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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밀 졸라의 경우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악의적인 무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때가 되면 진실은 어김없이 한 걸음씩 전진하게 될 것이다. 진실은 모든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에밀 졸라의 명문 선집 `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은행나무)이 완역 되어 나왔다. 자신이 직접 엮은 것으로,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해 드레퓌스 사건에 관련된 많은 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해 전 유럽의 지성적 양심을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에 일어났다. 장교 드레퓌스는 독일군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혐의 없음, 이라는 명백한 증거들이 숱하게 나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게 빌미가 되었고, 국가 안보와 군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한 사람의 희생양이 필요했다. 비공개 재판에서 드레퓌스는 유죄를 선고 받았다. 그때 드레퓌스의 결백을 밝히는데 주저함 없이 앞장 선 이가 에밀 졸라였다.언론은 사건의 진실보다 마녀사냥을 즐겼다. 반유대주의 여론을 앞세워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몰았고, 드레퓌스의 결백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을 압박했다. 에밀 졸라는 굴하지 않았다. `절대왕정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악한 일이 자행되는' 것을 막고자 기꺼이 펜을 들었다. 무려 열 세편의 격문을 발표하며 국가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성토했으며, 진실과 정의를 옹호하는데 온힘을 다했다.기망이 횡횡하는 이 시대, 양심에 흔들림 없이 행동한다는 건 쉽지 않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흥분하거나 분노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하지만 타자의 인권이나 공익적 진일보를 위해 제 양심을 거는 건 흔치 않다. 뒤숭숭하기만 한 요즘 양심을 깨치는 영혼의 외침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려온다. 그것이 공익이나 약자를 위한 것일 경우 공감지수와 흥분지수는 높아진다. 혁명은 위대하고 큰 것만은 아니다. 선을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혁명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에밀 졸라는 그것을 실천한 작가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28

이 봄날

온 나라가 슬픔의 도가니다. 며칠 째 집단 우울에 감염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직접 고통을 당한 분들에 비할까만 근래에 이토록 안타까움과 갑갑함에 절망해본 적도 없다. 세탁소 옷걸이에 걸려 있는 실종 학생들의 교복들. 며칠 째 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는 처연한 그것을 방송사 카메라가 클로즈업한다. 말 없이 비춰주는 그 장면만으로도 또 눈시울이 붉어진다. 슬픔을 덜어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일부러 과장된 명랑을 낯빛에 심는다. 독서모임이 있는 날이다. 자유 토론에 들어가면 오늘도 어김없이 눈물바다가 되고 말 것이다. 웃음을 되찾을 묘안을 짜본다. 애송시 낭송 대회를 열기로 한다. 떨어지는 봄꽃에게도, 날아드는 꽃가루에게도, 또한 그 봄을 맞이한 우리 모두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다. 속울음 삼키며 저마다 준비한 시를 읊는다. 가슴 가득 쌓인 절망의 켜들이 조금이나마 낮아지는 기분이다. 이 시간만큼은 슬픔의 그림자는 잠시 미뤄 놓기로 한다.`이 봄바람을 어찌할 거나? / 나름 수양했다는 수양버들도 / 저리 흔들리는데 / 대충 산 나야…. /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지.' 중년의 나이에도 사랑의 불씨는 살아 있더라, 며 누군가 이 시를 읊었다. 성급한 박수와 환호가 이어질 만큼 공감하는 분위기다. 하기야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던가. 어쩐지 사랑 앞에 시시해진 나 같은 목석파도 시구가 외워질 정도로 이 시는 참말로 진솔하게 와 닿는다. 제목도 시인 이름도 출처도 모른다는 낭송자를 대신해 누군가 인터넷 검색을 한다. 이수동 화백의 그림 에세이`오늘, 수고했어요'에 나오는`이 춘풍'이란 시다.집단으로 우울해지는 것과 봄은 어울리지 않는다. 집단으로 꽃바람이 나, 이 춘풍 하면서 맘껏 까불대고 한껏 발랄해져도 좋을 이 봄날, 여전한 상실감이 우리 곁을 맴돈다. 수양 쌓았다는 수양버들조차 저리 흔들리고, 대충 산 필부필부들은 `당연히 못 참고 달려'야 할 이 봄이건만, 지독한 슬픔의 바리게이트는 절벽이 되어 바위가 되어 가슴에 부딪는다. 누가 이리 만들었나./김살로메(소설가)

2014-04-25

풍우동주(風雨同舟)

오나라와 월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춘추전국 시대 두 나라는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영토를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충돌했다. 삶은 피폐했고 인정은 메말랐다.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멀리했다. 어느 날 두 나라 백성이 우연히 한 배를 타게 되었다. 거센 바람이 강심으로 휘몰아쳤다. 뜻하지 않은 위협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적이 아니었다. 서로 돕기를 왼손과 오른손처럼 하였다. 손자병법 구지(九地)편에 나오는 `풍우동주' 대목이다. 폭풍우 속에서 한배를 탄다, 라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빗대어 `오월동주'라고도 한다. 사이가 좋지 않은 자끼리 한 자리에 있더라도 어려움에 부딪치면 함께 헤쳐 나간다는 의미이다. 한 배에서 풍랑을 맞으면 원수라도 힘을 합하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사는 게 다 내 맘 같지 않다. 60억 인구라면 60억 개의 마음이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내 감기가 타인의 암보다 더 심각하다고 느끼는 게 사람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내가 소중한 만큼 타자도 소중하다. 오나라 사람 입장에서는 월나라 사람이 별스럽게 보이겠지만 월나라 사람 입장에서는 오나라 사람 역시 밉상으로 보인다.누구나 자신이 처한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다 보니 그 기준 안에 딱 맞게 들어오는 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 기준이 정답이 아니라면 뭐든지 `약자를 위한 입장'에서 서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오나라와 월나라 백성은 서로 싸우기만 했다. 하지만 비바람 몰아치는 한 배 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삶의 뿌리를 위협하는 순간이 닥치면 서로 협력하고 위로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위기 앞에서 누구나 힘들겠지만 기왕이면 약자에게 더한 배려가 닿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산다는 게 어쩐지 팍팍하고 무기력해지는 나날이다. 모두 생각도 각각이고 마음 갈피도 제대로 잡지 못한다. 그럴수록 서로 살피기를 왼손과 오른손 같기를 기도할 뿐이다.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다. 한마음으로 보듬는 일이 풍우동주 같기를 바라고 바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24

하인리히 법칙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조짐 없는 사건 또한 없다. 특히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반드시 그 뒤에는 관련되는 크고 작은 징후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하인리히 법칙'이라 한다. 20세기 초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예방 관련 연구서에서 이 법칙을 소개했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던 그는 업무 상 사고 통계를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 통계적 법칙 하나를 발견했다.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중상자가 한 명 나온다 치자. 그러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래서 통상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법칙'이라고도 부른다. 대형 사고는 우연히 발생하는 게 아니다. 그 이전에 반드시 어떤 조짐을 보여준다. 가벼운 사고들이 되풀이 되는 가운데 전조 현상을 보여 줌으로써 경고를 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알아채고 조치를 취하면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징후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실로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큰 재해는 사소한 방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숱한 학습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긴장은 순간이고 설마하고 안심하곤 한다. 사소한 것들이 큰 것을 부른다는 건 일을 그르친 뒤에야 깨닫는다. 작은 것의 빌미를 철저히 살피면 큰 것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이번 세월호 침몰 사고도 크고 작은 여러 징후를 무시한 인재다. 그간 선체 이상을 느꼈다거나, 배가 기운다거나, 조타기 전원 접속 이상을 감지했다거나, 수밀 문의 작동이 불량하다는 평가를 받았거나 등등의 결함이 지적되어왔다. 하지만 관계자 그 누구도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사소한 300 가지의 경고를 만났을 때 빨리 대처하면 다소 무거운 29가지는 해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1이라는 대형 참사 같은 건 평생 만나지 않아도 된다. 준비 없는 완벽이 어디 있으랴. 유비면 무환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고가 터진 뒤에야 하인리히 법칙 따위를 떠올리면 그 무슨 소용이 있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4-04-23

애도의 방식

“그 사람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가? 누군가가 어떤 일로 그에게 감사를 표한 적이 있는가? 매일같이 죽은 이들을 찾아다니지만 이 세 가지만 알 수 있으면 한 사람 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유일한 인물로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질문의 답만 갖추면 어떤 형태로든 만족스럽게 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텐도 라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소설의 주인공 시즈토는 별난 남자다.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 방식은 유별나다.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 세 가지만 조사해서 현장을 찾아가 애도한다. 각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사람들의 죽음은 정상적인 면보다는 비정상적이거나 안타까운 죽음일 경우가 많다. 주인공은 그런 사람들의 뒷조사를 한다. 그 조사라는 건 단순하기 그지없다. 죽은 이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한테 사랑을 받았으며, 누가 그에게 감사했는지 등만 조사한다. 어릴 적 새 한 마리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 모든 죽은 것들의 긍정적인 면만을 기억하기로 한 것. 그것이 애도의 진실성에 최대한 가깝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사람 관계란 게 두부 자르듯 명쾌하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오해와 더러는 억지로 꼬이기도 하는 게 사람 사이이다. 가까운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애증의 감정이 뒤섞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애도의 본심에는 복잡한 심경이 필요치 않다. 타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은 그 사람의 좋은 점만을 기억하는 것, 즉 진심만으로도 충분하다.600여 페이지가 넘는 소설은 시즈토의 시선을 빌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진중하게 보여준다. 삶과 죽음의 관계가 전혀 다른 게 아님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누구에게 나는 사랑 받고 있던가, 누구에게 감사함을 느끼도록 한 적이 있던가, 반대로 누구에게 충분히 감사함을 전한 적이 있던가. 내 애도의 방식이, 또한 타인의 나에 대한 애도의 방식이 그저 단순한 진심이 될 수 있도록 남은 날들을 담백하게 살아야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22

허언증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과장하거나 거짓을 말한다. 자신이 한 말을 확신한다. 그 말을 타인도 그대로 믿는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잘 꾸미고 잘 퍼뜨린다. 현실에 바탕을 두되 진실한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듣는 입장에서는 처음 한두 번은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 반응에 자신감을 얻어 자신이 진실만을 말한다고 단정해버린다. 희열과 쾌감을 느끼며 계속해서 타인을 기만한다. 허언증을 앓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허언증은 거짓말을 해서 관심을 얻고자 하는 심리 현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자로부터 관심 받기를 원하고 그 과정에서 약간의 거짓은 일삼는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선의든 악의든 누구나 초 단위로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행한단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사소한 거짓은 인간적이고 자연스런 현상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거짓이 타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때이다. 허언증이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다.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안타까운 이 시점에 모 방송사의 인터뷰 한 건이 온 국민을 분노케했다. 검증 되지 않은 민간 잠수부라는 한 여성의 인터뷰 요지는 이랬다. “현장 정부 관계자가 대충 시간이나 때우고 가라 말했다. 민간 잠수부들과 관계자의 협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으며 장비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아 힘들었다.” 알고 보니 허언을 취미로 일삼는 여자에게 방송사가 낚인 거였다. 피해는 심각했다.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에게 심리적 상처를 안겼으며, 현장에서 밤낮으로 구조하는 분들의 사기도 떨어뜨렸다. 지켜보는 국민들도 상처를 입은 건 마찬가지다.구조가 제일 시급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더 이상의 피해자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자극적인 인터뷰가 나타나 자신의 관심병을 알리고자 온 국민을 상대로 장난을 치다니.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실종자 가족 및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인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분들 또한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 한시가 아쉬운 이때에 한 개인의 허언증까지 보듬을 여유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21

희망이 사람을 구한다

286명이 실종되었다. 몇몇의 사망자도 확인되고 있다. 실종자 가족과 유가족의 비통하고 애끊는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지켜보는 이도 고통스럽다. 감정이입이 되어 이 글을 쓰는데도 눈물만 난다. 자식을 키우고 이웃이 있는 보통 사람 누구라도 이런 심정이리라. 여객선 세월호의 침몰 소식이 들린 건 지난 16일 아침이었다. 400명 이상의 승객을 태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여객선은 진도를 지나 제주를 향해 가고 있었다. 두 시간만 더 가면 뭍에 닿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참이었다. 수학여행을 가는 고등학생 단체 승객이 대부분이었고 각종 계모임 친구들과 일반 여행객 그리고 선사 직원이 나머지 구성원일 터였다. 안타깝게도 아직 절반도 구조되지 못했다. 대형 참사로 이어지지 않도록 한시 바삐 구조되기만을 바랄 뿐이다.가는 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바다가 깊지 않아 배의 후미 부분이 수면 위로 떠올라 있는 것에서도 희망을 본다. 배 안 곳곳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릴 어린 학생들이, 평범한 여행객들이 두려움을 이겨냈으면 좋겠다. 각종 선박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난해 대서양에서도 사고가 났을 때 갇혀 있던 선원이 삼일 만에 구조된 적이 있었다. 바다 밑까지 가라앉은 배에서도 안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배안에는 `에어포켓`이라는 공간이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 물로 연명하며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지를 굳혔다고 한다.큰 배인 세월호에도 에어포켓이 있을 것이다. 그나마 안전하다는 그곳을 확보해 구조의 손길이 올 때까지 잘 견뎌냈으면 좋겠다. 육체적 고통도 크겠지만 갇힌 공간 안에서 받을 그들의 심리적 충격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맘 약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두렵고 무섭겠지만 부모와 친구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타게 기다리는 실종자와 억장이 무너지는 유가족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다. 선실 안이든 파도와 싸우든 그들 곁에 희망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란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8

봄날의 방명록

참한 분의 초대를 받았다. 봄 뜰을 둘러보기엔 지금이 적격이라고 했다. 잔잔한 연둣빛 향연을 감상하기 위해 친구들이랑 길을 나섰다. 기꺼이 운전대를 잡은 사람, 삼겹살을 준비한 사람, 과일과 음료수를 챙겨 온 사람 등등 모든 이의 표정은 봄 소풍에 대한 기대감으로 밝고 환했다. 친구들을 맞이하는 주인장의 얼굴빛 또한 미소로 넘쳤다. 나날이 줄기를 키워가는 매발톱꽃, 무더기로 지고 있는 할미꽃, 아직 덜 핀 물달맞이꽃 등을 둘러보는데 탄성이 절로 터졌다. 주인의 여문 손 끝에 존경심이 일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미의 손톱 밑은 까맸다. 텃밭의 잡풀을 걷어내고, 마당의 꽃나무를 돌보느라 생긴 영광의 흔적이었다. 네일 아트로 단장한 여느 여인의 손톱보다 예뻐 보였다.흰 탱자꽃과 쟈스민 향이 번지는 거실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읊는 말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고 한 소절의 노랫말이 되었다. 처음엔 화분에 돋는 잡초조차 생명 있는 것이라 여기니 함부로 뽑기 힘들었다고 했다. 모종삽으로 흙만 뒤집어 놓았더니 다음날 다시 살아나더라고 했다. 천성으로 순수하고 배려 깊은 이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마음 저 끝에서 나오는 진심이란 걸 알겠다.우리 행동의 모든 원천은 `쾌락`에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누군가에게 오늘 점심 같이 해요, 라고 말 건네는 건 듣는 사람도 행복하겠지만 말 건네는 나도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유쾌하지 않은 상태에서 베푸는 호의는 진정한 호의가 아니다.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은 순수한 의미에서 `쾌락의 감정`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동기의 모든 유쾌한 감정에는 엔돌핀이 솟구친다.자발적으로 하는 모든 유쾌한 행동은 일차적으로 남을 즐겁게 한다. 하지만 결국 내 자신을 위한 일이다. 내가 즐겁지 않으면 남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그미의 방명록에 못다 쓴 한 마디를 이렇게 남긴다. 자발적인 당신의 무구한 눈빛과 환한 미소는 타인에게 제 삶을 자발적 유쾌함에 대해 되돌아보게 한다고. 그런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4-04-17

글쓰기 도반

`도반(道伴)`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 용어로 `함께 도를 닦는 벗`이란 뜻이다. 도(道)는 혼자 닦을수록 좋다. 삶의 진리를 깨치는 수행에 굳이 친구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멀고도 험한 길에 같은 뜻을 지닌 친구가 있어준다면 그보다 힘이 되는 것도 없다.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한 길을 간다는 건 보통 사람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같은 뜻을 가진 길동무가 있어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힘이 된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다 보면 어느새 도의 실체에 다다를 수 있게 된다.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글은 원래 혼자 쓰는 거다. 혼자 왔다 혼자 가는 인생, 문리를 깨치는데 무슨 친구가 필요할까 싶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다. 그 어떤 주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글쓰기 한 길을 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글쓰기 모임을 만들어 서로 용기를 북돋우고 조언을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서는 포기하기 쉽지만 함께 하다 보면 서로 상승작용이 되어 문리의 실체에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친구란 어려울수록 손 맞잡고 힘들수록 어깨 두드려주는 관계이다. 수행에 그런 도반이 있듯이 글쓰기에서도 글 도반이 있다. 도반과 함께라면 글쓰기도 그렇게 두렵지 않다. 글쓰기는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게 아니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도 제대로 된, 글 한 줄 얻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글을 읽는다는 것과 글을 가르친다는 것 또한 글을 쓴다는 것은 제각각 다르다. 글 보는 안목은 있어도 그 안목만큼 잘 쓸 수 없고, 글 쓰는 법을 가르칠 순 있어도 그 가르침처럼 잘 쓰기는 어렵다. 그만큼 글쓰기가 어렵다.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글쓰기의 어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글 솜씨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향상시키려면 매일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 숙달됐다 싶어 연습을 게을리 하면, 금방 둔해집니다.` 게을러지는 그 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쓰는 이에게는 글동무가 필요하다. 글쓰기에서 도반이 요청되는 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6

조팝꽃과 싸리꽃

봄꽃이 앞 다퉈 피고 진다. 매화와 산수유가 피는가 싶더니 개나리와 벚꽃도 지고 금세 복사꽃과 조팝꽃이 온 봄을 뒤덮었다. 복사꽃은 야외로 가야 볼 수 있는데 그 아쉬움을 달래주는 꽃이 조팝꽃이다. 도심 곳곳에서 정원수나 가로수로 피어난 조팝꽃을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조팝꽃은 갓 지은 쌀밥을 누군가 손톱 크기로 뭉친 뒤 가지가 휠 정도로 몽글몽글 매달아 놓은 느낌이다. 가까이서 보면 그 느낌은 또 다르다. 희디흰 꽃잎 하나하나는 다섯 개의 홑겹으로 되어 있는데 잘 튀겨 놓은 팝콘 같다. 보릿고개를 넘던 그 시절의 정서를 대표하는 꽃이 조팝꽃과 이팝꽃이다. 조팝꽃이 튀긴 좁쌀 모양이라거나 조밥을 닮았다는 말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모양으로만 보면 고봉쌀밥을 닮은 정도로는 이팝꽃보다 조팝꽃이 더하다. 조팝꽃이 이팝꽃이 되어도 좋았겠다.좋아하는 봄꽃도 그때그때마다 다르다. 옛날에는 화사한 복사꽃이 그리 좋더니 요즘은 은은한 조팝꽃이 새롭게 보인다. 어린 시절 봄날에도 조팝꽃이 지천으로 피었었다. 우리는 그 꽃을 싸리꽃이라 불렀다. 아마 조팝나무로도 싸리비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어른들부터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봄볕 다사로운 싸리꽃 울타리 아래서 소꿉장난을 하곤 했다. 아득하게 번지는 싸리꽃향을 맡으며 붉은 돌을 빻아 고춧가루를 만들고, 진흙을 이겨 떡을 빚었다. 빈 동동구리무 통과 소주병뚜껑으로 세간을 삼기도 했다. 순정한 시절이었다.싸리나무는 따로 있는데다 종류, 모양, 꽃 피는 시기 등이 조팝나무와는 다르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내가 알고 부르던 싸리꽃이 실은 조팝꽃이라는 게 영 어색하다. 꽃 이름 하나 새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그것과 관련된 기억 때문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것의 소중함을 알고 느낀다. 순간의 기억이지만 구체성을 띈 그 `유의미한 것`들을 인위적으로 바꾸려하면 마음의 저항을 받는다. 그러니 조팝꽃은 내 맘 안에서는 언제나 싸리꽃이다. 맘이 쉽게 조팝꽃으로 받아들여 버리면 추억마저 변할 것을 염려하기에./김살로메(소설가)

2014-04-15

문명은 우연의 산물

`총,균,쇠`는 1998년에 첫 출간되었다. 책이 나온 지 십오 년이 넘었는데도 스테디셀러를 넘어 여전히 베스트셀러 자리까지 지키고 있다. 700여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이토록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화를 곁들인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사에 대한 독특한 시각과 인류에 대한 진정성 깃든 충고 덕분이 아닐까. 너무 두꺼워 발췌독을 하는데도 흐름을 이해하기엔 무리가 없다. 한마디로 기존의 인종주의적 시각에 반하는, 문명 발전에 관한 새로운 보고서이다. 저자에 의하면 유라시아가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비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우연에 의해서다.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 차이에 따라 인류 발전의 속도가 달라졌을 뿐이다. 지리적 여건이 좋고, 기후가 유리한 쪽에 곡물과 가축이 집중되었다. 그 우연 덕에 유라시아 사람들은 패권을 쥘 수 있었다. 결코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열등한 종족이라서 그들에게 당한 건 아니다. 특정 인종에게 유리한 유전자란 없다. 지리적 환경적 특성에 따라 인간 발달 정도가 달라졌을 뿐이다.총과 균과 쇠는 유럽인이 원주민들을 정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지리적 혜택을 받아 가축과 곡식을 선점할 수 있었던 유럽인은 총이라는 살상무기로 원주민을 빠른 시간 안에 접수해버렸다. 또한 내성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천연두라는 균을 옮겨 그들을 거의 초토화시켰다. 쇠로 만든 무기나 갑옷이 유럽인들에게는 있었지만 원주민들에게 무기로서의 철기 문화는 요원한 것이기만 했다.총, 균, 쇠로 무장하면 언젠가는 문명세계는 붕괴하게 될 것이다. 바느질과 농사로 대변되는 일만 삼천 년 전 정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문명사회보다 전통 사회에서 배울 게 많다는 것도 강조한다. 자연 자원을 남용하는 것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환경이란 우연이 우월을 낳았을 뿐 인간 자체에 우월이 있을 순 없다. 인류가 지나온 긴 시간 속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태도가 보인다. 단순해지고 겸허해지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었을 게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4

문학 번역서 단상

잘 번역된 문학서는 창작품 못지않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다고 그 번역이 완벽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른 문화, 다른 환경에서 생산된 문학작품이 우리 정서나 문투에 꼭 맞게 옮겨지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들 문법으로는 허용되는 말이 우리말에 와서는 막히는 부분이 있고, 그들 풍습과 일상이 우리와 미묘하게 달라 텍스트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예를 들어 `안나 카레니나`, `롤리타`, `위대한 개츠비` 등은 번역자에 따라 책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다. 담백한 문체에 경제적인 문투를 담은 책이 있는가 하면, 어떤 책은 산문체에다 설명적인 문투로 되어 있다. 또 어떤 책은 의역이 심해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번역서마다 개성이 있고 독자로서 호불호를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 번역서가 엉터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문 번역가 그 누구도 크고 작은 오류는 범한다. 문화와 언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인정한다면 같은 작품을 두고 번역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다.`이방인` 번역을 두고 논쟁이 한창이다. 새로운 번역서를 낸 출판사의 선전문구가 도발적이어서 수상쩍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나. 기존의 김화영 작품이 엉터리라는 논리에는 전혀 수긍할 수 없다. 부분적인 문장, 상황의 의미 해석, 특히 등장인물의 캐릭터 등이 잘못되었다고 새 번역자는 격앙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그가 지적하는 오류는 그 자신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이건 누구 번역의 옳고 그름의 문제가 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기존 번역이 낫고, 어떤 상황에서는 새로운 번역자의 의미 해석에 타당성이 있는 정도이다. 싸잡아 기존 번역이 공격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새로운 번역서를 만나는 건 독자로서 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해당될 실수를 엉터리라고 매도하는데 동참하면서까지 새 작품을 응원하고 싶지는 않다. 번역서의 호불호를 견주는 건 독자의 몫이다. 출판사가 설레발 칠 일은 아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1

프루스트, 홍차, 마들렌느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따른데다 내용은 방대하고 문체 또한 산만하다. 고만고만한 등장인물이 수시로 드나드는데다 문장은 접속사와 반점의 향연일 정도로 부담스럽다. 고전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신념으로 열심히 정복하려 하지만 십여 권이 넘는 이 대하소설을 아직도 1, 2부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다 읽은 것 같은 이 느낌은 뭘까. 아마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 나오는, 마들렌느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는 장면에서 독자로서의 호기심을 충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마들렌느가 어떤 과자일까, 하는 소설 외적인 호기심이 생긴 적이 있었다. 마침 만화로 된 책도 나왔기에 얼른 샀었다. 완간 소식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마들렌느 과자를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작은 기쁨이었다. 평범한 조개 모양 과자 하나로도 우리는 잊고 지냈던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 홍차에 찍은 마들렌느 과자, 그 향과 촉감에 주인공 마르셀은 불현듯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한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일요일 아침, 이모가 권하던 그 마들렌느 맛이 겹치면서 마르셀은 완전무결하게 제 어린 시절을 글로 복원하게 된다. 마들렌느라는 소박한 촉매제 하나가 위대한 소설을 탄생시킨 셈이다.“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는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적신 마들렌느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은 과자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홍차에 적신 과자가 뭔가를 일깨”웠다고 프루스트는 말한다. 이런 섬세한 감각의 영혼이라니.저마다의 감각에 겨운 봄꽃은 저리도 앞 다퉈 피고 지는데, 내 온몸과 마음에 숨어 있는 오감은 여전히 무디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10

비판의 방식

`비판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그 비판 속에 비판자의 비난이 교묘하게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판에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은 그 비판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행위하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 비판이라는 것이 비난을 내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과 염려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공지영 소설의 `높고 푸른 사다리` 중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무장되어 있지만 실은 감정에 지배당할 때가 많다. 한 치 흐트러짐 없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 뚜껑을 열게 되면 한없이 흔들리기만 한다. 인간 존재의 바탕엔 용기와 관용뿐만 아니라 나약함과 비겁함이란 속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직함과 너그러움을 동시에 지닌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곤 대개 우리는 나약함과 비겁함의 생활 패턴에 쉽게 길들여진다. 금세 후회하면서도 의지력은 약해지고 만다.이처럼 약점 많은 게 인간이다 보니 우리는 자연스레 타인을 비판하거나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공교롭게도 인간에게는 양심이나 염치라는 게 있다. 그러다 보니 비판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건강하고 온전한 의견일지라도 드러내놓고 상대를 향해 목소리를 내지는 못한다. 대개의 비난의 목소리가 에둘러서 오고 바람결에 감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타자에 대한 애정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그 비판은 직접적일수록 좋고, 비판 자체에 목적이 있어야 한다. 백 마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뭐하나. 한 마디 에둘러서 오는 비난의 목소리에 그 사랑이 의심 받는데. 아무리 건전한 비판이라도 몇 번의 고개를 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처음의 알맹이는 온데간데없고 어이없는 인신공격이란 허울만 남게 된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자부하면 그 대상에 대한 비판은 삼가는 게 최선이다. 해야만 할 때는 에두르지 말고 정공법을 쓰는 게 좋다. 직접 말할 수 없는 모든 비판 속에는 그 사람에 대한 비난이라는 심술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9

백일장

봄소식과 더불어 곳곳에서 개최되는 백일장 소식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우리 지역에서도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쇳물백일장이 지난 주말에 열렸다. 겨우내 갇힌 공간에서만 글을 써오던 일반 및 학생들에게 기분 좋은 나들이가 되었을 것이다. 글쓰기 대회를 왜 백일장이라고 부를까. 백일장(白日場)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1.국가나 단체에서, 글짓기를 장려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글짓기 대회. 2.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서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하여 글짓기 시험을 실시하던 일. 글짓기 대회라는 것만은 확실한데 그것이 왜 백일장으로 불리는지는 사전 뜻으로는 불충분하다.뜻이 맞는 사람들이 주로 달밤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시재를 견주어 보기도 하는 망월장(望月場)과 대조적인 의미로 대낮에 시재를 겨룬다 하여 백일장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불분명한 유래지만 일리는 있다. 오늘날의 백일장도 대부분 해가 뜬 이후에 시작해서 적어도 해지기 전에는 마감을 하지 않던가. 대낮에 경연을 펼침으로써 부담감도 줄이고 공정성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일(白日)이라 함은 `구름이 조금도 끼지 않은 맑은 날의 해`를 일컫는다. 그만큼 공정성과 투명성을 전제로 경연을 펼쳤다는 뜻일 게다.백일장은 벼슬길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마추어끼리의 순수한 경연이었다. 과거 시험에 낙방한 사람과 과거 지망생의 명예욕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기에 주로 지방에서 성행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백일장도 과거시험 못지않게 부정이 횡횡했다. 일자무식꾼이 베껴 쓰는가 하면, 대신 참가하거나 시험지를 바꾸는 예도 빈번했다. 참가자뿐만 아니라 문란하기는 심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수령의 자제와 기녀까지도 합세하여 엉터리 등수를 매기기도 하였다. 백일장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오늘날에는 백일장의 본래 취지를 살려 국가나 여러 단체에서 글짓기 대회를 연다. 환한 대낮에 열리는 만큼 참가자나 심사자 모두 밝고 산뜻한 마음으로 서로의 글맛을 느끼는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8

2014 포항시 원북(One Book)

올해도 어김없이 원북 선정 위원회가 열렸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에 포항시 원북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지역 문화 활동의 모범적인 사례가 되어 가고 있다. 포항시는 2006년부터 `한 권의 책, 하나의 포항(One Book, One Pohang)`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 걸고 범시민 독서 운동을 펼쳐왔다. 시립도서관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한 권의 책을 그 해의 원북으로 선정하고 이를 선포한다. 각종 독서 활동 및 다양한 독서 관련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의 독서 문화 함양에 기여하자는 것이 원북 행사의 취지이다. 2006년 고 박완서 작가의 `읽어버린 여행 가방`을 시작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 `귀신고래`, `엄마를 부탁해`, `덕혜옹주`, `아프니까 청춘이다`, `종이책 읽기를 권함`에 이어 지난해에는 `시 읽기 좋은 날`이 원북으로 선정되었다. 해마다 선정된 한 권의 책은 시민들의 독서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올해도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추천 목록에 올렸다. 인문학 열풍을 실감하듯 여전히 인문학 관련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소설 분야 책들도 그에 못지않은 지지와 관심을 얻었다.다(多)추천을 받은 동시에 범시민적 독서 운동 취지에 맞는 도서 몇 권이 최종 후보에 남았다. 그 어떤 것이 선정되어도 무방한 터라 한 권을 골라야 한다는 게 난감하기만 했다.난상토론 끝에 선정된 도서는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이다. 아버지 부재의 현실을 통렬히 자각하고 그 시선을 독자에게 돌려 공감을 유도하는 작가의 진중한 시선이 선정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간 모성의 핍진한 희생에만 독자적 애정을 가졌던 이들이라면 이제 우리 시대 아버지들의 곡진한 삶 또한 재조명 받아 마땅한 것임을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느끼게도 되지 않을까.올해의 원북으로 선정된 `소금`이 부디 널리 퍼져 한 사람의 내면을 알맞게 절이고 나아가 시민 의식을 성숙시키는 그야말로 소금 같은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본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7

예술과 예술적 삶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의 정의에서 빠지지 않는 기본 요소는 `아름다움`이다. 한마디로 미적 탐색이 없는 예술의 본질은 무의미하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생각에 꼬리를 물다 얻은, 지극히 개인적인 예술에 대한 내 정의는 `진실로 아름다움이 없는 것이거나 혹은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개별자의 인식`이다. 집착이나 열망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일어나 밥 먹고 일하고 웃다가 허기지면 또 먹고 일하고 울다 잠자리에 드는 것, 이런 단순한 패턴을 일러 예술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술이 되려면 일상성이 개인의 고유한 내면 정서와 충돌해야 한다. 그 양상은 평범한 삶에 대한 염증, 도덕적 일탈, 평정을 넘어선 의식의 과잉 등의 행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예술은 도덕이나 선함과는 무관하다. 심미안에 눈 뜨면 추함과 아름다움엔 경계가 없고 행과 불행의 사슬도 실은 그 엮임에 경계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추함과 불행까지도 포괄하는 게 예술이다.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예술의 본질과 인간의 고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미주의에 대한 예찬과 동시에 윤리적 알레고리를 품고 있는 이 소설은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라는 것을 보여준다. 쾌락주의와 감각을 앞세워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삶의 위선을 질타한다. 그렇다고 주인공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하는 삶이 결코 최선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삶을 경계 없는 예술로 인식하고 개인적 감각만을 추구하던 도리언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가 젊음을 유지하고 그 대신 초상화가 늙어간다 해서 제 영혼의 충족까지를 보장 받는 건 아니다.도리언의 파멸 과정을 통해 와일드가 말하고자 한 것은 예술과 도덕은 무관하다는 것. 그럼에도 예술과 예술적 삶은 별개의 영역이란 것. 예술과 예술적 삶이 맞장 뜨는 그 자리엔 공허와 허무만이 가득하다는 것. 그렇지만 예술의 본질인 아름다움은 인간과 함께 영원하리라는 것. 예술과는 별개로 우리 삶 또한 나름 지속된다는 것./김살로메(소설가)

2014-04-04

생각을 잇지 않기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상처 받은 영혼에 대한 위무의 대가로 불릴만하다. 현장에서 수집한 여러 예화로 인간이 대면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상처를 위로해주면서 명쾌한 답까지 제시해준다. 우리 일상은 상처의 연속이다. 물리적으로야 환희와 무탈함의 시간이 상처의 그것보다 길다. 하지만 그 속성 상 아무리 짧은 상처도 심리적으로는 뭉근한 지속성을 띈다. 종일토록 얻은 영광의 환희도 다음날이면 사라지기 쉽지만, 단 몇 초 간 입은 마음의 상처는 일 년이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 생각하고 고뇌하는 영혼에게 따라오는 필수불가결한 부산물이 상처이다. 상처에 부당한 상처와 온당한 상처가 있을 리 없겠지만 그래도 예상치 못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바르데츠키 여사의 치유법을 잠시 빌려 오자. 젊은 여자가 수영장에 갔다. 옆에 있던 아줌마가 제 친구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수영장 입장권을 사지 않고 뒷문으로 몰래 들어온 사람이 있다고. 여자에게 곁눈질을 하는 걸로 봐서 여자 들으라고 한 소리다. 여자는 마음이 상한다. 맹세코 그런 적이 없으므로 아줌마에게 삿대질을 하며 따질까, 아니면 수영을 그만 두고 집에 와버릴까 고민한다.그러나 여자는 거기에서 멈춘다. 더 이상 아무 생각을 이어가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진정되고 화가 수그러든다. 다시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하고 맞은편에서 헤엄쳐오는 아줌마에게 인사까지 건넬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와 친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서로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있다. 여자는 마음 상한 원인을 아줌마의 잘못으로 돌려주기로 한다. 함부로 남을 의심한 건 여자가 아니라 아줌마였으니.바르데츠키 여사의 저서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에는 위무 받기 좋은 예시들이 나온다. 근거 없는 상처는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딱히 화를 내거나 속을 끓일 이유가 없다. 내 것 아니어야 할 상처에서 쉽게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잇지 않는 것`이다. 생각을 늘이는 건 근거 없는 상처를 대하는 가장 나쁜 방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3

슬픔에 꽃불을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온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밤이 오고 겨울이 오고 봄이 온다. 너는 웃고 나도 웃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숲에 이른 문장을 보리라. 몇 개의 문장을 더 쓰고 어둠이 오면.` 이준규 시인의`문장`(`네모`, 문학과 지성사) 전문이다. 이 짧은 산문시를 발견하는 순간 온몸으로 화르르 벚꽃이 피었다. 빠르게 퍼지는 술기운처럼 전신이 달아올랐다. 멀리 누워있던 그림자마저 제 심장에 펌프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문장을 벼리는 시인의 순간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문장으로 저녁을 기다리고 문장으로 밤을 지새우며 문장으로 겨울을 나고 문장으로 봄을 맞고 문장으로 웃음 강을 건너 문장으로 숲에 이르는 시인의 시간. 다시 저녁은 오고 그 순환되는 문장 속으로 내딛는 시인의 영혼.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옷깃에 묻은 얼룩 같은 허물을 탕감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눈물로 국숫발을 삼키던 당신의 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계단 앞 주춤하던 당신의 무릎 관절이 내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한 생애에 드리운 눈썹 밑의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내 무딘 눈동자가 놓친 당신 손끝의 피로를 만질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울분 서린 당신 연둣빛 스카프에 내 연민의 방점을 보탤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나야 너무 빨리 피고 지는 저 봄꽃이 야속타는 당신의 혼잣말을 되뇔 수 있을까. 감춰둔 오금 밑 당신 슬픔과 내 슬픔이 같음을 눈 맞출 수 있을까. 저렇게 숲은 멀리 있는데.시인의 말처럼 삶은 들여다볼수록 슬픔만 남는다. 삶을 슬픔으로 이해하는 자들이 몇 개의 문장을 쓰는 순간 저녁은 온다. 그렇게 겨울을 나고 웃음 같은 봄을 맞으면 남는 건 문장이 아니라 몇몇의 슬픔이다.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섣불리 지나친 먼지 낀 시간들을 살릴 수 있을까. 몇 개의 문장을 지워야 기꺼이 껴안지 못한 슬픔의 영역에 꽃불을 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숲은 멀기만 한데./김살로메(소설가)

2014-04-02

말의 허용 정도

“군주가 아첨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이 사실대로 말해도 그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점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그들의 존경심을 잃고 만다.” 마키아벨리도 군주, 아니 인간의 심리에 대해 어지간히 파악한 자였다. 현명한 리더는 제 약점을 맘껏 말해도 좋다고 주변인들을 안심 시킨다. 누군가 리더 자신의 허물에 대해 말한다면 요즘말로 쿨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나아가 프로젝트 실패에 대한 리더로서의 책임을 물어 누군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논평을 한다 해도 평정심을 잃지 않을 것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리더의 현명함은 여기까지다. 모든 약점과 온갖 실패에 대한 충언까지 감당할 수 있는 군주는 없다는 뜻이다. 세상 대부분의 CEO들이 왜 저마다의 근엄함으로 제 권위를 지키려 하는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저 명언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다. 현명한 군주는 열린 마음이 준비 되어 있다. 그렇다고 제 명예심을 해칠 정도로 사람들의 솔직한 언행을 바라는 건 아니다. 존경 받고 있다는 자존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한다. 어디 군주만 그럴까. 세상 누구나 자의식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의견 또는 평가나 비난을 받아들인다. 상대가 발 들일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자신의 잣대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으니 이 정도의 열린 마음만 있어도 모두 현명하다 할 수 있다.그렇다면 언행의 한계치는 누가 정하나. 현명한 사람 곁에 현명한 친구가 모인다는 전제하에 그것은 발언하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다. 그들은 상대의 맘을 손상시키지 않는, 다시 말하면 서로의 자존에 폐가 되지 않는 정도의 진솔함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고 있다. 타자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제 자존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아첨과 진솔함의 경계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말을 현명하게 부릴 줄 안다. 넘친다거나 모자란다고 말하지 않더라도 군주가 그것을 알아채도록, 제 현명함의 한계치를 잘 활용할 줄 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