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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억이라는 윤색

얇디얇은 꽃잎이 겹겹이 쌓였다. 한 송이에 무려 삼백 여장의 꽃잎이 피어난단다. 미나리줄기 같은 연한 꽃대에 꽃받침마저 바짝 붙어 있어 담백하기 그지없다. 꽃잎이 휘돌아간 매무새는 장미를 닮았고, 활짝 핀 꽃잎이 겹겹이 벌어지는 모양새는 국화를 닮았다. 우아하기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백합과 수국 옆에서도 전혀 기품이 달리지 않는다. 습지꽃 라넌큘러스를 두고 한 말이다. 내 멋대로 그 꽃을 `기억꽃`이라 부른다. 음지나 습지의 기억일수록 잘 살아난다. 개구리란 뜻의 `라이나`에서 유래한 라넌큘러스는 이름에 걸맞게 습지와 연못을 좋아한다. 수 백 장의 꽃잎마다 수 백 가지의 기억을 지닌 꽃. 한 두 잎으로 시작해 자꾸만 부풀어가는 습습한 기억들. 한 잎 한 잎 아픈 기억을 보듬고 돌보는 과정에서 가공되고 늘어난 꽃잎들. 꽃말조차 매력, 매혹, 비난이 아니었던가.매혹과 비난은 이음동의어이다. 매력은 시선과 시샘을 동시에 얻는다. 매혹과 비난의 꽃말이 같은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팬을 많이 거느리는 연예인일수록 안티 팬도 많은 것과 같다. 수 백의 잎으로 피어나는 낱장 하나하나마다 다른 기억의 조각보를 지닌다. 인간의 기억은 예민한데다 부서지기 쉽다. 상처와 악의의 기억은 영광과 선의의 기억보다 깊고 오래간다. 따라서 상처나 악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진실을 본다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보고 싶은 대로 가공하고 윤색한다. 본 것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봐야 했던 것만 기록한다. 남 보기 좋은 게 아니라 나 보기 좋으라고. 조각보 같은 꽃잎이 모여 한 송이 꽃이 되고 정원이 되고 들녘이 된다. 라넌큘러스 꽃잎이 벌어진다. 잎 얇고 빛 고운 저 기억의 꽃잎들, 한 장 한 장 보듬는다. 죽은 꽃잎은 떼어내고, 덜 핀 꽃잎은 여며준다. 각각의 틀에서 재편집되고 수정되는 연민 서린 꽃잎들, 그렇게 기억의 꽃송이는 피고 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4

진실로 두려운 것

방관자 효과라는 게 있다. 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지 않을 때 흔히 쓸 수 있는 용어이다. 주변에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울 확률은 낮고, 행동으로 옮기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진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돕겠지 하는 심리 때문이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제 오지랖을 펼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나서지는 못하지만 나보다 나은 누군가가 나서서 그 사람을 도와주겠지 하며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방관자 효과 이론에 역행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그들은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일에 더 적극적이고 민첩하게 행동한다. 보통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유권자를 의식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제 선행의 활약상을 보아주는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제 입지를 굳히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진실로 중요한 것은 방관자 효과와는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 말고 저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그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 저 많은 사람들 중 내가 나서서 도와야 내 행동이 돋보일 거라는 생각 그 둘 다 옳지 않다. 군중 속 구경꾼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하고 아주 극소수는 구경꾼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그래도 희망은 있다. 정의감과 선함을 겸비한 이들이 도처에 숨어 있다 말없이 행하러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제 에너지를 쏟아 약한 자와 상대적으로 없는 그들을 돕는다. 그런 이들이 흔치 않기에 감동이 두 배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숙연한 두려움도 알게 된다.권세에 눌리지 않고 강자 앞에서 솔직할 것, 소외나 아픔에 공감하고 약자 앞에서 발 벗고 나설 것, 저 단순하고 담백한 명제 앞에 어찌 그리 담대한(?) 핑계는 많기만 한지. 이해타산 없는 순수한 영혼들을 만나거나 읽는 날, 내 두려움과 비겁함의 실체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것인가를 확인하곤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3

수련에 지름길 없다

`수양`의 사전적 뜻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품성이나 지식·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림`이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수련은 `인격, 기술, 학문 따위를 닦아서 단련함`이란다. 제목에 수양이란 낱말을 넣으려다 수련으로 선회했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수양이란 말보다는,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는 의미가 깃든 수련이란 말이 덜 부담스러워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냐고. 공자는 그것도 괜찮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답한다. 자공은 `시경`에서 `자르고 쓸고 쪼고 간 듯하다(절차탁마)`고 했는데 그런 걸 말씀하시냐고 되묻는다. 같이 시를 논해도 될 만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며 공자는 자공을 칭찬한다.`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내 식으로 재구성해봤다. 마음을 다스리거나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결심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행해야지 결심하기가 무섭게 결과는 언제나 저렇게 행동한다. 가난하면 비굴해지기 쉽고, 부유하면 교만해지기 쉬운 게 사람이다. 각각 두 상황에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것을 넘어 없이 살아도 즐거워하고, 부자더라도 예를 지키기를 좋아하라고 가르치신다. 똑똑한 제자 자공은 스승의 이런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노력 없이, 수련 없이는 인격이 완성될 수 없음을 스승의 입을 통해 확인한다.학문이든 인격이든 예기든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며 숫돌에 가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오늘도 만족할만한 수련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마감했다. 맘먹은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고, 성인들은 부러 절차탁마라는 어려운 수련법을 범인(凡人)들에게 제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수련에 왕도 없단다. 그저 자르고 쓸고 쪼고 갈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2

본성 속 덕성

`어려울 때 친구가 참된 친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어려울 때`라는 말은 당사자 둘 중 하나만 그런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나머지 상황이 괜찮은 사람이 그 친구 곁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는 경우 이 속담은 유효하다. 그렇다면 둘도 없던 친구가 곤경에 빠지고 그 때문에 나 또한 힘들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옛날에 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재상이 있었다.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아 종들과 비슷한 일상을 꾸리기를 좋아했다. 자신이 고기를 먹으면 종들에게도 고기를 주었고, 종들이 김치를 먹으면 자신도 김치를 기꺼이 즐겼다.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설상가상으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기와 김치를 가리지 않고 함께 먹었던, 식구라고 여겼던 종들부터 모두 떠나가 버렸다. 몹시 야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시간이 흘러 복권이 되어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다. 종들이 가장 먼저 돌아와 같이 일하기를 청했다. 재상은 배신감에 고래고래 고함부터 질렀다. 그러자 한 종이 말했다. “주인님, 어찌 사람의 본성을 모르십니까. 어른께서 우리와 고기를 나눠 먹든, 김치를 같이 먹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려워지면 제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어른께서 덕을 베풀지 않았다면 이 많은 종들이 다시 재상님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인간은 매번 도덕적·이성적 판단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게 정답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저렇게 행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살아야 하는 실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낭패가 뒤따르고 부덕의 자괴에 몸서리치더라도 인간이 인간이려면 덕성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제 것을 지키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 속에서도 타자의 덕성이라는 후의는 결코 잊히지 않으리라는 선한 믿음. 그 믿음이 주는 밝음 때문에 덕을 짓는 사람들의 행보는 오늘도 이어진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0-21

어쩐지 몽롱한 사유

2014 노벨 문학상은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받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라고 그 작품을 다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상을 탔다니 예의로라도(?) 일단 책을 산다. 모디아노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어 은근히 기대를 했다.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도착했다. 첫 문장부터 맘에 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 의 `이방인` 이나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줘`의 `모비 딕`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첫 문장이다.잃어버린 과거 찾기가 주 내용이고, 나의 정체성 확인하기가 주제처럼 보인다. 부담 없는 두께라 시간적으로는 금세 읽힌다. 그렇다고 쉬운 책은 아니다. 뭔가 몽롱해진다. `나` 롤랑은 과거 찾기에 성공한 것인가, 거듭되는 자아 발견의 고민은 해결된 것인가. 결말 없이 책을 덮고 나면 머리만 무거워진다. 한참 멍하게 있다 정신을 차린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어찌할 수 없는 `몽환의 자아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내가 기억하는 내 과거는 온전히 내 것일 리 없고, 타자 기억 속의 내 과거 역시 타자가 기억하는 내 모습일 뿐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딘가에 실존하되 어디에서도 진실로 발견되지 않고, 그 누구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자아라는 수수께끼. 그 근원적 모호함에 대한 서술 방식이 참으로 프랑스 소설답다. 페드로가 잠시 살았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독자로 하여금 자신 또한 그런 거리를 찾아 배회하게 하는 힘, 그것이 모디아노를 놓지 못하게 하는 원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확실한 것은 “어느 날 무(無)에서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리는 게 우리 삶이란 것. 인파로 붐비는 백사장 사진 속, 모래알 같은 배경이 되었다가 한순간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해변의 사나이` 같은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이 가을, 몽롱한 사유의 거리에서 자아 찾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0

살아간다는 것

`레지나 브렛이 전하는 삶의 교훈`이라는 내용이 인터넷에 떠다닌다. 50 여개 항목인데 공감할 만한 내용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작가가 90세라기에 신기함 반, 호기심 반으로 검색을 해본다. 역시 와전된 거란다. 어떤 사람이 이메일로 잘못된 정보를 보냈는데 그것이 세계로 퍼졌다나. 1956년생인 작가는 `나더러 90살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주 젊다는 것은 놀랄만하고 좋은 일이다.` 이런 두루뭉술한 인터뷰를 했다. 나이에 대한 독자들의 오해를 방치함으로써 다른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 비해 관심을 끌었으니 성공한 마케팅인가. 어쨌든 50여 가지 인생 지침서 중에 내 맘에 닿는 것도 많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좋다.” 공평한 게 인생이라면 얼마나 무기력해지고, 살 맛 나지 않을 것인가. 공평하지 않은 그 게임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공평함에 조금이라도 다가서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다독이고 정비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삶의 활력이 되어 여전히 살만한 인생이란 긍정의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너 말고는 어느 누구도 너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는다.” 행복의 기준도 행복을 보는 관점도 사람마다 다르다. 다른 이의 행복 커트라인에 내 점수를 맞출 필요는 없다. 내가 행복해지는 대상과 그 접점이 누구이고 어디인지는 나 자신이 제일 잘 안다. 그 기준에만 닿는다면 충분히 행복한 것이다. 누가 뭐래도 행복은 내 안에 있지 너 안에 있지 않다.“쓸모가 있거나 예쁘거나 기쁨을 주는 것 외에는 어떤 것이든지 버려라.” 자기계발에 대해 충언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말을 많이 해준다. 버리지 못하면 집착과 아집에서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깊은 데까지 가지 않더라도 잘 버려야 공간이 생긴다. 공간은 곧 여유다. 잡동사니로 가득한 곳에 있거나, 불필요한 것들로 꽉 찬 곳에 머물게 되면 가슴부터 답답해온다.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걸 알고 긍정할 것, 잘 비울 것, 스스로 행복해질 것. 이 삼박자만 맞춰나가도 살 맛 나는 삶과 가까워지는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0-17

품성에 근거한 교류

인간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나만의 새로운 통찰을 발견한 건가 싶어 나름대로 정리해보지만 늘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모든 희로애락의 성찰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선각자들이 완벽하게 정리해놓았다. 후세대인 우리는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을 취할 뿐이다. 가령 이런 문장은 어떤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한다. 이런 근거로 성립하는 친교는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것이 얻어지지 않으면 해체된다. 그들이 사랑한 것은 상대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것이었는데, 그 소유물은 지속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품성에 근거한 친교는 사랑 자체로 성립하기 때문에 지속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친교에 있어서 교환의 원칙`을 얘기하는 부분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 번이나 맞장구를 치게 된다.남녀 간의 사랑이 성립하는 데는 품성적 근거가 주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미모나 미소나 손발짓 등 자신만이 느끼는 감각적 코드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 저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처럼 사랑을 구하는 사람이든 사랑을 받는 쪽이든 그 중심에는 `자신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관계의 객관성과는 무관하며 사랑의 근원적 개념과도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구하는 자, 받는 자 어느 한 쪽이 그것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해체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얻을 게 없으면 만남을 지속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반면에 품성에 바탕을 둔 만남(물론 남녀 간의 사랑에도 이런 사례는 흔하다)은 사랑 자체로 성립한다. 서로간의 품성이란 매력에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감성적 코드에만 머문 필요에 의한 만남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고, 서로를 신뢰하는 높이도 높을 수밖에 없다. 일방적으로 구하려고 하거나 받으려고 하는 건 진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가 주려고 하는 품성의 합일점 그곳에 완벽한 사랑이 있음을 알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6

그녀의 답

전설의 탁구 선수 덩야핑. 1990년대 탁구사에서 그녀를 능가한 활약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현정화 선수마저 번번이 좌절케 한 탁월한 기량을 보여줬던 선수. 24세 정상에 있을 때 은퇴를 선언한 그녀가 선택한 것은 못다 한 공부였다. 특기자로 칭화대에 입학했을 때 그녀는 거짓말 조금 보태 알파벳도 제대로 모를 정도였다. 다섯 살 때부터 탁구만 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그녀는 운동할 때의 근성을 공부에도 접목시켰다. 지독한 공부 끝에 학부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까지 갔다. 끝내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거머쥐었다. 것도 운동 관련이 아닌 경제학 박사. 영어와 거리가 먼 선수생활을 했던 사람이 이룩하기에는 힘든 성과였다. 평생 공부만 해온 사람도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캠브리지 대학 800년 역사상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로서는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단다.인민일보 계열인 지커닷컴 CEO가 된 그녀에게 기자가 물었다. 탁구와 박사와 사업 가운에 무엇이 가장 쉽고 무엇이 가장 어려운가를. “세상에서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 그녀의 명료한 대답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세상에 쉬운 일 없다는 건 떼쟁이 어린아이도 안다. 하지만 세상에 안 되는 일도 없다는 말은 쉽게 믿기질 않는다. 세상사는 안 되는 것 투성이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해도 우리가 바라는 것의 반도 이뤄내기가 어렵다. 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상황이 흘러가는 경우도 있고, 내 의지가 박약해 애초부터 그 뜻을 관철할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도 많기 때문이다.평범한 사람은 못 이룬 것에 대한 핑계를 찾는다. 하지만 비범한 사람은 처음부터 핑계거리를 만들지 않는다. 세계를 백 번 이상 제패한 최고의 선수에게 두려움 따위는 적수가 되지 못한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걸 어릴 때부터 실천해온 사람에게는 뭐든 된다는 강한 자기 긍정의 기가 서려 있다. 흔들릴 때마다 덩야핑의 무한 긍정의 신념을 신선한 자극제로 삼아도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5

삶은 이미지로 각인된다

“우리에게 기억되고 각인되는 건 이를테면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죽음이 닥치는 순간, 그는 매끄러운 책상 위에 놓인 클립을 집으려고 책상 위를 긁고 있었고, 미끄러운 클립 때문에 얼굴 가득 불만스러운 표정이며, 고통으로 입은 반쯤 벌어져 있었고, 그리고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이 죽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레이먼드 챈들러의 편지 한 구절이다. 챈들러 소설의 묘미는 묘사와 대사에 있다. 그런 그의 글쓰기 방식을 선호하지 않은 편집자는 더러 작가의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그 부분을 빼곤 했다. 편집자는 독자들이 오로지 `행동`(결과)에만 주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편집자나 평론가들에 대한 불만 섞인 예를 들어 챈들러는 저런 편지를 썼다.챈들러에 백번 공감한다. 우리 삶이 그렇다. 행동의 결과가 모든 의미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소소하게 쌓인 이미지에서 그 의미가 살아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오늘 하루 고달프고 힘들었다 치자. 과연 `오늘 하루는 몹시 피곤하고 힘겨웠다.` 이 말로 내 하루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그것은 언젠가는 휘발되고 말 회상이다. 몹시 피곤하고 힘겨운 하루는 오늘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반면에 풍경으로 남는 이미지는 오래 각인된다. 고춧대를 뽑아내던 엄마의 등 뒤로 번지던 쑥부쟁이 향기, 장날마다 맨발로 신작로를 달리던 애꾸눈 총각의 낡은 런닝셔츠, 깜짝 학교를 방문해 내 기를 살려주던 곁방 새댁의 자주색 주름치마, 어스름 안개를 뚫고 어깨동무 잡지를 싣고 오던 둘째오빠의 고달픈 어깨. 이 모든 이미지는 명백한 풍경이 된다. 그 풍경을 되새기면 구체적 이야기가 되고 그것이 곧 삶이 된다. 의미가 부여되는 삶.거기 고통이 있었고, 거기 환희가 있었다. 이렇게 결과론적 서술만으로 삶이 다 설명되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건 풍경과 묘사이다. 순간의 선명한 이미지가 모여 삶의 모자이크를 이룬다. 미끄러운 클립 하나의 풍경이 끝내 의미가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4

어쩐지 짠한

맑은 날 해야 할 일을 비 내리는 날에 가서야 하고, 유행 지난 옷은 별 고민 없이 헌옷수거함에 잘도 던져 넣는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 중 하나이다. 웬만큼 게으르고 적당히 편안을 모색해도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다. 오히려 너무 부지런하고 너무 완벽할 필요가 없다며, 적당히 쉬어가고 인간적으로 흐트러지라고 부추기는 책들이 나오는 세상 아닌가. 요즘은 무조건 부지런하고, 한없이 절약하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는 어땠을까. 유배가 길어지는 동안 본가의 식구들은 곤궁한 살림을 살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누에를 치고, 아들들은 농사를 배우고 닭을 쳤다. 물려줄 재산이 없는 다산은 자식들에게 편지를 쓴다.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 두 글자의 부적이라며 `근`(勤)과 `검`(儉)을 강조한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보다 훨씬 나아서 평생토록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젊은이는 힘든 일을 하고 부인들은 밤 한 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않는 것, 잠시도 한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다산이 말하는 부지런할 `근`이었다. 올 고운 옷이 해져서 처량한 것보다 거친 올의 옷을 입어 흠이 되지 않는 것, 이것이 다산이 말하는 검소할 `검`이었다. 근검 두 글자는 `성실함`에서 나오니 절대 속임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딱 한 가지 속여도 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입`이란다. 상추로 쌈을 싸서 밥을 먹는 것은 `보잘것없는` 음식을 입에게 속이기 위한 방편이란다.선생의 산문집 `다산의 마음`에는 스스로를 올곧게 다지는 선비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맘을 알면서도 이렇게까지 당신과 가족을 채찍질할 필요가 있나 하는 반발심도 인다. 짠한 연민 때문이다. 근검의 실천 항목으로 매일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부녀자들 입장이 가슴 아프고, 먹는 즐거움을 별 것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아비의 애상이 전해진다. 특히 입을 속이면 맛있게 된다는 장면에서는 당혹감이 밀려온다. 늘 덜 먹기를 고민하는 현대인들의 수많은 입 중의 하나라는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기도 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3

그 누구의 사생활도

연예인 생활하는 것도 어렵다. 각종 보도 매체의 진화와 범람으로 이제 연예인의 사생활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마음껏 그들의 사생활을 파헤쳐 대중의 먹잇감으로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알려져서 좋은 사생활은 알려지지 않아서 좋은 사생활 보다 드물다. 대중 심리는 고약해서 알려져서 좋은 사생활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다. 따라서 누군가의 사생활이 알려졌을 때 당사자와 주변인들은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혹자는 말한다. 연예인은 공인(公人)이기 때문에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고. 과연 연예인은 공인일까. 또 공인의 사생활은 무한정으로 알려져도 좋은 것일까. 우선 연예인은 공인이 아니다. 공인은 `국가나 사회를 위해 공적을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연예인은 대중에게 재능을 서비스로 주고 사랑과 대가를 받아가는 직업인이다. 따라서 인지도 높은 연예인이나 스포츠인을 무조건 공인으로 보려는 시각에는 무리가 있다.공인이든 연예인이든 개인이든 그 누구의 사생활도 보호 받아 마땅하다. 물론 공인은 예외가 따른다. 공인의 경우 사회적 지탄을 받을 행위를 했을 경우 반드시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 외의 지극히 사적인 일은 공인이라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단정한 매무새, 긴장한 심리 상태로 사회적 생활을 한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풀어진 옷자락, 놓아버린 마음으로 간섭 받고 싶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이다. 따라서 불특정 다수의 관음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연예인의 사생활을 수집하고 때에 따라서 과장 보도를 하고, 대중을 자극하는 보도 매체들의 관행은 지양되어야 한다.한 연예인의 친부논란 보도로 연예계가 시끄럽다. 다행히 지탄받을 행동이 아니라 본보기가 될 언행으로 대중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멋진 부성을 보여주는 그 연예인을 보는 시선이 어느 때보다 호의적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사생활 노출은 그 자체가 당사자들에게는 상처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욕구를 위해 그 누구의 사생활도 희생양이 되는 건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10

기역 · 니은 · 디귿

`ㄱ`을 `기윽`으로 읽지 않기. 입에 착착 감길 때까지 `기역`으로 연습하기.`ㄷ`을 `디??으로 착각하지 않기. 입술에서 술술 나올 때까지 `디귿`으로 기억하기. `시옷`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글을 배운 이래로 자모의 명칭이 왜 그렇게 일관성이 없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답을 아는 선생님들도 어린학생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한 나머지 무조건 `기역, 니은, 디귿, …. 시옷 ….`으로 알고 외우라고만 가르쳤다. `기역, 니은, 디귿….` 표기의 뿌리는 한글 창제 백 년 쯤 뒤에 발간된 최세진의 `훈몽자회`이다. 세종 당시 자음 발음은 여러 정황 상 `기, 니, 디, 리…`였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한다.기역, 니은, 디귿 등과 달리 `훈몽자회`에서도 `ㅋ, ㅊ, ㅍ….`은 세종 당시의 발음인 `箕(키), 治(치), 피(皮)….`로 읽는다.최세진 당시 초성과 종성에 함께 쓸 수 있는 여덟 글자의 활용 예를 보여주기 위해 `기` 대신 `기역`, `니` 대신 `니은`, `디` 대신 `디귿` 으로 표기했다. `ㅋ, ㅊ, ㅍ….` 등은 당시 종성으로는 활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두 글자로 표기할 이유가 없었다.기역(其役), 디귿(池末), 시옷(時衣)으로 어렵게 발음하는 이유? 괄호 안처럼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기윽`, `디??, `시읏`에 해당하는 한자 발음이 없어서 `훈몽자회`에서는 가장 비슷한 소리의 한자로 표기했다.후대 사람들이 문헌에 충실하다 보니 차츰 그렇게 굳어져 버렸다. 한자로 표기만 빌렸을 뿐, 당시에는 기윽, 디?? 시읏으로 발음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쉽기만 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북한에서는 `기윽, 디?? 시읏`으로 제대로(?) 읽는단다.작년부터 한글날이 다시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한글 사랑을 실천하려는 입장에서는 반갑기만 한 일이다. 이참에`기윽, 니은, 디?? 표기법까지 되찾을 수 있다면. 아니, 기왕이면 세종 당시처럼 `기, 니, 디, 리`로 자음 표기법을 바꾼다면. 그렇게 되면 상징적으로라도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한글 홍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10-08

가장 멀리 있는 별

이성적·논리적 근거보다 감성적·정서적 정보에 우리 심상은 먼저 반응한다. 아무리 깨끗한 우물이라도 내 맘에 들지 않으면 구정물로 보이고, 아무리 더러운 우물이라도 내 맘에 차면 샘물 맛이 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가장 잘 이해되지만, 자기가 싫어하는 상대방은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세상은 이해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 따위로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성적으로 그걸 알면서도 인간은 감성을 지향할 때가 많다. 객관성을 표방하는 척하면서도 감성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중성. 나무에 못 박히면 장도리 들고 빼려 하고, 이웃에 불이 나면 물동이 들고 달려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나무가 쓰러지면 도끼 들고 달려가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자신을 포함한 인간을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멀리 있는 별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 가장 멀리 있는 별끼리 모인 게 사람인지라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게 모순인지도 모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 지른다. 가까이 가본다. `정의`를 위해 소리친다고 당사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제 삼자 입장에선 그것이 정의로 보이지 않는다.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악다구니로 보일 때가 더 많다.타자를 위한다고 큰 소리 칠수록 실은 나를 위하는 것이다. 절실하게 누가 나를 원할 때 아니오, 라고 단박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이기적인 게 아니라 한없이 자유롭고 거리낄 게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 타자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이기적 자아 소유자일 수도 있다. 상대를 환대하는 인간의 본능 속에는 이타성이 있지만 자기애도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밝음과 어둠 어느 한 쪽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그 둘이 뒤섞인 채 욕망은 본성을 부추기고, 본성은 자아를 다독이거나 분열시킨다. 그 틈새의 갈등에서 우리는 조금씩 성숙해나간다. 미로처럼 뻗친 양면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날마다 갈고 닦지만 결코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삶의 길./김살로메(소설가)

2014-10-07

삶 자체로 살아가기

병아리 한 마리를 키웠을 뿐인데 닭이 되고, 닭이 거위가 되고, 거위가 자라 양이 되고 양은 자라 궁극의 소가 된다. 그 절정의 소는 양으로 변하고, 양은 거위로 작아지고 거위는 닭이 되었다가 닭은 병아리가 되었다가 종내는 병아리조차 없어진다. 온갖 은유와 직유를 가져와 설명한다 해도 `인생`에 대해 이보다 직접적이고 확실한 답문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중국 작가 위화가 말하는 삶이란 이처럼 병아리에서 소가 되었다가 소가 다시 병아리, 아니 무(無)로 이행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소설 `인생`에는 선대의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한 주인공 푸구이가 나온다. 호방했던 아버지가 재산의 반 토막을, 나머지를 아들인 푸구이가 보기 좋게 말아 먹는다. 원하는 대로의 삶을 원 없이 탕진해본 푸구이는 자신이 지주였던 땅의 소작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몰락이 지주 처단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를 비껴가게 하는 행운으로 작용하긴 했지만, 나머지 푸구이 삶의 대부분은 비련과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병 든 아내, 수혈해주던 아들의 죽음, 농아가 된 딸의 출산과 죽음, 사위와 외손자의 잇단 죽음 등 극한으로 치닫는 삶을 푸구이는 꿋꿋이 감내한다. 소를 잃어 본 자가 다시 병아리를 키워 소로 만드는 일의 어려움을 보여주듯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가족사가 푸구이 앞에 이어진다.개인사를 중국의 근현대사에 엮은 이 소설은 살아간다는 것의 비장함과 지난함과 절절함에 대한 보고서로 이루어져 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보낸 중국의 단면을 푸구이의 운명에 빗대어 말하고자 하는 위화의 작가정신이 돋보인다. 공산주의 사회의 급진성과 문화 대혁명의 시기, 다시 자본주의 체제로의 변화 등을 겪으면서 중국 민중들은 삶과 죽음의 곡예를 넘나들어왔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의 시간을 견딘 푸구이 같은 사람이 살아남아 이렇게 인생의 곤고함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다. 작가의 한마디가 모든 삶의 비의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김살로메(소설가)

2014-10-06

버섯피자

오페라 `버섯피자`를 보았다.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의 하나로 포항오페라단이 마련한 무대였다. 좋은 분들과 함께 지역 음악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창하고 웅장한 것이 오페라라는 보편적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터라, 이번 공연은 발췌 형식인 `갈라(gala) 오페라`겠지 하고 넘겨짚었더랬다.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었던 데다 전통 오페라 공연장으로는 무대가 좁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공연을 보면서 오페라에 대한 그간의 내 무지와 편견을 조금이나마 깰 수 있었다. 오페라라고 다 위용 서린 대작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잘 알려진 라보엠이나 라트라비아타 등은 모두 막간도 길고 오케스트라도 대동하는데다 무대 세트와 의상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종합 예술을 지향한다. 한데 이번 `버섯피자`는 대작이 아니다. 달랑 네 명의 등장인물만이 무대를 장식한다. 그렇다고 축소판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작곡가 세이무어 바랍(Seymour Barab)의 작품을 한국어로 번안한 완제품이다. 적은 경비, 소박한 무대로도 오페라라는 예술 형식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버섯피자`의 매력이다. 평범한 관객을 위한 대중 지향적 오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버섯 피자`는 불륜, 질투, 출생의 비밀, 배신, 욕망 등등 소위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소를 갖췄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그런 설정이면 욕하면서 본다지만 오페라가 그런 설정일 때는 웃으며 봐도 좋다. 본질적으로 이 작품은 코미디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욕칠정을 심오하게 살피는 대작 오페라도 괜찮지만, 일상에 찌든 보통 사람들이 재미와 웃음을 사갈 수 있는 이런 힐링용 오페라도 좋다. 클래식이 꼭 어려워야 할 이유가 없듯이 오페라도 꼭 무거워야 할 이유가 없다. 뮤지컬과 연극이 대세인 틈새시장에서 신선한 발상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버섯피자 같은 작품이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맛깔스럽고 웃음을 선사하는 이 공연에 객석이 다 차지 않았다는 점은 약간 아쉬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03

꽃은 거름에서 핀다

가을 들녘을 지나면 구린내가 진동한다. 은행나무 열매 익는 냄새인가 싶었는데 거름냄새란다. 닭똥 등 동물분이 섞여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모양이다. 지독한 냄새는 여전한데, 그것이 똥이 아니라 거름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알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저 거름더미에서 향기로운 국화가, 고소하고 단단한 배추나 무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참을 만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향기 진하고, 자태 아름다운 장미일지라도 그 출발은 냄새나는 퇴비더미이다. 결실을 위해서는 거름냄새를 견뎌야 한다. 하지만 그 거름이 자신이 뿌린 보석인지도 모른 채, 코 막고 남의 똥 보듯 하는 이들도 있다. 잎 나고 꽃피고 열매 맺어도 거름 덕인지를 알지 못한다. 도리어 냄새 난다는 그 이유만으로 제가 삭인 거름마저 부정한다. 막상 꽃피고 열매 맺으면 맨발로 뛰쳐나가 그 꽃과 열매가 제 것이라고 설레발치기 바쁘다. 그러다 무성의하게 거름 내지 않은 채 씨를 뿌려, 농사를 크게 망치고 나서야 그 거름이 보석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속성이다. 그 어떤 눌변가라도 자기변호 앞에서는 달변가가 된다. 목소리가 커지고 조금 알수록 그게 전부인양 소리친다. 소리친 열배의 낭패를 당하더라도 일단 내질러놓고 본다. 이 역시 정치인들에게 어울리는 비유이다.여린 잎으로 피어나 푸름 짙어지는가 싶다가도 끝내 떨어지고 마는 게 인생이다. 무성할 때 낙엽을 내다보고, 강할 때 쇠락을 미리 읽을 수 있어야 사람이다. 그간의 역사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오늘의 허세나 교만은 내일의 수렁이나 자책을 예견한다고. 세상엔 말로 할 수 있는 허상의 것보다 말할 수 없는 본질의 것들이 더 많다. 비열한 사람들은 자신의 들보만한 잘못은 숨기고 티눈만한 타인의 실수는 잘도 말한다. 겸허한 사람들은 자신의 티눈은 자책하고 타자의 들보는 보듬는다. 후자의 성정을 지닌 자들이 정치를 관장하면 좋으련만 세상은 언제나 바라는 것의 거꾸로 될 때가 많다.꽃은 거름에서 시작하고 거름은 냄새가 나야 거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02

옥병엔 얼음 같은 맘

가을비 오신다, 맞춤하게 내린다. 주차된 차 위로 물기 서린 누런 잎들이 떨어진다. 무성했던 벚나무 가로수도 연못 속 푸르렀던 연잎도, 저 먼 우주의 한 줌 먼지가 되기 위해 성급히 내려앉고 있다. 이 비 그치면 더 비워 넓어지려는, 그러나 어딘지 쓸쓸해져가는 물상들의 춤사위가 넘쳐나리라. 청명하고 공활한 하늘이 그 고립된 자유를 드높이고 위무해주리라. 그때 문득 잊고 지낸 이름 하나 불러내 저 높고 환한 허공에다 새겨 넣어도 좋으리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라고 대시인조차 허락한 계절이질 않은가.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이 지방관으로 은거하고 있을 때 친구 신점(辛漸)이 찾아와 하룻밤 머물렀다. 낙양으로 떠나는 신점을 부용루에서 송별하며 왕창령이 시를 읊었다. 이름하여 `부용루송신점(芙蓉樓送辛漸)`. `찬 비 강 따라 밤새 오나라로 들고, 그대 보내는 새벽 초나라 산들이 외롭구나. 낙양 벗들 내 소식 묻거들랑, 한 조각 얼음 같은 맘 옥항아리에 있다 전해주게.`마지막 일곱 마디 `일편빙심재옥호`(一片氷心在玉壺)가 독자의 애를 끊는다. 가을 정서와 딱 맞아 떨어지는 시구다. 일편단심이 열정과 뜨거움의 절개라면 일편빙심은 냉정과 차가움의 의지이다. 피처럼 들끓는 마음도 좋지만 얼음처럼 투명하게 가라앉는 마음도 그 진정성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얼음 같은 마음만 해도 깨끗한데, 그것을 투명한 옥항아리에 담았으니 얼마나 더 하자 없을 것인가.강직한 마음 때문에 중앙의 부름을 받지 못한 채, 한직에 밀려나 은거했던 왕창령. 마음만은 거리낄 것 없었던 시인이 부른 깨끗하고 당당한 노래. 세상을 향한 불변의 지조와 영원한 우정을 묘사해 줄 말로 `얼음 같은 맘을 옥항아리에 담는` 것보다 나은 게 있을까. 투명함 속의 투명함, 이중의 자기 확신을 선포하는 시인의 절창 앞에 결점 많은 일상을 엮어가는 스스로가 부끄럽기만 하다. 가슴을 파고드는 옛 시 한 편 앞에서, 투명하게 깊어가는 가을이 서러우면서도 반갑기도 한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01

너무 빼지 않기

외국에서 온 철없는 동서를 한없이 품는 탈북 출신 맏며느리 이야기가 방송에 나온다. `밉상`인 동서를 보듬고 챙기는 그녀를 보면서 절로 존경심이 인다. 천성이 고운데다 북한 및 탈북 과정에서의 특수한 경험이 그녀를 단단하고 큰 사람으로 만들었을 거라는 짐작을 해본다. 한 가계를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밝은 천성의 그녀도 때론 힘든가 보다. 눈물을 흘리며 몰래 맘 삭이는 장면에선 짠하다 못해 화가 난다.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으로 한 가계의 행복을 얻는 구조라면 그 희생자가 아무리 자신의 선행이 즐거움이라고 우긴다 해도 동의하기가 싫다. 맑고 밝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따뜻이 엮어나가는 건 맞지만 그들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곁에서 위안 받고, 사람 곁에서 상처 받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한쪽만의 헌신이나 사랑으로 이루어진 방식은 옳은 관계법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을 때는 서로 상승 기운을 좇을 때이다. 겸손한 자 곁에 있으면 절로 겸손해지고, 순한 사람 곁에 있으면 절로 순해진다. 기 센 사람 곁에 있으면 절로 드세어지고, 별난 사람 곁에 있으면 같이 별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그 어떤 환경에서도 무조건 베푼다는 건 어렵다.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은 상대적이다. 기를 빼앗기보다 서로 기를 돋우는 사람, 웃음을 앗아가기 보다는 서로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 대개는 그런 관계를 꿈꾼다.“너무 빼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불러줄 때가 적기입니다. (….)준비가 다 됐을 때는 막상 아무도 부르지 않습니다. 너무 빼지 말고 도전하십시오.”혜민 스님의 한마디를 보면서 혼자 밥 떠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빼는 것도 민폐이다. 너무 빼지 않고 불러 줄 때 가는 것이야말로 염치를 아는 것이다. 불러도 나가지 않기 전에, 먼저 부르는 삶이 되도록 할 것. 망설이며 누군가의 등에 기대려 하기 전에, 먼저 환히 불러내 같이 성장할 수 있을 것. 어차피 완벽한 준비는 없으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9-30

박범신의 행복론

`포항시 올해의 원북` 행사의 하나로 박범신 작가 초대 강연이 있었다. 살뜰한 문우 한 분께서 정리해서 보내온 것을 내 식으로 재편집했다. 강연장에 오고 싶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독자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 나의 세대는 광풍의 질주시기였다. 개별자의 꿈보다 공동체의 희망을 위해 야수적으로 일만 했다.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라는 사회적 명령에 저항할 틈조차 없었다. 아버지들이 바친 헌신으로 우리는 이만큼 누리고 산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의 눈물과 땀의 결과가 오늘날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부권은 내려앉고, 가족은 해체되기 직전이다. 물질에 오염된 환자만 양산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했지만 그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각자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야 행복하다. 세상이 주입해준 삶이 아니라 하루라도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누구든 행복해질 준비는 되어 있다. 다만 우리가 불행한 것은 더 가진 자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벽 넘고, 달 뒤엔 무엇이 있을까. 늘 삶의 이면에 대해 의심하며 탐구해야 한다. 표면 구도 너머의 욕망이 없으면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눈앞에 출렁이는 황금물결의 완벽함이 이 세계의 완벽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허기와 결핍의 문 앞에 서성여 본 사람은 그 이면의 눈썰미도 발달하기 마련이다. 내 안엔 짐승이 우글거린다. 이 짐승들은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들을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품을 쏟아낸다. 창조적 자아가 발현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자기 갱신, 자기 변혁에 대한 욕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늙어도 젊다. 청춘은 내부의 명령이지 표피적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내 안의 창조적 짐승 한 마리를 끊임없이 키워라. 결국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사는 존재이다. 사랑의 불모지에서 헤매는 우리, 사랑의 끝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랑의 끝은 결국 사랑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9

보따리 단상

기숙사에 가져갈 딸의 여름이불을 꾸릴 때였다. 이불 케이스나 쇼핑백에 넣지 않고, 별 생각 없이 이불을 보자기에 쌌다. 보기 흉하거나 거북살스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중에 보따리를 발견한 딸이 놀라는 눈치였다. “이불을 보자기에 싸니 이상해.”하면서 쇼핑백으로 바꿔 이불을 넣는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따리를 든 채 거리를 헤매는, 행색 초라한 노파 이미지를 떠올렸나 보다. `보자기에 물건을 싸서 꾸린 뭉치`가 보따리이다. 사실 보따리의 이미지는 볼썽사납거나 추레한 느낌만 있는 게 아니다. 전통과 품위가 있는 자리에 보따리는 필수였다. 함을 들고 날 때도 선물을 주고받을 때도 보따리를 꾸린 채였지, 맨살 그대로의 물건을 드러내는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최대의 정성 깃든 포장`이 보따리인 셈이다. 보자기가 품위 있는 짐 꾸리기에만 머물지 않고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아무래도 그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온 겨레의 포장법인 보따리가 우아함과 추레함을 아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부산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들고 서성이는 걸 경찰이 발견하고 딸과 만나게 해드렸다는 소식이 뜬다. 슬리퍼 차림에 두 개의 보따리를 품은, 그야말로 추레한 행색의 할머니. 할머니는 딸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저 밥보따리가 식을세라 꼭 품은 채 딸이 병원에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보따리에는 미역국과 나물반찬, 흰밥이 들어 있었다. 식은 미역국 보따리를 풀어헤치며`어여 무라`는 할머니의 사랑 앞에 병실의 누군들 함께 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정신이 허물어져가도 가슴만은 살아 자식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그 마음, 통증이 되어 가슴팍을 콕콕 찧는다. 자식을 향한 엄마의 보따리는 결코 추레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가슴이 부르는 마음을 언제든지 보따리에 담아 건넬 수 있는 사람, 그 위대한 이름 부모. 노심초사 속보따리 겉보따리 바리바리 싸는 늙어가는 엄마에 비해 내가 당신에게 쌀 수 있는 보따리는 얼마나 미욱하고 보잘것 없는지./김살로메(소설가)

2014-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