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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치와 막말

“과거 ‘여자는 밤에만 쓰는 것’, ‘주막집 주모’ 등 발언한 적 있느냐” “대통령 앞에서 깐죽거리고 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나” 도대체 듣고 있기가 쉽지 않다. 대선 국면에서 쏟아지는 막말들 말이다. ‘춘향이’ 운운한 어떤 발언은 입에 담기도 어려워 여기 적을 수조차 없다. 내란 정국 때는 ‘계몽’과 ‘요원’이란 단어가 히트(?)더니, 근래엔 ‘깐족’과 ‘아부’, ‘키높이 구두’와 ‘눈썹 문신’이란 말이 유행인가보다. 기억에 남는 정책이나 국정철학은 없고 오로지 ‘비아냥’과 ‘조롱’만 남은 모 정당의 토론회를 보고 있자니, 저들에겐 과연 역사에 대한 부채 의식이나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대통령 파면으로 시행되는 엄중한 대선인데, ‘비상계엄’과 ‘탄핵’마저 희화화되고 있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공론장에서의 말(Lexis)과 행위(Praxis)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말과 행위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의 발언은 그 수행적인 힘을 대의하는 자리에서 발화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언어의 생산과 교환은 일정한 언어 자본을 갖춘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상징적 권력 관계 속에 자리 잡는다고 논한 바 있다. 언어 교환의 권력 관계는 제도적이든 아니든 그들이 집단으로부터 받고 있는 인정에 따라 상이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누구든 말할 수 있고, 명령의 의미를 발화할 수 있지만, 필요한 권위가 결여되어 있는 자에게 그것은 ‘행위’가 될 수 없으며, 단지 ‘말’로만 남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인의 말은 수행적인 힘을 갖는다고 여길 수 있다. 그만큼 책임이 동반되는 행위라는 거다. 말하는 자는 자신의 발화가 ‘언어의 장’에서 어떻게 수용될지에 대해 나름의 예측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와 담론은 언제나 ‘완곡어법’이자 ‘타협’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잘 말하려는’, ‘적절하게 말하려는’ 전략적 수정의 결과이기에 ‘완곡어법’이며, ‘말해야 하는 것’과 ‘표현되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발화 형태가 결정되기에 일종의 ‘타협’인 것이다. 그런데 언어의 수용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의식적인 계산으로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언어적 아비투스(habitus)의 영역이라 수용가능성에 대한 감각,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언어생산물의 잠재적 가치에 대한 감수성에서 기능한다. 이점을 비춰볼 때 막말을 해대는 정치인의 언어 감수성이 어느 레벨에서 작동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선 토론을 겨우 ‘말싸움’ 정도로 여기는 천박한 권위 의식과 경쟁심이 결합 된 언어적 결과에 불과한 것 아니겠는가. 예전의 보수는 나름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위선이라도 부렸다. 위선이란 적어도 세간의 이미지를 의식하고 남들 눈치 정도는 보기 때문에 가능한 가식이다. 그럼에도 즉물적 감정에만 휩싸여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저 오만한 권력이 언제까지 연명할 수 있을까? 토론 자리를 상대 ‘망신주기’의 기회 정도로 여기지 말기를 바란다. 막말이 계속되는 한, ‘천박한 정치’에 대한 ‘고상한 대중’의 심판도 오래고 지속될 것이다. /허민 문학연구자

2025-06-01

더하기 빼기를 잘하자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선택의 순간을 자주 맞닥뜨린다. 작게는 오늘 무엇을 먹을까, 메뉴를 결정하는 일부터 크게는 대학 진학이나 결혼 등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선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선출 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선택도 있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합리적 사고로 결정하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 경우만 해도 잘못된 선택으로 시간 버리고 돈 버린 경우가 셀 수가 없이 많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도 졸업 후 진로도 생각하지 않고 결정하고, 결혼할 때도 노래 잘하기에 지나치게 점수를 많이 주었다. 모두 감정에 치우쳐 하나만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선택을 할 것이다.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떤 항목에 지나치게 점수를 후하게 배분하고 다른 항목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런 조짐이 많이 보인다.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해서 지지하는 후보는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반대하는 후보에게는 적개심을 품기까지 한다. 어떤 유권자는 자기가 반대하는 후보자 유세장에 트럭을 몰고 가서 덮치고 싶다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주제별로 세 차례 토론이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하고 일부 후보의 자극적인 질문은 대선 토론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문제 제기가 나올 정도로 후폭풍이 큰 상황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유권자들은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하는 일은 헌법 제4장 1절 66조에 있다. ①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②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ㆍ영토의 보전ㆍ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③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 중국 고전 ‘대학’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의 단점을 알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의 장점을 알아서 합리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대통령이 수행해야 할 일을 염두에 두고 후보들의 장단점을 비교해 보자. ‘더하기 빼기’ 기법은 장단점 비교에 도움이 된다. 이 방법을 개발한 사람은 에드워드 드 보노라는 의사인데, ‘수평적 사고’라는 용어를 만드는 등 사고력 향상 방법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더하기 빼기 기법’은, 정확하게 말하면 PMI(더하기 빼기 흥미)라서 항목이 하나 더 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 같은 명확한 선택지가 있는 경우에는 흥미 항목을 빼도 좋다. 먼저 자기가 적극 지지하는 후보와 경쟁하는 후보 두 사람을 선택한다. 그다음 후보들의 주요 정책을 뽑은 후 각 정책에 대해 긍정하는 근거와 부정하는 근거를 찾아 10점 척도로 점수를 매긴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면은 더하기 점수, 부정적인 면은 빼기 점수를 부여한 다음 합계를 낸다. 옷 하나, 휴지 하나를 사도 매장마다 브랜드마다 가격과 품질을 꼼꼼히 비교한다. 5200만 명의 삶이 달린 대통령을 뽑는 일이니만큼, 더하기 빼기를 잘해서 능력 있는 대통령을 뽑자. /유영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

2025-06-01

본투표 변수는 유시민·이준석 ‘舌禍(설화)’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지낸 유시민씨의 설난영 여사 학력비하 발언과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젓가락 발언’ 논란이 내일 치러지는 대선 판세의 변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유씨는 지난주 김어준씨 유튜브에 출연,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아내인 설 여사를 겨냥해 “대통령 후보 배우자는 설씨 인생에선 갈 수 없는 자리”라고 했다. “고졸 노조위원장 출신인 설 씨가 대학생 출신인 김문수와 혼인하면서 ‘고양(高揚)”됐고, “그 이후 국회의원·경기지사 사모님이 되면서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막말도 했다. 설 여사가 김 후보와 만나 신분 상승을 했으니, 대통령 배우자가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는 얘기로 해석된다. 참 기막힌 말이다. 설 여사가 태어난 1950년대에는 대부분 여성이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때였으며, 순천여고는 명문고였다. 유씨는 한 때 노무현의 후계자란 소리까지 들었다. 그 자신도 김대중·노무현 정신을 입에 달고 살았다. 두 전직 대통령은 목포·부산상고 출신이며, 대통령이 된 후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통합정치를 해 전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분이다. 이러한 정치환경에서 장관까지 지낸 유씨가 학벌과 근로자 비하발언을 하며 대선후보 배우자를 조롱한 것은 사과로만 그칠 일이 아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선후보의 ‘젓가락’ 발언도 품격 없는 행위다. 이 후보는 지난주 TV토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아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댓글을 인용해 권영국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여성의 성기에 젓가락을 꽂고 싶다’고 하면 여성 혐오에 해당하느냐”고 물었다. 당장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민형배 의원을 비롯해 야권 국회의원 21명은 “시청자들이 성폭력 발언의 피해자가 됐다”며 지난 30일 국회의원 징계안을 발의했다. 의원직 제명은 재적 의원 3분의 2(200명) 이상이 찬성하면 통과된다. 국민의힘 의원들의 선택에 따라 이 후보의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 유시민·이준석의 발언이 대선 판세를 어떻게 뒤바꿔 놓을지 주목된다.

2025-06-01

자식 농사

우리 속담에 “자식도 농사와 같다”는 말이 있다. 농사를 짓는 일처럼 자식을 키우는 일도 제때 낳고, 낳은 자식은 잘 돌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을 농사에 비유한 것은 한국인이 농사를 전통적으로 중요시 여겨왔던 오랜 농본의식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한국인에게 농사는 먹고사는 삶의 전부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농업을 산업의 으뜸으로 삼는다는 철학이다. 백성의 생업이 농업에 달려 있고, 나라의 경제도 농업을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는 사상이다. 이런 농본주의 사상 속에서 자식 키우는 일을 농사짓는 것과 비유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농사를 통해 수확을 얻는 것과 같이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통해 우리의 부모들은 수확만큼의 큰 기쁨을 얻는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자식 농사가 잘됐다는 것은 반드시 자식의 출세나 성공만을 기준 잣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자식이 돈을 아무리 많이 벌었다 하더라도 시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인물이라면 자식 농사가 잘됐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바른 인격과 인성을 지니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일 떼 자식 농사도 잘됐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얼굴을 닮는다”는 말은 부모가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자식도 본받아 훌륭하게 자랄 수 있다는 뜻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 아들의 도박 및 음란글 게재가 대선을 앞둔 정국에서 논란이다. 이 후보가 “잘못 키운 제 잘못”이라며 사과성 발언을 했지만 대선 판세에 악재가 될지 주목된다. 대선 후보들의 자식 농사는 후보들의 가정교육과 가풍을 살펴보는 주요 요소란 점에서 유권자들에게는 주요 관심사가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6-01

해군 초계기 추락, 사고원인 철저히 규명해야

지난달 29일 오후 경북 포항에서 훈련 중이던 해군 해상초계기(P-3CK) 1대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조종사를 포함 탑승자 4명이 모두 숨졌다. 사고 군용기는 이날 오후 훈련차 포항기지에서 이륙했고, 이륙 6분만에 원인 미상의 이유로 급격히 기지 인근 야산에 떨어졌다. 군 비행기가 추락한 곳에서 불과 250m 떨어진 지점에 680가구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자리하고 있어 자칫하면 대형참사로 이어질 뻔도 했다. 해군은 사고 대책본부를 구성하고 사고원인 규명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비행기 잔해와 비행기록장치 분석 등을 통해 기체결함, 정비 미비, 조종 이상 등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정밀 조사를 벌인다고 하니 조사 결과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군 관계자는 사고가 난 군 비행기는 당일 두 번째 훈련에 돌입했으며 공중선회 도중 별다른 교신 없이 이륙 6분 만에 추락했다고 말했다. 또 이날 기상도 양호했고, 훈련경로도 평소와 같았으며 초계기는 2010년 새 기체 수준으로 개조돼 안전상 문제가 드러난 적이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군은 동일 기종의 비행기 8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고 후 모두 비행을 중단시켰다고 밝혔다. 포항에서는 2018년 7월 해병대 상륙기동헬기 마린온이 포항경주공항 활주로에서 추락해 5명의 장병이 순직하는 사고가 있었다. 군 항공기 사고는 군부대 인근 주민들에게는 늘 불안감을 준다. 평소 군 비행기의 소음과 분진 등으로 불만이 있는데다 사고까지 겹치는 경우는 불안감이 증폭된다. 이번 사고가 난 지점 인근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로선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올 3월 6일에는 공군 KF-16 전투기가 공대지 폭탄 8발을 오폭해 민간인이 다치는 사고를 냈다. 황당한 군 비행기 사고가 올들어 벌써 네 번째 발생했다. 사고 원인을 철저히 밝히는 것이 또 다른 사고를 예방하는 최선의 방책이다. 군 당국은 사고 원인 규명에 집중해 그 원인을 국민에게 소상히 알려야 한다. 동시에 선거 등 어수선한 정국으로 군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빌미가 된 것은 아닌지도 살펴 기강 확립에도 나서야 한다.

2025-06-01

대선 토론회 유감

인간이 여타 생물과 다른 점은 여러 면에서 찾을 수 있지만, 그 근간은 언어에 있다. 언어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인간의 기초적인 생존과 문화, 고도로 발전된 문명의 요체(要諦)다. 아울러 언어는 개인과 집단 혹은 종족과 민족의 본질을 드러내는 지표로도 작용한다. 어떤 민족의 언어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원형과 지향하는 종착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대선 토론회를 보고 들으면서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네 사람의 식견을 국민이 생중계로 확인하는 면접 형식이 텔레비전 토론회다. 그런 자리에서 후보들의 지적-정신적-인격적 자양분과 밑천이 드러남으로써 많은 국민이 큰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토론회가 진행되었는지, 토론회 자체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토론(討論)의 핵심은 ‘말’에 있다. 말의 다른 표기가 언어(言語)다. 개인이 활용하는 말과 표현은 그가 살아온 인생행로와 경험, 독서와 사유, 인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런 까닭에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예악사어서수’로 요약되는 ‘육예(六藝)’를 지식인의 기본적인 자질로 여겼다. 중세 유럽에서 문법, 수사, 변증 세 과목을 대학 교양과목으로 설정한 것도 같은 이치다. 토론의 전제는 경청과 인내 그리고 설득이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그와 나의 차이가 명백하게 변별된다. 그와 나의 차이를 알아야 나의 견해를 제대로 피력할 수 있다. 이런 작업에는 인내가 수반된다. 남의 말, 그것도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듣는 일은 그야말로 고도의 집중력과 절제된 예의범절이 선행조건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견해를 가진다. 다수 대중이 지배하는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모든 개개인은 고유한 입장과 태도로 견고하게 무장돼 있다. 그런 까닭에 상반된 견해를 가진 사람을 설득함은 매우 어려운 과업이다. 그래서 최고 정치 지도자에게는 일반 대중보다 훨씬 많은 독서와 사색 그리고 고뇌의 경험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어느 대선 후보의 배설에 가까운 ‘젓가락’ 막말을 듣노라니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솟구친다. 툭하면 명문대 나왔다고 떠벌리는 자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언어폭력이 끔찍하게 다가온다. 소크라테스는 말할 때 가져야 할 세 가지를 지적한다. “하려는 말이 사실인가,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필요한가, 필요한 말이라도 그 말이 선한가?!” 대선 토론회에 나선 후보자 가운데 누가 한 권의 시집, 한 편의 연극이나 영화를 진정으로 보았는지, 참 궁금하다. 그들의 빈곤한 언어와 의사 표현 방식과 그것을 강제한 엉성한 토론 규칙이 마음에 걸린다. 청소년들도 함께 본 토론회가 미래 세대의 자양분이 되려면 토론자들의 인격과 품위가 담보되어야 한다. 그것의 첫 번째 전제가 풍성한 독서와 인격이다. 정치 지도자는 분출하는 사적 욕망을 절제된 언어로 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지적-정신적-인격적 능력을 갖춰야 한다. 정치는 무엇보다 먼저 인간이 된 사람만이 해야 한다. 이것이 인간 아닌 자가 저지른 내란으로 치르게 된 대선 토론회를 본 나의 쓰라린 소감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2025-06-01

조선 풍수지리학자 남사고 기록 ‘호미곶 지명’ 낭설? 정설?

요즘 포항관광 1번지인 호미곶의 유래를 설명하는 호미곶 새천년기념관의 전시물을 비롯한 각종 홍보자료에는 조선 중엽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가 그의 저술 속에서 이곳을 호미등(虎尾嶝)이라 기록한 것이 단초가 되었다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 남사고가 지금의 호미곶을 호미등이라 기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걸쳐 몇몇 문헌에서 잘못 사용한 것을 뒤의 사람들이 확인 과정 없이 ‘퍼 나르다’ 보니 상당한 기간 와전된 채 정설처럼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백과사전에 소개된 남사고는 조선 중기 울진 출신의 학자로 역학, 천문, 지리에 통달하였으며, 동서분당, 임진왜란 등을 예언하였다 한다. 그러나 남사고의 고향이자 그의 기념관이 있는 경북 울진문화원에서 발간한 ‘격암선생일고역’에서는 ‘남사고비결’이니 ‘격암유록’이니 하는 풍수서들이 격암 선생과는 아무 관계없이 시대의 산물로 생성되어 세월 따라 전전하다가 더러는 호사가에 의해 문자로 정착이 됐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 세간에 남사고가 지었다고 알려진 풍수서는 남사고와 관련이 없는, 조작된 것들이다. ‘호미등’을 기록했다는 남사고의 저술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포항지역의 각종 자료에서 ‘호미등’을 기록했다고 하는 남사고의 저술을 조사해 보면 산수비록, 산수비결, 격암산수비록, 동해산수비록, 산수비경, 격암유록, 격암실기, 영남명승명당비기 등 무려 8가지나 된다. 그러나 이 8가지 책 중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실체가 없는 책을 두고 여기에 호미등이라고 기록했다고 하니 난감하다. 다만 ‘산수비록’에 전한다는 ‘호미등’ 관련 기록 12자만 확인할 수 있다. ‘격암선생일고역’에 보면 ‘산수비록’에 실려 있다는 ‘호미등’ 관련 구절이 나온다. 이 책 증보편 끝에 “滄洲蓬萊山下有虎尾嶝明堂(格菴山水秘錄)”이라는 문장이다. “滄洲蓬萊山下有虎尾嶝明堂”은 “창주 봉래산 아래에 호미등이라는 명당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창주’가 호미곶과 가까운 구룡포의 옛 명칭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말이 약 500년 전에 남사고가 지금의 호미곶인 호미등을 명당으로 지목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호미등의 남사고 관련설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산수비록」에 적혀 있다는 이 기록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여기에서 말하는 ‘호미등’은 현재 포항의 호미등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왜 그럴까? 현재의 구룡포읍을 ‘창주’라 부른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현 구룡포읍의 일제강점기 시절 명칭인 창주면(滄洲面)은 조선시대에 장기현(長鬐縣) 구역이었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기군 내북면과 외북면을 병합하여 창주면으로 명명되었으며, 1942년 10월 1일 구룡포읍으로 승격할 때까지 쓰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산수비록’ 속의 ‘창주 봉래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격암선생일고역’을 보면 임유후(任有後)가 쓴 ‘향현사상량문’이 있다. 이 속에 “滄洲直望靜玩嘉遯之爻閶闔高臨久鬱利見(후략)”이라는 구절이 있고, ‘창주(滄洲)’가 나온다. 창주는 글자 그대로 ‘푸른 물가’란 뜻인데, 여기서는 ‘신선이나 은자가 사는 곳’ 또는 ‘사람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산수 좋은 땅’을 의미한다. 봉래산(蓬萊山) 역시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하는 중국 전설상의 영산”을 말한다. 그러니 구체적 지명으로 봐선 안 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창주 봉래산’은 구체적 지명이 아닌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 정도로 봐야 한다. ‘有虎尾嶝明堂’의 ‘호미등’도 구체적 지명이 아닌 ‘최고의 길지’란 뜻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남사고가 살았던 조선 중엽에 이곳을 호미등이라 불렀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는 낭설이다. ​포항지역에서 호미등과 관련하여 남사고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다. 1985년 2월에 영일군에서 현재의 호미곶에 장기갑등대박물관(현 국립등대박물관의 전신)을 개관한 후 영일군수가 박물관 앞에 장기갑호미등(長鬐岬虎尾嶝) 유래비를 세웠는데, 거기에 처음 등장한다. “大甫는 예부터 自然美觀이 秀麗하여 六堂 崔南善 先生의 朝鮮常識 地理篇에 大韓十景의 하나로 記錄하고 있으며, 朝鮮 明宗朝 風水地理學者 格菴 南師古 山水秘錄에서도 이곳을 虎尾嶝이라 하여 범꼬리라 부른다.” 이 비석에 격암 남사고의 풍수지리서인 ‘산수비록’에 호미등(虎尾嶝)이라 하였다고 적었다. 장기갑호미등유래비(1985)에서 처음 언급되고, ‘포항시사’(1987)에 기록된 후 ‘확대 재생산’ 과정을 거쳐 여기 저기 인용되면서 왜곡되었다. ‘호미등’ 지명의 남사고 관련설은 무척 흥미롭고 극적인 요소가 있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게 지역사회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너무 많이 왜곡·전파된 상태이다 보니 오류임이 알려진다 해도 이를 과연 되돌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설령 되돌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실은 진실인 것이다. /동해안민속문화연구소장

2025-05-29

대구 취수원 이전, 비장한 각오로 해법 찾아야

대구시민의 먹는 물 개선을 위해 취수원을 안동댐으로 이전하는 사업(맑은물 하이웨이)이 낙동강 유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다. 자칫하면 지역 간 새로운 물 분쟁으로 비화할 소지도 없지 않아 보여 당국의 적극적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 지난 27일 상주에서는 대구취수원 안동댐 이전과 관련한 낙동강통합물관리방안 변경에 대한 주민 경청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환경부는 “대구시 안동댐 계약물량의 추가 공급은 없다” “안동댐의 일 46만t 취수는 최대 가뭄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상주의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의 부족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주시민들은 “안동댐 직하류에서 일 46만t의 원수를 대구로 공급하면 하천 유지수가 줄면서 수질오염 악화와 생활·농업용수 등의 부족이 우려된다”며 반발했다. 특히 “낙동강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국가사업을 하면서 대구시와 안동시만의 합의로 진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충분하고 신중한 검토"를 요구했다. 대구 취수원의 이전 문제는 30년 이상 끌어온 대구시민 숙원사업이다. 취수원을 옮겨 깨끗한 수돗물을 먹자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요구이자 권리다. 서울 등 전국의 많은 도시들이 댐 물을 마시고 있는데 대구시민만이 오염에 노출된 강물을 마셔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낙동강 상류 해평 취수장을 공유하려던 대구시의 계획은 수년 전 수포로 돌아갔다. 안동댐을 취수원으로 하는 이번 계획은 마지막 남은 대구시의 대안이다. 이것마저 실패한다면 대구시민은 오염에 노출된 낙동강 물을 영원히 식수로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대구시 등 관계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민을 설득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가 없다는 각오로 주민을 만나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그들이 만족할만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대구와 경북은 행정구역만 다를 뿐 동향이다. 대구시민의 취수원 이전의 절박함을 잘 알리고 낙동강 유역의 지역과 상생 발전하는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대구시민은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의 악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2025-05-29

6·3大選이 지역감정 굴레에서 벗어나는 계기 되길

정치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선거라는 정치의 결과물은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 투표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종종 감정에 휘둘리곤 한다. 이번 대선을 통해 우리나라는 건국,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거쳐 빠르게 발전해왔지만, 그동안 소홀히 했던 공화정의 기틀을 마련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공화정으로 융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좋은 국가의 필요조건이며, 공화 혁명은 이를 완성하는 충분조건이다. 그동안 한국 정치는 좌우를 막론하고 수구 세력을 심판하는 도살장과 같았고, 한국사는 역사의 법정 역할을 했다. 이제 상대를 적으로 보는 대신, 희망의 경쟁 상대로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공화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쉴 때, 비로소 희망의 균형을 이루며 힘차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을 타도하자!”라는 구호는 민주공화국을 자멸로 이끄는 지옥문과 같다. 공화혁명의 길에 들어서야만 자유 시민들이 공공선을 실현하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공화주의적 국민 통합은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통합과 조정의 리더십이 부족한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을 특정한 명사로 고정시키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자신을 단순히 ‘유권자’, ‘의사’, ‘교수’로 규정짓는다면, 그 안에 담긴 수많은 가능성과 역동성을 잃게 된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동사처럼 살아야 하며, 고정된 자아에 갇혀서는 안 된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도 그 사람의 본질과 대화하고, 상대를 인간 존재로서 대해야 한다. 스스로를 규정하거나 외부의 조작에 의해 한정된 ‘나’에서 벗어나야 한다. 동사적 삶을 살며 역동적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모든 조건, 소유, 지위를 다 떼어내고 나면 우리의 본래 존재는 호수처럼 투명하고 바다처럼 역동적이다. 우리는 현재 자신이 실천하고 있는 동사들을 나열해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공허감을 벗어나는 길이다. 저는 영·호남 지방인이 이번 대선에서 정치인들이 쳐놓은 거미줄 같은 사슬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지역감정의 망령을 떨치는 것이라고 본다. 지역감정은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손쉽게 승리하기 위해 순진한 국민들에게 뿌린 마취제와 같다. 이는 정치인들의 승리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지역감정을 이용한 술수에 철저히 농락당한 이들은 영남과 호남 사람들이다. 영남은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호남에서는 민주당 소속이 아니면 예수님이나 이순신 같은 인물도 공천이나 당선이 불가능하다. 결국 손해는 지역 주민들이 모두 떠안고 있다. 실제로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는 제대로 된 공약이 부재한 상황이다. 공화정을 향한 선거 혁명이 이루어진다면 영·호남의 관계도 이유 없이 멀어진 관계가 아닌,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력하며 상생하는 가까운 관계로 변모할 것이다. 함께 국가 발전을 도모하며 지혜를 나누고 힘을 합치게 될 것이다. 대전 대덕, 대구, 광주 등의 민간 및 군 공항 이전지에 과학기술 혁신 연구 단지를 조성하여 국가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트라이앵글을 형성할 것이다. /신광조​​​​​​​ 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2025-05-29

판세는 아직 유동적이다…투표율이 변수

제21대 대선 사전투표가 어제(29일)부터 시작됐다. 평일이지만 투표소마다 새벽부터 유권자들이 몰려들어, 투표율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정치분석가들은 “투표율이 본투표까지 합쳐 80% 이상 되면 국민의힘에게 유리하고, 그 이하면 민주당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대구·경북지역에서 투표·득표율 모두 82%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민의힘이 남은 4일간 보수성향 중도층을 얼마나 투표장으로 끌어내느냐가 승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대선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단일화가 무산되면서, 결국 3자 구도로 굳어졌다. 지금까지 각 여론조사기관에서 발표한 주요 후보 지지도는 조사 방법에 따라 편차가 컸다. 일부 여론조사만 보고 판세가 굳어졌다고 예단해선 안 된다. 아직 판세는 유동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앞으로 중도층의 선택에 따라 판세가 얼마든지 요동칠 수 있다. 그동안 각 후보는 TV토론회나 유세를 통해 자신의 정책 비전을 제시할 기회가 많았지만, 선거 종반까지 네거티브전으로 일관했다. 주요 정당과 후보자들은 지금부터라도 인신공격, 흑색선전을 멈추고 정책으로 지지자 외연을 확장해 나가야 한다. 유권자들도 선전·선동에 휘둘리지 말고 각 후보자의 공약을 바탕으로 지지 후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민주당은 그저께 발간한 공약집에서 사법개혁과 대법관 증원, AI 신산업 육성, 대통령 4년 연임제를 제시했다. 국민의힘도 지난 26일 내놓은 공약집에서 재건축 촉진특례법, 2032년 달 착륙 추진, 공수처 폐지, 비수도권 주택 취득세 폐지 등을 약속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론분열에다 심각한 경제·안보 위기까지 겪고 있다. 올해 경제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미국이 주한미군 4500명을 철수한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는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려면 국민 통합을 통해 국력을 결집할 수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한다. 유권자들은 나의 한 표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투표장에 나와야 한다.

2025-05-29

펫팸족 1500만명 시대

과거 애완(愛玩)동물이라 부르던 호칭이 요즘은 반려(伴侶)동물로 바뀌었다. 애완의 완(玩)은 장난감을 뜻하는 완구에 쓰이는 한자 말이다. 사람이 동물을 대할 때 장난감처럼 좋아하는 도구 정도로 여겼다는 뜻에서 나온 표현이 애완이다. 반려(伴侶)란 짝이란 뜻이다. 사람이 단순히 동물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넘어 사람과 동물이 동등한 관계라는 뜻이다. 동물도 사람과 감정을 교환하고 아픔을 나누고 소통하는 존재로 인정받는 사회적 흐름이 호칭까지 바꾸게 된 것이다. 2020년 동물보호법 개정으로 동물의 정서적 가치가 인정되고, 그 생명과 복지를 위한 법적 보장의 길이 열리게 됐다. 학자들은 이때부터 반려동물이란 표현이 공식적 법률적 용어가 됐다고 한다. 최근 펫팸족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Pet+Family의 줄인 말로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50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반려동물의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약 30%에 이른다는 말이다. 열 집 중 세 집은 반려동물이 있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반려동물과 관련한 산업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2015년 반려동물 시장 규모가 1조7000억원 정도였으나 올해는 4조원이 넘을 거란 추측이 나온다. 반려동물과 관련한 산업을 펫코노미라 부른다. 관련 분야로는 먹거리를 비롯해 영양제, 의류, 액세서리, 펫보험, 장묘업, 동물병원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사회적 추세를 반영하듯 대선후보들도 반려동물 의료비 경감 등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반려동물 팔자가 상팔자라 할만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9

두 글자를 새기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 나는 아들에게 자주 말했다. 자신이 흘린 땀과 시간은 자아를 단단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험을 앞둔 날이나 대회에서 고배를 마신 뒷날, 작은 성취 앞에서도 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성실하게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 여정 속에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에 욕심낼 때가 있었다.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를 기원하거나 안정된 기업에 취업하기를 바랄 때는 부모로서 간절히 결과에 집착했다. 아들의 어떤 실패는 나 자신의 좌절보다도 더 아프게, 더 무겁게, 더 쓰라린 상처로 내게 남았다. 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으로부터 멀어질 때면, 마치 실패의 날 선 조각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가슴팍을 긁고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통은 자식뿐만 아니라 그를 품고 살아온 나에게도 전이되었다. 그래서 결과에 매달렸다. 이럴 때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또한 살면서 과정이 중요한지, 결과가 중요한지, 내 마음속에서 의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내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해준 여행이 있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였다. 가우디의 흔적은 종교를 초월한 울림을 주었다. 돌마다 기도가 새겨져 있는 것 같은 조각품을 보니 가슴이 벅찼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자 시간의 성소에 머문 듯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빛이 시간 위로 내려앉아 성스러웠다. 경외와 경이, 그 사이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며 빛을 올려다보았다. 믿지 않는 사람조차 기도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나는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만드는 공간 앞에서 말없이 오래 서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대성당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장관이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을 붙잡은 건, 화려한 첨탑이나 섬세한 장식이 아니었다. ‘아직도 공사 중’이라는 대성당의 완성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대성당은 1882년에 착공해 지금도 짓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완성된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한다. 안정감과 질서를 주고 결과로서의 성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 앞에서는 미완의 건축물인데도 경외감을 느낀다. 완성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하는 가치관에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완성이라는 순간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속에서 더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면, 완성은 그 자체로 정지된 상태다. 반면에 짓고 있는 것은 살아 있다. 변화하고, 이어지고, 다음 세대로 흘러간다. 대성당은 가우디가 짓지 못한 부분을 지금의 장인들이 이어가고 있다. 대성당의 미완성은 단순한 불완전이 아니다. 가우디의 신념이 세월을 통과해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끊임없는 ‘도전’의 시간, ‘이어짐’의 마음이 곧 아름다움이었다. 언젠가는 완공될 그날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더 진실한 현재다. 그제야 나는 아들에게 결과보다 과정이 소중하다는 것을 왜 말했는지 깨달았다. 우리네 삶 또한 미완성의 대성당처럼 매 순간 완성을 향해 지어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간혹 실패를 하더라도 결과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실패를 이겨내는 힘이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곳에서 인식했다. 성취보다 더 오래 남는 건 결국 살아온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가우디의 묘소가 있는 대성당에 머무르니, 공간이 내 감정을 일깨웠다. 공간에 나의 기억이 보태지면 특별한 장소가 되어, 공간에 대한 사랑인 토포필리아(topophilia)를 느낀다고 한다. 과정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며 대성당의 품안에서 토포필리아를 만끽했다. /정미영 수필가

2025-05-28

‘TK 사전투표율’ 대선판세의 잣대 될 수도

지난 27일 열린 대선후보 3차 토론회도 지난 두 차례 토론과 마찬가지로 네거티브전으로 일관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김문수(국민의힘) 후보에게 “국회에서 국무위원들이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을 때 유일하게 일어나지 않았다.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고, 김 후보는 이 후보에게 “본인을 위해 모든 재판을 중지하고 대법관 수를 100명, 30명으로 늘리겠다고 한다. 황제도 이렇게는 안 한다”고 대응했다. 이준석(개혁신당) 후보는 이재명 후보에게 형수 욕설 논란을 꺼내 들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열린 토론회니 만큼 어느 정도 난타전이 예상되긴 했지만, 대선후보 토론회라고 하기엔 그 수준이 너무 낮았다. 세 후보가 이날 상대 후보를 공격한 주 무기는 ‘비상계엄’과 ‘사법 리스크’, ‘과거 발언’이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거론돼온 메뉴 들이라, 정책 경쟁을 기대했던 많은 시청자들이 식상해 했을 것이다. 오늘(29일)부터는 사전투표가 시작되면서 공직선거법에 따라 선거일인 6월 3일 오후 8시까지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된다. 부정확한 여론조사가 발표돼 선거 공정성을 해치더라도 시간이 촉박해 반박·시정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한 것이다. 이번 대선은 이재명·김문수·이준석 후보 간 3자 대결로 구도가 굳어지는 분위기다. 보수진영 단일화도 사전투표가 진행됨으로써 물 건너 간 것 같다. 국민의힘도 이준석 후보와의 단일화가 사실상 어려워졌다고 보고, 김문수 후보 지지층 결집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여론조사 추이를 보면, 이재명 후보와 김문수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고 있다. 이제 승부를 가를 최대변수는 투표율이다. 김문수 후보의 경우 최근 지지도가 상승하는 대구·경북(TK)지역 투표율을 역대급까지 끌어 올리면 대역전극을 펼칠 가능성도 있다. 아마 오늘 시작되는 TK지역 사전투표율이 후보들에겐 승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잣대가 될 것이다. 사전투표율로 보수진영 결집 정도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5-05-28

TK 신공항 국가사업, 대선후보가 약속해야

대구경북(TK) 신공항 사업을 국가가 주도하는 국가재정 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시민단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구경북 신공항은 기부대 양여방식 원칙 아래 대구시가 직접 건설하는 공영개발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나 자금조달의 어려움으로 사업 진척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 대구시는 신공항 건설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원 조달을 위해 정부의 공공자금관리기금의 융자를 건의했지만 기획재정부는 이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내놓은 상태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지난 2월 대구시 간부회의에서 “30조 원이 넘는 신공항 사업은 정상적으로 추진되려면 국가재정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이 맞다”고 말하고 “대구시 사업으로 추진한 자체가 잘못된 출발인 만큼 정부가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기부대 양여방식이란 대구시가 선투자 해놓고 민간 공항을 짓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K-2 군부대 부지를 팔아 신공항 건설비를 다시 충당해야 하는데, 신공항 사업비 규모가 수십조에 이르는 마당에 지방자치단체가 선투자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현재 TK신공항 사업이 지지부진한 것은 재정 조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통합신공항대구시민추진단은 27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국가 주도 TK신공항건설 촉구대회’를 열고 사업의 안정적 추진을 위해 정부 재정의 선투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을 찾아가 신공항 건설 촉구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대구경북 신공항사업은 지역 100년을 내다본 미래를 위한 투자다. 지역민의 기대와 염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국가적으로도 국토 균형발전을 이룰 사업이다. 지방소멸 극복에 도움을 주고, 신냉전 시대 국가 안보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부산의 가덕도 신공항이 국가사업으로 추진되면서 대구경북의 신공항을 지자체 부담 사업으로 둔다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다. 대구시가 대선후보 건의 1호 사업으로 신공항 조기 건설을 선정해 후보 측에 전달했다. 사업의 중요성과 대구경북민의 희망으로 가득 찬 사업이란 측면에서 당연하다. 이제 국가재정사업에 대한 대선후보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래야 희망이 보일 것이다.

2025-05-28

‘대통령의 아내’라는 자리

지위가 높은 사람의 부인을 일러 영부인(令夫人)이라 칭한다. 보통은 선출된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의 아내를 부를 때 사용된다.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영부인 역시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니 매사 몸가짐과 언사에 조심해야 한다는 건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영부인의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나 말이 남우세스러운 꼴로 대중 앞에 노출되는 걸 우리는 드물지 않게 봐왔다. 최근에도 그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 2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영부인과 함께 베트남을 찾았다. 그런데, 하노이공항에 도착한 비행기 입구에서 눈꼴사나운 장면이 연출됐다. 영부인이 마크롱 대통령의 뺨을 때리듯 강하게 얼굴을 미는 모습이 여과 없이 영상을 통해 전해진 것. 스물다섯 살 연상의 아내에게 밀쳐진 프랑스 대통령은 면구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걸 전 세계 사람들이 지켜봤다. 프랑스 당국은 즉각 “영부인의 장난”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각국 외신들이 ‘둘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 아닌가’라는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으니. 비단 프랑스 영부인만일까? 적절치 못한 행실로 국민들의 입길에 오르내린 영부인이 적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내는 공식 행사장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대통령이 내민 손을 뿌리쳐 화제가 됐다. 한국의 전 대통령인 문재인과 윤석열의 아내, 즉 한국 영부인들 역시 적지 않은 구설수에 휩싸여 있다. 영부인은 벼슬이 아니며, 안하무인(眼下無人)의 태도로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자리는 더욱 아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자신은 물론 남편까지 망치게 된다. 그러니, 다들 자중하시라.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5-05-28

토론인가 배틀인가

TV 토론이 유권자에게는 후보자의 자질을 가늠할 수 있는 창이며, 후보에게는 자신의 정책과 비전을 국민 앞에 펼쳐 보이는 기회다. 최근 방영된 TV 토론에서 토론 주제가 있었고 후보자 간 시간 배분도 조율된다. 그럼에도 정작 토론의 시간을 채운 것은 정책이 아니라 인신공격이었다. 후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통 특정 후보에 대한 비난으로 채웠다. 본인의 비전이나 공약에 대한 설명은 단편적이거나 생략되기 일쑤였다. TV 화면 앞에 앉은 국민은 ‘우리가 왜 이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지’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정치토론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자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은 ‘다른 생각’의 공존이며 토론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 조율해가는 과정이다. 후보자들이 서로의 정책과 가치관을 비교하며 논리적으로 겨루는 가운데, 유권자는 각자에게 더 믿음직한 정책을 선택할 근거를 확인한다. 오늘 선거 토론은 본래의 취지를 잊어버렸다. 무엇이 문제일까. 토론문화 자체에 대한 후보자들의 바른 인식이 없다. 후보자들이 토론을 ‘전투’로 인식하여 공격과 방어로 점수를 따고 상대의 실수를 하나라도 끌어내어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명료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인데 토론 시간을 상대방 흠집내기로만 날려버린다. 유권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결과만 낳는다. 토론의 운영방식도 문제다. 주제가 분명히 제시되었지만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비껴가며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후보에게 제재가 없다. 사회자는 때때로 공정한 중재자라기보다 시간 관리자 역할만 한다. 방송사의 편집방식도 갈등과 자극 위주로 흐르는 경향이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토론보다 고성과 자극적인 언행이 ‘돋보이는 전략’이 되고 만다. 토론에 대한 교육과 훈련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 유권자도 정치인도 진정성 있는 대화보다 ‘말싸움’에만 몰입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토론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공직선거 TV토론의 규칙을 더욱 엄격히 정비해야 한다. 주제 이탈, 인신공격, 반복 발언에 대한 경고와 벌칙을 정비하고 실효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사회자의 적극 개입권과 진행 권한을 강화해 토론의 질을 높여야 한다. 유권자의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 자극적인 발언보다 성실하고 조리 정연한 설명을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언론이 정책중심 보도를 강화하고 선거 토론을 예능처럼 소비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가 이겼나’가 아니라 ‘무엇을 말했나’를 무겁게 여기는 분석과 보도가 필요하다. 정당의 책임도 크다. 후보자에게 단순한 말싸움 기술보다, 시민과 소통하는 진정어린 화법과 설득력을 장착하도록 준비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정당 스스로 ‘네거티브 선거’를 탈피하려는 의지를 세워야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토론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다. 토론이 정치의 얼굴이어야 한다. 어떤 토론을 하느냐는 어떤 정치를 바라는가 보여주는 거울이다. 선거 토론은 배틀이 아니다. 토론이 성숙해야 정치가 숙성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28

오장육부-정신과 육체

오장육부(五臟六腑)에는 몸과 마음, 그리고 삶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지도가 담겨있다. 장(臟)은 에너지를 저장‧변화시키는 본체이고 부(腑)는 그 에너지를 순환‧배출시키는 통로다. 이 둘이 서로 호흡을 맞추면 기와 혈이 전신을 부드럽게 흐르고, 사람의 몸과 마음은 동시에 튼튼해지고 가벼워진다. 반대로 간이 울체되면 근육이 뻣뻣해지고 화(火)가 치밀며, 신장이 허하면 요통과 무릎 통증이 찾아오는 동시에 두려움이 증폭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 관찰이 현대 의학의 언어로도 설명된다는 점이다. 장(腸)과 뇌를 잇는 ‘장–뇌 축’ 연구는 장에서 합성된 세로토닌과 도파민이 뇌의 감정 회로를 움직인다는 사실을 밝혔고, 이는 곧 비위(脾胃)와 심(心)의 연관성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한다. 몸과 마음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다. 일상에서 깊고 일정한 호흡으로 폐를 충분히 사용하면 산소 포화도가 높아지는 동시에 과다한 교감신경 흥분이 잦아들어 불안이 완화된다. 반면 수면이 부족해 비위 기능이 흐트러지면 달콤한 음식이 당겨 체중이 늘고, 뇌의 보상 회로는 과각성 모드로 돌입해 짜증과 집중력 저하가 뒤따른다. 규칙적으로 걷거나 달리는 전신 운동은 간의 기혈 순환을 촉진해 근육 뭉침을 풀어 줄 뿐 아니라 정체된 감정까지 배출한다. 이처럼 ‘좋은 컨디션’은 특정 장부 하나를 집중 관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빈틈없이 협연할 때 비로소 꽃피는 총체적 상태다. 정신 건강 역시 장부 균형에 달려 있다. 한의학은 마음의 근거를 심장만이 아니라 간‧비‧신장까지 오장육부 모두가 폭넓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간은 욕구와 창의성, 비는 사유와 기억, 신은 의지와 생명력의 뿌리를 맡는다. 과로로 비위가 허하면 사소한 일을 곱씹는 사려과다가 생기고, 간에 열이 오르면 작은 자극에도 짜증과 분노가 폭발한다. 반대로 장부가 조화를 이루면 감정 기복이 완만해지고 정신적 몰입과 통찰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명상과 복식호흡이 주목받는 이유도 폐‧심‧간‧신의 리듬을 맞추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장부 균형을 지키는 첫 걸음은 몸의 언어를 듣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 혀의 색과 설태를 살피고, 첫 소변의 색과 냄새를 관찰하며, 오후쯤 찾아오는 피로의 위치와 강도를 기록해 보면 어느 장부가 과부하를 받는지 윤곽이 드러난다. 이어서 하루 한 끼만이라도 따뜻한 밥과 채소 위주의 간소한 식사를 하고, 점심 후 10분 산책으로 기와 혈의 순환을 깨우며, 잠들기 전 5분간 복식호흡과 명상으로 정신의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찾으면 몸은 자연스레 건강해진다. 여기에 주 2~3회 가벼운 땀이 맺힐 정도의 운동을 더하면 오장육부에 생기가 돌고 머릿속 구름이 걷히듯 기분이 맑아진다. 결국 오장육부는 낱낱의 장기가 아니라 우리가 숨 쉬고 움직이는데 그리고 감정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신과 육체의 주체다. 숨을 제대로 쉬고, 땀을 흘리고, 잘 씹어 먹고, 편히 잠드는 평범한 실천과 간단한 명상으로 건강하고 편안한 오장육부를 만들 수 있다. 오장육부가 건강하면 육체와 정신의 건강은 따라온다. 오늘부터 걷고 움직여 명상하며 육체와 마음을 다스려 당신의 오장육부에 작은 격려를 건네 보자.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2025-05-28

모리 교수의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

두 달 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책장에서 꺼내 다시 읽은 적이 있다. 그때 또 한 권의 책을 샀다. 모리 교수의 제자인 미치 앨봄이 쓴 책이 아니라 모리 교수가 생전에 썼던 미출간 유고를 그의 아들인 롭 슈워츠가 사후 편집해 출간한 책이었다. 영어 원제는 모리의 지혜(The Wisdom of Morrie)인데, 우리나라에서 출간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멋들어지게 바꿔 놓았다. 처음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과 같이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최근엔 가방에 넣어다니며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읽는다. 원래 소설 읽기를 즐기던 심히 편협된 독서 취미가 있던 나는 책 한 권을 잡으면 며칠을 밤새다시피 읽어 끝장을 보곤 했다. 그러나 서사가 없는 책은 내리읽을 필요도 없고 차례대로 읽지 않아도 되니 쉽다. 침대 가까이 두고 집히는 대로 잡아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곤 했다. 지난주 일요일 108 사찰순례 때는 가방에 넣어 가서 버스에서 읽기도 했고, 오늘은 손주들 하교 도우러 나설 때 가방에 넣었다가 차 안에서 한 페이지를 읽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건 아니고, 읽은 데를 또 읽기도 하고, 가까이에 쓸 것이 있으면 밑줄을 그어두거나 별표를 크게 하기도 하고, 그마저도 없으면 그 페이지 귀퉁이를 접어 두기도 했다. 모리 교수가 “책장을 가벼이 넘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시간을 두고 찬찬히 생각하고 다각도로 궁리하기”를 바랬으며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라”고 주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노년의 즐거움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어 현재의 노년의 내 생활에 가장 긴요한 주문들이 그득그득하기 때문이다. 67살 즈음 자신이 고령자임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노년의 삶을 긍정하기 시작한 작가, 모리의 성찰과 지혜에서 우러나온 거의 모든 언사에 백배 공감한다. 책상 위에 있는 책을 들고 책의 접힌 부분을 슬쩍 펼쳐보니 34페이지다. “오늘 내가 살고 만들어가고 경험하는 ‘지금’이 인생의 화양연화임을 이제는 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탁 쳤고, 혼자서 씩 웃었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신황금기라 여기는 나와 똑같은 생각이기 때문이다. 259페이지에서는 소중한 관계의 가치를 얘기하고 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 모두와 인연을 이어가자”를 읽으면서 소소하되 귀한 모임의 소중한 동반자를 떠올리고, “손주들의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방법을 알아내자. 이때 자녀와 손주의 관계를 방해하면 안 되겠지만 오히려 자녀들이 반길 수도 있다”를 읽으면서 나의 현재 최대 관심사를 어찌 알았을까. 또 줄을 굵게 쳤다. 8장 ‘이토록 멋진 인생이라니’에서는 잘 늙기를 제안한다. 세상은 아름답다. 마음을 열어 하늘을 보고 타인을 존중하고 삶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며 매일 즐겁고 황홀하게 웃음거리를 찾자.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은퇴 후의 자유를 활용하라는 조언.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더욱 충만하고 자유롭고 활기차게 살 수 있다는 모리 교수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 책은 요 근래 내 지근 거리에 있으면서 내 시선과 손길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2025-05-28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어느 나라에나 국민들이 애독하는 첫사랑 소설이 있기 마련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텐데요. 한국인에게 가장 익숙하고 정감 가는 한 편의 첫사랑 소설을 꼽으라면, 그것은 아마도 황순원의 ‘소나기’일 겁니다. 일본에도 국민 첫사랑 소설이 있는데요. 그것은 일본 최초의 근대여성작가로 꼽히는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1872-1896)의 ‘타케쿠라베(키재기)’(1895-1896)입니다. 놀랍게도 일본판 ‘소나기’에 해당하는 ‘타케쿠라베’는 요시와라 유곽과 그 주변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히구치 이치요만큼 평생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살다간 문인도 드물 겁니다. 소설가가 된 계기부터가 소설 발표를 통해 원고료를 받는 친구에게 자극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본래 하급 무사의 딸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이치요는, 오빠와 아버지가 연이어 병사하면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게 됩니다. 그녀는 24년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늘 빈곤에 시달렸으며, 흡족한 연애도 해볼 수 없었습니다. 정혼까지 했으나 경제적인 이유로 파혼당한 시부야 사부로, 마음속 짝사랑에 머물렀던 문학선생 나카라이 도스이와의 관계만을 남겼을 뿐이니까요. 이치요는 그 모든 현실적 불우를 오직 붓 한 자루에 의지해 헤쳐 나간 여성입니다. 1890년 9월 이치요는 혼고기쿠사카초(本鄕菊坂町)로 이사하여 빨래나 바느질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꾸려나갑니다. 1892년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이치요는 1893년 7월에는 지금의 이치요기념관이 있는 시타야류센지초(下谷龍泉寺町)로 이사하여 완구나 과자를 파는 잡화점을 여는데요. 이 곳은 유곽 요시와라의 뒷골목에 해당하는 동네로서, 이 곳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바로 ‘타케쿠라베’입니다. 잡화점에서 별다른 수익을 얻지 못한 이치요는, 문학에 전념할 생각으로 1894년 5월 최후의 거처인 혼고마루야마후쿠야마초(本鄕丸山福山町)로 이사를 하는데요, 이 곳 역시 겉으로는 술과 요리를 팔고, 속으로는 매춘 행위를 하는 사창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곳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바로 ‘니고리에’(1895)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임 그리워 돌아본다는 오몬(大門)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이르는 길은 멀지만 오하구로 도랑에 등불이 비치는 유곽 삼 층에서 벌어지는 소란은 손에 잡힐 듯 들리고 밤낮없이 오가는 인력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번영을 상기시킨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타케쿠라베’는 요시와라 유곽과 주변 동네의 풍경과 분위기를 매우 섬세하고 아름답게 표현한 명작입니다. 요시와라의 잘 나가는 유녀를 언니로 둔 미도리는 승려의 아들 신뇨를 좋아하는데요. 동네 아이들이 골목파와 큰길파로 나뉘어 대립을 하는 가운데, 센조쿠 신사의 여름 축제가 열리는 저녁 무렵, 골목파 패거리가 들이닥쳐 미도리의 이마에 진흙이 묻은 짚신을 내던집니다. 배후에 신뇨가 있다고 오해한 미도리는 다음 날 아침부터 학교에도 가지 않울 정도로 큰 충격을 받는데요. 신뇨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미도리지만, “정말로 저렇게 싫은 녀석은 없을거야.”라고 침이 마르도록 욕을 해대면서도, 신뇨의 뒷모습을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바라보는” 애틋한 마음만은 변화가 없습니다. ‘타케쿠라베’에서 미도리와 신뇨의 여린 마음이 가장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은 심부름을 가다가 미도리의 집 앞을 지나던 신뇨의 나막신 코 끈이 끊어지는 장면에서입니다. 고생을 모르고 곱게만 자란 도련님인 신뇨는 코 끈이 끊어져 허둥대기만 하는데요. 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미도리는 격자문 사이로 손에 든 빨간색 천조각을 가만히 신뇨에게 던집니다. 그러나 천성이 소심하기만 한 신뇨는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도, 천조각을 줍지도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다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나고 마네요. 드디어 둘 사이에도 이별의 순간이 다가옵니다. 존경받는 승려의 아들인 신뇨와, 유녀의 운영이 예정된 미도리의 해피엔딩이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나 봅니다. 미도리는 언니를 따라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가 되고, 그 이후로는 거리에서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절을 이어받아야 하는 신뇨 역시 승려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동네를 떠나는데요. 신뇨는 승려학교로 떠나는 날 아침에 미도리 방의 격자문에 조화 수선화를 꽂아 놓습니다. 미도리와 신뇨의 사랑 이야기는 요시와라 유곽이라는 환락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애잔하고 순수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케쿠라베’로 이치요는 일본 문단의 최고 권위였던 모리 오가이의 격찬을 받으며, 일약 문단의 스타로 떠오르는데요. 안타깝게도 그로부터 1년도 지나지 않은 차가운 가을날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불운했던 이치요의 사후는 참으로 화려한데요. 수많은 문인들의 기념관이 있는 도쿄지만, 이치요기념관 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2004년부터는 국가적 영웅들에게만 허락되는 지폐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는데요. 여성이 일본 지폐에 등장한 것은 신공황후 이후, 무려 123년 만이라고 합니다.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히구치 이치요가 100년이 훨씬 지난 후에 고액권의 주인공이 됐다는 사실은 조금 얄궂게 느껴집니다. 이치요의 불우했던 삶과 사후의 영광을 떠올릴 때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아주 오래된 말이, 새로운 울림으로 다가오고는 합니다. /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5-05-27

약속

아버지 나이 마흔에 나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깊은 병환에서 회복하는 단계였고 내 시작의 환경은 어려웠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애 늙은이 같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내 나이 세 살부터 아버지는 내게 약속을 했다. “아빠는 막내딸 시집 갈 때까지 꼭 살거야.”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반복되었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자랐다. 아버지는 키가 작고 마른 편이었다. 걸음걸이는 늘 분주했고 어깨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새벽에 나가 땀을 흘리고 들어와도 나를 보면 피곤한 기색보다 웃음이 먼저였다. “너무 늦게 낳아서 너 크는 걸 오래 보고 싶어.” 그 말이 어린 마음에 자꾸 남아 나는 아버지가 늙어 가는 게 싫었다. 어느 날 아버지의 흰 머리카락을 보며 “아빠, 늙지마.” 그랬더니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늙어야 오래 살지 하시며 내가 시집 가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까지 보겠다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날까지 아버지는 내 곁에 계셨다. 나보다 내 아이를 더 귀여워했고 아이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도는 것 뿐 아니라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토끼도 함께 키우며 자연을 배우게 했다. 아버지의 약속은 시집갈 때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지켜졌다.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아침부터 엄마의 전화가 잠을 깨웠다. 일주일 전부터 아버지의 컨디션이 떨어지고 집 앞 의원에서 약을 먹고 수액을 맞아도 차도가 없어 아버지는 이전보다 훨씬 살이 빠져 있었다. 무조건 나를 불러라고 해서 엄마가 전화를 하였고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 입원수속을 밟았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으며 아버지는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이제 약속 다 지켰으니 편안하게 기도 되겠제?”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아버지는 단순히 오래 사신 것이 아니라 약속을 위해살아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니요, 손주 결혼식도 보셔야죠.” 아버지는 웃었다. 그 웃음 속에 긴 시간 동안 묵묵히 약속을 지켜낸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약속이란 말은 단순한 언약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약속은 현재 진행형이다. 입원실 천장에 매달린 링거 줄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다시 말했다. 손주 결혼식까지는 내가 봐야지라며. 그것은 병을 이기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늙고 아프고 작아져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고 싶다는 다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부모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자식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 괜찮은 이별을 남기고 싶은 그 마음. 약속은 거창하지 않다. 한 줌의 흙 속에서도, 흰 종이 위의 주문서에도 병원 위의 다짐 속에도 있다. 그것은 곧 희망이다. 누군가 나를 믿는다는 증거이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표식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마음속 약속 하나를 꺼내어 다시 접는다. 아버지의 약속은 단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를 향한 다짐이고 기다림이며 때로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아버지는 병을 이겨내겠다는 말 너머에 우리와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간절함이 담긴 마음이었다. 삶은 예기치 못한 변수로 가득하지만 그 안에서 약속은 우리를 붙드는 끈이 된다. 나는 오늘도 나만의 약속을 되새긴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다시 한 번 약속을 꺼내어 본다. 언젠가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우리는 그 약속을 품고 살아온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진심으로 한 약속은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약속을 기다리며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김경아 작가

2025-05-27

Clean 작업장, Clean 마인드

사람의 변화는 쉽지 않다. 교육을 한다고 행동의 변화까지는 어렵다. 특히, 지식과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치관이 강한 사람일수록 변화는 쉽지 않다. 사람은 교육을 받으면 생각이 열리고, 실행하면서 진짜로 변한다. 즉, 교육은 변화의 시작이고 실행은 변화의 완성이다. 교육은 사고의 틀을 넓히고,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삶을 바꾸는 것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있다. 아무리 좋은 강의, 책, 워크숍을 통해 들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는 인식에 그친다. ‘운동해야 건강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실행은 실제 변화를 만든다. 실행을 통해서 사람은 몸으로 배우고, 경험으로 내면화한다. 시행착오, 피드백, 반복 속에서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가치관, 신념까지 바뀐다. 실행 없는 교육은 조리법만 배우고 요리는 안 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실행하고 변화하려면, 혼자 힘만으로 어렵다. 주변 분위기, 시스템, 문화가 실행을 끌어내고 유지시킨다. 가령, 모두가 청소하는 회사에선 청소가 습관이 된다. 문제를 솔직히 공유하는 문화에선 감추기 보다 개선을 선택하게 된다. 교육, 실행, 환경이 새로운 이해와 실행 속에 습관화 되고 변화하게 된다. 즉 ‘Learning by doing’ 을 실행하면서 배우고 변화된 결과에 비로소 학습이 되는 것이다. ‘Clean 작업장, Clean 마인드’는 청소나 정리 수준을 넘어 조직문화와 업무 방식의 핵심 가치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특히, 제조업, 생산 현장, 또는 혁신 지향형 조직에서는 이 두 개념이 성과와 안전, 품질, 효율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기초 역할이다. Clean 작업장은 단순히 깨끗한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돈된 시스템과 규율이 살아 있는 작업환경을 의미한다. 즉, 언제나 누구나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시작과 끝이 있는 표준화 된 상태를 말한다. Clean 작업장을 만들기 위한 핵심 조건은 5S 활동의 철저한 실행이다.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정돈하고, 청소를 해서 깨끗한 작업장을 만드는 일이다. 도구의 위치, 작업 절차, VM(Visual Management) 등이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하는 표준화된 작업환경이다. 낭비를 줄이는 ‘Lean Thinking’ 사상으로 불필요한 물건, 불필요한 공정 제거로 생산 라인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Clean 마인드는 명확하고 건전한 사고 방식, 즉, 책임감 있고 긍정적이며 자기통제력이 있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내가 하는 일에 애정을 갖고 남 탓보다 나부터 돌아보는 태도’ 라고 할 수 있다. 실행 조건은 첫째, 책임의식과 자기관리이다. 실수나 문제를 숨기지 않고, 스스로 개선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둘째, 긍정과 존중의 소통이다. 불필요한 비난 대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 받는 문화를 말한다. 셋째, 자기 성찰과 개선 지향이다. ‘왜?’ 라고 묻고,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넷째, 타인과 조직을 위한 행동이다. 이기심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고려한 행동을 말한다. 다섯째, 감정 관리와 일의 집중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목적 중심으로 일하는 것이다. 교육은 마음을 열게 하고, 실행은 몸이 익게 만들고, 환경과 문화는 그 변화를 굳게 만든다. Clean 작업장과 Clean 마인드는 조직 변화의 시작이다.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2025-05-27

동해안 기차여행

오월의 신록 속으로 질주하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 가는 산과 모내기 준비가 한창인 들판을 지나 이내 탁 트인 동해바다와 마주하며 미끄러지듯이 내달린다. 몇 개의 교량과 터널을 지나니 차창 밖으로 지난 3월의 대형산불로 산림과 농가에 극심한 피해를 준 처참함이 푸른 산의 검버섯처럼 드러나는 영덕 일대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간간이 농촌ㆍ산촌ㆍ어촌마을이 나타나고 바다와 산을 접하며 동해안 7번 국도와 나란히 강릉까지 이어지는 동해선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올해 1월 1일부터 개통된 동해선 고속철도는 한반도의 등줄기로 불리는 동해안을 따라 강릉~동해~삼척~포항~경주~울산~부산(부전)을 이어주는 약 370km 구간이다. 작년 말 포항~삼척 구간의 고속전철화 사업이 완공됨에 따라 올해부터 이른바 ‘동해안 철도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랜 염원의 동해선 개통으로 강릉~부산 간은 3시간 50분대에 주파 가능해져 동해안과 강원 북부권의 물류ㆍ산업ㆍ관광 등의 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강원 동해안과 인구 300만의 부산과 경북ㆍ경남 동해안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관광수요의 폭발적 증가는 물론 산업적인 측면의 시너지 효과도 상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과연 항간에 명성(?)이 자자한 기차를 설렘 속에 직접 타보니 운행 내내 열차의 쾌적함과 편리함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평소 자동차로 제법 시간이 걸려야 가던 월포나 영덕, 울진 등지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낯선 풍경 담기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다음 역에 다다를 정도로 빠른 속도감이 들었다. 마치 수도권의 전철을 타고 가다가 얼핏하는 사이 금세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는 것처럼 먼 거리가 짧게만 여겨졌다. 다만 예전의 완행열차 특유의 쇠바퀴 굴림의 덜컹거림이나 희미한 기적 속에 또렷하게 들려오던 “오징어 땅콩 카라멜~ 삶은 계란 있어요~”라고 외치며 기차 안에서 간식을 팔던 ‘홍익회’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없어져서 수십년 전과는 사뭇 격세지감이 드는 듯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다 가까이에 기차역이 있는 정동진역에 기차가 섰을 때는 잠시 추억과 낭만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어린 애들과 함께 정동진 해변 모래밭에서 사발이 오토바이를 신나게 타기도 했었고, 가족들과 함께 커다란 모래시계를 보면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한 것 같았다. 또한 5~6년 전 아들과 함께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안자전거도로를 따라 종주 중 정동진 고개 넘어 아들 자전거의 뒷바퀴 펑크로 때우는데 엄청 고생스러웠던 기억 등이 철썩이는 파도 결에 오버랩되기도 했었다. 차창에 어리는 풍경 감상과 아련한 회억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강릉역에 도착했다. 비가 와서 한결 구미가 당긴 초당순두부전골, 환상적인 미디어아트에 몰입되는 강릉아르테뮤지엄,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선교장(船橋莊) 고택에서의 보기 드문 파이프오르간 연주, 허균ㆍ허난설헌기념공원과 경포대 산책로, 카페거리 안목해변 등 어디 하나 둘러봐도 발길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이처럼 동해안 기차여행은 축지(縮地)로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먹고 즐길 거리를 무한정 가능케 해주는 묘미가 있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2025-05-27

국힘, 끝까지 후보 단일화 포기해선 안 된다

김문수(국민의힘)·이준석(개혁신당) 대선 후보가 사전 투표를 하루 앞두고도 후보 단일화 테이블에 앉지 못했다. 결국 국민의힘은 이번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어떤 극적인 드라마도 없이 조기 대선을 치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단일화 데드라인은 사전 투표(29~30일) 전날인 오늘까지다. 그동안 단일화를 주도했던 국민의힘 김용태 비대위원장은 어제(27일) 마지막 TV토론회 직전까지 이 후보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이 후보는 거부했다. 그는 국민의힘 인사들의 전화를 안 받는 것은 물론 거처까지 남모르게 옮기는 단호함까지 연출했다. 국민의힘으로선 후보 단일화를 위해 쓸 수 있는 카드를 거의 사용한 것 같다. 김 위원장은 처음 국민 경선(여론조사)을 조건으로 제시하다가 이 후보가 호응하지 않자 “개혁신당이 조건을 제시하면 모두 검토하겠다”고 했다. 사실상 어떤 조건도 다 수용하겠다는 뉘앙스로 들렸다.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은 이 후보가 있는 유세 현장을 직접 찾아가 단일화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 후보가 단일화를 거부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 지지자층인 20·30대가 후보단일화를 한다고 해서 김문수 후보에게로 표가 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26일에도 “김 후보로 단일화되면 표의 합(合)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했다. 단일화에 대한 이 후보의 거부반응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과 단일화한 안철수 의원이 친윤계로부터 서자 취급을 당하는 현실을 직접 보고 있는데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후보 단일화를 할 경우 지지층 이탈 현상이 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김문수 후보 측은 TV 토론회가 모두 끝난 오늘 이 후보에게 회동을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후보 단일화 제안에 앞서, 국민의힘은 이 후보의 양보를 이끌어 내기 위한 극적인 해법을 우선 마련해야 한다. 자신의 정치 인생을 올인하며 이번 대선에 뛰어든 이 후보에게 단일화에 대한 충분한 명분을 주는 게 예의다.

2025-05-27

대선승패는 ‘사전투표’와 함수관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가 사전투표 첫날인 내일(29일) 광주에서 가장 먼저(오전 6시) 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사전투표에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일부 보수진영 유권자에게 충분히 자극을 줄 수 있는 캠페인이다. 한 전 대표는 지난해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부정선거 음모론과 단호하게 선을 긋지 못하면 ‘민주당은 3일간, 우리는 하루만’ 투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전투표는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높이는 경향이 있어 진보진영에 유리하다는 분석이 많다. 지난해 4월 치러진 22대 총선에서 사전투표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호남과 수도권이었다. 투표율 1위는 전남(41.19%)이 차지했고, 그다음 전북(38.46%), 광주(38%) 순이었다. 꼴찌는 대구(25.6%)였다. 당시 민주당은 “하루라도 빨리 윤석열 정권을 심판하겠다는 민심이 확인됐다”고 했다. 실제 이 총선에서 사전투표 결과로 당락이 바뀐 지역구가 52곳에 달했으며, 민주당이 압승했다.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를 최대변수도 사전투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대선에서는 사전투표율이 본 투표율과 거의 차이가 없다. 3년 전 20대 대선 때 사전투표율은 36.9%로 본투표율 40.2%와 비슷했다. 지난해 22대 총선 때도 사전투표율(31.28%)이 본투표율(35.7%)에 근접했다. 사전투표가 사실상 보편적 투표 방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번 선거는 본 투표일(6월 3일)이 휴일과의 간격이 좁아져 투표율이 낮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많다. 직장인의 경우, 월요일인 2일 휴가를 내면 5월 31일부터 나흘간 쉴 수 있다. 한국지방신문협회가 지난 24~25일 에이스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3028명) 결과, 응답자의 34.5%는 ‘사전투표를 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63.3%는 ‘본투표를 하겠다’고 했다. 다만 보수 성향 응답자 가운데 75.4%는 본투표 참여 의사를 밝힌 반면, 진보 성향 유권자들은 사전투표(50.3%)를 하겠다는 응답자가 본투표(47.6%) 응답자보다 오히려 많았다. 중앙선관위는 사전투표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 대선에는 투·개표 관리를 철저히 하겠다고 발표했다. 우선 이번 사전 투표에서는 ‘투표소별’로 투표자 수를 1시간 단위로 공개하기로 했다. 종전에는 ‘선거인 주소지’를 기준으로 사전 투표자 수를 시간대별로 공개했다. 사전 투표자 수를 부풀려 투표를 조작한다는 의혹을 불식하려는 조치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는 ‘공정선거참관단’도 운영한다. 공정선거참관단은 투·개표 과정뿐 아니라 후보자 등록, 선거인 명부 작성, 투표지 회송용 봉투 우체국 접수 절차 및 투표함 이송 등 사전 투표 전 과정을 현장에서 참관한다. 이번 대선도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주요 후보 간 지지도 격차가 좁혀져 박빙의 승부전이 예상된다. 이 때문에 각 정당과 대선 후보들도 경쟁적으로 사전투표를 독려하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유권자들은 내일, 모레 사전투표일에는 아무런 부정선거 의심 없이 투표장에 나와 주권을 행사하길 바란다.

2025-05-27

전공의 추가모집도 저조…의료정상화 멀었나

대한수련병원협의회 등 6개 병원 단체가 건의한 전공의 추가모집 방안을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대구 등 전국 수련병원들이 이달 말까지 자율적 전공의 추가모집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병원 단체의 뜻을 받아들여 예외적으로 추가 모집을 허용한 것은 의정갈등 이후 이어지는 의료공백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의지와는 달리 전국 대부분 수련병원에서의 전공의 복귀는 매우 저조한 것으로 알려져 안타깝다. 26일 전공의 복귀 원서를 마감한 대구파티마병원의 경우 지원자 수가 0명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또 같은 날 원서접수를 끝낸 영남대병원은 접수 현황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복귀율이 매우 미미하다고 한다. 병원에 따라 이달 말까지 전공의 추가 접수를 받고 있지만 여타 병원들도 비슷한 상황일 것으로 보는 관측이 많다. 지역병원 관계자는 대다수 전공의들이 복귀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며 “다수는 달라진 게 없는데 돌아가야 하느냐며 회의적 반응을 보인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전공의 복귀가 저조한 것은 전공의의 상당수가 이미 병의원에 재취업한 때문으로 보는 분석도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김선민 의원이 밝힌 자료에 의하면 사직 또는 임용을 포기한 레지던트 8791명 가운데 61%가 이미 병의원에 재취업한 상태로 나타났다는 것. 정부가 이례적으로 전공의 추가모집을 감행한 것은 의료공백 상황을 조속히 해결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럼에도 어떤 이유에서든 전공의의 복귀가 저조한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전공의의 복귀가 늦어지면 전문의 수급에 차질이 발생하고, 그로 인한 부작용은 국민이 감당해야 한다. 의정갈등의 여파로 전국 40개 의대 재학생의 42%가 유급될 처지다. 전공의 복귀가 저조한 가운데 당분간 의료인력 양산에도 문제가 생긴 것이다. 전공의의 병원 복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필수의료 등 공공의료를 유지하려는 공익적 차원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의정갈등은 의대정원을 원위치함으로써 이제 사실상 해소됐다. 지금이라도 의료정상화를 위한 노력에 의료계가 한마음을 모아 위기를 극복해나가길 바란다.

2025-05-27

포항이 크루즈관광 명소라면

크루즈 관광이란 단순히 배를 타고 이동하는 개념의 관광 서비스 산업이 아니다. 지금은 숙박, 교통, 관광, 엔터테인먼트를 종합적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형태의 리조트 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바다 위의 호텔에서 숙박을 하지만 배 안에서 제공되는 즐길거리로 여행의 재미는 배가 된다. 갖가지 세계 요리를 맛볼 수 있는가 하면 수영장, 놀이시설, 스파, 카지노, 영화관, 피트니스 등 다양한 위락시설은 크로스만이 가지는 장점이다. 또 특급호텔 서비스를 여행 기간 내내 누릴 수 있다는 것도 크루즈 여행의 매력이라 하겠다. 그래서 크루즈 여행을 찾는 인구는 매년 늘어난다. 작년 12월 포항 영일만항에서는 관광객 1100명을 태운 대형 크루즈 코스타 세레나호가 일본 오루타항으로 출항했다. 이 배는 오루타, 삿포로, 하코다테 등을 거쳐 5박6일 일정을 소화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탈리아 선사 소속의 코스타 세레나호는 11만4000톤급 선박으로 길이만 290m에 이른다. 포항은 동해안 유일의 항만인 영일만항이 있는 곳이다. 영일만항을 모항이나 기항으로 하는 크루즈관광 산업이 활성화된다면 포항은 동해안 최대의 관광명소는 물론 환태평양 관문 역할도 가능하다. 포항시는 2019년부터 크루즈관광 유치에 많은 공을 들여왔지만 아직은 크루즈의 불모지다. 대형 국제 크루즈 선박을 몇 채 띄운 적은 있으나 영일만항이 크루즈항이라고 아는 이는 드물다. 경주 APEC을 맞아 영일만항에 크루즈선을 띄우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APEC 경주를 찾는 관광객의 부족한 객실을 크루즈선으로 대체한다는 아이디어다. 포항을 크루즈 명소로 만들 좋은 기회 아닌가.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5-05-27

산림 가치의 재발견

국토의 약 63%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림은 기후 위기와 도시화가 심화되는 이때, 다기능적 가치가 더욱 주목받고 있다. 지난 3월 발생한 대형 산불로 의성, 산청, 울산 등 영남권 10만4000 ha의 산림이 소실되었다. 산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 회복된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실질적인 재난 대응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보다 효과적인 산불 대응은 무엇일까. 산림의 생태적 대응으로 ‘수종 전환’이 있다. 산림의 약 37%는 침엽수로, 특히 소나무는 산불에 매우 취약하다. 소나무재선충병과 같은 병해충 피해 저지를 위해서도 수종 다변화가 요구된다. 굴참·상수리나무 등 내화성 강한 활엽수 위주의 ‘내화 수림대’를 조성하면 산불 확산을 늦추는 자연 소화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호주는 2019~2020년 대형 산불 이후 유칼립투스 대신 다양한 활엽수를 혼합 조림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은 서부 산악지역에 폭 30~50m의 산불 차단 구역과 방화 도로 조성 및 AI 산불 감시 시스템 도입하고 있다. 산불 초기 대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임도’다. 산불 진화 인력의 접근성을 높일 뿐 아니라, 트레킹과 산악자전거(MTB) 코스 활용이나 양떼목장 같은 산지형 관광과도 연계할 수 있어 산악레포츠 자원으로도 가치가 크다. 산불 감시용 카메라 설치, 산림 인접 주택가와 사찰의 비상소화 시설 구축이 병행된다면 산불 대응과 예방 효과 모두 향상될 것이다. 산림의 경제·문화적 가치도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월 방문한 포항시산림조합은 임산물 산지종합유통센터 건립, 로컬푸드 직매장 운영 등 임산물 시장 확대를 위한 다양한 사업으로 일자리 창출과 임가 소득 증대에 기여하고 있으며, 특히 ‘숲마을’이라는 산림 테마 복합문화공간을 조성하여 주목받고 있다. 연간 100만 명이 찾는 이 공간은 생태학습장, 숲 카페, 임산물 판매장, 명상쉼터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수목원을 옮겨놓은 듯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울산숲’과 국제정원박람회장 주변에 조성될 ‘미세먼지 저감숲’은 도시열섬 완화와 탄소 흡수 등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자연친화적 공간으로, 도시와 산림을 잇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최근 울산기업인 롯데정밀화학이 스마트 묘목장을 건립해 주었다. 도심 내 숲과 정원이 많이 만들어지면 더 많은 나무와 꽃이 필요해지고 묘목 재배와 화훼산업도 활성화될 것이다. 나무 의사, 식물 병원도 만들어져 현대인의 아픈 마음까지 치유해 줄 수도 있다. 결국, 산림은 단순한 휴식공간을 넘어 기후 위기 대응, 삶의 질 향상,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이제는 산림의 생산성과 재해 대응력을 높이고 정원문화를 확산해 산림정책을 고도화할 때이며, 이는 산림청을 산림부로 승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어머니 나무가 있는 숲은 인류가 탄생하고 오랜 기간 자라온 삶의 터전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망각해 온 에덴동산을 새롭게 다시 찾아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안승대 울산광역시 행정부시장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단체장 출마 희망자의 기고문을 받습니다. 후보자의 현안 진단과 정책 비전 등을 주제로 200자 원고지 7.5∼8.5장 이내로 보내주시면 지면에 싣도록 하겠습니다. 기고문은 사진과 함께 이메일(hjyun@kbmaeil.com)로 보내주세요. 외부 기고는 기고자의 개인 의견으로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2025-05-26

정치와 문화

20세기 초까지 독일은 인류사상 유례없는 인문학적 성취를 이룬 나라였다.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쟁쟁한 철학자들과 괴테, 실러, 토마스 만, 헤세 등 굴지의 문호들이 독일의 정신세계를 이끌었고, 음악 분야에서도 바흐, 베토벤, 바그너, 브람스, 슈만 등 불멸의 작곡가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에 열광하며 나치즘의 길로 나아갔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과 대량 학살, 그리고 국가의 파멸로 치달았다. 러시아와 그 주변 국가들이 소비에트연방으로 공산화 되는 과정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같은 세기의 문호들과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 라흐마니노프 같은 천재적인 음악가들이 있었고, 정신적 지평을 떠받치는 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도 많았지만, 공산주의혁명이라는 이념의 광풍 앞에서는 그런 문화적 축적도 한낱 가랑잎에 불과했다. 그 결과 스탈린 집권기에는 수천만 명이 숙청·강제노역·기근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념적 폭력은, 나치즘의 잔혹성과 견줄 만큼이나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짓밟는 참상을 낳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인문학적인 축적이 사회 전체의 이성과 양심을 보장하지 않을뿐더러 정치적 광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문화적 지성이 오히려 선동과 조장의 도구로 전락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가 소중히 받들어 온 인문학적 가치가 한낱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작금의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현상의 조짐을 보이고 있어 불안감을 더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심각한 진영대립 가운데 대선 정국을 맞고 있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대다수 식자층과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이념적 편향성이다. 자신의 이념 성향을 이유로 특정 진영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행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조차 외면하는 처사이다. 소위 의식이 깨었다는 미명하에 대다수 식자층이나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특정 정치세력 옹호의 도구를 자청하는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상대 진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적대감과 비방과 서슴지 않으면서 자기 진영 후보의 범죄 혐의나 도덕적 결함에 대해선 비호하고 정당화하기에 급급한 비양심적이고 반이성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념은 사유의 출발점이지 판단의 종착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식자층의 역할은 권력의 감시와 공공성의 수호이지, 특정 진영의 정치적 방패막이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지성인들이야말로 가장 먼저 자기 성찰의 거울 앞에 서야 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어느 편이 정권을 잡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는 편향된 정치적 광풍에 휩쓸렸다. 그리고 지금은 절체절명의 고비를 맞고 있다. 국민 각자는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옳은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2025-05-26

인간이 그리는 무늬, 침촌 인문학당

인문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는 어렵지만, ‘인간이 그리는 무늬’ 정도로 하자. 인류 탄생 이후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많은 무늬를 그려왔다. 그 무늬는 다양하다. 문학·철학·역사·종교· 언어· 예술 등등. 우리의 조상이 그렸고, 당신과 내가 그리고 있으며, 우리의 후손들이 그릴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어떤 무늬의 그림을 그렸는가. 자신의 과거· 현재·미래의 그림을 감상하고 통찰하는 것. 이것이 인문학이다. 우리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또 본다.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진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좋은 그림을 그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예술을 사랑하였으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명상하였다. 2014년 봄, 포항시 북구 장성동 소재 침촌문화회관 1층 70여 평의 공간에 퀘렌시아를 개설하였다. 틈틈이 공부하여 쌓은 나름의 결실을 나누고,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마음을 내었다. ‘인문학당 침촌 싸띠스쿨’ 10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명상, 차와 음악, 그리고 인문학의 순서로 세 시간 동안 노는 곳이다. 변호사가 무슨 저런 일을? 곁눈질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좋은 일이니 그냥 가면 될 것이었다. 첫 시간은 ‘명상의 시간’이다. M.O.S.T.(mindscience origin sati technic) 풀이 하자면, ‘알아차림에 기반한 마음과학 기술’ 정도이겠다. 명상은, 과학이라는 근거에서 출발한다. 시냅스 가소성(synaptic plasticity)에 기반한 내면 소통 과정이다. 걷기 명상과 호흡명상으로 ‘알아차림 기술’을 연마한다. 삶에서 일어나는 외형적 조건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자신과 끊임없는 내면 소통을 하는 시간이다. 둘째 시간은 ‘차와 음악’의 시간이다. 정갈한 차 한잔과 음악 속에서 침묵과 담소로 힐링의 시간을 가진다. 마음 편하게 차 한잔 나눌 수 있으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리라. 셋째 시간은 ‘인문학 강의’ 시간이다. 학당의 기본 교재는, ‘MOST’(붓다빠라 반테 저), ‘뇌 생각의 출현’(박문호 저),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저), ‘거의 모든것의 역사’(빌브라이슨 저), ‘빅 히스토리’(데이비드크리스천 저)로 출발하였으며, 이 이외에도 많은 교재를 도반들이 돌아가면서 강의하는 형식으로 공부하였다. 학생이 스승이요 스승이 학생인 학당, 최고의 학생이 최고의 스승인 곳. 가르침은 없다. 스승이 된 자는 자신의 무늬를 보여주고, 학생이 된 자는 그저 감상할 뿐이다, 학당이 위치한 건물은 전통을 자랑하는 수원백씨 참판공 종회 건물이다. 5층의 대규모 건물로 이쁜 정원, 주차장 시설까지 완벽하다. 평소 건물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는 건물이다. 학당이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온 것은 종회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내공을 닦는 곳이요, 쉬는 곳이요, 지식을 쌓는 곳이다. 오늘도 자유롭고 행복한 사유 여행은 계속된다. 잘랄루딘 루미의 ‘봄의 정원으로 오라’가 생각난다. “여기 명상과 차, 음악과 지혜가 흐르는 아름다운 학당이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리고 당신이 온다 한들 또한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