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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봄이 오는 길목

정미영 수필가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비가 오다 긋다. 빗물에 젖어 있는 고즈넉한 산책로에서 나래비 서 있는 나무를 만난다. 언 땅 아래에 새봄을 알리는 새싹들이 숨죽이고 있듯이 나무들의 몸피 속에서도 새순들이 나붓이 엎드려 있는 것 같다.입춘이 지나고 나면,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커진다. 봄 마중을 하러 모처럼 집을 나서니 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으로 형산강 가장자리에 있던 새떼들이 눈에 띈다.새들도 봄을 기다리는가. 손님맞이 단장을 하듯 깃털을 손질하고 물 가운데로 미끄러져 들어가 세수를 한다. 첨벙거리는 새의 움직임에 바람도 일렁인다. 봄을 재촉하는 내 마음에 조급함이 더욱 짙어진다.강변 의자에 앉아 윤슬을 바라본다. 그 반짝거리는 햇살에 잇닿아 오래된 추억 속의 영화 한 편이 바람에 실려 온다.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년 작)’이다. 자녀 교육에는 엄격하지만 아이들과 강으로 낚시를 하러 가는 자상한 면모도 갖춘 아버지 맥클레인과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모범생이었던 형 노먼, 형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성격의 동생 폴이 주인공이다.어느 날, 거리에서 폴이 사망했다. 폴은 세상을 떠났지만 가족들은 그를 잊지 못했다. 맥클레인은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는 말로 아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표현했다. 가족은 가장 소중한 관계이지만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존재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인 것 같아,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감동을 받는다.내 기억에 남아 있는 또 하나의 명문장이 있다.‘인생은 예술품이 아니고,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노년의 노먼이 강을 찾아 했던 말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간 순간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으니,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뜻으로 나는 해석하고 있다.며칠 전, 보람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방 수북에 다녀왔다. ‘작가와 함께 수북수북’ 강연회에 문태준 시인이 초빙되어, 기억과 서정을 주제로 독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은 아내의 고향인 제주 애월읍에 터를 잡은 지 3년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육지로 왔을 때 만산이 보고 싶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소박한 일상을 전하면서도 기억 저편에 머물고 있던 고향과 가족과 사물에 대해 편안하게 들려주었다.그리고 시 작법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시적인 사건이 있어야 하고, 여지를 내어 보이는 것이 시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자분자분 서정을 풀어내는 작가에게 나는 따뜻함을 느꼈다.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관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시인의 눈으로 봤을 때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이냐는 내 물음에 문태준 시인은 생태적인 삶을 언급했다. 작가의 시집 ‘아침은 생각한다(2022년 작)’에 실린 몇 편의 시를 예로 들며 부연했다.“나는 새와 벌레가 쪼아 먹고 갉아 먹고 남긴꾸지뽕 열매 반쪽을 얻어먹으며 별미를 길게 즐겨요”-‘별미(別味)’ 중에서 발췌“우리는 울고 웃으며 풀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옮겨 감았다”-‘뿌리’ 중에서 발췌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공존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나눔과 교섭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시인에게 나는 깊은 공감을 가졌다.지금, 봄이 오는 길목에서도 강물처럼 시간은 흐르고 있다. 모든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시인을 만났던 추억을 비롯해 나만의 소중했던 찰나를 기록으로 남긴다면 오래도록 나의 인생은 곰곰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으리라.

2023-02-22

노로바이러스와 패류독소, 그리고 방사능 오염

겨울방학이 끝나기 직전, 설 명절을 앞두고 스키장을 찾았다. 스노보드를 배우고 싶다는 아이의 말에 온 가족이 설산으로 향했다. 평일 야간개장이었지만 스키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그재그로 뒤뚱거리며 슬로프 내려오기를 반복하자 아이는 금세 익숙해져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속도가 붙자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횟수가 점점 줄었다. 영하 10℃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생애 첫 스노보드 타기에 성공했다.그런데 그날 밤, 잠에서 깬 아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발열을 동반한 구토와 설사, 복통으로 아이는 밤새 울었다.다음날 아침,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장염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생애 첫 보드타기로 근육통까지 얻게 된 아이는 급격히 까라졌다. 생굴을 먹었냐는 질문과 요즘 노로바이러스가 유행이라 사람 많은 곳에서 옮았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수액과 항생제 처방을 받고, 아이는 설 명절 내내 떡국이 아닌 죽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새해를 맞았다. 물론 엄마도 곧 감염돼 배앓이를 하며 명절을 보냈다.노로바이러스 장염은 겨울철 본격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식중독이다.감염된 환자의 구토에서 나온 입자가 공기 중 에어로졸 형태로 대규모 감염을 일으킬 정도로 전염성이 높다. 세균성 식중독과 달리 낮은 온도에서 생존하며, 60℃의 온도에 30분간 가열해도 죽지 않는다. 위생에 각별한 신경을 쓰는 국가에서 빈발해 ‘선진국형 장염’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수산물 중에는, 특히 생굴을 먹었을 때 노로바이러스 감염이 빈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사가 열 살짜리 아이에게 생굴을 먹었냐고 물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굴은 아이들이 싫어하는 물컹한 식감으로 어린이용 식재료가 아니다. 그럼에도 의사는 수산물 매개질환의 원인으로 굴을 지목한다.굴 양식업자들이 억울한 것도 이 지점이다. 매년 겨울 유행하는 노로 바이러스 자체를 막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전염성이 강해 한번 유행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익혀 먹기를 권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회를 즐기는 식문화로 인해 사람들은 여전히 생굴을 선호한다. 100℃에서 1분만 데쳐도 바이러스는 사라지지만 굴전이나 굴구이 등 작정하고 요리를 하지 않는 이상, 싱싱한 굴은 그냥 날로 먹는다.수산물 매개질환은 이 뿐만 아니다. 날이 따뜻해지는 3월부터는 패류독소가 기다린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노로바이러스의 발생 빈도는 급격히 낮아진다. 대신 패류독소라는 새로운 복병이 나타난다. 특히 올해는 예년과 달리 패류독소 발생이 빨라질 것으로 예상돼 해양수산부는 1월부터 대응태세에 나서고 있다.패류독소는 유독성 플랑크톤을 섭취한 패류 내에 축적된 독소로, 3월부터 5월까지 최고치를 나타내다가 평균 기온 25℃ 이상인 여름철에 소멸된다.조개류와 멍게, 미더덕 등이 대표적이다. 패류독소 수산물을 먹을 경우 근육마비와 복통, 설사 등을 일으킨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마비성 패류독소가 주로 발견된다. 섭취 후 30분 이내에 입술 주위로 마비가 나타나고 두통과 메스꺼움, 구토 등을 동반한다. 심할 경우는 호흡곤란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특히 패류독소는 가열해도 파괴되지 않아 발생지역은 패류출하금지해역으로 지정되고 정부의 관리 하에 들어간다.해양수산부는 2월 현재, 작년 조사에서 패류독소가 검출되었던 해역에 대해 주 2회 조사로 독소의 허용기준 초과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3월부터는 조사 지역을 129개로 확대해 주 1~2회 조사할 예정이다.허용기준 초과로 검출될 경우 패류출하금지해역으로 지정된다. 검출 패류는 엄격히 출하 금지되고, 어민들이 타 품종 출하를 희망할 경우 조사 후 허용기준 적합 패류만 출하할 수 있다. 봄철 임의로 조개류를 채취해 섭취하는 것에 주의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정현미 작가 정부는 패류독소 발생 현황과 품종별 조사 결과 등을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안전나라(www.foodsafetykorea.go.kr), 국립수산과학원(www.nifs.go.kr) 누리집을 통해 신속히 알리고 있다.이 외에도 방사능 노출 수산물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이 올해 3월부터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고 밝힌 이상 방사능 오염 수산물에 관한 공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본격적인 방류가 이뤄지면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도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우리나라 등 주변국에서 수차례 시뮬레이션으로 피해 정도 등을 예측했지만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피해가 명확해질 경우 정부도 본격적인 대응에 나설 것이다.매년 발생하는 피해에 더해 새롭게 나타날 방사능 오염수 유출이라는 복병으로 수산업계의 시름도 깊어질 것이다.어업인들도, 소비자도 함께 윈윈할 수 있도록 정부의 다양한 정책과 지혜가 모아지길 희망해본다.

2023-02-22

샤일록이 된 은행

홍석봉 대구지사장 샤일록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다. 욕심 많고 인정 없는 인간의 대명사로 꼽힌다. 은행이 샤일록 평가를 받을 정도로 탐욕을 부리다가 된서리를 맞았다. 국민들은 고통에 허덕이는데,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면서도 고금리 돈장사를 계속했다. 금융당국과 국민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금융권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발표하고 앞다퉈 대출금리를 내렸다. 신규 채용도 늘린단다. 돈장사로 잇속만 챙기다가 국민 시선이 싸늘해지자 내놓은 금융권의 고육책이다.5개 시중은행은 지난해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 대구은행도 비슷한 상황이다. DGB대구은행은 지난해 전년보다 17.5% 증가한 5천18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당기순이익(3천925억원)은 18.9% 늘었다. 금리 장사 덕분이다. 대구은행은 은행별 예대금리차 순위도 국민, 하나, 신한은행보다 높다. 지방은행 중에 부산은행 보다 높다. 이자를 그만큼 많이 받아챙겼다는 얘기다.반면 은행들은 점포수를 지속적으로 줄여왔다. 비대면 거래가 늘었다는 이유다. 지방은행의 영업점도 크게 줄었다. 지방은행 중 점포수가 가장 많이 줄어든 곳이 대구은행이다. 대구은행의 점포수는 지난 3년간 42개가 줄었다.은행 점포 감소는 금융 서비스 사각지대 확대로 이어진다. 접근성 제한 등 고령층 고객의 소외를 불러온다. 지역 경제 및 창업에까지 악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점포 축소를 자제하라고 경고했다.금리 추가 인하 등 국면전환에 나섰지만 이미 국민들의 눈밖에 났다. 샤일록이 된 은행의 모습에 국민들은 허탈해 하고 있다. 대구은행도 먼 산의 불이 아니다. 지역을 더욱 돌아봐야 할 것이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2-22

학교폭력, 나라의 문제

장규열 한동대 교수 배우려고 학교에 간다. 다양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습득하고 경험하여 바람직한 인성으로 자라기 위해 학교교육을 받는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끊임없는 응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부모와 교사, 친구와 이웃이 성장과정에 반드시 필요하다. 배우고 자라는 길에서 주변으로부터 받는 신호와 목소리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긍정적인 부추김과 부정적인 두려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들게 된다. 한때 부모나 교사가 무서워 억지로 구겨넣듯 배웠던 과목들이 있다. 느꼈던 공포는 생생하게 떠오르지만 무엇을 배웠는지는 생각도 하기 싫지 않은가. 학교폭력은 어른들만 저지르지 않는다. 같은 반 친구가 두려움의 대상이라면, 일상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불안과 분노, 스트레스와 우울증세, 무력감과 실패감에 휩싸이고 학교성적이나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등 피해학생의 일상이 무너지게 된다. 길게는 사회성의 저하, 정신과민증, 대인기피증, 인격장애현상 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거나 자살(Bullycide)에 이르기도 한다. 일상이 망가질뿐 아니라 일생을 망치게도 된다. 최근 OTT 인기드라마에 등장한 한 연예인에게 오래전에 학교폭력을 당했노라는 고발이 있었다. 가해자는 심심해서 장난삼아 생각없이 벌인 일이 피해자에게는 평생을 두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터이다. 피해는 학교현장뿐 아니라 온라인으로 번져 24시간 발생하므로 가해자로부터 피할 방법이 없다. 학교폭력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두려움이 그늘진 마당에 교육이 일어날 방법이 없다.폭력은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학교폭력은 더욱이 사후수습보다 사전예방이 먼저다. 미국학생들은 학폭과 관련하여 세 가지 다짐을 한다. 학교폭력이란 해서도 안 되고, 하는 걸 목격했을 때 간과해도 안 되며, 당했을 때에 가만히 있어도 안 된다. 이와 함께 연중 꾸준히 학교폭력의 위험과 폐해에 관해서 경계하고 가르친다. 학폭에 대하여 무관용원칙(Zero tolerance principle)을 가지고 강력하게 대처하는 미국이 다소 심하다 싶지만, 자칫 총기사고와 연결되는 그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럴만도 하겠다. 벌어진 학교폭력에 대응하여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학폭위)가 교육지원청 주도로 구성되지만, 구성과 심의방법 및 처분결정내용 등은 보다 전문적으로 정교하게 기획할 필요가 보인다. 학폭위의 논의과정이 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 처벌에 방점을 두는 현황을 재고하여 피해자와 가족들이 장기적으로 겪을 어려움과 상흔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일에도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모든 폭력에 반대한다. 신체적, 정신적, 성적 폭력과 학대, 놀림과 따돌림은 현대사회에서 사라져야 한다. 폭력이 교육의 현장에서 똬리를 트는 일에는 전쟁이라도 선포해야 한다. 한 아이에게 참다운 교육이 진행되려면 온 동네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학교폭력을 학교만의 문제로 바라보기보다 전 사회적 관심이 일어나야 한다. 다음세대를 바르게 키우는 일보다 중요한 숙제가 어디 있을까.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3-02-22

할매카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주 손자의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다. 10명의 원생에 축하하러 온 학부모와 조부모가 족히 50명은 더 돼보였다. 우리만 해도 아들 내외, 우리 부부, 외조부모까지 여섯이나 됐으니….작년 이맘때쯤이었다. 통원버스가 집 부근으로 오지 않는 유치원에 다닐 손자의 등하원을 고민하는 아들내외에게 선뜻 내가 맡겠다고 했다. 은퇴해 다소 한가하니 이참에 손자랑 시간을 보내도 좋을 듯싶었다. 매일 아침 등원과 오후 2시경의 하원을 도맡았다. 집이 가까운 데 있어 평소 자주 보던 사이지만 최소 1년간 매일 보게 됐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않으랴 설렐 정도였다. 제일 먼저 차에 카시트를 얹고, 간식바구니를 마련해서 과자를 채웠다. 지인이 선물해 준 차량용 트레이와 쓰레기통도 장착했다. 승용차로 10분 내외의 거리였다. 그 짧은 시간에도 다정다감한 손자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나와 같은 할머니들이 두 분 더 계셨다. 특히 하원할 때 아주 잠시, 약 10분 정도 만나는 분들이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다 정이 들었다. 맘카페라는 단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초등학교나 유치원의 엄마들이 지역 육아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점차 규모가 커진 인터넷 커뮤니티가 됐다는 정보를 귀동냥했던 터였다. 우리도 맘카페같이 할매카페 하나 만들까요? 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모두 동의했다. 매일이다시피 만나 어느 정도 친목이 생겼기에 쉬웠다. 우린 할맘 (할mom)은 아니었다. 할맘은 부모를 대신해 전적으로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라는데, 우린 그렇게까진 아니었다. 그저 맞벌이하는 자녀의 조력자로 손주를 돌봐주러 잠시 시간 내는 그저 할매 노릇인 거였다. 그렇다고 절대 소홀할 일은 아니어서 부득이한 경우엔 할배들이 대신했다. 일 년간 아이들 친외가의 조부모를 모두 뵌 것 같다.할매카페는 맘카페와 같이 인터넷으로 뭔가를 도모할 일은 결코 없기에 우린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즐겼다. 그래도 맘카페 흉내는 냈다. 아침에 아이들 등원시킨 후 근처 브런치 맛집을 찾아 브런치를 즐기는 것으로 첫 시작을 했다. 수다의 재료는 무궁무진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전 10시에 들어간 카페에 오후 2시까지 있기가 죄스러울 정도였다.내가 독감에 걸려 일주일을 쉰 적이 있었다. 문자로 문안도 하시더니 일주일 후 다시 뵙자 병치레하여 힘들었을 테니 따뜻한 칼국수를 사주시겠단다. 칼국수 맛집을 수배했다. 칼국수 대신 병 끝에 먹으면 좋다는 찹쌀수제비로 몸을 데우고 커피를 마시며 서너 시간 이야기를 나누니 오랜 친구에 진배없었다. 나잇대가 비슷하고 동시대의 경험치가 있어서인지 공감하고 감동하고 때로는 파안대소하는 얘기가 끝이 없었다.손주들 졸업이 다가오자 우리의 만남도 끝날 것이 아쉬웠다. 애들은 졸업하지만 우리끼리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만날까요? 물론 다같이 찬성. 할매카페의 다음 모임은 3월 둘째 화요일이다.

2023-02-22

이번 주에 등산 가실래요?

나선택 포항 행복한의원장 본격적인 등산의 계절이 오고 있다. 산림청 조사 결과 2021년 등산·걷기 (트래킹) 활동 인구는 전체 성인 남녀의 77%인 3천169만명으로, 2018년도 조사결과(71%) 보다 6% 증가하였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등산인구는 점점 늘고 있다.등산은 심폐 기능과 근골격계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고, 대사성 증후군의 지표인 체중, 체지방, 허리둘레, 휴식시 혈압, 콜레스테롤, 혈당, 혈전 예방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 반면에 위험요소도 상당히 많다. 특히, 심장마비가 온 경우 후조치를 빨리 할 수 없어 사망률이 높다. 무리한 등산은 관절에 부담을 준다. 탈수와 탈진, 열사병이나 저체온증, 추락 사고, 곤충이나 뱀 물림 사고 등 위험요소가 많다. 즐겁고자 간 산행에서 목숨을 잃거나 큰 부상을 입는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또 있을까?심장의 문제는 예방이 최선이므로 산행 시 심박 체크를 하는 것이 좋다. 최대 심박수는 운동 시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는 최고 심장 박동수를 의미한다. 1분에 (220-나이) x 0.75로 계산하면 된다. 50세라면 1분당 심박수를 120∼130회 정도로 유지하면서 산을 오르는 게 좋다. 스마트워치 등을 이용하면 심박수를 쉽게 체크할 수 있다. 안정시 심박수가 1분당 100회 이상이거나, 왼쪽 가슴에 통증을 느낀다면 심장질환의 유무를 확인한 뒤 등산을 해야 한다.무릎 관절은 187개의 관절 중에서 가장 크고 강한 인대와 근육이 붙어 있어 몸무게를 거뜬히 지탱하지만, 손상을 입으면 심각한 경우가 많다. 건강한 무릎의 연골은 걷는 동작에서 생기는 압박으로 더욱 튼튼해진다. 그러나 관절염이 생겨 연골이 상한 경우는 걷거나 뛰면 연골 손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 쪼그려 앉기, 오래 서 있기 등 무릎에 나쁜 생활습관을 고치고, 칼슘과 비타민D가 풍부한 음식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관절 건강에 도움이 되는 증손활혈탕 같은 한약으로 관절 내 혈액순환 상태를 좋게해야 한다. 누워서 다리 들기, 물속에서 걷기, 실내자전거 타기, 계단오르기, 수영 같은 운동을 통해 허벅지의 앞, 뒤쪽 근육과 종아리 근육을 강화시키는 운동을 해야 한다.산을 잘 오르는 것만큼 잘 하산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산을 내려올 때는 체중의 3∼5배 되는 하중이 무릎에 실린다. 하산 때는 근육의 긴장이 풀어져 발을 잘못 디뎌서 발목을 삐기 쉽고, 다리의 힘이 풀려 무릎이 꺾이면서 십자인대가 손상되거나 허리를 다칠 수도 있다. 하산할 때는 올라갈 때보다 더 천천히 걷고 보폭을 줄이고 자주 쉬어야 한다. 스틱과 무릎 보호대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발목을 삔 경우 당일에는 최대한 움직이지 않아야 하고 냉찜질을 자주 해줘야 한다. 부상이 심해서 반깁스를 한 경우라도 가까운 한의원에 가서 부항과 침 치료를 받아야 회복도 빠르고 후유증도 줄일 수 있다.산이 아름다워지는 3월이다. 평소 근력운동을 잘해서 몸을 준비하고, 일기예보를 체크해서 필요한 장비를 잘 챙기고, 경쟁하듯 빨리 등산하기 보다는 느긋하게 자연을 즐긴다는 마음으로 산이 주는 풍성한 생명의 에너지를 잘 받으시기를 바란다.

2023-02-22

대구 중구 집행부와 의회, 끝없는 갈등

김재욱 대구본부 대구 중구 집행부와 의회의 갈등이 3개월이 지났지만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발단은 예산 심의 과정에서 발생했다. 의회가 집행부에게 소명 기회도 주지 않고 관광 예산 77억 원 중 52억 원을 삭감했다. 이에 집행부가 예산결산위원회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서로 감정이 상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고발로 번졌다. 지난해 12월 27일 집행부 간부가 폭언을 했다는 이유로 중구의회 소속 구의원 세명이 대구시경찰청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이어 이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공직윤리와 사회 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이후 집행부 관계자가 사과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감정의 골은 깊어졌고 갈등은 2월 임시회까지 이어졌다. 노조까지 가세해 더욱 시끄러워졌다. 더불어 의원들 간에도 패가 갈려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다.문제는 집행부와 의회의 다툼으로 주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구의 이미지 타격도 만만치 않다. 전국 기초의회 중 중구의회만큼 시끄러운 곳은 없다.현재 중구의회는 7명의 구의원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중 김오성 의장을 포함한 4명의 의원과 여성의원 3명이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이같은 대립 결과는 임시회에서 바로 나타났다. 주민들을 위해 발의한 의원들의 조례가 통과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편 나누기’, ‘불공정’이라며 서로 감정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의원들의 반응도 양단으로 갈린다.한쪽은 “아예 대화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좋은 대화 이후 하루가 지나면 바뀌었다”고 했고, 또 다른 쪽은 SNS 등을 통해 연일 상대편이 잘못했으며 본인들은 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또 심한 스트레스로 약을 섭취하는 이도 있고, 연일 한숨만 내쉬는 이도 있었다.현재 중구의회 의원들은 서로 상대방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 주장만 있다. 한쪽은 어설프게 손을 내밀었다가 지쳐가는 중이고, 또다른 한쪽은 버티면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새다.중구 주민 A씨는 “구민의 참뜻을 실현하는 게 중구의회의 슬로건으로 알고 있는데, 마치 초등학생들의 감정 싸움을 보는 것 같고 주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것 처럼 느껴진다”며 “주민들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화해할 마음이 없는 의회가 어떻게 지역 현안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구민의 대의기관이 될 수 있겠나”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서로 양보하지 않으면 관계가 파탄날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이 상황까지 온 마당에 누가 나서서 중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오직 해결방법은 그들 스스로 알 것이다. /kimjw@kbmaeil.com

2023-02-21

기억의 알맹이를 여러 개 갖고 있다는 것

올해 나는 한번도 도전해 보지 못했던 취미를 시작하거나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일을 하며 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새해부터 새로운 일을 잔뜩 벌려 놓고 보니 사실 과거의 익숙한 것이 훨씬 나아 보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예전에 했던 익숙한 일과 취미로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다보니 시작선 앞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움츠리는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결국 올해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 지에 대한 의문이 시작되었고 그러다 우연히 책 한권을 마주했다.김영하의 ‘작별 인사’ 작품 속 주인공 철이는 안드로이드 휴먼이다. 철이의 아버지는 유명한 IT 회사의 연구원이며 휴머노이드를 만들어 인류의 유산을 남기고자 한다. 철저히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라 굳게 믿고 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있는지 의문도 없이 살아가다 어느 날 사건에 휘말려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모든 것이 생소한 날 것 그대로의 수용소에서 철이는 금방 자신이 인간이 아님을 알게 된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혹독한 현실 속에서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재정립하며 혼란스러운 과정을 겪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을 성장이라 깨닫는다.철이는 그곳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을 만나 우정의 관계를 맺으며 소속감을 느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추억이란 개념을 처음 입력하게 된다.동시에 철이는 의식과 존재란 무엇이며 인간다운 삶은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파고들며 자신이 속한 세계를 다시금 바라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속에서 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므로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고통과 수반된 사건은 기억되기 쉽다. 예기치 못한 순간과 갑작스런 변수는 분명 당혹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이라는 깊은 자국을 남긴다. 물론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 또한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지만, 내겐 행복의 기쁨이 기억에서 차지하는 크기보다 조금 더 고통의 기억이 깊게 새겨진다.고통과 함께 동반되는 좌절과 우울감은 분명 괴롭지만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것들 중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의 의식은 조금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는 경험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기억에 깊이 남은 고통의 경험은 결국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힘이 되게 하고, 다시금 장애물 앞에 도달했을 때의 유연성과 여유를 가지게끔 한다. 고통을 이겨내 의연하게 생을 살아가는 기억의 알맹이를 여럿 갖고 있는 것이 내겐 중요하고 그것이 살아가는 데 있어 오랜 기간 써내려 갈 숙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영화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전에 없는 고난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이 처한 공간을 청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마녀배달부 키키’ 속에서 주인공 키키는 어린 나이에 아무 능력도 없는 채로 집을 떠나 마녀수행을 가는 장면에서 위기가 시작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주인공은 어느 날 이유 없이 인간 세상과 다른 낯선 세계로 빨려 들어 가버리고 만다. 불현듯 낯선 세계에 진입한 것도 당황스럽지만 갑작스레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여 홀로 위기 속에 남겨진다.그러한 위기 속에서 그들은 역경을 이겨내는 첫 단추로 청소를 택한다. 고통의 세계에 진입하자마자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깨끗하게 치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건의 위기와 절정을 지나 결론에 도달하여 씩씩하게 이야기를 완성한다.삶의 고통 뒤에 따르는 가치는 대부분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때문에 고통을 자세히 보고 사유하며 깊이 헤아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고통과 가치는 아주 긴밀하게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한 사실은 지금 나를 둘러싼 수많은 스트레스에 적절히 나를 던질 필요가 있다는 안도를 마주하게 된다. 고통을 향신료처럼 요리하여 고독을 즐기는 방법은 늘 생소하고 어렵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2023-02-21

튀르키예는 ‘사람’이다

튀르키예 사람들은 너나없이 이방인에게 친절하다. 2005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 갔다. 10월의 선선한 바람과 온화한 가을볕이 좋았다.아야 소피아 성당,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예레바탄 지하 궁전, 갈라타 타워 등 이름난 관광지들을 다녔다.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이틀째 날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고 늦은 저녁 호스텔에 오니 감기 기운이 돌았다. 당시 유럽을 강타한 조류독감 진원지가 튀르키예였다.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약을 먹어야하는데, 짐 부피를 줄인다며 온갖 비상약을 다 뜯어 넣어온 게 문제였다. 뭐가 감기약인지 몰라 소화제, 설사약, 멀미약, 진통제, 감기약 등이 섞인 알약 열 알을 한입에 털어 넣고 잤다. 멀쩡했다.다음날은 멀리 신시가지까지 걸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위에 놓인 갈라타 다리에 수많은 낚시꾼들이 고등어와 정어리를 낚아 올리고 있었다. 잡은 고기는 곧장 케밥 장수가 사 가서는 그릴에 구운 뒤 빵에 끼워 ‘고등어 케밥’으로 팔았다. 저렴한 길거리 음식이지만 가난한 배낭여행자에게는 사치여서 노릇노릇한 냄새에 침이 고이는 걸 겨우 참아 지나쳤다.여기저기 구경하다 보니 저물녘이 됐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숙소로 돌아가는 방향을 잃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차비도 없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중년 남성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영어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데이비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외모는 튀르키예 사람인데, 아마 영어 이름을 말한 것 같다. 퇴근 후 귀가 중이던 그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함께 걸어줬다. 그의 친절한 동행 덕분에 갈라타 다리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다. 다리만 건너면 숙소가 있는 구시가지였다. 다리 중간까지 같이 온 데이비스는 배고프지 않느냐며 고등어 케밥 두 개를 사서는 전부 다 내게 건넸다. 양손에 케밥을 들고선 다리 끝까지 혼자 걸었다. 걷다가 돌아보니 데이비스가 다리 가운데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만난 천사의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새뮤얼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 세계질서는 이념이 아닌 문명 대립으로 재편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로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는 튀르키예를 들었다.튀르키예는 과거 오스만 튀르크 시대부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지정학적 긴장이 팽팽했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은 중세 오스만 제국을 배경 삼아 오늘날 튀르키예의 정체성 문제를 매혹적인 추리서사에 담아냈는데, 소설 속 연쇄살인범은 오스만 제국이 서양에 예속될 걸 두려워했지만,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융성하며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동서양 문명의 충돌은 여전한데, 2000년대 들어 EU 가입을 추진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유럽을 지향하는 한편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국민들이 분열됐다. 특히 쿠르드족과의 갈등은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정학적, 문명적 갈등은 지금 아무 의미가 없다. 튀르키예 남부와 시리아를 강타한 지진으로 무려 4만5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끔찍한 자연재해 앞에서는 기독교도 이슬람도, 서양도 동양도 없다. 그저 사람, 지극히 연약하고 불쌍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지금 튀르키예와 시리아는 18년 전 캄캄한 이국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린 내 처지처럼,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천사 데이비스를 생각하면서, 아름다웠던 이스탄불의 추억들을 떠올리면서 구호단체인 ‘희망브리지’에 성금을 기부했다. 고등어 케밥 두 개 값의 스무 배쯤 되는 돈이다. 데이비스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엔 턱없이 적다.역사적으로 그리스는 튀르키예와 앙숙이다. 튀르키예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적대심은 우리의 반일감정 이상이다.이번 지진 피해에 그리스는 가장 먼저 물자와 구조인력을 보냈다. 미초타키스 총리는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이웃 국가다. 튀르키예 국민과 그리스 국민을 나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한 대목을 옮긴다. “네 앞에 인간이 있다. 튀르키예인이면 어떻고 그리스인이면 어떠하냐. 중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다 인간이란 것이다. 입이 있고 가슴이 있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이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튀르키예의 정체성은 유럽도 이슬람도 아니다. 튀르키예는 ‘사람’이다.

2023-02-21

우크라이나 전쟁 1년

우정구 논설위원 오는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1년째 되는 날이다. 지난해 2월 24일 새벽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을 단행했다.20만명 가까운 병력을 동원한 러시아군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곧 쓰러질 것 같았으나 국제사회의 예상을 뒤엎고 전쟁 1년을 버티어 냈다. 서방국가들의 군사지원 힘도 컸지만 국가를 사수하려는 국민들의 단합된 애국심의 결과기도 하다.1년 동안 양국이 입은 피해는 엄청났다. 양국의 사상자 수가 이미 수십만명에 이르렀고, 민간인 사상자도 2만명을 육박하고 있다 한다. 키이우경제연구소는 작년 말 기준으로 우크라이나의 재건비용으로 1조달러(약 1천220조원)를 예상했고, 우크라이나 국내 총생산(GDP)은 전년보다 30%가 줄었다고 발표했다.특히 이번 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유럽 최대의 난민 피해를 일으켰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우크라이나 국민의 3분의 1인 1천300만명이 피난길에 올랐고 그 중 800만명은 해외로 떠났다고 발표했다.6·25 전쟁을 경험한 우리는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잘 안다. 전쟁이 지나간 뒤에 생긴 비극적 상황을 전쟁이 끝난 수십 년 뒤에도 상처로 안고 지낸 기억도 있다.전쟁 발발 1년에 즈음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깜짝 방문했다. 5억달러 규모 군사 지원도 약속했다. 양국 간의 연대감을 과시한 방문이라는 관측이 있지만 전쟁의 종식을 바라는 지구촌의 기대는 당분간 멀어진 듯한 느낌이다.우크라이나 전쟁 1년을 되돌아보면서 지구촌은 전쟁의 위험과 고통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2-21

집권당은 ‘民心의 무서움’을 되새길 때다

심충택 논설위원 2024년 4·10 총선이 1년 2개월 채 남지 않았다. 총선을 앞두고 지금 가장 긴장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내년 총선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 ‘건곤일척의 승부전’을 펼쳐야 할 운명이다. 선거에서 지면 윤 대통령은 곧바로 뒷방노인 신세로 전락하고, 이 대표는 감옥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냉혹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윤 대통령이 ‘비윤’ 후보(안철수)를 ‘국정훼방꾼’이라며 몰아붙이는 것도, 입법권력을 쥐고 있는 이 대표가 노란봉투법, 간호법, 양곡관리법 등을 남발하며 진영(陣營)을 강화하고 있는 것도 모두 그 승부전의 일환이다.현재까지의 전쟁스타일을 굳이 정리하자면, 이 대표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는 태세인 반면, 윤 대통령은 오히려 대문을 닫아버리고 지원병력을 외면하는 뺄셈정치를 하고 있다.윤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당지도부를 측근세력으로 구성하기 위해 난리법석(이준석 전 대표 축출, 유승민 전 의원 출마봉쇄, 나경원 전의원 불출마 강제)을 떨었다. 이 난리에 휩싸여 소속 국회의원들도 당의 미래에 대한 충정보다는 차기공천을 염두에 두고 대통령과 그 주변 권력자를 향해 줄서는데 급급했다. 모두들 마음이 콩밭에 가 있다 보니 총선승패를 좌우할 민심챙기는 데는 뒷전이다.3·8전당대회 당권레이스가 진흙탕싸움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당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당 대표 선거의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김기현·안철수 후보 간 비방전은 합동연설회와 TV토론을 계기로 본격화하고 있다. 전당대회까지 합동연설회 3차례(23일 강원, 28일 대구·경북, 3월 2일 서울·인천·경기), TV토론회 2차례(22일, 3월 3일) 남겨둬, D-데이가 임박할수록 네거티브전은 가열될 가능성이 크다.전당대회 최대이슈가 ‘친윤계’인 김기현 후보의 ‘울산부동산 시세차익 의혹’이라는 점도 여당으로선 불행한 일이다.이 이슈를 놓고 선두를 추격하고 있는 안철수 후보가 연일 “의혹은 털고 가야한다”며 부풀리고 있고, 김기현 후보는 “유치하다”며 대응하고 있으니 전당대회가 외연확장으로 흘러가기는 불가능하다. ‘포스트 전대’의 암운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는, 아주 좋지못한 형국이다. 전당대회의 궁극적 목적이 민심을 얻는 것인데, 오히려 민심이반을 가져오고 있으니 윤 대통령으로선 기가 막힐 것이다. 만약 전대 후 후보들끼리 승복문제가 불거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집권당의 차기 당 대표 임무는 막중하다. 내년 총선에서는 대통령보다 오히려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가지게 된다. 최근 김기현 후보가 “당대표에 당선되면 총선에서 안철수· 나경원·유승민·이준석에게 실질적 역할을 하도록 할 것”이라고 한 말은 정말 마음에 든다. 여권이 전당대회를 총선승리의 기회로 만들려면 당권레이스 캠페인을 외연확장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윤 대통령의 지지율이 답보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2023-02-21

날씨같이 변덕스러운 마음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봄이 오는 길목은 순탄치가 않다. 뒷걸음 치는 겨울이 시샘하며 찬 입김을 내뿜거나 비바람으로 여세를 몰아보려 하지만, 봄물 불어나는 우수 지난 절기는 이미 메마른 겨울의 진영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다. 어쩌면 체념하고 떠나는 겨울의 아쉬움 같은 봄눈이 지난 주에 새벽같이 살짝 내려 눈이 귀한 포항지역에서는 잠시나마 설레임이(?) 쌓이기도 했었다. 계절의 특성에 따라 날씨는 이렇게 을씨년스럽다가도 금세 반갑고 포근함으로 다가오며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불규칙적인 날씨나 자연환경에 따라 사람도 간혹 영향을 받게 된다. 예컨대 비오거나 안개 낀 날에 사람들의 우울감과 갑갑함은 더 많이 느껴지게 되고,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파도를 닮아 성질이 거칠어지게 된다는 말들이 빈말이 아니게 들린다. 그만큼 날씨와 환경은 많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일상 속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날씨가 변하면 사람들의 움직임이 달라지게 되고 변덕스러운 날씨가 이어져 계절이 바뀌게 되듯이, 사람도 겹겹의 일상 속에서 세월의 풍파에 따라 조금씩 변해 가기도 한다.세상만물의 변화와 혁신은 성장과 존속의 중요한 변곡점이듯이, 사람에게도 체질적인 성장과 심성적인 변화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는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경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십년을 지나더라도 한결같이 믿음과 의리를 지키는 듬직하고 넉넉한 큰바위 같은 사람이 있다. 창조적인 개선과 혁신을 위한 변화는 필요하겠지만, 자신의 인성적인 가치와 도의적인 신념은 쉽사리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변화하되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하고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고 지혜롭지 않을까 싶다.그러나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水深可知 人心難知)는 말처럼, 사람의 속마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시쳇말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 비일비재하다. 멀쩡하게 어울리며 흠 없이 잘 지내다가도 하루 아침에 돌변해서 딴 길을 간다거나, 아주 사소한 논점과 견해차로 인해 급기야 결별에 이르게 됨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보아 왔다. 또한 철석같이 믿으며 형제애로 교감하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배신의 날(刃)을 갈고, 자신의 업신여김은 차치하고 오로지 관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배타적인 앙심을 드러내는 등 상식이나 양심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 경우가 흔하다. 그래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니 구밀복검(口蜜腹劍) 같은 성어가 생겨났을까?사람은 어차피 끼리끼리 만나고 어울리며 모여들게 된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거나 뜻이 통하지 않게 되면 물과 기름이 섞일 수 없듯이 한 배를 타고 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루에 사계절이 다 들어있다는 변덕스러운 영국날씨만큼이나 예측 불가하고 표리부동한 사람은 결코 어디에서나 동화하고 동행하지 못할 것이다.

2023-02-21

혼돈속의 질서

전재영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3000년의 역사를 130권에 풀어낸 양적으로만 봐도 어마어마한 역사책이다.등장 인물의 직업들만해도 1천300여 가지이니 말이다. 그 시대의 빅데이터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사기를 정말 독특하게 여기는 이유는 따로 있다. 왕조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 외에도 역사를 몸으로 지탱했던 수많은 ‘일반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열전(列傳)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라고 말했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의 말을 무색 시킬 정도로, 지배자와 승자를 넘어 민중의 역사도 담아냈다. 무려 4천여 명의 인물을 다루었으며, 사회적 약자와 실패자, 심지어 비겁자의 이름과 삶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통해 귀한 교훈들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2천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무대 뒤편에서 역사를 등에 업고 아무개로 살던 사람들을 기록하겠다던 사마천의 그 시선은 놀라운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시선이 아닌가 싶다.코펜하겐비즈니스스쿨의 로버트 D. 오스틴 교수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민들레도 잡초가 아닌 약초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두고 ‘민들레 원칙’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덴마크의 회사 스페셜 리스테른은 자폐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장점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테스트 분야에 그들을 대거 고용하여 남다른 경쟁력으로 성공을 이끌어내었다. 민들레 원칙이 적용된 좋은 사례이다. 사마천은 어찌 보면 진부하고 반복되는 왕들의 권력 다툼과 욕심의 이야기는 잠깐 뒤로 하고, 전국 방방 곡곡에 흩어져 있는 민들레를 직접 찾아가서 그들의 삶을 역사로 기록했는지도 모르겠다.빅데이터는 우리에게 혼돈(chaos)으로 다가온다. 데이터가 3차원을 넘으면 우리는 더이상 그 데이터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혼돈으로 보이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종종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기술을 사용한다. 기계학습은 주어진 고차원 데이터를 저차원으로 줄이고 공통된 패턴과 규칙을 찾아내고 대다수의 데이터가 합의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추세와 범주를 벗어나는 데이터들은 특이값(outlier), 즉 잡초로 간주하고, 수학과 통계라는 칼을 이용해 민들레 뽑아내 듯 과감하게 제거해 버린다. 각각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과 다양성은 대세와 주류에 묻어버리고,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0과 1로만 구분해 버리는 새로운 전체주의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다.우리가 혼돈을 해결하는 대부분의 방법은 그냥 민들레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질서’라는 이름표를 붙여버리곤 한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 이미 창조주의 질서가 들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그냥 아직 민들레의 숨겨진 진짜 가치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빅데이터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쓰레기통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통에 던져버린 민들레, 그 민들레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창조주의 시선이 아닐까.

2023-02-21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과 관동대지진

홍덕구 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지난 2월 6일 새벽 4시 17분 36초, 튀르키예(터키의 새 이름) 남동부의 도시 가지안테프 인근에서 모멘트 규모 7.7의 강진이 일어났다. 이후 수차례의 여진이 이어지다가, 첫 지진 발생으로부터 9시간이 지난 시점에 가지안테프 옆 지방인 카흐라만마라쉬에서 규모 7.5의 강진이 또다시 일어났다. 이 대지진은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 및 국경을 맞대고 있는 시리아 북부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집계된 바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가 현지 시간 19일까지 4만6천명에 달한다고 한다.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은 거대한 천재지변이지만, 그 피해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예방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에르진은 튀르키예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이지만, 이번 대지진으로 단 한 채의 건물도 무너지지 않고,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내진설계 및 시공이 되어 있지 않은 불법 건축물을 강력하게 규제한 시 당국의 방침 덕분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인간의 힘으로 최소화해낸 것이다.하지만 이러한 미담이 이번 대지진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대지진이 일어난 튀르키예 남동부 지역은 시리아와 인접해 있다. 십 년 이상 이어진 내전에 시달리다 못해 국경을 넘은 전재민들로 인해 인구가 급증했기에 피해가 더 컸던 것이다. 4만6천여 명의 죽음은 대지진이라는 천재(天災)와 전쟁, 토건비리와 같은 인재(人災)가 중첩된 탓이다.올해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1923년 9월 1일 발생)이 일어난 지 백 주년 되는 해이기도 하다.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 지진을 우리는 ‘조선인 대학살’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일본인들이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 품고 있던 우월의식과 조선인들을 멸시하면서도 동시에 불온한 존재로 여겼던 감정에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가 불을 붙였고, 결과적으로 최소 수천 명에서 최대 1만 명 이상의 일본 거주 조선인이 죄 없이 살해당했다. 지진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도 막대했지만, 그 틈을 타 제국주의와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라는 인간의 이념이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촉발했다는 것이 더 끔찍하다.그 후 백 년이 지났다.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아주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으로 세계 각국의 구호대가 급파되었고, 민간 차원에서도 구호물자를 모으는 활동이 활발하다. 구조견 ‘토백이’의 ‘붕대 투혼’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민족, 인종, 종교, 정치적 입장 따위와는 상관없이 피해자를 돕는 마음이다. 튀르키예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형제의 나라’라는 이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들도 우리도 대자연의 분노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도와야만 한다.전문가들에 따르면 한반도에서도 규모 7.0 이상의 강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는 인간이 설정한 국경을 개의치 않는다. 서로 돕는 마음에도 경계가 있어서는 안 되겠다.

2023-02-20

남을 배려하는 자전거 문화

김규인 수필가 요즈음 자전거를 타는 것이 유행이다. 여가를 즐길 만큼 소득이 늘었고 운동에 관심이 는 탓도 있다. 뱃길을 만든다던 4대강 사업은 강변을 따라 자전거도로를 내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코스다. 물길을 따라 달리면 한 주일의 피로는 씻은 듯이 사라진다.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늘어서인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난다. 10㎞ 미만의 거리를 달리면 운동할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적정량의 운동이 이루어지고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는 덤이다. 출근 시 막히는 도로를 달리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나는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시간이 여유로운 퇴근길에는 신천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어김없이 휴대전화를 꺼낸다. 2억 화소의 휴대전화 카메라는 어김없이 작품 사진을 남긴다. 강가에 머무는 시간만큼 추억도 사진도 쌓인다. 생각은 깊어지고 소소한 삶의 행복은 늘어난다.낙동강 변의 무심사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 성지다. 낙동강 자전거도로 옆에 있는 데다가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한다. 주위를 지나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들른다. 스님의 배려에 두 손을 모으며 다시 즐거운 자전거 여행을 한다.무심사에서 자전거를 타는 손님들에게 공양을 차려주는 사람은 노보살님이다. 불편한 몸으로 공양을 차리는 보살님의 손이 바쁘다. 혼자 몸으로 많은 사람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몸을 쉬는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러지 않아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거나 재를 준비하느라 바쁜 몸이 종종걸음을 친다. 거기에 더하여 밤늦은 시간에 찾아와 공양을 달라는 사람들 때문에 몸은 파김치가 된다.대구 신천을 따라가면 사람이 다니는 길과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 대부분 따로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전거길과 인도를 아무런 구분 없이 다닌다. 자전거의 속도를 15㎞로 정해 두었지만, 자칫 사고가 나기 쉽다. 일부 사람은 우측통행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이 자신이 가고 싶은 대로 마구 다닌다.유럽 여행을 가면 복잡한 시내에도 자전거 전용도로가 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자동차가 다니는 차선처럼 엄격하게 지킨다. 여행을 온 사람들이 자전거길에 들어서면 가이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고가 난다고 잡아당긴다. 자전거를 타는 문화의 차이다. 우리는 아직 자전거 전용도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역주행을 하거나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이 전등을 높이거나 반짝이는 모드로 놓아 시야를 방해한다. 성능 좋은 LED 등은 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마주 보고 달려올 때는 사고가 날까 봐 조마조마하다. 자전거를 탈 때마다 불빛을 낮추어 달라고 부탁한다. 위로 켜진 불빛이 마주 오는 자전거의 운전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생각해야 한다.자전거를 타는 것은 우리 생활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즐거운 자전거 타기를 원한다. 그것은 남을 배려하는 자전거 문화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조금만 남을 생각하면 자전거를 타는 재미는 배가될 것이다.

2023-02-20

이재명과 文過遂非(문과수비)

홍석봉 대구지사장 검찰이 대장동 개발 특혜와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과 관련,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성남시장 시절 대장동 개발 사업의 최종 결정권자로서 초과 이익 환수 조항을 빼도록 해 성남 도시개발공사에 4천895억 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다. 또 성남FC 구단주로 있으면서 각종 인허가와 관련, 부정한 청탁을 받고 네이버 등으로부터 133억5천만 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검찰총장까지 나서 “지방 권력과 부동산개발업자의 불법 정경 유착을 통해 천문학적 개발이익을 개발업자와 브로커가 나눠 가진 지역 토착비리”라며 몸통은 ‘이재명’이라고 시사했다.이에 이 대표는 “오늘은 윤석열 검사 독재정권이 검찰권 사유화를 선포한 날이자, 사사로운 정적 제거 욕망에 법치주의가 무너져내린 날”이라며 “희대의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되받았다. 그는 온갖 수사(修辭)를 동원, 자신의 범법행위를 미화했고 검찰을 불학무도한 집단으로 몰아붙였다. 독재 권력의 정적 탄압이라고 규정했다. 검찰은 사악하고 파렴치한 집단이 됐다. 검찰이 이 지경으로 매도당한 적이 있나 싶다.거기에 더해 “민주주의와 헌정 질서 파괴”라며 민주당 의원들에게 체포동의안에 반대해달라고 주문했다. 개인 비리를 민주당이 나서 막아달라고 한다.사마광의 자치통감에 ‘문과수비(文過遂非)’라는 말이 나온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교묘하게 꾸며 합리화하고 잘못된 행동을 계속한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은 자기합리화와 거짓말을 밥먹듯했다.검찰은 지금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칼을 갈고 나섰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사법정의는 이제 국회의원들 손에 달렸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2-20

대구정책연구원 출범

남광현 대구경북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지난 2월 1일 대구정책연구원이 출범하였다. 1991년 대구경북연구원으로 시작하여 31년 만에 경북연구원과 대구정책연구원으로 분리되어 각각 경상북도와 대구광역시의 독자적 정책 연구기관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의 단일 정책연구기관으로서 대구와 경북 협력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제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변화에 더 탄력적으로 대응하고 각자의 고유 여건을 반영하여 최대한의 역량을 도출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분리를 선택하게 되었다.대구정책연구원의 신념과 의지는 “글로벌 신(新)중심지 ‘대구미래50’ 중추 크리에이터”의 구현이라는 비전에 담았다. 그리고 연구원이 행동하는 근저를 일관하여 흐르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대구 경제개혁과 삶의 질 혁신을 선도하는 실용적 정책 크리에이터”라는 연구원의 기조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연구원은 ‘창의’, ‘현장’, ‘실용’, ‘소통’, ‘글로벌’ 등 5가지를 ‘금과옥조’와 같은 핵심 가치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가치들은 연구원이 추구하는 연구 목표와 시스템 구축의 골격으로 작용한다.①신산업혁신, ②신공항 등 글로벌 대구 혁신, ③메가공간혁신, ④청년대구혁신, ⑤스마트생활·인프라혁신 등 5대 혁신은 대구정책연구원이 실현을 선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공무원과 연구직원이 하나 된 팀(one team)을 구성하여 시정 주요 현안 이슈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이론과 현장을 접목한 연구고도화를 강구하고자 한다. 정책연구의 적시 고품질화를 위한 조직구성으로 ①전략기획실, ②경제산업실, ③사회문화실, ④공간교통실, ⑤환경안전실, ⑥경영관리실 등 6개의 연구실을 구성하였다.대구 5대 혁신과 이를 포괄한 대구미래 50년 등 대구가 추구하는 핵심의제 6가지를 ‘슈퍼어젠더’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현장 중심의 정책연구 및 분석을 위한 조직구성으로 ①대구미래 50년 LAB, ②신산업전략 LAB, ③신공항경제권 LAB, ④메가공간전략 LAB, ⑤청년대구전략 LAB, ⑥스마트생활권 LAB 등 6개의 전략 LABs을 구성하였다. 이들 LAB의 기능은 마스터플랜(기본계획), 로드맵, 현안 이슈 대응, 데이터 계량 분석 등으로 그야말로 대내·외 변화와 현장, 그리고 시민 공감을 중시하는 정책연구를 수행한다.전국 최초로 대구시청 공무원과 연구원이 ‘연관융합형 정책 싱크 탱크 모델’을 정립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그리고 주요 정책의 계량적 분석을 위한 계량 융합 모형(빅데이터·GIS·계량 경제·디지털트윈 등)을 적용하는 ‘정책 시뮬레이션센터’를 운영한다.이제 갓 발족한 조직의 적은 인원으로 최대효율을 창출하기 위해 매트릭스형(6연구실×6전략 LABs)으로 연구인력을 적정 배치하고 각 연구부서에 이론과 현장 및 정책실무 경험 접목을 위한 공무원을 부원장, 연구실장 등 연구진으로 적정 배치하고자 한다. 이제 대구정책연구원은 출범과 함께 ‘대구 미래 50년’을 향한 대혁신을 위해 조직관리 등 조기 정착에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2023-02-20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신성로마제국의 탄생

800년 성탄절 날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초청해 왕관을 씌워주었다. 서양의 역사에서 이 사건에는 여러 상징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황이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교황은 게르만의 일파인 프랑크의 왕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고 강력한 힘을 지녔던 세속 군주 카롤루스는 교황을 지켜주었다. 카롤루스가 치세하는 동안 프랑크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그의 정책에 힘입어 혼란의 중세 유럽은 첫 번째 르네상스를 맞이했고 이 때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814년 1월 28일 갑작스런 카롤루스의 죽음으로 왕국은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왕좌를 이어받은 것은 여섯 번째 아들 루도비쿠스 1세였다. 형들이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카롤루스의 유일한 적자로서 그가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왕국을 다스렸지만 카롤루스 사후 영지 분봉 문제로 재위하는 동안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심지어 상속 문제로 아들들이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가까스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두터운 가톨릭 신앙을 가졌던 왕은 많은 교회를 세우고 수도원을 후원했다. 성직자를 국가 주요 관직에 등용했고 교회와 수도원에 면세 특권을 주었다. 강한 종교적 신념으로 일생동안 가톨릭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독실한’이라는 의미의 별칭 ‘경건한(Pius)’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왕으로서 그의 정치력은 무능에 가까웠다.숱한 역경을 겪으며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던 루도비쿠스가 840년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의 전통에 따라 장자 로타리우스 1세에게 왕국이 상속되었지만 이에 불복한 이복동생 카를루스 2세와 셋째 동생 루도비쿠스 2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전쟁의 혼란은 843년 왕국을 동, 중, 서로 나누는데 합의한 베르됭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단락된다. 로타리우스 1세가 중프랑크를, 카롤루스 2세가 서프랑크를 그리고 루도비쿠스 2세가 동프랑크를 차지했다.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나누어지면서 지금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의 경계가 어렴풋 만들어졌다.분열된 왕국은 예전처럼 강하지 못했다. 허술한 틈을 놓치지 않고 남쪽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동쪽에서는 마자르족이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이 침입과 약탈을 시작했다. 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이민족의 침략은 10세기에 이르는 동안 이어졌다. 특히 북쪽 노르만은 프랑크 왕국은 물론이고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해안지역에 수시로 출몰해 약탈을 일삼았다. 오랜 시간 거듭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 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쇠락했고 봉건제도라고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출현한다.봉건제도는 토지를 매개로 형성된 사회적 주종관계를 가리킨다. 봉건제도 아래 사람과 토지는 계급화되어 큰 권력에 종속되는 독특한 구조를 만들었고 영주들이 토지를 권력화함으로써 왕권이 약화됐다. 영주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봉신을 거느려야 했고 영주로부터 봉토를 부여받은 봉신들은 충성을 맹세했다. 약한 영주는 강한 영주를 강한 영주는 더 강한 영주를 섬겼고 이렇게 맺어진 주종관계의 봉건사회는 피라미드 구조의 계층을 만들었고 그 정점에는 왕이 있었다.이 같은 정세 속에서 936년 지금의 독일에 해당하는 동프랑크 지역에서 작센의 오토공작이 강력한 왕권을 수립했다. 카롤루스처럼 대제로 불리게 될 오토는 헝가리의 마자르족과 보헤미아의 슬라브족을 제압했고 서쪽으로는 벨기에 남쪽으로는 이탈리아까지 정복했다. 교황 요한 2세는 962년 2월 2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오토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었고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이 탄생했다.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전역을 정복한 대왕 오토는 이교도를 굴복시키며 그리스도교의 수호자가 되었고 이를 토대로 서양의 중세미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3-02-20

눈앞에 닥친 재난, 속수무책이었다

19세기 대구의 선비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는 1856년(철종7) 6월 5일의 일기에서 눈앞에 펼쳐진 폭우의 피해를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3일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전날 세차게 내리면서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서찬규는 이때 한천바위(달성군 가창면 냉천리 위치)에 ‘寒泉’ 글씨를 새기는 일 때문에 한천 물가를 자주 오갈 때였다. 서찬규가 남긴 ‘임재일기’는 그의 나이 21세인 1845년(헌종11)부터 37세가 되던 1861년(철종12) 5월 20일까지 17년간 기록한 것이다.“비가 많이 내림. 이날 집 앞의 시냇물이 넘쳐서 물이 문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양 제방으로 막은 것이 무너지는 환난이라도 있을까 걱정이 되어 집안 식구들을 동쪽의 이웃 마을로 모두 대피시키고 또 사랑방의 서책 등 물건을 옮겼다. 그러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사촌 동생 남규 또 노비 몇 명은 남아있었다. 촛불을 들고 지켜보고 있는데, 북쪽 이웃에서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급히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하니 신천(新川)이 무너져서 물이 크게 밀려와 관덕당(觀德堂) 앞까지 연달아 물에 잠겼는데, 원촌(院村)의 큰 시장 주변 그리고 비산(飛山)과 원북(院北)의 총 400여 가구가 잠겼다고 한다. 재산과 곡식, 그릇 등이 전부 떠내려 가버려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남녀노소가 서로 붙잡고 통곡하며 이리저리 재난을 피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마을 위쪽에 있었는데, 윗마을은 큰 피해 없이 지나갔다.”-서찬규의 ‘임재일기’1856년(철종7, 병진년) 6월 5일 일기 중에서이날 서찬규는 집 앞의 시냇물이 넘쳐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올까 전전긍긍하다가 급기야 둑이 무너져 큰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족들을 다른 곳으로 대피시켰다. 급하게 가족들을 피신시키는 중에도 사랑방의 서책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 했다는 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집 안의 남자들은 집에 남아서 피해를 대비했다. 촛불을 들고 상황을 지켜보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이웃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서찬규는 위기를 직감하고 사람을 시켜 피해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신천이 무너져 물이 크게 밀려와 주변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으며, 400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고 했다. 곡식과 가재도구들이 물결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통곡하는 주민들과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해 이리저리 뒤엉켜 움직이는 주민들의 모습을 서찬규는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비록 자신의 집은 마을 위쪽에 위치해 있어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이 거대한 물난리는 대구의 한 고을을 하천으로 바꾸어버릴 만큼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며칠 후 서찬규는 수해를 당한 곳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했고, 6월 13일의 일기에서는 “전답이 하천으로 변해 버린 것이 5만118두(斗) 9두락(刀落)이고, 떠내려가 버린 집이 1천360호(戶)이며, 죽은 사람은 46명이니 이것은 대구 한 고을만의 피해이다”라며 주변 마을의 구체적인 피해 상황을 기록했다. 그리고 다시 6월 30일의 일기에서 홍수로 인한 영남 지역의 피해를 기록했는데, 물에 잠긴 민가가 1만2천804가구 인명 피해는 559명이라고 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수해를 입기 직전 한천바위에 글씨를 새긴 서찬규는 7월 4일에 한천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온 사방이 물에 잠겨 바위가 있던 물가 언덕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어려웠고, 글씨를 새긴 바위도 깊이 가라앉아 평평해져 버렸다. 다만, 바위에 새긴 글씨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수해 이전의 풍경을 되새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폭우가 내린 지 한 달이나 지났을 때였는데도, 물에 잠긴 곳이 완전하게 복구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으며 그 피해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서찬규의 기록조차도 사실은 그 참혹한 실상을 다 담지 못했다. 다만 구체적인 숫자로 재산과 인명 피해를 기록했기에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할 뿐이다. 하룻밤의 폭우로 559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금처럼 정확한 집계가 불가능했다고 보면, 인명피해 숫자는 부상자까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서찬규는 폭우가 지역을 훑고 지나갈 때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어떻게라도 피해를 줄여보기 위해 촛불을 들고 주변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들리는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집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나갔지만, 짧은 시간 동안 긴박했던 아비규환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참담한 마음을 눌러야했다.서찬규는 일기에서 10여 차례에 걸친 지진과 때마다 닥치는 가뭄도 기록한 바 있다. 그러나 재난상황까지 이어지지는 않았기에 구체적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에 비해 이날의 폭우는 유례 없는 혼돈을 초래했고, 서찬규는 그 속에서 두려움과 싸우며 참혹한 풍경을 마주해야만 했다. 갑자기 닥친 자연 재해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혹시 있을지도 모를 재난에 대비해 오랜 시간 많은 것을 준비하지만, 그 시간과 노력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자연 재해는 얼마나 무서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구하고 극복하고 또 잊으며 살아간다. 그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으며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흘려보낸다.

2023-02-20

역사를 바꾼 책이 독서율을 높일까?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4년 전쯤, 중장년을 위한 사회 교육 기관에서 강의할 때 대학원 수료 학력 수강생의 포부를 들은 적이 있다. 연세가 60쯤 되어 보이는 분이었는데 죽기 전에 서울대 추천 도서 100권을 다 읽고 싶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서울대에서 추천했으니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그런데 며칠 전 EBS에서는 역사를 바꾼 책 100권을 선정하여 전 국민에게 홍보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 발표를 보니, 그때 수강생도 생각나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해서 서울대 목록과 비교해보았다. 과연 서울대 100권 중에는 과학책이 10권인데 비해 EBS의 과학책은 19권이었다. 두 기관의 추천 목적도 달랐다. 서울대학생을 대상으로 만든 서울대 목록에서는 “고전이란 모름지기 인류의 지혜가 집약된 보고이므로 고전에 대한 독서를 통해 판단력과 사고력을 함양하는 한편 성숙한 지성인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기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반면, EBS는 독서율 저하 때문에 문해력이 부족하고 개인 역량이 떨어지며 사회적 소통 능력이 낮다고 보고, 이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역사를 바꾼 책으로 독서율을 높이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작년에 방송된 ‘당신의 문해력+’13부작에서 나온 문해력 문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 방송에서는 업무용 이메일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어휘력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등 일상적인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를 보여주었다.그런데 역사를 바꾼 책 선정 기준이 학제 간 의미를 중시하고 특히 과학책의 비중이 높다면서 이전의 다른 목록과 차별성이 있다고 강조해도, 서울대 목록과 25권이 겹치고 나머지 75권도 서울대 목록과 난이도는 비슷하다. 철학 비중이 높아서 그런지 오히려 더 어려워 보인다. 칸트의 저작 중 서울대에는 ‘실천이성비판’한 권이 있는데 비해, EBS에는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 두 권이 있다. 칸트의 저작이 왜 두 권이나 들어갔는지도 의아하고, ‘순수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이 ‘실천이성비판’보다 당대 사조를 바꾸는 데 더 기여했다는 것인지도 궁금해진다.‘역사를 바꾼’을 앞세운 것을 보면, 아무래도 EBS에서 기대하는 문해력 수준은 단순히 글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력과 판단력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능력은 그냥 읽기만 해서는 높아지지 않는다. ‘이 말이 맞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문제는 없나?’,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숙고하며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핵심 메시지를 전문가가 설명하는 홍보 영상까지 만든다고 하니, 그렇지 않아도 질문하기 어려워하는 독자들이 이렇게 숙고할 기회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어떤 목적을 위해 도서를 선정할 때는 무엇보다도 현재의 상태를 고려해야 한다. 고학력자의 교양 쌓기 목록 같은 고전 읽기 운동으로 독서 진흥이 잘 될지, 한 방향 홍보 영상이 문해력 향상과 사회적 소통 능력 제고라는 목적을 얼마나 달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2023-02-19

생산 현장의 안전 체계와 개선 순서

엄주선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안전(安全)이라는 한자는 ‘여인이 집안에 왕처럼 있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국어사전에서는 ‘위험이 생기거나 사고가 날 염려가 없음 또는 그런 상태’라고 되어 있다. 우리나라 모든 기업들이 직원들을 산업재해로부터 지키고 생산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을 안전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입하고 있으나 아직 선진국 수준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듯하다.정부도 2018년 1월부터 산업재해사망자수를 절반으로 줄이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 2018년 971명이던 사망자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2022년에는 644명을 기록하였다. 정부의 정책과 기업의 노력으로 사망자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근로자 1만명당 발생하는 사망자수인 사망 만인율은 OECD 평균인 0.29에 한참 못 미치는 0.43수준이다. 독일 0.15, 일본 0.13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멀다.안전한 현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전과 관련된 의식, 방법, 체계가 잘 구축되고 유기적으로 작용하여야 한다. 의식은 모든 활동에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본인이 근무하는 현장의 법적 사항 위험물 등 안전과 관련된 기본적인 지식을 학습하고 갖추는 자세이다. 방법은 위험요인을 발굴하고 제거하는 수단을 말하며, 체계는 이러한 일련의 활동이 경영자부터 직원까지 모든 현장에서 관리되고 작용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이중 현장의 직접적인 작업안전확보 수단인 방법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방법은 위험요인을 발굴하고 제거하는 수단을 말하며 위험요인 발굴은 작업표준의 작업 순서를 활용하는 것이 좋다. 작업 순서를 시작부터 작업이 완료될 때까지 빠짐없이 동작 단위로 기술하고 각 동작에 대하여 동영상이나 실제 작업하는 현장을 현물로 보면서 작업의 유해 위험 요인에 의한 부상 또는 질병의 발생 가능성과 사고 시 상해의 크기인 중대성을 추정·결정하여 등급을 구분하고 등급이 높은 고위험 작업에 대한 위험 요인을 도출한다.도출된 유해 위험 요인의 개선 순서는 첫째가 위험한 작업을 아예 하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공정 자체를 바꾸거나 사람의 작업을 기계화 자동화 하여 대체하는 것이다. 그 다음 둘째가 어쩔 수 없이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 작업자가 처음부터 실수하지 않도록 하거나 실수를 하여도 사고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셋째가 가장 낮은 수순의 조치로 접근을 못하도록 안전시설물을 설치하거나 보호구를 착용하는 것이다.기업의 안전수준을 이야기 할 때 ‘비료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식물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의 최소량의 법칙을 많이 인용한다. 그는 ‘식물의 성장을 좌우하는 것은 충분히 많은 영양소가 아니라 가장 부족한 영상소’라고 하였으며 이를 나무판자들을 덧대 만든 물통에 비유하여 가장 높이가 낮은 판자에 의해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즉 회사의 전체 안전 수준도 결국 소속된 개개인의 수준에 의해 결정되며 전 직원이 스스로 안전 수준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2023-02-19

‘그깟 5년 정권이… 겁이 없나’

김진국 고문 사는 과정이 아귀다툼이다. 그런데도 사회가 유지되는 건 탐욕을 규제할 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지배한다. 특히 힘있는 사람들의 절제가 필요하다. 힘이 세다고 거들먹거리면 더 센 사람에게 굴욕을 당한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군(君)’은 딱히 최고 권력자뿐 아니다. 권력 집단 모두에 해당한다. 그나마 법이 힘없는 사람의 권리를 대등하게 보호한다.‘탈진실’(post-truth)의 시대라고 한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대안적 진실’을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도 전형적인 탈진실의 경향을 보인다. 진영으로 쪼개져 다투기만 할 뿐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 대안적 진실을 끌어안는다. ‘뻔뻔한 진실’이다. 그러니 대화도, 통합도 어렵다.그런데도 진실은 필요하다. 진실이 무너지면 사회도 무너진다. 법 집행과 정의도 사라진다. 그러면 무엇으로 진실을 가려야 하나. 힘으로 진실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건 ‘뻔뻔한 진실’이다. 상식에 맞아야 한다. 법으로 가릴 수밖에 없다.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있다. 바둑에서 큰 말은 잘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힘 있는 사람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치 거물이라고 처벌받지 않는다면 그건 민주주의도 아니고, 정의로운 사회도 아니다. 진실은 힘이 아니라 법과 상식으로 가려져야 한다.곽상도 전 국민의힘 의원의 아들이 퇴직금이란 이름을 붙여 50억 원을 받았는데,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30대 초반 평범한 직장인이 6년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았다. 터무니없는 돈이다. 누가 봐도 뇌물이다. 곽 의원이 50억 원을 달라고 조른다는 녹음도 있다. 그런데도 증거가 없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경제단위란다. 증여세 없이 자식에게 재산을 넘겨 주려고 온갖 편법을 쓰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걸 완전히 외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최순실 씨와 ‘경제공동체’라고 묶어 뇌물죄를 적용한 검찰과 법원은 어디 갔나.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했다고 믿기 어렵다. ‘50억 클럽’의 다른 혐의자들은 손도 대지 않고 있다. 명백히 돈이 전달된 곽 전 의원이 무죄라면 나머지는 안 봐도 뻔하다. 법은 어렵다. 일반인은 겁부터 난다. 서민들도 ‘높은 분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싶다. 법 논리를 아무리 정교하게 세워도 평범한 우리 입에서는 “놀고 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7일 “그깟 5년 정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 겁이 없나”라며 검찰을 비난했다. ‘그깟 5년’이라니. 겁이 나면 검찰이 수사하지 말아야 하나. ‘5년 뒤 내가 집권하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감히 나를 수사하느냐’는 말로 들린다.힘으로 진실을 가릴 수 없다. 그는 민주당 지역위원장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수사의 대상이 된 피의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술하거나 진술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헌법상, 법률상 권리를 조목조목 열거했다.이 대표도 법률에 허용된 권리를 충분히 행사할 수 있다. 그러려면 국회 1당 대표로서 검찰을 위협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수사받아야 한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섰던 정치인이다. 침묵을 지키는 권리 행사에 앞서 자신을 지지해준 국민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다. 일반인으로서 권리는 다 찾아 누리고, 정치 지도자로서 도덕적 의무는커녕 힘으로 검찰수사를 방해하려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다.서울중앙지방법원은 17일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 요구서를 발부했다. 이 요구서는 정부를 거쳐 국회에 전달되고, 국회가 동의하면 구속 영장이 발부된다. 또 이때 법원이 영장실질심사를 하게 된다. 검찰이 일방적으로 구속하는 게 아니다. 법원이 동의서 발부, 영장실질심사를 한다.더군다나 최종적인 진실은 법원이 가린다. ‘감히 나를…’이 아니라 당당하게 진실을 가리고, 법 해석으로 다투는 것이 정도다. 국민은 진실을 원한다. 또 책임 있는 정치인으로부터 솔직한 고백을 듣고 싶다.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3-02-19

에너지 전환시대, ‘태양광 농사’가 해답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1700년대 석탄과 석유, 가스 등 화석연료의 대량사용은 에너지 혁명을 가져오고 산업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급격한 인구증가도 수반했다. 당시의 산업혁명은 상상 이상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했고,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이상의 급격한 기온 상승 요인이 됐다.전문가들은 급격한 기후변화로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농업이라고 한다. 기후 위기는 곧 식량 위기인 것이다.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기후 위기 극복은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는 식량의 자체 생산보다 수입이 더 많은 처지여서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식량 수입국, 더구나 제조업 강국인 산업구조를 감안한다면 우리나라는 탄소중립을 위해 어떤 나라보다도 더 노력해야 되는 입장이라 할 수 있겠다.윤석열 정부는 전 정부에 비해 재생에너지 정책을 한참 후퇴시키고 원전에만 매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제조업 중심의 기업들은 정부와 국민들 눈치만 보며 설마설마하는 중인 것 같다.일본에서는 정부가 재생에너지 정책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자 소니가 나서서 일본을 떠나겠다고 압박하며 정부정책을 바꿨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뒷걸음치고 있는 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에 항의하는 기업이 한 곳도 안보인다. 정치권, 특히 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한 직접적인 권한을 가진 지자체들은 없던 규제를 만들어서 대부분 마을에서 500m, 시·군 도로 이상 도로에서 500m의 이격거리를 두어 재생에너지 산업의 씨를 말리고 있다.주민들 또한 전자파 괴담과 중금속 등 오염물질 가짜뉴스를 맹신하여 비닐하우스보다 오염이 덜 한 태양광 발전소 시설을 혐오시설 취급하며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후 변화에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나라는 우리나라다. 식량 수입국인 우리나라는 식량 안보를 위해서라도 탄소중립에 국가적 사활을 걸어야 한다. 에너지 안보에 식량안보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철강,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탄소배출이 많은 제조업 수출 중심 국가인 한국의 산업은 탄소국경세 등으로 인해 당장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산업계가 지금 고민해야 될 일은 하루빨리 RE100을 달성할 방안을 찾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은 RE100 달성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세계적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고 흔히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연평균 4시간, 연간 1,459시간의 일조량을 갖고 있다. 독일보다 38% 태양광 기회가 많다. 그리고 큰 바람은 부족해도 산과 골로 이루어진 국토는 소형 풍력 발전에도 적합하다.문제는 국민의식이다. 태양광 발전은 전자파 발생이나 중금속으로 인한 오염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어 주민들은 무조건 반대한다. 그러나 태양광 모듈에서는 전자파가 발생하지 않는다. 단지 집전 시설에서 일반적인 변압기에서 발생하는 정도의 전자파가 발생하는데 이것도 휴대폰 전자파 수준도 안된다. 태양광 모듈이 흑색이다보니 중금속 오염에 대한 그릇된 정보들이 많이 나오는데 태양광 모듈은 모래에서 추출하는 규소로써 반도체와 같은 소재인데, 쓰이는 중금속도 극히 미미하여 비닐하우스 수준의 오염이 발생한다. 그리고 소형풍력의 경우는 1kW~5kW 정도의 제품들로 지붕이나 건물 옥상에 설치하면 되는데 소음도 거의 없다.우리나라의 농지는 150만㏊에 이른다. 이 중 25% 정도를 태양광 발전으로 사용하면 원자력 발전과 에너지 믹스를 통해 탄소중립이 가능하다. 농지에 태양광 발전을 하면 농사는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질문들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의 발전사들은 그간 영농형 태양광 발전에 관해 실증사업을 해왔는데, 벼농사의 경우 태양광을 정상에 비해 20% 줄여서 설치하면 벼수확량이 20% 정도 줄어들지만 영농이 가능하고 농가소득은 10배 이상 증가한다는 보고가 있다.요즘 농촌에 가보면 쌀농사를 짓지 않는 농경지는 과수나 채소 재배를 하거나 아니면 묵혀두는 곳이 대부분이다. 근본적인 농가소득 변화를 위해서라도 논농사 수익의 20배에 달하는 ‘태양광 농사’를 통해 농업·농촌 문제와 탄소중립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처럼 사막이나 버려진 땅이 거의 없다. 67%는 산지이고 15% 정도가 농지이며 나머지는 도시 등 사람이 사는 곳이다. 탄소중립을 위해 산지를 훼손하는 일은 오히려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일이다. 도시의 주택이나 공장의 지붕에만 태양광 설비를 해서는 탄소중립을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농사가 가능한 토지에 대해서는 수확이 20% 정도 줄더라도 소득은 10배정도 늘릴 수 있는 영농형 태양광 발전시설을 하고, 기계영농이 힘들거나 버려지는 농지에 대해서는 ‘태양광 농사’를 통해 농촌소득을 증대시켜야 한다. 그래야 농촌 소멸을 막을 뿐만 아니라 국토 균형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순조로운 에너지 전환과 탄소중립은 ‘태양광 농사’가 해답이다.

2023-02-19

자원! 우리가 직접 확보하자!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석탄, 석유, 철의 원광석 등은 수천 년간 삶의 인프라를 제공해 왔다. 전기, 자동차, 항공, 건물, 자재 등은 이러한 기본적인 자원의 개발이 있어서 가능했다.사실상 인간의 삶은 자원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할 정도로 자원의 중요성은 역사와 함께 해 왔다.최근 곧 공급이 부족할 것으로 예측되는 자원인 리튬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전기차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는 가운데 배터리의 핵심원료인 ‘백색 황금’ 리튬을 확보하려는 기업 간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이다.한국에서는 최근 캐나다에 북미산 리튬정광을 확보한 LG화학 외에도 자동차 배터리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SK온이 있지만, 10여 년 전부터 리튬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포항의 포스코그룹이 있다.사실상 포스코는 지난 2010년부터 그룹의 미래 먹거리를 리튬으로 지목하고, 염수에서 리튬을 뽑는 기술을 개발해왔다. 2018년에는 약 3천억 원을 투자해 아르헨티나 옴브레 무에르토 리튬 염호(소금호수)를 인수했고 2년 후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2020년에는 현지 시험공장 시험가동을 마쳤다. 이에 따라 지난해부터 2.5만t 규모의 1단계 상용화공장 착공에 돌입했다.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리튬은 전기차 약 60만대를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추정치이긴 하지만 매장량 잠재력으로 볼 때 호수의 리튬 매장량이 인수 당시 추산한 220만t보다 6배 늘어난 1천350만t임을 확인했고 이는 전기차 약 3억7천만 대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대박을 넘어 초대박을 터뜨린 것이다.세계 각국의 전기차 업체와 배터리 제조사도 리튬 확보전에 뛰어들었다. 가장 일찍 출사표를 던진 기업은 미국의 전기차 업체 테슬라다. 2020년 피에드몬트 리튬과 북미 공급 계약을 하고, 현재 텍사스주에 리튬 정제공장 건설을 추진 중이다.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 목표에 도달하려면 2030년까지 연간 판매되는 차량의 약 60%를 전기 자동차로 채워야 한다고 한다.탈중국화도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중국과 서방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탈중국화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탈중국화에 필수적인 방법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희토류, 리튬 등 희귀자원의 자급자족 및 공급망 강화를 서두르고 있다.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희토류 채굴 허가 프로세스를 단축하기 위해 재검토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EU 집행위는 재검토를 마친 뒤 오는 3월 관련 법안을 발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법안이 통과되면 희토류 채굴부터 공급까지 소요 기간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 전망이다.미국은 희귀 자원 공급망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캘리포니아주 희귀 광물 채굴·처리시설 개발에 수 천만 달러를 투자하고, 텍사스주에선 미 화학기업 블루라인이 호주 최대 희토류 생산업체 라이너스와 공동 건설 중인 희토류 정련공장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한편 자동차의 휘발유에 대한 의존도가 전기차로 대치된다 해도 여러 가지 용도로 석유의 개발도 여전히 중요하다.사실상 석유와 희토류, 리튬 등 필요한 자원개발과 활용, 변환의 일괄 공정은 이제 필연적 과제로. 정책과 인재양성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자원 확보에 필요한 외교정책, 기술, 자금지원 인재양성도 빠른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대학들은 기존의 자원공학을 ‘에너지자원 공학’으로 명칭을 바꾸고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이러한 세계적 추세에 대응하고 있다.서울대를 비롯한 에너지자원공학의 커리큘럼은 최근 에너지자원 개발, 처리, 변환 등의 일괄 밸류체인을 완성하고 환경 및 에너지 경제 등까지 연구 영역을 확대하면서 에너지 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재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여기에 재생에너지까지 가세하고 있다. 최근에는 폐금속 발굴 재생(Urban mining)이란 분야도 등장하였다.지금도 사우디, 인도네시아 등 세계 전역을 돌면서 자원 확보를 위해 애쓰는 엔지니어들을 보면 묵묵히 일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고 있다. 이제는 정책적으로 뒷받침해 이들을 격려하고 자원전쟁 시대에 한국이 선두에 나설 수 있도록 정책적 뒷받침을 해야 한다.특히 이곳 포항은 포스코가 자원 확보에 절대적 선봉에 서 있는 기업이므로 그러한 분야의 연구를 포스텍도 본격적으로 시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사실상 자원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활에 필수품인 전기공급, 자동차도 도로를 달릴 수 없고, 공장 등이 가동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필수품이 된 핸드폰도 만들 수 없다.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자원은 유한한 것이다. 미래는 자원전쟁과 자원외교의 장이 될 것이다포스코 자원투자의 개가를 보면서 에너지자원 기술에 대한 포스텍의 학문적 뒷받침과 인재양성, 연구투자, 기술투자들이 절실하고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아마도 의과학자 양성과 에너지자원 개발 처리의 연구가 앞으로 포스텍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자원, 우리가 직접 확보해야 한다.

2023-02-19

다시 2월, 배웅과 마중의 행간

이희정시인 젖도 덜 뗀 어린 것이 아우를 보았던가이월 숲 아랫도리는 여전히 까칠해도보란 듯 우듬지 쪽은 핏물이 하마 돈다꽃샘이 뒤미처 와 눈을 자꾸 흘기더니날日수도 늘 모자라 무녀리만 같은 너를자투리 천 조각 이어 감침질로 안고 간다-이승은 시집 ‘넬라 판타지아’(2014) 중 ‘다시 이월’ 전문이승은(1958~) 시인이 부르는 이월의 마디는 환한 적막 속 어녹은 눈처럼 온다. ‘다시 이월’이 수록된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의 표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는 ‘환상 속에서’로 번역되며, 1986년 발표된 영화 ‘The Mission’의 주제곡인 ‘가브리엘 오보에’에 이탈리아 가사를 붙여서 부른 노래다. 뜻밖의 새하얀 늦눈을 만나는 이월은 짧게 교차하는 ‘배웅과 마중’의 환상적인 간이 구간이 아닐까.1979년 KBS 문공부 주최 전국민족시대회에서 약관의 나이로 우리 곁에 온 시인은 “하마 도는 핏물”의 생경한 언어처럼 와서는 “다시 이월”이라고 했다. 이미 시인은 앞선 시집 ‘환한 적막’에서 ‘2월’을 선창하며 “늘 못다 떼고 덮어버린 국정교과서 같은 2월 / 어정쩡한 학기 말”의 모국어를 건너왔기에. 이즈음 다시 궁금한 그녀의 “젖니의 시간, 뜯고 싶은 봉함 편지”를 기어이 뜯어보려는 것이다.모자라거나 작은 것들, 여린 것들은 언제나 눈을 시리게 한다. 첫 행을 보라, 막 첫걸음마를 뗀 어린 형이 채근 대는 아우에게 유모차를 내어주고 조막만 한 발을 소심하게 내딛는 모습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이어 화자는 유독 날수가 모자라 다리가 짧은 2월을 “무녀리”라고 했다. ‘무녀리’의 사전적 의미는 “비로소 문을 열고 나왔다는 뜻 ‘문(門)+열다’의 ‘문열이’가 변하여 된 말이며, 짐승의 한 태(胎)에서 나온 여러 마리의 새끼 중에 맨 먼저 나온 놈을 일컫는 말”로 제일 먼저 나온 새끼는 다른 새끼들에 비해 유약하다. 화자의 애잔하고 깊은 내성의 눈빛이 짙게 묻어나는 둘째 수를 주목해 보자.“꽃샘이 뒤미처 와 눈을 자꾸 흘기더니 / 자투리 천 조각 이어 감칠질로 안고 간다” 며 동적인 시상을 입체적으로 펼치며 2월을 상징하고 있다. 기실 이승은 시인은 돌연 감침질로 안고 가버리는데 능하다. 그것도 바늘땀이 밟고 간 자국도 없이 귀신같이 홀쳐 꼬리를 감춰버리는 것이다. 첫 행은 오금을 박듯 오지게 들어 앉히고는 여봐란듯이 따돌리고 가는 비기(祕記)를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지점이 곧 올곧게 이어온 현대시조가 담보하는 올무 같은 정형의 탄성을 만나는 마술적인 구간일 것이다. 그녀는 근작 시집 ‘첫 이란 쓸쓸이 내게도 왔다’에서 “아직 끝난 건 없다”라고 다짐하는데 화자의 이월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월이고 곧 다가올 뭇 생명을 예고하는 옴의 구간이기 때문이리라.겨울과 봄을 여닫으며 판타지풍의 발성으로 부르는 배웅과 마중의 행간, 2월이 여닫는 문은 여느 계절과는 다르다. 이월(February) 속에는 입춘이라는 절기가 들어 있는데 입춘은 봄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봄의 문턱에 들어서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아직 날씨는 한겨울이지만 얼었던 땅이 서서히 풀리고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입춘에는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였다. 이는 고대 서양에서의 2월이 가진 정화의 의미와도 다르지 않을 테니 겨울을 고이 보내며 다가오는 봄을 새 몸, 새 마음으로 맞는 정결한 의식과도 같다. 어느새 햇살을 입은 생명들이 번지듯 오고 있다.“이월 숲 아랫도리는 여전히 까칠해도, 우듬지 쪽은 핏물이 하마 돈다”◇ 이희정 시인 약력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오랜 이웃의 문장들’

2023-02-19

공무원, 청렴하면서도 유연해야

주낙영 경주시장 ‘접시깨기 행정’이란 말이 있다. 제20대 대통령직 인수위가 “접시를 열심히 닦다가 깨트린 사람은 보호해 주고, 접시를 닦지 않아 먼지가 끼도록 두는 사람은 책임을 엄정하게 묻겠다”며 공무원들에게 적극 행정을 장려한데서 나온 말이다.접시깨기 행정이란 말은 과거에도 있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2020년 1월 취임사에서 “일하다 접시를 깨는 일은 인정할 수 있어도, 일하지 않아 접시에 먼지가 끼는 것은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신년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설거지를 하다 보면 손도 베이고 그릇도 깨고 하는데 그릇 깨고 손 베일 것이 두려워 아예 설거지를 안 하는 것은 안 된다”고 지적했다.이처럼 역대 정부마다 접시깨기 행정을 주문한 이유는 “새로운 일에 손을 댔다가 책임지기 보다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는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나서달라는 말인데, 여기서 말하는 ‘적극적’이란 단순히 ‘소극적’의 반대말이 아니다.일례로 한번 쓰고 버려지는 애물단지 ‘아이스팩’의 수거·재활용 시스템도 다름 아닌 공무원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아이디어를 낸 서울 강동구청 최병옥 주무관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전국 지자체 최초로 아이스팩 재사용 체계를 구축한 덕분에 2년 간 아이스팩 20만1천990여개를 수거해 생활쓰레기 101t을 줄일 수 있었다.이뿐만이 아니다. 2020년 5월 정부가 코로나19로 경제적 어려움을 국민을 위해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적이 있다. 당시 지급 3주 만에 대상자 99%가 지원금을 수령할 만큼 신속한 속도를 보였는데, 이는 민간 카드사 홈페이지와 연계한 시스템을 만들자는 행안부 이빌립 서기관의 아이디어 덕분에 가능했다.적극 행정 사례는 경주시에도 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는 교량 신설 대신, 보행로를 활용해 우회전 전용 차로를 신설하고 교량 측면에 보행자용 데크를 만들자는 역발상 역시 공무원의 아이디어였다. 경주시 신재목 주무관의 아이디어 덕분에 교통정체를 획기적으로 줄였을 뿐 아니라 예산 90억원도 아낄 수 있었다.흔히들 공직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청렴이라고 한다. 청렴해야 공정해지고, 공정해야 신뢰가 생긴다. 하지만 지나치게 청렴만 강조하다보면 유연함을 잃게 되어 적극 행정을 할 수 없게 된다.명나라 시대 ‘해서(海瑞 1514-1587)’라는 유명한 청백리가 있었다. 그는 우도어사(감찰부장)까지 오른 정2품의 고위 관료였지만, 사망 후 남긴 재산이 장례를 치르기에도 모자라 동료 관원들이 돈을 걷었다는 일화가 있다. 더 대단한 것은 해서가 평생토록 이런 수준의 청렴함을 유지하고 살았다는 것인데, 그는 평생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한번은 그가 병약한 노모를 위해 고기 두 근을 사자 “해서가 고기를 두 근이나 샀다”는 소문이 관가에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이 정도면 도가 지나치다 못해 매정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해서는 강직함으로 시기와 원성을 사 수차례 파직을 당해야 했다. 해서의 삶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엇갈린다. 탐관오리들로 가득한 부패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었다는 호평과 함께, 결벽증에 가까운 강퍅함으로 주변을 불편하게 만들어 실제 큰 성과도 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처럼 해서는 시대와 불화했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중텐 ‘품인록’ 중)2023년 현재를 살아가는 공무원들은 해서의 어떤 면을 취하고, 또 어떤 면을 버려야 할까?만약 공무원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법과 규정만을 고집한다면, 시민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해결해 줄 적극행정은 불가능하다. 높아진 시민들의 기대와 욕구를 감안할 때 해서가 추구했던 얼음장 같은 강직함이 능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법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유연하고 능동적인 자세로 민원을 해결해 줄 수 있어야 유능한 공무원이다. 청렴하되 무조건 강직해서는 안 된다. 공무원들이 청렴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청렴만 해서도 안 되는 이유다.

2023-02-19

동주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래전 일이다. 서관에서 강당을 거쳐 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정한숙 선생이 서 있었다. 그런데 선생의 자세가 이상했다. 오른손을 눈썹 위에 갖다 붙이고 경영대 방향 동쪽 하늘을 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궁금증이 많은 나는 선생께 여쭈었다. “뭘 보십니까?!” “안 보이나?” “글쎄요?” 나도 선생을 따라 같은 자세를 취했으나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뭐, 특별한 건 안 보입니다.” “저기 멀리서 봄이 오고 있어.”‘뭐지?’ 하고 나는 혼잣말했다. 노교수의 눈에는 봄이 오는 것이 보였으나, 젊은 육신의 내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노소(老少)의 문제가 아니었다. 봄을 간절히 그리는 초로의 교수와 봄이 아쉽지 않은 청춘의 차이가 불러온 결과가 아니었나 한다. 정한숙 선생이 지금도 떠오는 것은 “시는 무조건 암송해야 한다”는 소중한 말씀 때문이다. 선생의 ‘소설 기술론’ 강의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말씀이 그것이다.신입생 시절에 나는 두 가지 일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하나는 손에 닿는 대로 시인들의 시집을 찾아 읽고 마음에 드는 작품은 외우는 것이었다. 윤동주, 이육사, 서정주, 한용운 시인의 작품이 주요 대상이었다. 여기 덧붙여 시인들의 평전을 읽는 것이었다. 그 둘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영어판을 아껴서 읽는 일이었다. 읽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어린 왕자’를 선물하곤 했다.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나는 적잖은 시를 기억한다. 시조와 한시, 일본의 하이쿠 몇 편도 번역으로 기억하며,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도 암송한다. 정한숙 선생의 말씀은 진리였다. 암송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이가 떨어져 나간 시편(詩篇)은 아쉽기 그지없다. 요즘도 불가(佛家)의 서책이나 유가(儒家)나 도가(道家)의 경전 가운데 마음을 흔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기억하려는 자세는 그때 생겨난 것이다.지난 2월 16일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가 세상을 버린 날이다. 1917년 12월 30일 태어나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세상과 작별한 동주. 그와 연희전문에서 수학했던 후배 정병욱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동주에 관한 안목을 넓혔던 기억도 어제처럼 선연하다.“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을 모두 헤일 듯합니다.”로 시작하는 ‘별 헤는 밤’과 연관된 정병욱 선생의 글은 잊히지 않는다. 본디 ‘별 헤는 밤’의 마지막 연은 “따는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였다고 한다. 병욱은 마지막 연이 너무 허전하다는 말을 동주에게 전했고, 두어 달 뒤에 동주가 마지막 연에 새로운 부분을 덧붙였다는 것이다.“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부끄러운 자신을 부정하는 청년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시인의 면모를 아름답게 그려낸 동주. 창밖 촉촉한 빗소리가 봄을 부르는 듯하다.

2023-02-19

대구시민의 날

우정구 논설위원 21일은 대구시민의 날이다. 대개 도시마다 시민의 날을 정해 그날은 축제와 각종 행사로 기념하고 있다.대구시는 본래 1981년 대구직할시 승격을 기념해 10월 8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으나 도시 정체성을 살리는 뜻있는 날로 정하자는 여론에 따라 2020년부터 국채보상운동 기념일인 2월 21일을 시민의 날로 변경, 시행하고 있다.서울시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한양 천도일인 10월 28일을 서울시민의 날로 정해 놓았고, 부산시는 임진왜란 당시 부산포해전 승전일을 기념해 10월 5일을 시민의 날로 정했다. 저마다 도시의 특성과 시민의 자부심을 떠올릴 역사적인 날을 뽑아 시민의 날로 정하고 있다.대구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항해 일어난 세계 최초의 시민주도 경제주권 운동이다. 1907년 2월 21일은 대구민의소가 북후정에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낭독해 국채보상운동의 서막을 알린 날이다.이 운동은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고, 남정네는 담배를 끊고, 부인네들은 패물을 내놓아 나라의 빚을 갚는 데 앞장섰다. 2017년 10월 유네스코는 국채보상운동과 관련한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대구시는 21일을 시민의 날로 지정하면서 대구·경북 최초의 국가기념일인 2·28 민주운동기념일까지를 대구시민 주간으로 정해 시민들이 뜻깊은 날을 기억토록 하고 있다. 특히 2·28 민주기념일은 대구지역 젊은이가 독재에 항거해 일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주의 운동이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운동이어서 시민주간 행사의 의미를 더해 준다.많은 시민이 이 날을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겨보아야 시민의 날 제정의 의미가 있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2-19

에르진市의 교훈

우정구 논설위원 에르진시는 지진이 덮쳤던 튀르키예 10개 주(州) 가운데 특히 피해가 컸던 하타이 주 인구 4만2천명의 작은 도시다. 이번 강진의 진앙지로부터 직선거리 8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1만2천 채의 건물이 무너지고 수만명의 사람이 사망한 튀르키예 강진에도 건물붕괴 0, 사상자 0를 기록했다. 외신들은 기적의 도시라 불렀다.에르진시 엘마소글루 시장은 이런 결과를 묻는 외신기자에게 “나는 단지 불법건축물 시도를 일절 용납하지 않으려 노력했을 뿐”이라 말했다.이번 강진이 발생하자 튀르키예 정부도 부실공사가 피해를 키웠다는 여론에 따라 건설업자들에 대한 칼을 빼들어 100여 명을 체포하기도 했다.일본의 지진 전문가들은 튀르키예 지진이 피해가 컸던 원인으로 팬케이크 붕괴 현상을 꼽았다. 팬케이크 붕괴는 건물의 바닥이 무너지고 그 위에 또다시 윗층 바닥이 무너지는 방식이다. 잔해 속에 빈공간이 없기 때문에 다른 붕괴보다 위험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내진 설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2017년 포항에서 발생한 5.4규모 지진에도 수많은 이재민과 재산 피해가 일어났다. 지진은 인류가 막을 수 없는 최악의 자연재난이다. 하지만 미리 대비를 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튀르키예는 1999년 북서부 대지진으로 1만7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는데도 제대로 건축법을 지키지 않아 피해가 커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엘마소글루 시장은 선거당선 후 불법건축물에 대한 예외 적용을 요구하는 민원에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 그러나 한 번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장의 법과 원칙 고수가 인명과 재산을 지킨 결과가 되었다. 타산지석 삼을 만하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2-16

무너진 공정과 상식

홍석봉 대구지사장 기가 막힌다. 사법정의는 실종됐다. 금융권은 돈 잔치에 흥청망청이다. 국민들은 분노한다. 대통령까지 나섰다.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우리 사회의 공정과 상식이 형편없이 무너졌다.법원과 검찰의 국민의 법 감정과 괴리된 판결과 기소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잇단 법원판결이 원인이다. 곽상도 전 의원의 뇌물죄 무죄 판결이 불을 질렀다. 야당이 들고 일어났다. 재판거래 의혹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사법부의 권위와 신뢰는 바닥이다.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대구지법 앞에서 규탄 시위를 했다. 곽 전 의원 아들이 받은 퇴직금이 뇌물이 아니라면 5년10개월 근무한 대리가 받은 퇴직금 50억 원이 정상이냐고 꼬집었다. “퇴직금 50억 원은 대기업 대표로 20년 이상 근무한 사람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거액”이라며 사법부를 성토했다. 대장동 일당의 뇌물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한 국민상식이라고 비판했다.“정상적인 퇴직금 지급액의 221배에 달하는 금액, 검사 출신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이 이렇게나 달라야 하는지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법치가 무너지고 공정과 상식은 휴지조각이 됐다.검사출신의 홍준표 대구시장은 “요즘 판검사는 샐러리맨”이라며 ‘검수완박(검찰수사권 완전 박탈)’말이 나오는 이유라고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검사의 봐주기 수사인지, 무능에서 비롯된 건지, 판사의 봐주기 판결인지 모르겠다”고 힐난했다. 야당의 특검 추진을 반기며 ‘50억클럽’ 특검을 촉구했다. 대통령실도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라는 반응이다.앞서 법원은 무소속 윤미향 국회의원의 정의기억연대 기부금 횡령 사건과 관련, 벌금 1천500만 원을 선고하고 주요 혐의 대부분을 무죄판결 했다. 기부금 관리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국민의 법 감정과 상식에 맞지 않다며 시끄럽다. 홍준표 시장은 “정신대 할머니를 등친 후안무치한 사건이라고 그렇게 언론에서 떠들더니 언론의 오보였나. 검사의 무능인가”라고 꼬집었다.고금리를 틈탄 은행의 ‘돈잔치’는 서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4대 금융지주의 당기순이익이 16조6천억 원에 달했다. 빚을 내 집을 산 ‘영끌족’과 영세 자영업자 등을 상대로 고금리의 이자장사로 배를 채웠다. 희망퇴직자에겐 수 억에서 10억 원대의 퇴직금을 지급, 서민들의 눈이 돌아가게 했다. 학자금 등 각종 명목의 지원금까지 얹어줬다. 성과급 잔치는 불문가지다. 대통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정치판도 공정과 상식을 찾을 길이 없다. 여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는 대통령의 개입으로 이미 난장판이 됐다. 야당은 당 대표의 사법처리를 막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친다. 민주노총은 법 위에서 군림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장애인단체는 약자를 무기로 국민을 불편케 한다. “정치는 실종되고, 사회는 분열되고, 자유는 위협받고 있다.” 야당 원내대표의 말이다.수 없는 좌절과 고통을 극복하고 이 자리까지 온 우리다. 대오각성이 필요하다. 틀을 부수고 알을 깨야 한다.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일깨우고 되찾아야 한다.

2023-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