묵의 원숙함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문자나 예술이 자연에서 나왔듯이, 붓글씨 역시 자연을 닮아감은 당연한 교효작용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게 구름의 암시(?)를 받으며 도착한 곳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개막식이 열리는 전주의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형 애드벌룬이 빨간 색상의 현수막을 드리우며 반기고, 분수 옆 국제관 입구에서부터 바닥에 깔린 레드카펫은 행사의 규모와 품격을 말해주는 듯 했다. 지난 1997년부터 시작돼 올해로 14회째 맞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는 서예를 매개로 전세계 서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류와 화합의 마당과 주제에 걸맞는 작품 전시·국제학술대회·부대행사·전북 14개 시군 ‘2023 서예, 전북의 산하를 날다’ 주제의 연계전시행사 등을 대대적으로 다채롭게 펼치는 세계서예잔치다.40여 개국 3천2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 올해 비엔날레의 주제는 ‘생동’(Vividness)으로, 출품작가들의 개성과 독창성, 창의력, 미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며 작품세계에 빠지다보면 어느새 예술적 쾌감과 감동의 희열에 젖어 들게 될 것이다. 특히, 10미터 이상 높이의 사방 벽면을 가득 메운 강건한 필력의 다채로운 대형작품은 관람객을 압도하기에 충분하고, 천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천 편의 시를 동일한 크기(10x10cm)의 전주한지에 써서 모자이크처럼 만든 ‘천인천시’ 10곡병풍은, 세밀함을 살리면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조화로움 등으로 실로 서예작품의 표현방식과 영역, 장법(章法)과 구도가 무궁무진함을 일깨워준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그 밖에 외국인 작가와 참여국가의 대사가 쓴 영어, 아랍어 등 각기 다른 언어로 쓰여진 작품은 다양성의 조화를 거침없이 드러냈다.서예와 예술은 이렇듯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고 소통하며 화합의 마당으로 모여들게 한다. 서예의 대중화와 실용성을 더 높이는 다양한 기획과 참여로 뉴노멀 시대에 서예문화의 선도적인 역할과 지속가능한 빌전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023-09-26

유비무환 다지는 국군의 날

우정구 논설위원 군사력이란 한 국가가 국가간 분쟁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군사적인 능력과 역량을 총괄하는 개념이다.우리나라는 남북이 대치한 특수한 상황에서 세계 6위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다. 군사병력 수로는 중국이 세계 1위나 군사 수와 무기의 수 등 군의 질적 요소 등을 감안한 총괄적 군사력에서는 미국이 단연 세계 1위다.올해로 건군 75주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국군의 날 행사가 어제(26일) 서울에서 열렸다.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이 추석 연휴에 끼어 기념행사를 앞당겨 시행했다. 특히 10년 만에 국군의 날 시가행진이 펼쳐지면서 국민들의 많은 시선을 모았다. 폴란드 수출로 성능을 인정받은 K2전차와 한국형 사드로 불리는 지대공 미사일 등 최첨단 무기들이 대거 선보이면서 한국군의 위용을 유감없이 과시했다.국군의 날은 국민에게 국방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고, 군인에게는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군과 국민간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지난 수년간, 남북관계 긴장 완화와 코로나 등을 이유로 국군의 날 행사가 간소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군사 도발에 대응하기 위해선 우리 군의 확고부동한 국방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여론도 많이 나온다.국방연구원의 국군의 날 행사관련 설문조사에서도 군장병의 88%, 시민의 72%가 국군의 날 시가행진을 찬성한다고 했다. 군의 강인함과 웅장함을 대외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자주국방의 필요성을 모두가 느끼는 때다. 군은 군다워야 힘이 생기는 법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생각하는 국군의 날이 되었으면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9-26

기회발전특구 유치 전쟁, TK만의 전략 중요

심충택 논설위원 정치사회가 ‘이재명(민주당 대표) 블랙홀’에 빠져 어수선하지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한 지방정부들의 노력은 숨가쁘게 진행돼 그나마 다행이다. 비수도권 모든 시·도가 마찬가지지만, 대구시와 경북도는 지난 7월 관련법안이 시행된 기회발전특구 유치를 위해 최근 전 행정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기회발전특구는 지방정부와 입주기업 간 협의성과를 보고 정부가 지정하기 때문에, 지방정부 역량이 특구선정의 최대변수다. 아직 특구지정과 관련한 세법 제·개정과 정부지침(특구지정 평가 요소)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대구시와 경북도는 이미 특구 후보지를 기정사실화하고 대기업 유치에 올인하고 있다. 대구시와 경북도 모두 지난 7월부터 기회발전특구 추진단을 가동중이다.대구시가 기회발전특구 유치 대상지로 선정한 곳은 달성군 국가산업단지와 테크노폴리스, 수성알파시티다. 이 세 곳은 미래산업(모빌리티, 로봇, 디지털 분야) 분야 국제경쟁력이 어느 도시보다 우위에 있고, 튼튼한 산·학·연 협력 체계가 구축돼 있어 국내외 대기업 유치 조건을 비교적 잘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구시는 달성군 제2국가산단과 군위군 신공항 첨단산업단지도 기회발전특구 후보지로 생각하고 있다.경북도의 1차적 유치후보지는 포항(이차전지 특화단지)과 경주(소형모듈원자로 국가산단), 안동(바이오 생명 국가산단), 구미(반도체 핵심 소재·부품 특화단지 및 방산 혁신클러스터), 울진(원자력 수소 국가산단)지역 산업단지다. 경북도의 경우, 최근 제정된 ‘분산 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 근거하면 전기요금이 전국 최저 수준으로 낮아질 수 있어 대기업 유치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경북도는 대학, 시·군과 함께 원팀을 구성해서 특정기업이 특구에 투자할 의향이 있으면, 곧바로 맞춤형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공장 준공 때 바로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 두고 있다.경북도는 지난주(20일)에는 서울 국회의원회관에서 수도권 기업들을 대거 초청해 도내 기회발전특구 후보지에 대한 다양한 인센티브를 설명하며 적극적인 투자를 권유했다. 이 자리에는 삼성과 LG, SK, 두산, 에코프로 등 주요 대기업 관계자들도 참석해 경북도내 특구 후보지 투자에 관심을 보였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지난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중동에너지기업들을 초청해 경북투자를 권유했다. 이 지사는 경주 SMR산단과 울진 원자력수소 산단 조성에 많은 국내외 대기업이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에너지 산업만큼은 경북도가 투자하기에 가장 매력적인 곳이라고 강조했다.기회발전특구는 일단 비수도권 시·도를 대상으로 지정된다. 만약 대구·경북이 윤석열 정부의 기회발전특구 지정을 이용해서 대기업 유치 기회를 잡지 못하면 곧바로 다른 지자체와의 경쟁력에서 뒤처지는 것은 물론, 청년층 인구소멸에 가속도가 붙게 된다. 기회발전특구제도 운용에 대한 정부의 구체적 계획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해서 대구·경북만의 강점을 살린 대기업유치 전략과 인센티브를 만들어 내야 한다.

2023-09-26

경북도가 총대멘 ‘수소경제시대’ 기대된다

경북도가 그저께(25일) 포항 포스코 국제관에서 이철우 도지사, 이강덕 포항시장을 비롯해 수소산업 관련 대기업과 연구기관, 학계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소경제 대전환’을 선포하는 대대적인 행사를 열었다. 최근 ‘수소연료전지 클러스터’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포항시와 원자력수소 국가산단을 건설하는 울진군을 중심으로 경북도가 ‘수소 산업 메카’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뜻 깊은 행사다. 경북도는 이날 수소경제 전환을 통해 미래산업을 선도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중점적으로 추진할 전략도 구체화했다. 경북도는 이미 환동해의 풍부한 에너지자원을 기반으로 수소산업 인프라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에는 2030년이 되면 158만㎡ 규모의 ‘원자력수소 국가산단’이 가동한다. 그리고 포항시는 올해 이차전지 특화단지 선정과 수소연료전지 클러스터 예타 통과를 동시에 달성했다.포항 블루밸리 국가산단에 자리잡는 ‘수소연료전지 클러스터’는 수소연료전지 생산기업과 수소관련 부품·소재 실증 인프라로 구성된다. 5년후에는 사업이 완료된다. 수소연료전지는 ‘3차전지’라고도 불리며, 전기를 저장만 할 수 있는 이차전지와는 달리,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전지 안에 충전된 수소와 바깥공기 안에 들어있는 산소가 반응해서 전기가 생산되는 것이다. 이차전지를 사용하는 전기차에 비해 아직 가격이 비싼 단점이 있지만, 충전시간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 경북도는 원전과 연계한 하이브리드 청정수소 생산기지를 구축해 ㎏당 3천원 정도의 값싼 수소를 생산할 계획이다.수소산업은 탄소배출을 제로로 만들 수 있는 게임체인저로 인식된다. 우리나라도 지난 2019년 수소차와 연료전지 산업에 주력해서 세계 최고수준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었다. 경북도가 이번에 수소경제 대전환을 선포하며 국내 수소산업의 첨병이 되겠다고 발표한 것은 타이밍이 맞다. 경북도가 앞으로 수소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해 우리나라의 탄소중립 실현을 주도해 나가길 바란다.

2023-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