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문화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 신비로운 7가지의 운명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익사이팅`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가 이명행이 설화적 원형이 풍부하게 함축된 첫 소설집 `마치 계시처럼`(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관계`와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의 닿음닿음마다 신비로운 운명이 어려 있음을 얘기하는 일곱 편의 소설을 만나보자.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숨결`은 새벽 2시만 되면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치과 의사의 이야기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댄다. 주인공은 너무나 엉뚱한 이 상황을 생각처럼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앓고 있던 불면증은 더욱 심각해진다.`완전한 그림`에는 불현 듯 현실이 숨 막혀 가출을 감행하는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 `완전한 그림`은 홀로그램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인데, 홀로그래픽 필름의 아주 작은 조각에도 이미지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발된 인연`과의 옛 기억을 하나하나 채취해가는 남자의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표제작 `마치 계시처럼`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하얀 소복을 한 기차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유년에 간접적으로 겪은 열차 사고가 중년에 접어들도록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인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향으로 찾아갔을 때 새록새록 돋아나는 기억들이 아프고도 따스하다.뒤를 잇는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보면, 삶의 경로를 벗어나 떠돌다가 `마치 계시처럼` 느닷없이 엄습하는 기억들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한 통증을 겪어내며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인간이 도구 없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기재일 것이다. `마치 계시처럼`의 수록작들이 모두 특별히이 `기억`을 향해 촉수를 민감하게 뻗고 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이명행의 소설들은 나는 누구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운명이나 우연과 같은 불확정적인 질서에 내던져진 인물을 통해 그 질문의 답을 찾고자 한다. 우연과 운명은 예측할 수 없는 공포와 절망을 불러일으키고 이 세계를 모순의 연속이자 집합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그러나 이명행의 인물들은 절망의 끝에 서 있긴 하지만 운명과 우연도 이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의 한 갈래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삶을 경이롭게 맞이하도록 만들어주지 않는가 하는 긍정의 여지를 둔다.문학평론가 김진수는 이명행의 이러한 작업을 `모순의 통일`이라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21

단어 하나하나가 던지는 의미…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2014 제3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문학사상사)이 출간됐다.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중·단편소설만을 모아 싣는`이상문학상 작품집`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심사 과정과 한국소설 문학의 황금부분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수상작으로, 현대소설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 미학의 절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2014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은 김윤식, 서영은, 권영민, 윤대녕, 신경숙 등 심사위원 5명의 심사숙고 끝에 편혜영의 `몬순`으로 선정됐다. 편혜영은 그동안 인간의 내밀한 고독과 불안을 치밀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호평을 받아왔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몬순`의 곳곳에 산재한 불안과 관련된 소재나 장면 역시 그동안 지속되어온 작가의 관심과 연결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특히 거대한 불안과 대면하는 과정에 주목하였던 종전 스타일과는 달리, 인간의 삶 자체가 겪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세계의 진전을 기대할 만하다.이번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편혜영의`몬순`과 자선 대표작 `저녁의 구애` 외에도 대상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우수상 수상작인 김숨의 `법(法) 앞에서`, 손홍규의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 천명관의 `파충류의 밤`, 조해진의 `빛의 호위`, 윤고은의 `프레디의 사생아`,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윤이형의 `쿤의 여행`, 안보윤의 `나선의 방향` 등 삶에 대한 깊이와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고루 포진해 읽는 재미와 맛을 더해주고 있다.작품 외에도 김윤식, 서영은, 권영민, 윤대녕, 신경숙 등 심사위원 5인의 심사평도 함께 실려 있어 각각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편혜영의 `몬순`을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있어 심사위원들은 작가가 그동안 즐겨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 작품의 무게와 그 소설적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심사를 맡은 김윤식 평론가는 “삶의 난감함을 겪는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이 작품의 우수성을 주목했고, 서영은 소설가는 “무심심한 단어 하나하나가 돌연 의미심장한 주제로 바뀌는 것이 매력”이라고 이 작품의 무게를 인정했다. 권영민 평론가는 “주인공의 삶에 내밀하게 자리 잡고 있는 고통과 그 비밀이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불안의 상황과 절묘하게 접합되어 있음”을 주목했다.`몬순`은 아이의 죽음을 서사의 바탕의 깔고, 제목이 암시하듯 삶의 불확정적인 요소들을 집요하게 응시한 작품이다. 더불어 관계의 틈에 도사리고 있는 극복할 수 없는 괴리감과 단절감이 `단전`의 상황에 빗대져 작가만의 건조하고 치밀한 문체로 유려하게 서술돼 있다. 그 어떤 것도 확실하거나 증명되지 않는 삶, 부조리함이 어느덧 전제로 작용하는 삶 속에서 주인공은 실체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자신을 다만 무기력하게 지켜볼 뿐이다. 관계로 표현되는 삶의 생태성이 무너져가는 현실을 압축해서 드러낸 이 작품은 반복되는 생활 속에 함몰돼 놓쳐버리고 말았던 진실의 무수한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다.대상 수상작 외에도 학교폭력 가해학생의 아버지가 겪는 다양한 상념과 혼란을 통해 선과 악의 근본적 정의에 대해 질문한 김숨의 `법(法) 앞에서`, 기억을 모두 잃고 한 일가가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통해 삶의 균열을 그린 손홍규의 `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 절박한 생존본능을 내포한 파충류의 기억을 통해 삶과 죽음의 양면성을 표현한 천명관의 `파충류의 밤`도 눈여겨볼 작품이다. 또한 두 세계에 관한 기억과 기록을 치밀한 구도로 교차 조명하며 숨을 불어넣는 작가적 역량이 돋보이는 조해진의 `빛의 호위`, 유일무이한 어떤 가치가 상업적 포즈에 휘둘리면서 점차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윤고은의 `프레디의 사생아`도 고유한 개성을 발하는 작품이다. 아울러 기린불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참과 거짓의 정의에 질문을 던지는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쿤`이라는 상징을 통해 타자화된 삶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다룬 윤이형의 `쿤의 여행`, 본론과 각주로 이어진 독특한 소설 쓰기로 숨은 역량을 보여준 안보윤의 `나선의 방향`도 주목해볼 만한 수작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14

미군 포로 생체해부 사건으로 일본인 죄의식 부재 문제 다뤄

일본을 대표하는 엔도오 슈우사꾸의 장편소설 `바다와 독약`(창비)이 출간됐다.엔도오 슈우사꾸는 전후 일본인에게 드러나는 죄의식의 부재 문제를 일관되게 작품화한 가톨릭 작가로서 초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소설에서는 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군 포로에게 행해진 생체해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생체해부라는 선정적인 사건을 리얼하게 묘사하면서도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죄의식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있다.2차대전 막바지인 1945년 5월, 미군 B29기가 추락하면서 12명이 포로로 잡히고 그중 8명이 재판 없이 사형선고를 받는다. 큐우슈우 대학 의학부에서는 이 포로들을 생체해부 대상으로 요청하고 군은 이를 받아들인다. 이 작품은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세 등장인물이 어떻게 가담하게 되는지를 중심으로 그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무력감이나 피로감은 오랫동안 이어진 비인간적인 전쟁이 `독약`처럼 퍼져 양심과 정신을 마비시켰음을 말해준다. 작가는 전쟁 같은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이나 윤리, 합리적 사고가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고 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소설은 전쟁이 끝나고 10여년이 흘러 한창 재건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모습을 먼저 보여준다. 새로운 주택지로 이사한 `나`가 기흉 치료를 받기 위해 찾아간 의사 스구로는 미군 포로 생체해부 실험에 가담했던 과거를 지니고 있다.암울함과 불안감이 지배하는 2차대전 말기, 오랜 전쟁으로 도시는 폐허로 변하고 사람들의 삶과 마음은 나날이 피폐해져간다. 밤마다 계속되는 공습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지만 대학병원에서는 차기 의학부장 자리를 두고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미군에 대한 생체해부 역시 이러한 권력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작가는 스구로, 토다, 우에다라는 세 인물이 어떻게 생체해부에 가담하게 되는지를 중심으로 그들 내면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의학도인 스구로는 양심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생체해부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실험에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소심한 스구로는 불참을 선택하지 못한다. 이런 그의 태도에는 체념과 무기력이 자리하고 있다. 깨진 파편과 같이 미약한 인간은 넘실대며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맞설 수 없으며 검은 바다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체념은 동료인 토다와 간호사인 우에다에게도 공통적으로 보인다. 우에다는 결혼 후 아기를 사산한 뒤 부정을 저지른 남편과 이혼하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인물로 별다른 가책 없이 생체해부 실험을 돕게 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무력감이나 피로감을 느끼는데 오랫동안 이어져온 비인간적인 전쟁이 `독약`처럼 퍼져 양심과 정신을 마비시켜버렸음을 말해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14

삶과 존재에 대한 치열한 반성

독일의 유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서평가인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비견되는 작가”라고 평했으며, 스페인 비평상(스페인), 로물로 가예고스 상(베네수엘라), 페미나 국제문학상(프랑스), 임팩 더블린 문학상(아일랜드), 넬리 작스 문학상(독일), 몬델로 문학상(이탈리아), 유럽문학상(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문학상을 싹쓸이한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 하비에르 마리아스의 소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남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 상` 수상작으로 탐정소설과 철학 에세이라는 두 장르의 기법에 바탕을 두고 구성된 소설이다. 사랑과 죽음에 관한 수많은 사색과 성찰을 비극적이면서도 코믹한 말투로 진지하면서도 가볍게 다루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독자를 이끈다.드라마 작가이자 대필 작가인 빅토르는 사랑을 나누기 직전 숨을 거둔 여인 마르타의 집에서 자신의 흔적을 지운 뒤 떠난다. 마르타의 가족은 그녀가 죽을 때 혼자가 아니었음을 눈치 채고, 그녀의 남편 데안은 그 밤에 마르타와 함께 있던 사람을 찾는다. 한 달 뒤 자신이 누구인지 숨긴 채 마르타의 가족에게 접근하고 마르타의 여동생 루이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하는데….스페인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세계 유명 문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하비에르 마리아스는 특유의 성찰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현대인의 존재론적 불안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다. 이른바 `형이상학적 스릴러`라는 마리에스 소설 특유의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확실해 보이는 삶 너머에 있는 불확실성에 대한, 삶을 주관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불확정적인 것들로 가득 찬 인간 존재에 대한 관조를 통해 얻은 깨달음을 전한다.사실 사색과 성찰이 포함돼 느리게 진행되는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고역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끄는 기발함으로 내면적 성찰에 중심을 두는 소설의 단조로움을 파괴하고, 이로 인해 독자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우리의 삶과 존재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라는 성찰적인 내용을 스릴러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이 비범한 작품은 문학사의 한 장을 장식할 현대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인상적이면서 동시에 궁금증을 일으키는 제목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는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인용한 문장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14

김동리와 함께 보낸 삶 이야기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나는 나 자신이나 김동리에 대해서 가능하면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무한유(無限有)한 인생의 심오함을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다.”- `꽃들은 어디로 갔나`작가의 말 중한국 문단의 거목이었던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세 번째 아내, 30대에 혜성같이 나타나 이상문학상을 받은 화제의 여성 작가 서영은(71)씨의 자전적 장편소설`꽃들은 어디로 갔나`(해냄)가 출간됐다.문학을 통해 구도(求道)의 길을 걸어온 서씨가 인고(忍苦)의 사랑을 그린 이 책은 그가 김동리와 함께 보낸 지난한 삶을 픽션으로 옮겼다.서씨는 마치 자신과 김동리를 제3자인 것처럼 3년여 결혼 생활을 무심하고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며 둘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30대에 문단에 등단, 이상문학상과 연암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던 서씨는 44세 때 김동리 선생의 세 번째 아내가 됐다. `등신불` 등 수많은 소설을 발표해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으로 불리던 김동리 선생의 당시 나이 74세였고 두 번째 아내 손소희 여사를 사별한 후였다. 결혼생활은 3년 만에 끝났지만, 이들의 결혼은 당시 문단의 대단한 화제였다.삶의 근원과 존재론적 슬픔을 그려낸 서씨의 작품세계는 1968년 등단한 이래 46년간 이어져왔다. `그녀의 여자` 이후 14년 만에 출간하는 일곱 번째 장편인 이번 신작에서도 작가는 남녀의 사랑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를 이뤄낸다. 작품의 일부는 2004년 `작가세계`(서영은 특집)에 게재된 바 있다. 소재는 자전적이지만 오랜 세월을 통해 정련된 3인칭 서술의 어조는 무연(無緣)하기까지 하며, 작가 스스로도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오로지 작가로서 삶의 진실, 인간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노라고 밝혔다.소설은 두 번째 아내와 사별한 70대 노인 박 선생의 세 번째 아내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40대 여인 강호순의 내면을 3인칭 시점으로 그린다. `50, 60대 시절, 대학에서 맡고 있던 직함 외에도, 중요한 직함만 일고여덟 개 이상`이었던 남자의 외도 상대였다는 것만으로도 호순의 사랑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우리 박 선생 불쌍한 사람이야. 잘 지켜줘”라는 말을 남긴 뒤 세상을 떠난 전처의 자리에 들어가게 된 호순은 아내로서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채 그늘과 구석을 오가며 삶을 견뎌 낸다.이념 지향적 문학이 주도하던 7~80년대, 서영은 작가의 작품들은 개성적이고 이채로운 공간을 구축한 정신적 모험이었다고 평가된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1983년, 컬러TV와 프로스포츠 등으로 독서문화가 위축되고 산업화에 발맞춘 처세서와 대중소설이 쏟아지던 때에 작가는 근대적 합리주의와 물신주의의 반대편에서 삶 자체가 안고 있는 시련을 평범한 일상 안에서 `실천`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속물적 세계에서 `참된 나`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를 보여준 첫 단편 `교(橋)`와 세속의 허무와 무의미를 극복하는 `사막을 건너는 법` 그리고 `관사 사람들`에서 드러난 순수한 생명력이 `먼 그대`에 이르러 고통(사막)과 극복(물)의 힘을 함께 품은 불사의 낙타가 됐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신작 `꽃들은 어디로 갔나`의 주인공 호순에게서도 구현된다.▲ 서영은 소설가`생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담금질하는 그녀는 한 남자의 생애와 비속한 일상을 포용함으로써 현실을 전복해 나간다. 성공한 남자의 세속적 외관을 떠받치는 `순결한 안감`이자, 나약해진 그를 보듬는 강인한 보호막이기도 한 호순은 `먼 그대`의 `낙타`를 더욱 다면적으로 드러낸다.`생의 가시밭길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마침내 자존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발견한` 주인공의 초극적 자아는 인생의 참뜻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사랑과 삶의 의지를 북돋는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07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인생

1989년 등단 이래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 간명하고 절제된 형식으로 생명이 깃든 삶의 표정과 감각의 깊이에 집중해온 나희덕 시인이 `야생사과`(2009) 이후 5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무한 허공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는 나무에서 저 무(無)의 바다 앞에 선 여인의 노래에 이르기까지 이번 시집에는 죽음의 절망과 이별의 상처를 통과한 직후 물기가 마르고 담담해진 내면에 깃들기 시작하는 목소리와,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인의 조용하고도 결연한 행보가 가득하다. “떼어낸 만큼 온전해지는, 덜어낸 만큼 무거워지는 이상한 저울, 삶”(뒤표지 시인의 산문)을 온몸으로 부딪쳐온 시인은 이제,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존재의 시원인 깊고 푸른 바다에서 시인이 만나는 무수한 말들과 그가 내보낸 한 마리 말, 이들의 상호순환적인 움직임은 해변에 이르러 부서지는 흰 포말처럼, 무의 허공으로 사라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건 도약으로 볼 수 있다.(남진우, 시인·문학평론가) 그 도약은 “무언가, 아직 오지 않은 것”(무언가 부족한 저녁`)처럼 어느 날 찾아드는 목소리일 사랑에의 희구, 궁극적으로 시인이 쓰고자 하는 한 편의 시를 향한다.첫 시집 `뿌리에게`를 필두로 등단 초기에 자기희생과 소멸까지 감내하며 묵묵히 포용하는 대지와 초목의 은밀한 교감 그리고 그 생성의 궤적에 주목했던 시인은 이번 시집의 첫 장에 한 그루의 나무로 자신을 설정하고 마를 대로 마른 가지의 이미지에 스스로를 투영한다. “나부끼는 황홀 대신/스스로의 棺이 되도록” 허락해달라는(`어떤 나무의 말`) 간절한 호소는 언뜻 내적 세계에 봉인된 시적화자의 소멸과 쇠락을 향한 죽음충동으로 읽힐 수 있다. 최근 정치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온 사건들에 대한 감회를 담는 등(`아홉번째 파도`) 주로 2부와 3부에 안타까운 죽음과 상실의 시간들(“피에서 솟구친 노래, 모래언덕을 잃어버린 파도”-`들리지 않는 노래`)이 산재해 있다.“말들이 돌아오고 있다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흰 갈기와 검은 발굽이시간의 등을 후려치는 채찍처럼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 부서지고 밀려오고나는 물거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이 해변에 이르러서야히히히히힝, 내 안에서 말 한 마리 풀려나온다”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07

근원과 순수 향한 길고 깊은 앓이들

곽효환 시인의 새 시집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시인은 앞서 출간한 두 시집 `인디오 여인`과 `지도에 없는 집`을 통해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모든 실제적 욕망들을 차근차근 비워내며 처음의 포용력만을 남기는 미학을 추구해왔다. 곽효환은 삶의 신산한 풍경에 가려진 순수에게 손 내밀고 격변의 틈에서 신음하는 근원을 부축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인이란 구원자이기보다는 근본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가깝다. 그러므로 무자비한 개발 논리, 갈등만 쌓여가는 사회, 자본에 눈먼 욕망들 앞에서 수없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시인은 “남들보다 빨리 움츠러들고, 남들보다 소심하게 반응지만 대신 먼저 아프고 오래 앓고 마지막까지 질문한다”고 고백한다. 이번 시집의 예순여섯 시편들은 시인이 그렇게 주저하고 망설이며 다가간 고통의 중심에 서 있다.곽효환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응시하는 시선과 자주 마주친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포진해 있는 비합리를 바라보는 그의 동공은 매번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서쪽 바다`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물기둥`(`늦게 핀 꽃들의 저녁`)이나 종로 일대의 재개발 풍경(`피맛길을 보내다`) 앞에서 시인이 체험하고 있는 것은 짙은 무기력이다. 시인의 번뇌는 `도심의 저녁 식사`에서 좀더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대결할 상대는 `창밖 하늘 아득한 곳까지 닿아 있는 타워크레인`처럼 위압적이다. 그에 비해 시인은 가장 낮은 곳, 텅 빈 식당에 홀로 앉아 있는 나약한 사무원일 뿐이다. 시인은 소리 없이 반복해 외친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하는가. 이 대목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윤동주를 떠올린다면 비약일까. 그러나 곽효환이 `병상일기`에서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라고, 윤동주의 `병원`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며 한탄한 것을 그저 가볍게 보아 넘길 독자는 없을 것이다.“저물녘 텅 빈 식당 한켠에 구겨져 앉은 그림자 하나삼켜지지 않는 입안 가득한 밥을 씹는다홀로 마주한 밥상의 서걱거리는 밥알들씹다 만 깍두기처럼 겉도는 말들떠도는 말들과 부유하는 진실을 삼키는여름날, 목메는 도심의 저녁 식사”-`도심의 저녁 식사`부분시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아픈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어쩌면 미래에 대한 낙관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낙관의 근거는 시인이 자주 호출하는 북방의 곳곳에 새겨져 있다. 자연 지리상의 북방은 사시사철 폭설과 한파를 견뎌야 하는 땅인가 하면 한없이 메마르고 거친 고통의 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곳은 척박하지만 인정 넘치는 삶의 터전이며 고달프고 벅찬 이야기가 두텁게 쌓여온 곳, 세상살이의 따스한 인간미가 살아 있는 땅, 사랑의 궁극이 숨 쉬는 장소이며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시원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2-07

詩로 읽는 삶의 지혜와 철학

“나이들어 눈 어두우니”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풀과 나무 사이에도 보이고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별` 전문문단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올곧은 `원로`로서 익숙하고 친근한 이름 석자만으로도 든든한 버팀목으로 우뚝 서 있는 신경림 시인이 신작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펴냈다. 시인의 열한번째 신작 시집이자 `낙타` 이후 6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한평생 가난한 삶들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들을 고졸하게 읊조리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건네는 “맑고 순수하고 단순한 시편들”(이경철`발문`)을 선보이며, 지나온 한평생을 곱씹으며 낮고 편안한 서정적 어조로 삶의 지혜와 철학을 들려준다. 올해 팔순을 맞는 시인은 연륜 속에 스며든 삶에 대한 통찰과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 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가슴 저릿한 전율과 감동을 자아낸다. 등단 59년차에 접어든 시력(詩歷)의 무게와 깊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서러운 행복과 애잔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시집”(박성우, 추천사)이다.“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하늘에 별이 보이니/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별` 전문)한평생 시의 외길을 걸어온 시인은 이제 황혼의 고갯마루에 이르러 “지금도 꿈속에서 찾아가는, 어쩌다 그리워서 찾아가는”(`나의 마흔, 봄`) 지난날을 돌이키며 빛바랜 추억의 흑백사진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리운 얼굴들을 현재의 삶 속에 되살려낸다. “서른해 동안 서울 살면서” 집에서 시장까지의 짧은 길만 오가며 사셨지만 “아름다운 것,/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어머니(`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죽어서도 떠나지 못할” 산동네에서 살다 돌아가셨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그곳에서 “지금도 살고 계신” 아버지와 “아들도 몰라보고 어데서 온 누구냐고 시도 때도 없이 물어쌓”던 “망령 난” 할머니(`안양시 비산동 498의 43`), 그리고 “부엌이 따로 없는” 무허가촌 사글셋방에서의 가난한 삶 속에서 일찍이 사별한 아내. 그들은 이제 모두 떠나고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꿈인 듯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는 아득한 그리움에 젖는다.세상은 바뀌었지만, 돌아다보면 지나온 길이 그립고 아름답게 빛난다▲ 신경림 시인어머니와 달리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늘 떠돌았던 시인은 낯익고 익숙한 것들 속에서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역전 사진관집 이층`)을 찾듯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고 찾으려고 하루하루 “활기차게” 살아간다. “아주 먼 데./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그 먼 데까지 가자고” 멀리 떠나기도 하지만 종내는 “사람 사는 곳/어디인들 크게 다르”지 않고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면서”(`먼 데, 그 먼 데를 향하여`) 살아가는 모습은 한결같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별들이 쌔근쌔근 코 고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초원의 적막 속에서 문득 “세상의 소음”(`초원`)이 그리워진 시인은 “너무 오래 혼자”서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터벅터벅 걸어서/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이쯤에서 돌아”(`이쯤에서`)가고자 한다.자연의 순리대로 세월은 가고 시인은 나이가 들었다. 시인은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다시 느티나무가`)고 말한다. 그러나 “하늘을 두려워 않고 자연을 넘보면서 뿌린 오만의 씨앗”(`원 달러`)으로 인한 재앙과 “매몰찬 둑에 뎅겅 허리를 잘리기도 하는”(`담담해서 아름답게 강물은 흐르고`) 강을 바라보면서 마구잡이 환경 파괴에 비판의 시선을 내쏘기도 한다.일찍이 문학평론가 최원식이 “우리 시대의 두보(杜甫)”라 일컬었듯이 신경림 시인은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민초들과 더불어 저잣거리에 섞여 살면서 하찮은 존재들의 슬픔과 한, 그들의 굴곡진 삶의 풍경과 애환을 질박하고 친근한 생활 언어로 노래해온 `민중적 서정시인`으로서 자리매김해왔다. “화려한 것들과 찬란한 것들”(`섬`)의 볕바른 중심에 서 있기보다는 “늘 음지에 서”(`쓰러진 것들을 위하여`)서, “세상에서 버려져 살아온 사람들”(`빨간 풍선`)과 “꽃 같은 생애와는 무관할 것 같은 민중의 헐거운 삶”(박성우, 추천사)을 끌어안으며 “언 손 굽은 등 두루두루 어르면서”(`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집권자들의 횡포에 삶의 뿌리를 잃”은 “가난하고 힘없는”(`인생은 나병환자와 같은 것이니`) 외로운 존재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언제나 더없이 따뜻하기만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24

`개혁 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 생애 그려

중국 `개혁 개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덩샤오핑의 인생과 국가 전략을 담은 `덩 샤오핑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세 번 쓰러졌으나 세 번 다시 일어서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오른 덩샤오핑(1904~97)은 근대 이후 중국을 지배한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사명을 완수했다. 바로 중국 인민을 부유하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길을 찾은 것이다. 저자 세계적인 동아시아 전문가 에즈라 보걸(84)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정부 인사, 당 역사 연구자, 가족, 주변 인물 등과의 인터뷰와 최근에 공개되거나 발굴된 각종 문서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덩샤오핑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의 생애와 맞물린 중국의 전환기를 세밀히 그려 낸다. 10년간 저자의 모든 경험과 연구 성과를 쏟아부은 역작 `덩샤오핑 평전`은 비단 시대를 바꾼 걸출한 인물의 전기일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한 시대를 이끈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하며 풀어내는 웅장한 중국 현대사다.이 책은 덩샤오핑이라는 한 걸출한 인물이 살아온 삶을 통해 그가 지나온 중국의 현대사, 그가 만들어 낸 중국의 현대사를 그려 낸다. 특히 덩샤오핑이 광대한 중국 대륙에 불러일으킨 개혁의 바람을 집중 조명하여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할애할 정도로 매우 깊게 다루고 있다. 중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거대한 개혁이 어떻게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을 통해 실현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곧 현대 중국이 어떻게 이룩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곧은길이다.덩샤오핑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개괄한 1부에서는 그가 프랑스 유학, 대장정, 항일 전쟁, 국공 내전 등을 경험하면서 어떠한 자질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때의 실전 경험이 그의 미래 구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조망한다.2부에서는 마오쩌둥 체제하에서 쌓은 실무 경험과 세 번의 실각과 복귀 등을 다루면서 덩샤오핑 시대 이전에 어떠한 기류가 형성돼 있었는지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화궈펑이 이미 덩샤오핑 이전에 마오쩌둥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으며 중국을 개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음을 밝힌다. 화궈펑은 계급 투쟁보다 현대화에 초점을 맞췄고 현대 기술 습득을 위해 대표단을 해외에 파견했으며 경제 특구를 처음 설치하기도 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면서 자신만이 지닌 뛰어난 정치 감각과 지도력으로 돌출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간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덩샤오핑을 `총설계자`가 아닌 `총지배인`으로 일컬어야 한다고 단언한다.이어 3~5부에서는 본격적으로 덩샤오핑이 중국을 이끌어 나간 20년간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마지막 6부에서는 덩샤오핑의 후계자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와 중국이 맞이할 미래를 생각해 본다.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 계승을 공언한 시진핑 주석이 덩샤오핑을 능가할 만한 최강의 권력자로 대두된 지금, 과연 중국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덩샤오핑 시대를 통해 전망한다.`덩샤오핑 평전`은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큰 주목을 받으면서 현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언론의 극찬을 받았고 각계의 추천도 이어졌으며 세계 최고 논픽션 상 중 하나인 라이어넬 겔버 상(2012)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국 본토에서는 학생 시위와 톈안먼 사건을 다룬 2개 장(20~21장)이 축소되고 `덩샤오핑 시대의 핵심 인물` 부분은 삭제된 채 2013년 번역 출간됐으나 65만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24

“부부는 교집합을 가진 합집합”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애니북스)은 여자들의 대변인으로 떠오른 마스다 미리의 신작이다. `수짱 시리즈`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작들이 30대 싱글 여성들의 삶과 고민을 주로 다루었던 것과 달리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은 치에코 씨와 사쿠짱 두 부부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속에 등장하는 치에코 씨와 사쿠짱은 결혼 11년차 부부다. 회사에서 비서로 일하는 치에코 씨와 집에서 구두 수선 가게를 운영하는 사쿠짱은 아이 없이 둘이서 살아간다. 작품 속에 그려지는 두 사람의 일상은 매우 평범하다. 함께 밥 먹고, 장 보고, 대화하고, 일을 한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이좋은 보통 부부의 모습이다.그런데 두 사람의 모습은 “부부는 일심동체” 라는 말과는 어쩐지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이 부부의 생활 속에선 “부부는 함께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매일 퇴근길에 역에서 만나 저녁 장을 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좋은 부부이지만, 새해 연휴를 쇠러 고향으로 떠날 때는 각자의 집으로 향한다. 서로 가장 원하는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각자의 본가에서 보내는 것이 더 좋겠다며 결혼 전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부에겐 혼자 커피를 마시러 가거나 산책을 즐기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부부는 닮아간다”고들 하지만 치에코 씨와 사쿠짱은 서로 닮지도 않았다. 서로 성격과 습관은 물론 사소한 점 하나하나도 모두 다르다. 치에코 씨는 섬세하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꾸밈없이 표현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매 순간을 소중히 음미하고자 한다. 반면 사쿠짱은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느긋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치에코 씨처럼 순간에 의미를 두진 않지만, 있는 그대로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줄 안다. 이렇게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더 많은 두 사람인지라 때로는 의견이나 감정의 충돌이 벌어지기도 한다.하지만 이 부부는 서로 간의 차이를 현명하게 맞추어나갈 줄 안다.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일심동체”보다는 “교집합을 가진 합집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24

“기억 정화하면 행복해져요”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판미동)는 고대 하와이인들의 문제 해결법 `호오포노포노`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책이다. 이 책은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의 후속작이다. 전작은 저자 조 비테일이 호오포노포노에 입문하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조 비테일의 스승이자 호오포노포노의 최고 권위자인 휴 렌 박사가 호오포노포노의 원리와 실천 방법을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특징이다. 1장 만남, 2장 원리, 3장 실천, 4장 QA로 구성된 목차에는 이러한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전작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 입문서였다면,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는 본격 실천을 위한 안내서인 셈이다.그렇다면 호오포노포노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호오포노포노는 기억을 정화해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고대 하와이인들의 치유법이다.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현재를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거하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역할과 공간이 주어지고 그 결과 부와 건강, 행복이 자연스레 뒤따른다는 것이 호오포노포노의 핵심 원리다. 이를 위해서는 매일 자신을 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는 그 실천을 돕는다. 휴 렌 박사는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용서하세요`라는 네 마디 말을 반복함으로써 기억을 정화할 수 방법을 알려준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정화 도구를 소개하며 호오포노포노를 쉽게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아이오와 대학에서 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휴 렌 박사는 1982년에 현대 호오포노포노의 창시자인 모르나 날라마쿠 시메오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그는 하와이 주립 병동의 임상 심리학자로 부임하게 됐다. 이 병동은 살인, 강간 등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장애인을 수용한 곳으로, 폭행이 끊이지 않았으며 증상이 회복돼 병동을 나가는 수용자도 드물었다. 3년 뒤 이 병동에 기적이 일어났다. 병이 치유돼 퇴원하는 환자가 줄을 이은 것이다. 현재 이 병동은 폐쇄된 상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오로지 호오포노포노로 정화한 것뿐이다. 휴 렌 박사가 호오포노포노의 최고 권위자라는 명성을 갖게 된 배경이다.하와이인들의 오랜 지혜를 전 세계에 전하고 있는 심리치료사, 이하레아카라 휴 렌. 이제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별난 강의를 들어 보자. 휴 렌 박사의 지침을 따라하다 보면 `하루 한 번 호오포노포노`라는 멋진 습관을 갖게 되어, 어느덧 자신도 놀랄 만큼 변화한 일상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하와이 말로 호오포노포노는 완벽해지기 위해 오류를 수정하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오류`와 `잘못`은 잠재의식 속에 있는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고대부터 하와이인들은 동료들 간에 문제가 생기면 집단으로 모여 이러한 기억들을 정화해 왔다. 이를 집단이 아닌 개개인이 할 수 있는 형태로 현대화한 것이 `셀프 아이덴티티 호오포노포노(Self Identity ho`o ponopono: SITH)`다. 이 책의 저자인 휴 렌 박사는 현대화된 호오포노포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호오포노포노에서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기억`이 삶을 왜곡시킨다고 여긴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축적돼 온 기억들이 인간의 행동과 삶에 반영되어 수많은 장애와 고뇌를 일으키고 있다. 기억을 제거해 버리면 이러한 고민과 고통은 사라진다. 호오포노포노에서는 이를 `정화`라고 부른다. 잠재의식 속의 기억을 제거함으로써 당신은 본래의 모습과 삶을 되찾아 무한한 자유와 풍요,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세상도 바꿀 수 있다. 한 마디로 현대 호오포노포노는 `누구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8p.)호오포노포노는 회개와 용서, 변환의 세 단계로 이뤄져 있다. 기억을 정화하려면 회개와 용서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위해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용서하세요”라는 네 마디 말을 반복해야 한다. 이 책의 3장에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는 호오포노포노 실천 노하우가 담겨 있다.`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용서하세요`를 마음속으로 습관처럼 되뇐다. (93p.)네 마디 말을 다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로도 충분하다. (93p.)사랑한다는 말이 하기 어려우면 소중하다고 말해도 된다. (94p.)반드시 진심으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컴퓨터에서 삭제 버튼을 누를 때 감정을 담아 누르는 사람은 없다. 버튼을 누르듯 마음속으로 습관처럼 말을 되뇌기만 해도 충분하다. (161p.)에너지를 활성화하는 `하(ha) 호흡법`을 해 본다. 의자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은 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기를 일곱 번 반복한다. (111p.)/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7

꽃잎같은 손이 세상 헤집고 꽃이 되다

1987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한 윤제림(서울예술대 교수) 시인이 `그는 걸어서 온다`이후 5년 만에 찾아왔다. 그의 여섯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그동안 보여준 `낡거나 모자란 것`에 대한 관심, 연기론(緣起論)적 인식을 바탕으로 한 삶에 대한 연민을 고스란히 담으면서도 타자의 얼굴과 시선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응답, 익숙한 풍경의 바깥을 향한 관조와 통찰을 더욱더 농밀하게 보여준다. 특유의 이야기성이 강한 시들 역시 만날 수 있다.`새의 얼굴`(문학동네)은 총 67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담겼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여행에 관한 시편들이 적지 않은데, 1부에 포진한 여행지는 2부에서 4부로 흘러가면서 자연 일반과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김소월, 박목월, 오규원부터 배병우 함민복까지 실존인물에 대한 회상과 인연에 대한 소회로, 마지막 4부에서는 별주부, 토끼 부인, 이몽룡씨 부인 등 시인 특유의 상황극적 시로 이어지며 의미와 논리로 가득찬 세계를 일순간에 뛰어넘는다.여행지에서 시인은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이국적인 풍광이나 그가 이방인으로서 느끼는 정서적 감흥에 심취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만나고 마주치고 의식한 시선들, 내면성에 갇혀 있던 `나`를 자극하고 다른 시공간으로 이끌고 가는 `얼굴`들이야말로 `내`가 다 볼 수 없는 것들로 나아가게 한다.“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와 서너 살 사내아이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눈다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제 일도 못 다 본 누나가제 일은 미뤄놓고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손으로,꽃잎 같은 손으로안개가 걷히면서 망고나무 숲이 보인다인도의 아침이다”-`예토(穢土)라서 꽃이 핀다` 전문예토의 `예(穢)`는 `똥`이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예토라고 한다. 똥들이 가득한 이 땅, 누나에게 똥을 눈 밑을 맡긴 채 엉덩이를 `쳐들고` 앉아 있는 동생과 그런 동생의 밑을 닦아주는 누나. 그 “꽃잎같은 손”은 예토를 헤집고 한 송이 꽃이 되어 시인의 눈앞에 피어난다.“집으로 가는데,큰물에 떠내려왔다가판문점 넘어가는 북쪽의 사람들처럼이쪽의 옷은 훌렁훌렁 벗어던지고만세를 외치며냅다 뛰어 달아나지 못하고 -`하구의 일몰` 전문이 시의 주체가 `하구의 일몰`에서 본 것은 다만 풍경이 아니라 집으로 가는 약한 자들의 모습이다. 이 세계에 자신의 몫이 없는 이들의 모습이 해와 함께 서서히 진다.“어떻게 생긴새가저렇게 슬피울까딱하고 안타깝고궁금해서밤새 잠을 못 이룬 어떤 편집자가자기가 만드는 시집에는꼭시인의얼굴을넣어야겠다고생각했을 것이다”-`새의 얼굴`전문`딱하고 안타깝고 궁금해서` 슬피 우는 새의 얼굴이 궁금하다. 타자의 울음을 듣고 그 얼굴을 궁금해하는 것. 타자의 울음을, 슬픔을 대면하고 응답하고자 하는 것. “윤제림의 시쓰기에서 힘없고 연약한 얼굴들, 그 무방비의 얼굴들 깊숙한 곳에서 만나는 것은 이 얼굴들의 `가늠할 수 없음`이다. 윤제림 시 특유의 위트마저도 결국 감동스러운 것은 이 연약한 존재들에 대한 느꺼운 감수성 때문이다”(이광호, 해설에서) 그리하여 시집에 실리는 시인들의 얼굴은 슬프게 우는 바로 그 새의 얼굴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7

어머니 위해 부르는 사모곡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속살을 보여줘 온 강형철 시인이 십여 년 만에 펴낸 네 번째 시집 `환생`(실천문학)이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는 강형철 시인의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매개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노래한 시편들이 실려 있다. 독자들은 이번 시집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 지쳐 놓치고 있던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삶의 근본임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마음은 어머니를 위해 부르는 우리 세대의 사모곡이라고 할 수 있다.먼저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통해 바라본 환생은 정신이 다시 살아남을 의미한다. 간혹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정신을 통해 어머니와 시인은 예전의 관계성을 회복하며 그것은 모자간에 형성된 시간의 지층을 반추하는 일이다. 이는 “어둑한 집 안의 오후가 환해”(`환생`)지는 시간이다. 하지만 과거의 반추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피가 뜨거웠던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느라 고초를 겪었던 아들을 생각하곤 다시 그 아들이 잡혀갈까봐 걱정하는 노모가 있다.이 시집은 시인이 발표한 지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시들과 최근의 시들을 합쳐 총 4부로 묶었다. 1부는 나름으로 전체적인 이야기를 모았고 2부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 이야기를 모았다. 3부와 4부는 최근에 생각하는 것들을 시로 쓴 것들이다. 시인은 특히 2부 시편들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웃으면서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품들로 엮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7

“진정한 이해·사랑 일깨워줘”

대산문학상과 현대문학상을 거머쥐며 뛰어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는 작가 김숨의 네번째 소설집 `국수`(창비)가 출간됐다.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 밤의 경숙`을 비롯 김숨의 탁월한 소설세계를 보여주는 9편의 작품을 실었다. 가족의 의미를 진중하고도 새롭게 천착하는 진정성과 더불어 현대인이 앓고 있는 분열적 심리에 대한 성찰과 묘사가 지적 각성과 동시에 깊고 풍부한 울림을 선사한다. `국수`는 김숨이 3년 만에 펴내는 소설집이자 그의 열번째 저작이다. 그는 등단 7년 만에 첫 소설집 `투견`을 내놓은 후 누구보다 왕성한 창작열로 매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발표한 작품들은 호평을 받으며 굵직한 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됐고 지난 2013년 장편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로 대산문학상을, `그 밤의 경숙`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데뷔 이래 사회의 이면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와 그런 사회에서 망가져가는 관계를 특유의 잔혹한 이미지와 환상적 기법으로 구현한 소설세계로 주목받았다. 또한 주제를 향해 나직하지만 집요하게 나아가는 문장은 그의 작품의 또다른 든든한 축이 되어주었다. 이런 김숨이 이번 소설집에서 더 깊이 집중하는 관계는 `가족`이다. 부부의 갈등과 균열을 사회적 층위와 연결 지어 긴장감 있게 그리고(`막차` `명당을 찾아서` `그 밤의 경숙`),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편한 동거를 기묘한 분위기로 드러내며(`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 증오만 남은 부자 관계를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집단 살육의 현장과 중첩시켜 표현하기도 한다(`구덩이`). 그중에서도 `국수`와 `옥천 가는 날`은 전통 서사에 기대어 모녀간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결을 함께한다. “삶의 영원한 화두에 대한 아름다운 천착이 돋보인다”(서영은)는 평을 받기도 한 표제작 `국수`는 외롭고 고단했을 계모의 삶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화해를 이루는 주인공의 심리를 국수를 만드는 일련의 조리 과정에 탁월하게 버무려낸다. 리드미컬하게 문장에 문장을 더하며 촘촘한 서사의 밀도를 이루는 이 작품은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옥천 가는 날`의 두 자매는 응급차에 어머니의 주검을 싣고 장례가 치러질 어머니의 고향 옥천으로 향한다. 자매가 좁은 공간에서 주검을 어루만지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상황은 죽음과 삶이 이질감 없이 한데 섞이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자매가 회상하는 그들 가족의 드라마는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하고 유일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는 가족이란 관계의 심연을 들추어낸다.`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는 가족이라고는 혐오하는 개 한마리뿐인 한 노인이 등장한다. 극도의 한파가 들이닥치는 냉골에서 밤을 이겨내야 하는 노인은 부인이 살아생전 데리고 온 개와 함께 있다. 방에 온기를 내뿜는 것이라고는 그 개뿐이지만 노인은 개를 가까이하지 않겠노라 거듭 다짐한다. 그러나 결국 노인이 극심한 추위에 정신을 잃자 그를 살리려 사력을 다하고 온기를 나누어주려 이불 속으로 기어드는 건 바로 그 개다.▲ 김숨 소설가가족은 사랑으로 묶이기도 하지만, 증오로도 엮일 수도 있다는 걸 김숨은 간과하지 않는다. 같이 사는 시아버지와 함께 식사하는 것조차 끔찍해하면서도 시아버지가 남편이 날려버린 재산을 돌려달라고 할까봐 불안해하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의 주인공이나 오랜 시간 함께한 남편에 대한 경멸과 멸시를 숨기지 않는 `막차`의 주인공, 하루가 멀다 하고 어머니와 이혼하라며 전화로 윽박지르는 아들을 둔 `구덩이`의 주인공은 모두 부조리한 관계 안에서 고통받는다. 이처럼 김숨은 자칫 진부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새롭게 보고 관계의 심연까지를 집요하게 파고들어 진실과 마주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그가 구사하는 단단한 문장과 독자들의 눈을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는 탄탄한 구성과 만나 진정성의 파장을 획득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0

아내 죽음에 얽힌 진실은?

기억과 정체성이라는 테마를 과학적 상상력과 치밀한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 간 `무명인(원제 `게놈 해저드`)`이 출간됐다. 저자 쓰카사키 시로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발표하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견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산토리 미스터리 대상 독자상을 수상한 이번 작품은 기억에 문제가 깨달은 주인공이 자신의 진짜 정체성과 아내의 죽음에 얽힌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속도감 있는 전개와 촘촘한 구성을 통해 보여 준다. 기본적으로는 스릴러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본격 추리와 SF의 성격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엔터테인먼트 소설로서의 재미를 배가시킨다.“생일날 발견한 아내의 시체, 그와 동시에 걸려 온 그녀의 전화….기억이 잘못된 걸 깨달은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기 시작했다!미유키가 그런 표정을 지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다른 누군가로 절대 착각할 수는 없었다. 그 여자, 거기 죽어 있는 여자는 내 아내였다.”_ 본문 중에서결혼 후 맞게 된 첫 생일, 일러스트레이터인 도리야마 도시하루는 아내 미유키와의 저녁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갈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그가 집에 도착하여 보게 된 것은 조명이 나간 거실과 열일곱 개의 촛불, 그리고 아내의 시체였다. 그런데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패닉 상태에서 전화를 받은 도리야마의 귀에 분명 그의 옆에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아내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린다.곧이어 형사라고 밝히며 두 남자가 찾아와 도리야마를 추궁하다가 끝내 집 안으로 들어오고 만다. 도리야마는 방금 전만 해도 있었던 아내의 시체가 사라진 것에 당황한다.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전화로 도리야마에게 두 남자의 정체가 사실 형사가 아니며 그를 납치하러 온 것이니 당장 도망치라고 지시한다. 추격을 피하다가 우연히 오쿠무라 지아키라는 여성의 도움을 받게 된 도리야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와 함께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생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하게 되는데…./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0

자연의 신비 따르며 평화롭게 사는 `우리`

전쟁을 찬미하고 나치 집권에 일조하는 글을 썼다고 비난받는 동시에, 나치에 비판적인 작가로 간주되기도 하는 에른스트 윙거(1885~1998)의 대표작 `대리석 절벽 위에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지식인 한 명 한 명에게 정치적 결단과 결정이 요구되는 시기를 살며 민감한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던 동시에 독보적인 미학적 성과를 보여준 에른스트 윙거는 독일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윙거는 세계적 명성에 있어서도 이미 오래 전에 20세기 독일문학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들 중 한 사람으로 꼽혔지만 한국에서 그의 작품이 출간되기는 이번에 처음이다. 그것은 니체의 영향을 받은 초기 윙거의 반민주주의적 사상으로 인해 독일에서도 그의 문학적 가치가 다소 늦게 인정된 데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윙거 정도의 명성과 영향력을 지닌 20세기 세계 문학 거장이 국내에 최초로 번역, 소개되는 케이스는 앞으로 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윙거는 국내에 미지로 남아 있는 최후의 20세기 거장이었다고 할 만하다.땅을 일구며 영혼과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키며 살아가는 곳, 마리나. `나`와 오토 형제는 이 목가적인 땅의 대리석 절벽에서 식물계를 연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산림감독원장과 그가 이끄는 마우레타니아 인들의 횡포로 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은 피로 얼룩지게 된다. 1939년에 발표한 `대리석 절벽 위에서`는 나치 정권이 주도한 폭력 시대의 역사적 반성을 담았다고 해석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정작 윙거는 `산림감독원장`이 히틀러 한 사람을 지칭한다기보다 지구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는 독재자의 한 전형이라고 말한다.시대를 추정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무법의 독재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이 나치 정권을 겨냥한 것으로 한정된다면,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돼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양상을 달리한 채 폭력과 압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폭력으로 얼룩진 인간 역사의 축소판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언제 어디서든 당대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이 짧은 장편 소설은 영혼의 힘과 자연의 신비를 따르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우리`(화자인 나와, 함께 식물계를 연구하는 오토 형제)가 잔인한 독재자 산림감독원장 무리의 횡포에 맞서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장소 혹은 인물 들이 실제의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과 뚜렷한 대응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먼저 `나`와 `오토 형제`가 기거하는 운향초 암자는 윙거가 동생 프리드리히 게오르크와 2차대전 직전에 살았던 위버링겐을 그린 것이며, 마리나의 풍경은 보덴 호수 지역을 닮았다고 한다. 한편 용기와 호기를 갖추었으나 결국은 잔인한 폭력 위에 권력을 구축하는 산림감독원장은 히틀러나 스탈린, 혹은 헤르만 괴링을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나치 정권하에서 문화를 통제하던 이들은 즉시 윙거를 체포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낼 것을 건의했으나 히틀러가 직접 말렸다는 에피소드도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10

“몽골은 잃어 버렸던 그리운 풍경”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박태일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2006년 2월부터 2007년 1월까지 한 해 동안 머물렀던 몽골에서의 나날살이를 총 5부, 60편의 시로 오롯이 담아냈다. “언어의 생김새와 색깔, 소리 등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의 맛을 적절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풀나라` 이후 11년 만에 낸 시집이라 더욱 관심을 모은다.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말결에 대한 뛰어난 감수성을 바탕으로 낯선 몽골이라는 공간을 우리말의 리듬 속에 함축적으로 녹여내어 시적 서정의 공감대를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 박태일 시인은 몽골말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존에 통용되는 영어식 표기보다는 실제로 생활하며 듣고 말했던 현지 발음에 가까운 살아 있는 표기를 사용했다.경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지역어와 고유어 등을 살리는 노력에 공들여온 그이기에 이번 작업이 더욱 의미가 깊다.“가을 가랑잎이 겨울까지 흘러왔다 얼음 속에 켜켜 한소끔 몰려 앉았다 호롱불 눈을 밝힌 소들이 강 위로 건너온다 어미소가 송아지를 기다려 돌아섰다 다시 걷는다 큰 키 버들숲이 이고 진 홍싯빛 노을 강우물 번지 위쪽에선 늙은 내외 기러기가 물을 긷는다 쩡 한 획 굽은 톨 강이 등짐 내려놓는다 쩡 어디선가 말 뼈다귀 찾아 문 검둥개가 지나다 그 소리에 놀라 선다.” ―`강우물`전문“나무 장작 조개탄 장수 다 돌아간 골짝버스도 사람을 내려놓고 문을 잠근다흰 낙타 털 흩뿌리는 밤기울어진 연통을 안고아이들이 게르 위로 날아오른다능선에는 큰 키 낙엽송이 서넛텅 어느 눈벼랑이 갈라졌나개가 짖는다잠결에 젖을 물리는 어머니.”―`백야` 전문▲ 박태일 시인단음의 의성어들은 원시의 생명력을 드러내며 `도끼` 처럼 강렬하게 시적 화자의 내면을 쪼갠다. 그와 함께 시인은, 강을 건너는 “어미소가 송아지를 기다려 돌아섰다 다시 걷는” 풍경이나 잠결에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모습 등 자연의 위협적인 생명력 앞에 놓인 삶의 단면을 능숙하게 접고 펼치면서 특유의 회화적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리하여 어느새 몽골은, 잃어버렸던 그리운 풍경이 돼 마음에 조용히 걸어들어온다.“오츨라레는 몽골 말로 미안합니다톨 강가 이태준열사기념공원 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고벅뜨항 산 인중까지 관광 게르 식당이 번져올라봄부터 가을 양고기 반달 만두가 접시째 떠다니는데오츨라레 허리 세게 눌러서 아픈 발가락 당겨서당신 나라와 당신 말씨와 당신 복숭뼈를 밟아서”―`오츨라레 오츨라레` 부분허나 몽골이 우리가 잃어버린 따뜻한 장면만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장경제가 도입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대자연이나 아직 때묻지 않은 순박한 삶의 모습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왜곡에 그칠지 모른다.문학평론가 이경수가 해설에서 지적한 대로 “어쩌면 몽골에서 본 사막보다 더 막막한 사막에서 살고 있는 시인과 우리에게 몽골의 슬픔과 쓸쓸함은 우리의 나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4-01-03

신비한 운명의 일곱 가지 이야기

장편소설 `사이보그 나이트클럽`을 통해 현실과 허구의 `익사이팅`한 대결을 보여준 소설가 이명행이 설화적 원형이 풍부하게 함축된 첫 소설집 `마치 계시처럼`(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번 소설집의 작품들을 쓰는 동안 `관계`와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다고 밝혀놓았다. 얽히고설킨 그물 안에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맺어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주치는 애틋한 관계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맺어가는 인연들의 닿음닿음마다 신비로운 운명이 어려 있음을 얘기하는 일곱 편의 소설을 담았다. 소설집의 첫머리에 놓인 `숨결`은 새벽 2시만 되면 모르는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는 치과 의사의 이야기다. 전화기 너머의 여자는 주인공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댄다. 주인공은 너무나 엉뚱한 이 상황을 생각처럼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앓고 있던 불면증은 더욱 심각해진다.`완전한 그림`에는 불현 듯 현실이 숨 막혀 가출을 감행하는 중년 남자가 등장한다. 제목 `완전한 그림`은 홀로그램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인데, 홀로그래픽 필름의 아주 작은 조각에도 이미지 전체의 정보가 담겨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불발된 인연`과의 옛 기억을 하나하나 채취해가는 남자의 여정이 담담하게 그려진다.표제작 `마치 계시처럼`에서 눈에 띄는 이미지는 하얀 소복을 한 기차다. 주인공이 고향에서 유년에 간접적으로 겪은 열차 사고가 중년에 접어들도록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있는 것인데, 주인공이 이를 극복하고자 고향으로 찾아갔을 때 새록새록 돋아나는 기억들이 아프고도 따스하다.뒤를 잇는 `통증` `변신의 끼` `푸른 여로` `국경, 취우령 이야기`를 마저 따라가보면, 삶의 경로를 벗어나 떠돌다가 `마치 계시처럼` 느닷없이 엄습하는 기억들로 하여금 예상하지 못한 통증을 겪어내며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인물들을 계속 만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03

개성 넘치는 지구촌 요리사들 삶은?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반비)는 미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세계 곳곳의 개성 넘치는 요리사들을 찾아 그들의 삶을 소개한 책이다.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요리사들에게 삶과 음식의 의미를 묻는 이 책은 요리사들의 삶과 요리 방식, 음식 철학 자체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다. 산뜻한 유머, 새콤한 기발함, 달콤한 재미, 짭짤한 눈물, 매콤한 아이러니, 뒷골을 짜릿하게 만드는 기이한 인생 역정이 다채롭고 화려한 향연을 펼쳐 보인다.세상에 요리는 많고, 요리사는 더욱 많다. 두메산골이든, 사막이든, 심지어 감옥이든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음식이 있고 그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있다. 요리만큼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소재가 없다면, 요리사에게도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음식을 만드는 환경이 독특할수록, 거기서 일하는 요리사 역시 남다른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저자 후안 모레노는 전 세계 곳곳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한 이야기를 간직한 개성 넘치는 요리사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미국,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등 나라와 국적을 불문하고 저자가 발굴한 요리사의 리스트는 화려하다. 텍사스 교도소에서 200명의 사형수에게 마지막 식사를 만들어준 요리사가 있는가 하면, 알프스의 두메산골에 있는 700년 된 게스트하우스에서 요리하는 할머니도 있고, 반핵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시위자들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도 있다.이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는 세상의 어느 화려한 요리보다도 더욱 흥미진진하다. 이들의 주방에서는 가족에 대한 애증, 친구와의 우정, 가난의 추억, 이룬 줄 알았던 꿈과 뒤늦게 알게 된 인생의 진실들이 지글지글 익어간다. 인터뷰를 이어나가는 동안, 요리와 인생은 어느새 한 덩어리가 되어 페이소스 가득한 이야기가 된다. 저자는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그 이야기에 감칠맛을 더한다.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주방에서 최선의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에 관한 책이자, 그들이 주방에서 완성해낸 인생의 깊이에 관한 책이다.책에 등장하는 17명의 요리사들이 서 있는 주방은 다채롭다. 여기에 평범한 주방은 하나도 없다. 각 요리사들이 서 있는 주방은 그 자체로 요리의 목적과 요리사의 인생을 반영한다.이탈리아 출신 요리사 프랭크 펠레그리노가 운영하는 뉴욕의 레스토랑에는 영화`대부`로 그 낭만이 절정에 달했던, 이탈리아 마피아의 추억이 가득 서려 있다. 우간다의 요리사 오톤데 오데라는,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의 주방에서 일했다. 스위스 할머니 오타비아 파서가 일하는 `카사 칼라바이나`는 알프스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는,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게스트하우스이며, 케냐의 아기 엄마 페이스 무토니는 나이로비 최대의 쓰레기장인 단도라 쓰레기 집하장 안에 간판도 없는 식당을 열었다.주방이 따로 없는 요리사도 있다. 그린피스의 환경 감시선 `레인보 워리어`를 시작으로, 시위 현장만을 찾아다니며 요리하는 독일인 밤 카트에게는 거리가 곧 주방이다. 바리케이드 앞에서 요리하는 그는 반핵 시위대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사이다.유럽으로 건너가려고 임시로 난민 캠프에 살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요리사 이매뉴얼 존도 캠프의 어느 공터에서 요리를 한다. 번듯한 집도, 교회도 없는 곳이니 주방이라고 갖춰져 있을 리 없다. 독일의 요리사 제라르도 아데소는 원래 유명한 레스토랑에 근사한 주방을 가진 위풍당당한 셰프였지만 마약 거래 혐의로 수감되어 지금은 감옥에서 요리한다. 이 요리 천재는 감옥에서도 자기 음식에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너털웃음을 웃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4-01-03

좀도둑서 조직 보스로… 그의 끝은?

“당대 최고의 전문가가 선보이는 범죄 느와르 소설. 섬세하고 문학적이고 예리하며 문장문장에서 즐거움이 묻어난다.” -뉴욕타임스`살인자들의 섬(셔터 아일랜드)`, `미스틱 리버`로 전 세계 독자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작가 데니스 루헤인의 최신 베스트셀러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황금가지)가 출간됐다.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 이후, 뿔뿔이 흩어진 커글린 가문의 막내 아들 조의 파란만장한 생을 격동적으로 풀어낸 작품으로, 출간 즉시 전미 베스트셀러를 석권하고 2013년에는 애드거 앨런 포 상에서 선정한 최고의 소설로 꼽히는 영애를 누렸다. 데니스 루헤인은 이미 보혁, 노사, 인종, 남녀 갈등이 폭발하던 1919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운명의 날`로 독자들의 찬사와 평단의 호평을 동시에 받았는데, 이번에는 금주법 시대를 배경으로 술이 마약처럼 밀거래되던 어둠의 세계를 사실적이면서도 흡인력 있게 담아냈다. 뉴욕타임스는 “섬세하고 문학적이고 예리하며 문장문장에서 즐거움이 묻어난다.”, 워싱턴 포스트는 “신선하면서도 정교한 언어, 폭력적 과거에 대한 세밀한 재현” LA타임스는 “숭고한 야심과 의도로 빚어낸 걸작” 이라고 찬사하는 등 평단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올해 최고로 꼽는 단 하나의 책으로도 선정된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는 최근 할리우드에서 대작 영화로 기획 중인데, 현재 가장 주목받는 배우 겸 감독인 벤 애플렉이 감독으로 낙점됐으며, 그는 이미 자신의 데뷔작 영화로 데니스 루헤인의 `가라, 아이야, 가라`를 만들어 협회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을 만큼 인연이 깊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배우로 캐스팅된 가운데, 2015년 공개될 예정이다.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라는 제목은 니컬러스 레이 감독의 영화 `그들은 밤에 산다(They Live By Night, 1949)`와 라울 월시 감독의 영화 `그들은 밤에 달린다(They Drive By Night, 1940)`에서 영감을 받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보스턴에서 37년째 경찰로 근무 중인 아버지를 둔 조 커글린은 밤의 남자다. 아버지를 `누구보다 뻔뻔한 범죄자`라고 생각하는 그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강도질을 일삼고 다니던 중 불법 도박장을 털다 에마라는 이름의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보스턴 거대 범죄 조직의 보스인 앨버트 화이트의 애인이다. 조는 에마와 함께 도망가기로 하고 은행 강도에 나서지만 의도치 않게 지역 경찰관 셋이 죽으면서 감옥에 잡혀 들어간다.범죄 조직이 지배하는 건 감옥 안이건 밖이건 다르지 않다. 마피아 조직의 보스 마소 페스카토레는 고위 경찰인 조의 아버지가 마소의 경쟁 조직을 쓸어버리도록 압박을 가한다. 앨버트 화이트와 마소 페스카토레의 무자비한 전쟁 속에서 조와 네 범죄가 낳은 아이들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보복으로 돌아올 거야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운명적으로 엇갈린다. 범죄, 복수, 음모, 배반, 치명적인 사랑 같은 범죄 누아르 장르의 익숙한 재료들이 초반부터 숨가쁘게 맞물려 돌아간다.소설은 중반부터 출소 이후 마소에게 조직을 물려 받아 플로리다에서 사업가로 성공하게 되는 조의 궤적을 좇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7

인생을 사는 방법 근원서 찾다

20여년 전 출간돼 아직까지도 널리 읽히는 철학 입문서 `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저자인 이진경이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을 근원에서부터 다시 성찰하게 할 `삶을 위한` 철학책 `삶을 위한 철학수업- 자유를 위한 작은 용기`(문학동네)을 출간했다.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 다섯번째 책으로 지난 4월부터 9월까지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에서 독자들과 교감하며 교류한 일상의 철학 이야기를 오롯이 묶은 책이다.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더 이상 남의 삶을 살지 말고, 남의 꿈을 꾸지 말고 “나의 자유를 찾으라”.이 책은 `삶과 자유` `만남과 자유` `능력과 자유` `자유와 욕망`이라는 네 가지 영역에서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지 반문한다. 삶의 고통과 기쁨, 타인과 맺는 관계, 우리가 견고한 토대라 믿는 자아의 편향과 반성 없는 아상(我相), 내 것이면서도 때로는 내 것이 아닌 욕망 등 자유는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매 국면마다 거기 항상 있으면서도 또 없다. 왜? 수많은 요구와 억압, 그리고 자아의 한계가 우리의 꿈과 욕망, 사람 사이의 관계마저 제한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좋은 대학에(또는 직장에) 가고 싶어”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라고 생각하지만 어디 정녕 그것이 나 자신의 온전한 바람으로 형성된 욕망이던가?누구나 `내가` 이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나의 자아조차 자유롭지만은 않다. 개인의 경험과 감각, 지성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시야 밖의 것은 보지도, 생각하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물론 누구나 순간순간 어렴풋이 인지하는 부자유의 항목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부자유의 통속성을 끝까지 파헤치며 “도대체 왜 우리는 부자유의 사슬에 묶이게 되었는가?”를 묻고 또 묻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7

한편의 詩가 된 이해인 수녀 기도

사랑과 간구, 깨달음과 찬미, 참회와 기도의 언어로 정결한 시 세계를 펼쳐온 이해인 수녀의 40년 시작(詩作)을 총망라한 `이해인 시전집`(전 2권·문학사상)이 출간됐다. 이 시전집은 문학사상이 창사 40주년을 맞은 2012년부터 추진됐던 것으로, 2014년 고희를 맞이하는 이해인 수녀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그 봉사와 희생의 뜻을 함께 축복하고자 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이해인 수녀는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시인으로서, 이 시전집은 그의 40년 문학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정신을 널리 기릴 수 있는 기회가 돼 줄것으로 보인다.이 책 속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한평생 진정으로 굽어보고 사랑해온 한 수도자의 진심어린 애정과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 대한 위로,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 등이 오롯이 담겨 있는 시들이 수록돼 있다. 또한 순결한 신심과 투명한 서정으로 종파를 뛰어넘어 시의 대중화 시대를 연 뒤 수많은 독자들의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그의 시 문학이 총망라 돼 있다.세상과 인간, 자연과 사물에 대해 변함없는 사랑과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세상에 전파해온 이해인 수녀.그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고결한 시어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어느 순간 깊이 위로하고 치유해주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내가 죽기 전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누군가의 마음을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한 톨의 시가 세상을 다 구원하진 못해도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나는 행복하여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작은 소망` 전문▲ 이해인 수녀이 전집에는 기도시집, 꽃시집, 동시집 등을 제외한 10권의 순수 시집만을 모아 수록했는데, 1권에는 `민들레의 영토` `내 혼에 불을 놓아`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시간의 얼굴`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가, 2권에는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작은 위로` `작은 기쁨` `희망은 깨어 있네` `작은 기도`가 실렸다.또한 각 권에 30여 컷의 사진을 실어 이해인 수녀가 지금껏 살아온 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게 했다.화보에는 이해인 수녀의 어린 시절부터 수녀회에 입회할 당시 및 수많은 문인들과 인연을 쌓은 소중한 사진들이 포함돼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한마디로 이 전집은 그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따스한 위로와 기쁨을 선물했던 이해인 수녀의 모든 것이 한데 모아져 있는 기념비적인 저서라 할 수 있다.“마른 향내 나는갈색 연필을 깎아글을 쓰겠습니다사각사각 소리 나는연하고 부드러운 연필 글씨를몇 번이고 지우며다시 쓰는 나의 하루예리한 칼끝으로 몸을 깎이어도단정하고 꼿꼿한 한 자루의 연필처럼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연필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말로당신이 원하시는 글을 쓰겠습니다정결한 몸짓으로 일어나는 향내처럼당신을 위하여소멸하겠습니다”-`살아 있는 날은` 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7

평이함 속 오래가는 공감의 파장

1995년 동서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시인 윤병무(47)의 시집 `고단`(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서정시적 문법을 다양하게 변용하는 시적 개성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했던 첫 시집 `5분의 추억`이후 꼬박 13년을 두고 다시 묶은 두번째 시집이다. 등단 20년에 가까워가는 그의 시력에 단 한 권의 시집은 어쩌면 직무유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책의 연혁`에 마음 둘 줄 아는 출판편집인과 살뜰한 네 식구의 가장으로서 그의 삶은 결코 게으르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집 `고단`에는 일상의 서정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슬픔의 윤리학을 통한 도덕적 지향, 이것이 윤병무 시의 핵심이고 그의 생활이 추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고단하고 때로 비루한 삶의 하중을 두 어깨로 버텨내며, 생활하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생활이라는 삶 자체의 슬픔을 겨냥한 시들은 소박하면서도 통절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예리하다. 바로 그 슬픔을 윤리의식 삼아 인간 삶의 보편성을 응시하게 하는 도덕적 자아를 만나보자.어둠에서 일어나 “먼동처럼 천천히 눈을”(`숲속이용원`) 뜬 시인은 간밤에 꾼 꿈을 비릿한 자신의 눈물자국으로 더듬는다. 그의 낮 시간은 지난밤, 지나온 시간과 장소, 마주해온 사람과 사물의 흔적 즉 일상의 공간을 묘사하고 시간의 뿌리가 뻗어 나가는 것을 추적하느라 소리 없이 부산하다.“유용한 것들은 하나같이 자연(自然)의 시간을 다 채우지”(`엄마 은행나무`) 못하지만, 누구나 한 번뿐인 오늘의 삶은 핍진(逼眞)하다. 그의 몸은 소시민의 외투에 감싸여 있지만 그의 미망(未忘/迷妄)은 시(/시작)에 불들려 “그 바람처럼 나도 이 세상 잠시 빌려/가끔 종잇장 구기고”(`저작권`) 있다. 그리하여 “그칠 줄 모르는 폭설을 견디고 있는 소나무처럼” 꺾이기 전까지 시인은 “겨울 가고 부러진 가지에 돋는 송진처럼 진물 맺히면/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문신(文身) 같은/상처가 손바닥을”예언과 마주”하고 “제 차례가 올 때까지/혼자 준비”(`예언`)하겠노라 다짐한다.▲ 윤병무 시인멀리 있는 시간과 기억을 가까운 곁으로 끌어와 앉히는 윤병무의 시어와 시구가 그 평이함 속에서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파장은 오래 지속된다. 텅 빈 밤, 누구나 혼자일 수 있고, 그래서 고독할 수 있고, 그래서 착하건 악해지건 딱히 간섭받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다.보편적인 삶에서 찰나의 사건을 포착하고, 말(시어)을 길어내며 기어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약점을 굳이 밝히자면 윤리적 책임에서 한순간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 단적으로 그의 시적화자는 착하다. 약삭빠르게 일처리하고 자기 잇속 챙기는 사람이 `난놈`이라는 세상인심에서 그는 한참 비껴서 있다. 구어체에 담긴 부부의 한밤 풍경은 또 얼마나 적요(寂寥)하고 다정한지.“훗날에는 함부로 사는 제가 아내보다 먼저세상의 손 놓겠지만힘 풀리는 손 느끼고 나니 그야말로별세(別世)라는 게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그날 오면 아내의 손 받치고 있던그날 밤의 저처럼 아내도 잠시 제 손 받치고 있다가제 체온에 겨울 오기 전에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아내 따라 잠든제 코 고는 소리 서로 못 듣듯세상에 남은 식구들이조금만 고단하면 좋겠습니다”(`고단(孤單)`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0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취업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것이 요즘 청춘의 현실이라지만 모든 청춘이 닥치고 취업만을 외치는 것은 아니다. 깨어 있는 20대는 돈도 벌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직장생활을 어느 정도 수행한 30대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이 단순한 돈벌이가 아닌 의미 있는 활동이고자 하는 바람을 품는다. 도현영이 최근 펴낸 `나는 착하게 돈 번다`(문학동네)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책이다.한국경제 TV, 국회방송, 채널IT 등 경제·시사 전문 앵커로 9년 넘게 열심히 일하던 저자는 어느 날 문득, 이런 고민에 빠진다.“일에 쫓겨 사는 삶, 나를 잃어버린 삶, 이게 사는 건가?”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내가 꿈꾸던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나도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리는 걸까?” “나는 지금 정말 행복한가?”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그녀가 택한 방법은 “사람”이었고, 이후 1년 반 동안 자신의 일과 삶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며 소멸되어가던 열정을 다시금 불태울 수 있었다.“저 구석에 내팽개쳐두었던 나의 꿈을 다시 찾아준 사람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면서, 그 일에서 가치를 찾고, 그 가치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선순환`을 실천하고 있었다. 거창하거나 비장하지 않아도, 지금 당장 내가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산증인들이었다. 그야말로 `착하게, 행복하게, 즐겁게, 의미 있게, 보람차게` 돈 버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만났다. 만약 지금 당신이 인생의 변화를 꿈꾼다면, 이들의 리얼 스토리가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큰 성공을 거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환상 속의 멘토”가 아니라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그 고민을 좀더 잘 해결해가는 `현실의 동반자`들. 짧은 고민 뒤에 의욕적인 삶을 실천하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왠지 모르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저자 도현영씨이 책은 저자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인상적인 17인의 스토리를 담은 것으로 `한국의 구글` 핸드스튜디오 안준희 대표, `소자본 창업의 성공주자` 국대떡볶이 김상현 대표, `세상을 바꾼 게임` 트리플래닛 김형수 대표, 두산인프라코어 직원이자 비영리단체 CE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명한씨 등의 가슴 벅찬 삶이 소개돼 있다. 저자 도현영은 “직업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아주 신나게 노는 것처럼 일하는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정장 차림에도 배낭을 메고 다니는 아나운서.한국경제 TV, 국회방송, 채널IT 등 경제·시사 전문 앵커로 9년 넘게 활동중이며, 최근에는 작가, 콘텐츠 기획자로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사람들과의 영감 공유가 목적인 프로젝트 플랫폼 `Inspiration market`의 공동대표,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 플랫폼 `D.NOV`의 대표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0

불시에 폐부 찌르는 13편 단편 엮어

프랑스 문단의 원로 로제 그르니에(94)의 신작 소설집 `짧은 이야기 긴 사연`(문학동네)가 번역 출간됐다. 지난해 발표한 `짧은 이야기 긴 사연`에는 읽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보듬어주다가도 불시에 폐부를 찌르며 공격해오는 열세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노인,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 광고판을 등에 지고 진종일 도시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시인 샌드위치맨, 유년 시절에 처음 만나 인생이 저물어가는 날까지 삶의 행로가 마주치고 갈라지기를 반복하는 두 남녀 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생에 사랑에 대하여 건네는 이 작가의 담담한 소회 앞에 어쩐지 마음이 애잔해지고 만다. 작가는 기나긴 인생의 사연들을 고요하고도 깊은 시선으로 가만가만 짚어낸다.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발령지에서 어렵게 사귄 친구의 아내와 부정(不貞)을 저지르고 결국 다시 또 외톨이가 되는 기상학자,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며 반성하다 스스로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지만 그마저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노인, 독일 점령에서 파리가 해방되던 그때 주어진 임무는 수행하지 못하고 엉뚱하게 총각 딱지를 떼게 된 청년, 매일 밤 첼로를 등에 메고 홍등가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첼로 연주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소설을 광고하는 샌드위치맨이 되어버린 시인 동료를 바라보는 통신사 기자, 파란 많은 인생행로의 끝에 유랑극단의 단역배우가 되어 뜨개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여배우, 유년기부터 인생이 저물어가는 날까지 닿을 듯 닿지 않고 인연이 끝나버리는 두 남녀….`짧은 이야기 긴 사연`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다양하지만 한편으로 조금씩 닮아 있다. 어딘지 조금은 모자란 듯하면서도 외로운 인물들이다. 로제 그르니에는 소설 속에 거창한 인물들을 내세우지 않는다. 격정적인 감정을 폭발하는 인물도, 당장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인물도 없다. 그는 제법 단순하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이야기를 나직나직 들려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20

소 닮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포항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필가 박창원씨가 첫 수필집 `향기있는 사람`(북랜드)을 펴냈다.“수필은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라고 했는데 구전민요를 연구해온 향토사학자이자 중학교 교장이기도 한 박씨의 수필은 착한 총각이 새초롬한 아가씨와 산책하는 풍경이다. 총각은 끊임없이 말을 걸고 꽃을 따다 바치지만, 아가씨는 조금 눈을 주는 듯하다가 만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가씨 눈길에 고마움이 담겨 있다.김윤규 한동대 교수는 서평에서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짐작되는 수필집이다. 그러면서 이 수필집은 박창원이 사는 풍경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어차피 친절하지 않은 세계이지만, 그럼에도 한없이 섬세한 자아의 시선이 잡아낸 기록”이라고 적고 있다.박창원의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문 곳은 부모님이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박창원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전사(前史)이다. 보이지 않는 전생(前生)을 우리가 현생에서 가장 비슷하게 추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박창원은 그 눈길로 아버지를 보고 있다.“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아버님에게 있어서 소는 아직 소다. 송아지 내다 팔아 `엄무~`하고 울면 가슴아파하시고, 다른 집 소들이 소똥 밭에 뒹굴지언정 하루에도 몇 번씩 마른 짚으로 진자리 덮어주시는, 논을 갈거나 달구지 끌지 않아도 여름엔 꼭 풀을 뜯어다 먹이시는 아버님에게 있어서 소는 여전히 소다. -`쇠죽을 끓이면서` 중아버지만 소를 닮아가신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통해 그의 후생 박창원 또한 소의 심성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아버지는 `우직`하시면서도 `고집스러움`을 잃지 않은 자신의 원형이다.그렇게 아버지는 그의 전생이 되셨다. 그 그리움을 눈망울에 가득 담은 박창원의 다정한 시선은 이제 가족에게 향해 있다. 아버지가 그리운 만큼, 자신이 만든 가족에게 자신은 어떤 전생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박창원의 다음 과제이다. 다른 수필가도 그렇지만, 박창원의 수필에서도 `아내`, `가족` 등의 단어가 유난히 많다.박창원의 따뜻한 시선은 다음으로, 교직의 현장인 학교를 향해 있다.박창원은 교장선생님이다. 시골 중학교에 청년교사로 부임해서 30년을 꾸준히 근무해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도 선생님이지만, 이런 오랜 체험은 그를 더 뼛속까지 선생님이 되게 했다.박창원은 자신의 작품에서 천상 선생일 수밖에 없는 자기 성품과 행실을 고백하면서, 마침내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선생인 박창원의 눈에는 모든 것이 가르칠 내용으로 보인다. 그는 나무를 보아도 돌을 보아도, 내연산 굽이굽이 폭포를 보아도, 그저 이걸 학생들에게 가르칠 생각만 한다. 이렇게 다정한 눈길을 가진 이에게 학생을 처벌하기도 하고 교사응모자를 탈락시키기도 해야 하는 교장은 참으로 부담스럽다. 그의 수필에 낯선 고뇌의 흔적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박창원 수필가박창원의 시선이 가장 따뜻하게 가는 것은 남보다 작은 것들이다. 모두들 크고 화려한 것을 선망하고 흠모할 때도, 박창원은 작고 고운 것에 눈길을 주고 있다. 혹시 그 화려함 때문에 작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조차, 박창원은 그 떠들썩한 자랑잔치를 헤집어서 작고 고운 것들을 찾아 그 수줍은 빛에 눈을 맞추고 있다.그는 모래 속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는 개미귀신을 우리에게 소개하기도 하고, 거미줄에 걸림 송장메뚜기를 우리 눈앞에 들어 보이기도 한다. 어디 산골에서 금방 나온 착해빠진 소년 같은 호기심으로, 박창원은 운동장의 왕바랭이 한 포기도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의 수필에는 엄숙한 교장회의의 풍경도 없고, 높은 사람과의 개인적 인연도 없고, 하다못해 지방유지와의 요란한 술자리조차 없다. 교사의 꽃이라는 교장쯤 되었으면 좀 더 화려하고 거대하고 이름난 것들에도 눈이 갈 법한데, 그는 그저 작고 못난 것들에 관심이 많다.박창원은 우리와 함께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작고 여린 존재인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가냘프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고백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13

유년시절 도시 철거촌의 익숙한 풍경들

10년간의 침묵을 깨고 백민석이 돌아왔다. 1995년 `문학과사회`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장한 그는 “현란한 젊은 문체, 발랄한 감수성은 우리 전래의 문학적 풍속을 일거에 일그러뜨리고 새로이 새롭게 돋아난다”(문학평론가 김병익), “낯설기조차 한 그의 젊음은 일상의 구속에서 벗어날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해낸다”(문학평론가 김종욱) 등의 평을 받으며 1990년대 문학에서 뉴웨이브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아파트 세대와 텔레비전 키드로 명명되며 도시에서 자라난 이들의 우울한 감각을 보여줬고, 분노와 증오로 요동치는 언어와 기괴한 상상력을 분출해냄으로써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9년여 동안 두 편의 소설집과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발표하며 활발한 창작을 계속하다가 돌연 지난 2003년 절필을 선언한 뒤 올 겨울 소설집 `혀끝의 남자`(문학과지성사)를 출간하며 다시 돌아왔다.두 편의 신작과 일곱 편의 기발표작을 새로 고쳐 총 아홉 편의 소설을 묶어낸 이번 소설집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변화`를 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소설집 `혀끝의 남자`는 이전 백민석 소설의 세계들과 몇 개의 이음새를 공유한다. 특히 수록작 `폭력의 기원`은 그의 유년과 맞닿아 도시 철거촌의 익숙한 풍경을 펼쳐 보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13

詩세계서 이질적 가치는 어떻게 공존하나

지난 200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새들은 북국으로 날아간다`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이향 시인의 첫 시집 `희다`(문학동네)가 출간됐다. 11년 전 시인은 “첫 도전에 덜컥 당선이라니. 나는 너무 쉽게 나비가 된 것 아닌가”, “막 첫잠에서 깨어난 애벌레에 불과”한 시인으로서 “말의 집 한 채를 세우기 위해 조급하게 우왕좌왕하지는 않겠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시인이 첫 시집 `희다`를 출간하기까지 걸린 11년의 시간을 두고, 길다거나 짧다고 간단히 평하기는 그래서 쉽지 않다. 다만 “잃어버린 목탑을 세우는 마음으로 한 층 한 층 탑을 쌓아올리고 싶었다”는 시인의 다짐이 `희다`라는 견고한 결실을 맺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수많은 이질적 가치, 현상, 사물들은 이향의 시세계 안에서 화해를 이룬 채 공존한다. “한 층 한 층 탑을 쌓아올리”는 시인의 마음이 반영되어서일까, 대립하고 충돌하고 반목할 법한 언어들이 `희다` 안에서만큼은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돌은 돌에서 태어난다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흰 그늘을 뿜어올리는검은등불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펼쳐지는밤의정원에서멀리 걸어나와 다시는돌아가지 않을 것처럼저 혼자 앉아 있는밤”─`밤의 그늘` 전문밤은 이미 태양의 그늘이다. 그렇다면 “밤의 그늘”은 `태양의 그늘의 그늘`인데, 그늘에게도 그늘이 있고 그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는 게 시인의 통찰이다.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양경언은 “시인이 그늘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오롯이 그늘이 지탱하는 힘으로 견디어내는 밤에 주목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이르러서야 낮 시간 동안에 존재가 감추어왔던, 조명하지 못했던 이면의 진실이 드러나기 때문”(해설)이라고 시인의 `그늘론`을 읽는다. 그늘이 존재의 이면이라면, `그늘에겐 또다른 그늘이 있다`는 게 시인이 발견한, 그 이면의 진실인 셈이다.“언뜻 보면 한 몸 같아도죽음을 걷어내면 삶까지 달려나올 것 같아멀찍이 보고만 선 겨울 배추밭”─`경계` 부분해설자의 지적처럼 이향 시의 시적 주체는 “범속한 삶에 매인 여인”에 가깝다. 그러나 시 속의 그 `여인들`은 삶의 범속함 속에서도 긴장을 놓지 않은 채 모순을 끌어안고 버티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를테면 봄은 단순히 겨울 다음에 위치한 계절이 아니다. 봄은 새것이 헌것을 갈아치우는 교환의 계절이어서 “허물어지는 만큼 피는 봄”인 것이다.시인이 이야기하는 “그늘”(들)이 긴장감 없는 검은색 하나로 묘사되지 않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이향은 `그늘`에서 검은색은 물론 회색, 붉은색, 푸른색, 흰색과 같은 다채로운 색감의 이미지들을 발견한다.무심히 바라본 그늘은 단조로운 음영(陰影)을 띨 뿐이지만, 멀리서 보고 가까이서 보고 눈을 감고도 본 그늘은 이전과는 다른, 결코 단순하지마는 않은 그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밤의 그늘”을 노래한 시인의 통찰이 우리에게 오랜 사색을 요구하는 까닭이다.이향의 시는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를 풍경에서 풍부한 바림(gradation)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을 넓혀줌은 물론 시력을 한층 돋궈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13

“방향 잃은 삶, 어떻게 바꿀 수 있나”“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해야”

삶이 자기만의 방향성을 잃고 헤맬 때, 우리 삶의 모양새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의 회복을 위해서 역시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하면 좋을 것이다. 소르본 대학의 철학교수 미셸 퓌에슈는`내가 매일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철학 에세이로 써 내려갔다.미셸 퓌에슈가 펴낸 철학 에세이 시리즈`나는, 오늘도`(이봄) 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봄으로써, 삶을 각자가 생각하는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켜보자는 것이다.이 시리즈가 다루는 것 모두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마음`이며 `행동`이며 `생각`이다. 철학이 매일의 행동과 만날 때 우리의 삶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서 읽는 철학책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단기간에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피로회복제나 영양제를 복용하지만 근본적인 회복을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와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 삶의 모양새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몸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삶의 회복을 위해서 역시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집중하면 좋을 것이다.미셸 퓌에슈는 철학이 아카데미에서만 `사유`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철학적 개념과 사유들을 쉽게 풀어내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런 저자가 급변화하는 21세기를 맞이한 현대인들에게,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해야 살 수 있는 21세기에는 `개인`이 아니라 `함께`라는 개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강조한다.현대인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이다. `타인`은 실제로 나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지만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기기들과 콘텐츠`도 포함된다. 그 타인들은 나의 삶을 풍족하게도 해주지만, 끊임없이 나의 고유한 삶을 침범한다. `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이 과연 이 `타인들`과 행복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범람하는 타인들 앞에서 `나`를 찾기는 어려워보인다.그래서 저자가 들고 나온 방법은 `내가 매일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살피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행동하고 있는가, 생각하고 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으며(사랑하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 어려움은 없는지(설명하다), 설명하는 중에 타인의 이해를 받지 못해 수치심을 느낀 적은 없는지(수치심), 매일 지하철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걷다), 잘 먹고 사는지(먹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건넬 때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이야기하는지(말하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무엇인지(원하다), 심지어 어제 분리수거함에 버린 쓰레기는 어디로 가는 건지(버리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인지(살다)를 등을 생각하며 책 9권으로 펴냈다.“진정한 사랑의 아픔은 사소한 고통이 아니라 진짜 고통, 가장 격렬한 고통 중 하나이다. 아무리 엄격하고 어른이 다 된 사람들일지라도 사랑을 하고 그 사랑으로 고통 받을 때는 눈물을 흘린다. 진정한 사랑의 상실은 계획의 실패에서 오는 단순한 좌절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상실에 대한 애도이다.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예전 같은 방식으로 그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깊고 내밀한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는 사랑의 관계는 끝난 것이다.” (`사랑하다` 84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06

스피노자와 함께 떠나는 내면 여행

`철학의 시대` `상처받지 않을 권리` 등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글쓰기로 유명한 철학자 강신주(46) 박사는 최근 펴낸 `강신주의 감정수업`(민음사)에서 자아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나만의 소중한 감정을 잘 가꾸고 보듬을 것을 요구한다. 저자는 주체적으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감정에 혼동이 생기면 삶도 혼동되고 결국에는 자신조차 불신하게 된다는 지적이다.감정을 짓누르는 무거운 현실과 자기 생으로 맞닥뜨렸던 세계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 48편과 함께 `경탄` `야심` `사랑` `욕망``환희` `분노` 등 48개의 감정에 관한 수업을 진행한다.이 감정은 스피노자가 `에티카` 3부에서 분류한 인간의 48가지 감정이다.타인의 감정을 살피고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위해 각 장마다 그림 보는 시간을 할애했다. 책은 스피노자의 48개의 감정, 48권의 세계 문학의 걸작, 철학자가 들려주는 48개의 어드바이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시각화했던 예술가들의 명화 45개로 이뤄졌다.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와 그의 저서 `에티카`는 철학사에서 많은 논란과 동시에 흠모의 대상이다. 이성 중심의 서양 철학 전통에서 `감정의 철학자`로 불리게 되는 혁명적인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강 박사는 이 스피노자의 감정을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명해 준다.저자는 야심이야말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위험한 감정임을 지적한다. “더 위험한 것은, 야심이 커질수록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감정들이 모조리 고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야심은 아카시아나무와도 같다. 너무나 생명력이 강하고 뿌리가 깊어서 주변의 다른 나무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아카시아나무 말이다. 그렇지만 아카시아 꽃향기는 어찌나 매혹적인지!” 모파상의 소설 `벨아미`에서 철학자는 `야심`을 신성하고 순수한 욕망이라고 생각하는 사랑의 감정에서도 떨쳐버리기 힘든 욕망이라고 말한다.이 책의 출발점은 스피노자이지만 온전히 `강신주의 감정수업`이다. 평생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이며, 저자 자신이 누구보다도 `감정`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에서는 스피노자의 10번 `헌신`의 감정이 빠지는 대신 31번 `치욕`에 대한 부가 설명으로서 `수치`의 감정을 추가했다. 한 권의 책에 모든 감정을 다 담을 수 없으므로 `헌신`은 사랑의 감정에 따라오는 `경탄`과 유사한 감정이기에 `사랑`과 관련된 감정들 부분에서 함께 논의될 수 있는 반면, `수치`의 감정은 `치욕`의 감정과 비교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여기 소개되는 감정을 문학의 예를 통해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력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작가나 저자가 보여 주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감정 실험실에서 각각 하나의 감정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연구를 끝낸 후에 독자는 그 경험을 통해 새롭게 내 안에 들어오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데 하나의 사고 틀을 얻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