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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 저는 개독교인입니다

이재현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쫓아오든 햇빛인데 / 지금 敎會堂 꼭대기 / 十字架에 걸리였습니다.”윤동주가 원고지에 쓴 그대로 ‘십자가’ 한 소절을 옮겨봅니다. 오늘은 맞춤법을 따르기보다 시인의 마음을 좇아, 참회의 그 심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노래합니다.예, 저는 개독교인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경멸하며 비하해 부르는 그 ‘개독교인’ 맞습니다. 열정에 가득찬 누군가에 이끌려 교인이 된 게 아닙니다. 제 의지로 교회를 찾아가 교인이 된 것도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개독교인,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못해신앙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모태신앙인입니다. 감성적이기도 하지만 나름 논리와 합리성을 따지는 저는 부모님으로부터의 신앙 유전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은 개독교인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모태신앙을 감사하며 이때껏 살아왔습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장로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사람을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호감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기독교 친화적인 시절이 있었습니다. 권사님이라고 하면 왠지 믿음이 가고 어머님같고 친할머니같은 포근한 느낌을 보통 사람들이 가졌던 적도 있었습니다.구한말 백척간두의 위기 속에서 미몽에 갇혀있던 우리 민족을 깨우쳐 근대화를 이루게 하고, 일제하 독립운동에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이 기독교였습니다. 독수리 날갯짓과 같은 믿음으로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게, 추한 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고 외치며 “해 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주시어 정의가 사나니”라는 찬송을 부르며 독재의 군화와 최루탄에 당당히 맞서 민주화를 이뤄낸 선배 기독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사랑과 정의의 빛이 점점 흐려지고 부정적 인식은 점점 커져 개독교라고 불리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극우 집단이 태극기부대라는 이름으로 소동을 부린다 해도 태극기를 부끄러워할 수는 없듯이, 일부 극우 기독교 세력의 과격 언사와 행동으로 인해 사람들이 기독교를 싸잡아 욕한다고 해도 저는 개독교인임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 저 또한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게 만든 원인 제공자임을 자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보다는 욕망을 좇고 욕정에 뒤엉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기독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데에 가톨릭교인들은 불편해 하기도 합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사회적 이미지가 좋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인 1990년 9월 말 ‘내탓이오’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사회의 타락을 ‘나’부터 반성하며 일으킨 사회 개혁 운동입니다. ‘내탓이오’는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는 회개와 성찰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도 끌어안는 사랑과 포용의 자세입니다. 이 자세를 배우려 합니다.저는 개독교인입니다. 가톨릭이 아닌 ‘개(신 기)독교인’입니다. 하여 이제 ‘다시 새로워’지겠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리는 날 새벽, 교회당으로 가겠습니다. 예배실 한 귀퉁이에 조용히 앉자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기도할 것입니다. 교회당 꼭대기가 아니라 제 마음 한가운데 십자가를 가만히 걸어두겠습니다.

2020-09-15

망국병

망국병이라 함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말한다. 그 고질병을 콕 꼬집어 말하라고 하면 “이거다” 하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이유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조선말 단재 신채호는 조선이 망한 이유로 유교문화를 손꼽았다. 그가 주장한 유교망국론에 대해 당시 많은 지식인이 동조했다. 유교문화에서 비롯된 사대주의 사상과 당파 싸움, 허례허식과 같은 잘못된 문화가 결국 조선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한나라가 융성하고 쇠락하는 것은 외적 요인보다 내적요인에 의한 것이 더 많다. 내적 요인이란 그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지도자나 국민을 말한다. 국민이 똑똑하거나 뛰어난 지도자가 나와 국가를 잘 경영한다면 나라가 망할 이유는 없다. 특히 과거처럼 전쟁과 무력으로 한 국가를 점령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인도의 간디는 나라가 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 가지 병폐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성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 등이다.틀릴 데가 없는 말이다. 사회정의는 반드시 원칙이 있어야 세워지고, 부를 축적하려면 땀과 노력이 필수여야 한다. 종교가 희생이 없다면 종교로서 의미를 상실한 거나 같다.정부의 2차 재난지원금이 국회 문턱을 넘기도 전에 여권 내부에서 내년초 3차 지원금 얘기가 흘리고 있다. 국민이 곤경에 빠졌다면 정부가 할 일은 마땅히 해야겠지만 나랏빚이 산더미인데 국민 세금을 선심 쓰듯 하겠다는 집권여당의 생각이 지극히 실망스럽다. 포퓰리즘으로 망한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포퓰리즘적 발생이 잦으면 그것도 망국병이 된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9-15

이율배반적인 관료들

강희룡서예가전국시대 맹자는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학파로 공자 문하의 적통을 대표하며, 철두철미하게 백성을 근본으로 생각했던 민본주의 사상가이다.전국7웅이 다투는 혼란의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백성을 중심에 놓는 민본주의를 꿈꾸며 임금은 백성과 함께 즐겨야 한다며 민권(民權)을 더없이 높였고 민본사상을 최대로 고취시켰다. 반대로 패도정치는 악덕하므로 오래가지도 못하고 천하를 통일해도 참다운 패자(覇者)가 될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지적했다.당시 맹자는 이상 사회를 꿈꾼 것이 아니라 그 실현 가능성에도 털끝만큼 의심하지 않았다. 부국강병의 패도주의가 오히려 비현실적인 뜬구름이라며 군주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맹자 이후 2천300여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그가 그토록 믿어 의심치 않았던 민본주의라는 이상사회는 실현된 적이 없다. 다만 현대사에서 일컫는 민주주의시대가 열린 것만 해도 인류 역사의 큰 성취로 보아 이를 위안으로 삼아야 할 형편이다. 맹자의 민본주의는 말 그대로 ‘백성을 뿌리’라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맹자가 생각한 백성은 보이지는 않지만 땅 위에 서 있는 큰 나무를 지탱해 주는 뿌리와 같은 존재였다. 비록 정치적인 힘은 없지만 백성이 없으면 국가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무의 뿌리가 조금이라도 상하면 나무 전체의 생명이 위태롭기에 백성 역시 하나라도 소외되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고 최고 법에 명시한 민주주의라는 우리사회를 맹자가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우리는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정치가는 국민의 머슴이나 심부름꾼이라고 부르짖는다. 맹자가 그토록 갈망하던 민주주의라는 이름만 듣고는 백성이 주인인 시대가 열렸다고 기뻐하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고는 크게 실망하며 분명 적지 않게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머슴이 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 부으며 머슴살이 시켜달라고 애원하며, 자기들보다 몇 배 더 잘 살도록 돈을 걷어서까지 머슴 월급을 줄 주인이 과연 어디 있단 말인가!이러한 기이한 현상을 보고나면 맹자는 명(名)과 실(實)이 맞지 않으니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고치거나 이름에 맞는 참된 민주주의를 시행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현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민이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는 선거 때마다 한 표를 던지는 일 밖에 없다. 제도의 한계나 권력추구자의 행태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의(義)가 아닌 이(利)에 눈이 멀어 표밭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다. 국민들의 정치 선진의식이 깨어있어야 국민의 바람과는 동떨어진 의구심이 가는 검찰개혁추진과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조국이나 추미애 같은 관료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국민이 권력추구자의 정치놀음에 놀아나지 않고 모두가 깨어서 냉철한 눈으로 권력자를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주인은 국민이 되고 권력자들의 술수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2020-09-14

무기력증에 빠진 당신에게

문가인참마음심리상담센터 원장심리상담도 유행이 있다. 분노조절장애(전문용어 간헐적 폭발성장애)가 유행이었던 적도 있고, 공황장애가 유행이었던 적도 있는 것 같다.요즘에는 무기력증을 호소하며 상담센터를 방문하는 이들이 많다. 아동, 청소년, 청년, 성인, 노인 가릴 것 없이 의욕이 없고, 만사가 귀찮고, 온종일 누워만 있고 싶다고 한다. 심지어 두통을 비롯해 가슴의 답답함까지 호소하기도 한다.외관적으로는 우울증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신, 환경, 미래에 대한 부정적 사고를 주로 호소하며 자살까지 생각하기도 하는 우울증과 무기력증은 다르다. 그들은 부정적 사고를 크게 호소하거나 죽고 싶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몸과 마음에 활력이 없다고 한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의 신체 건강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증이란 바이러스로 마음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힘없는 목소리와 흐릿한 눈동자로 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생존의 욕구가 그들에게 나를 만나러 오게 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오기도 하지만 가족 중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를 찾아온다.나는 고민한다.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무기력증에 빠진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세계적인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1964년 개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탈출구가 없는 상자에 갇힌 개에게 지속해서 전기자극을 주었을 때 처음에는 개가 팔짝팔짝 뛰다가 나중에는 웅크린 자세로 주저앉는다는 그 실험에서 우울증의 학습된 무기력 이론이 생겼다.우리의 지금 상황이 그렇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 우리의 대기를 떠돌 때는 당황하고 놀라고 두려워하고 분노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장기화함으로써 무기력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중에 몇몇은 심각한 우울증 등의 심리적 문제로 발전하기도 할 것이다. 그중에 몇몇은 지혜로운 방법을 스스로 찾을 것이다.마틴 셀리그먼의 실험에서도 모든 개가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탈출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이전에 학습한 개는 포기하지 않고 탈출할 방법을 찾아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학습된 무기력이 있다면 학습된 낙관주의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부정적인 마음도 학습될 수 있듯이, 긍정적인 마음도 학습될 수 있다는 것이다.학습된 낙관주의로 우리는 이 코로나 시국에서 탈출해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의 하나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외부의 전문가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외부의 전문가들을 너무 맹신하거나 쉽고 빠른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말라.나는 무기력증을 호소하는 그들이 심리상담 및 최면을 통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갈 무렵, 이렇게 말한다.“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사람들은 자신이 의사인 줄 모르고 외부의 의사를 찾으러 돌아다닌다.”“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비밀의 열쇠를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고 합니다.”“그 비밀의 열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2020-09-14

저 자비롭게 나투는 꽃처럼… 고령 반룡사(盤龍寺)

일주문은 길을 살짝 비켜나 높은 곳에 서 있다. 절을 드나드는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눈빛에서 느껴지는 고독한 품격은 그 상징성만으로도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쉽게 일주문을 통과했지만 이내 단단한 철문이 더 이상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장내 집회를 금한다는 하얀 안내문이 콜록거리며 반룡사를 보호한다. 경내는 공사 중인지 푸른 가림막이 쳐져 약간은 어수선하고, 인기척 없는 산중에 빗줄기만 뿌려댄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철문 아래로 몸을 굽혀 허락없이 경내로 들어선다.반룡사는 동화사의 말사로 신라 애장왕 3년(802년) 해인사와 함께 창건된 절로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가 중건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다시 중건하였다. 대가야의 후손들이 신령스러운 용의 기운이 서려 있는 곳에 세웠다고 해서 반룡사라 이름 붙였다.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진된 것을 사명대사가 중건하였지만, 화재로 전소되어 1764년 영조 때 대웅전과 만세루를, 1930년경 다시 중수하였으며 1996년 대적광전을 건립하여 오늘에 이른다.허락 없이 들어서는 사찰이라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미숭산 품은 더 없이 아늑하고, 그 안에 자리 잡은 반룡사는 바깥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흐른다. 퇴락해 가는 천년고찰의 상실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가지런히 쌓아올린 담들과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절의 품격을 한껏 높여 주고 있다.커다란 굴참나무가 불이문을 대신하고 맞은편에는 잘 정돈된 승탑밭이 숙연하게 나를 돌아보게 한다.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 배치된 당우들도 산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대적광전 앞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예불을 볼 수 있도록 검은 차양막이 쳐져 시대의 아픔을 호소하는데, 법당 뒤편 레이스빛 불두화들만 축제를 벌이듯 쓸쓸히도 탐스럽다.굵어지는 빗줄기를 피해 대적광전 법당문을 열고 들어선다. 손 세정제와 방명록이 사천왕처럼 나를 점검하는 이색적인 풍경, 이 모든 것들에 익숙해져 가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이름을 적고 백팔배를 시작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법당은 언제나 위험과 불안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던 가장 안온한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기도할 때면 저절로 감사함으로 행복해지곤 했다.그런데 오늘은 텅 빈 법당에서 올리는 백팔배가 부끄럽다. 잔인했던 태풍의 상흔과 도무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회는 의기소침한데, 나는 그들의 아픔을 방관하지는 않았는지, 위기 앞에서 나를 동여매느라 타인과 사회로부터 돌아앉아 있지는 않았는지 점검해 본다.궂은 날씨에도 몸은 가볍다. 가뿐히 백팔배를 끝내고 가부좌를 하고 비로자나불을 올려다본다. 만물의 창조주인 비로자나불의 미소에는 견고한 침묵만 흐를 뿐 말이 없다. 부드러움과 힘이 공존하는 목조비로자나삼존불상은 경북 유형문화재로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慧熙)의 작품이다. 여느 불상과는 다른 묵직함이 마음을 사로잡는다.영혼을 태워 불상을 탄생시켰을 조각승의 일생이 떠오른다. 오로지 한 곳을 향한 집념과 절절함으로 이루어졌을 모든 날들, 그의 삶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깊고 푸른 호수 하나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생명의 기운이 도는 부처님, 마침내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는 순간의 감격과 희열을 무엇에 비하랴.조낭희수필가비로자나불의 엄숙하고도 잔잔한 미소에서 조각승의 얼굴이 보인다. 일상의 위기 앞에서 수많은 염원과 기도로 무릎을 꿇던 순간들도 있었으리. 생각지 않았던 역병과 수많은 자연재해들, 인류가 쌓아올린 질서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좀 더 겸허해지고 자숙의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 오래도록 비로자나부처님을 우러러 본다.부처님과 나 사이에 수많은 말씀들이 오고간다.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것은 세월과 정성이 빚어낸 아우라를 뜻한다.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와 현실 앞에서 부처님은 꺼지지 않는 빛이 되어 존재하신다. 나의 백팔배는 좀 더 이웃의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자비심으로 이어져야 함을 깨닫는다. 내 안에 맑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법당을 나설 때는 바람은 멎고 빗줄기는 유순해졌다.물기를 머금은 절은 한층 깊고 힘이 넘친다. 대단한 풍광을 자랑하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도 없다. 하지만 눈길 닿는 곳마다 안정적인 맥박이 함께 한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소나무와 배롱나무 들은 조화롭게 서로를 보듬고, 적당한 높이의 돌축대에서는 반듯함이 읽혀진다. 욕심 없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중용의 아름다움을 갖춘 선비와 대화를 나누듯 나는 경내를 거닌다.우측 산기슭에 자리 잡은 약사전과 지장전을 둘러보는데 여성 불자 두 분이 우산을 쓰고 절을 빠져나간다. 어디에 있었던 걸까? 이야기를 나누며 내려가는 발걸음에 부처님이 보인다. 이끼 낀 돌축대는 여전히 좌선 중이고, 넓은 파초잎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염불을 외며 그들을 배웅한다.나는 철 늦은 꽃들이 시간을 품은 채 나투시는 모습을 그윽히 바라보며 절을 나선다.

2020-09-14

쇠퇴하는 바로크, 떠오르는 신고전주의

1750년을 전후로 서양미술사에서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나타나 프랑스 혁명기 동안 전유럽에서 유행했다. 신고전주의는 앞선 바로크와 로코코의 현학적인 기교에 대한 미학적 반발로 등장하면서 고대, 특히 고대 로마 미술에서와 같이 형식과 내용의 통일성과 명료성을 강조했다.신고전주의가 유럽 전역에 급속히 확산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수백 년 동안 화산재 속에 덮여 있던 고대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발굴이다. 고대의 정신을 이상적 가치로 여기던 유럽인들에게 고고학적 발굴로 옛 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그 흥분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예측된다. 많은 유럽인들이 상상으로만 그리던 고대 도시의 모습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향했고, 부유한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유서 깊은 도시를 방문해 그곳의 문화와 역사를 현장에서 체험하고 익히는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유행했다. 지적 호기심에 가득찬 여행객들 중에는 당연히 미술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미술가들은 눈앞에 펼쳐진 고대의 생생한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 판매했고, 타국에서 몰려온 여행자들은 현장의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할 목적으로 그림을 구매해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고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고조가 신고전주의 양식이 급속히 전파되는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신고전주의가 발달한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프랑스였다. 유럽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국가주도의 체계적인 미술교육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바로크적 미술 취향을 밀어내고 신고전주의가 싹을 틔운 것은 18세기 중반이다. 이 양식이 번창했던 것은 초기 혁명기에서부터 나폴레옹 시대까지 다다르는데, 1800년경 낭만주의 미술과 일정 기간 공존하다 서서히 사라졌다.신고전주의 미술을 이끌었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는 자끄-루이 다비드(1748∼1825)라는 인물이다. 위풍당당 말을 타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1801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히 거행된 ‘나폴레옹의 대관식’(1806년) 장면을 담은 그림이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다비드는 프랑스 왕립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는데, 당시에는 귀족들의 유희와 쾌락이 강조된 장식성 짙은 로코코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시대적 유행과는 달리 다비드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발달시킨 선구자 조셉-마리 비엥(1716∼1809)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648년 루이 14세의 명으로 문을 연 프랑스 왕립미술학교는 해마다 각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선발해 로마로 국비유학을 보내주는 ‘로마 대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자끄-루이 다비드는 1774년 명예로운 로마 대상을 수상해 1775년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물며 이탈리아 거장들의 미술은 물론 고대에 대한 식견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난 다비드는 이제 막 발굴되기 시작해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폼페이를 방문해 고대 유물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폼페이에서의 경험은 훗날 다비드가 신고전주의 양식 최고의 대가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로마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다비드는 프랑스 왕실로부터 한 점의 그림을 주문 받았고,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루브르가 소장하고 있는 다비드의 대표작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1784년)이다. 고전미술을 모범으로 내용과 형식에서 명료함과 통일성을 완벽에 가깝게 구현한 다비드의 그림은 1785년 파리의 살롱전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한 점의 그림으로 자끄-루이 다비드는 단숨에 프랑스 미술계 일약 스타로 급부상했다. 고대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그리고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묘사된 한 장면을 그리고 있는 ‘호라티우스 형제들의 맹세’는 화가 다비드의 출세작임과 동시에 바로크가 막을 내리고 신고전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중요한 걸작이다. /미술사학자 김석모

2020-09-14

인연

초가을 햇살이 눈 안에 반짝인다. 녀석은 순하고 따뜻한 성격이다. 태풍 두 개가 지나갈 때도 잘 참고 작은 박스집을 의지 삼아 잘 견뎌 주었다. 내 곁에 온 두 살배기 라마스테다. 녀석의 고향은 스코틀랜드라 했던가. 이억만 리가 고향인데 어떻게 한국의 땅 경주까지 왔을까. 인연법이란 참 묘하다.나름대로 사랑을 독차지한 녀석에게 어느 날 이변이 생겼다. 인연이련가. 다른 절에서 키우던 집고양이 자몽이 4개월 정도에 인연 따라 여길 왔다. 여동생이 생긴 셈이다. 녀석의 눈치를 보니 처음에는 서로가 경계하는 듯하더니 어느새 어린 동생을 잘 돌봐주고 덕과 아량을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집을 뺏기기 시작했다. 사료도, 장난감도 빼앗기며 순번이 뒤바뀌는가 싶더니 두 녀석의 서열 싸움이 시작되었다.사람도 성격과 습관이 다르듯 두 녀석은 확연히 다른 성격이었다. 녀석이 모든 것을 내주는 부모 같은 성격이라면 다른 절에서 온 고양이는 질투심과 이기가 대단해 온순한 라마스테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암고양이였다. 어느 날부터 라마스테의 몸이 야위기 급속히 야위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바람개비처럼 휙 그냥 들린다.어느 날은 녀석이 이틀간 보이지 않았다.“라마스테 오빠 찾아 와. 네가 밥도 집도 다 빼앗아 배가 고파 나갔으니 빨리 찾아 와.” 그랬더니 눈 옆에 눈물을 흘린다. 아량 넓고 모든 걸 양보하던 라마스테가 없어진 것을 그때야 알아차린 듯 자몽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갑자기 짠해졌다. 동물도 저러한가. 며칠을 찾은 끝에 옆집 담장 사이에 빠져 못 나온 라마스테를 구조했다. 가끔 기도를 할라치면 사람처럼 손과 두 다리를 모으고 한 자리에 두 시간을 앉아 있는 라마스테를 본다. 아마도 전생에 많이 닦은 수행자의 모습이다. 나와 세 번째 가을을 맞이한 라마스테가 오래오래 인연이 되길 바란다. 라마스테(그 안의 불성이 거룩합니다)라는 의미처럼. /지원 스님(경주시 외동읍)

2020-09-14

빛과 기다림의 예술

우리는 지금 사진의 숲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진이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터넷 광고는 물론이고 심지어 음식점의 맛있는 음식도 사진으로 찍어 SNS로 보내는 실정이다.그럼 어떤 사진이 잘 찍은 사진이고 못 찍은 사진인지 평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잘 찍은 좋은 사진일 수도 있고 잘못 찍은 나쁜 사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고 잘 찍은 사진은 아름답거나, 다른 사람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사진,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잘 나타내야 좋은 사진이라 할 수 있다.사진은 빛과 기다림의 예술이라 한다.많은 사진인들이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또 순간의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먼 장거리도 마다 않고 출사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큰 사진은 러시아의 이르크추크시 앙가라강변의 영하 30~40℃ 되는 새벽 풍경이다. 이 사진은 누가봐도 혹한의 추위를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혹한을 느끼게 하는 건 주위에 눈, 상고대 뿐이 아니고 사진의 빛의 색 때문에 이다. 아마 이 사진을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빛으로 찍었으면 이렇게 리얼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사진은 올해 경북사진대전에서 최고의 상인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작은 사진은 고니 사진이다. 고니는 몸통이 커서 한번 앉으면 잘 날지를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활공이나 착지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이 고니의 착지와 비상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많은 기다림으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다른 사람에게 감동 여부를 평가 받는 방법으로는 공모전에 출품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권일영 사진작가

2020-09-14

초보 농사꾼 입문기

농사를 짓다 보면 생각만큼 쉽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직장 생활이 힘들거나 하던 일이 잘 안 풀리면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짓지 뭐’하고 씹던 껌 버리듯 무심코 말을 내뱉지만 농사야말로 그 어떤 일보다 많이 생각 해보고 결정을 내려야 될 일이다.남편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퇴직 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무료한 시간을 보낼 겸 소일거리로 할 수 있는 조그만 농장을 하나 샀다. 뜻하지 않게 나를 동참시키는 바람에 얼떨결에 남편이랑 같이 농사를 짓게 되었다. 산비탈 들쑥날쑥한 땅을 포크레인으로 고르게 평탄 작업해 놓으니 땅 모양이 화장한 여인처럼 근사하게 바뀌었다. 초봄이라 잡풀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이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한 것처럼 흥분되고 설레기까지 했다. 예쁘게 자랄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등을 상상해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봄이 무르익자 온갖 잡풀들이 쑥쑥 올라왔다. 작물들을 심으려고 땅을 뒤집으니 곳곳에 돌이 박혀 있어 돌 고르는 작업을 먼저 해야 했다. 뒤집으면 다시 돌이 올라오고 치우고를 반복하며 우리 부부는 조금씩 지쳐갔다. 남편이 전화로 서울 사는 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토요일에 아침 일찍 내려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올라가면 어떻겠냐고. 아이들은 왕복 열차표를 끊어 준다는 남편의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다.처음으로 해보는 어설픈 호미질에 외발 수레에 돌을 싣고 언덕을 오르는 작은 딸아이가 몇 번씩 고꾸라졌다. 남편은 눈짓으로 내게 못본척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옷이 흙으로 더럽히고 손바닥이 까여 상처가 났지만 일하고 먹는 삼겹살 맛이 최고라며 밥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 후로 두 번 더 주말에 내려와 돌 고르는 작업을 도왔다.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두 명 왕복 열차 값이면 포크레인 하루 부르고도 남는다는 내 푸념에도 남편은 고집스럽게 제 주장대로 밀고 나갔다.눈앞에 웃자란 부추가 땅에 늘어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들깨가 출렁이며 흔들린다. 알싸하고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어설프지만 우리 부부가 힘들여 지어 놓은 농막 하우스에는 붉은 고추가 널려있다. 유례없이 긴 장마를 이겨 내고 올겨울 김장 양념으로 식탁에 오를 생각을 하니 여태껏 고생한 수고로움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물건의 질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 내가 기른 농산물은 내게 최고의 가치다. 많은 시간과 노력, 땀방울과 한숨이 그 속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한 해의 결실이 손에 쥐어지면 힘들었던 과정은 깡그리 잊어 버리고 다시 내년 농사를 준비할 것이다. 농부가 아니라 진정한 농사꾼으로./김지연(경주시 마동)

2020-09-14

냉장고 털기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주방에서만 걸음이 늦었던 나는 대단한 결심을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집을 떠나 있다는, 회식이 잦은 남편 때문에 한걸음 뒤에 두었던 냉장고를 털기로 했다.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채소 칸에 쟁여 놓은 한 보따리의 욕심이 가득하다. 싱싱하다 싶으면 사고 일대일 행사제품을 보면 왠지 남는 장사라 싶어서 산 것이다. 비닐에 싸인 봉지를 꺼내 식탁에 쌓았다. 쿰쿰한 냄새를 품은 봉지가 식탁에 가득하다. 한 봉지를 열어 보니 호박들이 뒤엉키고 짓물러 서로 붙어 있다. 겨우 하나를 살리고 나머지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물러진 대파와 양파, 버섯은 그들이 갉아 먹은 시간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채소 칸을 비워 햇볕에 말리니 내 마음에 윤이 났다. 하나 남은 호박을 씻어 놓으니 참 매끈하다. 물러진 양파는 한 귀퉁이를 잘라 투명한 통에 넣었다. 내일이면 이 녀석들은 된장찌개에 들어가 통렬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내친김에 냉동실도 열었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봉지가 칸칸이 가득하다. 말끔해진 식탁 위에 또다시 얼음덩이가 하나 둘 쌓였다. 봉지를 열어 보니 봄에 데쳐 물과 함께 넣었던 나물이, 지난겨울에 지인이 국산이라고 주었던 고사리가 보였다. 고등어와 오징어 가자미 등 생선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정리정돈의 첫 단계는 버리기다. 그다음에는 공간의 재배치이다. 그래서 나는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비웠으니 한눈에 볼 수 있게 반찬들을 배치했다. 자주 사용하는 것들을 앞에 놓고 장류와 양념 통은 냉장고 안쪽에 두었다.냉장고 털기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나의 훈련이다. 정리정돈에 약한 내가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이순혜(포항시 남구 효자풍림아이원)

2020-09-14

코로나 시대에 행복해지는 법

유영희인문글쓰기 강사·작가코로나가 발생한 지 8개월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끝나리라는 희망을 갖기가 어렵다. 전염력이 강한 데다 그야말로 글로벌하게 발생하고 있으니 피할 곳도 없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일수록 행복 찾기는 더욱 절실하다. 여기저기서 심리적 적응을 위해 자구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심리적 자구책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되어 있다.한국인의 행복지수와 관련해서 장기 연구가 있다고 한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 팀은 2017년부터 매일 한국인의 행복도를 설문지로 조사하고 있는데, 올해도 이 연구가 계속되어 1월부터 6월까지 60만 명이 참여했다. 올해는 특히 이 조사를 통해 코로나 확진자 수 변화와 설문참가자들의 행복도 사이에 상관관계를 성별, 나이, 경제 수준, 성격 등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 연구하여 그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여자들의 행복도가 언제나 남자보다 낮고, 두 번째는 경제 수준이 낮은 사람의 행복도가 경제 수준이 높은 사람보다 낮았다. 마지막으로 나이 든 사람들의 행복도가 젊은이보다 높았다.경제 수준이 낮은 사람, 여성의 행복도가 낮은 것은 충분히 예상할 만한 결과지만, 50대 이상의 행복도가 젊은이보다 높고 변화폭이 적다는 것은 의외의 결과다. 연구 팀이 분석하기로는, 나이가 들면 반응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나쁜 일에 대한 충격도 그만큼 적은 데다가 나이 든 사람들은 평소에도 거리를 두고 살았기 때문에 격리 상황에 대한 불편함이나 그에 따른 우울감이 적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참고할 것은 행복의 의미다. 행복에는 삶의 만족도, 긍정적 정서, 삶에 대한 의미 경험 등의 요소가 있는데, 코로나 시기에 만족도나 긍정 정서는 하락했지만, 삶에 대한 의미 경험은 상승했다고 한다. 부정적 감정을 많이 느끼는 중에도 삶에 대한 성찰력은 높아졌다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성찰력이 젊은이보다 높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이 나이 든 사람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결과가 있다고 해서 나이 든 사람의 행복 찾기 방식을 모델로 삼기는 어렵다. 이것은 나이듦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데다, 무엇보다 외부 변화에 반응력이 낮은 것을 긍정적인 신호라고 보기 어렵고, 평소 대인 관계에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심리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행복도가 낮은 사람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자영업의 휴업이 잇따르고 고용도 불안정하니 한창 일할 젊은이들의 행복도가 낮고, 특히나 여성들은 언제나 낮다. 이 결과를 보면, 행복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물리적 조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에 의미를 부여하여 말을 줄이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거나, 내 방도 여행하고 몸과 마음을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행복을 찾을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정책 입안자들의 현명한 대처가 더욱 필요한 이유다.

2020-09-14

‘단지 셰어링’서비스

세대별로 갑자기 필요한 물품이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 서로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마을공동체 문화를 되살리는‘단지셰어링’서비스가 새롭게 소개돼 관심을 끌고있다.예를 들면 컴퓨터가 갑자기 말썽을 일으켜 쓸 수 없게 됐을 때 “노트북 한나절만 빌려주실 분 찾습니다”라고 올리면, 주민 가운데 그날 하루 컴퓨터 쓸 일이 없는 사람이 “제가 빌려드릴게요”라고 댓글로 응답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급하게 외출해야 할 일이 생겨 아이를 잠깐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거나 집들이를 해야 하는데 큰 상이나 그릇이 필요한 경우에도 이런 앱을 이용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골프 강사나 아이 미술·음악·운동 선생님 등을 찾거나, 유모차·장난감과 어린이용 자전거 등이 필요한데 잠깐 쓸 용도여서 목돈주고 장만하기 애매할 때도 유용하다.단지셰어링 서비스 아이디어는 어린 시절 웬만한 것은 마을 주민끼리 다 해결할 수 있었던 시절의 추억에서 비롯됐다. 아이 학교 육성회비를 내야 하는데 돈이 떨어졌으면 이웃에게 빌렸고, 갑자기 호미나 낫이 필요할 경우 이웃집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급하게 외출을 할 때도 마주치는 동네 주민에게‘우리 애들 밥 좀 챙겨줘’라고 말하면 됐던 시절이었다.이같은 앱서비스를 개발, 제공하고있는 쏘시오리빙은 2018년 설립해 시작한 종합 주거 서비스에 아파트단지 주민끼리 물품과 재능을 공유할 수 있게했다. 이 서비스는 현재 서울 강남의 아크로비스타·신반포자이와 수원시 꿈에그린 등 5개 아파트단지 5600세대를 대상으로 제공되고 있다. 우리 전통의 아름다운 마을공동체 문화가 4차산업혁명 시대에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9-14

울릉도 특별재난지역 신속 지정해야

김두한경북부제9호 태풍 마이선과 제10호 태풍 하이선이 잇따라 동해안을 관통하며 울릉도가 큰 피해를 입었다. 섬 전체가 무너지고, 부서지고, 깨지고, 날라가고, 침몰하는 등 멀쩡한 곳의 하나도 없을 정도로 초토화됐다.울릉도 주민 80%가 직간접적으로 관광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코로나 19로 관광객이 크게 줄어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태풍마저 연이어 덮치며 아사지경으로 내몰았다.육지와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여객선 선착장과 터미널이 부서지고 울릉도 대동맥인 섬 일주도로가 무너지고 뜯겨나갔다. 50t급 시멘트 구조물이 날아다닐 위력의 파도가 덮쳤으니 해안가를 따라 개설된 도로의 파괴는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지난 3일 울릉도를 관통한 태풍 ‘마이삭’은 최대순간파고가 19.5m로 기상관측 이래 가장 높은 파고를 기록했다. 아파트 7층 높이의 파도가 덮친 셈이니 해안가 시설물과 주택이 온전하게 버텨낼 수 없었다.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파괴된 울릉도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재난, 재해가 발생하면 피해를 정리 입력하는 NDMS(국가재난관리시스템)가 있다. 여기에 울릉도 피해를 입력한 결과 546억 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아직 제10호 태풍 하이선의 피해는 제대로 산정하지 않은 집계이니 울릉도의 피해 규모가 어느정도인지 가늠해 볼 수 있다.특별재난지역선포기준 피해예상금액 75억 원 이상이면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시행령 제69조’에 의거 최종 피해금액이 확정되기 전 예비조사를 거쳐 특별재난지역으로 우선 선포할 수 있다.정세균 국무총리와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관리연안항, 국가어항 시설의 책임자인 해양수산부장관까지 피해현장을 목격했다.따라서 당장 특별재난 지역으로 선포해야 한다. 울릉도는 육지와 달리 피해 복구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울릉도의 태풍 피해복구를 서둘러 시작해야 한다.울릉주민들의 울분을 달래고 합리적인 법적 근거에 따라 정부는 자체없이 울릉도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울릉도주민들이 삶의 의욕을 되찾도록 해주기 간곡히 바란다./ kimdh@kbmaeil.com

2020-09-13

사업의 성패는 간판보다는 내용

최근 마이삭과 하이선이라는 강력한 두 개의 태풍이 경북 동해안 지역을 강타하며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울릉도는 방파제가 유실되고 차량과 선박이 파손되었으며 도로도 유실되었다. 포항을 비롯한 경주, 영덕, 울진 등지도 집중호우로 한 해 농작물이 추석을 앞두고 쓰러지고 심지어 어디에 있던 것인지도 모르는 컨테이너 하우스가 버젓이 남의 논밭에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코로나19로 어렵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소상공인의 가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돈을 들여 세워두었던 입간판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건물 외벽에 전기장치까지 달아 두었던 세로형 간판은 구겨지고 떨어졌다. 어느 모델의 옥상 간판도 넘어졌지만 옥상 안쪽으로 넘어져 다행히도 인명피해는 나지 않았다. 아는 지인이 경영하는 철강공장도 지붕이 구겨지고 훼손되었지만, 그 옆 공장의 지붕은 아예 이번 태풍이 뜯어갔다고 한다.포항시 등 지역 공무원들은 불어난 강물로 오염된 산책로에 쌓인 쓰레기를 수거하고, 부러진 가로수를 처리하는 등 불철주야 고생하였다. 그동안 공무원들의 일 처리에 불만이 있던 시민들도 이번에는 박수를 보냈다. 코로나19사태가 확대된 이후부터 최근 태풍 피해 복구 등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올해만큼은 공무원들이 모두 월급 값 이상을 한 것만은 틀림없다고 본다. 이번 재해는 특히 아주 가끔 나타나는 초대형 태풍이었기에 아무리 사전에 철저하게 단속하고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힘은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이겨왔기에 피해가 전혀 없을 수는 없었다.이처럼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이후부터는 복구가 최대 현안이 된다. 하지만 태풍이라는 자연재해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그때마다 지금처럼 강풍으로 훼손되는 주요 대상이 늘 같다는 것이 문제다. 간판이다. 그동안 상인들은 자기 가게 홍보를 위해 어느 한 곳이 돌출형이나 세로형 간판을 만들면, 그 옆 가게는 그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간판으로 대응해왔다. 입간판이나 돌출간판, 세로형 간판 등은 오래전부터 도시미관을 해치고, 자동차 운전자들의 시각을 어지럽게 하며, 보행자에게는 불편을 주는 대상이었다.약 16년 전인 2004년 당시 건설교통부는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던 경기도 화성과 판교지역의 건축주나 건물사용자가 건물에 간판을 함부로 설치하지 못하도록 규제한다는 방침을 세웠었다. 최근 두 도시를 가보지 않아 지금의 모습은 모르지만, 그때 정부가 내세운 기준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신도시 건축물 간판 경관제도’라는 이 정책은 무질서하고 원색적인 건물 간판이 도시 미관을 해치고 운전자의 주의를 분산시켜서 교통사고를 유발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기존 도시보다는 신도시 건설 단계부터 적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여겨 시행했던 것 같다. 당시 계획으로는 업소당 가로형 간판 1개만 허용하고 세로형 간판은 설치를 금지하며 돌출형 간판은 4층 이상 건물에서 통일된 형태로 설치할 때만 허용하였다. 또 가로형 간판의 경우 3층 이하에는 위층과 아래층 사이 폭 이내에서만, 그리고 4층 이상에는 건축물 상단과 측면에만 설치할 수 있도록 하며, 간판의 색채는 주변 건물이나 간판과 어울리지 않는 순도 높은 원색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문자도 딱딱한 느낌을 주는 사각형체 사용을 억제하는 상당히 강력한 방침이었다. 하지만 정부가 아무리 강한 의지로 규제하더라도 언제나 그 틈새는 있기 마련이다. 상인들도 자신의 가게가 생존하고 더욱 번창하려면 더욱 기발하고 크며 화려한 간판이 필요하다고 믿으며 지금에 이르렀다.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간판(看板)’이라는 존재와 용어 자체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거래는 시장이 중심이었고, 그곳에서 거래를 위해 모인 상인들은 호객하거나 자신의 거래목적을 위해 장터를 돌아다니다 적당한 상인을 발견하고 거래하거나 거간꾼을 통해 매매하는 것이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이후 상인이 자신의 가게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상가가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들이 상회 등 회사조직을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물론 유사한 기능은 있었다. 주요 건물에는 간판이라는 용어가 아닌 현판이나 편액 등이 걸렸다. 때로는 나무판자에 붓글씨를 써서 대문 근처에 걸어두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이 도입한 간판과 유사한 기능을 가지면서 지금의 네온사인과 같이 밤에도 빛나는 초롱을 걸던 곳도 있었다. 깊은 밤중 산길을 밝혀주는 지금의 여인숙 기능을 함께 하였던 주막의 등불이었다.이처럼 간판이라는 존재는 근대 이후든 이전이든 그 가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용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파는 곳인지 알려주는 용도 등에 일차적 목적이 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발달하면서 많은 사람이 멀리서라도 자신의 가게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알려주는 용도로 오랫동안 긍정적인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때마다 다시 그림이나 글자를 새로 쓰던 아날로그 간판은 순식간에 글씨를 바꿀 수 있는 디지털 간판으로 바뀌고 있다. 게다가 이제는 누구나 지닌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위치 기능을 이용하여 가게 이름부터 주변 맛집 검색 등을 통해 정확하게 해당 지점까지 지도로 안내해주고 있다. 굳이 입간판, 돌출간판, 세로형간판 등 온갖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간판이 없어 가게나 어떤 업체를 찾아가지 못하는 경우란 있을 수 없다. 대형 건물에 입주한 기업이나 점포도 굳이 머리를 치켜들어 빌딩 바깥의 간판을 보고 몇 층에 있는지 찾을 필요도 없다. 건물 로비에 들어가면 네모난 아주 작은 크기의 판에 각층별로 입주한 업체나 가게를 깨알같이 써서 안내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종의 간판이다.우리는 간판의 크기와 모양을 생각하기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간판이 화려하고, 네온사인을 두르고 원색적인 글자로 손님을 유혹한다고 하더라도 가게의 성업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유통점이라면 그 점포에 진열된 상품들의 품질이나 상태가 양호하고 다양성이 갖추어져 있고, 접객하는 종업원의 친절도가 고객의 재방문을 결정한다. 음식점이라면 아무리 수시로 실내 장식을 바꾸고 온갖 진귀한 진열품으로 가게 분위기를 화려하게 꾸미더라도, 정작 그 가게의 정체성인 음식점으로서 음식이 맛없거나 청결하지 않고 손님들이 불편하면 소용이 없다.이번에 마이삭과 하이선이라는 초대형 태풍이 연속으로 강타하면서 지역 곳곳에 있는 많은 사업체의 간판을 부수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당장 망가진 간판부터 새로 만들기 전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였으면 한다. 또다시 지금처럼 태풍이 와서 강풍으로 날아갈 세로형 간판이나, 입간판, 돌출형 간판을 굳이 돈을 들여 마련해야만 할지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강력한 태풍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동안 도시미관을 헤친다는 지적이 있었던 간판이라면 더더욱 이번 기회에 깔끔한 작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스스로 우리는 간판보다는 내용이 충실한, 간판이 없어도 경쟁력이 높은 가게임을 자랑해보면 어떨까. 명함에 금박을 입혔다고 그 사람이 높게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시기다. 시간이 흐르면 녹슬고 태풍 때마다 날아갈까 노심초사하지 않았으면 한다. 사업의 성패는 간판보다는 내용에 있음을 잊지 말자./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

2020-09-13

‘사석(捨石)’ 놀이

안재휘 논설위원바둑판 격언 중에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先手)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속담도 있다. 바둑판에서는 초심자일수록 자기편 돌은 하나라도 죽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고수는 사석작전(捨石作戰)에 능하다. ‘버림돌’을 잘 써야 고수다.‘내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자른다’는 뜻인 육참골단(肉斬骨斷)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세계에서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 쓰는 비법으로 통한다. 변화무쌍한 정치권의 쟁패에도 이 작전은 왕왕 구사된다.연초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논란이 도무지 종식될 기미가 없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적극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2건의 ‘추 장관 탄핵’ 국민청원에 각각 24만여 명, 21만여 명의 동의를 얻으며 답변 요건을 충족하자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국방부의 급변이 특히 눈에 띈다. 국방부는 관련 규정들을 구구히 들며 전화로 휴가 연장한 추 장관 아들의 휴가 연장 절차에 하자가 없다는 해석을 내놨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휴가연장 명령서나 청탁 전화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국방부의 해명이 민주당과의 협의 절차를 거쳐서 작성되고 공유됐다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추 장관 아들 측의 법적 대응도 주목거리다. 추 장관 아들 서모 씨 군부대 배치 청탁 의혹을 보도한 SBS와 소속 기자를 형사 고발한 데 대해서는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3단체가 ‘언론 길들이기’라는 비판과 함께 고발 철회를 촉구했다.정부와 민주당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추 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논란에 대한 국민 정서는 험악하다. ‘병역’이라는 민심의 역린을 건드린 일이어서 갈수록 고약해질 공산이 크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해법은 도외시한 채 스스로 판검사 밑으로 기어드는 현상은 우리 정치의 천박성을 상징한다.드디어, 정권이 추미애 장관을 ‘사석(捨石)’으로 놓고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국 사태 때도 그랬지만, 팬덤이 지배하는 돌연변이 정치풍토 속에서 온 나라가 난리를 쳐도 거시적 계산법으로는 ‘총알받이’를 장기간 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 야권은 지금 ‘전술’에서는 이기고 ‘전략’에서는 지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헐벗은 경제도, 조국도, 윤미향도, 윤석열의 위기도 잊히고 있다. 윤영찬도 곧 잊혀질지 모른다.무능한 정권에 대해 ‘퇴진’을 요구하는 제2의 촛불 민심은 ‘코로나19’가 대신 막아주고 있으니 문재인 정권은 참 복도 많다. 적지 않은 국민이 선동 장난질에 부화뇌동하고 선심 정책에 휘둘리는 수준에 머무는 현실은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다. ‘깨어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던가. 독재 타도를 위해 평생을 뜨겁게 살다 간 고(故) 함석헌 선생의 말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른다.

2020-09-13

김치의 힘

김치는 우리나라 전통 발효식품이다. 지역과 가정마다 담그는 방법이 다양해 우리나라에는 200종이 넘는 김치가 있다.지역별로 보면 추운 북쪽지방은 고춧가루가 적게 들어간 백김치, 보쌈김치, 동치미 등이 유명하며 영남지방은 짠 김치, 호남지방은 매운 김치가 특색이다.김치에 들어가는 고추에는 비타민이 매우 풍부하고 마늘과 파, 생강 그리고 젓갈류 등이 가미되면서 김치는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한 건강식품이다. 미국의 건강잡지인 ‘헬스’는 세계 5대 식품으로 한국의 김치를 선정했다. 웰빙식품인 김치에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해 소화를 원활히 하고 암을 예방하는데 유익하다는 것이 선정 이유였다.한방에서도 김치를 음양이 조화된 완전식품으로 설명한다. 성질이 서늘한 배추와 무가 열이 많은 고춧가루, 마늘, 파, 생강 등과 음양의 조화를 잘 맞춘 식품이라 건강에도 좋다고 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동국세시기’가 김장 담그기와 장 담그기를 우리 민족의 중요 연례행사로 소개할 정도로 김치는 우리민족과는 뗄 수 없는 관계다.최근 프랑스의 한 연구진이 코로나19 사망자수와 국가별 식습관 차이간 상관관계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진은 확진자 대비 사망자수가 적은 국가로 한국과 독일을 주목했다.두 나라는 발효된 배추와 양배추를 주된 부식으로 먹고 있는 것이 공통점이다. 한국의 김치와 독일의 ‘사우어크라우트’다. ‘사우어크라우트’는 양배추를 시큼하게 절여 발효시킨 음식이다.코로나 사태 속에 국내 김치의 수출이 전년보다 무려 44%나 증가했다. 국내 김치업계는 김치가 코로나 면역력 증강에 좋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김치의 해외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한다. 놀라운 김치의 힘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9-13

“뭉쳐라”, “흩어져라”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뭉쳐야 찬다’란 tv예능프로그램이 있다. 한 때 대한민국 내노라하는 스포츠 스타들이 축구종목으로 한 팀을 만들었다. 2002년 월드컵축구 반지의 제왕 안정환 선수가 감독으로 팀을 이끈다. ‘전설’, ‘신’, ‘천하’, ‘제왕’, ‘대통령’ 같은 으리으리한 수식어를 장착한 왕년의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팀이다. 동호회 팀들과 겨뤄 처참하게 연패를 당했다. 어느새 목표치 1승을 넘어 제법 하는 축구팀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재미와 의미를 더해간다. 자신들과 무관했던 새로운 종목으로 one팀을 만들어 좌충우돌하는 설정이 쏠쏠한 재미다. 선수와 감독시절 버럭 소리의 대명사였던 농구대통령 허재의 허접한 말과 유행어들이 웃음으로 반전을 이루며 감칠 맛나게 한다. 웃음 뒤에 밀려오는 잔잔한 의미들을 곱씹어 보게 된다. 지나가는 세월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경험하지 않은 종목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사람들이 패배를 받아들인다. 내려놓음의 미학을 음미하게 된다.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능력을 과신하는 구성원들이 많은 조직은 갈팡질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하며 양보, 희생, 배려의 미덕을 보인다.전혀 다른 종목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one팀을 이뤘지만 개성을 크게 내세우지 않는다. 팀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뭉쳐서 살아가는 지혜다. 감독의 목표달성을 위한 열정, 적절한 전술, 연공서열을 넘는 파격적인 출전 선수 선발, 선수들의 건강을 챙기는 자상함에 조직의 리더로서 역량도 보게 된다. ‘뭉쳐서 찬다’ 축구팀은 뭉쳐서 잘되고 있는 조직 같다.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뭉쳐서 잘했다. 몽골의 침략도, 임진왜란도, 6·25 남침도 모두 뭉쳐서 막아냈다. 일제강점은 ‘조선인은 세 명만 모이면 싸운다.’는 허언으로 뭉쳐서 저항을 할까 두려워했다. 코로나 사태로 뭉치는 일이 금기시 되고 있다. 뭉치면 죽는다는 말과 동의어로 ‘흩여져야 산다’는 메카폰 소리가 도처에서 울린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크린은 “join or die”(뭉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말로 영국 식민에 저항의 메시지를 던졌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호소했다. 건국 후 좌우 이념의 극한 대립에 통합과 단결을 외쳤다.작금의 대통령은 ‘흩어져야 산다’고 한다. 이념과 정체성이 대비되는 대통령들의 외침에서 공교롭게도 정치적 메타포를 보는 것 같다. 뭉침은 저항의 최고 공격 무기다. 뭉침은 억압의 공고한 방패다. 부동산 정책, 장관아들 군복무 스캔들 등 난제들로 웅성거림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뭉쳐서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광장은 나쁜 바이러스로 이미 폐쇄되었다. 한가위 달빛을 그리며 달리고 싶던 철마는 주춤거리고 있다. 간만에 큰 제사상 받아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고 싶던 조상님도 올 추석은 혼자 계셔야 할 처지다.암은 혈류와 신진대사의 막힘이다. 웅성거림이 막혀 밀폐된 중얼거림은 대중의 암이 될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방패삼아 이곳저곳 웅성거림을 막으려는 의도가 아닐까? 곱지 않은 시선이 나돈다. 뭉쳐서 살아났었던 민족이다!

2020-09-13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김현욱시인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길어지면서 반 아이들과 일주일에 한번밖에 못 만나고 있다. 저번에는 태풍 때문에 하루 등교하는 날조차도 온라인수업으로 전환했다.아이들 만나서 할 일이 태산이었는데, 망연자실이다. 최초로 학급 선거를 온라인으로 치러야 할 판이다. 글기지개 2권 넘어가는 아이들도 있어 진심으로 격려하고 새 공책을 챙겨줘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학기 초 꿈꿨던 많은 것들. 이를테면, 시 암송, 시 쓰기, 글기지개, 학급카페, 놀이 활동, 가정독서토론 등등이 코로나19로 물거품이 되는 꼴을 보자니 코로나 블루가 아니더라도 가슴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가장 걱정스러운 모습은 교실에 등교한 아이들 중 몇몇이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존다는 것이다. 물어보면, 십중팔구, 새벽까지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동영상을 봤다고 한다. 생활리듬이 완전히 깨진 것이다. 뭐든지 귀찮아요, 귀찮아요, 귀찮아 타령을 하는 아이도 늘었다. 학부모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또한 학부모이므로 고충을 모를 리 없다. 눈치를 살살 보면서 벌써부터 요령을 피우는 딸아이를 보자니, 이를 어쩌나, 싶다.누굴 탓하랴. 원격수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담임과 학부모가 좀 더 관심과 인내를 가지고 도와주는 수밖에. 코로나19 치료제 희소식이 들리니 아무쪼록 내년에는 마스크 없는 세상에서 마음껏 뛰어놀고 어울리며 수업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오은영 교수의 ‘내 아이가 힘겨운 부모들에게’는 사춘기 아이들의 심리와 부모들의 고민을 담은 책이다.5학년 담임으로서 예사롭지 않게 읽혔다. 특히, 자녀와의 관계가 삐걱거리는 시점을 ‘공부’로 잡은 것은 몸소 체험한 일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통 공부를 시작하는 시점부터 말을 안 들어요. 공부를 놀이처럼 즐겁게 하는 아이는 없거든요. (중략) 이렇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 시기부터 아이와 부모는 사소한 일에 티격태격하게 돼요. 관계가 삐걱대기 시작하는 거죠.”딸아이의 공부, 특히 수학과 영어를 봐주기 시작하면서 나는 딸에게 화를 많이 냈다. ‘내가 왜 이러지’란 생각을 자주 하면서. 그전에는 늘 “우리 은유 참 열심히 했네.”, “우리 은유 자랑스럽다” 이런 말들을 자주 했는데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이가 잘 못 하는 것에만 도끼눈을 뜨고 있는 것이다.‘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그 모든 씨앗들이 심어져 있을 것이기에//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 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박노해 시인의 ‘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라는 시를 알아도 현실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라는 시구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겨본다. 경험상, ‘공부는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란 말도 함께.

2020-09-13

내 고장 9월은 사과가 익어가는 시절

윤경희청송군수“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렇게 시작하는 이 글은 우리 청송 근교에 위치한 안동의 저항 시인, 이육사의 ‘청포도’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그런데 시가 창작됐던 일제강점기 당시 안동에는 사실 청포도가 재배되지 않았다. 조국 광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뭉친 모습을 알알이 영그는 청포도 송이에 비유했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내 고장 청송의 7월은 사과가 영그는 시절”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추석을 앞둔 지금 9월은 명품 청송사과가 탐스러운 빛을 발할 시간이라고.“청송사과”는 따로 수식어가 필요 없는 지역 최고의 특산품이다. 필자는, 청송사과의 명성이 날로달로 높아지는 이유가 결코 변하지 않는 명품 맛에 있다고 본다. 청송은 일교차가 매우 크고 해양성과 내륙성 기후가 교차하는 등 사과가 자라기 위한 최적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서 그 맛이 일품이다. 또 농가에 대한 지속적인 영농교육 및 선진재배기술의 도입으로 타 지역보다 상품성이 우수하며, 당도가 높고 과즙이 풍부해 신선도가 오래가므로 맛 또한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이다.이를 증명하듯 청송사과는 2020년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사과브랜드 부문에서 8년 연속 대상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특히 차별화 측면에서 월등한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됐는데, 이는 소비자 반응이 우수한 시나노골드 품종을 ‘황금진’ 브랜드로 개발해 황금사과 이미지를 선점하고 붉은색으로만 치우친 사과 시장에 시각을 자극하는 ‘컬러 마케팅’의 남다른 전략 덕분에 성공한 것으로 분석된다. 또 황금사과는 사과 소비가 부진한 젊은 층에 인기가 높은 품종이어서 미래 고객인 젊은 세대를 겨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군이 만들어가는 황금사과의 미래가 전설처럼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라 예상하는 건 당연지사.“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천혜의 자연이 만들어 준 생육 환경 위에 다채로운 정책들이 얹어졌다. 그 시너지 효과는 명품 청송사과의 품질, 유통 및 홍보 등 다방면에서 상호 상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앞서 언급한 청송황금사과 브랜드 ‘황금진’을 필두로 해 청송황금사과 한국시리즈 나들이, 전국 146개 이마트 납품, 사과유통공사 시스템 재정비, 농산물 택배비 지원 사업, 청송사과 품질보증제 등이 그것이다.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개막 시즌에 맞춰 서울시민과 관람객들에게 3만 개의 청송사과를 무료로 나눠준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유쾌한 홍보 전략이었다. 또 필자가 임기 초부터 자처하며 강조한 ‘세일즈 군수가’ 되기 위해 전국 146개 이마트 납품은 물론, 국내 최대 농산물 도소매 매장인 서울 하나로클럽 양재점에서 홍보 판촉행사를 추진했다. 마찬가지로 매년 행안부의 지방공기업 평가에서 최하위를 면치 못하던 부실 공기업인 청송사과유통공사를 유통센터로 전환해 전국적 생산과잉 시대를 대비한 산지유통 시스템을 재정비했다.이렇듯 청송사과의 내일을 위해 이 시절 각 농가마다 주렁주렁 열린 사과들처럼 다양하고 유익한 정책들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필자는 황금빛 미래라는 열매를 ‘주저리주저리’ 결실 맺게 하기 위해 그 노력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내가 바라는 손님은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매년 10월 말경 성황리에 개최했던 청송사과축제를, 올해는 안타깝게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위협을 가져온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다. 군민들의 소중한 피땀으로 알알이 익힌 사과를 전 국민과 함께 축제로 즐기며 맛볼 수 없어서 심히 유감스럽지만, 군민의 안전과 감염 예방이 무엇보다 우선이므로 취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시인 이육사가 바라는 손님은 푸른 베옷을 입고 찾아오는 조국 광복이었다. 그렇다면 필자가 민족 대명절을 앞둔 지금 바라 마지않는 손님은 감염병으로부터 우리 군민을 안전히 지켜내는 것과, 황금사과로 인해 빛나는 청송의 미래뿐이다. 한 시인이 하얀 모시 수건을 앞에 두고 조국 광복을 기다렸던 것처럼 필자 또한 그런 날을 염원해 본다.

2020-09-13

돌에 새기는 마음

금오산을 오른다. 제일 먼저 메타세쿼이아가 푸른 숲에 잘 오셨다고 반갑게 길을 안내한다. 양옆으로 늘어서서 그늘을 만들어주니 눈부터 시원해지고 ‘좋다~’라는 소리가 입에서 반사적으로 흐른다. 메타세쿼이아에게 배턴을 이어받은 소나무 산책로,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는지 둘레가 어른 한아름으로도 모자라다. 산새 소리와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의 협주곡이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위로한다. 곳곳에 놓인 나무마루에 일찌감치 눌러앉은 가족들, 얕은 물에 뛰노는 아이들 소리가 ASMR이 되어 숲에 마음을 내려놓게 한다. 금오산이 주는 선물이다.산 좋고 물 좋은 자리에는 늘 정자가 있다. 채미정도 그런 곳에 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너머에 흥기문이 보인다. 오래전 이곳에 주인이었던 길재 선생이 거닐었을 그 길에 내 발을 얹어본다. 그가 자란 고향이자 나이 들어 고려의 기울어짐을 바로 세울 힘이 없음을 알고, 어머니와 가족을 거느리고 찾아왔을 때 변함없이 우뚝 솟아 긴 산자락을 펼치고 선생을 안아 준 것은 금오산이었다.금오산은 본래 대본산(大本山)이란 이름이 있었는데 세월 따라 여러 개의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중국 허난성 숭산과 생김새가 비슷한데다 남쪽에 있다 해서 고려 때는 남숭산(南崇山)이라고 불렸는데 북한 황해도 해주에 북숭산을 둬 남북으로 대칭되는 산의 이름이었다. 지금의 이름인 금오산(金烏山)이란 명칭은 저녁노을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에서 비롯됐다. 한편 중국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 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이 고장 출신의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의 충절을 기려 옛사람들은 금오산을 일컬어 수양산이라 부르기도 했다.고려 말기의 충신이며 학자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은 조선이 개국하자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받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 생활을 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에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충절과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에 채미정을 건립하였다. 뒤편에는 숙종의 어필 오언시(五言詩)가 보존되어 있는 경모각이, 옆에는 구인재가 자리했다. 길 건너에는 기념관이 있다.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 갈 때도 있다. GOP에 근무하던 군인 아들 면회하러 가는 길에 민통선 내에 있어서 평생 가 볼까 말까 한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을 우연히 들렀다. 그곳에서 신라왕이 왜 경기도에 묻혔는지 그때야 새삼 깨닫게 됐다. 둘째 아이가 강원도 고성에 배치되었을 때에는 근처의 송지호 호수와 청간정에 올라 보기도 했다. 아이들이 거기에 있지 않으면 평생 가보지 않고 살았을 곳이다. 채미정도 큰아이가 다니는 학교가 구미에 있어서 둘러본 곳이다. 고려 삼은 중에 한 분이라서 더 가봐야지 했다. 삼은 중에 포은 정몽주는 경상북도 영천군 임고면에 서원이 있고, 목은 이색은 경상북도 영해읍 괴시리에 기념관이 있다. 두 곳은 예전에 가 보았기에 채미정을 둘러보았으니 이제 삼은을 다 만나본 것이다.김순희수필가세 사람이 삼은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기와 이유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조선 중후기의 사림을 형성하는 성리학자들이 다름 아닌 야은 길재의 후학들이기 때문에, 이색-정몽주-길재로 이어지는 동방 성리학의 거성들을 숭상하기 위해 여말삼은이라 칭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인생 말년을 금오산에 은거하며 스스로를 ‘금오산인’이라 불렀던 야은 길재의 대표 시이다. 이 시조는 채미정 입구 바윗돌에도 새겨져 있다. 고려의 서울이던 개성을 그리며 쓴 ‘회고가’이다. 돌에 새겨놓은 그의 마음이 절절하다. 내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길재 선생의 절절한 마음까지는 이해 못 하면서도 달달 외워서인지 수십 년 후의 내 입에서도 절로 흘러나온다. 오늘 그의 마음에 오래 간직한 충심을 다시 들여다보며 시를 읊조려 본다.

2020-09-13

축약어 시대

영어 브런치(Brunch)는 아침식사와 점심식사 그 사이에 먹는 식사를 말한다. 미국에서는 브런치를 먹는 가정이 많아 자연스레 생긴 단어라 한다. 우리나라도 언제부턴가 이를 아점이란 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국립국어원에서 어울참으로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아점으로 그냥 굳어져 가고 있다.긴 단어나 말을 줄여 부르는 현상이 어느 듯 우리의 일상에서 신조어라는 이름을 달고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소확행이나 버스카드 충전을 가리키는 버카충, 생일파티의 생파 등은 그래도 점잖은 표현이다. 낄낄빠빠(낄때 끼고 빠질때 빠져)나 안물안궁(안물어 봤고 안궁금함), 걸조(걸어다니는 조각상) 등은 설명을 듣지 않으면 내용 파악이 쉽지 않은 축약어다.법률분야에서도 단통법(단말기 유통구조개선법)과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등과 같이 줄여 부르는 일들이 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 축약 언어의 사용은 세태 반영과 더불어 언어 관습의 변화란 관점에서 유의 있게 볼만한 일이다. 일부 전문가는 한국인의 축약어 사용은 민족의 조급성을 반영한 것이란 설명도 하고 있으나 더 자세한 것은 연구가 있어야 할 일이다.긴말을 줄여 부르는 것이 꼭 언어의 왜곡으로만 볼 수 없다.영어에도 축약어가 많이 있다. see you를 CU, First를 1st 등으로 부르는 것 등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축약된 언어가 무질서하게 난무한다면 언어 정화 차원에서 재고의 여지는 있다.최근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유입되면서 젊은층 사이에 영끌이란 말이 유행이다. “영혼까지 끌어 모은다”는 말의 줄임이나 작고 사소한 것까지 탈탈 털어 모은다는 뜻이다. 기성세대에 실망한 젊은층이 지어낸 축약어라서 씁쓸한 뒷맛이 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0-09-10

여당의 실책이 야당의 성공?

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더불어민주당의 잇따른 헛발질이 여권에 대한 여론의 반감으로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야당인 국민의힘에 대한 지지율이 급격히 오르고 있지도 않다. 이런 측면에서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비록 지금은 정부여당을 구석에 몰아넣고 공세를 퍼붓는 양상이지만 절대 자만할 일이 아니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적지않다.우선 여당 대표 출신의 추미애 법무장관 아들의 특혜성 휴가 논란이 통역병 지원과정에서의 청탁논란 등 군복무전반에 있어서의 불공정·특혜논란으로 번지고 있어 여권에 상당한 타격이 되고 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말한 것처럼 “병역문제는 국민의 역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특히 병역 불공정문제에 대해 분노를 느낄 젊은 세대는 서씨의 휴가 특혜논란에 상대적인 박탈감과 함께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가뜩이나 조국 전 법무부장관 사태에서 공정성 문제가 이슈가 된 마당에 추 장관 아들문제가 또 다시 한번 공정성에 의문을 갖게하는 충격을 더한 것이다. 또 여당 의원들의 잇따른 실수도 공교롭다. 최근 윤영찬 민주당 의원은 국민의힘 주호영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연설을 하는 과정에서 포털 메인뉴스 화면의 뉴스편집에 문제를 제기하며 카카오 관계자를 국회로 부르라고 지시하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는 장면이 보도됐고, 야당은“포털 통제”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윤 의원은 ‘카카오 문자’논란에 대해 “질책을 달게 받겠다”고 사과했지만 여당의 오만을 보여줘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대목이었다.엎친데 덮친 격으로 더불어민주당 대변인 출신으로, 4선 중진인 우상호 의원이 “카투사 자체가 편한 군대”란 취지로 말했다가 호된 비판에 직면했다. 우 의원은 추 장관 아들의 특혜성 휴가 의혹 방어에 나서서“카투사는 육군처럼 훈련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편한 보직이라 어디에 있든 다 똑같다”며“카투사에서 휴가를 갔냐 안갔냐, 보직을 이동하느냐 안하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 발언이 알려진 직후 카투사 출신 네티즌들이 활동하는 한 커뮤니티에서 우 의원의 사과를 촉구하는 성명이 발표되는 등 일파만파였다. 결국 우 의원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현역 장병들과 예비역 장병의 노고에 늘 감사한 마음”이라며 공개사과했다. 이 같은 여당 의원들의 실책 때문일까. 리얼미터의 9월 2주차 여론조사에서 국민의힘 지지율이 32.8%로 민주당(33.7%)을 오차범위내로 추격했고, 20대에선 8.9%p 오른 36.4%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그러나 이번 국민의힘 지지율 상승은 정부여당 실책에 따른 반사이익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국민의힘이 최근 당명 및 정강정책을 개정하고, 로고와 상징색을 바꾸는 등 변신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데 대한 평가가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새 정강정책에 더불어민주당이 도입을 검토하던 기본소득을 정강정책에 포함하는 등 중도보수층을 아우르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데 대한 국민의 평가가 향후 대권 승부를 가르는 관건이 될 수 있다.

2020-09-10

분열의 정치

김병래시조시인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한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백인 정부의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느라 대학시절부터 줄곧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1963년엔 종신형을 받아 1990년 석방될 때까지 27년 넘게 감방과 채석장에서 복역을 했다. 석방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으로 선출되어 백인정부와 협상, 350여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킨 공로로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1994년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식에 옛 교도관을 초대했는가 하면 자신을 투옥시킨 사람들을 내각에 등용해서 갈등과 상처의 치유에 힘썼다.그를 추종하는 국민들로부터 종신대통령직 제안을 받았지만, 아프리카의 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며 거부하고 199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지지자와 피해자가 함께 일하는 광경은 보기 좋았다. 그들은 과거를 부정하지도, 현재의 의견 불일치를 감추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동의 미래를 구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 그것은 만델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화해의 정신 덕이었다.” 그리고 그는 만델라에 대해 ‘오랜 수감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우정, 친절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썼다.그와는 정반대로 문재인 정권은 오로지 분열의 정치에만 목을 매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분명 통합과 공존의 세상을 열어가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언명했지만, 실상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분열과 적개심을 조장하는 일에 앞장을 선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지난 정권과 상대 당을 모조리 적으로 몰았고, 반일감정을 부추겨 우파들에 토착왜구란 프레임을 씌운 것,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편을 갈라 증오와 보복의 정치를 한 것, 최근에는 의사와 간호사들까지 이간질을 하는 비열한 행태를 보였다,정치적 책략 중 가장 비겁하고 치사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바로 분열의 정치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좌우의 대립이 상존해 왔으므로 적당한 구실을 던져주고 프레임을 씌우면 알아서들 피터지게 싸운다. ‘대가리가 깨어져도’밀어붙이는 절대 지지층을 손쉽게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 다음엔 부화뇌동하는 중도층을 포퓰리즘으로 끌어들이면 정권유지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런 전략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 바로 지난 총선이었다. 재난지원금이란 구실로 돈을 풀어먹인 것이 주효했다.정권이 획책한 대로 대한민국은 지금 분열과 갈등의 양상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불신과 적개심은 가뜩이나 어려운 국가의 전망을 더욱 암담하게 한다. 관용과 배려의 정신은 실종되고 나라가 망하든 말든 끝장을 보겠다는 광기와 증오가 난무한다. 넬슨 만델라와 같은 현인(賢人)이 참으로 아쉬운 시국이다. 최근 들어 문제인 정권을 지지했던 일부 지식인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다. 올바른 식견과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른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사필귀정의 결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2020-09-10

두 공항을 한 개의 공항처럼!

서의호 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대구국제공항을 대체할 대구·경북 통합신공항(민간 공항+K2 공군기지) 이전지가 공동 후보지인 경북 의성군 비안면, 군위군 소보면 일대로 결정됐다. 대구시와 국토교통부 등은 2028년 개항을 목표로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에 나선다고 한다.기본계획수립용역을 통해서 개략적 내용이 수립되면 이를 토대로 통합신공항의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고, 건설사업도 본격적으로 추진된다고 하며, 2024년 착공을 거쳐 2028년 통합신공항을 개항한다는 계획이다.그러나 부산상공회의소는 최근 울산상공회의소, 경상남도상공회의소협의회와 공동으로 국토부의 김해공항 확장안 취소와 유일한 대안인 가덕신공항 건설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이번 공동성명 발표는 부·울·경 경제계가 지난 7월 22일 부·울·경 신공항의 조속한 건설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음에도 여전히 검증결과 발표가 늦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국무총리실의 김해공항 확장안 적정성 검증 발표와 함께 신공항 대체 입지로 가덕도가 선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경북이나 포항의 입장에서 보면 영남권의 신공항 추진이 지역민들에 큰 기쁨과 희망인 것은 틀림없다.그러나 이 조그만 국토와 영남권에 부산권·대구권 2개의 공항이 필요한가 하는 건 그리 쉽지 않은 판단이다.부산·대구 지역이 상호 자기 지역에 공항유치를 위한 노력을 넘어서서 상호비방하는 현수막들을 보면서 참담한 생각이다 두 공항을 만들어도 하나의 공항 개념으로 묶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다. KTX 고속철이 탄생한 후 서울과 포항, 대구간 항공 노선들이 없어지다시피 한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비록 2개의 공항이 탄생하지만 하나의 국제공항 개념으로 가는 것이 영남지방 발전을 위해 훨씬 좋아 보인다.우선 공항명에 경북, 경남, 대구, 부산 등의 이름을 쓰지 말고 영남의 개념의 이름을 쓰면 어떨까 한다. 공항 이름에서 외국인들이 하나의 공항으로 생각하게 유도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KB(경남, 부산) Airport, KK(경북, 경남) Airport 이름도 좋다. 또는 시애틀-타코마, 달라스-포트워스처럼 두 개의 도시를 묶는 트윈시티 이름을 써 대구·부산 공항으로 불러도 좋다.그리고 각각의 공항을 제1터미널, 제2터미널 등의 이름으로 부르자. 작명부터 하나의 공항 개념으로 묶어 영남권을 커버하는 것이 인천공항과 같이 국제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두 공항 사이에 최신 논스톱 고속철을 건설하여 항공권 소지자는 출발·도착 전후 24시간 내에 무료 승차를 허락하고 두 공항이 다소 거리가 있지만 사용자에게는 하나의 공항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보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이는 영남권을 국제적 중요 명소로 유도하고 영남권이 세계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지역으로 발돋움 하는 지름길이 되리라 확신한다. 두 개의 공항을 하나의 공항으로 묶어 영남권 지역 발전에 불을 지피자. 두 개의 공항을 하나의 공항처럼!

2020-09-10

‘거북목 증후군’ 주의보

코로나19 재확산사태로 비대면 온라인수업이 크게 늘면서 많은 시간을 모니터앞에서 보내는 학생들에게 ‘거북목증후군’주의보가 내렸다. 거북목증후군은 C자형의 정상 목뼈가 잘못된 자세로 인해 일자목으로 변형되고, 더 악화되면 거북이의 목처럼 앞으로 나오고, 이로 인해 통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주로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오래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생긴다. 대표적인 증상은 목이 뻣뻣해지면서 아프고, 어깨주위까지 통증이 번진다. 팔 저림, 두통, 어지럼증 등도 따를 수 있다. 이런 증상이 오래 지속될 경우 목디스크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전문의를 찾아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증상이 경미한 환자의 경우 물리치료, 약물치료, 도수치료, 주사치료 등 비수술치료만으로도 좋아진다. 하지만 이미 목디스크로 진행된 환자의 경우 통증부위에 약물을 투입해 염증을 치료하는 시술을 고려할 수 있다. 시술은 경막외신경성형술, 풍선확장술, 고주파수핵성형술, 신경차단술 등이 있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목디스크가 심한 경우에는 수술을 해야한다. 수술에는 경추 전방유합술, 양방향 내시경 하후방 경유 신경감압술 및 추간판 제거술이 있다. 특히 목디스크를 그냥 방치할 경우 하반신 또는 전신마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거북목증후군은 무엇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눈높이에 맞춰 사용하고, 어깨와 가슴을 바로 펴고 턱을 가슴쪽으로 당긴 바른 자세로 앉아야 한다. 또 1시간 이상 장시간 앉아있는 경우 중간중간에 목과 어깨의 긴장을 풀어주는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좋다. 코로나19가 촉발한 또 다른 병마에 어린 학생들이 병들지 않도록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때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0-09-09

초인은 없다 일등도 아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현실은 늘 못마땅하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삶은 날마다 버겁다. 허덕이며 지나는 모든 질곡은 광야가 아닌가.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그래서 백마를 타고오는 초인을 기다렸을까. 보통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라고 때마다 표를 던진다. 기대만큼 일상이 호전되지 않아 기대는 다시 실망이 된다. 하필 감염병이 돌아 행동도 자유롭지 못한데 뜬금없는 ‘일등’소리를 듣는다. 일등은 과연 초인이었을까. 당신이 아니면 세상은 하염없는 나락을 헤맬 것인가. 일등만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한때는 그랬다. 아니 그래 보였다. 뛰어난 지력이 놀라운 성장과 함께 성취에 이르면 눈부신 열매도 거두는 듯하였다. 세간의 관심이 먹고사는 데에 머무는 동안 세상의 일등들이 이끌어 여기까지 온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허세와 과장도 결과를 보면서 용인하였다. 그늘에서 이름없이 도왔던 손길들도 그들의 출중함을 탓하지 않았다.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자신들도 묵묵히 일로 보여주므로 공연히 시비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그래 왔을까. 급기야 일등들이 스스로 ‘일등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자만은 위험하다. 자신을 세상보다 높은 자리에 올린다. 더 배우거나 깨우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현실에 안주하여 생각할 필요를 막아버린다. 더 배우지 않게 하고 상상력을 차단하며 남과 함께 하는 협력의 창을 닫아 버린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신은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사람에게 자만심을 선물로 준다’고 하였다. 세상도 바뀌었다. 일등을 조건없이 인정하고 순순히 따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당신에게서 진정성과 공감능력을 확인해야 한다. 세상은 일등의 자만심에 기대지 않는다.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역사 가운데 위기에 봉착했던 인류를 ‘창조적 소수자들(Creative minories)이 구해왔다’고 하였다. 광야에서 달려오는 어느 초인이나 일등의 기억만 고집하는 수재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놓고 함께 공감하며 걱정하는 집단지성을 의미하였다. 인류문명은 외부의 공격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부의 몰락으로 붕괴한다고 하였다. 우리 내부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시하는 창조적 소수자들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념에 기초한 편 가르기에 몰두해서 될 일이 아니다.일등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다. 초인을 기다리는 국민도 없다. 함께 어우러지며 더 나은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 둔하고 더디어 굼뜨게 행동하는 인간이 인류의 위기를 이제는 절감하며 움직여 가도록 코로나19가 온 게 아닐까. 시대의 지성과 보편적 양심이 깨어나도록 재촉하고 있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모두에게 달렸다. 앞에 선 몇 사람에게 재촉할 일이 아니다. 애를 안 쓰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어째서 편만 가르고 있는 것일까.누구를 기대할 것인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세상은 바꾸어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2020-09-09

선인장의 죽음

어째서 선인장은 仙人掌, 신선의 손바닥이라 했나?멀리 라스베거스 가는 애리조나 사막 드넓은 황무지에서 그대를 만났었지. 고국에 돌아와 나는 선인장 그대를 사랑한다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다짐했노라. 사랑은 찾는 데서 싹트고 물을 주는 데서 자라나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애절해질 수밖에 없다.안성 가톨릭 신자들 숨어 살던 배티 성지 가던 길에 아름다운 선인장 하나를 사고, 또 대전 중앙시장 옆 대전천 천변 꽃집에서 선인장 하나를 또 샀지. 하나는 산호 선인장, 다른 하나는 철갑을 두른 듯 용맹하게 생긴 선인장이었다.두 선인장 모두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러 해를 살아왔으되 마치 헛 살아온 것처럼 선인장 키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물은 오랫동안 머금을 수 있어 자주 주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향이 사막인 탓에 더위에도 추위에도 강하다는 것도 알았다. 한없는 어둠만 아니라면 꼭 햇살 따가운 곳이 아니더라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았다.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은 흙이 오히려 수분이 많아 축축해지면 선인장은 뿌리부터 썩어들어가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흙에도 물을 잘 내리는 흙이 있고 잔뜩 물을 흡수해서 진득진득한 상태로 오래 가는 흙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여름 내내 비도 그렇게 질기디질기게 올 수 없고 그 끝에 태풍도 벌써 세 번째 북상 소식이 들리는데, 그 무덥고 축축한 여름이 오래 가는 사이에, 세상은 코로나 천지가 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측정의 도구조차 잃어버린 사이에, 나의 사랑하는 선인장 하나는 물에 뿌리가 젖어 생살이 썩어가듯 잎사귀가 짓무르며 그만 모진 목숨을 끊고야 말았다.물 없이는 길게는 석삼 년씩도 사는 선인장이 있다는데, 이 여름처럼 습한 나날은 오히려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한 포기 선인장을 잃어 버리고 나의 방에는 이제 마지막 선인장 한 포기, 산호선인장밖에 없다.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메두사처럼, 그러나 아름답게 뻗어 올린 산호선인장은 사막처럼 바싹 메마른 외로운 방을 깊은 바닷물 속처럼 그윽하게 변모시킨다.선인장 하나와 나 하나. 아주 오랜만에 혼자인 혼자만의 삶으로 돌아온 것 같은 지금, 홀로 남은 강인한, 고독을 견디는 선인장의 삶을 생각한다.홀로 몇 스푼 아주 적은 수분에만 의지하며 적게 먹고 적게 쓰고 말없이 견디는 선인장의 미덕을 생각하며, 나 또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적게 살고 뜨겁고 차가운 대지 위에 홀로 많이 버텨야 한다.그렇게 속으로 생각해 보는 날이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

2020-09-09

디어 위너

강길수수필가영문 이메일을 받았다. 어마어마한 내용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나는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다. 정말 행운의 소식이면 좋겠다.이메일은 영문 ‘디어 위너(Dear Winner)’로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당첨자’라니, 우선 기분이 좋다.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내용을 대충 살폈다. 내 이메일 주소가, 올해 자사의 이 메일 프로모션에 당첨되어 축하한단다. 당첨금이 원화로 환산하니 무려 150억 원이나 되었다. 일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체 내용을 빨리 알기 위해, 인터넷의 영문번역기에서 전문을 우리말로 바꿔보았다. 따로 추첨에 참여하거나, 티켓을 끊을 필요는 없단다. 단지 이름, 주소, 나라,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만 답신으로 보내면 된다고 했다.기분이 이상해졌다. 번역문을 읽으며 ‘스팸’, ‘피싱’ 같은 단어들이 함께 떠올라서다. 스팸문자, 스팸메일, 보이스피싱 등 사기(詐欺)나 범죄에 이용되는 통신수단에 당했다는 보도나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우리 집도 보이스피싱을 몇 차례 겪은 적도 있다. 그러니 은연중에 스팸이나 피싱에 대한 대응력이 생겼으리라.스팸메일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이면 좋겠다는 바람(望)도 마음 한구석에서 명지바람으로 일었다. 달콤한 유혹이다. 이율배반이다. 햄릿 증후군이기도 하겠다. 머리로는 아닌 줄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끌리는 심리상태를 또 경험한다.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이 조화롭다면, 스팸메일이란 판단이 들었을 때 지웠어야 했다. 내 속물근성이 이 이메일 앞에서 또 이빨을 드러내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속 갈등을 한다.“그래, 다른 이들도 같은 사례가 있나 찾아보자!”내부 갈등의 타협안이 제시되면서, 내 손가락은 저절로 웹사이트를 뒤지고 있었다. 작년에도, 올해도 똑같은 내용의 메일을 받았다는 사람의 글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작년 것은 금액이 올해보다 적었지만, 올해 것은 금액도 같았다. 전자는 상담을 받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카페에 올린 글이다. 후자의 경우, 끝에 독자들과 댓글을 주고받으면서 결국 답신 메일을 보내고 말았다는 게시자의 고백도 있었다.쓴웃음이 났다. 이성과 감성이 이런 상황에서도 싸운다.“이봐! 스팸메일이 맞잖아? 괜히 헛꿈을 꾸었어. 시간도 버리고….”“잠시 행복했잖아? 그러면 된 거지. 뭘 그리 따지고, 불평하는 거야?”처음 복권을 사던 날이 떠올랐다. 주택복권이다. 아마도 70년대 중반쯤이었을 거다. 확실한 날짜를 알려고 일기장을 한참 뒤졌으나, 못 찾았다. 아마 회식을 마치고, 얼큰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으리라. 회식 중 동료들과 복권에 대해 갑론을박하다가 ‘복권은 바로 행운 부르기’란 말에 이끌려, 난생처음 100원짜리 주택복권 두 장을 손에 쥔 날이다. 술기운에, ‘이 복권으로 내 집을 살 것이다!’라며 의기양양하게 발길을 뗐었다. 조금 걷다가 어느 순간, ‘나도 그만 사행성 탁류에 휩쓸리고 말았구나!’ 하고 깨달으며, 하룻저녁에 천국과 지옥을 오갔던 기억이다. ‘근면, 자조, 협동’의 역동적 사회 구조 안에서, 그 시절 내 눈엔 복권은 사행성의 징표일 뿐이었다.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젠 복권을 사행성 징표나, 노름같이 보는 시각은 사라졌다. 어떤 지인은 투자라며, 봉급을 타면 내 기준엔 제법 많은 일정 금액의 복권을 샀다. 문제는 ‘디어 위너’처럼 공적 복권을 사칭한 스팸메일 등, 사기를 치기 위한 정보가 횡행한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 시대니, 5지(G)시대니 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사회의 정보기술 환경에 따라가기도 힘든 현대인들이다. 그들이 스팸이나 피싱 같은 사기에 시달리는 상황에 놓인 것은 대체 무얼 말해주는 걸까.“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말이 있다. 인간과 생명은 아니, 만물은 이 말처럼 살고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우주 안 모든 존재의 존립 양상이 어찌 보면,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힘을 다하여 살고 또, 존재하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음을 다잡아야, ‘친애하는 당첨자’처럼 달콤한 사기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진정한 ‘디어 위너’만 있는 세상이 그립다.

2020-09-09

짧은 만남 긴 우정

우리가 만난 세월이 얼만데! 상대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가를 증명해보이고 싶을 때 흔히 하는 말입니다. 오랜 기간 만나왔으니 그 우정의 깊이는 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시간과 우정이 꼭 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학창 시절 친구가 아무리 좋다 해도 서로 도움 주는 이웃만 못하고, 직장 동료와 종일토록 붙어 있다고 해도 마음 먼저 닿는 먼 친구만 못합니다. 한마디로 때와 장소 등 물리적 요인은 관계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래 알아왔다고 우정이 깊은 것도, 자주 만나는 사이라고 절친이 되는 것은 아니지요. 공감보다 나은 친구는 없고 마음보다 앞선 우정은 없을 테니까요. 진심이 통할 때 우정은 지속됩니다.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습니다. 다섯을 묶은 출발점은 ‘책’입니다.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의기투합하여 비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져왔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모이기도 힘들 텐데 다섯 친구들은 운명처럼 전국에 골고루 흩어져 삽니다. 대전, 청주, 광주, 포항, 부산. 각자 뚜렷한 개성을 지녀 한 번만 만나도 어떤 성격인지 알 정도입니다.좋은 날 불쑥 각자 기차를 타고 청주나 부산 또는 경주나 대전 그리고 광주 어디쯤에 모여 점심을 함께 하며 수다를 떱니다. 읽은 책을 화제 삼고 가진 책을 나누며, 잘 쓴 작가를 부러워하고 읽고 싶은 책 목록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물론 고상한 척 책 이야기만 하는 건 아닙니다. 자식 걱정이나 자랑도 하고, 남편 흉이나 장점도 나눕니다. 각자의 회한도 돌이켜보고 앞일을 가늠해보기도 합니다. 주어진 하루가 짧다는 걸 알아서일까요. 오래 만나온 사람들이 나누는 것 이상으로 인간사 희로애락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술술 풀어내곤 합니다.이 매혹적인 모임은 한 친구 덕에 가능했습니다. 어떤 방해꾼도 없는 온전한 한나절의 해방구는 그녀의 기획 작품인 셈이지요. 열정과 선함이 몸에 밴 그 친구는 나머지 네 명을 적극적으로 아우르고 배려하고 챙깁니다. 우리는 그녀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그녀가 마련한 멍석 마당에 자유롭게 퍼질러 앉아 수다 떨고 웃기만 하면 됩니다. 책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녀에게 저는 ‘다정도 병’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그토록 다감하고 그토록 솔직하며 그토록 열정적인 친구를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그렇게 모임을 이끌던 친구가 멀리 떠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LA로 가게 되었지요. 환송회가 있던 날 키 크고 잘생긴데다 착하기까지 한 그녀의 남편 뢉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양손엔 다섯 점의 그림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예술을 전공한 뢉이 아내와 그 친구들을 위해 몇날 며칠 이별 선물을 준비한 것이지요. 아무도 생각지 못한 깜짝 쇼였습니다. 안타까움으로 허해진 가슴에 훈풍이 깃들었고,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습니다. 아쉬움과 감동이 교차하던 시간이었습니다.미국에 정착한 그녀는 새로이 간호학에 도전했습니다. 기전공인 패션과는 너무 먼 방향이라 의아했지만 그녀의 열정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지요. 공부엔 나이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몇 년 만에 드디어 학위를 받게 됩니다. 내친 김에 대학원에도 진학해 학계에 남고 싶어 합니다. 긍정적 마인드로 앞을 향해가는 그녀의 성정을 알기에 그것 역시 어려운 고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취미이자 특기인 공부에 매진하는 그녀가 경이롭기만 합니다.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친구들의 생일이나 경조사 등을 챙깁니다. 그녀를 알게 된 후, 받는 데만 익숙했지 뭔가를 제대로 줘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녀보다 한 발 늦습니다. 이번엔 큰 맘 먹고 한 발 앞서보기로 했습니다. 간호사 면허 취득 축하겸 생일 축하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탄탄대로만 남은 그녀에게 뭔가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김살로메소설가졸업파티에서 입을 한복을 선물할까, 액세서리를 좋아하니 목걸이를 선물할까 이것저것 고민했습니다. 기왕이면 그녀가 받고 싶은 선물을 하고 싶었습니다. 몇 번의 밀당 끝에 제 진심을 안 그녀가 조심스레 말합니다. 청진기를 받고 싶답니다. 미국 간호사는 청진기가 필수랍니다. 선물 받은 청진기로 진료하는 간호사라니, 생각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아마존에 접속해 전문 청진기를 검색해봅니다. 그녀가 모델명까지는 끝내 말하지 않으니 화면 앞의 제 눈은 까막눈이 될 뿐입니다. 아쉽지만 차선책으로 송금이란 선물을 택했습니다. 며칠 뒤 청진기에다 제 이름을 새기고 싶다며 그녀가 연락해왔습니다. 쑥스럽지만 고집 피울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러라고 했습니다.작년 미국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놓쳤고, 올해 서울에서 재회하자는 통화도 코로나 때문에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기야 만남 유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마음이 있는 한, 우정은 계속되는 것이니까요. 간호사로 멋지게 성장할 그녀를 멀리서나마 응원해봅니다.

2020-09-09

이리나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1990년 10월 3일 동서 도이칠란트가 재통일되면서 남북의 분단상황이 더욱 괴롭게 느껴지던 무렵의 이야기다. 유학의 피로와 염증이 있던 데다가, 육체적·정신적 소모가 상당해서 일상의 하중을 견디기 어려웠다. 항시적인 피로와 체중감소로 집 근처 내과를 찾았다. 50대 초반의 여의사가 반가운 얼굴로 맞이한다. 루마니아 태생이며 ‘이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의사. 체호프의 ‘세 자매’에 등장하는 막내딸 이리나가 생각났다.무슨 일로 왔는지 물으면서 차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나의 신상 하나하나를 캐묻기 시작한다.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있는데, 상당히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야경꾼으로 일하고 있는데, 낮과 밤을 바꿔 살아야 하는 일이어서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가깝게는 부모님의 건강 이력부터 멀게는 조부모에 형제들까지 소급해가면서 요모조모 캐묻는 이리나의 진지함과 성실함에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1시간도 넘게 걸린 질의응답을 거쳐 그녀는 일주일 후에 자신이 지정한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당시 나는 유학생 신분으로 한 달에 1만5천원 정도를 의료 보험비로 지출했다. 물론 보험은 3인 가족 전원에게 적용됐다. 종합검진을 받고, 약속한 날짜에 이리나의 병원을 찾아갔다.그녀는 간단한 결론을 준비하고 있었다. 양자택일하라는 것이었다.“학위논문을 포기하거나, 야경 일을 관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에 큰 사달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야경 일을 내려놓는 것이 유일한 출구였다. 그러나 안양에서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것도 선택 밖의 일이었다.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이리나에게 물었다. “무슨 방도가 없을까요?” 하는 질문에 그녀가 소견서를 써주겠다고 한다.소견서의 골자는 나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야간근무를 주간근무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리나와 나의 두 번째 대면은 30분 정도로 끝났다. 소견서 덕분에 나는 야경(夜警)꾼이 아니라, ‘주경(晝警)’꾼이 될 수 있었다. 야경으로 학업을 유지하던 주변의 유학생들은 그런 나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대목은 다른 곳에 있었다.환자 한 사람과 1시간 이상 의료상담을 하면서 도이칠란트 의사들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는 것일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고 신기했다. 지금도 한국인 의사들은 환자 1인에게 5분 이상의 시간을 허여하지 않는다. 내원자가 많을수록 의료비는 올라가고 그것이 고스란히 의사 개개인의 수입으로 잡히기 때문이다. 아주 특별한 가정의나 부자들의 개인 전담의가 아닌 담에야 어떤 한국인 의사가 환자에게 1시간의 상담과 진료시간을 베풀고 있는가?!그런 도이칠란트조차 의대 입학정원을 5천명 이상 늘리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구 천명당 의사 수가 4.6명이라는 도이칠란트의 의사들이 의대 정원확대를 반긴다고 한다. 우리는 2.3명 혹은 2.6명이라 한다. 한국의 의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2020-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