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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멜무지로

언니는 자주 카톡 문자를 보내온다. 길고 지루한 출퇴근 지하철 안, 책을 읽다 발견한 의문 사항들을 보내온다. 안부를 대신하는 질문형 문자의 대부분은 순우리말에 관한 거다. `곁섬 털다` 가 뭐야? `듬쑥하니`는? `타울거리다`는 또 무슨 뜻이야? 나는 즉각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내 어휘 깜냥으론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스마트폰 검색으로 답을 보낸다. 언니가 질문을 해오는 것은 답이 궁해서가 아니다. 문학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는 언니 나름의 배려이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바쁘거나 귀찮을 땐 `검색의 생활화도 모르나. 언니가 그냥 찾아 봐`라며 퉁을 내기도 한다. 오늘도 예의 질문형 문자가 왔다. `에멜무지로`가 뭐야? 나로선 처음 보는 말이다. 스페인어 쯤 되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순우리말이다. `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이나 `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을 일컫는단다. `거리가 가까우니 그냥 에멜무지로 안고 가라`라거나 `에멜무지로 한 일이 그렇게 잘될 줄은 몰랐다`라는 쓰임새로 활용할 수 있다.검색해서 알게 된 모범 답을 전송한다. 이어지는 언니 말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쓰던 말 중에 `이말무지로`가 있었단다. `이말무지로 논두렁에 심은 팥이 실하게 영글었다`라거나 `이말무지로 산 닭인데 달걀을 많이 낳더라`는 식의 화법을 엄마가 즐겨 썼다나. 검색해보니 `이말무지로`는 `에멜무지로`의 방언이다. `에멜무지로`만 표준어로 삼는다고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여기서 얻은 결론 하나. 보수적 언어 습관을 지닌 엄마 세대의 언어도 어김없이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 언어의 소멸과 생성 및 변화 속도는 생각이상으로 빠르다. `이말무지로`냐, `에멜무지로`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숱한 순우리말의 생명력 자체가 약해진다는 게 문제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고이 쓰이던 낱말들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안타까움. 에멜무지로 쓰던 우리말이 다시 피는 꽃처럼 살아나기를 바라는 건 역시 무리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9-18

참수와 IS

얕은 둔덕이 보이는 황량한 사막. 아래위로 오렌지색 복장을 한, 서방 출신의 인질이 카메라를 향해 최종 발언을 한다. 양팔은 묶이고 무릎은 꿇린 채다. 화면 오른쪽에는 번득이는 두 눈동자만 드러낸, 전신을 검은색 복장으로 휘감은 괴한이 서있다. 그는 흉기를 들었고, 인질은 곧장 참수될 것이다. 낯선 한자어 어감 때문에 그 흉포함이 덜 전해져서 그렇지 참수(斬首)가 무언가. `목을 베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극단주의 집단 명칭은`IS`(Islam State·이슬람국가)이다. IS의 만행은 쉬 멈출 것 같지 않다. 납치한 참수 대기자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온다. 서방 국가와 중동사회가 연합해 IS를 격퇴하자는 오바마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민간인 희생자 수는 늘어날 것이다. 근간의 세계정세에서 IS는 가장 강력한 질서 파괴 단체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알 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한 IS는 시리아 내전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그 잔혹성 때문에 알 카에다도 그들과 선을 그었다지만 세력을 키운 IS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도 없어 보인다. 소위 알 카에다는 지는 해, IS는 뜨는 해라 할 만큼 국제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으니. 알 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주 무대이고, IS는 시리아와 이라크 땅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게릴라성 테러 활동을 지향하는데다 중동쪽 요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 카에다에 비해, IS는 전문적인 군사조직으로 무장해있고 조직원도 범 세계를 아우른다. 세계 도처에서 몰려든 희망자 속에 한국인 출신도 있다는 외신 보도가 완전한 헛말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그 어떤 이유로도 테러나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참혹한 슬픔 앞에서도 역사적·정치적 입장을 동원해가며 그들 단체를 연민하는 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극악무도한 만행은 인간 존엄에 앞설 수 없다. 오렌지색 복장을 한 선량한 사람의 공포 서린 눈빛, 더 이상 화면에서 만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7

안개 자욱해도

“우리가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를 안개 밖으로, 발각되기 쉬운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계속 애를 쓴다.” 켄 킨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한 장면이다. 편한 수감 생활을 원하던 맥머피는 미치광이로 위장하는 바람에 정신 병원에 위탁된다.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권위와 억압의 상징인 수간호사를 상대로 그는 끊임없이 저항한다. 농아(聾啞) 행세를 하는 브롬든은 내레이터로서 그 둘의 갈등이 주축이 된 병동 생활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소심하거나 허세에 쩐 수용인들은 자신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콤바인으로 명명되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폭압에 길들여져 있었음을 맥머피가 벌이는 적극적 투쟁을 보면서 알아차린다. 교묘한 학대와 부당한 처우 속에 치유불능 상태가 되어가는 수용자들. 그들에게는 분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전기충격이나 전두엽 절제술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존엄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에게 맥머피는 쉼 없이 `깨쳐라, 일어나라`를 강조한다. 위기관리에 구멍이 생길 때 병원 측에서 쓰는 안전한 방법이 저 안개 요법이다. 흡입구를 통해 몽롱한 안개가 쏟아져 나오면 거칠고 흥분했던 환우들은 모호함 속으로 제 존재를 숨겼다. 저항할 수 없는 굴욕 앞에 숨을 수 있다는 위안만큼 효과적인 약도 없었다.그토록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애썼던 맥머피는 스스로 전기충격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맥머피 도발의 종착역은 패배였지만 그것이 소설의 패배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의 영향으로 브롬든이 탈출을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위엄은 그 어떤 억압과 폭력 보다 윗자리임을 브롬든이 알게 된 것은 맥머피의 통찰 덕이었다. 거대한 억압체인 뻐꾸기 둥지를 바꿀 수 없다면 그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밖에 없다. 소설 머리말에 나오는 인디언 동요처럼 안개 자욱해도 `한 마리는 동쪽으로,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나머지 한 마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그렇게 날아올라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6

먹은 밥은 시가 되고

볕 좋은 오후였고, 가까운 곳에서 갈바람이 불어왔다. 안절부절못할 만큼의 견딜 수 없는 풍요의 바람이라면 피우는 자만이 누리는 자가 될 터였다. 모의하지 않는 곳에 신화가 만들어질 리 없고, 저지르지 않는 곳에 전설이 피어날 리 없다. 가을의 전설과 바람의 신화를 꿈꾸는 지인들 몇몇 맘 내키는 대로 모였다. 하늘은 더없이 공활했고 그 아래 떠도는 구름 빛마저 가을을 예고했다. 마당 넓은 집 테이블에는 결실을 증명하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차려졌다. 배고픔을 가장한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 바쁜 손놀림으로 투덕투덕 익어가는 삼겹살을 뒤집거나 아귀아귀 서로의 입을 벌려 갓 싼 쌈을 먹여주곤 했다. 쑥부쟁이무침에 지나는 바람 한 점 얹어, 웃음보에 싸먹는 이 순간이 천국이라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들끼리의 눈길은 헤플수록 무죄였다. 한 잔의 차로 부른 배를 달랠 즈음에야 마당 앞의 길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이 눈에 들어왔다. 쪽물 들인 천을 말린다는 주인장의 심지 굳은 표정처럼 서있는 바지랑대, 툭툭 잘린 기억처럼 매달려 있는 빨래집게 위로 이른 별이 뜨고 있었다. 아쉬울 때 자리를 뜨기 좋은 시간이었다.주인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설거지거리만 잔뜩 남긴 채 헤어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안현미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 점심시간 //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갓 차려낸 따뜻한 밥상은 판타지이자 동화이고, 물리고 난 밥상은 삶이자 시이다. 발랄한 평화로 그 판타지를 누리는 것은 손님의 책무요, 무연한 뒷정리로 그 판타지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렷다! 판타지의 향연을 낸 자리에 시의 알곡이 남았으니, 객으로서 설거지를 하지 못한 미안함은 주인을 위한 사려 깊은 배려였다고 자위해도 될라나. 이 가을 설거지 못하고 떠난 자의 맞춤한 변명은 시인이 대신해준다. - 우리가 먹은 밥의 모든 흔적은 시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5

또 하나 별빛이

추석 연휴가 끝났다. 뿔뿔이 흩어지는 게 현대 가족의 숙명이라도 되는 걸까. 한 이틀 얼굴 마주한 식구들은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저마다의 터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나이 들수록 가족끼리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어른들이 매양 하시는 `너들도 내 나이 돼봐라, 부모 마음 알게 된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자식들은 빨리도 자란다. 어느 날 문득 눈 비비고 돌아앉으면 훌쩍 자란 자식은 그럴듯한 독립체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시시콜콜한 부모의 입김이 잔소리가 되고, 도리어 지들이 부모 걱정을 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자식이 성인으로 성장해갈수록 부모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 저 밑바닥부터 샘솟는다. 겪어보지 않으면 부모 마음을 모른다는 앞선 이들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이다.더 이상 부모 영역 안에 머물지 않게 된, 성장한 자식들을 보면서 맘이 다급해진다. 각자의 자리가 있으니 가족이라 해서 맘먹은 대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여건이 될 때마다 많은 추억거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맘 한쪽을 지배하게 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러 웃을 거리를 만들고, 색다른 경험을 하며, 공유할 관심거리를 찾아 나선다.명절의 가장 긍정적인 해석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합법적으로 배려 받는 것` 쯤이 될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어찌 빛나기만 하는 별이겠는가. 박형준의 시처럼 `통증`과 `상처`의 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포용되고 기어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다음 명절을 기다리게 된다.“이 저녁에 또 하나 별빛이 통증처럼 뻗어나온다 / 나는 말하지 않으련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 / 굴뚝에 오르는 연기를 따라 가면 / 밥상처럼 차려져 있는 달 / 먼 집, 대답 없는 날들이 대문이 빼곰 열린 마당 / 서늘한 우물에 어지럽게 떠 있다” 식구들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박형준 시인의 `이 저녁에` 한 구절을 웅얼거려 보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2

기다리는 수고

사는 건 갈등과 결정의 연속이다. 사소하게는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크게는 직장에 사표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은 갈등과 결정의 순환과정이라 해도 별 무리가 없다. 온갖 갈등을 지속적이고 원만하게 해결해나가는 과정 그것이 곧 삶이다. 모든 갈등은 내면의 문제로 돌아온다. 혼자만의 심리적 고민이든, 표면적 사회 문제이든 갈등은 필연적으로 자신 고유의 결정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하던 일을 말아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저 사람을 계속 사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갈등은 하루아침에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 혼란스러운 내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만도 없다. 뭔가의 결론을 내기는 내어야 한다. 스스로와 합의한 그 결정이 쓴 열매가 아니라 `단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흔히 `홧김에` 라는 말을 쓰는데 심리적 갈등의 끝자락에서 홧김에 라는 말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섣부른 판단이 일을 그르치고 성급한 결정이 후회를 부른다. 내면에 갈등이 생기면 어떤 식이든 결정을 하는 게 옳다. 고민거리를 두고 언제까지나 미적거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중해야 한다. 한 번 내린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데다, 스스로 내린 그 결정이 옳았다고 자부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게 좋다. 잘못 선택한 결정 때문에 한 톨 먼지 같았던 영혼의 흠집이 폭우 속 거센 물살 같은 정신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단순명쾌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진득하니 기다리고 뻔뻔하게 견디는 것. 견딜만한 갈등은 다른 말로 하면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참고 견디면 뜻밖의 행운이 보상으로 따를 수도 있다. 누군가 말했다. 행운을 부르는 진짜 주인공은 `기다림`그 자체라고. 행운을 만나고 싶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뻔뻔하게 그것이 올 때를 기다리면 된다. 최선을 다한 뒤의 뻔뻔함으로 기다리는 행운은 무죄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1

새벽의 힘

시 읽기에 내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이렇다. 시를 다른 작문처럼 이해의 대상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이해하면서 느낄 수 있는 시는 좋아하면서도, 내 깜냥으로 요령부득인 시는 좀처럼 가까이 하기 힘들었다. 취향에 맞는 시를 만나면 온몸이 조여드는 쾌감을 맛보곤 한다. 물론 내 식 이해가 전제되었을 때만 그런 느낌이 온다. 시도 문장으로 이해하려는 내 편협한 눈이 그런 감상법을 낳았다. 하지만 시는 글이기 전에 감각이다. 느낌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때 더한 전율을 맛볼 수 있다. 이를 테면 더 이상 잠들지 못한 새벽녘 신형철의 평론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감각은 야생동물이다. 길들이는 순간 죽는다.…. 감각은 세계를 염탐하고 자연의 암호를 번역하는 재현의 에이전트가 아니다. 감각의 본능은 배반이다. 감각은 이중 스파이다. …. 감각이 끝까지 달려 나갈 때 그것은 자신을 잊고 사유가 된다.” 감각이 뻗치면 끝내 자신을 잊은 `사유`가 된다니! 막연히 감각이 글을 쓰고, 감각이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돌멩이 같은 이성의 한 구석을 빌려 감각을 감각 그대로 두지 못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어리석음을 짓곤 했다. 내 이해의 바운더리에 들어오지 않는 그 어떤 감각적인 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감각은 정돈될 필요가 없고, 사유에는 예고가 없다. 전달되지 않더라도 시요, 말이 되지 않더라도 시다. 이해와 느낌이 동시에 오는 것도 좋은 시지만, 이해를 놓아버린 그 자리에 감각만이 들어차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그걸 모른 채 어쭙잖은 해석의 끈으로 시를 묶으려니 시 읽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감각으로 합주되는 희귀한 언어들의 향연, 이것 역시 시의 일부임을 알겠다. 감각의 컬트를 보여주는 시들은 신형철의 말대로 매끄럽지 않고 명징하지 않으며 순수하지 않다. 시는 작문이 아니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이제 랭보나 보들레르의 날뛰는 언어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까지 하게 생겼다. 이 모든 게 새벽의 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5

연민도 지나치면

정직하기는 쉬워도 편견을 버리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축적된 지식이나 충분한 경험을 쌓기 전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교육자 집안 출신이라니 믿을 만한 인품을 지녔을 거야, 동남아 노동자니 가난하고 지저분할 거야, 시각장애인이니 무조건 도와야 해` 이런 일상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잘못된 예측을 했지만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에 기초하여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보지 않아도 좋단다.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 같아 맘이 한결 편해진다. 단순한 편견을 넘어 `골통` 이 되는 경우도 있다. 뒷받침이 되는 근거나 정보 앞에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제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은 가치 기준점이 오직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상황이나 대상을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모든 걸 제 기준에서만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한다. 편견이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편견이 무서운 건 여차하면 그것이 `집단의 결속`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귀속 본능이 있는 인간은 제 안정을 꾀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대립 구도를 만든다. 잘 알지 못하고 친근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완전한 감정은 집단적 편견으로 확대되고, 무죄한 대상들은 방패 없이 그 편견의 칼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시각장애인 문예 교실 종강을 했다. 개인적인 보람은 조금이나마 가졌던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점이다. 그들에 대한 내 무지는 `무조건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여나 상처 받을까 조심스레 접근했고, 그러다 보니 의도한 만큼 진솔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이 인다. 그들 말처럼 그들도 혼자 밥 떠먹을 수 있고, 지팡이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연민도 지나치면 자만이고, 배려도 앞서면 편견이 된다. 이런 생각들이 집단적 편견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 사실을 깨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4

혁신이라는 말

“보수는 혁신합니다.” 여당 회의실 배경 현수막에 적힌 글귀가 뉴스 화면에 잡힌다. 곱씹자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문학 용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보여주자는 것일까. 말뜻만 살펴도 보수는 혁신의 대상은 될지언정 혁신의 주체는 될 수 없다. 즉, 보수를 혁신할 수는 있어도 보수가 혁신을 할 수는 없다. 보수의 사전적 풀이는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이고, 혁신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다. 한 마디로 전자는 지키려 하는 것이고, 후자는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가급적 지키려는` 성질의 것이 어떻게 `완전히 바꾸려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혁신(革新)은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껍질을 벗겨 무두질하여 쓸모 있는 가죽이 되게 새롭게 만드는 일이 혁신이다. 피부를 벗겨낸 상태인 피(皮)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완전히 다른 제품인 혁(革)이 되려면 거기에다 여러 까다롭고 힘든 공정을 보태야 한다. 단순한 물리적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위적 제품이 되려면 피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지나, 가죽이 문드러지고 펴지기를 수십 차례 해야 한다. 극한의 고통 뒤에야 `혁신`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키려는 보수는 새로워지려는 혁신과 궁합이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다. 보수의 태생적 운명이 혁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혁신의 옷걸이에다 일말의 `개선`이라는 옷이라도 걸어보려는 시도, 혹 그것을 두고 `혁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나쁜 것을 고쳐서 좋아지는` 개선과 혁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수의 말뜻에는 미묘하나마 변화를 수용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니 개선이라는 말과는 얼추 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변화를 뜻하는 혁신은 보수라는 말과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날마다 `혁신`을 부르짖는 그들 앞에서 국민은 `개선`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치계의 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심각한 인플레 놀이 중이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3

청양고추

늦은 여름휴가를 간다. 안면도를 가는 중인데 경유 도시 중에 청양이 나온다. 유독 붉은 고추 홍보물이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마침 청양고추 및 구기자 축제 기간이라 그 열기가 피부로 와닿는다. 청양도 영양이나 청송만큼 고추 특산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모양이다. `청양고추`없는 우리식 밥상을 상상하면 싱겁기 그지없다. 흔히 `땡초`로 불리는 청양고추가 시중에 나온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유래 논쟁이 자못 흥미롭다. 1980년대 초반 모 종묘업체가 개발한 고추 품종 이름이 `청양`이다. 품종개발자인 유일웅 박사의 공식 인터뷰에 의하면 청양고추 품종은 제주산과 태국산 고추를 잡종 교배하여 개발했다.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에서 임상재배에 성공했는데, 현지 농가의 요청에 따라 청송의 청(靑),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고 품종 등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름에 걸맞게 청양군도 청양고추의 연고권을 주장한다. 1970년대 모 종묘업체가 청양농업기술센터에서 매운 고추 씨앗 여러 종을 받아갔다고 한다. 개발 과정에서 여러 품종이 섞였다 해도 매운 고추의 뿌리는 청양 지역이 틀림없다는 논리다. 청양군 유래설은 설득력이 다소 약하긴 하지만 지방자치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의 현명한 대처법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청양고추는 브랜드 명이지 산지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소비자로서는 원조 논쟁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고추가 그 세 지역에서만 나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최대 청양고추 재배지는 밀양이란다. 선의의 경쟁이 좋은 품질을 낳는 것이지 원조라는 후광이 품질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손으로 개발한 그 품종은 IMF 사태이후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 경영난으로 대부분의 종묘 회사들이 다국적 회사에 흡수되었다.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청양고추를 먹고 있는 것이다. 청양고추의 빼놓을 수 없는 진실은 몹시 매운 맛을 지녔다는 것과 매운 값만큼의 톡톡한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9-02

예술혼 끝에는

`천국의 문`이 서울에 왔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 걸작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청동 문짝 부조물이다.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인데 7m 높이에 6t 무게가 나간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경복궁내 고궁박물관에서 다른 작품들과 전시되고 있다. 피렌체에 가면 이 `천국의 문`과 `두오모 쿠폴라`(대성당 돔)만은 꼭 봐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작품이다. 피렌체의 산 조반니 광장에는 세 개의 중요 건물이 있다. 대성당, 세례당, 종탑이 그것이다. 그 중 세례당을 장식하는 세 문 중의 하나가 천국의 문이며, 대성당 두오모의 돔 지붕 형식이 쿠폴라이다.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이 각 10장의 판에 새겨진 `천국의 문`은 동시대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인정할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있고 싶다.`라고 그가 말한 것을 계기로 `천국의 문`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문으로 만들 부조상을 현상공모했을 때 기베르티 외에 응모한 주요 인물은 금 세공사였던 필리포 브루넬레스코였다. 두 시작품은 지금도 전해져 관광객들은 비교해 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코의 것은 조각의 느낌이 강하고 혁신적인데 비해, 기베르티 것은 회화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이 난다. 공모전의 최종 승자는 기베르티였는데, 실력이 나아서라기보다 기법상 좀 더 가벼워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기베르티는 천국의 문과 다른 한 쪽문을 완성하는데 거의 한 평생을 쏟아 부었다. 브루넬레스코도 패배자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공동제작을 권유한 관계자의 청을 마다하고 건축 공부를 했다. 고대 로마 유적 및 구조물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완성한 작품이 바로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이다.진정한 예술가에게 승자니 패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숭고한 예술혼 끝에는 완성된 작품과 무한한 감동이 있을 뿐이다. 두오모의 돔을 보러 당장 이탈리아까지는 갈 수 없고, 천국의 문 숨결이라도 느끼게 고궁박물관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 천상의 아름다움 전은 11월 중순까지 계속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1

인간이란 굴레

작가 곁에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항상 많았지만 그들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이런 말로 대변되는 작가적 투망에 잡힐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의 저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근원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러 좋아하려고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 라고. 서머싯 몸은 인간 내장에 돋은, 까칠한 돌기까지도 잡아낼 정도로 통찰 깊은 작가이다. 인간 관찰에 대한 그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나쁜 짓하다 들킨 아이처럼 뜨끔해지곤 한다. 그가 작가로서 우뚝한 순간은 음악으로 치자면 감성 발린 발라드를 부를 때가 아니라 격정적인 몸짓까지 노래하는 락 음악을 보여줄 때이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린 `인간의 굴레에서`에서를 살핀다. 인간을 노래하는 그의 발성법은 뼛구멍에 난 터럭까지 감지하고 표현하는 것을 택한다.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심을 변론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당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다.”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내 욕망과 같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라는 것, 그것이 곧 자비라는 것, 저마다 추구하는 삶은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의 쾌락`이라는 것. 맨 살에 바른 파스가 뼛속을 관통할 때의 시원한 쾌감 같은 이 기분. 다만 그 통찰이 시원함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마디마디 서늘한 후통증을 동반한다는 것. 매운 맛을 두려워하면서도 매운 떡볶이를 찾는 소비자처럼 그의 문장들에 중독된다.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서머싯 몸은 친구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에두르지 않고 직설 화법을 구사하는 그가 미덥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토록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전우주적 이해의 접선을 시도하는 그의 말 안에서 우리는 따끔거리고, 찢어지며, 화끈거린다. 경멸하고 경원시하면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의 고통, 그것에 대해 그보다 더 잘 말하는 작가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9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어제오늘 검색어 상위에 오르내린다. 모 연극배우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 관련으로 단식 투쟁 중인 유족 김영오씨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다. “그냥 단식하다 죽어라. 그게 네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전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말을 자신의 SNS에 남겼다. 배려 없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 충격적 발언의 조회 수 만큼 사람들은 일제히 `프로파간다`라는 뜻을 검색을 한 모양이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선전, 홍보`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특정한 원칙이나 행위를 전파하기 위해 세우는 체계화된 계획이나 그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동`이라는 부정의 뉘앙스가 남아있는 말이 되어버렸다. 선전이라는 중립의 의미가, 새빨간 거짓말인 선동의 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였다. 연합국이 영미 대중들을 향해 이 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 본뜻은 사라지고 사악한 의미만 남았다.선전은 막강하고 대중은 어리석다. 아무리 현명한 민중도 보이지 않는 정부나 거대 손이 움직이는 선전 전략을 앞서기는 어렵다. 대중을 위한 선전에 잠식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일수록 드러나지 않은 선전 기획팀에 휘둘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적 코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전문 선동가들 앞에서 우리는 내남없이 우중(愚衆)이 되기 쉽다. 전형적인 선동적 프로파간다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하지만 프로파간다의 원래 뜻만 되살릴 수 있다면 그것의 효용도 나쁘지는 않다. `선동`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걷어낸 자리에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불러와 다채롭고 창의적인 화법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이나 홍보라는 말 자체가 어느 특정 집단, 특히 덜 가진 자보다는 더 가진 자,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의 논리와 맞물린다. “거짓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도 결국 힘이 전제되었을 때나 통용된다.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리는 약자에게는 선동의 입김을 느끼기 전에 연민의 입술이 먼저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8

완벽주의는 완벽하지 않아

조상들이 말했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고. 흔히 완벽주의자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뭐든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럴까. 그런 사람들은 끝내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잘 돼 가냐고 물으면 그들 대답은 한결같이 꼿꼿하다. 여전히 `완벽하게 준비하는 중`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는 일에 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위의 예는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이다. 절대 완벽주의자가 못 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위로한다. 실천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둘러대는 핑계가 바로 `완벽주의론`이다.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곧장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혹시 불어난 몸피가 살이 아니라 붓기일 수도 있으니 병원부터 가야할 핑계가 남았고, 쓰다 만 단편을 완결 짓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 문체가 원하는 만큼 완성도가 높지 못하니 될 때까지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준비해야할 이유가 기다리고 있다. 진실로 진실이 아닌 핑계를 갖다 붙인다. 게을러서 실행 못하는 것을 마치 완벽주의자여서 그런 것처럼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미흡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서두의 두 속담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아는 길은 곧장 가면 되고, 얕은 내는 가벼이 건너도 무관하다. 아는 길에 괜히 허비할 시간은 행동으로 옮기는 데 쓰고, 얕은 내를 건너는데 소비한 과도한 에너지는 심오한 창의력에 할당하면 된다. 이 세상에 완벽함은 없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미완이고 어설프지만 일단 시도하는 게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모든 완성은 불완전에서 출발한다. 완벽하게 준비한 사람이 끝낸 일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도한 사람이 끝낸 일이 더 많다. 완벽한 사람은 시작한 일 자체가 드무니 성공할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연함은 완벽에 이르는 가장 나쁜 포장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7

취향일 뿐

체리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체리가 드문드문 시장에 나오던 초창기에는 그것이 맛나다는 것조차 즐길 겨를이 없었다. 비싼 수입 과일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맛있다는 진심의 욕망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라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일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체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비싸기는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대중적 과일이 되어 있었다. 남유럽 여행에서 충격 먹은 것 중의 하나. 달리는 차창 밖으로 아름드리 체리나무 행렬이 이어졌다. 내게 로망이기만 했던 과일이 이토록 흔한 것이었다니! 제 철이라 그런지 값도 무척 쌌다. 체리 한 번 다시 실컷 먹어보기 위해 다시 여행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반면에 나는 토마토는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단맛에 길들여진데다 미감마저 약해 내 입맛에는 토마토가 영 밍밍하고 싱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찰토마토니 대추방울토마토니 등 온갖 세련된 맛의 품종이 쏟아져 나와도 내게 토마토는 다 같은 토마토일 뿐이다. 나를 뺀 나머지 식구들은 토마토를 좋아한다. 몸에 좋다니 자주 사서 갈아먹고 볶아먹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토마토에는 손길이 가질 않게 된다. 토마토나 식구들 입장에서는 토마토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할 수도 있겠다.체리든 토마토든 과일 자체의 본질이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체리는 체리 그대로, 토마토는 토마토 그대로 존재한다. 체리를 선호하거나 토마토를 우선하는 것은 선택자의 마음일 뿐이다. 내가 특정 과일을 선호한다고 해서 다른 과일의 본질이나 가치가 뒤로 밀리는 건 아니다. 그건 취향의 문제이지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체리는 체리대로 토마토는 토마토대로 존재 이유가 있다.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가 다를 뿐이지 그 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와 맛은 다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본질과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다. 개성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6

스스로부터 보듬기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아가씨를 만났다. 이십대 여성 특유의 새치름함과 쑥스러움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엘리베이터 안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동무가 될 정도로 털털하고 밝은 아가씨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마자 예의 환하고 씩씩한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데이트 하러 가나 봐요.`라고 화답을 했더니 그녀의 반응이 이랬다. “아니에요. 이 몸에, 이 얼굴에 누가 데이트 신청이나 하겠어요? 살 빼고 더 예뻐진 다음에 생각해 볼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녀 스스로를 비하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충분히 예뻤으며, 더 이상 뺄 살 같은 건 없었다. 참 밝고 유쾌한 아가씨다, 라고는 느꼈어도, 한 번도 그녀가 못생겼다거나 뚱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충격을 먹은 것은 그 아가씨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타자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다. 특히 자신만이 생각하는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타자는 나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타자는 내가 집착하는 나의 약점 같은 데 관심이 없다. 내 약점은 내 필터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지 타자에게 건너가면 시쳇말로 `의미 없다`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타자는 나만큼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다만 누군가의 비난 서린 한 마디가 평소 자신이 생각한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타인이 나를 `못생겼다`고 생각하거나 `뚱뚱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10퍼센트의 타자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타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오해이다. 타자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에 대해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그러니 부디 스스로부터 긍정하도록. 나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타자의 시선도 곡해하게 된다. 호의적인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껏 스스로를 옭아매고 불인정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스스로 버리는 사람부터 버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5

한 호흡, 반 박자

“핵심은 상대의 말에 말려들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발언이 이어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 정말로 무례하고 공격적인 말을 들었다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왜냐고? 침묵은 금일 뿐 아니라 잘못 인용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는 이처럼 매력적인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 여타 인간관계 관련 책보다 진솔하고 현실적이다. `웬만하면 참아라, 포용하면 언젠가 상대가 맘을 알아준다.` 류의 원론적 자기 수양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은 그런 소극적 방식을 넘어선 적극적 자기 표현법을 제시한다. 타자의 입장만을 우선하는 인간관계론은 반쪽짜리 가르침일 뿐이다. 자기 확신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일상의 철학을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그런 것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매사가 피로하며, 어쩐지 귀찮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부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다.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이 `저급하고도 진실한` 인간 심성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예상치 못한 일탈로 일반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 잘나가는 정치인일수록 허술한 수신제가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게도 된다.자기모순을 줄이고 자기 확신에 이르는 길목에서 필요한 것이 `한 호흡, 반 박자`의 원칙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위기가 닥치거나 흥분이 몰려오는 그 순간 한 호흡만 쉬고, 반 박자만 멈추면 된다. 침 한 번 삼키고 잠시 허공에 눈길 한 번 주면 될 것을, 찰나가 주는 침묵의 향연을 야무지게 새기면 될 것을. 그 리듬을 잃고 성급히 굴다가 자기모멸이란 자술서를 쓰게 된다. 회한과 후회와 번민의 모든 뒤안길에는 지키지 못한 한 호흡, 반 박자가 원죄처럼 남아 있다. 휘말리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을 가장 쉬운 전략은 한 호흡 가다듬고, 반 박자 멈추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실천이 어려운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8-22

잘 듣기

잘 말하기도 어렵지만 잘 듣기는 더 어렵다. `적당히 말하고 나머지는 잘 들어주기` 이런 소통 자세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다양한 개별자만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이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그에 따른 소통 방식도 달라진다. 일방통행으로 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묻어가는 자세로 듣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관심사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재미없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미없어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묻어가거나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남의 얘기를 듣는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말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결코 말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남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거기다 기왕이면 잘 들어주는 것 이런 소통법을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잘 말하는 것 못지않게 잘 들어주는 연습도 필요하다. 듣는다(listen)는 것은 영어에서 침묵하는(silent) 것과 같은 철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잘 듣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일, 그다지 어려울 것 없어 보이는데 범부로선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지.잘 듣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고, 대상은 너이다. 그 대상인 `너`는 당연히 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만 한다.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직면한 아픔과 의혹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비굴하고 비열하고 연약한 우리 영혼은 강자의 말을 듣는 것엔 잘 길들여져 있다. 반면에 약자에겐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학습 없이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한 활동이야말로 `잘 듣기`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큰 울림을 주는 행보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1

차이는 차별 아닌 구별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차이가 없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앞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코스트 전범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취재기인 이 책은 대중성과 흥미를 갖추었음에도 쉽게 읽히지 않는다. 당시 유럽이 처한 정치적 환경과 아렌트가 추구하는 철학적 배경에 대한 독자로서의 지식 부족 탓도 있고, 내용 및 용어 등에서 매끄럽지 못한 번역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밑줄 긋기 할 곳이 많은 건 전적으로 아렌트가 발하는 통찰 덕이다. 크고 작은 갈등의 바닥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함`이라는 인간의 기본 성질이 깔려 있다. 욕심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차이의 불인정에 기인한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처럼 인간에게 `차이`라는 게 없으면 `소통`도 필요치 않다. 같은 생각 같은 모습, 즉 모든 인간이 내외적으로 획일화 되어 있다면 갈등도 소통도 애초에 없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소통 이전에 모든 답이 똑같아 버리는 현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따라서 갈등하는 인간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소통이 문제이다. 잘 소통하려면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차이를 인정하려면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감각했던 아이히만의 가장 큰 문제는 `차이`에 대한 무지였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악한 게 아니라 그저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타자의 관점에 대한 학습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만큼 악의 평범함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차이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의미한다. 너와 나를 차별해도 좋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름을 구별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관점을 훈련하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악의 평범성에 감염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르침!/김살로메(소설가)

2014-08-20

교황이라는 말

프란치스코 교황이 출국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명동 성당 미사를 끝으로 4박5일 간의 방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시종일관 약자와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배려, 어린이와 상처 받은 이에 대한 사랑과 시선을 우선한 행보를 보이셨다. 순수와 위안과 평화를 전하고자 한 당신의 발걸음에 감동을 받은 이들도 많았고, 직간접으로 그 순간을 체험한 이들은 마음가짐을 다잡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낮고 비루한 일상을 보듬는 그 마음결을 되새기자니 문득 `교황`이라는 말 자체가 당신의 행보와는 걸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용어 같다. 일반인의 생각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교황이란 말이 오랫동안 쓰여 입에 붙어 간간이 쓰긴 하지만 일부러 황제의 이미지를 떼어버리는 자극을 주기 위해 교종이라는 단어를 고집스럽게 쓴다.” 교황방한 준비위원장인 강우일 주교도 이처럼 `교황`이라는 명칭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었다. 교황(敎皇)이라는 명칭에 담겨 있는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의도를 경계하는 마음이 느껴져 공감이 간다.교황이라는 말에서 황제, 임금이라는 뉘앙스가 떠올려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낮고 평범한 것을 지향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 가르침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교황(pope)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파스`(paps), `파파`(papa)에서 유래했다. 지역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부르던 말이 아시아에 번역되면서 교종, 교황으로 정착되었다. 일본에 교황으로 번역되어 온 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교과서에도 자연스레 교황이란 용어로 자리잡았다. 어색할 겨를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애초의 `pope`라는 말에는 `교황`이란 말이 풍기는 봉건적 군림의 의미가 있었을 리 없다. 교황이니 교종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사실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옛날 전제군주제 식의 무조건적 추앙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는 진심이 아니다. 그건 낮은 행보를 하시는 당신의 뜻에도 반하는 행동일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