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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아직도 친일몰이, 피해망상인가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나 생각을 가지는 심리적 상태를 피해망상(被害妄想)이라 한다. 이는 정신질환의 주된 증상 중 하나로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해서 나타난다. 유전적 요인도 있고 도파민, 세로토닌 같은 뇌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으로 유발될 수도 있다. 심한 스트레스나 트라우마가 원인일 수도 있고 약물남용이나 신체적 질병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피해망상의 주요 증상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공격, 감시, 음모 등의 피해를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비합리적인 경우가 많다. 확실한 근거도 없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거나 속이거나 이용하려 한다고 믿는가 하면,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자신을 겨냥한 의도적인 공격이나 비난이 있다고 느껴서 과민반응을 한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타인의 행동을 감시하거나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CCTV를 설치하는 등 비정상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우리 민족이 직간접적으로 받은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나 일제에 대항해 싸우다 순국하신 분들과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옥살이를 하신 분들, 그 유족들의 원한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일제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히고 항일투쟁을 하다 순국하셨거나 고초를 겪으신 분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와 보상도 마땅히 따라야 한다. 역사적 사건의 진상은 학자들이 철저히 규명할 일이고, 개별적이고 개인사적인 일들은 문학작품 등을 통해 조명되기도 했다.올해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지 79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제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80세 이상 되는 노인들 뿐이다. 그분들 중에는 아직도 상당한 트라우마를 가진 분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사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우리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방심하다가는 또다시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될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우려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을 추월하는 단계에 이른 지금도 그런 우려를 하는 국민은 아마 없을 것이다.그런데도 친공·좌파들은 아직도 일본에 극도의 피해의식을 가진 것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지금도 일제의 식민지라는 착각에 죽창이라도 들고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는 심각한 정신질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좌파들의 친일몰이는 그런 피해망상이나 위기의식은 아닌 것 같다.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수시로 친일몰이를 꺼내드는 것은 궁지에 몰린 국면을 뒤집어 보려는 교활한 수작인 줄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프랑스와 독일이 지금 우방으로 지낸다고 침략전쟁의 과거를 잊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듯,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 정책도 일제의 침탈을 망각하거나 용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좌파 정치인들이 당면한 사법리스크 방탄용으로 써먹는 친일몰이에 현혹되어 퇴행적 과거집착에 함몰할 것이 아니라 지금은 오로지 새로운 역사를 쓸 때다.

2024-08-22

무더운 8월의 망각

윤영대전 포항대 교수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고 숲속에는 매미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바다 물놀이가 즐거웠던 영일대 해수욕장도 지난 18일 일요일 저녁에 폐장한다는 현수막이 붙어있으나 해변을 찾는 시민의 발걸음은 여전히 북적거린다. 이제 농부들은 호미를 씻어 놓고 휴식을 취하는 농한기에 들어가겠지만 텃밭을 가꾸는 도시농부들은 작은 삽을 들고 김장용 배추나 무를 심을 즐거운 계획을 세우겠지…. 이때쯤 한줄기 큰비라도 내려 더위를 씻어주는 ‘처서 매직(magic)’을 기다려 보지만, 올해의 첫 태풍인 9호 ‘종다리’는 기세 좋게 서해로 올라오더니 어저께 열대성 저기압으로 기세가 꺾인 후 소멸하여 돌풍과 함께 엄청난 폭우를 뿌리며 중부지방을 지나가 버렸다.올해는 8월 중순까지 태풍 소식이 없는 이례적인 기상 상태를 보여주더니 이번 백중사리 때에 맞추어 종다리의 날개짓으로 서해안을 넘치게 하고 습한 찜통더위로 전력수요도 100GW(기가와트)급으로 급증시켰다. 종다리는 종달새, 노고지리라는 텃새인데 북한이 제시했던 태풍의 이름이다. 이 종다리는 6년 전에도 12호 태풍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더니 일본 본토를 휘젓고 거꾸로 한 바퀴 돌고는 남중국 쪽으로 빠져나갔었다. 그때도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서울 지역을 40도 가까이 달구었었는데 이번 종다리는 대구 포항 권역을 35도 이상의 찌는 듯한 열기로 덮어 계속 달굴 모양이다.이런 무더위 속에 덮쳐 온 나쁜 소식이 있다. 잊혀져 가던 코로나19의 재확산이다. 새로운 변이로 의료공백 장기화로 가뜩이나 불안한 의료계에 초비상이 걸렸다. 감염자 수가 한 달 사이 6배로 빨라졌고, 질병관리청은 이달 말까지 35만 명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며 증상이 감기나 독감과 유사하여 유행 속도가 빨라지지나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이 더운 여름철에 다시 마스크를 써야 하는 고민이 생겼다. 65세 이상 고령자나 기저질환자는 증세가 인지되면 즉각 검사하여 확산을 막아야 하는데 이제 팬데믹 현상으로 4급 감염병이라 격리 의무는 없다.또한 8월 말은 각급 학교의 개학 기간이다. 초중등은 이미 개학한 곳이 많겠지만 늦어도 다음 주까지는 모든 학교가 문을 열게 되니 철저한 방역으로 지난 4년간의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힘을 기울여야 한다. 질병관리청은 현재 코로나19가 계절독감과 같이 치명률이 낮은 만큼 과도한 불안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치료제와 백신 접종에 대한 대책을 확실하게 세우고 있는지 염려스럽다.폭염은 계속되고 있다. 두 달간 돼지와 닭 등 가축이 100만 마리 가까이 폐사하고 해수 온도 상승으로 양식어류도 500만 마리 이상이 물 위로 떠올랐다. 배추, 시금치 등 채소도 피해를 입어 밥상 물가를 들썩이고 있으며 이상기후가 추석을 앞둔 실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걱정이 태산이다.갈수록 뜨거워지는 기온으로 인해 강에는 녹조, 바다에는 적조가 두터워지고 가을을 맞으며 밀려온 태풍은 집중호우를 퍼붓는다. 무더운 8월, 잘 익은 붉은 복숭아의 달콤함에 빠져 시원한 휴식을 취해보고 싶다.

2024-08-22

박정희 영문 표기조차 통일하지 못하나

홍석봉 언론인 TK라는 단어는 대구·경북의 로마자 표기 줄임말로 많이 사용된다. 정치 성향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인다. PK(부산·경남)와 대비된다. 한글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TK가 아니라 DG(Daegu-Gyeongbuk)가 맞다.하지만, 개정 로마자 표기법(2014년 시행)이 사용되기 이전에 굳어진 말로 관행화됐기 때문에 TK(Taegu-KyEB20ngbuk)가 보편화했다. 현재 DG는 대구시의 머리글자로 더 많이 쓰인다. 언론 등에서도 ‘DG’와 ‘TK’를 병행 사용하는 등 한동안 적잖은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TK’로 굳어졌다.우리나라 5대 성씨인 김, 이, 박, 최, 정은 Kim, Lee, Park, Choi, Jung으로 표기한다. 개정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Gim, I, Bak, Choe, Jeong이 맞지만, 표기법에 어긋난 Lee, Park, Choi 등이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5대 성씨가 표준을 이기고 정설이 된 것이다. 성씨 표기는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됐다.급기야 국립국어원이 성과 이름은 독자적으로 표기를 정할 수 있도록 로마자 표기법을 개정했다. 원칙을 깨고 관례화된 표기를 공인한 것이다.동대구역의 박정희 광장, 영문 표기 논란이 일단락되는 모습이다. 대구시가 동대구역 광장 이름을 ‘박정희 광장’으로 바꿨다. 이곳에 세운 표지석에 ‘Park Jeong Hee’라고 명기했다. 논란이 거셌다. 박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시가 “박 전 대통령은 여권과 방명록에 자기 이름을 ‘Park Chung Hee’로 썼다”며 “박 전 대통령의 뜻을 존중해 영문 표기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 박 전 대통령 관련, 기록물에 고유명사처럼 쓰였고 정부 대통령기록관, 박정희대통령기념관에도 그대로 표기됐다고 했다.반면 대구시는 로마자 표기법에 따랐다는 입장이다. 국립국어원이 정한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정’은 ‘Chung’이 아니라 ‘Jeong’으로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구시는 박정희기념사업위원회에서 재논의했지만 결국 원안을 유지하기로 했다.박정희 영문 표기는 두 가지의 공존이 불가피해졌다. 외국인들은 헷갈리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통일했어야 했다.논란의 불씨는 남아있다. 대구시와 경북도가 공동추진 중인 대구·경북신공항 이름을 박정희 공항으로 짓는 방안이 유력하게 대두한다. 현재 대구·경북 통합과 관련, 통합 청사 위치와 관할 범위 등을 두고 신경전을 펴는 마당에 양 시도가 신공항의 영문표기를 두고 충돌할 가능성이 크다.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제7항에는 ‘인명, 회사명, 단체명 등은 그동안 써 온 표기를 쓸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한때 ‘짜장면’ 표기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표준어는 ‘자장면’이 맞지만 ‘짜장면’이라는 말이 워낙 대중화돼 널리 사용되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이 ‘짜장면’과 ‘자장면’ 둘 다 표준어로 인정하고 말았다. 그만큼 언어 습관은 무섭다. 대구시의 결정에 아쉬움이 남는다.

2024-08-22

영화 관람료 논쟁

우정구 논설위원 영화는 과학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과학의 산물로 탄생한 영화는 이후 예술영역의 주요 분야로 자리를 잡고 산업으로도 영역을 키우고 있다. 또 많은 사람이 힐링을 위해 즐겨 찾는 문화 콘텐츠로서도 입지를 잘 굳혀가고 있다.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의 하나가 됐다. 지금 이 시간도 전 지구적으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영화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미디어 산업의 발달로 이제는 영화관에서만 상영되는 것이 아니고 TV나 스마트폰, 인터넷, DVD 등 다양한 방법으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일반인의 문화생활 도구로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정신 건강을 돕는 수단으로서 영화는 우리와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이다.영화배우 최민식이 TV에 출연해 영화 티켓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한 후 영화 관람료를 둘러싼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극장가 관람료가 최고 50%가량 인상된 게 촉발 배경이다. 구경하기가 부담스럽다는 반응들이 많이 나온다. 일각에선 코로나 때 죽었다 살아났으니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반응도 있으나 관람료 인상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다.여기에 티켓가격 인상과는 별개로 볼 것이 별로 없다는 한국영화 콘텐츠에 대한 비판까지 가세되면서 논쟁은 또 다른 논란을 낳고 있다.문제는 영화관람 대신 넷플릭스와 같은 OTT를 찾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TV 화면보다 영화관 대형 화면에서 보는 재미가 분명 있을 텐데 관객이 줄어드는 것은 한국영화의 위기로 볼 수 있다. 가격일까, 콘텐츠 부족의 문제일까 한국영화산업이 고민할 문제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8-22

양념딸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나는 여형제가 없다. 위로 세 살 터울의 오빠, 아래로 연년생인 남동생 가운데다. 엄마는 종종 남들에게 나를 가리켜 양념딸이라고 했다. 양념은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 쓰는 참기름, 들기름, 깨소금, 간장, 소금, 파, 마늘 등등의 온갖 식재료를 일컫는다. 음식은 원재료도 좋아야 하지만 맛깔나게 하는 건 무릇 갖은 양념들이다. 왜 양념딸이지? 궁금했지만, 재미없고 무심한 아들들만 있는 것보단 하나 있는 딸이 마치 양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걸로 미루어 짐작했다. 알고 보니, 양념딸은 고명딸의 사투리이고, 아들 여럿 있는 집의 외딸이라는 의미였다. 그럼 고명딸의 고명은 무엇인가.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 음식에 꼭 필요한 게 아니어도 음식을 더 예쁘고 맛있어 보이게 치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떡국 위에 얹는 노란색, 하얀색 달걀지단과 붉은 소고기 꾸미, 까만색의 김과 같은 색색의 웃기나, 감주 위에 동동 띄워 얹는 잣과 같은 것, 곧 서양요리의 토핑이 바로 고명이다. 양념이든 고명이든 간에 음식을 맛나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듯, 양념딸이나 고명딸은 아들 많은 집에 양념처럼 맛내고, 고명처럼 예쁘게 얹힌 하나뿐인 딸이라는 뜻이니 고마운 치사가 아닌가. 실제로 아버지와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무던히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지지해 주셨다. 아들과 딸을 전혀 차별하지 않는 두 분이셨다.어느 날 엄마에게서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한 얘기를 들었다. 예전 내가 초중등학교 다니던 시절엔 귀한 흰쌀밥 대신 보리밥을 주로 해먹었다. 미리 한 번 삶은 보리쌀을 밥솥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흰쌀을 한줌 넣어 지은 밥이다. 밥을 푸는 순서에 따라 흰쌀이 좀더 섞였다. 엄마는 아버지 밥을 먼저 푸고 난 뒤, 3남매 도시락밥을 펐다. 그 다음엔, 얼마 남지 않은 흰쌀과 보리쌀을 모조리 두루 섞었다. 그 순간 누구 밥을 먼저 푸나 항상 고민했다는 엄마. 맏아들 밥을 먼저 푸려니 양념딸이 걸리고, 딸 밥 먼저 푸려니 막내아들이 밟혔다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훗날 이 얘기를 남동생에게 했더니, 금시초문이라면서도 누나가 우리 삼남매 중 항상 우선이었어. 가난했지만 누나가 해 달라는 건 거의 다 해줬잖아. 우리집은 남아선호가 아니라 여자우대였어 한다. 그런가? 그렇다. 확실히 그랬던 것 같다. 양성평등 부모님 덕에 난 매사에 남자애들과 겨뤄도 앞장섰고, 당당한 사회생활도 그 덕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집에서 제대로 양념이나 고명의 역할을 했는진 모르겠다.당시 여형제 많은 친구와 이종들이 있었다. 아들 보기 위해 딸을 줄줄이 낳은 게 확실한 이모님이 계셨다. 이종사촌들은 그 남동생을 귀히 아끼고 극진히도 보살폈다. 맏딸로 여동생만 넷을 둔 내 친구는 6학년 때 어머니가 남동생을 낳았다며 신나게 자랑했었다. 어쨌든 여형제 많은 이종사촌이나 친구가 부러웠다. 아무래도 오빠나 남동생보다는 여형제가 더 다정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언니나 여동생이 없어 외로웠던 나는 최근 사촌언니들과 가끔 만나 언니의 살가운 온정을 느끼며, 언니 없는 설움을 푼다.

2024-08-21

구내염과 면역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입안이 헐거나 염증이 생기는 경우는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 그 고통이 심하다. 처음엔 한두 군데가 헐거나 염증이 생기나 내 몸이 건강한 경우는 1~2주가 지나면 자연 회복이 된다. 그러나 내 몸의 면역이 떨어지고 몸의 자율신경이 항진되어 몸의 균형이 깨어져 있는 경우는 염증회복이 더디어지고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많은 곳이 헐거나 염증이 생겨 생활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는 상태가 지속된다.구내염은 구강 점막에 염증이 발생하여 헐거나 염증반응이 일어나 통증을 일으키는 질환이다. 구내염이 생기면 입안에 찌르거나 따가운 통증, 뜨거운 통증을 느끼고 가만히 있어도 고통스럽다.특히 음식을 먹을 때 그곳에 음식이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상당히 고통스럽고 자극적인 음식을 조금이라도 먹으면 염증반응이 더 심해져 하루 종일 입안이 얼얼하다. 구내염이 있는 경우는 입술 주변과 입 주변까지 염증이 생겨 고생하는 경우도 많으며 입가에 염증이 생기면 입을 벌리는 거 자체가 고통스럽다.구내염은 세균감염, 바이러스나 곰팡이, 알러지 반응 등으로 생길 수 있다. 내 몸의 면역상태가 건강하다면 금방 사라지나 스트레스나 피로 감기 등으로 몸의 면역이 떨어진 상태에선 잘 낫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나타나게 된다. 내 몸의 면역 기능이 건강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당히 괴로운 질환이다.구내염이 낫지 않는 경우는 대부분이 피로하고 과로한 상태이며 교감신경 항진 상태로 몸의 밸런스가 깨어진 경우다. 흔히 면역이 떨어졌다고 표현한다. 휴식을 충분히 취해주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면역이 저하되어 생기는 이런 질환들은 충분한 휴식과 수면 보충 적절한 영양공급이 이뤄지면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낫는다. 그리고 고춧가루나 자극성이 있는 음식은 절대 금해야 한다. 입안이 아프고 음식을 잘 먹지 못하니 먹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은데 먹을 땐 천국이지만 먹고 나면 지옥이 펼쳐진다. 자극성이 없는 밥과 간단한 간이 되어 있는 나물반찬 그리고 간이 덜된 고기반찬을 천천히 씹어서 먹는 것이 좋다.운동은 상태에 따라 달리 해야 하는데 몸이 피로하고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라 격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줄이는 것이 좋고 운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벼운 산책을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하는 것이 좋다. 날이 선선한 저녁에 하는 것이 좋고 너무 열심히 운동을 하고 나면 잘 때 염증반응이 더 심해지니 꼭 간단한 산책 위주로만 하는 것이 좋다.한의원에선 한약으로 치료를 하는데 그 환자에 맞게 면역을 높이고 부수증상을 좋아지게 할 수 있는 처방을 하게 되면 대부분 보름에서 한 달 이내로 좋아진다.사실 한약을 몸에 맞춰 먹으면 금방 좋아지기 때문에 위의 음식 관리나 운동은 차선으로 하고 한약 복용을 최선으로 하는 것이 제일 빠르다.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근처 한의원에 가서 처방받아 고통을 빨리 해결하는 것이 좋다.

2024-08-21

은메달과 동메달

장규열 고문 인류의 축제, 여름 올림픽이 멋지고 훌륭하게 지나갔다. 대한민국 대표단 젊은 선수들은 기대를 넘는 좋은 결과를 낳으며 개선하였다. 금, 은, 동메달을 열 셋, 아홉, 열 개씩 획득하였다.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물론 더없이 행복하였겠지만, 은과 동을 딴 선수들은 누가 더 기뻤을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 2등이 낮은 3등보다 낫지 않았을까도 싶다. 하지만 정작 해당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미국 코넬대학이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만족도를 10점 척도로 조사하였다. 은메달리스트의 만족도는 평균 4.9점이었던 반면, 동메달 획득자는 평균 7.1점을 기록하였다. 은메달리스트는 마지막 순간에 금메달리스트에게 이기지 못한 짙은 아쉬움을 가졌으며, 동메달리스트는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승리를 맛보며 시상대에 오른 터이다. 메달의 색깔이 결정되기 직전에 은메달 획득 선수는 졌지만, 동메달은 이긴 게 아닌가. 하마트면 마지막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였겠지만, 결국 승리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심리학이 말하는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와도 맞닿아 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겪고 나서 반드시 가지게 되는 생각의 구조로서,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벌어진 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을 일컫는다. 그리 반갑지 않는 일을 당했을 때 사후가정사고는 안도감, 즉 부정적인 생각을 진정시키면서 긍정적인 정서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후가정사고가 은메달리스트에게보다 동메달리스트에게 보상적 심리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 결과, 보다 높은 행복감에 젖게 된다는 것이다.미국 시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가지 않은 길’을 노래하였다. 노란 숲속에 난 두 길을 우리는 어차피 모두 가 볼 수는 없다.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지만, 결국 한 길을 택해야 한다.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으로든 나아가야 한다. 그런 끝에 우리는 모두 돌아보지만, 결과에 대한 감상은 드러난 등수나 점수보다는 늘 마음 속에 있다. 그 누구의 노력과 성과를 겉으로 보이는 결과로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도 평가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우선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결과를 딛고 계속 나아가는 힘을 기르는 길이기도 하다.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온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메달리스트들은 물론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우리는 고맙고 고맙다. 대한민국이 세상과 겨루어 결코 뒤지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그대들이 자랑스럽다.영국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젊은 선수들에게 나라 안 모습은 부끄럽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한껏 올려준 자부심의 기대치만큼, 나라의 품격을 오늘보다 한층 올려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다. 다음 올림픽을 기약하며 열심히 땀을 흘릴 젊은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나라를 나라답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낼 새 힘과 용기를 온 나라가 가져야 한다.

2024-08-21

베트남 국가문화유산이 된 쌀국수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현지인들은 ‘퍼(Phở)’ 또는 ‘포’라고 불렀다. 한국 사람들은 ‘쌀국수’라고 한다. 베트남 북부 하노이, 중부 후에, 남부 호치민 모두엔 조리법과 국물의 농도, 면의 굵기를 달리하는 쌀국수가 있다.바로 이 ‘베트남 퍼’가 국가문화유산이 됐다.최근 베트남 정부는 “하노이 쌀국수와 북부 남딘성의 쌀국수, 중부 꽝남성 비빔국수 등 3종류의 퍼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쇠고기나 닭고기로 육수를 낸 베트남 퍼는 숙주나물 등 여러 채소를 함께 식탁에 올린다. 독특한 향신료 냄새 탓에 꺼리는 이들도 있지만, 몇 번 먹다보면 중독성 강한 매력적인 음식이란 걸 알게 된다.이래저래 베트남을 4번쯤 여행했다. 그때마다 값싸고 편리하게 뚝딱 한 끼를 해결하는데 쌀국수만한 게 없었다. 지역마다 각기 다른 쌀국수 맛을 비교해보는 재미까지 있었다.베트남 쌀국수에 얽힌 ‘잊을 수 없는 추억’도 생겼다. 2011년. 베트남에 이상 한파(寒波)가 닥쳤다. 늦봄엔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하노이의 기온이 15도 이하로 떨어진 것.얇은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하노이역에 도착한 건 새벽 5시였다. 여벌의 두꺼운 옷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어깨는 움츠러들고 턱이 덜덜 떨렸다. 한국의 12월 같았다.아직 해도 뜨지 않은 캄캄한 시간. 역 광장에서 양동이에 육수를 담고 바구니에 면을 담아 파는 노점상 아주머니가 말아준 500원짜리 따끈한 쌀국수 한 그릇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허겁지겁 젓가락질 하는 낯선 여행자에게 한 국자 가득 국물을 덤으로 퍼주던 아주머니의 미소가 지금도 선연하다. 오늘 점심 메뉴는 ‘베트남 퍼’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8-21

송도, 그리다

정미영 수필가 포항 송도 거리의 풍경을 마음에 그리려고 길을 나섰다. 구부정한 골목의 등허리를 밟으며 사잇길로 빠져 내려갔다.그 곳은 바닷길로 이어져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는데, 갈매기들이 내 기척에 놀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새가 앉았다 날아간 자리를 눈으로 훑어보니 무수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제각각 존재의 무게만큼 깊고 얕은 흔적을 남겨둔 채 떠나간 새떼를 주시하며, 내 삶은 어떤 무늬의 흔적을 남기게 될지, 궁금했다.송도해수욕장을 걸으면 도시의 소음이 점차 멀어지고 파도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파도 소리는 때때로 내 마음의 울림 같았다. 내면까지 파문을 일으키는 짙푸른 물결을 보며 지나온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잔잔한 물결 속에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헤치다 보면, 바다를 배경으로 나만의 서사시가 한 편 완성되는 듯 했다.단순히 눈에 보이는 장면을 넘어 하얀 포말 속에 수많은 생각의 파편을 담아 마음 속 깊이 새겨진 그림으로 완성될 때도 있었다.오늘처럼 송도의 길을 이리저리 정처 없이 걷다 보면 멈춰 설 때가 있다.마치 영화 ‘일 포스티노’에 등장하는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인 마리오처럼 “아름다워요. 이렇게 아름다운지 몰랐어요!”라고 외치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난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풍경들을 보며 감동을 받는 것이다.결혼해서 포항에 정착한지 30년이 되어 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서 생활할 때 나의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가 바닷가 근처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건물 숲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현실이 사막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무미건조한 순간이 많았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를 보면 답답한 가슴이 탁 트일 것만 같았다.그런 내가 결혼을 하면서 바닷가 근처에 살고 있다. 이른 새벽, 돋을볕이 떠오를 때 바닷가에 서 있으면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요하고 평화로울 때가 많았다.그리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다독여준 것은 구룡포나 칠포, 여남 등에서 만난 바닷바람이었다. 파도 소리 실은 바닷바람의 따스한 손길이 내 피부에 닿으면 가슴이 충만해지며 위로가 되었다.포항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대구와 비교했을 때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지명에 도(島)가 들어가 있는 곳은 예전에 섬이었다는 것이다.해도, 상도, 송도, 죽도, 대도가 섬이었는데, 지금은 다리와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특히 송도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염전이 유명했다고 한다. 우리 전통 소금인 ‘자염’을 생산했는데, 나라에 진상할 정도로 특산물이었단다.내 마음을 가장 사로잡는 것은 송도에 위치한 ‘동성조선소’였다. 뜨거운 햇살 줄기를 등에 업고 여름날 송도해수욕장에 핀 갯메꽃과 참질경이꽃을 눈에 담은 뒤 솔밭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보면 동성조선소가 나온다. 열린 문 사이로 조선소 안을 바라보면 거대한 크레인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선박의 몸체를 들어 올려 수리를 받게 하는 모습은 마치 철의 거인이 일하고 있는 것 같다.동성조선소는 한때 지역의 경제와 산업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축이었다.초기에는 소형선박을 건조하는데 주력했으나, 점차 규모를 키워 대형선박을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소를 바라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겹쳐졌다. 사람들은 배를 만들며 개인과 가족에 대한 꿈과 의지, 삶에의 희망을 쏟아 부었으리라.다시 걸음을 옮겨 솔밭을 거닐었다. 솔향기 가득한 숲속에서 숨을 들이마셨더니 푸른 생명력이 느껴졌다. 햇살 조각이 솔잎에 매달리면 작은 그림자가 춤추듯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눈부신 햇살 그림자의 향연들을 잘 갈무리하여 내 마음 속 화폭으로 옮겨 그렸다.나는 지금,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앉아 있다.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내가 그린 마음 속 광활한 송도 그림을 펼쳐놓으며 나 혼자 향유한다.

2024-08-21

숙자는 힘이 세다

숙자라는 사람이 있다죽도시장이라는 큰 세상에 산다그는 키가 커서 멀리 보는 게 아니라마음이 높아서 그럴 거다세상의 장터인 죽도시장을 지키는 사람으로그 길목에서 바람을 감지한다태평양에 어제 밤에 오줌을 누었단다새침하게 내륙의 향기를 바다에 풀었단다비린내 나는 사람의 온기가 아니어도꽉 차게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그런 사람이 있다세상이 살만 하다는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이 된다짜고도 씀씀한, 늘 그렇게,그의 생업처럼 사람과의 관계를숙성시키고 버무릴 줄 아는,젓갈이 왜 아름다운 밑반찬인가그렇게 숙자는 사람을 사랑하는힘이 센 사람이다나팔꽃 같고 사르비아 같다그런가 하면 쌍욕으로 무례를 응징할 줄 안다나는 그런 것에서 용기를 얻었다우리 곁에는그런 사람이 꼭 있다그래서 산다실핏줄이 동맥보다 못 하랴.숙자라는 사람은 개인인 동시에 죽도시장 대부분의 상인을 지칭하는 일종의 대명사로 생각하면 좋겠다. 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편향되지 않고 묵묵하게 인생의 서사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오페라보다 화려하다. 그러나 결코 사치스럽지 않다. 검소하면서도 조금도 누추하지 않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08-21

꿈틀대는 불의 고리

우정구 논설위원 칠레는 영토 전체가 환태평양 지진대에 해당된다. 크고 작은 지진과 화산 폭발이 자주 일어나고 금세기 역사에 기록될 만큼 어마어마하고 거대한 지진만 세 번이나 발생한 나라다.1960년 5월 22일 칠레 발디비아에서 일어난 지진은 지진관측 사상 가장 큰 규모인 9.5를 기록했다. 아직도 이 기록을 깬 지진은 없다. 이 지진으로 칠레에서는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태평양 건너인 하와이, 일본, 필리핀, 미국 서해안까지도 지진의 영향이 미쳤다고 하니 칠레 지진의 위력을 짐작하고도 남는다.환태평양 조산대는 지구상에서 가장 활발하게 지진과 화산이 발생하는 곳이다. 남미 서안에서 북미 서안을 거쳐 러시아 동부, 일본을 지나 뉴질랜드까지 이어지는 지역이다. 태평양 해안선을 따라 말발굽 모양의 띠를 형성하고 있어 불의 고리라 부른다.불의 고리로 지목된 이곳을 중심으로 최근 잇따라 지진이 발생하면서 대지진 전조가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일본에서는 난카이 해곡 대지진 경보가 내려진 가운데 9일과 10일 도쿄 서쪽 가나가와현과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 북동쪽 해역에서 잇따라 지진이 발생했다. 또 19일에는 이바라키현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등 최근 잇따른 지진으로 일본 전역에 지진 공포감이 커지는 분위기라 한다. 지난 16일에는 대만 화렌현에서, 18일에는 러시아 캄차카반도 앞바다에서도 지진이 발생했다. 이른바 불의 고리를 중심으로 잦아지는 지진을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는 대지진 전조란 분석도 내놓는다.우리나라는 정말 지진의 안전지대일까. 날로 괴팍해지는 지구촌 자연현상 앞에 인간의 무력함이 느껴지는 요즘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8-20

응급실 마비 직전인데 코로나까지 유행

심충택 논설위원 응급환자가 늘어나는 추석 연휴를 앞두고, 끔찍했던 코로나19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은 대부분 대형병원이 의사가 부족해 응급실을 축소 운영하는 상태다. 대구·경북 지역민은 지난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전염병으로 인한 응급의료시스템 붕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피부로 체험했다. 열이 펄펄 나는 코로나 환자 수천 명이 응급치료를 받지 못한 채 집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때, 문재인 정부 주요 인사들은 “대구경북을 봉쇄하라”, “대구는 손절해도 된다”며 비수를 꽂는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질병관리청 집계에 의하면, 코로나 입원환자는 지금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여름철 유행 동향과 추세로 볼 때 8월 말이면 주당 35만명의 환자가 발생할 수도 있다니 충격적이다. 대구·경북 지역도 감염자 수가 급증하고 있어 보건당국이 비상이다. 지난주에는 경북도내 노인요양시설과 요양병원 9곳에서 191명의 확진자가 발생해 전염병 고위험군에 대한 보호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특히 개학을 코앞에 두고 어린이 환자가 속출해 걱정이다. 어린이들은 감염돼도 무증상·경증이 대부분이어서 코로나 팬데믹의 고리로 작용할 수 있다.대한아동병원협회가 소속병원 42곳의 코로나 아동 환자(16세 이하)를 조사했더니, 지난 7월 22~26일 387명에서 8월 5~9일 1080명으로 2주간 2.8배 늘었다. 초등학생·학부모 연쇄 감염이 우려되는 상황이다.지금은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의 병원 이탈 사태가 6개월째 이어지면서 상급종합병원 대부분은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의료진이 극도로 부족한 상황이라 코로나 환자가 급증하면, ‘의료대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재 대부분 상급종합병원은 전공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전문의나 간호사들을 통해 겨우 응급실을 운영하고 있다.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대구지역 응급의료 대란설도 나와 시민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대구시는 해당 글이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이라고 하지만, 시민들의 걱정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충남·충북 쪽에서는 24시간 365일 가동돼야 할 응급실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는 때도 있는 모양이다. 동아일보 19일자 보도로는, 충북대병원은 지난 14일 오후∼15일 오전 분만과 심근경색 등 14가지 중증 응급질환 진료를 중단했다. 세종 충남대병원도 응급의학과 전문의 부족으로 이달부터 매주 목요일 응급실을 부분 폐쇄하고 있다.대학병원 교수들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코로나 환자가 많이 늘어나면 중환자 대응이나 치료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최근 전국 수련병원이 하반기 전공의 추가모집을 마감한 결과, 대부분 지원자가 아예 없거나 한두 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구지역 8개 수련병원도 추가모집 지원자가 전혀 없었다. 상급종합병원 의료공백의 장기화가 불가피해 진 것이다. 코로나 대유행에 대비해 대형병원의 응급의료체계를 하루빨리 정상화하지 않으면, 우리사회에 어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다.

2024-08-20

어쩌다 보니 내몽고 여행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사상 초유로 두 쪽 난 광복절 행사에 아랑곳없이 징검다리 연휴에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은 건국절 논란의 염증(?)을 떨치기라도 하듯 저마다의 목적지로 부담없이 떠났다. 어차피 삶은 여행이니 하찮은(?) 일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 것이 홀가분한 여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방향과 속도가 정해진다. 아무리 지루하거나 빠듯한 일정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라면 눈길 닿고 발길 머무는 곳마다 즐겁고 설렘이 가득할 것이다. 여행도 쉼의 일종이듯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서로를 챙기고 배려하며 즐기다 보면 어느새 낯선 여행지의 풍경이 정겨움으로 다가올 것이다.반면 빨리 다니며 이것저것 많이 보고 혼자 즐기는 사람이라면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주마간산격의 여행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행은 대부분 어떤 모임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마련이다.하지만 그것도 꼭 그렇지만은 않아, 어느 날 각기 다른 사람들이 여차저차 만나 우연의 일치로 떠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어떤 계기가 되어 어디론가 무작정 떠나게 되는 것이다.그러고보니 지난 주 광복절을 전후해 다녀온 해외여행은 정말 즉석에서 던진 말에 우연찮게 동조하면서 어쩌다가(?) 다녀오게 된 것 같다. 길거리나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반가움을 더해 주듯이, 오래 전부터 계획한 일정이 아닌 즉흥적인 발상과 추진이 한결 흥미와 설렘을 부추겨주지 않았을까 싶다.그렇게 떠난 곳이 내몽고이다. 중국의 다섯 개 자치구 중 첫번째로 지정된 내몽고자치구는 몽골,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17세기 무렵 당시 차르 러시아와 청나라의 이익 다툼으로 외몽고(몽골)와 분단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는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정복을 이룬 불세출의 영웅 징기즈칸은 몽골에서는 영웅으로, 중국에서는 위인으로 추앙받기에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지만, 징기즈칸릉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르도스(궁전) 초원 한 켠에 유택(幽宅)을 마련하는 등 대대로 정복왕에 대한 존숭과 예우를 다하고 있다.광활한 초원에 말과 양이 풀을 뜯고 군데군데 전통가옥인 몽골포(게르)가 놓여진 목가적인 풍경은 더없이 낭만과 평온함이 느껴지지만, 유목민 몽골족에게는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또한 평균 해발고도 1300미터의 고지대로 밤하늘의 별들이 더없이 크고 초롱초롱 빛나며, 은하수가 금방이라도 땅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데 불현듯 빗금을 치고 사라지는 유성은 찰나의 삶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온순한 낙타를 타고 야트막한 사막을 둘러보다가, 그 옛날 아득한 고비사막을 건너며 삶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을 유목민들을 생각하니 괜스레 애잔함이 묻어나기까지 했다.그리고 푸른 초원에서 말타기를 해보니 척박한 땅에서 기마민족으로서 세계정복을 꿈꾸며 평원을 우렁차게 달렸을 몽골인들의 기개와 용맹함이 지평선 끝의 먹구름처럼 몰려오는 듯했다.말 위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살고 말 위에서 바람처럼 사라져간다는 몽골인들의 애환과 운명이 곳곳에 펄럭이는 깃발로 아우성치는 듯했다.

2024-08-20

야생 코끼리를 움직이는 힘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야생 코끼리를 산 중턱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내에 이르게 하는 것’이 조직의 변화관리이다. 미래를 향한 기업의 성장 과정은 변화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업의 비전이 설정되고 이를 실현시킬 전략과 목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 속에 변화관리가 필요하다.변화관리(Change Management)는 조직이나 개인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일련의 계획, 과정, 도구 및 전략을 의미한다. 변화로 인한 저항을 최소화 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필요로 한다. 조직 내에서 새로운 전략, 기술, 프로세스 또는 구조의 도입과 같은 변화를 관리하고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접근을 의미한다. 조직의 변화뿐만 아니라 구성원 개개인의 행동변화까지 포함한다. 변화관리는 조직의 목표 달성과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성공적인 변화관리를 위해서는 첫째, 조직의 비전과 목표 설정이다. 변화가 필요한 이유와 목표가 명확해야 하며, 모든 관련자에게 전하고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둘째, 리더의 강력한 지지이다. 변화의 성공 여부는 리더십의 지원에 달려 있다. 리더는 흔들림 없이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셋째, 참여와 소통이다. 변화 과정에서 관련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그들의 불만과 바람을 풀어줘야 한다. 넷째, 자원 제공과 교육 훈련이다. 변화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시간·인력·자금 등)이 제공되고 새롭게 도입되는 시스템이나 절차에 충분한 교육과 훈련이 제공되어야 한다. 다섯째, 점진적인 변화와 모니터링이다. 변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며, 각 단계에서 성과를 평가하고 필요시 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변화 후 자리 잡도록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피드백을 통해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1980년대 GE는 변화 관리의 성공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었다. 당시 CEO였던 잭 웰치는 비효율적인 구조와 문화를 바꾸고자 강력한 변화를 추진했다. GE는 수직적이고 경직된 조직 구조를 평평하고 유연하게 바꾸고 직원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다. 이를 통해 품질 개선과 효율성 향상을 목표로 식스 시그마(Six Sigma)를 도입해서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지속적인 성장과 높은 수익성을 유지 할 수 있었다.기업의 조직과 구성원은 야생 코끼리와 같다. 야생 코끼리의 습성은 본인 습관대로 움직인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물가에 가서 놀고 쉬곤 한다. 이런 야생 코끼리를 원하는 목적지에 정해진 시간 안에 이르게 하는 길은 여러 요건이 있지만 아이(I) 관점이 아닌 유(You) 관점에서 생각하고 유도하는 것이 길이다. 기업에서는 MZ세대와 기성세대 간 생각과 문화의 차이로 시너지를 못 내는 경향이 있다. 조직에서 이를 해결하는 길은 MZ세대 생각을 반영하고 MZ세대 입장에서 해결안을 찾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2024-08-20

‘비국민’이 기억하는 한국의 광복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1930~1975)는 60년대 이후 일본에서 장르소설, 특히 기업소설이나 모험, 추리소설 등을 쓰면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한국에서 경험했던 전쟁에의 기억을 다수의 작품에서 남겼다. 한국에서는 1967년 신상옥 감독이 그의 소설 ‘이조잔영(李祖殘影)’을, 1979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그의 소설 ‘족보(族譜)’를 각각 영화로 만드는 등 그가 보여준 1940년대 무렵의 한국의 기억에 이해와 공감을 보냈다. 사진은 1963년에 ‘이조잔영’으로 나오키상 후보가 되었을 무렵의 가지야마 도시유키. 소설가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는 1930년 한국에서 태어나, 소학교와 중학교를 경성에서 졸업하고, 1945년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던 것은 바로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광풍과 패전이라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 그가 첫 번째로 쓴 습작이라고 해도 좋을 ‘족보’가 바로 그 시기를 다룬 것으로, 제국주의적 폭력이 극에 다다랐던 1940년대 초 한국인에게 강요되던 창씨개명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 기억해둘 만한 지점이 존재한다.이 작품은 미술학교를 졸업했지만, 전쟁 동원을 피하려고 당시 경기도청 총무부에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역할을 맡은 다니 로쿠로라는 주인공이 700여 년이 넘는 가문의 역사를 지키려고 창씨개명만은 거부하려고 하는 설진영이라는 이를 찾아가 설득하는 것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이제 쉰사오 세쯤 된 설진영은 소작미 2만석을 총독에게 헌납할 정도로 친일파로 자신의 가문 외에 아무 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인물이다.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위해 윗선의 명령을 받고 그의 집을 방문했던 다니 로쿠로는 설진영의 딸 옥순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미술을 배웠다는 것을 알고 친밀감을 느끼면서도, 궤짝 가득 쌓여 있는 족보를 보여주며 성씨의 개명만은 할 수 없다고 하는 그의 태도에 한편으로는 공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답답해 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대단한 것처럼 내선일체나, 창씨개명의 대의를 내세우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목표 달성만을 독려하는 총무과의 과장이나 계장의 이중적인 태도에 반감을 갖는다. 결국 설진영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담당자들은 헌병을 동원해 그의 딸과 결혼하기로 한 남자를 고문하거나, 그의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를 압박해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하고, 결국 그는 창씨개명 서류를 제출한 뒤 집 우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만다.이 작품은 작가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감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전쟁을 준비하는 일본이 어떤 방식으로 창씨개명이나 전쟁공출을 강제했는가 하는 전쟁 직전의 분위기를 어떤 문장보다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우리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을 광복 이전의 가장 어두운 분위기가 그대로 들어오는 듯하다.목표 달성을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경기도 총무부의 과장과 자신이 대물림한 족보를 지키기 위해 성씨를 바꾸는 것만큼은 거부하는 설진영 사이에서, 이 소설 ‘족보’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우유부단함은 양분된 현실 사이에서 이해를 도모하는 유일한 입장일 수밖에 없겠지만, 과장은 그런 그를 ‘비국민’으로 취급하고, 설진영의 가문 사람들은 그를 총독부의 앞잡이 정도로 취급한다. 친일과 반일 그 중간 어딘가에 끼어 있는 존재인 그는 유일하게 족보가 가진 의미를 이해하는 존재지만,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중간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그의 존재야말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증언한다.8월은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뜻깊은 기간이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하고 점령해서 식민지로 만드는 제국주의의 야만성에 대해 되새기는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그 쓰라린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그런 야만의 역사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지야마 도시유키는 ‘비국민’이라는 다른 자리와 다른 목소리로, 마찬가지로 폭력의 역사에 대한 폭로와 이해에 동참한다. 그 역시 기억할 만한 소중한 증언일 것이다./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4-08-20

추억 지우기

좋은 추억은 영혼의 허기를 달래준다. 오래 묵은 편지는 추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물건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 건네주었던 편지들을 꺼내 읽는다. 삐뚤빼뚤 적힌 연필 글씨를 쳐다보고 있노라니 더위에 지쳐 사라졌던 입맛이 금세 돌아올 것 같다. 빛바랜 편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있는 사랑한다는 말이 마음을 촉촉하게 한다. 성적이 떨어져서 미안하다며 쓴 편지도 지나고 보니 사랑스럽기만 하다. 세상에서 엄마가 최고라는 말은 읽을수록 기운 난다. 어버이날마다 편지와 함께 받았던 안마 이용권은 아까워서 쓰지 못하고 넣어두기만 했었다. 지금 보니 까무룩 넘어가도록 좋다. 아이가 철이 들어 남의 나라 여행 가서 보내온 편지는 어찌나 절절한지 코끝이 시큰하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소중해서 마음 안에 오래도록 품고 싶은 보물이다.메일함을 연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광고며 스팸 메일이 수두룩하다. 수신인이 원하지 않는데 마구잡이로 보내는 건 폭력이나 마찬가지다. 차단하기 바쁘게 발신인을 바꾸어 다시 보내는 데도 뾰족한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수시로 버리지만 쌓이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읽고 버리지 않은 메일도 가득 쌓여있다. ‘디지털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일 중엔 메일함 비우기도 있다는 걸 알고부터 언젠간 몽땅 비워야지 했다. 그런데도 하루 이틀 시간만 보냈다. 지구별을 생각하는 마음이 부끄럽게도 내 게으름을 따라잡지 못한 탓이다. 받은 메일함의 숫자를 살펴본다. 천 개가 훌쩍 넘는다. 게 중에 꼭 보관해야 할 중요한 메일은 몇이나 될까.받은 메일함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니 2004년 4월에 온 것부터 저장돼 있다. 이미 이십 년 전부터 손 편지 쓰기를 그만두었다는 확실한 물증이다. 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던 어쩌면 삭막한 시대에 디지털카메라를 옆에 끼고 어릴 적 꿈꾸던 작가 공부를 시작했다. 보낸 이를 훑어보니 가까이 지내던 수필가며 사진 선생님에게서 받은 메일이 대부분이다. 그 무렵엔 좋아하는 수필가의 홈을 들락거리며 글 얘기와 사진 얘기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홈에서 못다 한 이야기는 메일로 주고받았다. 각 문예지에서 처음으로 받은 원고청탁서며 별것도 아닌 내 글을 읽고 여기저기서 보내온 격려 메일도 숱하다. 정성껏 꾹꾹 눌러쓴 펜글씨는 아니라도 언제든 위로가 되어주는 고마운 글이다. 게 중에 아껴가며 보고 싶은 것들만 추려서 보관 메일함으로 보낸다.보낸 메일함 역시 만만찮다. 행사 때마다 글쓰기 동인들의 사진을 찍어 일일이 보내주고도 지우는 게 귀찮아 그대로 둔 게 태반이다. 여기저기에 보낸 원고들도 버려야 할 것들이다. 후배 작가들이 부탁한 습작품에 도움을 준 글들도 꽤 있다. 선배 역할에 충실하느라 다정한 인사도 잊지 않고 빼곡히 적어 놓았다. 종이 편지였다면 이미 내 것이 아닐 것들이 전자 편지라서 남아 있다는 게 괜히 무겁게 느껴진다. 다만 한 사람, 나를 무채색의 세상에서 꺼내 준 아름다운 수필가에게 꼬박꼬박 보낸 메일만은 따로 챙겨둔다. 두고두고 다시 읽어도 그녀에게 빠진 내 마음이 배어있어 향기로울 거라는 걸 안다. 나머지는 눈 딱 감고 삭제 단추를 누른다. 후련하다.내게 쓴 메일함이 남았다. 수업 자료를 저장했다가 출력하는 목적으로 이용하는 요긴한 곳이다. 청소를 싫어하는 아이처럼 소용이 끝난 후에도 제 때 비우지 않아 눈덩이처럼 쌓였다. 제목도 없는 내용들이 그득하다. 처음의 자료가 뭘까 열어보니 박성우 시인의 ‘오이를 씹다가’란 시가 들어있다. 이 시를 암송할 때만 해도 아직 푸릇한 나이였다는 착각을 하며 잠시 추억에 잠긴다. 퍼뜩 마음을 다잡고 한꺼번에 삭제 단추를 눌러나간다. 박월수 수필가 메일함 전부를 비우는 데 꼬박 여덟 시간이 걸렸다. 제때 정리하지 않은 까닭에 버려야 할 것과 보관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다른 이들도 나처럼 이십 년 동안 쌓아두고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개인의 사소한 기록을 보관해 주느라 지구 한 귀퉁이는 병들고 있었다는 늦은 자각이 든 때문이다. 우리가 인터넷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동안 데이터 센터에서 내뿜는 온실가스 발생량은 계속 증가할 게 뻔하다. 메일함을 비우는 일은 어쩌면 추억을 지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별을 생각한다면 소소한 것들은 버릴 줄 아는 용기도 필요하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것들은 마음 안에 간직하면 될 일이다.환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디지털 탄소발자국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스마트폰과 좀비의 합성어인 ‘스몸비족’이란 말이 유행한 지도 꽤 되었다. 현대인들은 잠시도 스마트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도 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뿐 아니라 폐기할 때 나오는 이산화탄소 양은 엄청나다고 들었다. 환경오염 따위 먼 나라 얘기라는 듯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바꾸기보다 십 년째 같은 폰을 쓰는 이가 많았으면 싶다. 낡은 스마트폰을 들고 메일함을 자주 비우며 쓰지 않는 코드는 뽑아 놓을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지구별은 반짝이지 않을까. /수필가◇ 박월수 수필가 약력 ·2022년 대구수필가협회 문학상·2022년 경북문협 작가상 등 수상·수필집 ‘숨, 들이다’·청송문인협회장

2024-08-20

개돼지는 되지 말자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2015년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에서 유력 신문사 주필 이강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파업 기사에 분노하는 재벌 회장 오현수에게 “대중들은 개돼지”라는 대사를 날린다. 대중들은 개나 돼지와 같아 적당히 먹고 살게만 해주면 더 이상 짖지 않는다는 이 말은, ‘내부자들’의 명대사로 아직도 회자하고 있다.특히 이 말은 2016년 교육부 고위 관료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사용하며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당시 구의역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은 김 군 사건을 거론하며, 어차피 모두 평등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하면서 자신의 무의식을 영화 대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영화의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사회 고위층이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로 내뱉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게다가 교육부 관료의 말에 동의하는 시선을 보고 있자니, 인간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부끄러움에 대한 나의 사고가 잘못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벌써 8년 전의 일이다.이른바 ‘건국절 논쟁’이 촉매제가 되어 정부 주도의 광복절 기념행사에 야당과 독립운동단체가 불참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과거부터 건국절 주장을 하는 세력은 있었지만, 뉴라이트 인사의 독립기념관장 임명 등 대통령의 역사관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실은 곧바로 건국절 추진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여기저기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그런 와중에 먹고 살기 힘든 국민에게 건국절 논쟁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대통령의 말이 보도 되었다. 자신은 건국절에 대해 언급한 적도 지시한 적도 없는데 지금의 논쟁은 납득이 어려운 정치 공세라는 것이다.독립기념관장이라는 상징성이 지니는 의미. 좀 더 구체적으로 대통령의 인사권과 역사 인식의 연결고리를 사고하지 못하는,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기사였다.그렇지만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것은 먹고 살기 힘든 국민은 역사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누구보다 ‘먹고사니즘’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우리의 오랜 반일 정서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다. 내 전공 분야에서는 일본인 연구자와의 교류도 매우 활발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역사는 지난 과거, 잊힌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올바로 설계하기 위해서 반성해야 하는 시간이다. 반성하지 못할 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된다.평범한 사람에게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먹고 살게만 해준다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개돼지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개돼지가 되어갈수록 권력자들은 뒤에서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영화 ‘내부자들’처럼 말이다. 8년이란 시간이 지나는 동안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도, 반대로 더욱 예민해진 사람도 많아졌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2024-08-19

환경권

강길수 수필가 열대야가 모자라는지 일부 지역은 초열대야까지 기승을 부리는 삼복더위 한여름이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지 않아 가로수 밑 잔디가 타들어 간다.방학과 휴가기가 겹쳐서인지 출퇴근 길이 한산하다. 한데도, 이따금 보행 중 흡연자가 있고, 보도 위엔 담배꽁초가 자주 보이며, 명함 광고지도 더러 있다. 또, 생활 폐기물 모으는 곳은 더 너저분하다. 공원 등의 낮은 담장 위에는 마시다만 컵, 캔, 병 같은 것들이 눈살 찌푸리게 한다. 그 외 이면도로변의 폐타이어, 물통 같은 주차 방지용 개인 설치 방해물 등 쾌적한 환경을 저해하는 것들이 많다.우리나라 헌법 제35조 1항은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환경권’을 천명하고 있다. 이 1항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모든 국민이 ‘쾌적한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음을 선포한다. 다음으로 ‘국가와 국민이 함께 쾌적한 환경보전을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상쾌하고 즐거운 환경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은 국가나 국민만의 책무가 아니라, 공동목표이자 과업이라는 점이다. 국가나 자치단체의 환경 관련 법령과 규칙, 조례 같은 것들은 헌법에서 정한 ‘환경권’을 구체적으로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성패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법령도 실제 시행하는 규칙, 공고, 조례 등 하위 규정들의 디테일이 부족하면 소기의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면도로 후미진 곳들의 지저분함, 시 우회도로 변의 쓰레기, 보도 위의 담배꽁초나 명함 광고지 같은 것들은 디테일의 부족함을 말하고 있다.이런 문제와 관련하여 ‘포항시 환경기본조례’와 포항시 ‘2020 환경백서’ 등을 폐기물 관련 항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대부분 국가나 상위 기관의 제도나 지침에 따른 원론적이고 거시적 문제들을 주로 다루고 있었다. 시민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디테일한 것들, 그 지역만의 특별한 문제 같은 사항들을 더 다룰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산뜻한 홍보 슬로건을 보았다. “바쁘신 고객님의 ‘깨끗할 권리’를 되찾아 드립니다”가 광고문의 요체였다. 회사명도 ‘깨끗할 권리’다. 30대 사장과 직원 1명의 소기업이다. 그렇다. 우리나라 헌법이 천명하는 ‘환경권’을 다른 말로 ‘깨끗함을 누릴 권리’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함에는 공기, 물, 소리, 음식물, 의복, 주택, 자연 및 생활환경 등 모든 인간 삶의 여건이 포함되어야 마땅하다.그렇다면 공공재들인 건축물, 거리, 도로, 공원, 산하, 바다, 하늘까지 즉, 자연과 인공 환경 모두가 깨끗하게 관리, 지속되어야 한다. 그 주체가 국민과 국가라는 것이 우리나라 헌법이 구현하고자 하는 환경권이라고 본다. 나아가 이 환경권은 전 지구촌이 함께 추구하고 실행해야 할 과제다. 환경에 관한 한, 지구촌이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결국, 나라의 온 기관과 국민이 담배꽁초 하나, 휴지 한 조각 안 버리기 같은 기초부터 해 나아가는 디테일을 살려내는 길이 환경권을 이루는 방안일 것이다.

2024-08-19

프란츠 파농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이날 우리는 간월암 거쳐 수덕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마지막 회의를 그쪽에서 갖기로 한 것이다. 합정동에서 셋이 만나고, 다른 세 사람은 간월암에서 합류하기로 했다.내려가면서 나는 계속 프란츠 파농을 생각했다. 마침 그의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를 읽고 있던 참이다. 파농은 1925년생인데 1961년에 세상을 떠났다. 길지 않은 일생이었다. 백혈병이었지만, 그 전에 프랑스 정보당국에서 이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몇 번씩이나 일종의 ‘공작’을 벌였다고 한다.프란츠 파농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 출신이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 노예의 후예였다. 비록 어머니는 흑백 혼혈이었다지만 그는 형제들 가운데에서도 유난히 검은 피부를 타고났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철학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평전은 말한다. 파농은 프랑스 정규 군대 군인이 되었다가 의대를 거쳐 정신과 의사가 되지만 결국 철학적인 저서를 쓰게 된다.‘검은 피부, 흰 가면’은 전체를 읽어보면 흑인의 ‘정신적’ 해방에 관해 쓴 책이다. 그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알제리 사람들의 해방운동에 깊이 참여하지만 그의 저서는 흑인들의 진정한 자기의식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한국에서 이 책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김남주였다. 이 시인은 ‘남민전’ 준비위 사건으로 15년형을 받고 9년여를 살다 석방되었다. 그가 이 책을 번역, 출간한 때는 1978년이다. 그는 영감어린 시인의 문체로 이 책을 완역했다.김남주에 관한 회상들은 그가 전대 영문과 시절부터 이 책을 읽었음을 보여준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던 그에게 한국 농민의 상황은 아프리카 흑인들의 상황과도 같은 것으로 느껴졌던 게 아닐까?김남주가 감옥에 갇혀 있던 1980년대에 상당수 지식인들은 한국이 ‘제3세계’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제3세계’라면 한국은 그 정태적 패러다임이 계시하는 탈식민지 해방 혁명이 아니고서는 구원될 수 없다.그러나 한국은 그러한 의미의 혁명이 없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로 변모했다. 한국은 식민지의 유제라 할 분단을 청산치 못한 가운데에도 제1세계와 같은 ‘형상’을 취하게 된 것이다.이 문제는 아주 까다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 끝에 내가 찾아낸 해법은 제3세계론, 종속이론, 올드 마르크시즘 등 1970~1980년대를 풍미한 해방의 이론들은, 그 정태적 패러다임, 즉 어떤 불변의 구조를 상정하고 이 구조는 진정한 혁명 없이는 타파될 수 없다는 신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프란츠 파농, 김남주, 남민전, 제3세계, 혁명, 해방…. 혹시, 그 해, 1987년, 6월부터 7~8월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는 ‘전형적인’ 제3세계 혁명과는 다른 의미의 ‘진짜’ 혁명을 경험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짜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간월암이라는 이름은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간월암 저편으로 아름다운 핏빛 석양이 졌다. 사람이 진실을 안다는 것은 단연코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한다.

2024-08-19

이젠 ‘천국의 미남’이 된 알랭 들롱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세기 중반. ‘지구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로 불렸던 프랑스 영화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알랭 들롱. 1935년생이니 향년 89세.지금은 70~80대 할머니가 된 한국 여성 다수가 영사막에 비춰지는 알랭 들롱의 우수어린 눈빛과 회색빛 트렌치코트에 매료됐다.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는 열광이었다.‘태양을 가득히’를 필두로 ‘한밤의 암살자’ ‘고독한 추적’ 등의 영화에서 보여준 알랭 들롱의 반항적 이미지와 강렬한 눈빛은 동시대 미국 미남배우인 제임스 딘(1931~1955)과 비교되며 ‘프렌치 느와르(암흑가 남성들의 파멸을 다룬 영화)’라는 조어(造語)까지 생겨나게 했다.“인물값 한다”는 옛말처럼 알랭 들롱은 무수한 스캔들 또한 만들어냈다. 독일 출신 열아홉 살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의 시끌벅적했던 연애를 시작으로 나탈리 들롱, 미레유 다르크 등 사망 때까지 공식적으로만 5명의 여성과 결혼 혹은, 동거를 이어갔던 것.‘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알랭 들롱이 아기였던 시절 동네 산책을 나갈 때면 그의 엄마가 유모차에 이런 팻말을 붙였다. ‘제발 내 아기를 만지지 마세요.’ 너나없이 천사처럼 귀여운 알랭의 볼을 쓰다듬으려 했기 때문이다.뿐인가. 10대 땐 식당 앞에 서있으면 식당 주인이 스테이크를 공짜로 주고, 옷 가게 앞을 서성거리면 의상실 주인이 돈 안 받고 외투를 줬다는 이야기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떠돌았다.알랭 들롱에게 ‘미남으로 평생을 사는 게 어땠는가?’ 묻고 실은 남자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해졌다. 이제 그는 ‘지구의 미남’이 아닌 ‘천국의 미남’으로 닉네임을 바꿨기에. 멀리서 명복을 빈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8-19

육근상 시인 ‘동백’ 의 충청 방언 맛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평론가 임우기는 그의 비평문집인 ‘문학과 예술의 다시 개벽’(솔, 2024)에서 “방언은 삶의 살아있는 현장의 목소시를 직접 가져오는 것일 테니까 그야말로 삶의 내부에서 우러나온 자재 연원의 언어이고, 그것이 여러 현장의 구체성을 확보할 테니까 인위적 공교함을 앞서는 언어”라며 방언문학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소외된 삶을 사는 자들의 방언 복권으로 아버지의 삶의 승리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문학적 승리라는 해독은 매우 난해하다. 시인의 눈에 비친 여항의 사람들의 삶을 방언으로 그려내면서 여항인들이 과연 무슨 변화가 있을까? 햇볕이 자주 다가서지 못하는 세계의 모든 소리들 그 가운데 기거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태양의 밝은 햇살에 조명된 표준어로 쓴 시에 가까이 다가서게 해준다는 자율적 시론을 확대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게 문학방언이 놓여야 할 자리”라고 방언문학론을 펼쳤다. 그가 대표적 방언 시인으로 꼽은 시인 육근상은 충청 방언으로 온전한 시를 창작한 많지 않은 시인 중의 한 분이다.육근상의 시집 ‘동백’(솔, 2024)에 실린 ‘해나무팅이’라는 작품을 보자. “해나무팅이라는 곳은/다 헐 수 웂는 말 빈 마당 휘돌먼/천장 내려온 먹구렝이 문지방 넘어 대숲 아래 똬리 틀고 있다는거다//새벽밥 준비허던 엄니/투거리 들고 장 뜨러 나왔다/아달아 오짠일여 언능 들어가자/아니다아니다 정짓간 들어가/주먹밥 쥐여주며 잽히먼 안 된다/엄니는 암시랑토 않응게 호따고니 넘어가그라/지푸재 새앙바위 뜬 그믐달인 거다/뒤안길 달음박질치다 넘어져/손톱 빠지고 이마빡 깨고/옆구리 터져 돌아와 보니/뚜껑이 개터래기 땅개 모르는 척이다/아무 말 허지 않는다/그슨새 지나간 자리 않고서야/숨죽이고 핀 꽃들 펀던 달려나갔겠는가/돌아보도 않고 피반령 넘어 갔겠는가“그는 왜 이 시를 방언으로 썼을까? 햇살이 내리는 마을의 한 모퉁이 자리인 ‘해나무팅이’는 시인의 고향집이다. 운동권 수배자 신분의 시적 화자가 꼭 시인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수배자 신분으로 숨어든 고향집 ‘엄니’와 동네 친구들과 문 앞에 매인 개도 이 시의 서사의 핵심이다. 이 시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부 토박이의 말로 표현함으로써 현장감과 서사를 더 견고하게 다져 준다. ‘암시랑토 않응기 호따고니 넘어가그라’가 이 시의 핵심행이다.‘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경찰에 잡히지 말고 빨리 산을 넘어가 피신하라’는 ‘엄니’의 말은 캄캄한 밤하늘에 뿌린 핏빛별이 된다.반정부 시국 사건에 연루된 자의 실화사건이 문학장치에 올려져 엄청난 확대 재생산의 과정을 거치면서 독재의 강압조치가 부풀어오른다. 문제는 이런 민중성을 이용한 작품의 상투성의 문제나 허구성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거칠 사이가 없었다.부들부들 먹기좋게 잘 부풀어 오른 빵에 요기조기 보기 좋고 맛있게도 박혀있는 콩과 같이 친근한 방언 ‘그슨새’ ‘호따고나’, ‘펀들’은 독자들의 식감을 한층 더 높여 준다. 육근상 시인의 ‘화엄장작’, ‘꿀벌’, ‘가을’과 같은 뛰어난 시에 펼쳐진 시의 말씨를 보면 그는 고향지명과 토박인 말씨의 청각적 인상을 매우 중시하며, 문학방언으로 진지하게 시작하는 시인임을 알 수 있다.‘꿀벌’이라는 시에서 “엄니가 생을 하다여/사경을 헤매고 있던 날/마당 가득하게 작약은 피어있었네/뜰팡에 벌통 몇 개 놓고/꿀 따곤 하셨는데/겨울날이면/늬덜두 목숨인디 먹구살으야지/아나 아나/벌통에 설탕물 부어주곤 하셨네(중략)/허리에 상복 무늬 하고/끝없이 걸어나오던 꿀벌들/밀랍을 먹감나무 가지에 발라놓아도/영영 돌아오지 않았네.”‘꿀벌’의 묘사를 엄니 장례에 면한 상복으로 처리한 점도 대단하지만 그 이전 수배자 신분으로 엄니 곁을 지키지 못한 시적 화자를 대신한다는 상상력도 뛰어나다. 엄니는 아들 대신 벌들을 자정으로 키웠고, 벌은 아들 대신한 상주 역할로 보답하는 것이다. 육 시인과 같은 민주운동의 세력을 배출한 것은 세상일과 아무 관계없는 듯한 무지랭이 농사꾼의 아내요 육시인과 같은 아들을 키운 ‘엄니’들이다. 민주화의 주류 레짐의 밑에는 한국의 어머니가 ‘지령의 기화’(임우기, 329)임에 틀림이 없다.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노동에 시달린 못난 대한민국의 어머니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를 키워내었기에 그들의 시골 방언은 그들의 심회를 그대로 전달하는 강력한 힘의 언어인 것이다.

2024-08-19

바다 위에 떠 있는 신사(神社)를 찾아

지금까지는 히로시마와 관련해 원폭이나 전쟁에 관련한 이야기에 집중한 것 같습니다.그러나 히로시마는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한 곳인데요. 히로시마현을 일컬어 ‘일본의 축도(縮圖)’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로시마에는 일본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바다, 섬, 산, 평야 등이 모두 존재합니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인 ‘세토나이카이국립공원’(1934년 지정)의 중심지도 바로 히로시마현이며, 히로시마현에는 두 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두 개의 유산 중 하나가 바다 위에 지어진 이쓰쿠시마신사(53B3島神社)인데요. 4월 27일 우리 일행이 향한 곳은 바로 이 신사입니다.이쓰쿠시마신사가 있는 히로시마현 남서부의 이쓰쿠시마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히로시마 시내에서 열차를 타고 35분 정도를 달려 미야지마구치역에서 내린 후에, 다시 페리로 갈아타고 10여 분 정도를 더 가야 합니다. 이 날은 미야지마구치역에서부터 수많은 일본인들로 발걸음을 떼어 놓기도 어려울 정도였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날은 골든위크(황금연휴)로 불리는 긴 연휴의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보통 4월 29일인 ‘쇼와의 날’부터 5월 5일 ‘어린이날’까지 이어지는 일주일이 넘는 연휴 기간을 일본인들은 ‘골든위크’라 부르며, 국내외로 여행을 떠나고는 하는데요. 2024년에는 토·일요일과 대체 공휴일까지 겹치는 바람에 골든위크가 무려 4월 27일부터 5월 6일까지 이어졌던 것입니다. 저희는 미처 그 정보까지는 확인하지 못한 채, 일본인들이 모두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골든위크의 첫 번째 날, 일본 3대 절경(나머지 두 개는 교토의 아마노하시다테와 미야기현의 마쓰시마)의 하나로 꼽혀 평소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이쓰쿠시마에 간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 가면 가장 이색적이면서도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아마도 신사일 텐데요. 신사는 그야말로 일본인의 일상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대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초가 되면 유명 신사에는 수백만의 사람이 방문했다는 뉴스가 들려오기도 하고,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날 때면 일본인들은 늘 신사에 가고는 하니까요. 이러한 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사를 의미하는 옛날 단어가 ‘모리(森, 숲)’였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모든 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먼 옛날의 일본인들도 장엄하거나 아름다운 자연에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는데요. 그렇기에 사람들은 신성한 장소에 신전을 짓고 의례를 치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신사라고 합니다. 지금도 신사는 신성한 느낌을 주는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이쓰쿠시마의 자연은 아주 오래전부터 숭배의 대상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섬의 중앙에 자리한 해발 535m의 미센산(5F25山)이 지닌 능선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쓰쿠시마는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는데요, 수백만 년 동안 화강암이 풍화되며 연출된 장엄하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인하여, 고대로부터 일본인들은 이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섬 전체가 ‘신의 섬’으로 신성시되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미센산의 능선이 마치 관세음보살이 누워 있는 모습에 비유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그랬던 이쓰쿠시마신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크게 개축된 것은 1168년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서입니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자신의 구미에 맞춰 천황을 갈아치울 정도의 막강한 실력자였는데요. 그는 당시 송나라와의 무역 거점을 하카타(후쿠오카의 일부)에서 오오다와토마리(고베의 일부)까지로 확장시켜 더욱 큰 부와 권력을 누리고자 했으며, 이 때 세토나이카이에 자리한 이쓰쿠시마신사를 해상활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쓰쿠시마의 광장에는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지금도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경재 숭실대 교수 페리에서 내려 이쓰쿠시마신사로 향할 때는, 수많은 관광객만큼이나 많은 사슴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는데요. 이쓰쿠시마에는 현재 약 500마리의 사슴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신사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바다 위에 떠 있는 붉은 색 도리이(鳥居:신사 입구에 세운 문)인데요. 무게가 60톤이나 나가며, 높이 16미터 둘레 10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도리이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끌었습니다. 이 도리이를 제대로 촬영할 수 있는 포토 스팟에 서기 위해서는 길게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습니다.이쓰쿠시마신사에는 일본의 신불습합(神佛習合, 일본 고유의 신앙과 불교가 융합되어 하나의 종교 체계를 이룬 것)이라는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여, 수많은 불교 유산이 남아 있기도 했습니다. 이 날 우리는 점심으로 히로시마 특산의 장어덮밥을 먹었는데요. 독특하게도 이곳에서는 우나기(민물장어)가 아닌 아나고(바닷장어)를 사용하여 덮밥을 만들었습니다.가격은 우나기보다 저렴하면서도 담백한 맛은 오히려 나은 아나고덮밥과 함께, 이번 히로시마 답사는 조용히 저물어 갔습니다.글·사진=이경재(숭실대 교수)

2024-08-19

평범함에 대한 존경

지난달에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제 약 50일 정도를 함께 한 셈이다. 그 중 아내의 회복을 위한 입원 기간과 산후조리원에 있던 기간을 제외하면 내 손으로 육아라는 것을 하게 된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육아는 고단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프리랜서 형태로 일을 하기 때문에 아내와 둘이 함께 아기를 돌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생아 육아는 쉽지 않다. 세 시간 반에 한 번 아기는 분유를 먹는다. 분유를 타고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잠투정을 받아주다 다시 잠을 재우는 과정은 아무리 빨리 해도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두 시간 쉬고 다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것인데, 체감적으로는 물 한 번 마시고 나면 또 아기가 깨어나 밥을 달라고 보채는 기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백일의 기적’을 우리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정말 그 무렵이면 아기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백일까지 우리를 버티게 해 주는 것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그래도 우리의 아기가 너무나도 사랑스럽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과정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육아 선배들이 이미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고단함이 아니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겨냈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은 때로는 위로가 되고 때로는 오기가 되어 다시 마음을 다잡게 만들기도 한다. 육아는 평범한 행위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어려움을 극복해내었고 누구에게나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평범하다고 해서 위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한 책임감으로 한 생명을 끌어안고 고단한 시절을 보낸다는 것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걸 해내었거나 해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육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일들이 아주 많고 매일같이 그것을 해내며 살아가는 위대한 사람들도 아주 많다. 나는 살면서 ‘나인 투 식스’라고 이야기하는 고정된 출퇴근 시간에 맞추어 살아본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부터 그런 삶을 가까이서 바라볼 기회가 생겼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각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늦지 않게 회사에 출근한다는 것은, 그것을 언제나 해 나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 것 아닌 것이라 느껴질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대단한 일이다. 처음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는 나도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 웃는 얼굴로 아내의 출근을 배웅한 뒤 힘차게 하루를 시작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는 침대에서 간신히 손만 뻗어 아내에게 인사를 건넸고, 또 언제부터는 아내의 출근을 보지 못한 채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이 많아졌다.회사에 출근해서도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하루는 계속된다. 회사에 책상이 있다는 것, 아니면 근로 현장에 자신만의 포지션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책임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출근 하지 않는 프리랜서 예술인인 나 역시 책임감을 느끼며 내 직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책임감이 있는 것과 책임이 주어지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나는 필요한 시간만큼 책임감의 스위치를 켰다가 다시 끌 수 있지만,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최소한 그 조직의 업무시간 만큼은 지속적으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일상성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매우 무거운 일이며 대단한 일이다. 자신이 놓여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속한 조직이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분명 위대한 일이다. 강백수 세상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 원고지와 오선지를 넘나들며 우리 시대를 탐구 중이다. 퇴근해서는 어떤가. 우리는 또 다른 호칭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시간을 맞이하곤 한다. 부모, 자식, 때로는 친구라는 호칭조차도 책임감을 요할 때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역할 또한 잘 해내며 살아가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나의 경우처럼 육아 전선에 뛰어들기도 하고 부모님을 챙기기도 하며 외로운 친구들에게 어깨를 내어주기도 하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 그 과정마저 해내고 나면 진정한 자유시간이 잠시 주어지기도 하는데, 그런 순간에마저 다음 날을 또다시 위대하게 보내기 위해 절제력을 발휘하곤 한다.평범한 이들의 평범한 하루는 사실 이토록 위대한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에 모든 평범한 사람들은 존중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다. 남들이 그렇게 해 주지 않더라도 스스로부터 자신을 존중하고 칭찬하며 매일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위대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2024-08-19

그렇게 있어 줘, 빛나는 별처럼

‘킹 오브 프리즘’이 개봉할 것이라는 소식(이 글이 지면에 실릴 때면 이미 개봉한 뒤겠다)을 들었다.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겠지만 어쩐지 관련 내용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애니메이션은 내게 ‘응원상영’이라는 흥미로운 문화를 알려준, 일종의 스승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함께 호흡하는 모습. 스크린에 명시되는 배급사를 향해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엔딩곡이 끝나면 “앵콜!”을 외치는 장면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저런 식의 관람도 가능하구나. 저렇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하고.극장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정숙을 요구해 왔다. 나 또한 예민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으로 극장의 침묵을 중요시 생각한다. 이러한 뾰족함은 영화가 시작하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는데, 옆자리 사람이 팝콘을 먹기 위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고 타인의 불규칙한 호흡 때문에 작품에 몰입하는 것이 힘겨울 정도다. 가끔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고 싶다. 이봐요. 당신의 숨소리가 매우 크다는 걸 알고 있어요?응원상영은 다르다.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소리를 지르고 응원봉을 흔들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당연하다. 작품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킹 오브 프리즘’에는 여자 캐릭터의 대사를 관객에게 넘겨주는 부분이 있으니. 남자 캐릭터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면 목소리 높여(그리고 진심을 가득 담아) “좋아!”하고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나는 오랫동안 이 애니메이션이 인기가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찾아온 꿀 같은 공휴일, 나는 마음먹고 이 작품을 정주행하기로 했다. 전작인 ‘꿈의 라이브 프리즘 스톤’을 감상하는 것부터 시작, ‘킹 오브 프리즘’의 극장판과 애니메이션을 차례로 독파했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의 서사가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어떤 부분에서는 눈물을 찔끔 흘리기까지 했다.한동안 나는 ‘프리즘 스타’들에게 빠져 지냈다. 방 청소를 하다가 “작사, 작곡은? 신도하!”라고 외친다든지, 강아지가 나를 향해 폴짝 뛰어들면 “미안, 난 모두의 것이니까” 하고 너스레를 떨고, 운전 중에 채우리의 ‘Blowin’ in the Mind’를 튼 뒤에 신명나게 따라 부르기도 했다. “양자택일 극단적이야 넌 너무 긴장하지 마라, 냥냥 냥냥냥 냥냥!” 이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정말이지 수치스럽겠지만, 나도 나를 제어할 수 없었다.내가 이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또한 내 동생이었다. 그녀의 2D 사랑은 아주 오래되었는데, 국적 불문, 장르 불문, 모조리 섭렵해 내는 2D계의 척척박사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나를 앉혀 놓고 ‘킹 오브 프리즘’의 역사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가 감흥 없이 건성으로 듣자 맥 빠진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니는 이 장르를 진심으로 즐기는 게 아니잖아. 다만 신기한 것뿐 아니야?”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그럴지도. 오랜 기간 나에게 있어 2차원의 존재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깨닫고 있는 요즘이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현실보다 더 현실다움을 느끼고 그 안의 인물이 떠나갈 때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았던가. 하나의 캐릭터가 빚어지는 데는 무엇보다 정교하고 섬세한 조물주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거기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와 “좋아하는 2D 캐릭터가 생겼어”는 충분히 같은 층위에 놓일 수 있다. 좋아하는 마음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어라 형용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나’를 넘어서 ‘너’로 향하는 일. ‘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의 하루가 맑아지는 일. 마음이 멀리 뻗어나갈수록 세계는 확장되고 혼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영역까지 가닿을 수 있다.어쩌면 나는 그러한 마음을 동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흠뻑 빠져 하루를 보내고 자신 있게 “좋아해!” 하고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그 힘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 그것은 불행을 피하기에 급급한 것이 아니라 행복을 향해 걸어가는 태도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 ‘덕질’은 삶을 윤택하게 하지. 좋아하는 마음은 함께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고. 물론 그 세상이 늘 기쁘기만 할 순 없겠지만, 그럼에도 애호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며, 계속 그렇게 있어 주면 좋겠다. 빛나는 별처럼.

2024-08-19

인사 시스템에 문제 있다

김진국 고문 광복절에 낯부끄러운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이 참석한 광복절 행사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데, 같은 시각 효창공원의 백범기념관에서는 또 다른 기념식이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광복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통일이 숙제라는 뜻이다. 그런데 남북통일은커녕 남쪽마저 두 쪽이 난 광복절 경축식을 치렀다. 광복회 기념식 맨 앞줄에 민주당을 비롯해 야당 대표들이 앉았다.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만 정부 행사에 참석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했다. 독립기념관장 인사 문제가 온 나라를 해방 정국으로 되돌려놓았다. 광복회 행사 발언은 더 고약하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덮을 수는 없다”라고 정부를 비난했다. 야당은 기념식장에 입장하기 직전 ‘친일·반민족 윤석열 정권 규탄 대회’를 열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3년이 지긋지긋하게 길다. 혁신당은 야당·시민사회와 함께 친일 밀정 정권 축출에 온 힘을 다하겠다”라고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이 이종찬 광복회장의 반발에서 비롯했다. 이 회장은 백범의 장손자인 김진 광복회 부회장을 추천했으나 탈락했다. 이 회장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뉴라이트’다, 건국절을 만들고, 이승만 전 대통령을 신격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건국절을 제정할 의사도, 검토한 적도 없다”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김 관장을 사퇴시키라고 요구하며 논란을 키웠다. 이 회장의 조부 우당 이회영과 종조부 성재 이시영 전 부통령 형제는 전 가산을 팔고, 온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명문가다. 이 회장은 과거 언론인터뷰에서 “작은할아버지(성재)께서는 정부 수립 전후로 사이가 틀어진 백범(김구)과 우남(이승만) 사이에서 두 분을 화해시키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라고 말했다. 단독정부수립에는 우남 노선을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더구나 이 회장은 지난해 “이승만 기념관 설립에 대찬성”이라고 말했다. 이제 와 ‘이승만 우상화’라고 주장하는 건 이해가 안 된다. 광복을 위해 모두 바친 선조를 생각하면 개탄스럽다. 김형석 관장은 “건국절에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뉴 라이트’가 아니라고 부인했다. 광복회나 야당이 밝힌 그의 발언을 봐도 딱히 문제 삼을 내용이 아니다. 광복절 행사는 특정 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축식이다. 인사에 이견이 있다고, 오물을 뿌릴 자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 경영 능력에 아쉬움이 남는다. 노무현 정부 때 한 장관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장관이 인사할 자리가 많다. 부처 내에는 물론 산하 단체 임원도 인사한다. 이것을 장관이 모두 임명하면 안 되고, 산하단체는 물론 부처 내 인사도 임명권자인 대통령실의 의견, 국·과장 재량권도 일정 비율 인정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야 국장도 부하직원들을 지휘할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종찬 회장은 대통령에게 세 번이나 사신을 보냈는데도 답이 없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윤 대통령이 아들 친구다. “모욕감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인사를 들어주든 말든, 성의를 다했으면 이 지경이 됐을까 싶다. 더구나 임기가 절반 가까이 지난 지금도 공공기관장·감사 자리 39%를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은 52%, 나머지는 공석이다. 임기가 끝난 사람들도 후임 인사가 오지 않아 1년 넘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비어 있는 공공기관장 인사를 미루자 “총선에서 떨어진 정치인들에게 줄자리인가 보다”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총선이 지나도 그대로다. 낙선자 배려가 아니라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꼭 챙겨야 할 자리 외에는 위임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실이 다 쥐고 있다고 한다. 오히려 작고, 보잘것없는 자리에 집착해 분란을 일으킨다.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의 관심사인 경우다. 인재를 발굴하는 것도, 정권 창출 기여에 대한 보상도, 검증도 모두 문제가 있다. 임기가 절반이 다 가도록 이 모양이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2024-08-18

자생력 갖춘 미래도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박남서 영주시장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도시의 근간이 되는 경제구조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고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해나가면 제자리걸음뿐 새로운 미래를 맞이할 수 없다.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살아남기 위해서는 도시가 가진 산업의 경쟁력을 배가시키고,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영주시는 베어링으로 대표되는 첨단산업이 그 마중물이다.베어링은 산업제품의 정밀성·내구성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로 산업의 쌀로 불린다.자동차 한 대당 100~300개가 사용되며 기차, 항공기, 스마트폰에도 필수 부품이다. 영주시는 일찍이 국가 기간 산업으로 꼽히는 첨단베어링에 주목하고 지역 특화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여왔다.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8월, 국토교통부로부터 최종 지정, 승인받았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으로는 최초의 국가산업단지로, 첨단베어링 산업단지가 성공적으로 운영될 경우 1만 명 이상의 인구증가와 760억 원 규모의 경제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지난 13일, 영주시는 경상북도 개발공사와 임종득 국회의원과 함께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영주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 사업설명회를 개최했다. 500여명이 참여한 이날 행사에는 임종득 국회의원과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 최은석 의원, 최형두 의원, 이인선 의원, 이달희 의원을 비롯해 박성만 경북도의회 의장, 양금희 경북도 경제부지사, 박태규 재경영주시향우회 회장. 김진영 영주시민추진위원장 등 영주첨단베어링 국가산단 지정에 힘을 모아온 많은 분들이 함께 자리해 영주시 베어링산단이 대규모 기업 및 투자유치에 성공해 경북은 물론 국가성장의 원동력 역할을 해주기를 함께 기원했다.영주에 지어지는 첨단베어링 국가산업단지는 영주 IC와는 4.3㎞, 영주역에서는 2.4㎞ 떨어진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게 된다.향후 첨단베어링 제조 기술을 활용한 많은 기업들의 입주와 함께 새로운 정주 인프라 등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다양한 사업들이 함께 추진될 계획이다.또, 이와 함께 지역에 위치한 동양대학교와 경북전문대에 베어링 산업 관련 인력양성을 위한 학과를 운영하고 고용보조금 등을 지원함으로써 우수한 인력을 체계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전문인력양성 사업도 차곡차곡 추진 중에 있다.시는 현재 국가산단 기업유치전략 수립 용역을 추진 중으로, 지속적인 기업 면담을 통해 친기업적인 지원제도를 발굴하고 있다. 또한 베어링 관련 산업과 경량소재산업을 하나로 묶는 ‘베어링·경랭소재 관련 기업 집적화 단지’ 조성도 추진 중에 있다.영주시는 일반산업단지 5개소, 농공단지 6개소 등 총 11개소의 산업, 농공단지를 운영 중인 경북 북부권의 대표적인 제조업 중심 산업도시로, SK스페셜티, 노벨리스코리아, 베어링아트, KTG 영주공장 등 관내 대기업과 중소기업 등 168개 기업과 기업해피모니터, 1인 1기업 담당운영 등 소통창구를 원활하게 유지, 상생해 온 경험이 풍부한 도시다.지난 8월 6일 경상북도에서는 기업을 위한 경북을 민선8기 후반기 경제정책의 핵심 화두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영주시 또한 경북도와 발맞추어 일사천리 경제도시 조성을 목표로 기업지원실과 일사천리팀을 신설하는 등 인허가 원스톱 지원, 규제 완화 등 경제도시 영주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특히 올해에는 100개 이상의 베어링 관련 기업 방문 등 국가산업단지 기업유치에 적극 힘써 경북 북부 대표 산업도시에서 대한민국 대표 첨단도시로 도약해 나갈 계획이다. 도시의 자생력은 도시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과 매력에서 나온다. 경기침체와 인구감소 등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영주시는 도시의 매력을 하나하나 추가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더욱 단단한 자생력을 갖추어 간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변화가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아무런 기대도 할 수 없다. 영주시는 변화와 도전에 두려움 없이 계속해서 전진해 인구가 돌아오는 도시, 자생력 있는 도시 영주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2024-08-18

말 못할 첩첩은 내게도 있지

이희정시인 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김수환, ‘첩첩’전문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김수환 시인의 ‘첩첩’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축조된 구조물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어떤 시어나 비유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딱 들어맞는다.자칫 이런 상징은 언어유희로 한정될 수도 있지만, 이런 디테일은 시의 진정성을 담보한다. 이를테면 이 시에는 덜 조여진 ‘첩첩’은 하나도 없다. 그러면서 여유롭게 관조적으로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매끄럽게 흐른다. 첩첩이 닿는 공간마다 적확하고 깊은 이 시는 말 못 할 첩첩이 제각기 한 작법으로 성취를 이뤄내고 있다.“밤을 새워 만든 사과파이”에서 시작된 첩첩은 “수십 장의 종이 같은 얇은 마음”에도 잘 드러난다. 행간에 진입할수록 수사적 진술을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첩첩에는 이렇다 할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종일관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첩첩에 적중한다. 시의 리듬을 통해 발화되는 첩첩들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거느리고 있다. 첩첩이라는 어사(語辭) 하나가 이렇듯 많은 서사를 거느릴 수 있다니 충분히 다성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저미고 밀어 만드는”첩첩은 겹겹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사전적 의미로 첩첩은 걱정이나 근심이 겹으로 쌓여있는 것으로 눈으로 보이는 외상의 겹겹으로 설명될 수 없는 더 깊은 정서가 내진한다.말하자면 이 시에서 첩첩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고개”와 끝끝내“건널 수 없는 마음”을 되짚어 넘어보려는 태도이며, 서로의 몸으로 가슴으로 반복해서 설명되어 온 우리가 될 수 없는‘우리’에 대한 함축을 풀어내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시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서사 구조 속에서‘관찰되는 객체’일 수밖에 없는 첩첩을 말하지만, 특유의 생동감 있는 리듬으로‘정서적인 주체’로 환원되고 있다.여기서 첩첩은 압축된 현대시조의 말 부림만으로는 환유할 수 없는 시상이 중첩되어 있다. 크루아상의 외피처럼 사실상 속은 공기로 부풀어 비어있는데, 플롯은 꽉 차 있다. 원심력만으로 평생을 끌고 가는 첩첩은 가벼운 듯하나 아픔이 깊다. 바로 이 점이 “김수환 시인의 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그리움과 아픔”이라는 독해에 동의하게 되는 지점이다.이 시에 드리운 첩첩의 배경을 보라. “밤을 새워 만들”어야 하는 것이고,“물 마른 진흙”이고,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이지 않은가. 풀리지 않는 매듭 앞에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람에게 이 시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늪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해도 독자에 따라 저 깊이까지 파고들게 하는 구심점을 목도 할 수는 있겠다.막막한 내면의 벽을 달콤하고 부드러운 외양 속에 숨긴 대상의 비유도 놀랍지만, 더 감탄스러운 것은 저마다의 첩첩을 대하는 자세다. “아주 얇게”“모퉁이 돌아”“가쁘게”시인의 이 작품은 시조라는 장르가 진부하지 않을 정도로 신선하고 입체적이다.그렇다면 이 첩첩의 막막함이 주는 무기력한 안온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가벼운 듯 깊은 이 시의 정조가 당신에게 어떤 방향을 작용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가라앉아 가는 당신의 밤을 첩첩은 흔들어 놓을 것이다. 치료제는 없을지라도 사과파이 같은 달콤한 각성제는 들어 있기 때문이다.“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

2024-08-18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 운동과 건강

박성률트레이닝과학연구소장동국대 의과대학 연구초빙교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전 세계 인구의 절반가량이 통제를 받았다. 다시 말해 90개 이상 국가와 지역이 39억 명 이상의 사람을 집에 머무르도록 권고 또는 명령한 것이다. 이 같은 강력한 봉쇄정책으로 바이러스 확산은 둔화했지만, 운동 등 신체활동을 할 수 있는 야외 장소나 공간 폐쇄로 중·고강도 신체활동량이 줄어들며 신체적·정신적 건강 불균형과 수면의 질 저하 등이 나타났다. 결국 코로나19 팬데믹이 머문 자리에는 ‘신체활동 감소’라는 흔적의 자국이 남았다.코로나19가 지속되면서 신체활동량 감소와 좌식시간 증가로 체력 저하는 불가피한 현실이 됐다. 특히 고령자뿐만 아니라 어린이, 청소년들의 복합적 건강 위험이 컸다. 체력 감시 자료를 분석한 해외 연구에서도 팬데믹 기간의 5~17세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모든 범주에서 체력이 떨어졌다는 보고가 나왔다. 체력의 변동은 코로나19 초반기에 가파르게 저하했다가 후반기에 어느 정도 회복했으나 비만 남자어린이들은 회복을 하지 못했다. 이처럼 취약집단에서 코로나19 건강 위험이 노출됐음에도 적절한 대안은 미흡했다.우리나라 조사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도 코로나19 이전 기간에는 신체활동 수준이 일관성을 보이다가 팬데믹 기간에 현저하게 줄었다고 보고가 됐다. 특히 노년층을 포함하여 개인이나 집단에서 팬데믹 기간에 신체활동량 감소가 뚜렷했다. 신체활동 감소는 비만과 마찬가지로 ‘감염병’ 범주로 다뤄지고 있다. 전 연령층에서도 어린이들이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은 마치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 위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코로나19 이후 수행된 대규모 전향적 코호트 연구에 의하면, 코로나19 발생 전 주당 최소 150분 중·고강도의 신체활동량을 유지해 왔던 성인들은 코로나19 감염이나 입원 확률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연구 결과가 연이어 발표되면서 또다시 닥쳐올 팬데믹을 대비하는 전략으로 정부나 지자체 및 기관이 나서서 노인과 학생들을 위한 신체활동 부족과 건강체력 유지 개선을 위한 온라인 기반 운동 프로그램의 개발 및 적용이 부각되고 있다.코로나19의 경우 급성 단계가 지나면 일련의 증상들이 남아 만성 코로나19 증후군을 보일 수 있다. 이때도 운동은 관련 증상을 개선하고 코로나19의 장기적인 영향을 줄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코로나19에 감염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신체적 운동재활 평가에서 신체적 운동은 호흡곤란, 피로, 우울증 개선에 효과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같이 신체적 운동재활은 장기간 지속되는 코로나19에 대한 잠재적 치료 전략으로 선택될 수 있고, 코로나19에서 회복한 사람들을 위한 임상 지침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운동 등의 신체활동 부족은 심장과 폐, 혈관의 기능을 떨어뜨려 심혈관계 질환, 당뇨병, 암과 같은 만성질환 유발과 연관이 있다. 게다가 골다공증, 일반적인 골절, 치매 위험, 불안과 우울증 발생률 증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면 활발한 신체활동은 심혈관질환 및 사망률 위험을 감소시키고, 비만, 치매 및 알츠하이머 질환의 예방과 개선에 효과가 있다. 이외에도 신체활동은 최소 25가지 만성질환에 대응하는 보호적 메커니즘에 작동한다. 신체활동이 잠재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SARS-CoV-2) 감염에 대응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코로나19 팬데믹은 감염병에 대응하는 운동 이점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고, 보건의료 연구 분야에서는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했다. 규칙적인 신체활동은 코로나19 예방, 치료, 재활의 핵심 수단으로 역할을 했다. 즉 운동은 면역 감시 기능을 개선하고, 코로나19 감염에 저항하며 증상을 감소시키고, 회복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재확인된 것이다.팬데믹 이전 주당 9시간 정도 빠르게 걷기에 해당하는 신체활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19% 낮았다. 특히나 신체활동이 활발한 성인의 경우 감염 위험이 11% 낮았고, 입원 위험이 36% 낮았으며 사망 위험도 43% 낮았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에서 우리가 다음 팬데믹을 대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더욱 명확해진다.코로나19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한 번쯤은 온-오프라인을 통해 운동 정보를 검색하고 따라 하려는 시도도 했을 것이다. 일부 지자체가 기본적인 신체활동 권고나 운동 동영상을 개발했으나 활용도나 적합성 평가는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최근 들어 다양한 운동 정보가 늘어나면서 코로나19 기간 중 운동 참여 여부에 따른 방해요인에 대한 연구들이 수행되고 있다.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향후 팬데믹에 대응할 신체활동력 및 면역력 강화를 위해서는 참가자의 선호, 건강 및 체력 상태, 운동 시간과 강도, 부상 방지 대책, 교육 및 지도, 접근성, 사회적 연결 등을 고려한 근거기반의 맞춤형 온라인 운동 프로그램의 개발 및 적용이 시급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에 대한 정부와 지자체 및 기관의 세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4-08-18

뉴라이트의 역사인식 무엇이 문제인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뉴라이트(new right)의 역사관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광복절 행사마저 양쪽으로 갈라져 개최되었다.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뉴라이트란 무엇인가. 한국의 뉴라이트는 2004년 자유주의연대로 출범하여, 2007년 뉴라이트 전국연합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보수적 학자 중심의 이들은 반공주의, 신자유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등 극우적 사고를 선호한다. 이들 중에는 과거 진보 좌파에서 ‘신흥 보수’를 표방하며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까지 있다. 이들은 ‘교과서 포럼’을 통해 역사 교과서의 개편을 시도하면서 ‘현대 사학회’를 통해 자신들의 극우적 주장을 파급하려 했다.윤석열 정부는 정부의 주요 기관이나 독립운동기념 단체 등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주요 공직에 뉴라이트 인사를 대거 기용하였다.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 관련 대한광복회가 정부의 광복절 행사에 불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정치의 극한적인 대결의 기저에 뉴라이트의 극우 편향적 역사 인식이 한 몫하고 있는 셈이다.첫째,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은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시하는 친일사관과 상통한다. 낙성대 경제 연구소 이영훈 교수 등 뉴라이트 인사들이 출판한 ‘반일 종족주의’(2019년)는 한국사회 위기의 근원을 한국인들의 ‘반일 종족주의’에서 찾고 있다. 이들은 한국 민족주의를 종족주의로 비하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수많은 동포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전 민족이 고통 받은 역사를 인정치 않고 있다. 이들 중엔 일제의 ‘양곡 수탈’을 ‘수출’로 둔갑시키고 있다. 일제 시 일부 친일 부역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 백성들이 수난 받은 역사까지 부정하고 있다. 이 같은 그들의 역사 인식은 일본 정한론자 요시다 쇼인의 역사인식과 괘를 같이한다. 쇼윈은 이토오 히로부미 등을 길러 조선 침공의 발판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뉴라이트의 천박한 역사인식은 일본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반민족적 친일사관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둘째, 뉴라이트의 이러한 역사인식은 결국 상해 임정 등 항일 독립운동까지 폄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낙성대 연구소의 정안기 교수는 올해 ‘김구는 테러리스트로 살았다’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렇게 되면 일제 시 대구에서 출범한 항일 무장비밀 결사인 광복회의 활동까지 모두 테러행위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의열단의 이종암, 청산리의 김좌진, 광복회의 우재룡, 상해 임정의 윤봉길의 활동마저 테러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제 시 수많은 항일 투사들이 일본 법정에서 폭력 테러 살인범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뉴라이트 인사들의 김구 테러리스트라는 주장은 결국 일제의 단죄를 정당화시킬 뿐이다. 그들의 1948년 8·15 건국절 제정주장도 1919년 상해 임정의 역할을 비하 시키려는 의도일 뿐이다. 이들 뉴라이트 일부는 상해 임정을 정부가 아닌 ‘임의 민간운동 단체’로 폄훼하고 있다. 이들은 오히려 상해 임정에서 탄핵된 이승만 대통령을 극찬하고 있다. 이는 분명 반 헌법적 반역사적 역사인식이다.셋째, 뉴라이트적 인식은 대일 외교 등 현안문제 해결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일본은 아직도 우리의 고유 영토인 독도까지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 노동자 강제 징용, 종군위안부 문제까지 일본의 요구에 양보해 버렸다. 일본은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등재 요건인 한국인 강제 동원사실까지 기록에서 삭제해 버렸다. 일본정부는 최근 그것을 한국 정부와 수차례 협상 결과라고 강변하고 있다. 필자가 지난달 다녀온 일본 야마구치의 장생 광산에도 당시 강제 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 137명이 수장되어 있다. 일본의 민간단체까지 이 문제 해결을 주창하지만 일본 정부도 한국정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뉴라이트 일부 인사들은 노동자 동원마저 강제가 아니고 위안부도 자발적 생계형이라고 동조하고 있다. 불행한 과거에 묶여 대일 협상마저 거부하는 것은 온당치 않지만 역사의 바른 인식은 협상의 전제이다. 신채호의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주장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뉴라이트적 시각은 학자들의 연구 차원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사상과 학문의 자유라는 입장에서 허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정부가 이런 뉴라이트 인사 25명을 정부 요직에 기용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윤석열 정부 들어서 국방, 통일부 장관, 국편 위원장, 한중연 원장, 동북아 역사재단 이사장, 과거사 정리 위원장 등 정부 요직에 이들을 임명 전진 배치한 것은 유감 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인식이 윤석열 정부의 외교, 안보, 대북 정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극한 이념 대결 정치로 치닫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뉴라이트의 이러한 역사 논쟁이 국익에 도움보다는 분란만 야기하니 안타까운 일이다.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교육, 노동, 연금 개혁 등 3대 국정과제가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 대통령의 30%대의 지지율 반등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뉴 라이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은 민족의 정통성을 약화시키고, 국민들의 자존심마저 훼손시킨다.

2024-08-18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오 히로부미

유영희 작가 생협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 일본 생협 활동가들이 한국에 왔을 때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토오 히로부미를 영웅으로 배웠는데 한국에 오니 그들이 한국 사람에게 천하의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 문화 충격을 받았다면서 우리에게 사과했던 일이 있다. 올해는 부쩍 그때 일이 생각난다.79주년을 맞은 올해 광복절은, 이렇게 논란이 많은 광복절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이슈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유만 50회 외쳤을 뿐 일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일을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 8월 6일, 대통령은 독립유공자 후손이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주로 맡았던 독립기념관장에 전혀 결이 다른 김형석 고신대 교수를 속전속결로 임명했다.김형석 신임 관장은 평소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통성을 부정하여 뉴라이트 친일 인사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임용 면접 때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사람들 국적은 일본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취임 후 기자들 질문에 “친일파로 매도된 인사들의 명예 회복에 앞장서겠다”고 답변하여 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대북지원금 5억을 통장 조작으로 횡령한 혐의로 벌금형을 받은 사실도 있다.그런가 하면, 작년 12월에 나온 국방부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에는 독도를 영토분쟁지역으로 표시했다가 논란이 일자 이달 초에 나온 수정본에서는 독도 표기 문제는 해결했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교재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김좌진 홍범도 김구의 이름이 사라졌다. 국방부에서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을 실어 광복군과 독립군이 대한민국 국군의 정신적 토대임을 명확하게 기록했다고 해명했지만 군색하다. 지난 16일에는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기 전시회도 보훈부의 압박으로 취소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라고 한다.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 광복절에 맞추어 발간된 낙성대연구소 정안기의 ‘테러리스트 김구’라는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테러리즘’을 강자에 대한 약자의 저항이라고 정의하고 김구의 9건의 테러 중 테러리즘 있는 테러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1건일 뿐, 나머지는 테러리즘 없는 테러라고 하면서 김구가 개인적 재물 탐심과 보복,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테러를 이용했다고 비판한다.그런데 암만 봐도 이 주장에는 일관성이 부족하다. 제목의 테러리스트는 테러리즘 없는 테러리스트라는 의미일 텐데, 저자가 말하는 테러리스트의 원뜻은 테러리즘 있는 테러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테러리즘은 크게 109개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그중 폭력과 정치적 목적을 가진다는 특성은 대부분의 테러리즘 정의의 공통적 요소라고 한다. 그렇다면 폭력과 정치적 목적으로 김구를 비판하는 저자의 테러리즘 정의는 상당히 주관적이기도 하다.같은 행위라도 내 편이냐 남의 편이냐에 따라 평가는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너는 누구 편이냐고 윽박지르며 묻는 79주년 광복절이 너무나 씁쓸하다.

2024-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