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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애플 신화 주인공 잡스 경영철학 분석

전세계 모바일 혁명을 이끈 애플 신화의 주인공 잡스(1955~2011)와 함께 애플의 광고와 마케팅을 이끌었던 켄 시걸이 `미친듯이 심플`(문학동네)을 출간했다.`스티브 잡스, 불멸의 경영 무기`라는 부제의 `미친듯이 심플`은 잡스의 경영 철학을 분석했다.저자 켄 시걸은 1997년 잡스가 애플에 복귀했을 때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광고 캠페인을 기획해 애플의 부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아이맥(iMac)`이란 제품명을 고안해 `아이(i)` 시리즈의 기반을 다졌다.켄 시걸은 똑똑한 인재들의 창의적 사고를 저해하는 관료적인 위계질서와 복잡한 대기업형 프로세스를 철저하게 단순화하고자 한 잡스의 경영 방식을 “단순함을 향한 헌신적인 집착”이라고 표현하고, 애플의 혁신을 가능하게 한 단순함의 11가지 원칙을 제시하며 애플의 외부인이나 저널리스트가 쓴 책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잡스는 남다르게 생각할 줄 아는 뛰어난 인재들의 아이디어가 회사의 프로세스로 인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애플의 업무 구조를 신선할 정도로 평탄하게 만들고 프로세스를 단순화했다. 그 누구에게도 형식과 격식을 요구하지 않았고, 아이폰의 단순한 디자인처럼 군더더기 없이 애플을 경영하고자 했다.저자 켄 시걸은 이러한 잡스의 경영 원칙을 형상화한 상징물로 `심플 스틱(Simple Stick)`이란 것을 언급한다. 심플 스틱은 실제 애플 직원들이 사용했던 말이다. 잡스가 어수선한 결과물을 내놓은 직원을 직설적인 언사로 호되게 평가했을 때 직원들은 “심플 스틱으로 맞았다”고 표현하곤 했다. 회의에 불필요한 사람이 참석했을 때, 제품의 기능이나 디자인이 직관적이지 않고 복잡하기만 할 때, 두세 마디면 끝날 의견 개진을 겉만 번드르르한 프레젠테이션으로 만들어 회의 시간만 늘여놓았을 때 어김없이 잡스의 심플 스틱이 등장했다. 저자는 똑똑한 인재가 모인 굴지의 IT 기업들조차 복잡한 프로세스에 빠져 좋은 아이디어를 사장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고 지적하며, 이 책을 통해 복잡한 형식과 절차에 매몰된 기업들이 심플 스틱을 거머쥘 수 있도록 안내한다.시걸은 잡스의 경영 무기이자 핵심 철학은 바로 심플(단순함)이라고 강조한다. 잡스는 구성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로막는 관료적 위계질서와 복잡한 대기업형 프로세스를 최대한 단순화시켰다. 전 세계 애플 임원의 수를 100명으로 한정하고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연례회의 `톱 100`을 운영하는 등 단순함의 원칙을 적용했다. 제품군에서도 마찬가지다. 잡스는 애플 복귀 당시 20개가 넘는 제품군을 개인용과 전문가용 데스크톱, 노트북 등 4개로 단순화했다.시걸은 잡스의 경영 방식을 `단순함을 향한 헌신적인 집착`으로 요약한다. 그리고 잡스가 끝없이 추구한 단순함 속에서 11가지 경영 원칙을 추려낸다. `냉혹하게 생각하라`, `작게 생각하라`, `최소로 생각하라`, `가동성을 생각하라` `상징을 생각하라`, `단어를 생각하라` `평소처럼 생각하라` `인간을 생각하라` `회의적으로 생각하라` `전쟁을 생각하라` `앞서 생각하라` 등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2

“태어나는 순간엔 왜 나를 볼수 없을까”

이영주(40·사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차가운 사탕들'(문학과지성사)은 존재의 비밀과 시 탄생의 비밀을 일치시키려는 낯선 언어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존재의 비밀이란 한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걸쳐 있는 존재의 현상학을 의미하는데, 이영주는 우선 탄생의 순간에 대한 비의를 이렇게 시로 옮긴다.“태어나는 순간에는 왜 나를 볼 수 없을까/ 미래 밖에서 우리는 공을 굴린다.//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안쪽에 숨겨져 있다./ 아픈 사람의 손바닥은 빨개// (중략)// 새벽을 지나 앞발로 공을 굴리는 고양이/ 태어나면서부터 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색깔을 가졌을지도 몰라// 모호한 시작 때문에 처음과 끝을 굴리는 우리는”(`둥글게 둥글게' 부분)탄생의 순간을 기억하는 갓난아이가 없다는 점에서 산파술의 비밀은 타자만이 탄생의 순간을 기억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받은 산파마저도 피조물이긴 마찬가지여서 산파술의 비밀은 산파 역시 알지 못한다. 한 존재의 시작에 칠해진 가장 아름다운 색은 존재 그 자체라고 할 `공'의 안쪽에 칠해져 있지만 우리는 한번도 그 색을 보지 못한 채 공을 굴리고 있을 뿐이라는 자괴감이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렇다면 죽음은? “오늘은 이 잠이 마지막입니다. 차가운 돌 위를 떠나 안으로 들어갈 날을 하루 앞두고 있네요. 돌을 깨고 돌가루를 먹는 석공들은 느낌으로 안다고 합니다. 병자의 마음을… (중략) 돌을 깨고 나면 우리의 생태는 죽은 살덩이로 남아 있습니다. 미끈한 돌이 완성되고 벼랑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애인을 만나려고.”(`석공들의 뜰' 부분)이 시의 화자는 돌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임종 직전의 사람으로, 여기서 돌이란 차갑게 굳어져가는 그의 몸을 형상화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영주의 시는 이렇듯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모호한 현상들을 포착하고 있는 한편, 그러한 현상을 시의 탄생 과정과 일치시키려는 개성적인 해석학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해석학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야유회'일 것이다. “노인들은 서로를 죽은 자로 대할 수 있기 때문에 등을 쓸어준다. 솟아오른 등뼈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도록. 나는 어떤 뼈의 성분에 숨어 있었나.// 머무는 곳으로부터 추방당하면서 침묵은 언어보다 크고 뜨겁게.// 태어난 곳에서 가장 먼 곳. 폐기물 냄새가 모여드는 곳.”(`야유회' 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25

대작가 탄생 알리는 단편들…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핀천의 유일한 소설집 `느리게 배우는 사람'(창비)이 완역·출간됐다.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네명의 소설가로 꼽히는 핀천은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소설에 끼친 영향으로 싸이버펑크 SF문학의 선조로 인정받는 소설가로서,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초기에 쓴 다섯편의 단편을 모아 작품을 쓴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4년에 출간한 것이다.데뷔 장편이 나온 이듬해에 발표된 `은밀한 통합'(1964)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핀천이 대학생 시절에 쓴 작품들이며 소설집에 실린 초기 다섯편의 작품을 보면 핀천이 이후에 발전시킬 주제와 스타일, 취향 등을 짐작할 수 있다.핀천은 소설집 앞에 긴 작가 서문을 붙여서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자신의 미흡했던 점, 즉 어두운 말귀 때문에 대화의 많은 부분을 망가뜨리고 있는 점, 개념이나 관념을 먼저 앞세운 탓에 등장인물의 생생한 형상화가 미흡한 점 등을 고백하고 있다. 작가 서문은 각 단편들에 대한 해설과 비평으로서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접하기 힘든 핀천의 문학적 성장과정을 자전적으로 소개하는 글이기도 하다.소설집에 담긴 다섯편의 이야기는 소재나 배경 등이 각기 다르지만 죽음, 무기력,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감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다. 핀천의 첫 단편 `이슬비'는 군대라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청춘의 이야기이다.주인공 러바인은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온 인물인데, 그는 군대를 떠나려 하기보다 반복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그곳에 안주하려 한다. 주인공은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인근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신 인양작업을 하면서 죽음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의미없는 섹스를 한다. 그런 뒤 그는 휴가를 가는 대신 군대생활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폐쇄회로와 같은 고립적이면서 단절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1960년대 보잉사를 그만 두고 작가로 변신한 이래 지금까지 은둔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토머스 핀천. 사진은 그가 1960년대 중반 뉴욕에 머물 때의 모습으로 유일하게 공개된 것이다.`로우랜드'는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책임있는 성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롭고 활기찬 삶을 꿈꾸는 남성의 이야기이다. 결혼하여 도시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데니스 플랜지는 젊은 시절 바다에서 해군 장교로 지낸 기억을 되살리며 집에 찾아온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하나 아내에 의해 쫓겨나 쓰레기 폐기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쓰레기 폐기장에는 1930년대 테러리스트들이 파놓은 은신처가 있고 현재는 집시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집시 소녀를 만나 새로운 삶을 계획하나 작가는 이 장면을 환상처럼 묘사함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일지, 아니면 또다른 굴레일지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다.`엔트로피'는 핀천 문학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엔트로피 개념을 문학적으로 처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후 핀천 소설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아파트 삼층에 사는 멀리건은 재즈 사중주단 친구들과 함께 사흘째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고, 바로 위의 사층에서 학자로 보이는 칼리스토는 방을 온실처럼 만들어놓고 죽어가는 새를 살리려 하고 있다. 작가는 삼층과 사층을 번갈아가며 묘사하는데, 삼층의 파티가 상징하는 무질서·소음·혼란·고갈과 사층의 온실이 상징하는 질서·규칙·통제·보존 간의 갈등이 소설의 핵심구조를 이룬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25

회계사가 바라본 돈의 본질은?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돈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은 어쩌면 치열한 일상과 맞물려 무의미한 소리일 수 있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 삶에서 개인차는 있겠지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뉴스 속에서 꼭 돈이 많다고 행복하고 돈이 적다고 불행함은 아니란 것을 듣는다. 이 시점에서 돈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업종 중의 하나인 회계사인 저자 정재흠 선생은 고민한다. “과연 돈이란 무엇인가?” 우리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돈의 본질에 대해 생각한다. 그 결과물이 `풍경 속 돈의 민낯'(휴먼큐브)이다. “인간 삶 속에 스며 있는 돈의 민낯을 자연이 펼친 풍경과 함께 추적해보기로 마음을 먹고 펜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작업이 형이상학적 측면, 곧 인간의 불가해한 심리를 자신 있게 추적해나가겠노라고 외치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는 깨우침이 들기 시작했다. 돈의 영혼은 나를 비웃는 듯했고 나의 손은 부끄러워 펜을 놓아야 했다. “돈이란 무엇인가”라는 황당한 회의는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당혹스러운 물음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결국 나는 교실에서 익힌 경제 경영 서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학으로 증명된 경제 경영 수치, 학문적·관념론적 언어, 또 도구적 이성으로 돈의 민낯을 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돈의 영혼이나 본질을 증명하기 위해선 오로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고 인간을 에워싼 문화와 역사, 사유의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가 분출한 사회적 현상을 따라가봐야 했다. 특히 현재는 물론이고 과거 고려, 조선시대 사람들, 혹은 중세, 근대 역사 속의 사람들이 돈 때문에 겪은 사건이나 서사, 사유 모두 내겐 현재적 사건이요, 오늘날 맞닥뜨리는 문제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인식도 한몫했다.”_머리말 중`풍경 속 돈의 민낯' 책 속에는 크게 다섯 가지 풍경이 나온다. 저자는 경기도 안성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켜켜이 쌓인 돈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로 잡아내고 있다.책의 본문에서 저자는 생명이 깨어나는 풍경 속 모습에서 자연이 개발 분양한 초대형 전원단지에 대해 사색하고, 박두진 시인의 `해' 속에서 사람 잡는 돈의 모습을 말한다. 이처럼 풍경과 문학, 사랑 등의 소재와 돈이라는 언밸런스한 소재를 통찰해 `돈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저자의 시선은 의미가 깊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이 책의 목표는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인간과 돈의 화해가 모색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즉,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룰 때 인간에게 안락감이 깃들듯, 인간과 돈이 화해를 모색할 때, 인간이 돈의 위세에 억눌리지 않고 사이가 좋을 때, 비로소 인간이 평화를 느낄 수 있고, 인간의 삶은 더 정직해지고 또한 우리의 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성해진다는 진리를 쫓는다는 일념으로 저자는 글을 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25

조선시대 명문가 비밀은 `道와 禮儀 정신`

2004년부터 조선 명문가를 찾아 그들의 이상과 정신을 탐구해 온 뿌리회가 펴내는`조선의 양반문화`시리즈 2번째 책인 `명문가, 그 깊은 역사`(글항아리)가 나왔다.16세기 사림의 대표 인물인 조광조의 한양 조씨 정암 가문, 성삼문 등 수많은 관료와 학자를 배출한 창녕 성씨 청송·남명 가문, 영일 정씨 송강 가문,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파평 윤씨 명재 가문,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여주 이씨 퇴로 가문 등 모두 10개 명문가를 다뤘다.이들 가문은 단순히 관료를 많이 배출하거나 권력을 누린 것이 아니라 유교의 `예(禮)`와 `덕(德)`을 조선 명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명가의 탄생은 조선시대에 예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항상 권력과 힘보다는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16세기 사림의 영수로 맨 앞자리에 놓이는 조광조의 한양 조씨 가문은 원래 공신세력이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다. 선조 조인옥은 고려 말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인물이며, 조영무, 조연, 조온 등 한양 조씨 일원은 이성계 측에 참여해 활동하고 그 성과로 대거 봉군되었다. 당시 이성계와 중첩해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 주효했다. 한양과 경기 지역 일대에 세거하던 한양 조씨는 재지 기반을 확대해나갔고, 15세기 중반에는 일부 계파가 용인 지역에 정착했다. 이러던 것이 조원기가 16세기 초반 소릉(문종비) 복위를 지지하면서 한양 조씨는 정치적 성향이 변하게 됐다. 점차 사림 성향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조선 중기의 학자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이 우리 창녕 성씨다”라고 했듯, 창녕 성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문가 집안이다. 성삼문, 성담수, 성현, 성수침, 성혼 등 이름을 빛낸 수많은 관료와 학자가 이 집안에서 나왔다. 성여완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갔다. 이후 성충달의 아들 성세순은 이조참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과 중종 때 모두 벼슬생활을 한 그는 이조참판 때 그의 집에 벼슬을 구하러 오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청렴했으며 죽었을 때 김안국이 “조정은 양좌를 잃었다”라고 할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책에서는 성세순을 기점으로 그의 아들인 성수침과 손자 성혼으로 이어지는 창녕 성씨 가문의 학문적 위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저자들은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항상 권력과 힘보다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했다”고 평가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4-18

대한민국 `정치지도` 한눈에

삼국지 인물과 대한민국 유명 인사들을 정교하게 접목시켜 지난해 말부터 한국 페이스북을 뜨겁게 달구며 화제를 모았던 고려대 한문학과 강사 김재욱씨의 `삼국지 인물전`(휴먼큐브)이 출간됐다.저자가 페이스북에 올려 폭발적인 호응을 얻은 즉흥적 인물평을 엮은 이 책은 한 마디로 삼국지로 풀어보는 대한민국 인물열전이다. 우리에게 친근한 삼국지 인물들과 우리 현대 인물을 절묘하게 매칭 시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삼국지 인물전`책 속에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유명 인사 32명의 인물이 나온다.문재인은 유표, 박원순은 유언, 진중권은 예형, 조국은 조자룡, 김한길은 원술, 안철수는 원소 등 언급되는 인물들의 살아온 행적과 삼국지 내용 중 비슷한 인물을 비교했다.그럼으로써 딱딱한 인물평이 아닌 시대와 교감하는 살아있는 인물전을 만날 수 있다.문재인을 풍채 좋고 사람 좋은 성인군자였지만 천하를 경영할 뜻이 없었던 유표에 비유하면서 유비나 조조 같은 인물로 성장하려면 대중 속으로 뛰어들라고 조언한다. 김한길은 능력도 없으면서 전국옥새에 탐을 내 패가망신의 교과서가 된 원술에 비유했다. 안철수와 짝이 된 원소는 겉으로는 너그러운 것 같지만 시기하는 마음이 강하고 꾀는 많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이다.특히 오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요동치는 정치국면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인물 중심으로 파헤쳐 대한민국의 `정치지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김재욱씨는 “현대 인물의 경우 그 사람에 대한 전망과 바람을 덧붙였다. 한 사람의 행적을 쓰는 것이므로 사실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으며, 신중하게 쓰되 재미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김씨는 또 “독자들은 책을 읽으면서 삼국지의 등장인물과 현대 인물의 모습이 아주 많은 부분에서 흡사하다고 느낄 것인데, 인물 비교와 글의 내용이 독자의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도 당연히 있을 것이나, 작가의 개인적인 견해라 여기고 해량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재미있게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주면 다행”이라고 바람을 나타냈다.“혹시 안철수가 야권 단일 후보가 되어 2017년 대선에 나선다면? 진다. 현재와 같은 밋밋한 장수 구성에 민감한 사안은 모조리 피해가는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한다면 이길 수 없다. 안철수의 지지율이 높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태도와 신념을 쉽게 뒤집는 모습을 보면서 안철수를 싫어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아진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가 원소처럼 피를 토하고 죽지 않으려면 이래야 한다. 책임 소재가 확실한 사안은 명확히 따져 묻고 답해야 한다. 정치권 밖에 있는 인재를 선거에 내보내야 한다. 지금처럼 민주당 2진급 인물을 가지고 싸워서는 지방 토호 세력밖에 될 수 없다. 언론인처럼 논평▲ 김재욱 고려대 강사하지 말고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원소처럼 옳고 그른 것을 섞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현안, 예를 들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통합진보당 사태, 민영화 논란에 대해 확실한 의견을 제시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이런 정도의 행동은 보여줘야 야권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허상에의 집착은 파멸을 부를 뿐`중 50면)경북 봉화 출신인 저자 김재욱은 동국대 한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한문교육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연수원을 수료했고, 고려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8

연구실에 등장한 사지 잘린 시체 두 구…

요시가와 에이지 문학상, 나오키상 등을 받으며 일본 환상 미스터리의 대가로 불리는 미나가와 히로코의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80대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면서 본격 미스터리계의 대표작가로 자리잡고 있는 미나가와 히로코는 환상적인 전기소설, 미스터리, 시대소설 등 장르를 초월할 정도로 독특하고 역사 감각이 아주 색다르고 탐미적인 작품들로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2011년 발표한 장편소설 `열게 되어 영광입니다` 역시 본격 미스터리라는 큰 틀 안에서 미나가와 히로코만의 개성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2012년 제12회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하고 `책의 잡지` 2014년 추천 문고 미스터리 부문 1위에 올랐으며, 출간된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를 비롯해 거의 모든 미스터리 랭킹에서 3위 안에 드는 기록을 세웠다.18세기 런던,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도 해부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던 외과의사 대니얼 버턴의 연구실에 정체불명의 시체 두 구가 등장한다. 사지가 잘린 소년과 얼굴이 짓뭉개진 중년 남자. 평소 연구와 실습을 위해 도굴꾼이 무덤에서 파헤친 시체를 암암리에 구입해왔던 대니얼은 경찰의 추궁으로 궁지에 몰리지만, 맹인 치안판사 존 필딩은 그의 연구에 흥미를 표하며 사건 해결에 협조해줄 것을 요구한다. 총명한 판단력과 강단을 지닌 수제자 에드워드와 심약한 천재 세밀화가 나이절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제자는 스승과 자신들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시체에 얽힌 수수께끼를 쫓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에서 시인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런던으로 올라온 한 소년의 비극이 밝혀진다. 소년을 죽인 이는 누구인가? 시체의 팔다리는 왜 잘렸으며, 어째서 해부실 난로 뒤에 숨겨져 있었는가? 완전범죄에 가까운 사건의 전모가 가혹한 시대상의 묘사와 함께 우아하고도 스릴 넘치는 문체로 그려진다.`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던 1770년대의 런던은 빈곤, 실업문제,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의 악화 속에서 향락과 퇴폐, 그리고 범죄가 공존하던 도시였다.일본 출간 후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나가와 히로코는 “당시 런던에선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신과 신식 의학이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사치스러운 상류계층과 밑바닥 하층민의 대비가 심했기도 하고요. 직접 살라고 하면 싫을 가혹한 시대지만,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무척 흥미로웠습니다”라고 말했다.추리소설사 최고의 명탐정 셜록 홈스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가 활약했던 시기로부터 한 세기 전을 배경으로 삼은 이 작품은 그야말로 미스터리 팬들의 구미를 자극할 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8

우리時代 젊은 세대의 초상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꾸준하고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온 김금희의 첫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창비)이 출간됐다.등단 이후 5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차분히 가다듬어온 열편의 소설이 묶였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공간을 찾아나가는 우리 시대 젊은 세대의 초상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가운데, 주변을 돌아보는 속 깊고 섬세한 시선이 풍성한 이야기의 결 안에서 따뜻하게 빛난다.김금희의 소설은 어느덧 우리 시대의 보편이 돼버린 막막한 현실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데서 출발한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고 집을 나가 자취를 감추었거나(`너의 도큐먼트`), 허울뿐인 베트남 참전 경험만 믿고 허황하게 사업을 벌이다 IMF에 떠밀려 좌초되거나(`장글숲을 헤쳐서 가면`), 일평생을 몸 바쳐 일했지만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에서 밀려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아이들`). 그다음 세대에게도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갓 상경해 입사한 회사를 수습기간도 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거나(`우리 집에 왜 왔니`),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 몇달씩 헛된 꿈을 쫓기도 하고(`아이들`), 서울의 변두리를 전전하다 회사 사무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거나(`릴리`), 고단한 일상을 견디며 철거 중인 오래된 판자촌을 지키고 있다(`집으로 돌아오는 밤`).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야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김금희의 소설이 돋보이는 점은 자신이 처한 곤경에 유난 떨지 않고 손쉽게 환상에 기대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어정쩡하게 타협하지도 않는 차분한 균형감각이다. `너의 도큐먼트`의 주인공은 어머니의 제안에 따라 집 나간 아버지를 찾으러 지도를 들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는데, 거리거리를 계획 없이 어슬렁거리는 그 하릴없는 여정의 사이에, 옛 친구의 죽음을 전해듣고 해묵은 부채감에 친구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가 나란히 놓인다.이 탐색은 결국 아버지의 현재와 친구의 죽음 양쪽 모두와 지금의 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현실적인 거리감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게 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 공백의 자리로부터 자신만의 길을 어렴풋하게 열어나가는 주인공의 성장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그의 여러 소설들이 세대를 품 넓게 아우르는 것도 그런 미덕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산과 인천의 목재공장에서 평생을 일해온 아버지의 신산한 생애와, 변두리 아파트에 집을 마련해 이사하던 날 정육점에서 구한 황소 코뚜레에 중산층의 소망을 의탁했던 어머니의 삶을 이해해가는 이야기이다.▲ 소설가 김금희아버지와 어머니가 힘겹게 이루어낸 변두리의 삶을 벗어나리라는 꿈을 꾸며 방황했던 주인공은 이제 큰 수술을 앞두고 있는 아버지의 곁에서 언젠가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나무의 부력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아슬아슬한 생의 부력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시간을 이어주고 있음을 깨달아간다.다양하고 개성 있는 인물들이 품고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와 그들의 사연을 요령 있게 갈무리해내는 솜씨 역시 김금희의 소설을 특징짓는 미덕이다.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은 재수에 실패한데다 덜컥 임신까지 해버린 스물한살 주인공의 막막한 상황이 이야기의 중심이지만, 그 고민 못지않게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이 지닌 저마다의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며 특유의 풍성한 서사의 결을 만들어낸다.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의 곤경을 차분히 응시하면서 주변의 이들에게 따뜻하고 애틋한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일,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기울여야 알아챌 수 있는 희미한 기척으로 그들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 그것이 김금희의 소설이 세상에 응답하는 우직하고 정직한 방식이다. 담담한 듯 애틋한, 건강한 그 시선이 더욱더 깊고 넓어지면서 만들어갈 아름다운 소설의 결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해도 좋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1

`조선 최고 침의` 허임 파란만장한 삶

조선 최고의 침의(鍼醫·침술로 병을 다스리는 의원) 허임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소설 `허임`(전 3권)이 출간됐다.`낮은 한의학`의 저자인 이상곤 한의학 박사와 100여 편의 소설을 집필한 성인규 작가의 공동 저작으로, 4년 동안의 기획을 거쳐 탄생한 역사소설이다.관노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광해군과 선조에게 침을 놓았던 전설적인 침술가 허임(1570~1647·추정)의 일대기가 장편소설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동의보감`의 저자이자 당대 명의였던 허준과 동시대를 살았던 허임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 때까지 침의로 활동했다. 말년에는 `침구경험방`을 저술해 중국과 일본의 침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서출이나 양반가이던 허준과 달리 허임은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지녔으나 침 하나로 어의에 당상관까지 올랐다.책은 노비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취약점을 딛고 끊임없는 견제와 모함을 받았음에도 어의에 이르는 허임의 일대기를 대하 역사소설로 풀어나간다. 성인규 작가가 풀어나가는 17세기 혼란스러웠던 조선중기의 사회상과 전개, 그리고 현직 한의사인 이상곤 원장의 치밀한 의학적 고증은 책의 재미를 더한다.당파 싸움으로 얼룩진 권력자들과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임금, 공이 있는 자들을 역적으로 몰아세워 죽이거나, 전란 중에 사사로운 이득을 탐내 아군을 사지로 몰아넣는 자 등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해 책에 담아냈다. 또한 전란 와중에 시작된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 보위를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과 선조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당대 명의였던 허준과 허임의 경쟁 등도 다루고 있다.장악원 악공이었던 허억봉은 자신의 말실수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고, 야반도주하여 숨어 지낸다. 그의 아들 허임은 술만 마시고 가정은 돌보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한다. 아버지 대신 돈을 벌던 어머니가 쓰러지자, 사방팔방 용한 의원을 찾아 헤매이지만 천한 신분과 가난 때문에 그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던 중 약재를 찾으러 간 노비촌에서 우연히 마소를 돌보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침구술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1

투박하지만 깊은 울림 주는 `詩人 내면`

문학 전문기자이자 소설가로도 활동중인 정철훈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빛나는 단도`(문학동네)가 출간됐다. 표제작인 `빛나는 단도`는 시인의 내면을 솔직하게, 그래서 투박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전해준다. 태생적인 불구, 그래서 고단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온 꼽추 친구는 시인에게 죽음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이 죽음의 충동은 역설적으로 술잔을 채우고 춤을 추는 역동적인 삶을 떠올리게 한다.앞으로만 진행하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는 지나가는 존재. 미래는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게 불안하지만, 이 세상이, 가혹한 시간이 볼 수 있도록 피를 묻히는 것. 그것이 정철훈에게는 시가 아닐까. 이번 시집은 그의 언어의 피, 시의 피를 위해 비밀 주머니에서 그가 꺼내든 “빛나는 단도”일지도 모른다.광주에서 태어나 소련 해체 이후 본토에서 러시아 관련 학위를 받은 시인은 이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특유의 강건한 문장을 무기 삼아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역사와 시대를 작품 속에서 다뤄왔다. 한국전쟁으로 이산가족이 된 아버지의 사연과 미증유의 살육을 겪었던 고향의 역사, 그리고 찾아온 현실 사회주의의 패퇴. 역사적 사건은 그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하여 남다른 가족사와 개인적 체험을 매개로 한 그의 시는 `북방`에 얽힌 민족사를 시 안에 적극 끌어들이는 한편, `광주(光州)`로 상징되는 한국 근대성의 파산 과정을 비판적으로 사유하며 역사와 현실을 노래했다. 정철훈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단단한 힘이 거기 있었다.그러나 이번에 출간된 `빛나는 단도`는 광주와 러시아와 관련된 소회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빛나는 단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웅숭깊게 스스로의 내면을 주시하는 시인의 시선과 이어서 따라오는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자신에게 시가 무엇인가 하는 시인으로서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문자를 해득하기 전의 나를 규명하는 일은 그래서 이유 있음이다”(`독서의 습관`)라는 시구가 이번 시집의 열쇠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화려한 수사적 성찬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바가 아니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전철희는 “다층적 사유를 적확하게 전달하려는 시인에게”, 과장과 애매성을 수반하고 현실과 차폐된 경우가 많은 화려함은 미덕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하여 해설에서 “정철훈의 강건한 말투가 사상적 고투의 흔적이라면 그 궤적을 복기하는 것보다 충실한 독해법을 상상하기 힘들다”면서, 그 작업에 기여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 속으로 들어간다. 명료하고 호방한 정철훈 시의 언어에서 “투박한 껍질 속 알을 감춘 진주처럼” 심원한 통찰을 읽어내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11

한국사회 팽배한 물신주의인간성 외면·배반하는 과정…

문학동네작가상(2004)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 전수찬(46)의 세번째 장편소설 `수치`(창비)가 출간됐다. 등단 당시 `개개인의 실존적 고뇌와 삶에 관한 녹록지 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신수정)는 평을 받은 그가 본격적으로 인간의 가장 내밀하고도 연약한 감정, `수치`를 치밀하게 파헤친다.주인공 원길은 아내와 함께 딸 강주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다. 그러나 아내는 몽골사막을 건너다 쓰러지고 말았고, 원길은 그런 아내를 사막에 남겨둔 채 강주를 업고 돌아섰다. 이후 남한에 온 원길은 같은 처지의 영남과 동백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살아남아 생을 이어간다는 수치심에 물들어 있다.동백은 스스로를 우스갯거리로 만들어 손가락질 받는 것으로 속죄하려 하지만 죄책감을 덜지 못하고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동백이 떠난 뒤에도 원길은 매순간 자책과 자학을 반복한다.아내를 버리고도 아무 일 없던 듯 살아가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라는 그는 스스로를 “죽음을 지키는 묘지기”(184면)로 규정하며 다만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살아간다. 반면 영남은 새 생활을 시작하겠다며 올림픽을 유치한 지방도시로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도 삶과 죽음 사이의 처절한 번민은 계속된다.그러나 `수치`는 탈북자들의 “험난한 인생역정과 사회적 곤경”(한기욱, 추천사)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 작품이 아니다. 전수찬은 주인공들의 겪고 있는 내적 고통을 고도로 자본화된 한국사회, 그 안에서도 물신성이 첨예화되는 사건 하나에 맞붙인다.영남이 이사 간 도시의 올림픽 선수촌 공사현장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유골이 다량 출토된다. 전국은 민간인 학살의 범인이 미군이냐 인민군이냐 하는 진실공방으로 떠들썩해지고, 정부는 인민군의 범행이라는 공식입장을 내놓는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마을로 몰려와 공사를 중단하고 진실을 규명하라며 시위를 벌이고,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길 바라는 지역주민들과 심한 갈등을 빚는다.`수치`의 주인공들은 남한 사회의 소수자이자 퇴락한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제삼자로 자리한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 한국사회의 팽배한 물신주의가 인간성을 어떻게 배반하는지 폭로한다.민간인 학살이라는 역사적 상처 앞에서 정부와 지역주민, 정부를 불신하는 시위대 모두가 자신의 물질적, 정치적 이득을 쟁취하기 위해 날을 세운다. 무엇보다 먼저 이루어졌어야만 했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는 어느 쪽에서도 고려되지 않는다.날이면 날마다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삶이 내뿜는 아름다움에 매번 좌절하고 마는 영남과 원길의 애처로운 고뇌가 스스로의 삶을 물질에 저당 잡히고 염치를 파한 채 살아가는 이들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전수찬이 `수치`를 집요하게 이끌고 온 것은 최소한의 윤리조차 내던진 세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다.▲ 소설가 전수찬복잡한 이해관계와 단단한 권력구조, 인간성을 탈각시키는 자본의 원리에 위태로이 떠밀려가는 사회에 대한 안쓰러움이 작품 전반에 짙게 묻어난다.전수찬은 이러한 사회· 윤리적 사유의 얼개를 하나의 사건에 밀착시켜 탁월하게 표현했다. 탈북자들의 실존적 고민과 이 땅의 윤리적 척박함이 뒤섞여 명과 암의 앉은자리를 다시금 더듬어보게 한다.작품의 거개가 대화로 이루어졌음에도 사건의 진행에 빈틈이 없고 주인공의 내면을 세밀하게 추적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수치`가 이룬 또 하나의 성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04

어시장 체험이 그대로 詩가 되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시어에 삶의 신산스런 목소리와 날것의 냄새를 덧입히는 시인 성윤석(48)이 어시장 `일용잡부`가 돼 돌아왔다. 이 시집에는 시인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배달 오토바이를 타고 부둣가를 누비며 틈틈이 쓴 시 74편이 수록돼 있다. 극장을 드나들던 소년(`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은 묘지 관리인(`공중 묘지`)을 거쳐 지금은 남쪽의 한 바닷가 도시(마산)에 정착해 있다. 스스로를 `잡부`라 칭하는 시인은 어시장에서 냉동 생선상자를 배달하거나 냉동생선을 손질하는 일을 하고 있다. 시인은 그렇게 한동안 시를 잊고 지내다가 그곳의 상인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중 모처럼 시심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는 멍게를 비롯해 문어, 상어, 해월(海月, 해파리), 사람이 된 생선(임연수), 빨간고기(적어), 호루래기(오징어의 새끼) 등 많은 수산생물들이 주요한 시재로 등장하는가 하면 요구, 통발, 유자망, 딸딸이 등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어로 도구들도 자주 보인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이를 두고 성윤석이 자연 생태의 한 극단을 통해 현재와 과거의 체험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결국 성윤석 시의 비밀은 `체험의 강도`와 `실험의 밀도`가 강력하고 집요한 `기억`의 힘에 의해 합체되면서 두 몸이 아니라 한몸을 이루는 데 있을 것이다.” ―오형엽 해설 `체험의 강도와 실험의 밀도` 부분이번 시집에서의 성윤석은 약 200년 전 진해(마산 진동의 옛 지명)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당정 김려가 우리나라 최초의 어족 도감 격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쓰던 모습과 닮았다. 시인은 스스로를 부둣가에 유폐하고 수면 위로 끌려나와 퍼덕이는 생선처럼 불가능한 것을 갈구하지만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그 서러운 힘은 삶의 비릿함만 더할 뿐이다. 희망은 너무 멀리 있고 슬픔만이 번민의 몫으로 돌아오는 상실감에도 불구하고 와 닿지 못할 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밝기로 시인을 향하고 있다. 달이 너무 환해 무서운 월명기(月明期)에 심연으로 깊이 숨어드는 바다짐승들처럼 시인은 세계의 명징함을 피해 끊임없이 침잠하는 중이다. 그렇게 시인은 오늘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괴로워 의도적으로 의식을 지워내고 있다. 독자는 침잠의 그 어느 지점에서 시인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투쟁이 일순 정지하고 시의 미학이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보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04

세상의 외로움 보듬는 부모 잃은 두 자매

마치 변함없이 마음 편한 집 앞 골목처럼, 언제나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처럼, 항상 돌아보면 거기서 따스한 위로의 메시지를 발신하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50). 그녀가 이번에는 외로운 모두를 위해 `함께 이야기하기`에 대한 소설을 펼쳐 보인다.고독한 사람들 사이에서 떠도는 비밀의 홈페이지 `도토리 자매`. 두서없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나누고 싶은데 말할 상대가 없는 우울한 날, `도토리 자매`에게 메일을 보내면 반드시 답장이 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처음으로 올려다본 파란 하늘의 상쾌함부터 저녁 식탁에 올릴 따끈한 수프 한 그릇의 온기까지. 아무리 소소한 이야기라도 마음을 담은 대답이 있으면 외로움이 사라진다.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날, 정말로 외로운 사람들만 공유하는 비밀의 주소가 있다. 언제든 메일을 보내면 언젠가는 답장이 오는 홈페이지 `도토리 자매`. 사랑하는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죽음, 친척 집에서 보낸 힘겨운 세월, 설레는 연애의 끝, 좋아했던 사람과의 아쉬운 이별. 말을 잃었던 시간이 있었는가 하면 마냥 도망쳐 버린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겨 내고 머물 곳을 찾은 `도토리 자매`는 지금 여기서 고독한 사람들을 위해 답장을 쓰고 있다.요시모토 바나나의 따스한 신작 장편소설 `도토리 자매`(민음사)의 제목 `도토리 자매`는 자매의 이름에서 따온 필명이다. `돈코`와 `구리코`(일본어로 `돈구리`는 `도토리`를 의미한다.) 자매는 산부인과 병원 뜰에서 도토리를 주우며 딸아이들의 출생을 기다린 아버지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과 `도토리`라는 이름을 나누어 붙이자는 어머니 두 사람의 귀여운 마음이 담긴 이름을 받았다. 자매가 어린 시절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남겨 준 것은 특이한 이름과 사랑받은 기억뿐. 몇몇 친척들의 가정을 거치며 살아오던 자매는 각자 힘든 시기를 거쳐 결국에는 두 사람만의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다.` `부모님에게 받은 따스한 마음을 잊지 않고 세상에 돌려주고 싶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떠난 온천 여행에서 그런 서로의 생각을 확인한 두 사람은 비밀리에 `도토리 자매`라는 홈페이지를 열고, 이메일을 모집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보내오는 무수한 편지에 답장을 하기 시작한다. 활달한 연애 지상주의자 돈코와 내성적이고 신중한 구리코,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른 자매이지만 둘의 삶은 `도토리 자매`를 운영하면서 점차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간다.세상을 향한 순수한 애정, 그런 것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만 해도 위로받는 순간이 있다. 언제 어느 작품을 집어 들고 언제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에는 그러한 위로가 존재한다.요시모토 바나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품 속에 그녀가 좋아하는 여행지 풍경이 살짝 삽화처럼 들어가기도 하지만 아예 라틴아메리카나 하와이를 무대로 한 본격적인 여행 이야기를 발표하기도 한다.특히 이번 작품에서 도토리 자매의 언니 돈코가 치유를 경험하고 그 마음을 전하는 장소는 바로 `서울`이다. 다정한 한국인 남자 친구와 함께 떠난 서울 여행에서 돈코는 자기 안의 슬픔을 위로받고 그 이야기를 자신들의 홈페이지인 `도토리 자매`의 메일 계정을 통해 가득히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4-04

“지금 여문 건 고통의 강 건너 왔기 때문”

“사랑하는 일이 가슴 아픈 일 일지라도멈출 수 없으리상처받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가을바람 불면 그 바람 온 몸으로 맞고바람이 잠들면일어나 가던 길 다시 가리라계절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면언제 흔들려 내공을 쌓으랴작은 열매가 바람에 흔들,흔들거리면서 익어 가듯이내 사랑도 가을바람에 붙들려후려치는 아픔을 견뎌야 익어가리라성숙하기 위해서 사랑은 아픈 것인가가을이 가고 바람이 잠들면가던 길 다시 가면서 말하리라이 세상에 아프지 않는 사랑은 없다고지금 여문 것은한 때 긴 고통의 강을 건너온 것이라고바람이 잠들면 말하리라”(박철언 시 `바람이 잘들면 말하리라`)박철언사진 전 정무장관이 세 번째 시집 `바람이 잠들면 말하리라(순수문학)`를 최근 출간했다.20여년 전부터 시인으로 활동해온 박 전장관은 `작은등불하나`, `따뜻한 동행을 위한 기도` 등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다.공직을 떠나 야인이 된지 14년이 되는 박 전 장관은 시인으로서도 잘 알려져 2005년 `김만중 문학상` 대상을 비롯해 2008년 `순수문학작가상`, 2013년 `세계문학상` 시부문 대상 등을 수상했다.박 전 장관은 이번 시집을 통해 여러 대상에 대한 그리움의 마음을 담고 있다. 특히 사랑에 상처받은 영혼들이 그 상처를 통해 더욱 성숙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쉽고 아름다운 단어로 표현해 내고 있다.시집에 대해 오양호 문학평론가는 “단순한 연가의 영역을 넘어서는 어떤 숭고의 색채가 시의 행간에 배어난다”며 “어휘의 절제와 압축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박영하 시인(월간순수문학 주간)은 `축하의 글`에서 “박철언의 시를 보면 감성이 따뜻한 분이구나 느낀다. 가슴을 울리는 시, 영원한 서정시인이다”라고 말했다.한편 성주 출신인 박 전 장관은 제6공화국 시절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장관을 역임한 3선 국회의원으로 현재는 변호사와 대구경북발전포럼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8

詩는 기도와 혁명에 가깝다

강은교, 권혁웅, 김언, 박정대, 박주택, 박형준, 손택수, 신현림, 여태천, 유홍준, 이기인, 이민하, 이승희, 이영주, 이재무, 장석주, 정끝별, 정병근, 정호승, 허연….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이 모였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가는 실험시까지, 다양한 시의 면면만큼이나 필자들의 구성 역시 다채롭다. 이들이 시를 처음 접한 계기는 무엇이고, `천형`이라는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 계기는 무엇일까? 서정시만큼 아련하고 아름다운 사연이 있었을까? 전통을 깬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시만큼이나 놀라운 것들이 존재할까?`시인으로 산다는 것`(문학사상사)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20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한데 모은 책이다. 특히 시인으로서의 삶과 창작론에 대해 쓴다는 큰 틀 외에는 형식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시인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쓴 20편의 글들을 비교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시인들이 시에 대해서 생각해온 것, 이제 시의 지향점이 어디인지를 모아보는 자체만으로도 21세기 초반 우리 당대의 시에 대한 생각을 함께 증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개성 넘치는 에세이집인 동시에, 시인을 꿈꾸는 미지의 후학들에게 문학적 지평을 확장해주는 지침서가 돼줄 것이다.책머리에서 문학평론가 권영민 교수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특별한 재능이나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직업들의 호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 화가 음악가 등은 `집 가(家)`를 쓰고, 가수 목수 등은 `손 수(手)`를 쓴다. 그런가 하면 의사 교사 목사 등은 스승 사(師)`를 쓰고, 변호사 박사 회계사 등은 `선비 사(士)`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같은 문학 분야에서도 작가 소설가 평론가처럼 시가(詩家)라 하지 않고 `사람 인(人)`을 써 시인(詩人)이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 시를 아름답고 초월적이며 고매한 정서의 표현으로 여긴다. 그러나 `아름답다`의 어원이 `앓다`이듯, `글`의 어원이 `그리워하다`이듯, 아름다운 시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래도록 세상을 온몸으로 앓고 사랑한 이의 가슴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아름다운 시가 때로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시인이 자기 내면의 혼란과 진흙탕 같은 세상의 부조리를 힘겹게 뚫고 올라와 승화시킨 결과가 그 시이기 때문이다. 말(言)로써 절(寺)을 짓는 사람(人), 그가 바로 시인(詩人)이다.이 책에는 시인들이 습작생 시절에 느꼈던 감정과 현재 시인으로서 겪는 솔직한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왜 시를 쓰는지, 왜 시를 쓰려고 하는지, 왜 시를 써야만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한 사람의 위대한 시인을 만든다. 끝이 보이지 않고 정해진 답도 없지만, 이것은 시인이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시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시는 기도에 가깝고 혁명에 가깝다. 기도에 가깝지만 인간과 시대에게로, 혁명에 가깝지만 언어와 저기-너머로 향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를 얻기 위해서는 안 보이는 간절한 것들을 감각하라, 그리고 의심하고 물어라. 안 보이는 간절함에 천착하고 그 간절함에 대해 되물어라. 그것이 사랑이든 시간이든 죽음이든, 유토피아든 신념이든, 돈이든 밥벌이든 사람살이든, 새롭게 인식하고 감각하기 위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정끝별―시는 어디서 오는가)이 책은 시를 쓰는 사람에겐 어떻게 시인의 길을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침반이며,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겐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지 일러주는 동시에 시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좋은 지침서다. 모처럼 시인들의 향기로운 시와 흥미로운 삶 이야기에 한껏 취해볼 기회다. 읽는 이 모두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8

사랑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

1987년 시집 `사람`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독특한 어법과 돌발적인 비유로 한국 서정시에 다채로움을 더한 개성적인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황학주 시인의 열번째 시집 `사랑할 때와 죽을 때`(창비)가 출간됐다.`某月某日의 별자리`(지혜 2012) 이후 2년 만에 새롭게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랑과 슬픔과 고독이 뒤섞인 고즈넉한 서정의 풍경 속에 감성적이고 “차가운 육감의 세계”(이근화, 추천사)를 펼쳐 보인다.더욱 원숙해진 시선으로 생(生)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직 우리 시가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날것의 체험”(송재학, 발문)을 섬세하고 정갈한 언어로 갈무리한 시편들이 둔중한 울림 속에서 서늘한 감동을 자아낸다.“한사람의 젖어가는 눈동자를/한사람이 어떻게 떠올리는지 모르지만/사람들은 사랑한다고 말한다/그러나 과거를 잊지 말자/파탄이 몸을 준다면 받을 수 있겠니//숨 가쁘게 사랑한 적은 있으나/사랑의 시는 써본 적 없고/사랑에 쫓겨 진눈깨비를 열고/얼음 결정 속으로 뛰어내린 적 없으니/날마다 알뿌리처럼 둥글게 부푸는 사랑을 위해/지옥에 끌려간 적은 더욱 없지//예쁘기만 한 청첩이여/목이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좀 아프면 어때/아픔은 피투성이 우리가 두려울 텐데”(`얼어붙은 시` 부분)`사랑과 상처의 시인`으로 불려온 황학주 시인은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장 소중한 삶의 방식으로 여긴다. “온몸으로 서로에게 저물어가”(`진학`)는 사랑은 타자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는 길이자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여 “아직 한번도 못 본/한사람을 위해 유랑하고 있는/시”(`백야`)는 “빨랫방망이로 두드려놓은/맑은 물”(`우물터 돌`)처럼 순결한 생의 바탕으로서 시인의 순정한 사랑과 다르지 않다.“숨도 쉴 수 없는/행복하게 외로웠던 순간들”(`그렇게 협소한 세상이 한사람에게 있었다`)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시인은 사랑의 불가해한 현상 속에서 삶의 근원과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어느날 야윈 눈송이 날리고/그 눈송이에 밀리며 오래 걷다//눈송이마다 노란 무 싹처럼 돋은 외로움으로/주근깨 많은 별들이 생겨나/안으로 별빛 오므린 젖꼭지를 가만히 물고 있다//어둠이 그린 환한 그림 위를 걸으며 돌아보면/눈이 내려 만삭이 되는 발자국들이 따라온다//두고 온 것이 없는 그곳을 향해 마냥 걸으며/나는 비로소 나와 멀어질 수 있을 것 같다/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사랑은 그렇게 걸어 사랑에서 깨어나고/눈송이에 섞여서 날아온 빛 꺼지다, 켜지다”(`겨울 여행자`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8

쉬운 언어, 근데 왠지 생경한…

기존 `시`의 모습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전혀 새로운 시의 문법을 보여주는 시인 이준규(44)의 다섯번째 시집 `반복`(문학동네)이 출간됐다. 네번째 시집 `네모`와 한 주 상간으로 연이어 출간된 이번 시집은 정직하고 그래서 강렬한 제목 아래 55편의 시를 담고 있다. 각 시편의 제목만 훑어보아도 이번 시집의 성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동일하거나 조금 변주된 비슷한 제목의 시들이 번호의 구분 없이 놓여 있는데 하나의 단어가 어떤 실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음을 보여줬던 이준규의 시를 줄곧 따라 읽어온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구성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일상적이고 어렵지 않은 단어와 그것으로 이뤄져 있는 문장이 이준규를 통해 시라는 옷을 입고 태어나면 지금까지 만나본 적 없는 생경한 `시`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의 시는 소통을 거부한 난해한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시가 맥락이 있는 이야기 혹은 정보 전달의 기능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 송종원이 유아기 때 처음 모국어를 접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으로 이번 시집의 해설을 시작하고 있고 이준규가 언어를 대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익숙한 단어를 학습된 의미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감각적 울림, 혹은 그것을 둘러싼 다른 상황이나 감각을 통해 대상을 새로이 인식하는데 그것은 마치 말과 글을 모르는 시기의 언어감각을 다시 되살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이를테면 이준규가 그리는`딸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과일이 아니다.“딸기가 그릇에 담겨 있다. 딸기는 하얀 바탕에 노란 꽃무늬가 있는 손바닥 크기의 그릇에 담겨 있다. 딸기는 별로 크지 않은데, 반으로 잘려 있다. 절단된 딸기 무더기. 딸기는 작은 꽃무늬가 있는 하얀 그릇에 담겨 있다. 나는 그것을 하나 둘 먹기 시작한다. 딸기를 먹으니 기분이 좋고 딸기를 먹으니 가슴의 통증이 있고 그렇게 딸기를 계속 먹으니 가슴의 통증은 사라진다….”_ `딸기`전문조금도 어렵지 않은 언어들로 이뤄진 이 시가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그간 우리는 `딸기`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딸기`에 얽힌 이야기나 `딸기`를 매개로 해서 얻어진 감정, 그것을 써내려간 것이 `시`의 익숙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준규는 `딸기` 자체에 집중한다. 주변의 다른 대상들을 끌어들이는 것도 결국은`딸기`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딸기`가 반복될 때마다 그것이 읽는 이의 내부에서 다른 감각들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준규의 시에서 보여지는 반복은 언어 자체가 가진 다양한 감각의 울림을 확인하게 하는 실험인 동시에, 의미의 부재를 확인하는 `포르트-다` 놀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이준규그런데 이준규의 시에서 부재하는 것은 의미만이 아니다. 그의 시에 특히 많이 등장하는 말은`그것`이다. 언어의 불확정성과 가변성만큼이나 규정하기 어려운, 따라서 말의 움직임과 그 관계 속에서 매번 다르게 그 존재와 가치를 따져 물어야 하는 미지의 대상은 가령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그것은 비스듬히 추락한다. 모든 것처럼. 그것은 비스듬히 추락하는 희망이자 환멸이다. 그것은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긁는다. 그것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그것은 앉았다 일어나고 일어났다 앉는다. 그것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렇게 반복한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성실함을 보여주며 그것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의 생은 단순하며 그것의 일생은 비극적이다….”-`그것` 전문의미의 부재를 확인하게 하는 시, 구체적 대상을 지워버린 시. 이런 시의 마지막에서 결국 의미도 실체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드러나면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허무와 우울이다. 문학평론가 송종원이 시집의 해설에서 이준규의 시에서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펼치기도 전에 그것의 불가능성을 먼저 의식하는 사람이 떠오른다”고 언급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가 아닐까./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1

긍정적 가치라는 `투명성`에 의문 제기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신작 `투명사회`가 출간됐다. `투명사회`는 `투명성`에 대한 독일 사회의 주류 담론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비판적 입장을 제시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Transparenzgesellschaft(투명사회)`(2012)와 우리 삶에 새로운 위기를 불러온 디지털 문명에 대한 진단을 제시한 `Im Schwarm. Ansichten des Digitalen(무리 속에서·디지털의 풍경들)`(2013)을 번역해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이 책에서 저자는 투명성의 전체주의적 본질에 대한 전복적인 성찰을 시도한다. 저자에 따르면 투명성은 “신자유주의의 요구”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밖으로 표출시키고 정보로 전환시킨다. 반면 낯선 것, 모호한 것, 이질적인 것들은 투명성의 이름으로 해체된다. `투명사회`는 부패 근절과 정보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결코 깨달을 수 없을 투명성의 시스템적 폭력성을 한병철 특유의 간결한 문체로 날카롭게 파헤친다.오늘날 `투명성`은 중요한 화두다.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는 물론이고 이제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투명성이 강조되고 있다. 사람들은 투명성이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특히 인터넷, 소셜네트워크 등의 발달로 정보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공개되고 무제한적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투명한 사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다.그런데 `투명사회`에서 한병철은 이렇게 긍정적인 가치로 간주돼온 투명성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새로운 통제사회라고 주장한다. 투명사회는 우리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시 상태, `디지털 파놉티콘`으로 몰아넣는다. 이 사회의 거주민들은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전시함으로써, 심지어 그것을 `자유`라고 오해한 채 스스로 `디지털 파놉티콘`의 건설에 동참한다. 이곳에서는 빅브라더와 파놉티콘 수감자의 구분이 사라진다.한병철은 투명성이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장악해 근원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끌어들이는 시스템적 강제력,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회 시스템은 모든 사회적 과정을 조작 가능하고 신속하게 만들기 위해서 투명성을 강요한다. 가속화의 압력은 부정성의 해체와 궤를 같이한다. 투명성은 낯선 것과 이질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서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가속화한다. 투명사회에서는 점차 타자가 소멸되고 나르시시즘의 경향이 강화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1

빚의 덫에 걸린 사람들에 던지는 위로

신용 불량을 넘어선 개인 파산 시대. 거대한 빚에 눌려 꿈도 사랑도 청춘의 것이 아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빚더미에 갇혀 버린 한 여성이 10일 동안 `상가수첩` 아르바이트를 하며 겪은 일을 유쾌한 입담과 현장감 넘치는 대화로 그린 소설 `청춘 파산`(민음사)이 출간됐다. `청춘 파산`은 제2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청년 파산, 청년 실업 등 오늘날 청춘들이 당면한 위축된 현실을 상가수첩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백인주의 삶을 통해 실감나고 흥미롭게 그렸다. 숨 막히는 일상 속에서도 운명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 길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의 의지가 사채업자의 빚 독촉보다 끈질기고 강렬하다.김의경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인 만큼 `청춘 파산`은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인간 CCTV·위장 손님·두상 모델 등 발 닿는 곳마다 이어지는 지난날 아르바이트의 추억과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채권추심 서류, 사채업자들의 예측 불가능한 독촉 방식과 그들을 따돌리기 위한 주인공의 절박한 위장술에는 빚 독촉을 피해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로 일관했던 작가의 한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서른 개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빚 때문에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은 작품 속 등장인물일 뿐만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세상에 빚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은 빚처럼 널려 있었다. 빚의 덫에 걸려든 사람들에게 이 소설이 아주 작은 위로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혼자 공부한 지식으로 법정 서류들을 작성해 부당한 채권추심 세력과 맞서고 쳇바퀴같이 돌기만 하는 아르바이트 인생을 살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삶의 방향을 전진시키려는 모습은 쫓고 쫓기는 이야기적 재미와 인간 승리가 주는 감동뿐만 아니라 작가의 바람대로 위기의 청춘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하다.올해 나이 서른셋. 아르바이트라면 안 해 본 일이 없다. 하루에 세 번 취직하고 세 번 잘린 적도 있으니 이 정도면 알바 계의 고수. 일당 3~4만원짜리 알바 자리라고 해도 이토록 쉽게 취직할 수 있고, 또 이렇게 박력 있게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판단력 있는 백인주가 알바만 고수하는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그녀는 `제3신분`, 원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신용 불량자에다 개인 파산자다.인주의 아르바이트 인생은 엄마의 사업 부도와 함께 시작됐다. 신용카드는커녕 한 달에 30만 원 이상은 써 본 적도 없건만 자고 일어나니 빚더미 위. 귀신같이 알고 직장으로 몰려드는 사채업자들 탓에 웬만한 일자리는 엄두도 못 내던 그녀를 아르바이트가 받아 줬다. `알바 천국`의 세계에 입성한 인주는 인간 CCTV부터 시작해 나이트클럽 위장 손님, 인형 탈 알바, 고시원 총무 등 일일이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그러나 하나같이 자격을 따져 묻지 않는 `헐렁한`곳에서 일자리를 얻는다.불행 중 다행으로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져 억울하게 상속받은 빚의 그늘에서 벗어나는가 싶던 찰나, 이상한 공문서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21

`케냐 동물 고아` 야생복귀 양육과정 다뤄

대프니 셸드릭은 코끼리 신생아를 인공수유로 키우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다. 케냐의 풍부하고 다양한 야생동물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 오랜 세월에 걸친 관찰, 올바른 사육법과 우유 조제법을 완성한 선구적인 노력은 수많은 코끼리와 코뿔소를 비롯해 많은 동물을 죽음에서 구해냈으며, 횡행한 밀렵으로 거의 절멸 상태가 된 케냐의 검은코뿔소를 멸종으로부터 구했다. `아프리칸 러브 스토리-고아 코끼리들의 엄마, 그 경이로운 날들의 기록`(문학동네)은 그녀의 가슴 따뜻하고 애틋한 회상록이다.이 책은 더불어 데이비드 셸드릭과 함께한 밀렵 근절 및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활동, 동물들의 인간적 측면, 동물 고아들의 야생 복귀를 위한 양육과정 등을 다룬 책이자 남다른 길을 걸어온 한 여성에 대한 초상이다.그녀는 수많은 동물 고아들과의 놀라운 관계를 이야기한다. 대프니의 첫사랑인 촉촉한 눈망울의 영양 부시, 작은 난쟁이 몽구스 리키-티키-타비, 부지런한 소길쌈새 그레고리 펙, 장난꾸러기 얼룩말 후페티, 그리고 대프니와 40년이 넘는 진한 우정을 쌓아온 거대한 코끼리 엘리너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이 그들이다.또한 이 이야기는 대프니와 차보 국립공원의 유명한 관리소장이던 데이비드 셸드릭과의 아름답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프니가 다방면에서 성과를 이루기까지,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셸드릭 야생동물 트러스트를 설립하고 나이로비 국립공원 내에 고아 탁아소를 세워 지금까지도 계속 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두 사람의 깊고 열정적인 사랑과 자연의 모든 것에 대한 데이비드의 탁월한 통찰, 그리고 데이비드의 때 이른 비극적인 죽음이 있었다.이 두 사람의 밀렵 근절 및 케냐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지난한 활동과, 동물들의 인간적 측면과 교감하는 능력, 동물 고아들의 야생 복귀를 위한 양육과정을 다루는 이 책은 따스함과 유머로 활기가 넘친다. 케냐의 다양한 야생동물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 오랜 세월에 걸친 관찰, 올바른 사육법과 우유 조제법을 완성한 선구적인 노력으로 코끼리와 코뿔소를 비롯해 수많은 동물을 죽음에서 구해낸 저자의 눈물이 고스란히 담겼다.대프니 셸드릭은 케냐의 자연과 야생동물을 사랑하며 그들와 함께 살아가고, 반밀렵 활동을 하며, 고아가 된 야생동물들을 돌보고 다시 야생으로 복원시키면서, 인간에 의해 절멸로 치닫던 케냐 야생동물 역사의 궤도를 바꾸기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한 여인이다. 단지 야생동물 전문가나 활동가 혹은 투사로써가 아니라 고아가 된 야생동물들의 엄마가 되어 그들과 가족의 사랑을 나누는 방식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동물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남다른 재능을 가져서만이 아니라 바로 야생동물들이 인간의 감정과 똑같은 감정과 개성을 가지고 있음을 오랜 시간을 거쳐 배우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그들의 본능과 감정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14

모든 사물에 생명 온기 불어넣어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병록(32) 시인의 첫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창비)가 출간됐다.등단 당시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서둘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이 탁월”하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은 산뜻한 감각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시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묵직하고 개성적인 첫 시집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 사이의 균열”에 숨결을 불어넣는 “대지의 상상력”(손택수, 추천사)이 넘쳐흐르는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전통적 서정과 현대적 감각을 아우르면서 평범한 일상에서 새로운 삶의 결을 발견해내는 시적 인식과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이 도드라진다. 또한 사물의 현상과 본질을 꿰뚫어보는 사유의 깊이가 돋보이는 시편들이 다채로운 빛을 반짝이며 다사로운 감동을 선사한다.유병록의 시는 `몸의 언어`라 이를 만하다. 문학평론가 양경언이 해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병록 시인은 시적 대상의 육화(肉化)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붉게 익어가는/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개의 심장”(`붉은 달`), “땅에 묻힌 자가 팔을 내밀 듯/피어나는 꽃” “부러지는 손가락처럼/뚝뚝/꽃잎 질 때”(`완력`), “굽이를 지나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물방울, 뼈가 부서지고 체온이 탈출한다 살점이 공중으로 튀어오른다”(`중력의 세계`)에서 보듯, 시인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현상에 생명의 온기를 불어넣는다. 그리하여 시인이 그려내는 시적 세계의 풍경은 바로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인 물질성을 띠며 선명한 감각으로 다가온다.유병록은 몸의 언어를 매개로 언어와 현상세계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려 한다. “아무도 부축하지 않는 생은 지구가 업고 간다//구부러진 자들은 두 손으로 지구의 목을 꼭 끌어안는다”(`구부러지고 마는`)에서 보듯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서로 유기적인 영향 관계에 있으며 삶의 무게를 함께 견딘다는 것을 통찰하는 시인은 사과 한알이 둘로 쪼개지는 틈새에도 “검은 피가 흐르고 흰 뼈가 돋아”(`검은 피 흰 뼈`)나는 존재들의 세계가 있음을 일깨운다. “종이 한장 갖지 못한 자들이 제 몸을 펼쳐 이야기를 기록하는”(`너를 만지다`) 순간이기도 하면서, 문자와 종이의 관계를 뼈와 몸으로 여기는 시인에게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에 검은 잉크가 새겨지면서 새로이 시가 탄생하는 순간”(양경언, 해설)이기도 하다.▲ 시인 유병록유병록의 시는 진부하고 어설픈 상징이나 알레고리 혹은 흐리터분한 이미지의 나열로 빈약한 사유를 눙치거나 얼버무리지 않는다. 시인은 바람에 날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구겨진 종잇조각에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읽어내고 “검은 뼈가 자라듯 글자가 새겨지던 순간”과 “뼈를 부러뜨리고 온몸에 상처를 남긴 완력”(`구겨지고 나서야`)을 포착해내는 섬세한 시선으로 사물의 실체를 꿰뚫어보며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시인은 또한 “늙어서 죽은 자는 지혜의 책이, 젊어서 죽은 자는 혁명의 책이 된다더군/아이가 죽으면 예언서가 된다더군”(`사자(死者)의 서(書)`)에서처럼 상징적 관념을 찬찬히 풀어놓거나 때로는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해 환상적 세계를 펼쳐놓기도 한다.유병록이 고등학교 때 쓴 시 `식구`는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 널리 읽히고 있다. 그만큼 탄탄한 기본기와 내공이 입증된 셈이다.손택수 시인은 “석탄처럼 막막한 밀도의 어둠을 품고 피워낸 불꽃 같은 시집으로 시단에 또렷한 첫발자국을 새긴 이 시인의 첫걸음으로 하여 우리 시는 희미해져가는 두근거림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14

詩人 49명이 고른 자신의 대표작은?

문학동네시인선이 50권째를 맞아 펴낸 기념 자선 시집 `영원한 귓속말`은 말 그대로 시인들이 직접 나서서 한데 목소리를 모았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영원한 귓속말`은 지금까지 문학동네시인선을 통해 선을 보인 1권부터 49권까지 49명의 시인들이 각자의 시집에서 시인 자신이 이거다 싶은 한 편의 시를 직접 고르게 했고, `시인의 말`과는 별개로 시와 시집에 붙이고 싶은 산문을 덧대었다. 안도현, 허수경, 송재학, 김언희, 조인호, 이홍섭, 정한아, 성미정, 김안, 조동범, 장이지, 윤진화, 천서봉, 김형술, 장석남, 임현정, 김병호, 이은규, 김경후, 최승호, 김륭, 함기석, 이현승, 서대경, 장대송, 김이강, 조말선, 박연준, 신동옥, 이승희, 곽은영, 박준, 박지웅, 김승희, 서상영, 장옥관, 김충규, 오은, 이사라, 윤성학, 박상수, 고형렬, 리산, 손월언, 윤성택, 조영석, 이향, 윤제림, 박태일 시인이 그 주인공.어떤 이는 한 편의 시와 같은 산문을 쓰기도 했고, 어떤 시인은 일기에서처럼 시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시인은 연륜에 걸맞게 시론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개성이 제각각으로 드러나는 시와 산문을 엮어내어 우리 시의 다양성과 우리 시인들의 폭넓은 상상력을 재미있게 선보이게 된 점이 이 책이 가질 수 있는 큰 미덕 가운데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자선시 `꾀병`전문“거짓말 할 때 코를 문지르는 사람이 있다 난생처음 키스를 하고 난 뒤 딸꾹질하는 여학생도 있다 // 비언어적 누설이다 // 겹겹 밀봉해도 새어나오는 김치 냄새처럼 숨기려야 숨길 수 없는 것, 몸이 흘리는 말이다 // 누이가 쑤셔박은 농짝 뒤 어둠, 이사할 때 끌려나온 무명천에 핀 검붉은 꽃//몽정한 아들 팬티를 쪼그리고 앉아 손빨래하는 어머니의 차가운 손등 // 개꼬리는 맹렬히 흔들리고 있다 // 핏물 노을 밭에서 흔들리는 / 수크령 // 대지가 흘러내리는 비언어적 누설이다” -장옥관 시집 `그 겨울 나는 북벽에 살았다` 자선시 `붉은 꽃` 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14

현대 中 지식인들 부조리 고발

중국 내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 폭발력 있는 작가, 쟁의가 가장 많은 작가로 손꼽히는 옌롄커. 그의 국내외 수상 경력과 여러 나라 대학이나 학회에서의 화려한 문학강연 활동을 보면 이제 그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히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세계적 작가임에 틀림없다. 1996년 중편 `황금동`으로 제1회 루쉰문학상 수상, 1997년 `연월일`로 제2회 루쉰문학상 수상, 2005년 `레닌의 키스`로 제3회 라오서문학상 수상 등 자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쓴 것은 물론, 해외에서도 2012년 `딩씨 마을의 꿈`으로 타이완 `독서인상` 수상, 전지구 화어 10대 양서 선정, 영국 `맨아시아문학상` 최종후보, `파이낸셜 타임즈` `올해의 책` 선정과 더불어 `사서`로 프랑스 `페미나문학상` 최종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이번에 나온 옌롄커의 장편 `풍아송`(문학동네)은 출간 당시 “베이징 대학을 겨냥했다”는 비판과 더불어 대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며 `중국 당대 문학에서 최초로 지식인의 부조리를 소재로 한 소설`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또 한번 `중국에서 가장 쟁의가 많은 작가`라는 화제를 불러모았다. 한국어판에는 저자가 직접 보내온 `한국어판 서문`과 말미에 부록으로 실은 `저자 후기` 세 편이 실려 있어 이 작품의 창작 과정과 출간에 대한 저자의 변을 맛볼 수 있다.옌롄커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부조리하다. 글을 쓴다는 건 인생에 대한 도둑질, 죽음이 엄습한 곳에서 생명을 도둑질하는 과정이다”라고 했다.이 책의 제목 `풍아송`은 원래 `시경`에 나오는 내용별 분류 체제를 가리킨다. 즉 `풍(風)`은 남녀의 애정을 주로 다룬 여러 제후국의 민요·민가이며,`아(雅)`는 조정의 의식에서 주로 불린 시가이고, `송(頌)`은 선조의 덕을 기리는 종묘 제의용 악시다. 옌롄커는 이 체제를 차용해 자신의 소설 형식을 변주했다. 이 소설은 돌림노래처럼 이 세 개의 악장이 돌아가며 반복된다. `시경`의 각 시에서 빌린 제목의 낱낱의 장들은 밀도감 있는 심리 묘사와 빠른 이야기 전개로 한 편의 완결된 시적 정경을 만들어낸다.이 소설의 내용적 측면에서 보자면, 주인공 양커 교수의 행보는 아주 문제적이다. 바러우산맥의 시골 출신인 그는 현재 입신양명해 베이징 유명 대학의 교수이자 `시경`을 연구한 권위자다. 5년 간 공들여 쓴 50만 자 분량의 연구서를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침실에는 자신의 아내이자 동료 교수 자오루핑이 훗날 총장으로 취임할 리광즈와 뒹굴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래폭풍에 휩쓸려 쓰러져가는 대학건물을 지키려던 대학생들과 우연한 계기로 함께하다 정치적 교수사회의 표적이 돼 뜻밖에도 정신병원 환자로 둔갑된다. 대학 내에서 배척되던 그의 강연 기회는 황당하게도 정신병원 환자들과 홍등가로 변모한 고향 천당 거리의 여자들에게 베풀어진다. 또한 공자가 채록에서 빠뜨리거나 삭제된 사라진 시편을 찾으려는 그의 학문적 이상은 고향 바러우산맥에서 자신만을 사랑했고 그 사랑의 체념으로 죽어간 링쩐이라는 여인과 그녀의 딸 샤오민에 대한 일그러진 사랑의 양태로 변모한다. 그는 과연 자신의 붕괴된 학문적 이상을, 누락되어 사라진 시들을, 황폐해진 사랑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소설가 옌롄커지식인으로 자부하는 이들 앞에서 양커 교수는 매번 숱한 유혹과 갈등의 시험대에 오른다. 그의 선택과 행동이 곧 지신인의 실천이자 정신의 지표인 셈이다. 그가 부딪히는 심판의 문들 앞에서 해나가는 그의 선택이 이 서사를 이끄는 동력이다. 그러나 그가 “마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산 전체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이들에게 오히려 무릎을 꿇는 행동은 지식인으로서의 무기력과 나약함을 반증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단속이자 타인의 반성과 성찰을 촉구하는 기도와 같다. 이 주객이 전도된 자세란 얼마나 부조리한가. 자오루핑과 리광즈의 불손한 결탁 아래 펼쳐지는 교수사회의 횡포로부터 도망한 고향도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07

감각 자체만으로 대상과 마주하며…

한국 시단의 독자적인 징후이며 예외적인 프로파간다로 회자되는 시인 이준규의 네번째 시집 `네모`(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시적인 구성을 도모하지 않고 짧은 줄글로 작성된 72편의 산문시들은 내용도 형식도 없는 지표들을 제시함으로써 적막한 외관을 구축하고 있다. 온갖 수사를 배제하고 극미한 진술만을 통해 멈추어 있는 이 정물성은 감각에 순수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시인의 기획이다. 대상을 인식하는 데 간섭하는 모든 외적 요소를 차단하고 감각 자체만으로 대상과 마주하며 감정의 요동은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준규의 시어들은 완벽히 고립되어 있다. 동료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이수명은 이러한 이준규의 시를 가리켜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프로파간다”라고 했다.이준규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모든 시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제시와 불친절한 단절의 외연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를 피하고 부사와 형용사를 절제한 결과, 시어에 감정의 물기가 스밀 틈이 없고 단어와 문장 들 사이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공동이 자리 잡는다. 그렇게 “있다” “있었다”와 같은 단순 진술만으로 포착된 이준규의 세계에는 아찔한 여백들이 시의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게 된다.“공터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끝에 교회가 있었다. 교회의 뒤로 테니스장이 있었다. 테니스장 옆에는 밭이 있었다. 비닐하우스도 있었다. 그곳은 겨울이면 스케이트장이 되었다. 조금 떨어져 도로가 있고 도로 위에는 육교가 있었다. 공터의 다른 끝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공터의 가운데에 트램펄린이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트램펄린` 전문이 시는 화자의 시선이 해가 지고 있는 시각에 공터를 시작으로 공터 주변의 대상들을 훑은 뒤 다시 공터 한가운데 놓인 트램펄린에 가 닿는 것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화자의 위치를 허공에 두고 사물을 조망한다는 습관적인 독법은 이 시를 맛보는 데 별 소용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놓인 여백을 읽어낼 때 비로소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놀고 있는 화자가 드러나는 것이다. 공터 가운데서 높이 솟구치길 반복하며 공터의 끝, 교회의 너머, 테니스장의 근처에 있는 밭과 비닐하우스까지 눈에 담는다. 대상들은 화자가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사이사이에, 즉 여백과 여백의 틈에서 잠깐씩 드러난다. 시의 후반부에서 공터의 다른 끝, 화자의 시선 반대편에 있는 아파트를 의식하는데, 그 아파트는 화자가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만 하는 집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화자는 이 즐거운 유희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07

타살일까 자살일까, 13살 소년의 죽음

일본의 인기 작가 오쿠다 히데오(55)의 신작 `침묵의 거리에서`(전 2권·민음사)가 출간됐다. 일본 아사히신문 연재 당시부터 큰 반향을 부른 이 소설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중학생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했지만, 비극적인 색채를 띠는 일반적인 왕따 소설과는 달리 가해자와 피해자를 확실히 구분하지 않는다.한여름, 학교에서 벌어진 한 소년의 죽음을 둘러싸고 인간 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한 사고사나 자살인 줄 알았던 죽음에 잔혹한 학교 폭력이 결부됐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나오면서 학교, 유가족, 가해 학생, 경찰, 법조계, 언론이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를 꺼내 보인다.휴대 전화 협박 문자, 소년의 등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 혐의를 부정하는 모범생들, 엇갈리는 아이들의 증언, 가해 학생 부모들의 두 얼굴, 신참 기자와 젊은 검사와 말단 형사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왜곡되고 만들어지는 소문들, 그러나 모든 진실은 소년의 죽음을 지켜본 교정의 은행나무 그늘 속에 침묵할 뿐이다.매 장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또 다른 가능성, 책을 덮을 때까지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이야기로 독자를 압도한다.중학교에서 열세 살 학생이 죽음을 맞는다. 2층 높이의 운동부실 지붕에서 학교의 자랑인 커다란 은행나무 그늘 속 도랑에 떨어져 사망한 나구라 유이치. 아들이 집에 돌아오지 않아 당황한 어머니의 전화 한 통에 아이를 찾아 나선 교사가 소년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다. 최초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단순한 실족 사고인지 사춘기 소년의 자살인지 아니면 훨씬 무거운 비밀이 숨어 있는 사건인지 수사에 나선 경찰과 학생을 보호하려는 학교의 의견이 갈리면서 한여름의 잊지 못할 이야기가 생생하게 펼쳐진다.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유가족, 학교 폭력 주도자로 지목된 자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가해자 가족, 끝내 비밀을 밝히지 않으려 애쓰는 중학생들, 전대미문의 스캔들에 당황하는 교사들, 흉악한 소년 범죄를 밝혀내려는 말단 형사, 처음으로 만난 호외 앞에서 기자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신참 기자, 잠을 줄이면서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젊은 검사, 그리고 소문을 퍼뜨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입을 다무는 마을 주민까지. 말없이 죽은 소년의 시신 앞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페이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펼치는 가운데 어른도 아이도 결국 가장 중요한 이야기에는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열세 살 소년의 죽음.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이러한 주제를 놓고 오쿠다 히데오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의 무게를 재어 가면서 숨 가쁘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읽는 재미는 물론, 손에 잡힐 듯이 알기 쉽게 인물 심리를 묘사하여 잘 읽히지만 오래 생각하게 하는 `오쿠다 히데오식 사회파`를 완성해 내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은 작품의 힘에 대해 작품 연재지인 아사히 신문에서는 “무거운 테마를 이토록 읽기 쉽게 보여 주는 필치야말로 이 작가만의 독무대일 것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3-07

신현림이 건네는 `사랑의 통찰`

예술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전방위 작가 신현림(53)의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책읽는오두막)이 출간됐다.삶을 견뎌내고 사랑하며 살아온 신현림의 색깔 있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겨 있는 감성에세이다.이번 신간은 그간 써뒀던 작품에서 엄선한 것과 새로 쓴 작품을 함께 엮은 것으로 신현림의 작품 세계가 어느 책보다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더불어 사진작가 신현림과 시인 신현림의 면모가 균형감 있게 녹아 있는 책이기도 하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30여장의 사진 작품은 본문과 어우러지게 배치돼 몰입을 높이고 중간 부분에는 별도의 포토페이지를 구성해 텍스트뿐 아니라 사진 작품을 감상하는 묘미를 살렸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촬영된 사진들은 낭만적인 감성을 자아내고 텍스트의 의미를 확장시켜 더 폭넓은 감상의 기회를 안겨준다. 또 각 주제별로 엮은 글들은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며 공감을 확보하고 있고 작가의 삶에 대한 철학과 예술관을 다양한 주제의식으로 잘 버무려냈다. 이 책을 통해 신현림의 기존 독자는 물론, 신현림을 만난 적이 없었던 새로운 독자들도 지친 영혼에 위로를 얻고 자신의 삶이 조금 특별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그동안 신현림은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사랑`으로 꼽으며 강조해왔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날`에서도 이별·관계·신앙·여행 등 여러 주제의 글과 사진을 보여주며 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 에세이에서 다루는 사랑은 범위를 한정할 수 없는 폭넓은 사랑이지만 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틈새에 관한 이야기이자 앞으로 다가올 사랑을 기다리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바쁜 생활에 쫓겨 사랑에서까지 조급해하며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신현림이 건네는 사랑의 통찰은 무엇보다 특별하다.인생에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저자가 가장 중요시하는 메시지는 `함께하라`라는 것이다. 여행과 신앙, 예술로 시원한 숨을 들이쉬고 친구와 가족과 연인을 마음껏 사랑하며 함께하라는 말. 그러면서도 홀로 겪어야 할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 또한 마냥 괴롭고 떨쳐야 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축복이 있다고 강조한다. 사진과 글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이 에세이는 총 일곱 파트로 구성돼 있다. 첫 번째 파트인`나도 쓰레기였던 적이 있어`에서는 잉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젊은 날에 대한 회상과 고뇌가 눅진하게 녹아 있다. 특히 지금의 2, 30대 젊은이들이 경험하고 있을 막막함과 실패에 대한 아픔이 자신의 일기를 들여다보듯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두 번째 파트인 `흰 눈으로 끓인 커피`에는 사랑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사랑 고민과 이별 후의 아픔, 인연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배어 있어, 자신이 가진 사랑이 어떤 모양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부분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8

발견한 욕망, 실천과정 보여줘

1995년 데뷔, 등단 20년차인 은희경(55) 작가에게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이하 `눈송이`·문학동네)는 그의 다섯번째 소설집이자, 열두 권째 작품집이다. 소설 외에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이 있다. 연재를 하고 계절마다 단편을 쓰고, 그것들을 모으고 정리해 책을 내는 시간들을 생각하면 작가는 그동안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작품을 쓰고 책을 묶었다. 20년, 작가의 첫 책 `새의 선물`에 열광했던 이들의 딸들이 자라 다시 그의 책을 집어드는 시간이다. `은희경`은 엄마와 딸이 함께 읽는 브랜드 장르다. 어떤 시간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풍경은 늘 그렇게 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조금은 다를 것이다. 결국 시간이 개입된다는 뜻이겠지.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간다. 대체로 헤맸다. 익숙한 시간은 온 적이 없다. 늘 배워왔으나 숙련이 되지 않는 성격을 가진 탓이고 가까운 사람들이 자주 낯설어지는 까닭이다. 왜 그럴까. 시간이 작동되는 것이겠지.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닿느냐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고 여겼을 때는 그랬다는 말이다. 지금 이 풍경 앞에서 생각한다. 내가 풍경으로 간 것이 아니라 실려갔다. 떠밀려간 것도 아니고 스침과 흩어짐이 나를 거기로 데려갔다. 이런 생각을 하던 시간들이 이 책 속 이야기가 되었다. 쓸 수 있다, 고마운 일이다.”_은희경, 작가의 말`작가의 말`에서 그는 `시간`과 그 시간이 데려간 `풍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떠밀려간 것이 아니라 스침과 흩어짐이 데려”간 그곳에 대해.이번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대부분은 압축적이고 단일하며 통일적이라기보다 굉장히 긴 시간, 그러니까 한 인간(혹은 한 집단)의 긴 인생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전의 소설들이 한 사람의 생애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사건, 한 순간을 통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압축적이고 통일적으로 그려냈다면 `눈송이`의 소설들은 한 인간의 수많은 굴곡들과 삶의 파노라마들을 냉정하면서도 차분하게 따라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단편소설들이 인생을 결정짓는 지속적인 계기들 혹은 시간을 견뎌낸 자들만이 발견하는 삶의 진실들 같은 것에 굉장히 인색하다면`눈송이`의 소설들은 이례적으로 유한한 인간이 시간의 압력 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주고 있다.그래서일까. 우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그 시간의 흔적들을 그가 쫓아간 때문일까. `눈송이`에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들은 느슨하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유사한 인물들과 동일한 공간들이 여러 소설들에서 겹쳐지고, 에피소드와 모티프가 교차한다. 그리고 여섯 편의 소설들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마지막 작품 `금성녀`에 이르면, 그것들이 단지 희미한 유사성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집은, `눈송이 연작`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각각의 단편으로 흩어져 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연결고리들은 이렇게 함께 모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홀로 빛나는 듯 보이던 별들이 모여 다시 제각각의 별자리를 이루듯,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면서 하나의 “선”이었던 시간은 “면”을 이뤄나간다.▲ 은희경 소설가그 안엔, 우리의 시간들도 함께 엮여들어간다. 당신이 겪어낸 시간은, 곧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기도 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견뎌낸 시간들. 그 시간들은 힘이 세다. 그래서 이렇게 농익은 이야기로, 때론 촘촘하게 때론 느슨하게, 그러나 결국은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된다.그의 소설이 단언컨대 한 번도 설익은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작품집에 실린 여섯 편의 소설들은, 곧장 따서 한 입 베어물면 입술을 타고, 팔목을 타고 과즙이 흘러내릴 것 같은 잘 익은 과일과도 같다. 시간과 비와 바람과 햇빛을 견뎌내며 품어안은 향기는 이미 봄의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8

한시로 본 조선시대 지식인 사회·문화

선비의 삶과 사상을 담은 한시를 독자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서온 강원대 김풍기 교수가 `한시의 품격`(창비)을 출간했다. 조선시대 주류 문화인 한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그 속에서 조선 지식인 사회와 문화를 읽어낸다. 저자는 한시를 양반만의 전유물로 바라보지 않는다. 사대부의 시뿐만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승려의 시 그리고 신분적 불평등을 문학으로 승화한 중인들의 작품까지 폭넓게 살핀다. 좋은 시작품을 읽는 가운데 자연스레 그 안에 깃든 `옛사람이 시를 보는 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읊은 한시의 세계가 오늘날 우리 삶의 풍경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하려는 의도다.김 교수는 한시가 조선 지식인 사회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고상한 듯 보이는 한시의 세계뿐만 아니라 한시와 더불어 살아가던 이들이 일으키는 잡음까지 포착해서 생생하게 들려준다. 옛것을 인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문화에서 표절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 자존심을 건 문인들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됐는지, 날선 비평의 세계에서 한시가 어떻게 살아남아 전해지는지 등 조선 지식인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를 서슴없이 들춘다. 좋은 한시를 소개하는 책은 많지만 어떻게 해서 그 작품들이 오래도록 남아 전해지는지 알려주는 책은 드물다. 그 배경과 과정을 찾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에게`한시의 품격`은 좋은 길잡이 책이 될 것이다.10대의 어린 총각부터 70대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함께 어울려서 답안지를 쓰고 마음 졸이며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는 것은 과거시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렇듯 입신양명을 꿈꾸며 관직에 나아갈 때도 모든 명예를 버리고 초야에 묻힐 때도 그들 곁에는 언제나 한시가 함께했다. 그러다보니 한시에 얽힌 믿기 힘든 일이 전해지기도 한다. 시 귀신에 얽힌 이야기가 대표적인데 글자 한 자 모르는 시골 선비가 어느날 뛰어난 시를 짓게 된다거나,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에게 귀신이 답을 알려준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저자는 이를 중세 지식인을 옭아맨 관직 진출에 대한 부담감이 시문(詩文)의 신비스러운 성격을 강화시킨 결과라고 해석한다.사실 한시는 선비에겐 지식의 감옥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대부 커뮤니티에 끼기 위해서도 한시를 짓는 능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허름한 행색의 선비가 좋은 시구 하나로 상석에 앉아 명주를 얻어먹는 일화는 수두룩하다. 이렇듯 저자는 선비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한시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말한다.이 책에서 좋은 한시 작품을 소개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일견 어려워 보이는 시운론, 천기론, 성령론 등의 문학이론을 깊이 있게 다루는 이유다. 하지만 그 핵심을 설명할 때에는 서거정, 이규보, 허균 등의 문집에 실린 글과 시작품을 직접 인용해 옛사람의 생각을 직접 대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8

말문 닫고 사는 새시대 `바벨` 모습

2009년 등단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짙은 인상을 남기며 평단의 기대를 받아온 소설가 정용준이 첫번째 소설집 `가나`(2011)에 이어 첫번째 장편소설 `바벨`(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말이 얼음 결정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남는다는 아름답고 불길한 동화 `얼음의 나라 아이라`로 시작되는 `바벨`은 이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천재 과학자 노아가 말을 결정화하는 실험에 실패한 뒤, 말이 만들어내는 부패하고 냄새나는 펠릿 때문에 사람들이 말문을 닫고 살아가는 새로운 시대(`바벨`)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과 `소통`이라는 언어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런 SF적 상상은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와 결합해 먹먹하고 절망적인 시기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고 그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바벨`은 (소재적으로는) 종말의 문제를 `언어`의 형상화와 소통이라는 문학의 오랜 고민과 더불어 제시하고, (서사적으로는) 종말론적 이야기가 거의 필연적으로 당도하게 될 선택의 아포리아와 정직하게 대면하며, (주제적으로는) 그 아포리아가 유발할 수 있는 종말론적 염세주의에 손쉽게 투항하지 않은 채 급기야는 어떤 희망이라는 삶의 형식에 도달하고야 만다”(강동호). 말의 무게를 재는 이 한 편의 실험극은 `정용준 소설`이라는 거대한 결과와 함께 우리 소설의 새로운 미적 성취를 보여줄 것이다.“사랑에 도달한다는 것은 언어를 나누는 공통 감각의 현장에 두 사람이 함께 입회, 근원적인 실존을 나누고 느끼면서, 다시 둘로 나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에 대한 정용준의 끈질긴 천착이야말로 종말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예표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벨`은 여전히 우리가 희망을 더듬어 나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이유를 느끼도록 만드는 중이다.”- 강동호(문학평론가)정용준 소설에는 유독 언어 장애를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말에 대한 욕망에도 억압과 폭력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인물이 그려진 `굿나잇, 오블로`나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차라리 벙어리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말더듬이의 이야기 `떠떠떠, 떠` 등. 말하자면 이번 작품은 말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관심이 언어 장애를 겪는 전 인류의 이야기로 확장되면서 말이라는 인간의 욕망과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을 포획해버리는 가혹한 실험을 한다.`단 하나의 욕망`인 `말`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이 우울한 공상은 그 정황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공포와 혐오의 감정에 휩싸이게 하고 우리를 슬픔 안에 가둔다. `말`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소설적 분투가 감정적 격정을 일으키고 얼룩처럼 남아 무게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먹먹해지는 가슴은 물리적 상처처럼, 흉터처럼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누구도 쉽게 어떤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말`을 가진 인간 모두에게 이 소설은 극단의 체험이다.종말의 시대를 보여주는 문장들은 계시의 순간처럼 잠언으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작가 특유의 시적 문체가 한 시대를 말하는 이 소설에서 얼마나 절묘한 문장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말에 대한 오만이 말로써 끔찍한 형벌을 받는 상황은 “역사는 영원한 밤을 맞이했다” “오래전에 시작된 현재”, 그리하여 “종말은 미래가 아닌 현재였고 과거였다”는 문장을 입으며 언어라는 관념적 대상은 물리적 속성을 갖고 살아나게 된다. “역사적 진보의 확신이 남아 있지 않은 세계의 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얼마나 정확한 문장인가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요나와 마리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가리켜 “두 사람의 언어가 서로의 언어를 만지는 행위”와 같다는 강동호의 지적은 좀더 효과적으로 정용준의 문장을 대변한다. “`바벨`에서 보여주는 이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는 결정적이다. 종종 우리는 문체를 이야기와 구별되는 어떤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해버릴 때가 있는데, 최소한 정용준의 소설에서 문체는 그야말로 소설의 몸과 같아서 그것만으로 소설의 주제를 체현하는 노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사려 깊고 조심스럽게 배려하면서, 한편으로는 끈질기게 만지려고 접근해가는 작가의 노력이 이렇게 표현되는 중이다.”▲ 정용준 소설가`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어릴 때부터 말을 할 때마다 무언가를 죽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쉽게 말을 할 수 없었고, 오랫동안 말더듬이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장용학과 박상륭은 사변화하고, 편혜영과 백가흠은 사회화하고, 백민석은 탈승화한 그 데스트루도를 정용준은 서정화”(김형중)한다는 지적을 다시 상기해보면, 정용준의 소설이 서정화되는 지점은 소설과 작가의 내밀한 밀착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자전에서 나오는 평면적, 서사적 친화가 아닌 자신의 모티프를 꿰뚫고 들어가 앓는 밀착이다. `사후의 세계` `SF-우화`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들로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 작가만의 이 방식은 불가능해 보이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문제, 우리의 문제로 만들고야 마는 능력이다. “깊게 파고든 밀도 높은 어둠”으로 작품 읽기는 괴롭지만 끝내 작품을 내려놓을 수 없게 하는 힘, 그것은 진실한 한 작가와 나누게 되는 `공통 감각` 때문일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1

美 대표작가 샐린저의 영혼과 고독…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1919~2010)의 전기 `샐린저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이 책은 샐린저 사후 최초로 출간된 평전이다. 샐린저에 관한 웹사이트를 운영해 온 케니스 슬라웬스키가 샐린저 별세 4개월 후인 2010년 5월에 출간했고, 민음사가 최근 번역해 내놓았다.샐린저의 편지들, 부모님과 전 아내들에 관한 정보, 비밀에 부쳐진 첫 결혼, 심취했던 동양철학 등 사생활의 전모가 담겨있다.책은 강박에 가까운 `사생활 보호`로 철저히 감춰져 있던 샐린저의 인생을 탐색하면서, 그의 영혼의 성장과 고독의 뿌리를 찾아간다.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이름 뒤에는 `은둔 작가`, `괴짜`, `사생활 보호에 과민한 사람` 등 예사롭지 않은 표현들이 늘 따라다녔다. 실제로 샐린저는 1965년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이후로 수십 년간 미국 뉴햄프셔주 코니시라는 코니시라는 작은 마을에 머물며 문단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은둔을 시작한 1965년은 작가 샐린저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전성기였다. 당시 그의 이전 작품들은 해마다 새로운 쇄를 찍었고, `호밀밭의 파수꾼`은 매년 30만부씩 팔려 나갔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은둔 생활을 유지했다.샐린저는 또한 `괴팍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매번 책을 출판할 때마다 편집은 물론 표지 디자인, 홍보 방식까지 하나하나 간섭하고 통제했다. 또 `홀든 콜필드`가 부당하게 인용되는 걸 용납하지 않았으며, 대중매체에 자신의 개인 정보가 오르내리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샐린저 생전에 랜덤하우스(이언 해밀턴)가 출판한 `샐린저 전기`는 법정 공방에까지 이르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샐린저는 저작권 및 사생활 보호 명목으로 `전기`에 인용된 개인적 편지, 신상 정보, 자신이 언급된 모든 인터뷰 기록을 삭제시켰고,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저작권법 판례가 됐다. 따라서 샐린저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전기`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획이었다.2010년 5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최고의 샐린저 웹사이트(deadcaulfields.com) 운영자인 케니스 슬라웬스키는 `샐린저 평전`, 바로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샐린저 사후 최초로 출간된 획기적인 평전이다. 샐린저 생전에는 절대 공개될 수 없었던 그의 편지들, 부모님과 전 아내들에 관한 정보,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과의 연애 등 베일에 가려져 있던 사생활의 전모가 밝혀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언론에 의해 왜곡된 은둔 생활의 진실, 미국 문단의 최대 스캔들이었던 조이스 메이너드와의 관계,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 내용 등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조명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