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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하늘과 바다 맞닿은 중세도시 ‘에즈’서 삶의 여유를 맛보자”

◇럭셔리 관광지, 깊이의 삶이 느껴지는 곳 푸른 지중해를 품은 남프랑스는 예술적 감성이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가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도시국가인 모나코에서 세계적인 관광지 니스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가다보면 해발 427m의 절벽 위에 떠 있는 듯한 작은 마을이 있다. 고요한 중세마을 에즈(Eze). 인구는 고작 수백 명 남짓, 면적도 작아서 한시간 정도면 도보로 충분히 둘러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속엔 유럽 귀족과 예술가, 현대의 글로벌 부유층까지 매혹시킨 특별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에즈는 ‘중세의 시간을 그대로 보존한 마을’이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다. 14세기 요새 성벽 안으로 들어서면, 돌로 쌓아올린 건물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방문객을 맞는다. 거대한 상점 간판이나 상업화된 카페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향수를 만드는 소규모 아틀리에, 유리공예 장인의 작업실, 그리고 샤갈이나 니체가 머물렀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간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에즈는 대중 관광지라기보다는 럭셔리 관광지의 정수다. 대표적 명소인 ‘샤토 드 라 쉐브르 도르(Château de la Chèvre d’Or)’는 5성급 부티크 호텔로, 20여 개 객실이 에즈 마을 곳곳의 고택을 개조해서 만든 이채로운 곳이다. 이 호텔은 단순한 숙소 그 이상이다.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과 미로처럼 얽힌 정원, 지중해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테라스까지 갖췄다. 전 세계 CEO와 셀러브리티가 조용히 머물다 가는 곳이다. 이 마을은 ‘양보다 질’을 택한다. 숙박시설과 관광 편의시설 확장을 제한하며, 마을의 정체성과 미관을 철저히 유지하는 정책 덕에 높은 브랜드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에즈 모델’을 한국의 전통 마을 관광 개발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무엇보다 에즈의 진정한 가치는, 이곳에서 ‘속도의 삶’을 내려놓고 ‘깊이의 삶’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해발 427m 절벽 위에 있는 이 마을은 독특한 풍경 덕분에 ‘독수리 둥지’라 불린다. 에즈 빌리지는 중세 시대에 중요한 방어 요새로 사용되었으며, 그 흔적은 여전히 성채 곳곳에 남아 있다. 19세기 말부터 이곳은 수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로 자리 잡았으며, 특히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가 이곳에서 주요 작품을 집필하며 시간을 보낸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니체는 이 마을에서 영감을 받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했고, 많은 현대 예술가들은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에즈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지중해의 절경은 감탄을 자아내며, 왜 니체가 이곳을 사랑했는지 자연스레 느껴진다. 그의 이름을 딴 ‘니체의 길(Chemin de Nietzsche)’을 따라 걷다 보면, 그가 걸으며 사유에 잠겼던 풍경과 마주하는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내 사랑과 희망을 걸고 간청하니,/네 영혼 속의 영웅을 잃지 말고,/가장 큰 희망을 소중히 간직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성스런 기운이 감도는 에즈 빌리지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에즈 빌리지는 코트다쥐르에서 가장 독특하고 매혹적인 지중해의 풍경을 품고 있다. 발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즈넉한 중세마을의 돌담길을 걷다 보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집들과 마주하게 된다. 부서진 돌벽 틈에서 자란 이끼와 잡풀은 마을의 오래된 역사를 은은히 속삭인다. 거친 흙 냄새와 찬란한 햇살, 그리고 마을을 둘러싼 성스러운 기운이 에즈 빌리지의 첫인상이다. 이곳의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사색에 잠기고,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운명애’를 느끼게 된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는 바로 나 자신과 내가 선택한 나의 운명이다. 모든 걱정과 염려를 바닷바람에 실어 보내고, 남프랑스의 매혹적인 풍경 속에 흠뻑 젖어들자. 라틴어로 ‘아모르(Amor)’는 사랑을, ‘파티(Fati)’는 운명을 뜻한다. 니체 철학의 핵심 사상인 ‘아모르 파티’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라는 ‘운명애’를 의미한다. 지중해를 바라보며 문득 지난날을 떠올린다. 고단했던 순간들이 따스한 봄 햇살 속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듯하다. 내 인생의 ‘운명애’, 나만의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위해. 에즈 마을은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빛과 색의 마법 같은 변화를 연출한다. 아침 햇살은 돌담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마을에 ‘고독한 평온’을 드리우고, 한낮의 강렬한 햇빛은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석조 건물의 디테일을 더욱 선명하게 돋보이게 한다. 해질 무렵 저녁노을이 퍼지면, 고요한 중세마을은 온통 붉은빛과 주황빛으로 황홀하게 물든다. ◇ 니체가 사랑한 도시 명작의 탄생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좁은 골목길에 울리는 발자국 소리, 그리고 멀리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파도 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에즈의 풍경을 완성한다. 걷던 중 갑작스레 발걸음을 멈추고 한곳을 오래 응시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곳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매력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다. 시선 끝에는 낡고 커다란 화분이 놓여 있고, 초록 줄기를 따라 흰 꽃들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셔터 소리가 찰칵 울리고, 흐뭇한 미소와 함께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은 네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에즈쉬르메르(Eze-sur-Mer) 해변마을에서 에즈 빌리지로 이어지는 ‘니체의 오솔길(Chemin de Nietzsche)’.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니체가 남긴 발자취 위에 내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본다.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이곳 에즈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연인이었던 루 살로메(Lou Salomé)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후, 상실감 속에서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신체적 치유와 철학적 사유를 위해 그는 따뜻한 기후와 고요한 환경을 찾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에즈에서 니체는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인간이 더 이상 외부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며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인간이 자신의 삶과 운명을 사랑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즈를 여행하는 건 단순한 관광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시간을 되돌려, 자신만의 삶의 속도를 재조율해보는 ‘작은 사치’에 가까운 일이다. 세계는 넓고, 삶은 짧다. 그 짧은 삶 속에서 한 번쯤은 에즈의 해 질 녘 언덕에 앉아, 지중해의 바람을 맞으며 ‘여유’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글·사진=김범여행작가 /정리=최병일기자 skycbi@kbmaeil.com

2025-04-14

우정

마음이 울적할 때 따뜻한 침대에 누우면 기분이 좋아진다.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더는 힘들게 애쓰지 말고, 가을바람에 떠는 나뭇가지처럼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을 통째로 내맡기면 된다. 그런데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좋은 침대가 하나 있다. 다정하고, 속 깊고, 그 무엇도 끼어들 수 없는 우리의 우정이다. 슬프거나 냉랭해질 때면, 나는 거기에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힌다. 따스한 우정의 침대 안에 내 사고(思考)를 맡겨 버리고, 외부의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나 자신을 방어할 필요도 없어져서 마음은 이내 누그러진다. 괴로움에 울던 나는 우정이라는 기적에 의해 강력해져 무적이 된다. 동시에 모든 고통을 담을 수 있는 든든한 우정을 가졌다는 기쁨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 젊은 시절 그는 산문시를 썼다. 위의 시에서 그는 우정을 “누우면 기분이 좋아”지는 침대로 비유한다. 들어가면 깊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 “신기한 향기로 가득 찬” 침대. 외부의 추위를 막아주는 우정 안에서 그는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기적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고. 우정이 삶의 침대가 되었던 때를 기억해본다. “떨리는 내 마음을 눕”힐 수 있었던 우정의 공간을. 문학평론가

2025-03-06

내가 좋아하는 놀이

나는 놀이하는 천재를 좋아한다. 나는 천재의 잔머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때론 덜 깨친 천재의 재치를 좋아한다. 절망을 모르는 것처럼 반짝이는 혜안으로 즐긴다. 즐기는 만큼 천재의 놀이는 재미있다. 남에게 선사하기보다 자신에 충실하느니. 목숨을 걸고 놀이를 즐기는 그. 나는 그러한 모습을 너무 좋아한다. 너무 가까이서만 보면 지루할지 몰라 그와의 적당한 거리에 서서 그의 몰두를 본다. 그는 시퍼런 칼날은 숨기면서 여유롭게 흔들리지 않고 그는 오줌 찔끔찔끔 싸면서도 태연자약으로 거기 있고 이처럼 의연한 천재가 있어 세상이 아름답다. 나는 놀이하는 천재를 내 마음에 키우고 있다. 그는 언제든지 내 마음속에서 행복해한다. 나와 천재는 둘이 아닌 것처럼 사느니. 천재란 교육 받아 형성된 것이 아닌, 하늘이 내려주신 재능. 누구나 그런 재능이 있지 않는가. 어떻게 자신 안의 그러한 재능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자질이 있다면, 그것이 ‘천재’ 아니겠는가. 위의 시에서 시인이 좋아하는 ‘천재’는 놀이하는 재능이다. 자신에 충실하며 절망을 모르고 “목숨을 걸고 놀이를 즐기는” 천재. 시인은 그 천재를 마음 안에 키우고 그것과 “둘이 아닌 것처럼” 살아 행복하다고. 문학평론가

2025-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