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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모든 것, 백성

김탁환의 두 권짜리 소설 `혁명`을 완독했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체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역사 소설인데도 스토리에 치우치지 않은 것도 맘에 들고,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위안이 된다. 한마디로 취향이 맞으니 금세 읽힌다. 역사 소설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서사를 원하는 독자라면 이 소설이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등장인물의 디테일한 내면의 소리나, 담백하면서도 정돈된 문체 미학을 곁에 두고 싶은 독자라면 곁에 둬도 좋은 책이다. 이성계, 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대로 화자가 교차되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성계는 해주에 있고, 왕과 정몽주는 왕성에 있으며, 정도전은 유배지이자 고향인 영주에 머물러 있다. 정몽주가 살해되기 직전의 18일 간이란 시간을 역사적 기록을 빌려와 작가적 감수성으로 직조해냈다. 혁명이란 제목에 걸맞게 정도전의 내면이 가장 많이 투사된다. 혁명가의 내밀한 비망록을 전하는 작가의 상상력은 치밀하고 촘촘하다. 작가는 생의 가장 아련한 지점, 가장 극적인 순간만을 취함으로써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물론 밀도 높은 문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동문 학자로서, 혁명 동지로서 정몽주와 정도전은 같은 꿈을 꾸었다. 백성이 주춧돌이 되고, 재상이 대들보가 되며, 왕이 지붕이 되는 이상적인 세상. 하지만 현실 정치는 권력의 이전투구장일 뿐이었다. 정치는 타이밍이자 힘이 지배하는 논리이다. 그 둘의 기회를 잡을 줄 아는 자는 역사의 승자가 되고 그것을 놓친 자는 연민을 부르거나 잊힌 자가 된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후자의 운명이었다. 그들에게 혁명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였다.짧은 시간적 배경과 한정적인 공간적 배경 때문에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역시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다소 아쉽다. 그렇지만 `사직보다도 임금보다도 귀한, 결코 갈아치울 수 없는 그와 나의 모든 것, 백성`이라는 말 한마디를 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효용은 차고 넘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8

평정심 유지하기

기억의 자기력은 얄궂다. 대개 기억은 좋은 쪽보다 나쁜 쪽의 힘이 세다. 주변의 가깝거나 먼 사람들 대부분은 특별히 악하거나 선하지 않다. 그저 좋으면 웃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분노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그 평범한 사람이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적이 있으면 그것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한 더 많은 좋은 기억이 있음에도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상처는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약화시키는 속성이 있다. 타자에 대한 좋은 쪽의 기억은 나쁜 쪽의 기억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타자에 대한 나쁜 쪽의 기억은 단 한 번이라도 깊이 각인되고 나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기억에도 적용되는 셈이다. 상처는 나쁜 기억을 낳고 그것의 자기력은 끈질기고 뭉근하게 우리 내면을 괴롭힌다. 그 상처의 길은 끝내 기억을 왜곡한다.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내 기억과 당신의 기억이 다른 것은 모든 개별자는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편리한 대로 가공하고 아쉬운 대로 재배치되는 게 사람의 기억이다. 기억은 대체로 믿을 만하지만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못 된다.한편으로 기억 인자가 자기 유리한 대로 재편성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기억이 만약 원형질 그대로 재생된다면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안 그래도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끈질기게 우리의 심리적 옷자락을 잡아당기는데 왜곡조차 되지 않고, 가공조차 되지 않은 채 재현된다면 제 기억의 한계가 부끄러워 더한 상처를 받게 되는 건 아닌지.떠올리기 싫은 기억은 내면의 고통을 부른다. 고통은 평정심을 흐트러뜨리고 급기야 자기 연민으로 치환되곤 한다. 그 연민이 다 이해받는 건 아니니,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냉정한 조언을 준다. `네 연민조차 지나친 기억의 왜곡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음을 상기하라`는 것. 그렇게 부단히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게 삶인 것을./김살로메(소설가)

2014-07-17

정치가의 덕성

권력의 세계에는 법의 지배와 함께 힘의 지배도 요구된다. 숱한 영웅들이 제 나름의 정치적 덕성에 따라 역사를 장식했다. 요동치는 격변의 세상, 정치판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자는 끝내 힘의 논리를 거부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권력 쟁취라는 면에서 승리한 그들은 자신이 지닌 정치적 역량에 따라 훌륭한 리더로 추앙되거나 함량 미달의 독재자로 추락하곤 했다. 여말조선 초, 격동의 시기 군웅들이 할거했다. 그 중 정치적 리더로서 제 나름의 덕성과 개성을 확보한 이는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 등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위기의식으로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여준 방식은 셋이 지닌 덕성이나 개성만큼 달랐다. 극적인 드라마의 소재가 될 만큼 치열한 권력 투쟁을 했다.우선 정몽주는 원칙에 입각한 인물이었다. 두 임금을 모시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역성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못했다. 끝내 반대 노선을 택했고 죽음으로서 제 정치적 덕성을 실현했다. 이방원은 구체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보다는 권력의지에 무게를 둔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덕성은 법과 제도에 충실한 신념에 있다기보다, 요즘 유행하는 의리에 바탕을 둔 인간 경영에 무게를 두었다. 마지막으로 정도전은 주자학의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이론과 현실을 접목한 인물이었다. 이념과 제도를 바탕으로 한 권력 지향적 인물이 정도전이었다.정치적 자질로만 보면 정도전은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이상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운명이 쏠리는 곳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운명은 이방원 쪽으로 기울었다. 정치가의 덕성은 일반 철학에서 말하는 덕성과는 다르다. 정치적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 그것이 정치에서 말하는 덕성이다. 이방원의 힘이란 덕성이 정몽주의 원칙과 정도전의 이상이라는 각각의 덕성을 눌렀다. 결과가 아니라 합리적인 생각만을 그 기준으로 할 때, 사람들은 정도전의 정치 이념에 손을 들어준다. 그리하여 역사의 승리자가 못 된 심적 동반자로서 그의 실천적 의지를 응원하게도 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6

정도전의 철학

정도전 정치 철학의 기본 이데올로기는 주자학과 정전제와 재상제였다. 얼마 전 종영한, 그를 타이틀로 한 주말 드라마에서도 이 정신만은 온전히 투영되었다. 정치적 기초 질서로 주자학을, 민본의 생업 토대로서 정전제를, 이상적인 권력 제도화로서 재상제를 설계했다. 우선 그는 더 이상 불교가 정치 이념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정치의 요체는 `질서`였다. 천지만물을 아우르는 불교의 가상적 윤회관은 이를테면 군신과 부자 관계 등으로 이루어지는 현실의 상하질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정도전 정치철학의 기본은 차별적인 상하관계를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차이를 부정하는 불교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경제적 토대로서 그가 내세운 것은 정전제였다. 어떤 정치 제도도 그것을 받쳐줄 경제적 기반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다. 정도전 정치의 활동 방향은 `의식의 풍족`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바탕에 백성이 있었다. 민생 안정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토지개혁을 내세웠다. 대토지를 소유한 기득권에 맞서 국가권력의 지배가 미치는 토지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마지막으로 권력의 제도화로서 재상제를 주장했다.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관료체제가 요청된다고 보았다. 그가 이상으로 내세운 재상은 식견과 도량과 덕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재상의 시비와 적부를 논하고, 재상은 군주를 바르게 보필해 서로의 임무를 다함으로써 정치적 권위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정도전 정치 철학이 새삼 조명되고 있는 이유는 그의 사상 밑바탕에 민본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밥벌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백성 없이 나라 없다. 제 정치적 신념으로 조선왕조 건국에 크게 기여한 정도전이 민본정치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주목 받아 마땅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5

용서, 위안부의 경우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따라서 설득이나 학습된 강요에 의한 용서라면 한참 미뤄져도 좋다. 때 아닌 용서는 더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 맘 편하고자 용서하라고 한다든가, 용서는 빠를수록 좋다는 등의 섣부른 감화를 조장하는 말에는 쉽게 동의하지 않으련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이면의 여러 상황과는 별개로 할머니들의 심적 태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기억과 경험`에만 의거한 반쪽 의견에 우리 국민 정서가 움직이고,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여러 오해와 복잡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간 위안부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두 나라의 화합적 미래를 위해서라도 식민지 경험의 왜곡에서 벗어나 용서함으로써 과거에서 자유로워지자는 게 저자의 논지이다.위안부를 총체적 피해자로 규정하면서도 저자는 가해의 궁극적 주체가 일본이라는 점을 피해가는 모양새를 취한다. 예를 들면 업자와 포주란 모집책이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위안부 문제를 `온건통치의 범주에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불법을 자행`한 면이 있다고 쓴다. 깡패집단 보스의 잘못이 `온건`으로 이해되거나 행동대장의 잘못만이 `불법`으로 치부되는 시각이 독자로서 불편하다. 조선 위안부가 겪은 상황을 구별해서 인식하려 한 점도 껄끄럽다. 그들 대부분은 관리매춘에 해당하기 때문에 중국 점령지에서의 일회성 강간이나 네덜란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속적 폭력과는 달리 봐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 위안부의 상황이 그 둘의 경우와 분명히 다른데 그들의 기억인자는 후자의 방식으로만 발현된다는 것이다.적극적 공감 능력이 부족한 저자의 시각이 아쉽다. 자발적 형식이든, 공포적 속수무책이든 정황상 비인륜적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었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 맥락을 깊이 성찰하는 게 먼저지 용서가 급한 건 아니다. 후대에게 숙제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닌 건 아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 용서를 미루는 건 잘못이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4

갈 길이 멀다

독도에도 텃밭이 있을까? 온통 바위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설마 보자기만한 텃밭 하나 만들 땅이 없을까?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하려면 독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잘 알려면 직접 그곳을 경험하면 된다. 독도를 터전 삼아 살아본 사람만이 가장 현장성 있는 답을 줄 수 있다. 오늘 그 확실한 답을 알게 되었다. 전충진 기자의 독도 현장 르포인 `여기는 독도`의 한 장면. 독도에 살러 간 기자에게 가족과 지인은 각각 질문을 한다. `독도에 슈퍼마켓은 있는가, 독도에 밭농사는 좀 할 수 있는가`하고. 독도에 슈퍼마켓이 있을 리 없다. 극히 제한된 주민이 살거나 드나들 뿐이니 구멍가게조차 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밭농사는 좀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자신이 없다. 막연히 섬 한쪽 어딘가에 손바닥만한 텃밭이라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그러고 보니 독도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알아야겠다고 적극적 노력을 한 적조차 없다. 이 책에서 알게 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외국 사람들의 70퍼센트가 독도를 일본 땅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한 예로, 미국에 유학하러 간 대학원생의 전언에 의하면 자신만 빼고 다른 모든 외국 학생들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여기더란다. 왜 한국 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교수의 질문에 이 대학원생은 한 가지 답밖에 할 수 없었단다. 한국인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으니 한국 땅이라고. 이렇게 빈약한 논리로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제대로 주장할 수가 없다.독도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러한 우리의 약점을 알기라도 하듯 그들은 틈만 나면 독도가 저들 땅이라고 우긴다. 지피지기라야 백전백승할 수 있다. 하지만 독도 문제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 지피지기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점유했다고 다 우리 것이 되는 건 아니다. 독도 공부를 제대로 해, 아집에 둘러싸인 일본의 부당한 처사에 논리적 맞대응을 하고 싶다. 그러기엔 가야할 길이 너무 멀다.참고로 독도에는 `파 한 뿌리 묻을 만한 곳이 없다`는 게 작가의 전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11

꼰대라는 말

`늙은이`나 `선생님`을 가리키는 은어가 `꼰대`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렇다고 실생활에서 그 말이 두 부류를 한정해서 쓰이는 건 아니다. 고루한 생각을 강요하거나 제 말만 옳다고 남을 설득하기를 즐기는 모든 사람은 꼰대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미있는 건 자신이 꼰대인 줄 모를수록 꼰대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수록 누구나 조금씩 꼰대가 되어 간다. 원하지 않아도 뒤를 잇는 세대가 기성세대를 그렇게 규정해버리는 한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기도 한다. 상황이 아니라 시간이 사람을 꼰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제 아무리 꼰대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도 그들이 우리를 꼰대로 여기는 한 그렇게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이 들수록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슬프기 한량없다. 기성세대의 `꼰대스러움`에 대한 경고문으로 읽히기 때문이다.꼰대인가 아닌가를 가늠하는 흔한 방법 중의 하나는 “요즘 애들은 말이야”하는 말을 얼마나 자주하는지를 체크하는 일일 것이다. 인류 언어 역사와 함께 생겨난 말이 `요즘 애들은` 이란 말이라고 할 정도로 앞선 세대는 뒤따르는 세대에게 질책성 또는 훈육성 언어를 쓰기를 즐긴다. 따지고 보면 언제나 `요즘 애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없는 `기왕의 어른`의 실존적 서글픔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걸 바라보는 씁쓸한 자괴의 심정에서 만들어낸 말이 `입은 닫은 채 지갑만 열라`는 것이 아닐까 싶어 씁쓸한 면도 없지 않다.대접 받으려는 마음, 내가 옳다는 믿음, 젊은이는 가르침의 대상 등이란 생각 때문에 꼰대라는 은어가 생겨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꼰대는 되지 않는 게 좋겠지만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레 꼰대로 비춰지는 건 세월 탓이니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 완전히 젊은 세대에 동화될 수는 없겠지만 말끝마다 `요즘 애들이란` 하는 추임새를 넣는 횟수를 줄이는 노력만으로도 꼰대 되는 속도를 어느 정도는 늦출 수 있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7-10

그때그때 나누기

누구나 혼자일 수는 없다. 직간접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산다. 나무 한 그루가 물과 햇빛과 공기를 만나 성장하듯이 우리 개별자도 다른 사람들이란 여러 환경과 만나는 가운데 인격적 성숙을 도모한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타인이 곧 지옥`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이고 보석이다. 꽃으로 때릴 수 없고, 보석으로 물수제비를 뜰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친구인가 아닌가의 기준은 나이에도 환경에도 취향에도 있지 않다. 맘 편히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모든 관계는 친구로 불려도 마땅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식탁 예절을 의식해야 하거나, 밥상 앞에서 뭔가 부자연스런 느낌이 오가는 사이라면 아무리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도 친구라 하기엔 껄끄럽다.산해진미 가득한 밥상보다도 소박한 콩국수 한 그릇을 앞에 둔 사이가 훨씬 맘 편한 이유가 여기 있다. 밥상의 질이 친구 관계를 좌우하는 게 아니라 편하게 이어지는 대화가 이미 좋은 양식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함께 하는 음식이 소박한 만큼 함께 나누는 얘기 또한 그러하다. 클라이맥스 없는 일상 드라마 속에 눈물이 있고, 지혜가 있고, 공감이 있다.나누면 나눌수록 끝이 없는 게 친구들과의 수다 속성이기도 하다. 어둠에 잠긴 무덤 같이 맘이 무거운 날이나 바람 빠진 공처럼 속이 허한 날에는 내남할 것 없이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하자. 짜인 틀이 필요치 않는 사람끼리 크게 웃고 실컷 떠들든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웃고 떠드는 가운데도 배울 게 있다. 헤어질 때쯤이면 다 알면서도 실천하기 힘든`생활 속 지혜` 하나쯤을 덤으로 얻는 건 친구들과의 수다 매력이기도 하다.가령 오늘처럼 가스레인지나 그 주변 벽은 그때그때 훔치는 게 진리라는 것을 새삼 깨치게 되는 건 어떤가. 하루 일분만 투자하면 평생 깨끗한 가스레인지를 곁에 둘 수 있다. 매사가 그렇다. 친구인들 예외일까. 내 받은 것 이상으로 그때그때 조금만 신경 쓰면 될 것을 편하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미뤄둔 것은 아닌지. 가장 쉬운 게 가장 실천하기 어렵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9

성찰이 필요한 이유

악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악은 특별하지 않다. 악은 평범하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언이다. 아렌트 여사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쉽게 읽힐 거란 내 예상은 빗나갔다.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방청기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단순한 기고문이 아니었다. 철학자의 글답게 시종일관 심오한 문투다. 호기심이나 흥미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다 보니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다. 몰입이 잘 되면서도 금세 읽지 못하는 것은 공감이 가는 장면마다 생각이 가지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 상황, 그 환경에서 아이히만과 다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삼라만상의 그 무엇을 내 눈의 잣대로 규정짓고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내 안의 선이 그리 특별하지 않듯, 내 안의 악 또한 그러하거늘 왜 우리는 유독 타인의 악행에만 그토록 분노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이 책이 그토록 회자되는 건 단연 부제 때문이다. 대놓고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고 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란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인간 보편성의 기저에는 악의 평범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게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보통의 악, 평상의 악이라니 섬뜩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절대의 선, 객관의 선을 행사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재판을 방청한 그녀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저 직책과 명령에 충실했을 뿐, 어디에도 광적 학살에 집착하는 악의에 찬 기질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무능성` 때문이었다고 아렌트는 짚어낸다. 판단의 무능성은 사고와 성찰이 부족할 때 생겨난다. 악의 평범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지속을 경계할 수 있는 올바른 사고 체계의 확립이 문제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선명해진다. 악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철학적 사유의 반성으로 이끌게 하는 힘, 그것이 한나 아렌트의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8

하틀리의 바이올린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개봉한지 이십여 년이 되어가는 영화 `타이타닉`을 생각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선율이다. 어릴 적 예배당 다닐 때의 그 가락은 낭만적 정서를 떠올리게 하지만 타이타닉에서의 그 현악 4중주 장면은 비감한 숭고함을 경험케 한다. 영화 속에서 연주자들은 약속된 피날레 곡을 신호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즉 탈출 대열에 끼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단원들과 작별인사를 하자마자 바이올린 주자이자 리더인 월레스 하틀리는 다시 바이올린을 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의 익숙한 선율.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것도 잠시, 나머지 연주자 셋도 돌아와 그 애잔한 멜로디 `내 주를 가까이` 연주에 동참한다. 위기에 직면해 우왕좌왕하는 승객들의 안타까운 장면을 배경으로, 담대하고도 처연하게 사명을 다하는 그들의 모습은 최고의 영화 장면으로 손색이 없다. 내남할 것 없이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의 안정을 전하기 위한 그들의 이타심은 거룩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그들의 자발적 희생은 실제 상황이었다. 영화 속에서는 4중주 멤버로 나오지만 실제는 8인의 악사들이었다. 하틀리는 70여 차례나 항해 경험이 있는 여객선 악사였다. 그의 시신이 십여 일만에 발견되었을 때 그의 허리에는 가죽 가방에 담긴 바이올린이 묶여 있었다. 약혼자가 선물했다는 그의 바이올린은 지난해 영국의 한 경매에서 우리 돈 15억원에 낙찰되었다. 타이타닉 관련 단품으로는 최고가였다. 많은 사람들이 비싼 낙찰가에 놀랐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가끔씩, 살았을 때의 제 삶을 재상영하는 프로그램이 다음 생애 시작 전에 반드시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곤 한다. 의식하지 못했던 내 실수와 내 약점은 하느님도 너그러이 봐주시겠지만, 의도한 내 악덕과 내 졸렬함은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월레스 하틀리의 먼발치에서 당신의 바이올린이야말로 숭고한 것이라고 눈빛이라도 건네 보려면 얼마나 선한 것들을 새겨야 할 것인가. 장맛 빛 하늘만큼이나 맘이 무거워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7

독도에 살다

책 제목을 칼럼 제목으로 삼기는 처음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만큼 이 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싶었다. 독도에 관한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독도 기자`로 알려진 전충진 작가의 신작 `독도에 살다`가 나왔다. 신문사 소속 독도 체류 기자로 활동했던 작가는 이전에도 독도 관련 책을 냈었다.`여기는 독도`라는 책인데 그 책이 정사(正史)였다면 이번 `독도에 살다`는 야사(野史)에 가깝다. 두 책 모두 작가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문장이 쉽고 간결해 부담 없이 읽힌다. 시도 때도 없이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일본의 최종 목적은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독도 문제를 제소하는 것이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전략의 한 방편으로 독도가 언급될 때마다 우리 국민 정서는 상처를 입는다. 아니 상처를 넘어 분노가 끓는다. 작가는 마냥 흥분하다 이내 사그라지는 우리의 태도에 경종이라도 울리듯 시종일관 깊은 성찰로 독도를 바라본다.작가는 앞뒤 재지 않고 독도살이를 자청한다. 누가 뭐래도 독도가 우리 땅이며, 우리 삶이 이어지는 공간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보다 진실하고 실천적인 방법이 어디 있으랴. 독도는 결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낭만적 정서에나 어울리는 외로운 섬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일상이 이어지고 역사가 진행되는 우리 호흡이 살아있는 터전이다.일 년여 간을 독도에 상주하면서 작가는 그곳의 자연과 사람, 역사에 대해 담담하게 기록한다. 애정과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펄떡이는 물고기 떼, 섬 주변을 맴도는 새떼, 바위틈에서 흔들리는 잡풀 하나에도 우리의 숨결이 흐르고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인다. 서도 어민숙소와 동도 등대를 번갈아 오가며 독도 깊이 알기에 도전한 작가의 실천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긴 인생에 비추어 일 년이란 시간은 짧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노고는 결코 하찮은 게 아니다. 독도와 한 몸 ·한마음이 되어 열정을 다한 작가의 진정성이 조금이라도 더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4

번아웃

번아웃 신드롬(burnout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탈진증후군이나 연소증후군을 뜻하는 신조어다. 의학적인 병명으로 알려진 건 아니지만, 현대 심리학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이다.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던 사람이 에너지 고갈로 탈진하는 상태가 된다. 신체적ㆍ정신적 극도의 피로감은 사람의 기를 소진시키고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제 아무리 의지가 굳고 심지가 단단해도 살다 보면 한계점은 온다. 오래된 친구처럼, 연민 서린 친척처럼 잊을 만하면 무기력과 자기연민이란 감정은 찾아온다.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한 일에 몰두하는가?` 이런 근원적인 생각에 빠져들면 심할 경우 우울증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아침에 눈 뜰 때 자신이 근사하다는 마음이 드는가, 기억력이 옛날 같지 않은가, 그냥 넘길 수 있던 일들에 짜증이 나거나 화가 돋는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가, 무미건조하고 삶의 행복이 멀게만 느껴지는가. 이 중 3개 이상 해당하면 번아웃 증후군을 의심할 만하단다. 겉으로는 잘 견뎌 보이는데 알고 보면 탈진증후군을 앓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현실적이고 정이 많은 이들일수록 속은 문드러지고 아린 경우도 있다. 현실에 발을 둔 만큼 이상 또한 높아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일에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면 몸과 마음은 많이 지친다. 그 정점에서 불길은 타오르고 연료는 금세 바닥이 난다. 그때부터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고 하더라도 제 완벽한 에너지를 쏟을 수가 없다. 소위 말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불타버린 연료는 몸과 마음의 예민함이란 후유증을 남긴다. 헐겁고 피폐해진 영혼에 수시로 연료를 보충해야 한다. 자가 점검 식 연료 보충이 가장 좋겠지만, 눈치가 빠른 친구라면 주변 점검자로 나서도 좋을 일이다. 열정을 지나치게 쏟아 붓거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하는 당신이라면 지금 당장 한 박자 늦출 타이밍이다. 정점의 시간은 필연의 번아웃이란 전야를 예고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호흡 쉬어간들 될 게 안 되는 건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3

전압 높은 글

작가 김훈은 `전압이 높은 문장이 좋다`라고 어떤 인터뷰에서 말했다. 전압이 높으면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도 강하렷다. 우선 높은 전압을 얻으려면 많이 축적해야 한다. 축적하려면 버려야 한다. 버리지 않으면 원하는 만큼의 전압이 생길 수가 없다. 버리는 만큼 내공이 쌓이고, 버리는 과정에서 높은 전압이 발생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김훈의 `칼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 소설로 읽히는 게 아니라 예의 전압이 높은 문장들로 직조된 한 편의 에세이 같다. `난중일기` 문체와 그의 문체는 닮았다. 많이 축적하기 위해 과감히 버리는 그 담백한 단단함. 이를 테면 이순신은 “각 고을의 색리 열한 명을 처벌하다. 군사 결원이 수백 명에 이르렀는데도 매양 속여 허위 보고를 하다. 그래서 오늘은 그들을 사형에 처해 목을 높이 매달았다. 모진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일기에 쓴다. 이런 문체는 김훈에게로 고스란히 전이된다. 군더더기를 버림으로써 전압이 높아지는 문장. 문장과 문장 그 한 호흡 사이에 수다를 떨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수다가 많아지고 호흡이 길어질수록 문장의 밀도는 낮아진다. 즉, 전압이 낮아진다. 하고픈 말을 삼킨 그 자리엔 깊은 우물 하나 생긴다. 물길은 깊고, 그 깊은 곳의 끝자락은 드넓기 한량없다.원고지에 연필로 또박또박 쓴다는 그는 몸으로 쓰는 사람이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느낌이 없으면 전혀 쓰질 못한다고 고백한다. 따지고 보면 글의 팔할은 몸이 쓴다. 거의 전부의 몸이 쓰고, 나머지 약간의 마음이 다듬는다. 몸으로 하는 글쓰기의 고통과 환희. 따라서 높은 전압의 글은 몸이 제대로 달아올랐을 때 쓸 수 있다. 마음에 아무리 전율이 와도 몸의 전압이 받쳐주지 않으면 글은 글이 되지 못한다. 헛구호로 그치고 만다.정직하게 몸부터 안달하는 자의 글은 밀도가 높다. 온몸으로 밀고 가는 언어에 성김이 없다. 수다가 들어찰 틈이 없다. 이순신의 일기가 그렇고, 김훈의 서사가 그렇다. 마음보다 몸이 앞서 쓴, 전압 높은 글에 독자는 감전되어도 좋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2

자비라는 명상

싫음의 감정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사랑의 감정은 막연하게 나타난다. 싫음의 감정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어떤 한 남자가 싫을 이유는 백 가지가 넘는다. 약속 시간을 칼 같이 지켜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생긴 것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한 옷차림새를 하는 것도 싫고, 유머랍시고 하는 말들이 어쩐지 유치해보여서 싫고, 심지어 내세울 게 없어 보이는데도 당당하게 보이는 모습조차 싫다. 이외에도 죄 없는 그를 싫어할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다. 반대로 한 남자를 좋아할 이유는 선뜻 대기 어렵다. 하자 많을지도 모를 그 남자를 왜 좋아하냐고 누군가 물으면 답은 오직 한 가지, 무조건이다. 객관적인 눈들이 후자의 남자보다 전자의 남자가 훨씬 괜찮다고 충고한다 한들 그것은 남자를 보는 판단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별자 감정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그 감정이란 게 객관성과는 무관하다는 거다.석가모니가 한 무리의 스님들에게 조용히 수행할 숲을 추천해주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명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무 정령들이 저들 거처에 스님들이 쳐들어온 것을 보고 격노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자비심`이라는 명상법을 가르쳐서 스님들을 다시 숲으로 보냈다. “이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유일한 보호책이니라.”라는 말과 더불어. 웬일인지 나무 정령들의 해코지가 멈췄다. 심술쟁이 정령들도 법복 입은 스님들이 뿜는 자비심이라는 파동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마음을 어지럽히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 의심,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은 내 맘에서 출발한다. 너그러움과 관대함에 대한 훈련으로 그 맘을 어느 정도는 다스릴 수 있다. 나무의 정령으로 상징되는 인간사를 다독이는 것은 너그러움의 힘이기 때문이다. 자비라는 연민은 타자를 향할 때 그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내 안으로 환원되는 감정이다. 스스로를 위한 궁극의 훈련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맘속 우물 하나 깊어질 수 있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7-01

점진적 성숙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과 달리, 나는 태생적인 겁쟁이다. 낯선 일을 싫어하고, 노상 허둥대고, 곧잘 상처받고, 넌더리나게 망설인다. 혼자 욱하고, 혼자 부끄러워한다. 사소한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졸렬하게 군다. 그걸 들키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한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 공감이 간다. 누구나 겁쟁이고 누구나 졸렬하다. 작가의 말처럼 필요에 의해 우리는 자제심을 발휘할 뿐이다. 사람의 성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작가는 `완강한 항상성`이라고 표현했다. 변하지 않으려는 본성적 자아와 변화를 원하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 자아의 끊임없는 충돌, 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인간의 특징이다.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는 기본적 생각에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말처럼 사람의 성질이라는 게 언제까지나 완강한 항상성을 유지한다고는 볼 수 없다. 사회적 요청이나 보편적 정서가 개별자에게 입력되면 그 완강함이란 벽은 허물어지기도 한다. 이 글 처음에 인용한 `필요에 의해 선택한 성격`도 그러한 면과 일맥상통한다.혼자 살 수 없는 사람에게는 두 자아가 있다. 내 식의 자아와 사회가 원하는 그 자아는 끊임없이 충돌한다. 이 때 자유인은 내 안의 자아와 사회가 원하는 자아가 충돌한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진정한 자유인은 그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다음, 그 둘의 충돌에서 내 안의 자아를 고집스레 승리의 방향으로 이끄는 자들이다. 개별적 이기주의자라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그 둘의 충돌에서 사회가 원하는 자아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평화주의자가 있다. 상황에 따라 누구나 자유주의자가 되거나 이기주의자를 거치거나 평화주의자를 자처하게 된다. 중요한 건 이 모든 패턴 속에 성숙이란 성찰이 함께 한다는 점이다.사람의 성정이 아무리 불변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점진적 성숙`의 절차를 밟는다. 완고한 특징을 지녔지만 점진적 변화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 그것이 사람 성정이 지닌 매력이 아닐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6-30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

“나는 너무 깊게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본다.” 콜린 윌슨의 비평집 `아웃사이더`1장을 펼쳐본 적 있는 이에게는 무척 익숙한 문장이다. 문학작품 속 여러 유형의 아웃사이더를 거론하면서 윌슨은 가장 먼저 앙리 바르뷔스의 소설 `지옥`을 언급했다. 거기에서 주인공 `나`가 독백처럼 저 말을 내뱉는다. 너무 깊게 많이 보는 `나`를 아웃사이더로 규정해준 콜린 윌슨 덕에 앙리 바르뷔스의`지옥`은 좀 더 유명해진 셈이다. 오묘한 인간의 본질적 특성에 집착하고 통찰하는 바르뷔스 식 아웃사이더가 있는가 하면 오히려 너무 깊이 너무 많이 보는 것과는 무관한 아웃사이더 유형도 있다. 가시적인 사회적 관계망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모든 아웃사이더들이 닮았다. 진실을 보려하고 그것에 충실한 것은 모든 아웃사이더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카뮈가 창조해낸`이방인`의 뫼르소는 거기에 더해 정직한 감정을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여기서 정직이란 도덕적 책무로서의 정직이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요구하는 본능적 정직을 말한다. 뫼르소에게는 엄마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카뮈가 말하려한 정직성이었다. 뫼르소에게 `엄마`에 대한 애정의 유무와 애도의 형식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 두 개를 연결 지어 판단한 것은 세상의 눈들이다.아웃사이더는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주눅 들지 않는다. 타자에 기대지 않으니 눈치나 망설임을 친구로 두지 않는다. 우정을 구하거나, 애정을 갈망하거나, 연민을 부르지도 않는다. 악이든 선이든 있는 그대로의 본질에 충실하다. 따라서 욕망하고 번민하는 보통의 존재로 남는 한 우리는 결코 이방인의 뫼르소가 될 수 없다. 진실을 몸소 실천하려는 트러블 메이커의 운명이 아웃사이더의 길이라면, 인사이더는 관계의 지속을 바라는 평화주의자들이다. 정직하지 않을 예의가 정직할 무례보다 덜 위험하다는 암묵적 약속을 알기에 우리는 기꺼이 사회적 동물로 살아간다. 뫼르소 식 아웃사이더가 드물어도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27

요량의 철학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예교실에서였다. 연세 지긋한 한 분이 밤새 써온 글을 발표하신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잘 보이던 젊은 한 때, 좋아했던 여성분이 선물해준 책 한 권에 관한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다. 박목월 시인의 수필집`밤에 쓴 인생론`이란 책인데, 그 안에 나오는 어떤 한 장면이 평생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 장면을 생각하노라면 자연스레 책을 선물해준 여성분도 연상이 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애틋해 다시 한 번 그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요량의 철학`이란 소제목이 달린 부분이 재미난 한 장면인데, 식모 `요량댁`은 요량이란 말을 요량 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다.어린 딸을 잃은 아픔을 누군가 위로할라 치면 “시집 간 요량하지요.”라고 너스레를 떤다거나, 돈지갑을 잃어버렸을 때에도“약값으로 쓴 요량하지요.“ 라고 여유를 부릴 줄도 안다. 아픔이나 슬픔을 체념이나 달관의 경지로 승화시킬 줄 아는, 털털한듯하지만 강단 있는 요량댁의 좋은 이미지를 글쓴이는 평생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던 모양이다. 그분은 책을 선물해준, 고왔을 그 여자분에게서도 요량댁과 비슷한 인생관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작품을 낭독하던 봉사자 한 분이 그 책을 녹음해드리겠다고 자청하신다. 녹음도서가 완성되려면 한 달 이상이 걸리겠지만 기꺼운 목소리로 봉사하시겠단다. 그것이 지난 주 일이었다. 오늘 문예교실에 글쓴이는 예의 그 수필집을 들고 오셨다. 녹음해 주시겠다던 봉사자의 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1960년대 말에 출간된 책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편집된 데다 글자 크기도 겨우 8포인트를 넘길 정도였다. 유행 지난데다 조악해 보이기까지 한 책인데 들여다보자니 까닭모를 뭉클함이 몰려왔다. 그새 나도 요량의 철학에 감염되었나 보다. 일상의 힘든 고비를 만날 때마다 이제 “냉수 목욕한 요량하지요.”라며 짐짓 여유를 부릴 수 있으려나. 나아가 젊은 한 시절을 그리워하는, 한 사람의 그 섬세한 떨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려나./김살로메(소설가)

2014-06-26

노력하기

그림을 잘 그리려면 타고난 손재주가 있어야 하고, 노래를 잘 부르려면 물려받은 목청이 좋아야 한다.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 부른다 해도 각각 천부적인 화가와 선천적인 가수와는 견줄 도리가 없다. 선천적인 재능과 미적 완성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대개의 예술이 타고난 재능과 순간의 영감 그리고 개별자의 노력으로 완결된다고 보았을 때, 선결조건인 재능이 충족되지 않으면 후자의 두 조건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노력하는 살리에리가 타고난 모차르트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포기할 것인가. 그래서는 안된다.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문학을 하거나 글을 쓴다는 행위를 예술의 영역에 빗대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재능이라는 면만 따로 떼서 보자면 글쓰기는 재능과는 멀어져도 큰 상관이 없다는 쪽이다. 기본적으로 글쓰기는 노동이다. 다른 예술 분야처럼 재능이 있다면 노동의 길이 쉬울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없다고 지레 포기해서도 안 된다. 예술에 앞서 노동인 글쓰기는 노력만으로도 그 한계를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재능은 타고 나야 한다는 말 속에 숨은 공허한 울림을 이해하고 나면 재능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그녀의 생각은 옳다. 사실 재능은 낡은 신발만큼이나 흔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재능을 지니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점은 중요하지 않다.” 도러시아 브랜디 여사의 `작가 수업`추천사에 나오는 말이다. 글쓰기에도 재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미술과 음악 등의 분야만큼 재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설사 많은 재능이 필요하다 해서 지레 겁먹고 도망갈 것까지는 없다. 글쓰기는 노동에 속하고 그 숙련도는 노력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는 것도 어렵고 노래 부르는 것 역시 만만찮다. 글쓰긴들 다르겠는가. 하지만 글쓰기에서만큼은 노력이 곧 재능이라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예술을 포기한 자리의 신산한 노동이 그래야 희망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25

한 호흡에 실어보내기

길게 보아 우리 삶은 한 호흡이다. 숨 한 번 쉬고 돌아서면 사라지는 덧없는 삶. 거의 모든 것의 원리가 호흡 하나로 모아진다고 생각하면 숨 한 번 들이켜고 내쉬는 일이 새삼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알겠다. 사람답게 사는 여러 경구 중 “좋은 친구가 되고 싶으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주라”는 말과 “베풀 수 있으면 베풀어라. 그런 다음 잊어버려라.”라는 말을 새기곤 한다. 좋은 친구 되기는 저 말처럼 그리 어렵지 않다. 호감을 가지고 진솔함으로 먼저 다가가면 되니까. 흔히 친구가 없다고 푸념하거나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선인들의 저 말씀을 새겨듣지 않거나 알고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보다 먼저 다가간다는 것이 어쩐지 쑥스럽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자존심에 손상을 입는다고 생각해 제 호감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원하기만 하면 이것도 훈련에 의해 극복할 수 있다.문제는 `베풀었으면 깨끗이 잊어버려라.` 단계이다. 어린왕자가 장미꽃에게 물을 주고 고깔을 씌워주듯, 여우가 황금빛 밀밭을 보면 어린왕자의 금발 머릿결을 떠올리듯, 좋은 친구가 되기로 맘먹은 이상 우리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다. 한데 그것이 어느 한 쪽의 일방적 시혜일 경우에는 그 상황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어린왕자가 장미꽃에게 서운함을 느껴 제 별을 떠났듯이 인간적인 번민으로 갈등하게 된다. 마냥 베풀고도 태연무심해지기엔 우리 심리 기저에는 여전히 `내 맘을 알아봐줬으면` 하는 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기실 이런 욕망들은 베푼다는 것의 본질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럴 때 한 호흡의 원리를 떠올리면 좋다. 빚도 베풂도 한 호흡에서 나온 한 갈래 숨결이다. 고마움을 몰라주거나 모른 척하는 당신이, 그래도 베풀지 못해 불편한 내 마음보다는 낫지 않던가. 어쩌면 고마움을 몰라줘서가 아니라 당신 눈에 담기고 싶은 내 욕심이 베풀고도 끝내 깨끗이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 설워말자. 한 순간, 한 호흡에 모든 (부질없는) 것들은 실려 가고 말 것이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6-24

동정, 연민 그리고

동정과 연민의 사전적 뜻은 이렇다. 동정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또는 `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풂`이라고 되어 있다.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김`이다. 사전적으로 `동감`이라는 의미에서는 두 말이 비슷하게 묶여 있지만 정서적으로 풍기는 뉘앙스는 서로 조금 다르다. 예를 들어 숲길 초입에 상수리나무 한 그루 가지가 부러진 채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치자. 최근 들어 비바람이 몰아친 적 없으니 자연재해는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나무둥치엔 대못 몇 개가 박혀 있다. 멧돼지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려다 그랬는지, 운동 기구를 설치한 흔적인지 연유는 알 수 없다. 길섶의 부러진 생나무는 오가는 등산객의 발길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밟힌다. 둥치에 박힌 대못을 눈 여겨 보는 이조차 드물다.동정은 널브러진 나뭇가지를 치우고 둥치에 박힌 못을 빼주는 행위를 말한다. 연민은 거기에다 감정이입이 되어 그 나무가 불쌍하고 가엾기 그지없는 맘을 일컫는다. 동정은 적극적 동감을 요구하진 않는다. `저 나무가 나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라는 맘이 전제로 깔린다. 연민은 `저 나무가 곧 나여서 눈물이 나.` 라는 감정 상태이다. 동정이 실행의 의지에 바탕을 둔다면 연민은 마음의 발로에 영향을 받는다. 이 두 감정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자신의 세계 안에서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사랑이란 감정과 비슷해 보인다. 따라서 이 둘을 사랑과 혼동하기도 한다.하지만 동정과 연민은 사랑과는 구분되는 감정이다. 안타깝고 가여워서 나오는 행동과 마음은 잉여의 감정이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던질 수 있는 맹목의 감정은 아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기만할 때 흔히 동정과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연민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온전한 사랑일 리가 있겠는가. 무엇을 위해 손 내밀 수는 있지만 그 무엇을 위해 다 던질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면 동정하고 연민할 틈조차 없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