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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행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돈이 행복의 기준이라고 보는 이도 있고, 사람과의 교감에 제 행복의 근간을 두는 이도 있다. 많이 아파본 사람은 건강만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기준을 넘어서 진정한 행복이란 `혼자만의 시간`에 만족할 수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외로워 외로워서 못살겠어요, 라는 오래된 유행가 가사가 있다. 사람 곁에서 위안과 행복을 느끼고 싶은 그 처연한 상황이 애처롭기만 하다. 외로운 게 사람이긴 하지만 외로워서 못 살 정도이면 몸과 마음이 아픈 상태이다. 아픔은 행복의 주적 중의 하나이고, 그 아픔이 혼자이고 싶지 않은 갈망 때문에 생긴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다 갖춘 사람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없다면 그것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모든 문제는 사람이 만든다. `어찌하면 좋을까요?`라고 어떤 문제 앞에서 우리가 탄식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방법을 묻는 의미는 아니다. 모든 답은 내 안에 이미 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고 확신을 주는 사람 곁에서도, 내 안의 답이 셋이면 셋이라고 생각하는 게 사람이다.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고 에두르는 화법으로 정답을 내놓지 않는 식의 명답을 내놓는 현인 앞에서도, 내 안의 답이 넷이면 넷이라고 결심을 굳히는 게 사람이다. 긍정적 측면에서 이 정도 되면 그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뭔가에 자신의 에너지를 오롯이 쏟아 붓기 때문이다.사람 곁에서 위안과 화평을 얻는 게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온전한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진실로 행복하려면 사람 없는 그 순간에도 스스로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이 확보되었을 때,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충족감을 경험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심 행복한 사람이다. 생산적인 뭔가에 제 기를 오롯이 쏟으려면 사람과 멀어져 있어야 유리하다. 혼자 있을 때 평안한 만족감을 느끼거나 지극한 자존감을 맛본다면 당신의 행복지수는 아직 믿을만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7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간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못 잔 게 아니라 잠 잘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다. 희붐한 아침이 왔을 때야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몰입도는 최상이었다. 평생 불면의 밤과는 친구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잠과 친숙한 체질이지만, 더러 몰입의 밤과도 친구할 만큼 한 곳에 집중하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시쳇말로 나는 `그분이 오시면` 무작정 쓰게 되고, `필이 꽂히면` 빨려들듯 읽게 되는 부류이다. 몸을 위해선 결코 좋은 생활 패턴이 아니다.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과 좋은 책들이 널렸다. 평생 읽고 쓰는 데만 온전히 시간을 바쳐도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란다. 한데 좋은 사람들 만나 수다 떠는 걸 즐기는데다, 짜인 일들까지 갈무리하면서 읽고 쓰는 나 같은 이는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게을러서 생긴 강박관념은 몸의 피로를 몰고 오고, 그것은 자연히 마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나름 열심히 하는 건 분명한데 늘 허망한 이 느낌.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핍진감의 원인은 고백하건대 단 하나다.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대로 하지 않는 진실이 그것이다. 충만감에 가닿지 못하는 모든 열정은 몸의 피로와 마음의 불안을 낳는다는 것을 알겠다.“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넘어설 수 있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꼼꼼하게 채워간다. 미래란 현재의 동력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안다.”`메이드 인 공장`에서 작가 김중혁이 한 말이다. 현재를 꼼꼼하게 채워가는 것 같은 데도 스스로 충족에 이르지 못하는 심리 상태는 작가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비관 때문에 생긴 감정이 아닐는지.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소용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의 피로가 누적된다는 것. 그 피로를 이기는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4

선명한 슬픔

늦가을 바람이 맵차다. 벚나무 가로수에 바람이 닿으면 선명한 붉은 잎가지들이 온몸을 흔든다. 눈을 찌를 듯, 얼굴을 삼킬 듯 격렬해지는 저 갈망의 향연. 벚나무 단풍이 저리도 고왔던가. 가로수 색깔이 선명하지 않았다면 제 아무리 바람의 부추김이 셌다하더라도 지나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진 못했으리라. 색깔의 변화에 민감하게 되면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라는데 정녕 그런 모양이다. 옛날에 무심코 지나쳤던 이 길이 옛날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계절의 변화가 눈에 띄게 분명하게 보이고, 한 계절 안에서도 그 계절이 깊어가는 과정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건 분명 슬픔의 조짐이다. 그 깊은 조짐을 선인들은 `성숙해진다`라고 표현했다. 물 잘 든 벚나무 가로수 풍광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반은 떨어져 누렇게 길 위에서 스러져가거나 벌써 저 먼 우주 속 먼지로 멀어져 가고, 아직 남은 나머지 반은 달뜬 몸으로 세상을 향해 화려한 무언의 발화를 시도한다. 먼저 먼지가 되고, 더러 바래져가고, 남아 무르익어가는 그 잎들의 고향인 나무를 보며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한 살이를 생각한다. 나목으로 눈비 맞다가, 물올라 잎 나고, 그 잎들 무성히 하늘도 가렸다가, 다시 저토록 화려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담대하게 허물벗기 위해 온몸으로 불태우는 저 울음의 절정길. 그단순한 것을 보고 우리는 탄성을 지른다.나무든 사람이든 생명에 유한성이 있다는 것은 같다. 하지만 겨울을 맞는 몇몇의 나무들이 한껏 제 잎들의 향연을 펼칠 수 있는 것은 다음 봄날을 예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가 새 계절을 맞는 순환고리에는 새봄이란 물리적 환원이 보장되지 않는다. 기왕의 몸은 그저 늙어가고, 다만 망가져갈 뿐이다. 몸이 삭으면 자연히 맘에 사무치는 게 늘어간다. 그러니 잎 붉어지는 단순한 저 자연현상도 단순하게만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나이 들수록 성숙해진다는 말은 사람들이 지어낸 자기위안인지도 모르겠다. 뭔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면 그건 선명하게 슬퍼지는 것의 시작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3

최소한의 양심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가 오만하지 않기는 쉽다.`공자가 한 말이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 돈 없어 비굴하고 비참하고 불안하고 불편할 때일 것이다. 반면에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의 오만은 허영심에서 오는 자기 과시욕에 지나지 않으니 힘든 것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허영`은 `비참`보다는 덜 심각한 감정이다. 따라서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이 가졌으면서 더 오만하고, 덜 가졌는데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왜 세상엔 이토록 착한 사람들이 많은지. 왜 한 편에선 저토록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있는지. 가진 자들이 저들끼리 속이고 속으면 `그들만의 판`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한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눈과 마음을 속이고 치졸하게 구는 걸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작게는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경제활동을 아우르는 기업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도 다양하다.가진 자들이 제 것 귀한 줄 아는 것 백만 배 이상으로 덜 가진 자들의 제 것은 소중하다. 덜 가진 자들은 원래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귀할 수밖에 없다. 덜 가진 자들이 순진하고 바보 같아서 가진 자들의 더티 플레이를 방관하는 건 아니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다. 약자이기 때문에.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사업주가 있다 치자. 어인 일인지 그는 사회사업과 기부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이 헌신하는 종교 단체의 사회사업에 기부금을 냈다 치자. 그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정말로 선한 사람이라면 사업주로서 먼저 자신의 직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쳐주었을 것이다.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을 짓밟아 얻은 돈으로 행한 선행은 칭송 받아 마땅한 걸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고 어른들이 말했다. 적어도 덜 가진 자들 앞에서 양심 찔리는 행동은 하지 말자. 종일토록 이런 화두에 매달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2

식구 모두의 배려

어쩌다 엄마께 전화하면 엄마는 올케언니 칭찬부터 한다. 언니가 얼마나 집안 대소사를 살뜰히 챙기며, 얼마나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얼마나 형제들 간에 우애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엄마는 좋으시겠어요, 요즘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라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언니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좋은 며느리가 되려하지 말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그런 내 충언(?)이 먹힐 리 없다. 사십년을 그렇게 살아온 언니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올케언니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미안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엄마로서는 복 받은 노년을 보내는 거지만 그렇다고 올케언니의 정성에 박수만 칠 수도 없다.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여성적 삶의 원칙들이 무조건 옳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의 개성은 권력이나 집단의 하위 개념일 때가 많았다. 더구나 이런 여성상은 여성 스스로 강화하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도리와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다.전통적 권위는 남성 또는 아버지 차지였고, 헌신은 여성 혹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연히 효 이데올로기의 최전방 행동대원은 여자들 차지였다. 젊디젊은 스타가 `결혼 상대는 우리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는 여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근성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여성을 한 집안의 효(孝) 대리인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참아내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남녀평등이 보편화되었다거나 여성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고 교묘하게 선전하는 집단들에는 여전히 동의할 마음이 없다. 가족 집단에 대한 희생이나 배려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 식구 모두의 것이 되어야 온당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1

마왕과 신해철

슈베르트 가곡 `마왕`을 여러 버전으로 보며 듣는다. 애니메이션이 따르는 몇몇 성악가 버전부터 흑백 화면으로 된 피터 디스카우를 지나, 바리톤 최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을 접한다. 평소 좋아하던 가곡이긴 하지만 새삼 이 짧은 가곡 하나에 온몸과 마음을 빼앗긴다. 괴테의 시에 열여덟의 소년이었던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 셋잇단음표로 휘몰아치는 피아노 전주에 맞춰 노래가 이어지는데 성악가는 내레이터, 아버지, 아이, 마왕 등의 목소리를 차례로 연주한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밤 아픈 아들을 감싸 안고 집을 향해 말을 달리는 아버지. 꽃과 놀이와 소녀들이 있다며 아이에게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마왕. 두려움에 떨며 마왕의 속삭임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아들. 그것은 엷게 퍼진 안개 무리이며, 마른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이며, 오래된 버드나무의 음울한 흔들림일 뿐이라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 하지만 안마당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품에서 아들은 죽어있었다.`마왕`을 들으며 신해철을 생각했다. 아니 그 때문에 다시 슈베르트의 마왕을 클릭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마왕` 별호는 그와 무척 잘 어울린다. 강렬한 울림의 그 이미지는 노래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했고, 정당한 이유 없이 개별자를 구속하는 것들에 반기를 들었다. 부패한 정치권이 도덕에 파격적인 유행가 가수들보다 더한 유해매체라고 일갈했으며, 부와 명성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느냐는 멋진 말도 남겼다.음악인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아티스트였지만, 논객일 때의 그도 더할 나위 없는 멋진 사나이였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음악적 열정과 사회적 패기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마왕. 그 영역 안으로 유혹할 어린 양들이 이리도 많은데 정작 그 자신이 먼저 먼 길을 떠나버렸다. 안개 무리이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며, 버드나무의 흔들림인 모든 것들의 진실을 노래하고 품었던 그를 애도하는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10

검은 다이아몬드 문체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소설을 쓸 때 결코 인물 내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옳다. 반면에 등장인물과 함께 슬픔에 빠지고 두려움에 떤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은 슬픔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게 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감정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고 잠재워야 할 것인가.하지만 그녀의 대표작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면 첫머리에 인용한 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묘한 것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한 그 문장들이 독자에게 건너가면 바늘 끝 같고, 손톱 같은 `콕콕 찌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벌목장에서 베이는 나무처럼 무뚝뚝한 문장들이 툭툭 넘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목도한 독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아린 통증을 품어야 한다.건조한 문투 덕분에 오히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매혹을 앓게 하는 그녀.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 못하고,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 잇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 과장이나 과잉 없는 서술로 사건 많은 쌍둥이의 일생을 전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감정선을 드러내는 그 어떤 묘사 없이, 짧고 단호한 직설로 뱉어내는 발화법. 그 속에서 처절한 절망의 노래를 느끼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어느 비평가가 그녀의 문체를 `검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는 말이 어쩜 이리 와닿는지. 처절하고 냉엄하고 허위적인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녀의 방식에 뒤늦은 찬미가를 보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06

욕망이라는 양철지붕

예술의 효용은 진실 탐구에 있다. 보편적 정서라는 잣대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추한 것을 추하게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시각이라 굳이 예술의 범주에 넣지 않아도 된다. 현상의 그 모든 이면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과정 그것이 예술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은 인간 욕망의 밑바닥까지를 들춰낸다.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 몸서리치는 자책으로 탈출을 꿈꾸거나,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초상 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은 이런 설정은 우리 일상과도 겹쳐 있기에 정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누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같은 제목의 윌리엄스 희곡은 제어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을 고양이에 비유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없다. 하지만 삶이란 무대는 만만치 않다. 욕망하는 무엇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판쯤은 견뎌내야 한다.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폴리트 할아버지의 생일 즈음, 모인 식구들은 평안과는 먼 분위기에 휩싸인다. 평생 남편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한 부인, 지나치리만큼 냉혹하고 현실적인 큰 아들 부부, 그들은 동생에게 거대한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둘째아들은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고민으로 갈등한다. 동성애적 관심을 호소하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외면 때문이라는 자책에 시달리며 점점 비현실적 인물이 되어 간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시아버지의 재산에 집착하게 된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스스로의 운명에 발을 동동 구른다.삶 자체가 달궈진 양철지붕이다. 억눌리면 억눌리는 대로, 냉혹하면 냉혹한 대로, 절실하면 절실한 대로 우리는 그 판 위에서 저마다의 발바닥을 단련시킨다. 뜨거운 지붕 위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발바닥의 동동거림만 더해질 뿐, 좀체 벗어나기 힘든./김살로메(소설가)

2014-11-05

삶과 죽음의 의미

“정말 영원히 산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 하나라도 있을까? 우리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되고, 놓치는 것도 없으며, 서두를 필요도 없다. …. 회복할 시간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수없이 많은 실수도 영원 앞에서는 무가 되고, 뭔가 후회한다는 것도 무의미해진다.”파스칼 메르시어의`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실은 동명제목의 영화를 먼저 봤다. 언제부턴가 영화와 원작이 있다면 영화부터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영화와 원작이 동시에 알려진 경우라면 영화를 먼저 보는 게 낫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작만한 영화가 없기 때문이다.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에 실망하게 되지만,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으면 둘 다 만족할 수 있다. 영화를 먼저 보면 등장인물이 축소되고, 주인공 심리가 덜 전달되고, 줄거리가 비약적 도약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책을 읽기 전이기 때문에 영화의 약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뒤 영화를 보면 심리적 곤욕에 시달리게 된다.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고유 분위기나 섬세한 풍광 진득한 심리 묘사 등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살아나지 않기 때문이다.`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경우도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본 건 잘한 일이었다. 영화와 책 둘 다 이기는 게임이 된 셈이다. 비 오는 날, 묘령의 여자가 남기고 간 빨간 코트와 책 한 권의 흔적을 찾아 무작정 리스본행 열차를 타게 된 남자. 시간여행의 형식을 빌려 타인의 삶을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그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진실과 다양한 개별자의 고뇌를 만나게 된다.예정에 없던 일탈을 감행하고픈 날들도 오는 게 삶이다. 용기 있는 자 미인을 얻고, 머뭇거리지 않는 자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그 누구도 타자의 삶에 간섭할 수 없다. 우연의 매개물이 나타나 운명처럼 삶과 죽음의 의미를 캐묻거든 지체 말고 떠나 볼 일이다. 리스본이 꼭 목적지일 이유는 없다. 물론 영화나 책이 그 경유지가 되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1-04

고통 받지 않을 권리

존엄사 관련 소식이 화제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뇌종양 말기로 힘겨워하는 메이나드라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존엄사 예고일을 동영상에 올렸다가 다행히 날짜를 연기했다. 하지만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여전히 `존엄사`를 포기하지 않겠단다.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사가 처방해 준 약을 먹고, 좋아하던 노래를 들으면서 자신의 침대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존엄사도 크게 보아 안락사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존엄사는 소극적 안락사를,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를 의미한다. 환자의 사전 의사가 있었다는 전제하에, 의료진에서 생명단축수단을 사용하거나 생명 연장 조치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경우를 일컬어 안락사라 한다. 위의 경우는 죽음에 이르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행위 주체가 환자 당사자이기 때문에 주목을 끈다.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적극적 존엄사` 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죽음이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극한 고통에 시달릴 경우 과연 연명 치료는 의미가 있을까. 삶이 소중한 건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삶이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 이후로 부쩍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회복 불가능한 단계에 이른 환자에게 어느 누구도 죽음의 방식을 강요할 순 없다. 죽음 직전에 감당해야할 고통 너머의 고통을 당사자 대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생명의 고귀함을 설파하기 위해 환자의 고통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다른 모든 논쟁거리를 뒤로하고 남은 자의 양심이나 도덕적 판단보다는 `환자의 고통`이 우선 배려되어야 한다는 것. 무의미한 연명치료만이라도 생명 중시라는 이데올로기 앞에서 지속되지 않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존엄사나 안락사가 죽음의 방식으로 완벽한 모델일 리는 없다. 그렇다고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도 없다. 생명 연장이냐 고통 완화냐 그 딜레마 앞에서 한발자국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지만, 그래도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고통 받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1-03

불편해야 진실이다

젊은 시절 사보 만드는 일을 잠깐 한 적이 있다. 주경야독을 하는 십대와 이십대들이 주를 이루는 섬유업체에서였다. 어느 날 현주라는 아이가 직원란에 실릴 시 한 편을 가져왔다. 수줍은 미소로 그미가 내민 원고의 마지막은 이러했다.`언제나 아름다움이 머무는 곳, 이곳이 바로 00입니다` 구체적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회사어천가 쯤 되는 내용이었다. 집 떠나 외롭고 고달픈데 사장님이 진심을 다해 그들을 배려하고 잔정을 내니 그 또래 감성으로는 충분히 그런 시를 쓸 만했다. 그런데 우연히 가불을 하러 사무실에 들렀던 아줌마 직원이 그 시를 보더니 혼잣말인 듯 제법 큰 소리로 말했다. “아름다워야 아름답다고 하지. 쉬운 말로는 뭣인들 못할까. 월급만 올려주면 나도 그렇게 쓰겠다.”예상치 못한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 관한 시라면 당연히 아름다움을 노래해야 한다고 생각한 내게 아줌마의 진솔한 한 방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줌마 입장에서 보면 세상은 불편하고 불공평한 것 투성이였다. 딱히 회사 자체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사회적 상황에 대한 불만이 아줌마로 하여금 세상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한 것이었다. 남편 없이 두 아이 키우고, 시댁 건사하고, 미래를 설계하기엔 이 사회가 결코 아름다운 곳이 못되었다. 가불하기 위해 들어서는 회사 문턱조차 얼마나 높았을 것인가.진실은 언제나 잠자는 평화를 배반하고, 진정한 미학일수록 아름답다는 편견을 거스른다. 고요하대서 진짜 평화가 아니고, 눈을 호사시킨다고 모두 아름다움은 아니다. 제 아무리 힘들어도 천성이 선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인다. 그들의 그 맘은 진심이다. 하지만 세상의 곤고함을 경험한데다 생의 이면을 보는 촉이 발달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거나 평화롭지만은 않다. 서정의 눈길이 앞선 이들은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보려하고, 통찰의 눈이 깊은 사람들은 추함까지도 미의 범주에 담으려 한다. 진실은 추하고, 추함은 불편함을 능히 감당할 자만이 이끌어 낼 수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31

오독의 자유

시 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은 오독(誤讀)에 있다. 그 어느 분야보다 축약과 비약이 허용되는 장르가 시이다 보니 읽는 이마다 행간의 의미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시인이 의도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독자 맘대로 이해했다고 그 시를 잘못 읽은 거라고 말할 수도 없다. 젊은 시절 김동리 소설가와 서정주 시인이 술집에서 만났다. 그때 김동리는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시 한 편을 쓴 소설가가 시인에게 그것을 읊어 주겠다고 했다. 취중 시인은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설가가 짧은 시를 읊었다.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 한 구절을 들은 시인이 무릎을 쳤다. “명작이다, 명작.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울다니!” 꿈보다 해몽이요, 시보다 해설이다. 시인을 떠난 시는 독자의 몫이다.“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이성복 시인의 시 `남해금산`첫 구절이다. 젊은 시절 이래로 나는 그 시에 나오는`돌`을 줄곧 `돌멩이`로 이해했다. 해변에 널려 있는 검은 몽돌 정도로 상상했다. 작고 반질거리는 반투명 검은 자갈돌에 들어앉은 여자를 상상했다. 소우주라는 거창한(?) 알레고리로 돌멩이를 해석했다. 남해금산에 대한 그 어떤 지리적·환경적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시를 접했기 때문에 이런 무지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남해금산이 바윗덩어리 산이고, 시에 나오는 돌이 자갈돌이 아니라 `바위`를 말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상상했던 시적 그림을 바꿔야 한다는 것에 저항감이 밀려왔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내게 `남해금산`의 `돌`은 `몽돌`이미지로 남아 있다.정서적 충만을 유도하는 즐거운 오독은 시적 비약이 허용되는 것만큼이나 독자에게 허용될 자유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를 왜곡하고 굴절하는 오독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한 것과 다른 미적 쾌감을 담보하는 오독이라면 굳이 바꾸지 않아도 큰 잘못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발화자인 시인들 스스로 그들의 시를 기꺼이 오독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르니까./김살로메(소설가)

2014-10-30

담백하게 단순하게

동방의 한 임금은 인간에 대해 알고 싶었다. 현자더러 오백 권의 책을 가져오라 했다. 나라 일로 바쁜 왕은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현자에게 책들을 간단히 요약해 오라고 했다. 이십 년 뒤 현자는 오십 권으로 줄인 역사책을 내어놓았다. 임금은 너무 늙어 묵직한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을 다시 줄여오라고 명령했다. 또 이십 년이 흘렀다. 백발이 된 현자가 임금이 원한 지식을 한 권의 책으로 줄여서 왔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던 임금은 한 권으로 줄인 책마저 읽을 수가 없었다. 깊이 생각한 현자는 사람의 역사를 단 한 줄로 줄였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에서 인용된 동방의 현자 이야기이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다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강박에 가까운 선현들의 가르침이 우리를 스스로 지닌 무게보다 더 큰 무게로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서머싯 몸의 말처럼 인생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우리가 가는 길에 꼭 뚜렷한 목적의식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삶이니 나름대로 성심을 다해 살아가면 그만이다.삶은 거창한 것보다 소박한 것에 기댈 때가 더 많다. 저 광활한 우주로 영역을 넓히면, 자기존재증명 같은 노력이 얼마나 하찮고 시시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굴레에도 예속되지 않는, 지금 이대로의 작고 소박한 삶의 고귀함.그러니 가장 치명적인 아픔인 `먹고 사는 걱정`만 해결되었다면 욕심을 버릴지어다. 애초에 인생에는 큰 의미 같은 게 숨어있지 않았으니. 가을볕에 흔들리는 단풍잎의 소소한 반짝임이 서로 다른 만큼의 차이일 뿐인 너와 나의 삶. 누구나 태어나서 고생하다 죽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되새기기만 해도 어느 정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담백하고 단순한 일상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0-29

개별성의 눈

심리학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리 -토끼`그림은 왼쪽에 초점을 맞추면 토끼가, 오른쪽에 초점을 맞추면 오리가 보인다. 그보다 더 유명한 `루빈의 꽃병`그림은 중앙을 주시하면 꽃병으로, 양쪽 배경을 주시하면 사람 얼굴 옆모습으로 보인다. 이런 그림의 원조 격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밀라노의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정물화 `채소 기르는 사람`은 똑바로 놓은 상태에서는 사람 얼굴이, 거꾸로 놓고 보면 바구니에 과일과 채소가 담긴 풍경으로 보인다. 원래 그림은 검은색 그릇에 각종 채소와 과일이 담겨진 평범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림을 거꾸로 놓고 보면 검은색 그릇은 모자로 보이고 각 채소와 과일은 사람 얼굴 하나하나를 가리키게 된다.우리의 시각은 믿을 게 못 된다. 그런 단정적인 얘기보다는 적어도 두 개의 믿음 이상을 허용하는 열린 눈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정서적 반응의 정도에 따라, 시각적 범위에 따라, 또는 심리적 기제에 따라 우리 눈에 비치는 대상은 달라 보일 수 있다. 그곳에 무엇이 있고, 그 무엇의 내용과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느끼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개인의 내면 심리에서도, 사회 무리 안에서도 이런 갈등은 적용된다. 아무리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이라도 밥벌이의 절실함 앞에서는 제 신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고, 아무리 자신이 보아온 그 무엇의 형상과 이미지가 선명하다 해도 상대가 경험한 그것의 형상과 이미지가 다르다면 제 눈만이 제대로 보았다고 고집을 피울 수도 없다. 한 대상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두 가지 이상이다. 그림의 왼쪽이나 배경이나 `거꾸로`를 봤다고 해서 그 그림을 잘못 봤다고 할 수도 없다. 원초적 모순을 내장하고 있는 개별자의 눈,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그것 덕에 웃기도 하는 게 사람이다. 저마다의 눈에 비친 세상만을 볼 수밖에 없는 화가이자 감상자로서의 인간의 한계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10-28

단풍이 있는 풍경

늦가을 풍광이 다채롭다. 그 중 색채의 화려함으로만 보자면 단풍나무가 으뜸이다. 그런데 조금만 눈여겨보면 단풍나무도 다 같은 단풍나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잎사귀가 갈라지는 개수도 다를뿐더러 물드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풍과 나무는 크게 다섯 종류란다. 뾰족잎이 세 개인 것은 신나무, 다섯 개는 고로쇠나무, 일곱 개는 단풍나무, 아홉 개는 당단풍나무, 열한 개는 섬단풍나무이다. 그 중 가장 붉은 잎을 자랑하는 것은 `당단풍`이란다. 이름에서 오는 느낌처럼 당 성분이 많으면 단풍도 잘 드나 보다. 이처럼 같은 단풍잎 모양 나무라도 나무가 처한 환경이나 성격에 따라 잎 갈퀴 개수도 다르고 물드는 정도도 다르다. 사람 사는 동네인들 다르랴.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의 삶을 살아가는 본질에서는 누구나 같다. 하지만 사람마다 본래 지닌 성정이나 살아온 이력 그리고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개성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한데 우리는 가끔씩 착각한다. 내가 당단풍 무리에 속해 있으면 모두가 거기에 맞춰줬으면 하기도 한다. 단풍나무도 아닌 것이 단풍나무처럼 물드는 신나무나 고로쇠나무가 얄밉고, 잎 갈퀴를 아홉 개로 맞추지 못한 채 불투명하게 물드는 단풍나무나 섬단풍나무가 야속하기만 하다. 같은 당단풍나무로 온 산을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이면 좋을 텐데 곁가지들이 섞이는 바람에 가을산 풍광을 망쳐놨다고 푸념하기도 한다.이런 결속은 상대의 개성이 우리라는 보편성과 동떨어질수록 확연히 드러난다. 신나무나 고로쇠나무라는 개성이 당단풍나무라는 집단에 섞이려들지 않고, 제 특이질을 발휘하게 되면 견제를 받게 된다. 눈에 띄는 개별자는 객관적인 옳고 그름을 떠나 비난의 타깃이 되기 십상이다. 타깃을 자처한 적 없기에 제 몸에 타깃을 지녔는지조차 모르는 죄 없는 개별자에게, 우리라는 결속의지는 무례하게도 화살을 겨누기도 한다. `보편성의 당단풍`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그 순간에는 이성보다는 감정이, 평정심보다는 흥분이 그 결속을 지배하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7

기억이라는 윤색

얇디얇은 꽃잎이 겹겹이 쌓였다. 한 송이에 무려 삼백 여장의 꽃잎이 피어난단다. 미나리줄기 같은 연한 꽃대에 꽃받침마저 바짝 붙어 있어 담백하기 그지없다. 꽃잎이 휘돌아간 매무새는 장미를 닮았고, 활짝 핀 꽃잎이 겹겹이 벌어지는 모양새는 국화를 닮았다. 우아하기로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백합과 수국 옆에서도 전혀 기품이 달리지 않는다. 습지꽃 라넌큘러스를 두고 한 말이다. 내 멋대로 그 꽃을 `기억꽃`이라 부른다. 음지나 습지의 기억일수록 잘 살아난다. 개구리란 뜻의 `라이나`에서 유래한 라넌큘러스는 이름에 걸맞게 습지와 연못을 좋아한다. 수 백 장의 꽃잎마다 수 백 가지의 기억을 지닌 꽃. 한 두 잎으로 시작해 자꾸만 부풀어가는 습습한 기억들. 한 잎 한 잎 아픈 기억을 보듬고 돌보는 과정에서 가공되고 늘어난 꽃잎들. 꽃말조차 매력, 매혹, 비난이 아니었던가.매혹과 비난은 이음동의어이다. 매력은 시선과 시샘을 동시에 얻는다. 매혹과 비난의 꽃말이 같은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마치 팬을 많이 거느리는 연예인일수록 안티 팬도 많은 것과 같다. 수 백의 잎으로 피어나는 낱장 하나하나마다 다른 기억의 조각보를 지닌다. 인간의 기억은 예민한데다 부서지기 쉽다. 상처와 악의의 기억은 영광과 선의의 기억보다 깊고 오래간다. 따라서 상처나 악의가 더 깊어지기 전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조작하고 왜곡한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이다.진실을 본다고 그것이 언제까지나 진실로 남아 있지는 않는다. 우리의 기억은 보고 싶은 대로 가공하고 윤색한다. 본 것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봐야 했던 것만 기록한다. 남 보기 좋은 게 아니라 나 보기 좋으라고. 조각보 같은 꽃잎이 모여 한 송이 꽃이 되고 정원이 되고 들녘이 된다. 라넌큘러스 꽃잎이 벌어진다. 잎 얇고 빛 고운 저 기억의 꽃잎들, 한 장 한 장 보듬는다. 죽은 꽃잎은 떼어내고, 덜 핀 꽃잎은 여며준다. 각각의 틀에서 재편집되고 수정되는 연민 서린 꽃잎들, 그렇게 기억의 꽃송이는 피고 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4

진실로 두려운 것

방관자 효과라는 게 있다. 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곁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도와주지 않을 때 흔히 쓸 수 있는 용어이다. 주변에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울 확률은 낮고, 행동으로 옮기는 시간도 그만큼 길어진다.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돕겠지 하는 심리 때문이다. 아무리 옳고 좋은 일이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앞에서 제 오지랖을 펼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내가 나서지는 못하지만 나보다 나은 누군가가 나서서 그 사람을 도와주겠지 하며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방관자 효과 이론에 역행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그들은 지켜보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모든 일에 더 적극적이고 민첩하게 행동한다. 보통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유권자를 의식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제 선행의 활약상을 보아주는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제 입지를 굳히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한다.진실로 중요한 것은 방관자 효과와는 무관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나 말고 저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그들을 도와줄 것이라는 생각, 저 많은 사람들 중 내가 나서서 도와야 내 행동이 돋보일 거라는 생각 그 둘 다 옳지 않다. 군중 속 구경꾼이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상황을 회피하려 하고 아주 극소수는 구경꾼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그래도 희망은 있다. 정의감과 선함을 겸비한 이들이 도처에 숨어 있다 말없이 행하러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심으로 제 에너지를 쏟아 약한 자와 상대적으로 없는 그들을 돕는다. 그런 이들이 흔치 않기에 감동이 두 배가 되는 것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숙연한 두려움도 알게 된다.권세에 눌리지 않고 강자 앞에서 솔직할 것, 소외나 아픔에 공감하고 약자 앞에서 발 벗고 나설 것, 저 단순하고 담백한 명제 앞에 어찌 그리 담대한(?) 핑계는 많기만 한지. 이해타산 없는 순수한 영혼들을 만나거나 읽는 날, 내 두려움과 비겁함의 실체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이기적인 것인가를 확인하곤 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3

수련에 지름길 없다

`수양`의 사전적 뜻은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품성이나 지식·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림`이라고 되어 있다. 반면에 수련은 `인격, 기술, 학문 따위를 닦아서 단련함`이란다. 제목에 수양이란 낱말을 넣으려다 수련으로 선회했다.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수양이란 말보다는, 최선을 다하면 족하다는 의미가 깃든 수련이란 말이 덜 부담스러워서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는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함이 없으면` 어떠냐고. 공자는 그것도 괜찮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고 답한다. 자공은 `시경`에서 `자르고 쓸고 쪼고 간 듯하다(절차탁마)`고 했는데 그런 걸 말씀하시냐고 되묻는다. 같이 시를 논해도 될 만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며 공자는 자공을 칭찬한다.`논어`의 학이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내 식으로 재구성해봤다. 마음을 다스리거나 인격을 도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던가. 결심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행해야지 결심하기가 무섭게 결과는 언제나 저렇게 행동한다. 가난하면 비굴해지기 쉽고, 부유하면 교만해지기 쉬운 게 사람이다. 각각 두 상황에서 아첨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런데 공자는 그것을 넘어 없이 살아도 즐거워하고, 부자더라도 예를 지키기를 좋아하라고 가르치신다. 똑똑한 제자 자공은 스승의 이런 마음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노력 없이, 수련 없이는 인격이 완성될 수 없음을 스승의 입을 통해 확인한다.학문이든 인격이든 예기든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톱으로 자르고 줄로 쓸고 끌로 쪼며 숫돌에 가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오늘도 만족할만한 수련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마감했다. 맘먹은 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고, 성인들은 부러 절차탁마라는 어려운 수련법을 범인(凡人)들에게 제시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수련에 왕도 없단다. 그저 자르고 쓸고 쪼고 갈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2

본성 속 덕성

`어려울 때 친구가 참된 친구`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어려울 때`라는 말은 당사자 둘 중 하나만 그런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 나머지 상황이 괜찮은 사람이 그 친구 곁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주는 경우 이 속담은 유효하다. 그렇다면 둘도 없던 친구가 곤경에 빠지고 그 때문에 나 또한 힘들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옛날에 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재상이 있었다. 상하귀천을 따지지 않아 종들과 비슷한 일상을 꾸리기를 좋아했다. 자신이 고기를 먹으면 종들에게도 고기를 주었고, 종들이 김치를 먹으면 자신도 김치를 기꺼이 즐겼다. 그것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라 생각했다. 그러던 중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설상가상으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기와 김치를 가리지 않고 함께 먹었던, 식구라고 여겼던 종들부터 모두 떠나가 버렸다. 몹시 야속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시간이 흘러 복권이 되어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다. 종들이 가장 먼저 돌아와 같이 일하기를 청했다. 재상은 배신감에 고래고래 고함부터 질렀다. 그러자 한 종이 말했다. “주인님, 어찌 사람의 본성을 모르십니까. 어른께서 우리와 고기를 나눠 먹든, 김치를 같이 먹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려워지면 제 살 길을 찾아 떠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어른께서 덕을 베풀지 않았다면 이 많은 종들이 다시 재상님을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인간은 매번 도덕적·이성적 판단에 맞는 행동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이게 정답인 줄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저렇게 행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그 모든 것에 앞서 `내가 살아야 하는 실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낭패가 뒤따르고 부덕의 자괴에 몸서리치더라도 인간이 인간이려면 덕성의 소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제 것을 지키는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 속에서도 타자의 덕성이라는 후의는 결코 잊히지 않으리라는 선한 믿음. 그 믿음이 주는 밝음 때문에 덕을 짓는 사람들의 행보는 오늘도 이어진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10-21

어쩐지 몽롱한 사유

2014 노벨 문학상은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가 받게 되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라고 그 작품을 다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지만 상을 탔다니 예의로라도(?) 일단 책을 산다. 모디아노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어 은근히 기대를 했다.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도착했다. 첫 문장부터 맘에 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가 죽었다` 의 `이방인` 이나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줘`의 `모비 딕` 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첫 문장이다.잃어버린 과거 찾기가 주 내용이고, 나의 정체성 확인하기가 주제처럼 보인다. 부담 없는 두께라 시간적으로는 금세 읽힌다. 그렇다고 쉬운 책은 아니다. 뭔가 몽롱해진다. `나` 롤랑은 과거 찾기에 성공한 것인가, 거듭되는 자아 발견의 고민은 해결된 것인가. 결말 없이 책을 덮고 나면 머리만 무거워진다. 한참 멍하게 있다 정신을 차린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어찌할 수 없는 `몽환의 자아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내가 기억하는 내 과거는 온전히 내 것일 리 없고, 타자 기억 속의 내 과거 역시 타자가 기억하는 내 모습일 뿐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어딘가에 실존하되 어디에서도 진실로 발견되지 않고, 그 누구도 실체를 알 수 없는 자아라는 수수께끼. 그 근원적 모호함에 대한 서술 방식이 참으로 프랑스 소설답다. 페드로가 잠시 살았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독자로 하여금 자신 또한 그런 거리를 찾아 배회하게 하는 힘, 그것이 모디아노를 놓지 못하게 하는 원천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확실한 것은 “어느 날 무(無)에서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리는 게 우리 삶이란 것. 인파로 붐비는 백사장 사진 속, 모래알 같은 배경이 되었다가 한순간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는 `해변의 사나이` 같은 존재가 바로 `나`라는 것.이 가을, 몽롱한 사유의 거리에서 자아 찾기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