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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군맹모상(群盲摸象)

인도의 경면왕이 신하들과 진리에 대해 토론을 하던 중이었다. 코끼리 한 마리를 몰고 오게 하더니 맹인 여섯 명을 궁으로 들였다. 각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했다.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 코끼리를 만져보았는가? 코끼리는 무엇과 닮았던고?” “코끼리는 무와 같습니다.” 상아를 만진 맹인이 먼저 말했다. “아닙니다. 코끼리는 돌과 같습니다.” 머리를 만져본 장님이 반박했다. “곡식을 까부는 키와 같습니다.” 이번엔 귀를 만진 맹인이 큰소리를 냈다. “절구통 같습니다.” 다리를 만진 장님이 맞받아쳤다. “들마루 같았습니다.” 등을 만진 맹인도 지지 않았다. 이어 배를 만진 맹인은 큰항아리 같다고 언성을 높였고, 꼬리를 만진 맹인은 굵은 동아줄 같았다고 우겼다. 여섯 명의 말을 끝까지 들은 왕이 말했다. “진리는 하나이다. 하지만 맹인마다 다르게 느끼고 자기 식대로 말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남의 의견을 수용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밝히는 일도 이와 같다.”불교 경전 `열반경`에 나오는`군맹모상` 대목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함을 비유하는 것으로`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란 속담과 연관이 있는 말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상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까. 만물의 영장인 똑똑한 인간은 그것이 내게 유리한지 불리한지를 우선 따진다. 내게 손해이고 내 억울함을 위무해주지 못한다면 아무리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라 해도 선뜻 발 벗고 나서지 못한다. 코끼리라는 하나의 진리는 너도 알고 나도 안다. 하지만 여섯 맹인이 느낀 그 실체에 대한 감도는 다 다르다.아는 만큼 본다고 했다. 아니 아는 만큼만 보려고 하는 게 사람이다. 공무원 연금 개혁을 둘러 싼 각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개혁 자체에 대한 국민적 공감은 얻었으되, 구체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좀처럼 합의점을 이루기 힘들다. 경면왕이 아무리 진실은 하나라고 외쳐도 다 같이 맹인인 우리는 매양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을 연출할 것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5

실패하더라도 시도하기

완벽한 계획을 세운 뒤 실행하는 게 나을까, 이것저것 재지 않고 일단 실행하는 게 나을까. 살면서 해결해야 할 여러 일들과 직면한다. 그때마다 우리는 개인의 성정이나 취향에 따라 그 일에 다르게 대처한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충분히 계획을 한 뒤에 뛰어들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서 달려들든다. 꼭 맞는 답은 없지만, 그래도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후자를 택하겠다. 애초에 완벽한 계획은 있을 수 없다. 모든 계획은 불완전을 전제로 한다.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변수가 생길 수도 있고, 그에 따라 계획은 얼마든지 변경하게 된다. 대개 소심하거나 여린 영혼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안에 대해 실천하기를 저어한다. 웬만해선 전면에 잘 나서지도 않는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주변의 눈길, 자기 불신 등이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진짜 이유인데, 완벽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여건이 좋아질 때까지 실천을 잠시 미룬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완벽할수록 완벽주의자와는 멀어진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영원히 완벽에 가닿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완벽한 계획주의자보다는 어설픈 실천주의자가 좋은 열매를 딸 확률도 높다. 대추 열매를 따려면 일단 가지에 손을 뻗어야지, 열매 따는 계획만 잔뜩 세워서는 곤란하다. 세상일은 언제나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실패가 두렵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망설인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 계획만을 세울 순 없다. 완벽하지 않아도 시도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미덥다. 도전하는 패기가 물러서는 신중함보다는 보시기에 좋다. 자신감 충만한 허풍쟁이가 강박에 휩싸인 완벽주의자보다는 낫다.좋은 열매를 따려면 실력이 아니라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 유폐된 자괴의 다른 이름인 완벽주의보다는 드러난 자만의 선물인 자신감이 훨씬 건전할 수도 있다. 시도하지 않는 무결점보다는,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결점이 더 많은 결실을 낳는다. 두려움 없이 저지르기, 결실의 계절이 내게 던진 화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4

정직한 패배자

이 세상엔 세 부류의 작가가 있다. 칼을 칼이라 부르고 꽃을 꽃이라 부르는 작가, 칼을 막대기로 보고 꽃을 천사로 보는 작가, 칼을 총으로 느끼고 꽃을 칼로 느끼는 작가. 독자로서 셋 다 괜찮지만 때론 세 번째 방식의 작가에게서 큰 울림을 받을 때가 있다. 이를테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같은 소설을 펼칠 때는 작가 편에 동조해 저도 모르게 묘한 긴장감이 서리곤 한다. 날 것의 인간 심리를 드러내는 작가는 흔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솔직하게 도마 위에 올리는 작가는 드물다. 인간의 솔직함이란 얼마나 이기적이던가. 타인을 객관화시켜 솔직하기란 쉽지만 스스로를 객관화하여 밝히기란 얼마나 어렵던가. 더구나 그 솔직함이 자기경멸이나 비열함 같은 거라면 누군들 자신에 대해 쉽게 솔직할 수 있을까.인간은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위선 떨기를 밥 먹듯 한다.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 자아를 지녔다고 고백하는 주인공 요조. 그는 인간에 대한 끔찍한 공포를 일찍이 경험했다. 사소한 예를 들면 정당 연설회에 참석한 이웃들은 돌아오는 길에 모두 그 연설이 형편없었다고 깎아내리기 바쁘다. 하지만 연사로 참석했던 아버지가 `연설이 어땠냐`고 객실에 사람들을 초대해 물었을 때 하나 같이 `오늘 밤 연설회는 대성공이었다고`천연덕스럽게 말한다.어린 요조는 그 모습을 보고 서로 속이면서도 전혀 상처 입지 않고, 어쩌면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산뜻하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 존재에 서려있음을 알게 된다. 신용이라는 껍질을 닫고 있는 인간. 이런 것에 대한 공포가 요조로 하여금 인간실격으로 떨어지게 했을 수도 있다.정직한 패배자, 솔직한 고백자로서 요조는 자신 또한 얼마나 나약하며, 얼마나 타인만큼 위선 덩어리인지를 낱낱이 고백한다. 요조에게 인간은 난해한 그 무엇이다. 그런 인간을 이해하는 소설 마지막 한 구절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23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백가흠 소설가의 모 신문 오늘 자 칼럼 한 구절. 소설가는 문단 대선배 황석영 작가를 만나 하룻밤을 지냈다. 새벽녘 자리에서 일어서며 후배 작가 어깨를 툭 치며 건넨 대작가의 말은 이랬다. “작가로 살려면 어떻게든 써야만 해. 작가로 사는 시간이 흐르면 쓰는 것도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 같지만 전혀 아니야. 잔머리 굴려 봐도 소용없어. 다른 방법도 없고.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천하의 잘난 작가 누구라도 앉아서 엉덩이로 쓰는 거야.”애오라지 작가로 살아온 이에게도 특별한 `쓰는 재주` 같은 건 없다. 천하의 작가도 앉아서 엉덩이로 쓴다. 모든 알려진 작가는 끈질기고 성실하다. 하기야 `끈질기고 성실하다`는 말은 잘 나가는 작가들에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하다못해 SNS나 블러그에 지속적으로 제 일상을 올리는 것도 재바르고 부지런해야 가능하다. 부담없는 일상적인 일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서 글쓰기라는 일생일대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건 착각일 뿐이다.황석영 작가의 저 몇 마디 말에 글 쓰는 자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모두 들어 있다. 우리는 오해한다. 잘 쓰는 작가 대부분은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났을 거라는 것과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글을 술술 생산해낼 것이라고. 절대 그렇지 않다. 쓰는 데서는 이등 가라면 서러워할 작가에게도 잔머리는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이 지난다고 절로 글이 나아지지도 않는다.글 쓰는 방법? 그런 건 없다. 그냥 쓰는 거다. 황석영 작가의 저 명쾌한 충고를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잘 쓸 수 있다. 언제나 실천이 문제일 뿐. 작가의 말대로 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 또 위에서 아래로 내려 쓰고, 그 누구라도 앉아서 엉덩이로 쓴다.우선 쓰려면 스스로를 유폐시켜야 하고, 그 갇힘 안에서 제 부지런함을 채찍질해야 한다. 고독의 성안에 갇힌 공주, 지옥의 감옥에 갇힌 죄수 그것부터 되지 못한 중생 하나, 새벽마다 의자에 앉긴 잘한다. 다만 늘어나는 엉덩이 치수에만 설워하니 글은 언제 될꼬./김살로메(소설가)

2014-09-22

이기는 토끼

“이 세계는 힘센 자들의 것이에요. (….) 토끼는 자연법칙이 정해준 제 역할을 받아들이고 늑대를 강한 자로 인정합니다. 자신을 지키려 교활해지고, 수세에 몰리면 도망갑니다. 늑대와 싸우려 대드는 일이 없지요. 그게 현명한 걸까요? 그럴까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주인공 맥머피가 정신병동에 갇힌 동료들을 향해 깨어 있으라고 각성시키는 대목 중의 한 부분이다. 힘 있는 늑대 한두 마리가 약한 천 마리의 토끼 무리를 조종한다. 그게 세상이다. 실체는 없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는 억압 조직체 `콤바인`. 그 행동대장인 늑대가 이끄는 고만고만한 토끼 조직원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불합리와 불의가 횡횡하고, 정직과 정의가 실종된 세계가 펼쳐져도 `토끼`로서 늑대에게 할 수 있는 무난한 처세는 순종일 뿐이다. 적극적 저항을 하지 않는 이유? 힘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절실하지도 않고, 이대로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가 나타나 저 무소불위의 늑대를 응징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호기롭게 나타난 토끼는 애석하게도 희생양의 수순을 밟기 마련이다. 절대 질서에 반항하다 결국은 뇌전두엽을 절제 당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맥머피처럼.대개의 우리는 불의를 보면 꾹 참는다. 승산 없는 명백한 싸움에서 보통의 토끼가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서 저항하다 끝내 파국을 맞는 그들은 진 게임을 한 것일까? 불합리나 불의에 항거한 그들이 남긴 꿀 덕에 우리는 이나마 달게 산다. 인류 전체로 보아 그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니 이긴 게임이 아닐까.여전히 크든 작든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용감한 토끼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보고 `나댄다`며 주제넘은 훈수를 둘 수는 없다. 체면 깎아가며 나댄 그들이 피운 꽃술에, 입술 디밀어 꿀물 빨아먹는 것은 비겁한 우리가 아니었던가. 깡충깡충 지금도 분주히 뛰어다닐 그들 토끼에게 필요한 것은 훈수가 아니라 응원이다. 나대다 죽은 맥머피 덕에 별생각 없던 브롬든이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9

에멜무지로

언니는 자주 카톡 문자를 보내온다. 길고 지루한 출퇴근 지하철 안, 책을 읽다 발견한 의문 사항들을 보내온다. 안부를 대신하는 질문형 문자의 대부분은 순우리말에 관한 거다. `곁섬 털다` 가 뭐야? `듬쑥하니`는? `타울거리다`는 또 무슨 뜻이야? 나는 즉각 대답을 하지 못한다. 내 어휘 깜냥으론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스마트폰 검색으로 답을 보낸다. 언니가 질문을 해오는 것은 답이 궁해서가 아니다. 문학적 긴장감을 놓치지 말라는 언니 나름의 배려이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바쁘거나 귀찮을 땐 `검색의 생활화도 모르나. 언니가 그냥 찾아 봐`라며 퉁을 내기도 한다. 오늘도 예의 질문형 문자가 왔다. `에멜무지로`가 뭐야? 나로선 처음 보는 말이다. 스페인어 쯤 되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순우리말이다. `단단하게 묶지 아니한 모양`이나 `결과를 바라지 아니하고, 헛일하는 셈 치고 시험 삼아 하는 모양`을 일컫는단다. `거리가 가까우니 그냥 에멜무지로 안고 가라`라거나 `에멜무지로 한 일이 그렇게 잘될 줄은 몰랐다`라는 쓰임새로 활용할 수 있다.검색해서 알게 된 모범 답을 전송한다. 이어지는 언니 말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엄마가 자주 쓰던 말 중에 `이말무지로`가 있었단다. `이말무지로 논두렁에 심은 팥이 실하게 영글었다`라거나 `이말무지로 산 닭인데 달걀을 많이 낳더라`는 식의 화법을 엄마가 즐겨 썼다나. 검색해보니 `이말무지로`는 `에멜무지로`의 방언이다. `에멜무지로`만 표준어로 삼는다고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여기서 얻은 결론 하나. 보수적 언어 습관을 지닌 엄마 세대의 언어도 어김없이 사회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 언어의 소멸과 생성 및 변화 속도는 생각이상으로 빠르다. `이말무지로`냐, `에멜무지로`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숱한 순우리말의 생명력 자체가 약해진다는 게 문제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만 해도 고이 쓰이던 낱말들이 너무 쉽게 사라지는 안타까움. 에멜무지로 쓰던 우리말이 다시 피는 꽃처럼 살아나기를 바라는 건 역시 무리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9-18

참수와 IS

얕은 둔덕이 보이는 황량한 사막. 아래위로 오렌지색 복장을 한, 서방 출신의 인질이 카메라를 향해 최종 발언을 한다. 양팔은 묶이고 무릎은 꿇린 채다. 화면 오른쪽에는 번득이는 두 눈동자만 드러낸, 전신을 검은색 복장으로 휘감은 괴한이 서있다. 그는 흉기를 들었고, 인질은 곧장 참수될 것이다. 낯선 한자어 어감 때문에 그 흉포함이 덜 전해져서 그렇지 참수(斬首)가 무언가. `목을 베는 것`을 말하지 않던가. 저 극악무도한 방법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살해하는 극단주의 집단 명칭은`IS`(Islam State·이슬람국가)이다. IS의 만행은 쉬 멈출 것 같지 않다. 납치한 참수 대기자만도 수십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나온다. 서방 국가와 중동사회가 연합해 IS를 격퇴하자는 오바마의 목소리가 크면 클수록 민간인 희생자 수는 늘어날 것이다. 근간의 세계정세에서 IS는 가장 강력한 질서 파괴 단체 중의 하나로 떠올랐다.`알 카에다`의 이라크 지부로 출발한 IS는 시리아 내전을 통해 세력을 키웠다. 그 잔혹성 때문에 알 카에다도 그들과 선을 그었다지만 세력을 키운 IS 입장에서는 아쉬울 것도 없어 보인다. 소위 알 카에다는 지는 해, IS는 뜨는 해라 할 만큼 국제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으니. 알 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이 주 무대이고, IS는 시리아와 이라크 땅에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게릴라성 테러 활동을 지향하는데다 중동쪽 요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알 카에다에 비해, IS는 전문적인 군사조직으로 무장해있고 조직원도 범 세계를 아우른다. 세계 도처에서 몰려든 희망자 속에 한국인 출신도 있다는 외신 보도가 완전한 헛말이 아닐 수도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그 어떤 이유로도 테러나 학살은 정당화될 수 없다. 이 참혹한 슬픔 앞에서도 역사적·정치적 입장을 동원해가며 그들 단체를 연민하는 자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 극악무도한 만행은 인간 존엄에 앞설 수 없다. 오렌지색 복장을 한 선량한 사람의 공포 서린 눈빛, 더 이상 화면에서 만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7

안개 자욱해도

“우리가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리를 안개 밖으로, 발각되기 쉬운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계속 애를 쓴다.” 켄 킨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한 장면이다. 편한 수감 생활을 원하던 맥머피는 미치광이로 위장하는 바람에 정신 병원에 위탁된다.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권위와 억압의 상징인 수간호사를 상대로 그는 끊임없이 저항한다. 농아(聾啞) 행세를 하는 브롬든은 내레이터로서 그 둘의 갈등이 주축이 된 병동 생활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소심하거나 허세에 쩐 수용인들은 자신들이 억압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콤바인으로 명명되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폭압에 길들여져 있었음을 맥머피가 벌이는 적극적 투쟁을 보면서 알아차린다. 교묘한 학대와 부당한 처우 속에 치유불능 상태가 되어가는 수용자들. 그들에게는 분노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전기충격이나 전두엽 절제술이라는 무시무시한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존엄한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들에게 맥머피는 쉼 없이 `깨쳐라, 일어나라`를 강조한다. 위기관리에 구멍이 생길 때 병원 측에서 쓰는 안전한 방법이 저 안개 요법이다. 흡입구를 통해 몽롱한 안개가 쏟아져 나오면 거칠고 흥분했던 환우들은 모호함 속으로 제 존재를 숨겼다. 저항할 수 없는 굴욕 앞에 숨을 수 있다는 위안만큼 효과적인 약도 없었다.그토록 `탁 트인 바깥으로 끄집어내려고` 애썼던 맥머피는 스스로 전기충격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맥머피 도발의 종착역은 패배였지만 그것이 소설의 패배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의 영향으로 브롬든이 탈출을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위엄은 그 어떤 억압과 폭력 보다 윗자리임을 브롬든이 알게 된 것은 맥머피의 통찰 덕이었다. 거대한 억압체인 뻐꾸기 둥지를 바꿀 수 없다면 그 둥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밖에 없다. 소설 머리말에 나오는 인디언 동요처럼 안개 자욱해도 `한 마리는 동쪽으로,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나머지 한 마리는 뻐꾸기 둥지 위로` 그렇게 날아올라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6

먹은 밥은 시가 되고

볕 좋은 오후였고, 가까운 곳에서 갈바람이 불어왔다. 안절부절못할 만큼의 견딜 수 없는 풍요의 바람이라면 피우는 자만이 누리는 자가 될 터였다. 모의하지 않는 곳에 신화가 만들어질 리 없고, 저지르지 않는 곳에 전설이 피어날 리 없다. 가을의 전설과 바람의 신화를 꿈꾸는 지인들 몇몇 맘 내키는 대로 모였다. 하늘은 더없이 공활했고 그 아래 떠도는 구름 빛마저 가을을 예고했다. 마당 넓은 집 테이블에는 결실을 증명하는 갖가지 먹거리들이 차려졌다. 배고픔을 가장한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 바쁜 손놀림으로 투덕투덕 익어가는 삼겹살을 뒤집거나 아귀아귀 서로의 입을 벌려 갓 싼 쌈을 먹여주곤 했다. 쑥부쟁이무침에 지나는 바람 한 점 얹어, 웃음보에 싸먹는 이 순간이 천국이라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좋은 사람들끼리의 눈길은 헤플수록 무죄였다. 한 잔의 차로 부른 배를 달랠 즈음에야 마당 앞의 길고 팽팽하게 당겨진 빨랫줄이 눈에 들어왔다. 쪽물 들인 천을 말린다는 주인장의 심지 굳은 표정처럼 서있는 바지랑대, 툭툭 잘린 기억처럼 매달려 있는 빨래집게 위로 이른 별이 뜨고 있었다. 아쉬울 때 자리를 뜨기 좋은 시간이었다.주인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다고는 하나 설거지거리만 잔뜩 남긴 채 헤어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안현미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돌멩이가 외로워질 때까지 // 나는 그게 시라고 생각한다 // 서둘러 산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 점심시간 // 내가 먹은 밥은 그곳에 있다 / 나는 그게 시라고 쓰고 싶다”갓 차려낸 따뜻한 밥상은 판타지이자 동화이고, 물리고 난 밥상은 삶이자 시이다. 발랄한 평화로 그 판타지를 누리는 것은 손님의 책무요, 무연한 뒷정리로 그 판타지를 되새김질하는 것은 주인의 기쁨이렷다! 판타지의 향연을 낸 자리에 시의 알곡이 남았으니, 객으로서 설거지를 하지 못한 미안함은 주인을 위한 사려 깊은 배려였다고 자위해도 될라나. 이 가을 설거지 못하고 떠난 자의 맞춤한 변명은 시인이 대신해준다. - 우리가 먹은 밥의 모든 흔적은 시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5

또 하나 별빛이

추석 연휴가 끝났다. 뿔뿔이 흩어지는 게 현대 가족의 숙명이라도 되는 걸까. 한 이틀 얼굴 마주한 식구들은 아무 일 없었단 듯이 저마다의 터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나이 들수록 가족끼리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어른들이 매양 하시는 `너들도 내 나이 돼봐라, 부모 마음 알게 된다`는 그 말씀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자식들은 빨리도 자란다. 어느 날 문득 눈 비비고 돌아앉으면 훌쩍 자란 자식은 그럴듯한 독립체로 저만치 물러나 있다. 시시콜콜한 부모의 입김이 잔소리가 되고, 도리어 지들이 부모 걱정을 하는 시기가 도래하게 된다. 자식이 성인으로 성장해갈수록 부모는 자식에 대한 애틋한 정이 저 밑바닥부터 샘솟는다. 겪어보지 않으면 부모 마음을 모른다는 앞선 이들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 것이다.더 이상 부모 영역 안에 머물지 않게 된, 성장한 자식들을 보면서 맘이 다급해진다. 각자의 자리가 있으니 가족이라 해서 맘먹은 대로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여건이 될 때마다 많은 추억거리를 공유해야 한다는 강박이 맘 한쪽을 지배하게 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러 웃을 거리를 만들고, 색다른 경험을 하며, 공유할 관심거리를 찾아 나선다.명절의 가장 긍정적인 해석은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합법적으로 배려 받는 것` 쯤이 될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어찌 빛나기만 하는 별이겠는가. 박형준의 시처럼 `통증`과 `상처`의 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포용되고 기어이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그 시간을 위해 우리는 다음 명절을 기다리게 된다.“이 저녁에 또 하나 별빛이 통증처럼 뻗어나온다 / 나는 말하지 않으련다, 아물지 않는 상처가 /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 / 굴뚝에 오르는 연기를 따라 가면 / 밥상처럼 차려져 있는 달 / 먼 집, 대답 없는 날들이 대문이 빼곰 열린 마당 / 서늘한 우물에 어지럽게 떠 있다” 식구들 뿔뿔이 흩어진 자리에 우두커니 남아 박형준 시인의 `이 저녁에` 한 구절을 웅얼거려 보는 것이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2

기다리는 수고

사는 건 갈등과 결정의 연속이다. 사소하게는 휴일 늦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부터 크게는 직장에 사표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은 갈등과 결정의 순환과정이라 해도 별 무리가 없다. 온갖 갈등을 지속적이고 원만하게 해결해나가는 과정 그것이 곧 삶이다. 모든 갈등은 내면의 문제로 돌아온다. 혼자만의 심리적 고민이든, 표면적 사회 문제이든 갈등은 필연적으로 자신 고유의 결정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하던 일을 말아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저 사람을 계속 사귀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갈등은 하루아침에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 혼란스러운 내면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만도 없다. 뭔가의 결론을 내기는 내어야 한다. 스스로와 합의한 그 결정이 쓴 열매가 아니라 `단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흔히 `홧김에` 라는 말을 쓰는데 심리적 갈등의 끝자락에서 홧김에 라는 말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섣부른 판단이 일을 그르치고 성급한 결정이 후회를 부른다. 내면에 갈등이 생기면 어떤 식이든 결정을 하는 게 옳다. 고민거리를 두고 언제까지나 미적거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중해야 한다. 한 번 내린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데다, 스스로 내린 그 결정이 옳았다고 자부하려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게 좋다. 잘못 선택한 결정 때문에 한 톨 먼지 같았던 영혼의 흠집이 폭우 속 거센 물살 같은 정신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단순명쾌한 답이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그럴듯한 방법은? 진득하니 기다리고 뻔뻔하게 견디는 것. 견딜만한 갈등은 다른 말로 하면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과 같다. 참고 견디면 뜻밖의 행운이 보상으로 따를 수도 있다. 누군가 말했다. 행운을 부르는 진짜 주인공은 `기다림`그 자체라고. 행운을 만나고 싶은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뻔뻔하게 그것이 올 때를 기다리면 된다. 최선을 다한 뒤의 뻔뻔함으로 기다리는 행운은 무죄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11

새벽의 힘

시 읽기에 내가 매번 실패하는 이유는 이렇다. 시를 다른 작문처럼 이해의 대상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이해하면서 느낄 수 있는 시는 좋아하면서도, 내 깜냥으로 요령부득인 시는 좀처럼 가까이 하기 힘들었다. 취향에 맞는 시를 만나면 온몸이 조여드는 쾌감을 맛보곤 한다. 물론 내 식 이해가 전제되었을 때만 그런 느낌이 온다. 시도 문장으로 이해하려는 내 편협한 눈이 그런 감상법을 낳았다. 하지만 시는 글이기 전에 감각이다. 느낌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때 더한 전율을 맛볼 수 있다. 이를 테면 더 이상 잠들지 못한 새벽녘 신형철의 평론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감각은 야생동물이다. 길들이는 순간 죽는다.…. 감각은 세계를 염탐하고 자연의 암호를 번역하는 재현의 에이전트가 아니다. 감각의 본능은 배반이다. 감각은 이중 스파이다. …. 감각이 끝까지 달려 나갈 때 그것은 자신을 잊고 사유가 된다.” 감각이 뻗치면 끝내 자신을 잊은 `사유`가 된다니! 막연히 감각이 글을 쓰고, 감각이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면서도 돌멩이 같은 이성의 한 구석을 빌려 감각을 감각 그대로 두지 못하고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어리석음을 짓곤 했다. 내 이해의 바운더리에 들어오지 않는 그 어떤 감각적인 시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감각은 정돈될 필요가 없고, 사유에는 예고가 없다. 전달되지 않더라도 시요, 말이 되지 않더라도 시다. 이해와 느낌이 동시에 오는 것도 좋은 시지만, 이해를 놓아버린 그 자리에 감각만이 들어차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 그걸 모른 채 어쭙잖은 해석의 끈으로 시를 묶으려니 시 읽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감각으로 합주되는 희귀한 언어들의 향연, 이것 역시 시의 일부임을 알겠다. 감각의 컬트를 보여주는 시들은 신형철의 말대로 매끄럽지 않고 명징하지 않으며 순수하지 않다. 시는 작문이 아니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이제 랭보나 보들레르의 날뛰는 언어들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착각까지 하게 생겼다. 이 모든 게 새벽의 힘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5

연민도 지나치면

정직하기는 쉬워도 편견을 버리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축적된 지식이나 충분한 경험을 쌓기 전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교육자 집안 출신이라니 믿을 만한 인품을 지녔을 거야, 동남아 노동자니 가난하고 지저분할 거야, 시각장애인이니 무조건 도와야 해` 이런 일상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잘못된 예측을 했지만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에 기초하여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보지 않아도 좋단다.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 같아 맘이 한결 편해진다. 단순한 편견을 넘어 `골통` 이 되는 경우도 있다. 뒷받침이 되는 근거나 정보 앞에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제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은 가치 기준점이 오직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상황이나 대상을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모든 걸 제 기준에서만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한다. 편견이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편견이 무서운 건 여차하면 그것이 `집단의 결속`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귀속 본능이 있는 인간은 제 안정을 꾀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대립 구도를 만든다. 잘 알지 못하고 친근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완전한 감정은 집단적 편견으로 확대되고, 무죄한 대상들은 방패 없이 그 편견의 칼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시각장애인 문예 교실 종강을 했다. 개인적인 보람은 조금이나마 가졌던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점이다. 그들에 대한 내 무지는 `무조건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여나 상처 받을까 조심스레 접근했고, 그러다 보니 의도한 만큼 진솔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이 인다. 그들 말처럼 그들도 혼자 밥 떠먹을 수 있고, 지팡이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연민도 지나치면 자만이고, 배려도 앞서면 편견이 된다. 이런 생각들이 집단적 편견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 사실을 깨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4

혁신이라는 말

“보수는 혁신합니다.” 여당 회의실 배경 현수막에 적힌 글귀가 뉴스 화면에 잡힌다. 곱씹자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문학 용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보여주자는 것일까. 말뜻만 살펴도 보수는 혁신의 대상은 될지언정 혁신의 주체는 될 수 없다. 즉, 보수를 혁신할 수는 있어도 보수가 혁신을 할 수는 없다. 보수의 사전적 풀이는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이고, 혁신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다. 한 마디로 전자는 지키려 하는 것이고, 후자는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가급적 지키려는` 성질의 것이 어떻게 `완전히 바꾸려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혁신(革新)은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껍질을 벗겨 무두질하여 쓸모 있는 가죽이 되게 새롭게 만드는 일이 혁신이다. 피부를 벗겨낸 상태인 피(皮)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완전히 다른 제품인 혁(革)이 되려면 거기에다 여러 까다롭고 힘든 공정을 보태야 한다. 단순한 물리적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위적 제품이 되려면 피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지나, 가죽이 문드러지고 펴지기를 수십 차례 해야 한다. 극한의 고통 뒤에야 `혁신`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키려는 보수는 새로워지려는 혁신과 궁합이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다. 보수의 태생적 운명이 혁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혁신의 옷걸이에다 일말의 `개선`이라는 옷이라도 걸어보려는 시도, 혹 그것을 두고 `혁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나쁜 것을 고쳐서 좋아지는` 개선과 혁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수의 말뜻에는 미묘하나마 변화를 수용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니 개선이라는 말과는 얼추 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변화를 뜻하는 혁신은 보수라는 말과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날마다 `혁신`을 부르짖는 그들 앞에서 국민은 `개선`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치계의 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심각한 인플레 놀이 중이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3

청양고추

늦은 여름휴가를 간다. 안면도를 가는 중인데 경유 도시 중에 청양이 나온다. 유독 붉은 고추 홍보물이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마침 청양고추 및 구기자 축제 기간이라 그 열기가 피부로 와닿는다. 청양도 영양이나 청송만큼 고추 특산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모양이다. `청양고추`없는 우리식 밥상을 상상하면 싱겁기 그지없다. 흔히 `땡초`로 불리는 청양고추가 시중에 나온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유래 논쟁이 자못 흥미롭다. 1980년대 초반 모 종묘업체가 개발한 고추 품종 이름이 `청양`이다. 품종개발자인 유일웅 박사의 공식 인터뷰에 의하면 청양고추 품종은 제주산과 태국산 고추를 잡종 교배하여 개발했다.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에서 임상재배에 성공했는데, 현지 농가의 요청에 따라 청송의 청(靑),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고 품종 등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름에 걸맞게 청양군도 청양고추의 연고권을 주장한다. 1970년대 모 종묘업체가 청양농업기술센터에서 매운 고추 씨앗 여러 종을 받아갔다고 한다. 개발 과정에서 여러 품종이 섞였다 해도 매운 고추의 뿌리는 청양 지역이 틀림없다는 논리다. 청양군 유래설은 설득력이 다소 약하긴 하지만 지방자치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의 현명한 대처법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청양고추는 브랜드 명이지 산지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소비자로서는 원조 논쟁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고추가 그 세 지역에서만 나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최대 청양고추 재배지는 밀양이란다. 선의의 경쟁이 좋은 품질을 낳는 것이지 원조라는 후광이 품질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손으로 개발한 그 품종은 IMF 사태이후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 경영난으로 대부분의 종묘 회사들이 다국적 회사에 흡수되었다.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청양고추를 먹고 있는 것이다. 청양고추의 빼놓을 수 없는 진실은 몹시 매운 맛을 지녔다는 것과 매운 값만큼의 톡톡한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9-02

예술혼 끝에는

`천국의 문`이 서울에 왔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 걸작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청동 문짝 부조물이다.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인데 7m 높이에 6t 무게가 나간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경복궁내 고궁박물관에서 다른 작품들과 전시되고 있다. 피렌체에 가면 이 `천국의 문`과 `두오모 쿠폴라`(대성당 돔)만은 꼭 봐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작품이다. 피렌체의 산 조반니 광장에는 세 개의 중요 건물이 있다. 대성당, 세례당, 종탑이 그것이다. 그 중 세례당을 장식하는 세 문 중의 하나가 천국의 문이며, 대성당 두오모의 돔 지붕 형식이 쿠폴라이다.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이 각 10장의 판에 새겨진 `천국의 문`은 동시대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인정할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있고 싶다.`라고 그가 말한 것을 계기로 `천국의 문`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문으로 만들 부조상을 현상공모했을 때 기베르티 외에 응모한 주요 인물은 금 세공사였던 필리포 브루넬레스코였다. 두 시작품은 지금도 전해져 관광객들은 비교해 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코의 것은 조각의 느낌이 강하고 혁신적인데 비해, 기베르티 것은 회화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이 난다. 공모전의 최종 승자는 기베르티였는데, 실력이 나아서라기보다 기법상 좀 더 가벼워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기베르티는 천국의 문과 다른 한 쪽문을 완성하는데 거의 한 평생을 쏟아 부었다. 브루넬레스코도 패배자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공동제작을 권유한 관계자의 청을 마다하고 건축 공부를 했다. 고대 로마 유적 및 구조물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완성한 작품이 바로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이다.진정한 예술가에게 승자니 패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숭고한 예술혼 끝에는 완성된 작품과 무한한 감동이 있을 뿐이다. 두오모의 돔을 보러 당장 이탈리아까지는 갈 수 없고, 천국의 문 숨결이라도 느끼게 고궁박물관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 천상의 아름다움 전은 11월 중순까지 계속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9-01

인간이란 굴레

작가 곁에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항상 많았지만 그들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이런 말로 대변되는 작가적 투망에 잡힐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의 저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근원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러 좋아하려고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 라고. 서머싯 몸은 인간 내장에 돋은, 까칠한 돌기까지도 잡아낼 정도로 통찰 깊은 작가이다. 인간 관찰에 대한 그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나쁜 짓하다 들킨 아이처럼 뜨끔해지곤 한다. 그가 작가로서 우뚝한 순간은 음악으로 치자면 감성 발린 발라드를 부를 때가 아니라 격정적인 몸짓까지 노래하는 락 음악을 보여줄 때이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린 `인간의 굴레에서`에서를 살핀다. 인간을 노래하는 그의 발성법은 뼛구멍에 난 터럭까지 감지하고 표현하는 것을 택한다.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심을 변론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당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다.”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내 욕망과 같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라는 것, 그것이 곧 자비라는 것, 저마다 추구하는 삶은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의 쾌락`이라는 것. 맨 살에 바른 파스가 뼛속을 관통할 때의 시원한 쾌감 같은 이 기분. 다만 그 통찰이 시원함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마디마디 서늘한 후통증을 동반한다는 것. 매운 맛을 두려워하면서도 매운 떡볶이를 찾는 소비자처럼 그의 문장들에 중독된다.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서머싯 몸은 친구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에두르지 않고 직설 화법을 구사하는 그가 미덥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토록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전우주적 이해의 접선을 시도하는 그의 말 안에서 우리는 따끔거리고, 찢어지며, 화끈거린다. 경멸하고 경원시하면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의 고통, 그것에 대해 그보다 더 잘 말하는 작가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9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어제오늘 검색어 상위에 오르내린다. 모 연극배우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 관련으로 단식 투쟁 중인 유족 김영오씨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다. “그냥 단식하다 죽어라. 그게 네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전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말을 자신의 SNS에 남겼다. 배려 없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 충격적 발언의 조회 수 만큼 사람들은 일제히 `프로파간다`라는 뜻을 검색을 한 모양이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선전, 홍보`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특정한 원칙이나 행위를 전파하기 위해 세우는 체계화된 계획이나 그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동`이라는 부정의 뉘앙스가 남아있는 말이 되어버렸다. 선전이라는 중립의 의미가, 새빨간 거짓말인 선동의 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였다. 연합국이 영미 대중들을 향해 이 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 본뜻은 사라지고 사악한 의미만 남았다.선전은 막강하고 대중은 어리석다. 아무리 현명한 민중도 보이지 않는 정부나 거대 손이 움직이는 선전 전략을 앞서기는 어렵다. 대중을 위한 선전에 잠식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일수록 드러나지 않은 선전 기획팀에 휘둘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적 코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전문 선동가들 앞에서 우리는 내남없이 우중(愚衆)이 되기 쉽다. 전형적인 선동적 프로파간다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하지만 프로파간다의 원래 뜻만 되살릴 수 있다면 그것의 효용도 나쁘지는 않다. `선동`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걷어낸 자리에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불러와 다채롭고 창의적인 화법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이나 홍보라는 말 자체가 어느 특정 집단, 특히 덜 가진 자보다는 더 가진 자,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의 논리와 맞물린다. “거짓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도 결국 힘이 전제되었을 때나 통용된다.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리는 약자에게는 선동의 입김을 느끼기 전에 연민의 입술이 먼저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8

완벽주의는 완벽하지 않아

조상들이 말했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고. 흔히 완벽주의자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뭐든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럴까. 그런 사람들은 끝내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잘 돼 가냐고 물으면 그들 대답은 한결같이 꼿꼿하다. 여전히 `완벽하게 준비하는 중`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는 일에 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위의 예는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이다. 절대 완벽주의자가 못 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위로한다. 실천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둘러대는 핑계가 바로 `완벽주의론`이다.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곧장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혹시 불어난 몸피가 살이 아니라 붓기일 수도 있으니 병원부터 가야할 핑계가 남았고, 쓰다 만 단편을 완결 짓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 문체가 원하는 만큼 완성도가 높지 못하니 될 때까지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준비해야할 이유가 기다리고 있다. 진실로 진실이 아닌 핑계를 갖다 붙인다. 게을러서 실행 못하는 것을 마치 완벽주의자여서 그런 것처럼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미흡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서두의 두 속담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아는 길은 곧장 가면 되고, 얕은 내는 가벼이 건너도 무관하다. 아는 길에 괜히 허비할 시간은 행동으로 옮기는 데 쓰고, 얕은 내를 건너는데 소비한 과도한 에너지는 심오한 창의력에 할당하면 된다. 이 세상에 완벽함은 없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미완이고 어설프지만 일단 시도하는 게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모든 완성은 불완전에서 출발한다. 완벽하게 준비한 사람이 끝낸 일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도한 사람이 끝낸 일이 더 많다. 완벽한 사람은 시작한 일 자체가 드무니 성공할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연함은 완벽에 이르는 가장 나쁜 포장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7

취향일 뿐

체리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체리가 드문드문 시장에 나오던 초창기에는 그것이 맛나다는 것조차 즐길 겨를이 없었다. 비싼 수입 과일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맛있다는 진심의 욕망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라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일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체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비싸기는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대중적 과일이 되어 있었다. 남유럽 여행에서 충격 먹은 것 중의 하나. 달리는 차창 밖으로 아름드리 체리나무 행렬이 이어졌다. 내게 로망이기만 했던 과일이 이토록 흔한 것이었다니! 제 철이라 그런지 값도 무척 쌌다. 체리 한 번 다시 실컷 먹어보기 위해 다시 여행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반면에 나는 토마토는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단맛에 길들여진데다 미감마저 약해 내 입맛에는 토마토가 영 밍밍하고 싱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찰토마토니 대추방울토마토니 등 온갖 세련된 맛의 품종이 쏟아져 나와도 내게 토마토는 다 같은 토마토일 뿐이다. 나를 뺀 나머지 식구들은 토마토를 좋아한다. 몸에 좋다니 자주 사서 갈아먹고 볶아먹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토마토에는 손길이 가질 않게 된다. 토마토나 식구들 입장에서는 토마토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할 수도 있겠다.체리든 토마토든 과일 자체의 본질이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체리는 체리 그대로, 토마토는 토마토 그대로 존재한다. 체리를 선호하거나 토마토를 우선하는 것은 선택자의 마음일 뿐이다. 내가 특정 과일을 선호한다고 해서 다른 과일의 본질이나 가치가 뒤로 밀리는 건 아니다. 그건 취향의 문제이지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체리는 체리대로 토마토는 토마토대로 존재 이유가 있다.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가 다를 뿐이지 그 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와 맛은 다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본질과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다. 개성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