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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국민의 근심이 된 정치

국민의 ‘희망’이 되어야 할 정치가 ‘근심’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막장 권력투쟁, 사리사욕 정치, 아사리판 선거는 한국 정치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국민은 대선 때마다 ‘이번에는 혹시’하고 기대해보지만 결과는 언제나 ‘이번에도 역시’였다. 정치인들의 생각이 구태의연한데 정치가 달라질 수 있겠는가? 권력투쟁에 일그러진 정치인들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집권을 위한 감언이설(甘言利說)은 갈수록 교활하다. 평소에는 편 가르기를 일삼다가 선거 때는 통합의 화신처럼 말하고, 평소에는 독선을 고집하다가 선거 때는 민주주의자로 둔갑한다. 카멜레온 같은 변신 정치는 노회(老獪)한 정치꾼들에게 식은 죽 먹기다. 이들의 선거유세는 마치 공자가 부활한 것 같은데, 지금까지의 정치행태를 불 때 가소롭기 짝이 없다. 후보들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된 과거’부터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당과 이재명 후보에 대한 우려는 무엇인가? 민주당은 이재명 일극 체제이며 정당민주주의는 죽었다. 민주당은 이재명을 구하기 위해 탄핵과 특검으로 행정부를 무력화하고, 사법부를 겁박해서 삼권분립을 형해화(形骸化)했다. 대법원이 이재명 사건에 유죄취지의 파기환송을 하자, 민주당은 대법관 청문회와 대법원장 특검으로 사법부를 협박하는 한편, 이재명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입법들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깨끗한 법정’과 ‘사법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민주당의 이재명 후보가 ‘절대 반지의 제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합리적 추론이 아닌가? 액튼 경(Lord Acton)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경고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한편 국민의힘과 김문수 후보는 어떤가? 당명은 ‘국민의 힘’이지만 현실은 ‘국민의 짐’이 되고 있다. 권력에 줄 서는 ‘웰빙 보수’는 민심을 모른다. 친윤이 주도한 후보 교체 쿠데타의 실패로 당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정치경험이 전혀 없는 윤석열을 영입해서 위기를 자초하더니 또다시 한덕수를 영입하려다가 사분오열되었으니 도대체 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게다가 김문수 후보는 보수혁신과 중도 확장에 소극적이고,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탄핵을 공산국가에 비유하는 등 여전히 극우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도층과 개혁보수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대선은 필패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낡은 보수에 둘러싸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개혁보수의 젊은 비대위원장 김용태의 모습이 처연하다. 이처럼 거대 양당과 후보들의 정치행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권력에 눈이 멀어 정의를 말하면서 정의를 짓밟고, 국민을 말하면서 국민을 배신하는 표리부동의 정치는 대선 이후가 더 걱정이다. 부디 차기 대통령은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괴물 같은 권력’이 되지 않으려면 목에 힘을 빼고 겸허한 자세로 비판과 고언(苦言)을 경청해야 한다.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종말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를 바란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2025-05-26

고발전 난무…대선막판 진흙탕 싸움되나

대선을 일주일여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양당의 선거전이 격해지고 있다. 이재명·김문수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면서, 상대 후보에 대한 반감을 극대화해 판세를 유리한 구도로 만들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양당은 2차 TV토론회를 마치고 서로 김문수(국민의힘)·이재명(민주당) 후보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토론 현장에서 오간 진흙탕 공방이 형사고발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2차 토론에서 김 후보는 모두발언부터 ‘가짜 총각’, ‘검사 사칭’을 거론하며 이 후보를 공격했고, 이 후보는 김 후보의 ‘소방관 갑질’ 논란을 거론하며 응수했다. 민주당이 25일 고발한 내용은, 김 후보가 지난 24일 경북 상주 유세 중 한 유권자로부터 문경 사과 한 바구니와 상주 곶감 한 상자를 받고, 김천역 유세에서 김천 특산물 한 상자를 받았다는 것이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유권자로부터 불법으로 물품을 받았으니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다. 국민의힘 네거티브 대응단도 이날 이 후보가 ‘HMM 부산 이전’, ‘일산대교 통행료 무료화’, ‘커피 원가 120원’ 등의 발언이 허위 사실 공표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라며 경찰에 고발했다. 국민의힘은 “이 후보가 당선을 목적으로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고 했다. 이재명·김문수 후보의 지지율 격차는 최근 한 자릿수로 좁혀지고 있다. 지난 24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는 이재명 후보 46.6%, 김문수 후보 37.6%로 두 후보 지지율 격차가 9%p로 좁혀졌다. 가상 양자 대결 조사에선 이 후보 51.1%, 김 후보 43.9%로 7.2%p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오는 28일부터 여론조사 ‘깜깜이(공표금지)’ 기간에 들어가면 네거티브 공세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네거티브전의 일종인 흑색선전과 인신공격은 유권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하면서 올바른 후보 선택을 가로막는 최대의 적이다. 양대 정당과 후보들은 남은 선거운동기간 만이라도 네거티브 유혹에 빠지지 말고, 유권자에게 정책과 비전으로 수권능력을 심판받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25-05-26

자랑할 건 ‘여권 파워’가 아니다

외국을 여행하는 사람의 국적과 신분을 증명하고, 방문하는 국가에 자국민의 보호를 당부하는 문서. 여권(旅券)이다. 그 여권으로 비자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지를 가늠해 이른바 ‘여권 파워’라고 부르는 모양. 최근 한국 여권의 ‘힘’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가 하나 나왔다. 영국 런던에 자리한 글로벌 시민권 및 거주 자문회사 헨리&파트너스는 ‘2025 헨리 여권 지수’를 발표하며 한국과 일본이 공동 2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헨리 여권 지수’는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국가의 수가 많을수록 높은 순위를 준다. 국제항공운송기구의 데이터가 조사의 토대다. 이 조사에서 여권 파워가 가장 강한 국가는 싱가포르로 드러났다. 싱가포르 여권 소지자는 비자 없이 193개 나라를 방문하는 게 가능하다. 한국과 일본의 여권으로는 190개 나라를 무비자로 여행할 수 있다. 해외 관광이 보편화된 시대이기에 나쁜 소식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한국 여권 파워는 세계 2위”라고 외치고 다니는 건 좀 낯 뜨거운 일인 듯하다. 왜냐고? 이어지는 ‘헨리 여권 지수’ 순위를 보자.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여권으로도 비자 없이 189개 나라를 여행할 수 있고, 오스트리아,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스웨덴 여권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나라가 188개다. 한국과 겨우 1~2개 국가 차이. 무엇이건 자화자찬이 과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국가가 많은 걸 자랑할 게 아니라, 여행자로서의 매너를 잘 지키는 게 진정한 자랑거리가 아닐지.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6

구미 아시아육상대회에 시도민의 관심을

오늘부터 31일까지 구미에서는 2025년 아시아 육상경기선수권대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서울과 2005년 인천에서 각각 개최된 바 있는 이 대회는 20년 만에 구미에서 다시 열린다. 2022년 인구 500만명의 중국 샤먼시와 경합 끝에 경북 구미시 유치가 확정됐다. 자본과 인프라 등에서 샤먼시보다 불리했지만 체육 시설의 집중화와 접근성이 앞서고 특히 팬데믹 상황에서 한국의 대응 능력 등 안전과 신뢰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다. 또 삼성과 LG, SK실트론 등 글로벌 대기업이 소재하고 있고,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대표 산업도시란 강점도 대회를 유치하는 데 큰 힘이 됐다. 국제대회란 나라와 도시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면 도시의 국제적 위상도 올라간다. 국제적으로 도시가 가지는 신뢰의 가치가 높아지면 도시가 가져올 이익 또한 크다. 반도체 등 대기업이 포진하고 있는 경북 구미시로서는 이런 위상 제고가 기업의 시장 확대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 도시의 발전을 이루는 배경이 된다. 이번 대회에는 43개국 선수단과 임원 등을 포함해 2000여 명이 참가한다. 직전대회인 방콕 때보다 규모만 두 배 수준이다. 이번 대회 참가 선수들 가운데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선수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 세계 최고 높이뛰기 선수인 우상혁을 비롯해 파키스탄 육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남자 창던지기의 아르샤드 선수도 온다. 중국의 포환던지기 강자인 송지아위안 등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이 내놓을 대회 성적도 관심거리다. 그러나 당초 기대했던 대회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예상 밖이다. 예상치 못한 대통령 선거가 갑자기 치러지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선거에 쏠려있기 때문이다. 선거 분위기에 휩싸여 20년 만에 찾아온 아시아육상대회가 빛을 못낼까 걱정이다. 기초단체 개최는 구미시가 아시아 최초다. 경주 APEC 대회를 앞둔 대규모 국제대회란 점에서 행사의 붐업이 필요하다. 내 고장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시도민의 관심과 응원이 있길 바란다.

2025-05-26

비호감은 뒤로 숨는 게 후보를 돕는다

선거는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다. 그런데 모두 마음에 안 들어, 그나마 덜 미운 이를 고를 때도 있다. 최근 우리는 그런 선거를 많이 했다. 비호감 선거다. 지난 대통령 선거가 그랬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민 주당 이재명 후보 모두 호감도보다 비호감도가 컸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10일 유세에서 “정치는 우리가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으면 상대방이 자빠진다.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을 인용했다. 국민의힘 당권파가 마음대로 후보를 만들려다 실패한 일을 꼬집었다. 과거에도 이런 사례는 무수하다. 2004년 열린우리당(현 민주당) 정동영 의장 은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그분들은 집에서 쉬셔도 되 고…”라는 말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멸 위기였던 한나라당이 121석으로 살아났고, 200석을 넘보던 열린우리당은 152석에 그쳤다. 그 뒤 대통령 선거에서도 정동영 후보는 참패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두 번이나 다 이겼다고 생각한 대선을 망쳤다. 나중에 김대업이라는 사기꾼의 공작으로 결론이 났지만, 아들의 병역 회피 의혹이 만든 ‘비호감’ 탓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자유한국당은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국민의 분노 속에서 선거를 치렀다. 제대로 끊어내지 못하고, 정권을 갖다 바쳤다. 이재명 후보가 24일 비법조인도 대법관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추 진하는 데 대해 “섣부르다”라며 제동을 걸었다. 자신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대법원을 공격하던 이 후보도 여론의 반발을 의식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칠 수 있다. 최근 여론 흐름이 심상찮기 때문이다. 50%를 넘어서던 지지율이 내려앉고, 김문수·이준석 후보가 상승세를 탔다. 이 후보의 방탄복이 테러에 대한 동정심보다 ‘방탄 입법’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부각했다. 삼권 장악과 독재 위험을 경고했다. 차기 요직을 둘러싼 입소문이 오만함으로 비쳤다. 그러자 이 후보도 긴장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 21일 ‘부정선거, 신의 작품인가’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했다. 탄핵 이후 첫 공개 행보다. 그는 비상계엄의 명분 중 하나로 ‘부정선거’를 꼽았다. 이날 행보는 비상계엄이 정당하다는 무언의 시위로 비쳤 다. 그의 옆에 이영돈PD와 비상계엄을 ‘계몽령’이라 주장하던 전한길 전 역사 강사가 앉은 사진을 공개했다. 윤 전 대통령에 대해 엉거주춤한 국민의힘의 대선 전략에 비상계엄이라는 부담을 다시 한번 더해줬다. 그는 지난 11일 SNS에 “이제는 마음을 모아 주시라”면서 지지층 결집을 호소했다. 그가 움직이는 게 김문수 후보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탄핵에 반대하던 시위대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 팬덤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윤 전 대통령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들이 이재명 후보를 찍을까. 그가 입을 열수록, 대중 앞에 나설수록, 비상계엄의 트라우마만 생생해진다. 민주당 측에 선 방송 패널들이 이재명 후보의 문제가 지적될 때마다 “그래도 비상계엄, 내란 세력만큼 나쁘겠느냐”라고 방어막을 친다. 윤 전 대통령 측의 착각이다. 지난 총선에서도 그랬다. 윤 전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라고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강서구청장 후보를 마음대로 뒤집어도, 국민의힘 후보를 마음대로 조작해도, 수사받고 있는 피의자를 대 사로 임명해 출국시켜도, 선거 직전에 의정(醫政) 갈등에 기름을 부어도, 자기 표를 얹어준다고 착각했다. 표를 깎아 먹으면서 지원한다고 착각했다. 이재명 후보는 계산이 빠르다. 여론조사를 믿는다. 대법원 선고 직후 분개했던 마음도 스스로 자제할 줄 안다. 당내 충성 경쟁이 오히려 표를 깎아 먹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윤 전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여전히 착각 속에 산다. 어차피 보수 후보를 찍을 유권자를 자기 표라 착각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선거 이후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비호감인 사람은 뒤로 숨는 게 후보를 돕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5-05-25

자동차 키 실종 사건

이것은 지난주에 벌어진 사건이다. 비공식 사건기록, 일명 ‘차 키 실종 사건’. 출근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자동차 키를 찾아 거실을 헤매는 중이었다. 차 키를 책상 위에 올려둔 사실에 대한 기억은 명확하다. 위증할 이유도 없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기어다니는 모습은 흡사 나의 반려견 보리의 포즈와 비슷했다. 고개를 숙이고 코끝을 들이밀며 테이블 밑, 가방 안, 옷더미 속을 거의 킁킁대다시피 하며 뒤지던 찰나,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네 짓이야?” 나는 기억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보리를 향해 쏘아붙였다. 그러나 보리의 눈빛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 집에서 가장 무고한 존재라는 걸 기억하라!’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함을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분실이 아니라 존재론적 혼란에 가깝다. 그 순간 나는 차 키도, 존엄도 잃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결국 차 키는 이불 밑에서 발견되었다. 도대체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쿨쿨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차 키를 손에 쥐고 다시 누운 것도 아닐 텐데.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바로 인간이라는 종의 불가사의인 것이다. 비단 차 키만이 아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꽤 중요한 것들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해야 할 일을 깜빡하고, 약속을 놓치고, 심지어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조차 잊는다. 기억은 언제나 정교하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 기억을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건 사실상 착각에 가깝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망각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뇌 안에는 기억을 지우는 메커니즘이 존재하며 이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이를테면 수업 시간에 분명 열심히 들었던 내용이 하루만 지나도 흐릿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24시간 이내에 학습한 정보의 70%가 사라진다는 망각 곡선은 뇌가 불필요한 정보를 선별적으로 지워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려준다. 그러니 ‘내 머리는 왜 이리 좋지 않은가?’ 하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뇌가 만든 아주 정교한 생존 전략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찾는 행위나, 가스레인지를 끄지 않고 외출하는 일, 눈앞의 사람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민망한 웃음으로 위기를 넘기는 순간 같은 행위를 뇌의 합리적 메커니즘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종종 엉뚱한 일을 벌이는 우리 뇌를 두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며 삶의 허점을 덮는 건 어쩐지 위험해 보인다. 마치 사고를 쳐도 당당한 사춘기 자녀를 보는 기분. 형편없는 시험 성적을 보고서 “왜 열심히 암기하지 않았느냐”고 혼내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쏘아붙이는 것이다. “이건 제 문제가 아닙니다. 저의 뇌가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라고요.” 문제는 이러한 영역이 아니다. ‘실종 사건’의 본질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칠 때가 잦다. 소중한 사람과의 약속, 미처 전하지 못한 말, 놓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어떤 마음들. 그럴 때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또다시 한탄하게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을 허술하게 다루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면 모든 것은 아주 쉽게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기억을 기록하고 감정을 박제하기 위해 애쓴다.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문장을 쓰는 일도 분투의 과정 중 하나다.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고민하는 나를 보고 보리는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손에 쥐지 못할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군. 참으로 안타까운 존재로다….’ 그렇다. 이토록 애처로운 노력 덕분에 우리는 사라지는 마음을 한순간이라도 더 붙잡을 수 있고 흐릿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차 키를 아무 곳에나 두는 나의 뇌를 더는 탓하지 않기로 한다. 어쩌면 이것은 정말 나를 시험에 들게 하려는 보리의 은밀한 소행일지도 모르니. 내가 정말 오래 기억하고 싶은 건 녀석의 쫑긋거리는 귀와 움찔대는 작은 콧구멍,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 같은 것. 차 키를 어디에 두었는지 아는 것보다 이 장면을 자주 떠올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안다. 그것이 바로 차 키 실종 사건을 해결하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문은강(소설가)

2025-05-25

통통족의 패션, 그리고 스페셜리스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아주 신경 써서 옷을 입는 편이라는 사실. 실제로 옷을 잘 입거나 못 입거나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내 딴에는 나름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뚱뚱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옷 태가 안 나서 그렇지,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이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여서 그렇지, 나름 옷을 구입하는 과정부터 매칭 하는 과정까지 허투루 하지 않는 편이다. 이십대 때는 패션 매거진도 정기구독해서 꼬박꼬박 챙겨 봤고, 요즘도 여러 쇼핑몰이나 인터넷 사이트들을 살피며 트렌드를 파악하고 그 안에서 내 스타일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패션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을 자주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채널들은 모델 같은 핏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적어도 표준 정도의 체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기에 다소 활용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기도 하고, 저들이 추천하는 브랜드에 내 사이즈가 없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도 그 중에 나 같은 체형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나마 유용한 채널이 종종 있기는 한데, 그 중에 하나가 어느 배우가 운영하는 채널이다. 통통한 체구를 가진 그는 우리 같은 체형을 가진 이들을 ‘통통족’이라고 칭하며 우리에게 유용한 패션 정보를 제공한다. 얼마 전, 그 채널의 콘텐츠들을 탐독하다가 재미난 기획 하나를 발견했다. 통통하거나 그 이상의 체형을 가진 패셔니스타 두 명을 초대하여 세 남자가 자신들의 패션 노하우를 공유하는 기획이었다. 내용 중에는 다른 유튜버들이 통통족 남성들에게 패션 지식을 설파하는 콘텐츠들에 대해 실제 통통족들이 의견을 내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재미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 많은 패션 유튜버들이 통통족들을 위한 패션 조언을 할 때 초점을 맞추는 부분은 바로 ‘뚱뚱하지 않게 보이기’였다. 이를테면 몸을 작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어두운 컬러를 선택한다거나, 세로로 된 줄무늬 옷을 입는다거나, 셔츠의 윗 단추를 몇 개 풀어 목을 길어보이게 하는 것 등. 그런데 이들은 여기에 대해 다른 의견들을 냈다. 꼭 뚱뚱하지 않게 보이는 것만이 멋이 아니라는 것이다. 뚱뚱해 보이건 말건 밝은 색상의 옷을 입어 화사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고, 예쁘지 않으면 세로 줄무늬 옷을 기피하기도 하고, 셔츠의 단추를 끝까지 채워 단정하고 귀여운 분위기를 연출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뚱뚱하지 않게 보이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예쁜 옷을 예쁘게 입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안 뚱뚱하면 좋겠지만, 당장 뚱뚱한 것을 어쩌겠나. 단점을 가리는데 급급해서 예쁜 옷을 입지 못하고 칙칙하고 일관된 것들만 선택해야 한다면 센스 있는 패션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자신의 단점은 시원하게 인정하고, 새로운 장점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옷을 입는 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빠른 발이 장점인 축구선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 대신 그는 몸싸움이 약하다. 그래서 체중을 비약적으로 불려서 보통 수준의 몸싸움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빨랐던 발 역시 보통 수준이 된다면 감독이 그를 써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필요한 만큼의 웨이트 트레이닝과 더불어 자신의 빠른 발을 살려 단점을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옳은 길이 아닐까? 반대로 홈런을 펑펑 때리는 거대한 체구의 야구선수가 있다. 그는 발이 느려서 도루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래서 그가 체중을 확 줄이고 리그 평균 수준의 주력을 갖게 된다면? 홈런을 때리던 그 힘을 잃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지만 특출난 점도 없는 선수가 된다는 것. 그것이 과연 긍정적인 일일까? 한 때 모두에게 모든 면에서 능력을 갖춘 제네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스페셜리스트도 필요한 시대이다. 부족한 점은 또 새로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와의 협업을 통해 극복하고,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물론 단점도 극복하고 장점도 개발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 중에 우선순위를 정한다면 무엇을 앞세워야 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장점을 개발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단점을 가리는데 급급해서 다른 장점들을 챙기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강백수(시인)

2025-05-25

첫 투표, 더 나은 선택을 위한 준비

운전면허 학원에 처음 갔던 날, 강사가 가장 먼저 알려준 것은 “차에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매세요”였다. 그 덕분인지 나는 지금도 차에 타자마자 습관적으로 안전벨트를 맨다. 처음부터 제대로 배운 방식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어 오랜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나는 생애 첫 공직선거를 앞둔 고등학생들을 위해 매년 새내기 유권자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18세가 되면 우리는 매번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교육감, 지방의원과 정당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막상 투표를 하려 하면 ‘나는 누구를 뽑아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따라서 나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한다. 내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무엇인가? 정당 정책과 후보자 공약에서 내 가치와 맞닿은 부분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정당과 후보자를 선택할 기준을 세워야 한다. 학생들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하는 만큼, 신뢰할 만한 정보를 확인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다. 연수를 진행하며 다음과 같은 실천법을 강조한다. 정당과 후보자의 주요 공약 및 분야별 우선순위를 확인하기, 후보자의 경력·학력·납세·병역·전과와 전문성·공적·사회공헌 등을 점검하기, 우편으로 송달되는 선거공보 속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를 꼼꼼히 읽어보기, 다양한 언론을 비교하며 후보자 정보가 어떻게 보도되고 있는지 분석하기. 이러한 습관을 들이면 선거 때마다 신중한 판단을 내리는 유권자로 성장할 수 있다. 연수에서는 선거의 의미뿐만 아니라 절차와 진행 과정 또한 중요한 부분으로 다룬다. 학생들에게 “투표소 및 기표소 안에서는 사진을 찍으면 안 되지만, 투표소 밖에서는 투표 인증샷을 찍어도 괜찮다”는 점도 알려준다. 아마 학생들은 이런 작은 팁만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첫 선거를 무사히 치르며 민주주의의 의미를 깨닫기를 바란다. 지난 총선에서 18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던 학생들도 이번 6월 3일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권자로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이제 각 가정으로 배달된 선거 공보를 펼쳐놓고, 후보자 공개 자료를 검토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을 비교하고, 가족 또는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그들의 첫 선거를 멋지게 치르기를 바란다. /한국희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초빙교수

2025-05-25

“그렇지만 좋은 것들은 너무 많고”

오늘은 해가 떴다. 그러니까 오늘은 환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나는 180도로 다른 얼굴이 되어가지. 모자 속에 눈이 묻히고 총에 맞아도 웃음이 살아남는 인형의 입술이 되고 그리고 진짜 아침을 먹으면 목 밑에 목이 이어지는 것처럼 오래도록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야. 마술사의 손을 가진 것처럼 피아노를 칠 수도 있을 거야. 그다음엔 하얀 장갑을 끼고 열 개의 손가락을 가져야지. 사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신해욱,‘굿모닝’전문 (‘생물성’, 문학과지성사) ‘나’란 과연 누구이며, 무엇일까. 신해욱의 시에는‘얼굴’,‘눈’,‘손’과 같은 신체에 관한 언술이 많다. 일본 애니메이션‘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는‘가오(얼굴)나시(없음)’라는 독특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기서 가오나시는 온갖 부정성과 이물질이 뒤섞여 과잉이거나 결핍인 현대인의 페르소나를 상징하는 듯하다.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나는 180도로/다른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화자의 언술처럼 페르소나란 다른‘나’가 되는 것으로 “총에 맞아도 웃음이 살아남는/ 인형의 입술이 되”듯 그것은 자연인이 아니라 서정시의 내적 요구에 따라 배당된 일종의 배역적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동양적 전통에서‘글’과 ‘사람’은 혼연일체를 이루는 한 몸의 결속체로 인지되어왔다. 하지만“글이 곧 사람이다.”라는 선언적 명제는 정작 페르소나를 품은 현대의 서정시에서는 시인과 페르소나가 두 개로 갈라지게 된다.”(유성호, ‘가히’ 2025년 봄호) 신해욱의 시에는 일인칭 화자가 고백하는 페르소나의 언술이 많다. 가령 이 시집에서 인용되지 않은“나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한 눈으로는 왼쪽을/한 눈으로는 오른쪽을 본다”라든지 “너는 좋아 보이는구나/나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있어”“쥐에게도 개에게도 얼굴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나는 터무니없이 부끄러워지고 풀이 죽는다.” 는 기표들처럼 화자는 미학적으로 가공된 목소리를 통해 다양한 전언을 들려주고 있다. 말하자면 페르소나는 독자나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존재이다. 이어지는 고백들에서는 시인과 좀 더 멀리 분리되거나 해체된 화자를 대면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수요일이 아닌 채로 수요일을 대신하며 옷을 벗게 된다/나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수요일이라 할 수 없는 나를 대신 끌어안고/수치를 견디는데/ 그런데 누군가 나보다 먼저 내 방을 사랑하고 있다/ 키가 크고 있다/사소한 훼손도 없이” 이처럼 화자는 시인과 세계, 시인과 작품, 작품과 대상과의 관계를 암시해 주지만 동시에 그 자신이 되기도 한다. 다시 처음의 얼굴로 돌아와서 이런 질문에 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문학을 혹은 예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결국은‘자신을 알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일상에서 되도록 멀리 가 보려는 것, 그래야 겨우 알 수 있을 법한‘나’란 존재에 대해 서른다섯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선택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40편의 단편 소설을 썼던 이유 또한 답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실은 이 질문은 나의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쓰는 일과 그림을 보는 일이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그림은 왜 그린 대요?”라는 그 질문의 질문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서 배턴을 넘겼을 뿐. “하지만, 미안.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져서 너의 그림자를 건드렸다.” /이희정 시인

2025-05-25

예천군, 맨발걷기 특화도시 조성

땅은 곧 삶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다. 주위에 조금만 터가 있어도 콩을 심고, 고춧대를 세우고, 호박과 옥수수를 기르던 풍경은 우리 세대에게 낯설지 않은 기억이다. 먹고사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던 시절에는 아주 작은 터조차도 허투루 두지 않았다. 그만큼 한 평의 땅도 소중했고, 농작물은 생계와 직결된 생활의 일부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했다. 경제적 안정과 생활 수준의 향상은 생활 양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이제는 단순히 ‘무언가를 길러내는 땅’보다는 ‘머무르고 싶은 공간’, ‘눈길이 머무는 곳’, ‘마음을 쉬게 하는 장소’로서의 공간이 주목받고 있다. 조경이라는 개념은 더 이상 일부 고급 주택이나 특수 시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국 각지의 도시들이 생활 환경 개선과 도시 이미지 제고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천군 또한 공원과 경관 조성, 건강 도시 환경 구축을 통해 ‘힐링 도시’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예천군 곳곳에서는 최근 몇 년간 작은 공원 조성과 공공 조경 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마을 입구, 유휴지, 공공청사 주변, 그리고 개인 주택 앞까지 꽃과 나무로 꾸며진 아름다운 정원은 그 지역의 인상을 한층 부드럽고 따뜻하게 바꾸고 있다. 이러한 공원은 단순한 미관 향상을 넘어서 외부인의 발걸음을 이끄는 명소로 자리 잡고,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공간을 가꾸며, 관광객은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으며 자연스럽게 주변 식당이나 카페, 전통시장을 찾게 된다. 잘 조성된 공원 하나가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공원은 개인의 여유를 넘어 마을의 품격, 나아가 지역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자산이다. 도시개발에서 ‘경관’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공간이 주는 인상은 곧 도시의 정체성과 연결되며, 이는 주민의 자긍심은 물론 방문객의 만족도로 이어진다. 예천군은 최근 ‘맨발 걷기’에 최적화된 도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단순한 산책로 정비를 넘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치유 공간으로 조성하려는 시도는 지역 정책에서 보기 드문 접근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남산공원 정비사업, 예누리길 조성사업, 개심사지 역사공원 조성사업이다. 이 세 개의 거점 사업은 기존 한천 산책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예천 전역을 하나의 대형 힐링 산책로로 엮고자 하는 구상이다. 도청신도시에서 예천읍으로 오다 보면 시가지 입구에서 맞이하는 개심사지는 고려 현종 2년(1010년)에 건립된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장소이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곳은 최근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되어 예천의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결합한 대표 치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예천이 자랑하는 천년고찰 용문사, 명봉사, 장안사와 연계하여 불교 성지순례 코스로의 확대를 준비 중이며, 단순한 관람이 아닌 명상과 산책이 함께하는 정신적·신체적 치유의 장소로 주목받고 있다. 신도시 진입도로 개설로 기능을 잃은 경북선 폐철도(예천읍 구간) 부지도 새로운 도시재생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예천군은 이곳에 길이 1.2km, 면적 2만7천㎡ 규모의 ‘옛기찻길’을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의 공간 조성은 행정 주도가 아닌 주민과 행정이 함께 만드는 공동체적 공간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예천군은 이들 핵심 공간을 중심으로 기존의 한천 산책길과 예누리길 등을 연결해 도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걷기 코스로 재편할 계획이다. 건강, 역사, 자연, 치유가 어우러진 복합적 산책 환경을 통해 군민에게는 삶의 여유를, 외부 방문객에게는 여행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도시의 대답이다. 예천군이 공원을 가꾸고, 산책로를 잇고, 치유 공간을 조성하는 일은 단순한 공간 정비를 넘어서 주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생계를 위한 땅이 전부였다면 이제는 마음을 쉬게 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작물을 심던 공터가 이제는 사람을 불러 모으고, 머물게 하며, 그 안에서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함께 길러내고 있다. 예천의 이러한 변화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변화가 도시의 방향성을 바꾸고 있으며, ‘살고 싶은 도시’에서 ‘머물고 싶은 도시’로의 진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예천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2025-05-25

사람과 정책, 무엇이 중한가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온다. 유권자가 대통령 후보의 정책을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은 오늘부터 딱 7일 남았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주관하고 있고, 이를 지상파 3사에서 분야별로 각 두 시간씩 방송하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저성장 극복과 민생경제 활성화, 대외 통상 등 경제 분야를 주제로 1차 토론회가 열렸고, 23일에는 사회 갈등 통합 방안, 초고령 사회의 연금 및 의료개혁, 기후위기 대응 등 사회 분야 토론이 진행되었다. 마지막 3차는 27일에 정치개혁, 개헌, 외교안보 등 정치 분야를 토론할 예정이다. 토론회가 끝나면 지지율에 변동이 생기니 각당 후보들은 두 시간 동안 모든 정책을 펼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대선 토론회가 과연 얼마나 유권자의 기대에 부합했는지는 의문이 많이 남는다. 특히 2차 토론회에서는 인신공격과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가 난무했다. 이 두 가지는 대학에서 토론 수업을 할 때 강조하는 것이다. 인신공격이란 정책과 큰 관련 없는 개인 신상을 공격하는 것인데 토론의 본질을 흐린다. 아무래도 정책 평가는 어렵지만 사람 평가는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허수아비 공격이란 상대방 주장을 왜곡하거나 과장해놓고 비판하는 것인데 이것은 토론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현대의 문제를 분석하면서 고전을 인용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고전의 문장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아니고, 옳다 하더라도 아전인수격으로 적용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용’에서 가장 중요하게 주장하는 가치가 지극한 정성인데, 말 자체는 흠잡기 어렵지만 지금 여기에서 순수한 진정성인지 무엇인지 판단하기는 자기이해가 반영될 여지가 많다. 그럼에도 고전은 짧은 경구는 갈등을 해소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공자는 ‘문왕이나 무왕 같은 위대한 정치가들의 정책이 책에 다 있지만, 그것을 실천할 사람이 있어야 제대로 시행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책 자체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추상적이거나 사적인 인격이 아니고 그 정책을 실천할 공적이고 구체적인 역량을 말한다. 정책 실천 역량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인 신상을 비판하는 것은 정책토론만으로도 부족한 두 시간을 낭비하고 유권자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도자가 아무리 자신을 선하다고 주장해도 백성에게 실질적인 효과로 나타난 것이 없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무릎을 치게 된다. 대선 후보들이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국민에게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동안 그들이 한 행동이 국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가 대통령 자격을 판단하는 가늠자가 되어야 한다. 대선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이념으로 해서도 아니고 인상 비평으로 해서도 안 된다. 이제 남은 일주일 동안 우리 모두 부수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을 구분하고 어떤 정책이 국가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지, 그 정책을 실천할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냉철하게 분석해보자.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5-25

‘진정성이 있어야’

요란한 선거 홍보 현수막에 질린다. 말끝마다 국민을 위한다는 데 나에게는 왜 와 닿지 않을까. 남을 위한 선행은 요란하지 않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정치인은 하지도 않는 일을 입만 가지고 말만 한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방송에 나오면 말없이 채널을 돌린다. 노점상으로 힘겹게 돈을 벌어 1억 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한 김정순 여사(80)의 기사가 나를 잡는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 편지를 읽고,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할머니의 기사를 읽는다. 우연히 본 기사인데도 오랜 시간 마음속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힘겨워 휘어진 손으로 장학금을 내밀 때의 마음이 전해진다.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에서 발생한 불을 끄느라 지친 소방대원과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경찰관들에게 무료로 식사를 선물한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한 식당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한다. 온전한 음식 대접을 위해 일반 손님을 받지도 않았다. 경기마저 나쁜 상황에서 선뜻 하기 힘든 일이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주인의 마음을 느낀다. 육군 이규탁 중사는 양평군 양서면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를 운행하던 중 사고가 난 차를 발견했다. 범퍼가 많이 부서지고 에어백이 터진 상태에서 운전자도 피를 흘린다. 이 중사는 가지고 다니던 구급낭을 꺼내 지혈하고 119구급대가 올 때까지 환자를 돌보며, 추가 사고를 막기 위해 교통정리도 하였다. 아이유 씨의 선행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펜클럽의 이름으로 불우한 이웃을 위해 거액을 기부한다. 돈이 있다고 하여 남을 위해 기부를 하는 건 아니다. 이 세상에 돈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들은 내어놓기보다 더 모으는 데 힘을 쏟는다. 남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고 위로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여러 번에 걸친 선행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일이다. 배우 박보영도 그러하다. 2014년부터 물품과 금품을 후원하는 일을 꾸준히 한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쩌면 진정성은 평상시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보고 행동하는가의 문제이다. 행동과 생각이 다르거나 일시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건 선행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선행한 사람들이 자신을 알리는 현수막을 걸어놓은 걸 본 적이 없다. 그렇듯 남을 위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슴 바닥 깊은 곳에서 조용히 뿜어나온다. 정치인들은 왜 모르는가. 말하지 않아도 그들의 밑바닥에 숨은 남을 위한 마음이 뿜어나오게 할 수는 없는가. 선거철만 되면 몸을 비틀어도 없는 진정성을 짜내느라 잠을 설치며 돌아다니기보다 평상시에 국민을 위한 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도 거리를 나서면 나를 보라는 듯 정치인의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주인을 닮은 가벼운 몸놀림이 눈을 어지럽힌다. 이 혼잡한 시간이 언제 지나가려나. 국민을 위한 진정성은 없으면서 말끝마다 내뱉는 국민이란 두 글자에 머리가 아프다. 박수를 보낸다. 이 시대를 함께 사는 말 없는 선행자들을 위해. /김규인 수필가

2025-05-25

담배 소송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흡연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공단 재정 누수 방지 등을 목적으로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500억원대의 담배소송이 11년만에 항소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2014년 소송을 시작한 이 사건은 2020년 1심 재판부가 원고 측인 공단 쪽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질병이 흡연 외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발병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담배회사 측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공단 측은 즉각 항소하며 흡연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학술적 자료와 담배 퇴치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의견수렴을 증거 자료로 재판부에 제출했다. 소송이 11년을 끌어오는 과정에서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범국민적 인식이 크게 높아졌고, 시민단체의 호응도 커져 항소심에서의 판결이 1심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을 지 여부에 대해 세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 46개 주 정부가 담배회사를 상대로 의료비용 환수를 위한 소송을 제기해 우리 돈으로 약 280조원에 달하는 배상을 받아낸 바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도 1심과 다른 판결이 나올 수 있다는 견해가 조심스레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담배 배상 판결 후 캐나다 등 세계 많은 나라에서는 영향을 받아 담배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11년을 끌어온 담배 소송은 재판부의 판결 결과를 떠나 담배판매 기업과 흡연자들에게 주는 사회적 메시지는 분명히 있다. 유해 물질을 파는 기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따지는 것과 판결이 국민의 건강권, 소비자 보호 등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5

명실상부한 청정 산업도시로 가는 포항

경북 포항시가 산업부 선정의 분산 에너지 특화지역 최종 후보지에 선정됐다. 정부는 지난주 포항과 부산, 울산, 제주, 전남, 충남, 경기 등 전국 7곳을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발표하고 이들 지역에 대해서는 에너지심의위원회를 거쳐 지정 여부를 최종 확정한다고 밝혔다. 분산에너지 특구는 특별법을 근거로 지역에서 한전을 거치지 않고 전기를 생산하고 수요자에게 직접 전기를 팔 수 있도록 하는 특례 적용지역이다. 전력은 원자력이 집중된 경북 등 지방 도시에서 대부분 생산되는데, 소비는 주로 수도권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한국적 현실이다. 지방은 전기 생산에 소요되는 각종 인프라를 감당하고 있지만 전기료는 수도권과 지방이 똑같다. 지방에서 전기를 생산해 값싼 가격으로 팔 수 있게 되면 전기 수요가 많은 기업의 지방 이전도 내다볼 수 있다. 또 반도체 등 전기 수요가 큰 기업이 지방으로 옮겨올 경우 지방균형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정부가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을 만들고자 하는 취지도 이런 데 있다. 포항은 청정 암모니아 기반의 무탄소 분산에너지를 생산하는 모델을 정부 측에 제시했다. 영일만산단을 중심으로 청정암모니아 기반의 수소엔진발전 실증을 통해 40MW급의 무탄소 분산전원을 실용화해 청정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이로 인해 포항은 전기 수요가 많은 이차전지와 철강기업의 전력 수요를 감당하고 탄소 가격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외지 기업의 포항지역 산단 유치에도 유리하다. 포항은 철강산업 도시로 세계에 알려져 있다. 산업구조 개편을 통해 철강과 함께 이차전지를 새로운 주력산업으로 삼고자 노력 중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후보지 선정은 지역산업 발전이란 측면에서 청신호라 할 수 있다. 청정에너지의 값싼 전기료로 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지역기업의 경쟁력이 올라가는 것은 물론 외지 기업 유치와 도시 전체가 활기를 찾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분산에너지 특화지역 후보지 선정과 그 의미를 살리는 지역사회의 노력들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2025-05-25

단일화 마지노선 이틀전…이준석 선택은?

6·3 대선후보들의 막판 스퍼트가 시작됐다. 지난 주말부터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판세가 요동치자, 각 후보는 상대 약점을 최대한 들춰내면서 총력전을 펴고 있다. 지난 주말 열린 2차 TV토론회에서 거친 설전이 오간 것도 남은 기간 상대 후보의 아킬레스건을 집중 부각시키는 것이 득표전에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2차 TV토론회에 대해 민주당은 김문수 후보가 허위 사실 유포, 인신 공격으로 일관했다며 공격했다. 김 후보가 이날 이 후보의 ‘형수욕설’, 김혜경 여사의 ‘법인카드 유용’ 등을 거론하며 ‘사기꾼’이라고 비판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반면, 국민의힘은 이재명 후보야말로 거짓말만 했다고 공격했다. 이 후보는 이날 김 후보에게 경기도지사 시절에 있었던 ‘119전화’를 거론하면서, “내란 수괴인 윤석열 전 대통령, 전광훈 목사를 비롯한 극우세력들과 단절할 생각이 없느냐“고 몰아붙였다. 남은 기간 대선 판세의 주요 변수는 김문수·이준석 후보의 단일화다. 앞으로 여론조사 발표는 사전투표(29∼30일) 직전일인 28일까지 허용되기 때문에, 향후 이틀간이 단일화 국면의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정치권에서는 “단일화가 되고, 두 후보가 공동 유세를 펼치면 TK를 비롯한 영남권 결집으로 박빙의 승부를 펼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도 보수 지지층이 막판에 결집해 윤석열 후보가 0.73%p 차이로 이재명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었다. 경북매일신문과 대한민국지방신문협의회가 지난 20~21일 한국갤럽에 의뢰해 여론조사를 한 결과에서는 이재명 후보 46%, 김문수 후보 34%, 이준석 후보 11%(중앙선거여조사심의위 참조)로 나타나, 김문수·이준석 두 후보가 단일화하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만약 ‘깜깜이’가 시작되는 28일까지 발표될 각종 여론조사에서 두 후보간 합산 지지율이 이재명 후보를 넘어설 경우, 이준석 후보의 입장에도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 후보로서는 대선 이후의 정계개편과 ‘배신자 프레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2025-05-25

남가일몽(南柯一夢)

교양 강의 ‘동서 고전의 만남’을 진행하면서 느끼는 소회가 적잖다. 학생들이 기초적인 한자마저 등한히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아프게 다가온다. 한자어는 상당수 한국어의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문해력을 늘리려면 한자어 실력 배양이 필수다. 하지만 실상을 살피면, 상황은 정반대임을 알게 된다. 한자어를 영어가 대체하는 요지경이 펼쳐지고 있다.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에는 읽기와 쓰기, 말하기가 있다. 타인이 쓴 글을 올바르게 독서하는 능력이 읽기다. 필자의 생각과 느낌을 적절하게 전달함이 쓰기이며, 말하기는 화자의 생각을 구두(口頭)로 발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을 자연스럽고 윤택하게 해주는 세 가지 능력의 바탕에는 우리 고유어와 더불어 한자어가 자리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우리 언어생활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한자어를 버리고 영어로 대체함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노릇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한자어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그야말로 불 보듯 뻔하다. 예전 세대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썼던 사자성어 혹은 고사성어를 알고 실생활에서 활용하는 청년 세대는 거의 멸종된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동서 고전의 만남’에서 일주일에 하나 정도 고사성어를 소개하고 있다. ‘남가일몽’도 그런 인연으로 다시 만나게 된 고사성어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덕종 치세의 선비 순우분이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나 확인해 보니 홰나무 남쪽 가지 아래 개미굴이 있었다는 얘기에서 나왔다. 꿈속에서 흘러간 20년 세월이 그야말로 순식간의 일이었던 셈이다. 나는 남가일몽을 고교 국어책에 실린 정비석 선생의 ‘산정무한’에서 만났다. 금강산을 두루 유람하고 소감을 글로 남긴 것이 ‘산정무한’이다. 글 끄트머리에서 선생은 쓴다. “천년 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 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永劫)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須臾)던가. 고작 칠십 생애에 희로애락을 싣고 각축하다가 한 움큼 부토(腐土)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니, 의지 없는 나그네의 마음은 암연히 수수(愁愁)롭다.” 경순왕 김부(金傅)가 935년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치고자 할 때 태자가 결연히 반대하지만, 김부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에 태자가 베옷(마의)을 걸치고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신라의 천년 사직도, 태자가 세상을 버린 뒤 흘러간 천년도 영겁의 세월에 비춰보면 잠시의 일 아니겠는가, 하며 선생은 쓸쓸해한다. 남가일몽과 비슷한 뜻을 가진 고사성어가 있으니 ‘한단지몽(邯鄲之夢)’이다. 인간이 영위하는 지상의 삶이 유한함을 가리키는 고사성어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길지 아니한 덧없는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진실로 가치 있고 아름다운 대상은 놓쳐버리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들에 몸과 마음을 탕진하고 있음은 아닌지, 돌아보라는 게 아닐까. 선거를 앞두고 내란 잔당의 해괴한 언사와 설익은 칼춤이 난무한다. 작은 권력과 돈푼에 육신과 영혼을 팔아넘기는 내란 잔당들을 본다면 지하의 마의태자는 무슨 말을 남길 것인가.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5-25

구미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작은 거인’ 구미의 선전 기대

이제 하루만 지나면 아시아 육상스타간 ‘별들의 전쟁’ 구미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가 구미일원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27일부터 31일까지 열리는 이번 육상대회에는 세계 최고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을 포함해 한국남자육상 100m 유망주인 고교생 조엘진, 3000m 장애물경기 한국신기록 보유자 조하림, 우상혁 라이벌인 카타르의 바르심, 세계육상대회 장대높이뛰기 은메달리스트인 필리핀의 어니스트 존 오비에나 등 한국과 아시아 육상 스타들이 대거 출전한다. 이들 참가 선수들은 트랙과 필드, 도로를 아우르는 총 45개 세부 종목에서 210개의 메달을 놓고 불꽃 튀기는 명장면을 연출할 예정이다. 그러나 구미아시아육상대회는 당초 예정에도 없던 조기 대선으로 대회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당초 기대보다는 가라앉은 모양새다. 오죽하면 김장호 구미시장이 지난달 13일 한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난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후보에게 “예기치 않게 대선 일정이 육상대회 일정과 겹쳐 국민들의 관심이 대선에만 쏠릴까 걱정”이라며 대회 홍보와 관심을 당부할 정도였다. 이러한 응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적 관심은 온통 대선에 쏠리고 있다. 이 때문에 구미시와 육상대회조직위는 글로벌 스포츠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마치 ‘거인 골리앗’과 같은 대선 열기가 상대적 약자인 ‘다윗’ 같은 육상대회 분위기간 대결 양상까지 연상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는 각 대선 후보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끊임없이 보도되고 중계되는 반면 구미아시아육상대회에 관한 소식은 ‘가뭄에 콩나듯’ 하고 있다. 구미아시아육상대회는 대형 국제도시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기초자치단체가 아시아 최초로 유치한 국제육상 대회란 점도 특이하다. 구미시는 2023년 12월24일 구미 보다 인구가 6배나 많은 중국 샤먼시를 물리치고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 유치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까지 이 대회는 베이징·도쿄· 뉴우델리· 도하· 방콕· 자카르타· 쿠알라룸프르 등 유명한 국제도시에서만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 인천 등 수도와 광역시에만 개최됐던 대회이다. 기초자치단체란 왜소한 체구로 ‘거구 도시’와의 외로운 싸움 끝에 대회를 열게된 구미시는 이제 또다시 예기치 않게 대선 이슈란 거대한 복병을 만나게 됐다. 그러나 우리는 늘 거인과 난장이 싸움에서 약자의 선전을 응원하듯 ‘작은 용사 다윗’의 활약을 상상한다. ‘다윗 같은 작은 거인’ 구미가 개최하는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 대구와 경북 시도민은 물론 전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열기가 모아지길 기대한다. /류승완기자 ryusw@kbmaeil.com

2025-05-25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우리는 송해 선생님을 참 부러워했다. 돌아가셨을 때 연세가 95세다. 우린 연세가 많은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돈을 버셨다는데 주안점을 두고 말한다. 그 연세에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울 지경이다. 정말 부러웠다. 이제는 대상이 바뀌었다. 그동안 송해 선생님 때문에 가려졌던 분들이 하나둘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시형 박사, 김동건 아나운서, 허영만 화백 등이 그분들이다. 게 중 맛있는 것을 전국 팔도를 다 돌아다니면서 섭렵하는 허명만 화백이 제일 부럽다. 돈 벌고 맛있는 것 먹고. 이제 겨우 육십이 넘어 정년퇴직한 햇병아리들이 세상 다 산 늙은이 흉내를 내는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다. 백세 시대에 아직 살날이 사십 년이 더 남았는데 얼마나 노후 준비를 충실히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집 한 채 덜렁 남아 있고 국민연금에 목 빼고 살 지경이면 바로 재충전해서 일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왕년에 내가 누구라는 것을 상기하며 자존심 세우다간 시대에 뒤처지는 인간으로 낙인찍힌다. 밥 세 끼를 제대로 다 먹고 사는 세대이자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세대, 손에 전화기 들고 다니는 첫 세대이고 주판 대신 전자계산기 두드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노인으로 분류되는 세대이다. 하루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급변하는 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바로 ‘꼰대’ 소리 듣는다. 시대가 바뀌면 문화도 바뀐다. 며느리나 딸이 애 낳으면 산후조리원비를 포함한 생산 축하 자금을 내놔야 한다. 그냥 대충 재래시장에 가서 산모용 미역 한 다발 사 들고 가는 시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애 결혼 시켰다고 방심하다가 주위에 돌아가는 꼴을 보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산후조리원 동기끼리 자기 시부모가 뭘 해줬다는 것을 다 까발린다고 하지 않는가. 한참 떨어지는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이 시댁에 처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 아들을 쥐잡듯 잡을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한숨만 나오고 이런 풍토를 확산시키는 요즘 잘나가는 부모들에게 한소리 질러주고 싶다. “제발 고마해라.” 딸을 시집보내고 이번엔 며느리를 맞이하는 지인이 있다. 사위 인사 올 땐 대충 밖에서 밥 먹고 들어오자는 딸 말만 믿고 대충했는데 며느리 될 애가 인사 온다고 하니 집안에 비상이 걸린단다. 제대로 며느리에게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전화 받고 싶으면 대충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들리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던 며느리가 차츰 애 낳고 살더니 주위에 듣는 소리가 있는지, 없는 시부모 괄시하는 게 눈에 보인단다. 하긴 몇백만 원씩 척척 내놓는 시부모가 있는가 하면 100만 원 가까이하는 애 유모차를 사주는 부모에게 더 정이 가기 마련일 것이다. 며느리가 자기 생일상 안 차려 준다고 툴툴거리는 사람을 봤다. 아마 상다리 부러질 정도를 기대한 모양인데 물려받은 시골 뒷산이 몇십억 한다면 모를까 꿈은 빨리 깨는 것이 좋다. 효도라는 단어가 곧 사라진다. 이웃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면 정말 남의 일이 아니다. 사위가 차를 바꾼단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 거지? 그냥 바꾼 다음 말하면 안 되나? /노병철 수필가

2025-05-22

‘쿨존’

최근 기후변화의 속도는 인류의 적응 능력을 뛰어넘고 있다. 유럽, 북미,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폭염이 빈발하고 있으며, 사망자와 경제 피해도 함께 늘고 있다. 2025년 여름을 앞두고 기상청은 우리나라가 평년보다 높은 기온을 기록할 가능성이 60%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일부 기상 전문가는 올해 여름이 4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특히 대구·경북 지역은 국내에서 여름철 최고기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손꼽히며, 실제로 온열질환자 수도 전국 최고 수준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역사회는 더 이상 ‘폭염을 견디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기후재난 시대를 맞아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 ‘쿨존(Cool Zone)’의 확대와 정착이 절실히 요구된다. ‘쿨존’이란 단순한 에어컨 공간이 아니라, 기후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생활형 안전망을 의미한다. 주로 공공도서관, 복지관, 지하철역, 정류장, 공공청사 등에 설치되며, 내부에는 에어컨, 냉풍기, 냉수대, 그늘막, 쿨링 미스트 등이 갖춰져 있다. 폭염특보 발효 시에는 무더위쉼터로 기능하며, 특히 노약자·야외근로자·취약계층에는 생명선 역할을 한다. 실제로 서울·부산·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는 무더위쉼터를 중심으로 ‘쿨존’ 체계를 운영하고 있으며, 열지도(Heat map)를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배치하거나 운영시간을 연장하는 식의 개선도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하며, ‘쿨존’ 간 정보 접근성, 시설 수준, 이용 편의성 등의 질적 차이 해소가 과제로 남아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쿨존’ 정책을 도시 인프라의 필수 전략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뉴욕시는 매년 폭염기간 동안 공공도서관과 노인센터를 쿨링센터로 지정하여 시민에게 냉방 공간을 제공한다. 애리조나 피닉스시는 교회, 카페, 쇼핑몰과 같은 민간공간도 ‘쿨존’으로 활용하고, 무료 교통수단과 연계해 접근성을 높였다. 호주 멜버른시는 도심 내 ‘쿨링 스테이션’을 촘촘히 배치하여 시민의 열 스트레스를 줄이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대구·경북 지역에도 여러 시사점을 준다. 특히 도심 열섬현상이 심한 대구 도심이나, 야외 작업자 비중이 높은 경북 농촌지역에는 ‘지역 맞춤형 쿨존 전략’이 요구된다. 행정기관 주도뿐만 아니라 민간 공간과의 연계, 에너지 효율 기술 접목, 시민참여 확대 등 다양한 방식이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쿨존’은 단기 대책이 아니라, 기후 위기 적응의 핵심 기반이 되어야 한다. 대구·경북은 여름철 고온 위험도가 높은 만큼, ‘쿨존’의 ‘양적 확대’는 물론 ‘질적 고도화’가 필요하다. 각 자치단체는 생활권 중심으로 ‘쿨존’을 확대하고, 열지도 기반의 취약지역 우선 배치, 정보 접근을 위한 ‘쿨존’ 안내 시스템 정비, 에너지 절감형 냉방 장비 도입, 민관협력 운영모델 마련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지역 주민 스스로가 폭염 대비 행동 요령을 숙지하고 ‘쿨존’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조금 더 친숙한 교육과 홍보도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가 지금 ‘쿨존’을 확대하는 일은 단지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화하는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25-05-22

보이스피싱 경계령

전화를 통해 개인정보를 빼내 사기를 치는 수법의 보이스피싱은 영원히 근절이 되지 않는 범죄일까. 수많은 서민에게 억울한 피해를 안기고 있는 범죄지만 당국의 꾸준한 단속에도 최근 몇 년 사이 보이스피싱 사기는 오히려 더 늘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올 1분기 보이스피싱 범죄는 전년 동기대비 건수는 17%, 피해 금액은 120% 증가했다. 사기 피해가 오히려 대형화되는 추세다. 피해자 연령은 정보기술 이용 수법에 취약한 50대가 가장 많았다. 50대 이상 피해자 비중은 2023년 32%, 2024년 47%, 올 1분기는 53%까지 높아졌다. 보이스피싱 피해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 때문이라 한다. 전화 통화를 통해 인증을 거치는 일들이 개인이나 공공기관에서 많아졌다는 것이다. 특히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은 피해자 상당수가 피해를 입고도 피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많은 피해가 발생한 뒤다. 대책도 없다. 금융감독원이 21일 고금리와 경기회복 지연 등으로 자금이 절박한 자영업자 등 서민층을 겨냥한 대출 빙자형 보이스피싱이 극성을 부린다고 경계령을 발령했다. 1분기 보이스피싱 피해자 중 42%가 대출 빙자형이라고 하니 나쁜 죄질에 분통이 저절로 터진다. 장사가 안돼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서민층을 상대로 금융사기를 치는 악질 보이스피싱 범죄에 강력한 철퇴를 내리는 방법은 없을까. 벼룩의 간을 빼먹는 세상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2

시장 공석의 대구시, 내년 국비 확보 비상이다

기획재정부 주관의 지방재정협의회가 21일 세종시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열렸다. 지방재정협의회는 기획재정부가 본격적인 정부 예산편성에 앞서 국가재정 운영방안을 설명하고, 각 지자체의 주요 현안 사업에 대한 의견을 직접 청취하는 자리다. 말하자면 국비 확보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자리라 할 수 있다. 내년도 예산은 지난 3월 국무회의에서 ‘2026년 예산안 편성 지침’을 의결할 때 대략적인 규모는 정해졌다. 작년보다 4% 정도 증가한 704조원이다. 예산 규모는 증가했지만 대미 통상갈등과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와 경기회복을 위한 일자리 창출 등 시급한 국가 현안에 많은 예산을 투입할 것으로 보여 각 지방자치단체가 요구하는 예산이 제대로 반영될지는 불투명하다. 또 대선 결과에 따른 공약 이행 사업비 등이 반영돼야 하는 변수도 남아 있어 지자체간의 국비 확보는 전쟁터를 방불할 만큼 치열해질 수 있다. 특히 대구시는 홍준표 전 시장의 대선 출마로 시장 자리가 공석이 된 상태여서 예산 확보전에 매우 불리한 입장이다. 이런 점을 고려, 김정기 시장 권한대행은 전 부서 총력 대응을 강조하고 지방재정협의회에도 기획실장 등 예산 관련 부서 간부를 모두 대동하는 비장한 각오의 모습을 보였다. 대구시는 이날 협의회에서 TK 신공항 건설, 도시철도 4호선, 글로벌 인공지능 전환 혁신 기술개발,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 사업 등 지역 주요현안에 대한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하나같이 대구 미래를 위해 중요하지 않은 사업이 없으며 예산 또한 규모가 커 정부의 예산 반영이 잘 될지 걱정이 된다. 신공항 건설의 핵심 요소인 공공자금관리기금의 활용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부정적 의견을 보인 바 있어 대구시의 내년도 국비 확보는 넘어야 할 고비가 하나둘이 아닐 것 같다. 김 권한대행의 고군분투와 함께 지역 정치권도 일찌감치 나서 지역 현안 해결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 지역 국회의원의 역할이 여느 때보다 막중하다.

2025-05-22

‘金·李 단일화’ 성사, 오늘 TV토론회가 좌우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는 지난 21일 한국방송기자클럽 대선후보 초청 토론회에서 지지율을 끌어올릴 대책을 묻자, “특단의 대책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와의 단일화”라고 답했다.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지지도가 좀처럼 올라가지 않자 김 후보가 솔직한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단일화 방식과 관련해서도, “100% 국민여론조사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겠다”고 했다. 국민의힘은 최근 당내 주요 인사들이 모두 나서 이준석 후보와의 단일화 성사에 사활을 걸고 있는 분위기다. 김용태 비대위원장은 “보수 본가(本家)가 고쳐 쓸 수 없는 집이라면, 그 자리에 더 좋은 집을 새로 짓겠다”며 이 후보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안철수 중앙선대위 공동위원장은 직접 이 후보의 유세현장으로 찾아가서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이 후보는 여전히 후보 단일화에 부정적이다. 그는 “단일화 논의보단 꾸준히 저희를 지지해주는 젊은 세대와 개혁을 바라는 진취적인 유권자에게 도리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개혁신당에선 “국민의힘 주류(친윤계)로부터 당권을 줄 테니 단일화하자는 연락도 온다”는 폭로까지 했다. 사실 정치권에서도 두 후보의 단일화 성사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두 후보가 뭉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근접한 수준까지 지지율이 올라가면 단일화 논의에 추진력이 생길 수 있지만, 지금 수준의 두 후보 지지율로는 단일화를 해도 큰 효과가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23일) 오후 열리는 2차 TV토론회가 단일화 성사 여부를 가리는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준석 후보도 21일 안철수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2차 TV토론이 끝날 때쯤엔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만약 오늘 TV토론회 후 발표되는 여론조사에서 김문수 후보와 이준석 후보의 지지율이 동반 상승할 경우, 단일화 바람이 강하게 불 수 있다. 보수진영이 총결집해 김 후보를 밀고, 중도·청년층 유권자 표심이 이준석 후보에게로 모일 경우, 이재명 후보를 추격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25-05-22

유발지진은 맞는데 인과관계는 없다니

필자처럼 숫자에 약한 사람도 이 날짜는 잊히지 않는다. 지진 났던 날. 2017년 11월 15일.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오후 재판이 있어 기록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법원 언덕길을 올라 법원에 들어섰다. 7호 법정에 들어가 재판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 두둥하고 작은 울림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내 재판 순서가 되어 원고대리인 석에 앉았다. 판사님의 질문에 무언가 답변을 하려는 순간 5.4 규모의 지진이 났다. 법정이 크게 흔들리고 전산에 오류가 난 듯한 삐 하는 소리 속에서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3초 정도 침묵 속에서 서로를 쳐다보다가 얼음땡이라도 한 듯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벽이 일부 무너져 내린 법원 건물 옆에서 넋이 나가 서 있는데 저 멀리 우리 직원이 울면서 뛰어오고 있었다. “변호사님, 저 지금 집에 가볼게요!” 당시 포항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자가 겪은 이런 일을 겪었을 것이다. 지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공포와 트라우마가 더 무서웠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을 서울 시댁으로 일주일간 피난을 보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여진에 다른 가족들도 여차하면 바로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한 상태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재판을 가면 법정 뒤엔 피난용 안전모가 놓여있고 집과 사무실 벽엔 금이 가 있었으며 한동안 깨진 화분과 액자들을 잔뜩 버렸다. 몇 달 뒤 가족여행으로 갔던 평창올림픽 폐회식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포항에서 왔다고 말하는 아홉 살 아들에게 대뜸 “아~ 거기 지진난 데?”라고 하는 것에선 무언가 모를 지역 비하까지 느껴졌다. 지진 때문에 우린 이렇게 힘들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 배우자가 외도하거나 누군가에게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린 피해를 보았고 정신적 고통을 느꼈다. 정신적 고통에 대한 손해배상금이 위자료라면 우린 잘못한 누군가에게 위자료를 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런 고통을 초래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부가 밝혀내겠다고 나섰다. 1년이 넘는 조사를 거쳐 정부조사단은 2019년 3월 20일 포항 지진이 정부가 지은 지열발전소에 의해 유발된 촉발 지진이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조사단의 공식 발표가 이러하니 피해자들 일부가 위자료 소송을 제기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4년 뒤 1심 법원도 지열발전소를 짓고 운영한 정부가 잘못한 것이 맞다며 포항 시민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했다. 법원까지 이렇게 판결을 내리니 포항 시민 45만 명이 소송에 참여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번에 2심 법원인 대구고등법원은 포항 지진이 유발 지진이고 시민들이 정신적 고통 입은 것도 다 맞긴 한데 여기에 정부 과실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며 위자료를 몽땅 취소해 버렸다.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 · 법적 인과관계는 없어 보인단다. 나라가 세운 시설로 지진이 나서 국민이 고통을 입었고 나라가 나라 잘못이 있었다고 인정하길래 소송을 제기했더니 나라가 위자료를 주랬다가 다시 주지 말랬다가 한다. 포항 시민들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7년쯤 지났으니, 지진의 고통이 다 잊힌 줄 아는 것인가. 가해자는 원래 피해자의 아픔을 다 알 수 없는 법이다. △포항여자고등학교 고려대법과대학 이화여대로스쿨 현재)한동대 겸임교수 변호사김세라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김세라 변호사

2025-05-22

새순의 향연

산이 아기 엉덩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살이 오릅니다. 푸른 물을 머금은 나무들을 보면 마음부터 바빠집니다. 팝콘 터지듯 하는 꽃보다 연초록의 새잎에 마음을 뺏깁니다. 꿈틀거리는 새순의 옹알거림에 귀가 간지러운 날입니다. 스물 두어 살 즈음 4월의 그날, 내 눈에 비쳤던 그 연두 빛을 잊지 못합니다. 점심시간이면 으레 찾는 구내식당 밥이 싫었습니다. 친구와 나는 밥 대신 빵과 우유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뒷마당으로 가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습니다. 봄 햇살이 초록물감보다 노랑물감을 약간 더 섞어서 잔디밭에 훅 뿌린 것 같았습니다. 풋내가 확 덮쳤습니다. 새순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눈부심 속에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입이 먼저 엄마를 기억합니다. 가죽나무 순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친정 텃밭 한 귀퉁이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가죽나무 순으로 김치를 담았습니다. 식구 누구도 아닌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봄 내내 엄마의 냄새를 즐겼습니다.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나의 봄도 사라졌습니다. 나는 이십여 년 동안 그 맛을 지어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경주로 터전을 옮겼습니다. 잠시 시골집에 살 때였습니다. 옆집 할머니가 엄나무 순을 한 소쿠리 가져오셨습니다. 도시에서 온 우리가 먹을 줄 아느냐며 먹는 방법을 여러 가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눈만 끔뻑거리던 나는 가장 쉽다는 방법을 택해, 끓는 물에 살짝 데쳤습니다. 초고추장을 찍어 입에 넣는 순간, 엄나무 새순이 내 입맛을 홀렸습니다. 그동안 최고의 봄나물인 줄만 알았던 두릅이 엄나무 순에 밀려났습니다. 올해도 텃밭 한 귀퉁이에 보랏빛 제비꽃이 핍니다. 논둑에 냉이 꽃이 피고, 달래가 지천입니다. 텃밭에는 하얗게 완두콩 꽃이 피고, 부추와 쪽파가 자리를 잡습니다. 된장찌개 끓일 때마다 넣을 냉이와 달래까지 냉동실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쑥에 생콩가루를 묻혀 봄을 저장합니다.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저녁, 쑥국으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모양이 비슷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분류합니다. 씀바귀를 무치고, 고들빼기김치를 담습니다. 쌉싸래한 맛이 입안에 맴돕니다. 나는 이제 봄나물을 만지고 먹어야 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첫물인 부추로 김치를 담급니다. 양념 묻힌 쪽파를 통에 가지런히 담습니다. 김치 안 되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살짝 데친 머위를 김치 담그듯 양념에 무쳐봅니다. 된장으로 맛을 낸 것과는 또 다른 맛입니다. 시골 장에서 가죽나무 순과 초피나무 순을 샀습니다. 초피나무 순으로 장아찌를 만들고, 가죽나무 순을 만집니다. 인터넷을 뒤져 엄마의 맛을 내는 방법을 찾아봅니다. 그 맛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또 해 봅니다. 어지간히 따라간 것 같은데 엄마 냄새는 없습니다. 김치 통 하나 채우려면 얼마만큼의 가죽나무 순이 필요하고, 고추장 단지가 움푹 비어버린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나도 엄마처럼 김치 통에 가죽나무 한 그루 담습니다. 아들과 딸에게 반찬 한 번 변변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가죽 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르는데, 내 자식들은 언제 내가 생각날까. 이제야 애들을 생각합니다. 쑥을 한 움큼 보내겠다고 하자, 전화기 너머 딸애의 목소리가 뜨악합니다. ‘어떻게 하라고’가 말끝에 들려옵니다. 조금이라도 먹여 볼 요량으로 저마다 고유의 향과 맛을 가진 봄나물을 나열합니다.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해서 보내겠다고 해도 손사래 치는 딸이 보입니다. 봄나물은 긴 겨울을 이겨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맛이 그냥 생긴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세월도 그냥 지나온 게 아니 듯이요. 세파를 헤쳐 온 내 안의 세월이 봄나물을 끌어당깁니다. 겨우내 무뎌졌던 감각을 새순의 향기로 깨웁니다. 겨울을 이겨낸 쌉싸래한 맛으로 또 한해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돌나물 물김치까지 곁들여 식탁 가득 차립니다. 새순의 향연을 함께 즐길 엄마가 없어 서러운 봄날이지만, 나는 새순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윤명희 수필가

2025-05-21

낮달-신광 법광사지 당간지주

그대, 떠돌이면서도 원주민인 사람 타인과의 경계가 그토록 마음에 걸렸을까 밤낮 없이 기웃거린 발걸음 나쁜 것을 먼저 배워 허무를 실천하는 사람 산에 가리고 강에 잠기면서 물음표 느낌표 다 깨물어먹고 맨발로 자기 속으로 숨는 사람 비겁함에 힘을 실어주고 웃는 사람 새털구름 잔주름 묻은 햇살을 녹인 소주 한 잔 마시고 그걸로 양치질하는 더러운 사람 보는 이 마음에 무혈입성하여 남긴 차가운 소인(消印) 그렇게 누구에게나 원죄는 있다고 다그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사죄이며 소멸의 시작임을 가만히 지적하는 무기질의 비웃음 폴폴 날리며 걷는 사람 하늘엔 문이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문을 여는 마음이 예쁜 사람, 불치병이 없는 사람 그대 원주민이면서도 떠돌이인 사람. … 일상적 혹은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이란 말을 나는 자주 사용한다. 그보다 더한 철학은 없다고 믿는다. 평범해서 눈부시다. 모든 사람의 생애가 반드시 그러하다. /이우근 ..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5-05-21

알레르기 비염의 치료

알레르기 비염은 단순히 ‘코에 염증이 생겨 콧물이 흐르는 병’이 아니다. 코 점막의 과민반응은 전신 면역계의 불균형이 빚어낸 결과이며, 피로‧수면 부족‧스트레스 등 생활 리듬이 조금만 흔들려도 증세가 요동친다. 한방에서는 이처럼 과잉 흥분한 면역 시스템을 다시 균형점으로 돌려놓고, 차가워진 비강 내부의 기혈 순환을 회복시키는 것을 근본 치료의 목표로 삼는다. 실제 임상 현장에서 체력이 떨어지고 감기에 잘 걸리는 환자에게 먼저 쓰는 처방이 시호계지탕이다. 면역을 올려주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약으로 이 약을 복용하면 환자들은 ‘몸이 덜 찌뿌드드하다’ ‘야근 뒤에도 코가 덜 막힌다’는 변화를 가장 먼저 체감한다. 면역 토대가 어느 정도 다져졌는데도 아침 기상 직후 맑은 콧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재채기로 기침을 하면 면역과 함께 차가운 습기가 문제다. 몸이 마르고 약한 사람은 몸을 보하면서 한습을 제거 하는 소청룡탕을 사용한다. 약이 맞으면 재채기 횟수가 줄어들고 콧물이 더 이상 목뒤로 흘러내리지 않는다. 몸도 따뜻해지고 멍했던 정신이 맑아지는걸 느낄 수 있다. 동물실험에서는 소청룡탕이 비점막 내 히스타민, IL-4, IL-5 분비 자체를 억제해 재발 빈도를 낮춘다는 결과도 확인되어 약을 충분히 복용하면 먹을 때만 효과 나는 약과는 다르게 완치 가까이 된다. 약침 치료는 익구개신경절을 초음파로 정밀 타깃팅할 때 시너지가 극대화된다. 이 신경절은 코와 부비동 점막을 지배하는 교감 부교감 신경이 뒤엉킨 교차로라 이 부분에 직접 약침이 들어가면 부교감성 혈관확장을 억제하며 점막 충혈을 가라앉히고 교감성 섬유 흥분을 완충해 즉각적인 코 뚫림을 유도한다. 초음파 화면으로 내·외익돌근, 상악동, 내경동맥 위치를 실시간 확인하므로 시술 안전성도 높다. 2024년 발표된 무작위 대조 연구에서 4주 동안 주 1~2회 초음파 유도 SPG 약침을 받은 환자군의 총 비증상 점수가 대조군 대비 40% 이상 감소했고 뿐만 아니라 야간 수면 질 지표도 유의하게 향상되었다는 결과가 보고되었다. 침 치료와 부항요법은 이러한 약침 효과를 묶어주는 실타래다. 침으로 코 주변의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부항으로 등의 폐와 심장을 자극하는 신경에 사혈을 하면 약침 효과가 한층 더 증대된다. 집에선 37 ℃ 약염수로 하루 두 번 가볍게 비강을 세척하면 염증 매개물질이 빠르게 씻겨 나가 재발 곡선이 완만해진다. 수면 역시 방어막을 세우는 데 빠질 수 없다. 성인 기준 7시간 이하의 부족한 수면은 단 하루 만에 자연살해세포 활성을 30%나 떨어뜨린다는 보고가 있어, 충분한 숙면은 어떤 약물·약침보다 강력한 면역 조절제다. 시호계지탕으로 면역을 올리고 소청룡탕으로 급성 증상을 잡고, 익구개신경절 약침으로 신경·혈관 반응을 조정한 뒤 침·생활요법을 병행하면 대부분의 알러지 비염은 큰 효과를 본다. 제대로 치료가 되면 일시적인 증상의 개선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큰 재발 없이 지낼 수 있다. 다만 체질과 동반 질환에 따라 약의 처방 구성이 달라지며 몸의 면역을 올리고 보하는 약재를 같이 처방을 해야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있다.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21

손녀가 쓴 나의 이야기

몇 달 전 서울의 맏손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부모님의 삶을 인터뷰해서 글을 써야 하는 숙제가 있다고 했다. 5학년인 손녀는 매우 조신했다.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는 나지막하되 다정했으나 더러는 집요하기도 했다. 할아버지께 양해를 구해 달라는 당부를 먼저 했다. 할아버지께서는 귀가 좀 어두우시니까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실 것 같아서 할머니 인터뷰할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서운해하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네 작은 전화 목소리를 어떻게 들으시겠니? 걱정말라는 나의 말을 듣고선 정해진 인터뷰 목록인지를 먼저 읽어주었다. 어린 시절, 학창 시절, 사회생활, 현재와 미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 등등이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였기에 준비할 겨를은 없었다. 약 20여 분 동안 손녀의 물음에 즉흥적이긴 했지만 성실히 답했다. 인터뷰를 다 마친 후 글로 적을 것이라면서 고맙습니다. 인사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니 더 나은 대답을 할 걸 생각했지만 다시 전화하진 않았다. 그러곤 잊었다. 며칠 전 아들이 바로 그 책(?)을 우편으로 보냈다. 분홍색 종이 두 장을 반 접어 표지까지 총 8쪽. 빨간색 실로 묶은 선장본(?)이었다. 표지엔 제목인 듯 “이정옥 교수님의 삶”이라 크게 쓰고 손녀 이 윤 지음. 목차도 적었다. 오른쪽 하단에 내 얼굴임이 확실시되는 파마머리에 안경 낀, 팔자 주름 선명한 노인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라고 떨리기까지 할까. 나를 어떻게 표현하여 썼을까 호기심, 설렘, 두려움 등등의 감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인터뷰한 내용을 거의 가감 없이 차례대로 적었다. 페이지마다 짧디짧은 글 아래 글의 내용에 꼭 맞는 삽화가 자그마하게 그려져 있었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과수원에서 아침마다 토마토를 따 드셨다. 토마토즙 때문에 입술이 따끔거렸던 기억도 있다고 하셨다.”는 글 아래 토마토를 베어 물며 얼굴을 찡그린 어린 여자아이를 그려 둔 식이다. 학창 시절 가야금을 배운 에피소드 아래엔 가야금 타는 긴 머리의 여자아이와 음표. 현재와 미래 페이지에는 글 쓰는 할머니, 한국어를 가르치는 할머니 모습을 적고 그렸다. 표지의 목차에는 없는 내용도 있었다. 글쓴이인 나(손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는 제목엔 내가 꾼 손녀의 태몽 이야기를 적었다. “손녀인 나에게 나의 태몽-고래떼가 바다에서 춤추는 꿈-처럼 넓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는 말씀을 하셨다.” ‘넓은 세상’은 ‘바다’요, ‘자유롭게’는 춤추는 고래라며 화살표로 표식해 둔 것이 놀라웠다. 내 말을 찰지게 이해해서 비유 풀이까지 한 것 아니겠는가. 그 페이지엔 바다에서 춤추는 고래와 지구 위에서 웃으며 춤추는 여자아이의 삽화가 있다. 마지막 페이지는 무려 “작가의 말”이었다. 흐뭇하고 대견하고 기특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대로 옮겨본다. “그렇다. 생각했듯이 나는 할머니의 손녀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의 작가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정옥 할머니는 은퇴한 지금도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계신다. 여러분도 이정옥 할머니처럼 열심히 공부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작가인 손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만든 첫 책(?)의 주인공이 된 이 맘을 어찌 표현할 말이 없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1

대기업의 지역 부동산 매각, 대구경제 흔드나

국내외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대구경북 진출 대기업들의 부동산 매각 처분이 잇따라 지역경제에 미칠 파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종합 유통업체인 이랜드리테일은 최근 대구 2곳, 경북 1곳 등 전국의 5곳의 부동산을 매각키로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랜드리테일이 매각할 것으로 알려진 지역의 부동산은 대구 수성구 동아백화점 수성점, 강북점 및 별관, 구미점 등이다. 이랜드그룹은 2010년 대구의 향토기업인 동아백화점과 우방랜드 등을 인수하면서 그동안 지역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번 부동산 매각이 경기침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면서 대기업의 지역 이탈 등 부정적 신호탄으로 비춰져 지역 경제계가 우려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이랜드 관계자는 “향후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조치로 부동산 가치를 확인하기 위한 자산평가의 하나”라고 밝히고 있지만 침체된 대구 시장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한 몫한 것으로 보는 분석을 배제할 수 없다. 또 KT가 대구 수성구 범어빌딩을, KT&G가 남구의 대구경북본부 빌딩을 매각키로 한 것 등도 같은 맥락에서 보여진다. 회생절차를 밟고 있는 홈플러스가 최근 대구 내당점 폐쇄를 결정한데 이어 동촌점도 폐쇄할 것으로 점쳐지면서 대구경제 전반에 불안한 심리가 감돌고 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도 대규모 부동산이 잇달아 시장으로 유입되면 가뜩이나 침체된 지역 부동산시장에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대기업 보유 부동산 매각은 부동산 시장의 장기침체를 가속화시키는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 대기업의 대구 이탈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대구경제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심각히 고민할 문제다. 알다시피 대구는 지역총생산이 31년째 전국 골찌다. 대구의 고용률은 58.2%로 전국 평균 62.5%에 턱없이 못미친다. 일자리가 없어 수많은 젊은이가 해마다 대구를 떠나고 있다. 그나마 대기업이 한자리를 떠받치고 있는 경제 영역이 빠져나간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구경제의 분발이 필요하다.

2025-05-21

TK현안 쭉 나열해놓고 대선공약이라니

제21대 대선일이 임박하면서 각 후보의 공약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한 표가 아쉬운 대선후보들로선 전국 골목골목 현안을 모두 공약으로 포장해서 캠페인에 나서고 싶겠지만, 유권자 입장에서는 공약 하나하나가 실현가능성이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일에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경쟁하듯 대구·경북(TK)공약을 발표했다. 국민의힘은 이날 대구의 경우, 12개 국회의원 지역구별로 3~4개 정도의 공약을 제시했다. 핵심공약은 서대구역에서 TK신공항을 잇는 고속철도 건설(지난해 5월2일 기획재정부 재정사업평가위원회에서 예비타당성 조사 대상사업으로 선정), 대구~광주 간 198.8㎞를 1시간 생활권으로 연결하는 달빛고속철도 조기 착공, 경부선 대구 도심구간 지하화, 대구 취수원 이전, 대구시청 신청사 조기 건립 등이다. 경북 공약은 포항 영일만대교 건설 조기 완공과 ‘철강산업지원특별법‘ 제정, 울릉공항 활주로 확장 등이다. 민주당의 TK공약 리스트 중 앞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대구를 ‘AI로봇 수도’, 그리고 세계인이 찾는 문화예술도시로 만들겠다는 것과 도시철도 5호선 단계별 건설, 염색 산단 이전과 취수원 다변화 등이다. 경북도 공약 중에는 영일만항 확충지원, 의과대학 설립 검토 및 상급종합병원 유치 지원이 눈에 띄는 정도다. 위에서 열거한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공약 중 새로운 사업이나 정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모두 현재 대구시와 경북도가 추진하는 현안을 열거하면서 지원하겠다는 약속에 그치고 있다. 현안 지원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이나 재원 대책 등은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 식의 책임없는 약속이다. TK지역에선 이번 대선에 거는 기대가 크다. 유력 대선주자들이 모두 이 지역 출신이라 주요 현안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다. 그러나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내놓은 공약 대부분이 각종 선거 때마다 거론돼온 단골 메뉴인데다 그마저도 구체성 없이 ‘지원’수준에 그치고 있어, 신뢰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2025-05-21

손흥민과 ‘임신 협박’

언필칭 ‘막장 드라마’ 방불이다. 젊은 여성 하나가 두 명의 남성과 동시에 연애를 했다. 와중에 임신을 했는데 여성은 그 아이가 어떤 남성과의 관계에 의해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둘 모두에게 “임신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게 싫으면 돈을 내놔라”고 한다. 남성 가운데 하나는 협박을 무시했고, 나머지 한 남성은 3억 원이란 거액을 송금한다. 이후 여성은 낙태를 했고, 결국 아이는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여기까지만 해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혀를 찰 일인데, 이야기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여성은 또 다른 남성을 만나 교제한다. 헌데, 그 남성이 3억 원을 여성에게 준 남성에게 연락해 “여성이 당신을 만날 때 양다리를 걸쳤다. 사기와 공갈로 고소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줄 테니 내게 70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이건 여성 한 명과 남성 세 명이 등장하는 ‘치정 스릴러 영화’ 스토리가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3억 원을 건넨 사람은 유명 축구선수 손흥민이고, 협박을 한 여성과 7000만 원을 요구한 남성은 구속됐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 그것도 자신의 아이를 범행도구로 사기와 협박을 일삼은 여성의 행태는 ‘금수(禽獸)와 다르지 않다’고 질타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웬걸. TV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한 판사 출신 변호사가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것과 유사한 사건이 적지 않아요. 나도 재판정에서 여러 번 봤고요.” 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까지 된 것일까? 21세기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본 듯해 입맛이 한없이 쓰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