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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경제적 불평등·우경화·반 유대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닌 프랑스”

자유·평등·박애의 나라 프랑스는 진정한 자유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의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유럽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범죄와 테러가 기승을 부리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이다. 지난해 1월 프랑스 시사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가 테러 공격을 당하자 프랑스 전역의 거리에 300만명 넘는 시위대가 쏟아져 나왔다.`프랑스판 9·11 테러`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한 해 잇따른 테러는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자유와 평등, 박애의 프랑스 대혁명 이념을 자랑했던 프랑스에서 테러 이후 국경을 닫아 이민자를 막자고 주장하며 이슬람에 적대적인 극우정당이 큰 인기를 끄는 이례적인 모습이 나타났다.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를 서슴지 않고 풍자한 샤를리 에브도 사무실에 난입해 총기를 난사, 편집장 샤르브 등 12명을 숨지게 한 테러범들이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이민자 후손이라는데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에서는 이민자 통합이 실패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예견했던 프랑스의 석학 엠마뉘엘 토드는 최근 번역·출간된 자신의 저서 `샤를리는 누구인가?(희담)`에서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이후 이 사건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사회적 파장에 주목한다.엠마뉘엘 토드는 프랑스에서 사회적 약자에 불과한, 이슬람이라는 소수 종교에 대해서 풍자의 자유를 주장하는 무정부 신문사(샤를르 에브도)를 옹호하기 위해, 300만명 넘는 시민이 거리로 몰려나온 시위가 과연 정당한 행동이었는지 묻고 있다. 그는 프랑스가 공화국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이슬람 국가 출신 이민자들을 포함한 자국 내 모든 민족과의 동화정책을 지지한다.엠마뉘엘 토드는 이 시위에서 프랑스 사회가 직면한 정반대의 현실을 읽어낸다. 그는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을 야기한 중간계층이 시위를 주도했고 결과적으로 이슬람 혐오주의를 부추겼다고 본다. 그는 당시 시위대를 지리통계학적으로 분석하면서`나는 샤를리다`를 외치며 거리 곳곳을 행진했던 수백만의 샤를리들은 실상 이슬람 혐오와 종교적 배타성으로 똘똘 뭉친 중간계층이었으며, 추모집회가 프랑스 대도시에서만 일어났고, 도시 근교의 빈곤층과 젊은이들은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집회에 참여한 것은, 대도시에 거주하고 문화적으로 가톨릭 전통에 속하는, 이민자와 빈곤층으로부터 사회 불안을 느끼는 중산층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90년대 이후 대폭 증가한 이슬람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가져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축적된 이슬람 혐오가 “나는 샤를리다”라는 표현으로 분출됐다는 분석이다.저자는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고 우경화 경향으로 반유대주의까지 나타나는 오늘날 프랑스가 더이상 본질적 의미의 공화국이 아니라고 냉정하게 분석한다. 불평등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공화국 정신으로 되돌아갈 해법은 유럽연합 탈퇴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한편 국립인구통계학연구소의 연구원인 엠마뉘엘 토드는 25세이던 1976년, 영아사망률을 근거로 소련의 몰락을 예견한 바 있다. 2007년에는 아랍 세계에서의 문맹률 감소와 출산율 상승으로 사회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며, 2010~2011년 아랍의 봄을 예측하기도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10-14

수면박탈시대 현대인이여 성공하고 싶다면 숙면하라

`수면혁명`(민음사)은 수면 박탈의 시대, 일에 매몰돼 소진돼 가는 현대인에게`잠`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책이다. 미디어업계의 판도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인터넷매체 허핑턴 포스트의 창립자인 아리아나 허핑턴의 신작이다. 전작 `제3의 성공`에서 돈과 권력이라는 전통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웰빙과 지혜, 내면의 여유로 성공의 패러다임을 재정의했던 허핑턴은 이를 이루기 위한 토대로서 인간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수면`에 주목하고, 숙면과 성공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24시간 연결돼 있으며, 온갖 정보가 쏟아지고,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숙면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면서도 동시에 충족하기 어려운 욕구가 됐다. 허핑턴은 잠이 성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라는 착각에 반기를 들고, 진정으로 `잘살고` `성공하고` 싶다면 숙면의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라고 단언한다.△아리아나 허핑턴의 수면 혁명 10계명1 매일 7~9시간을 자라.2 침실은 어둡고 시원하게 유지하라.3 훌륭한 베개와 잠옷이야말로 남는 투자다.4 잠들기 30분 전부터는 전자 기기를 사용하지 마라.5 침실 주변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지 마라.6 과식과 늦은 식사를 피해라.7 잠들기 전 따뜻한 물로 샤워하거나 목욕하라.8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요가, 명상 등으로 몸과 마음을 잠으로 유도하라.9 침대에서는 절대 일이나 공부를 하지 마라.10 `오늘의 감사 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하라./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10-07

존재의 부조리·삶의 본질에 대한 치열한 사유

2004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단에 나온 뒤 독특한 발상과 낯선 화법으로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온 이근화 시인의 네번째 시집`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창비)가 출간됐다.2000년대 시단을 뜨겁게 달궜던 `미래파 시인` 중의 한사람으로서 주목받았던 시인은 여러차례의 수상 경력에서 드러나듯이 한국 시단을 이끄는 젊은 시인으로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면서, 활달한 상상력과 감각적인 언어가 어우러진 단정한 묘사와 사유가 돋보이는 시 세계를 견고하게 다져왔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감정이 절제된 차분하고 담백한 어조로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섬세한 관찰력과 감각적인 언어로 그려낸다.욕망과 갈등이 들끓는 고단한 일상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부조리함과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냉철하게 응시하면서 “무감각하기만 한 일상의 시간”과 “나날의 삶이 기실 얼마나 메마르고 외롭고 위태로운 것인가를 알려주는 비명이자 침묵”(이영광, 추천사)의 목소리가 깊은 여운을 남기며 잔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이근화의 시는 한눈에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을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도 그럴 것이다”(`택시는 의외로 빠르지 않다`)라는 짐짓 무심한 표정의 일상적 어법으로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도달할 곳이 없는 세계”(`네덜란드인과 결혼하기`)와 사물에 대한 시인의 세심한 사유를 엿볼 수 있다.시인은 “그냥 그럴 것”(`집으로 가는 길`)인 예사로운 풍경들 속에서 `정신의 거처`로서의 시를 찾는다. “우스운 과거와 무시 못할 가족력”(`택시는 의외로 빠르지 않다`)이 있고 “적막과 허무”뿐인 “정적과 암흑의 놀이터”(`코맥스 200)인 우리의 인생이 결국은 “불가능한 꽃/불가해한 꽃”(`산유화`)으로 피어나는 한편의 시라는 깨달음에 이르며 삶의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다.시인에게 일상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눈빛이 떠”도는 미지의 세계이며, 시인은 “네가 나의 절벽이 되는 삶”과 “재가 너의 향기가 되는 죽음 위에”(`눈사람`) 절박한 마음으로 서 있다. 공감과 소통은 단절되고 곳곳에서 “지옥의 음악 소리”가 “부글부글 흘러나오는” 이 공포의 세계에서 더이상 “슬픔은 들리지 않”고 “고독은 냄새 맡을 수 없”(`가짜 논란`)으며 고통은 흔적도 없다. 하지만 시인은 “길 위에 더럽게 버려진” 채 “오늘도 살아야”(`요양원`) 한다. “길거리에 마구 내뱉어진” 그가 돌아갈 집이라고는 비록 “헛된 망상처럼 높고 반듯하고 분명”(`내 죄가 나를 먹네`)한 신기루에 지나지 않지만, “침묵과 울분 속에서” 마치 “세상을 다 아는 눈빛”(`새의 가슴`)을 번뜩이면서 우리들의 삶에 다가서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10-07

북촌, 그 정겨움에 대하여

한국문학의 대표 여성시인인 신달자(73) 시인이 열네 번째 시집 `북촌`(민음사)을 펴냈다.`백치애인``물 위를 걷는 여자` 등에서 인생의 관조가 배인 감성적 언어로 수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인은 그간 삶의 고뇌를 섬세한 여성적 감성으로 표현한 에세이, 소설 등으로도 성가를 높이며 우리 문학에서 여성 시의 영역을 개척하고 대표해 온 작가로 평가받는다.`살 흐르다`이후 2년 만의 신작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70편의 시들을 통해 서울 종로구 계동에 있는 서울의 대표 관광지이자 한옥 밀집 지역인 북촌 한옥마을에 대한 사랑과 예찬을 담아낸다.북촌은 다양한 문화재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다채로운 공간과 전통가옥인 한옥들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높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 아파트에서 살던 그는 2014년 가을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작은 한옥에서 느끼는 불편함보다 북촌의 정겨움과 아름다움에 더 푹 빠졌다.북촌로 8길 26, 열 평 남짓 작은 한옥에 살고있는 시인은 2014년 가을, 누우면 “발 닿고 머리 닿는/ 봉숭아 씨만 한 방”으로 이사한 첫 밤에 그녀는 새 노트를 펴고 `북촌`이라고 썼고, 그것이 이 시집의 시작이 됐다. 그날부터 계동의 골목을, 가회동의 소나무길을 걸으며, 북촌이 가진 역사와 문화와 삶을 가까이 보면서, 한 편 한 편 시를 써나갔다. 그곳의 삶 그 무엇 하나 그녀를 사로잡지 않는 것이 없었다. 북촌에 사는 내내 “온몸의 살과 뼈 피까지 옹골지게도 앓”으며 “누가 맘먹고 호미로 온몸을 조근조근 찢어 대는” 것처럼 아팠지만, 북촌을 써야 한다는 의욕으로 통증을 견디어 냈다. 그런 절실함으로 써낸 이 시집에는 “지상에서 가장 애틋한 언어”이자 “혀가 잘려도 해야 할 말”이 오롯이 담겨 있다.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골목골목에서 만나는 근대사의 유적과 인물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골목으로 들어서 골목으로 돌아돌아/ 다시 골목으로 이어지는” “골목골목이 소곤거리고 계단마다 반짝거리는 햇살”이 부서지는 북촌에서 그녀는 “열 평만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북촌이 다 내 것”이라는 충만함을 느낀다. 그녀는 북촌을 “고향 품” 같고 “엄마 품” 같다고, “내 생의 중심”이자 “내 혼의 종착지”이자 “내 생의 출발 지점”이라고 노래한다. “극세공의 필치로 쓴 역사가 있고/ 핏줄을 뽑아 그린 화가의 그림이 있고/ 목숨으로 지킨 나라 사랑이 곳곳에 보일” “단 한마디 아름다움이란 말 놓칠 수 없는/ 북촌”은 “이 골목 저 골목이 모두 역사의 현장”이며, “북촌의 어느 땅이건 다 성지다”. “일제 시대가 흐르고/ 한국 전쟁이 흐르고 새마을 운동 산업화 시대가 흐르고/ 알파고 시대”가 흐르는, “지금도 스치면 불붙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이 섞여 있는 곳, 북촌. “고요를 만지다가 더 큰 고요로/ 나직하게 침묵의 길을 걸으면서”, “이 집 처마와/ 저 집 처마가/ 닭 벼슬 부딪치듯/ 사랑싸움을 하”는 사람 냄새 풍기는 북촌. “누구라도 아늑하게 마음을 담는”, “누구라도 의지하고 말 터놓고 싶은”, “내 몸보다 더 편안한 곳” 북촌을 노래한 이 시집에서 우리는 “어디라도 손 내밀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따뜻한 길이 열리는 시간”을 만난다.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64년 등단한 신달자 시인은 시집 `봉헌문자`, `아버지의 빛`, `열애`, `종이` 등과 수필집 `다시 부는 바람`, `백치애인` 등을 펴냈다. 대한민국문학상, 한국시인협회상, 영랑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은관문화훈장을 받았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6-10-07

숨겨진 인간 욕구에 대한 집요한 파헤침

2009년 등단한 젊은 작가 이수진(29)의 첫 소설집`머리 위를 조심해`(문학동네)가 출간됐다.이수진은 200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2013년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로 중앙장편문학상을 받았다. 이수진은 등단작부터 “입심 걸쭉한 신인 탄생”(소설가 한승원)이라는 평을 들으며 한국문학의 외연을 활달하게 넓혀줄 기대주로 주목받았다.이번 소설집에는 `갈매기는 끼룩끼룩 운다`, `마니차`, `아버지 축제`, `머리 위를 조심해`, `벽장`, `전발씨`, `원초적 취미`, `대단히 멋진 꿈` 등 단편소설 8편이 담겼다.`갈매기는 끼룩끼룩 운다`는 세 명의 가난한 남자 대학생이 좁은 자취방에 누워 길에서 본 한 뚱뚱한 여성의 과거를 상상하는 이야기다. 인간의 식욕과 성욕, 질투심이 빚어낼 수 있는 사건을 기발한 상상으로 그린다. `자궁교`라는 이름을 지닌 사이비 종교 집단의 모습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표제작인`머리 위를 조심해`는 부끄럽거나 불편하거나 폭력적이어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이 대체로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어 쉽게 드러내기 힘든 인간의 욕구들을 과감하게 파헤치는 이수진 소설의 장기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전봇대 밑에서 잠을 깬 주인공은 전날 자신이 누구와 어떻게 술을 마시고 거기서 잠든 것인지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 갑작스런 `변의`가 밀려오고, 다급하게 이 배변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장소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부터 식은땀이 날 만큼 생생하고 집요한 변의에 대한 묘사가 시작된다. `아버지 축제`는 화자인 아들의 환각 같은 진술을 통해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대상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되묻고 있다.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대단히 멋진 꿈`은 실직중인 불면증 환자의 꿈에 대한 이야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10-07

이중 스파이 `마타하리`와 함께 또 한번의 감동을 몰고 오다

`연금술사`로 유명한 세계적 작가 파울로 코엘료(69). 그만의 독보적인 필치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고 우리 영혼에 깊은 울림을 전하는 코엘료는 발표작마다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왔다. 데뷔작 `순례자`를 발표한 지 30년이 되는 2016년, 신작 장편소설 `스파이`로 돌아온 코엘료는 다시 한번 그의 신화를 이어가고 있다.`스파이`는 지난 5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작품 일부가 전 세계 최초로 공개된 데 이어 이번에 작가의 모국인 브라질과 한국을 비롯해 40여 개 언어로 번역, 출간됐다.`스파이`는 1차세계대전 당시 이중 스파이 혐의를 받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전설적인 무희 마타 하리(1876~1917)에 관한 이야기다. 코엘료는 그동안 여러 차례 주체적인 여성 화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역사적 인물을 다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한때, 일촉즉발의 전운이 가득한 한편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시기의 유럽을 배경으로 파블로 피카소, 프로이트, 오스카 와일드, 니진스키, 모딜리아니 등 당대의 문화 예술계를 주름잡던 인물들을 작품 곳곳에 직간접적으로 등장시키며 소설 읽는 재미를 더했다.마타 하리는 동양의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춤으로 20세기 초반 파리를 비롯해 유럽 전역을 사로잡은 전설적인 무희다. 벨 에포크 시대, 유행을 선도했던 패셔니스타이자 화려한 무대 위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던 여성, 높은 인기만큼 엄청난 부를 얻었고, 당대 권력을 쥔 남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며 그 관계를 통해 수많은 비밀을 간직하게 된 인물이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중 독일에 정보를 넘긴 이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군에 체포돼 총성 속에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코엘료는 내년 마타 하리 사망 100주년을 앞두고 삶의 어느 순간에도 자유롭고 독립적이고자 노력한 그녀의 삶에 주목한다. 그는 지난 20년간 발표된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의 기밀문서를 비롯해 관련 서적, 기사 등 수많은 자료를 참고해`스파이`를 집필했다. 코엘료는 마타 하리가 파리 교도소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오직 편지를 쓸 펜 한 자루와 종이 몇 장만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착안해 편지 형식으로 마타 하리의 삶을 재구성해나간다.소설은 프랑스 생라자르 교도소에 수감중인 마타 하리가 처형 일주일 전 자신의 변호사에게 써내려간 편지로 시작한다. 그녀는 이 편지가 자신이 죽고 홀로 남겨질 딸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그런 도전과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1부는 그녀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보낸 평탄치 않은 결혼 생활 이야기, 그리고 마타 하리라는 이름으로 `꿈의 도시` 파리로 떠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다. 1876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그곳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1895년 네덜란드 장교와 결혼을 해 인도네시아 자바 섬으로 떠난다. 남편의 폭력과 감시로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지속해나가던 어느 날, 그녀는 화려한 고대 인도 전통 무용을 추는 무용수들을 지켜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곧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면서 지난 삶을 청산하고 `진정한 삶`을 찾아나설 결심을 한다. 마클레오트 부인은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마타 하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마침내 꿈에 그리던 파리로 향한다.▲ 파울로 코엘료2부는 마타 하리가 파리에서 무용가로 성공해 부와 명성을 쌓고, 전쟁이 발발해 네덜란드에 갔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 펼쳐진다. 기메 박물관에서의 첫 공연이 성공을 거두면서 신문을 떠들썩하게 장식한 그녀는 이국적인 외모, 관능적인 춤으로 큰 인기를 누리면서 프랑스의 물랭루주, 밀라노의 스칼라극장 등 세계적인 무대에 서게 된다.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어울리면서 프랑스 사교계를 드나든다. 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부터 그녀를 주목해온 독일 정보부는 2만 프랑을 대가로 그녀에게 스파이 임무를 제안한다. 프랑스를 위해 일해오던 그녀는 중립국 네덜란드 여권으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끊임없이 연합국 정보부로부터 의심을 받고 1917년 2월 13일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이중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다. 3부는 마타 하리를 변호한 클뤼네 변호사가 그녀의 처형 전날 쓴 편지다. 그는 마타 하리가 어떻게 고위층과 관계를 쌓아나가면서 세계를 여행하고, 결국 이중 스파이로 의심받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독일측에 프랑스의 기밀 정보를 누설했다는 명확한 증거 없이 패전을 거듭하던 프랑스의 희생양으로 처형에 이르는 그녀의 모습을 그려 보인다. 또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현기증이 날 만큼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 유럽, 전쟁중인 유럽의 역사적 한순간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23

울타리 밖으로 내쳐진 청소년들…아픔은 각자의 몫으로

2014년 런던도서전 `오늘의 작가,` 2015년 서울국제도서전 `올해의 주목할 작가`이자,`마당을 나온 암탉`과`나쁜 어린이 표`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동화와 소설을 넘나들며 어른과 아이 모두가 공감하는 작품을 써온 황선미 작가의 신작`틈새 보이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이 책은 황선미 작가의 세번째 청소년소설로 작가 특유의 세심한 필치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깊이와 감동은 여전하면서도 한층 더 농익은 작품세계를 펼쳐 보인다. 전작인`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에서 유년기의 자전적 체험을, `사라진 조각`에서 청소년의 집단 성폭행 문제를 다뤘다면, `틈새 보이스`에서는 `가정`과 `학교`라는 안전 울타리 밖으로 내쳐진 청소년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어른들의 제대로 된 보호와 보살핌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년들의 이야기를 따스하고도 정교한 시선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소년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소설 속에는 마음의 상처와 비밀을 지닌 네 명의 소년이 등장한다. 학교도 사는 곳도 꿈도 성격도 가정환경도 제각각. “틈새. 우리 사이에는 그게 있다. 마치 이 분식집처럼.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공통점이란 시간뿐이었다. 6시에서 7시 사이.” 이들에게 공통점이라곤 그저 “시간뿐”이지만, 감당하기 버거운 문제를 홀로 짊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딘지 닮은 구석이 있다. 불안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잔뜩 날이 선 모습도. 소년들은 `틈새`라고 부르는 분식집에서 우연히 만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시나브로` 친구가 되어간다.소설은 친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간직한 주인공 `무`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불안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무`와 틈새 소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무`의 과거를 둘러싼 의외의 인물과 여러 사건들이 맞물리며 흥미롭게 펼쳐지는 이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가슴 먹먹한 감동을 자아낸다. 작가 특유의 절제되고 흡입력 있는 문장과 속도감 넘치는 전개, 내면의 상처를 지닌 소년의 복잡한 심리를 섬세하고 밀도 있게 그려낸 점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더 나은 미래로, 바깥세상으로 한 걸음 조심스레 내딛기 위해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견뎌내는 틈새 소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 역시도 “기댈 데 없이 외로웠던 청소년기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먼저 그 시기를 지나온 한 사람으로서 외롭고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을 이들에게 공감과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23

남한에서의 중도세력 통합으로 한반도 분단체제 변혁

“한국 사회 분석에서 한반도적 시각은 필수이지만 `변혁적 중도주의`는 남한 사회에 적용되는 담론입니다. 혁명이란 말을 쓰기가 거북해 `변혁`이란 말로 바꿔쓴 것은 아닙니다. 남한과 북한 전체가 변혁돼야 한다는 전제 아래서 남한에서 모든 중도세력의 광범위한 통합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변혁적 중도론`(창비)은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 지난 40년간 진보적 담론들을 생산해온 백낙청(78)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반도를 아우르는 운동노선이자 실천전략으로 제안한`변혁적 중도주의`를 다룬 책이다.백 교수는 지난 2009년 펴낸 네 번째 사회평론집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에서 한반도 정세와 통일 과정을 진단하면서 그 실천적 개념으로 `변혁적 중도`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백 교수가 이 책에서 내놓은 핵심적인 주장은 제목 그대로 우리 사회가 `변혁적 중도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남쪽 사회의 중도 통합을 통해 한반도의 선진화와 평화를 제한하는 분단체제를 변혁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밝혔다.`변혁적 중도론`은 `분단체제론`에 대한 이해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백씨의 글 3편, 변혁적 중도주의의 가능성과 과제를 살펴본 유재건 부산대 교수 등의 글 6편을 엮었다.한국사회 변혁의 운동노선이자 실천전략으로서 변혁적 중도론의 개념과 현시점에서의 실천과제를 제시하는 서장, 변혁적 중도론의 이론적 기반인 분단체제론에 대한 이해와 변혁적 중도의 관계를 정리한 제1부 `분단체제와 변혁적 중도론의 제기`, 분단체제론을 역사성, 체제론, 남북관계, 경제권 등으로 나눠 고찰한 제2부 `분단체제론의 지평`, 변혁전략, 사회운동, 현실정치, 새로운 운동주체의 구상 등 변혁적 중도론의 현실적합성을 탐색한 제3부 `변혁적 중도주의의 실천`으로 구성됐다.서장 `변혁적 중도의 실현을 위하여`는 언뜻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변혁`과 `중도`의 개념과 의미, 변혁적 중도론의 이론적 기반인 분단체제론과의 관계, 포용정책 2.0과 2013년체제론 검토에 이어 이 담론의 실천을 위한 과제를 점검함으로써 한국사회 변혁의 운동노선으로서 변혁적 중도론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제1부는 변혁적 중도론의 근거이자 이론적 기반인 분단체제론에 대한 이해를 돕고 분단체제의 특수성에서 비롯하는 변혁적 중도주의 논의의 진전을 보여주는 백낙청의 글 세편을 시기순으로 엮었다.제2부에서는 변혁적 중도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분단체제론을 역사성과 사회체제 면에서 고찰하고, 남북관계와 경제 부문에서 변화의 실마리를 탐색한다.제3부는 통일운동, 생활정치, 제도정치와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 드러나는 변혁적 중도주의의 구체적 양상과 과제를 살펴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23

섬진강 시인 소박한 마음 `오롯이`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보면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그러면 나는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울고 들어온 너에게`전문)섬세한 시어와 감성이 돋보이는 정감어린 서정시로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섬진강 시인` 김용택(68)이 신작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창비)를 펴냈다.`하찮은 존재들의 무한한 가치`를 노래하며 서정시의 새로운 진경을 보여준`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온갖 비루와 원망이 사라진 가장 깨끗한 가난의 미학”(김정환, 추천사)을 선보이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대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지금-여기의 살아 있음을 최대한 이행하는 데에서 삶의 가치와 행복을 찾는”(김수이, 해설) 시인의 소박한 마음이 오롯이 깃든 간결하고 단정한 시편들이 오래도록 가슴속에서 여울지며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나는/어느날이라는 말이 좋다.//어느날 나는 태어났고/어느날 당신도 만났으니까.//그리고/오늘도 어느날이니까.//나의 시는/어느날의 일이고/어느날에 썼다.”(`어느날` 전문)김용택의 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친근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삶의 노래`이다. “사랑의 아픔들을 겪으며”(`오래 한 생각`) 그날그날 “있는 힘을 다하여”(`받아쓰다`) 살아온 이야기이며, “새벽에 일어나/시를 쓰고, 쓴 시를 고쳐놓고 나갔다 와서/다시 고치”(`베고니아`)며 살아가는 일상의 이야기이다. “내가 산 오늘을/생각하”(`아버지의 강가`)며 “한줄의 글을 쓰고 나면” “다른 땅을 밟고 있”(`한줄로 살아보라`)는 `낯선 나`가 말한다. “그래, 어디, 오늘도/니들 맘대로 한번 살아봐라.”(`가을 아침`) 김수이는 해설 첫머리에서 이 시집을 “`살다`의 활용에 의한, `살다`의 활용을 위한 시집”이라고 명명한다. 그렇듯 시인에게 시를 `쓰는` 일은 곧 `사는` 일이다.어느덧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된 시인은 “갈라진 발뒤꿈치 틈으로 외풍이 찾아드는지” “자꾸 아랫목 콩자루 밑을 찾는” “어머니의 발”과 “밖으로 밀려”난 “굳은살 박인 아버지의 복사뼈 절반”(`아버지의 복사뼈`)을 회상하며 자신에게 다가올 노년의 삶을 차분히 곱씹어보기도 한다. 시인은 “몸이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어머니의 눈에서 “깊고도 아득한,/인류의 그 무엇”(`우주에서`)을 발견해내기도 하고, “몇해를 걸”어 자신이 도착한 곳이 결국은 “도로 여기”임을 확인하면서 “또다른 생”(`도착`)의 가능성을 담담히 응시한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시를 쓰면서 편안함을 얻었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김용택 시인시인은 최근에 고향 진메마을로 돌아가 정착했다. 한국 현대시사에 한 획을 그은 명편`섬진강`연작의 발원지인 그곳에 이르러 시인은 “귀환은 평화롭고 안착은 아름답다”(`익산역`)고 고백한다. “인생이 시작되었던” 그곳에서 시인은 “속셈 없는 외로움”(시인의 말)을 찬찬히 가다듬으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이 하는 말”을 겸허한 마음으로 고스란히 “땅에 받아적으며”(`받아쓰다`)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날` 저물녘, 묵묵히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저 섬진강 가를 거닐며 끊임없이 순진무구한 시심을 길어올리는 시인의 뒷모습을 찬찬히 따라가다보면 순간 세상이 환해지는 행복감을 만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09

“이제 선뜻 인사를 건넬 수 있다. 아물지 않은 상처와”

류근(50) 시인의 두번째 시집 `어떻게든 이별`(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나 18년간 한 편의 시도 발표하지 않았던 류 시인은 2010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시편들을 모아 엮은 첫 시집`상처적 체질`에서 개인의 기억에서 비롯한 아픔을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애수로 확장시키며 상처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을 드러냈다.`어떻게든 이별`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류근이 등단 이후 18년 동안 “시로부터 도망다닌 것처럼 보이는 세월에 대한 비밀”이 이번 시집 속 72편의 시들에 숨어 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시인은 첫 시집 출간 후 6년이라는 시간만큼 차곡이 쌓인 상처를 다시 진솔한 언어로 매만지며 돌아보는 한편, 아물지 않는 그 상처와 `어떻게든 이별`하려는 결심을 거듭해 시도하고 있다.“어제 나는 많은 것들과 이별했다 작정하고 이별했다 맘먹고 이별했고 이를 악물고 이별했다 [….] 어제는 어제와 이별하였고 오늘은 또 어제와 이별하였다 아무런 상처 없이 나는 오늘과 또 오늘의 약속들과 마주쳤으나 또 아무런 상처 없이 그것들과 이별을 결심,하였다” ―`어떻게든 이별`부분“그런 때에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보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시들이 많은데, 고(故) 김광석의 노래로 널리 불리는 초기 시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토로하던 류근 시의 화자는 긴 세월 상처로 남은 애인, 애인들에게 어느덧 “결별의 말을 남길 수 있어 행복”하다고, 당신을 만나 “남김없이 불행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이제 선뜻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제 기억과 상처에게도 전하는 인사일 것이다. “가족에게 비겁했고, 가족 때문에 비겁했다. 애인에게 비겁했고, 애인 때문에 비겁했다. 시 때문에 비겁했고 시에게 비겁했다”(홍정선). 모든 비겁함에 이별을 고하며, 겪어온 어떤 상처보다 더 쓰라릴 `고독`을 화자는 견딜 수 있을까. “내게서 한 걸음도 달아나지 못하고/일없이 왔다 가는 밤과 낮이 아프다”(`고독의 근육`).지극한 고독과 깊은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시가 버겁지 않은 건 류근이 지닌 자질 덕분일 것이다. 첫 시집에서 보여준 “가장 진지하고도 가장 가볍게 타자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스며드는 일종의 방법적 사랑”(최현식)이라는 의미에서의 통속미(通俗美)는 이번 시집에서도 유효하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6-09-09

미아가 된 우주 비행사·고아가 된 스탠드업 코미디언

2015년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김중혁(45)의 네 번째 장편소설 `나는 농담이다`(민음사)가 출간됐다.`문단의 호모 루덴스`라 불리는 김중혁은 특정한 시기 자신을 사로잡은 주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다.이번 소설의 배경은 지구와 우주를 넘나들고, 이 소설의 인물은 삶과 죽음을 벗어나며, 이 소설의 상상력은 무중력 공간을 유영한다. 이 소설의 독자인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우주를 유영하듯 김중혁의 농담 속을 거닐게 될 것이다.△“관제 센터, 들리나?” ? 우주로 나아간 남자 이일영한 남자가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다. 오랜 시간 훈련받은 우주비행사이자,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연인인 이일영은 자신의 오랜 꿈을 이룬다. 그것은 우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그는 모체 우주선과 분리돼 우주를 떠돌아야 한다. 이일영은 이왕 최대한 먼 곳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기내 산소량은 점점 줄어든다. 광막한 우주에서 그는, 관제 센터를 향해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것은 절대 절명의 구조요청이었다가, 철학적 사유였다가, 가벼운 농담이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는 편지가 된다. 그의 메시지는 지구에 닿을 수 있을까. 그는 살아 있는 것일까.△“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 ? 지구에 남겨진 남자 송우영한 남자가 무대 위에 혼자 서 있다. 낮에는 컴퓨터 수리공으로 일하지만 밤이면 백퍼센트 코미디 클럽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는 송우영은 얼마 전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는 부치지 못한 편지를 남겼다. 편지의 주인은 그의 이부형제 이일영이다. 하지만 형은 실종되었고 그는 주인 없는 편지 앞에서 그저 혼란스럽다. 송우영은 그저 농담 속에서 살고자 할 뿐이었다. 어두운 무대에서 그는, 관객을 향해 농담을 던진다. 그것은 배꼽 잡는 섹스 코미디였다가, 철학적 질문이었다가, 진지한 농담이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하는 일기가 된다. 그의 농담은 우주에 닿을 수 있을까. 형은 살아 있는 것일까.“서 있을 때만 웃기는 건 아니지만, 서 있을 때 가장 웃긴 건 확실합니다. 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 이야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일어서는 상상을 하는데요. 상상만으로도 이야기가 잘 됩니다. 이야기라는 놈은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모양이에요. 그런 면에서 전파를 닮았죠. 우리가 빌어먹을 인공위성들을 만든 이유가 뭡니까? 전파는 무조건 직선으로만 움직이니까 그걸 지구 반대편에 보내기 위해 반사를 시킨 거잖아요.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인공위성의 역할을 대신하는 겁니다. 자, 모두들 인공위성을 하늘로 올려 볼까요? 아, 여기 앞에 앉아 계신 분은 아폴로 13호를 닮았네요. 얼굴이 터질 것 같아요. 얼굴이 터져도 나사(NASA)를 탓하지는 마세요.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13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09

마흔살 건달의 뜨거운 인생 이야기

탄탄한 구성과 서스펜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분출하는 에너지로 매번 강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 김언수의 신작 장편 `뜨거운 피`(문학동네)가 출간됐다. 2006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캐비닛`, 2010년 문학동네 온라인카페 연재 당시, 매회 수백 개의 덧글이 달리며`설거지들`열풍을 일으킨 작품`설계자들`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장편소설이다. 지난 2014년 집필을 시작해 지난 2년만에 펴낸 `뜨거운 피`는 1993년 봄과 여름의 이야기다. 마흔 살 건달의 짠내 나는 인생 이야기. 인생에도 사계가 있다면 마흔 살은 여름에 해당될 터, 그 뜨겁고 강렬한 날들의 기록이 부산 앞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한국형 누아르의 쌉싸름하면서도 찐득한 맛이 살아 있으며, 두려울 것 없던 마흔 살 건달이 겪게 되는 정서적 절망감이 사실적이면서도 흡인력 있게 담긴 작품이다.작품 속 인물들은 자기 일신의 안위를 살피고, 눈앞의 이익을 좇고, 암투와 회유, 배신으로 일희일비한다. 그런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격랑이 이토록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갈등과 첨예한 권력 싸움에 휘말렸음에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든 꾸려나가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던지는 그 뜨거움 때문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09

압제와 착취의 표상 아프리카 스스로 이루는 해방의 길 모색

“내 세계는 정치가들의 세계와 반대되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들에게 지시한다. 내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계획을 세운다. 나는 별들에 이르는 계단을 만들고 있다. 나한테는 인간 전체를 데리고 저 위에 갈 권리가 있다.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베시 헤드현대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여성작가 베시 헤드(1937~1986)의 소설 `비구름이 모일 때`(문학동네)가 출간됐다.베시 헤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인종차별을 겪으며 자랐다. 정치활동이 빌미가 돼 고국에서 영구 추방된 작가는 보츠와나로 망명하지만 15년간 시민권 요청을 거부당하다 1979년 어렵게 시민권을 얻는 등 곡절의 세월을 보냈다.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48년 입법화된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한창 극렬해지던 1960년 전후 시기, 이십 대 초반의 베시 헤드는 이 현실에 맞서 아프리카 사회에 만연한 여러 문제를 중점적으로 살피는 일에 열중했던 기자였다.당시 남아공 흑인사회 문제를 널리 알린 급진적 신문들 `골든 시티 포스트` `드럼` `콘택트`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편, 범아프리카회의(PAC)에 가담해 활동하다 체포돼 나온 다음에는 홀로 `더 시티즌`이라는 독립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남아공의 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벗어나 작가로서 첫 명성을 알리고 새로운 길을 열게 된 계기는 보츠와나로 넘어가면서부터다. 그 물꼬를 튼 작품이 바로 이 소설 `비구름이 모일 때`다.1962년 무장투쟁중이던 넬슨 만델라가 체포된 그해, 작가는 점점 자신의 모국 남아공과 2년 남짓한 결혼생활에 회의와 절망을 느끼기 시작해, 1964년 당시 영국 보호령이던 베추아날란드(현 보츠와나)로 아들만 달랑 데리고 망명했다. 남아공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동료 작가 패트릭 컬리넌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보츠와나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나, 그녀는 난민 신분으로 시민권 없이 15년간 그곳에서 방황해야 했다.이런 이력은 이 소설의 주인공 마카야에게 고스란히 투영돼 남아공의 국경 철조망을 넘어 보츠와나로 망명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현실로 나아가게 한다. 흑인을 `보이, 개, 캐퍼(깜둥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증오와 분노로 얼룩진 투쟁으로 죽음과 폭력에 지친 마카야는 `마음의 평화`를 갈망하며 낯선 나라에서 전혀 다른 백인 길버트 밸푸어라는 인물을 만나 새로운 땅을 일구는 역사에 동참한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노력은 현실에 맞지 않는 그들만의 구습과 편견, 자신들의 이익만 챙기는 정치인, 흑인 공동체 내의 또다른 폭력과 음모 등의 현실과 맞부딪힌다.베시 헤드는 이 작품에서 아프리카가 어떻게 기술과 경영의 진보를 통해 화합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을지, 어떻게 그들 스스로 정치적 압제로부터 풀려나, 마침내 인간의 존엄을 회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이 소설은 하나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도 섣불리 속단하지 않으면서 정치와 경제의 구조적 폭력에 무감각해진 공동체가 어떻게 그들 스스로 진정한 해방을 이끌어내고 미래를 모색할 수 있을지, 그 길을 찾아나가기 위해 아프리카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미래에 대해 던지는 질문의 책이자 대답의 책이라 할 수 있다.이 작품의 또다른 매력은 시대가 부과한 올가미와도 같던 의식에서 벗어나, 서구 중심의 영문학사에서 지배와 착취와 학대 대상으로만 다뤄진 흑인 사회의 중층적이고 다층적인 새로운 시각을 견지해낸 베시 헤드 문학세계의 독창적 이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헤드는 `컬러드(백인과 토착민의 피가 섞인 유색인)`이자 여성으로서 겪은 인종 및 성 차별, 잦은 실직으로 인한 극심한 가난과 고립으로 정신적으로 누구보다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작가다. 그런 작가가 문제삼은 건 정치현실을 넘어, 보편적으로 인간 본연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존재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아파르트헤이트를 집중적으로 다룬 동시대 작가들과 달리, 아프리카 문학세계가 눈 돌리지 않던 아프리카의 자연과 부족 내 전통, 자유와 화해의 서정을 노래하는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개척해 나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02

삶과 시, 삶 같은 시, 시 같은 삶… 그리고 맛있는 이야기

▲ 박기영시인“식당 문 열고 들어가면/서툰 솜씨로 차림표 위에 써놓은 글씨가/무르팍 꼬고 앉아, 들어오는 사람/아니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옻오르는 놈은 들어오지 마시오.`//그 아래 난닝구 차림의 주인은/연신 줄담배 피우며/억센 이북 사투리로 간나 같은/남쪽 것들 들먹였다.//`사내새끼들이 지대로 된 비빔밥을 먹어야지.`” (박기영 시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중)박기영(47) 시인의 신작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모악) 출간기념 문학포럼이 2일 오후 7시 구미시 형곡4주공 네거리 인근에 위치한 카페공간 지하 갤러리에서 열린다.`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은 박기영 시인이 지난 1991년 민음사에서 첫 시집 `숨은 사내`를 내고 홀연히 문단에서 사라졌다가 25년만에 불쑥 내어놓은 두번째 시집이다. 그는 1979년 당시 열일곱 살이던 장정일을 처음 만나 문학의 길로 인도했고, 그가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내고 김수영 문학상을 받을 때까지 이끌어준 스승으로도 문단에서 널리 회자된 시인이다.그는 `시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테마로 열리는 이번 문학포럼에서 이하석, 안도현 시인과 이춘호 영남일보 음식전문 기자와 함께 `삶과 시, 삶 같은 시, 시 같은 삶`에 대한 이야기와 북한의 토속음식과 옻에 대한 질펀한 만담을 펼친다.구미지역에 문학의 텃밭을 일구며 30년간 오랜 전통을 이어온 수요문학회(회장 박상봉) 주관으로 류경무 시인이 진행을 맡고 권미강, 구은주, 이복희 등이 시낭송을 한다.이날 패널토론자로 참석하는 이춘호 기자는 기타연주와 노래공연을 들려주며, 구미의 새로운 뮤지션 그룹 하늘뮤직앙상블(대표 김희겸)이 축하공연을 한다.행사를 마친 후에는 박기영 시인이 직접 요리하는 북한 음식을 나누는 뒷풀이 행사도 갖는다.한편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은 크게 4부로 나눠 `낭림산맥을 그리다`, `한 마리 버들치처럼`, `부용대 백사장`, `호두나무 과수원 아래`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다. 이 시집에는 거친 야성과 강인한 생명력이 펄떡거리는 시 50편이 실려 있다. 맹산식당은 평안도 맹산 포수였던 그의 부친이 대구에 냈던 옻 전문 식당이라고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02

창비 173호 출간 `우리시대의 현재와 미래`

계간 문예잡지인 창작과비평 173호(2016년 가을호)가 출간됐다.이번호 특집은 현 시대 자본주의체제에 일어나고 있는 변화와 위기적 양상에 주목한다. 그로 인해 우리 일상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살핀 후,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사회운동의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특히 지난 6월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내한한, 맑스주의의 세계적 대가 데이비드 하비의 현실진단 및 주요 입론을 통해 우리 시대의 현재와 미래를 다방면으로 논한다. 하비-백낙청의 특별대담을 비롯한 5편의 글은 심대한 위기 국면을 대담한 설계로 돌파하려는 시도로서 향후 열띤 논의를 촉발할 여지가 크다.올 한해 연속기획도 이어간다. 주요 시인들의 신작시를 담는 시란에는 문태준 김선우 이영광 손택수 진은영 송경동 등 25인의 작품을 게재했고, 중편 특집에는 독특한 미학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김엄지의 작품을 담았다. `한국의 `보수세력`을 진단한다 기획을 `보수적 사회단체, 어떻게 움직이나`라는 주제의 대화로 이어가는 한편, `소수자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본다`는 이번호에서 성소수자 문제가 한국사회의 여러 측면에 어떻게 접속되어 있는지를 논한다.그밖에 고(故) 박영근 시인의 삶과 문학을 돌아본 황현산의 문학평론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등을 인터뷰한 `독자의 목소리`, 중국과 일본의 현주소를 들여다본 해외 필자들의 `논단`등을 수록했으며, 제34회 신동엽문학상 발표와 2016 창비신인문학상 수상작도 만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9-02

`맞아들임`을 엮은 책

`해체의 사상가 `자크 데리다(1930~2004)는 플라톤 이후 수천 년간 서구 철학을 지배해온 형이상학에 반기를 든 혁신적인 사유방식 `해체론`을 열었던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다.데리다의 해체론은 `텍스트는 불변의 의미를 지닌다`는 기존의 사고를 뒤엎은 것으로, 그의 삶도 일체의 권위에 맞서는 실천적 저항으로 일치됐다.`타자의 철학자 `엠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흔히 `네 문화의 철학자`로 불린다. 그는 러시아의 변방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독일철학을 공부했고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주체의 의지에 따라 외부의 대상을 재단하고 왜곡하는 폭력성이 잠재된 서구철학의 전통 속에서`타자의 철학`을 정초한 레비나스는 철학에 고통의 흔적을 남겼고, 윤리학을 제1철학의 자리로 격상시킨 철학자로 평가받는다.`아듀 레비나스(문학과지성사)`는 1995년 12월 25일 89세로 세상을 떠난 철학자 레비나스의 장례식장에서 데리다가 낭독한 조사 `아듀`와 레비나스 사망 1주기를 기념해 열린 학회에서 데리다가 개막 강연으로 발표한 `맞아들임의 말`을 엮은 책이다.이 글들에서 데리다는 `타자`, `환대` 등에 대한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앞으로의 논의에 열려 있는 가능성들을 짚어본다.이 책에서 데리다는 `아듀``환대``맞아들임``무한``응답``타자``윤리``여성성`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레비나스의 철학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하고 정리함과 동시에 그의 철학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면들과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을 짚어보려고 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데리다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특히 이 책은 한 철학자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1964년 레비나스의 주저 `전체성과 무한`을 분석한 논문`폭력과 형이상학`을 발표한 이후로, 레비나스의 철학과 끊임없는 대결을 펼쳐온 데리다가 “아듀”라는 추도사를 통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다른 곳에서 “아듀”라는 말이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사용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하나는 다른 서술적인 말들에 앞서 하는 인사나 축복의 말로 “안녕” “반가워” 등을 의미한다. 두번째는 헤어질 때, 혹은 영원히 헤어질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하는 인사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데리다가 이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신에게로(a-Dieu)`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Adieu a Emmanuel Levinas`는 `레비나스를 신에게로`라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데리다는 “아듀라는 인사는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아듀는 “존재와 무의 양자택일을 거부하면서”, 한정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무한으로, 잉여의 의미로 데려간다. 즉, 레비나스를 신에게 보낸다는 것, 신에게 맡긴다는 것은 레비나스의 사상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고 그를 맞아들이는 것,그의 철학이 가질 수 있는 모든 함의와 발전 가능성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 책을 옮긴 문성원 교수의 해석을 덧붙이자면, `아듀`는 데리다가 이제 신에게 맡겨진, 무한한 가능성에 맡겨진, 그 가능성을 채워나갈 우리에게 맡겨진 레비나스에게 새롭게 건네는 인사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사상을 되짚어보고 그것을 둘러싼 20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에 대한 데리다 자신의 독특한 해석을 펼쳐나간다. 먼저 세상을 떠한 위대한 철학자에게 뜨거운 존경과 우정의 말을 건네면서도, 거의 철학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며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예를 들어 레비나스가 강력한 유대적 전통의 영향 아래 사유를 전개했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내세운 윤리적 명제들이 어떻게 보편적이 될 수 있는가를 계속 물고 늘어진다. 대표적으로 피난처로 부각되는 예루살렘이 그러한데, 데리다의 논의 속에서 예루살렘은 특정한 지역명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또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는 윤리, 정치 너머의 윤리를 강조한다면, 데리다는 레비나스가 말한 `환대`와 `맞아들임`의 개념을 통해 이 윤리의 문제가 어떻게 정치와 엮일 수 있는가를 문제 삼는다. 그는 “도처에서 모든 종류의 피난자들”이 “집단 수용소에서 유치 수용소로, 국경에서 국경으로, 매일매일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며 “환대에 반하는 범죄”를 견뎌내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 환대에 대한 진중한 숙고가 필요함을, 레비나스의 논의를 경유해 재차 강조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26

식물과 인류…술이 탄생하기까지의 비밀

사케는 쌀에서 시작됐다. 스카치는 보리에서, 테킬라는 아가베에서, 럼은 사탕수수에서, 버번은 옥수수에서 시작됐다.`술 취한 식물학자`(문학동네)의 저자 에이미 스튜어트는 각종 작물, 허브, 꽃, 나무, 열매, 그리고 균류를 동원해 독창적인 영감과 필사적인 노력으로 용케 술을 빚어온 인류의 역사를 탐구한다. 보리, 쌀, 밀, 포도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술의 재료는 물론이고 때로는 독특하고 기이하기까지 한 식물들이 발효되고 증류돼 우리가 지금 음미하는 술이 됐다. 이 다채로운 술은 전 세계 애주가들의 전통과 역사에 저마다 독창적인 문화적 풍미를 더해줬다.가드닝 칼럼니스트인 저자는 “모든 술은 식물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식물학과 생물학, 화학, 그리고 술을 즐겨온 인류의 문화사까지 서술해가며 식물에 대한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다 들려준다. 식물을 통해 우리가 마시는 술이 탄생하기까지의 비밀을 천천히 되짚어가는데 모두 160여 종의 식물이 이 책에 등장한다. 50가지가 넘는 칵테일 레시피가 포함돼 있다. 술의 재료나 가니시(칵테일에 장식으로 올리는 재료)로 쓸 수 있는 식물을 정원에서 직접 재배하는 법을 안내하는 가이드도 수록돼 있다. 군데군데 각종 식물의 세세한 분류 표, 술에 들어가는 벌레 이야기, 그리고 식물 그림과 단면도도 들어가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26

유해한 집에서 유익한 집으로 몸과 마음을 살리는 우리 집 “에코하우스로 오세요”

친환경 페인트는 정말 환경에 무해하고, 화학 성분 `무첨가` 라벨이 붙은 식품은 과연 우리 몸에 이로울까? 안전한 생활용품부터 건강한 먹거리, 인테리어, 마음챙김까지 세상의 모든 독소로부터 몸과 마음을 지키는 법을 담은 친환경 라이프스타일 안내서`에코하우스로 오세요`(판미동)가 출간됐다.이 책에는 화학물질 성분표를 읽는 법, 유기농·슈퍼푸드로 식단을 구성하는 법, 몸에 쌓인 노폐물을 제거하는 법 등 집과 몸을 해독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담겨 있다. 또한 마음챙김과 명상을 통해 일상의 해로운 자극에서 내면을 지키는 법을 전하며,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아우르는 토탈 디톡스 솔루션을 제시한다. 친환경 생활 전문가이자 그린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저자는 네 아이의 엄마로서 가정을 꾸려온 경험을 바탕으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고 영감 넘치는 활기찬 가정을 만들어 최적의 삶을 사는 길을 안내한다.이 책은 총 6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습관의 중요성에 대해 알아보고, 2~5장에서는 각각 에코하우스의 네 가지 기둥에 대해 다루며, 감각적인 일러스트와 함께 실질적인 예시와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6장에서는 이를 총정리하며 앞으로의 청사진을 그리도록 하고, 부록에 수록된 주요 독소 목록과 슈퍼푸드 조리법은 에코하우스의 생활방식을 일상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은 바깥세상의 요구에 맞춰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집을 몸과 마음을 충전하는 공간으로 바꾸는 법을 알려 주는 유용한 안내서가 돼 줄 것이다.이 책은 독성 화학물질이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샴푸, 화장품, 세정제, 반찬통, 페인트, 가구 등의 생활용품에서 발견되는 화학물질은 대략 8만 개에 달한다. 이중 인체 무해성 실험을 거친 화학물질의 수는 매우 적은데,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럼 인과관계가 입증돼 위험이 드러난 경우는 더 적다. 심지어 1급 발암물질로 분류된 다이옥신, 포름알데히드 같은 성분조차도 기준치 이내에서는 사용이 허용되는 실정이다. 문제는 우리 몸이 유해 물질에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노출되면, 서서히 면역 체계가 파괴돼 아토피 같은 환경성 질환을 비롯해 암과 각종 질환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점이다.저자는 이러한 상황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알려진 독성 물질만이라도 집 안에 들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한다. 그 첫걸음은 장바구니를 통제하는 데서 시작된다. 식료품을 비롯해 각종 생활용품을 구매할 때, `무첨가`, `자연 방목`과 같은 라벨에 속지 말고 제품 성분표를 꼼꼼히 따져가며 쇼핑 리스트를 의식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저자는 몸에 이로운 방식으로 장바구니를 구성할 수 있다면, 집 안 환경은 물론이고 전반적인 생활까지도 자신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일상을 바꾸는 것은 결국 `습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을 토대로 이 책은 독소로부터 몸과 마음을 지키는 생활 습관을 분류해`에코하우스의 네 가지 기둥`으로 명명하고, 이를 일상에서 쉽고 간단하게 실천하는 법을 알려 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26

경쾌한 언어유희 속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

“꿀맛이 왜 달콤한 줄 아니?꾼 맛도 아니고 꾸는 맛도 아니어서 그래.미래니까,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몰라서 달콤한 말들이 주머니 속에 많았다.”(오은 시인의 말 부분)젊은 시인 오은(34)의 세번째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전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이후 3년 만의 시집이다. 오은의 시를 `오은의 시`답게 만드는 유쾌한 말놀이와 단어들이 제공하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거침없는 폭로와 상처, 어둠, 쓸쓸함 등의 감정을 기록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중첩되는 단어와 시구 들이 밀어붙이는 리듬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출된다. “세계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놀이”(권혁웅, 문학평론가)이기에 오은, 그의 말놀이는 한가로운 피크닉 장소에 떨어진 폭탄처럼 평온함을 뒤엎고 전에 없던 흥겨움을 터뜨린다. 말놀이로 일궈낸 신나는 한 판이 오은의 시어들 속에서 시작된다.두번째 시집에서 얼핏얼핏 드러났던 사회와 체제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의식은 세번째 시집에 와서 더욱 깊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시집 출간 이후 한국은 더욱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고, 전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비극적 사건이 있었으며 그로 인한 트라우마 속에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하거나 외면하는 사태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오은은 그사이 세월호에 대해, 헬(hell)조선이라 불리는 이 나라의 어둠에 대해 숨김없이 말해왔고, 그의 이번 시집에는 그의 마음을 반영하는 시가 다수 수록됐다.“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하나만 중요했다”―`서바이벌` 부분오은은 현 사회 전반에 자리하고 있는 쓸쓸함과 불안감의 실체를 `서바이벌`에 빗대어 드러낸다. “살다의 반대말은 죽다가 아니야/떨어지다지”라는 시인의 시구처럼, 한국은 살아남거나 혹은 떨어지는 사회로 요약될 수 있다. “내가 살아남았다는 것은”, 곧 “누군가는 떨어졌다는” 뜻과도 연결된다. 오은은 “우리” “너” “나” “하나”와 같이 가볍고도 흔한 단어들로, `내가 살고, 너는 떨어진다`는 사회의 이면을 드러냄과 동시에 `우리`가 사라지고 `하나`만이 남는다는 서바이벌의 규칙을 한국 사회에 접목시킨다.그가 이 책에서 사회의 어두운 면에 몰두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이 시집의 또 다른 측면에 “몰라서 달콤한 말들”을 꿈꾸는 “꿀맛” 같은 달콤함이 살아 있다. 그의 지난 시집들에서 주목받은 `말놀이`의 특징들, 그 유희의 측면이 이번 시집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9

삶의 모순에 대한 담론 또는 치열한 전투 기록

`벌거벗은 철학자-정념에 관한 일기`(문학동네)는 신체결함(뇌성마비)을 정신단련으로 극복한 스위스 태생의 베스트셀러 작가 알렉상드르 졸리앵(41)이 철학의 힘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삶의 진실과 의미, 기쁨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극복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내밀한 정념에 대해 쓴 일기 형식의 글이다.자신이 쓴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쓰기 어려웠다고 고백하고 있는 책은 그가 그동안 펴낸 책 중 가장 개인적인 글이며 그렇기에 기만과 가식 없이, `말과 담론과 일상 사이에` 있는 `심연에서` 나온 글이고, 그 심연에서 이뤄진 자신의 정념과의 전투 기록이다.탯줄이 목에 감긴 채 태어나 사십 평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아온 저자는 과연 우리들이 각자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지, 또는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휩쓸리듯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후회할 일을 해 본 적이 없는지 현대인들의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억누르기 어려운 생각들의 근원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강박관념과 약점과 혼돈과 상처, 그리고 숱한 삶의 모순 속에서 온몸과 마음으로 찾아가고 있다.알렉상드르 졸리앵은 스위스 프리부르 문과대와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거쳤다. 1999년 펴낸 첫 저술 `약자의 찬가`는 프랑스 몽티용 문학철학상과 아카데미프랑세즈가 수여하는 모타르상을 수상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9

기어이 파헤쳐 지는 `진실`

올해 제 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이혁진(36) 작가의 장편 소설 `누운 배`(한겨레출판)는 총 232편의 경쟁작 중 아홉 명의 심사위원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선택된 작품이다. `누운 배`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진수식이 끝난 배가 갑자기 쓰러지며 시작한다.`배가 눕는다`는 압도적인 상징으로 다른 후보작들과의 차이를 만든다. 그건 어떤 이미지나 문체가 가진 미적인 차이가 아니다. 그저 `사실`의 차이이며 `사실의 언어`의 차이다. `누운 배`가 상징하며 이야기하는 거대한 사실은, 누워버렸고 방치되어 우리의 눈 밖에 있는 우리의 손과 발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어떤 사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심사를 맡은 황현산 평론가의 추천의 말 서두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내려앉고 세월호가 침몰하였다”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건 아마 그 사실이 가진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누운 배`는 소설은 미적인 것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사실적인 것과 경쟁해야 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누운 배`가 단지 `사실을 다루기만 한` 흔한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인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이 가진 디테일의 정확함과 정교함은 단지 리얼리즘 소설이라고만 부르기에는 뭔가 아깝다.`누운 배`는 앞선 어떤 리얼리즘 소설보다 차갑고, 단단하며, 무겁다. 소설가 김별아는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이 비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평했고, 평론가 정홍수는 “사실의 자리에서 인간 진실에 대한 끈질긴 열정과 상상을 읽었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다른 소설과의 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누운 배`의 세상이 그려내는 풍경은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장막을 벗겨내고,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무서운 진실을 코앞으로 들이밀어 그 진실에서 풍겨 나오는 지독한 냄새를 맡게 한다. 이야기가 진행되고 진실이 축적되며 이윽고 누운 배가 일으켜 세워지는 장면에 도달했을 때, 소설은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보기 힘든 어떤 거대한 광경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장관을 바라보며 압도당한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한국을, 관료주의와 계급구조의 모순이 가득한 한국 사회가 가진 부조리를 떠올리고야 만다.`누운 배`는 사회 소설인 동시에 기업 소설이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다. “회사 생활 다 그런 거 아이겠나?”라는 말로 대변되는 문 대리, 오 팀장, 정 이사, 양 이사, 조 상무, 황 사장 등의 말과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우리가 몸담은 회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은 치밀하게 직조하고 치열하게 밀어붙여 소설 속 회사를 현실의 회사 위로 일으켜 세운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설 곳곳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발견하고, 과거에 했거나 지금 하고 있거나 미래에 할지도 모를 행동을 대신하는 인물들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부인하든 부인하지 않든, 소설 속의 그 무수한 모습들은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소설의 배경은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중국에 조선소를 세워 진출한 한국의 대기업 조선회사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말단 직원이다. 취업을 위해 이 회사에 입사해 어쩌다 보니 중국에 있는 조선소까지 오게 된 나는 상사의 지시에 잘 따르고 열심히 일하려고 하지만, 사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부조리한 일들을 목도하며 끊임 없이 회의를 느낀다.회사는 합리성과 효율성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오너의 말 한 마디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그 밑으로 층층이 서열화된 수직 구조에서 더 위에 있는 사람, 연줄이나 힘을 가진 사람의 말이 결론이 된다.이런 회사 조직의 생리를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작가가 실제 신입사원으로서 직접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이혁진 작가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1년 가까운 잡지사 기자 생활을 거쳐 소설 주인공처럼 중국 진출 조선소에서 3년 남짓 일했다고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9

아이돌 팬덤에 대한 생생한 증언·사랑의 특수성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이희주의 장편소설`환상통`(문학동네)은 수상 소식이 발표된 순간부터 아이돌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온 화제의 작품이다.소설은 아이돌 그룹의 한 멤버를 사랑하는 이십대 여성 m과 만옥,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목소리로 이뤄져 있다. m과 만옥처럼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어린 여성들을 사회에서는 `빠순이`라는 다분히 경멸적이고 비하적인 단어로 지칭한다. 물론`팬`이라는 보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단어가 존재하지만, 이들의 감정 상태와 존재 양식은 어쩐지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담아내기 어려워 보인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마도`팬`보다는 `빠순이`라는 단어로 훨씬 더 자주 호명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언어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위치하는 곳, 그리고 그 거리가 가져올 수밖에 없는 한계를 담고 있다. 그러니까 `빠순이`라는 단어를 통해서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일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환상통`이 무엇보다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빠순이`인 당사자의 시선과 목소리로 이뤄진 소설이라는 점에 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희주는 “복잡한 세상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한철과 그 시절 팬의 일상은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기록해야 한다”라고 작가로서의 임무를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우리는 아이돌 팬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자 그 사랑의 특수성에 대한 섬세한 기록을 만날 수 있게 됐다.“당신은 평생 이 정도로 사랑하는 감정을 알지 못할 거야.”1부는 휴학생 m이 서술자로 등장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m은 N 그룹의 멤버 M을 사랑해 사인회, 공개방송, 행사 등을 열성적으로 찾아다닌다. m은 자신의 체험을 흘려보내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 소유하고자 하는데 그녀에게 그 수단은 문장이다.2부는 m이 공개방송을 기다리는 도중에 만난 `만옥`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m이 사랑에 빠진 동시에 그 사랑을 객관화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인물이라면, 만옥은 그저 그 사랑에 온몸을 내던지고 열렬히 앓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3부는 만옥을 짝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미성년자일뿐더러, 현실세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아이돌 M을 사랑하는 만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9

한국 현대사의 이면과 가슴 묵직한 질문들

`이상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수상 작가인 중견 작가 최수철(58)씨가 여섯번째 소설집 `포로들의 춤`(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우리 시대 가장 지적인 소설가 중 하나인 최씨는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맹점`이 당선돼 등단한 이래, `의식을 추적하는 집요한 언어`와 무수하고 치밀한 감각의 연쇄가 낳은 `감각의 무정부 상태`를 그린 작품 세계로 현대 한국 소설사에 뚜렷한 족적을 새겨왔다.`포로들의 춤`은 작가가 2014년 여름부터 지난해 겨울까지 발표한 중편소설 3편을 묶은 연작소설집으로,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비극을 소재로 하고 있다.스위스 출신의 사진작가 베르너 비숍(1916~1954)이 1952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찍은 `유엔 재교육 캠프에서의 스퀘어댄스`에서 출발한 이번 연작은 피로 얼룩진 50년대 포로수용소 광장에서 회백색 최루탄 연기가 난무하는 70~80년대 대학가 시위 현장으로, 다시 2002년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붉은 악마`의 물결로 넘쳐났던 시청 앞 광장으로 한국 현대사의 시계추를 종횡무진으로 옮겨놓고 있다.실재하는 역사 속에 틈입한 의식과 상상력의 소설 언어가 낱낱으로 있던 사건과 의혹, 구멍과 관계들을 퍼즐처럼 꿰맞춰가는 치밀한 구성이 그 어느 때보다 돋보이는 연작 `포로들의 춤`은 영혼까지 빼앗겨버릴 만큼 공포와 치욕으로 참혹했던 공간의 인물들을 형상화하고 역사의 이면을 추적해가는 한편, 가슴 묵직한 질문을 함께 던진다. `사진에 봉인된 과거의 역사가 소설 속에서 어떻게 현재의 역사로 이어질 수 있는가. 과연 우리는 역사의 리얼리티를 어떻게 경험해야 하는가`.`거절당한 죽음`은 포로수용소의 비극이 대를 걸쳐 포로였던 남자의 딸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그렸다. 주인공이 대학 시절 사랑한 여자 `한수영`은 인민군 출신으로 거제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정신이 이상해진 아버지의 상처를 온몸에 아로새기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임진강을 건너 월북을 시도하다 초병들에게 들켜 사살당했다. 한수영은 대학에 들어와 군사정권의 프락치로 활동하는 남자와 사귀게 되고, 그 옛날 아버지를 구하려 애썼던 것처럼 위기에 빠진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최수철 소설가`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는 거제 포로수용소의 참상이 더욱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전역을 뒤덮던 2002년, 시청 앞 광장에 운집한 `붉은악마`들이 외치는 한목소리의 구호 위로, 50년 전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철조망에 옷을 모두 벗어 걸어놓고 빨간 알몸으로 수십 명씩 스크럼을 짜서 구호를 외치며 광장을 온통 핏물로 물들이던 포로들의 목소리가 겹치며 독자를 압도한다. 소설은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오로지 줄무늬 옷만을 입고 자란 광고기획사 직원 `나(최하람)`와 심리상담센터 색채심리사이자 `붉은악마`의 중앙사무국 운영위원인 `윤서강`의 만남으로 시작한다.수록작 중 마지막 작품인 `거제, 포로들의 춤`은 작가가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 베르너 비숍의 사진을 우연히 접하고 호기심을 갖는 과정과 실재한 역사적 사실을 다큐멘터리처럼 설명해 놓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2

밤에 대한 옛 사람들 생각이 궁금하세요

로저 에커치 미국 버지니아공대 교수가 쓴 `잃어버린 밤에 대하여`(교유서가)는 산업혁명 이전의 밤에 대해 저자가 일기나 여행기 등 개인의 기록부터 잡지, 그리고 철학, 인류학 관련 학술연구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20여년간 집필했다.이 책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매우 광범위하다. 지리적으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의 자료와 미국 초기의 역사를 함께 다룬다. 시대적으로는 근대 초기를 주로 다루지만, 비교를 위해 중세와 고대의 관습이나 신앙도 함께 다룬다. 시공간이 무척 광범위하지만 옛 사람들의 밤에 대한 생각과 일상을 매우 촘촘하게 복원하고 있다.책은 총 4부 12장으로 이뤄져 있다. 제1부 `죽음의 그림자`는 밤의 위험성에 초점을 맞춘다. 육체와 영혼에 대한 위협은 어둠이 깔리고 나서 확대되고 강화된다. 저녁이 서양의 역사에서는 근대 초기에 가장 위험시됐다. 제2부 `자연의 법칙`은 밤시간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과 민간의 대응을 다룬다. 밤 활동을 제한하려는 교회나 국가의 다양한 억압적 조치, 그리고 어둠에 맞서기 위한 민중의 관행과 신앙을 다룬다. 제3부 `밤의 영토`에서는 사람들이 일하며 놀며 드나들던 장소를 탐색한다. 귀족과 평민 등 계급에 따른 밤시간의 서로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4부 `사적인 세계`는 낮 생활의 고통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안식처인 잠, 잠의 유형과 침실 의식, 수면장애 등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인 `닭이 울 때`에서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도시와 큰 마을에서 진행됐던 어둠의 탈신비화를 분석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2

법은 단 한줄… 평화로운 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설가 한창훈(52)의 소설 다섯 편을 모은 연작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한겨레출판)는 176페이지밖에 안 되는 작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수십 년이 걸려서야 완성된 단단하고 커다란 의미가 있는 책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작가는 20대 후반이던 어느 날 우연히 한 신문 칼럼을 읽게 된다. `녹색평론` 김종철 선생의 `단 하나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라는 글이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던지 작가는 그 종잇조각을 가위로 오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읽고 또 읽는다. `어느 누구도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는 남대서양 화산섬인 트리스탄 다 쿠냐 섬의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40대 중반이 된 작가는, 어느 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시민사회 구성원의 덕목에 대한 우화풍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처음엔 거절하나 문득 저 가슴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섬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종철 선생의 칼럼은 그렇게 연작소설의 첫 편인 `그 나라로 간 사람들`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네 편의 소설이 5년 사이에 차례로 발표된다. 소중한 씨앗 하나가 연작소설을 낳게 만든 것이다.`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한 평화로운 섬을 배경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섬의 법은 단 한 줄이다.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는 것. 빈부귀천이 없어서 그곳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조차 모른다. 순리대로 아무 걱정 없이 산다.화산 폭발 때문에 섬을 떠나 본토인 육지로 이주하게 된 섬 주민들에게 어느 날 기자 한 명이 찾아온다. 휴일에는 쇼핑도 하고 놀러 다니면서 즐기라는 기자의 말에 섬 주민 중 한 명은 지금도 충분히 즐겁고 만족스럽다고 말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오늘은 쉬는 날이죠. 그래서 이렇게 쉬고 있습니다. 물고기나 새도 활동을 하고 나면 쉬죠. 이보다 어떻게 더 잘 쉴 수가 있지요?”작가는 다섯 편의 연작소설을 통해 `물질과 소유 중심주의`, `소통과 공감의 부재`, `성공 지상주의`, `개성을 무시하는 획일주의`, `독재의 폐해에 시달리는 사회`를 풍자한다. `쿠니의 이야기 들어주는 집`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지와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짚고, `그 아이`를 통해 성공과 일등을 향해 질주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그곳으로`를 통해 지도자의 독선적인 판단이 모두를 얼마나 위험에 빠지게 하는지도 보여준다. 그리고, “준비를 해야 행복해진다고” 믿는 우리에게 “진짜 사랑하는 게 뭔지, 진짜 행복한 게 뭔지”를 묻는다.전라남도 여수시 거문도 출신인 한창훈은 19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단편 소설 `닻`으로 등단해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등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소설로 써왔다. 대산창작기금, 한겨레문학상, 제비꽃서민소설상, 허균문학작가상, 요산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12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

김수영문학상, 동국문학상,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시인 이윤학의 아홉번째 시집`짙은 백야`(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1990년`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시인은 3~5년 주기로 성실하게 시집을 출간해왔고, 그때마다 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사소한 존재들에 관심을 쏟고 생의 결핍을 성찰적 시선 안으로 끌어들이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발견`하는 이윤학 특유의 방식은, 5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깊이를 더한다.태어나 살아가고 언젠가 묻히게 될 사적인 공간, 그곳은 `농촌`이자 제이, 제삼의 고향이며 과거의 기억에서 미래의 모습을 읽어내고 현재의 `늙은 시절`을 기록하게 하는 곳이다. `십대의 몸` `칠십의 마음`이었다 어느덧 `칠십의 몸` `십대의 마음`으로 살게 된 시적 자아가 기록하는 `늙은 시절`은 이 시집에서 영원한 삶의 무덤인 동시에 생명과 감각의 터전이 된다. 언뜻 처연해 보이는 사적인 역사를 투영해 바라본 곁의 존재들은 그러나 죽음 근처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생명의 아이러니를 온몸으로 나타낸다. 시인은 동물과 식물, 모든 생명들의 원천이자 무덤인 자연에서 개별적 삶들의 운명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삶엔 마치 “짙은 백야”처럼 두터운 안개가 끼어 있다.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지만 어디로 가든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길을 우리는 걷는다. 이윤학의 시에서 시적 자아를 포함한 존재들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사월의 눈`) 모를 삶이라는 길을 “필사적으로 걸어”왔다.“가난을 즐기는 게으름뱅이가 되려다 실패한 수천만번째 사례”(`공터의 벽시계`)인 “사내”에게는 이제 사랑조차 서로에 대한 “확대 해석”(`하리 선착장`)이고 “어떤 사랑도 실패한다는(`누옥의 방 한 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기에 그저 “드러누워 병나발을”(`사일로가 보이는 식탁`) 분다. 이윤학이 응시하는 건 모두 “또 하루를 산 것이 대견해 눈물이”(`서대길`) 날 법한 존재들이다.그러나 이 쇠함에 지극한 슬픔이나 절망은 없다. 소박하고 사소하고 어쩌면 늙거나 낡고 약한 존재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지역 이름이나 꽃이름들,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제목들로 꾸려진 이 시집 속 3부 62편의 시들은 어머니들과 고양이, 개, 닭, 물고기, 나무 등 모든 생명들의 “무덤”에 다녀오고 있는 중이다.“푹푹 찌던 지난 세월이” “몰려왔다”. “많은 징검다리를 밟고 여기까지 왔다”(`뒤표지 글`). 갖은 풍경과 생애로 구성되고 조직된 시로써 마침내 마주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벼름박(벽)에 걸어둔 간드레(광산의 카바이드등)와, 폐광된 갱도를 따라간 바닷물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묻힐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시인의 말`). “명감도 보고 개암도 보고 정금도 보고 나를 만나지 못한 나도 보았다”.그렇게 이윤학의 시는 현실의 시간을 부정하되 공허에 빠지지 않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깊은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05

短詩, 짧은 울림 긴 여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철없이 킬킬대는구나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신경림 시`농무(農舞)`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40년 동안 한국시단의 중심을 지켜온 창비시선이 400번을 맞아 기념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창비)를 출간했다.박성우·신용목 시인이 창비시선 301번부터 399번까지 각 시집에서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따라 읽을 수 있는 시 한 편씩을 선정해 엮은 책이다.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의 경우 그 중 한 권만 택해 수록했기에 총 86편의 시가 실렸다.엮은이들은 선정 기준에 대해 “이를 두고 단시(短詩)라고 불러도 좋고 한 뼘 시나 손바닥 시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다. 짧은 시가 쉽다는 뜻이 아니라 가파른 길을 짧게 나눠서 걸어가면 어떨까 하는 기대 말이다”라고 밝힌다.창비시선은 첫 시집 출간 이래로 인간을 향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정신을 견지해왔다. 창비시선의 시집은 사람과 삶에 대한 것이었으며, 그 어떤 시선보다 독자와 함께하는 소통을 우선시해왔다. 한동안 위축돼 있던 문학시장이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는 지금, 시와 독자가 만나는 지점을 다시 고민하는 것이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의 기획의도다.신경림`농무`, 고은 `새벽길`, 곽재구 `사평역에서`, 김용택 `섬진강`, 조태일 `국토`, 박노해 `참된 시작`,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문태준 `맨발`,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등 창비시선의 주요 시집은 독자들의 뜨겁고도 꾸준한 사랑을 받았으며, 시대의 목소리를 담보하면서도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해왔다.`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역시 오늘날 한국 시단을 이끌어가고 있는 다양한 시인들의 면모를 담았다. 고은 신경림 김용택 도종환 김사인 나희덕 장석남 정호승 이영광 함민복 문태준 진은영 송경동 등 각자의 개성과 성취가 뚜렷한 시인들의 절창과 강성은 이제니 김중일 이혜미 주하림 신미나 안주철 박소란 안희연 박희수 등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인을 소개하는 시편을 고루 포진한 것은 이번 시선집의 특징인 동시에 전세대의 목소리를 모두 담아온 창비시선의 자랑이다.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짧은 시를 읽음으로써 독자들은 난해하게만 여겨졌던 시에 한결 가깝게 다가가고, 짧기에 전해지는 또다른 울림을 느낄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05

조상의 지혜·맛·풍류 내림음식·내림술 기행 종가음식 43가지 소개

조선시대에는 김유와 김령처럼 요리책을 쓴 선비가 있는가 하면, 약술을 빚은 사대부`어부사시사`의 윤선도도 있었다. 양반도 소매 걷어붙이게 하는 내림음식, 내림술의 비밀은 무엇일까?`요리책 쓰는 선비, 술 빚는 사대부`(담앤북스)는 미식가와 애주가를 사로잡는 종가 음식 43가지를 소개하는 음식 책이다. 종가의 고장 안동부터 의정부와 모악산 사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과상, 제사상, 손님상 차림은 물론 반주 상차림까지, 좋은 재료만 쓰고 아낌없이 베푸는 종가 음식 기행이다. 옛 지혜가 살아 숨 쉬는 술상과 밥상 차림에서 식(食)도락, 주(酒)도락을 느껴 보자. 읽다 보면 혀끝에 와 닿는 조상들의 정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종가 문화를 지키는 건 종손뿐만이 아니다. 종손, 종부, 남녀와 관계없이 지금도 내림음식과 내림술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딸에서 아들에게, 아들에서 딸에게로, 딸에서 딸에게 등등, 전통은 다양한 갈래로 전해지고 있다.대중에게 내림음식과 내림술을 소개하려는 후손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전통 부각`을 판매하는 거창 사증종가와 `죽염장`으로 유명한 담양 양진제 종가처럼, 기업이 된 종가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다. 이제 종가의 문화는 사라져 가는 소중한 것들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동안 종가의 이미지가 전통, 고급 음식에 국한돼 있었다면 이 책에서는 현대적인 종가, 대중 지향적인 종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6-0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