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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검은 대륙

아프리카는 54개국 11억 인구가 사는 지구 상에서 두 번째로 큰 대륙이다. 또 역사가 시작된 인류의 요람인 동시에 전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기도 하다.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 독립의 시대가 열리자 전 세계는 미지의 대륙의 미래에 환호와 격려를 보낸다. 1960년 영국 수상 해럴드 맥밀런이 “아프리카 대륙 전역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1세대 지도자들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아프리카는 경제 호황은커녕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는다. 이런 까닭에 맥밀런으로부터 40년 뒤 영국 총리 자리에 오른 토니 블레어는 아프리카를 “세계의 양심에 새겨진 상처”라고 표현한다.신간 `아프리카의 운명`은 아프리카 독립의 시대가 시작된 시기부터 반세기의 역사를 살펴보며 풍부한 자원과 풍요로운 역사·문화를 가진 대륙이 어떻게 절망과 궁핍의 나락으로 추락했는지 추적한다.책은 특히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의 성격과 행적이 각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과정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전기작가이자 역사가인 저자 마틴 메러디스는 아프리카 특파원으로 15년간 재직한 경험을 살려 전쟁, 독재, 부패, 빈곤 등 현재에도 아프리카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생생하게 풀어놓는다.그도 그럴 것이 건국의 주역이 된 1세대 지도자들은 대부분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개인숭배의 길을 걷는다. 또 불법적인 개인재산의 축적은 정부와 공무원의 부패로 이어져 민중을 빈곤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이는 다른 쿠데타로 이어지고 혼란은 지속된다.일례로 아프리카 사회주의 혁명 지원을 위해 콩고로 파견됐던 전설적 혁명가 체 게바라는 자신이 지원한 카빌라의 게릴라 군대를 두고 “기생충 같았다”고 말한다. 이 밖에도 기니의 첫 대통령인 세쿠 투레는 자신을 `아프리카의 위대한 아들`, `혁명학 박사`로 부르며 농업, 철학, 축구 등 모든 분야의 달인으로 묘사한다. 또 자신의 연설과 사상을 기록한 책을 필독도서로 만든다.아프리카의 에이즈 확산 배경도 흥미롭다. 아프리카 영장류인 침팬지와 긴 꼬리 원숭이로부터 유래한 에이즈 바이러스는 그 존재가 알려지기 전부터 아프리카에 퍼져 있었다. 에이즈가 아프리카 가정을 빈곤으로 몰아놓고, 생산성을 급격히 떨어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지도자 대부분은 문제를 부인하거나 무시했다. 아프리카 정치인들은 에이즈를 서구에서 흘러들어온 것으로 치부하거나 아프리카인의 성적인 열정과 재생산 능력을 감퇴시키려고 서구 인종주의자들이 꾸며낸 선전 활동이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탄자니아에서 에이즈는 `죽일 테면 죽여보라지. 그래도 나는 절대로 젊은 여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의 스와힐리어로 번역됐고, 자이르 대학생들은 에이즈를 `애정을 감퇴시키는 가상의 증후군`이라고 불렀다.저자는 과거를 알지 못하면 현대를 절대 알 수 없다며 정글과도 같은 아프리카 정치판과 사회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이어 아프리카 저개발의 책임을 무조건 서구 국가들에 떠넘기기보다 아프리카가 직접 나서야만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35장에 걸쳐 아프리카 현대사를 속도감 있게 기술했다./연합뉴스

2014-07-11

아마존 원시부족으로 본 인간본성의 진실

신간 `고결한 야만인`(원제: Noble Savages)은 미국의 인류학자 나폴리언 섀그넌이 아마존 원주민 야노마뫼 족을 평생에 걸쳐 연구한 기록이다.야노마뫼 족은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 양편에 사는 아마존 원시부족이다. 섀그넌은 1964년 야노마뫼 족을 처음 접하고 이들이 인류학계에서 통념적으로 이해되던 원시부족과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는 야노마뫼 족을 지구 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야생의 원시민족이라 보고 연구를 시작한다.야노마뫼 족은 1964년 당시 수렵·채취에서 농업·가축으로 넘어가는 석기시대에 살고 있었다. 섀그넌은 35년 동안 25번 야노마뫼를 방문하며 이들이 원시적 과정에서 탈피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리고 부족사회에서 전개된 정치적·사회적·군사적인 투쟁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책은 우리가 원시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해 지닌 몽상을 차례차례 깨뜨린다.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비폭력적이고, 이타적이며, 경쟁하지 않았다고 묘사한다. 우리도 원시사회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처럼 평화로웠을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이는 우리의 착각일 뿐이다.섀그넌은 예측하지 못할 때 갑자기 공격하는 이웃이 가장 위험한 적이라며, 야노마뫼 족은 이웃의 공격을 항상 걱정하고 두려워했다고 말한다. 야노마뫼 족은 늘 폭력과 전쟁의 위험에 노출됐고, 섀그넌이 야노마뫼에 처음 들어간 날도 비사아시테리의 야노마뫼 족은 이웃마을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로 유추해 볼 때 인류사회의 먼 과거는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묘사한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더 가까웠다.여성을 얻기 위한 전쟁과 다툼은 현재보다 더 비일비재했다. 섀그넌의 조사 결과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는 야노마뫼 족 전사들을 그렇지 않은 남성들에 비해 부인이나 자식이 더 많았다. 전략적 물적 자원이 갖춰지기 전의 부족사회는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에 대한 성적 접근권을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섀그넌은 야노마뫼 족 사회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더 크고 복잡하게 발전하게 됐는가를 알아내면 많은 부족이 국가 형성을 위한 첫걸음을 어떻게 내딛게 됐는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와 문화의 진화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고 말한다.인류학에 진화론을 도입해 학계로부터 엄청난 반발에 시달린 그는 유전자 실험을 위해 원주민에서 고의로 홍역을 전염시켰다는 누명을 쓴다. 그래서 역사상 가장 많은 논란에 휘말린 인류학자로도 알려졌다. 그러나 원시부족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려 한 그의 노력은 인정받아 마땅하다./연합뉴스

2014-07-11

“맛의 끝은 사랑입니다”

허영만 화백의 요리만화 시리즈 `식객`이 완간된 지 4년 만에 세 권짜리 컬러판이 새롭게 나왔다.김영사에서 출간된 `식객` 시리즈는 지난 2010년 27권 `팔도 냉면 여행기` 편으로 완간됐으며, 이번에는 도서출판 시루가 `식객2`라는 이름으로 세 권을 발간했다.흑백인 `식객`과 달리 `식객2`는 전면 컬러로 구성됐다. `식객`이 주인공 성찬과 진수가 전국을 누비며 우리 맛을 탐구하는 내용을 담았다면, `식객2`는 `그냥밥집`이라는 식당을 찾는 단골 이웃의 희로애락과 요리를 다뤘다.이 때문에 `식객 2`는 요리 이야기와 함께 그리움과 사랑 등 사람 간에 벌어지는 휴먼 드라마도 비중 있게 전하고 있다.1권 `그리움을 맛보다`는 대구내장젓, 김해뒷고기, 된장찌개, 아이들을 위한 채소 요리, 보리밥 한 그릇 등 5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됐다. 3권은 총 14개의 에피소드와 후기로 이뤄졌다.`식객`은 2000년부터 2010년까지 135개의 에피소드를 다루며 27권이 나왔고 총 350만권 이상이 팔렸다. 두 차례 영화화됐으며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시루는 “`식객2`는 1974년 `집을 찾아서`로 공식 데뷔한 허영만 화백의 만화 인생 40주년 기념작”이라며 “`식객2`가 발간되면서 `식객` 시리즈의 15년 대장정도 마무리하게 됐다”고 밝혔다.허영만 화백은 “맛의 끝은 사랑”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2014-07-11

추락할 때 돋아나는 `천사 날개`

첨예한 여성적 감각으로 생명을 사유하는 소설가 전경린이 네번째 소설집 `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동네)를 펴냈다.`물의 정거장`이후 11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단단히 써낸 9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이 소설집은 가히 전경린 문학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2007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악마와 천사라는 본성의 양면성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천사는 여기 머문다 2`와 2011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강변마을`, 2004년 대한민국소설상을 수상한 `여름 휴가` 등 평단과 독자 모두를 만족시켜온 그의 소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은 아직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다. 지리멸렬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만큼 경이롭고 환희에 찬 인생,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하얀 “천사”의 날개를 펼쳐내며 살아감을 멈추지 않는다.`모든 자유를 가진 것 같지만,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우리 사회 여자들의 갇힌 삶이 전경린의 문학적 관심사였다. 일찍이 `정념(情念)`과 `귀기(鬼氣)`라는 강렬한 단어들로 설명돼온 그의 소설들은 우리의 내면에 잠재한 고통스러우면서도 찬란한 생명의 빛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유의 시정(詩情)적인 문체와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은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기도 하고 전락을 향해 달려가는 무거운 현실이기도 하다.전경린의 사랑은 통속과 관습의 굴레로는 잠재울 수 없는 `존재의 비명`이다. 온몸을 휘감는 열정의 시간이 또한 추락의 시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들의 등에서 천사의 날개가 돋아난다. 광기와 열정의 벼랑 끝에서 마침내 찾아오는 평온과 고요. 이를 통해 전경린의 인물들은 점차 사랑의 외연(外延)을 넓혀나간다. 홀로이던 그녀들의 곁에 이제 딸과 엄마와 동생과 이웃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짐승처럼 천진스러웠던 시절을 지나, 평화로운 식물성의 생활을 향해 나아가려고 노력한다.△맥도날드 멜랑콜리아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으나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는 도시의 인공섬, 맥도날드. 통유리창 너머 잿빛 거리를 바라보며 햄버거를 꾸역꾸역 씹던 어느 날, 나정은 아침마다 늘 맥도날드에서 마주치는 남자에게 말을 건네본다. 모두에게 잊힌 그녀처럼, 남자도 화려했던 한때를 지나 한심스러워 보이는 생활을 하고 있다.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고, 별다른 하는 일도 없이 카페를 전전하며 신문을 보는 삶. 두 사람은 곧 서로의 내밀한 감정들을 조금은 유치하게, 하지만 진솔하게 털어놓기 시작한다.△야상록(夜想錄)오랜만에 친정에 돌아온 금조는 어린 딸과 함께 엄마와 여동생과 한방에서 잠을 잔다. 좀처럼 오지 않는 잠에 감았던 눈을 뜬 그녀의 앞에 떠오르는 아버지 생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우제를 지내기 전날 밤, 금조에게 손님이 찾아왔었다. 장례식에 결코 들일 수 없었던 한 남자. 금조는 7월 말 한낮 검은 상복을 입고 온 남자와 바깥잠을 잔다. 다시금 떠오르는, 하얀 물질경이꽃이 덮여 있는 검은 연못의 풍경…. 돌을 토해내듯 억눌렸던 울음을 쏟아내는 그녀의 등을 엄마는 한없이 쓰다듬는다.△천사는 여기 머문다 1처음 온 사람이면 누구나 순간적으로 균형감각을 잃어버릴 법한 산밑 마을. 세상과 단절된 듯한 이곳에서 여자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있다. 한없이 자유롭지만, 또 그만큼 위태롭고 외로운 그곳. 여자는 알고 있었다.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을 무심히 지나치듯, 그가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떠나리라는 것을.▲ 소설가 전경린△천사는 여기 머문다 2독일 서부의 한 작은 마을 S. 인희는 모경과의 실패한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언니를 따라 비수기의 관광지처럼 한적한 그곳에 정착하려 한다. 그녀를 초대한 사람은 섹스가 없는 `백색 결혼`을 원하는 하인리히. 그를 만날 때 입고 갈 옷들을 살펴보던 인희는 지퍼 부분이 찢어진 블라우스를 발견하고, 그것을 꿰매기 위해 붉은색 실을 풀어낸다. 한 바늘, 두 바늘, 세 바늘……. 갑자기 하늘에서 쾅 하고 천둥이 치고 인희는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고 만다. 그 순간, 석상처럼 굳어버린 그녀의 양손 끝에 반딧불 같은 빛의 방울들이 점점이 모여든다.△밤의 서쪽 항구통영지방의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P와 정흔이 찾아온다. 정흔은 10년 전쯤 `나`와 친하게 지내던 인연. 함께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떠올리는 것은 `나`가 정흔과 함께 친하게 지냈던 선후에 관한 기억이다.젊은 날 그들을 자연스레 멀어지게 했던 그 일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쓸쓸한 서쪽 항구에서 벌어진 꿈같은 여행의 기록./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7-04

시와 삶 아우르는 진지한 성찰세계 보여줘

서정적 감수성과 기발하고 활달한 상상력이 어우러진 독특한 어법을 구사하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안현미 시인의 세번째 시집 `사랑은 어느날 수리된다`(창비)가 출간됐다. “새로운 감수성과 삶의 힘을 감싸안는 웅숭깊은 서정”과 “진솔함의 미덕과 상상력의 힘을 합체하는 타고난 언어감각”(박형준)으로 2010년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한`이별의 재구성`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어둠속의 불우한 현실을 감싸안으며 시와 삶을 아우르는 진지한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감각적인 언어유희가 도드라지는 가운데 삶과 사람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거름으로 하여 삶의 밀도 있는 체험이 눅진하게 녹아든 시편들이 먹먹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감성을 따뜻하게 위로한다.“그는 여행자 배롱나무의 동쪽을 다녀온 자 無에서 꺼내온 시간을 들고 방금 막 도착한 자 현 없이도 울음을 데리고 아름다움에 참여하고 있는 자 그는 여름 바람 앞의 미루나무, 사랑 옆에 서 있는 여자, 야생 두릅을 삶아서 먹는 저녁 밥상, 미지의 곳을 헤매다 돌아오는 여행가방, 분노로 빛나는 물항아리, 질문하는 구름 그는 무릅쓰는 자 불행과 고독 무의미와 어둠 중력과 천민자본주의 불가항력과 부조리를 끝끝내 무릅쓰는 자 삶은 고독 삶은 부조리 삶은 학살의 일부”(`시마할` 부분)진솔한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안현미의 시는 “미래의 누군가에겐 위로가 될지도 모르는”(`이별수리센터`) 연서(戀書)이다. 그 자신이 가난하고 외롭고 꿈조차 사치였던 `고장난` 시절에 시로 위로받았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 험준한 세상에 시인은 “사랑의 부재 또한 사랑”(`그도 그렇겠다`)이고 “인생이란 원래 뭘 좀 몰라야 살맛 나는 법”(`카이로`)임을 깨달으며, 삶의 “강 옆에서 물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삐아졸라를 들으며 나는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리는 애틋한 마음으로 “사소했지만 힘겨웠던”(`전갈`) 상처투성이의 시절을 달래고 위무한다.“결혼 후 한 계절이 지났습니다 입덧이 시작됐고 제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시집왔나 생각해봅니다 입안이 얼얼하고 간혹 어린 엄마였던 언니가 너무 사무칩니다//삶의 비애를 정확하게 바라본다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닐 테지만 나를 보아 너무 서둘지 않아도 나쁘진 않았을 텐데 어리고 영민한 여자가 현모양처가 되기란 동서남북 이 천지간에서 얼마나 얼얼해야 하는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고 싶었던 행복을 얼음처럼 입에 물고 너도 곧 엄마가 되겠구나 무구하게 당도할 누군가의 기원이 되겠구나 여러 계절이 흘렀으나 나는 오늘도 여러개의 얼음을 사용했고 아무도 몰래 여러개의 울음을 얼렸지만 그 안에 국화 꽃잎을 넣었더니 하루 종일 이마 위에 국화향이 가득하였다 그 향을 써 보낸다 그저 얼얼하다 삶이”(`내간체` 전문)2001년 등단한 이후 주목할 만한 젊은 시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해온 시인도 어느덧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삶을 인용해서 살고 있는 것만 같은/불혹”(`불혹, 블랙홀`)의 나이를 넘겼다. “거울도 지도도 없었고 그저 눈물뿐이었”(`어떤 삶의 가능성`)던 시절, “살 수도 살지 않을 수도 없는(죽을 수조차 없는) 그런 날”(`화란`)들의 “신산한 삶이 남긴 상처를 녹여내”(`화면조정시간`)고 “지나가는 시간을 잠시 바라보”(`불혹, 블랙홀`)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유희하”고 “연희하”고 “환희하는 자”(`연희-하다`)로서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다른 세상”(`다뉴세문경`)과 “다른 차원의 시간이 열리”는 “새로운 인생”(`어떤 삶의 가능성`)이 움트는 시의 텃밭을 일구어나간다./윤희정기자

2014-07-04

“문화가 변해야 새 경제조직 탄생”

`여파-경제위기는 우리 시대의 문화다`(글항아리)는 지난 2008년 시작된 금융위기 발생 이후의 여파에 대해 탐색하고 그 대안에 대해 논의한다.마누엘 카스텔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교수와 주앙 카라사 리스본 대학 교수 등 다수의 국제적 학자들이 유기적·협력적 논의를 거쳐 단계적이고도 폭넓은 구성으로 목차를 짰다.1부에서는 현대사에서 반복돼 온 위기 국면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동시대인들이 `종말의 이미지`속에서 경제적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데 얼마나 익숙해 있는지를 보여주며, 2부에서는 기업 및 국가가 주도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를 걷어냈을 때 `위기`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드러낸다. 이어 3부에서는 위기에 대처하는 기업, 국가, 언론의 미봉적 행태 및 현행 제도의 한계를 구체화하고, 4부에서는 그런 가운데 대중의 어떠한 움직임이 있어왔으며 대안 시민사회가 어떻게 출현하고 있는지를 다룬다. 마지막 5부는 `세계 경제위기`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의 특수한 사회문제를 다뤄 한걸음 더 시야를 넓혔다.이 책에서 영역 간, 다문화 간 분석의 결과로 제시하는 핵심 주제는 경제. 모든 경제는 문화라는 것이다. 문화적 실천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소비, 교환 과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경제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문화다. 시스템의 위기가 있다면 그곳에는 반드시 인간 행동의 근본 원리로서 기능하던 어떤 가치관이 지속가능하지 않게 되는 문화위기의 조짐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때만 새로운 형태의 경제조직과 제도가 탄생하며, 경제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보장될 것이다.이 책에서 저자들은 지금이 그런 역사적 이행기라는 가설 하에 어떤 문화적·사회적 상태가 위기로 이어졌는지를 검증한다. 그리고 위기의 여파 속에서 나타난 서로 다른 문화의 사회적 생산성을 평가한다.저자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위기는 이미 일상이자 문화라고 강조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7-04

그 집에 프레디 목소리는 없었다…

대산대학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차세대 주목받는 젊은 작가로 떠오른 윤고은의 두번째 소설집 `알로하`(창비)가 출간됐다. 제12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해마, 날다`를 비롯, 윤고은의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절박한 세계인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아홉편의 작품을 실었다.인성에 대한 자본의 공격이 첨예화된 사회, 그 안에서 소멸되지 않기 위해 고투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한층 세련되고 깊어진 윤고은의 통찰력에 전적인 신뢰감을 안겨준다.신예로서의 기발함과 패기로 주목받았던 윤고은은 어느덧 등단 11년차의 짧지 않은 경력을 쌓았다. 한권의 소설집, 두권의 장편을 출간하는 동안 증명되어온 그의 독보적인 상상력은 `알로하`에 이르러 이제 그 자체로서 빛이 날뿐만 아니라, 서사와 인물의 개연성과 단단히 결합해 주제의 완결성을 견인한다. 신랄하게 현실을 고발하기보다는 세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을 슬쩍 끼워두는 세련된 서사 운용력 역시 그의 필력이 단단하게 여물었음을 증명한다.윤고은은 자본주의의 허울과 그것의 내부에서 본질이 좀먹는 사태를 직시해왔다. 그런 그의 눈에 띈 것은 우리 사회가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내밀한 가치인 가정조차 시간 단위로 전시되고(`사분의 일`), 하객을 고용한 결혼식을 전시하고(`월리를 찾아라`), 부동산 값을 올리기 위해 소설의 배경이 되기로 작정한 도시는 모든 공간을 소설에 맞게 부수고 세워 전시한다(`Q`). 그런가 하면 록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살았던 집에 우연히 세를 든 `프레디의 사생아`의 주인공은 집을 전시공간으로 만들어 프레디 머큐리의 가짜 소지품을 전시하는데,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자못 깊은 울림을 남긴다.“이제 그 집에는 모든 것이 있다. 단지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만 없을 뿐이다.”(40쪽)프레디 머큐리를 규정하는, 그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의 본질은 분명 그의 목소리다. 그러나 자본의 짙은 그림자 아래 개체의 고유한 아우라가 모두 지워지는 것, 본질과 비본질이 뒤바뀌고 가품이 진품의 자리를 가로채는 아수라장이 바로 윤고은이 바라본 세계의 초상인 것이다.`알로하`의 아홉 작품은 주인공들이 존재증명을 위해 벌이는 처절한 싸움의 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고유한 개성이 그다지 지켜져야 할 가치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주체들은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거나 잊힐까 전전긍긍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잊히지 않기 위해, 남들과 분별되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기 위해 인물들은 외로운 싸움을 계속한다. 능력은 초 단위로 평가되고 사회에 유익한 존재가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즉시 생존은 위협받는다. 그 누구도 평온하게 존재하지 못한다.`P`의 주인공 `장`은 회사에서 내쫓기며 도시 안에서 자신을 증명해주던 주소 `P259′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을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결국 그는 그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동료를 배신하고 자신을 내쫓은 회사로 되돌아가 새 주소 `P1765′를 부여받는다. 그런가 하면 회사에서 내쫓기고 책 광고를 하는 새 직장에 들어간 `요리사의 손톱`의 주인공 `정`은 지하철에서 최대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책을 읽어야 한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책에 꽂히길 바라지만 역설적으로 그 책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는 건 정이 선로 위로 투신한 뒤다.수록작 중 비교적 최근작인 `알로하`와 `콜럼버스의 뼈`, `해마, 날다`는 고독한 개인에 대한 윤고은의 고찰이 새로운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세 이야기는 모두 `기억`의 문제를 환기한다. 개인의 존재와 정체성은 실상 타인의 기억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의 기억에 스며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존재증명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고독한 개인들은 공동의 기억 안에서 구원된다. 이 몇편으로 윤고은의 서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금 억지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소설가 윤고은것은 분명, 이 파괴되어가는 세계에서 저마다의 싸움을 하는 개인들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직한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나의 말이기도 하고 당신의 말이기도 한 그 이야기들. 윤고은은 서로 얽히고설켜 분리가 불가능해진 우리의 이야기들을 부려놓는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온몸으로 악다구니를 쓰는 것조차 우아하지 않느냐고, 어쨌거나 삶은 우리 모두가 완성해야 할 저마다의 악보가 아니겠느냐고 말을 거는 듯하다. 그리고 하루하루 힘들게 스스로를 지켜내는 삶들에게, 알로하, 하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27

“슬픔에 무너지는 마음, 성경서 위로 얻기를”

정신과 전문의 이나미사진 박사의 성서 치유 에세이 `슬픔이 멈추는 시간`(민음인)이 출간됐다.일상의 크고 작은 고통, 분노나 미움으로 인한 마음의 병, 실패로 인한 무력감에서 가족을 잃고 느끼는 깊은 슬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넘어지고 절망하거나 무력감을 겪는다. 어떤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이 마음의 상처가 깊어질 때 저자는 성경의 한마디에서 위로를 얻기를 권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경은 온갖 비유를 담고 있는 인류의 고전이기에 심리적 통찰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고민이 있을 때 신앙이 있는 이들은 성경이나 불경 등 믿는 종교의 경전을 펼치기도 하지만, 막상 어디를 읽어야 할지 난감한 경우가 많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 어디를 봐야 할지 알려 주는 가이드북 같은 역할도 할 수 있는 책이다. 화가 날 때, 죽고 싶을 때, 부모님 때문에 속상할 때, 배신당했을 때 성서의 어느 부분을 읽으면 마음을 다독이고 위로받을 수 있는지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한다.저자는 신앙이, 성서가 누군가의 소망을 이루어 주리라거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없애 줄 것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픔을 달래며 책장을 넘기는 시간 동안 잠시나마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고통이 스스로를 더 깊고 성숙하게 만들 수 있도록 용기를 내라고 조언한다.한편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전문적인 위로의 말이나 항우울제 같은 약보다 때로는 신앙과 성경에 등장하는 비슷한 상황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가 오히려 공감과 위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저자는 자식 잃은 슬픔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임종까지도 평화로웠던 외할머니의 삶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믿음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화와 종교의 힘을 직접 느껴 왔다. 그의 커리어가 서울대학교 정신의학과 박사 과정 이후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종교심리학을 공부하고 뉴욕 신학교 강의로이어진 것, 두 개의 석·박사 논문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일 것이다.책은 총 다섯 개의 부로 구성된다. `깊은 슬픔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 `가족 때문에 상처가 깊다면` `분노와 미움으로 마음이 병들어 갈 때` `회의와 허무의 순간에는` `옳고 그름 혹은 종교에 대하여`, 이 다섯 가지 분류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슬픔과 고민이 여과 없이 담겨 있으며, 이에 대한 성서적 접근과 정신과의사로서 주는 조언이 함께 엮인다. 지독한 슬픔을 경험할 때, 화가 치밀 때, 죽고 싶을 때, 가족 때문에 상처받을 때, 잊기 힘든 배신을 당했을 때 등 누군가 현실에서의 고민을 털어놓으면 저자가 그에 답하는 방식으로 구성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27

詩로 풀어낸 고국의 그리움

재미시인 김정기씨의 다섯번째 시집 `빗소리를 듣는 나무`(문학동네)가 출간됐다.1975년 첫 시집 `당신의 군복`으로 문단과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반응을 이끌어냈던 시인은 1979년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췄고, `구름에게 부치는 시`(공저·1987), `사랑의 눈빛으로`(1989), `꽃들은 말한다`(2004) 등 시간이 흘러 시인의 이름이 거의 완전히 잊힌 뒤에야 그는 오랜 세월 가슴속에 묵혀뒀던 시편들을 조금씩 꺼내 선보여왔다.시인으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가장 빛나야 했던 시절, 왜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금-여기에서 사라져야 했던 것일까. 3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보면, 시인의 남편이 뉴욕 UN 한국본부에 외교관으로 재임중이던 1979년 10·26이 터졌고, 시인의 남편은 하루아침에 외교관에서 `국가원수를 살해한 대역죄인의 측근 제1호`로 낙인찍히게 됐다. 시인과 가족들은 뉴욕에서 불법체류자가 돼 이국땅에 표류하게 됐다. 고통스러운 시간도 어느새 35년이나 흘러 냉혹한 낙인의 굴레는 벗었지만 시인에게는 `고국으로부터 잊힌 존재`가 됐다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꽃들은 말한다`이후 다시 10년, 시인이 굴곡진 지난 삶의 한을 가슴에 묻고 먼 곳에서 날려보낸 새로운 시편들은 오히려 이곳, 고국의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 그의 시는 고통 속에서 끌어내 더욱 빛나는 깨달음을 물, 나무, 꽃 등 부드럽지만 강인한 자연의 이미지로 전달한다. 이 86편의 시들은 타국에서 고독과 그리움으로만 30여 년을 살아낸 시인의, 그럼에도 계속해서 세상을 마주하고 모국의 언어로 시를 쓰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다.이번 시집에서 김씨는 무너질 것 같은 자신에게 오랫동안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던 이와의 영원한 이별, 그리고 노년에 이방에 홀로 남은 이의 절절한 외로움을 절제된 언어로 읊조린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 눈을 부릅뜨고 똑똑히 세상을 마주 본 시인에게 슬픔이란 솔직하고 강렬하게 발산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치기를 버리며, 순간순간 치밀어오르는 눈물을 마음속에서 삭이고 다듬어 고매하고 세련된 결정(結晶)으로 만들어내는 과정. 그것이 시인에게는 `나이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다독여 떨치고 일어서는 시인의 노련함과 원숙함은 이번 시집의 주된 분위기를 형성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27

사랑받고 싶어하는 인간 욕망 그려

“경계에서 세상의 온갖 거짓과 위선을 추문화한다”(문학평론가 우찬제)는 평을 들으며 2007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작가 윤보인의 첫 장편소설 `밤의 고아`가 출간됐다. 등단 8년차에 첫 장편이지만 작가가 유년 시절 겪은 망실과 고독의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인 만큼 오랜 시간 깊은 고민 속에 쓰고 다듬어져 작가의 애정이 남다른 소설이다. 윤보인은 그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 독특한 감각의 경신과 꾸준한 자기 세계의 확장으로 주목을 받아온 작가다. 섬뜩하리만치 그로테스크한 문장들은 이전의 편혜영·김이설 등이 보여준 세계의 폭력을 들추어내는 하드보일드한 기법을 떠올리게 하고, 세계를 비틀어보고 우울을 끄집어내는 정서는 비슷한 시기 등단한 염승숙·임수현과 나란히 읽어볼 수도 있지만 윤보인은 좀더 개인적인 욕망에 천착해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원초적 본능에 더 충실한 인물과 세계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지난 2012년 출간된 소설집 `뱀`으로 사회라는 거대한 틀에 수렴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한 욕망과 충동을 집요하게 추적했던 작가는 이번에는 좀더 긴 호흡으로 삶의 근원에 뿌리박힌 어둠을 길어 올려 보인다. 서늘할 만큼 정적이고 그늘진 소설 속 공간들은 어디라고도 할 수 없는 동시에 모든 곳과 닿아 있다. 믿기지 않을 만큼 우울하고 부정적인 등장인물들 또한 누구도 아닌 동시에 모두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깊은 어둠, 생을 관통하는 비루함과 우울, 이 모든 것들을 날것으로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남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담담하고 당당하게 드러낸다는 점이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든다.이야기는 “가난한 신혼부부, 외국인 노동자, 사고로 부인을 잃은 남자, 아이를 버리고 가출한 젊은 여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모여 사는 연립에서 시작된다. 이곳에 살고 있는 세 사람, 여, 기, 로의 시선이 교차되며 소설이 진행된다.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실제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고아`라는 점이다.`밤의 고아`는 어둠이 과잉된 세계의 이야기다. 그곳에서는 좌절과 냉소가 횡행하며 불신과 배반이 당연시된다. 우리의 일상에도 항상 존재하지만 누구도 불러 보려 하지 않는 것들을 계속 노출시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20

사막에 비 내리면 황무지는 끝나고…

`제국호텔`이후 10년 만에 내놓는 이문재(55)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문학동네)이 출간됐다.“지금 여기”라는 화두는 시인의 시를 읽어온 독자들에게 그리 낯선 주제가 아니다. 시인은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한 이래 어쩌면 그보다도 일찍부터 지금 여기라는 화두를 노상 품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미래를 근심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그간 적도에서 눈썰매 타기(“자메이카 봅슬레이”), 유전자 속 그리움의 정보, “무위로서의 글쓰기” “은유로서의 농업” “인간중심주의” “세기말” “언제나 접속되어 있는 e-인간들” 등을 지금 여기에서 발견하거나 발명해왔다. 10년 전 시인에게 지금 여기가 디스토피아 또는 멋진 신세계였다면 그래서 시인이 언플러그드, 전원(電源)으로부터 절연을 이야기했다면, 이제 그는 “지금 여기 내가 맨 앞이었다”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 듯하다.모두 85편의 시가 실린 `지금 여기가 맨 앞`은 4부로 나뉘어 있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각 부의 키워드를 `봄` `중년성` `사랑/죽음` 그리고 `시공간의 사회학`으로 포착해 `지금 여기가 맨 앞`을 읽는다. 그리고 그는 이 시집 옆에 90여 년 전 씌어진 T. S. 엘리엇의 시`황무지`를 불러내 나란히 놓는다.`황무지`가 그러하듯이 이 시집도 봄날의 풍경들과 함께 시작됐는데(1부), 이 시집의 `나`는 `황무지`의 5절(`천둥이 들려준 말`)에서도 울렸던 그 천둥소리를 듣고서 자신의 사람을 돌아보기 시작했고(`천둥`), 그래서 그는 런던의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를 하던`황무지`의 어부왕처럼 일단 제 자신의 재생을 도모하기 위해 자작령 꼭대기에 오르고 나서는(2부), 역시나 `황무지`의 뭇 주인공들처럼 우리 시대의 사랑과 죽음에 대해 성철하다가(3부), 더 구체적인 생활세계로 하강하여 이와 같이 대안적 상상력을 찾고 있다(4부). 그렇다면 이 시집이, 사막에 비가 내리며 끝이 나는 `황무지`처럼, 사막이 초원으로 바뀐 저 기적의 순간에 끝이 난대도 좋지 않을까.한 세기 전의 시인 엘리엇에게 지금 여기는 1차 대전 이후의 유럽사회였다. 신형철은 그래서 `황무지`의 시인이 `지금 여기가 맨 끝`이라는 생각에 더 잠겨 있었을 거라고, 그러나 현재의 시인 이문재는 “가장 간절한 간절함으로”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라는 인식에 도달했을 거라며 두 텍스트의 간극까지 함께 읽어낸다.다른 한편 이 간극은 이문재 시인이 지난 10년을 통과하며 겪은 마음의 이력, 모종의 깨달음이기도 할 것이다.“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지금 여기가 맨 앞`전문▲ 시인 이문재“지금 여기가 맨 끝”이라는 구절에서 “지금”은 시간적으로 종말을, “여기”는 공간적으로 벼랑을 뜻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우리더러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종말이 임박했다고 말하려는 걸까. “네번째 시집 이후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왔다”는 고백이 앞서 나왔던 것은 벼랑일지 모를 종말일지 모를 “맨 끝”을 “맨 앞”으로 그러니까 이를 변증법적으로 또 전위적으로 읽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일 것이다. “땅끝”이 “바다의 끝” “물끝” “땅의 맨처음” “땅의 시작”이라는 각성도 그래서 함께 가능하지 않았을까.10년 전 시인의 벗 고종석은 `제국호텔` 발문에서 “걸음은 이문재 삶의 거름이다”라고 얘기한 적 있는데, 시인은 그간 10년을 줄곧 “홀로, 두 발로, 꾹꾹 지문 찍듯이 걸어” 땅의 끝까지 간 것일까. 그리고 땅끝에서 한참 바다를 마주한 끝에 왈칵 눈물 쏟고 온몸이 환해진 다음 “이윽고 땅의 끝에서 돌아”서서는 “땅의 맨 처음”을 새삼 인식한 것 아닐까.(`땅끝이 땅의 시작이다`) “땅바닥”이 사실은 “하늘의 바닥”, “언제나/ 꼿꼿이 서 있는” “땅의 머리” “땅의 정수리” 아니겠느냐는 깨달음도 그렇게 함께 오지 않았을까.(`바닥`)이문재 시인은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노작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6-20

식물 사냥꾼들의 화려한 신대륙 모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200여 주나 머물면서 전 세계 독자들의 열광적인 사랑을 받은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엘리자베스 길버트사진,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불러일으키는 그녀가 이번에는 탐험과 발견과 위대한 발전의 시대 19세기를 무대로 한 대작 장편소설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약용 식물 거래로 필라델피아 최고의 부를 거머쥔 풍운아 헨리 휘태커의 외동딸 앨마 휘태커. 그러나 앨마는 넘치는 재력과 지성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성격과 압도적인 배경 탓에 홀로 고독한 삶을 보낸다.“이것은 한 인생의 소설이다.”(`오 매거진`)라는 열광적인 서평이 증명하듯, `모든 것의 이름으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 주인공 앨마가 살아온 격동의 19세기를 그대로 담아낸 완벽한 시대 소설이자 인물 일대기다. 앨마의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 내기 위해 작가는 자연 과학, 철학, 복식,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1800년대 말의 유럽과 폴리네시아 등 전 세계의 역사적 풍경을 그대로 재현한다.특히 그중에서도 주인공 앨마가 평생을 바쳐 헌신한 식물학 분야에 대한 취재는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다. 앨마의 아버지 휘태커를 포함해 `돈이 되는` 신대륙의 식물을 찾아 위험한 승부수를 걸었던 식물 사냥꾼들의 화려한 모험, 바위에 붙어 수백 년 동안 작지만 풍요로운 우주를 만드는 이끼를 연구하는 선태학자들의 열정, 폴리네시아의 정글을 장식한 이국적인 열대 나무들, 보석과도 같은 희귀 난초를 그린 우아한 석판화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열광, 거대한 유리 온실 속에서 한겨울에도 향기롭게 열매 맺는 체리와 파인애플까지. 자연 과학의 태동기인 19세기, 세계와 자연을 새롭게 분류하고 해석하려 노력한 인간들의 정신이 집중되었던 분야인 식물학에 대한 소설 속 묘사는 투철하고 생생하다.한편 말라리아의 특효약이었던 기나나무를 손에 넣기 위한 열방의 각축, 노예 폐지론이 대두된 미국 동북부의 첨예한 갈등, 쿡 선장이 감행한 무시무시한 모험 이야기, 조용하지만 확실히 세계를 지배하던 동인도 회사, 타히티 섬 초기 선교사들의 고난과 승리 등 과학의 발전과 맞물려 변화하기 시작한 세상의 모습 역시 또 하나의 볼거리다. 주인공 앨마가 어린 시절부터 지식을 쌓는 방대한 규모의 도서관 묘사에 이르면 마치 우리도 그 서늘한 지식의 보고에서 중세의 명저들을 함께 읽어 나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힐 정도다.자연 과학이 태동하던 19세기. 누군가는 명성을, 누군가는 부를 추구하며 식물을, 광물을, 대륙을 찾아 위험한 항해와 모험을 펼쳤던 시기. 미신과 과학이 공존하고, 진화론을 주창한 과학자가 강신술을 주제로 한 모임을 갖는 한편, 원주민 청년이 매끄러운 영어로 성경을 강독하던 시기. 저널리스트 출신의 작가는 이 모든 장면을 무엇 하나 빠짐없이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읽는 우리 역시 앨마의 혼란스러우며 강렬하고 짜릿한 여정을 함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20

별의 최후는 어떤 모습일까?

올해 초 `겨우` 1천200만 광년 떨어진 SN 2014J 초신성 폭발이 관측돼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초신성은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을 일으키는 현상을 가리킨다. 천체 간의 거리를 재기 위한 단위가 바로 빛이 이동하는 거리일 정도로 무한한 거대한 우주 공간 너머는 `스타 트렉`에 심취한 SF 팬이나 상아탑 속 학자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 초신성이 인류 존재의 열쇠이기도 하다.46억 년 전 초신성 폭발 이후 하나의 별에서 유래한 인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타원 은하의 별 탄생의 비밀을 밝혀 낸 세계적인 천문학자 이석영 교수가 들려주는 일상 속 우주의 비밀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나 본다. 이번에 펴낸 `초신성의 후예: 나는 천문학자입니다`(사이언스북스)는 2006년 `네이처`에 실린 타원 은하 별 생성 과정을 밝힌 연구로 전 세계 천문학계를 놀라게 한 젊은 천문학자 이석영 교수의 고백록이다. 이 책에는 우주 탄생의 신비와 밤하늘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과 유학 과정, 미국 항공 우주국(NASA)과 옥스퍼드 대학교에서의 경험담을 비롯해 일상 속 깨달음과 기쁨이 모두 담겨 있다.우주가 어떻게 시작이 됐을까? 어떻게 뜨거운 초기 우주에서 물질의 근원이 만들어졌을까? 식어 가는 우주 속에서 어떻게 은하와 별들이 태어났을까? 별의 최후는 어떤 모습일까? 이 모든 것들의 순환 과정을 알 수 있을까? 저자는 끊임없는 질문과 상상을 통해 과학과 이성의 눈으로 우주를 검증해 나간다.초신성 폭발 후 블랙홀이나 중성자별 안에 갇히지 않은 대부분의 물질은 우주 공간으로 환원된다. 만일 초신성이 자기가 만든 귀한 원소들을 우주에 나눠 주지 않는다면 젊은 별은 초기 우주가 만든 수소와 헬륨 등 극히 단순한 원소 외에는 갖지 못한 채 태어날 것이다. 지구를 이루고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들도 마찬가지다. 산소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대부분 46억 년 전 초신성 폭발과 함께 생을 마감한 이름 모를 어느 거대한 별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인류는 모두 한 별의 흔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13

`아시아` 눈으로 방콕 조명하다

한영 대역으로 발행되는 아시아 전문 문예계간지 `아시아(ASIA)`의 여름호(통권 제33호)는 방콕을 찾았다. 창간호부터 지속적으로 아시아 지역의 문학과 문화, 쟁점과 이슈를 조명해 온 `아시아`는 지난 2012년 봄호(통권 제24호)부터`스토리텔링 아시아`라는 부제를 달고 아시아 각국의 도시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루고 있다.현재 방콕은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을 안고 있는 도시 중의 하나다. 5월, 방콕에는 계엄령이 선포됐고, 잉랏 친나왓 총리 퇴진과 총선 반대 시위로 타이 정국은 불안하다. 일명 옐로우 셔츠와 레드 셔츠의 충돌로 상징되는, 공존 불가한 두 패러다임 사이의 갈등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명쾌하게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타이 내부인의 시선으로도 마찬가지다.그럼에도 타이 현지에서 여러 작가들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아시아(ASIA)`의 여름호는 타이를 대표하는 작가 찻 껍찟띠의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풍자소설을, 칼럼니스트 묵콤 웽떼즈의 타이 정세를 이해하는데 선명한 길잡이 구실을 해줄 에세이 등을 싣고 있다. 그 밖에도 한국 단편문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오정희 소설가의 신작 수필, 오랜만에 만나보는 시인 이성복과 김근의 신작 시도 눈에 띈다.`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를 보자`는 `아시아`의 모토로 방콕을 조명한 `아시아(ASIA)` 여름호를 만나보자.방콕 현지 컬럼니스트 묵콤 웡떼즈의 `방콕 신드롬, 그 병적인 증상들`은 타이의 정세를 이해하는데 선명한 길잡이 구실을 하는 글이다.타이 문학의 흐름을 간단하게 짚어볼 수 있는 순서도 마련했다.타이 대표 작가 찻 껍찟띠의 `발로 하는 얼굴마사지`는 타이의 정치 현실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풍자소설이다. 오물 정수처리장 부정부패에 연루돼 위기에 처한 정부 차관이 발로 얼굴을 마사지하는 기이한 마사지사를 찾아가 환상적인 체험을 하고 다른 사람이 돼 돌아온다는 이야기다.소설가 김남일의 `수톤과 마노라`는 타이의 설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한국외대 김영애 명예교수의 `타이 근현대문학의 흐름`은 타이 문학의 현황을 깔끔하게 개괄했다.소설가 박상은 배낭여행족들의 메카인 방콕 카오산 로드에서 지낸 경험을 여행기에 담아 방콕의 기묘하고 환상적인 일면을 감각하게 해준다. 방콕에 거주하는 작가이자 방송인인 깜 파까의 산문 `방콕, 날 좀 사랑해주겠니?`는 방콕의 속살을 짚어내는 글이다. 방콕의 무질서와 더러운 위생에도 불구하고 남루한 시민들은 왜 항상 웃고 있는지가 의문스러웠던 필자는 방콕 시민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결국 해답을 얻는다.문화 활동가 뺏뽄 푸통은 `행간에 숨겨진 뜻: 타이에 펼쳐진 한국문학의 풍경`에서 타이에 소개된 한국문학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주로 번역돼 출간된 장르는 무엇인지, 베스트셀러가 된 서적은 어떤 것이 있는지 등 지금까지의 성과를 꼼꼼히 정리하며 그녀는 앞으로 한국문학이 해외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갈 때 발생할 장애물들을 예견한다.`ASIA의 작가`에서는 오정희 작가를 초대했다. 한국 여성문학의 정점에 서 있는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지, 어떻게 글을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진정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일상을 뚫고 찾아온 자연의 재난으로부터 시작되는 글은 유년기 전후사회의 불안과 결핍, 상실감에서 형성된 작가의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고백과 그 고투에서 놓지 않은 작가적 윤리성에 대한 사유로 매우 숨차다.섬세하고 평이한 언어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노래하는 시인이라 평가받는 이성복은 `슬픔에 대하여` `오월에 있었던 일`두 편의 신작시를 공개했다. 김근 시인의`형`연작시 두 편은 형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과 회의가 곡진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

2014-06-13

폐허된 서울서 펼치는 한 소년의 고투

지난 2001년 등단 이후 독특한 상상력과 탄탄한 문장으로 폭력적인 현실 속 인간 존재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해온 작가 손홍규사진의 새 장편소설 `서울`(창비)이 출간됐다. 폐허가 된 서울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소년의 목숨을 건 고투가 시종 읽는 이를 압도하는 가운데, 긴장감 넘치는 문체와 환상적인 분위기, 탄탄한 이야기 구조에 실린 묵직한 문학적 문제의식이 긴 여운을 남긴다. 종말과 인간, 기억과 관계에 대한 집요한 작가적 탐구가 응축된 한편의 아름다운 서사시라 할 만한 작품이다.알 수 없는 이유로 폐허가 되어버린 서울에서 동생과 함께 살아남은 소년이 있다. 소설은 서울을 폐허로 만든 재앙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건물들은 무너졌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즐비하며, 정체 모를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어딘가에서는 비명과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소설은 다만 이 폐허의 풍경과 그 속에 던져진 소년의 행동을, 짤막한 대화와 소년의 황량한 내면을 건조한 문장으로 묘사해갈 뿐이다.“세계가 끝났는데 여전히 인간과 짐승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다. 서로를 사랑할 수도 없었고 서로를 용납할 수도 없었다. 증오만은 처음처럼 순결했다. 세계가 끝난 뒤에도 증오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건 곧 우주가 증오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인지도 몰랐다.”(129쪽)그러나 이 `끝나버린 세계`의 주인은 소년이, 인간이 아니라 괴물들, “한때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결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러나 사람과 너무도 흡사하기에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부르기에도 어색한 저 새로운 종족들”(197쪽)이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들도, 그리고 소년의 동생도 그와 같은 존재임을 소설은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소년은 끝까지 동생과 함께하고자 목숨을 내던진다. 동생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다시 죽음을 결심하고 서울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간다.무너진 서울 곳곳의 거리와 소년의 내면 풍경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소설은 낯선 만큼 강렬하고, 한편으로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소설이 종말에 대한 익숙한 관념 대신 독특한 은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숱한 예민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기 때문이다. 소설은 묻는다. 종말 이후는 이전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종말 이전에도 `서울`에 속해 있지 않았던 이에게, 종말 이후의 서울은 무엇일 것인가. 종말 이전과 이후에 `우리`는, `타자`는 서로 무엇이 되는가. 소년은 매일같이 꿈에서 새로 태어나는 서울을 보고 있었다.“빌딩 앞에 선 그들은 도시를 바라보았다. 소년이 꿈에서 보았던 도시였다. 소년의 마음속에서 폐허로 남아 소년의 꿈에서 날마다 새로 태어나던 도시가 눈을 떴다. 예전의 서울로 이루어졌으나 예전의 서울은 아니면서 또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서울이었다.” (278~79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6-13

성공하고 행복해지고도 싶다면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사람을 가장 많이 인터뷰한 의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가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은 현대인의 삶을 진단한 `윤대현의 마음 성공`(민음사)이 출간됐다.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인해 뇌가 피로에 빠지는 소진 증후군을 소개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한 책이다. MBC 표준 FM `윤대현의 마음 연구소`를 통해 피로와 불안에 지친 사람들에게 `마음 챙기는 법`을 소개하고 있는 윤대현 교수는 이 책에서 열심히 달리기만 하느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번아웃`된 감성 에너지를 충전하는 마음 관리 전략을 알려 준다.최근 실리콘밸리에서는 Wisdom 2.0 컨퍼런스, 구글의 내면 검색(SIY) 프로그램 등 마음 챙김(mindfulness)과 명상, 연민과 수용의 지혜를 삶과 비즈니스에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주목받고 있다. `윤대현의 마음 성공`은 최신 정신의학 이론인 연민집중치료, 수용전념치료에 근거해 생존과 성취, 경쟁 위주의 삶을 가치와 성숙, 연민의 프레임으로 보완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기반을 둔 `마음이 행복한 성공`을 추구할 것을 제안한다.오후 6시 퇴근을 `칼퇴`라고 부른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습관이 몸에 붙은 듯 자연스럽다.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진다. 하나라도 실패할까 봐 두렵고, 하나를 성공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혀 온다.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직장인의 모습이다.한국인의 삶의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일에 쏠려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다. 손에 꼽을 정도로 근무 시간이 긴 나라인데도 생산성은 하위권을 맴돈다.(OECD 조사 결과 한국의 시간당 노동 생산성은 28.86달러로 34개국 중 29위에 불과하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이 폭발적인 공감과 호응을 불러일으킬 만큼 사회 전체가 과도한 업무에 지쳐 있다.우리는 왜 한계에 다다르도록 열심히 일할까? 쉬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엄격히 관리하고 있는 힘껏 능력을 발휘해야 성공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행복한지 물으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근본적으로,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면 행복해질까?과로하면 심장에 무리가 가듯 뇌도 과부하가 걸리면 고장이 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감성이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이성이 시키는 대로만 자신을 다그치면 소진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빠지고 만다. 감성의 뇌에 쌓인 피로를 제때 풀어 주지 않으면 감성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돼 버리는 것이다. 특히 생존과 성공을 위해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진 증후군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스트레스성 뇌 피로증이라고도 하는 소진 증후군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좀처럼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짜증이 늘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한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고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내 마음이 고달프니 남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도 없다. 사람을 만나기가 싫고, 주말에도 집에 콕 틀어박혀 있기 일쑤다. 무서운 것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내가 나를 근사하다고 느끼는 마음, 즉 자존감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소진 증후군의 핵심 증상은 삶의 의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던 삶이 가치 없게 느껴지고, 심하게는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까지 들게 한다.정신신체의학, 스트레스의학 전문가인 윤대현 교수는 최신 신경과학과 정신의학에 근거해 소진 증후군에 빠진 현대인의 삶을 조목조목 설명해 준다. 직장 회식부터 `시월드`에 이르는 일상 속의 친근한 사례들이 소진 증후군이란 무엇인지, 왜 소진 증후군에 빠지게 되는지 이해를 돕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30

잔잔한 통찰로 엮은 철학 고전들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철학의 명저`(교유서가)는 헤겔의 저작에 대한 획기적인 번역으로 이름높은 일본의 철학자 하세가와 히로시가 쓴 독서에세이다. 안정된 사고의 리듬, 격조 있는 문장, 잔잔한 통찰로 엮은 철학고전 읽기의 좋은 본보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15권의 고전을 인간, 사색, 사회, 신앙, 아름다움의 5개 카테고리로 구분해 읽어나가면서 느낀 바를 기존 번역본을 인용하며 소개한다. 이 책에서 다룬 고전들은 희랍 고전에서 20세기 프랑스 철학서는 물론이고 사회과학서나 논어, 문학작품 등에 걸쳐 있다.하나같이 읽어서 재미있고 그 느낌을 글로 써서 더욱 즐거운 책들이다. 지은이는 이들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도 교과서적인 소개보다는 비판적인 태도로 자기 나름의 사색을 심화시키는 소재로 활용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지은이와 함께 생각하고 지은이가 던지는 질문에 독자 나름의 답을 떠올려보는 기분이 들고, 그만큼 즐거운 사색의 시간이 된다.셰익스피어 `리어 왕`, 데카르트 `방법서설`, 플라톤 `향연`, 공자 `논어`, 루소 `사회계약론`,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도스토옙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아우구스티누스`고백`, 파스칼 `팡세`, 보들레르 `악의 꽃`, 메를로퐁티 `눈과 정신` 등이 지은이가 엄선한 고전들이다.△셰익스피어 `리어 왕`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비극이든 희극이든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 사람들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감회를 남긴다. 사회 속에서 함께 살며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에게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근대 유럽의 기본적 인간관이라 한다면, 셰익스피어의 극은 근대 여명기에 근대적 인간관의 풍부함을 실물로 입증한 것이라 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리어 왕`은 하나의 물결이 또다른 물결을 일으키고, 끔찍한 고통이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지는 인간세의 변화무쌍함을 다룬 비극이다. 줄거리가 전개되는 면만 보더라도 이만큼 빈틈없이 꽉 찬 내용을 담은 작품도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 존재는 브리튼 왕국을 지배하는 늙은 왕 리어. 입에 발린 소리로 알랑거리는 자들에게 둘러싸인 권력자가 주변의 상황을 냉정하게 꿰뚫어보지 못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인데, 다만 리어의 경우는 보통의 범위를 넘어서며 비현실적인 감마저 풍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우여곡절 끝에 애정 넘치는 리어와 주변 사람들이 나누는 마음의 교류에서는 광기마저 감싸안는 두터운 정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지은이 하세가와는 인간이 본래 지닌 마음의 풍요로움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무언가가 거기에는 있다면서, `보통사람들의 별로 색다를 것 없는 생활 속에 살아갈 만한 가치가 숨어 있다`고 보는 셰익스피어의 인생관에 주목한다.△데카르트 `방법서설`이 책에서 지은이 하세가와는 `방법서설`이야말로 사람에게 살아갈 용기와 생각할 용기를 주는 상쾌한 책이라고 잘라 말한다. 데카르트는 넓고 깊게 학문에 익숙했고, 다양한 사람과 사겼으며, 인간사회를 가까이에서 또 멀리에서 관찰했고, 자신의 생각이 정말로 옳은지 계속해서 물었던 철학자다. 그의 생각의 토대는 인간을 관찰해서 얻은, “양식(良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는 데 있었다. 데카르트는 양식·이성·판단력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든 세상에 대해서든 교만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 그는 양식과 이성과 판단력에서 보통사람들보다 뛰어나지도 열등하지도 않은 사람으로서, 보통사람들과 함께 지적으로 살기를 바랐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30

소년이 갇힌 도서관에 무슨 일이?

일본의 세계적인 인기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이상한 도서관`(문학사상사)이 출간됐다.지난 1983년 발표된 단편 `도서관 기담`을 다시 써 재출간한 `이상한 도서관`은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쉬크가 일러스트를 더해 책이 나왔다. 마치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이 단편에 카트 멘쉬크의 감각적인 일러스트가 더해져 글과 그림을 함께 감상하는 또 다른 즐거움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도서관은 평소보다 훨씬 더 기괴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문득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세금 징수법`이 궁금해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느닷없이 지하 감옥에 갇혀버린 소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하루키의 초기작에 등장했다 사라진 `양사나이`가 재미를 더한다. 원고 양은 적지만 작가의 특징은 고스란히 담겨있다.도서관에서 만난 이상한 노인에게 안내된 지하 열람실. 계단을 내려온 깊은 곳에서 양 사나이가 나타난다. 빌린 책을 모두 외워야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노인의 강압적인 말에 소년은 도서관에 머물게 된다.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순순히 감옥에 들어가 발에 쇠사슬이 감긴 소년.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에게 걱정끼치지 않도록 감옥을 벗어나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 소년의 주위에서는 중요했던 많은 것이 사라져간다.과연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세금 징수법`을 조사하러 간 소년은 도서관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끝까지 읽어도 이야기가 계속될 것 같은 매력 가득한 무라카미 월드를 느낄 수 있다.`이상한 도서관`은 단편 하나가 새롭게 태어난 소설이어서 원고 양은 적지만 하루키 문학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하루키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이 다른 것으로 유명한데 하루키 또한 그동안 여러 작품의 작가의 말에서 여러 번 읽기를 권했다.이 작품 역시 처음 읽을 때와 두 번, 세 번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르다. 하루키의 단편소설에 장편 못지않은 매력이 숨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30

우리 삶, 어떤 자세로 맞아야 하나

2013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유순하의 `바보아재`가 연작소설 `바보아재`(실천문학사)로 출간됐다. 대상작 `바보아재`는 애초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소설의 첫 번째 작품으로 기획돼 쓰인 작품이며, 이어지는 8편의 단편들은 다양한 죽음을 포착하고 인간의 삶을 여러 각도에서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다.표제작 `바보아재`와 연작소설들은 작가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순간부터 줄곧 구상해 30여년간 죽음이라는 화두를 정리한 작품이다. 그래서 부제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소설`이라 했다. 작가가 오랫동안 이렇게 죽음에 대해 천착한다는 것은 기실 삶의 열망에 대한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순하의 `바보아재`는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가 삶을 어떤 의미와 자세로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이번 연작소설에서 작가가 바라본 죽음의 풍경과 그 속에 얽혀 있는 삶의 갈등들은 어떤 양상으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똥 싸는 시어머니`에서는 하루하루 시어머니의 죽음을 고대하며 사는 며느리의 시선이 그려지고 있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노쇠로 인해 대소변은 물론 끼니까지 떠먹여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 뒷바라지를 모두 감내해야만 하는 며느리의 위선적 모습과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시어머니의 팽팽한 대립구도가 이 소설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화장하는 며느리의 마지막 장면은 죽음을 준비하는 자와 기다렸던 자의 전범을 보여주는 백미라고 할 수 있다.또한 `태식이 엄마`에서는 젊을 때 유별난 색탐으로 인해 자식들과 멀어진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는 죽음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 찬연한 생명감을 탐닉한 한 인간에 대한 모습을 보여주며, 그러한 집착이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하고 있는지 여실히 그려내고 있다. `공범`에서는 죽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죽인 자의 내면적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오랜만에 온 가족이 여름휴가를 떠나는 날, 비가 온 탓에 술 취한 행인을 차로 쳐 죽이게 된다. 당황한 주인공은 뺑소니를 치게 되고, 여러 날 죄책감과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된다. 결국, 자수를 통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심연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로 구성됐다. 작품이 전개되며 그려지는 주인공의 긴장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23

우린 왜 무엇을 들려주고 싶어할까?

지난 2003년 첫 소설집 `토끼를 기르기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래 출간하는 책마다 기이하고 극단적인 상상력과 예리한 유머로 독자를 사로잡아온 소설가 박형서가 네번째 소설집 `끄라비`(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표제작을 포함해 7편의 작품이 실렸다.박형서가 안고 있는 `뻔뻔한 허풍` `발칙한 상상` 등의 수식어가 다시 한 번 증명된다. 표제작 `끄라비`부터가 그렇다. 작가의 상상을 거친 태국의 휴양지 `끄라비`는 책에서 한 여행객을 흠모하는 질투의 화신이 된다.`끄라비`는 흠모하는 여행객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기상을 악화시키는 등 투정을 부린다. 더 한 패악은 여행객이 애인을 데려왔을 때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작가가 사랑과 애착을 빙자한 폭력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다.작가의 허풍과 상상은 수록작들에서 확장한다. 360억년을 주기로 붕괴와 대폭발을 반복하고 있는 우주에서 다음 우주의 신을 육성한다는 이야기 `티마이오스`에서는 우주로도 뻗는다.그렇다고 위트와 상상만이 박형서를 말하지는 않는다. 박항서는 파이(π)값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수렴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수학자를 내세운 `Q.E.D.`를 통해 소설가로서의 자세를 말한다. `이상이 내가 증명하려는 내용이었다`라는 의미로 수학자들이 증명을 마칠 때 찍는 약호 `Q.E.D.`를 영원히 찍지 못하는 수학자 이면에 시도로서 증명되는 작가가 있다.제3세계 희귀 언어로 쓴 소설을 표절한 작가를 주인공을 내세운 `아르판`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다. 소설 속 표절 작가는 희귀 언어로 쓴 소설은 읽어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설이 아니고 이를 가져와 많은 독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언어와 문화로 각색한 뒤에야 비로소 소설다운 소설이 된다는 발칙한 주장을 펼친다.박형서는 `Q.E.D.`가 애초 목적이 아닌 듯 끊임없이 소설을 파헤치고 있다. 지침서를 닮은 `논쟁의 기술`, 논문의 형식을 빌린 작품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등이 실린 2006년 두 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에서부터 본격화된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다.“또다시 싸움을 걸었다. 단방에 맥없이 코피를 뿜으며 나가떨어지기에 어찌 된 일인가 봤더니 그게 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아이는 3학년 최강 싸움꾼이었고, 나보다 심한 청각장애가 있었으며, 게다가 여자애라나 뭐라나.”(`어떤 고요` 252쪽)“남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건 마약과 같은 작업이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용되는지 따위는 관심 밖이다. 어쩌면 그건 성욕과 다를 바 없을지 모른다. 번식이 육신의 DNA를 보존하려는 욕망의 소산이라면, 예술은 정신의 DNA를 남기려는 욕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끄라비`에 수록된 단편 `아르판`에 나오는 대목이다. 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해석이 그럴듯하다. 아르판은 화자가 동남아시아 오지의 `와카`라는 곳에서 머물며 발견한 이야기꾼이다. 아르판은 “세상의 마지막 전신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산등성이 분지에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써 내려간” 사람인데, 작가가 그곳에서 아르판의 이야기를 듣고 문명세계로 돌아와 자신의 소설에 써먹는다.제3세계 작가들을 초청한다는 명분으로 서울까지 데려온 아르판은 정작 자신의 서사가 차용된 나의 작품만 인기를 끄는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할 따름이다. 그에게 사실을 고백했는데 아르판은 나를 “내게서 생명을 받아간 자, 내게서 모든 걸 물려받은 사람”이라고 칭하면서 “제 정신의 DNA가 어떤 식으로 세상에 간섭했는지 확인한 뒤 자랑스럽게 허리를 펴 퇴장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돌아간다. 이야기꾼의 본질과 그 욕망의 바탕을 우화 형식으로 전개한 박형서의 재치와 재능이 돋보인다.▲ 소설가 박형서이런 독특한 서사 스타일은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타 단편들에도 여일하게 적용된다. 마지막에 실린 자전소설 `어떤 고요`에는 문장마다 위트, 혹은 비애가 묻었다. 유아기에 열병을 앓고 일시적으로 청력을 상실한 사건에서 시작하는 소설에는 그가 `글을 쓰겠다`고 선언적으로 마음먹은 계기, 문학상을 받은 후의 고민 등이 담겼다.`어떤 고요` 속 `어림잡아 5년 이내에` 완전히 듣지 못하게 될 거라는 전문의의 진단 앞에서 “귀도 안 좋고 해서 20년쯤으로 들었다”는 작가의 농담은 슬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23

만연한 중국사회 병폐·부조리 비판

중국 청년 세대 `바링허우`의 기수로, 이들의 분노와 비애를 대변해온 작가 한한의 `나의 이상한 나라, 중국`(문학동네)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왔다. 17세 나이에 내놓은 데뷔작 `삼중문(三重門)`으로 일찍이 밀리언셀러 소설가 반열에 올랐던 한한은 젊은 세대에 드리운 중국 사회의 그늘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들로 지난 십수년간 당대 중국 청년 세대의 분노와 비애를 대변해왔다. 2000년대 말부터는 문학의 테두리를 넘어 사회 전반에 대한 비판적 견해들을 온라인 공간에서 날카롭게 표출하며 수억명에 달하는 중국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중국 최고의 청년 작가가 문학과는 다른 문장, 다른 호흡으로 써내려간 사회비평은 과연 어떤 걸까? 활어처럼 팔딱거리는 재기발랄한 그의 문장들은 일단 폭소 또는 실소를 자아낸다. 하지만 그 문장들 속에 도사린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은 이내 읽는 이의 심중을 후벼판다. 중국 사회를 `찜쪄먹는`불한당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고, 부당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는 중국인에 대한 애잔함이 샘솟는다. 단합이란 명분으로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정부, 오만함에 찌들어 인민 대중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사회지도층, 권위주의와 허위의식에 물든 권력집단, 비뚤어진 중화주의의 망상에 젖어 외부세계와 자꾸만 충돌하는 중국인 등 중국 사회에 만연한 온갖 병폐와 부조리를 가감 없이 비판한다.중국 청년 세대의 다른 이름은 `바링허우(80後)`다. 1980년대에 태어나 현재 20~30대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은 중국의 오늘과 내일을 짊어지고 나아갈 중추적인 세대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들이 당면한 현실은`중추`에게 주어져야 할 현실과는 전혀 다르다.이 책의 지은이이자 바링허우의 대변인인 한한은 이들의 현실을 이렇게 정리한다. “기계적인 노동, 희망 없는 미래, 형편없는 보수.” 반도는 물론 대륙의 젊은이들까지 집어삼킨 이 정체 모를 공포의 기운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한한은 첫 글 `청춘`에서 중국 젊은 세대에 닥친 엄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을 시작으로, 온 중국 사회를 종횡무진하는 비판의 포문을 연다.책의 1부는 한한이 젊은 세대로서 중국 사회를 살아가면서 목격한 여러 부조리를, 재치 있는 조롱과 풍자의 형식을 빌려 고발하는 글들을 담고 있다.2부에서는 한한이 작가이자 전방위 문화인으로서 바라본 중국 문화계의 문제들이 중점적으로 언급된다. 기성 문단과는 다른 문체와 접근법으로 자신의 문학관을 구축한 한한은 먼저 중국 문단을 둘러싼 엄숙주의에 일침을 가한다. 평소 모든 권위적인 것들에 경계심을 드러내온 만큼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3부에서는 최근 중국이 세계적 규모의 행사들을 치르며 보인 비이성적인 모습들을 중심으로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불합리한 면모들을 지적한다.한편 이 책 마지막인 4부에서는 중국의 시사주간지 `난두저우칸(南都週刊)`과의 인터뷰 내용이 소개된다.한한은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들을 멈추지 않아 감시와 검열의 대상이 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또 당대 중국의 청년 문화를 이끄는 `바링허우의 기수`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삶과 생각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토로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23

미국 기부문화 명암 조명하다

세계적인 석학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기 소르망(70)의 `세상을 바꾸는 착한 돈(Le coeur americain)`(문학세계사)이 번역, 출간됐다.이 책은 기 소르망이 지난 2012년 6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1년 동안 미국 현지에 머무르면서 미국의 기부 문화에 대해 샅샅이 취재한 기록을 담고 있다.그는 미국 기부문화의 기원과 현주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실상과 허상을 분석해 미국 기부 문화의 명암을 심층적으로 조명했다.그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기부문화의 진실뿐만 아니라 빈부격차나 공교육의 부실 등 미국이 안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들여다보게 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 문제에 대해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게 한다.사람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자본의 탐욕이 불러낸 이번 세월호 참사 등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듯 하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내라”기 소르망은 “미국의 슈퍼리치들은 자신들의 부를 대물림하는 데 집착하기보다는 사회 환원에 더 적극적”이라며 “기부는 미국 문화와 역사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설명했다.그는 또 “미국인들은 후원금이나 자산 기부 등 금품기부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나누는 자원봉사에도 적극적이고 연간 수십억 달러를 기부하는 슈퍼리치들이 있는가 하면 매달 자신의 유무급 휴가를 이용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지정단체에 소액 기부금을 보내는 평범한 이들도 있다”고 소개했다.미국인들이 기부에 적극적인 이유에 대해 기 소르망은 박애적 기부를 통한 슈퍼리치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미국의 정신문화적 전통에 기인한다고 분석한다.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부분인 미국의 갑부들은 성공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행운이 따라준 것에 감사하며 성공한 후에는 자신이 누렸던 그 행운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3섹터`의 기반이 되는 기부기 소르망은 “기부는 받는 사람만큼이나 베푸는 사람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좋은 일 좀 했다고 박물관이나 학교 건물에 이름을 남기는 일부 슈퍼리치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준다는 것만이 아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좋은 일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시간을 베풂으로써 사회적, 인간적, 정신적 혜택을 얻는 것이야말로 기부의 미덕”이라고 설명한다. 기부자든, 자원봉사자든, 기부단체 운영자든, 베푸는 사람들은 자신의 시민정신과 영혼의 고취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또 그는 “기부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이 못 다한 일을 해결함으로써 아름다운 사회를 완성해주는 `제3섹터`의 기반”이라고 했다.국가나 시장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보를 추구하면서 시민정신과 유대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한국 젊은이에 기부 통한 새 길 제시기 소르망은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헌정하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사회학자 기 소르망“한국 사회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는 정부보다 사회단체나 재단들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수많은 기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통해 온 사회가 같이 책임을 나누어지고, 그렇게 나누는 만큼 그 무게는 가벼워질 것이다. 오늘을 사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삶의 의미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나눔 실천, 박애적 기부 활동이야말로 미래를 꿈꾸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는다.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에게 행복을 선사할 수 있다는 점이 기부가 가진 가장 커다란 덕목이기 때문이다. 나눔과 기부 문화는 자원봉사와 함께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중요한 척도이다. 시민들의 자발적 행위를 통한 계층 간 통합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나눔과 기부 문화를 통해 한 사회 안의 건강함을 엿볼 수 있다. 기부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92%)은 그렇지 않은 사람(76%)보다 자신의 건강과 삶에 더욱 만족한다는 설문조사가 있다. 어려운 처지의 누군가를 작게나마 도움으로써 뿌듯함을 얻는 일은 분명 자신을 따뜻하게 해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16

유적과 유물로 본 日 천년고도 교토

`문화유산 답사 붐`을 일으킨 유홍준(65) 명지대 석좌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의 세 번째 책 `교토의 역사`를 내놨다. 유 교수는 지난해 시리즈 출간 20주년을 맞아 일본편 1·2권인 규슈편과 아스카·나라편을 펴냈다.최근 펴낸 `일본편 3권 교토의 역사`(창비)는 천년 고도 교토의 진면목을 살피기 위해 헤이안시대 이전부터 가마쿠라시대까지, 교토의 역사를 씨줄로 삼아 유물과 유적을 선보이는 한층 진화한 `답사기`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한반도 도래인의 문화를 토대로 발전시켜 오늘날 일본의 `국풍문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현장감 넘치는 설명과 이미지로 그려낸다.교토의 공간을 낙중(中)과 낙외(外)로 나누고 그 위에 일본의 역사를 따라가는 동선까지 고려해 설계한, 유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교토 답사의 미적분 풀이`인 이 책의 추천 코스를 따라가다보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교토 답사의 새로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인간과 예술과 역사가 어우러진 `답사기` 본래의 읽는 재미까지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경주를 빼놓고 한국의 문화를 논할 수 없듯 교토를 빼고 일본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교토는 일본 역사에서 1천년간 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문화의 진수가 다 모여 있고, 일본미의 꽃이 여기에서 활짝 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위상은 숫자로도 증명된다. 교토부(府) 전체에 사찰이 3천30곳, 신사는 1천770곳이 넘는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만 해도 사찰이 13곳, 신사가 3곳, 성이 1곳으로 모두 17곳이나 된다. 이를 보기 위해 해마다 국내외에서 800만명이 모여들어 교토는 세계적인 역사관광 도시가 됐다.유 교수가 교토를 찾은 이유는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찍이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가 교토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추적함으로써 일본과 한국의 문화적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집필 의도를 책 곳곳에서 드러내 보여준다. 그 어느 곳보다 교토는 한반도 도래인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곳이다.황폐한 교토에 댐을 세우고 수로를 만들어 비옥한 땅으로 일군 하타씨(秦氏)의 숨은 공로가 없었다면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 천도는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일본 국보 1호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있는 광륭사에는 신라계 도래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날리는 원효와 의상의 실물과 가장 가까운 초상화가 인화사에 보관돼 있다.또 신안 해저 유물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복사는 수많은 보물을 실은 `신안선`이 목적지로 삼은 당대의 대찰(大刹)이었다.이처럼 `답사기 교토편`은 교토를 단순히 관광지가 아닌 우리의 역사가 함께 어우러지는 친숙한 곳으로 바꿔놓는다.유홍준 교수의 교토 답사기는 한반도 도래인이 남긴 자취를 찾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교토 땅을 문명의 터전으로 일군 도래인의 노력과 뒤이은 당나라 문화 배우기(당풍·唐風), 헤이안시대 중엽(후지와라시대) 이래 스스로의 힘으로 문화를 일궈내려는 시도(국풍·國風) 등을 거치며 교토가 일본문화의 수도로 확고하게 자리잡는 과정을 교토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소상히 알려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16

美 노예제부터 현대 인종차별까지 다뤄

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살아 있는 미국문학의 대모 토니 모리슨의 대표작 `빌러비드`(문학동네)가 출간됐다. 1987년 출간 당시 퓰리처상, 미국도서상, 로버트 F. 케네디 상 등 미국소설에 주어지는 거의 모든 명예를 얻은 `빌러비드`는 21세기에 들어서며 20세기 미국문학의 정전으로 자리매김했다. 2006년 뉴욕 타임스에서 작가, 비평가, 편집자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1980년 이후 최고의 미국소설` 1위에 선정됐고, 2008년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 조사한 `하버드대 학생이 가장 많이 구입한 책`에서는 2위에 꼽혔다.미국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흑인문제를 노예제에서부터 현대의 인종차별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다룬 토니 모리슨은 `빌러비드`에서는 특히`여성 노예`에 초점을 맞췄다. 노예라는 운명의 대물림을 끊기 위해 딸을 죽인 흑인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흑인들의 참혹한 역사를 재조명하는 한편, 박탈당한 모성애를 되찾은 도망노예의 과격하고 뒤틀린 사랑과 그로 인한 자기 파괴를 이야기한다.시대적으로도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남북전쟁 직후의 재건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노예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그들은 여성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성적 억압과 모성애의 박탈까지 삼중의 폭력을 겪어야 했다. 결혼은 불가능했고, 자식은 낳아야 했지만 부모가 될 수는 없었다. 제목인 `빌러비드`는 `사랑받은 자`를 뜻하는 말로, 주인공이 죽은 딸의 묘비에 새겨준 글자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사랑받지 못한 흑인 여성들을 애도하는 뜻이 담겨 있다.1856년 1월, 켄터키 주의 한 여성 노예가 임신한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오하이오 강을 건너 신시내티로 도망쳤다. 우여곡절 끝에 친척의 집에 몸을 숨겼지만, 뒤따라온 노예 사냥꾼과 보안관의 추격에 끝내 붙잡힐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식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자기 손으로 죽이겠다고 결심한 후, 두 살배기 딸의 목을 베었다.`빌러비드`의 부분적인 줄거리이기도 한 이 실제 사건은 노예제의 비인간성을 방증하는 사례로 노예제 폐지 운동의 역사에 남은 실화다. 토니 모리슨은 이를 `빌러비드`의 모티프로 차용하면서, 어머니가 영아를 살해하게까지 한 노예 경험을 독자의 피부에 와 닿게 묘사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16

젊은작가상 수상자들 개성·색깔은?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이 출간됐다.한국 문단의 최전선에서 활약중인 젊은 작가들을 격려하고 독자들에게는 열정과 패기로 충만한 젊은 소설의 숨결을 확인하게 하고자 문학동네가 지난 2010년부터 신설, 운영해온 젊은작가상은 그사이 많은 독자들과 작가들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왔다.2014년 제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가는 황정은 조해진 윤이형 최은미 기준영 손보미 최은영 이다.빽빽한 서사보다는 특유의 리듬감 있는 대사와 여운이 느껴지는 문장으로 `황정은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는 황정은의 `상류엔 맹금류`가 “`젊은 작가의`라는 제한적 수식조차 필요 없는, 2013년 최고의 단편소설”(신형철, 문학평론가)이란 찬사를 받으며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라는 믿음을 스노볼, 카메라, 빛의 이미지 등을 통해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조해진의 `빛의 호위`, 성장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받는 지금,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쿤`이라는 회백색 덩어리를 내세워 묻고 있는 윤이형의 `쿤의 여행`, 사타구니 가려움증에 걸린 한 남성의 가질 수 없는 욕망을 끈적하고 집요하게 파헤친 최은미의 `창 너머 겨울`, 우연히 옛사랑을 만나 일어나는 짧은 해프닝을 담담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기준영의 `이상한 정열`, 가장 친숙하며 가까운 존재인 가족들 사이의 의심, 불안, 거짓말을 세련되고 정교하게 표현한 손보미의 `산책`, 언어와 국적이 다른 두 소녀가 만나 성장의 문턱들을 통과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 이상 일곱 편이 올해 젊은작가상 수상작이다.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상류엔 맹금류`의 작가 황정은은 한국일보문학상(2010) 현대문학상(2013, 차후 수상 반려) 등을 수상하며 지금 한국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로, 올해로 세번째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게 됐으며, 지난해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손보미 역시 올해로 세번째 젊은작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손보미는 2012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가이기도 하다.)두 명의 3회 수상작가를 제외하면 나머지 다섯 명의 작가들은 이 상에 처음으로 얼굴을 선보였다. 2004년 데뷔해 올해로 10년 차 마지막 심사 대상자이기도 한 조해진부터, 지난해 겨울, 작가세계신인상 등단작으로 수상하게 된 가장 젊은 최은영까지, 그 이름들은 신선하고도 흥미롭다. 그리고 감각적인 문체의 기준영과 개성 강한 문제의식을 보여준 윤이형 최은미, 우리는 이 젊은 작가들의 이름을 다시 한번 주목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9

어른돼 읽어보는 유년시절 동화

건축가 김진애, 오영욱, 서울도서관장 이용훈, 라디오 피디 정혜윤, 경제학자 우석훈, 아나운서 고민정, 소설가 황경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17인의 탐서가들이 동화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한 자리에 모였다. `플랜더스의 개`, `비밀의 정원`, `어린 왕자`, `인어 공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서가 깊은 곳에서 `내 인생의 동화`라 할 작품들을 꺼내온 저자들은 오랜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화와 함께 성장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어렸던 나와 다시금 마주하면서, 그때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감동과 교훈을 발견하는 과정을 글에 담았다.유년 시절에 읽었던 동화를 어른이 되어 다시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얻게 될까? 동화를 읽으며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로 `시간 여행`을 다녀온 저자들은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반비 펴냄)에서 결코 `추억의 복원`만이 두 번째 독서의 유일한 매력이 아니라고 말한다.명작 동화들은 어른에게도,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삶의 의미를 되새겨주며, 고단한 시간을 감내하는 용기를 북돋워준다. 특히 동화는 세상에서 가장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그런 가르침을 전해주어, 감동의 깊이를 더한다. 아련한 시간 여행 끝에 저자들이 발견한 것은 어른의 영혼도 또 한 번 성장시키는, 위대한 고전의 힘이다.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동화의 힘은 더욱 빛난다. 동화는 우리를 그때 그 시절로 다시 데려가,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와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며, 근본적인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우리는 모두 동화를 먹고 자란다. 동화는 그 자체로 우리의 성장기이다. 그래서 동화를 다시 읽는 것은 그 동화에 새겨진 성장의 발자취를 다시금 되짚어 추억하는 일과 같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저술가, 독서가들이 어린 시절에 읽었던 각별한 동화들을 다시 읽으며, 어떻게 동화와 함께 성숙했고, 세상의 진리를 깨쳤으며, 마침내 지금과 같은 모습의 어른이 되었는지 이야기한다.동화 두 번째 읽기를 통해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발견한 것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의 힘이다. 명작 동화들은 그 어느 책보다도 쉽고 아름다운 언어로, 인생과 세상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주고, 지켜가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알려주며, 더 아름답게 나이 들도록 응원해준다.동화는 “나를 퇴행시킴으로써 재무장”(김혜리)시키기도 하고, “막막하고 무기력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이라 할지라도, 손에 쥔 모래알처럼 의미 없이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안소영) 가르쳐주기도 한다.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권오준)는 구절은 여전히 진리이며, 어른에게도 여전히 “기적과 마법의 순간”(김용언)은 필요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9

익숙한 존재들이 그려낸 낯선 초상

익숙한 언어 질서와 의미 체계를 전복해, 늘 곁에 있었으나 깨어나지 않았던 말들의 입체적 이미지를 되살려낸 시집 `시소의 감정`으로 편운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시인 김지녀가 두번째 시집 `양들의 사회학`(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기성의 개념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를 자신의 감각으로 새롭게 매만지는 그만의 생동감이 여전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무수한 존재들을 제 몸에 품었다 낸다. 그들이 들고 난 상흔으로 무너진 얼굴들이 빽빽이 겹친 55편의 시들에서, `양들의 사회학`이라는 기이한 몽타주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 “세계의 자화상”에는 시대의 초상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여기, 바깥을 향해 계속 자라는 목과 이미 알려진 세계를 무위로 돌리는 낯선 코, 허공에 밧줄을 매다는 절박함으로 문장을 되새김질하는 공복과 부정의 힘을 쥔 왼손, 그리고 실패를 반복하는 `더러운 손`과 `낭비`로써 존재의 변이를 촉진하는 `넘치는 발가락`이 있다. 이 시집의 이미지-언어는 어떤 `초상화`, 궁극적으로는 세계의 `자화상`이 될 신체의 부분들을 포착하는 데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냉철하고 정교한 `객관적` 시선이 움켜쥘 수 없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고, 세계의 배후이며, 시간의 기미다.” -함돈균(문학평론가)“우리의 발목쯤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긴”(`B1`). 첫 시의 첫 문장을 실마리 삼아 조심스레 짐작해보면, 이 시집은 `우리` `몸` `이곳` `지금`을 이야기할 것이다. 김지녀의 시를 신(新) 서정이라 이름 붙였던 가장 큰 이유는, 시인 내면의 단일한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익명적 존재들이 화자 역할을 하여 입체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바깥에서 피고 지는 것들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는 생각으로”(`혼잣말의 계절`) “줄지어 내게로 달려 들어온 것들”(`검은 재로 쓴 첫 줄`)을 만신(萬神)처럼 품는다. 시인은 몸을 열어 “낯선 손과 악수”하고, “네번째 온 사람, 여섯번째의 노인이나/아흔두번째의 양”(`검은 재로 쓴 첫 줄`)이 된다.김지녀가 그리는 “세계의 자화상”은 시대의 민낯을 동반한다. “우리 시대의 젊은 감각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고 할 때, `사회학`이 문학적 신체의 단순한 후경이 아닌, 그 신체의 감각을 배태하고 지탱하며 변형시키는 존재 지평이라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야말로 필수적”(함돈균)이기 때문이다.“이름 모를 병이 많고/설명할 수 가늠할 수 없는 아픔이 많”은 이곳엔, “갑자기 잠에 빠져/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오늘의 체조`), “무엇이든 꼭 쥐고 놓지 않는 감자 손가락이 잘린 감자 파업 중인 감자 떠도는 감자 침묵하는 감자”(`더 딱딱한 희망`), 앞선 한 마리를 따라 벼랑인 줄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가는 양 떼(`양들의 사회학`)와 “겁먹은 쥐들”(`회색 눈동자`)이 있다. 세상은, 문제가 있다.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국문학 혹은 정치학 전공자로서, 사람들은 현상을 “해석”하고 “한참을 생각”하며 고민한다. 하지만 폭우처럼 쏟아지는 사회적 병폐의 `의미`를 곱씹는 중에도, “여자아이는 알몸으로 떨”며 한 남자는 빗속에서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다 젖어”간다. 발밑으로 흐르는 빗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것만 속절없이 지켜볼 뿐이다(`붉은, 비가`). 해결책은 마땅치 않다. 그러므로 이미 그어져 있고 “아무도 넘지 않는” “선 위에서 우리는 떨고 대결한다/왼쪽과 오른쪽이 되어 줄다리기를 한다/아무도 불평하지 않아서/선은 공평하다”(`선`). `우리`들이 아무리 단단히 각오를 해도 “빠져나올 수가 없다 땅속의 평화와 안전은/보장받을 수가 없다/거대한 손아귀가 줄기를 잡아당기는 순간/크고 작은 주먹들이 열없이 쏟아져 나온다/올해도 흉작이다”(`더 딱딱한 희망`). 이것이 `우리`의 사회학이다.김지녀의 `사회학`은 암흑에서 길어 올린 깊은 자괴나 부글부글 끓는 울분과는 거리가 멀다. 옅은 자조가 섞인 시인의 진단은, 애써 “안 될 거야, 아마”라고 뇌까리는 지금 젊은 세대들의 낙관도 비관도 아닌 담담한 현실 인식과 얼핏 닮아 있다. 시인에게 이 이상한 세상을 공격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미지를 전복하는▲ 김지녀 시인부비트랩을 설치해두고 줄곧 시선을 유지한 채 온 세상으로 퍼지기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시인은 “희망도 불행도 없는 얼음”처럼 무겁고도 단단한, 차가운 진실을 껴안고는, “다 말하지 못한 진실의 먼지들”(`해동`)이 고여 있는 “가장 사적이고 사색적인” 몸을 열고 세계의 이미지를 품을 준비를 한다. 아직,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들이/켜켜이 쌓여 있다”(`발설`). “무정한 고요와 기만적 평화가 “무너지고 무너지면서”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개미들의 통곡`)하”(함돈균)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5-09

동학 2대 교주 최시형 재조명

작가 조중의(54)씨가 해월 최시형을 조명한 장편역사소설 `망국`(영림카디널)을 출간했다.소설은 동학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1871년 동학 교도들의 영해 동학혁명을 중심으로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을 재평가했다.사실에 허구를 부분적으로 가미한 팩션(faction)이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은 모두 실존했던 인물이다.녹두장군 전봉준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최시형의 사상가이자 조직가로서의 면모를 재조명했다.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최시형의 족적은 의외로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는 개벽의 때를 찾아 고뇌하며 `만민의 나라` 조선의 부활을 꿈꿨던 인물이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인 동학을 다시 살려 천기를 불어넣었던 최시형이 혁명의 주변인물로 밀려나 있던 까닭은 무엇일까?최시형은 동학을 창시한 스승 최제우의 돌연한 형사(刑死)로 황망한 기운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한 채 법통을 물려받았다. 최제우의 그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교세의 근간은 뿌리째 흔들리고, 심지어 교권을 탐내는 접주(接主)들까지 곳곳에서 발호해 동학 자체가 괴멸지경에 놓이게 된다. 최시형의 권위는 그야말로 바람 앞 등잔 불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최시형에게 난국을 타개할 비책은 동학의 근본인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으로 꿋꿋이 가는 길뿐이었다. 그는 하늘님 아래 모든 사람이 평등한 나라를 만들자는 후천개벽론을 설파해 교세를 회복시켜 나갔다. 당시 대원군 치하 조선 조정의 탄압은 날로 거세져 최시형은 줄곧 도망자로 지내야 했다. 궁지로 몰리면 몰릴수록 최시형은 더욱 단단해졌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조선팔도의 동학이 꿈틀꿈틀할 정도로 카리스마도 갖추게 됐다. 그러는 사이 대책 없이 쓰러져가는 조선 땅에서 수많은 민초들에게 최시형은 유토피아를 열어줄 등불 같은 존재로 재등장한다.`망국`은 동학초기비사로 전해오는 1871년 동학교도들의 영해성 거사를 모티프로 삼아 최시형을 재평가한다. 1864년 4월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참형을 당한 후 도통을 이어받아 교주가 된 해월 최시형의 지위는 위태로웠다. 수운의 장남인 세정을 따르는 무리와 유림을 버리고 동학당에 들어온 사대부들은 무학자인 그를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조정의 수배를 피해 산간 오지를 숨어 다니다 겨우 영양 일월산에 거처를 정한 해월은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며 흩어진 도인들을 모으고, 교주로서의 권위를 세우는데 절치부심한다.몇 년 후 영해접주 박사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동가 이길주는 스승인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영해성을 도모하자는 제안을 해온다. 해월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수차례 거절하나 도인들의 성화를 견디지 못해 결국 거사를 허락하고 만다.▲ 조중의 작가전국에서 집결한 도인들은 영해성을 공격해 부사 이정의 목을 베고 관아를 점거하는데 성공하지만 정예 관군이 출동한다는 소문이 돌며 하루 만에 철수를 결정한다. 영해성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자는 애초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해월과 동학당은 도주를 시작한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도피 과정에서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가는 도인들을 바라보며 해월은 처절한 반성과 각오를 다진다. 도인들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해월은 태백산 깊은 곳에서 동학당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교주로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결의를 다져나간다. 조 작가는 “소설 `망국`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도 구원의 빛을 밝히려 했던 해월 최시형의 삶에 대한 문학적 복원이다. 그동안 시대의 논리에 밀려 역사의 이면으로 밀려나 있던 그를 다시 불러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조중의 작가는 199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새 사냥`이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5년 동안 기자로 활동하면서 `신 택리지`, `동학 100주년, 발상지를 가다` 등을 연재했다. 장편소설 `농담의 세계`, 평전 `새로운 세상을 꿈꾼 해월 최시형`, 산문집 `사는 게 참 행복하다` 등을 펴냈다. 현재는 포항CBS 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2

“사물 꿰뚫어보는 시선 예리하며 따뜻”

맑고 투명한 서정 속에서 더욱 빛나는 강인한 시정신으로 한국 현대사와 문학사를 관통해온 이시영 시인의 신작 시집 `호야네 말`(창비)이 출간됐다. “현실에 맞서 시대의 진실을 세심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밀도 높은 서정이 다양한 형식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진 뛰어난 시정신의 소산”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박재삼문학상`과 `만해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한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열세번째 시집이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서정과 서사를 아우르는 독특한 감성의 어법으로 단형시, 산문시, 인용시 등 변함없이 다채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삶에 대한 애정과 웅숭깊은 자기성찰이 깃든 `오래된 노래`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나직 들려준다. “짧은 서정시라 불리는 독특한 시 형식에 `스스로 그러함`을 드러내는 영원한 순간들의 미학”(오철수, 발문)이 현란한 수식 없이 간결하고 명료한 일상적 언어에 녹아든 단정한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과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동양파라곤아파트 동쪽 정원 측백나무 옆/고양이 세마리가 나와 자울자울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그중 두 놈은 흰 배에 검은색 등이고/나머지 한 놈은 완전 호랑이 색깔이다/그런데 저렇게 평화로울 수 있다니!”(`평화롭게` 전문)이시영의 시는 짧지만 긴 여백 속에 큰 울림이 있다. 냉정하다 싶을 만큼 차분한 감성과 극도로 절제된 언어로 사물의 현상과 실체를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정확히 꿰뚫어보는 시선이 더없이 예리하면서도 한편 따뜻하다.`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팍팍한 시대를 올곧은 정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은 “모든 결빙(結氷)의 시절”(`십이월`)인 현실을 직시하며 그 속에 감추어진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암울한 시대의 어둠을 밝히며 진실한 삶을 오롯이 지켜온 시인은 편을 가르거나 누구를 따돌리지 않고 서로 어울려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그런 `나라` 없는 나라”(``나라` 없는 나라`)를 꿈꾼다.이시영 시인은 삶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사람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쉽게 가슴을 울릴 만큼 `인간적`이다.이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아직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싶은 평범한 시인”(시인의 말)으로서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선한 눈빛과 순정한 마음이 새잎에 돋는 이슬방울처럼 “금빛으로 환하게 눈부”(`금빛`)시다.“양들이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를 건너 귀가하고 있습니다/곧, 저녁입니다”(`곧` 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