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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명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 이야기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왕성한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작가 박찬순의 두번째 소설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작가는 첫 소설집 `발해풍의 정원`으로 “신진 작가들이 자부하는 신선한 감수성에 더불어 젖어가면서도 자신이 살아온 근대화시대의 리얼리즘 세대가 지녀온 삶의 의미 추구에의 소망을 여전히 잘 간수하고 있는”(김병익) 작가라는 평을 들었고, 이 책에 수록된 단편 `립싱크`는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출간하는 잡지 `AZALEA`에 번역 수록되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는 이전 박찬순 소설의 특징으로도 주목됐던 다문화적인 코드와 더불어 문명의 그늘 속에서 비루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응원을 담은 소설들 아홉 편을 묶었다. 박찬순은 소위 `여성작가`로 규정되는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오래도록 생활인이자 번역가로 활동해온 내공을 바탕으로 단단하고 당찬 문장을 구사한다.박찬순의 소설은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문화적인 소재를 자기만의 의미로 내면화하고 그것을 삶의 한 깨달음으로 구체화한다. `나폴레옹의 삼각형`은 나뭇가지에 줄을 묶어 받쳐놓아 폭설에도 두텁게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도록 하는 일본의 유키즈리를 주요 소재로 하여 힘겨운 삶의 무게를 버티게 하는 자신의 유키즈리가 무엇인지 자문해보게 하고, `책 만드는 여자`는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을 배경으로 문학적 의지가 인간의 사회 경제적 삶과 빚는 갈등에 대한 고통을 짚어보기도 한다.이 외에도 `살사Salsa`에 한 획만 더하면 `살자`가 된다는 `살사를 추는 밤`, 미국 키웨스트 사람들의 소라고둥에 대한 애착으로 치열하고 세련된 현대적 삶의 공허함을 드러내는 `소라고둥 공화국`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낯선 배경과 함께 선명한 의미로 다가온다.박찬순의 이번 소설집은 문명의 그림자에 가려진 이들을 조명하며 삶의 고단에도 불구하고 더욱 간절해지는 생의 의지와 확신이 형형히 드러난다. 표제작 `무당벌레는 꼭대기에서 난다`는 드높아가는 마천루로 빼곡해진 도심 속에서 아파트 복도를 청소하고 고층 빌딩의 유리창을 닦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보여주는 생에 대한 절박한 의지는 가장 아름다운 곤충`무당벌레`의 날갯짓으로 형상화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2-06

여자들이 잘 모르는 남자들 이야기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포착해온 소설가이자 `사람 풍경` `천 개의 공감` `만 가지 행동` 등으로 유명한 국내 최고의 심리 에세이스트인 김형경사진 작가가 이번엔 남자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남자들, 신화와 소설에서 만나는 남자들의 내밀하면서도 찌질하고, 슬프고도 아픈 이야기를 담은 `남자를 위하여`를 읽다보면 어느새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외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나고 그를 위로하게 된다. 여자들이 잘 모르는, 남자들 스스로도 잘 몰랐던 남자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반씩을 채우고 있으면서도 온전한 하나를 이루지 못했던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될 것이다.남자와 여자는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또는 그저 아는사람, 스쳐지나가는 사람 등 어떤 식으로든 늘 옆에 있고 함께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서로를 탓하고,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사랑과 위안을 갈구한다. 어쩌면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더욱더 서로를 알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왜 첫사랑을 잊지 못할까? 남자들은 왜 중요한 순간에 여자를 버리고 도망칠까? 남자들은 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까? 남자들은 왜 자동차의 작은 흠집에도 그토록 흥분할까? 남자들은 왜 여자의 성공을 두려워할까? 남자들은 왜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없을까? 남자들은 왜…. 이렇듯 남자들에 대한 일상의 의문들은 끊이질 않고 잘 풀리지도 않는다. 남자,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아마 여자들은 평생을 살아도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지 모른다. “남자로도 살아보고 여자로도 살아봤던”(155면) 그리스신화 속 테이레시아스나 알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날카롭고도 유쾌한 시선으로 주변의 사례와 진솔한 경험담을 나누며, 남자를 알아가려는 노력이 한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을 들여다보는 의미있는 과정이 되길 응원한다.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남자의 관계, 열정, 부정적 감정, 변화를 키워드로 삼아 남자의 마음속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고 이를 바탕으로 남녀 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한다.책에는 문학작품이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과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남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담겨 있어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저자는 이러한 다양한 사례와 참고서적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면서 해박한 심리학적 식견과 특유의 통찰로 남성들의 내면과 남녀 관계를 날카롭게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저자는 남녀가 서로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며, 먼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함께 고민할 것을 제안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29

고통·절망 너머 회복의 풍경들

인간 삶의 고독과 비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진실과 본질적인 정서들을 특유의 단단하고 시정 어린 문체로 새겨온 한강이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1993년 계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시가 실리고 이듬해 `서울신문`에 단편이 당선돼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 올해로 등단 20년차인 한강은 그간 여덟 권의 소설 단행본을 출간하는 틈틈이 쓰고 발표한 시들 가운데 60편을 추려 이번 시집을 묶었다. `저녁의 소묘` `새벽에 들은 노래` `피 흐르는 눈` `거울 저편의 겨울` 연작들의 시편 제목을 일별하는 것만으로도 그 정조가 충분히 감지되는 한강의 시집은, 어둠과 침묵 속에서 더욱 명징해지는 존재와 언어를 투명하게 대면하는 목소리로 가득하다. “말과 동거”하는 숙명을 안은 채 “고통과 절망의 응시 속에서 반짝이는 깨어 있는 언어-영혼”(문학평론가 조연정)을 발견해가는 시적 화자의 환희와 경이의 순간이 빛-무늬처럼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염된다.“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부스러질 것들//부스러질 혀와 입술, /따뜻한 두 주먹//부스러질 맑은 두 눈으로//유난히 커다란 눈송이 하나가/검은 웅덩이의 살얼음에 내려앉는 걸 지켜본다//무엇인가/반짝인다” (`저녁의 소묘 4`)“늦은 오후에서 한밤으로 건너가는 시간(저녁), 다시 한밤에서 날이 새기 직전의 시공간(새벽)에 주로 깨어 있는 시인은 “부서진 입술//어둠 속의 혀”로 “허락된다면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피 흐르는 눈 3`) 한다.“이 어스름한 저녁을 열고/세상의 뒤편으로 들어가 보면/모든 것이/등을 돌리고 있다//고요히 등을 돌린 뒷모습들이/차라리 나에겐 견딜 만해서”(`피 흐르는 눈 4`)“몸속에 맑게 고였던 것들이/뙤약볕에 마르는 날이 간다/끈적끈적한 것/비통한 것까지/함께 바싹 말라 가벼워지는 날”(`해부극장 2`)마르고 텅 비어가는 그 육체는 영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지(同志)이기에 결국 영혼도 부서지고,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과 균열의 느낌은 어김없이 찾아든다.“어느/늦은 저녁 나는/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때 알았다/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지금도 영원히/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어느 늦은 저녁 나는`)▲ 한강 시인그러나 시인은 이런 상실감과 슬픔에 앞도당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과 정면승부를 한다. 스스로에게 재우쳐 다짐하듯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그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단오하다. 짐작건대 그가, 시집의 5부(`캄캄한 불빛의 집`)에 실린, 대부분 시인의 20대에 씌어진 시들에서 목도할 수 있는 벅찬 숨결, 더운 핏줄, 열정적 사랑, 푸릇한 청춘의 시절을 통과해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아아 첫 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첫 새벽`)이제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조용한 저녁이 흘러”(`저녁의 소묘 3`)들 때, 어둠 속에서 건너가보는 꿈속에서, 거울 저편의 정오나 혹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에서 “동그랗게 뒷걸음질 치는”(`심장이라는 사물`) 혀를 이용해 시인이 닿고자 하는 것은 순수한 언어, 삶의 본질, 고통과 절망 너머의 어떤 절실함과 회복의 풍경들이다.“이제/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얼굴에/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눈을 감고 있었다/가만히”(`회복기의 노래`)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침묵의 그림에 육박하기 위해 피 흘리는 언어들이 있다. 그리고 피 흘리는 언어의 심장을 뜨겁게 응시하며 영혼의 존재로서의 인간을 확인하려는 시인이 있다. 그는 침묵과 암흑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진실을 건져 올렸던 최초의 언어에 가닿고자 한다. 이 시집은 그간 한강 문학을 이야기할 때 언급돼온 강렬한 이미지와 감각적인 문장들 너머에 자리한 어떤 내밀한 기원-성소에 한 발 가까이 다가가는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29

우리 말 들어주는 `거대한 귀`

올해로 등단 20주년이 된 소설가 김연수가 다섯번째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문학동네)을 펴냈다. 이 책은 2008년 가을부터 2013년 여름까지 발표된 단편 11편을 담았다.최근 업로드된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 이야기`에서, 작가 김연수는 말한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타인을 이해하는 문제는 다르다. 속일 수가 없다. 쓸 수가 없다. 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타인의 삶을 쓸 수 없다, 는 걸 인정하고 포기하는 데서부터 나는 오히려 시작한다.” 너의 삶을 이해한다, 안다, 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어쩌면 김연수의 소설이 가지는 힘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삶과 이 세계를 제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해하려 애쓰고, 결국은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그래서일까. 특히 이번 작품집에 실린 열한 편의 소설은 작가(혹은 작중 화자)의 개입 없이 소설 속 인물들이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엄마가, 누나가, 이모가, 들려주는 제 삶의 이야기들이다.“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 머리 위에는 거대한 귀 같은 게 있을 거야. 그래서 아무리 하찮고 사소한 말이라도 우리가 하는 말들을 그 귀는 다 들어줄 거야. (….) 그런 귀가 있어 깊은 밤 우리가 저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거야. ”_`깊은 밤, 기린의 말`김연수의 소설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면, 또한 그 때문일 것이다. 너를 이해한다, 서툴게 위로하지 않고, 그저 삶이 거기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삶이 아득해지는 어떤 순간 뜻없이 중얼거리는 말들을 커다란 귀가 되어 그저 그 자리에서 들어줌으로써. 그리고 그 순간 결국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함으로써.사랑하는 이의 어깨에 몸을 기대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을 기대는 일이다. 그래야 기대는 쪽도 의지가 되는 쪽도 불편하지 않다. 이제, 그의 커다란 귀를 열어둔 소설에 마음을 기댈 시간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29

“하나님 심정은 곧 사랑이죠”

한동대에 입학하면 누구나 듣는다는 그 유명한 `하심`이 책으로 나왔다. 한동대 박영춘사진 교수는 `하심` 시리즈 창세기 편으로 `하나님의 심정으로 읽는 창세기`(토기장이)를 출간했다.한동대 전산전자공학부 교수인 저자는 제자훈련을 바탕으로 지난 1992년부터 요한복음을 가르치기 시작, 지금까지 평신도 제자훈련 사역에 힘쓰고 있다.하심은 `하나님의 심정`의 줄임말로 말씀 묵상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을 깨달아 그분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드리기 원하는 삶의 현장 제자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다.한동대에서 시작돼 뿌리내린 `하심`은 지역사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고자 하는 영적 부흥의 소망을 품고 있다.`하심`의 사역 대표인 저자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인텔에서 근무하던 중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미국 마운틴뷰 새누리교회 김동명 목사(`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사모의 남편)에게 11년간 제자훈련을 받으며 평신도 사역에 헌신하게 된 것이다.저자는 1992년부터 요한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해 지금까지 평신도 제자훈련 사역에 힘쓰고 있다. 이 책은 한동대에서 열리는 4박 5일간의 `창세기 수련회`에서 젊은이들과 나눈 메시지를 모아 펴낸 것이다.무엇보다 저자는 깊은 말씀 묵상을 통해 창세기의 한 단어, 한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을 써내려가고 있다. 하나님의 심정은 곧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으로 말씀을 다시 읽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심정 가운데 풍성하게 풀어질 것이라고. 책은 1부(태초에) 창조주 하나님, 에덴동산을 만드신 하나님,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 2부(아브라함) 복의 근원이 되라, 뭇별을 세어 보라, 열국의 아비가 되라, 동역자로 삼으시는 하나님, 시험하시는 하나님, 3부(이삭) 돌보시는 하나님, 4부(야곱)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5부(요셉) 꿈을 주시는 하나님, 총리로 세우신 하나님, 요셉을 사용하신 하나님 등 모두 5부 15장으로 엮어졌다.부록에서는 `하심`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박영춘 교수는 “독서 관련 게시판에 올라온 독자들의 기대 글처럼, 많은 분들이 `하심`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22

세상 꿰뚫는 통찰… 읽는 재미 쏠쏠

`세계적인 시인`이라는 호칭마저 새삼스러운 고은 시인이 한국문학사에서 획기적인`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묵직한 시집 한권을 새로 내놓았다.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연시집 `상화 시편 :행성의 사랑`을 동시에 펴낸 지 2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 `무제 시편(창비)`이다. 이번 시집은 총 607편, 1016쪽에 이르는 그 방대한 분량으로 우선 압도적인 대작이다. 더구나 이 엄청난 시들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고작 반년 만에 씌어진 것으로 여든을 넘기고도 식을 줄 모르고 오히려 폭발하듯 분출하는 시인의 창작열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광활한 시공간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도저한 사유와 유장하고 분방한 언어로 완성된 이 거대한 시집은 가히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위업이라 할 만하다. ▲ 고은 시인“옛 시에서는 `곳(處)`이 `때[時]`이다. 이 말이 후대의 내 말인 줄 누가 알았으랴. 나에게 시의 `때`가 곧 시의 `곳`인 것.//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정녕 이렇다면 시는 죽음 앞에서, 죽음 속에서 시이다. 궁극도 근원도 굳이 필요 없다.”(`서문`부분) 시집은 `무제 시편`과 `부록 시편`으로 구성돼 있다. `무제 시편` 539편, `부록 시편`68편, 모두 607편, 1016쪽에 이르는 방대한 시집이다. 더욱이 `무제 시편`은 올해 봄부터 여름까지 불과 반년 만에 씌어진 전작 시편이다. 수치로 따지자면 하루에 3편꼴로`쏟아낸` 셈. 시인은 올해 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주로 체류하면서 4월 이탈리아 까포스까리 대학으로부터 명예 펠로십을 받고 5월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했으며, 8월에는 칭하이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중국을 방문하고 9월에는 22일간 시베리아를 열차로 횡단하기도 하는 등 세계 시단을 무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이렇게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곳곳을 오가는 여행과 체류의 사이에 폭발하는 열정으로 쏟아져나온 것이 이`무제 시편`이다.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이 경험을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라고 돌이킨다. 그러나 `만인보`가 그러했듯이 이 시집 또한 단순히 양의 문제가 아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우리는 세상을 꿰뚫어보는 예감과 시대에 맞서는 투철한 역사의식,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 어우러진 우주적 상상력의 시세계는 물론이고 가히 초인적이라 할 만한 이 `청년 시인`의 식을 줄 모르는 창작열에 경탄해 마지않을 것이다.`무제 시편`을 통해 시인은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도저한 시정신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으며 한편 한편 비범한 시적 사유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은 추천사에서 이를 “찰나에서 찰나로 미끄러지는 죽음의 시편이요, 그 찰나 찰나가 해탈의 이행(履行)으로 되는 초월의 시편”이자 “자유, 대자유, 마침내 자유조차 잊는 그런 자유함”이라고 찬탄한다. 시를 둘러싼 모든 편협과 속박마저 떨치고 `시의 모국어`라 할 드넓은 대지를 탐사하는 이 대시인의 발길은 달리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 시의 독보적인 성취이자 한국문학뿐 아니라 세계 시사에서 유례가 없는 위업이라 할 만하다.시인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에서 온 생애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뇌하며 세상 만물과 “어제의 나/그저께의 나만도 못한 오늘”(`무제 시편 63`)을 살아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고, “언제까지나 목마른 세상 내려다보”(「무제 시편 6」)면서 “만성(慢性)의 번뇌 행렬”(`무제 시편 1`)을 좇아 “더 가야 할 시의 길”(`서문`)을 찾아 나선다.이어지는 `부록 시편`은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상화 시편`과 `내 변방은 어디 갔나`이후 발표한 근작시를 간추린 것이다. `부록`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나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한 권의 시집으로 묶기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시인 역시 애초에 `무제 시편`과는 별도로 엮을 생각이었던 것을 “안성 시대를 마감하는 내 최근의 동정(動靜)에 따라 부록으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22

고독한 女性에 보내는 따뜻한 위로

간사이 사투리 연애소설로 유명한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들 가운데 최고의 사랑을 받은 단편을 엄선한 `고독한 밤의 코코아(포레)`가 출간됐다. 다나베 세이코는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30대 여자들의 연애 담화를 신랄한 필치로 그린 `서른 넘어 함박눈`으로 올봄 또다시 국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독한 밤의 코코아`는 2010년 복간 이후 일본에서 또 한 차례 다나베 신드롬을 일으키며 80만 독자의 선택을 받은 책이다. 삼십 년도 전에 쓰인 이 소설들이 그토록 사랑받는 것은 특유의 구성진 유머와 단순명쾌한 서사, 감각적인 문체와 더불어 인간과 삶에 대한 다나베 세이코만의 탁월한 묘사와 관조 덕분일 것이다.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을 통해 여자들은 연대하고 공명한다. 무겁지 않은 스토리로 무한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능력,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글 몇 줄로 생의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서사를 만들어가는 솜씨,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철렁할 만큼 인간 심리를 꿰뚫는 예리함은 이제 다나베 세이코 하면 떠오르는 특별한 아우라가 되어 독자들을 언제나 기대에 부풀게 만든다.이 책에는 `고독한 밤의 코코아`라는 제목을 단 단편이 등장하지 않는다. 열두 개의 단편은 각각의 주인공들이 보내는 각기 다른 `고독한 밤`의 기록들이고 그 밤의 이야기들은 달콤하지만 뒷맛은 씁쓸한 `코코아`의 향기를 품고 있다.열두 단편의 이미지를 모아 외연을 확장한 이 책의 제목은 아마도 고독한 밤을 보내는 청춘의 그녀들에게 작가가 보내는 따뜻한 위로일 것이다.독특한 유머와 해학, 연애와 현실의 거리에 대한 날선 통찰, 이야기가 끝나면 `모두 그렇구나` 하는 보너스 같은 안도감까지 선사하는 다나베의 소설은 극적이기보다 일상의 풍경처럼 잔잔하고 유머러스하게 전개되지만 이 책에 실린 `개양귀비 사랑`이나`봄을 알리는 새`같은 단편은 그 어떤 애달픈 사랑의 글보다 극적으로 소멸의 허무와, 성인의 사랑을 강렬하게 형상화한다. 이렇듯 소녀의 로맨티시즘과 성인의 리얼리즘이 공존하는 다나베 세이코의 연애소설은 노련한 여가수가 관객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치며 부르는 노랫가락과 같다. 이 가수는 때로 장난기 가득한 은밀한 가사로 듣는 이의 얼굴을 붉히게 하고, 절절한 멜로디로 가슴을 무너뜨렸다가 뜻밖의 제스처로 긴장감을 유발하면서 경탄스러운 무대를 만들어나간다. 관객은 사랑을 노래하는 작지만 폭발적인 이 무대를 통해 세상의 관계를 되새김하고 다양한 조화로 가득찬 삶 속에 떠오르는 `연애`의 소소하지만 알짜의 재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22

“21세기 느헤미야 배출 이어져야”

“만약 네가 한동대학교 총장이 된다면, 포스텍과 같은 연구 중심대학보다는 교육 중심의 산업체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길이다.” 당시 포스텍 초대 총장이셨던 형님 김호길 박사가 동생(당시 김영길 KAIST 교수)에게 한동대 총장직을 만류하면서 덧붙여 말한 내용이다.과학자로서 그리고 한동대 총장으로서 학계와 교계에 널리 알려진 김영길 총장의 간증집 `신트로피 드라마`가 출간 됐다.신트로피(Syntropy)란 엔트로피(Entropy)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물질세계와는 달리 생명체에서는 무질서 상태에서 오히려 질서도가 증가돼 질서 상태로 변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질서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로서 결국 신트로피는 죄라는 인간의 타락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영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서로 다른 이야기의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된 책은 1부에서는 무신론 과학자에서 시작해 하나님을 만나고 한동대 총장으로 감옥까지 가게 되는 저자의 간증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인류 사상 및 문명의 변화를 통해 바라보는 한동대학교의 21세기 교육철학과 사명을 제시하며, 이에 따른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묵상이 담겨 있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 같지만 각각의 주제는 하나님의 회복, 신트로피 드라마이다. 책은 각 개인의 삶에서 가정, 공동체, 전 세계 각 나라, 크리스천 리더십을 통한 사회, 창조된 모든 피조세계 영역까지를 관통하는 회복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내년 1월31일 퇴임 앞두고 간증집을 낸 김영길 한동대 총장. 김 총장은 지난 1994년 초대 총장에 임명된 뒤 파격적인 교육실험, 기독교정신에 기반한 도덕성 교육을 통해 오늘의 한동대로 성장시켰다.김영길 총장은 “한동대는 하나님의 대학으로서의 정체성과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나감으로써 세속화되지 말아야 한다”며 “한동대를 통해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다시 쌓고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신트로피의 드라마를 써가는 21세기의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가 계속해서 배출될 것을 기도한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 생명과 회복의 신트로피 부흥 운동이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나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말했다.1995년 기독교적 설립 이념을 바탕으로 개교한 한동대는 `배워서 남주자`, `세상을 바꾸자`는 교육 철학을 가지고 전공 간의 장벽을 허무는 통합적 교육, 정직과 성실을 기반으로 하는 전인교육, 지식정보화 기술 및 첨단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21세기형 글로벌 교육을 추구해 왔다. 한동대 하면 떠오르는 책 `갈대상자`(김영애 저)가 한동대의 기적과 감동을 노래한다면, 이 책은 하나님의 창조와 회복의 법칙을 바탕으로 쓰여진 간증을 통한 신앙의 입문서이자, 저자의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 및 교육 철학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나눔의 장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15

아담 창조서 최후심판까지… 24점 명화 수록

명화를 통해 성경을 만날 수는 없을까. 성경의 가르침과 주제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도전적 주제였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거장들은 성서를 소재로 한 명작들을 다수 남겼다. 서양사를 전공한 학자(경희대 명예교수)이자 신앙인(분당 샘물교회 장로)인 이석우 선생은 자신이 그림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을 단련해왔다고 고백하며 명화에 담긴 예술가들의 열망과 고뇌, 성경의 가르침을 전한다.`명화로 만나는 성경`(아트북스)은 `아담의 창조`에서 `최후의 심판`까지 구약과 신약의 주요한 사건과 이를 다룬 24점의 명화를 시간순으로 아우르는 가운데 이 작품 속 사건의 의미와 함께 화가가 자신의 신앙적 고뇌와 진실을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살핀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가 `아담의 창조`에서 아담의 신체를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남성의 몸에 완벽히 구현되었다는 믿음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고, 뒤러가 `네 명의 성스러운 사람들` 아래 루터 성경의 문구를 넣은 것은 당시 독일을 휩쓴 종교개혁을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대목이 그렇다.루벤스의 걸작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을 언급하면서는 영광과 그늘이 함께한 다윗의 삶과 루벤스의 삶ㅡ그는 화려한 외모와 천의무봉의 솜씨를 갖추었지만 자신의 화풍을 이루지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렸다ㅡ이 교차하는 지점을 짚어내는데, 성경 속 인물의 삶과 화가의 삶을 병치하는 대목이 흥미롭다.저자에 따르면 성화는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문제인 죄와 고통과 죽음, 그 한계를 다루고 있으며 빛과 어둠에 대한 선택을 우리에게 직접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화로 만나는 성경`은 `명화로 보는 성경책`이자 이석우 교수의 신앙 고백집이다.하지만 단순히 성서를 소재로 한 작품을 소재주의적으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기독교 미술사의 걸작으로 남을 만한 작품을 골라 성경과 역사, 미술사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을 바탕으로 `예술과 신앙의 만남`을 주선한다.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를 자신의 믿음에 대한 고민과 함께 엮어내 성경을 읽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성화를 상징 등 미술사적 관점에서 살핀 책은 많았지만, 신앙의 관점으로 살핀 책은 드물다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할 만하다.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지은이가 그림과 대화하면서 인생의 문제를 질문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를 발견하는 대목이다.조르주 드 라 투르의 `욥의 고통`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왜 주셨는지,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묻고 두초의 `산 위에서 시험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정신적 삶의 가치관(“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을 곱씹는다.특히 하나님의 섭리대로 산다는 명목으로 자칫 인간이 책임져야 할 영역마저 하나님께 미루지 않는지 기독교인으로서 돌아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삶에서 부끄럽고 죄에 빠진 부분이 많았지만 감사하게도 어둠의 길로 가지 않고 빛의 길을 향해 갈 수 있었다”라는 지은이의 신앙고백이 진실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러한 윤리적 성찰 때문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15

재개발이익 뒤에 가려진 처절한 가정폭력…

한국일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수상작가 황정은(37)씨의 장편 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가 출간됐다. 황정은은 여장 노숙인 앨리시어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이제까지 그의 소설에서 만나보기 어려웠던 황폐하고 처절한 폭력의 세계를 만들어냈다.황정은은 지난 2005년 등단한 이후 지난 팔 년간 두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내보냈다. 적합한 수식어를 찾기 어려워 그저 “황정은풍”이라고만 이야기될 수 있을 뿐인, 그 누구보다도 개성적인 소설세계를 구축해 왔다. 두번째 장편소설 `야만적인 앨리스씨` 역시 그렇다. 책의 문을 여는 순간 그간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선 목소리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쏟아져나오는 듯한 환상에 빠져든다. 마치 앨리시어의 목소리를 소설 속으로 그대로 옮겨놓기라도 한 듯 말이다. 문장으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그리하여 결국 읽는 이의 귀에 들리도록 만드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앨리시어는 재개발을 앞둔 `고모리`에 살고 있다. `무덤`이라는 어원을 가진 이곳은 식용을 목적으로 길러지는 개들을 가둔 개장, 그 개들의 뼈와 내장과 가죽을 먹고 큰 은행나무, 너클크레인과 폐지더미로 둘러싸인 고물상, 모래언덕으로 이뤄진 공사장과 악취가 풍기는 하수처리장, 폐쇄된 단추공장 등으로 이뤄져 있다. 무엇보다 이곳을 황무지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살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단단히 한몫을 챙겨 떠나기 위해 남은 마을 사람들 때문이다.앨리시어와 그의 어린 동생은 어머니에게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하며 살아간다. 그것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수시로 벌어지는 이들 모자의 일상 자체다.“내가 세라고 했지? 세라고 했는데 왜 세지 않냐. 몇 대까지 맞았는지 세지도 못하냐. 잊어버렸냐. 너는 그 정도 머리도 없는 짐승이고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하면 되겠네? 잊어버린 네가 순전하게 잘못했으므로 처음부터 다시 하면 되겠다. 세라 머리부터 꼬리뼈까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십 씨발 십이 십삼 사 오 육 칠 팔 다음이 뭐냐 응? 다음이 뭐야?”앨리시어의 아버지는 이러한 폭력적인 상황에 한없이 무심할 뿐이며 마을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이들은 한 몸처럼 오로지 재개발 이후 치솟을 땅값에만 혈안이 돼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15

감동·충격·격려가 있는 詩

2007년 `젊은시`에 선정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김현욱(36) 시인의 첫 시집 `보이저 씨`(도서출판 애지)가 출간됐다.타인의 아픔, 소외된 민중의 삶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시적 위트와 유머로 풀어낸 그의 시에는 자위와 자폐, 기교, 허무, 퇴폐, 유희로 가득한 최근의 시단 경향과는 달리 우리네 삶과 사람의 향기, 눈물, 사연, 희망으로 가득하다.그의 시를 두고 이승하 평론가(중앙대 교수)는 “소재도 풍부하고 주제도 다양한 시인의 사회적 관심사가 이룩한 시적 성취도를 높이 평가한다”고 해설하고 있고, 배창환 시인은 그의 시는 “역설과 반어, 때로 냉소의 언어까지 동원하여 뿌리와 줄기, 잎까지 철저하게 해부하고, 여러 각도로 조명기와 현미경까지 들이대어 진실의 핵심을 파고든다”고 평하고, 고증식 시인은 “그는 단순한 산책자가 아니라 탐험가에 가깝다. 자신의 온 `인생을 볼모`로 최고 순도의 `우라늄 235`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찾아 헤맨다”고 평했다.시집을 묶고 난 후의 소감에 대해 김현욱 시인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누군가 시집은 묶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만나고 헤어졌던 수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연에게도 이별을 고합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詩作)하겠습니다. 지금, 여기의 삶과 사람의 이야기를 또박또박 적어나가겠습니다. 미사여구 없이, 포즈 없이, 있는 그대로, 보이저 씨처럼, 삶의 우주를 향해, 사람이라는 크고 작은 행성을 향해, 두려움 없이, 뚜벅뚜벅.” 시인의 말처럼 55편의 시는 모이고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시집이 되어 우리에게 뜨거움과 감동, 충격과 웃음, 그리고 위로를 전한다.“포스코 사거리 한 귀퉁이에 이글루가 들어섰다북극곰의 어금니로 말뚝 박고푸르뎅뎅한 얼음천막으로 서슬 퍼런 집이마에 검은 띠 두른 에스키모인이결가부좌로 들어앉아 있다불의 경계 밖으로 쫓겨나면누구나 날고기를 먹어야 하는 법이따금 확성기에서비정규직 철폐라는 낯선 낱말들이대낮 오로라로 펄럭거리다가 주저앉는다이곳은 불의 나라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경고에용광로의 교시를 받드는 곳불씨를 가진 사제만이수많은 목숨의 도가니마다불 지필 수 있는 땅에고드름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는에스키모인이 천천히 녹기 시작한다이글루 둘러싼거대한 불의 바리케이드 틈으로차가운 희망이 뚝뚝 떨어질 것이다얼음불꽃으로 타올라 세상 덥힐 때까지”― `이글루` 전문▲ 김현욱 시인우주의 산책자 보이저호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김현욱 시인은 지금도 은하계 `어딘가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가 유영하듯 걸으며 전송해오는 사진에는 곳곳의 행성 모습이 가감없이 담겨 있는데, 그의 렌즈가 유독 자주 머무는 곳은 소소한것들이 `깨지고 잘려`가며 만들어 놓은 후미진 자리이다. 특히 `녹색`을 `우주 최고의 문명`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농부들 아니 외계인들`을 향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그는 단순한 산책자가 아니라 탐험가에 가깝다. 자신의 온 `인생을 볼모로` 최고 순도의 `우라늄235`를 얻기 위해 쉬지 않고 찾아 헤맨다. 그 우라늄을 원료로 한 `핵폭탄` 같은시를 써보겠다는 다부진 꿈을 안은 채 오늘도 그는 `일상에서 꿈에서 무의식`에서 고비샅샅 우주의 망망대해를 훑고 있는 것이다.`젊은` 김현욱의 시는 그보다 더 젊다. 싱싱한 상상력이 시의 줄기를 타고 봄물 오르듯 솟아 올라와 꽃을 활짝 피운다.그가 재배한 `꽃`의 목록에는 무한 생존 경쟁에서 벼랑끝으로 밀려난 이 시대의 구조적인 희생자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지하철 땅바닥에 드러 누운 노숙자, 정리해고된 노동자, 빚으로 음독해 세상을 하직한 농군과 취업에 오래도록 실패하고 결국은 화장터로 간 고향친구와, 생존의 망루를 지키다 산화해 간 용산 철거민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노래하는 대상에 대해 따뜻하고 진솔한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과 반어, 때로 냉소의 언어까지 동원하여 뿌리와 줄기, 잎까지 철저하게 해부하고, 여러 각도로 조명기와 현미경까지 들이대어 진실의 핵심을 파고든다. 대상이 결코 만만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모더니스트이면서 사랑을 아는 리얼리스트의 길을 걷고 있다.“보이저 호가 인류를 위해 태양계를 벗어나 우주 끝까지 가고 있듯이 우리네 삶과 사람을 위해 시의 우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겠다”고 말하는 김 시인의 두 번째 항로가 벌써부터 기대된다.김현욱 시인은 포항 출신으로 대구교대를 졸업했다. 200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시가,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와창작문학상, 해양문학상,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을 받았으며 한국작가회의 및 포항문인협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08

음식이 주는 따뜻한 위로와 희망

매일 아침 7시 클래식 FM을 통해 우리의 아침을 깨워주던 KBS 아나운서 위서현의 첫 번째 에세이 `뜨거운 위로 한 그릇`(이봄)이 출간됐다. 음식을 좋아하고, 심리상담학을 전공한 저자가 음식을 매개로 일상에서 만난 깨달음, 음식이 주는 따뜻한 위로, 자신의 내면과 만나는 방법,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치유를 말한다.사람에게 지치고, 세상살이에 고단해질 때면 그 어떤 말보다 한 그릇의 음식이 진하고 깊게 마음을 치유해줄 때가 있다. 여행에서, 혹은 일상 속에서 만난 음식과 음식이 이어준 인연들을 통해 지친 삶이 어떻게 위로받고, 치유되며, 새로운 희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현대인들, 특히 꿈을 잃고, 삶의 지표를 잃어 세상에 도전하기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이 든든한 위로를 받고, 그들 스스로 내면의 힘을 발견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이 책에 담았다고 위서현은 말한다.음식을 소재로 해 마음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면서도, 글 속에서 인생의 전환점과 계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또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 성찰의 기회를 마련하는 이 책에는 지은이의 전공분야인 `상담`이 잘 녹아 있다.위서현의 `상담`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다. 그렇다고 자신의 이야기만을 풀어놓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음식을 통해, 삶의 힘겨움과 고통을 대면하고 그 순간을 겪어야만 하는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동참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지은이가 `음식`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며, 조곤조곤한 말투로 친절하게 마음을 설명하기 때문이다.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위서현은 이화여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연세대대학원에서 심리상담학을 전공했다. KBS 아나운서로 일하며 뉴스, 교양 프로그램, 1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치열한 인생만이 청춘이라고 믿으며, 1분 1초를 쪼개어가며 방송국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접하게 된 심리상담학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느릿하고 여유롭게 바뀌었다. 지금은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음악과 글을 통해 청취자들과 솔직한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클래식 FM의 `노래의 날개 위에`를 진행했고, 최근까지 매일 아침 7시에 `출발 FM과 함께`를 통해 청취자들을 만났다. 현재 1라디오의 `책 읽는 밤` 진행을 맡고 있다.틈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골목길과 재래시장, 숨어 있는 맛집들과 케이크 가게를 찾아다니는 그녀는 글과 음악, 그리고 한 그릇의 음식이 주는 사소하고도 커다란 위로를 믿는다.위서현은 상담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만나고, 이해하고, 공감하라`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그 어떤 이론이나 심리상담 기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만남에서는 절로 치유와 성장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지은이의 말처럼 마음과 마음이 맞닿는 곳, 즉 소울푸드를 찾아내 독자와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문제는 이것이고, 당신의 문제는 이것이니 이제부터 해결해보자는 방식이 아닌, 먼저 공감의 지점을 살며시 꺼내든다. 당신과 나의 소울푸드가 일치하는 그곳에서 마음이 열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08

`살인 조감도` 그린 당돌한 여고생은…

영화 `버스, 정류장` 시나리오 작가인 이재찬의 첫 장편소설 `펀치`(민음사)는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화제의 작품이다. 심사위원들로부터 “제목처럼 강렬하고 가혹하며 `잘 썼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은 `펀치`의 주요 모티프는 극심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존속살해`다. `살인의 조감도`를 기획하는 당돌한 여고생 `방인영`은 마치 한니발 렉터처럼 40대 계약직 공무원 `모래의 남자`의 심리를 꿰뚫고 그가 완전범죄를 대행해 나갈 수 있도록 철저히 조종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소녀의 폭력성 그 자체가 매혹적이면서도 논쟁적인 작품”인 `펀치`는 제목 그대로 “독자들의 윤리관과 도덕관”에 그리고 “삶에 남겨 둔 약간의 기대에”조차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난폭한 냉소와 당돌한 폭력으로 무장한, 이 “반성하지 않는 10대 소녀라는 캐릭터는 그녀가 지닌 생생한 살의와 평면성으로 인해 잔혹함을 더”하며 한국문학에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탄생을 예고한다. 또한 진중한 문제의식을 예리하고 경쾌한 말맛으로 그려 낸 “반항이 거세된 세대들의 자해적인 자화상”이기도 한 작품 `펀치`는 한동안 문단을 유행처럼 휩쓸었던 `루저 문학`과는 또 다른 “새로운 서사의 출구”와 방향을 제시하며 독자들로 하여금 이 매혹적인 등장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게임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이재찬은 김태우·김민정 주연의 영화 `버스, 정류장`의 시나리오 작가답게 현장감이 물씬 풍겨 나는 여고생들의 언어와 심리묘사, 감칠맛 나는 생생한 리듬감으로 작품 전반을 경쾌하게 장악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내용은 “제목처럼 강렬하고 가혹하다.” 친부모를 살해하기 위해 `살인의 조감도`를 완벽하게 기획하는 여고생의 이야기란 그 이유를 막론하고 폭력과 연결된다. 그리고 폭력에 관한 이야기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분열과 모순에 빠뜨리게 하며, 그 누구도 패자일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에 언제나 비극적이기도 할 것이다.방인영의 시점을 따라 `펀치`를 읽어 가다 보면,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독자들은 인영의 편에 서서 사건의 흐름을 주시하게 된다. 그로 인해 이 소설은 선이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과 완전범죄가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 사이의 어느 애매한 지점에 독자를 내려놓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08

한국어·영어로 동시 읽는 `한국대표 소설`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단편 작품을 한글과 영어로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시리즈(이하 `바이링궐 에디션`)의 세 번째 세트가 출간됐다. 아시아 출판사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에서 나온 가장 중요하고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들을 선별해 총 100권의 시리즈를 기획했다. 이번에 출간된 세 번째 세트는 서울, 전통, 아방가르드라는 카테고리로 나누어 김소진, 조경란, 하성란, 김애란, 박민규(서울), 박범신, 성석제, 이문구, 송기원, 서정인(전통), 박상륭, 배수아, 이인성, 정영문, 최인석(아방가르드) 등 한국의 대표 작가들의 단편 소설들을 기획, 분류해 수록했다.한국 대표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도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꾼 주요한 사건들과 그에 응전해 변화한 한국인의 삶의 양태를 살필 수 있다. 이 시리즈는 세계인들에게 문학 한류의 지속적인 힘과 가능성을 입증하는 전집이 될 것이다.이 시리즈는 하버드 한국학 연구원 및 세계 각국의 우수한 번역진들이 참여해 외국인들이 읽어도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는 손색없는 작품으로 재탄생해 원작의 품격과 매력을 살렸다. 영어 번역의 질을 최우선으로 삼고 브루스 풀턴(브리티시 컬럼비아대), 테오도르 휴즈(컬럼비아 대학교), 안선재(서강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전승희(하버드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연구원) 등 한국 문학 번역 권위자들은 물론 현지 내러티브 감수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그간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느껴지는 외국 문학이라는 어색함을 벗어던진, 영어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받았다.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동아시아학과 한국문학 교수인 테오도어 휴즈와 하버드대학교 동아시아학과 한국문학 교수인 데이비드 매캔이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시리즈의 출간을 반기며 추천사를 썼다. 테오도어 휴즈는 이 시리즈가 세계의 독자들에게 “한국 문학의 풍부함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 될 것으로 추천했다. 데이비드 매캔은 “최상의 번역자와 편집자들이 작업한 시리즈”로 칭찬하며 국경과 언어의 벽을 넘어 사랑받는 한국 문학에 대한 기대를 표현했다.이번에 출간하는 세트3은 서울, 전통, 아방가르드라는 세 카테고리로 나뉘어져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익숙한 문제의식이지만 20~30대 젊은 세대나 외국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작품에 대한 짧지만 심도 있는 해설과 비평의 목소리, 작가 소개를 수록하였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작품의 해설을 담당해 원작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와 작가가 추구하고자 한 가치 등을 한국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외국의 독자들도 알기 쉽도록 서술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3-11-01

`대형 로펌` 꿈꾸는 잘못된 변호사 삶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과 장편소설`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통해 유연하면서도 거침없는 소설 쓰기를 선보인 최제훈이 신작 장편소설 `나비잠`(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작가가 한국일보문학상(2011)을 수상한 이후 내놓는 첫 책이며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제목으로 작년 한 해 동안 `웹전문지`의 장편 연재 페이지를 뜨겁게 달군 바로 그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한 인물의 삶을 중심에 놓고 그의 의식을 따라가며 써보고 싶었다는 작가는 이번 소설에서 이야기의 재료만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내면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최요섭`은 대형 로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법무법인 사해(四海)의 변호사다.그에게는 법조계에서의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없다. 윗선에 어필할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관뿐. 그는 사해에서 뒤가 구린 사건들을 도맡은 덕분에 `피 묻은 칼`을 맡겨도 좋을 팔 안쪽 사람으로서 깊은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다.`최요섭`의 대사와 행동은 도시에 안착한 사람들의 여러 생존 방식 중 어느 한쪽을 대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아들의 진학을 위해 뒷돈을 쓰거나 자기만 살겠다고 남에게 누명을 씌우는 건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질서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먹이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연재 당시의 제목과 부제목에서 얼비치는 것처럼 이 소설의 한 축에서는 불온한 판타지가 강력한 서사적 동력을 제공하고 있고, 다른 한 축에서는 냉혹한 현실의 이야기가 판타지와 공조하며 숨 가쁜 흐름을 만들어낸다.서로 다른 이야기인 듯 두 이야기는 평행선을 그리지만, 현실의 수많은 재료들이 새로운 맥락을 부여받아 재등장하곤 한다.기발한 발상과 치밀한 계산으로 곳곳에 매설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겹침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더라도 무심코 읽어내리다 보면 불현 듯 엄습하는 기시감과 함께 뒷덜미에 얹히는 짜릿함을 경험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01

“여행길 오르면 모두 이방인”

한국문단을 이끄는 작가 여섯명의 여행, 그 특별한 기록을 한데 묶은 산문집 `누구나, 이방인`(창비)이 출간됐다.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으며 창비 문학블로그 `창문`에 연재됐던 글을 엮은 것으로 이혜경, 천운영, 손홍규, 조해진, 김미월 다섯명의 소설가와 시인 신해욱의 산문이 연이어진다. 여행기로서의 풍부한 감성을 전달하는 것은 물론,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문학에 대한 고민과 사유의 흔적을 엿볼 수 있어 깊이있는 산문을 기다려온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행길에 오르면 누구나 이방인이 된다. 여기, 여섯명의 작가들은 여행을 떠나는 저마다의 이유를 안고 낯선 땅으로 향했다. 누군가는 알래스카의 곰을 보기 위해, 누군가는 운명이 우연처럼 다가와서, 또 누군가는 그저 가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가방을 꾸렸다. 그런 그들이 선택한 곳은 여행 애호가들의 여행지 리스트에 있을 법한 지역들이다. 알래스카, 터키, 몽골, 라오스, 카리브 해, 그리고 폴란드까지. `누구나, 이방인`은 각종 여행안내서에 소개돼 그 이름만으로 기시감을 주는 여행지에 싫증이 난 이들이나, 보다 특별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의 갈증을 풀어줄 것이다. 게다가 여행기를 들려주는 작가들의 면면 또한 매력적이다. 중견 소설가 이혜경을 비롯 이미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천운영, 손홍규 소설가와 젊은 활력으로 자신들만의 작품세계를 쌓아가고 있는 조해진과 김미월, 간결한 언어 사용으로 정평이 난 신해욱 시인이 여행지에서의 정서를 오롯이 기록했다. 짧게는 몇달, 길게는 일년여의 시간 동안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산 그들은 타지에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고민하기도 하고 새 소설의 영감을 얻어 집필을 시작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누구나, 이방인`을 읽으며 작가들의 사유의 여정에 함께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누구나, 이방인`의 첫 목적지는 알래스카. 소설가 천운영이 그곳의 정취를 전한다. 강렬한 서사와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천운영은 이번 산문에서 재치 있고 유머 넘치는 새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스타카토처럼 튀어오르는 문장들로 이어지는 여행기의 꽃은 오로라다.손홍규와 조해진 소설가가 선보이는 여행기는 좀더 둔중한 울림을 주는데, 그들은 여행을 스스로의 내면을 더욱 깊이 바라보는 기회로 삼는다. 폴란드로 떠난 조해진은 그곳의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방인의 삶을 산다. 늘 안개가 낮게 깔린다는 폴란드의 정취는 작가의 존재론적인 고민과 어우러져 더욱 깊은 인상을 남긴다.손홍규 소설가는 여행기의 시작부터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런 그를 작은 방에서 몰아낸 건 벗을 만나고 싶다는 강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벗이란, 작품으로 접한 작가들이다.머나먼 이국의 벗을 어렵게 만나고 돌아온 그는 이렇게 다짐하듯 읊조린다. “터키에서 돌아온 이유는 나도 누군가의 벗이 되고 싶어서였다”(153면) 누군가의 벗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외로운 고투를 할 그에게 터키에서 보낸 얼마간은 분명 오랜 시간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듯하다.독자들을 라오스로 이끄는 건 신해욱 시인이다. 시인은 여행을 하는 동안에도 언어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여행을 떠날 때 가장 먼저 차오르는 두려움은 바로 소통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언어를 잃어야만 좀더 평화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신해욱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함께 낯선 말을 쓰는 거라면, 낯선 말은 종종 낯선 대로 좋다. 몇개의 단어와 보디랭귀지를 섞어 최선을 다해 뜻을 전하고 최선을 다해 귀를 기울이고 최선을 다해 맥락을 생각한다. 길거나 짧은 여정에 대해,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가족에 대해, 헤어진 애인에 대해, 젓가락을 잡는 방법에 대해.”(210면)세계 곳곳으로 떠난 작가들이 품고 돌아온 빛나는 추억은 `누구나, 이방인`, 이 특별한 여행수첩에 빼곡히 적혀 있다. 갈피갈피마다 꽂혀 있는 여행지의 사진은 독자를 한달음에 오로라 앞으로, 메콩 강 위로, 고비사막 한복판으로 데려다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1-01

직설적으로 그린 삶의 모순

2005년 스물한살의 어린 나이에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후 저돌적인 에너지로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며 한국문학의 가장 개성적이고 문제적인 작가로 성장해온 소설가 김사과(29)의 신작 장편 `천국에서`(창비)가 출간됐다. 더 넓어진 시선으로 우리가 처한 이 출구 없는 세계의 전모를 조망하며 그 균열을 곧장 가로질러 나아가는 그의 패기 넘치는 행보가 놀랍고도 미덥다. 소설은 주인공 `케이`가 뉴욕에서 매력적인 여자아이 써머와 그녀의 남자친구 댄과 어울리며 공연과 파티와 마약으로 이어지는 뉴욕의 문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세련되고 근사한 이른바 힙스터들의 세계 속에서 그녀는 말할 수 없는 고양감에 젖어 반짝이는 여름 한철을 보낸다.그러나 꿈 같은 나날은 그녀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끝날 수밖에 없다. 현실의 삶으로 돌아온 케이는 그후로 모든 것이 시시하게만 느껴지고, 그러던 어느날 홍대 앞의 한 술자리에서 뉴욕에서 산 적이 있는 재현을 만난다. 그리고 소설은 서울과 광주와 인천 등으로 이어지는 여정을 따라 그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인물들과 그녀가 겪는 내적 편력을 그려나간다. 잠실 출신의 부유한 여대생 친구, 운동권 출신으로 독일에서 반문화운동을 경험하고 돌아와 문화기획 일을 하다 광주에서 통닭집을 운영하는 중년의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줄곧 인천의 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의 초등학교 동창 지원과 그의 가족 등 그녀는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자신을 에워싼 불안과 마주하게 된다.눈길을 끄는 것은 이야기 틈틈이 끼어드는 작가적 논평이다. 주인공 케이와 주변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뿐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이 지닌 사회적 배경과 이력에 대한 설명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며 길게 서술되고, 그것이 소설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거의 모든 인물들에 대해서 그리고 주인공 케이와 그를 둘러싼 현실 자체에 대해서도 작가는 직접적인 논평을 덧붙이기를 잊지 않는다.소설가 김사과그런 논평들은 주인공 케이의 시선과 때로는 일치하기도, 때로는 거리를 두기도 하면서 시종 주인공에 대한 동일시를 교란한다. 한편으로 김사과 소설 특유의 것이기도 한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 넘치는 대화가 그런 논평과 어울리면서 `천국에서`만의 독특하고 절묘한 원근감이 생겨난다. 주인공 케이의 고민과 방황이 그것대로 절실한 감정으로 다가오면서, 또 한편 그것이 내포하는 균열과 모순이 선명한 형태로 드러나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국에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이기도 하다.케이가 겪는 절실한 방황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도 누구도 그녀에게 해답을 주지 못한다. 뉴욕의 경험을 이해할 세련된 인물로 보였던 재현도 실상은 허영에 찬 무기력한 백수일 뿐이고, 그와는 반대로 성실하고 착해 보이던 지원은 그와는 다른 세계에 속한 케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찾아간 통닭집 남자마저 그녀에게 또다른 환멸을 안겨준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는 써머와 댄이 속한 세계마저도 그녀가 예상하지 못했던 파국을 드러낸다.하지만 그것은 이미 케이 자신에게 내재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평범한 것을 경멸하고 세련된 취향을 섭렵하는 것으로 불안을 떨치고 스스로를 증명하려 하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바로 그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 자체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이 케이가 직면한 현실이다. 소설은 케이와 같은 감각의 소유자가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그 불안과 자가당착적인 환멸을 냉정한 묘사와 생생한 대화, 직설적인 진술을 교차하며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그럼으로써 소설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그 불안과 환멸의 바탕에 놓인 세계 자체의 몰락이다. 그리고 이것이 김사과 소설의 눈에 띄게 달라진 면모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25

관계는 태도·경향보다 훨씬 경험적!

박주택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앞선 시집 `시간의 동공`이후 6년 만이다. 박주택은 시인 자신이 경험과 고통을 시에 각인할 때 비로소 시가 불멸의 힘을 얻는다고 말한 바 있다. 시란 “불멸을 꿈꾸며 써야 날카롭게 벼리어져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꼿꼿하게 허공을 가른다” 던 시인은 이제 시를 통해 외부와 서로의 존재성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형상과 내용의 괴리가 끊임없이 훼방을 놓고 있다.시집 뒤표지에 실린 시인의 산문에는 두 개의 글과 책 제목이 등장하는데 발표연도와 발행연도가 이상하다. `세속적인 호의와 고의적인 예감`은 평론인 듯한데 2027년 발표라고 돼 있고 `메스꺼운 유리`는 시집이라는데 2033년 발행으로 밝혀놓았다. 아직 없는 글과 책이란 건 물론이거니와 지금으로선 시인이 해당 연도에 같은 제목의 글과 책을 내놓을지도 알 수 없다. 어떤 의미로든 형식과 내용은 서로 구성할 수 없는 허구나 가상의 것인 관계적 오류로서만 존재한다.인용된 진술을 참고해 `세속적인 호의와 고의적인 예감`이나 `메스꺼운 유리`를 일종의 형상으로 읽어볼 수 있겠다. 그랬을 때 우리는 두 제목에 이어지는 진술, 즉 “반양식적 모델을 향한 가치와 연결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자칫 무례한 현실의 형식 혹은 억압의 형식과 연결”된다는 얘기나 “자신이 아닌 것으로 익어가는 생성/폐기에 관한 지형”에 대한 경고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시인이 꼬집고 비트는 형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우스갯소리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마저도 시인의 의도일 것이므로 긴장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다.산문 형식의 `시인의 말`에서 한 행을 따로 차지하고 있는 문장에 유독 눈이 간다.“관계는 태도와 경향보다 훨씬 경험적이다”시인은 지금 이 시집을 통해 `관계`를 정의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경험을 들추고 있다. 자신의 경험과 고통을 시에 각인해야 한다는, 앞 시집의 뒤표지 글에서 선언하듯 쓴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시인의 경험이 시에 각인될 때 형식은 삽시간에 뒤틀린다. 이를테면 이웃집과의 벽은 국경으로(`국경`), 막 도살된 소는 그저 하얗게 누워 있는 물건으로(`가죽이 벗겨진 소`) 바뀌는 식이다. `덫`에서는 지구의 형식이 얼음인 셈이라고 하고 인형이 아름다운 것이나 십자가가 능력을 유지하는 것 모두가 형상의 유머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시인이 옮겨온 이들 유머는 더 이상 웃기지 않을뿐더러 정색하고 들어야 한다.“언제나 그랬지(…)흐린 하늘 아래 고역을 이긴 노파들 모여 불을 쬔다, 고개를 잔뜩 움츠린 채 좌판 위로 가라앉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상점이 된 사람… 고구마와 장작으로 이루어진 사람(…)십자가도 타이르지 못한 무엇을 생각하는지눈에 덮여가는 것을 본다”-`크리스마스` 부분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은 채 씌어지고, 옮겨지는” 허상의 한복판을 휘저어놓았다. 이때 시인은 형식의 허상을 혐오하는 동시에 연민했다. 시인에게는 이 지구의 삶마저도 관성화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지구”를 요청하는바, 이 시집에 응어리처럼 자리 잡은 것은 지독한 우울과 절망의 바닥을 치고 올라올 때 얼핏 보이는,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일지도 모른다.“지구 위로 별자리 옮기네 계절은 바뀌고 바뀌어 태양과 도네 우리는 우리는 울 줄을 모르고 답할 줄도 모르네 비가 내릴 때까지 꽃이 필 때까지 날짜는 우리를 찍어내고 지구의 이쪽이 아프고 지구의 저쪽이 아퍼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 우리는 날마다 전시되고 비육되네” -`도플갱어`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25

고향 너머 확대되는 죽음 세계…

지난 1990년 계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이래 무한한 상상력으로 도발적인 시적 실험을 계속해온 시인 김영산의 여섯번째 시집 `하얀 별`(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백색왜성을 뜻하는 `하얀 별`이라는 제목처럼 남김없이 불타 이제는 무덤이 된 별, 폐허가 된 세계를 위한 깊은 애도가 시편들마다 담겨 있다.이 시집은 `詩魔-십우도` 연작 10편과 `詩魔-제7계`로 총 11편의 시가 묶였다. `시인의 말`에서 언급되었듯 이 시들은 장시가 아닌 `시설(詩說)`이라는 종래에 없던 형식으로 씌어졌고, 이는 “시와 소설 혹은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어 시가 가지는 가락과 모든 산문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시의 장편소설”이자 “시의 대하소설”이다. 낱낱이 독립적이지만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이 시들은 고향과 지구, 우주를 넘어서며 점층적으로 확대되는 기묘한 죽음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이 시집은 하나의 극단적인 선언에서 시작된다. 지구는 장례 중이고, 별은 무덤이고, 산 자는 송장이고, 생가는 폐가며, 집은 상여고, 여행은 자폐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독자들에게 김영산이 제시하는 `죽음`의 상황을 대면하여 “이게 오늘의 현실인가?”라고 물을 게 아니라, “현실이 이와 같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치러낼 수 있을 것인가?”를 우선 묻고, 그 뒤에 이 독서 경험을 통해 “저 가정된 상황을 얼마간 포함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인식하고 변화시키는 데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죽음의 상황에 대한 경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25

희비극 뒤섞인 보통사람 삶이란…

미당문학상을 수상하고 `미래파` 논쟁을 주도했던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권혁웅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창비)가 출간됐다. 시대 풍자의 묘미를 보여준 `소문들`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들이 어울려 지지고 볶는”(오연경, 해설) 삶의 현장을 조망하는 명료한 시선과 풍부한 감수성으로 일상의 다채로운 풍경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다.감각과 사유의 기반을 `세속의 자리`에 두고서 “일상성을 뒤집는 섬뜩한 인식과 능청스러운 해학”(김기택 시인)으로 일상의 풍경 속에서 삶의 세목을 짚어내는 예민한 통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돋보이는 시편들이 슬픔과 유머를 동반하며 잔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당문학상 수상작 `봄밤`을 비롯해 모두 59편의 시를 수록했다.“전봇대에 윗옷 걸어두고 발치에 양말 벗어두고/천변 벤치에 누워 코를 고는 취객/현세와 통하는 스위치를 화끈하게 내려버린/저 캄캄함 혹은 편안함/그는 자신을 마셔버린 거다/무슨 맛이었을까?/아니 그는 자신을 저기에 토해놓은 거다/이번엔 무슨 맛이었을까?/먹고 마시고 토하는 동안 그는 그냥 긴 관(管)이다/그가 전 생애를 걸고/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 동안/침대와 옷걸이를 들고 집이 그를 마중 나왔다/지갑은 누군가 가져간 지 오래,/현세로 돌아갈 패스포트를 잃어버렸으므로/그는 편안한 수평이 되어 있다/(…)/봄밤이 거느린 슬하,/어리둥절한 꽃잎 하나가 그를 덮는다/이불처럼/부의봉투처럼”(`봄밤`부분)시인 권혁웅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시를 `미래파`라고 명명했던 것과 사뭇 달리 권혁웅의 시는 전통 서정시에 가깝다. `시는 세속의 자식`이라 여기는 시인은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매일매일의 소소한 일상과 희비극이 뒤섞인 보통사람들의 삶에 주목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서 거짓으로 “야근과 당직을 마치고 퇴근하”는 가장(`24시 양평해장국`), “늙으면 죽어야지” 하면서도 “로맨스가 그치지 않는” 노인대학의 노인들(`불멸`), “가짜 양주나 홀짝이다가 기어이/제 눈물을 홀짝이는” 중년의 “오빠”(`애모`), 췌장암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간 사내(`요단강 이야기`), “종이상자가 주소지”인 노숙자들(`삼국지 열전-노숙`) 등, “중년과 초로 사이”(`추리닝과 함께 상추와 삼겹살과 함께`)에서 “옆 마을 어딘가에” 있을 “무릉”(`불가마에서 두시간`)을 찾아 “전 생애를 걸고/이쪽저쪽으로 몰려다니는”(`봄밤`) 현대인의 비애를 바라보면서 시인은 `지금-여기`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반죽을 주무르듯 말을 부리는 솜씨와 능란한 시 작법이다. “음치가 음악치료가 되는 기적”(`주부노래교실`), “삼년째 돈을 붓는 아마곗돈 회원들”(`불가마에서 두시간`), “시금치는 시큼해지고 맛살은 맛이 살짝 갔지”(`김밥천국에서`), “그녀가 어두육미도 아니고/내가 용두사미도 아니고”(`우동을 먹으며`),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가당치 않다고 할 때의 바로 그/얼토와 당토야말로 귀신의 영토”(`서해에서`), “저녁은 이녁의 반대말”(`몸속을 여행하는 법 2`) 등에서 보듯이 시인은 말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말을 가지고 노는 `말놀이꾼`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또한 일상 언어를 한자어로 재구성하여 현실을 풍자하는 기법은 감탄을 자아낼 만하다.권혁웅 시인은 매 시집마다 참신한 면모를 보여주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시도해왔다. 패러디, 연애시, 정치풍자시를 거쳐 최근의 일상시까지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탐구하며 완숙한 개성으로 시세계의 영역을 넓혀온 시인은 우리가 무심결에 놓쳐버리기 쉬운 “수많은 사람/사물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서 우리 앞에 쓱 밀어놓는다.” 서정성과 실험성을 아우르는 발랄한 기지와 일상의 현실 속에서 포착한 소재를 형상화하는 놀라운 솜씨뿐만 아니라 빼어난 언어 감각과 상상력,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두루 갖춘 이 시인을 “명석한 시인”(신형철, 추천사)이라 부른다 해도 과찬의 말은 아닐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18

한여름 추억하며 읽는 재미 `솔솔`

하성란의 다섯번째 소설집 `여름의 맛`(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네번째 소설집`웨하스 이후 7년 만에 만나는 소설집이고 신작으로도 장편소설 `A`이후 3년 만이다. 최근 2013년 황순원문학상 수상 소식과 함께하는 반가운 만남이다. `여름의 맛`에는`두 여자 이야기` `여름의 맛` `알파의 시간`(현대문학상), `그 여름의 수사(修辭)`(오영수문학상)와 더불어 `카레 온 더 보더`(황순원문학상) 등 한여름을 추억하며 읽기 좋은 10편의 작품들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하성란만큼 난장(場)의 삶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는 작가는 드물다. 그동안 그녀는 우연과 폭력의 양면성을 가진 삶을 스스로 양자 우주 속의 입자가 돼 증명하는 소설을 써왔다. 그런데 이번 소설집에서는 좀더 `바라보는 데` 초점을 둔 독특한 시선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오후, 가로지르다`에서`여자`는 누군가가 사무실에서 기르는 뱀이 다리에 스치는 느낌 때문에 책상 위로 뛰어오르게 되는데 그 순간 1인용 감옥과도 같은 큐비클 안에 갇힌 보이지 않던 개별자들의 사연에 눈을 뜨게 된다.그 안에는 빨래를 널어놓고 `살다`시피 하는 사람, 젊은 날의 사진을 크게 뽑아 걸어놓은 사람, 사랑을 나누는 사람 들이 있다.이 모습을 작가는 나이와 경력에 맞게 뒤로 밀릴 대로 밀린 `나이 든` 화자의 쓸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또 `알파의 시간`에서는 국도 야립 간판에 새겨진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엄마의 생을 되돌아보는데 당시에는 몰랐던 엄마의 빛나는 한 시절이 불쑥 떠오르자 `나`는 “내 자신이 풍경의 일부”가 된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때는 바로 엄마와 자신의 시간(모습)이 횡의 시간이 아닌 종의 시간으로 이해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대상을 오래 바라봄으로써 얻게 되는 기다림의 결과 혹은 보상인 것이다.`여름의 맛`에 담긴 하성란의 소설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다 읽어내지 못한 숨겨진 의도와 이야기를 찾게 한다. 그러한 감각을 부르는 읽기는 인간의 본능, 본성을 다각적으로 만나게 한다.또 예민한 감각을 사용하게 해 긴장감을 높이는 가운데 어떤 정확한 말, 고급한 말보다 더 `느낌 있는` 단어의 선택과 특유의 유머로 긴장을 풀어주는데, 이것은 하성란 작가만의 여유가 전하는 선물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18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릿한 성장담

경장편소설 분야에서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문학동네작가상의 열여덟번째 수상작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문학동네)가 출간됐다.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안보윤, 정한아, 장은진, 황현진 등 수많은 신진작가들을 발굴하며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켜온 문학동네가 올해 야심차게 선정한 이 장편소설은 유려한 글쓰기로 풀어낸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릿한 성장담이다. 매력적인 인물들이 여린 마음을 어르고 눙치며 마침내 서로 감싸안는 이야기의 싱그러운 속살이 읽는 이에게 잔잔하고 나긋나긋하게 전해진다. “나 좀 좋아해줘”라고 말하면서 “시간 있으면”이라고 전제를 다는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거침없이 살기에는 너무 거친 이 시대를 자기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나이든 소년·소녀 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재미있는 것, 그런 것들이 문제야. 세상을 망치는 원흉이라고.”한 소년이 슈퍼에 앉아 손가락마다 꼬깔콘을 끼우고 있다. `개미슈퍼`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작고 아담한 이 가게는 골목까지 밀고 들어오는 대형마트의 입김에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소년의 이름은 율이. 키가 186cm나 되고 나이도 어느덧 스물여섯을 훌쩍 넘겼지만 이 청년은 아직도 `소년`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린다. 취직도 하지 않고 대형마트 반대 시위를 하러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가게에서 빈둥거리는 율이.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기묘한 애정결핍과 반항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대형마트에 취직하기로 결심한다.“어쩌면 우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어른이 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타입인지도 몰랐다.”율이를 좋아하면서 말도 못 하고 그의 주변을 빙빙 도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이름은 이레. 그녀 역시 아직 별다른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가 시간이 날 때마다 개미슈퍼에서 율이와 함께 소일하고 있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도 새로운 아르바이트가 생겼다.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정체불명의 상호의 회사. 무언가 물건을 나르는 일로 알고 찾아간 그곳은 뜻밖에도 전화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을 하는 회사였다. 과연 이레는 이 독특한 아르바이트를 잘해낼 수 있을까?“사랑하고 사랑받는 건 몇 살을 먹어도 좋은 법이야.”어느 날 동네에서 가장 양 많고 저렴하기로 유명한 중국집 쌍용각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남김없이 먹어치운 이레의 할머니. 자신이 받은 암 선고와 코앞에 다가온 죽음에 대해 이레에게 덜컥 이야기하면서도 할머니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늘 유머를 잃지 않고 생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할머니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행복하기 살아가기 위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괜찮아, 사람은 언젠가는 다 죽는 거야.”“나는 말이야, 한때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그러니까,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무려 삼 년간.”`들어주는 사람`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온 이레에게 아빠가 좋으냐고, 엄마가 좋으냐고 다짜고짜 묻는 사람.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전화사업을 하며 속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성훈 사장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18

`월북 아버지`에 비친 질곡의 현대사

베스트셀러 장편소설 `마당깊은 집`의 소설가 김원일(71)이 최근 자전소설 `아들의 아버지`(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50년에 걸쳐 착잡한 우리 세계의 진실을 찾아 한국전쟁과 분단 비극을 파헤치는 데 주력하며 `분단 소설의 미학`을 보여준 김 작가는 `아들의 아버지`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 곳곳에 희미하게 등장했던 `아버지`의 생애를 추적한다.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가상 인물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등장해 정면에서 아버지를 마주한다. 전쟁 중 아버지가 월북한 뒤 삯바느질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는 어머니 아래서 누나와 두 사내 동생과 함께 `마당 깊은 집`에 세 들어 살며 호되게 장자의 역할을 종용하는 어머니를 가짜 어머니로 의심하는 과정을 통해 시대에 빼앗긴 어머니 찾기를 그린 소설이 `마당 깊은 집`이라면, `아들의 아버지`는 여덟 살 이후 만나지 못한 아버지의 자취를 추적한 잃어버린 아버지 찾기라 할 만하다. 또 `마당 깊은 집`이 열세 살 무렵의 작가의 모습을 담았다면 이 책은 이전의 이야기, 태아일 때부터 아버지가 월북하던 여덟 살 무렵까지를 다룬, 그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상업학교를 나와 읍 소재 금융조합 서기로 일하던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 귀국한 뒤에도 집에 머물지 않고 농촌에서 사회운동을 하며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강습소를 열기도 한다.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부산에 머물며 자치단체를 조직하고 사상 공부에 열을 올리던 중 남로당 경남도당 책임지도원 자리에 앉게 된다.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공치하의 서울에는 여기저기 인공기가 내걸렸다. 집행부 사무실은 물론 드문드문 일반 가정집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공산당 가담자 색출에 혈안이던 이승만 정권이 전쟁이 나자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피신한 이후였다. 그리고 3개월 뒤 “인민군이 문산과 동두천 쪽으로 밀고 내려온다느니, 국군이 괴뢰군을 되치고 올라가 해주를 탈환했다느니, 한동안 전황이 엇갈”리는 사이 미군 참전을 달성해낸 남한 정부와 국군이 다시 북진을 시작하고 서울 거리의 사람들은 어느새 어디에서 났는지 모를 태극기를 가슴에서 꺼내들고 외친다.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던 국민들이 “국군과 유엔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작가는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영진공업사 뒤 객차방에 머물고 있었는데, 노동부 간부의 집이라는 동네 사람들의 밀고를 듣고 들이닥친 미군이 쏘아대는 총질을 피해 왕십리로 피신을 한다.이 인상적인 장면은 작가의 세계관을 가장 잘 피력한다.▲ 소설가 김원일작가는 이웃의 밀고나 미군의 총질을 객관적으로 감정 없이 묘사할 뿐 한 번도 원망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생사의 기로에서 인공기를 드는 일과 태극기를 드는 일이 어떤 사상의 지배도 아닌 삶의 의지에서 나온 행동이듯 당시는 그저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 없는 한민족의 고통스런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을 살리고 국가를 세우는 내재적이고 근원적인 사상 찾기보다는 망상 대 망상으로 대립하는 지금의 정치 상황에서 이 소설은 단순한 개인사를 뛰어넘어 우리 현실의 바로보기가 될 것이다.월북으로 헤어질 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두 배가 넘는 고희에 이르면서 작가는 이제야 정면으로 아버지의 삶의 실제를 추적한 이 소설을 통해 개인적인 아버지를 온전히 찾아냄과 동시에 기구한 민족의 안쓰러운 역사, 질곡의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따뜻하게 다독인다. 작가는 해방과 전쟁 사이의 시대적 공간을 역사적 사실에 의거해 르포식으로 기술해나가는데, 덕분에 소설은 그 어떤 현대사보다 많은 실증 사료와 구술 자료를 참조하고 직접 인용하기도 한다.하지만 아버지의 생애와 아들(자신)의 유년을 사실대로 반영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작가 특유의 소박한 삶의 실제는 어떤 소설보다도 더 소설적이다. 문단의 거대한 존재 김원일이 소년으로 등장해 겁먹은 채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누나의 손을 잡고 석탄 무개차를 타고 시커멓게 까마귀가 되어 피난을 하는 모습은 읽는 이로 하여금 눈물과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11

작가 기억으로 포장된 우리들 이야기

성석제사진 작가가 2008년 출간한 `지금 행복해` 이후 5년 만에 신작 소설집 `이 인간이 정말`(문학동네)을 펴냈다. `속도`가 중요해지고 그것이 가지고 오는 `변화`에만 관심을 두는 오늘. 하물며 기후마저 여기가 어딘가 싶게 바뀌고 있는 요즘. 이렇게 울퉁불퉁해진 세상에서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에” 집중하는 그의 이야기가 반갑기 그지없다.`작가의 말`에서 “유년기와 첫사랑, 청춘 시절처럼 오래된 기억은 천억 개가 넘는 뇌세포 가운데서도 안쪽 깊숙한 데 숨어 있었다”라고 적고 있듯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에는 작가의 기억으로 포장된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첫 작품 `론도`는 단순 접촉사고에서 시작된 차와 보험에 얽힌 사건들이 `동일한 주제가 되풀이되는 사이에 다른 가락이 여러 가지로 끼어드는 형식의 기악곡`을 일컫는 작품의 제목처럼 반복되는 과정에서, 입장에 따라 화자의 행동이 변화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이어 `남방`은 화자 일행이 우연히 `박`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약간 흥미로우면서도 조금 불편해진 그들의 라오스 여행기를 담고 있다. `찬미`는 어린 시절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이 아름다웠던, 그래서 더욱 좋지 않은 소문만 무성했던 첫사랑에게서, 마지막으로 본 지 이십 년도 훨씬 지난 현재 문자 메시지를 받은 화자가 그녀를 만나러 가면서 지난날을 떠올리는 이야기이다. 표제작 `이 인간이 정말`은 엄마의 주선으로 맞선 자리에 나온 백수가 맞은편에 앉은 아가씨는 전혀 배려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습득한 잡다하고 불편한 정보들을 저 혼자 쉴 새 없이 늘어놓아 여자를 질리게 만드는 과정이 백수의 말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그 배경이 현재가 아닌 조선시대인 작품 `유희`는 복수군의 장수로서 단 한 번도 왜군과 싸우는 일이 없었던 기원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원에 의해 무참히 죽은 유희의 이야기이다. 다른 단편에 비해서도 특히 짧은 소설`외투`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늘 입고 다녔던 외투를 물려 입은 화자가 그 외투가 마치 아버지처럼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서서히 갖게 되는 내용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11

詩 안에서 발견하는 `우리`

2004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면서 시단에 나온 조영석 시인의 두번째 시집 `토이 크레인`(문학동네)이 출간됐다.첫 시집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라 더욱 기대를 모은다.2004년 당시 등단 심사평에서, “참신한 상상력이 가벼운 재치나 산만한 진술로 추락하지 않고 미적인 합리성을 가진 구조를 얻고 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는 시인은 2006년 출간한 첫 시집 `선명한 유령`을 통해 동시대 몇몇 시인들이 보여줬던 난해함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드러냄으로써 그의 시적 가능성을 확인하게 해줬다. 시인은 그 첫 시집에서 우리의 삶의 현장을 정글로 바라보며, “육식성”의 사회 속에서 “초식”의 삶을 꿈꾸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 현실과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 일상잡사의 이면에 감춰진 전혀 평범하지 않은 비밀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형안은 이번 시집에도 그대로 이어져 다시 한번 독자들을 끌어당긴다.“고요한 밤무거운 밤당신의 머리 무게를 재는나의 팔이 잠들지 못하는 밤고된 하루의 노동이꽁꽁 얼어 있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파르르 떨리는 당신의 목이 안쓰러워생침을 삼키는 당신의 침묵에내 혀는 그동안 배운 모든 말을 잃어버리고살며시 당신 이마에 손을 얹을 뿐내 핏속으로 점점 침몰하는당신의 머릿속 비린 하루를 느끼며나도 그대의 머릿속에서멀고먼 아침까지 숨을 참는다고요한 밤 무거운 밤세상에서 사라져버린두 사람의 줄기찬 불면(不眠).”-`부부`전문시적 자아는 가족이라는 땅에서 뿌리를 거둬들이고, 자신의 의지로 새롭게 뿌리를 내리며 `우리`라는 가능성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 시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고된 하루 노동”으로 “파르르 떨리는 당신의 목”과 “당신의 머릿속 비린 하루를 느끼며” “멀고먼 아침까지 숨을 참는” `나`의 모습이다.뿌리를 옮겨도 남루한 현실은 다를 바 없다는 비극의 확인. 하지만 말을 잃고도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음을, “말이 아닌/ 이 세상 모든 것으로 노래하”(`순례자 2`)게 될 수 있음을 시인은 동시에 알게 된 것이 아닐까.그가 새로이 내리려는 뿌리가 닿아 있는 곳은 바로 `시`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게는 `시`가 곧 `우리`이리라. 때문에 그 `시` 안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이토록 남루하고 또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이 노래를 읽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즉 “당신의 머릿속 비린 하루를 느끼”는 일, 당신과 세계의 비림이 실은 `나`의 것이기도 함을 절감하는 일, 그렇게 세계에 대해 `나`의 입장을 세워가는 일을 하는 것이겠다.-이재원(문학평론가)/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11

타인의 아픔·고통 외면하지 마라

강명수사진 포항대 관광호텔항공과 교수의 번역서 `홀스토메르·무엇 때문에?`(지식을 만드는 지식)는 러시아의 문호인 레프 톨스토이의 중편 소설 `홀스토메르`와 `무엇 때문에?`가 실린 책이다. `홀스토메르`에서는 `남과 다름으로 인한 아픔`과 `늙고 병듦으로 인한 고통`이 `무엇 때문에?`에서는 거대한 국가적 폭력과 심리적 강압으로 인한 `한 인간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이 나타난다.톨스토이는 이 두 작품을 통해서 나와 다른 너도 `삶과 죽음`이라는 불변 항을 매개로 연결돼 있으므로 타인의 아픔과 고통, 소외와 불안에 대해 외면하지도 눈감지도 말 것을 넌지시 주문한다.작가의 자아와 독자의 자아가 서로 뒤엉키며 울림과 반향을 낳는 중편소설 `홀스토메르`는 탄생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에 대한 기록이다. 톨스토이는 자동화된 우리의 의식에 일격을 가하는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인간 사회의 부조리, 사회적 위법, 소유권의 문제, 사회적 강압, 심리적 강제와 폭행, 전횡, 박해 등을 표현하는 한편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 미와 추, 젊음과 늙음에 대한 성찰과 통찰을 드러낸다. 종국에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해독하지도 못한 채 허둥대며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편하더라도 삶의 진실을 직시하도록 이끈다.`한 인간의 실존적 아픔과 고통`을 형상화한 중편소설 `무엇 때문에?`의 주제와 대부분의 줄거리는 막시모프의 `시베리아와 강제 노동`에서 취했다. 막시모프의 이 작품은 톨스토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유형을 당해 강제 노동에 처해진 폴란드인 미구르스키와 그의 아내 알비나는 실재했던 인물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 생애의 모든 비극적 이야기가 온전히 보존돼 있다. 톨스토이는 이들의 이야기에다 인간이 처한 상황과 결부된 심리적 묘사를 도입한다. 그래서 이들은 민감한 영혼과 성정의 소유자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톨스토이는 국가의 억압과 강압의 희생양인 주인공들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그려낼 뿐만 아니라, 폴란드의 민족 해방운동에 대한 공감을 표출하고 있다.강명수 교수는 “지금 이 시대의 사회적 직업이나 노동은 단순한 돈벌이나 물질적 재화 획득 차원을 넘어서 자아를 표출하고 자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기에 사회적 직업이나 노동이 곧 `바로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의 자기 창출 행위를 원하는 대로, 안정적으로 할 수 없는 실존적 상황에 처한 미구르스키를 보면서 그의 아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을 실로 절감하게 된다. 아울러 `위험을 관리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과 고통, 불안과 절망도 `겹쳐서` 읽게 된다”고 전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04

“서있는 곳에서 생존 넘어 자존을”

다양한 인간관계와 계속되는 업무로 지치기 쉬운 직장인들. 특히 직장에서 즐겁게 일하고 성공하는 싶은 30, 40대 직장인들에겐 인간관계론과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연마하는 것은 필수랄 수 있다. 포스코 패밀리사 포스코터미날 곽정식 상무가 최근 펴낸 `생존과 자존`(도서출판 작가)은 올해 30년차 직장인인 저자가 삶과 사회생활을 주제로 직장인에게 조언하는 내용을 담았다. 현대 경쟁사회에서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처세서다.포스코에서 투자, 구매 등 기본 업무는 물론 유엔에서 동구권 경제부흥 업무 등 다양한 일을 소화한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 나름대로 깨우친 처신과 운신의 지혜를 틈틈이 정리해 직장인이라면 보편적으로 느끼는 고민의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책은 총 81편의 간결한 글이 리더의 조건, 부드러움과 강함, 코리아를 넘어서, 운명 업그레이드, 행운이 올 때 등 총 5부로 나눠져 있는데 직장인이 어떻게 하면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는지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3간(間)`의 관점에서 말한다.“베이비붐 세대로 앞 세대의 규율에 따르고 뒤 세대의 창의를 배워야하는 이중의 부담 속에서도 이기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알고, 행하고, 바라온 나는 복잡하고 비합리적인 현대의 불합리한 구조들을 보면서 `세상이 다 이런 건가?`라는 회의를 품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며 가장 기초적인 삶의 공간인 가정과 직장에서 진지하게 생각한 것들조차 `쓸데없는 고민과 갈등이었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평소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고 우리의 문화와 대비하며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는 저자는 특히 사람 속에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며, 늘 서있는 자리에서 생존을 넘어 자존을 꿈꾸며 살기를 권유한다.“농촌에서 태어났지만 `고개 숙임`의 의미도 이제야 제대로 와 닿고 서해의 밀물과 썰물의 의미도 가슴 깊이 스며든다”는 그는 “농촌 마을에서 서울, 미국과 유럽, 오지와 험지를 다니면서 다양한 형태의 삶을 여러 프리즘을 통해 본 결과 결국 인간의 삶의 의미는 `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어떻게 어울릴 것인가?`로 귀착된다”고 설명한다.“광활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한 일도 없고 대단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울림을 통해 지혜를 찾고 평화를 찾아 주어진 불균형 속에서 나만의 균형을 잡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곽정식 포스코터니날 상무저자는 직장생활에 필요한 조언뿐 아니라 일그러진 세태, 위협적 주변 속에서 현명하게 중심을 잡는 방법도 들려준다. 간결하면서 핵심을 찌르는 말과 비유, 적절한 사자성어를 통한 새로운 해석, 공감 사례 등 찬찬히 음미해볼 만한 이야기가 많다.이중 저자가 강조하는 삶의 진리는 `겸손`, `심사숙고`, `멈춤과 기다림`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지혜를 새로운 생각으로 다시 곱씹어 보는 일도 평화로운 가을나기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04

자제력은 성공과 생존의 핵심 요소

미국인 전체 사망률의 50%를 차지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무시무시한 암이나 총기에 의한 살인? 아니다. 일종의 느린 자살, 즉 `자제력 부족`이 그 원인이다. 전체 미국인 가운데 흡연, 과음, 비만 등으로 죽는 사람이 연간 100만명에 이른다. 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군 총 전사자가 40만명임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수치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질병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천천히 죽는 길을 택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어떤 이는 사람들의 무지가 이 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흡연자들은 흡연이 건강에 얼마나 해로운지 잘 알고 있으며, 그 가운데 70%는 담배를 끊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자제력 부족이 문제다.이처럼 자제력은 현대인의 건강과 생존을 좌우하는 필수조건이 됐다. 물론 수천 년 전부터 자제력은 줄곧 성공의 핵심 요소로 인정돼 왔으나 지금처럼 생명을 위협한 적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자본주의 체제는 동틀 무렵 헬스클럽에서 지방을 털어 내고, 지옥 같은 교육과정을 견뎌 우수한 성적을 얻는 자제력 엘리트들에게 예전보다 훨씬 후한 보상을 준다. 오늘날에는 그만큼 충분한 자제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이제 현대인들은 사회로부터 엄청난 수준의 자기 절제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요받고 있다. 사회는 더 이상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자제력 부족은 낙오와 실패,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 결과 우리는 365일, 24시간 나 자신과 끊임없는 사투를 벌여야 하는 지긋지긋한 삶을 살게 됐다.니얼 액스트가 펴낸 `자기절제사회`(민음사)는 자제력이 개인의 성공과 생존의 핵심 요소가 된 현시대를 진단하고, 그 사회적 배경과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제시한다.저자는 자기 절제에 관한 거의 모든 지식을 이 한 권에 담으면서도 지루하게 정보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처럼 술술 읽히는 흥미로운 이야기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현대사회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게 될 뿐 아니라 자기 절제를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인 힘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10-04

삶의 의미 일깨우는 잔잔한 울림

여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시정신으로 지난 반세기 한국 시단을 오롯이 지켜온 `문단의 작은 거인` 민영 시인이 올해 팔순을 맞아 아홉번째 시집`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창비)를 펴냈다. ▲ 민영 시인`방울새에게`(2007)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은 지나온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아스라한 기억 속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자신에 대한 치열한 냉엄성과 이웃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겹치는, 냉엄과 온정이 공존하는”(김응교, 해설) 아늑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평생 오로지 시의 외길을 걸어온 노시인의 묵직한 연륜과 단아한 기품이 서린 정갈한 시편들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언어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에 실려 진실한 삶의 의미와 자연의 섭리를 일깨우는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꽃도 철 따라 피지 않으리라/그리고 구름도/嶺 넘어 오지는 않으리라//나 혼자 남으리라/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노래를 부르리라/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序詩`전문)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시인은 실향민으로서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몽매간에도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며 시인은 “저 멀리/북만주 땅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저 산 너머/용인 땅에 누워(`다시, 이 가을에`) 계신 어머니”를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비록 “육신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고요히 감은 영혼의 눈”(꿈)에는 또렷이 떠오르는 고향 마을을 애달픈 마음으로 노래한다. 또한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인은 또 하나의 고향인 그곳, “슬픈 아비가//해란강 언덕 위 흙 속에 누워 있”는 “그 북간도의 화전 마을”(`새벽에 눈을 뜨면`)을 간절히 그리며 또다른 향수에 젖기도 한다.“새벽에 눈을 뜨면/가야 할 곳이 있다./밤새도록 뒤척이며 잠 이루지 못하다/새벽에 눈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울타리 밖에 내리는 파리한 눈,/눈송이를 후려치는 아라사 바람이/수천마리의 양처럼 떼지어 달려와서/왕소나무 숲을 뒤흔드는 망각의 땅,/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을/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장백산 올라가는 멧등길에/하얗게 피어 있던 백도라지 꽃,/그 북간도의 화전 마을을/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더 늦기 전에!”(`새벽에 눈을 뜨면`부분)잃어버린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때로 “무의식의 영사막 위에/오래전에 떠난 고향 마을이 나타나고,/숨바꼭질을 하던 옛 동무들이/요지경처럼 비”(`잠 안 오는 밤에`)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로 갈라지고 “병들어 만신창이 된 이 국토”(`별꽃`)의 반쪽에서 아렴풋이 고향을 건너다보고 “기다림에 지친 보고 싶은 얼굴들”(`갈대밭에서`)을 호명하며 “얘들아, 다 어디 있니,/밥은 먹었니,/아프지는 않니?//보고 싶구나!”(`비무장지대에서`) 안부를 묻는 시인의 공허한 외침은 사뭇 애절하기만 하다. 시인은 또 상처로 얼룩진 “거칠고 사나운 역사”(`이 가을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자들은/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겨울 들판에서`)졌음을 탄식하며 막막한 가슴을 애써 달래기도 한다.온화하기 그지없는 노시인의 눈길은 비단 까마득히 사라져가는 과거의 시간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삶의 풍경은 변함없이 시인의 관심 대상이다. 시인은 “눅눅하고 쓸쓸한 지하 단칸 셋방”(`겨울 강에서`)에서 폐지를 주워 파는 노부모와 살아가는 아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안는가 하면, “술 한잔 마시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지하철역을 찾아가는 노숙자”(`바람의 길`)들이며 “살아온 날의 절반을 또다시 집 없이 헤매야 할”(`해 저무는 거리에서`) 철거민들처럼 “작고 하찮은 목숨”(`별꽃`)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따듯한 눈길을 건넨다. 그런 한편 “새파란 젊음이 스러진 자리에는/검은 재만 남고, 몸 안에서 출렁이던/생명의 물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모기에 관한 단상`)는 그 자신은 겸허한 자세로 삶을 받아들이며 “눈부신 여명을 맞이하기 위해”(`여명`) “출항의 깃발을 높이 올”(`출항의 꿈`)리는 희망의 불꽃을 지핀다.문단의 원로 시인으로서 근엄한 시인 정신을 지켜온 민영 시인은 스물다섯살에 미당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줄곧 올곧은 서정시인의 길을 걸어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