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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생은 끊임없는 배움의 여정, 김천평생교육 ‘50+ 학교’

김충섭 김천시장우리사회에서 갈수록 노년인구가 늘어나는 반면에 은퇴 시기는 빨라지고 있다. 은퇴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1막이 끝나고 2막이 다시 시작하는 시기이다. 이때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을 은퇴 이전부터 중요하게 생각할 일이다. 40대 혹은 50대 초반부터 이제는 100살까지 살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의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삶 전반에 대한 설계를 해볼 일인 것이다.유엔 발표에 의하면 18∼65세를 청년, 66∼79세를 중년, 80∼99세를 노년, 100세 이상을 장수노인이라 한다. 인생을 전반생과 후반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반생과 후반생 사이에 자신이 후반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비록 전반생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평가의 시간을 갖고 내 인생의 후반생을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 시간을 두고, 진지하게 행복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40대 후반, 50∼60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서 특히 사회적 지원이 많지 않은 세대다. 청년이라 할 수는 없는데, 슬슬 퇴직을 하고 은퇴를 하고 회사를 나와야 하지만, 그렇다고 노년이라 하기엔 너무 젊은 나이. 생각해보면 50대 쯤 돼서 더 이상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김천시는 이러한 50+ 세대들을 위한 ‘인생 후반기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을 고민해 오다 시민들의 인생 이모작을 돕기 위해 나섰다. 삶과 노후에 대한 인식전환과 다시 시작하는 인생 재설계의 실마리를 제공하여 다양한 각도의 제2인생 설계를 모색할 수 있도록 50 이후의 삶을 지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천시평생교육원에 문을 연 ‘50+학교’다.아름답고 활기찬 인생 후반전을 위한 준비가 김천시평생교육원에서 시작되고 있다. ‘50+학교’는 김천시민의 바람을 그대로 담아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김천시는 ‘50+학교’ 개설에 앞서 먼저 김천시에 거주하고 있는 50대 시민들을 대상으로 수요를 조사했고,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덕분에 삶과 노후에 대한 인식전환, 커리어설계 프로그램, 취미여가설계 프로그램, 시니어(50+) 인생찾기 특별강좌 등 인생 후반전을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준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50+학교’는 취미·여가설계반, 악기·커리어설계반 총 2반으로 운영 중이며, 1인당 최대 4개 과목까지 수강할 수 있다. 하반기에는 2학기 수강생을 모집할 예정이다.운영 과목은 총 12개로, △인생설계프로그램(건강, 재무, 여가) △취미·여가설계 프로그램(악기, 요리, 스포츠) △커리어설계 프로그램(치매예방 트레이너, 건강관리사, 부동산 경매) 등의 과목을 개설했다. 또한 시니어(50+) 인생찾기 특별강좌를 통해 다양한 일자리의 이해, 사회적 기여, 버킷리스트 등의 프로그램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50+ 장년들을 사회적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전문기관과의 연계도 도모하고 있다. 고용복지+센터, 여성새로일하기센터, 시청 일자리경제과를 통한 취·창업 지원, 김천시종합자원봉사센터를 통한 사회공헌활동과 연계시키는 한편, 자격 취득 프로그램을 통한 주민강사 육성 등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이들의 50+ 인생 활동을 적극 지원해 나갈 방침이다.50 플러스 인생 후반전.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인생 백세시대. 그냥 가만히, 그리고 조용히 세월만 보내는 옛날과는 다른 시대다. 인생 후반전을 명승부를 펼쳐야 한다. 후반전에 이겨야 진짜 이기는 것이다.그리고 하나 더.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면서 함께 생각해 볼 것이 소확행(小確幸)이다. 소확행은 주택구입, 취업, 결혼 등 인생에 있어서 크지만 성취가 불확실한 행복을 쫓기보다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 또는 그러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 또는 그러한 행복을 말한다.소확행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 수필집에서 행복을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정의했다. 말 그대로 ‘일상에서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어다.이른 새벽에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일, 작지만 아담한 마당 쓸기, 화분이나 텃밭 가꾸기, 한 잔의 차와 독서하기, 집안 청소하기, 이타심을 발휘하는 다양한 봉사활동 등 우리 주변에 ‘소확행’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조용히 스스로 자신의 주변을 한번쯤 되돌아보자.인생은 모든 연령대가 나름의 행복을 가지고 있다. 10대는 10대의 즐거움이, 50대는 50대의 즐거움이, 70대는 70대의 즐거움이 있다. 현재의 나이는 과거를 보면 가장 많은 연령이고 미래를 보면 가장 어린 연령이다. 어느 연령대에 있든지 그 나이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유쾌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조기 퇴직과 정년퇴직으로 늘어만 가는 50+ 세대들이 인생 후반전을 미리 준비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사회가 더 많은 지원과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할 시기이다.

2019-06-18

개와 산책하는 올바른 방법(上)

개는 일반적으로 먹는 것보다 산책을 더 좋아한다. 보통 개들은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있을 때도 먹을 것을 보면 새끼를 밀치고 먹이를 향해 달려갈 만큼 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보다 더 좋아하는 것이 정기적으로 산책을 해온 개들이 원하는 산책이다. 정기적으로 주인과 산책한 개들은 먹는 것보다 주인과 함께하는 산책을 더 좋아한다. 사실 산책시간은 불규칙한 것이 좋은데, 사람들은 일정한 시간에 개와 산책하여 문제를 만든다.개는 시간에 굉장히 예민한 동물이라서 일주일 동안 같은 시간에 산책을 나갔다면 개는 그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는 편이다. 그래서 산책 갈 시간이 가까워지면 개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불안해 하고 낑낑거린다. 만약 주인이 그 시간을 무심히 지나치면 개는 당연히 산책을 가고 싶다고 조르거나 짖게 된다.개의 이런 행동을 오해하는 주인도 있다. “우리 개는 아주 영리해요. 시간을 다 알아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사람의 착각일 뿐이고, 개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봐 이제 슬슬 산책시간인데, 뭘하고 있는거야 빨리 날 모시고 나가야지” 정기적인 시간에 하는 산책이 반복되어 개가 계속해서 짖어대면 주인은 어쩔 수 없이 개의 요구대로 산책을 나갈 수 밖에 없어진다.아파트 등에서 개 짖는 소리는 이웃의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정도 되면 개의 산책에 사람이 끌려가는 모양새가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서열을 중시하는 개의 입장에서는 주인의 머리 위에 있으려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꼬박꼬박 산책을 데리고 나가면 개는 사람을 자기가 길들였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필히 기억하라. 산책 시간을 규칙적으로 정하지 말아야 한다.산책은 주인의 상황에 따라 나가야 한다. 시간에 관계없이 주인이 주도권을 늘 가질 수 있도록 해야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산책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 그래야 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짖어대는 일도 없다. 습관적 산책은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매일 빠지지 않고 산책을 나가주는 것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개는 산책이 습관화되면 습관대로 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산책은 주인 마음대로, 형편에 따라서 가능한 불규칙한 시간에 하라. 산책을 의무로 생각할 필요도 없고 산책을 가지 못한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다. 더 나아가 정기적 산책의 결과로 개가 줄을 가지고 와서 산책을 가자고 조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주인은 개가 똑똑해 보이고 심지어 이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이 모습은 개가 주인에게 산책을 가자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서열상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개가 서열이 낮은 주인에게 산책을 요구하는 모습인데, 이때 개의 요구에 따라 산책에 응해줘서는 안된다. 이때 산책에 응해주면 개의 본능은 점점 주인에게 복종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다. 개가 줄을 물고 와서 산책을 가자고 조를 때는 일단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한다. 산책에 나가서도 개가 사람보다 앞서가거나 줄을 당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개가 힘이 넘쳐서가 아니라 개가 주인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주종관계를 역전시키는 방법은 한가지 뿐이다.주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개를 이끌고 가는 것인데, 개가 앞서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뒤에 따라 오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리더워크인데, 개와 시선을 맞추지 않은 상태에서 개가 앞으로 가려고 하면 빙글 돌아서 방향을 바꾸어 반대방향으로 가고, 다시 앞으로 나가려고 하면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여 사람이 가고 싶은 데로 걷는 방법이다. 이사람 저사람이 돌아가면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산책에서 개의 운동량은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운동을 많이 시키면 개도 체력이 길러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왕성한 체력을 발산하고 싶어하고 그렇지 못하면 개는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한다. 결국 개와의 장거리 산책이나 달리기로 습관이 되는 경우들이 있다. 지나친 운동형 산책은 단명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지나친 운동은 개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대형견이라고 해서 장거리를 달리게 할 필요가 없으며 지나친 운동은 피하고 주인과 적당한 운동을 하면 되는데, 몸집이 큰 사람이 작은 사람보다 운동을 특별히 더 많이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생각하면 된다. 몸집이 큰개라고 운동을 무조건 많이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서라벌대 반려동물연구소 소장(마사과 교수)

2019-06-18

대구를 빛낸 사람

대구 출신의 20세 이하(U-20) 월드컵 대표팀 정정용 감독에 대한 뒷 얘기가 무성하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히딩크를 연상케 한다.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U-20 준우승이란 신화를 일궈낸 그에게 언론은 그의 지도력과 인간애 등을 최고의 화제로 삼았다. 무명선수 출신으로 평범했던 그가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된 것은 오직 성실성과 인간적 면모가 있었기 때문이라 평가했다.그는 대구신암초교에서 축구를 시작해 축구명문 청구중고교에서 선수로 뛰었다. 경일대를 졸업하고 아마구단인 이랜드 푸마에 입단했으나 서른도 되기 전에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접었다. 그러나 축구에 대한 일념으로 대학원 과정에서의 공부와 열정으로 그만의 전략과 전술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선수들은 그를 ‘제갈용’이라 불렀다. 삼국지에 나오는 책략가 제갈공명 못지않은 축구 전략가라는 뜻이다. 변화무쌍한 전술 구사로 적의 허점을 찌르고 승리를 이끌어 내는 그의 전술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와 같았다는 평가다.그만의 리더십도 주목을 받고 있다. 지시보다 이해를 먼저 구하는 그의 태도에서 선수들은 그를 감독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 불렀다. 언론은 그의 리더십을 ‘아저씨 리더십’으로 표현했다. 권위적인 리더십과는 다른 그의 다정다감한 리더십이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고 팀의 동력을 키우는 힘의 원천이 됐다는 설명이다. 국가대표 이승우 선수는 “가장 존경하는 감독”이라 말했다. 평범하지만 인간적인 그의 지도력이 새로운 리더십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힘든 요즘이다. 대구출신의 그가 들려준 낭보는 이곳 고향사람에게는 청량제와 같다. 갑갑하던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다. 정 감독이 일궈낸 신화는 대한민국 모두의 영광이지만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제 일만을 열심히 해온 그의 성실함은 우리가 배울만한 일이다. 정 감독과 함께 대표팀에는 고재현,김세윤 두 명의 대구신암초교 출신선수가 더 있다. 그들이 함께 했기에 이번 영광이 더 자랑스럽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6-18

용적률 인센티브 유감

김영태 대구취재본부 부장대구지역에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택지가 거의 고갈되면서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6개월 동안 이들 사업을 수주한 회사들은 지역업체는 단 한 곳도 없고 전부 서울에 본사를 둔 이른바 메이저급 회사들이 차지했다. 대구시가 지난해 11월 지역업체들의 재개발·재건축 사업 참여율을 높이기 위해 용적률 인센티브를 23%까지 높여주는 제도를 도입했는데도 이 같은 현상이 벌어져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용적률 인센티브를 적용하면 조합원은 가구당 수천만원의 이익이 돌아오는 제도인 데도 조합원들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두고 지역 건설업체들을 중심으로 대구시의 인센티브 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결국 대구지역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이제 메이저급 건설회사들의 각축장이나 다름없게 됐고 곳곳에서 지역업체들이 수주전에서 선정되지 않는 현상을 볼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는 인센티브 적용사업장이 적은데다 홍보마저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지역의 한 건설업체가 분석한 결과 대구에서 성공 가능성이 큰 사업지는 10여 곳이고 이중 단 2곳만 용적률 인센티브를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마저도 조합원에 대한 사전 홍보활동 금지 규정에 발목이 잡혀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 없어 지역 건설업체들이 수주전에서 고전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용적률 인센티브를 적용하면 조합원의 개발이익이 가구당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홍보할 시간이 없어 애로를 겪었다는 것이 지역 업체들의 한결같은 하소연이다. 심지어 지역 건설업체들은 대구시의 홍보가 부족해 조합원들이 용적률 인센티브 제도를 알지 못하면서 외지 대형 건설업체의 브랜드 네임을 통한 아파트값 상승을 원인으로 한 선호도를 보인다고 평가한다.실질적으로 메이저 건설업체들은 브랜드 네임에 대한 인센티브를 최대한 강조하며 조합원들에게 어필하고 지역업체를 몇 수 아래로 보는 수주전을 펼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코오롱글로벌이 시공사로 선정된 대구 북구 ‘칠성24지구 재건축사업’의 경우에는 용적률 인센티브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지역업체인 화성산업은 공사비로 3.3㎡당 447만원에 대구시가 지원하는 용적률 인센티브 23%를 적용해 용적률 407%에 최고층수 41층을 제안했다. 반면 인센티브가 없는데도 코오롱글로벌은 3.3㎡당 공사비 447만원, 용적률 410%를 적용해 최고층수 49층, 851가구를 제안했다. 이는 지역업체 용적률 인센티브를 적용한 것보다 코오롱글로벌이 더 높은 용적률을 제시한 것으로 현실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해 줄 수 있는 대구시 관계자는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모호한 답변을 한 것으로 알려져 조합원들의 불만을 샀다. 이러니 최근 6개월 동안 지역업체의 재개발, 재건축 수주가 단 한 건도 없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제도상으로는 지역 업체들을 돕고 지역 경제활성화를 이끄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제도다. 지역 건설업체들이 더 이상 수주전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강조 않겠다고 할 정도로 유명무실한 제도로 여기는 이유도 이것이다.대구시의 어정쩡한 자세 때문에 건설사들의 수주경쟁이 과열되면서 금품살포 의혹이 일거나 세입자·재건축조합 간에 이주 지원을 둘러싸고 집단 갈등도 빚어졌다. 특히 지난달 실시된 대구 북구 ‘칠성24지구 재건축사업’과 관련, 수주 경쟁을 벌이는 건설사들을 상대로 금품제공 여부를 대구경찰이 수사에 들어갔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르면 건설업자가 조합원에 금품 등을 제공할 경우 과징금과 함께 1∼2년간 입찰참가가 제한된다. 대구지역 건설업체 수주를 통한 경제 활성화라는 대전제를 깔고 있는 용적률 인센티브 제도가 오히려 지역업체의 발목을 잡는 현실을 타개할 실질적인 방안을 대구시가 내놓아야 할 때다.

2019-06-18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법

김진홍 한국은행 포항본부 기획조사팀장기업 경영자들은 지금쯤 ‘여름이라는 계절’의 느낌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야할 사방이 모두 날카로운 칼날로 덮여있어 한발만 잘못 내디디면 베일까 가슴이 서늘해지는 ‘정치라는 계절’임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2020년은 수많은 1년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미국과 우리에게는 묵직한 한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4월 15일이면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르게 된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 11월 3일이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할지 아니면 수많은 오바마 전 대통령의 후계자 중 하나가 정권을 잡을지 결정될 것이다. 선거는 내년이지만 이미 이를 의식한 정치인들은 분주하다. 우리는 이미 정치의 계절에 살고 있는 것이다.지난 6월 11일 미 법무부는 반독점법(Antitrust Laws)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공표하였다. 과거 반독점법은 독점상태에서 부당하게 높은 가격을 매겨 ‘소비자의 불이익’을 일으키는 기업을 단속하기 위해 탄생하였다. 그런데 이 ‘소비자의 불이익’에 대한 개념을 이전보다 더욱 확장한 것이다. 경쟁상대방을 매수함으로써 혁신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서 퇴출시키거나 기업이 개인정보를 독점하여 프라이버시 보호에 방심할 우려, 경쟁기업 부재에 따른 ‘저품질의 경쟁’상태를 유발하는 것까지도 ‘소비자의 불이익’으로 보겠다는 것이다.미국 사법당국의 이러한 움직임은 가파(GAFA)에 화살을 겨냥하고 있다. 즉 구글(G), 아마존(A), 페이스북(F), 애플(A)이라는 세계적인 대형IT기업을 대상으로 반독점법에 따른 규제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페이스북이 인스타그램이나 왓츠앱을 인수한 것도 경쟁상대를 미연에 방지하는 행위로 간주해서 반독점법 적용을 검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미국의 정책변화를 암시한다. 지금까지 미국 IT산업의 성장과 경쟁력의 원천이 정부의 ‘자유방임’정책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제 ‘규제강화’로 정책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배경이 있겠지만 이 또한 2020년 미국의 ‘대선’이라는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물론 우리나라는 대선과 같이 국가적인 경제정책의 기조변화까지는 발생하기 어려운 ‘총선’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는 긴장감이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은 현 시점에서 각 지역별 현안사항을 중심으로 국회의원과 소속 정당 등의 공약, 지지계층의 반응 등이 얽혀 있는 데다 선거결과에 따라 해당 지역경제의 향방에 영향을 줄수도 있다는 점에서 지역 기업의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대선보다 총선이 더욱 민감하게 느낄 가능성도 있다.이러한 정치의 계절에서 지역 기업들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사실 아무리 ‘정치의 계절’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업의 요건은 항상 변함이 없다. 게다가 과거처럼 정치적 배경만으로 승승장구하기도 어려운 시대다. 미국 정치인들이 ‘소비자의 불이익’을 내세우고 있지만 결국 기업의 생존은 자사의 제품, 자신의 서비스로 ‘소비자의 만족’을 이끌어내는가에 달려있다. 경기가 최악이라는 포항이지만 시내 곳곳에는 줄지어 대기하며 예약해야만 이용할 수 있는 음식점도 있고, 2호점 3호점으로 도리어 확장하는 가게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결국 ‘소비자의 눈’은 정확한 것이다. 정치의 계절에 정치인들이 정치소비자인 ‘시민’을 의식하듯이 기업가는 소비자인 ‘수요기업’이나 ‘구매자’를 의식하여야만 한다. 정치의 계절이라고 좌충우돌할 필요는 없다. 언제나 ‘소비자’만 바라보는 기업이라면 비록 정치의 계절이라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소비자 우선주의는 언제나 최고의 방법이며 유일한 방법이다.

2019-06-18

코리안 마마

마더 테레사는 살아 생전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주린 배를 움켜 쥐고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을 어머니처럼 보살핍니다. 그녀가 50년 넘도록 말과 행동으로 전한 사랑의 메시지는 종교와 이념을 초월해 이기주의와 물질 만능에 빠져드는 20세기말 인류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은 단순합니다. 믿음을 갖고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는 것입니다.”피부가 문드러져 썩어가는 나병 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고 악취나는 몸을 씻어주고 죽어가는 에이즈 환자를 끌어안는,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나눠주는 희생과 사랑. 마더 테레사는 평소 ‘당신이 크리스천이 된다면 우리는 당신을 도울 거에요!’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적 사랑이 그녀의 목표였습니다.LA의 마더 테레사로 불리는 한국인이 있습니다. 미국명으로 글로리아 김(김연응)입니다. LA타임즈는 지면 2개를 빌어 그녀를 조명한 적이 있지요. 글로리아 김은 20년 동안 새벽 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거리 노숙자들에게 나눠 줄 음식을 준비합니다 새벽 4시면 낡은 승합차에 온갖 음식을 싣고 다리 밑, 공원 구석, 거리 모퉁이를 천천히 돌면서 노숙자들을 발견하면 음식을 나눕니다. 차에는 바나나 2박스, 물 25ℓ, 빵 400개, 200명 분의 스프, 포도와 양말, 옷가지 등이 실려 있습니다. 그녀의 별명은 ‘코리안 마마’. 으슥한 새벽, 그녀 승합차가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나타나면 그들은 “마마” “마마”를 외치며 반깁니다. 둘러서서 따스한 음식을 먹으면서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김연응씨의 봉사가 남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노숙자들을 위해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봉사는 많이 있습니다. 국내도 역 광장 등에서 무료 급식하는 장면들을 봅니다. 종교 단체에서는 급식 행사를 하면서 단체를 홍보하거나 특정 종교를 내세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노숙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손 내미는 봉사여서 글로리아의 봉사가 남다릅니다.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 희생과 나눔이지요. 글로리아 본인도 70세를 넘은 고령에 관절염과 백내장으로 하루가 힘겹지만, 매일 새벽 200명 이상의 노숙자들을 찾아 다니며 음식을 공급하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아무런 조건없이 아무런 이름도 내걸지 않고 순수하게 손 내미는 참된 선행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늘어나는 아름다운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18

학교와 마을의 상생

이주형 시인·산자연중학교 교사“산자연중학교 바로 옆 학교 진학을 위해 주택을 준비하신다면 신축급 전원주택 추천합니다.”학교 기사를 검색하다 의외의 내용을 보고 필자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 당혹감은 곧 묘한 기대감으로 변했다. 비록 큰 광고는 아니었지만, 학교가 상업광고에서 불특정 다수 소비자들을 설득시키는 중요한 논리로 사용된다는 것은 학교 입장에서는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산자연중학교가 소재한 마을의 모습을 학교가 개교한 2014년도와 비교해 보았다. 필자는 의미 있는 변화 몇 가지를 발견했다. 제일 큰 변화는 마을에 새 집들이 여러 채 생긴 것이다. 학교 소재지 마을은 슈퍼는 물론 네온사인 하나 없는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하루에 시내버스가 아침, 점심, 저녁 세 번만 운행하는 마을이라고 하면 좀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런 마을에 세련된 디자인의 집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분명 큰 변화다. 이런 집들 때문인지 마을의 이미지도 전통과 현대가 조화된 밝은 이미지로 바뀌고 있다.마을의 이미지 변화는 마을 주민들의 삶의 변화로 이어졌다. 학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면 마을은 곧 어둠에 잠겼다고 한다. 분명 그 때는 해가 넘어가기도 전에 마을길엔 인기척이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곧 침묵의 마을로 변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경야주(晝耕夜奏)! 이 말은 필자가 지금 학교 소재지 주민들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말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낮에는 들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신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에 오셔서 색소폰 등을 배우신다. 비록 고된 농사일에 힘이 드시지만, 거의 매일 저녁 학교에 오셔서 레슨도 받으시고, 또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시다 기쁘게 댁으로 가신다.2017년 대안학교 우수프로그램 일환으로 시작한 마을 색소폰 연주단은 올해로 3년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어르신 연주단은 마을과 학교, 그리고 교육청 행사에도 참가할 정도로 연주 실력이 우수하다. 지난 5월 8일에는 지자체 경로 효 잔치에 초대되어 연주를 하였다.마을 색소폰 연주단의 평균 연령은 60대 중반을 넘는다. 그러다보니 연주도 연주지만 연주단원들의 활동 모습은 주변 마을 어르신들께 큰 희망을 주고 있다. 그래서 학교에는 연주단 가입에 대한 문의가 1년 내 끊이지 않는다. 비록 신청하신 모든 분께 기회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지만, 내년에는 제일 먼저 연락을 달라는 어르신들의 목소리에서 필자는 힘을 얻는다.산자연중학교에는 마을 색소폰 연주단 이외에도 서예, 수영 등 마을 어르신들과 학생들이 함께 배우는 특성화 프로그램들이 있다. 또 산자연중학교 학생들은 학기별 1회 이상 어르신들을 모시고 세대 공감 여행을 떠나는데, 여행단의 모습에 많은 관광객들이 박수를 보내주신다.필자는 산자연중학교와 오산리 마을의 관계는 상생(相生)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산자연중학교 교육공동체 모두는 마을이 학교와 학생들을 잘 키워주셨고, 또 앞으로도 더 잘 키워주시리라 확신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께 더 잘 하려고 노력한다. 마을 어르신들 또한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주는 학교와 학생들에게 늘 감사함을 포현하신다. 학교가 마을이고, 마을이 곧 학교인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그리고 산자연중학교!“재미삼아 무차별 폭행” 또래 숨지게 한 10대 4명 ‘살인죄’ 적용 검토! 참으로 아프고 슬픈 이야기이다. 학교 현장에 인성교육이 의무화된지 오래이지만, 인성교육 시간에 비례하여 학생 사건은 더 잔혹(殘酷)해지고 있다. 과연 우리 교육은 바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 삭막해져만 가는 학교 현장! 마을과 학교가 함께 행복한 산자연중학교의 마을 학교 프로그램을 다른 학교들도 벤치마킹해보면 어떨지 제안해 본다.

2019-06-18

현대 건축디자인의 시작 ‘바우하우스’

독일 베를린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적한 마을 데사우(Dessau). 이곳에는 현대건축의 선구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가 세운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Bauhaus)가 자리하고 있다. 바우하우스 건물의 모든 외벽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이야 전면 유리 파사드가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1926년 바우하우스 건물이 처음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혁신적인 건축언어였다.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 자체가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담고 있는 기념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26년 12월 4일 바우하우스 건물의 준공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데사우를 방문했고 이들은 현대 건축디자인의 역사적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도시에 어둠이 내려앉자 바우하우스 건물에 불이 켜지면서 장관이 펼쳐졌다. 격자 모양의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고 유리 파사드가 빛을 뿜어내면서 지금까지 본적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유전자의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바우하우스는 독일어로 ‘짓다’는 단어 ‘Bauen’(바우엔)과 ‘집’을 뜻하는 ‘Haus’(하우스)의 합성어이다. 바우하우스가 처음 시작된 것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Weimar)이다. 마흔 세 살의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산업적 미학을 창조하고자 바우하우스 운동을 일으켰다. 지금 우리가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작이 바로 그로피우스가 주창한 바우하우스이다. 바이마르의 평범한 공공건물에서 시작된 바우하우스 예술학교에서는 미술뿐만 아니라 금속가공, 목공 등 공예와 관련된 전 분야는 물론 공연과 무용에 이르는 모든 예술 교육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졌다.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가 색채 교육을 책임지면서 순수 미술에서 추구했던 미학이 일상에서 사용되는 가전이나 가구에 접목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충분한 자유가 주어졌고 수많은 실험들이 어떠한 제도적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렇게 바이마르에서 순탄하게 시작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 위기를 맞이한다. 그해 바이마르 시의 정권을 잡은 극우정당은 학교를 폐교할 목적으로 재정 지원에 대한 전면 중단을 결정하였고 바우하우스는 불가피하게 이전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예술과 기술을 접목해 일상의 물건이나 심지어 기계마저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새로운 산업 미학을 만들어낸 바우하우스. 1919년 독일의 역사적인 도시 바이마르에서 처음 문을 열었던 바우하우스는 극우정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재정 지원이 끊겨버렸고 존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도시 데사우로 그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데사우는 독일 산업의 전진기지로 도시의 정체성이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은 물론 학교 건축을 위한 넉넉한 부지도 기꺼이 마련해 주면서 그로피우스의 종합예술학교 이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데사우 시당국이 그로피우스에게 학교 부지로 제안한 곳은 도심에서 벗어난 넓은 벌판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제약 없이 건축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그로피우스는 새로운 터에 자리하게 될 예술학교를 설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이념에 따라 각 공간들이 독립적으로 기능하지만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통합적인 건축을 소개한다. 그 시대에 유행하던 건축 양식이나 형태에 구애를 받지 않고 쓰임에 적합하지만 자유롭고 통합적인 구조로 공간들을 배치하였다. 학교는 미술학교를 위한 건물은 물론 기술학교, 사무공간, 식당과 기숙사 등의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로피우스는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적으로 통일성은 보여주되 지루하지 않도록 대칭적 구조를 피하고 크기와 높이에 변주를 가했다. 그렇다보니 바우하우스 건축물의 전체 구조는 여느 건축물들과는 달리 좀처럼 한 눈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건축물들은 구조적으로 대개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외부에서 내부를, 하나의 공간에서 다음 공간을, 부분에서 전체를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렇지 않다. 학교를 구성하는 개별 건물들은 형태뿐만 아니라 크기나 구조 또한 모두 달랐기 때문에 외관의 피상적인 관찰을 통해 내부를 읽을 수 없고, 부분을 통해 전체를 파악할 수도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건축 구조와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직접 걸어 다니며 공간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바우하우스를 건축하면서 그로피우스의 고집이 강하게 드러난 부분은 디자인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본적인 건축철학은 ‘집과 가구는 조화를 이루어야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따라 문고리를 비롯해 전등이나 심지어 전기 스위치와 같은 소소한 대상들까지도 건물 전체 디자인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바우하우스에 사용될 조명들은 재학생들에 의해 직접 제작되었다. 각 층과 공간은 그 용도와 성격에 따라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 이렇게 기능성과 효율성을 유지하면서 미적 감각까지 더해 진 바우하우스 건물이 탄생한 것이다.1933년 나치가 데사우 시의회를 장악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에서 다시 문을 열었지만 나치의 탄압에 위협을 느낀 발터 그로피우스는 이듬해인 1934년 영국으로 망명해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하버드 대학의 디자인대학원장을 역임하면서 현대건축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바우하우스가 베를린으로 이전해 버리고 데사우의 건물은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다. 나치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역겨운 건축’이라고 폄하한다. 1945년 폭격으로 건물 일부가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데사우는 동독에 편입이 되었다. 동독 정부는 바우하우스 건물을 독일 건축의 전통을 파괴하는 흉물로 취급했지만 완전히 철거를 하지는 않았다.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 동독 내 정치적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1976년 바우하우스는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동서로 나누어진 독일이 다시 통일을 이루고 바우하우스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일부는 학교로 일부는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 그는 ‘예술은 탐구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탐구는 발견을, 발견은 창조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창조가 탐구에서 비롯된다면 그 토양이 되는 것은 ‘자유’이다. 시대를 움직이는 진정한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발터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통해 남기고 간 위대한 예술정신도 역시 자유이다./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

2019-06-17

소셜벤처

소셜벤처는 환경, 교육, 삶의 질 등 사회문제를 혁신적인 기술과 사업 모델로 해결하려는 기업이다. 빈곤과 불평등, 환경 파괴, 교육 격차 등을 해소하면서도 사업을 지속할 수익을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스웨덴을 방문하면서 스웨덴과 양국 협력의 일환으로 소셜벤처 육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해 화제가 됐다.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이날 교류행사에 참여한 한국의 소셜벤처는 (주)엔젤스윙(대표 박원녕), (주)닷(공동대표 김주윤·성기광), (주)테스트웍스(대표 윤석원), (주)오파테크(대표 이경황), (주)모어댄(대표 최이현), (주)유니크굿컴퍼니(공동대표 송인혁·이은영) 총 6개사로, 뛰어난 혁신기술이나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함으로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기업들이다.우선 (주)엔젤스윙(ANGELSWING)은 웹에서 드론 데이터를 처리·분석하여 맞춤형 지도를 제공할 수 있는 플랫폼 제작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재난 복구를 돕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는 소셜벤처다. 기업명 역시 ‘하늘을 나는 드론의 날개가 사회문제 해소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명칭으로, 엔젤스윙의 창업자 박원녕 대표는 대학 창업팀 시절부터 드론 기술을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해왔고, 이를 통해 미국 포브스지에서 발표하는 ‘아시아의 30세 이하 영향력 있는 리더’에 선정되기도 했다. 실제로 창업팀 때는 2015년 네팔 대지진 당시 드론을 이용한 정밀 3D 지도를 제작하여 재난현장의 복구를 도왔고, 2017년에는 서울시와 함께 ‘서울 쪽방촌 리빙랩 프로젝트’를 추진, 쪽방촌의 안전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주력해 왔다.폐자동차 시트 등 재활용 가죽을 활용하여 친환경 제품을 제작하고 있는 (주)모어댄, 시각장애인용 점자 스마트기기를 개발 사업화하고 있는 (주)닷 등 다른 소셜벤처 5개사도 혁신적 기술 또는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기업들로 널리 알려져있다.혁신적 기술이 사회적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이상을 실천하는 기업인 소셜벤처가 크게 발전하기를 기대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6-17

“냄새가 선을 넘는다”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반지하’ 냄새야, 이사 가야 없어져.” 영화 ‘기생충’에서 주목한 말이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계급을 상징하는 장치들로 넘친다. 그 중에 하나가 ‘냄새’다. ‘기생충’은 와이파이도 잘 안터지는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우네가 고액 과외를 시작으로 박사장네 저택에 미술치료사, 기사, 가사도우미로 합류하며 펼쳐지는 계층간의 대비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냄새’는 불평등한 계층구조의 단면을 암시한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의 발신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반지하 방에 잠깐 들어오는 한 줌 햇살에 양말을 말리는 생활에 배인 냄새다. 이러한 선을 넘는 ‘냄새’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선을 넘는 사람들, 내가 제일 싫어하는데.” IT회사 젊은 CEO 박 사장은 말한다. ‘대지 600평에 1층만 200평’인 대저택, 한눈에 정원이 보이는 통유리로 된 거실이 있는 곳에서 사는 박 사장에게 젖은 행주에서 나는 듯한 퀴퀴한 냄새는 불쾌하다.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과 구분지으며 이질적인 냄새에 대한 불편함을 얘기한다. 마크 냅은 ‘비언어 커뮤니케이션’에서 “냄새 효과는 본질적으로 의식적이 아닐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은 숨 쉬는 공간에서 떠다니는 냄새의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주위의 냄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줄리아 우드는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이 더 적거나 권력이 없는 사람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여러 ‘공간’은 사회경제적 위치를 반영한다. 차를 여러 대 갖고 있는 상류층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거의 없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서민들이다. 폐기물 처리장이나 유해한 시설은 대체로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 배치된다.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상류층은 안전지대에, 가장 취약한 계층은 일상의 위험에 불균형적으로 노출된다. 국토교통부의 ‘2018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38만 가구가 반지하에 살고 있다. 전체 아동 10명 중 1명은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여 있다. ‘기생충’에서 대주택과 반지하, 숨겨진 지하공간이 대비되듯이 집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문제는 살고 있는 집에 따라 ‘구분짓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크고 높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작고 낮은 임대’에 사는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지 않는다. 이질적인 주거환경이 인간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친구를 집에 초대해본 적이 없다’고 답한 일반가구 아동이 36.2%였던 것에 비해, 주거 빈곤 계층의 아이들은 66.9%나 되었다. 취약한 주거환경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에서 말했던 것처럼 심리적 위축으로 이어진다. “가난한 사람은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쓰게 된다.” 주거 빈곤의 고착화는 공동체 의식마저 약화시키고 있다.냄새가 선을 넘어야 한다.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서로 만날 있는 공간을 말한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시민들의 삶에 기반이 되는 시설들의 재건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 아이를 보내고 싶은 공립학교, 상류층 통근자를 끌어들일 대중교통, 민주시민이 공유하는 장소로 모이게 하는 ‘시설’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누군가에게 ‘기생’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사회를 만들려면, 무엇보다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져야 한다. 공원, 체육관, 복지관, 도서관, 박물관에서 서로의 냄새들이 어우러지고,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일상의 불편함을 해소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2019-06-17

증시의 저승사자는 죽었다

김학주한동대 교수증시 투자자들은 지난 10년간 인플레를 두려워했다. 인플레가 오면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지므로 정부는 시중에 풀린 자금이 회수될 수 밖에 없고, 증시 주변 자금들도 마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는 오지 않았다. 죽었기 때문이다.최근 일본에서는 몇 십 년 만에 생필품 가격이 인상됐다. 노동력이 부족하여 인건비를 올려줄 수 밖에 없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제품가격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물가 상승은 좌절됐다. 왜냐하면 가격이 오르자 물건이 안 팔려 슈퍼마켓에서 어쩔 수 없이 가격을 할인했기 때문이다. 세계 전체적으로 소비심리는 극도로 악화되어 물가가 오르면 사람들이 쉽게 소비를 포기하는 환경이 되어 버렸다. 늙었기 때문이다.문제는 인건비처럼 물가상승 요인이 발생해도 실제 물건 가격은 오르지 않지만 기업들의 수익성이 훼손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미-중 무역갈등을 비롯해 세계 전역에서 교역을 지양하고, 각자 도생의 길로 가면 국가간 비교우위가 사라지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싼 중국제품을 미국인들이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이 경우 비용상승 요인이 발생하지만 기업은 제품 가격을 올릴 수 없으므로 수익성이 악화된다. 정부가 아무리 시중에 자금을 공급해도 기업 실적이 악화되면 주가는 하락할 수 밖에 없다. 즉 트럼프가 지금 예민한 곳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증시의 새로운 저승사자는 생산성 하락이다. 이것이 기업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세계 세계경제가 저성장으로 가는 대신 본능적으로 비용을 절감하려는 몸부림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빅데이터(big data)를 활용한 공유경제 플랫폼, 또는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 솔루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움직임으로 인해 생산성이 개선되면 비용상승 인플레 압력이 약해지고, 그 만큼 정부는 많은 양의 자금을 증시에 남겨둘 수 있다.그런데 최근 이들 플랫폼과 제도권과의 갈등이 첨예하다. 즉 규제로 인해 이들 플랫폼들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시장의 우려가 많다. 최근 후쿠오카에서 열렸던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향후 재정지출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고 그 과정에서 정부 빚이 증가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이를 해소할 수 있는 세수에 대해 주로 논의했다. 그 가운데 데이터에 대한 과세가 쟁점이었다. 즉 데이터에 부가가치가 형성되는 과정을 정의하고, 해당 데이터가 제공된 곳에 세금을 매기자는 내용이었다.그러나 데이터 자체에 세금을 부과하면 이중과세다. 플랫폼 업체들의 이익에도 법인세를 부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접적인 과세는 아닐 것이다. 또한 빅데이터 플랫폼에서 지속적으로 세금을 거두려면 관련 규정을 만들어 사업을 구체화시켜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의 생산성 개선 활동이 시장의 우려만큼 방해받지는 않을 것 같다.그 결과 인플레 압력이 최소화되었고, 정부가 편하게 시장에 개입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따라서 증시의 복원력도 강해졌다. 그러나 이는 시장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인위적인 정책 때문임을 명심하자. 과거 미국이 경쟁력 있었던 이유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즉시 시장원리가 작동하여 빠르게 정상화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은행이 망하면 예금자들이 손실을 떠 안고 끝낸다. 환부만 얼른 도려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민간의 부실을 공공 부채로 떠 넘기며 상처를 숨기고 있다.정부가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세계경제 시스템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부분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부실이 전염된다는 것이다. 인구의 구조가 바뀌거나 새로운 성장동력이 나타날 때까지 이렇게 버티자는 것이고, 그 결과 시장은 평온해 보인다. 그러나 숨겼던 부실이 가끔씩 드러날 수 있으므로 그 때마다 증시를 피하는 훈련은 필요해 보인다.

2019-06-17

한 소년이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

2015년 6월 23일. 필리핀의 의대생인 조이스 토르프랭가(Joyce Torrefranca)는 세부섬 만다우에의 길거리에서 한 소년을 발견합니다. 소년의 모습에 감명을 받은 조이스는 멀리서 소년을 촬영해 페이스북에 올리며 한 문장을 씁니다. “한 아이를 통해 영감을 받았다.”사진 속 소년은 맥도날드 가게 앞 거리에 자그마한 간이 책상을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맥도날드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고 학교 숙제를 하고 있었던 거지요. 소년의 이름은 다니엘 카브레라(Daniel Cabrera). 5년 전 화재로 집이 불타 없어졌습니다. 3년 전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지요. 거리로 내몰린 엄마와 카브레라. 엄마는 편의점에서 일거리를 얻고 매장 주인의 가정부로 근무하며 하루 80페소를 법니다. 우리 돈으로 하면 일당 2천원.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엄마는 길거리에서 담배와 사탕수수를 팔며 카브레라를 키워옵니다. 카브레라의 어머니 크리스티나 에스피노사는 말합니다.“아들은 항상 제게 말했어요. 엄마, 저는 이렇게 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열심히 공부해서 내 꿈을 이루고 싶어요.”카브레라는 밤에는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 안타까웠습니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소년은 누가 버린 작은 책상 하나와 전 재산인 연필 한 자루를 들고 스스로 맥도날드 매장 옆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시작합니다. 혹시라도 한 자루 남은 연필을 잃어버릴까봐 연필 끝에 끈을 달아 손에 묶고 공부합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지요.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조이스 토르프랭가의 핸드폰에 찰칵, 그 장면이 찍힌 겁니다. 조이스의 페이스북은 폭발적 반응을 일으킵니다. 9800개의 공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진은 필리핀 전역에 큰 이슈가 됩니다. 나아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지요. 여기 저기서 온정의 손길이 쏟아집니다.맥도날드는 카브레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합니다. 필리핀 정부도 학용품비로 125만원을 지원합니다. 카브레라는 경찰이 되는 꿈을 꾸고 있지요. 로망 롤랭은 말합니다.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 가만히 견디고 참든지 용기로 내쫓아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소년은 경찰이 되고 싶은 꿈을 이루고 싶은 열망에 용기를 냈습니다. 그 용기가 행운을 불러오고 마침내 자신의 불행을 내쫓아 버립니다. 소년의 눈빛은 세상 어느 반딧불이 보다 찬란하게 빛납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17

국민 세금과 고액 강연료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과의 점심경매는 이제 연중행사가 됐다. 지난해 워렌 버핏과의 점심경매는 한화 약35억 원에 낙찰됐다. 낙찰을 받은 사람은 버핏과 3시간 동안 점심을 같이하며 그에게 돈버는 노하우를 듣는 댓가로 수십억을 던져버린 것이다.올해 경매는 암호화폐 트론(TRX) 창시자인 ‘저스틴 선’에게 한화 약 54억 원(456만달러)에 낙찰됐다. 지금까지 자선경매 중 가장 높은 낙찰금액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버핏이 알려주는 부자가 되는 비법을 한수 배우기 위해 해마다 엄청난 점심 값을 지불하려고 줄을 선다. 어떤 사람은 버핏과의 점심이 30억 원어치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세상은 참 요지경이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이 없다. 돈 버는데도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버핏과의 점심경매는 20년째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투자의 귀재’란 버핏의 유명세가 덧붙여져 홍보 등 다른 이득 효과가 있다. 그래서 낙찰금액에 대한 적절성 시비는 없다. 게다가 여기에 모여진 돈은 전액 빈민구제단체에 기부되고 있어 행사 자체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방송인 김제동의 고액 강연료 시비가 적절성 여부를 두고 계속 논란이다. 김씨 강연료에 대해 여론은 “대체적으로 과하다”는 반응이다. 대학교수나 유명 기업인의 90분 강연료가 500만∼700만 원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그가 특별하게 더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강연료는 강의자의 사회적 지위와 강의 내용, 참석인원 정도, 서울이냐 지방이냐 등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서 결정한다. 강연료를 얼마나 줄 것이냐는 강연을 개최한 기관의 판단 몫이다. 개최 당사자가 판단해 일반적인 수준보다 더 주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주최자가 국가나 공공기관인지 혹은 사기업인지는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강연료를 준다고 한다면 사회적 통념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누구의 강의도 모든 청중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누구에게는 감명을, 누구에게는 뜬구름 잡는 얘기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 새겨들어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19-06-16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

안재휘 논설위원영국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 그림자 내각)’ 제도의 시원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43년 전인 18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섀도캐비닛’이라는 말은 1907년 영국보수당의 A.체임벌린이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국의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저력을 유지해가는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섀도캐비닛’ 제도일 것이다. ‘섀도캐비닛’은 야당이 정권획득에 대비해 수상 이하 각 각료를 예정해 미리 정책을 연구하고 대안을 만들며 집권 준비를 하는 제도다.양당제가 발달한 내각제 국가라는 특성을 살려 야당도 총리를 비롯한 내각을 미리 정해 정책을 다듬어간다는 차원에서 정권 교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평소에도 정당 운영 자체가 ‘섀도캐비닛’ 중심으로 움직이는 만큼 자연스럽게 정당은 ‘정책 정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영국 정부는 야당의 ‘섀도캐비닛’이 정책 연구에 필요로 하는 정부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한다.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이 이제야 비로소 성립해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작금 심각한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바뀐 정권의 정책적 불안정성이다. 보수-진보 구조의 청백전 방식의 적대적 정치문화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에서 잦은 정권 교체로 인한 치명적인 정책 불안정성이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행착오 때문에 번번이 죽어나는 것은 국민이다.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야심만만하게 펼쳐온 적폐청산 드라이브와 온갖 이념정책들은 형언키 어려운 부작용들을 양산하고 있다. 부작용, 반작용들은 거의 전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닥치라 하고 달려가는 정책의 방향도 그렇거니와 검증되지 않은 탁상공론들이 마치 무슨 비법이나 되는 양 마구 펼쳐지는 바람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늘었다. 국민이 설익은 정책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결과는 참담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다.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정책 정당’으로의 변신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섀도캐비닛’ 제도를 원용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솔솔 나오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우리의 고질적 야당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일리가 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대선 전 ‘섀도캐비닛’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이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우선 ‘매관매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부터 펼친다. 불투명한 과거 정치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개연성이 전혀 없는 우려는 아니다. 그러나 제도가 가져올 편익을 좀 더 깊이 생각한다면 반대할 이유란 희박하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선진화할 수만 있다면 제도적 도입을 정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국민이 정당의 수권 능력을 미리 심층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섀도캐비닛’은 ‘무조건 반대’의 습성에 빠져 여론 선동에만 혈안이 된 우리 정치의 구태(舊態)를 개선해갈 여지가 분명하다. 걱정스러운 것은 제도적으로 도입을 하려고 하면 정부 자료의 야당 제공을 극도로 싫어하는, 승자독식 의식에 포로가 된 정부·여당의 몽니가 여지없이 작동할 것이라는 점이다. 야당 인사에게 자료를 제공했다간 곧바로 공무원이 치도곤을 당하는 세상이다.당장 제도화가 어렵다 하더라도 자유한국당이 ‘섀도캐비닛’ 콘셉트를 십분 활용해 ‘대안 정당’으로서의 역량을 구축하는 것도 괜찮은 지혜다. 사탕발림, 궤변이 뒤범벅이 된 선동정치의 망령으로부터 무구한 민심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도 ‘정책 정당화’ 작업은 시급한 과제다. 이 나라 국민들이 각종 연고에 집착하거나, 오만가지 포퓰리즘 선동정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정책’을 표심의 으뜸 척도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일을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진정한 ‘발상의 혁명’이 절실하다.

2019-06-16

약산 김원봉 행적에 대한 양면적 평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원봉(1898∼1958)의 서훈 문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얼마 전 임정 100주년 기념 토론장에 참석한 옆 자리 여고학생에게 김원봉의 서훈문제를 슬쩍 물어보았다. 의외로 그는 김원봉에게 서훈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의 항일 운동 업적을 보니 정부가 서훈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보수층에서는 북한 정권에 참여한 그에 대한 서훈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진보층에서는 그의 항일 애국 활동에 초점을 두어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그의 서훈 문제는 정부가 서훈 계획이 없다고 발표하여 일단락된 듯하다.차제에 김원봉의 행적에 관해 객관적 평가는 해볼 필요가 있다. 밀양 사람 김원봉은 1916년 18세 청년 나이로 일제에 저항하여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19년 길림에서 무정부주의적 의열단을 조직하고, 무한에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대장직을 맡았다. 그 조직이 1941년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초기에 장개석의 지원을 받았으나 결국 이 문제로 조직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1941년 무정과 최창익, 박일우 등 좌파는 화북의 팔로군에 가담하고 무정은 팔로군의 포병사령관이 된다. 1942년 김원봉은 의용군 일부를 이끌고 중경의 광복군에 합류하여 부사령관이 된다. 광복군 장준하, 김준엽도 중경임정에 합류하던 시기이다. 김원봉의 광복군 복귀는 매우 잘된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1945년 갑작스런 조국의 해방은 김원봉의 선택을 어렵게 하였다. 그는 1945년 12월 늦게 서울로 환국했지만 그에게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해방공간의 국내 정국이 김원봉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로부터 또 다시 수모를 당했다. 반민족특위는 유명무실해지고 이승만이 친일 청산의 의지마저 보이지 않자 그는 불만이 더욱 커졌다. 결국 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 문제로 어수선한 해방공간에서 그는 북쪽 정권을 선택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과 같이 평양 정치 협상회의에 갔다가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중경시절 비서 사모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에 가고 싶지 않지만 남한 정세가 나쁘고, 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의 월북이 자진이냐 납치냐 하는 논쟁은 불필요한 것이다.1948년 북한 정권 수립 후 김일성은 그에게 국가검열상이란 장관직을 주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광복군 출신 김원봉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2년 그는 노동상으로 발탁되고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우리의 국회부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도 맡았다. 그러나 그는 1956년 갑자기 실각되고, 1958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죄’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 청산가리 독살설, 자살설도 등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그가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은 6·25 전쟁 후 연안파 무정도 숙청하고, 친소파 거두 허가이, 남로당 대표 박헌영도 숙청했다. 그들은 모두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토사구팽당한 인물들이다.결국 김원봉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하의 암울한 청년시절, 의혈단과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고, 광복군에 합류하여 군무부장을 맡은 김원봉의 행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결코 폄훼되어서 안 될 부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 남한 정세에 대한 불만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10대에 항일운동에 나선 열혈청년 김원봉, 풍찬노숙하며 조국 광복에 매진했지만 해방 공간에서 그의 형제 4명은 남쪽에서 좌익분자로 몰려 처형되고, 그 자신은 북한에서 희생제물이 되었다. 민족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먼 훗날 남북이 하나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2019-06-16

반딧불이

반딧불이를 직접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도시에서 태어나 살아온 저는 40대 중반까지 반딧불이를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몇 년 전 미국 출장 길에 뉴욕 브루더호프 커뮤니티에 잠시 체류한 적이 있습니다. 저를 호스팅해 준 가족들과 어느 날 저녁 마을 인근을 함께 산책합니다. 5월 말로 기억합니다. 어스름 해가 질 무렵 들판 곳곳에서 갑자기 반딧불이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산책로와 인근 들판, 숲을 가득 메우는 장관이 펼쳐졌지요. 이 공동체에 도착하기 전에 들렀던 맨해튼 마천루 불빛들과 차원이 다른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옵니다.7세기 펴낸 중국 진서(晉書)에 반딧불이가 등장합니다. 동진 때 사람인 차윤(330~400)은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대단한 노력파였습니다. 집안이 가난한지라 밤에 등불을 켤 기름을 살 돈이 없었지요. 자윤은 낮에 흠뻑 빠져 읽던 책을 밤의 어두움에 막혀 더 이상 읽을 수 없는 상황이 속상했습니다. 돈 있는 집 자제들은 등불을 켜고 밤에도 마음껏 책을 읽습니다.차윤은 밤에도 책을 읽을 궁리를 하다가 반딧불이의 아름다운 야간 비행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지요. 명주 주머니를 벌레 통처럼 만들어 반디를 수십 마리 잡아넣고 거기서 나오는 빛으로 책을 읽습니다.반딧불이 축제로 유명한 무주에서는 1998년 재밌는 실험을 합니다. 형설지공 체험 현장 이벤트를 벌이고 무풍면 계곡에서 잡은 반딧불이 80마리를 1ℓ짜리 페트 병에 모았습니다. 이 불빛으로 1페이지 20자 정도가 들어가는 천자문 책을 너끈히 읽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페이지 당 한자(漢子) 200글자를 배열한 책도 훤히 읽을 수 있었지요.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차윤은 이부상서에 오르고 나중에는 상서랑까지 승진해 유능한 관리로 성장합니다. 진서에는 차윤과 손강의 이야기를 묶어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유명한 사자성어를 만들어냅니다. 여름에는 반딧불이 흐린 불빛으로 밤에 책을 읽고 겨울에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눈에 비친 달빛으로 공부하는 선비들의 치열한 배움의 열정을 빗댄 말로 후대에 큰 영감을 줍니다.열정은 절박함으로부터 나옵니다. 그 절박함을 채워주는 도구가 책이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들은 밤의 어둠과 추위와 궁핍을 책으로 이겨냅니다. 한결같은 배움의 열정이 우리를 흔들어 깨웁니다. 반딧불이의 작은 불빛은 거대한 LED 조명의 화려한 벽 같은 세상 앞에 쪼그라들며 나약해지는 생각을 죽비로 내리치는 참된 스승입니다./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16

태극기 그리는 방법

김현욱 시인2015년 7월 4일, 국세공무원교육원에서 9급 세무직 공무원 면접이 치러졌다. 일부 면접관들이 응시생들에게 ‘애국가 4절을 불러보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워봐라’, ‘태극기 사괘가 무엇이냐’ 등의 질문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해진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된 태극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참고로 가장 오래된 태극기는 ‘데니 태극기’다. 구한말 고종이 미국인 외교관 데니에게 하사한 것이다. 태극 문양이 조금 다르지만 색과 사괘까지 지금의 태극기와 거의 흡사하다.당시 공무원시험 정보를 나누는 인터넷 카페에서는 대체로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전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 속 국기 하강식 장면을 두고 ‘애국심’을 얘기했고, 당시 황교안 국무총리는 법무부 장관 시절 ‘애국가 4절을 완창’ 못하는 신임 검사들에게 ‘나라 사랑의 출발은 애국가’라고 질타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인사혁신처에서는 “스펙 위주가 아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인재를 선별해 뽑겠다”고 공언하면서 “적어도 공무원이 되려는 이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 국민에 대한 봉사의식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하긴, 2016년에 성인문해학교에 입학했던 예순의 어머니와 작년에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딸아이가 동시에 ‘태극기 그리기’와 ‘애국가 4절까지 외우기’ 숙제를 가져왔다. 한국에서 ‘배움의 출발은 애국가와 태극기’인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나라 없는 설움’을 당한 선조들에게 태극기와 애국가는 가슴 뭉클한 조국의 상징이고 울림이었을 것이다. 태극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882년 일본에서 발행한 ‘시사신보’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박영효는 고종의 명을 받아 태극기를 그렸는데, 그가 묵었던 숙소 고베의 니시무라 여관에 태극기를 걸어놓았다. 그것을 일본인 기자가 그려 신문에 게재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애석하게도 당시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는 국내에 없다. 그것을 2008년 영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한철호 교수가 국내에 소개했다. 태극이 회전하는 방향과 모양, 사괘의 색이 푸른색에 가까운 것이 지금과는 조금 다르다.고종이 태극기의 존재를 공표한 것은 1883년이다. 태극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우표를 활용했다. 1884년에 나온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에는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태극기는 중심에 위치한 원형의 ‘태극’에서부터 시작된다. ‘태극’이라는 말은 ‘주역’에 나온다.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를 ‘태극’이라고 한다. ‘태극’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형태와 의미에서 중국과는 다르다. 중국의 ‘태극도설’에 나온 태극은 동그라미가 여러 개 있고, 반으로 갈라져서 흑백으로 나누어져 있다.전남 나주 복암리 고분군에서 ‘태극무늬 나무상자’가 발견됐다. 관청에서 공문서를 받고 보낼 때 봉투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7세기 초 백제 사비시대 때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국 태극의 최초 기록보다 무려 400년이나 앞선다. 신라에서는 태극이 세 갈래로 갈라진 삼태극 모양을 많이 그렸다. 경주 미추왕릉에서 발견된 보검과 감은사지 장대석에 새겨진 게 삼태극이다. 한국 최초의 주자학자 안향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합호서원의 외삼문에 삼태극이 그려져 있다.태극기에서 하나의 괘는 세 개의 효가 모인 것이다. 하나로 이어진 것을 양효(陽爻), 나눠진 것을 음효(陰爻)라고 한다. 우리는 대자연의 원리를 담은 건곤이감(乾坤離坎)의 사괘를 사용한다. 세 개의 양효가 있는 ‘건’은 하늘, 세 개의 음효가 있는 ‘곤’은 땅, 가운데 하나의 음효가 있는 ‘이’는 불, 가운데 양효가 하나 있는 ‘감’은 물을 상징한다. 태극기를 그릴 때 ‘건곤’, 하늘과 땅이 만나는 대각선의 중심에서부터 그림을 시작해야 한다. 그 중심점을 기준으로 태극과 건, 곤을 그려야 한다. 오랜만에 태극기를 한 번 그려보면 어떨까?

2019-06-16

가토 기요마사

1562년에 나서 1611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 구마모토의 다이묘(大名)다. 우리한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침공해 들어온 적장으로 악명이 더 높다.원래 도요토미의 먼 친척이라 하며 그가 일본의 패권을 쥘 때 전공을 세우면서 유명해졌다 한다. 그건 일본에서 일이고 한국에 와서는 조선 사람 살상하는 일로 큰일을 했다. 듣자하니 얼마나 공을 세웠나 하는 것은 사람 목을 얼마나 벴나 하는 것, 머리를 베어 보내려면 부피가 크니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숫자를 셀 때까지 잘 보관되록 했다 한다. 제2차 진주성 싸움 때는 기어코 성을 무너뜨려 관군과 의병, 백성들 합쳐 6만 명이나 해쳤다 하니 그 잔인함을 가히 알 만하다.고니시 유키나가는 제1부대 선봉장이었지만 원래 기독교를 믿는 데다 장사꾼 출신이라 그런지 줄곧 화친을 도모했다 하고 애초에도 전쟁에 반대했다고도 한다. 그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이치. 서울에 들어올 때도 고니시가 먼저 들어온 것을 공을 다투려 애매하게 문서를 꾸려 본국에 보냈다 들통 나는 바람에 이를 드러낸 자와 원수지간이 됐다고도 하고. 함경도에 가서는 호랑이 사냥을 즐겨 ‘호랑이 가토’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도 한다. 그 용맹함이 곧 잔인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구마모토 현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기려 구마모토 성 아래 미유키 다리 옆에 ‘가토 공’의 흉상이 서 있고 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도 ‘가토 신사’까지 차려져 있다.이 가토가 그러면 임진왜란 중에 계속 그렇게 조선 사람 죽이는 일에만 신명을 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자신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도 같은데, 장덕산 대첩의 정문부 장군한테도 꽤나 혼났던 것 같고, 서생포와 울산 학성에 왜성을 짓고‘진지전’을 벌일 때는 우물이 없는 학성에서 명나라 군사와 조선 관군에 포위된 채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친 끝에 죽음의 그림자까지 느낄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한다. 그때 너무 혼이 난 바람에 오사카 성과 나고야 성에 이어 일본의 3대 성으로 이름난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파고 은행나무를 심어 비상시에 먹을 것으로 쓰게 하려고까지 했다니, 가히 알 만한 일이다.그래도 목숨 줄이 길어 조선에서 살아나가 나중에는 세상 떠난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쓰 편에 서서 복록을 누렸다 한다. 사세가 이미 기울었던 탓도 크겠지만 본래 머리 쓰는 사람들은 손바닥을 잘, 자주 뒤집는 법이다.같은 사람도 이곳에서는 악인이 저곳에서는 영웅이 되는 것이 세상의 어두운 이치다. 이번에 한국전통 시가 시조를 알리는 일로 바다 건너간 구마모토에서 뜻밖에 ‘명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기에 하는 생각이다. 그게 어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그렇던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정파마다, 세대마다, 이해관계 따라 참으로 위아래가 다르고 옳고 그름이 다르다. 안쓰러운 세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삽화 = 이철진한국화가

2019-06-13

구미시, 샴페인 터트리긴 아직 이르다

김락현경북부구미시 전체가 LG화학 구미형일자리 투자로 들떠있다.그럴만도 하다. 장기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역 경제에 모처럼 단비가 오는 격이니 들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철함을 갖고 사업추진에 빈틈이 없도록 해야한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리는 우를 범해선 안된다.지난 7일 구미시가 LG화학에 ‘구미형 일자리 투자 유치 제안서’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LG화학측으로부터 양극재 공장을 짓겠다는 의견을 전달받았긴 했지만, 아직 실무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6천억원에서 1조원 정도가 투자되고, 직·간접적으로 1천여명 이상의 고용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예측일 뿐,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바는 없다.투자 유치 제안서를 받은 LG화학측이 지난 11일 5공단에 대한 현장실사를 다녀간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미시와 지역 정치인들은 마치 모든 게 다 이뤄진 것인냥 자축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실제 LG화학측이 구미에 현장실사를 왔다가 시청 앞에 걸린 ‘LG화학 구미 투자 환영’이라는 수많은 플래카드를 보고 난색을 표한 것만 봐도 구미시가 너무 앞서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당시 LG화학 관계자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데 부담스럽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이 구미에 양극재 공장 투자를 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리지만 구미형일자리사업으로 봤을 땐 이제 사업에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다. 앞으로 해야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들뜬 기분을 가라앉히고 부지런히 바쁘게 일을 해야할 시기다.장세용 구미시장도 시청 직원들에게 들뜬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 것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시장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LG화학 투자는 구미형일자리 사업의 시작점이다. 구미형일자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역에서 완제품을 생산하도록 하는 것으로, 구미시는 이번 LG화학의 투자를 계기로 지역에서 전기자동차 완제품이 생산되도록 모든 역량을 모을 것이다”고 말했다. 장 시장의 말대로 구미시일자리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다.구미시가 이번 기회에 교육, 문화, 의료 등 기업이 원하는 정주여건을 잘 갖추기만 한다면 LG화학의 구미형 일자리사업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앞다퉈 구미에 투자하게 될 것이다.구미에서 전기자동차 완제품이 나오길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선 구미시가 신발끈을 바짝 조여매고 뛰어야 한다.kimrh@kbmaeil.com

2019-06-13

홍콩의 역대급 시위

박근혜 전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한창인 2016년 12월 우리나라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군주민수(君舟民水)였다. 군자주야 서자수야(君者舟也 庶者水也)에서 따온 말이다.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는 뜻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물은 배를 뒤집기도 한다는 순자 왕제 편에 나오는 말로 순자는 “임금은 이를 염두에 두고 위기가 닥칠 때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고 했다.그 해 교수회가 올린 사자성어는 박 전대통령의 국정농단을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로 교수의 지지를 받은 사자성어는 역천자망(逆天者亡)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천리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뜻이다. 천리를 따르는 사람은 흥한다는 순천자흥(順天者興)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노적성해(露積成海)와 “사람이 많이 모이면 하늘도 이긴다”는 인중승천(人衆勝天)도 후보로 올랐다. 특히 군주민수는 유교적 사상에 근거한 민본주의 사상을 잘 표현한 말로 임금도 백성의 뜻을 굽어 살피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어서 그 해 사자성어로 뽑혔다.모든 역사는 나라의 근본을 이루는 백성에서 시작된다. 역사는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렸을 때 가장 잘한 정치라 칭하고 당시 군주를 성군(聖君)이라 불렀다. 역사적 사실을 귀납해보면 역사는 사람의 의도대로 되지 않고 하늘의 뜻에 달렸음을 깨닫게 된다. 수많은 정치적 물음에는 백성이 항상 가운데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반정부 시위가 홍콩에서 벌어져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지난 9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 경찰과 충돌도 빚었다. 시위대는 홍콩정부가 추진 중인 범죄인 인도법안이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압박하고 홍콩의 자유를 위축하게 할 것을 우려한다며 반대에 나서고 있다. 홍콩의 시위는 미국 등 다른 국가에서도 지지를 보내면서 국제간 긴장도도 높아지고 있다. 홍콩 인구의 7분 1인 1백만 명이나 거리에 나선 홍콩인의 시위가 군주민수의 교훈을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19-06-13

추경예산 공방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야당인 자유한국당과 청와대·여당이 ‘시시비비를 알기힘든’ 일자리예산 공방으로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 야당의 주장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이다.정부여당은 통계청의 통계와 각종 경기지표 등을 제시하면서 추경예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예산 관련 토론회에서 야당 성향의 경제학 교수과 경제관료 출신 의원들을 앞장세워 “선거용 예산”이라며 강도높은 비판을 해댄다. 어쨌든 문제의 공방이 시작된 곳은 청와대부터다.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은 13일 오전 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야당에서는 늘 경제 파탄이니 경제 폭망 이야기까지 하면서 정작 추가경정예산(추경)은 안 해 주니까 답답하다”고 말했다. 정 수석은 이어 “미중 무역 갈등도 있고 대외 리스크가 점점 커지고 있는 데다 경기적으로도 하강 국면에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추경”이라면서 “추경 내용을 보면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들이 있고 수출기업에 대한 지원들도 있고 중소상인들에 대한 지원들도 있어 그야말로 경기 활력과 수출을 위한 예산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고 주장했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추경이라는 야당의 비판에 대한 반박으로 풀이된다.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와 보조를 맞춰 민생경제 회복을 위해 추경이 조속히 처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는 “산불·지진으로 피해 입은 주민, 미세먼지 없는 봄을 기다리는 주민, 미·중 경제전쟁 여파로 예고된 수출 먹구름, 경제침체에 직면한 위기의 자영업자, 중소기업, 청년 등 경제가 어렵다”면서 “적재적소에 정확한 규모로 타이밍을 맞춰 추경을 해야 한다”라고 밝혔다.이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이날도 경제전문가들과 함께 국회에서 ‘재해 및 건전재정 추경 긴급토론회’를 열고 이번 추경을 ‘선거용’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양준모 교수는 ‘추경 5대 불가론’을 펼치면서 추경을 반대했다. 미세먼지 등은 엄밀히 말해 추경 대상이 아니고, 추경의 고용 효과가 불분명하며, 선심성 사업이 다수 포함된 만큼 한국당이 추경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것이다.나경원 원내대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진단하는 ‘경제 실정청문회’를 열자고 주장했다. 옛 재정경제부 차관 출신인 김광림 의원은 이번 추경에 대해 자기 정권 유지를 위한, 내년 총선과 다음 대선을 위한, 포퓰리즘을 벗어난 ‘재정 퍼줄리즘’이라고 비판했고, 기획재정부 차관 출신인 추경호 의원 역시 “이 정부는 증세 아니면 빚더미에 앉는 길로 가고 있다”며 “결국 빚잔치하고 ‘먹튀’행태를 보일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돌이켜보면 이명박 정부시절 4대강사업 때도 정치권은 이처럼 여야가 확연하게 엇갈리는 주장으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4대강 사업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찬반으로 엇갈린다.필자의 견해로는 4대강 사업 자체는 훌륭한 국토개발사업이라 생각한다. 다만 5년이란 단기간에 전 국토를 갈아엎는 토목사업을 강행하는 바람에 일부 대기업의 주머니만 불렸고, 4대강 환경문제도 막지 못한 채 나라 곳간이 말라버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결국 중소건설업체들의 부도가 잇따르면서 나라경제가 위축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전례를 보면 정치권의 공방은 정답을 찾기 힘든 주장의 향연일 수 있다.어쨌든 요즘같으면 민초들의 주름살을 제대로 펴주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정부여당보다 경제정책의 선회를 주장하는 야당의 목소리에 좀 더 힘이 실릴 수 밖에 없다. 총선이 다가오니 ‘누가 옳고 그른가’보다 ‘누가 잘할까’에 관심을 갖게 되는 요즘이다.

2019-06-13

‘떠나감’의 미학

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국어교육과얼마 전의 일이다. 서로 살기 바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지인 한 명이, 간만에 대구에 들를 일이 있다며 차나 한잔 하자고 불러내었다. 오랜 만에 보았는데 대뜸 한다는 이야기가, 그 동안 지극정성으로 사랑한 남편이, 다른 여자가 생겨서 떠나가겠다고 선포를 하더라는 것이다. 애를 셋이나 낳아 애지중지 키웠더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냐며, 먹고 살만하니 그런다고 기가 막힌다며 하소연하던 그 앞에서, 나는 유자차 한 잔을 들이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고 살거라.”신경숙의 소설 ‘깊은 슬픔’에 나오는 구절이다. 한때, 사랑으로 인해 아파하고 슬퍼하던 많은 청춘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문구. 사랑하면 잡아둘 법한데, 왜 떠나보내라고 하는 것일까?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옛 고전 시가에도, ‘떠나감’을 받아들이지 못한 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떠나는 임을 향해 적극 매달리며 잡으려는 여성(‘서경별곡’), 서러운 마음 꾹 누르며 보내니, 가는 듯 다시 돌아오라며 여운을 남기는 여성(‘가시리’),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죽는 남편 따라 같이 죽는 여성(‘공무도하가’), 자신의 유혹을 거절한 채 갈 길 떠나는 남성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 여성(‘맏딸애기 노래’) 등.이는 비단 여성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문제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친구 사이 등 인간만사가 모두 떠나감-남겨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떠나감이 있으면 다가옴이 있고, 다가옴이 있다면 떠나감도 있는 법이다.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오롯이 내 것이기만 한 것이 어디 있었던가. 살면서 잠시 ‘내 것’이 되었던 것일 뿐. 죄다 이 세상에 살면서 잠깐 ‘빌린 것’들일 뿐이지 않는가 말이다. 인생사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것을. 헌데, 그것을 ‘내 것’이라 여기고 집착하고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룬다면, 이는 잠시 ‘빌린 것’에 스스로를 가두는 꼴이 아니고 무엇일까? 옛 여류 수필가 중, 1769년(영조 45년) 10월 13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김삼의당 부인이 있다. 그는 2살배기 셋째 딸을 잃어버리고 쓴 제문(‘哭第三女文’)에, 이렇게 적었다. ‘생이든 죽음이든 사람이 다 한번은 겪는 것이다. 수명이나 천명은 사람이 반드시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바이다. 대저 어찌하여 살면 기쁨이요, 죽으면 슬픔이 되는가.’라고. 그리하여 ‘나는 너의 죽음을 애석해 하지 않고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고.딸의 죽음 앞에서 이토록이나 담담하게 슬픔을 풀어낼 엄마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김 부인이 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많은 정이 쌓인 후 어느 날 아침 죽는다면 더욱더 아플 것이니 차라리 그 전에 죽어버린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역설을 통해, ‘떠나감’에 집착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를 보여준다. 누군가가 우리를 떠난다는 것은, 결코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다림’과 ‘절망’, ‘아픔’과 ‘슬픔’, ‘고통’과 같은 지독한 감정들을 겪고 난 후에 찾아오는 평온함, 그 속에서 ‘비움’을 채워갈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떠나감’의 핵심은, ‘떠나가는 주체’가 남겨진 자의 가슴팍에 아로새기는 상흔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주체’가 타자의 ‘떠나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간 스스로 집착하고 있던 것들을 떠나보내는 연습에 있다. 그 연습이야말로 다름 아닌, ‘떠나감’의 진정한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연습 과정은 비록 뼈를 깎는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할 지라도, 종국에는 스스로의 영혼을 성숙시키는 과정이자 언젠가 떠나간 빈자리를 채울 ‘새로움’을 위한 준비기간일 터이기 때문이다.

2019-06-13

폭증하는 외국인 유학생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한국대학 캠퍼스에서 외국인 유학생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 이제 한국의 어느 대학 캠퍼스를 가도 외국인 유학생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제 국내 대학의 외국인 유학생 수는 15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는 4년제 대학 기준으로 대강 캠퍼스당 1천명이 넘어선다. 유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들은 이미 이들의 숫자가 3천명을 넘어섰고 5천명의 유학생을 가진 캠퍼스도 있다. 일부 대학은 중국에 지점을 설치하고 유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불과 20년이 채 안된 1990년말 1만명을 넘긴 유학생숫자가 급증하게 된 계기는 지난 2004년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의 ‘대학 글로벌화’ 추진이 기폭제가 되었다. 국내 대학교 입학생 수 부족과 유학수지 적자 개선을 위한 방안으로 ‘Study Korea Project’를 수립했다. 이에 따라 국내 외국인 유학생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캠퍼스 글로벌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바람직한 현상으로 일단 받아들일 수 있다. 교육부의 2023년까지 외국인 유학생 유치 목표는 20만명이다.그러나 이러한 캠퍼스 국제화 실상을 들여다 보면 마냥 낙관적이지만 않다. 유학생의 90%는 아시아 국가 출신으로, 중국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체 유학생 중 절반 가량은 중국 학생이다. 얼핏 보기엔 ‘대학 환경의 글로벌화’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속사정은 다르다.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학교 차원의 배려나 정책당국의 해법이 미약하고 유학생 관리 제도는 사실상 방임되고 있다. 교육부와 학교의 관리 소홀로 외국인 유학생의 중도탈락률은 갈수록 늘고 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의 중도탈락률은 각각 5.0%, 6.3%, 6.6%로 증가세다.최근 교육부가 내놓은 ‘유학생 표준업무처리요령’은 유학생 선발 절차와 학업지도 등에 관한 업무처리를 표준화하기 위해 작성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제도를 제시하기보다는 추상적인 방향성만 권고하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선발·관리 절차는 대학의 자율에 맡기고 있다. 기본적인 시설만 갖추면 외국인 유학생을 받을 수 있다보니 질적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서울 소재 한 명문대학교는 학교 내 어학당을 졸업하고 한국어 시험만 통과하면 대학교 입학 자격을 준다. 따로 수능이나 입학시험이 필요하지 않다.대학들이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사활을 거는 까닭은 저출산으로 인해 대학 진학자가 급격하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결된 등록금으로 유학생 유치는 대학 재정에 절대 도움을 주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작 외국인 유학생의 관리에는 소홀하다.언어의 문제도 심각하다. 특히 명성이 낮은 대학에서의 문제점은 더 심각하다. 한국어 수준이 낮으니까 한국어 강의를 못 알아듣고 영어강의는 더 못알아 듣는 외국학생 특히 중국학생이 많다고 한다. 이들은 중국에서 대학을 실패하고 한국에 몰려온 케이스인데 대학들은 등록금 수입으로 받긴 하였지만 이들의 교육에 큰 골치를 앓고 있다.이제 유학생을 받아들이는 정책에 철학이 필요해 보인다. 등록금 동결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학들이 유학생유치에 의존하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리고 외국인 유학생은 한국홍보와 국제적 네트워크의 첨병으로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양적으로 팽창하는 유학생의 질이 관리되지 않는다면 이들은 고국에 돌아가서 한국유학생이란 타이틀로 한국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도 있다.현실에 입각한 외국인 유학생 관리 정책과 대학별 유학생의 질을 관리하고 올바른 교육을 시키는 자율적 정책이 조화를 이루어 조만간 20만명을 돌파할 외국인 유학생이 진정 그들에게도 그리고 한국에게도 도움이 되는 인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019-06-13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2)

에이미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하지요. “내 키가 굳이 167㎝일 이유가 무엇일까? 마음대로 키를 얼마든지 키울 수도 있어. 작은 사람과 데이트를 하게 된다면 줄일 수도 있지? 스노 보드를 탈 수 있다면 발이 하나도 시리지 않을 거야.”의족으로 사는 장점을 수없이 발견합니다. 마침내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지요. “내 삶이 한 권의 책이고 내가 그 책의 작가라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에이미는 상상합니다. 우아하게 걷는 모습, 세계를 활보하며 여행하는 모습, 스노 보드를 타는 자신을 실제보다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지요. 설원을 가로 지를 때 느끼는 세찬 바람, 흩날리는 머리카락, 미칠 것 같은 속도감을 심장이 쿵쿵거리며 반응할 때까지 치열하게 상상합니다. 그 연습이 에이미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4개월 후, 에이미는 다시 스노 보드를 탈 수 있었으니까요.일을 시작하고 대학공부를 시작합니다. 2005년에는 비영리단체 ‘어댑티브 액션 스포츠(AAS)’를 설립해 장애를 겪고 있는 청소년들이 스포츠 활동으로 삶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습니다. 2015년에는 ABC방송의 ‘댄싱 위드 더 스타’에도 출연합니다. 정상인들과 춤을 겨뤄 결승까지 진출하지요. 놀라운 에이미의 춤 솜씨에 미국이 열광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에이미의 트위터에 응원의 글을 남깁니다. 2018년 2월 평창의 장애인 올림픽에서는 스노 보드 여자 크로스 경기에서 은메달을 따냅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도 출연하지요.책에 사용할 스토리를 개발할 때 작가로서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주인공을 절망의 상황으로 빠뜨리지요. 예를 들면 경청에서는 이토벤이, 쿠션에서는 한바로가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인생의 장벽을 만나도록 설정합니다. 해결책을 미리 생각하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절망 그 자체로 주인공을 몰아갑니다. 작가로서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 함께 고민합니다. 실제로 작품의 캐릭터들과 대화도 수없이 주고받습니다. 에이미가 그랬던 것처럼 생생하게 주인공의 눈빛, 표정, 동작, 옷의 감촉까지 느끼면서 상상으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려 몸부림 칩니다. 하나의 질문이 에이미의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그 질문을 모두에게 던져봅니다.“당신의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그 책의 작가라면 당신은 그 책에 어떤 스토리를 담고 싶으신가요?”/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13

가업상속공제

가업상속공제는 가업을 이어받는 사주의 자녀에 대해 상속세를 줄여주는 제도로, 10년 이상 경영한 중소기업이나 매출액 3천억 원 미만 중견기업을 상속할 시 가업상속재산가액의 100%(최대 500억 원)를 공제해 주고 있다.100년 장수 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1997년 도입된 이 제도는, 도입 당시에는 공제 한도가 1억 원이었다가 2008년에는 30억 원, 2012년에는 300억 원, 2014년에는 500억 원으로 확대됐다. 상속재산 공제액은 가업 영위 기간이 10년 이상은 200억 원, 20년 이상은 300억 원, 30년 이상은 500억 원이다. 공제 혜택을 받는 기업은 중소기업으로 제한됐다가 2013년부터는 매출 2천억 원 이하 중견기업으로, 2014년에는 3천억 원 미만 중견기업으로 범위가 확대됐다.이 제도에 따라 상속세를 공제받을 경우 상속인은 10년 동안 휴업·폐업, 업종변경, 가업용 자산 20% 이상 처분 등이 금지되며, 지분과 고용을 100%(중견기업은 120%) 유지해야 한다. 이 제도에 대해 기업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매출액 한도를 확대하고 10년으로 규정돼 있는 사후관리 기간을 단축시키는 등 규제를 완화하자는 주장과, 가업승계에서 세금을 과도하게 면제해 부의 세습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그러나 현 정부에서는 규제를 완화하자는 분위기다.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업상속세제 개편방안 당정협의에서 “업종변경 허용범위도 표준산업분류상 소분류에서 중분류까지 크게 확대해 급변하는 경영환경 변화에 보다 유연하게 대응하고자 했다”면서 “10년의 사후관리기간을 7년으로 단축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또 자산의 처분도 보다 넓게 허용하고, 중견기업의 고용 유지 의무도 중소기업 수준으로 완화할 전망이다.다만 정부는 탈세, 회계부정에 따른 처벌을 받은 기업인에 대해서는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배제토록 했다. 나름 균형을 잡으려 노력한 흔적이지만 부의 세습을 막기에는 이미 구멍이 너무 커져버린 것은 아닐 까 싶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19-06-12

대학은 어쩌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대학이 많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와 함께 저조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그 여파는 대학의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인구 감소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자 숫자가 가파르게 줄어들면서, 2018년부터 이미 대학모집인원에 비해 졸업생 숫자가 적게 되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견되어 왔다. 최근 국가 교육통계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21년 대학입시에서 대입정원이 고졸자 수를 9만 명이나 초과할 것이라고 한다. 어림잡아 거의 백 개쯤 되는 대학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경상북도는 특히 심각하여, 입학정원이 고졸자 숫자의 거의 두 배에 달할 것이라 한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인구감소 현상이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대학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대학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우리 정부는 대학을 국가교육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아 교육부가 대학의 교육과정과 재정운영에 깊이 관여해 왔다. 대학으로 보면 정부가 간섭도 하고 모니터링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므로 이를 감수하면서 교육에 임해오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개별 대학의 존재 이유와 독특한 개성들은 사라지고 학문의 전당이어야 하는 대학들이 거의 모두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들이 제각기 특수한 교육이념과 철학, 개성있는 학문적 특성을 살려 가면서 대학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학풍, 전통과 긍지를 만들어 내는 다른 나라의 대학들과는 매우 다른 ‘대학가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추격과 모방’을 기저로 하는 개발모형에는 매우 효율적인 접근이었겠으나, 21세기 ‘창의와 혁신’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지식정보사회에는 매우 어색한 대학 분위기인 것이다. 정부가 대학을 잊어야 한다. 이제는 손을 떼어야 한다.대학은 어찌해야 하는가.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을 것으로 기대되는 대학의 미래는 대학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교육, 연구, 봉사 모든 면에서 다 잘 해야 하고 하나같이 평가하는 일률적 대학평가모델을 벗어내고 각자 무엇에 강한 대학이 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교육에 강한 대학과 연구에 튼실한 대학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지역사회와 호흡하겠다는 대학이 있어야 하고 평생교육에 능수능란한 대학도 만나보고 싶다. 한 가지 잣대로 모든 대학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대학(大學)이 ‘큰 배움’인 까닭은 총체적으로 볼 때 그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배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문사회와 자연이공계, 그리고 예술문화 분야에 각각 튼실하고 강한 대학들이 나와야 하고, 지역마다 그곳의 분위기에 걸맞는 대학들이 일어나야 한다. 정부의 결정에 그 운명이 좌우되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 기댈 언덕은 없다.그 같은 변화가 하루아침에는 어려울 터이다. 하지만 정부도 대학도 이제는 변해야 하는 조짐을 읽고 이제라도 과감히 새로운 대학교육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대학마다 핵심역량에 집중해야 하고 각자의 대학브랜딩(University Branding)에도 나서야 한다. 교육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살펴야 하며 어떻게 특화할 것인지도 찾아내어야 한다. 대학마다 느껴지는 품격과 분위기가 달라야 하며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도 모두 달랐으면 한다. 그런 곳을 통과한 젊은이들이 제각기 갈고닦은 식견과 소신으로 미래 사회에서 만날 때에 진정한 겨룸과 속 깊은 나눔으로 우리 사회를 움직여 갈 역동성이 솟아나지 않을까. 획일성은 이제 추구할 가치가 아니다. 다양성의 늪에서 진주를 건져낼 다짐으로 우리 대학을 키워가야 한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모두 다른 듯 하여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역시 이끌고 움직여 가는 그 ‘한마당’이 대학이 되어야 한다.

2019-06-12

소 도살은 엄벌…조선 정조대왕 때에야 고기 문화 시작

이른 새벽이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의 목소리. “쟈, 오늘 먼 길 가는데 콩대도 좀 넣고. 여물 잘 끓여서 멕여라.” 아버지의 대답. “예, 그러잖아도, 콩대 마이 넣고, 보리쌀도 쫌 넉넉하게 넣니더.”1960년대 후반 어느 겨울 새벽, 외양간에는 누렁이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의 마지막 식사. 우시장에 팔려나간 누렁이는 도살장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오백 원 지폐 한 뭉치와 어린 송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셨다.소는 식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경(牛耕). 농사의 주요 도구였다. 겨울철, 송아지는 열심히 먹고 몸을 불린다. 봄철, 얼마쯤 자란 송아지는 코뚜레를 꿴다. 일할 준비를 한다. 한 해 동안 일하고 몸을 불리며 송아지는 점점 자라 슬슬 소의 모습을 갖춘다. 더러는 겨울을 넘기고 이듬해에도 우리 논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겨울날의 어느 이른 새벽, 다 자란 소는 마지막 식사를 하고 우시장으로 향했다.한반도 소의 역사는 길다.소는, 농가의 ‘가족’이었다. 황소는 20인분의 일을 해낸다. 장정 몇이 파내지 못하는 큰 돌을 소는 쟁기질 한 번으로 뽑아낸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를 농사의 도구로 이용했다. 이밥에 고깃국은 우리 민족의 소망이었다. 남쪽은 1970년대에 이루었고, 북쪽은 아직도 ‘소망’으로 남았다.농경민족이다. 부여, 고구려 등 기마, 수렵민족의 피를 물려받았으나 한반도로 들어온 우리 선조들은 농경(農耕)을 업으로 삼았다. 고기를 도축하고, 먹는 북방 수렵민족의 피는 희미해졌다. 10세기 말, 북방의 기마, 수렵민족이 한반도에 나타난다.눌재 양성지(1415~1482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고, 많은 서적, 기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 도살’을 금하자는 양성지의 상소문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1456년(세조 2년), 1467년(세조 13년), 1469년(예종 1년)이다.소 도살은 심각한 문제였다.더 큰 문제는 상황이 점점 나빠진다는 점이다. 양성지는 십수 년 동안 여러 차례 ‘소 불법 도살 문제’를 엄중하게 제기한다. 그동안 양성지는 집현전 직제학, 대사헌, 공조판서 등으로 관직도 달라진다.1456년 3월, 양성지의 상소문이다. 제목은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 오경, 문묘 종사, 과거, 기인 등에 관한 상소’다. 긴 내용을 인용한다.“(전략)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단(韃靼)’ (중략)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중략) 지금 오래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중략)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중략)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중략)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 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중략)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백정, 소를 도축하는 이들은 누구인가?이름이 여럿이다. 화척, 재인, 달단, 백정 등이다. 하는 일은 무엇인가? 농사를 짓지 않으니 소를 도축한다. 일거리가 없으면 동냥질, 도적질에 나선다. 언제 한반도에 왔는가? 이미 내륙 혹은 국경 언저리에 있었다. 거란이 침입하니 앞잡이가 되어 거란의 고려 침공을 돕는다. ‘전조(前朝)’는 고려다. 거란의 1차 고려 침략은 993년이다. 양성지의 상소문과 비교하면 460여 년 전이 일이다. ‘오래된 자는 5백 년’이란 표현이 맞다. 지금으로 치자면 1,100년 전이다. 한반도에도 북방 유목민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고기 문화를 한반도에 전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년)이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고기 다루는 솜씨가 허술하다”라고 한 것은 1123년 무렵이다. 거란의 고려 침입 130년 후다. 여전히 한반도의 우리 선조들은 고기 다루는 솜씨가 늘지 않았다. 생활 습속이 다른 이민족은 고기를 도살하고 먹었지만 고려, 조선은 이단시한다.양성지가 상소문을 올린 조선 초기에는 이들이 사회 문제였다. 화척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산다. 결혼도 자기들끼리 한다. ‘강원도, 경상도’에 산 것은, 이 지역이 태백산맥 산악지대이기 때문이다. 산에는 짐승이 있다. 할 일이 있다. 외부에서 관군이 오더라도 버티기 쉽다. 거꾸로 관군들은 이들을 쫓기 힘들다. 차라리 깊은 산속에 사는 것이 낫다. 한양이나 대도시에 나타나면 불법 도축하고 사회적으로 말썽을 일으킨다.조선 정부는 이들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고 농사에 편입되기를 기대한다. ‘농상’은 농사짓고, 뽕나무 기르며 누에 치는 삶을 뜻한다. 화척들은 호락호락 조선 사회에 편입되지 않는다.‘달단(韃靼)’은 ‘가죽을 잘 다루는 종족’이라는 뜻이다. 달단은 ‘타타르(tatar)’ 혹은 ‘타르타르(tartar)’ 족이다. ‘타타르 스테이크’는 날고기로 만든 스테이크다. 우리의 육회와 닮았다. 타타르 족은 터키, 동유럽 등으로 이주한다. 유목, 기마, 수렵민족이다.1467년(세조 13년) 1월, ‘대사헌 양성지’가 또 상소문을 올린다. 제목은 ‘농우 도살 금지에 관한 상소문’이다.(전략) 남산의 소나무는 진실로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설혹 없다손 치더라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중외(中外)의 소[牛畜]는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데 자산(資産)이 되니,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중략) 곡식을 생산하는 소가 없다면, 곡식을 들여다 저장하는 창고가 있더라도 이를 장차 무엇에 쓰겠습니까? 옛날에는 백정(白丁)과 화척(禾尺)이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경외(京外)의 양민(良民)들도 모두 이를 잡으며, 옛날에는 흔히 잔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소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 안에서 판매하기 위하여 이를 잡고, 옛날에는 남의 소를 훔쳐서 이를 잡았으나, 지금은 저자에서 사서 이를 잡습니다. 백정은 일정한 수(數)가 있으나 양민은 그 수가 무한(無限)하며, 잔치는 일정한 수가 있으나 판매하는 것은 끝이 없으며, 남의 것을 훔쳐서 잡는 것은 일정한 숫자가 있으나 소를 사서 잡는 것은 무궁(無窮)하니, 일정한 수효가 있는 소를 무궁한 날에 끝없이 잡는다면, 반드시 남산의 소나무와 같이 다 벤 다음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날에는 소를 잡는 도적[宰牛賊]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거골장(去骨匠)’이라 칭하고, 여염(閭閻)의 곳곳에 잡거(雜居)하면서 소를 잡아도 대소(大小) 인리(隣里)에서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중략) 무릇 소를 잡은 사람은 (중략) 수종(首從)을 가리지 말고 모두 다 즉시 사형에 처하되, 그 처자(妻子)와 전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고, 소를 잡는 것을 고(告)한 자는 재산(財産)으로써 상(賞)을 주되( 후략)살벌하다. 소를 불법 도축하면 주범이든 종범(從犯)이든 사형이다.신고하면 범인의 재산을 신고자에게 준다. 남산의 소나무가 없어지듯이 조만간 소가 씨가 마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전히 불법 도축은 사라지지 않았다. 소 잡는 도둑, ‘재우적’이라고 하더니, 드디어 소 잡는 장인, ‘거골장’이라고 한다. 민간인까지 소 불법 도축에 나선다.1469년(예종 1년) 6월, 다시 양성지의 상소다. 더 절박하다.우선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말하더라도 양수척(楊水尺)이라는 것은 전조(前朝)의 초기에 있었는데, 강도(江都) 때에도 또한 있었으며, 재인(才人)과 백정(白丁)은 충렬왕(忠烈王) 때에 있었는데 공민왕(恭愍王) 때에도 있었으므로, 먼 것은 5, 6백 년, 가까운 것은 수백 년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 현가(絃歌)의 풍습과 재살(宰殺)의 일은 지금까지도 고치지 않았으며, (후략)양수척은 고려 초기에 이미 있었다. 후삼국 시대에도 있었을 것이다. ‘강도’는 강화도로 천도한 고려 왕조를 이른다. 소를 도축하는 이들은 화척이었다. ‘현가의 풍습’이라고 못 박았다. ‘현가’는 거문고 타고, 노래 부른다는 뜻이다. 광대, 재인, 기생 등이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추정도 있다. 농사짓는 소를 도살하며, 무리 지어 노래 부르고 논다. 일은 하지 않는다. 조선 왕조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한반도의 쇠고기 문화는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조선 후기인 정조대왕 시절에야 고기 먹는 문화가 서서히 정착된다. 무려 300여 년 후다.그동안 소의 불법 도살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살은 늘어났다. 거꾸로 법 적용이 느슨해졌다. 양성지는 “소가 어느 날 남산의 소나무같이 없어지리라”고 경고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국왕 정조대왕부터 신하들과 고기 굽는 불판 앞에 앉는다. 난란회(煖暖會) 혹은 난로회(煖爐會)다. 한반도의 고기 문화는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2019-06-12

천안문 사태 30주년을 생각하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지난 6월 4일은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지 30주년 되는 날이다. 1989년 6월 4일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언론자유, 법치주의, 사상해방 및 민주화를 요구하던 100만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인민해방군이 무차별적으로 발포함으로써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1990년 중국정부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희생자는 민간인사망 875명, 부상자 1만4천550명, 군인사망 56명, 부상자 7천525명이었다. 현대중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비극적인 사건이 천안문 사태다.천안문은 명-청시기에 국가의 주요 법률이나 명령을 공표하던 장소로 출전과 개선하는 군대를 황제가 맞이하던 장소였다. 천안문은 천명을 받들고 하늘을 섬겨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백성을 다스린다는 ‘수명우천 안방치민(受命于天, 安邦治民)’에서 유래한 것이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장소가 천안문이었고, 인민해방군 열병식이 거행되는 곳도 천안문이다. 이런 천안문에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학살이 자행된 것이다.천안문 사태는 복합적인 요인으로 발생한다. 대약진운동(1958∼1960)의 실패로 권력상실의 위기에 몰린 모택동이 추진한 문화대혁명은 숱한 모순과 파탄을 경험하면서 10년 만인 1976년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모택동의 뒤를 이은 화국봉(華國鋒)은 모택동 사상을 국가의 기본 정강으로 설정하면서 체제유지에 몰두한다. 문화대혁명으로 박해와 탄압을 받은 공산당 원로들은 화국봉을 비판하고 등소평을 전면에 내세워 권력지반을 다져 나간다.실사구시(實事求是)와 사상해방을 내세운 등소평은 1982년 개혁적인 인물 호요방(胡耀邦)과 조자양(趙紫陽)을 총서기와 총리로 세우고, 자신은 중앙군사위 주석에 오름으로써 정권을 장악한다. 실질적인 등소평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등소평은 농업, 공업, 과학, 기술의 4대 현대화를 주창하면서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설파한다. 검은 고양이든 하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지극한 실용주의 노선이다.오늘날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상품경제를 대거 도입함으로써 중국 현대화를 주도한 인물이 등소평이다. 그는 1985년 이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선행하는 개혁개방 정책을 담대하게 구체화한다. 중국의 신경제정책은 연평균 11%의 경이로운 성장으로 결실을 맺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와 도시내부의 빈부격차가 그것이다.평등을 최우선 가치로 인식하는 사회주의 체제에서 소득격차는 체제에 대한 불만을 야기했고, 실업문제와 인플레이션은 그것을 가속화한다. 텔레비전과 개방정책으로 서방세계의 생활과 정치의식에 노출된 중국인들은 정치적 변화에 대한 소망을 품기 시작한다. 정치적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태동한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공산당을 통한 개혁과 개방만이 유일한 방도라고 확신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정치개혁과 변화요구에 소극적으로 임한다.이런 상황에서 1986년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시위는 1989년에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개혁파 지도자 호요방의 실각과 급사(急死), 조자양의 가택연금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발생한다. 동시에 등소평의 충실한 하수인인 이붕(李鵬) 총리와 양상곤(楊尙昆) 같은 보수파가 천안문에 모인 시민과 학생들을 향해 총포를 난사함으로써 천안문 사태가 촉발된다. 중국판 ‘피의 일요일 사건’은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적인 변곡점을 매개로 발생한 것이다.천안문 사태 30주년을 맞아 중국정부는 검열과 사상통제를 강화했다고 한다. 세계 시민들은 중국의 비극적인 사건을 성찰하면서 진상규명과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요구하고 있다. 천안문 사태와 같은 비극은 결코 반복되면 안 된다. 이것이 천안문 사태의 교훈이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근본 목적이다.

2019-06-12

누가 돌을 던지나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물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뭔가를 쓰고 있다가 그들이 자꾸 다그치자 일어나서 “너희들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앉아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그 말을 듣고는 양심의 가책을 받아 여자를 끌고 왔던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여자 혼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예수는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여자가 없다고 하자 “나도 너를 정죄(定罪)하지 않겠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했다.이상은 기독교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자는 매춘부인가 본데, 아마도 당시에는 매춘에 대해서 모세의 율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매춘부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은 일이고, 용서를 하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라는 것인즉 예수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문재인 정권은 시작부터 ‘적폐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다. 지난 정권을 적폐로 규정하고 전 대통령들을 비롯하여 국정원장, 장관, 검찰청장 그리고 대법원장과 재벌총수들까지 온갖 꼬투리를 잡아 처벌하는 청산(?)을 단행했다. 적체된 폐단을 일소하겠다는 명분이야 그럴듯하지만, 문제는 그 적폐를 규정하고 척결하는 주체가 누구이고 어떤 잣대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외계인들이 와서 하는 일이 아닐진대,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몰고 처단을 하는 지에 대한 논란이 없을 수가 없다.소위 ‘촛불혁명’ 세력의 지지와 성원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원래가 41%의 득표로 탄생한 정권인데다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다시 과반수 이상이 찬성을 하지 않는 정권이니 그것을 절대적인 명분이랄 수는 없는 일이다.더구나 지금처럼 좌우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대립이 첨예한 시국에선 한 쪽의 주장이나 명분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고 대립과 갈등의 골을 더 깊게 하게 마련이다.좌파들이 장악한 정부에서는 우파정권의 행위들 거의가 적폐로 보일진대, 나중에 우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면 지금 좌파정권의 적폐청산 행위 역시 적폐로 몰릴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나라의 모든 부서와 기관은 물론 언론과 여론까지 장악을 하려고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는 예수의 심판이야말로 적폐청산의 전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적폐청산은 지난 일들을 모조리 들춰내어 저들의 잣대로 재단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정권의 적폐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제부터는 폐단을 짓지 않겠다는 결의와 다짐을 실행하는 일이다.과거청산을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준 지도자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만델라 대통령을 들 수 있다. 반정부 투쟁을 하다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고 27년간이나 옥고를 치렀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청산’을 단행했다. 지난 시절 인권차별 반대투쟁을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들도 잘못을 뉘우치면 사면하는 정책으로 흑백간의 오랜 갈등과 충돌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것이다.그와는 반대로 저들이 마치 정의의 사도인 양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둘러 상대를 적폐로 몰아가는 이 정권의 오만과 독선은 도를 넘은지 오래다.

2019-06-12

삶이 한 권의 책이라면 (1)

라스베이거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가 있습니다. 꿈 많은 십대에 소녀는 삶을 뒤 흔드는 질문을 만납니다. “만약 인생이 한 권의 책이고 당신이 그 책의 작가라면 당신은 그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은가요?”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라는 책에 눈(snow)이 들어가는 설정을 꿈꿉니다.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보지 못한 삶이 싫었습니다. 자유를 찾아 전 세계를 여행하고 진기한 경험 가득한 스토리를 쓰고 싶어하지요.스무 살이 된 에이미 퍼디는 꿈에 한 발짝 다가섭니다. 눈 많은 솔트레이크로 이사를 간 겁니다. 마사지 치료사가 되지요. 두 손과 마사지용 간이 침대만 있으면 어디서든 돈을 벌 수 있었고 스노 보드를 맘껏 탈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인생에서 주인이 된 기분을 느낍니다.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자유로웠습니다.감기 기운이 있어서 조금 일찍 퇴근한 어느 날 오후. 에이미는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산소 호흡기를 달고 생명 유지장치를 매단 채 중환자실에 누워있습니다. 의사들이 원인을 찾기 위해 숨가쁘게 움직입니다. 위급한 알람이 생명 유지장치의 모니터에 울려 댑니다. 데이터가 보여주는 생존 확률은 2%. 사투 끝에 원인을 찾아내는데 성공합니다. “박테리아성 뇌수막염.”이제는 치료를 위한 전투를 시작합니다. 에이미는 싸움에서 승리했고 목숨을 지켜내지요. 두 달 반의 투쟁 결과는 참담합니다. 비장과 신장을 잃었고 한쪽 청력이 사라집니다. 무릎 아래를 절단합니다. 퇴원하는 날 휠체어에 앉아있는 그녀는 조각조각 이어 붙인 누더기 인형과 다르지 않았습니다.며칠 후 에이미는 사투를 벌일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금속 덩어리 차디찬 종아리. 볼트로 죈 파이프 발목. 노란 고무 발. 두툼한 의족을 신고 일어서 본 에이미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에 사로잡히지요. 고통스럽고 부자유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생각합니다. “이 못생긴 의족을 신고 앞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모험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한 삶을 이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스노 보드와는 영원히 이별해야 하는 걸까?”삶의 이유와 소망을 잃어버린 에이미는 무기력에 빠집니다. 침대만 파고 듭니다. 자고 먹고 또 자고. 고통을 잊기 위해 잠에 빠져듭니다. 의족을 침대 곁에 세워 둔 채로. 괴물같은 저 의족을 신고 세상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내일 계속)/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

2019-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