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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與, TK의석 유지하려면 공정한 공천룰 중요

국민의힘 당무감사 결과와 관련, 내년 총선에서 TK(대구·경북)지역 의원들이 집중적인 물갈이 타깃이 됐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특히 컷오프대상 현역의원 22명의 명단이 사설정보지(지라시)형태로 유포되면서 TK지역 의원들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 신의진 당무감사위원장은 지난 27일 “204곳의 당협위원회를 감사한 결과 22.5%인 46명의 당협위원장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고 발표하면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곧 구성될 공천관리위원회가 컷오프 룰을 별도로 정하겠지만, 당내에서는 이 명단이 공천교체대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총선기획단도 현역 의원을 최소 20%이상 공천 배제하기로 결정했다.당무감사결과를 놓고 TK지역 의원들이 특히 불안해하는 이유는 당무위가 “여론조사에서 개인지지율이 당지지율보다 현격히 낮은 의원들의 컷오프를 당에 권고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TK지역의 경우 타 지역에 비해 당 지지율이 월등하게 높아, 상대적으로 TK 현역들의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다. TK지역 의원들은 “개인 지지율과 관련한 잣대를 대구·경북지역에 적용하면 현역의원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컷오프 대상에 포함될 것이다. 당무위가 사실상 TK지역 등 영남권을 겨냥했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국민의힘은 공천관리위원회가 출범하면 당무감사 결과와 여론조사를 통한 경쟁력 평가 자료 등을 근거로 지역구마다 경선이나 컷오프 방침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전체 현역의원 중 40%가량이 교체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정치권에선 국민의힘 공천에서 탈락한 현역의원들이 이준석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얘기다. 이 전 대표가 최근 TK지역을 신당창당의 거점으로 정조준하고 있는 것도 이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이미 이 전 대표가 TK 현역의원을 다수 확보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국민의힘 공관위가 공정한 룰을 정해 공천자를 결정해야 이러한 부작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2023-11-29

대구 상징물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를 상징하는 나무는 전나무다. 꽃은 목련이다. 대구시가 1972년 지정했다. 상징 새는 1983년 정한 독수리다. 전나무는 강직성과 영원성을 상징, 곧게 뻗어나가는 대구시민의 기상을 대표한다. 목련은 순결과 희생 정신의 시민 기질을 상징한다. 독수리는 활달하고 진취적인 기상, 개척적인 시민 정신을 나타낸다.도시도 마케팅하는 시대다. 다른 지역과 차별화는 기본이다. 지역의 개성과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 지역민들의 의견을 들어 도시를 상징하는 나무, 꽃, 새를 정한다.하지만 대구시를 상징하는 나무와 꽃, 새에 대해 아는 시민들은 많지 않다. 되레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과연 전나무와 목련, 독수리가 대구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다.권기훈 대구시의원이 28일 시정질의를 통해 대구 도동의 천연기념물 측백나무를 시목으로 지정할 것을 촉구했다. 기존 상징물이 대구와 아무런 연관성이 없고, 대구시의 각종 엠블럼이나 캐릭터 등으로도 활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상징물의 지정과 관리 등 제도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다며 활용 방안을 찾을 것을 주문했다.문화재청은 2021년 국보1호 승례문 등의 문화재 지정번호를 삭제토록 했다. 서열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이에 1962년 천연기념물1호로 지정돼 60년 간 자리를 지켜온 ‘천연기념물1호 도동 측백나무’의 1호 이름을 떼냈다. 하지만 명성은 여전하다.대구 동구 불로천 상류 해발 160m 향산 절벽에 높이 5~7m, 수령 500년의 1천여 그루 측백나무 숲은 남방한계선에서 자라는 식물학적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참에 목련과 독수리도 바꾸는 것을 고려해봐야 할 것 같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29

구룡포人의 삶의 애환 뮤지컬로 재조명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계절의 끝자락에 감동의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제법 쌀쌀해진 날씨 속에, 지난 주 포항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열린 이색적인 뮤지컬 공연을 보고 극히 일부겠지만 가슴 훈훈한 예술적 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구룡포지역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애환과 숨겨진 얘기가 대사와 노래, 율동과 몸동작 등으로 어우러져 파도의 여울로 굽이치고 고래의 울음으로 퍼지는 듯했다. 포구(浦口)의 아늑함과 일제의 잔재인 적산가옥이 있는 구룡포지역을 재조명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삶을 투영한 역작으로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이러한 작품은 지역의 손꼽히는 극단 예맥의 제60회 정기공연으로, 지난 여름날부터 거의 매일 연습하고 준비해서 정성껏 무대에 올린 창작 뮤지컬 ‘구룡포 프리덤’이다. 극단 예맥은 지난 1981년에 창립, 포스코 직원들을 중심으로 매년 1~2회의 정기공연을 열면서 근로문화제 대통령상 수상 등 꾸준한 활동을 펼쳐 이번에 60회째를 맞게 됐다. 뮤지컬로는 ‘93년 ‘넌센스’ 작품 이후 30년만에 두번째로, 당시의 파릇한 주연배우가 이번에 다시 중년의 주연배우로 열연, 두드러진 역할을 소화함으로써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특히 ‘구룡포 프리덤’은 ‘고향 구룡포에서 자유를 만끽하다’라는 주제를 담으면서 전체 대사의 95% 이상이 포항말(방언)로 되어 있어서 이채롭고 정겹게 다가왔다. 사라져가는 사투리의 말맛으로 진짜배기 구룡포인의 애잔하고 애틋한 스토리가 엮어져 공연 내내 향수와 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고나 할까? 또한 무분별한 포획과 불법 어획, 서식지 파괴 등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한국계 귀신고래가 서식지인 영일만 앞바다에 돌아오길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도 담고 있어서 한결 공감이 가기도 했다.구룡포를 주제로 한 뮤지컬 공연에 많은 시민과 동호인, 지역민들이 함께하여 아낌없는 갈채와 찬사를 보냈다. 특히 구룡포읍장을 비롯한 공무원, 해당지역 시의원, 지역사회보장협의체 위원장 등의 분들이 다수 객석을 채워 열렬히 환호했는가 하면, 연말에 구룡포에서의 앵콜공연까지 논의되는 등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냈다. 흘낏 지나치거나 무덤덤하게 여길 수 있는 일들을 뮤지컬이라는 예술적인 요소를 가미해 테마와 스토리를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풀어낸 걸작이 아닐 수 없다.이처럼 뮤지컬은 연극적인 바탕에 음악과 무용의 요소를 곁들여 주제의 표현과 관객의 공감을 극대화시키는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다. 연극과 오페라의 중간쯤 영역에서 진지함과 차분함, 애절함과 흥겨움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호흡하며 독특한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총체적인 연희(演戱)라고나 할까?이러한 측면에서 ‘구룡포 프리덤’ 뮤지컬은 시대에 투영된 삶의 변화와 굴곡이 극적인 요소와 잘 버물려 표현된 감칠맛 나는 ‘문화 밥상’으로 손색이 없었다. 구룡포인의 삶을 재조명한 극단 예맥의 줄기차고 의미있는 문화 밥상을 기대해본다.

2023-11-29

단풍 유감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아파트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빼곡하다. 봄이면 거목에서 피는 벚꽃이며 목련꽃이 장관이다. 하늘 높이 솟은 은행나무며 노랗게 치렁치렁 늘어져 담을 넘은 개나리도 눈길을 잡는다. 나는 이런 우리 아파트를 울긋불긋 꽃대궐이라 이름하고 꽃피는 봄을 만끽한다. 아파트 앞의 수성못 또한 벚꽃이 만개하면 꽃구경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꼬물거리며 싹 나고 불그스레 봉오리 맺는 것을 확인하곤 언제나 활짝 필까 맘졸이며 기다리는 일 또한 즐겁다. 팝콘 터지듯 한두 송이씩 피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눈 온 듯 옅은 분홍의 꽃이 구름같이 일렁이면 그 며칠이 환하다. 특히 밤의 벚꽃은 은은한 조명을 받아 희다 못해 눈부시고 향기까지 뿜어주니 게으른 발걸음이 이때만은 한 일주일 부지런해진다. 그러다 금세 하늘거리며 눈 내리듯 지는 꽃. 분홍 융단같은 꽃으로 내려앉은 봄은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괘념하지 않는다. 여름내 짙푸른 녹음을 만끽하다 가을이 되면 봄꽃보다 더 붉은 단풍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 단풍은 유난히 고와 해마다 찍어 저장한 사진도 많다. 높다란 은행나무의 찬란한 노란 잎을 쳐다보다 냄새 고약한 열매를 밟기도 하지만 노란 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수성못의 벚꽃길 단풍은 온갖 축제에 모인 사람들과 어울려 더욱 붉어지곤 한다.그런데 웬일인가. 올해는 도무지 단풍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붉지 않고 푸르죽죽한 잎으로 말라 버린 채 낙엽 지고 있다. 은행잎은 이 추위에도 아직도 푸른 잎이 성성하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잎같이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 낙엽이 아니다. 늦은 가을임에도 대체 단풍은 어딜 갔나 싶다. 멀리 산들도 여느 때와는 달리 울긋불긋 단풍옷이 아니라 누르거나 회색의 거무스레한 색이어서 영 볼썽이 아니다. 비가 와서일까, 가뭄이 들었나 걱정 아닌 걱정은 나 혼자만이 한 게 아니었던지 기사가 났다. 그제서야 이유를 알았다. 푸른 잎은 가을 되어 뚝 떨어지는 기온에 놀라 단풍이 들 것인데, 늦가을까지도 계속된 더위로 색을 바꿀 기회를 놓친 탓이란다. 결국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때문인 거였다. 그렇다면 내년도 또 후년도 쭈욱 고운 단풍 즐기기는 어려워진 걸까. 너무나 무서운 자연의 징벌이 어찌 단풍뿐이랴. 봄에는 산불로, 여름엔 태풍과 홍수와 산사태로 인간을 징치하는 자연이다. 두려워하고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그렇다면 난 무얼 해야 하나. 일회용품을 덜 써야 할까. 편한 물티슈 대신 걸레와 행주를 써야 하나. 가방에 손수건과 장바구니는 챙겨다니고 있다. 휴지 한 장, 비닐봉투 한 장이라도 덜 쓰고 싶어서다. 플라스틱컵이나 종이컵이라도 덜 쓰게 텀블러도 넣어다닐까 싶다. 두 식구인데도 어쩜 그렇게 쓰레기가 많은지 분리하다 보면 택배상자가 그 중 많다. 종이 상자 하나라도 줄이려면 홈쇼핑을 하지 말고 수고롭더라도 마트나 시장에서 장을 봐야 하나.단풍을 즐기지 못한 채 가을은 가고 겨울이 닥쳤다. 올겨울은 겨울다우려나 모르겠다.

2023-11-29

숲으로 들다

배문경 수필가 친구들과 함께 숲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짐을 풀고는 숙소를 나서자 오후의 햇살이 맞은편 산으로 기운다. 노을의 황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산 입구의 문을 열고 좁은 길로 들어서자마자 공기가 다르다.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폐의 가장 아래쪽까지 숲의 향을 끌어들였다. 편백의 신선함이 몸 끝까지 가닿기를 바라며 들숨으로 횡격막을 최대한 늘였다. 하지만 아무런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바닥에는 잣나무 열매가 떨어져 곰팡이가 피었고 측백나무와 잣나무 잎이 수북하게 쌓였다. 낙엽을 밟으며 올라가자 편백나무들이 훤칠하게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다. 시냇물을 건너 오르막을 향해가자 숲은 가슴팍을 열고 우리를 받아들였다.지난해 코로나에 걸리고 일주일간 애를 먹었다. 그리고 확연히 그 증거를 남겼으니 냄새 맡기와 맛 느끼기라는 감각기관을 잃었다. 몇 주 혹은 서너 달이면 좋아지리란 기대는 물 건너간 것 같았다. 1년이 지나도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다시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조금 아주 조금 나무의 청량한 향이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아…. 다시 후각을 얻은 것일까. 깊게 짧게 깊게 길게 숨을 내쉬고 들이쉰다. 사이다처럼 시원하고 싸한 기운이 콧속으로 빨려 들어왔다.편백나무 아래에는 넝쿨식물이나 다른 나무들이 자랄 수 없다. 피톤치드 때문이었다. 식물로부터 방산(放散)되어 주위의 미생물 등을 죽이는 작용을 하는 물질의 총칭이 파이톤사이드(Phytoncide)이다. 그래서 히노키로 만든 다양한 제품이 건강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팔린다.그 피톤치드를 찾아 이곳을 찾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고 했다. 나 또한 청량감으로 폐부에 시원한 공기를 선사하는 편백나무 숲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편백나무는 두 종류이다. 몸피가 매끈한 것은 화백나무이고 목재로 사용되었다. 표피가 거친 것은 측백나무라고 하며 오일이나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가려움에 좋다는 진액 오일과 두피에 좋은 샴푸를 샀다. 피부보다 모공이 다섯 배나 커서 평소 사용하는 샴푸로 인해 상한 두피를 달래보려 한다. 진액을 손에 살짝 묻혀 흡입하자 저 깊은 폐부에까지 깊이 파고드는 시원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숲의 입구에 지어둔 오육십 년 된 옛집을 개조해서 만든 펜션과 편백나무를 이용해 지은 펜션 사이에서 다섯 여자가 선택한 것은 개조한 집이었다.숲과 집이 온통 편백이었다. 이제 삐꺽거리기 시작하는 나이이니 건강에 좋다는 것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렵게 예약하고 건강을 찾는 이 계획을 선택한 것이었다. 편백나무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란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이 함께 한다.여름에는 키가 크고 겨울에는 부피가 커진다는 나무들, 육십을 바라보는 여자들의 삶도 키는 줄고 부피만 느는 시간이다. 힘겨운 추위를 이겨낼 때마다 내면에 좁은 나이테가 만들어지고 삶의 얼룩을 견뎌내고 따뜻해지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아픔도 슬픔도 질환으로 힘들어 하는 우리 모두가 저 나무들처럼 비바람이 불어도 나뭇잎이 떨어지고 추위가 와도 견뎌내는 힘이 이해와 사랑과 보살핌이란 것을 안다. 서로를 바라보며 주름진 얼굴 사이로 진액 같은 웃음이 흐른다.나무숲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나무는 그림자를 길게 늘이고 그 사이로 신선한 바람이 흐른다.다섯 여자가 숲을 바라보았다. 1888년 2월 아를에 도착한 직후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편지로 “나는 편백나무와 함께 별이 총총한 밤이 필요하다. 그런 밤은 아마도 잘 익은 밀밭 위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정말 아름다운 밤이 있다”라고 썼다. 우리 또한 보름달 옆으로 그 언제보다 밝게 빛나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함께 외쳤다.“별이 빛나는 숲속에서 아름다운 하늘에 빠졌다”라고.

2023-11-29

동지(冬至)와 명리 이야기

24절기 가운데 22번째가 동지(冬至)다. 태양 황경이 270도에 위치하며, 올해는 12월 22일(음력 11월 10일)이 동지다. 대설(大雪)과 소한(小寒) 사이다. 이때 북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 반대로 남반구에서는 낮의 길이가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다. 추위는 대략 이 무렵부터 강력해지기 시작한다.중국의 율력융통(律曆融通)에 의하면 입춘을 세수(歲首·새해)로 정한 중국 하(夏)나라는 인시(寅時)로, 소한(小寒)을 세수로 정한 상(商)나라는 축시(丑時)로, 동지(冬至)로 세수로 정한 주(周)나라는 정자시(正子時)로 하루의 시작을 정했다고 한다.동지가 반드시 음력 11월에 있었기 때문에 음력 11월을 동짓달이라 불렀다. 중국에서는 동지를 한 해의 기준으로 삼도록 했으나, 한대 이후로 입춘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지가 든 달이 반드시 자월(子月)이 되도록 설정했다. 이 같은 영향으로 중국이나 중국이 만든 역법을 받아들인 나라에서는 동지가 드는 시간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술이 필요했다. 올해는 12월 22일 12시 27분이다.동지(冬至)의 뜻을 한자로 풀어보자면 ‘겨울에 이르다’라는 뜻이다. 겨울의 한 절기로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을 의미한다. 동시에 해가 다시 길어지는 시점이기 때문에 한 해를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예로부터 ‘작은설’이라고 했다. 고려 때는 동지를 설날로 지정했는데, 충성왕 때 설날을 음력 1월 1일로 바꾸었다. 동지를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동짓날 민간에서 하는 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팥죽을 먹는 것이다. 왜 동지에 팥죽을 먹을까? 팥죽에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어 귀신을 쫓는 기능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동짓날 집 안에 있는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서 팥죽을 쑤어 집의 대문이나 문 근처에 뿌렸다고 한다.동지 팥죽은 단팥죽이 아니다. 찹쌀로 새알 크기 만한 새알심을 만들어 팥죽에 넣어 먹는다. 그리고 나이만큼 새알심을 먹는 풍습도 있다.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동지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과 연관이 있다.전통적으로 이날 팥죽을 쑤어 먹고 소똥과 팥죽을 대문과 마당에 뿌렸다. 이는 악귀와 액운을 내쫓는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비롯됐다. 또한 동지를 작은설로 부르며 크게 축하했다. 민간에서는 설날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처럼 동짓날 팥죽을 먹으면 한 살 더 먹는다고 했다. 이는 옛날에 동지를 정월(正月)로 삼은 풍속에 따른 것이었다.음력으로 11월 10일까지 드는 동지를 애동지, 아기동지라고 불렀다. 올해는 양력 12월 22일이 음력으로 11월 10일이라 애동지에 해당된다. 옛날에는 애동지에는 어린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여 팥죽을 쑤어 먹지 않는 대신에 팥 시루떡을 만들어 먹었다. 동지에 먹는 붉은 팥죽은 옛날부터 액운을 막는 절기 음식이다. 악귀가 붉은 팥을 싫어해서다.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점차 낮의 길이가 길어지므로 많은 곳에서 축제일로, 또는 1년의 시작일로 삼았다. 서양에서도 낮이 점점 짧아지는 현상을 태양이 죽어가는 것으로 봤다. 동지를 기점으로 낮이 길어지는 현상을 태양이 되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하여 태양신을 기리는 동지축제도 있었다.자월(子月·11월)의 절기인 대설과 소한의 중심에 동지가 있다. 명리에서는 12지지 중 첫 번째가 자(子)이다. 방위는 북쪽이고, 색은 검정이다. 시간으로는 자시(子時·23~01시)이므로 기운이 시작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통감외기(通鑑外記)에 보면 자(子)를 곤돈(困敦)이라 했다. 곤(困)은 궁핍하다는 뜻이며, 돈(敦)은 소생하는 기틀이다. 그래서 옛 운(運)은 이미 다하고, 새로운 기틀이 다시 일어남을 뜻하는 것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자(子)는 차가운 어둠에 웅크리고 있지만, 시기가 도래하면 불어난다는 뜻도 있다. 즉, 만물이 땅에서 불어난다는 것처럼 땅 아래에서 새끼를 치고 싹이 나는 기운이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다.동물로는 쥐다. 쥐는 번식력이 강하여 계속 불어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혜롭고 총명하고 끼가 많다. 그리고 생존에 유리한 조심성이 발달했다. 직업으로는 야간 활동이나 연구, 보안계통이나 은밀한 일에 적합하다.맹자의 ‘이루장구’ 하편에 ‘상고시대에 11월 갑자 초하루 야반(夜半·00시)을 동지로 역원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한 해의 진정한 새해 첫날은 동짓날이 시작되는 시간대인 자시(子時·23~01)의 중간인 자정이 새해의 시작이다. 또한 동지는 주역에 지뢰복(地雷復) 괘에 해당하므로 일양(一陽)이 시생(始生)한다. 즉, 동지가 새해의 생명 기운을 태동하는 때이기에 동지를 새해로 정한 것으로 추측된다.올해도 추운 겨울이 예상된다. 이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가장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들에게 온정과 관심을 가지는 동지가 되길 기대해 본다.

2023-11-29

밥상머리 교육이 무슨 죄

우정구 논설위원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인성과 예절 등을 배우는 게 밥상머리 교육이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가 반말을 하거나 어긋난 행동을 할 때면 “버르장머리 없다”“밥상머리 교육이 안됐다”는 식으로 나무라는 것이 보통의 언사였다.지금은 가정이 해체되다시피하고 한두 자녀를 귀하게 키우다보니 밥상머리 교육이란 말을 쓰는 경우가 드물다. 밥상머리 교육은 가족과 더불어 식사하면서 예절, 절제, 나눔, 배려 등을 배우는 한국식 도덕교육이다.하버드대의 한 연구팀은 만3세 아이가 책을 통해 배우는 단어는 140개, 가족과 식사를 하며 배우는 단어는 1천개라는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식사 시간의 대화가 언어습득과 구사에 매우 효과적이란 뜻이다.콜롬비아대서도 비슷한 연구가 있었다. 가족과 식사를 자주 하지않는 청소년은 자주 하는 청소년에 비해 흡연률은 4배, 음주률은 2배가 높다고 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우리 어른들이 말하는 밥상머리 교육은 매우 과학적 근거가 있는 교육법이다.국민의힘 인요한 위원장이 이준석 전 대표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이 “부모교육 잘못”으로 말했다가 사과를 했다. 과한 표현으로 사과는 했지만 인 위원장의 의도는 한국식 밥상머리 교육의 참뜻을 말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정치적 표현으로 부적절한 부분이 있었으나 밥상머리 교육의 진정한 의미가 잘못 전파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대가족제가 사라지고 바쁜 현대생활로 밥상머리 교육을 가르칠 기회가 적어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어른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적 예절을 지키는 도덕문화는 유지되는 게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11-28

여권 주류세력은 ‘넓은 視野’를 가지길

심충택 논설위원 국민의힘이 10·11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지 50일이 다 됐지만, 아직 터닝포인트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혁신위가 민심을 끌만한 다양한 혁신과제를 내놨지만, 당 주류인 김기현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와 친윤핵심, 영남권 중진들이 혁신 흐름을 끊고 있다. 국민의힘이 내년 총선에서 야권에 질 경우, 현재의 당 주류 인사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총선이 현 판세대로 진행되면 야권은 수도권을 석권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이 지금처럼 과반의석을 넘으면 입법·사법에 이어, 행정부까지 손아귀에 넣는다. 특검과 해임, 탄핵이 이어질 것이고, 현 정부의 3부기능은 모두 마비된다. ‘동학농민혁명군 명예회복법’ 같은 기상천외한 입법 폭주도 이어질 것이다. 책임은 현재의 여당주류 인사들에게 향하게 돼 있다.국민의힘 주류 인사들은 충분히 이러한 결과를 예상할 수 있음에도 혁신위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어깃장을 놓고 있다.민심이반 위기 돌파를 주도해야 할 그들이 눈앞의 자기이익에 몰두하면서 민심을 외면하는 것이다. 당내에서 유일하게 민심을 반영하는 혁신위원들이 “이대로라면 더는 못 하겠다”며 두 손을 드는 사태까지 왔다.당 혁신위는 내일(30일) 2호 혁신과제인 ‘불출마 또는 험지 출마’ 권고를 정식안건으로 의결하고, 지도부에 공식혁신안으로 제안할 예정이다. ‘주류희생’을 최종적으로 요구하는 최후통첩 절차다. 현재로선 당 지도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아주 높다. 김 대표는 오히려 본인 주도하에 총선을 치르겠다며 당 장악력을 강화하고 있다. 같은 처지인 친윤·영남중진 의원들도 이런 김 대표를 응원하고 있다.혁신위가 당에 권고한 과제 중에는 TK(대구경북)를 비롯한 영남중진들의 희생도 포함돼 있다. 사실 수도권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영남정치세력의 당내 권력독점’은 보수정당을 비토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지난 23일 열린 대구경북언론인회 포럼에서 “TK세력의 당권독점으로 인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층) 지지가 심각하게 떨어졌다”고 진단했다. 국민의힘이 영남일색인 현 지도부체제를 고집하면, 내년 총선에서 여당바람을 일으킬 동력을 만들 수 없다.당 혁신위도 이를 인식하고, 영남권 중진들이 희생한 빈자리를 중도·청년층으로 대체해 총선에서 외연을 확장하자는 과제를 내놓은 것이다.보수정당 역사에서 TK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 공헌도는 아주 높다. 김용판 의원(대구 달서병)이 언급했다시피, 이 지역 정치인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시 당을 지켜온 주류세력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영남당 이미지로 선거를 치르면, 승산이 없다는 점이다. 내년 총선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안위와 직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TK를 중심으로 한 여당 메인스트림(주류세력)은 시야를 넓혀, 인요한 위원장이 “나라가 먼저다”라고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2023-11-28

대규모 투자 이끈 대구시의 원스톱 지원행정

대구시의 기업지원 행정이 빛을 발하고 있다. 지난해 홍준표 대구시장의 지시로 설치한 대구시 원스톱기업투자센터의 활약으로 그저께 지역의 양극재 전문 대표기업인 엘앤에프가 대구국가산단에 2조5천억원의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대구에서 단일 투자 금액으로는 역대 최대며 신규 고용이 3천명 이상 발생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코스닥 시가총액 5위의 엘앤에프는 2007년 NCM계 양극재 생산을 시작해 2019년 세계 최초로 니켈 비중 90%인 하이니켈 NCMA 양극재 개발에 성공한 기업이다. 이번 투자로 양극재 생산전문 기업에서 차세대 음극재와 LFP 양극재까지 양산하는 이차전지 종합소재 기업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계획대로 라면 연간 9조5천억원의 매출이 발생, 지역경제에 대한 파급력도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기업이 새로운 곳에 입주하려면 건축 인허가 등 검토해야 할 분야가 많다. 특히 번거로운 행정절차로 많은 시간을 끌게 되면 경비 부담도 많은 게 사실이다.대구시는 홍 시장의 지시로 지난해 7월 대구시 원스톱기업투자센터를 설치해 이같은 애로를 해결해 주고 있다. 기업이 투지를 결정하면 건축 인허가 등 모든 행정절차를 대구시가 대신해 주는 역할을 한다.이를 위해 8개 구군청과 한국산업공단, LH 지역본부 등 15개 관련기관과도 협의체를 구성해 적극 돕고있다. 지난 1년 동안 원스톱센터는 22개 기업과 협약을 맺고 4조1천억원의 투자를 약속 받았다. 과거 10년 동안의 실적과 맞먹는 성과다.대구시 국가산단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한 엘엔에프의 최수안 대표는 “대구시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규제 해소로 투자를 결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업의 투자유치에 인허가 기관의 적극 행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대구시 원스톱기업투자센터의 적극 행정이 초심을 잃지 않고 더욱 분발 노력하여 더 많은 성과를 내길 바란다. 대구시의 기업지원정책이 널리 알려지면 더 많은 기업이 찾아오게 되고 도시 경쟁력 증대와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023-11-28

‘대구~포항 도시철도시대’ 공론화 할 때다

오는 2030년부터 영천(금호)까지 운행될 대구도시철도 1호선 구간을 포항까지 연장해서 ‘대구~동해안 도시철도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국민의힘 김정재(포항북) 의원은 “대구도시철도를 포항까지 연장하는 문제를 우선 대구시·경북도와 협의한 후 국회포럼을 통해 공론화하겠다”고 밝혔다. 경북도도 “대구 도시철도가 경북 서부권으로 확장되면서 동해안권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도시철도 영천연장 구간은 경산 하양역에서 금호읍까지 5km이며, 현재 예비타당성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2025년 설계를 완료한 후, 2026년부터 공사에 들어가 2030년 준공된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021년 7월 제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을 발표하면서 대구~포항간 광역철도망 건설에 대한 방안을 내놓았다. 대구선(동대구-하양-영천)과 중앙선(영천-아화), 동해선(서경주-안강-포항) 3개노선을 활용해 광역철도망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기존 계획에서 대구선 대신 대구도시철도 1호선을 중앙선, 동해선과 연결하면 큰 예산을 투입하지 않고도 광역철도망이 구축될 수 있다.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경기 화성시 동탄역 GTX 열차 안에서 가진 ‘광역교통 국민 간담회’에서 “서대구~의성 광역철도 구간은 2027년 현 정부 임기 내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끝내겠다”고 언급했었다. 윤 대통령이 대구·경북 광역철도망 건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 아직 국회나 정부차원에서 논의된 적은 없지만, 대구도시철도 1호선 포항연장 문제는 포항지역 시민사회의 최대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사실 대구·경북이 해양을 보유한 지방정부로서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려면, 대구~동해안 간 교통인프라 확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구도시철도 1호선 포항연장 사업이 성사될 경우, 대구와 포항은 출퇴근이 가능한 하나의 대도시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대구는 항만을, 포항은 거대상권을 새롭게 보유하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2023-11-28

정의의 탈을 쓴 희롱과 저주

교사와 여고생이 실랑이하는 영상이 뒤늦게 화제가 됐다. 지난해 3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수업 시간에 매점에 가려는 학생을 제지하려 교사가 가방을 붙잡는 과정에서 머리칼이 함께 잡힌 게 발단이 됐다. 학생은 “저도 남의 집 귀한 딸”이라며 따졌다. 선생님에게 대드는 여고생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와 영상을 찍는 친구의 킥킥대는 웃음소리 속에서 교사의 훈계는 맥 빠진 듯 들렸다.난리가 났다. 댓글창엔 “교권 추락의 현주소”라며 서이초, 호원초 사건과 묶어 탄식하는 글, 학생인권조례와 촉법소년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 가정교육을 질타하는 글이 넘쳐났다. 다수 언론에서 보도했는데 거의 모든 기사에 백여 개에서 천 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그만큼 사회적 공분을 산 것이다. 특이한 건 다른 이슈들은 기사마다 ‘베댓’(공감수가 많은 댓글)이 다양한 데 비해 이 사건 기사들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한결 같다. “꼬락서니 보니 어떤 인생을 살지 뻔하다”는 것.영상 속 학생은 짧고 타이트한 교복 치마를 입고 있다. 모범생처럼 보이진 않는다. 학생답지 않은 옷차림과 선생님에게 대드는 ‘버르장머리 없음’이 합해지면서 물어뜯기 좋은 빵이 됐다. 피라냐 떼처럼 달려든 어른들은 정의감과 도덕심에 불타올라 말했다. “룸망주”(룸살롱 유망주), “귀한 딸 밤마다 어디 출근하는지 알면 어머니 가슴 찢어질 듯”, “자퇴하고 술집 취업?”, “노래방 도우미”, “교복 보면 수준 보임. 앞으로 막 살겠군”, “탬버린 흔들고~”, “나가요”(성매매 여성을 일컫는 은어)라고.정의라는 가면을 썼지만 혐오의 민낯이 고스란히 보인다. 저열한 인상비평과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천박한 성희롱이다. 성별 및 세대별 댓글 비율을 보면 40대 남성이 압도적이다. 교복 치마 줄여 입었다고, 선생님한테 대들었다고 딸뻘 여학생더러 “나가요” 운운하는 게 과연 올바른 훈육인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을 하면 찔리는 데가 있을 것이다. 아니다. 이 또한 인상비평이니 관두겠다.치마가 문제인가 행실이 문제인가? 이미지와 행실이 짝을 이뤄 확증편향에 박차를 가했겠으나 하나를 보고 열을 안다면 점집을 차려라.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상황 안에서만 판단한다지만 지금 보이는 것으로 장차 보이지 않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교사에게 대든 걸 나무라면 된다. 교복이 불량한 걸 지적하면 그만이다. 하나를 보면 하나만 봐라. 고작 한 순간 인상으로 어린 소녀의 남은 인생 전체를 폄하하고 저주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대들었다면? 짧은 치마를 입고 예의바르게 행동했다면? 교복 치마는 상대적 조건일 뿐 절대적 근거가 아니다. 댓글을 단 이들은 “모든 룸살롱 여종업원은 짧은 치마를 입는다. 여고생은 짧은 치마를 입었다. 그러므로 여고생은 룸살롱 여종업원이 될 것이다”라는 유치한 삼단논법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솔직해지자. 훈육이 아니라 희롱하고 싶었다고, 걱정이 아니라 저주하고 싶었다고.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유행에 휩쓸리기 쉬운 나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에고가 강하고 별 이유 없이 기성세대에 피해의식을 가질 때다. 당신들은 안 그랬나? 1990~200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오토바이 폭주하고, 교복을 ‘쫄바지’, ‘항아리바지’로 줄여 입거나 아예 ‘똥 싼 바지’로 늘여서 “온 동네 다 쓸고 다닌다”며 등짝 맞던 세대가 지금의 40대다. 선생님한테 대드는 일이야 흔했다. 그러고 보니 근래의 교권 추락은 학부모들이 교사들을 낭떠러지로 몬 결과가 아닌가? 정작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남의 자식 귀한 걸 모르는 학부모들 대부분이 40대다.사진과 영상은 많은 걸 말하지만 파편이자 단면일 뿐이다. 이미지는 실재를 왜곡하고, 나중엔 실재와 무관하게 자립한다. 영상 하나가 한 소녀의 미래에 ‘막장 인생’ 낙인을 찍은 것처럼. 해당 학생과 영상을 촬영한 학생 모두 선생님과 오해를 풀고 잘 지내다가 개인 사정으로 자퇴했다고 한다. 온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지금 얼마나 두려울까. 잘한 건 없으니 반성해야지. 그 반성을 통해 성숙해야지. 검정고시든 취업이든 꿈을 향해 나아가야지. 한 번의 잘못으로 인생 전체를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과연 얼마나 바르게 사는지 모르겠다만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그들이 틀렸음을 보여주렴. 너는 귀한 딸이다.

2023-11-28

삶의 진주 목걸이 꿰기

급작스레 떨어진 기온 탓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 겨울날. 느릿느릿 산책하던 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게 되었고, 캄캄한 어둠으로 잠긴 아침은 평소보다 더 눈을 뜨기 힘들게 되었다. 급작스런 계절의 변화와 함께 나의 기분도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몇 날 며칠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터츠, 마음을 다스리는 마스터’ 속의 스터츠 박사는 ‘나약함을 드러내라’며 말을 건네 왔다.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필 스터츠(Phil Stutz)와 ‘머니볼’, ‘더 울프 오브 윌 스트리트’로 얼굴을 알린 배우 조나 힐(Jonah Hill)이 등장한다. 조나 힐은 스터츠 박사와 만나 습득한 심리 치료 기술을 소개하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불가능을 상징하는 목소리를 스터츠 박사는 X-파트로 명명한다. X-파트는 비판하는 자아이다. 반사화적이며 불가능을 상징한다. 스터츠는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X-파트를 없앨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삭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X-파트를 제거하면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삭제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는 있어야 한다. 이를 마주하면서 인정하게 된다면 성장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삶은 고통,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의 3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 3가지 측면을 인정하고 극복하는 과정이 비로소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삶의 고통과 불확실성, 끝없는 노력을 인정하고 행하기 위해선 어떤 게 필요할까? 그럴 때 스터츠는 ‘진주 목걸이 기법’을 이용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진주는 행동이고 목걸이는 행동을 계속 이어가는 행위다. 아침에 일어나는 행위도 진주알 하나이고, 훌륭한 일을 하는 것도 진주알 하나다. 진주알 하나하나에 일의 가치를 매기는 것이 아닌,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진주알로 대입해 계속 행동하며 나아가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어찌저찌 진주알을 실에 꿰었지만 진주알 속에 이물질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이물질 탓에 진주알은 매끄럽지도 못하고 거무튀튀한 탓에 유독 튀어 보인다. 하지만 이를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진주알 꿰기는 성공과 실패라는 결론이 중요하지 않다. 진주알 속엔 이물질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진주알은 진주알이라는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니 진주알 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계속 진주알을 꿰어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다. 그 의지를 발판 삼아 진주알 꿰기에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믿음만 있다면 삶이라는 진주 목걸이는 꽤 그럴 듯 해 보일 것이다.2주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급격하게 변화는 환경 탓에 혼란스러웠고, 현재까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성공했고 실패했느냐의 초점에 맞추어 오랜 고민을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되었고 빠른 흐름에 맞추어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X-파트에 가두어 더욱 나약해지기만 했다. 다행히 이 시점에서 습득한 ‘진주알 꿰기’ 기술은 X-파트를 마주하는 데에 진취적인 태도를 지니게끔 도와주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아가기 위해선, 외면했던 과거의 나 자신과 화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 했다. 숨기고 싶은 과거의 나는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거의 대부분 수치스러운 기억이거나 타인은 물론 나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내가 저 그림자를 꺼낼 수 있을까? 생각하다보면 다시 뒷걸음치게 된다. 스터츠 박사는 그림자는 결국 ‘나’이기에 그때의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과거의 수치가 현재까지 이어져 스스로 파괴적인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스터츠 박사 또한 외면하고 싶은 나 자신과의 화해가 어렵다. 그 또한 어린 스터츠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X-파트가 있었고 그 속에선 그저 힘없이 나약한 인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스터츠 박사 또한 이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취약성을 더 세밀하게 마주한다. 그는 취약성을 마주하며 마치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을 쉽게 가늠할 수 없지만 내가 발견한 건, 그는 그림자를 드러내어 인정하였다는 것이고 거듭 진주 목걸이를 꿰어가며 고통을 극복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찰나의 장면에 희망이 있었다. 그 희망을 믿고 싶다고 생각하는 순간 용기가 생겼고 동시에 삶의 방향이 묵직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23-11-28

삶의 확실성을 위협하는 불길한 어둠의 공포

에드가 앨런 포는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특색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최초의 전문 탐정인 오귀스트 뒤팽을 창조했던 미스터리 작가이기도 하고, 특유의 기괴하고도 섬뜩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들을 다수 써서 이후 소설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어셔가의 몰락’은 포가 1839년에 쓴 단편소설로 직계로만 이어진 어셔 가문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과 그것의 목격자가 된 나의 기록을 담고 있다. 어셔는 자신의 쌍둥이 누나를 죽여야만 하는 충동과 그로부터 얻게 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린다. 사진은 에드가 앨런 포. 우리의 삶은 단단한 현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고,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는 대상은 금방 그 존재를 잊어버리지만, 도무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도무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공포를 집어 먹는 존재이다.내가 익숙하게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 도시 알 수 없는 요소들이 끼어들어 그것이 더 이상 낯익은 대상이 아니게 되면, 그 관계는 공포가 된다. 철근콘크리트나 나무 같이 단단한 재료로 만들어진 단단한 공간들 사이에 존재하기 마련인 빈공간의 어둠은 인간의 태연한 앎을 빨아들여 불안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간단하게 ‘보이드(void)’라고 말해버릴 수 없는 공간과 관계의 공동은 내가 딛고 서 있던 단단한 실재의 토대를 무너져 내리게 만든다.이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공간과 공간, 때로는 시간과 시간 사이에 존재하고 있던 비어있음에 주목했던 최초의 작가는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1809~1849)가 아니었을까. 물론 그 이전에도 그 세계를 바라보았던 작가들은 존재했지만, 언어와 글쓰기라는 도구로 그 세계에 대해 그려냈던 혹은 그 빈공간을 부조해냈던 사례는 아마도 그로부터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전에는 ‘어둠’이라는 주제조차 빛을 비춰서 반사된 윤곽을 그려냈던 것에 불과했다면, 빛과 빛 사이, 단단함과 단단함 사이에 존재하는 불길한 어둠에 대해 최초로 그려냈던 것은 바로 포였다.에드가 앨런 포의 대표작 중 하나인 ‘어셔 가의 몰락’은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작가가 이 실마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걸어들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그 어둠의 세계는 깊고도 깊다. 모든 불길한 예감들이 그렇듯 책을 덮은 이후에도 어셔가가 내뿜는 어떤 기운은 독자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는다.구름이 무겁게 내리누르는 적막한 가을날, 시골길을 따라가던 나는 황혼이 내릴 무렵 옛 친구인 로데릭 어셔의 집이 보이는 곳에 다다른다. 그 황폐한 집을 보면서 나는 시적인 감정이 떠오르기는커녕, 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지 알 수 없는 침울함과 불안함에 사로잡힌다. 그러면서 이 음울한 집에서 몇 주간 머물기로 한다. 친구인 어셔는 오랜만에 나에게 연락해서 자신이 병에 걸려 있다며 나를 만나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몇 주 동안 어셔의 저택에 머물면서, 나는 어셔의 쌍둥이 누나인 마델린이 지각불감증과 전신경직증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어셔는 자신의 누나가 죽었다고 하면서 두 사람은 누나의 시체를 관에 넣어 지하실 깊은 곳에 넣어둔다. 그 이후 나는 신경과민 증세를 겪게 되고, 어셔와 마찬가지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나와 어셔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소설을 읽는데, 그들은 저 지하로부터 들리는 둔탁한 소리들을 듣는다. 어셔는 그 저택을 휩싸고 있던 공포의 실체에 대해 말해주고, 결국 그것에 잡아먹힌다.포의 이 ‘어셔가의 몰락’은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한 공포로 가득한 가족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집의 망령과 하나가 되어 누나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관에 넣어 지하에 매장했던 어셔는 저 깊은 무의식에서부터 보내오는 강박과도 같은 소리를 듣는다. 기겁해서 놀라 집을 뛰쳐 나온 내 뒤로 그 저택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그 분명하고도 명확한 공포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무너져 내린다. 그것을 흘깃 본 사람만이 그것의 존재를 증언할 수 있다. 그 불길하고도 강박적인 어둠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3-11-27

길 위의 작품, 청송 객주문학관

소설 창작을 위해 5년 동안 전국의 장터와 옛길을 다니며 자료를 조사한 소설가가 있다. 김주영 소설가는 1979년 6월부터 1984년 2월까지 ‘객주’를 신문에서 연재하면서, 한 달의 절반 이상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길 위의 삶을 살았던 조선 말 보부상들을 주인공으로 삼기 위해 작가 스스로 옛 보부상의 길을 따라 쫓으며 길 위에서 작품을 써 내려갔다. 그에 대한 자료는 청송의 객주문학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소설 ‘객주’는 총 3부 9권과 2013년 10권을 발간하면서 완간되었다. 1부에서 3부로 갈수록 폐쇄적 배경이 열린 배경으로 변화하고, 개인적 사건이 국내·국제적 사건으로 확장되고, 인물의 인식이 개인에서 민족주의까지 변화하게 된다. 1부는 보부상들의 걸음에 맞춰 그려낸 그들의 옛길에 대한 묘사가 섬세하다. 작은 언덕부터 소소한 갈림길 그리고 ‘밥때’에 머물던 장소까지, 실제로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소설 속에 들어 있어 작가의 노고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문경·상주·안동·예천·연산·강경·전주·군산포·하동·구례·전주 등 삼남을 종횡무진 다님에도 결코 ‘삼남’을 벗어나지 않는다. 신분도 사농공상 중 가장 낮은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며, 다루어지는 사건들도 상행보다는 개인적인 복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설 속 최돌이의 살인사건이 지역의 권력층에 의해 위조되고 덮이는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건 또한 그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배경에서는 시간적 배경도 큰 의미가 없다. 소설에서도 3권의 “무인 섣달(1878년 12월)”을 보고서야 거꾸로 유추하여 1권이 1878년 가을이고, 2권에서 “6월 수해”가 언급되므로 그해 겨울임을 확인할 수 있다.2부는 서울과 송파를 오가는 길이 배경이 된다. 서울은 과거에도 우리나라의 모든 것의 중심이자 전국을 연결하는 심장이었다. ‘객주’에서는 서울과 송파를 오가는 길을 다양하게 드러내면서 길이 한정적이지 않고 서울로 이어져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서울은 민씨 일가가 세력을 떨치는 곳이자 거상 신석주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신석주는 세곡선을 운항하면서 민씨 세력의 곳간을 책임지고, 민씨 세력은 신석주의 뒷배가 되어준다. 1부에서 일개 보부상에 불과했던 길소개는 신석주의 아래에서 성장하여 민씨 세력에 기생하는 상인으로 성장한다. 그 대척점에는 마찬가지로 일개 보부상이었던 천봉삼이 있다. 천봉삼은 길소개의 악행을 보고, 나라에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은 모두 권력층의 탐욕으로 인한 것임을 인지하게 된다. 또한 2부의 시간적 배경은 1부에 비해 비교적 쉽게 유추할 수 있다. 4권은 “기묘년 3월 중순(1879년 3월)”에서 약 보름의 일을 기록한 것이고, 5권은 “세곡선이 군산포를 떠난 것이 4월 스무사흘날”이라 명시하였다. 7권에서 “경진년(1880년)”으로 바뀐 부분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6권은 1879년 겨울까지 그려져 있다. 2부는 소설의 3부에 발생하는 임오군란 전에 상인 세력이 성장하는 시기이기도 하므로 비교적 1부보다는 시간적 배경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3부는 다른 권에 비해 역사적 사건이 드러나 시간적 배경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영남 만인소 사건(1881년 2월)·이재선의 역모(1881년 8월)·임오군란(1882년) 등 실제 사건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대비되게, “민영익이 부보상을 이용하여 군란을 제압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온다는 소문과 대원군이 서울 백성을 무장시켰다”는 실록의 간단한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이 가미한 사건도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서 민씨 세력은 보부상을 이용하여 서울군란을 진압하고자 하지만 천봉삼은 그와 반대되는 선택을 하여 보부상과 민의 부딪힘을 무마시킨다. 보부상의 조직이 임오군란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조직으로 성장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길소개는 몰락하고 천봉삼의 세력은 원산진까지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9권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지로 선정된 원산진이 배경이다. 원산진은 근대의 상징이자 조선 침탈의 기지가 되는 곳으로, 왜상이 곡물을 해외로 반출하여 국내 쌀값을 폭등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천봉삼 일행은 왜상에게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다 도리어 타격을 입고 투옥된다. 사형은 면하나 9권은 1883년 추분 이전에 끝을 맺어 아쉬운 결말을 남긴다.청송 객주문학관은 ‘객주’를 중심 테마로 삼아 공간을 꾸민 곳이다. 소설가가 소장했던 자료나 간행되었던 책 등이 있고, 그의 작품을 소재로 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작가의 필체로 쓰인 옛 원고 일부와 전국의 시장을 누비던 카메라 등과 같은 개인 소장품을 통해 집필하던 당시의 환경을 상상할 수 있다. ‘객주’체험 영상과 민속관도 흥미를 더한다. 길 위에서 생생하게 그려낸 ‘객주’의 발자취를 따라 전시실을 돌며 소설의 장면들을 되돌아본다./최정화 스토리텔러◇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2023-11-27

막내린 화원교도소 시대

홍석봉 대구지사장 대구 중구 삼덕동에 있던 대구감옥(1910년 설립, 1923년 대구형무소로 개칭)은 1971년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로 이전, 대구교도소로 이름을 바꿨다. 부지면적은 전국 교정시설 중 가장 넓은 편. 한때 국내에서 서울구치소 다음으로 큰 행형시설이었다. 화원교도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대구교도소에는 전국 몇 곳 밖에 없는 사형시설이 있다. 1997년 12월 30일 교수형 이후 사형집행이 중단됐다.대구교도소를 거쳐 간 수감자로는 유영철(53)이 있다. 유영철은 부녀자 등 21명을 연쇄 살인, 사형 선고를 받고 미집행 상태로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다. 유영철은 지난 9월 서울구치소로 이감됐다.‘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유행시킨 탈주범 지강헌과 함께 탈주했던 3명도 대구교도소에 구금됐었다.간첩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도 대구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레바논계 필리핀인으로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였던 그가 고정간첩으로 드러나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수감생활 중 실크로드 사전을 집필했다. 이젠 잊혀진 인물이 됐지만 1997년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5년 복역 뒤 특사로 석방됐다.1975년 8명이 사형당하고 17명이 무기징역 등 장기 투옥된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사형 및 구금된 곳도 이곳이다. 국회의원을 지낸 영화배우 강모씨도 이곳에서 구금생활을 했다. 대구교도소는 한때 수용 재소자가 4천500명에 달한 적도 있다. 현재 재소자 숫자는 2천여 명이다.28일 대구교도소가 52년 만에 달성 하빈의 신축 교도소로 이전한다. 교정 당국과 경찰은 완전무장한 채 군과 합동 호송작전을 벌인다. 근래 보기드문 대규모 죄수 이송 작전의 장관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1-27

여권, ‘주류희생’ 없이 총선동력 생기겠나?

국민의힘 지도부를 비롯한 주류측과 당 혁신위원회 간 갈등이 폭풍전야처럼 위태롭게 진행되고 있다. 오는 30일 혁신위가 주류 희생 권고안을 정식으로 의결한 후, 지도부에 공식 혁신안으로 제안할 방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당 지도부와 혁신위는 정면충돌하게 된다.혁신위의 시한폭탄 같은 경고에도 당 주류측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혁신위에 전권을 위임하겠다고 공언한 김기현 대표는 혁신위 2호안건(주류 불출마나 험지 출마)에 대한 입장을 아직 밝히지 않고 있다. 김 대표는 오히려 지난 25일 자신의 지역구인 울산 남구에서 “내 지역구에서 의정보고회를 한다니까 왜 하냐고 시비 거는 사람이 있어 황당하다”며 울산 출마의지를 강하게 다지는 발언을 했다. 혁신위의 경고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친윤(윤석열)핵심’인 장제원 의원이나 ‘영남중진’ 주호영 의원도 “서울에 가지 않겠다”는 발언을 한 상태다.당 주류측이 이처럼 2호안건에 대한 반발의지를 강하게 보임에 따라 혁신위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됐다. 혁신위 인요한 위원장은 지난 일요일 ‘험지 출마’를 결단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의 회동사실을 언론에 공개하며, 당 주류측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당 주류가 혁신안을 거부함에 따라 대처방안을 두고 혁신위 내부도 시끄럽다. 정치인위원과 민간위원이 혁신위 조기 해체론을 두고 격론을 벌였고, 박소연·이젬마·임장미 등 민간위원의 사퇴설도 흘러나오고 있다.지금상태로는 김기현 지도부가 만약 30일까지 2호 혁신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시그널을 보내지 않을 경우, 여당 혁신위는 좌초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당의 메인스트림에 대한 민간 혁신위원들의 불만이 예상외로 높기 때문이다.만약 혁신위가 당 지도부에 반발해 조기해체 수순을 밟게 되면 국민의힘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을 되돌리기 힘들어진다. 총선동력도 잃게 될 것이다.그 책임은 김기현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친윤계 중진의원들이 즉각적으로 져야 한다.

2023-11-27

‘유엔기후변화협약 COP28’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연구본부장 11월 30일부터 12월 12일까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엑스포 시티에서 전 세계 200여 개 당사국 대표와 민간 분야 참여자 등 7만여 명이 참여하는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8)’가 개최된다.‘COP28’의 회의 구조는 전반부 이틀은 정상회의를 진행하고 후반부 이틀은 고위급 회의 및 각료급 회의를 진행하는 형태이다.그리고 공식, 비공식 협상 회의와 다양한 부대 행사가 2주 내내 병행해서 진행된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극심한 가뭄, 유례없는 집중호우와 산사태로 큰 피해를 보았고, 세계기상기구(WMO)가 지난달을 역사상 가장 더운 10월로 기록하게 되면서 기후변화대응 관련 지구 최대의 행사인 ‘COP28’에 더 큰 관심이 집중되었다.이번 ‘COP28’은 미-중, 러-우, 이-팔 등 전 지구적 대립과 분쟁이 격화되어 다자 협력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최된다. 또한 ‘COP28’ 개최국인 UAE가 화석연료인 석유의 대량 생산국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미국의 글로벌 기후리더십이 또다시 요동칠 수 있는 2024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개최된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이러한 비관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지난 11월 14일 미국과 중국은 ‘COP28’ 개최를 앞두고 재생에너지, 메탄, CCUS 같은 분야에서 협력을 위한 구체적인 합의를 하고 공동 성명을 발표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지난해 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서 개최된 ‘COP27’에서는 ‘개도국들의 손실과 피해’에 대응할 펀드를 만들자까지만 합의가 되었다. 그래서 이번 ‘COP28’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될 의제는 그 펀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도록 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정의로운 전환’과 관련한 포괄적 행동계획도 논의될 전망이다. 온실가스 감축과 적응 그리고 이를 위한 재원, 기술, 파트너십은 기본적인 의제로 계속 다루어진다. 이러한 배경으로 당초 ‘COP1’의 시작 때에는 지구온난화라는 환경문제로만 인식하였으나 탈화석연료, 정의로운전환 등이 계속추가되어 ‘COP28’은 환경, 경제,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대회로 진화하고 있다.‘COP28’은 2015년에 파리협정(COP21)이 채택이 되고, 첫 번째 낸 NDC(국가별감축목표) 목표 연도인 2030년까지 기간의 중간이 되는 시점으로 그간의 성과에 대한 범지구적 점검(GST)을 하기로 되어 있다. 특히 신규 석탄발전 종식, 메탄감축 노력 가속화, 신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효율성 강화등 에너지 전환 관련 국제적 합의가 진행될 것이다. 선진국의 개도국에 대한 1천억불 제공 공약 달성이 미진한 부분도 집중 다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한정된 미래의 기후재원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와 2030년 이후 새로운 NDC에 대한 지침도 논의된다고 한다.정부는 이번 ‘COP28’을 계기로 국내·외 화석연료 사업의 방향전환, 2035 NDC 준비, 정부예산배분 등에서 저탄소 경제로의 전환, 그린ODA 국가 브랜드화 작업을 집중 추진할 예정이다. 이에 맞추어 대구경북도 ‘COP28’에서 국가 어젠다의 지역화된 조치이행을 위해 세계 지방정부들과 협력이 필요하다.

2023-11-27

프랑스 유력紙가 혁신도시로 소개한 포항

프랑스의 유력 경제전문지인 레제코(Les Echos)가 최근 철강에서 배터리 산업으로 변신하는 포항의 활력 넘치는 모습을 소개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작은 어촌마을이던 포항을 인구 50만의 도시로 성장시킨 대기업인 포스코의 성장과 현재를, 그리고 새로운 도시 성장동력으로 배터리 산업을 유치한 포항시의 혁신적 활동상을 소재로 삼았다. 이강덕 포항시장의 인터뷰도 실었다.특히 레제코는 특화단지를 통해 배터리 밸류 체인을 만들어가는 포항의 변신이 프랑스 배터리 허브도시로 떠오르는 덩케르크와 유사하다고 소개했다. 덩케르크는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최근 80억유로(86억달러) 규모의 배터리산업 투자를 유치한 곳이다.레제코의 보도를 본다면 포항시는 철강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산업구조 재편에 비교적 성공한 도시로 평가됐다. 2030년까지 이차전지 분야 100억달러 유치라는 인프라 확대 측면뿐 아니라 발빠르게 산업구조를 혁신하고 있는 포항시의 역동성을 높게 평가한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많은 도시가 산업구조 혁신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직까지 성공했다는 도시는 드물다. 포항은 일찍 산업구조 재편에 공을 들여왔고 지금은 이차전지 특화도시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지속적이고 성장 가능한 행정과 추진력이 뒷받침돼야 하는 과제는 있다.포항시는 세계적 철강도시 미국의 피츠버그시를 벤치마킹한 적이 있다. 철강도시에서 금융, 의료, 교육 등의 4차산업 중심도시로 거듭나는 피츠버그를 롤모델로 삼자는 의견도 있었다. 피츠버그는 지역의 대학과 민간단체들이 총체적 협력을 통해 도시 재생의 신화를 창조한 도시다.포항은 포스코를 통한 철강도시로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도시기반도 탄탄하다. 환동해 중심도시로 성장하기에 매우 좋은 여건이다. 과학첨단도시, 관광문화도시, 철강과 이차전지의 산업도시로서 무궁한 잠재력을 보유한 도시다.프랑스 유력 경제지 보도를 계기로 포항의 저력을 발휘해 세계로 도약하는 면모를 갖춰가야 한다. 환동해 중심도시를 위해 착실한 준비가 필요하다.

2023-11-27

반갑지만은 않은 방어 풍년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겨울 생선이라고 하면 방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제철을 맞아 기름기가 잔뜩 오른 대방어회는 겨울철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다. 무와 함께 푹 쪄낸 방어찜도 빼놓을 수 없다. 유통 기술의 발달로 전국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본래 방어는 제주도를 비롯한 남쪽에서 주로 잡히는 생선이다. 따뜻한 바닷물을 따라 계절마다 회유하는 어종이기 때문이다.그런데 요즘 들어 동해안 전역에서 방어 풍년을 맞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장이나 포항 같은 동해 남부 지역은 물론이고, 한참 북쪽인 강원도 지역에서도 방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올해만 유별난 것도 아니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지난 2010년대 후반부터 방어 어획량에서 동해가 남해를 거의 따라잡았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동해의 평균 수온이 꾸준히 상승한 탓에 겨울이 되어도 방어가 남쪽으로 회유하지 않는 것이다.반대로 동해를 대표하는 어종인 살오징어 어획량은 크게 줄었다. 방어와는 반대로 차가운 바닷물을 좋아하는 살오징어가 주 어장이었던 동해 남부까지 내려오지 않게 된 탓이다. 2009년에 12만t이 넘게 잡혔던 살오징어는 작년(2022년) 어획량이 1.5만t에 불과했다. 서민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횟감이었던 오징어가 ‘귀하신 몸’이 된 지 오래다.몇 년 전부터는 아열대성 어종인 참치가 강원도 주문진 앞바다에서 잡히고 있다고도 한다. 낚시인이라면 쾌재를 부를지도 모르겠다. 제주도까지 가지 않고도 방어나 참치 같은 ‘대물’들을 노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어민들로서도 당장은 반가운 일일 수 있다. 채비를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겠지만, 어떤 어종이든 풍어를 맞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하지만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기후변화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복잡해서 예측이 매우 어려우며, 그 결과가 인간에게 이득이 될 가능성보다는 피해로 돌아올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우리가 쌓아 올린 문명은 최소 수 세기에서 수십 세기 이상 안정화된 기후 상태를 토대로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따뜻해진 바닷물 때문에 상어를 비롯해 맹독을 가진 문어나 해파리, 고둥처럼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해양생물들이 한국 연근해에 출몰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지난 여름 휴가철, 속초와 고성 등지에서는 상어를 막기 위해 해수욕장의 수영 구역에 상어 방지 그물을 설치하기도 했다.문제는 바다에만 있지 않다. 아열대와 열대 지역에만 서식하던 독충, 해충들이 수입 과일이나 채소, 목재 등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되어 퍼져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다. 몇 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붉은 독개미’ 유입 사건이 대표적이다. 기후변화는 농업과 임업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평균 기온 상승으로 경북의 대표 농산물이었던 사과 수확량이 급감한 일은 기후위기 문제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23-11-27

은행나무 메모리카드

강길수 수필가 11월 하순, 한낮에 보도를 걷는다.늦가을 거리 모습은 올해도 자연의 아이러니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보도 한쪽 학교 석축 위 울타리엔 장미꽃이 제법 많이 피었다. 그 아래 작은 나무들과 풀들이 여름날처럼 푸르다. 맞은 쪽 보도에 줄지은 은행나무는 노란 낙엽을 흩날리고 있다. 장미꽃과 은행 낙엽과 푸른 잎들이 뒤섞인 늦가을풍경이다.종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에 나무, 풀들은 올가을도 헷갈리며 어지러운가 보다. 기후의 난동(亂動)에 대처하기도 벅찬데, 곁을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마저 탁류로 뒤범벅되어 범람하니 식물인들 정신 차릴 수 있으랴. 늦가을의 어리둥절 어지러운 세상 풍경을 나무, 풀들이 온 누리에 방영하고 있다.보도 위의 은행 낙엽 하나를 집었다. 가장자리가 옅은 갈색이다. 예전과는 달리 색바랜 노랑이다. 문득, 낙엽이 은행나무가 겪는 삶의 모습을 그린 메모리칩으로 보인다. 얼른 낙엽 메모리칩을 마음의 컴퓨터와 연결한다. 곧바로, 은행나무가 바라본 우리 사회의 초상(肖像)들이 모니터를 채운다.군대 시절 꼭 이맘때, 야간훈련에 만났던 ‘북진통일로’가 나타났다. 하늘을 메운 둥근 늦가을 달을 쳐다보는 순간, ‘그리스도의 과제가 여기 있다’고 깨닫던 젊은 마음이 되살아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참상들이 사람의 눈물마저 마르게 한다. 먹기 어렵던 시대는 ‘식량 뺏기 싸움’이란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전쟁을 총알받이 서민들은 어찌 알아듣고, 살아내야만 할까.유튜브로 보았던 다큐멘터리 영화 ‘왜(歪) : 더 카르텔’의 충격이 파노라마 된다. 부정선거 재판에서 법과 양심, 상식마저 내팽개친 대법관들의 검은 실루엣이 앞을 가린다. 180일 법정 재판기일을 사보타주로 몇 배나 넘기고, 126개 선거소송 중 5개 선거구만 재판을 열었다. 재검표장에 나왔던 태산 같은 부정선거 증거물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선관위에 면죄부를 하사한 대법관들의 흑심이 요괴하다. 대법정 지킴이 정의의 여신상이 노하여 오른손 저울을 던져버릴 기막힌 사법부다.지난 총선에서 통계 법칙을 짓밟고, 빼앗아 부풀린 가짜 사전투표 수치로 거대 야당이 된 무리. ‘민주주의’니 ‘국민’이니 하는 립서비스로 국민을 꾀며, 의회 독재 광대놀음만 한다. 걸핏하면, 당국자들을 탄핵 겁박하는 위선이 하늘을 찌른다. 6·25 남침의 주범, 북한의 기만에 이용만 당하던 지난날의 ‘삶은 소대가리’도 어른거린다. 국민을 개, 돼지로 얕보고 수탈 대상으로 삼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은행잎 메모리칩이 말한다. ‘사전투표인 명부’를 국민이 볼 수 없는 대한민국이라고….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맞는가. 그렇다면, 사전투표자 수를 조작할 수도 있지 않은가. 부정 시비 있는 사전투표는 왜 하며, 본투표 5일 전에 할까. 사악한 자가 그 기간에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선거절차를 이래 놓고도 공명선거를 입에 담는가.은행나무가 본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것들뿐일까. 비록 어지러운 가을일지라도 부디 우리가 진실의 불을 밝혀, 나무 풀들도 함께 즐거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빈다.

2023-11-27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나

김진국 고문 국회만 보면 한숨이 나온다.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최강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암컷들이 설친다’라고 말해 당원권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최 의원 발언이 최근 문제가 됐지만, 여(與)고, 야(野)고, 평소 쏟아내는 말들이 거칠기 짝이 없다. 국민대표로서의 품격을 찾아보기 어렵다.이러니 정치가 잘될 리 없다. 정치는 ‘전부냐 빈손이냐’의 싸움이 아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의원도 일정한 유권자들이 선택했다. 모두 존중받아야 할 국민대표다. 그러니 정글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국민 의견을 골고루 반영하여 정리할 의무가 있다.그런데 요즘 국회는 자신이 대변하는 국민의 뜻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의견을 가진 정치인, 심지어 국민도 짓뭉개고, 제거하는 것이 임무인 양 움직인다. 정치가 아니라 승리 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사이버 전쟁터 같다.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 추구한다. 나라의 미래는 보지 않는다.더구나 총선을 4개월여 남겨둔 요즘 온통 선거와 자리 이야기다. 용산이나 정부에서 출마를 노리는 사람, 출마하는 사람의 빈 자리를 노리는 사람…. 대화도 하마평뿐이고, 어수선하다.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소는 정말 누가 키우나.국회 예산 심의는 더 한심하다. 민주당은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예산 심의에서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원자력발전 분야 예산 1천831억원을 깎았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신재생에너지 관련 예산은 4천500억 원이나 늘렸다. 이 정부와 이 예산으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지 걱정이다.예산안을 던져놓고, 다수당인 야당을 설득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정부도 대책이 없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어깃장을 놓는 야당도 답이 없다. 아무리 야당 대표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취임한 지 1년 3개월이 지나도록 만남을 거부하는 게 말이나 되나.이 대표가 재판받고 있어도 그렇다. 국민감정이 나쁘다고, 일본 총리를 안만나고, 북한 김정은 위원장을 외면하지는 않는 것 아닌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난다면 그게 무슨 정치인가. 국민의 이익을 최대한 반영해 국정을 이끌어야 할 수임자로서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법률안은 무조건 거부하고, 인사청문회는 무시하고 밀어붙였지만 이제 예산은 어떻게 할 건가.민주당이 깎아 놓은 예산도 기가 막힌다. 이율배반이지만 문재인 정부도 원자력 수출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도 직접 세일즈에 나섰다. 그런데 원전 수출 기반 구축 예산 1천112억 원, 원전 수출 보증 예산 250억 원을 깎아 버렸다. 당장 이집트·루마니아 등에서 따낸 원전 건설사업이 위험해졌다. 폴란드·체코 등에서 추진 중인 원전 수출 협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그뿐 아니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i-SMR)’ 기술 개발 예산 333억 원도 전액 없앴다. 민주당이 추진한 사업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원전에는 무조건 윤석열 딱지를 붙여 삭감한 결과다. 원전만이 아니다. 청년 취업 지원 사업도 윤석열 표는 모두 삭감했다. 이재명 표가 붙은 지역화폐 예산, 재생에너지 투자, 새만금사업 등은 늘려놓았다.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 문제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다. 원전은 많은 약점을 안고 있다.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재생에너지 비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옳은 방향이다. 그렇지만 재생에너지만으로 필요 전력을 충당하기는 어렵다. 매우 조심스럽게 조율할 문제다. 그런데 전문가들마저 진영으로 쪼개져 있으니 이성적인 토론이 안 된다. 찬반과 상호 비난뿐이다. 자기 이익이 걸린 전문가도 많다. 국민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선다.정치권은 더하다. 대화와 타협으로 미래를 논의한다면 정권이 바뀌어도 정책변화가 제한적이어야 한다. 국가 미래 전략의 큰 방향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선거 한 번 할 때마다 정책이 180도 뒤집히는 정부를 어떤 나라가 믿고, 협상하겠나. 미래를 위한 장기 전략은 외면하고, 선거를 위해 과거 정부 정책은 무조건 뒤집어버리기를 5년마다 반복한다. 적성국의 이간책이라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을까. 유권자라도 깨어있어야 한다.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11-26

편집자형 인재가 필요한 시기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때로 어떤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 언급한 책들이 읽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바쁜 생활에 허덕이는 현대인으로선 이렇게 가지치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책들을 만나면 반갑다. 대개는 남들의 독서일기에서 그런 기회를 찾아낸다. 5권 이상의 독서일기를 펴낸 장정일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남들의 독서일기는 아마추어 독서광에겐 일종의 ‘참고자료(reference)’이기 때문이다.주로 내게 그 대상은 독서광인 친구이지만 때론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이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대개 가지치기를 하는 내 마음은 ‘내가 모르는 걸 저 사람은 알다니’같은 질투다. 그러나 가끔은 사람이 궁금해서 그가 언급한 책을 읽기도 한다. ‘이런 책을 읽다니, 그는 이런 사람인가 봐’추측과 흠모가 더해지며 살살 고양이처럼 활자 뒤를 쫓아다닌다.이렇게 가지치기를 한 잘 정돈된 내용을 대하게 되었을 때 드디어 내게 필요한 지식으로 쉽게 저장되고 저장된 내용을 필요할 때 잘 꺼내어 쓸 수 있다.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편집자라 부른다. ‘편집자는 세상을 관찰하면서 그것을 질료로 새로운 세계를 창출해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독서광과는 다르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도 한다. 편집자란 세상을 읽어 내기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읽어내는 기준으로서 ’나만의 관심’ 곧 자기다움을 가져야 한다. 이 자기다움은 필요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방식의 개발로 발전된다. 그것이 ‘관점’의 바탕이 된다.“미세 조정에 능한 편집자, 타인의 지혜를 현명하게 빌리는 편집자, 균형감각과 열정을 갖춘 편집자, 저자를 이끄는 게 아니라 ‘이해시키는’ 편집자가 좋은 편집자다”기업에서도 누군가는 가지치기를 하여 가려져 있는 가치를 드러내고 중요한 일과 필요한 일을 구분하여 제시하기도 하는 편집자 역할이 필요하다. 이 맘때 각 기업에서는 2024년 목표에 따라 각 부서별 실행계획을 입안하는 시기이다. 이때 각 계획들이 경영목표나 시장의 상황, 조직의 특성과 무관하게 급조된 기획안들이 넘쳐 나기도 하는데 리더들은 편집자가 되어 중장기 회사의 비전을 정확히 읽어서 꼭 필요한 계획들은 남기고 불필요한 내용은 가지치기 하여 실행 과정에 나타날 시행착오를 줄여야 한다,회사의 편집자가 된다는 것은 독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쉽게 전달하는 것처럼 직원들이 목표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고 실행이 되었을 때 성공으로 나타난다는 체험이 되는 신뢰가 쌓여야 회사와 개인의 발전이 담보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공정간의 문제를 가지치기 하여 단순화 시켜 과제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 부문 간 흩어져 있는 문제를 결합하여 회사의 명운을 건 대형 프로젝트화 시켜 미래의 먹거리를 창출해 내야 한다.기업의 고도성장 시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중요하여 기술자 위주로 스카우트 경쟁이 치열하였다면 이제는 가려져 있는 문제를 가지치기하고 드러내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문제를 만들어 내는’ 편집자형 인재가 기업에 꼭 필요한 시기이다.

2023-11-26

암컷과 젖소는 죄가 없지만

유영희 작가 2007년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BBK를 설립했다는 동영상이 나오자, 나경원 대변인이 주어가 없었다고 해서 온 국민이 국어 공부를 한 적이 있다. 요즘 그와 비슷한 언어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암컷과 젖소 이야기다. 암컷은 지난 19일 더불어민주당 최강욱 의원이 민형배 의원 북콘서트에 참석해서 한 말이다. 최강욱 의원은 동물농장에도 암컷들이 나와서 설치는 건 없다면서, 암컷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설치는 암컷을 암컷이라고 부른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에 비난이 일자, 여성비하 발언이 아닌 동물에 비유한 표현일 뿐이라고 해명하였다.젖소는 23일 국민의힘 김성원 의원(동두천, 연천) 보좌관이 SNS에 올린 글에 나온 말이다. 손수조 리더스클럽 대표가 그 지역구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데, 보좌관이 자신의 SNS에 개나 소나(앗, 젖소네) 지역을 잘 안다는 사람이 넘쳐난다고 쓴 것이다. 손수조 대표가 항의하자, 개 이모티콘 다음에 소 이모티콘을 치는데 젖소길래 그냥 ‘앗 젖소네’라고 덧붙인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김성원 의원 측에서도 그 글 어디에도 손수조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며 손 대표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모두 옹색한 변명이다.화용론이라는 언어학 분야는 상황과 맥락에 따른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화용론 연구 주제 중 하나인 함축은 발화된 것에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을 말한다. 발화에 직접 나타나진 않지만,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여러 증거를 통해 발화의 의미를 생각해낼 수 있다.암컷 발언의 경우, 최강욱 의원의 발언 직전에 박구용 교수가 현 정치 상황을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 빗대어 말했고, 최강욱 의원 역시 이를 받아서 동물농장조차 암컷이 설치는 경우가 없었다고 했으니, 이는 현재 상황이 동물농장보다 못하다는 말이다. 그가 변명으로 내놓은 동물에 빗댔다는 말은 동물이 아닌 사람을 겨냥했다는 뜻이다. 젖소 발언 역시 이미 손수조 대표에게 출마 포기를 종용한 후에 나왔고, 해당 지역구 출마 도전자가 손수조 한 명뿐이므로 다른 의미를 가질 여지가 없다. 그러니 암컷과 젖소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개만도 못하다고 하면, 듣는 개가 기분 나쁘다는 말이 있다. 암컷과 젖소는 죄가 없지만, 그가 누구든 간에 여성을 가리켜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발화자의 인격을 떨어뜨리는 막말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항의와 반박에 대응하는 태도다. 그들의 변명은 비겁한 궤변에 지나지 않고, 국민의 합리적 추론 능력을 무시하는 오만한 태도이다. 따지고 보면, 진정한 사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는 하다.그렇다고 정의당 류호정 의원처럼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최강욱 의원은 인간이 되긴 틀렸다고 하거나 북콘서트 한다면서 이런 이야기나 하는 것은 한심해 죽겠다고 비난하는 방식 역시 정당 정치인의 품격에 맞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인물을 보고 제대로 투표하는 품격 있는 국민이 되어야겠다고 굳게 다진다.

2023-11-26

원로들의 육성으로 엮어낸 포항 이야기

김도형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편집자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 연재가 3년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이 연재는 지역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18명의 원로로부터 삶의 발자취를 들어보고 글과 영상으로 남기는 작업이었다. 원로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근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었으며 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 문화, 여성, 체육, 의료, 봉사 등의 분야에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분들이다. 원로들의 삶을 씨줄로, 지역사를 날줄로 삼아 그동안 우리가 눈여겨보지 못했던 지역의 뿌리와 무늬를 입체적으로 복원해보는 것이 연재의 취지였다.지역 작가 11명은 부모님뻘 원로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대담 형식으로 기록했으며 원로들의 사진 앨범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진을 골라냈다. 원로 중 최고령자는 이봉식 선생으로 1931년생이며 다른 원로도 대부분 80대이다. 작가들은 원로들의 연령을 감안할 때 이 작업이 그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깨가 무거웠다. 실제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도중에 원로들의 건강이 악화돼 작가들이 긴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원로들의 적극적인 협조 덕분에 작업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고 200자 원고지 2천 장이 넘는 글과 다양한 사진이 지난 2021년부터 올해까지 3년간 총 100회에 걸쳐 경북매일신문에 실렸으며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포항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도시다. 근현대로 한정해서 봐도 그렇다. 일제강점기에는 지역의 많은 자원이 수탈당한 아픔이 있으며 6·25 전쟁 때는 폐허가 되었고 1960년대 후반에 포스코가 들어오면서 도시의 지도가 바뀌었다. 산업 및 인구 구조, 도시 공간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큰 변화의 물결이 계속 몰려온 것이다. 문제는 격동의 근현대사를 건너면서 지역사를 생동감 있는 기록으로 남기는 시도가 충분치 않았다는 것이다. 도시는 급격하게 바뀌었으나 역사 자료는 충분치 않으니 도시의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지역에 인문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대학이 사실상 부재한 탓이다. 안동과 진주, 목포, 군산 같은 도시는 포항보다 규모가 작지만 국립대학이 있고 여기에 인문학 학과가 있다. 이 학과나 관련 연구소에서 지역학을 연구함으로써 지역의 역사, 정체성, 가치 등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포항의 역사를 어떻게 살려내고 계승할 것인지는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그런 맥락에서 ‘원로에게 듣는 포항 근현대사’는 지역사 복원의 한 방법으로 의미가 있으며, 지역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겠다.이 연재를 통해 포항 사람도 몰랐던 포항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면서 많은 독자가 지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보람 있는 성과였다. 3년간의 여정에 함께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지역사를 정리하는 시도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2023-11-26

경북도의 디지털 전환 혁신에 거는 기대

지난 9월 정부는 비상경제 장관회의에서 지방자치단체와 민간 등과 협업해 오는 2027년까지 디지털 제조혁신기업 2만5천개를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다. 지금 세계시장은 4차산업 혁명의 주도권을 놓고 주요 국가 간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중심에 디지털화된 콘텐츠와 서비스가 있다. 정부가 디지털 혁신기업을 대규모 육성하고자 한 것은 대한민국을 디지털 산업의 세계 중심지로 우뚝 서게 하겠다는 것이다.미래산업을 선점하기 위해선 디지털 전환 혁신은 필수다.경북도도 이런 국가적 흐름에 따라 경북도 디지털 전환 기본구상을 지난 5월 발표한 바 있다.3조2천600억원을 디지털 분야에 투자하기로 하고 4대 추진 전략과 87개 세부 과제를 발표한 것이다. 기반구축, 생태계 조성, 서비스 확산, 거버넌스 구축 등이 주요 전략이다.지난주 포항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경북 디지털혁신 비전 선포식도 경북도의 디지털 전략을 공유하는 자리다. 경북도는 도청 신도시에 경북형 클라우드데이터센터 착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디지털혁신에 나선다고 이날 밝혔다. 포항에도 대규모 디지털 글로벌데이터센터를 건립해 경북을 AI, 빅데이터 등 첨단지식 서비스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겠다고 했다.인터넷을 기반으로 이뤄지고 있는 디지털 경제는 지금 세계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계 주요국은 디지털 기술을 앞세워 네트워크 방식을 통해 생산, 소비, 유통 등 전분야에서 걸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이런 시장 흐름에 타시도보다 앞서 경북도가 디지털 산업 육성에 앞장선 것은 바람직하다. 경북도는 디지털 전환 혁신이 시대적 흐름일뿐 아니라 지방이 안고 있는 인구소멸과 청년인구 유출과 같은 난제를 풀 대안으로도 생각하고 있다. 첨단지식센터 등을 운영 유지함으로써 인재양성과 인재유입의 효과를 기대한다는 뜻이다.경북도가 구상하는 디지털 전략이 지역의 산업과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획기적 전기가 되길 기대한다.

2023-11-26

푸른색 낙엽과 파랑돔

우정구 논설위원 만추(晩秋)의 시간인 지금쯤에는 노랗거나 붉은색으로 물든 단풍이어야 할 낙엽이 푸른색으로 떨어져 인도를 가득 메운 사진들이 온라인 상에 올라와 화제다.일부 네티즌들은 “기후변화가 언젠가는 곱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없게 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글까지 함께 올렸다.단풍은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잎에 있는 영양소와 수분을 나무가 빨아들이고 잎과 결별할 때 땅에 떨어진 것이 바로 낙엽이다.그런데 이상 기온으로 나무가 엽록소를 다 파괴하지 못해 잎이 푸른색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올 가을은 이런 푸른색 낙엽이 유난히 많아 네티즌 사이에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바다 속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최근 학계에 보고됐다. 국립생물자원관은 울릉도 연안에 대표적 열대성 어류인 파랑돔이 작년보다 10배 이상 늘었다는 보고를 했다. 베트남이나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 등지에서나 볼 수 있는 검은줄꼬리돔도 발견됐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로 물속 온도가 높아져 생긴 현상이라 말했다.기상청에 따르면 11월 대구의 최고 기온은 27도, 최저 기온은 17도를 기록했다. 평년보다 10∼15도가 높다. 사람들이 소매 차림으로 다녀도 전혀 어색치 않을 날씨다. 이달에는 또 비까지 자주 내렸고 중순 이후는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등 심한 기후 변동이 있었다.지구촌의 이상 기후가 생태계 근원까지 흔들고 있는 현장을 지금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울릉도 연안의 파랑돔 등장이 반갑지도 않고 푸른색 낙엽을 보며 만추의 여유를 즐기기에도 부담스럽다. 심각한 자연파괴 현상이 주는 충격 때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11-26

자유에 관한 짧은 생각

김규종 경북대 교수 ‘자유(自由)’를 말할 때 나는 한자(漢字)를 가지고 먼저 생각한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말미암는다는 것은 원인 제공자가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자유란 나로 인해 생겨나는 온갖 사건과 인연의 원인과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는 말을 뜻한다. 남에게 구속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의 자유는 좁고 단순하다. 그것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통찰하고 싶은 것이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말을 빌려서 자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원하는 만큼 처넣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조르바는 버찌가 무척 먹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엄청난 분량의 버찌를 사다가 배가 터질 만큼 쑤셔 넣는다. 그리고 먹은 버찌를 모조리 게워낸다. 그리고 난 후에 그는 비로소 버찌로부터 놓여난다. 조르바에게 자유란 처넣고 토해낸 다음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만화의 주인공 같은 조르바는 시종일관 경험론자다. 그가 토로하는 뱀과 새의 비유는 민중과 지식인을 은유한다. 온몸을 대지에 밀착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뱀은 경험으로 배우고 실천하는 민중이다. 반면에 텅빈 공중을 휙, 하고 날아가는 지식인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다. 조르바는 그런 지식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대하는 20대 청춘에게 조르바는 경이로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나는 조르바와 생각이 다르다.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이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21세기 과학기술문명이 불러온 혁명적 변화를 그 이전의 경험과 인식체계로 수용함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인이든 아니든 어느 정도 책을 읽음으로써 최소한의 지적·정신적 소양을 축적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에 관한 그의 경험칙은 어느 정도 교훈적이다. 자신의 한계치를 처절하게 극복함으로써 도달하는 경지!자유는 애착(愛着)을 버림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인과율의 출발지점과 최종지점의 책임을 자신에게 부여하되, 인과율 자체의 성립을 원천 봉쇄한다면 더욱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속박되는 까닭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원한다. 만일 그런 마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유나 속박, 원인 제공자나 결과 따위는 애초부터 무의미하다. 문제는 애착하고 욕망하는 마음이 언제나 우리를 사로잡는 데 있다.아끼고 사랑하며 갈망하는 마음과 작별하는 일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은산철벽(銀山鐵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풍미하는 유튜브를 볼라치면 돈과 건강, 인생의 행복과 정신적 안녕에 관한 내용으로 차고 넘친다. 나이 든 사람치고 노후(老後) 자금과 육체적·정신적 건강 그리고 무병장수에 무심한 사람이 있는가?! 문제는 그런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돈과 건강과 장수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이다.나이 들어서도 품위 있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인간으로 남고 싶다면, 애착과 거리 두면서 자신을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게 하는 여유로움을 가질 일이다.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다!

2023-11-26

‘경북 직업계高’ 전국적 인기 끈다니 반갑다

최근 대졸취업난이 심화되면서 직업계고(마이스터고, 특성화고)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 경북도교육청이 지난주 2024학년도 전기 고등학교 원서접수를 마감한 결과, 타 시·도에서 경북으로 지원한 학생이 1천343명(22.56%)이나 됐다고 한다. 청년인구 수도권 유출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경북도로서는 가뭄 속의 단비같은 반가운 소식이다. 교육당국이 오래전부터 다양한 산업분야(반려동물, 조리, 항공, 산림, 철도) 수요에 맞춘 학과개편을 한 덕분이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최근 발표한 2023년 직업계고 졸업자 취업통계조사 결과, 취업률이 55.7%로 높게 나타났다. 취업 대신 대학진학을 선택한 학생은 47%다.고등학교 전기입학 전형은 마이스터고와 특성화고 같은 직업계고와 예술고, 체육고가 대상이다. 경북도교육청 관내에는 모두 6천234명이 지원(5천605명 모집)했다. 타 시·도에서 직업계고에 지원한 학생은 특별전형 820명, 일반전형 523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97명이 늘어났다. 올해 처음 외국학생을 뽑은 한국해양마이스터고를 비롯한 8개교는 인도네시아, 태국, 몽골, 베트남 출신 유학생들이 49명 지원했다.최근 비수도권 인구소멸 문제가 최대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청년인구 유치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직업계고를 졸업한 유능한 인재들이 그 지역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해 선순환 구조를 이루며 사는 것은 국가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경북도처럼 직업계고가 지속적으로 학생들을 유인하려면, 무엇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기업들이 급여가 낮고 근무여건도 열악하면 학생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다. 직업계고도 계열에 따라 취업률 차이가 큰 만큼, 경북지역 특화 산업(모빌리티·반도체·이차전지 등)과 연계한 학과 구조조정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교육당국이 잘하고 있겠지만 학교와 지자체, 기업이 산학 협력체제를 강화해서 실무중심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3-11-26

인류사에서 종교는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왔을까?

박진홍부국장 인류사에서 종교는 어떻게 시작해, 어떤 모습으로 발전해 왔을까?600만년전 유인원에서 분기된 인류는 이후 수백만년 동안 본능적인 일상을 영위하다 7만년전쯤 인지혁명을 이루면서 종교를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인지혁명을 통해 상상력을 갖게 된 인류는, 원시종교를 통해 당시 혈연·지연 집단의 위계질서에 초월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원시종교로는 주술사(샤만)와 주술이 중심인 ‘샤마니즘’과 혈연·지연집단이 동·식물 등을 공통 조상 내지 결합 관계라고 믿고 숭배하는 ‘토테미즘’이 있다.또 ‘세상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이를 숭배하는 영혼신앙 ‘애미니즘’이 있다.영국의 인류학자 E.B 타일러는 1871년 저술한 ‘원시문화’에서 ‘원시인들은 꿈과 죽음에 대한 경험을 통해, 영혼이 있다고 여겼다’면서 ‘애미니즘 사고는 종교의 기원인 동시에 근본 원리’라고 주장했다.1879년 스페인 북부지역에서 발견, 구석기 후반 BC 1만3천년쯤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당시 ‘사냥감이 많이 잡히길 바라는 주술적 행위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벽화 모델은 들소와 사슴, 멧돼지 등이었다.인류는 1만2천년전쯤 농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 등의 농업혁명을 이루면서 원시종교 역시 혁명을 맞게 한다.구석기시대 인류는 ‘애미니즘 사고에 따라, 동·식물 등을 우리와 동등한 지위와 자격’으로 여겼다.당시 인류는 ‘영혼이 있는 동·식물 등을 사람과 교감하는 대상, 즉 세상의 공동의 주체’로 대우했을 것이다.하지만 농업혁명 이후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인류는 가축이나 농작물 등을 우리와 대등한 관계에서 소유물로 격하시키는 한편 상상 속의 신(神)을 종교적 카운트 파트너로 선택하게 된다.인류의 종교 무대에 ‘풍요의 신’이나 ‘하늘의 신’, ‘의약의 신’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 것.유발 하라리는 저서 ‘사피엔스’를 통해 ‘농업혁명 이후 인간은 신과 동·식물 등의 중간 매개 역할을 자처하게 된다’면서 ‘이후 인류는 동·식물을 지배하는 대신 신에게는 헌신하는 상상의 법적 계약 관계를 갖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이때부터 인류는 지구 생태계에서 절대자로 격상된다.그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지금으로 부터 5천500여년전.메소포타미아에서 세계 첫 문명 등이 발현한 후 왕국 등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체제 권력과 권위를 보완’해주는 울타리 같은 존재가 필요해진다.이때 다신교의 초월적인 신들이, ‘왕 등의 권력을 인정하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체제 유지에 많은 역할을 하게 된다.사실 현대에 다신교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유발 하라리는 “지난 수천년간 일신교에 세뇌 당한 인류가, 다신교를 무지하고 유치한 우상숭배로 본다”면서 “그것은 다신교에 대한 부당한 고정관념”이라고 지적한다.다신교는 개방성과 다양성, 폭넓은 종교적 관용 등을 가졌기 때문에, 인류사에서 극단적인 종교 갈등인 최소한 ‘이교도 처형’은 없었다.다신교였던 과거 로마·이집트·아즈텍제국 등의 경우 피정복민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대신 그들의 종교를 수용하는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였던 것.다시 세월이 흐른 후 ‘우리의 신만 유일신’이라는 일신교들이 인류사에 등장한다.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이 대표적으로 보인다.이들 일신교는 보편적인 가치 등을 내세워 세계적 종교로 크게 성장하며 현대까지 확고히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일부 역사학자들은 2천여년전 석가모니와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 등 세계 4대 성인 탄생을 즈음해 일신교 등 종교와 철학이 본격 등장한 이유를, ‘철기문화’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3천여년전 히타이트제국의 철기문명이 서서히 확산된 후 인류의 잉여 경제력은 매우 급증했다.이에 고도화된 사회 속에서 경제적 여유가 생긴 반면 생존 전쟁은 치열해지자, ‘생과 사’를 다루는 종교·철학에 대한 ‘인류의 욕구’가 분출됐다는 것.현대에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족주의, 인본주의 등을 종교로 보는 시각도 있다.인본주의는 인간을 신성시 하는 인류 중심주의 종교로, 자본주의는 현대에 가장 성공한 종교로 보기도 한다.과거 수천년 동안 종교는 인류를 분열 시키고 차별하는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반면 종교가 갈라진 인류를 통합시키는 매개체 역할을 해 온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과학과 종교’ ‘진화론과 창조론’, ‘이성과 감성’등은 인류의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로 보인다.

2023-11-26

단정하고 아름다운 배웅

두루미 날아간다지인의 모친상에조의금 오만 원 담아 두루미 날아간다늦가을 슬픈 표정은상가에 다 모이고발인은 내일모레장지는 하늘공원목깃이 새까매진 다저녁 산마루 위울면서 조문을 가는희고 빈 봉투 하나―고영민,‘부의 봉투’(‘가히’ 가을호, 2023)여기 늦가을 슬픈 표정이 상가에 다 모여 있다. 대저 “생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한 존재의 소멸은 참으로 사람을 유정(有情)하게 한다. 상가에 모인 조문객들의 슬픈 울음이 내 안에서도 일어나는 듯하다. 이 시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실경(實景) 속의 주인공이나 된 것 같다. 고영민(1968~) 시인의 ‘조의 봉투’가 그리는 풍경이 그렇다.이 시는 한 마리의 두루미로 시작된다. 죽음의 슬픔을 조문의 풍경으로 그려내는데 그 특정한 경험을 두루미가 견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두루미일까? 두루미는 우리나라 휴전선 언저리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다시 러시아에 있는 아무르강으로 떠나는 철새다. 죽음이 거느리는 의미의 본질을 제목인 ‘조의 봉투’가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제 두루미의 모습은 몸뚱이가 희고 목덜미와 다리는 검고, 날개에도 검은 깃털이 있다. 시에서 “다저녁 산마루”를 “목깃이 새까매진”으로 묘사하며 사실적 이미지를 심상의 풍경으로 병치하고 있다. 여기서 ‘새까매진 목깃’이란 조문 시 매는 검은색 넥타이를 비유한다.이 시에서 ‘빈 봉투’ ‘두루미’는 같은 자격임을 알 수 있다. 제목 ‘조의 봉투’라는 한 대상이 다른 대상 ‘두루미’ ‘화자’라는 대상들과 포개지며 의미론적 자질을 성공적으로 부여하고 있다. 부고장을 받고 “조문을 가는” 두루미라는 존재는 ‘조의 봉투’이고 동시에 조문을 하는 화자 자신을 상징하기에 이 대상들이 주는 효과는 그림처럼 선명하다. 또한 “조의금 오만 원” “발인은 내일모레” “장지는 하늘공원”이 주는 구체성은 시적 은유와 현실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게 한다. 우리가 아는 고영민 시인이 주는 시의 질감이 그렇다. 일상의 진정성을 담담한 어조로 풀어내는 방식은 어느 때나 편안히 등을 기댈 수 있게 한다. 이희정 시인 하지만 고영민 시인에게 이 시는 색다른 시편일 수 있겠다. ‘문학의 경계란 무엇이고, 어디까지인가’라는 시험지에 응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등단 장르가 아닌 정형시의 형식에 맞추어 쓰였기 때문이다. 정형시를 전문으로 쓰지 않는 시인이 처음으로 썼다고 해서 특별한 일은 아닐 테지만, 장르의 특성이 주는 작법은 그 방식이 사뭇 다르기도 하기에 시인에게 있어 이 작품은 조금 주의가 필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혹자는 자유시는 펼쳐서 그리는 회화에 가깝고 정형시는 최대한 깎아내는 조각에 가깝다고도 그 차별성을 설명했다. 한 시인이 오랫동안 체화되었던 방식을 벗어나 다른 방식을 대면했을 때 오는 당혹감이 있었을 법하다. 형식 면에서도 지켜야 하는 글자 수와 제한된 보법이 있기에. 그럼에도, 시인은 출제자의 의도를 탁월한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것은 현대정형시는 예전의 고시조와는 다르며 대부분 감상자가 느끼는 차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한국화와 서양화가 변주되고 있는 것처럼.요약하면, 시의 장면은 두루미로 시작해서 희고 빈 봉투로 그림처럼 마무리된다. 세상을 떠나는 망자에게 바치는 마지막 인사가 이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가 택한 두루미는 피상적인 오만 원의 조의금을 담고 있지만, 가없이 단아한 인사로 배웅하고 있다. 그래서 한 생의 무게가 그 슬픔보다 존귀하게 느껴진다.“울면서 조문을 가는 희고 빈 봉투 하나”

202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