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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SNS 사용 금지될 호주 청소년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모두가 유행에 따라 비슷한 춤을 추고, 이른바 ‘맛집’에 방문한 걸 사진으로 찍고, 새로 산 수영복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걸 SNS(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업로드 한다. 동양과 서양이 다르지 않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 SNS엔 고만고만한 자기 현시와 구걸에 가까운 ‘구독해주세요!’ ‘알림 설정해주세요!’라는 문구가 창궐 중이다. 이런 세태는 중반으로 달려가는 21세기를 특정 짓는 독특한 풍경이 됐다. 10대 초중반 아이들의 장래 희망도 바뀌었다.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타자에게 주목받으며, 돈까지 벌 수 있는 인플루언서를 꿈꾼다. 현실에서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인터넷 공간에 삶을 의탁해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철학과 세계관이 정립되기 전인 10대들에게 이게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일까? 호주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최근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방송에 출연해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SNS의 사용에 연령 제한을 두려한다”고 했다. 호주 야당 역시 ‘SNS 사용 연령 제한’에 공감하고 있으니, 향후 14~16세를 넘지 않은 호주 청소년은 SNS 사용을 할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지난 4월 시드니 한 교회에서 16세 청소년의 흉기 테러가 일어났다. 그 소년은 극단주의 단체가 운영하는 SNS를 통해 활동했다. 비단 흉악한 테러 행위만이 아니다. 호주 정부는 청소년들의 SNS 중독이 폭력과 혐오, 성의 상품화 등을 불러온다고 보고 있다. “골방에서 SNS에만 빠져 있는 게 아닌,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 말하면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틀딱’이라 손가락질 받으려나?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9-11

돌려막기와 짧은 시각

장규열 고문 의료대란은 자칫 국가적 위기가 될 판이다. 당장 코앞에 닥친 추석명절을 어찌 넘길까 걱정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다음이 더 문제다. 이미 시작된 대입 수시지원은 증원된 의대정원을 기초로 발진하였다. 내년에 의과대학 교육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인지 아무도 자신이 없다. 집단이 아니라 모두 개인적인 결정에 따라 떠나버린 전공의들은 돌아올 기약이 없다. 허리가 텅 비어버린 대학병원들은 전문의 교수들에게 모든 업무적 부담이 안겨졌다. 환자들은 본인 증상의 경중을 헤아릴 길이 없으며, 아픈 사람들이 급하면 모두 응급실로 향한다. 정부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 탓을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측은 누가 보아도 정부가 아닌가. 의료대란은 짐짓 국가위기가 되어간다. 사정이 급해진 정부는 전공의들이 비운 자리에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을 파견하였다. 공보의는 의료환경이 낙후한 지역 마을에서 주민들의 필요를 돌보던 이들이다. 공보의가 떠나면 마을의 보건과 의료는 누가 맡아야 하는가. 이미 전국의 시골 마을에는 ‘외지로 파견된 의사선생님’이 안 계셔서 지역보건에 공백이 생겼다. 군의관은 어떤가. 국방을 맡은 부대병력을 위한 의료에 구멍이 생긴다.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를 ‘의사 돌려막기’로 해결하려는 발상이 우선 건강하지 못하다. 간호사법을 통과시켜 의사를 도와야 할 인력으로 빈자리를 메우려 했던 일도 같은 맥락의 발상이 아니었을까.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전공의들이 상실감없이 돌아올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에 세심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정책입안에 긴 안목이 필요하다. 의사 돌려막기를 비롯한 정부의 정책발표에는 국가의 보건정책과 의료행정을 바라보는 짧은 시각이 엿보인다. 당장 추석명절을 어떻게 넘길까 노심초사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보건은 그보다 훨씬 긴 안목을 필요로 한다. 의료임상 뿐 아니라 의학교육까지 엮이고 보니 적어도 백년은 내다보는 장기적 포석이 있어야 한다. 짧게는 내년에 의과대학에서 벌어질 교육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추석에 응급실을 찾는 국민에게 높은 의료수가를 적용하겠다는 발상도 그 시선이 짧다. 그 다음엔 어찌 하겠다는 것인지. 국민과 나라의 긴 미래를 놓고 고민하는 공직자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행정을 다루는 관료의 시각과 지평은 길고도 넓어야 한다. 의료임상의 현장과 의대교육의 체계를 겨우 본인의 임기에만 연동시키는 공무원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나라가 잘 되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정부가 임기 5년을 훌쩍 넘는 장기적 안목과 너른 정책적 시선을 발휘해야 한다. 짧은 시선과 좁은 시야로는 국가를 순조롭게 이끌면서 국민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도리가 없다. 정부보다 오히려 긴 안목을 지닌 국민을 납득시키고 설득해 낼 재간이 없다. 가히 국가적 위기로 치닫는 의료대란 앞에 겨우 돌려막기와 짧은 시각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방도가 없다. 의료개혁으로 지방의료와 필수의료를 일으키려던 초심을 기억해야 한다. 당면 문제는 정면으로 응답하고 해결해 가면서 긴 시각과 넓은 시야로 오늘의 의료대란을 풀어내는 혜안을 만나고 싶다.

2024-09-11

맨발걷기 하면 좋을까?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강변에 나가서 운동을 하거나 산책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맨발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처음엔 신발을 신고 빨리 걷거나 뛰는 것이 더 나은 운동이 아닌가라는 개인적인 생각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남들이 뭘 하든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다양한 운동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암 관련 치료 사례들이 모인 카페에서 많은 치료 사례와 후기와 함께 많은 건강법과 다양한 운동법을 접하는데 여기서 꼭 나오는 운동법이 맨발 걷기였다. 난치병 환자들에겐 꼭 해야 하는 바이블과 같은 기본 운동으로 기적의 운동처럼 여겨졌다. 이에 맨발걷기에 대해서 유튜브나 구글 검색 등으로 알아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운동으로 보여 직접 해보았다. 부드러운 흙길을 가는 것이 기본이다. 맨발걷기를 하면 발이 지면과 맞닿게 되는데 땅이 거칠고 마르면 처음 하는 사람들은 발바닥이 생각보다 아프다. 오래 한 사람들은 신발을 신은 것과 비슷하게 휙휙 지나가지만 처음 하면 발바닥 통증이 생각보다 심해 빨리 걷지를 못한다. 30분이면 걷는 길을 1시간 가까이 걸려 겨우 걷고 나서 느낀 점이 생각보다 운동이 많이 된다였다. 발 전체가 욱씬욱씬 하면서 꽉 찬 느낌이 들고 혈액순환이 잘되는 느낌을 받았다.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는 다르게 지압효과와 더불어 발바닥과 발전체에 혈액순환이 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익숙해져 이걸 3시간 4시간씩 한다면 건강에 큰 도움이 되리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맨발걷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암이나 류머티스 고혈압 당뇨 등 난치병이나 잘 낫지 않고 오래 묵혀놓은 성인병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체험담을 들어보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첫째 잠이 잘 오고 푹 잔다고 말한다. 둘째 몸에 염증이 많아서 이곳저곳 많이 아팠는데 맨발 걷기를 하고 나선 몸의 염증이 확 내려가서 아프지 않단 것이다. 세 번째로는 맨발걷기를 오래한 사람들의 말인데 운동 이후 잔병치레를 크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추가로 암환자나 암을 치료한 후에 꾸준히 한 사람들의 경험담은 암의 치료가 남들보다 잘되었고 암 치료 후에도 재발없이 나은 삶의 질을 보내고 있단 말이 많았다. 접지효과 음이온 활성산소 제거 등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제대로 증명이 되진 않았다. 직접적인 체험과 맨발걷기를 오래한 난치병 환자들 사례를 종합하면 신발을 신고는 경험할 수 없는 발바닥 전체가 지압이 되는 효과, 염증이 가라앉아 통증을 줄이는 효과, 그리고 수면의 질이 향상되는 것은 공통적으로 느끼는 효과였다. 발바닥은 심장에서 제일 먼 곳으로 이곳이 다양하게 직접적으로 자극이 되면 혈액순환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명확하고 발바닥 지압점이 자극되어 우리 몸의 오장육부에도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다. 염증을 줄여 아픈 곳이 개선되는 경험을 했다면 그동안 내 몸의 균형이 맞지 않고 약한 곳이 좋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잠을 잘 자게 되는 것 또한 아주 바람직한 효과로 사람은 피로를 회복할 때 수면으로 몸의 피로를 회복한다. 단순하지만 건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한번 시도해 보는게 어떨까 한다.

2024-09-11

흰머리 소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내방가사를 인연으로 세 사람이 만났다. 20년도 더 전이었다. 영남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지역 특화수업을 개설한다며 ‘경북의 여성문학인 내방가사’강의 요청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위덕대에 국문학과가 없어 교양국어와 작문강의만 하였던 터라 전공강의에 목말라하던 때였다. 그때 그렇게 만나 여태껏 인연을 이어온 귀한 분들이다. 유복혜 선생님은 청도에서 오셨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오실 때가 많았다. 강의를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히 들으시는지 강의하는 내가 송구할 지경이었다. 하회가 친정이라 어릴 적 듣고 자란 내방가사가 낯설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신 듯했다. 집안의 안어른들 암송하신 가사를 이제야 이론으로 배우게 되었으니 남다른 감회가 있으신가 보였다. 기억력도 뛰어나 녹음해 들려드린 가사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시는 걸 보고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배가 나보다도 십수 년이나 윗길이신데도 여리여리한 소녀감성이 있어 별호가 흰머리 소녀라 했다. 유 선생님의 학구열은 훗날 위덕대 2014학번 성인학습자로 입학하여 졸업하신 걸로 증명되었다. 무려 공로상까지 받으셨다. 이솔희 선생은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조시인이었다. 수강자 중에선 나이가 어렸지만 나와는 오륙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여선지 이해도가 빨랐다. 시작 활동을 하면서도 전공공부 계속할 뜻을 비치더니 결국 경북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유 선생님은 나를 스승이라며 꼬박꼬박 대접하시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한없이 배려적이지만 무례는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성은 닮지 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스승이시다. 이솔희 선생은 대학 강의와 다양한 문화기관의 사회 강좌도 열심이다. 줌으로 문학치료 강의를 하길래 유 선생님과 함께 신청해 배운 적도 있다. 최근 유튜브로 멀티단장시조를 매일 올리는 부지런함을 보면서 이 분 재능의 끝은 어디일까 생각한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그 중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기꺼이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학습을 통해 바꿔라’는 말이 이어진다. 논어 속 공자님 말씀이다. 우리는 셋 중 어느 한 사람이 스승이 아니라 셋이 서로 스승이다. 처음엔 내방가사에 대한 내 알량한 지식으로 두 분의 선생으로 만났지만 20년을 동행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서로를 스승으로 삼아 기꺼이 따르는 사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고 했으니 셋은 완성의 숫자다. 우리는 셋이어서 부족함이 없고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해가 바뀌면 만나고 싶고 계절이 바뀌면 그리워진다. 만나면 고담준론에 행복하고 즐거움에 웃음소리도 맑고 높다. 이보다 더 좋은 동행이 또 어디 있으랴. 우리 모두 우아하게 늙되 마음만은 소녀같이 사시는 유 선생님을 닮자며 선생님의 별호를 우리 모임의 이름으로 삼았다. 흰머리 소녀.

2024-09-11

계단을 오르다

배문경 수필가 나뭇잎에 튕긴 햇빛이 비처럼 쏟아진다. 저만치 계단 위를 올려다보니 빛 속에 세상이 놓여있다. 기와지붕 끝이 맞닿는 곳에 백일홍이 붉게 웃는다. 순간, 모든 것이 희고 환해서 도무지 이 세상이 아닌 듯 몽롱하다. 스물 계단 앞에 섰을 때 세상은 혼돈이었다. 소용돌이치는 시대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쓸려 새로운 길을 만드는 물살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새로운 시대를 요구했다. 내가 살던 작은 도시에서도 골목골목에서 나온 사람들이 어깨를 서로 걸쳤다.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목소리는 하나가 되었고 의기는 투합 되었다. 그때는 어디를 가든 친구와 함께였다. 침낭과 먹을 것을 배낭에 나누어 넣고, 지리산과 설악산을 올랐다. 고단함도 잠시 텐트를 펼치고 쏟아지는 별을 노래했고 나날이 만들던 추억은 우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패기는 희망의 노래뿐만 아니라 절망의 노래를 부를 때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친구와 손을 잡고 오르면 어떤 계단에서도 숨이 차지 않았다. 서른 계단에서 결혼 후 아이들이 하나 둘 생겼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선 가을 길에 코스모스가 하늘거렸다. 돌담길을 걷자 쨍쨍한 가을 햇살에 땀이 났다. 능으로 가는 길,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나는 막내의 손을 잡고 걸었다. 계단 앞에 서서 큰아이는 동생을 위로 올라서게 한 후 나에게 올라서 보라고 재촉했다. 미소가 번지는 얼굴은 언덕배기를 하얗게 물들이던 구절초처럼 환했다. 아이들과 오르던 서른 계단은 웃음이 번지던 시간이었다. 마흔 계단을 오를 때는 사는 일에 스스로 지쳐 기진맥진할 때가 많았다. 홀로 떠난 여행길에서 감천마을을 살폈다. 낡은 집들의 틈새를 메우는 계단은 미로 같았다. 오르락내리락하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집은 이어졌다. 집도 사람도 서로를 보듬으며 견디고 있었다. 낡은 계단은 빗물을 흘려보내고 세월을 흘려보내느라 사람의 발길질에 삭을 대로 삭아 납작하고 보잘 것 없었다. 어둡고 칙칙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던 사람들의 흔적을 오르며 이 계단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했다. 쉰 계단은 나라는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과 함께 계단을 오른다. 라일락이나 들꽃처럼 짙은 보라의 향기가 번지는 시간이다. 운명을 찾아 연어처럼 자신을 찾는 회귀형도 있고, 파도에 적당히 몸을 맞기며 즐길 줄 아는 사람들도 본다. 그래서 그들 나름의 향기는 진하고 감미롭다. 나는 무슨 향기일까.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는 시간, 나의 향기를 덧입혀본다. 지금, 잠시 멈추어 서서 계단 아래로 눈길을 준다. 낮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찬찬히 눈에 들어온다. 어제까지 보이지 않던 들꽃이 어느 날 눈길을 끌던 것처럼 사소하게 넘긴 것들이 목의 가시처럼 걸렸다. 가까이 있는 사람은 늘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마음은 세심함을 잃은 행동이었다. 당연할 줄 알았다. 지금에서야 무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따뜻한 시선을 담아 보낸다. 어제 같은 계단이 내일도 이어진다. 무수히 뻗어있던 길과 계단에서 달리고 걷고 혹은 뛰어넘기를 하며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가다가 지치면 잠시 쉬었다 가더라도 가야하는 길이다. 나이를 먹을 때마다 더 나아지리란 달콤한 희망은 좌절될지라도 삶은 또한 살아지는 것. 그 끝이 당장 정갈한 나무숲의 빛 내림처럼 황홀한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다른 영산암 작은 마당에 햇살이 소복히 내려앉았다. 영산암(靈山庵)은 석가모니불이 경전을 통해 설법하셨던 영취산에서 유래했는데 보통 줄여서 영산이라 부른다. 어디에도 없던 평화와 안정이 마당에 들어찼다. 염불소리가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니 더 이상의 계단은 없는 듯했다. 세상의 모든 계단은 기도와 다르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 그 끝에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그마한 절 한 채가 있다. 그 도량을 거닐다보면 깨달음의 향기가 온 몸을 적신다. 절집 마당에 피어난 백일홍이 유난히 붉다.

2024-09-11

심각한 급여 양극화…그늘 짙어지는 청년들

심충택 논설위원 요즘 주변을 보면 현실에 강한 불만을 가진 청년들이 많아 안타깝다. 대부분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MZ세대 공무원들은 ‘필리핀 이모’보다 못한 박봉에 분개하고 있고, 회사원들은 평생 벌어도 내집마련이 불가능한 현실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고 있다. 민주당 이강일 의원실이 한국신용정보원에서 받은 자료에 의하면, 지난 7월말 현재 신용유의자(신용불량자)로 등록된 20대가 6만5887명에 이르며, 매년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10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빚더미에 눌려 생활고를 겪는 20대가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사례도 증가하는 모양이다. 경마장을 찾는 2030세대가 지난 5년간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는 통계도 있다. 신문사에 다니는 한 후배는 여성가족부가 지난주말 발표한 ‘공시대상회사와 공공기관’ 직원의 평균임금을 보고 기사 쓸 마음이 싹 달아났다고 했다. 평균임금은 남성은 9857만원, 여성은 7259만원이었다. 여가부는 성별 임금격차가 줄어들고 있다며 이 자료로 내놨지만, 공무원이나 회사원 대부분은 심한 피해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는 고임금이다. 공시대상회사는 시장경제 원리에 따르겠지만, 공공기관은 공무원과 비슷하게 정부가 투자하거나 지원을 하는 곳이다. 200만 원 정도의 첫 월급에서 시작해 10년이 지나야 300만원이 조금 넘어서는 급여를 손에 쥘 수 있는 공무원이나 중소기업 회사원들로선, 공시대상회사·공공기관 직원의 평균임금을 보면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다. 이러니 공직사회 MZ세대 이탈이 가속화하고, 대기업 취업이 안 되면 차라리 백수로 살겠다는 청년이 느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상반기 월평균 대졸 이상 학력을 가진 비경제활동인구가 405만8000명에 이른다. 대구만 해도 22만5000명이나 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급여양극화 탓이 크다. ‘백수’로도 불리는 비경제활동인구는 통계상 실업자로도 분류되지 않는다. 이들이 취업이나 창업 준비를 하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자포자기한 상태로 놀고 있다면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을 낳을 수 있다. 공직자들의 조기이탈은 낮은 보수가 주된 이유다. 9급 초임의 기본급은 월 187만7000원이다. 최저임금(206만원)보다 작고, 내년엔 병장 월급(205만원)에도 역전당한다. 최근 이탈 러시가 이루어지는 교사들도 마찬가지다. 연금메리트도 희석된데다, 교사들이 여가부가 밝힌 공공기관 직원 평균임금을 받자면 평생 근무해도 불가능하다. 교장급여가 그들의 평균임금과 비슷하거나 작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다양한 분야에서 양극화가 브레이크 장치 없이 진행되고 있다. 청년세대의 극단적인 급여양극화는 우리사회에 신용유의자, 도박중독자, 니트족 등을 양산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저임금으로 인한 취업포기·한탕주의는 결혼·출산율 저하와 직결돼 사회·경제적 손실이 크다. 급여양극화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 아니다. 대규모 공무원 조직의 보수를 짧은 시간에 개선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들에게 최저임금에 가까운 급여를 주면서 일하게 해선 안 된다.

2024-09-10

조만장자(兆萬長者)

우정구 논설위원 백만장자라는 말이 처음 생긴 1700년대 초반에는 미화 100만 달러(한화 약10억원) 이상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 백만장자는 대부호를 지칭하는 대표 용어로 사용됐다. 그러나 지금은 100만 달러가 적지 않은 돈은 맞으나 100만 달러를 기준으로 대부호란 표현을 쓰기에는 다소 어색한 면이 없지 않다. 미국의 석유왕 존 록펠러는 1916년 세계 최초로 백만장자를 뛰어넘어 억만장자가 됐다. 101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50대 후반부터 벌인 돈을 불쌍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돕는 일에 써서 20세기 최고의 자선 사업가란 이름을 얻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최근 보도에서 인류 최초의 조만장자 탄생을 예고해 화제가 됐다. 현재 세계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3년 뒤 조만장자로 등극할 것이라 했다. 머스크의 현재 자산은 2510억 달러(한화 337조원)이나 매년 110%씩 자산이 증가하고 있어 2027년에는 1조달러(한화 1339조원)가 될 것이라고 했다. 비공식적으로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빈살만의 재산이 1조달러를 돌파했지만 왕족 특성상 개인과 왕가 재산이 구분되지 않아 공식 집계에선 제외된다. 만약 머스크가 조만장자로 등극을 하게 되면 록펠러가 억만장자가 된 뒤 111년만에 대부호의 재산 단위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부가 소수인에게 집중되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시각도 있다. 상위 1% 부유층이 배출하는 탄소량이 세계 배출량의 16%에 달하는 나쁜 경우를 사례로 들고 있다. 많이 번만큼 사회에 기여율을 높이는 부자들의 자선가 정신이 더 절실한 때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9-10

동기부여와 삶의 가치관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동기부여와 삶의 가치관, 조직의 성과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동기부여는 개인의 특정 목표나 행동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내적 또는 외적 요인에 의해 유발되는 심리적 과정을 말하며, 삶의 가치관은 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믿음, 목표, 우선순위 등을 의미한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결정하고, 무엇에 동기를 느끼는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가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며, 직장에서 삶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일에 대한 몰입도가 다르고 생활 흐름도 영향을 받는다. 동기부여는 어떤 행동을 시작하게 하고 그 행동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고 삶의 꿈을 실현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이 흥미나 성취감을 바탕으로 스스로 동기를 가지는 취미 등은 내적 동기, 보상, 인정, 처벌 등의 외부 요인에 의한 조직 내의 개인의 움직임이 외적 동기라 한다. 삶의 목표나 비전은 개인의 가치관에 기초하며, 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이 동기부여로 이어진다. 기업은 공동의 가치관이 어떤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을지 결정하게 하며 동기부여 수준을 높이게 한다. 가치관이 확실하면 동기부여가 장기적으로 유지되고 개인의 일관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조직에서 직원의 동기부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첫째, 명확한 방향과 목표 설정이다. 조직의 목표와 자신의 업무 목표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달성할 때 조직 기여도와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적절한 보상체계이다. 금전적 보상뿐만 아니라 인정, 승진기회 등 비금전적 보상도 중요하다. 셋째, 자율성과 책임감이다.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을 자율적으로 수행하고 책임감을 느끼게 하여 중요한 역할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 일의 의미이다. 직원들이 자신의 일이 조직 전체 또는 사회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알 때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다섯째, 피드백이다. 성과에 대한 정기적인 피드백을 제공하면 자신의 발전 상황을 확인하고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일어난다. MZ세대는 기성세대와는 다른 가치관과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자율성, 목적의식, 성취감 등을 중시하며, 개인의 행복과 성장을 추구한다. 자율성과 주도권 부여가 중요하며 관리와 통제는 역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동기부여는 경제적인 경우와 비경제적인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의 구성원이면 성장과 수익을 추구한다. 필자가 컨설팅 하고 있는 119 방재센터는 인명구조와 화재진압의 미션을 갖고 있다. 경제적인 이해 타산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구하는 데 소명의식을 가지고 골든 타임에 집중한다. 기업은 구성원 동기부여가 적절히 이루어졌을 때 성과는 커진다. 동기부여가 잘 된 조직에서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발휘하며 매출 증가, 비용 절감, 혁신적인 문제 해결로 이어진다. 삶의 가치관에 맞는 동기부여는 일의 만족도를 높이고 조직 문화 개선, 기업 성과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24-09-10

책과 독서의 요람 ‘2024년 대한민국 독서대전 포항’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서늘해진 기온에 풀벌레 소리가 정겹다. 한낮으로는 늦여름의 꼬리를 잡는 노염의 심술이 가시질 않지만,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 결에 그리던 가을이 차츰 오려나 보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코스모스는 방실방실 피어 반기고, 온갖 풀벌레들은 청아한 합창으로 결실의 계절을 환호하는 듯하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은 책 읽기 좋은 ‘독서의 달’이다. 중국 당나라 문호 한유의 ‘이제 등불을 점점 가까이할 수 있으니(燈火梢可親) 책을 한번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簡編可卷舒)’ 시구를 굳이 들춰내지 않더라도, 덥고 습한 여름날의 시달림을 떨치며 산뜻한 날씨와 서늘한 바람 결에 책을 읽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더라도 즐겁고 가뿐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계절의 변화나 자연의 현상에 동화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 읽기 좋은 가을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의 독서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문체부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 독서율(1년에 책을 1권 이상 읽은 비율)은 2013년 72.6%에서 2023년 43.0%로 약 30% 급감했다. 그만큼 국민의 여가 중 독서 비중이 감소한 탓도 있겠지만,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활자보다는 영상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많아진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또한 독서의 계절 가을에 비해 여름철의 독서량이 15% 정도 더 높다 하니, 어찌 보면 책 읽는데 좋은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틈 나는대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아니하고(手不釋卷) 글을 읽는 자세나 습관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차제에 국민들의 독서 권장과 책 읽는 문화 확산을 위한 전국 최대 규모의 독서문화축제가 9월 말경 포항지역에서 열리게 돼 전국적인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 3월 포항시가 문체부로부터 ‘2024년 대한민국 책의 도시’로 선정, 선포함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포항시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제11회 대한민국 독서대전 포항’이 3일간(9월 27~29일) 영일대 누각 일원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대구·경북권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2024년 독서문화축제는 ‘책으로의 항해’라는 슬로건과 ‘동해바다, 책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책과 연관된 강연·공연·전시·체험·학술포럼 등 다채롭고 차별화된 독서축제를 선보일 전망이다. 이를 통해 책과 독서문화의 활성화로 기존 철강도시로 알려진 포항이 문화와 지식의 바다임을 알리며 책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새로운 장이 펼쳐질 것으로 기대된다. 책 속에는 길이 있고 끝없는 모험과 지혜의 보물이 존재한다. 책은 우리 삶의 유익한 동반자이자 함께 있으면 즐거운 친구이다. 독서는 사람의 재능을 밝혀주고 지혜를 더해 주듯이, 한 권의 책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새 시대를 열어갈 예지력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독서를 통해 우리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소한 일에서부터 사회적인 문제까지 지식과 정보, 감성과 상상력 등 다양한 통찰과 해법을 얻을 수 있다. 책을 매개로 소통하고 참여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독서문화의 향연이 성황리에 열리길 염원해본다.

2024-09-10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시험에 들게 하라

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언스플래쉬 사거리, 내리막이다. 이 길로 내려가면 큰길로 들어선다. 나를 제외한 일행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왼쪽 모퉁이를 돌아서 몇 걸음, 그들은 전파사를 지나 세탁소 앞을 지나고 있다. 따라갈 걸. 나는 이제 혼자다. 어디로 가지.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큰길, 거기서 오른쪽으로 100미터만 가면 지하철역이다. 승객이 별로 없는, 종착역에 가까운 역이지만, 오늘은 삼일절. 사람들은 충분히 많을 것이다. 등산을 하려고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나선 사람들,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사람들. 운이 좋다면 서 있을 자리도 없겠지. 저들을 따돌리기에는 충분하다. 갈까? 다음은? 다음은 어디로 가지? 우리는 이런 상황에 대해 약속해 놓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오늘이지?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왜 오늘일까? 담배를 두고 나왔다. 담배연기 한 모금이면 쿵쾅거리는 심장도, 정리 되지 않는 이 상황도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싶은데. 일단 담배부터 한 대 피우는 거다. 전봇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선다. 횡단보도 맞은편에 럭키슈퍼가 보인다.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고 천천히 돌아선다. 태연해지자. 아무렇지 않은 듯.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긴다. 가슴 깊숙이 들어간 연기가 덩굴처럼 감고 올라가 머리 안을 하얗게 채운다. 내뱉은 연기는 안경 안팎을 쓰다듬고 올라간다. 머리의 안과 밖이 다 하얗다. 어지럽다. 두 번, 세 번 급하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에 눈 안까지 아려온다. 심장소리가 작아졌다. 다행이다. 머리를 둘러싸고, 안과 밖을 채우던 하얀 연기도 사라졌다. 담배연기는 이제 입과 기도만을 왕래할 뿐이다. 지저분한 유리창을 청소하듯, 담배연기는 유리세정제처럼 머리를 닦아내고 나갔다. 누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퉁이 뒤쪽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 사이에 내게로 왔거나 얼굴을 내밀어 나와 마주 보고 있을 테지. 지금까지 기척이 없는 것은 저 뒤에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저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걸까. 정은이 왔을 때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며 한 참 동안 웃던 중이었다. 일본 영화였다. 시대극.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멈췄었다. 일본 방송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았고 누구도 다른 것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일본무사가 꿇어 앉아있었다. 주군이 죽었고 전쟁에서 졌다. 적장은 자기편이 되겠냐고 물었다. 무사는 핏발 선 눈으로 적장을 보다 한 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명예로운 죽음을 허락하라. 오네가이시마스! 적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는 옷을 단정히 하고 앉아 칼을 빼내겠지. 하늘을 향해 나지막이 혹은 침을 튀기며 몇 마디 말을 하겠지. 그리고는 자신의 배를 찌를 것이다. 배를 찌른 뒤 옆으로 배를 가르는 거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것. 뻔한 내용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눈을 떼지 못했다. “난 일본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저런 거는 멋있단 말이지. 주군을 따라 명예롭게 죽는 것, 또 그 죽음을 허락하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 않아?” “딱 봉건주의적 사고방식이지. 저게 뭐가 멋있냐?” 우리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에 무사는 칼로 자기 배를 찔렀다. 남은 것은 칼을 옆으로 돌려 배를 갈라야 한다. 그런데, 칼을 뺐다. 아악, 비명을 지르더니 찔렀던 칼을 빼내 집어던지고 배를 잡았다. 바닥의 뒹굴며 소리를 질렀다. 이따이 이따이. 텔레비전 안에서 그리고 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말 리얼하지 않아? 저건 리얼 그 자체야.” 그때 정은이 왔다. “정은이 왔네. 그러면 이제 올 사람은 다 왔으니 담배 한 대만 피고 회의 시작하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한 대씩 물고 앉아 연기를 뿜어냈다. 담배연기로 가득 찬 방안은 안개가 낀 듯했고, 그 속에 둘러앉은 우리는 말없이 기도하는 수행자들이거나 결전을 앞둔 전사들이었다. 결연한 의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짐이 담배연기와 섞여 방안을 채웠다. 문득 좀 전에 보았던 일본 방송이 떠올라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은이 물었다. “선배, 왜 웃어요?” “내가 언제?” “방금 ‘씨익’ 하고 웃었는데요.” “아, 그냥. 너 오기 전에 봤던 게 생각이 나서.” 정은이 궁금해 하며 말해 달라 보챘다. 좀 전에 보았던 무사 이야기를 해줬지만 정은은 웃지 않았다. “그게 뭐가 재밌어요? 그런데 오면서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뭔데?”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꼭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어요.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중간에 내려서 택시 타고, 지하철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지하철 타고 이리 왔거든요.” “그런데?” “그런데, 이상하게 중간에 똑같은 아저씨를 2번 봤어요. 버스에서, 그리고 지하철 종착역에서.” “야. 그 이야기를 지금하면 어떻게 해.” “아까 하려고 했었는데.” “들어오면서 그 이야기부터 했어야지.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 동네에 사는 아저씨가 등산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근데 등산복차림이 아닌 거예요.” “어휴. 그러면 네 녀석이 이리 들어오면 안 되지. 그냥 집엘 갔어야지.” “지금 그런 이야기 할 때야? 그건 나중에 얘기 하고 밖에 한번 나가 봐라.” 공휴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집 앞 골목은 조용했다.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힐끔거렸다. 건너편 골목에서도 누군가 나를 힐끔거렸다. 청바지에 흰색 운동화. 주황색 티셔츠. 각진 얼굴에 스포츠머리. 그들이다. 우리는 모두 방에서 나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고 갈림길에서 둘로 나뉘었다. 담배 두 개비를 피는 동안 저 전봇대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다. 나를 쫒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내 방을 뒤지고 있다면? 일단 여기를 피했다가 며칠 뒤에 다시 와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럴까. 나는 수배자도 아닌데, 이렇게 피할 필요가 있나?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왜? 걸음을 옮긴다. 방금 건넜던 횡단보도를 향한다. 보행자 신호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우측으로 돌아 나왔던 전봇대를 다시 좌측으로 돌아 올라간다. 쌀집이다. 쌀집 아저씨가 아주머니랑 내 방 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말하고 있다. 평소 웃으며 ‘초옹가악’하고 부르던 아주머니가 눈을 피한다. 집 앞은 아무 일 없는 공휴일 아침처럼 평온하다. 주인집과 분리된 내 방의 바깥문을 열고 들어선다. 누군가 내 방 창으로 상반신을 집어넣고 있다. 아래에는 그를 받치는 또 한 사람. 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나는 왜 다시 이리로 온 거지. 눈이 마주쳤다. 결정해야 한다. 지금. 여기서. 이번에. 결정을 짓겠다. 나는 누군가를 붙잡고 창에서 끌어내린다. 그를 붙잡고. 밑으로, 밑으로 내려갈 것이다. 이제 칼을 옆으로 돌릴 시간이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9-10

제주해녀가 정치인에게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제주올레 바닷길을 걷다가 ‘물질’하는 해녀들을 만났다. 제주해녀는 ‘강인한 제주 어머니의 상징’이다.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처럼, 해녀들은 목숨 건 물질을 하면서도 늘 이웃과 함께했다. 옥빛 제주바다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공존과 상생,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몸에 밴 그녀들이 있기 때문이다.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제주해녀문화’는 권력싸움에 찌든 정치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은 ‘제주해녀문화의 핵심가치’인 ‘공존’이다. ‘사람과 사람의 공존’, 그리고 ‘사람과 자연(바다)의 공존’이 바로 ‘제주해녀정신’이다. 잠수 능력이 탁월한 상군 해녀는 하군 해녀가 작업하는 ‘할망바당(할머니바다)’에 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할망바당은 먼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고령의 해녀들과 애기(초보)해녀들을 위한 ‘배려와 공존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해녀들은 ‘자연과의 공존’을 위하여 ‘지속가능한 바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수산자원의 보호를 위해서 자율적으로 ‘금채기(禁採期)’를 두는가 하면, 환경오염과 수온상승으로 인한 백화현상을 치료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갯닦이’ 작업을 한다. 작은 해산물 채취금지, 종폐 살포, 바다 숲 조성 등 해양생태계의 복원을 위한 공동체 차원의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제주해녀들의 ‘배려와 공존’이라는 ‘공동체정신’을 배워야 한다. ‘공멸의 정치’를 끝내려면 ‘공존의 정신’이 필수다. 정부와 국회를 각각 장악하고 서로 힘자랑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는 제주해녀들의 삶을 배워야 한다. 여야의 협치는 ‘입에 발린 소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들처럼 배려와 공존의 민주주의 가치관이 내면화되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제주해녀문화의 상징인 ‘불턱 민주주의’도 정치인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준다. ‘불턱’(현재는 해녀탈의장)은 해녀들이 물질을 준비하고, ‘물숨’과 같은 지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민주적 의사결정을 하는 곳이다. 민회 성격의 자조모임인 ‘해녀회’는 개인을 존중하면서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이 공동체의 리더인 ‘대상군’은 ‘나이가 아니라 인격과 능력’을 기준으로 추대되며, 매사에 솔선수범하는 헌신의 리더이다. 하지만 대상군도 체력과 판단력이 떨어지면 리더의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음으로써 해녀공동체의 안전과 성과를 지킨다. 이러한 자제와 절제의 미덕이 정치인에게 주는 함의가 크다. 해녀들은 ‘금지된 욕망’인 ‘물숨’이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호흡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물질에 욕심을 내지 않듯이, 정치인도 ‘권력이 마약’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서 성찰하고 절제할 줄 알아야 한다. 대상군 해녀가 때가 되면 리더의 역할을 스스로 내려놓듯이, 정치인도 자신의 능력 한계를 깨달을 때 비로소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

2024-09-09

‘비혼 축하금’ 받는 시대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회사에서 축하금을 준다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듣는다면 쉽게 믿을 수 없는 ‘비혼 축하금’을 지급하는 회사가 늘고 있다. 비혼 축하금은 말 그대로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이들에게 주는 돈이다. 결혼을 하면 결혼 축하금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 형태. ‘결혼 적령기’라는 단어가 힘을 잃은 지는 이미 오래다. 2024년을 사는 20~40대 직장인들에게 결혼이란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으로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니, ‘회사는 왜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만 돈을 주는가’라는 불만이 나오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 바뀐 시대에 따라 제도도 변한다. ‘비혼자 지원금 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회사 중 하나인 LG유플러스는 만 38세 이상·근속 기간 5년 이상의 사원이 비혼 선언을 할 경우 기본급 100%에 더해 경조사 휴가 5일까지 주고 있다. SK증권 역시 근속기간 5년 이상에 만 40세 이상 비혼 직원에게 축하금 100만 원과 유급휴가 5일을 주는 노사합의안을 확정했다. KB증권, NH투자증권, 신한은행 등도 액수와 휴가 기간은 조금씩 다르지만 유사 형태의 비혼 축하금을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 남편과 아내가 아닌 개나 고양이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건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유럽의 경우엔 기르던 개에게 거액의 유산을 물려준 사례도 있다. 예측하건대 앞으론 반려동물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직원에게 축하금을 주고, 키우던 개나 고양이가 죽었을 때 조의금과 휴가를 주는 회사도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변화 속도는 언제나 숨가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9-09

늦여름의 카레

입맛이 없거나 요리하기 귀찮은 날엔 카레를 떠올린다. /언스플래쉬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여름의 끝자락. 이맘때에 부엌 앞에 서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 몸이 지글지글 익는 더위에 불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 게다가 음식이 겹치지 않게 매 끼니 다른 음식을 먹어야 하는 안 좋은 습관도 있는 지라 여름날의 요리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귀찮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매 끼니 같은 음식을 먹어도 질려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각종 채소 재료를 둥그렇게 썰고 강황 가루를 듬뿍 넣은 카레다. 특히 대용량으로 만들어두고 먹기에 좋은데다 끓일수록 눅진하고 진득해지는 국물 덕분에 오래 둘수록 오히려 맛있어지는 고마운 요리다. 커리는 3000년 전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됐다는 발견이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 음식이다. 인도는 커리의 핵심재료인 코리앤더, 클로브, 생강, 마늘 등 여러 향신료를 사용하여 각 지역이나 취향에 따라 배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을 ‘마살라’라고 칭했다. 이 마살라에 고기나 생선, 요거트 등의 재료를 추가로 넣어 조리한 여러 스튜를 큰 범주로 커리라 불렀다. 18세기가 되자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인도 현지의 커리를 영국에 들여오게 되는데, 기존 인도에서 커리와 주로 먹던 난이나 빵이 아닌 쌀과 먹는 형태로 변하게 된다. 또한 이 때 물만 부으면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커리 가루가 생겨나며 간단한 요리법 덕분에 군대 식량으로 보급되기 시작된다. 덕분에 점차 세계 곳곳에 커리라는 음식이 퍼지게 된다. 커리하면 또 생각나는 대표적인 나라, 일본이 있다. 카레 스튜, 카레빵, 카레 라면 등 커리를 다양하게 이용한 요리가 참 많은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배경이 있다. 20세기 초 근대에 이르자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군사적 동맹을 맺게 된다. 당시 영국 해군은 여전히 커리를 즐겨 먹고 있었고, 당시 동맹을 맺었던 일본 해군 또한 영향을 받아 커리가 점차 인기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빵과 같이 커리를 즐겨 먹었던 영국 해군의 식단과는 달리 밥과 곁들여 먹는 카레라이스가 탄생하게 된다. 해군 뿐만 아닌 일반인도 카레라이스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레토르트화 되면서 점차 일본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한국은 일제시대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카레를 접하게 되고, 각종 야채와 마늘 등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신료에 강황 중심의 가루를 넣어 만드는 카레가 유행하게 된다. 이 또한 일반 서민도 쉽고 간편하게 즐겨먹을 수 있는 레토르트화 되며 현재에 이르러선 쌀밥에 올려먹는 형태로 변하게 된다. 종류 또한 다양하다. 토마토와 마늘, 돼지고기를 넣어 푹 끓이는 토마토 카레. 버섯, 토마토, 양파, 소고기를 넣어 만드는 실패 없는 맛의 소고기 카레, 버터와 우유, 치즈를 넣어 만드는 버터치킨 카레 등 넣는 재료에 따라 무궁무진한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채소만 충분히 손질한다면 누구나 만들기 쉬운 카레는 고형이나 분말 등 제품이 잘 나오기 때문에 식당에서 사 먹는 것만큼 높은 퀄리티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게다가 카레는 아주 어렸을 적, 어쩔 수 없이 장기간 집을 비우는 엄마의 필살기 요리법 중 하나였다. 어린 내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냄비 안에 냉장고에 있는 온갖 재료를 투박하게 썰어 놓고 가루를 물에 푼 후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 내는 카레. 냉장고에 잔뜩 얼려둔 쌀밥을 전자레인지에 해동한 후 냄비 속 카레를 그저 붓기만 하면 그럴 듯하게 한 상이 만들어졌었다. 오랜 자취 생활 중 이젠 엄마가 만들어내는 투박한 카레의 맛은 없지만, 이제는 요리할 기력이 없다거나 왜인지 카레가 먹고 싶어지는 날이면 엄마가 했던 것처럼 큰 냄비 가득 카레를 끓여내는 내 모습이 있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가 먹고 싶은 재료를 듬뿍 넣어 내 입맛 맞춤용 카레를 잔뜩 끓여낸다는 것. 고기를 많이 먹고 싶은 날엔 고기 걱정이 없도록 듬뿍 썰어 넣고, 어느 날엔 제철 토마토를 넣기도 하고 어느 날엔 계란 후라이를 잔뜩 올려 그날의 입맛대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 그러니 오늘처럼 무언가 입맛이 없거나 요리를 하기 귀찮은 날엔 수많은 요리 중 카레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냄비 바닥에 카레가 타지 않도록 수저로 깊숙한 냄비 속을 휘휘 젓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어느덧 더위가 조금 가신 주방, 늦게나마 늦여름을 감각해본다.

2024-09-09

슈퍼 아저씨와 사소한 기적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친해진 슈퍼 아저씨. 우리 동네엔 작은 슈퍼가 있다. 비닐봉지 값 따로 안 받고, 물건도 몇백 원 깎아주기도 하는 진짜 옛날 슈퍼다. 슈퍼 주인 아저씨는 아주 웃긴 사람이다. 얼굴에 늘 익살과 장난기가 가득하다. 나와 농담 따먹기를 종종 하는데 시작은 아저씨가 먼저 했다. 언젠가 과자 ‘맛동산’을 계산대에 올렸더니 “즐거운 파티를 하시려나보죠?” 해서 ‘웃긴데?’ 흠칫 놀랐다. 그래서 다음엔 내가 신라면을 계산해달라 하며 “사나이 울리는 일이 있어요” 했더니 아저씨도 ‘이놈 봐라?’ 하는 듯했다. 그랬더니 또 어느 날 아저씨는 부탄가스를 내민 내게 “조강지처가 좋죠?” 했고, 나는 며칠 뒤 짜파게티를 내밀며 “오늘은 제가 요리삽니다” 했다. 아저씨는 다음에 내가 카프리 맥주 다섯 병을 계산대에 올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으로 다섯 병을 다 마셔요?” 했다. 낚시로 광어나 농어를 잡아와 회 떠서 몇 번 갖다드린 일이 있다. 그러면 “고마워요” 끝에 “다음엔 도미를...” 하는 진짜 웃긴 아저씨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저씨 얼굴이 우거지죽상이다. 이유인즉슨 슈퍼 바로 앞에 편의점이 들어서서다. 자유시장경제에서 안될 일이 뭐 있겠냐마는 고작 10미터 앞에 편의점이 들어서는 건 내가 봐도 상도의에 어긋난다. 아저씨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저런 행동을 하는 영업점이라면 그 안에 물건들이며 장사하는 태도며 하여간 내용이 형편없을 것”이라고 독설하기도 했다. 아저씨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은 어느새 편의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슈퍼엔 없는 물건을 사거나 네 캔에 만천 원 맥주를 사거나 할 때, 비좁고 어수선한 슈퍼 대신 넓고 쾌적한 편의점에 갔다. 그게 내 생활에 편했다. 그러다 하루는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잔뜩 사서 나오다 담배 피러 나온 아저씨와 마주쳤다. 그동안 아저씨가 혹시 볼까봐 편의점 드나들 땐 조심했는데 드디어 딱 걸린 것이다. 가볍게 인사가 오갔지만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도 기분 나빴을 것이다. 그날 일이 마음 쓰여선지 그 뒤로 슈퍼를 찾는 횟수가 더 줄어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 음료수를 사러 편의점 가는 길에 보니 버티다 버티다 더는 안 되겠던지 슈퍼는 폐업하고 말았다. 간판도 떼고 온갖 자재들이 건물 밖에 널브러져 있었다. 내가 이사 오기 한참 전부터 동네에서 장사한 노포가 거대자본과 시장논리에 밀려 사라졌다. 아저씨와 주고받던 농담들, 늘 익살스럽던 그 표정, 한숨을 푹푹 쉬며 불황을 걱정하던 음성을 떠올리니 슬퍼졌다.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착잡한 마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편의점 카운터에 아저씨가 앉아있는 것이었다. 너무 놀라서 “아니 왜 여기 계세요?” 했더니 “여기로 옮겼어요” 하신다. 더 놀라서 “이러셔도 돼요?” 하니까 “이런 일도 있어요. 살다보면” 본인도 웃긴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능청을 떠는 아저씨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한참 웃었다. 18년 동안 해태 타이거즈를 이끌었던 김응용 감독이 라이벌팀 삼성 라이온즈로 옮겼을 때보다, 피닉스로 불리는 모 정치인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당적을 옮겼을 때보다 더 충격적인 이적이다. 아저씨와 계속 농담따먹기를 할 수 있게 됐다. 마음에 오래 묵었던 아쉬움과 미안함이 깨끗이 사라졌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날 하루 종일 인천 앞바다에서 주꾸미 낚시를 했다. 저녁 늦게 집에 오면서 편의점에 맥주 사러 들렀다. 알바생이 있겠거니 했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오붓하게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아이스박스에서 주꾸미 30마리를 꺼내 지퍼백에 담아 갖다드렸다. “이따 데쳐서 소주 한잔 하세요” 하자 아저씨 얼굴이 해처럼 환해졌다. 소소한 스몰토크를 주고받다가 편의점을 나섰다. 이런저런 제철 생선 잡으면 또 가져다드리겠다고 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던가. 삶이란 항상 반복되는 형식 같아도 그 안엔 내가 모르는 내용들이 가득하다. 이 우연과 미지가 삶이라는 여정을 때로는 불안하게, 또 때로는 설레게 만든다. 세상은 늘 내가 모르는 곳에서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 경이로움과 우연히 마주할 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삶이라도 기적처럼 여겨진다. 그걸 나는 사소한 기적이라 부르고 싶다. 폐업한 슈퍼를 바라보며 느낀 비애보다 아저씨가 앉아있는 편의점을 보며 벅차오른 희망이 더 크다. 이제 편의점을 지나갈 때면 저절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우리 동네 씨유편의점엔 아저씨가 웃기다네~”

2024-09-09

우리는 인공지능을 잘 쓸 수 있다

김규인 수필가 딥페이크 성폭력으로 여성들이 공포에 질렸다. 혹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합성사진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늘어난다. 요즘의 딥페이크 성폭력은 가까운 지인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더 그러하다. 일반인뿐만 아니라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한 딥페이크 영상도 늘어나고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최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악의적으로 표현한 딥페이크 영상과 이미지까지 터져 나왔다. 인공지능의 도입 시 문제가 될 거라고 지적한 내용들이다. 그동안 준비는 미흡했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다. 경찰도 그 누구도 뚜렷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그렇다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인공지능 사용을 막을 수도 없고 인공지능이 가진 이점은 너무도 많지 않은가. 다른 각도로 보면 산업 혁신을 주도하고 일상생활에도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고 있다. 날로 문제가 되는 기후 변화에 어쩌면 인공지능은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기후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인공지능의 도움은 절실하다. 어쩌면 지속 가능한 미래에 대한 답을 줄지도 모른다. 의과대학 증원 문제로 시끄러운 요즈음 인공지능은 의사를 대신하여 질병을 예측하고 치료할 수 있으며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은 수술할 환자를 정확하게 수행하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환자를 진료하고 처방전을 내리는 일도 인공지능은 오차 없이 수행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도입한 물건의 제조는 설계에서 생산 및 관리에 이르기까지 전 공정을 능숙하게 수행하고, 사람을 대신하여 궂은일을 지치지도 않고 처리한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도 않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 한다. 몸이 아프면 고쳐주기만 하면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는다. 참으로 충직한 일꾼이다. 우리 사회에 인공지능은 필요하다. 인공지능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의 힘을 다른 곳에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제다. 사용하기 전부터 부작용을 지적해도 아무런 대비 없이 성급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사람들의 문제다. 이제라도 속도를 조정하며 밀린 숙제를 하듯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불안한 시간을 더 이상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딥페이크 성폭력물이 성행하는 이유는 돈이다. 성 관련 영상을 만들면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의 구석을 파고들며 번성한다. 이제는 국가가 나서야 한다. 국가 산업에 도움이 되는 방향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며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고 많은 벌금을 부과하여 돈벌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누구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딥페이크 공포가 확산하고 이를 막고자 하는 사회의 인식도 어느 때보다 높다. 이제는 국가가 공정한 법을 만들어 인공지능을 관리할 때다. 우리는 지금도 인공지능보다 사람이 한 수 위임을 믿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믿는다. 사람이 인공지능을 잘 관리할 수 있음을 보여주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짜 모른다면 인공지능에 답을 구해보자. 인공지능과 함께 갈 수 있음을 보여주자.

2024-09-09

건물온실가스 총량제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올여름 8월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역대 최고의 폭염과 열대야 일수를 기록하였고, 이로 인해 국민의 기후위기에 대한 인식은 크게 높아졌다. 더욱이 지난 8월 29일 헌법재판소는 현행 ‘탄소중립기본법’ 8조 1항에 의거 2030년까지만 온실가스를 2018년 대비 40% 이상 감축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이후 2049년까지는 구체적 감축목표를 제시하지 않아 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주는 것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청소년 기후 단체와 영유아 등이 낸 이번 역사적 ‘기후소송’으로 인해 그간 국민의 불편과 경기침체 및 산업계 우려를 고려하였던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정책은 다시 강화될 전망이다. 지난 5월 제출된 ‘제1차 대구광역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에서 대구광역시의 관리권한 인벤토리 온실가스 배출량은 2018년 기준 총 1234만t(CO2 기준, 이하동일)이다. 이러한 대구의 온실가스 배출량에 대한 기여율을 배출원별로 구분해 보면 건물 58.4%, 수송 31.4%, 폐기물 8.7%, 농업 1.5% 순으로 건물부문이 압도적으로 높다. 가정과 상업·공공분야 건물에서 온실가스 배출은 건물에 공급된 도시가스 등 에너지가 연소하여 직접 배출하거나 다른 지역에서 공급된 전력이나 열로 인해 간접 배출하게 된다. 대구시의 가정과 상업·공공분야 건물에서 온실가스 총배출량은 720만t(2018년 기준)인데 가정에서 337만t이고, 상업·공공분야에서 383만t으로 가정보다 약 45만t 정도 더 배출된다. 대구시는 주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상업·공공분야의 냉방, 난방온수 및 조명 등에서 더 많은 온실가스가 배출되는 것이다. 대구시는 이러한 건물부문에서 2030년까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2018년 대비 49%로 설정하여 2030년까지 대구시 전체 온실가스 감축목표 45%보다도 높다. 그리고 2030년까지 대구시 총 감축목표량 556만t 중 건물부문의 감축량이 356만t으로, 기여율은 무려 64%이다. 이처럼 대구시는 건물부문에서 설정한 높은 감축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소형모듈 원자로(SMR) 건설, 산업단지 친환경에너지 전환 및 가정·상업·건물용 연료전지보급 등 에너지 ‘공급자 중심’의 에너지전환 사업을 핵심 감축사업으로 계획하고 있다. 태양광, 지열 등 신재생에너지를 도입하고 고효율 조명 및 보일러, 친환경 단열재를 사용하는 에너지 ‘사용자 중심’의 그린리모델링(그린홈 주택지원사업) 사업도 계획하고 있으나 감축목표량은 저조하다. 그런데 서울시는 건물부문의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에 대한 비중이 66.5%로 대구시보다 높은데,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중대형 비거주 건물을 대상으로 ‘사용자 중심’인 ‘건물에너지 신고·등급제’와 ‘건물온실가스 총량제’를 도입한 ‘서울시 기후동행 건물 프로젝트’를 핵심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건물온실가스 총량제’는 유형별 단위면적당 표준배출기준을 설정하여, 건물별 총배출허용량을 부여하는 제도로 서울시는 시범적용(2021년) 및 확대(2022~2025년)후 2026년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대구경북에서도 ‘건물온실가스 총량제’를 벤치마킹하여 강화될 온실가스 감축정책에 대비해야 한다.

2024-09-09

이용악의 함경도 방언 시의 애환과 슬픔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이용악은 함경북도 경성 출생이다. 국경을 넘나들며 소금장수를 하던 아버지를 연상하며 눈이 내린 날 쓴 ‘국경’이라는 작품은 이 민족의 슬픔과 애환을 노래한 뛰어난 시였다. 1937년 첫 시집 ‘분수령’을 내고, 이어 그 이듬해 두 번째 시집 ‘낡은 집’을 도쿄에서 간행했다. 이 두 시집에서는 나라를 잃어버린 예민한 한 지식인이자 시인의 감수성이 고도의 긴장으로 활과 리라의 활처럼 팽팽한 언어로 꾸며져 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간행한 ‘오랑캐꽃’에서도 그의 시작은 꽃을 피웠다. 그러나 북쪽 공산 치하에서 1956년 11월부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편집부 부주필로 일하면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등 해방전쟁의 투사로 전환한다.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는 어마무시한 시어를 구사하는 혁명 투사가 되었다. 노동전투와 대남 혁명을 선동하는 언사로 아름다운 시인의 길을 접어버린 아까운 시인 가운데 한 분이다. 이용악의 고향 경성은 두만강을 경계로 육진이 설치되었던 여진과도 맞닿아있으면서 연해주로 이어지는 극동지역 이주민들의 통로였다. 조선조 말까지 결혼을 하고 머리를 기른 재가승이 있었으며 한화한 여진계의 사람들이 뒤섞여 살았던 곳이다. 이 지역은 변화의 물결이 두루 미치지 못하여 음운이나 어휘 면에서는 옛말을 많이 지니고 있다. 독특한 방언이 많이 남아 있는 이 지역을 방언학계에서는 ‘방언섬’이라 이르기도 한다. 특히 소리의 높낮이가 단어의 뜻을 구별해 주는 성조방언의 모습을 보여주는 면에서는 경상도 방언과 상당히 닮아있다. 모음은 ‘ㅣ, ㅔ, ㅐ, ㅡ, ㅓ, ㅏ, ㅜ, ㅗ’의 여덟이다.‘외’는 대체로 ‘ㅙ’, ‘위’는 [wi], ‘의’는 ‘ㅣ’로 발음된다. 회령, 종성 등지에서는 반모음 ‘ㅣ’[y]가 탈락한 ‘돟다, 덕다, 탁실하다’와 같은 방언이 쓰인다. 북부의 회령, 종성, 온성 등지에서는 순자음 아래의 ‘ㆍㅗ’ 변화가 현저하다. ‘모디(마디), 몯아바니(큰아버지), 볿다(밟다), 볼써(발써), 뽈다(빨다)’ 등의 예들이 보인다. 함경도 방언은 중세국어의 ‘ㅸ’‘ㅿ’‘ㅇ’은 대부분 ‘ㄱ’ ‘ㅂ’‘ㅅ’으로 나타나 경상도 방언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구름이 모여 골짝골짝을 구름이 홀로//백 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오랑캐꽃/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게/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이용악의 ‘오랑캐꽃’을 읽으면 육진 지역에 혼거하는 여진족을 떠올리며 애상에 잠긴다.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인 ‘도래샘’, 벼처럼 생긴 띠로 엮은 지붕의 ‘띳집’, 돌 몇 개를 고아놓은 가마솥인 ‘돌가마’, 털로 된 신발인 ‘털메투리’. 이 모든 풍경과 물상은 여진족의 일상의 모습이다. 경성은 두만강을 건너면 ‘우라지오 바다’에 면하고 ‘아라사 벌판’으로 그리고 간도로 진출하는 관문인 국경 마을이다. 이용악의 시는 이별로 분열되는 변방에서 이향과 귀향의 악순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어둠과 고통을 몸으로 체험한 기록이다. “땀내 나는/고달픈 사색 그 복판에/소낙비 맞은 허수애비가 그리어졌다/모초리 수염을 꺼리는 허수애비여/주잖은 너의 귀에/풀피리 소리마저 멀어졌나봐” 이용악의 ‘소낙비 맞은 허수애비’에서 ‘허수애비’, ‘모초리’, ‘주잖은’과 같이 간간히 섞여있는 함경도 방언은 떠나온 고향이 못내 그리운 실향민의 슬픈 모습이 보인다. 그의 시집 ‘분수령’의 ‘만추(晩秋)’에서는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선 유민들의 암담한 비애와 고통의 심도를 전해준다. 그의 ‘두메산골 1’은 함경북도의 전통적인 풍물과 향토색 짙은 두메산골의 냄새에 물씬 젖어들게 한다.‘물구지떡 내음새’라든가‘썩달나무 썩는 냄새 유달리 향그러웠다’라는 향토의 방언으로 “주인장은 매사냥을 다니다가/바위틈에서 죽었다는 주막집에서/오래오래 옛말처럼 살고 싶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용악의 또 다른 절창인 ‘전라도 가시내’라는 시에서는 이향에서 만난 전라도 가시내에 대한 애틋한 동족의 의식, 식민과 함께 밀려든 역사의 무상함, 반전된 역사적 현실 앞에 좌절된 연민의 정을 각기 다른 방언으로 토로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인이 이념의 권좌 앞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친일과 김일성 혁명의 붉은 깃발의 프로파간다로 무너져 버린 이용악은 애달픈 시인이다.

2024-09-09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비나이다! 비나이다! 터줏대감님께 비나이다! 검은 시루 앞다리 선각에, 뒷다리 후각에 태산같이 삼시하고, 아무쪼록 박씨 가문 말끝마다 향내 나고, 웃음마다 꽃이 피고, 낮이면 물을 맑히고, 밤이면 불을 밝혀 앉아서 삼천리, 서서 구만리를 돌보아 주소서!”(하략) 장독대 정화수 바쳐놓고 발복(發福)을 빌던 우리네 어머니들이 즐겨 하던 고삿말이다. 행운이란 기적과도 같은 것, 신에 의지해서라도 잡고 싶은 게다. 핏줄끼리 통혼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람들을 아래턱이 몇 센티미터씩 돌출되는, 합죽이로 진화(?)를 거듭하였다. 악과 선 사이를 줄타기하며 600년 이상을 버텼다. 여기에 가톨릭이라는 불멸의 영혼, 희망을 카테고리로 기생하면서 편의에 의해 이용되거나 또 폭력에 정당성을 뿌리내린 채 당당하게 살아날 수 있었다. 1230년대,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베리아반도가 한 국가로 통일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이베리아 동부와 지중해의 코르시카, 시칠리아, 이탈리아반도 허리까지 차지하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혼인함으로써 연합 국가의 가톨릭 왕들이 태어났다. 도미니크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종교재판만을 합동으로 운영하면서 각기 다른 주권과 정치체제로 국가를 운영했다. 국토 회복 운동 ‘레콘키스타(통일 에스파냐)’, 즉 이슬람교도와 전쟁에 힘이 두 배로 비축된다. 이들은 이베리아반도에 하나 남은, 베르베르인이 지배했던 그라나다 나스르왕국(알람브라 궁전)을 1492년에 멸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오스만제국에 의해 실크로드가 가로막히자, 시선을 바다로 돌리면서 신대륙 발견이라는 대항해시대로 접어든다. 이때 콜럼버스에게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가 바로 카스티야이레온 왕국의 이사벨 여왕이다. 15세기, 유럽대륙 서쪽, 이베리아반도에서 지독한 가톨릭 제국 에스파냐가 식민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황금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부상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하여 세력균형을 맞추려는 듯 동쪽에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력이 충만을 더해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년)가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의 제위를 물려받기는 했지만, 당시 나라의 제정 상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제후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했고, 더구나 프랑스의 군주들까지 왕왕 시비를 걸어왔다. 한꺼번에 해결할 대단원의 반전이 필요했다. 군사와 자금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늘은 합스부르크 편이었다. 당시 프랑스와 날을 세우던 부르고뉴, 즉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지배하는 왕국의 대공 카를의 무남독녀인 상속녀 마리를 아내로 얻었다. 그녀는 누구나 군침을 삼키는 행운의 여신이었다. 네덜란드 영토를 결혼지참금으로 가져와 남편 막시밀리안 1세에게 안기자 유럽 최고의 상업 중심지를 확보하면서 날개를 단다. 이렇게 되기까지 매우 드라마틱한 사연이 있다. 부르고뉴 공국 카를은 로렌 공작과 벌인 낭시 전투에서 전사하고, 상속녀 마리마저 감금당하고 말았다. 이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프랑스 루이 11세가 마리를 자기 아들 샤를과 결혼시키기 위해 군사를 몰아왔다. 그러나 카를 대공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긴다.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와의 결혼은 반드시 성사시켜라!” 평생의 정적 프랑스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는 재원도 부족했을뿐더러 헝가리 왕 마차시 1세가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라 군사를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이때 상속녀 마리는 얼굴도 본 적 없는 미래의 신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일생의 도박을 건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보물을 보내 그를 도왔다. 막시밀리안 1세는 그 보물을 이용해 용병을 고용해 마리를 구출하고 프랑스를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사랑을 쟁취하면서 동시에 신성 도이칠란트의 왕좌에 오르자,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중세란 터널을 지나면서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와도 손잡아 앙숙 프랑스의 기운을 뺏다. 에스파냐와 합스부르크 이 두 제국은 국고를 낭비하고, 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전쟁보다는 현명하고 합리적이며 평화적인 방법을 선호했다. 제국의 굳건한 동지는 사촌보다 사돈이 더 좋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황태자 필리프(미남공)과 공녀 마르가레테가 그들이다. 그리고 당시 에스파냐에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장남 후안과 둘째 딸 후아나가 미혼이었다. 이들 두 제국은 겹사돈으로 유럽을 동서로 연결하며 경사를 맞는다. 미남공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 난 아들이 세기의 풍운아 카를 5세다. (계속)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09-09

울릉군의회 민생불편해소인가 힘의 논리인가…현재 대한민국 국회를 보는 느낌

경북부 김두한 기자 울릉군의회가 재정지원금의 투명성·적정성, 대중교통의 건전한 육성·지원을 위해 '대중교통운송사업의 재정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의결했다. 이 조례안 심사에서 울릉군의원 7명 중 3명이 반대 입장을 냈다. 울릉군 내 각급사회단체 17개 단체가 제고를 요청했다. 특히 대중교통이용 가장 많고 민원 발생이 잦은 북면지역 의원도 반대 의견을 냈다.  민생의 불편을 없애는데 누구든지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반대 여론이 있는 조례에 대해 합의도출이 아니라 숫자의 논리가 작용한 느낌이 들어 마치 현재 대한민국 국회모습을 보는 것 같다. 조례안 중 모순된 내용의 개선을 통한 대중교통의 건전한 육성보다  '규제를 위한 조례' 성격이 짙어 오히려 불편 더 가중시키고 대중교통이 퇴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따라서 울릉군의회 전체 의원들이 논의를 통해 좀더 건설적인 합의안을 만들어 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업자를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당 이익추구는 절대 안 된다. 사업자도 혈세 낭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울릉도 관광발전을 저해하고 자가용이 없는 주민들의 발인 대중교통이 불편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선 이 조례안의 쟁점은 차량구입비를 사업자가 30% 부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울릉군의회가 조례제정의 합리성을 설명하면서 1년간(2022년 기준) 포항시버스 1대 당 1억7300여만 원과 울릉군의 8000여 만 원지원을 단순비교한데 대해 오류가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울릉군의 대중교통지원도 육지와 단순비교 해서는 안 된다.  눈이 많이 오는 겨울철, 비탈길, 시멘트포장· 파손도로, 잦은 낙석, 월파 등 육지에 없는 교통환경 특성으로 차량 훼손이 심하다. 때문에 차량 내구연한(견딜 횟수)이 육지보다 절반 이상 줄어든다. 지금까지 차량을 전량 울릉군이 구매를 해줬다. 그런데도 차량의 부식이 심해 폐차수준의 차량이 운행되고 있다.  하지만, 조례에서 사업자가 30% 부담한다고 명시한 것은 조례안 취지의 큰 모순이다. 이 조례안은 애초 차량 구매에 대해 50%를 사업자가 부담해야 한다고 했지만, 잘못됐다는 지적이 있자 30%로 낮췄는데 마치 과거에는 사업자가 50% 부담했는데 울릉군의회가 30%로 낮춰 준 것으로 호도되고 있다. 차량을 전량 울릉군이 구매해주는 지금도 배차시간, 차량 훼손 등으로 많은 민원이 제기되는 데 제정조례 내용에 추가 지원은 없고 규제 및 사업자를 옥죄는  '갑질형 조례'성격이 짙다. 과연 서버스 개선을 통한 대중교통의 건전한 육성, 주민의 교통불편이 해소될 지 의문이다.   대중교통이 원활하고 편리하면 자가용 구입이 줄어들어 주차 대란을 조금이라도 해소할 수 있다. 또 관광객도 차량을 갖고 들어오는 것보다 대중교통이 편리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도록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 울릉도 교통발전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이 조례가 대중교통 건전육성, 주민의 불편을 없애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용자가 더 불편하고, 오히려 퇴보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울릉군의회가 숫자의 힘으로 밀어붙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

2024-09-09

분노를 조절하는 색다른 방법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내가 사는 청도의 이번 여름철 강우량은 예년과 비교해 적은 듯하다. 비는 잦게 내렸으나, 전체적인 강우량은 상당히 부족해 8월에는 마당의 잔디와 텃밭에 이틀에 한 번꼴로 물을 줘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선지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8월 초에 얼굴 내밀어야 할 상사화(相思花)가 8월 하순이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이 무슨 해괴한 노릇인가?! 해마다 초봄이면 진초록 이파리 내보내고, 8월 초가 되면 어김없이 화사한 연분홍색 꽃을 피워냈던 상사화다. 그것도 무려 10년을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서. 더욱이 진초록 이파리가 그 세(勢)를 불려 올해는 여느 해보다 풍성한 상사화를 보리라 남모르게 고대하고 있던 터에 얼굴마저 내밀지 않는 꽃을 기다리는 아쉬운 마음만 깊어가는 것이다. 그러다 홀연 하나의 생각이 찾아들었다. ‘필시 수분부족에서 기인한 게 아닐까?!’ 그래서 8월의 전반적인 강우 상황을 돌이켜보다가 무릎을 친다. 그렇다. 비가 적으니 토양 속으로 스며들 수분의 총량이 줄어든 것이고, 꽃을 피워 올릴만한 내적인 동력이 고갈된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상사화 이파리 나온 곳을 찾아서 듬뿍 물을 주기 시작한다. 그렇게 1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20mm 가까운 단비가 우리 동네를 찾아왔다.‘이번 비가 필경 개화를 촉진할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혼잣말한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비록 단 두 줄기였지만, 상사화 꽃대가 곧게 올라오더니 시원스레 하늘로 몸을 여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반가울 데가 있나, 하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 아는 이들에게 전송한다. 그와 함께 짧은 글을 지어 블로그에 올리고, 동창회 밴드나 카톡에도 부지런 떨면서 늦었지만 반가운 상사화의 개화를 알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진을 받았거나, 블로그에 실린 글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은 정말 천만뜻밖이었다. 뭐, 그만 일로 수선을 떨 필요가 있느냐, 하는 식의 시큰둥한 표정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소주(蘇州) 한산사(寒山寺)에서 만났던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에 감동하여 수많은 사람에게 카톡으로 알렸던 상황이 반복된 셈이다. 기막힌 한시(漢詩)를 보내줘서 정말 고맙네, 잘 읽었어, 하고 답장 보낸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오래도록 혼잣말한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번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게다. 뭐, 대수롭지도 않은 걸 가지고 호들갑인가?! 나이값도 못하고서, 쯧쯧…. 사정이 이럴진대, 나름의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 십인십색 각양각색 아닌가. 각자도생의 시간대라니, 각자 제멋에 겨워 사는 것이리. 해와 달도, 별과 우주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특별한 일도 아닌 게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은 나 아닌 사람은 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구도 나와 같은 느낌, 생각, 취향, 기획, 판단 같은 걸 공유하지 않는다. 모두 이상한 사람들이야, 생각하면 서운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을 터. 억제키 어려운 분노를 조절할 때 활용해보시기 바란다.

2024-09-08

뜨거운 감자…정년 연장

우정구 논설위원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안을 발표하면서.보험 의무가입 상한연령을 64세로 올릴 것을 검토한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정년연장도 동시에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끌고있다. 현재 정년 60세를 그냥 두고 보험료 납입기간을 64세로 올릴 경우 보험료를 납부할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보험료 의무가입 연령과 정년이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져야 공적제도인 연금제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 은퇴 후 연금을 받을 때까지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연금시스템을 유지하는 방안이라는 뜻이다. 노동계는 이와 관련 “연금과 정년의 사다리가 끊겨 노후소득 보장장치가 없으므로 정년연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정년연장이나 퇴직후 재고용의 방법으로 소득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년퇴직제는 본래 인적자원의 신진대사와 업무 능력 효율화에 있다. 그러나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령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노동시장의 판도가 과거와 달라졌다. 상대적으로 인구감소로 생산인구는 줄어 고령인구의 재고용 필요성이 높아진 게 현실이다. 다만 정년연장이 기업의 부담 증가뿐 아니라 젊은층의 일자리를 줄어들게 하는 역효과도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은 연령을 이유로 강제 퇴직하는 것을 연령차별로 간주, 금지하고 있다. 미국은 1967년부터 관련 법이 만들어졌다. 노령인구가 많은 일본은 65세로 정년을 연장했고 70세까지 계속 고용을 권하고 있다. OECD 국가 중 노인빈곤률(40%)이 가장 높은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면 정년연장의 당위성은 높은 편이다.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정년연장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어떨까. 관심이다. /우정구 (논설위원)

2024-09-08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김종찬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개선(改善)을 국어사전에서는 ‘잘못된 것이나 부족한 것, 나쁜 것 따위를 고쳐 더 좋게 만듦’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산업현장에서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개선 그 자체에만 목표를 두지 않고 개선된 결과가 오래 ‘유지관리’되도록 하는데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유지관리’된다는 것은 멈춰 있는 것을 의미하며 기업의 강점이 아니라 개선점이 되는 것이다. 현상 유지가 아니라 지속적인 노력이 조직을 포함한 프로세스, 제품 또는 서비스에 수반될 때 조직은 변화되고 강건한 기업이 된다. 이 지속성은 일을 시작하고 나서 완료하는 데 까지 꼭 필요한 성공의 핵심 에너지원이다. 그래서 은나라 시조인 성탕 임금은 반명(盤銘)에 날이 갈수록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인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란 글을 새겨 놓고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신우일신’의 의미가 내포된 지속적이면서 머무름 없이 깨어있는 발전적 노력은 기업 진화 발전의 핵심요소가 되고 있다. 제한된 자원을 기술력으로 무한하게 ‘일신우일신’한 사례는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1970년대 기술로는 대륙붕 연안에서만 석유 생산이 가능했고, 탐사 기술도 초보적 수준이었으며, 시추도 기술이 없으니 산업의 핵심 자원인 석유가 20년이면 고갈된다는 주장들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심해에서도 석유를 캐내고, 파도가 거친 유럽의 북해 유전에서도 채취되며 대륙붕이 아닌 바위틈 사이에 있는 가스와 석유를 녹여서 캐내는 시대이다. 즉 새로운 자원이 ‘일신우일신’된 기술에 의해 고갈되지 않는 자원을 더 값싸게 이용하고 있으며 기업은 안정적으로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랩 그로운 다이아몬드가 각광받는 것도 지속적인 기술 개발에 의해 점점 생산 원가가 낮아지면서 대중화되고 있는 영향에 기인하는 것이다. 벨기에 왕실 산하 기관인 안트베르펜 다이아몬드 센터(AWDC)에 따르면, 랩 그로운 다이아몬드 생산 비용은 2008년 캐럿당 4000달러에서 2018년 300~500달러 정도까지 줄어들었다.‘블러드 다이아몬드(분쟁 지역 다이아몬드)’ 같은 원산지 논쟁에서도 자유롭고, 채굴하는 방법 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은 부분도 강점이니 처음의 성과에서 머무르지 않고 ‘일신우일신’한 결과는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더욱 높여 놓은 것이다. 이렇듯 늘 새롭게 변화하고 최고의 효율을 견인하는 핵심은 지속성이며, ‘안되는 이유가 논리 정연한’ 조직은 밀어내고, ‘안되는 이유 보다 할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는 조직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무려 37.2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의 신체도 매일 0.025%의 세포를 교체한다고 하니, 오늘 하루도 내 몸에서 약 930억 개의 세포가 죽고 그만큼이 새로 생겨나는 것이다. 약 11년이면 거의 모든 세포가 새롭게 교체되는 생존의 신진대사를 하는 동안에 나 자신은 날로 새로워지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문자답해 볼 일이다.

2024-09-08

일제강점기 국적 논란을 끝내는 법

유영희 작가 내 책상 한쪽에는 ‘손바닥 헌법책’이 놓여있다. 딱 손바닥 크기인데, 손바닥보다는 얇다. 몇 년 전, 20권을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었던 책이다. 너무 작아 책꽂이에 꽂으면 파묻혀서 책상 위에 놓아두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자주 들춰본 것은 아니다. 그러다가 최근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 논란을 보면서 다시 펼치게 되었다. 맨 앞에는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나오고, 뒤를 이어 1948년에 공포한 대한민국 제헌 헌법 전문과 1987년 개정한 대한민국 헌법이 차례로 나온다. 모두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한 달이 넘게 뉴스를 달구고 있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 논란은 지난 8월 6일 새로 임명된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독립기념관장 면접에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답했는데, 10명의 후보자 가운데 최고점을 받았다. 그 때문에 각계 각층에서 김형석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당시 면접관도 비판하는 상태이다. 김형석의 뒤를 이어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도 지난 4일 KBS 라디오 ‘전격 시사’에 출연하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은 일본이라는 평소 입장을 고수하는 발언을 하면서 지금은 건국절 논쟁으로까지 치닫는 상황이다. 건국절은 나라를 세운 날이라는 의미인데, 이때 나라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의미한다. 이런 논란을 끝내기 위해서는 국적의 의미를 합의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국적이란 개인이 국가와 맺는 법적인 관계를 말한다. 개인이 특정 국가의 국적을 갖게 되면 그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고 의무를 지게 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일본 국적법을 조선에 적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 헌법을 조선에도 적용하게 되면, 조선인에게 투표권도 주어야 하고 일본 국민으로서 보호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주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일본 헌법을 적용받아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국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제국에 의해 강제로 주권을 침탈된 상태를 일본 국적이라고 할 수 없다.‘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 의하면, 1871년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부터 국적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국적자유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에 의하면, 국적은 강제로 부여할 수 없다. 주권이 없다는 것과 일본 국적이라는 말은 동의어가 아니다. 일본은 일본 국적법이 아니라 조선 총독부가 만든 제령으로 조선을 지배했다. ‘제령’은 일본 천황의 재가를 받는 명령이기는 하지만, 헌법은 아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제령 중 대표적인 것은 1912년에 제정한 ‘조선민사령’과 ‘조선형사령’이다. 일상에서 한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법령들이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용어를 분명하게 쓰는 것이다. 지도층일수록 사회적으로 합의된 언어를 써야 한다. 그것은 건국절도 예외가 아니다. 1948년 이전에도 우리에게는 나라가 있었다.

2024-09-08

군사와 교통 요충지 상주, 대구 군부대 이적 최적지

강영석 상주시장 대구 군부대 이전에 대한 국방부와 대구시의 시계가 연말 후보지 선정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도청과 혁신도시 유치에서 두 번 모두 차점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신 상주시민의 한과 열망이 군부대 유치로 달아 오르고 있다. 상주시는 3개의 고속도로가 관통하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지다. 지난 2022년 문경~상주~김천 중부선이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면서 서울 수서에서 상주까지 1시간 17분, 상주에서 거제까지 1시간 30분대로 연결될 전망이다. 게다가 동대구까지 KTX이음 직통 노선이 신설돼 50분대에 접근이 가능해진다. 철도가 개설되면 상주에서 전국 어디든 2시간대 연결이 가능하며, 중부 및 남부내륙의 산업벨트가 구축된다. 상주는 국난 때마다 전세를 역전시킨 격전지가 육군 전사에 가장 많이 실려 있을 만큼 군사적 거점 역할을 해온 전략의 요충지였다. 상주는 삼국시대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서북 내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배후기지였다. 삼국통일 이후 대몽항쟁 당시 지역민과 승려들이 힘을 모아 오랜 항전으로 나라를 지켜낸 상주는 줄곧 ‘호국보훈의 도시’로 숭고한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왔다. 육전의 명장이자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우는 충의공 정기룡 장군의 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정기룡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요충지인 상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전쟁의 판도를 바꾸며 임진왜란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칭송받는다. 이뿐 아니라 6·25전쟁 당시 한국군 단독 최초 승리전투인 화령장 전투가 벌어진 곳도 상주였다. 북한군의 불법 기습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며 수세에 몰렸던 우리 국군이 전쟁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인 전투가 ‘화령장 전투’다. 상주시는 교육발전특구 선정을 통해 미래교육도시 조성에도 앞장서고 있다. 군부대 유치와 관련해 상주시가 가장 먼저 고민한 부분은 바로 교육환경 개선이다. 군인 자녀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지역 사립고등학교에 한민고의 교육시스템을 도입해 명문학교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지난해 4월 경북교육청과 업무협약을 맺고 2031년까지 358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 교사ㆍ학생 주도형 방과 후 프로그램 확대 운영, 온마을 아이들 스쿨버스 운영, 청소년 복합문화시설 조성 등 미래교육 종합지원플랫폼 구축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교육발전특구로 선정돼 매년 60억원의 예산을 들여 24시간 거점형 돌봄 시스템 구축, 상주형 교육지원 모델 도입, 첨단산업 맞춤형 인력양성 등 돌봄-교육-취업으로 이어지는 교육도시를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상주시는 지난 7월 ‘한국형 화이트존’인 공간혁신구역 선도사업지로 선정됐다. 이 사업은 토지의 용도 제한을 없애고 용적률과 건폐율도 지방자치단체가 자유롭게 정할 수 있어 융·복합적 도시 개발이 가능한 특례구역이다. 이에 따라 ‘국·공유지를 활용한 콤팩트시티 개발’을 목표로 대대적인 도시 재창조 프로젝트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콤팩트시티의 주요 구성 요소로는 복합문화센터, 공동주택, 비즈니스타운, 센트럴파크, 도로 등이 포함되며, 민자를 합해 약 5070억 원의 총사업비가 투입될 예정이며, 총면적은 약 7만3000㎡에 이른다. 특히, 상주시는 문화도시로 발돋움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역점시책으로 추진해 온 만화특화 상주시립도서관을 준공해 운영하고 있다. 도서관은 사업계획 단계부터 대규모 선형공원인 복룡 시민문화공원과 인접한 이점을 고려해 복룡동 일원에 건립했으며, 공원과 건축물 간의 적극적인 연계에 초점을 맞췄다. 시립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의 기능을 넘어,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향유하는 공간으로서 시의 대표 랜드마크이자, 시민들의 복합커뮤니티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민 문화 갈증 해소를 위해 문화예술회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상주 문화예술회관은 총사업비 504억여 원을 투자해 2만8552㎡ 부지에 건축연면적 6972㎡, 650석 규모의 공연장과 전시실을 갖출 계획이다. 대구 군부대 이전지역이 확정되고 부대가 이전하기까지는 많은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상주시는 외부의 시선으로 정주환경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함으로써 군인가족이 상주시에서 행복한 삶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2024-09-08

우리 땅 독도

김경아 작가 여명이 밝아온다. 바다 밑 대장장이는 밤이 새도록 풀무질로 쇳덩이를 달군다. 때를 맞춰 화로에서 불덩이를 집게로 꺼내 수평선 위로 밀어 올린다. 이글이글 타오르며 솟아오르는 저 불덩이, 해는 내 머리 위에서 떠올라 육지로 간다. 하루를 지나는 동안 저 붉은 해는 세상에 광명을 뿌리고 서해 수평선 아래로 진다. 한 치의 어김없이 동해의 새날이 밝아온다. 바위틈 옆에서 자맥질하던 주름진 파도가 하얗게 웃고, 먼 길 가던 철새들은 인사를 건넨다. 괭이갈매기는 아리랑 춤을 추며 푸른 바다에 하루를 띄운다. 밤새 해풍에 움츠렸던 명아주, 번행초, 해국, 소리쟁이, 땅채송화, 괭이밥, 방가지똥이 생기를 되찾는다. 어둑한 천장굴에 빛이 들면 독립문 바위의 당당한 위엄과 함께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육지의 모든 산은 저마다의 키재기를 한다. 봄이면 앞을 다투어 움튼 새싹들을 키우고, 여름이면 번영하고 가을이면 오색 옷으로 갈아입고 풍요의 축제를 벌인다. 비가 오면 물을 머금었다가 젖줄도 흐르게 한다. 이 산 저 산 제 나름의 멋으로 서로 어깨를 맞대고 등을 기대고 손을 맞잡았으니, 이름하여 금수강산이다. 나는 망망대해 홀로 섰다. 사방을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다. 나는 어쩌다 절해고도로 자리를 잡았을까. 왜 홀로 차디찬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것일까. 나의 외로움을 아는 걸까. 먼 길을 떠나는 철새들이 휴게소인양 내게로 와서 쉬어간다. 빗물마저 고이지 않는 열악한 내 봉우리에 바다제비, 슴새, 괭이갈매기가 서식하며 가끔 육지 산 이야기도 건네준다. 전선 줄 건너 건너 유유자적 거닐며 나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고요에 졸기라도 할까 봐 상모솔새, 솔잣새, 매 솔개 무수리는 내 머리 위를 맴돌며 지친 어깨를 쓰다듬어 주기도 한다. 내 외로움의 반경은 넓다. 품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괭이갈매기는 초록의 알을 품고 이 곳에서 터를 잡는다. 흰배지빠귀, 검은 딱새, 노랑턱 멧새도 내 머리 위를 맴돌다 한 자락 노래를 뽑는다. 내 뿌리 깊은 곳에서는 돌기해삼, 개볼락, 파랑돔, 도화 새우가 머문다. 나는 동해 한 가운데 있기에 가장 작지만 가장 큰 해양영토를 지녔다. 척박한 환경에서 일궈온 바다의 수려한 경관과 땅의 가치, 육지와 동등한 주권이 미치는 공간 속에 수많은 광물과 자원이 도사리고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산봉우리는 비록 작지만 내가 품고 있는 영토의 잠재가치는 어떤 도량형으로도 가늠할 수 없다. 내 고독의 깊이도 동해만큼 깊다. 나의 가치는 무진장이다. 돈으로 환산한 가치는 계량일 뿐이다. 내가 있기에 대한민국의 해양영토가 동해로 뻗는다. 안전한 바닷길이 동북으로 열린다. 국제정세, 전략적 효용, 어느 모로 보나 내 몸값은 여느 섬과 비할 수 없을 만큼 가치가 높다. 그러니 탐욕의 무리가 어찌 호시탐탐 야욕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나는 칼에 피를 묻히기를 좋아하는 야만족의 땅이 아니다. 대포를 앞세워 위협하길 좋아하는 불곰족의 땅도 아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설계하는 사람들, 일한 만큼 얻고 남으면 남과 나누는 사람들, 남이 어려우면 소매를 걷고 돕는 사람들, 그래도 여유가 생기면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 부모형제, 이웃이 서로 아끼는 사람들, 자유, 평등,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역사 앞에 정직한 민족의 땅이다. 나도 한반도와 같은 지정학적 운명을 타고났다. 한반도에 터를 잡고 영토를 지닌 이상 나의 영유권은 백의민족이다. 사람, 영토, 주권이 삼위일체가 되어 주어진 길을 가야 한다. 존재에는 운명처럼 가야하는 길이 있다. 펭귄은 혹독한 남극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뱀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바닥을 기어야 한다. 나 또한 가야할 길이 있다. 푸르른 초원도 아니고 수풀 우거진 숲도 아니다. 시련 끝에 영광이 있는 길도 아니고 고난 끝에 안식이 있는 길도 아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등에 지고 역사의 사막을 끝없이 가야 한다. 가슴 속에 묵직한 사명 하나 품고 뜨거운 모래사막을 걸어가야 한다. 어둠이 몰려와도 결코 졸지도, 잠들지도 않으며 앞만 보고 가야 할 나의 길이다. 사람들은 내 두 봉우리를 보고 낙타와 닮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나는 작은 산봉우리 둘 등에 지고 역사의 사막을 건너고 있다. 하나는 한민족이며 하나는 한반도이다. 역사의 등짐이 가볍지는 않지만, 그것은 내가 지고 가야 할 역사이다. 낙타가 사막을 건너듯, 나는 오늘도 묵묵히 고독한 길을 걷는다.

2024-09-08

파크골프 열풍

우정구 논설위원 실버스포츠의 대명사로 알려진 파크골프가 연령대를 넓히면서 선풍적 인기다. 파크골프협회 집계에 따르면 작년말 기준 파크골프 회원수는 14만2000여명. 6년전보다 8배 이상 늘어나는 등 폭발적 증가세에 있다. 그러나 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동호인까지 합하면 전국적으로 50만명이 넘는 파크골프 인구가 있다는 관련업계의 추산도 나온다. 파크골프는 1983년 일본 홋가이도에서 처음 창안돼 1990년대 초반 국내에 들어왔다. 노년층 중심으로 동호인 수를 늘려 실버스포츠란 별명을 가졌다. 그러나 지금은 중장년층으로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최근들어서는 청년, 장년, 노년 3세대가 함께 즐기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비싼 이용료와 고가의 장비, 오랜 경기시간 등으로 대중화가 힘들었던 골프의 단점을 보완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기는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골프와는 다르게 배우기가 쉽고, 비용이 적게 들고, 접근성이 좋은 데다 건강에도 좋으니 애호가는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들이 파크골프 인구 증가에 맞춰 곳곳에 파크골프장 건립에 나서고 있어 바야흐로 파크골프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군위군이 군비 150억원을 들여 180홀 규모의 파크골프장 건설에 나섰다고 한다. 25만㎡에 천연잔디를 깔고 클럽하우스와 부대시설이 들어선 명품 파크골프장을 만들어 군위군의 랜드마크로 삼겠다고 한다. 파크골프는 말 그대로 공원에서 즐기는 운동이다. 도보로 이동하기 때문에 걷기운동 효과도 뛰어나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국민스포츠로서는 파크골프가 제격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9-05

투(妬)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얼마 전의 일이다. 마흔 중반의 나이에,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한 10년 넘게 공부하던 외국인 친구가, 마침내 지방 모 사립대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는지 잘 알기에,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진심 축하해주었다. 그러자 그 친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길, 그동안 생계 문제로 너무 힘들어 거의 연구를 포기하다시피 했고, 다들 싸늘하고 지도교수조차 외면했던 그 무렵, 내가 도움을 주어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근데, 한 이틀 후, 다시 전화가 왔다. 매우 시무룩한 목소리로, 잘 돼서 이제 축하해줄 줄 알았더니, 다들 심드렁한 표정에다, 심지어 지도교수 및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은, 도리어 화까지 냈다는 것이다. 아마 대학에 원서 낸 줄도 몰랐다가 주변에서 소식을 들은 모양인데, 예전 하루살이 인생으로 힘들게 살 때는 ‘나 몰라라 하던 이들이, 이제 버젓이 교수가 되고 나니,‘네가 잘된 게 내 덕’이니, 와서 감사함을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축하는 못해 줄 망정, 참. 일본의 예술가 기타노 다케시는, 그의 ‘생각노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의 성공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타인의 성공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 것 같다’고.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오스카 와일드도,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벗의 곤경을 동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벗의 성공을 찬양하려면 남다른 성품이 필요하다’고. 독일어에 이런 말이 있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손해 및 불행을 뜻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freude)’가 합쳐진 말로, 타인의 불행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실험 하나가 있다. 일본 교토대 다카하시 히데히코 박사는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가상 시나리오를 주고, 뇌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 결과, 많은 피험자들이 저보다 잘난, 시나리오 속 가상 동창생들에게 강한 질투를 느꼈고, 그럴수록 불안한 감정이나 고통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배측전방대상피질’이 반응하였다. 이는 곧, 질투의 감정이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가 느끼는 불안, 내적 결핍 등과 관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내면의 결핍이나 불안은, 자신의 현 상황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내면이 알곡처럼 단단하고, 자기의 삶에 만족한다면, 절대 남의 성공을 질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묵묵히 또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조선조 3대 가자(歌者) 중 한 명인 박인로는, 소 빌리기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렇게 읊조리지 않았던가. ‘남의 집 남의 것 전혀 부러워 말겠노라. 내 빈천(貧賤) 싫게 여겨 손 내젓는다 물러가며, 남의 부귀 부러워해 손짓한다고 나아오랴. 인간 어느 일이 명(命)밖에 더 있을까’하고. 가난해도 내면의 여유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 열흘 후면 우리의 최대 명절, 추석이다. 올 추석에는, 간만에 보는 친지, 형제들 간에 누가 더 잘 났고 말고를 따지며 시기 질투로 보내는 대신, 서로의 성공을 축하해주며, 아름다운 명절,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와 같아라는 말처럼.

2024-09-05

9월 문화꾸러미를 풀어보자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9월, 가을이 왔다. 하지만 더위가 가시지 않은 곳도 있으니 백로(白露) 철을 맞은 풀잎에는 하얀 서리가 맺힐지…. 물가의 백로(白鷺)가 긴 목을 빼어 들고 갸우뚱거린다. 이제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면 추수하는 기쁨도 있으려니 들국화 향기 퍼드러지는 들판을 거닐며 즐거운 마음으로 추석을 준비해야겠다. 그리고 뜨거운 계절을 이겨온 마음을 모아 문화의 한마당을 꾸며보는 것도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바람이리라. 포항문화재단의 ‘문화꾸러미’를 펼쳐본다. 포항시에는 많은 문화공간이 있는데 포항문화예술회관, 시청 대잠홀, 중앙아트홀 외에도 시립미술관, 포은중앙도서관 및 문화예술 팩토리 등 여러 곳에서 문화 보따리가 꾸며지고 있다.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는 12일 포항시립교향악단의 제209회 정기연주회 ‘베토벤의 취미는 산책’이 공연되고 26일에는 ‘협주곡의 밤’이 계획되어 있다. 시청 대잠홀에서는 5일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인 ‘벨라미치 퍼블릭합창단 성과연주회’가 있었다. 이는 6세 어린이부터 80세 미만 어르신까지 포항시민 120명이 합창을 통한 세대 간 이해와 교제의 성과물 음악회였다. 포항의 대표적 축제인 ‘칠포 재즈페스티벌’을 빼놓을 수 없다. 29일부터 이틀간 칠포해수욕장 무대에서 재즈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9월 축제로 이름이 나있어 티켓은 예매하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축제는 국내 젊은 그룹 밴드와 재즈 아티스트 외에 일본의 유명 재즈밴드도 출연하여 오감만족을 통한 가을 낭만을 즐길 수가 있다. 미술 분야의 꾸러미도 보자. 포항시립미술관은 스틸아트 기획전 ‘스틸 플로우’와 장두건 미술상 수상 작가의 영상과 아카이브 작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매달 마지막 주 목요일에는 ‘미술관 음악회’가 열려 또 다른 예술의 감흥을 주고 있다. 시립 중앙아트홀에는 여성인권전 ‘행진2024’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보여주고 있으며, 2층의 인디플러스에서는 국내외 독립영화를 엄선하여 보통 하루 3개씩 상영하고 있는데 관람료가 있으니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서 보는 즐거움도 찾을 것이다. 시내 중앙동에는 원도심 문화예술 지구인 ‘꿈틀로’ 거리가 있는데 20개가 넘는 공방이 각자의 특이한 작업을 통해 예술인들을 모으고 있으며 ‘Space298’에서는 청년 작가들의 미술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한편 포항북구청의 ‘문화예술 팩토리’에서 20일 포항 생활문화동호회가 펼치는 공연 한마당의 색소폰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취해보는 것도 좋겠다. 14일에는 청하에 있는 기청산식물원에서 ‘상사화 음악회’가 열리니 시골바람 쐬며 달려가 붉은 상사화가 하늘대는 풍경을 보면 어떨까. 27일부터 사흘간 포항시립도서관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독서대전’이 영일대 해상 누각 앞 마당에서 벌어진다. 초청 작가들의 강연과 북토크뿐만 아니라 창작 뮤지컬과 각종 문학 전시가 있다고 하니 바닷바람 마시며 9월의 문학잔치를 즐겨보았으면 한다. 지난 8월에 장성동의 옛 미군부대 부지 8000여 평에 포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 POEX가 착공하여 2년 후에 준공된다고 하니 글로벌 마이스(MICE) 산업 중심도시로 우뚝 서며 문화예술 도시로 거듭나기를 꿈꾸어 본다.

2024-09-05

여름 가고 가을이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한낮에는 여전히 30℃를 넘는 폭염이다. 지난여름은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높은 평균기온을 기록할 정도로 더위가 심해서 기상이변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 우리나라 정국(政局)이 그런 날씨를 많이 닮았다. 좌파에서 우파로 정권이 바뀐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좌파 세력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압도적 다수의석을 차지한 국회를 교두보로 현정권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는 상황이다. 국회의 주요 상임위원장 자리를 독식하고 온갖 패악질로 정부 정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 고유권한인 특검(특별검사제)과 탄핵 발의를 남발해서 정부기관을 마비시키고, 검찰과 사법부까지 협박하는 행태를 자행하고 있다. 저들의 당대표를 수사하는 검사들을 탄핵하고, 노조에 장악된 공영방송의 정상화를 막기 위해서는 연거푸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를 사퇴시키더니 결국 이진숙 위원장을 탄핵소추 해놓고 있다. 다수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어떻게 정부를 방해하고 위협하고 공격할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보여주는 세계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계절이든 역사든 거꾸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연일 열대야를 이어가던 밤 기온은 이제 제법 선선해졌고, 들판에 나가보면 벼들이 벌써 고개를 숙이고 영글어 간다. 고추가 빨갛게 물들고 코스모스도 피기 시작한다. 정치권에도 늦게나마 계절이 바뀌고 있다. 사법부의 수장이 바뀌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지난 정권이 임명한 판사들도 하나씩 교체되고 있다. 하지만 방문진 신임이사 임명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에서 인용 판결을 내린 것처럼 아직도 지난 계절의 잔재처럼 일부 남아서 사법체계를 어지럽히는 판사들이 없지는 않다. 지난 정권 비리의 수사를 막았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이원석 검찰총장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 정치권의 범죄 수사가 한층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가 된다. 사실 문재인 정권은 들어서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적폐청산을 명목으로 박근혜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탈탈 털어서 사법처리했다. 그래 놓고 정작 자신은 온갖 의혹이 있음에도 2년이 넘도록 수사 한번 받지를 않다가 최근에 와서야 딸과 관련된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 선상에 올랐다. 문재인 정권의 비리와 범죄혐의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심대하다. 가장 심각한 적폐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고 국방과 안보를 무력화한 것이다. 국정원과 군기무사의 기능을 축소·박탈하고 정기적인 군사훈련조차 폐기하는 등 주적인 북한에 대해 거의 무장해제를 한 수준이었다. 탈북어민 강제북송, 해수부 직원 피살 방치 같은 반인권적인 작태에다 탈원전 정책으로 원전생태계를 파괴하여 막대한 국익손실을 끼친 것, 울산시장선거 개입과 옛 사위의 이스타항공 취업 관련 뇌물수수 혐의도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 아무튼 시원한 가을바람이 후텁지근한 여름의 열기를 날려버리듯, 공정하고 엄정한 법집행으로 지난 적폐를 일소하여 가을하늘처럼 맑고 푸른 정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만치 가을이 와 있다.

2024-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