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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는 것과 보이는 것

왜 인간은 모든 타자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하기야 `모든 타자와의 완전한 일치`라는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신의 할 일이 무어겠는가. `인간적`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온갖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한계 중 하나는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다르다는 점이다. 이 두 사이에서 모든 인간적인 문제들이 생긴다. 만약 여러 상황에서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얼추 비슷하게 반영된다면 거기에 따르는 갈등과 번뇌는 문제될 게 못 된다. 바라보는 나와 보이는 나의 기 싸움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라보는 나가 앞에서는 이기는 것 같지만 실제 보이는 나는 뒤에서 진다.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게 사람이기 때문에 앞에서는 대놓고 진실을 말하기 어렵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바라보는 나는 변명이 되기 십상이고, 보이는 나는 진실이 되기 마련이다. 이 예감을 알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이는 나`에 더 치중한다. 예를 들어 `미생`에서 `장그래`가 사무실에서 두렵고 불편하게 느끼는 건 회사를 바라보는 나와 회사에 비치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감지하게 된 장그래는 보이는 나에 대해 단속하게 되고 신경 쓰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나는 타자를 규정할 수 있지만 내가 규정한 그 타자는 정확한 타자가 아니다. 내가 본 그 타자는 옳게 본 타자도 아니고 옳은 타자도 아니다. 다만 내가 바라보는 내 안의 타자일 뿐이다. 반대로 나를 규정하는 타자에 비친 나는 정확한 타자가 될 수 있다. 나를 본 타자 역시 옳게 본 것도 아니고 옳은 타자도 아니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내 밖의 타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그 시선은 정확한 것이 된다. 그것은 약자 인간이 느껴야 하는 운명의 고리 같은 것이다. 그러니 평범한 대부분의 생활인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타자를 보는 내 시선보다 나를 보는 타자의 시선이 더 옳다. 세상 모든 장그래들이 남은 연말이라도 편한 일상을 꾸릴 수 있기만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2-15

겨울강

박남철 시인이 떠났다. 시적 성과로`쩡쩡`울렸던 만큼 크고 작은 악행으로`쩡쩡`울기도 했을 시인이 끝내 세상과 등졌다. 투병으로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시인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연민한다. 이제 편해졌으면 한다. 저자에 오르내리는 시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여성 입장에서 분노하고 피해자 입장에 동조하던 그 마음조차 내려놓기로 한다. 모든 걸 떠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온전히 너그러워진다는 건 살아남은 자로서 가장 하기 쉬운 애도법이다. “겨울강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돌 하나를 던져 본다 / 쩡 쩡 쩡 쩡 쩡강물은 / 쩡, 쩡, 쩡, / 돌을 튕기며, 쩡, /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 쩡, 쩡, 쩡, 쩡, 쩡 / 강물은, 쩡, /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 봄이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 쩡, 쩡, 쩡, 쩡, 쩡 / 겨울 강가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 바닥에 닿을 돌들을, / 쩡 쩡 쩡 쩡 쩡 쩡 쩡”시인의 대표시 `겨울강`을 필사한다. 누군가 말했다.`악행보다 더 나쁜 건 위선`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눈썹이 떨리고 옆구리가 결릴 만큼 뜨끔해진다. 숱한 위선의 행적 앞에서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기는 어려워도 위선을 행하기는 얼마나 쉽던가. 밥 먹듯 위선을 떨면서도 떳떳할 수 있는 건 그 거짓이 간접적인데다 비겁함은 어느 정도 포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 악행을 하고도 떳떳할 수 없는 건 그 공격성이 직접적인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기 때문이다.겨울강이 제 아무리 쩡쩡 얼음장 조이는 소리를 내도 강은 강이고 물은 물이다. 얼음 위, 던져진 돌들은 마법이 풀리듯 봄 오면 기어이 바닥에 가 닿는다. 겨울강을 내려다본다. 아직 얼지 않은 저 물빛, 악행보다 위선을 경계한 시인의 눈물인양 따끔거리듯 반짝이며 흘러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12

시적 진실이 되는 순간

인간은 여타 동물에 비해 이성적일까. 공평무사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기는 하는 걸까.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시선을 확보하고는 있을까. 시의성 짙은 흉흉한 뉴스들로 시끄럽기만 한 요즘이다. 보도매체들마다 옳다. 눈과 귀를 더 열면 보도매체들마다 또한 그르다. 서로 자신들이 진실하다고 우기는데 국민 입장에선 그게 그거다. 어떤 현상 앞에서 대개 이론적 당위성과 실제 상황은 다르게 작동한다. 인간은 이성적이지도 않고, 공평무사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객관적이지도 않다. 이성적인 인간, 공평무사한 입장, 객관화하는 자아 등은 철학서에 나오는 당위의 문제일 뿐,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한 게임 양상을 보인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 논리에 따라 제 행동을 규정짓고 거기에 맞춰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논리적 사고를 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집단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때만 그것을 작동시킨다. 그렇게 되면 논리적 사고가 비합리적 직관을 앞선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다.인상 깊었던 영화 장면 하나. 오랫동안 탑에 갇혀 지내던 사내가 인간 사회로 나와 사회화 과정을 학습하는 이야기인데, 사람들은 기성의 논리를 사내에게 강요한다. 그를 가르치는 심리학 교수가 그를 탑으로 데려간다. 탑을 보고 사내는`이 탑보다 자신이 살았던 방이 더 크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큰 건물을 짓는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 탑을 거인이 쌓았다고 확신까지 한다. 탑 안의 방에 갇혀 살 때는 전후좌우 돌아봐도 방은 그대로 있었는데 밖에서 본 탑은 돌아서자말자 제 눈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사내에게는 탑이 방보다 클 수는 없는 것. 비합리적인 감각의 직관이 합리적인 이성의 논리를 압도하는 그 장면이 무척 시적으로 다가왔었다.살다 보면 시적 감수성이 논리적 합리성을 능가할 때를 만난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삶 마당, 가끔은 직관의 진정성으로 논리적 사유의 허점을 짚어주는 역설의 아우라를 떠올린다. 오래 갇힌 사내에겐 탑보다 방이 큰 것, 그게 시적 진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11

램프리턴 유감

`슈퍼 갑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뭐든지 시비를 걸 수 있다. 그들이 그토록 신봉해마지 않는 `매뉴얼`을 정작 자신들이 시비걸 때는 지키지도 않는다.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사안에 시비를 거는 것이니 매뉴얼 따위가 있을 리도 없지만. 슈퍼 갑질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자신 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있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가득하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다고 자사 항공사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슈퍼 갑질 부사장 이야기로 온종일 시끄럽다. 뉴욕발 인천행 대한항공 여객기가 활주로로 향하던 중 다시 탑승 게이트로 후진을 하는 램프리턴(Ramp Return)이 있었단다. `램프리턴`은 정비가 소홀했거나 승객의 안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취하는 매우 이례적인 조치란다. 이 다급한 사안이 이번 경우에는 견과류를 내놓는 방식 때문에 발생했다나.일등석에 자리 잡은 자사 항공사 여부사장에게 견과류를 `봉지 째` 건넨 게 발단이었다. 매뉴얼대로라면 승객에게 의사를 물어본 뒤 음료와 함께 접시에 담아내 줘야 한단다. 견과류 따위를 봉지 째 일등석 승객에게 안기는 것은 무례라 치자. 그렇다고 그 많은 승객들 앞에서 큰 소리를 지르고, 매뉴얼을 찾아보라고 윽박지르고, 당황한 승무원이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자 책임을 물어 활주로로 향하는 비행기를 후진시켜 사무장을 내리게 했단다.승객을 위한다는 모양새이지만 실은 승객을 무시하는 오너로서의 오만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에피소드이다. 승객의 안전은 관심도 없는 `갑`의 횡포만 횡횡한 그림이 그려진다. 황망하고 수치스러웠을 사무장의 인격은 또 어찌할 것인가. 매뉴얼을 따르지 않은 것은 직원의 실수요 잘못이다. 하지만 그건 차후에 얼마든지 징계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오너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승객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그들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는 것은 슈퍼갑의 횡포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진 권력이나 누리는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부터 이 사회라는 비행기에서 내침을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4-12-10

부모의 죄책감은 무죄

학부모 관련 강좌에서 느끼는 특징 중의 하나는 부모님들, 특히 엄마들이 아이와 관련해 크고 작은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녀들은 절대 부모가 원하는 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커간다. 그게 진리고 순리다. 그런데도 부모인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의 `자식 기르기 프로젝트`에 성공하지 못한 점에 대해 자책하기 일쑤이다. 좀 더 일찍 눈높이 대화법을 알았더라면 그때 아이에게 실수를 하지 않았을 터인데,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그 일에서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텐데…. 부모로서의 이런 죄책감을 상기시키게 하는 것은 부모들이 자녀교육에 관한 이론 공부를 너무 많이 한 탓도 있다고 본다. 부모자식간의 관계를 다루는 책에서 둘 사이에 문제가 있을 때 대부분은 부모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 부모를 위한 책이다 보니 그럴 것인데, 부모 입장에서는 모든 잘못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심한 경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과연 그럴까. 그 어떤 부모라도 의도적으로 내 자식이 엇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평범한 부모 세대가 그렇듯 이렇다 할 자녀 교육 강좌를 들어본 적이 없고, 어떻게 키우는 것이 현명한 자녀교육법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식을 낳고 길렀다. 그저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신념대로 아이에게 행해왔고 그것이 자식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며 키웠다. 가로 늦게 이론서들을 접하니 모든 게 부모 잘못인 걸로만 보인다. 하지만 부모는 최선을 다해 키우고 자식은 운명처럼 제 갈 길을 간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자책감만 남게 될 뿐이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은 층일수록 그 자책의 정도는 깊어진다.실수와 실패 없는 자식 교육이 어디 있을까. 더 이상의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그 실수는 결코 부모의 책임만이 아니라는 걸 동시에 받아들일 때 부모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부모이면 족하다. 완벽한 부모를 꿈꿀수록 죄책감만이 친구처럼 따라다닐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9

어두워졌던 모든 풍경

윤석홍 시인의 `밥값은 했는가`(아르코 출판)가 내게 왔다. 기다리던 터라 급하게 겉봉을 뜯다보니 손끝 지난 봉투에 상처가 너덜하다. 얼른 갈무리해서 친필 주소 적힌 봉투를 배경으로 시집의 인증샷을 찍어 시인께 전송했다.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내 소심한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내 뜻과는 무관하게 맨 뒷장부터 펼쳐졌는데 으라차차, 시집 발간에 도움을 준 이들의 이름이 가나다순으로 적혀 있다. 갑자기 속상해진다. 백여 명이 넘는 저 귀한 명단에 끼고 싶은데 내 자리가 없다. 추측건대 시인의 퇴직 기념행사 때 오신 분들의 정성으로 이 시집이 출간된 게 아닌가 싶다. 날짜를 알고도 축하 자리에 가지 못한 점이 못내 민구하다. 맘이 반이다. 아무리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해도 찾아뵐 방법을 연구하면 달리 없지도 않았을 터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반가운 맘에 시집을 급히 펼쳤으면서도 한동안 망연자실했다.이틀에 걸쳐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맘 자락마다 콕콕 박히지 않는 시가 없다. 시인은 인생의 숙제인 밥값을 생각하고, 참선하는 자연의 모든 것을 노래하며, 비움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쓸쓸히 몸부림 짓는 섬들을 불러 모으고, 금강경 쓰는 아내에게서 풍경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내면 풍경이 이토록 기꺼운 시어들로 꽉 차 있을 줄 예감하지 못했다. 군더더기 없이 정리된 말들은 고요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흡은 지축을 흔드는 지진 같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 같다. 겸손한 시인의 밥 한 술 속에 들어 있는 `흔들고 찔러대는` 그 울림 앞에서 내 주눅만 가득하다. 한정본이라 시중에서 살 수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능소화 1`전문을 옮겨와 아쉬움을 달래본다.“불안하다, 늘 / 이제 막 꽃 지는 능소화 /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 / 옛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피는 향기 / 아직도 그 영예가 그립다 / 어디에도 나는 없다 / 한때 내 눈의 그림자에 가려 / 어두워졌던 모든 풍경들이, 비로소 / 제 빛깔을 찾는 늦여름 / 쓸쓸하구나, 그대 없는 세상은”/김살로메(소설가)

2014-12-08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강한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대통령을 지낸 해리 트루먼의 이 말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앓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준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 정도가 약한 스트레스는 목욕 한 번 하거나 단 음료 한 번 들이켜면 없어진다. 하지만 스트레스라고 하기엔 강도가 심한 성추행, 언어폭력, 폭행 등에 노출될 경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적 고통을 당하게 된다. 그 흔들림의 원인이 누가 봐도 가해자에게 있음에도 고통의 몫은 고스란히 피해자 것으로 남게 된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심적 상처는 강력한 트라우마가 되어 세상은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해 적게는 말문을 닫고 크게는 삶을 마감하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은 한 순간, 한 호흡에 일어난다. 우연한 찰나의 시간, 그 짧고도 짧은 시간에 내재되어 있던 참을 수 없는 감정이 피를 토하듯 일순간에 터지기 때문이다.마음을 열지 않으면 봐도 잘못 보게 되고, 만져도 허투루 만지는 것이 된다. 마음을 열고 닫는 건 객관적인 시선을 요하지 않는다. 이성이 배제된 그 마음은 상황이나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상황이나 환경이라는 것도 반드시 개인과 개인의 화학적 결합 또는 관계망적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 그 결합 또는 연대라는 마음의 교감은 참으로 개별적이고도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생겨난다. 따라서 마음이 통했다 또는 그렇지 않았다의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개별자의 이익과 관계망의 연대의식이 맞아 떨어지냐 아니냐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 때리고 돌아서 제 연명을 구하는 흔들리는 눈빛은 평범한 인간들이 지닐 수 있는 이기심의 전형적인 면이다. 불가해한 시를 만났을 때, 자의적으로 풀이하는 것만큼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유희도 없다.“오! 폐가 불탄다. 관자놀이가 울부짖는다! 밤이 이 태양을 통해 내 눈에서 굴러다닌다!” 이런 극단적인 시는 천재시인 랭보에게나 어울리지 평범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소시민에게는 너무 과격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5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앤톨리니 선생이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성추행을 하는 장면,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콜필드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 센트럴 파크 연못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유머 깃든 순정이 깃든 장면 등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학교 선생의 성추행 장면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묘사로 작동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하는 콜필드의 대사 장면은 그 장면 자체를 작가가 책 제목으로 뽑았을 만큼 순수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센트럴 파크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마음이다.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세요?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연못이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어요. 오리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에요.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스쳐 지나는 인연에 지나지 않는 택시 기사 호이트 아저씨에게 콜필드가 한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저런 엉뚱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 의문은 동심이 풍부한 어릴 때나 그것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었을 때나 별 차이 없이 생겨난다. 살다보면 아주 익숙한 풍경인데 그 풍경이 느닷없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섬`에 급기야 한 점 재기발랄한 의문이 생길 때가 온다.아주 작은 연못에 오리들이 복작댄다. 봄의 기지개를 시작으로 조금씩 발길질하던 오리는 한여름의 풍성해진 자맥질을 지나 소요 없는 겨울을 맞이한다. 겨울을 맞이한 오리는 더 이상 연못에 머물 이유가 없다. 헤엄칠 물이 다 얼었기 때문이다. 그 많던 오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제비처럼 따뜻한 남쪽나라로 간 것일까, 스님처럼 동안거에 든 걸까. 아주 작은 연못의 겨울 오리떼는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숨은 오리떼를 찾아 나목의 숲을 헤매는 담담한 풍경, 그것이 겨울이란 계절의 존재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4

행복한 카뮈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상호보완적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좋은 제자는 스승이 만들고,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좋은 제자였고, 그의 스승인 루이 제르맹과 장 그르니에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루이 제르맹은 알제리 빈민가의 한 소년을 노벨 문학상 작가로 거듭나게 한 첫 번째 스승이었다. 궁핍한 살림을 꾸렸던 카뮈의 어머니는 초등과정을 마친 카뮈를 상급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알제리 하층민 소년들은 노동자가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부 열망으로 가득 찬 카뮈를 제르맹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뮈의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성심껏 지도해주었으며,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소년 카뮈에게 글 쓰는 재능과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아봤던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카뮈가 어머니 다음으로 제르맹 선생을 호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장 그르니에 또한 카뮈에겐 잊을 수 없는 스승이다. 카뮈는 선생을 신뢰했고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편지를 썼다. 스승의 산문집 `섬`에도 그 유명한 서문을 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서문은 그의 명성 덕에 스승의 산문집 자체보다 더 유명한 것이 되어버렸다. 진작 카뮈는 그 서문이 적힌 책을 받아 보지도 못한 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고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스승 장 그르니에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살다 보면 도처에 스승이 가득하다. 나를 이끌고 채찍질하는 모든 이는 루이 제르맹이요, 내게 충고하고 쓴 약을 주는 모든 이 또한 장 그르니에다. 내 곁에서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모든 스승들을 하나하나 불러내고 싶은 밤이다. 카뮈의 행복에 견줘도 좋을 만큼, 제 곁 스승을 확신하는 당신이라면 이 깊은 밤 맘껏 행복해도 괜찮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3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 위안이 있다 / (….) /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란 시의 부분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 꽂힌 후 폴란드 시인에 대해 더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시인이다. 쉼보르스카에 비해 덜 서정적이지만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인의 노고가 강풍에 흔들림 없는 나무둥치 같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석쇠도 필요 없을 만큼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일갈했다. 갇힌 공간에서 서로 욕망에 뒤엉키고 비애감에 젖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발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촉수가 적나라하리만큼 발달한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그런 시선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관심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어린 아기조차도 누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품는지, 누가 자신에게 적대적인지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안다. 달리 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를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학습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삶의 욕망과 비애가 타자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는 그 절정의 순간에 타자를 지옥으로 인식하고 탄식하게 된다.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말은 자가예프스키의 단언처럼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라는 것. 타인을 만나 지옥일 때보다 타인을 만나 천국일 때가 일상에서는 훨씬 더 많다. 깨끗한 하루의 시작점, 누군가의 맑은 이마를 보며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부정의 언사보다 긍정의 언사이기 쉽다.`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타인은 아름다움일 때가 훨씬 많다. 자가예프스키의 이런 긍정의 독백에 시선이 가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2

입술 헤르페스

또 입술이 부푼다. 전날부터 입술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무지근해지더니 어깨와 팔뚝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따뜻한 곳에 등을 대 지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쓰러지듯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입술에 기포가 생기고 발갛게 흉이 나기 시작한다. 구순포진이 도진 것이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 자주 입 주변에 물집이 퍼지고 이내 헐곤 했다. 이 하찮고도 귀찮은 증상은 달갑지 않은 친구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휘젓는다. 젊은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시험을 앞두고는 치통과 함께, 사랑을 앓으면서는 두통과 함께 슬며시 따라붙던 것이 이젠 만성증상이 되어 버렸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이라는 저 전제는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조금 수정해도 좋겠다. 내 경우 단순히 몸이 아픈 것만으로는 구순포진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맘까지 아파야 입술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맘에 사무침이 있거나 괴로움이 스미면 육체적 피곤으로 연결되고 몸은 그것을 감지해 나쁜 신호를 작동한다.“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잠복되어 있는 헤르페스 균을 도발하는 저 마음의 괴로움을 `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은 이 말과 연결해본다. 담아야 하는데 멀리 밀려가고, 묶어야 하는데 쉽게 풀려버리는 게 사람 사는 일의 과정이다. 놓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도 못하는 그 틈새에 마음의 병이 서린다. 그게 `보통 사람의 보편적 정서`이다.몸만 가벼이 아프면 한 사흘이면 족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아무리 가벼운 증상이라도 몇 주는 헤매야 한다. 몸 가벼이 아픈 것은 아프지 않은 것과 같지만 마음 아픈 것에는 가벼움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 부푼 입술로 나타나거든 저이는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이 피로한 것이구나, 보아도 무방하다. 천형처럼 `나았다 도졌다`를 반복하는 입술 헤르페스./김살로메(소설가)

2014-12-01

배려도 지나치면

딸내미랑 집 근처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 나가는데, 아내의 일손을 돕기 위해 남편은 직장에서 야간일만 전담할 정도로 성실하다. 내가 염색을 하는 동안 딸내미는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렸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에서 CNN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영어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염색약 냄새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원체 신뢰감을 주는 부부인데다, 오죽하면 손님 앞에서 저 방송을 틀었을까 싶었다. 남편분 직장에서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영어 듣기 공부를 하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방송은 딸내미가 파마를 마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못내 모른척했다. 오죽하면 저럴까,의 심정이 웬만하면 이해하자,는 감정보다 훨씬 절실할 것임을 알기에.드디어 미용실을 나서는 시간, 열심히 사는 부부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승진 시험으로 영어를 치르나 봐요?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여사장님 눈이 동그래졌다. “따님이 그 방송 틀어놓은 거 아니에요?” 맙소사! 미용실에서 영어 방송을 들어야할 만큼 절박한 일이 딸내미에게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런 무례를 범할 만큼 대범한 아이도 못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말을 이었다. “우린 따님이 영어 공부하려고 틀어 놓은 줄 알았어요.” 한다.다시 필름을 돌려 보자면 이렇다. 테이블에 놓인 신문 밑에 리모컨이 있었고 그것이 딸내미 팔꿈치에 눌려 저도 모르게 CNN 방송으로 채널이 바뀐 모양이었다. 딸내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미용실 부부는 딸내미가 영어 공부하려고 그랬나 보다 했던 것. 나는 나대로 미용실 남편분이 영어 공부를 하나 보다 하고 넘겨짚은 것이었다. 까딱하면 서로 오해할 뻔했다. 오늘의 결론? 배려도 지나치면 오해를 낳는다. 그러니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다. 단, 그 순간도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1-28

갑질도 배운다

`갑질`도 배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약자에게만`그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갑질의 특징이다. 저녁모임 자리가 있던 식당에서였다. 두 여종업원이 한 조가 되어 서빙을 했다. 한 명은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출신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선배격인 외국인 종업원은 아르바이트생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며 매서운 눈초리와 어눌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다. 숯불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며 `저리 비켜. 뒤로 나와!` 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마땅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갑질도 배우는구나.` 라는 단상이었다. 이국에서 온 그녀가 처음 일을 배울 때 혹 누군가로부터 저런 `갈굼`을 당하지 않았을까.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배운 며느리는 못된 시어머니가 될 공산이 크다. `반면교사` 하기보다 `모방하기` 전법을 따르는 건 얼마나 익히기 쉬운 학습법인가. 자신이 당한 설움을 고대로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복수인가. `더 약자인 동료`를 괴롭혀 내 아픔을 위로받기엔 얼마나 적절한 보상인가.`어눌한 일솜씨`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래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옆 친구가 거들었다. “괜찮아, 일주일만 지나면 저 관계도 역전될 거야.” 그때 얼음덩이 하나가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그 일주일 뒤 자신의 운명을 그 이방인은 진작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통 기한 촉박한 권력의 맛을 가장 실감나게 소진하기 위해 그미는 저토록 발악에 가까운 갑질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 순진한 천사도 언젠가는 초강력 여전사임을 마다하지 않는 자신을 능가하게 되리라는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것, 그것이 그녀를 거친 언행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에 들어선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는 갑질을 배우는 것 밖에 없었으리라는 이 당혹감./김살로메(소설가)

2014-11-27

야외 포트럭 파티

사과 다섯 개, 감 세 개, 배 두 개, 바나나 한 송이, 파인애플 한 개, 드레스코드는 선글라스와 머플러. 친구 둘과 내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공원에서 번개팅을 하자고 해놓고, 이렇게 두루뭉술하고 애매모호한 준비물을 가져오라고 하면 어쩌자는 거지. 이대로는 점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도 뭔가를 준비해오겠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할 것 같았다. 해서 우리는 파티를 기획한 친구가 내준 미션을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파인애플을 빼는 대신 어묵탕을 준비했고, 무거운 바나나도 배를 채울 수 있는 빵으로 대체했다. 실용적인 걸로 미션 품목을 바꾼 것에 대해 내심 뿌듯해할 정도였다. 파티 장소인 공원에 도착하고, 각자 준비한 먹거리를 내놓았을 때야 미션 수행에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공원 테이블을 세팅해 서양식 파티 상을 차릴 참이었던 기획자 친구의 센스를 우리는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리하여 같은 차를 탄 우리 셋만 미션에 실패했다. 파인애플 빠지고 바나나 없는 비주얼로도 근사한 야외 테이블을 차릴 수 있었다. 카나페 안주가 곁들인 와인, 케이크에 김밥, 과일과 빵까지 만족할만한 런치 테이블이 마련되었다. 야생 들꽃으로 장식한 꽃병이 차림새 한 가운데 놓이자 모두 탄성을 질렀다.선글라스와 머플러로 한껏 멋 낸 `아지매`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파티를 즐기는 그 시간만큼은 각 왕국에서 모여든 왕녀가 되어도 좋았다. 여담이지만 미션에 없었던, 모 여사가 끓여간 어묵탕이야말로 그날의 인기아이템이었다. 쌀쌀한 야외에서는 뜨끈한 국물이 통할 수밖에. 눈치 없는 자의적 해석이 반전의 즐거움을 낳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게 깜짝 야외 포트럭potluck 파티를 생각해낸 친구 덕분이었다.연말이 다가오고 각종 모임 자리도 늘어난다. 기왕 즐겨야한다면 이런 센스 있는 자리라면 어떨까. 그런 뜻에서 친구들과 나를 위해 포트럭 파티의 깜짝 기획자가 되어보고도 싶다. 장소는 어디로 할까. 드레스 코드는 뭐로 하지. 이런 상상만으로도 입 꼬리가 올라간다. 벌써 파티의 반은 성공한 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6

문체미학의 경제성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 는 말은 글쓰기에서도 통한다. 아무리 감동과 재미를 주는 글이라 해도 기본 형식에서 멀어져 있으면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나는 문체미학의 경제성을 옹호하는 쪽이다. 중언부언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 문장은 거칠지는 않지만 건조한 편이다. 소설을 쓸 때는 그나마 덜한데, 생활 칼럼을 쓸 때는 마음부터 건조해진다. 그걸 피해보려고 시집을 자주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때뿐이다. 실전에서는 예의 건조한 문체로 돌아가고 만다. 담백하고 건조한 문장을 선호하는 취향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다. 다만 성마른 문장을 구사하는데도 재미와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나면 기분 좋은 당혹스러움이 밀려온다. 어느 순간부터 화려한 문투와 과장된 어법에 대한 거부 반응이 일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많이 젊었을 때는 비유법도 많이 썼고, 소위 오그라드는 표현들도 즐겼다. 어느 시점까지는 미문이나 꾸밈이 과한 글에 혹하기 쉽다. 서정성을 담보한 그런 글은 영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그조차 거추장스러워 마구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자연스레 더 담백하고 더 건조한 쪽으로 문장을 내몰고 조인다. 문맥에 살을 붙이거나 색조 화장을 하는 걸 놔두질 않는다. 글쓰기 책들의 요지는 한결 같다. `문장의 나뭇가지를 흔들어라. 그리하여 나목 상태로 탈탈 털리거든 그것만 제대로 묘사해라. 아직까지는 이런 글쓰기 형식을 고수하는 이들의 방식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정민 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 이야기`에 보면 문장 수련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스승은 한참 정신을 못 차리게 야단치시더니, 이렇게 고쳐주셨다.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처음에 22글자였던 것이 11글자로 줄었다. 딱 절반만 남았다.” 줄이면 풍경이 보인다. 말을 아껴라. 설명하려 들지 마라. 보여주기만 해라. 스승을 잘 만난 정민 선생은 이런 깨달음을 빨리 얻었다. 문체미학의 경제성 안에 온 우주적 글쓰기가 다 담겼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5

도서정가제 유감

당분간 내가 책 사는 주기는 느려질 것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사두면 좋겠다 싶은 것은 정가제 시행 전 대폭 세일하는 기간에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느려진, 책 사는 주기를 평소대로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귀차니즘`과 친구인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보다 집안에 편히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사는 쪽을 선호한다. 당분간 옛날만큼의 할인폭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책 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 게 여전히 `편리하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가장 큰 명분은 `동네 책방 살리기`이다. 그간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높은 할인율과 무료 배송이라는 매력적인 마케팅으로 그나마 열악한 대한민국 독서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동네 서점들은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란과 바위의 싸움에서 당국이 계란 편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계란이 타조알 된다고 바위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15퍼센트 이내로 도서 할인율을 제한한다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간접할인이라는,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들을 동원할 것이다. 카드·통신사와의 제휴, 마일리지 지급율 인상 및 다양한 적립금 이벤트, 매혹적인 경품 잔치, 여전한 무료 배송 등을 내세워 기존의 고객을 유지·확보하게 될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만큼의 책값 이익은 영세 출판사나 동네 서점까지 가닿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네 책방 살리기라는 명분은 무색해지고 만다.도서정가제 시행의 `속 깊은 뜻`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책이라는 문화적 특수 공산품의 할인율을 당국이 설레발치며 규제한다는 게 어쩐지 맞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규제해서 약자나 소비자가 덕을 볼 수 있으면 좋은 시스템이지만, 규제해서 강자가 덕을 보거나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지켜볼 단계지만 도서정가제가 본래의 취지에 가닿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4

취향대로 읽기

퍼즐 맞추기식 소설은 집중도를 요한다. 아귀 착착 맞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그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칼자루는 작가가 쥐고 있으니 작가가 승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독자가 패자가 되는 건 아니다. 작가의 투망질에 걸려들수록 제대로 읽은 게 되니까 서로 이기는 게임이 된다. 이러한 퍼즐 맞추기식 소설의 강점은 제대로만 읽는다면 분명한 보상이 따른다는 거다. `충격`과 `여운`이 그것이다. 진부하고 평범한 저 두 낱말이야말로 작가에 대한 최대 찬사가 아니던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볼 때마다 새롭게 눈길 가는 곳이 나온다. 오늘은 주요인물인 사라 부분을 퍼즐 맞추기 해본다. 딸 베로니카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놀러온 토미에게 그녀는 추파를 던졌을까. 허둥대면서 요리를 하는 가운데 노른자 하나를 터뜨리면서도 토니를 관찰하는 장면, 서랍장에 몸을 기대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라고 뜬금없이 하는 말, 달궈진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던져 넣고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자 파괴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것, 둘만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토니를 향해 미소 짓는 일, 손을 높이 흔드는 게 아니라 허리께에서 수평이 되게 들어 작별 인사를 함으로써 토니로 하여금 그녀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을 유발하게 하는 것, 이 모든 사라의 언행은 토니로 하여금 “어머니 멋지시다.”라는 말을 베로니카에게 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작가는 답을 주지 않고 디테일한 정황들을 소설적 장치로 활용한다. 묘사와 대사로 이루어진 이런 것들은 등장인물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단서가 되고, 주제로 나아가는 밑돌이 된다. 처음엔 섬세한 부분들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눈과 마음이 자연스레 글에 동화되다 보면 작가의 의중에 어느 정도는 가닿게 된다. 문제는 이 바쁜 세상에 누가 소설 읽기에다 제 온전한 인내심을 쏟아 붓는단 말인가.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을 수고를 기꺼이 감당할 이에게 흥미진진한 이 소설을 권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21

진실로 사랑

불안하면 확인하게 되고, 미덥지 못할수록 보채게 된다. 고구마를 구우면서 하마나 익었을까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건 행여 그것이 탈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러 가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다짐 받는 건 상대에 대한 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심 가면 불안해지고, 마음 주면 보채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 보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한없이 평온하고 미더운 상태, 그건 에로스적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짓 감정이다. 에로스의 속성에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과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구속함으로써 내 불안을 자초한다. 지루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감정 소모가 이어진다. 한 마디로 진실로 사랑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특질이다. 그 사랑의 불꽃은 종국엔 재만 남긴다. 그 재는 안타까이 오래 가는 성질의 것도 못된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허용된 감정 안의 유한성의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다.하지만 진짜 사랑은 시공간에서 자유롭다. 오직 사랑이란 본질 자체에만 기댄다. 따라서 그 사랑은 무심하다.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 그 꼭대기에 무심함이 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기에 불안도 집착도 없다. 범접 불가한 그 사랑의 대상 1호는 내게 `엄마`이다. 애증이란 검증을 거칠 필요조차 없는 사람, 집착과 연민에서 자유로운 완전무결한 대상. 그러기에 이토록 무심하고도 뻔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덜 사랑할수록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진짜 사랑하면 그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하면 한없이 무심해질 수 있다. 그 사랑이 곧 내 마음인지 스스로도 잊을 만큼 항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도 않은, 늙은 엄마에 대한 이 직무 유기 사유서를 엄마는 이해할 것이다. 근데 무심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이런 반성문조차 필요 없는 거 아닌가./김살로메(소설가)

2014-11-20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관계망에서 언어만큼 자신의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맘만 먹으면 우리는 십 분 이내에 관찰 대상자의 현재 계급 지도(地圖)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상자들끼리 쓰는 언어 속에 모든 계급적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목표로 삼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현실적 시스템은 그것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되고 세련될수록, 인류는 계급의식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고착해나갔다. 인간 운명의 공통적 질서는 미개하고 야성적인 사고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문자가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이 일차원적인 사유보다 더 높은 의식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낳았고, 자연스레 계급의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착하다`라는 말을 예로 들자. 그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은 되지만, 아이가 어른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티나가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라고 목젖 꺾인 하이톤 콧소리로 말할 때 우리는 별 뜻 없이 크게 웃어젖힐 수 있다. 그 웃음은 착하다, 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담고 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의 계급적 한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반면에 선하다는 말은 어른, 아이 구별하지 않고 쓸 수 있지만 대개 전자에 더 많이 쓰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낱말의 영어 뜻은 같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그 둘의 쓰임새는 사전적 풀이부터 묘하게 다르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를 때 착한 것이 되고, 거기에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해지면 선한 것이 된다. 단순히 어른(권력)의 질서나 요구를 잘 따르면 착한 것이 되고, 거기다 도덕적 판단이란 막을 거르면 선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계급 언어의 산물인 착한 것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아도 좋다. 요구하면 따르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일방적 착함 대신, 부당하면 거부하고 곤란하면 거절하는 판단의 선함도 나쁘지 않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9

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좋은 소식은 실바람처럼 잔잔하게 오지만, 나쁜 소식은 강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몇 백 명이 동시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몇 백 명이 동시에 수장될 확률은 높다.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솟아나는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목도한다. 나쁜 소식 뒤에는 꼭 인재(人災)라는 말이 따라 붙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은 어질고 의롭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의(仁義)가, 말하기 좋은 당위의 사유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인간 깊숙한 곳에는 욕망이나 본능 같은 실체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인의는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이 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착실한 성정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면 왜 인간은 욕망에 허덕이고 본능에 몸부림 칠 것인가.배고프면 밥 찾고, 추우면 껴입고 싶고, 힘들면 눕고 싶고, 예쁘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이다. 자연스런 이런 현상은 인의라는 고상한 명분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다. 성악설이 성선설에 비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효도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천적 범주가 아니라 인위 즉 교육이나 훈련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성적 이상의 사유에 속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현상적 현실의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큰 고민 없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래야 어제오늘 벌어지는 여러 `나쁜 뉴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쾌락을 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본성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성악설의 요지이다. 그 인위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세상은 나쁜 소식들로 넘쳐난다. 본성이 선하다는 허상의 믿음 대신 본성을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훨씬 현명하다. 스스로를 연마하는 현실적 자세의 중요함이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