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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말의 강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가히 해부학적이라고 해야 할 시선으로 파고들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예 말하지 않는 그의 태도이다.” 신형철의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평론가의 글말은 탄력 스타킹을 당겨 신는 것처럼 팽팽하고, 끊고 싶지 않은 애인과의 통화처럼 미련을 담보한다. 굳이 평론집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편편마다 에세이로 가득하다. 700여 페이지가 넘는 그의 말들은 온전하게 그 자신의 말로서만 읽어도 충분하다. 분석 대상이 되는 작가나 작품을 몰라도 읽기엔 별 문제가 없다. 독자인 내게 그는 평론이란 겉옷을 빌려 입은 내면의 철학자로 비친다.아무 쪽이나 펼쳐도 맘에 드는 구절을 쉽게 만난다. `구체적 일상의 숭고함`에 대해 일관되게 말하는 김훈 작가에 대해 말하는 저 인용문을 나도 모르게 메모한다.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오직 현상뿐이다. 현상만을 말하고 냉혹하리만큼 그 현상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불필요한 주석은 달지 않는 것, 이것이 김훈 작가식 글쓰기 방식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 안에 구체적이고 던적스러운 일상이 들어가고, 그것은 숭고한 밥벌이가 되거나 과장 없는 신념이 된다.말할 수 없는 것들을 함부로 말하려 할 때 우리는 진실을 포장하게 되고 양심을 의심 받게 된다. 섣부른 연민, 지나친 환호, 드넓은 오지랖, 김훈의 작품 안에선 이런 것들이 빛을 발하지 못한다. 김훈이라면 저런 정서를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 안에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바다가 있고, 다만 거기로 나가 싸우고, 그저 견딜 뿐인 게 삶이지, 애초에 거창한 명분이나 정치적 함의 같은 건 김훈 소설의 주인공에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윤리적 진실에 가깝다고 김훈을 해석해주는 신형철의 말글. 함부로 연민하거나 멋대로 재단하지 않을 것, 이것이 우리가 건너야 할 말의 강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25

열린 듯 막혔다!

나는 딸이 버겁다. 나는 딸을 신뢰한다. 이 양가감정은 오랫동안 내가 딸에게 느껴온 감출 수 없는 진실이다. 제 생일을 맞아 아들녀석이 오랜만에 집에 왔다. 늦은 밤에 도착한 녀석은 저녁 먹다가 찌개국물이 튀었다며 셔츠를 빨아줬으면 했다. 여기서 엄마로서 금세 행동 개시를 했으면 좋았을 걸, 거짓말 보태 밤새워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의 과제가 밀려 있던 나는 맘만 급했다. 마침 소파에서 딸이 빈둥거리기에 `동생 셔츠 니가 좀 빨아줄래? 더 늦으면 얼룩 안 진다.` 이렇게 말했다. 한데 딸아이가 발끈한다. `스무 살인데 지 셔츠는 지가 빨아 입어야지.`한다. 덧붙여서 `엄만 만날 나보고는 샤워하는 김에 속옷 빨래 정도는 하라고 하면서 왜 아들한테는 그 룰을 적용 안 해?` 한다.너는 쉬고 있고, 엄마는 지금 바쁘고, 동생은 밤차 타고 오느라 힘들었으니 니가 좀 배려해주면 안 되나, 했더니 나더러 열린 사고의 소유자인척 하지만 이럴 땐 꽉 막혔단다. 만약 자신이 누나가 아니고 형이었다면 그 셔츠를 자신에게 빨라고 했겠냐는 것이다. 착한 아들은 웃으면서 `누나 말이 맞아요. 제가 샤워하는 김에 빨게요.` 하면서 금세 욕탕으로 사라진다. 아들과 딸이 평소 우애가 깊은 건 아들녀석의 속 깊은 이해가 전제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이 이야기를 맏딸인 지인들에게 했더니 내 입장도 이해가 되지만 딸아이 입장도 말이 된단다. 은연중에 맏딸에게 거는 엄마로서의 기대감이란 게 무조건적인 배려와 적당한 자기희생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자기앞가림 면에서는 정신력 강한 딸이 순정한 아들에 비해 훨씬 믿음직스럽다. 그쪽으로 딸을 신뢰하는 내 마음이 딸아이의 반격 콘셉트 앞에서 살짝 흔들린다. 나는 배려에 대해서 말하는데, 딸은 남녀차별이라고 받아들이는 이 아이러니를 뭐라 설명할까. 이건 딸아이가 잘못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아무리 바빠도 엄마는 아들 셔츠를 빨아 줄 때 행복감이 밀려온다! 이런 뚱딴지같은 결론이라도 내려야 불편한 맘이 가실 것 같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24

해주길 바라는 대로

인성이 좋은 사람들의 특징은 긍정적인데다 타자에 대한 배려심이 높다. 어떤 상황이라도 좋게 받아들이고, 아주 작은 것에도 타자를 먼저 생각한다. 따뜻한 유머로 주변인들을 웃음 짓게 한다. 귀찮은 기색 없이 인간적인 오지랖의 치마폭을 넓힌다. 그들은 가르치려 들지 않고 다만 이해한다. 성가시다고 피하는 대신 먼저 솔선수범한다. 자신보다는 타자의 입장을 우선한다. 모두가 그들을 인정하고 좋아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 행동하는 건 아니다. 몸에 밴 실천적 행동이 절로 나오는 것뿐이다. 어느 누구도 가르치려 들거나 잘난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네 맘을 내가 안다며 공감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성경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그럼으로 무엇이든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법이요, 선지자다.” 남이 내게 해주었으면 하는 대로 다른 사람에게 내가 먼저 해주면 된다. 친구를 얻고 싶으면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면 된다. 쉬운 방법 같아 보이지만 실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하지만 역지사지하는 사람들은 저런 말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다만 주변 사람들에게 진심과 최선을 다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행동이다.조선소 현장, 외국 선주가 근로자들을 위해 얼린 음료수를 마당에 부려놓았다. 그 소식을 아는 일부만이 음료수를 마셨다. 지인 한 분은 그 순간 무더위와 씨름하는 동료들 얼굴이 먼저 떠오르더란다. 제 욕심을 차리는 걸로 오해를 받아 감독관과 싸움이 날 뻔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음료수를 상자 째 들고 가 동료들에게 나눠 주었단다. 나 같으면 성가셔서, 오해 받기 싫어서, 오지랖을 떨기 싫어서라도 내 음료수만 챙겼을 것이다. 소심하게 음료가 배달되었다는 정보나 전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부러 악행을 저지르진 않지만, 적극적 선행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정 멋진 사람들은 오해를 받든 말든 적극적으로 타자의 마음을 보듬는다. 그들 반만 따라하자. 오늘도 반성문을 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23

꽃에 물 주듯

오랜 만에 집안 대청소를 했다.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고, 어질러진 책도 정리한다. 방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신간들을 제 자리를 찾아 넣는다. 내보내도 아쉬울 거 없겠다 싶은 책들을 빼낸 자리에, 맘과 달리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새 책들을 바꿔 앉힌다. 책 정리를 할 때마다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책을 두 번 사게 되는 경우도 있고, 산 기억조차 없는데 책꽂이 한 자리를 차지하는 책이 나오기도 한다는 것. 이번 경우는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만화판이 전자에 속했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 후자에 속했다. 몇 년 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만화로도 나왔다는 것을 알고 사들였다. 4권까지 를 읽고는 만족감으로 오래 설렜었??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얼마 전 그 책이 독서 토론 모임의 지정도서로 정해졌을 때, 원글 번역본은 쉽게 내 책꽂이에서 발견할 수 있었는데 만화본이 통 보이지 않았다. 온 책꽂이를 다 뒤져도 소용없었다. 급기야 내 기억을 왜곡하기에 이르렀다. 좋은 책이니 다른 문우에게 선물했을 거라고 믿었다. 해서 다섯 권으로 늘어난 그 시리즈를 다시 샀다. 한데 이번 정리할 때 먼저 산 네 권이 발견되는 게 아닌가. 이중으로 된 책꽂이 안쪽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사랑의 기술`은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 같은데 내 책방에도 꽂혀 있었다. 슬쩍 기억을 더듬을 겸 훑어보았다. 내용은 가물가물한데 이런 말은 용케도 눈에 띈다.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어버린 여자를 본다면, 우리는 그녀가 꽃을 사랑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필시 나는 책을 사랑하는 이가 아닌 게다. 책을 사랑한다면 아끼는 그 책이 제 방 책꽂이 어느 위치에 꽂혀 있는지, 또한 언제 무슨 이유로 그 책을 샀는지 정도는 금세 알 것이기 때문이다. 물 주지 않고는 꽃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곁에 두고 아끼지 않으면서 그 책을 사랑한다 할 수 없으렷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22

메이플 시럽 귀히 먹듯

덜 갖되 더 충실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더 가져 불충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덜 가진 건 떳떳한 것일까. 많이 가진 건 부끄러운 일일까. 국회의원 보궐 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가 재산 축소 및 누락 신고 의혹을 받고 있다. 경제적으로 많이 가졌다는 것은 적어도 공직 후보자로서는 그리 자랑할 만한 일이 못되나 보다. 저토록 감추고 싶어 하니. 많이 가진 자를 부러워한다지만 그건 세속적 관점에서의 부러움일 뿐이다. 옳고 그름인 도덕적 문제로 옮겨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공직 후보자들 스스로 더 많이 가진 것에 떳떳하지 못하다. 재산 축소 또는 누락 신고를 자처함으로써 그들의 부가 정당하지 못함을 스스로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정당한 방법으로 가진 자가 되었다면 쉬쉬할 이유가 무엔가.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산다. 많이 가졌다는 건 행복 조건의 일부분은 되겠지만 궁극적 목표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숨겨야 할 땐 숨기는 한이 있더라도 많이 가져 봤으면 하고 소원한다. 탐욕 때문이다. 아주 보통의 인간 누구에게나 탐욕은 있다. 하지만 아주 드문 누군가는 그것을 다스린다. 아니 초월한다. 가령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의 경우는 어떤가. 니어링 부부의 행복 찾기는 자연에서 맞춤하게 살아가기였다.남편 니어링이 죽은 뒤 헬렌은 회고록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다음과 같이 그들 삶의 방식에 대해 썼다. 자신과 화해할 것,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모든 면에서 잡동사니를 치울 것, 날마다 자연을 느낄 것, 힘든 노동을 하고 산책을 할 것, 날마다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 것, 모든 생명체에게 친절할 것 등등이다.물질을 그러안고 드높인다고 부자가 되는 게 아니다. 마음 부자는 소박하게 비우고, 기꺼이 나누는데 있다. 벌들에겐 그들의 양식이니 꿀도 아껴 먹고, 단풍나무 수액을 채취한 게 미안해 메이플 시럽조차 귀히 먹은 그들의 삶에서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21

모든 것, 백성

김탁환의 두 권짜리 소설 `혁명`을 완독했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역사 소설인데도 스토리에 치우치지 않은 것도 맘에 들고,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위안이 된다. 한마디로 취향이 맞으니 금세 읽힌다. 역사 소설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원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등장인물의 디테일한 내면의 소리나, 담백하면서도 정돈된 문체 미학을 곁에 두고 싶은 독자라면 곁에 둬도 좋은 책이다. 이성계, 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대로 화자가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성계는 해주에 있고, 왕과 정몽주는 왕성에 있으며, 정도전은 유배지이자 고향인 영주에 머물러 있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직전의 18일 간이란 시간을 역사적 기록을 빌려와 작가적 감수성으로 직조해냈다. 혁명이란 제목에 걸맞게 정도전의 내면이 가장 많이 투사된다. 혁명가의 내밀한 비망록을 전하는 작가의 상상력은 치밀하고 촘촘하다. 작가는 생의 가장 아련한 지점, 가장 극적인 순간만을 취함으로써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물론 밀도 높은 문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동문 학자로서, 혁명 동지로서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꿈을 꾸었다. 백성이 주춧돌이 되고, 재상이 대들보가 되며, 왕이 지붕이 되는 이상적인 세상. 하지만 현실 정치는 권력의 이전투구장일 뿐이었다. 정치는 타이밍이자 힘이 지배하는 논리이다. 그 둘의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자는 역사의 승자가 되고 그것을 놓친 자는 연민을 부르거나 잊힌 자가 된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후자의 운명이었다. 그들에게 혁명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였다.짧은 시간적 배경과 한정적인 공간적 배경 때문에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역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다소 아쉽다. 그렇지만 `사직보다도 임금보다도 귀한, 결코 갈아치울 수 없는 그와 나의 모든 것, 백성`이라는 말 한마디를 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효용은 차고 넘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8

평정심 유지하기

기억의 자기력은 얄궂다. 대개 기억은 좋은 쪽보다 나쁜 쪽의 힘이 세다. 주변의 가깝거나 먼 사람들 대부분은 특별히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그저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분노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 평범한 사람이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한 더 많은 좋은 기억이 있음에도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상처는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약화시키는 속성이 있다. 타자에 대한 좋은 쪽의 기억은 나쁜 쪽의 기억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타자에 대한 나쁜 쪽의 기억은 단 한 번이라도 깊이 각인되고 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기억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상처는 나쁜 기억을 낳고 그것의 자기력은 끈질기고 뭉근하게 우리 내면을 괴롭힌다. 그 상처의 길은 끝내 기억을 왜곡한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내 기억과 당신의 기억이 다른 것은 모든 개별자는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편리한 대로 가공하고 아쉬운 대로 재배치되는 게 사람의 기억이다. 기억은 대체로 믿을 만하지만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못 된다.한편으로 기억 인자가 자기 유리한 대로 재편성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기억이 만약 원형질 그대로 재생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안 그래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끈질기게 우리의 심리적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 왜곡조차 되지 않고, 가공조차 되지 않은 채 재현된다면 제 기억의 한계가 부끄러워 더한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아닌지.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내면의 고통을 부른다. 고통은 평정심을 흐트러뜨리고 급기야 자기 연민으로 치환되곤 한다. 그 연민이 다 이해받는 건 아니니,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냉정한 조언을 준다. `네 연민조차 지나친 기억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상기하라`는 것. 그렇게 부단히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게 삶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07-17

정치가의 덕성

권력의 세계에는 법의 지배와 함께 힘의 지배도 요구된다. 숱한 영웅들이 제 나름의 정치적 덕성에 따라 역사를 장식했다. 요동치는 격변의 세상, 정치판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자는 끝내 힘의 논리를 거부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권력 쟁취라는 면에서 승리한 그들은 자신이 지닌 정치적 역량에 따라 훌륭한 리더로 추앙되거나 함량 미달의 독재자로 추락하곤 했다. 여말조선 초, 격동의 시기 군웅들이 할거했다. 그 중 정치적 리더로서 제 나름의 덕성과 개성을 확보한 이는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등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위기의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방식은 셋이 지닌 덕성이나 개성만큼 달랐다. 극적인 드라마의 소재가 될 만큼 치열한 권력 투쟁을 했다.우선 정몽주는 원칙에 입각한 인물이었다. 두 임금을 모시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역성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못했다. 끝내 반대 노선을 택했고 죽음으로서 제 정치적 덕성을 실현했다. 이방원은 구체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보다는 권력의지에 무게를 둔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덕성은 법과 제도에 충실한 신념에 있다기보다, 요즘 유행하는 의리에 바탕을 둔 인간 경영에 무게를 두었다. 마지막으로 정도전은 주자학의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이론과 현실을 접목한 인물이었다. 이념과 제도를 바탕으로 한 권력 지향적 인물이 정도전이었다.정치적 자질로만 보면 정도전은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이상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운명이 쏠리는 곳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운명은 이방원 쪽으로 기울었다. 정치가의 덕성은 일반 철학에서 말하는 덕성과는 다르다. 정치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 그것이 정치에서 말하는 덕성이다. 이방원의 힘이란 덕성이 정몽주의 원칙과 정도전의 이상이라는 각각의 덕성을 눌렀다. 결과가 아니라 합리적인 생각만을 그 기준으로 할 때, 사람들은 정도전의 정치 이념에 손을 들어준다. 그리하여 역사의 승리자가 못 된 심적 동반자로서 그의 실천적 의지를 응원하게도 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6

정도전의 철학

정도전 정치 철학의 기본 이데올로기는 주자학과 정전제와 재상제였다. 얼마 전 종영한, 그를 타이틀로 한 주말 드라마에서도 이 정신만은 온전히 투영되었다. 정치적 기초 질서로 주자학을, 민본의 생업 토대로서 정전제를, 이상적인 권력 제도화로서 재상제를 설계했다. 우선 그는 더 이상 불교가 정치 이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정치의 요체는 `질서`였다. 천지만물을 아우르는 불교의 가상적 윤회관은 이를테면 군신과 부자 관계 등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하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정도전 정치철학의 기본은 차별적인 상하관계를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차이를 부정하는 불교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경제적 토대로서 그가 내세운 것은 정전제였다. 어떤 정치 제도도 그것을 받쳐줄 경제적 기반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다. 정도전 정치의 활동 방향은 `의식의 풍족`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바탕에 백성이 있었다. 민생 안정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토지개혁을 내세웠다. 대토지를 소유한 기득권에 맞서 국가권력의 지배가 미치는 토지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마지막으로 권력의 제도화로서 재상제를 주장했다.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관료체제가 요청된다고 보았다. 그가 이상으로 내세운 재상은 식견과 도량과 덕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재상의 시비와 적부를 논하고, 재상은 군주를 바르게 보필해 서로의 임무를 다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정도전 정치 철학이 새삼 조명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사상 밑바탕에 민본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밥벌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 없이 나라 없다. 제 정치적 신념으로 조선왕조 건국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이 민본정치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목 받아 마땅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5

용서, 위안부의 경우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따라서 설득이나 학습된 강요에 의한 용서라면 한참 미뤄져도 좋다. 때 아닌 용서는 더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 맘 편하고자 용서하라고 한다든가, 용서는 빠를수록 좋다는 등의 섣부른 감화를 조장하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으련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이면의 여러 상황과는 별개로 할머니들의 심적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억과 경험`에만 의거한 반쪽 의견에 우리 국민 정서가 움직이고,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여러 오해와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간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두 나라의 화합적 미래를 위해서라도 식민지 경험의 왜곡에서 벗어나 용서함으로써 과거에서 자유로워지자는 게 저자의 논지이다.위안부를 총체적 피해자로 규정하면서도 저자는 가해의 궁극적 주체가 일본이라는 점을 피해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예를 들면 업자와 포주란 모집책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위안부 문제를 `온건통치의 범주에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불법을 자행`한 면이 있다고 쓴다. 깡패집단 보스의 잘못이 `온건`으로 이해되거나 행동대장의 잘못만이 `불법`으로 치부되는 시각이 독자로서 불편하다. 조선 위안부가 겪은 상황을 구별해서 인식하려 한 점도 껄끄럽다. 그들 대부분은 관리매춘에 해당하기 때문에 중국 점령지에서의 일회성 강간이나 네덜란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속적 폭력과는 달리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위안부의 상황이 그 둘의 경우와 분명히 다른데 그들의 기억인자는 후자의 방식으로만 발현된다는 것이다.적극적 공감 능력이 부족한 저자의 시각이 아쉽다. 자발적 형식이든, 공포적 속수무책이든 정황상 비인륜적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 맥락을 깊이 성찰하는 게 먼저지 용서가 급한 건 아니다. 후대에게 숙제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닌 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용서를 미루는 건 잘못이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4

갈 길이 멀다

독도에도 텃밭이 있을까? 온통 바위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설마 보자기만한 텃밭 하나 만들 땅이 없을까?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하려면 독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잘 알려면 직접 그곳을 경험하면 된다. 독도를 터전 삼아 살아본 사람만이 가장 현장성 있는 답을 줄 수 있다. 오늘 그 확실한 답을 알게 되었다. 전충진 기자의 독도 현장 르포인 `여기는 독도`의 한 장면. 독도에 살러 간 기자에게 가족과 지인은 각각 질문을 한다. `독도에 슈퍼마켓은 있는가, 독도에 밭농사는 좀 할 수 있는가`하고. 독도에 슈퍼마켓이 있을 리 없다. 극히 제한된 주민이 살거나 드나들 뿐이니 구멍가게조차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밭농사는 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자신이 없다. 막연히 섬 한쪽 어딘가에 손바닥만한 텃밭이라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그러고 보니 독도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알아야겠다고 적극적 노력을 한 적조차 없다. 이 책에서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외국 사람들의 70퍼센트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한 예로, 미국에 유학하러 간 대학원생의 전언에 의하면 자신만 빼고 다른 모든 외국 학생들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여기더란다. 왜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교수의 질문에 이 대학원생은 한 가지 답밖에 할 수 없었단다. 한국인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한국 땅이라고. 이렇게 빈약한 논리로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제대로 주장할 수가 없다.독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러한 우리의 약점을 알기라도 하듯 그들은 틈만 나면 독도가 저들 땅이라고 우긴다. 지피지기라야 백전백승할 수 있다. 하지만 독도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 지피지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점유했다고 다 우리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독도 공부를 제대로 해, 아집에 둘러싸인 일본의 부당한 처사에 논리적 맞대응을 하고 싶다. 그러기엔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참고로 독도에는 `파 한 뿌리 묻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게 작가의 전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1

꼰대라는 말

`늙은이`나 `선생님`을 가리키는 은어가 `꼰대`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렇다고 실생활에서 그 말이 두 부류를 한정해서 쓰이는 건 아니다. 고루한 생각을 강요하거나 제 말만 옳다고 남을 설득하기를 즐기는 모든 사람은 꼰대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미있는 건 자신이 꼰대인 줄 모를수록 꼰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누구나 조금씩 꼰대가 되어 간다. 원하지 않아도 뒤를 잇는 세대가 기성세대를 그렇게 규정해버리는 한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기도 한다. 상황이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꼰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제 아무리 꼰대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도 그들이 우리를 꼰대로 여기는 한 그렇게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이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슬프기 한량없다. 기성세대의 `꼰대스러움`에 대한 경고문으로 읽히기 때문이다.꼰대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요즘 애들은 말이야”하는 말을 얼마나 자주하는지를 체크하는 일일 것이다. 인류 언어 역사와 함께 생겨난 말이 `요즘 애들은` 이란 말이라고 할 정도로 앞선 세대는 뒤따르는 세대에게 질책성 또는 훈육성 언어를 쓰기를 즐긴다. 따지고 보면 언제나 `요즘 애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없는 `기왕의 어른`의 실존적 서글픔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걸 바라보는 씁쓸한 자괴의 심정에서 만들어낸 말이 `입은 닫은 채 지갑만 열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 씁쓸한 면도 없지 않다.대접 받으려는 마음, 내가 옳다는 믿음, 젊은이는 가르침의 대상 등이란 생각 때문에 꼰대라는 은어가 생겨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꼰대는 되지 않는 게 좋겠지만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레 꼰대로 비춰지는 건 세월 탓이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완전히 젊은 세대에 동화될 수는 없겠지만 말끝마다 `요즘 애들이란` 하는 추임새를 넣는 횟수를 줄이는 노력만으로도 꼰대 되는 속도를 어느 정도는 늦출 수 있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7-10

그때그때 나누기

누구나 혼자일 수는 없다. 직간접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산다. 나무 한 그루가 물과 햇빛과 공기를 만나 성장하듯이 우리 개별자도 다른 사람들이란 여러 환경과 만나는 가운데 인격적 성숙을 도모한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타인이 곧 지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이고 보석이다. 꽃으로 때릴 수 없고, 보석으로 물수제비를 뜰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친구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나이에도 환경에도 취향에도 있지 않다. 맘 편히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모든 관계는 친구로 불려도 마땅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식탁 예절을 의식해야 하거나, 밥상 앞에서 뭔가 부자연스런 느낌이 오가는 사이라면 아무리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도 친구라 하기엔 껄끄럽다.산해진미 가득한 밥상보다도 소박한 콩국수 한 그릇을 앞에 둔 사이가 훨씬 맘 편한 이유가 여기 있다. 밥상의 질이 친구 관계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 편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이미 좋은 양식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함께 하는 음식이 소박한 만큼 함께 나누는 얘기 또한 그러하다. 클라이맥스 없는 일상 드라마 속에 눈물이 있고, 지혜가 있고, 공감이 있다.나누면 나눌수록 끝이 없는 게 친구들과의 수다 속성이기도 하다. 어둠에 잠긴 무덤 같이 맘이 무거운 날이나 바람 빠진 공처럼 속이 허한 날에는 내남할 것 없이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하자. 짜인 틀이 필요치 않는 사람끼리 크게 웃고 실컷 떠들든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웃고 떠드는 가운데도 배울 게 있다. 헤어질 때쯤이면 다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든`생활 속 지혜` 하나쯤을 덤으로 얻는 건 친구들과의 수다 매력이기도 하다.가령 오늘처럼 가스레인지나 그 주변 벽은 그때그때 훔치는 게 진리라는 것을 새삼 깨치게 되는 건 어떤가. 하루 일분만 투자하면 평생 깨끗한 가스레인지를 곁에 둘 수 있다. 매사가 그렇다. 친구인들 예외일까. 내 받은 것 이상으로 그때그때 조금만 신경 쓰면 될 것을 편하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미뤄둔 것은 아닌지. 가장 쉬운 게 가장 실천하기 어렵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9

성찰이 필요한 이유

악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악은 특별하지 않다. 악은 평범하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언이다. 아렌트 여사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쉽게 읽힐 거란 내 예상은 빗나갔다.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방청기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단순한 기고문이 아니었다. 철학자의 글답게 시종일관 심오한 문투다. 호기심이나 흥미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다 보니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몰입이 잘 되면서도 금세 읽지 못하는 것은 공감이 가는 장면마다 생각이 가지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 상황, 그 환경에서 아이히만과 다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삼라만상의 그 무엇을 내 눈의 잣대로 규정짓고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내 안의 선이 그리 특별하지 않듯, 내 안의 악 또한 그러하거늘 왜 우리는 유독 타인의 악행에만 그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이 책이 그토록 회자되는 건 단연 부제 때문이다. 대놓고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고 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란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인간 보편성의 기저에는 악의 평범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보통의 악, 평상의 악이라니 섬뜩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절대의 선, 객관의 선을 행사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재판을 방청한 그녀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직책과 명령에 충실했을 뿐, 어디에도 광적 학살에 집착하는 악의에 찬 기질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무능성` 때문이었다고 아렌트는 짚어낸다. 판단의 무능성은 사고와 성찰이 부족할 때 생겨난다. 악의 평범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지속을 경계할 수 있는 올바른 사고 체계의 확립이 문제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선명해진다. 악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철학적 사유의 반성으로 이끌게 하는 힘, 그것이 한나 아렌트의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8

하틀리의 바이올린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개봉한지 이십여 년이 되어가는 영화 `타이타닉`을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선율이다. 어릴 적 예배당 다닐 때의 그 가락은 낭만적 정서를 떠올리게 하지만 타이타닉에서의 그 현악 4중주 장면은 비감한 숭고함을 경험케 한다. 영화 속에서 연주자들은 약속된 피날레 곡을 신호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즉 탈출 대열에 끼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원들과 작별인사를 하자마자 바이올린 주자이자 리더인 월레스 하틀리는 다시 바이올린을 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익숙한 선율.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것도 잠시, 나머지 연주자 셋도 돌아와 그 애잔한 멜로디 `내 주를 가까이` 연주에 동참한다. 위기에 직면해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의 안타까운 장면을 배경으로, 담대하고도 처연하게 사명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최고의 영화 장면으로 손색이 없다. 내남할 것 없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의 안정을 전하기 위한 그들의 이타심은 거룩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그들의 자발적 희생은 실제 상황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4중주 멤버로 나오지만 실제는 8인의 악사들이었다. 하틀리는 70여 차례나 항해 경험이 있는 여객선 악사였다. 그의 시신이 십여 일만에 발견되었을 때 그의 허리에는 가죽 가방에 담긴 바이올린이 묶여 있었다. 약혼자가 선물했다는 그의 바이올린은 지난해 영국의 한 경매에서 우리 돈 15억원에 낙찰되었다. 타이타닉 관련 단품으로는 최고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비싼 낙찰가에 놀랐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가끔씩, 살았을 때의 제 삶을 재상영하는 프로그램이 다음 생애 시작 전에 반드시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곤 한다. 의식하지 못했던 내 실수와 내 약점은 하느님도 너그러이 봐주시겠지만, 의도한 내 악덕과 내 졸렬함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월레스 하틀리의 먼발치에서 당신의 바이올린이야말로 숭고한 것이라고 눈빛이라도 건네 보려면 얼마나 선한 것들을 새겨야 할 것인가. 장맛 빛 하늘만큼이나 맘이 무거워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7

독도에 살다

책 제목을 칼럼 제목으로 삼기는 처음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만큼 이 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싶었다. 독도에 관한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독도 기자`로 알려진 전충진 작가의 신작 `독도에 살다`가 나왔다. 신문사 소속 독도 체류 기자로 활동했던 작가는 이전에도 독도 관련 책을 냈었다.`여기는 독도`라는 책인데 그 책이 정사(正史)였다면 이번 `독도에 살다`는 야사(野史)에 가깝다. 두 책 모두 작가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문장이 쉽고 간결해 부담 없이 읽힌다. 시도 때도 없이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일본의 최종 목적은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를 제소하는 것이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전략의 한 방편으로 독도가 언급될 때마다 우리 국민 정서는 상처를 입는다. 아니 상처를 넘어 분노가 끓는다. 작가는 마냥 흥분하다 이내 사그라지는 우리의 태도에 경종이라도 울리듯 시종일관 깊은 성찰로 독도를 바라본다.작가는 앞뒤 재지 않고 독도살이를 자청한다. 누가 뭐래도 독도가 우리 땅이며, 우리 삶이 이어지는 공간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보다 진실하고 실천적인 방법이 어디 있으랴. 독도는 결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낭만적 정서에나 어울리는 외로운 섬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일상이 이어지고 역사가 진행되는 우리 호흡이 살아있는 터전이다.일 년여 간을 독도에 상주하면서 작가는 그곳의 자연과 사람, 역사에 대해 담담하게 기록한다. 애정과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펄떡이는 물고기 떼, 섬 주변을 맴도는 새떼, 바위틈에서 흔들리는 잡풀 하나에도 우리의 숨결이 흐르고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서도 어민숙소와 동도 등대를 번갈아 오가며 독도 깊이 알기에 도전한 작가의 실천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긴 인생에 비추어 일 년이란 시간은 짧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노고는 결코 하찮은 게 아니다. 독도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열정을 다한 작가의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4

번아웃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탈진증후군이나 연소증후군을 뜻하는 신조어다. 의학적인 병명으로 알려진 건 아니지만, 현대 심리학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이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에너지 고갈로 탈진하는 상태가 된다. 신체적ㆍ정신적 극도의 피로감은 사람의 기를 소진시키고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제 아무리 의지가 굳고 심지가 단단해도 살다 보면 한계점은 온다. 오래된 친구처럼, 연민 서린 친척처럼 잊을 만하면 무기력과 자기연민이란 감정은 찾아온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한 일에 몰두하는가?` 이런 근원적인 생각에 빠져들면 심할 경우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아침에 눈 뜰 때 자신이 근사하다는 마음이 드는가, 기억력이 옛날 같지 않은가, 그냥 넘길 수 있던 일들에 짜증이 나거나 화가 돋는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가, 무미건조하고 삶의 행복이 멀게만 느껴지는가. 이 중 3개 이상 해당하면 번아웃 증후군을 의심할 만하단다. 겉으로는 잘 견뎌 보이는데 알고 보면 탈진증후군을 앓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현실적이고 정이 많은 이들일수록 속은 문드러지고 아린 경우도 있다. 현실에 발을 둔 만큼 이상 또한 높아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일에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면 몸과 마음은 많이 지친다. 그 정점에서 불길은 타오르고 연료는 금세 바닥이 난다. 그때부터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하더라도 제 완벽한 에너지를 쏟을 수가 없다. 소위 말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불타버린 연료는 몸과 마음의 예민함이란 후유증을 남긴다. 헐겁고 피폐해진 영혼에 수시로 연료를 보충해야 한다. 자가 점검 식 연료 보충이 가장 좋겠지만, 눈치가 빠른 친구라면 주변 점검자로 나서도 좋을 일이다. 열정을 지나치게 쏟아 붓거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하는 당신이라면 지금 당장 한 박자 늦출 타이밍이다. 정점의 시간은 필연의 번아웃이란 전야를 예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호흡 쉬어간들 될 게 안 되는 건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3

전압 높은 글

작가 김훈은 `전압이 높은 문장이 좋다`라고 어떤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압이 높으면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도 강하렷다. 우선 높은 전압을 얻으려면 많이 축적해야 한다. 축적하려면 버려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원하는 만큼의 전압이 생길 수가 없다. 버리는 만큼 내공이 쌓이고, 버리는 과정에서 높은 전압이 발생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 소설로 읽히는 게 아니라 예의 전압이 높은 문장들로 직조된 한 편의 에세이 같다. `난중일기` 문체와 그의 문체는 닮았다. 많이 축적하기 위해 과감히 버리는 그 담백한 단단함. 이를 테면 이순신은 “각 고을의 색리 열한 명을 처벌하다. 군사 결원이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양 속여 허위 보고를 하다. 그래서 오늘은 그들을 사형에 처해 목을 높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일기에 쓴다. 이런 문체는 김훈에게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군더더기를 버림으로써 전압이 높아지는 문장. 문장과 문장 그 한 호흡 사이에 수다를 떨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수다가 많아지고 호흡이 길어질수록 문장의 밀도는 낮아진다. 즉, 전압이 낮아진다. 하고픈 말을 삼킨 그 자리엔 깊은 우물 하나 생긴다. 물길은 깊고, 그 깊은 곳의 끝자락은 드넓기 한량없다.원고지에 연필로 또박또박 쓴다는 그는 몸으로 쓰는 사람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느낌이 없으면 전혀 쓰질 못한다고 고백한다. 따지고 보면 글의 팔할은 몸이 쓴다. 거의 전부의 몸이 쓰고, 나머지 약간의 마음이 다듬는다. 몸으로 하는 글쓰기의 고통과 환희. 따라서 높은 전압의 글은 몸이 제대로 달아올랐을 때 쓸 수 있다. 마음에 아무리 전율이 와도 몸의 전압이 받쳐주지 않으면 글은 글이 되지 못한다. 헛구호로 그치고 만다.정직하게 몸부터 안달하는 자의 글은 밀도가 높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언어에 성김이 없다. 수다가 들어찰 틈이 없다. 이순신의 일기가 그렇고, 김훈의 서사가 그렇다. 마음보다 몸이 앞서 쓴, 전압 높은 글에 독자는 감전되어도 좋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2

자비라는 명상

싫음의 감정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사랑의 감정은 막연하게 나타난다. 싫음의 감정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어떤 한 남자가 싫을 이유는 백 가지가 넘는다. 약속 시간을 칼 같이 지켜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옷차림새를 하는 것도 싫고, 유머랍시고 하는 말들이 어쩐지 유치해보여서 싫고, 심지어 내세울 게 없어 보이는데도 당당하게 보이는 모습조차 싫다. 이외에도 죄 없는 그를 싫어할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다. 반대로 한 남자를 좋아할 이유는 선뜻 대기 어렵다. 하자 많을지도 모를 그 남자를 왜 좋아하냐고 누군가 물으면 답은 오직 한 가지, 무조건이다. 객관적인 눈들이 후자의 남자보다 전자의 남자가 훨씬 괜찮다고 충고한다 한들 그것은 남자를 보는 판단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 감정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그 감정이란 게 객관성과는 무관하다는 거다.석가모니가 한 무리의 스님들에게 조용히 수행할 숲을 추천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명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무 정령들이 저들 거처에 스님들이 쳐들어온 것을 보고 격노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자비심`이라는 명상법을 가르쳐서 스님들을 다시 숲으로 보냈다. “이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유일한 보호책이니라.”라는 말과 더불어. 웬일인지 나무 정령들의 해코지가 멈췄다. 심술쟁이 정령들도 법복 입은 스님들이 뿜는 자비심이라는 파동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마음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의심,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은 내 맘에서 출발한다. 너그러움과 관대함에 대한 훈련으로 그 맘을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 있다. 나무의 정령으로 상징되는 인간사를 다독이는 것은 너그러움의 힘이기 때문이다. 자비라는 연민은 타자를 향할 때 그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내 안으로 환원되는 감정이다. 스스로를 위한 궁극의 훈련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맘속 우물 하나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1

점진적 성숙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과 달리, 나는 태생적인 겁쟁이다. 낯선 일을 싫어하고, 노상 허둥대고, 곧잘 상처받고, 넌더리나게 망설인다. 혼자 욱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사소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졸렬하게 군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공감이 간다. 누구나 겁쟁이고 누구나 졸렬하다. 작가의 말처럼 필요에 의해 우리는 자제심을 발휘할 뿐이다. 사람의 성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작가는 `완강한 항상성`이라고 표현했다. 변하지 않으려는 본성적 자아와 변화를 원하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 자아의 끊임없는 충돌, 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인간의 특징이다.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는 기본적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말처럼 사람의 성질이라는 게 언제까지나 완강한 항상성을 유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사회적 요청이나 보편적 정서가 개별자에게 입력되면 그 완강함이란 벽은 허물어지기도 한다. 이 글 처음에 인용한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도 그러한 면과 일맥상통한다.혼자 살 수 없는 사람에게는 두 자아가 있다. 내 식의 자아와 사회가 원하는 그 자아는 끊임없이 충돌한다. 이 때 자유인은 내 안의 자아와 사회가 원하는 자아가 충돌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진정한 자유인은 그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 둘의 충돌에서 내 안의 자아를 고집스레 승리의 방향으로 이끄는 자들이다. 개별적 이기주의자라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그 둘의 충돌에서 사회가 원하는 자아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평화주의자가 있다. 상황에 따라 누구나 자유주의자가 되거나 이기주의자를 거치거나 평화주의자를 자처하게 된다. 중요한 건 이 모든 패턴 속에 성숙이란 성찰이 함께 한다는 점이다.사람의 성정이 아무리 불변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점진적 성숙`의 절차를 밟는다. 완고한 특징을 지녔지만 점진적 변화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 그것이 사람 성정이 지닌 매력이 아닐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