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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웃이 사라진 자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반갑게 알은 체를 하는 사람은? 외판원이나 전도하는 사람이란다. 개인적으로 덧붙이자면 그 다음이 어린이들 쯤이 될 것이다. 한 엘리베이터를 쓰는 주민 수가 많은 고층 아파트에 산다면 이 말을 실감하게 된다. 특히 아이들이 다 커버린 중년 이후라면 새 이웃과 알고 지내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나부터 이웃에 누가 사는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취미를 가졌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아이가 어리다면 그나마 같은 어린이집을 보낸다, 학습 정보를 공유한다는 등의 이유로 이웃과 알고 지낼 명분이라도 생기지만, 아이들마저 다 커버렸으니 그런 기회는 점점 줄어든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흔히 보는 풍경. 마지못해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잠시, 대개 스마트폰을 꺼내 애꿎은 화면만 터치하고 또 터치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에 그리 급하게 검색할 정보가 있을 것이며, 무슨 그리 다급하게 확인해야 할 메시지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나부터 그런다. 그 짧은 시간, 어색함을 감추기에는 스마트폰만큼 안전한 방어막도 없다. 그나마 아이들을 만나면 맘이 많이 누그러진다. 어른 이웃을 만났을 때의 어색함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아이들에게 말을 건넨다. 의외로 아이들은 성가셔하지 않고 이것저것 화답을 해준다. 소통의 부재나 현대인의 고립감이 뭔지를 모를 아이들의 천진성이 부러운 순간이다.농경사회의 집은 원래 정착이 그 주된 목표였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현대 도시인들 대부분은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에 가깝다. 처한 입장이 다양한 만큼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산다. 이웃을 사귈 시간도 의지도 생기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의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를 기웃거리거나 현실적 도움이 되는 모임들을 찾아 나선다. 이웃 없는 사회가 가능한 시대가 오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이웃 없어도 불행한 줄 모르는 도시인들은 이 순간에도 옆집 안부 대신 스마트폰의 안녕부터 점검한다. 실체 없는 기기 앞에서 허허실실 혼자만의 웃음을 짓는다. 그 많던 이웃은 이제 스마트폰 안에 산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3-03

집단으로 길들이기

모 은행 신입사원 연수 관련 동영상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삼백여 명의 신입 행원들이 멀쩡한 양복의 상하의를 걷어 부친 채 말 타기 자세를 취한다. 군대에서 집단 얼차려를 할 때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드레스셔츠 등짝엔 물을 퍼부은 듯 땀이 흥건하다. 흐트러진 자세가 될라 치면 교관의 질타는 이어진다.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다. 견디다 못한 몇몇은 구토를 하거나 탈진한 채 쓰러진다. 삼 년이나 지난 화면이라지만 여전히 그런 식의 신입사원 연수를 하는 곳은 많다. 슬픈 현실이다. 혹자는 이런 극기 훈련을 통해 애사심을 기르고 동료애를 나눌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얼마나 집단 우선주의 또는 맹목적 국가주의에 길들여져 왔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기업도 국가의 축소된 형태이다. 작든 크든 집단의 안녕과 이익 앞에서는 개별자의 개성과 존재 이유는 묻혀도 좋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잦은 이민족의 침입이라는 상황 속에 국가나 집단 이데올로기의 소중함에 자주 노출되었고 그것이 자연스레 체화된 면도 없지 않다.하지만 국가나 민족의 본래적 목적은 개인의 주체성을 깡그리 무시하는 무소불위의 그 무엇은 아니었다. 애초에 개인의 주체성을 보호하고 확대하기 위해 집단과 국가가 생겨났다. 하지만 거꾸로 되어 오늘날 도덕 교육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 맹목적인 감성적 국가주의에 호소해 개인의 희생정신을 은근 조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생각들이 기업 정신에 고스란히 연결되면 위의 신입사원 연수 모습 같은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을 통제하는 것이 당연하듯, 기업 또한 개인을 소모품으로 취급해도 저항 없이 견디라고 주입한다. 애사심이나 동료애라는 명분을 내걸어 개인적 모욕쯤이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다.개인을 억압하고 길들여서 도산 안창호의 주인정신을 주입하면 뭘 하나? 지치고 무력화된 상황 앞에서 창의력과 자유의지는 저만치 달아나고 마는데. 자발성이 배제된 모든 통제는 모욕감과 회의감을 낳을 뿐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8

자유에 대한 단상

이진경의 `삶을 위한 철학수업`(2013)은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한 것을 엮은 책이다. 자유에 관한 사유 모음집인데, 책으로 다시 만나니 새롭기만 하다. 삶, 만남, 능력 등의 키워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유의 여러 지표에 대해 성찰케 하도록 이끌어준다. 일상에서 만나는 고통과 환희, 타자와의 교류에서 생기는 필연적 사유의 파편들, 자아라는 기둥으로 버티는 능력의 환상 등이 얼마나 우리를 억압하는가. 하지만 자유를 원하면 원할수록 그것은 우리를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눈이 원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 나은 학벌, 괜찮은 위상 등등에 대한 욕망은 어쩌면 사회가 규정한 욕망이다. 그 욕망을 욕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유를 갈망한다. 욕망이 다다를 수 없는 지점에 자유가 있다. 따라서 자유란 욕망들을 욕망하기 위한 방어 과정에서 생긴 또 하나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밑줄 긋기 할 부분도 많았는데, 특히 자존심과 자긍심에 관한 개념 구분은 한 눈에 들어왔다. `자존심은 남들에게서 자신에 대한 존중을 얻으려는 마음이다. 남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다. …. 반면 자긍심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긍지의 표현이다. 그것은 남이 아닌 자신의 척도로 스스로를 비춘다. 남의 인정을 구하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확신하는 것,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에 비추어 자신이 잘했는지, 잘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다.`이를 테면 자존심은 약한 자들이 자신의 약함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고, 자긍심은 강한 자들의 자기 긍정의 내면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전자가 타자를 향한 것이라면, 후자는 자기를 향한다. 자존심과 자긍심을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유에 대한 개념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간 기분이다. 자유도 결국 내 안에서 생성되고 소멸된다. 따라서 모든 감정이나 의지들이 스스로를 향할 때 자유에 한결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7

참지 않아도 좋아

심야 토크쇼 중에 연애사를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청춘남녀들이 자신의 연애담을 상담하면 패널들이 조언을 해주는 형식이다. 수위가 높아 공중파 방송이라면 전파를 탈 수 없는 비교적 진솔하고 개방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애관을 볼 수 있는데다 패널들의 직설적이고 현실적인 입담도 눈여겨볼만하다. 그렇다고 거기에 나오는 모든 말들이 새겨들을 만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한 상담자가 나왔다. 미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단다. 꼭 사귀고 싶었으나 경쟁자가 많았다. 그럴수록 지극정성을 다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고, 드디어 여자랑 사귀게 되었다.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여자의 성격은 안하무인격이었다. 많은 걸 남자에게 요구했고 명령조로 말했다. 사소한 것도 의존하고 별 것 아니 것에도 참견했다. 한 마디로 자신을 종 부리듯 한다는 게 남자 상담의 요지였다.그 상황에서 패널들의 조언이 내겐 충격적이었다. 그 정도도 견딜 수 없으면서 미인을 차지하려 했느냐는 힐난조였기 때문이다. 예쁘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자학적인 마인드에서 나온 조언은 건강한 건 못 된다. 거꾸로 생각해서 어떤 매혹적인 남성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남자의 매력에 빠져 매달리다시피 해서 여자가 사귀게 되었다 치자. 우위에 있는 남자는 그 여자를 종 부리듯 해도 되는 것일까. 일방적인 관계에서 오는 피로감은 언젠가는 한계치를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기 전에 그것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흔히 참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한다. 참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더 도덕적이며 안정감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이 시달려본 사람들일수록 참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모든 것은 임계점을 넘으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그 상황을 인정한다면 무조건 참는 게 능사만은 아니다. 애초에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참지 않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조언할 수 있어야 한다. 무작정 참는 것만큼 행복지수를 갉아먹는 것도 없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6

변명도 연민도

인간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구나 상처 받고 상처 준다. 같은 농도로 주고받는 상처이건만 희한하게도 내가 받은 상처가 진해 보인다. 온통 상처 받은 영혼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책도 상처 받은 사람을 위로하는 것들은 불티나게 팔리지만, 상처 준 사람을 직접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책(이런 게 있을까만)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상처는 주는 것일 때보다 받는 입장일 때 훨씬 상처 본연의 속성에 가깝다. 개인이나 집단의 갈등이 생긴다. 잘못을 저지른 이와 피해자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변명을 찾기 바쁘다. 피해자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간다. 피해자인 자신에게 할당될 작은 책임조차 면하려면 어쩔 수 없다. 잘못을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정당화하지는 않더라도 그때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책임을 덜어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당하는 입장일 때는 일이 일어난 여러 정황들에 대해서는 빼는 대신 상대가 어떻게 나를 자극하고 해를 가했는지에 집중한다. 한마디로 자기 유리한 것만 이야기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당사자 간에 일어난 일은 두 쪽 다 들어봐야 안다고 했다.이런 현상은 막을 수 없는, 본능적인`자기애` 때문에 일어난다. 위대한 성인군자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를 비교적 괜찮은 사람으로 여긴다. 올곧고 성실한 쪽에 내가 있고, 그릇되고 거짓을 일삼는 편은 상대방이라고 생각한다. 극악무도한 행위를 한 사람이나 인류를 파멸로 이끈 독재자들조차도 자신을 위한 변명은 마련한다.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한다지 않는가.나약한 인간은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데 익숙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는 선, 너는 악의 구도가 자리 잡는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곧장 성립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언행에 신중을 가할 수밖에 없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선, 온전하게 피해자이거나 완벽하게 가해자인 일상은 없다. 변명도 연민도 한 몸에서 나온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5

힘들었지?

`자기보다 훌륭하고 덕 높고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묘비명이란다. 성공한 그의 이력이 이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 카네기는 성공 비결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보지 않았다. 자신이 잘 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뽑아 쓴 덕이라고 말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그를 성공한 사업가로 만들었다. 나아가 기부와 자선의 실천을 통해 인간 사랑의 증거로 삼았다. `사람이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앤드류 카네기는 일찍 깨쳤다. 어릴 때 카네기는 토끼 한 쌍을 선물 받았다. 한두 마리 토끼를 키울 때는 제 이름을 짓고 불러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열 마리, 스무 마리로 늘어나면 그 이름을 짓고 기억하고 불러주는 건 쉽지 않다. 카네기는 출석부에서 힌트를 얻어, 반 친구들의 이름을 각 토끼에게 목걸이로 걸어주었다. 그러자 친구들은 제 이름 팻말이 걸린 토끼에게 관심을 가지고 먹이까지 챙겨 주는 것이었다.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존재 증명을 바란다.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카네기는 토끼 키우던 그 시절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직원이 다섯 명이었을 때나 오백 명으로 늘어났을 때나 그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필요한 사람인지를 강조했다. 평생에 그가 가장 즐겨하고 자주한 말은 `자네, 힘들었지?`라는 한 마디였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정성을 한시라도 잊지 않았다.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고 내 맘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것도 없다. 카네기는 인간의 이런 근본 정서를 기업 경영에 접목한 셈이다. 정당의 목적은 정권 획득이고,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이다. 하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게 하는 바탕은 누가 뭐래도 사람이다. 현명한 카네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돈을 먼저 벌기보다 사람을 먼저 벌어라. 그러면 돈은 따라 들어오게 되어 있다`는 멋진 명제에 이르렀다. 지친 누군가의 얼굴에 안간 미소가 보인다면 무심한듯 다가가 가만 손잡아 주고 싶다. 오늘 그대 힘들었지?/김살로메(소설가)

2014-02-24

몸 언어 이해하기

`힐링 캠프`에 이상화 선수가 나왔다. 명랑하고 확신에 찬 모습에다 가족애도 넘쳤다.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한데 뭔가 모르게 불편했다. 성급한 편성을 한 방송사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을까. 아직 다른 선수들의 경기가 남아 있는데다, 그들이 안을 심적 고충을 헤아린다면 올림픽이 끝나고 방송을 해도 좋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이상화 선수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마저 불편하게 다가왔다. 토크쇼가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자족감에 찬 표정으로 자주 턱을 괴었다.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한 나머지 선수의 심정이 이상화 선수의 표정에 투사되었다. 겸손이 미덕은 아니지만 저 땐 겸양의 페르소나도 필요한데 하는 맘이 들었다. 이게 다 심리학 책 탓이다. 인간 행동 패턴으로 심리상태를 분석하는 책들의 잔상이 내 심사를 건드렸다.말만이 언어가 아니다. 심리학자들은 말보다 몸의 언어, 즉 비언어적 태도가 더 많은 정보를 준다고 강조한다. 행동 심리학 책들은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동작 하나하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타인의 몸말을 허투루 보지 않게 된다. 저 사람이 입구 쪽을 바라보는 건 빨리 이곳을 뜨고 싶다는 제스처야. 손을 책상 아래로 감추는 걸로 보아 저이는 자제심을 발휘하는 중일 거야. 다리를 갑자기 흔드는 저 남자에게 좋은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 책의 영향으로 타자를 향해 이런 분석을 하게 된다.한데 이런 면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심리학 서적이 아무리 과학적이고 심층적이라 해도 타자의 몸 언어를 명확하게 분석해주지는 못한다. 반은 받아들일만하고 나머지 반은 무시해도 좋다. 인간 행동 패턴에 관한 심리서는 필요악이다. 타자를 이해하는 긍정의 수단도 되지만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봤을 때는 공감도 된다. 내 실수를 줄이고 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한 지침서로 삼을 만하다. 타인을 적극 수용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한 목적이라면 인간의 몸 언어에 관심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1

쇼트트랙 단상

소치 동계올림픽이 중반을 넘어섰다. 우리 선수가 등장하면 맘부터 졸인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정서와 근원적 모성이 절로 발동하는 것이다. 쇼트트랙 경기에서는 그런 맘이 더해진다. 쇼트트랙은 스피드보다 경기 운영의 묘미에서 승패가 좌우되는 경기이다. 눈치작전도 필요하고 그만큼 몸싸움도 치열하다. 관전하는 이도 덩달아 조마조마해질 수밖에 없다. 숱한 변수들을 살펴가며 가슴 졸이는 그 재미에 쇼트트랙을 좋아하는 이도 많다. 사랑받는 국민 스포츠인 쇼트트랙에 관한 잡음이 끊이질 않는다. 올림픽 때만 되면 단골메뉴로 회자된다. 파벌 싸움이란 큰 틀은 이제 온 국민이 알 정도가 되었다. 잘못은 빙상연맹 관계자들에게 있고 책임 또한 그들 몫이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고, 그들 싸움의 제일 희생양은 선수들이란 사실만 남았다. 실력 보다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경기다 보니 선수들은 여러 요구 사항으로 심리적 압박을 받는다. 하지만 그 사항이 합당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끝내 갈등과 반발과 상처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이번 올림픽에서 보란듯이 성과를 낸 안현수 선수는 그나마 심리적·경제적 보상을 얻게 되었다. 다행이다. 빙상연맹 관계자들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국민정서 또한 그러한 안현수를 응원한다. 하지만 또 다른 피해자인, 한 때는 선수였거나 지금 선수인 이들이 받을 상처는 누가 치유해주나? 선수들 입장에서는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일 수 없다. 모두 피해자들일 뿐이다.성과 최고주의, 금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를 조장하는 한 이런 부조리한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한 자아의 건전한 성취욕이나 올곧은 투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올림픽은 충분한 감동을 선사한다. 개인의 영광이 타인에게 긍정의 자극을 주는 선만으로도 스포츠의 역할은 충분하다. 나부터 자국 선수가 나오면 떨려서 제대로 경기를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 정서와 과격한 스포츠 국가주의와는 다르다. 금메달을 애국이나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이런 사태를 방관한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20

깨지기 쉬운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다. 약고 발 빠른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눈치 없는데다 느리기까지 한 사람은 위기가 왔다는 것조차 모른다. 일반적으로 위기에 닥치면 당황하고 허둥대다 무너지기 쉽다. 나심 탈레브는 `안티프래질`을 통해 이러한 위기의 본질과 속성, 그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인식의 전환이란 관점에서 기술한다. 탈레브는 프래질(fragile, 깨지기 쉬운)과 안티프래질의 개념에 대해 촛불과 장작불을 예로 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쉬 꺼진다. 외부 충격에 약한 프래질 상태가 된다. 반면에 장작불은 바람이 셀수록 더 세게 타오른다. 외부 충격에 강한 안티프래질이 되는 것이다. 저자 자신이 조합한 용어인 이 안티프래질의 특성을 갈파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역설한다.프래질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이다. 예측가능한데다 선형적 구조를 지닌다. 이에 반해 프래질은 예측불가능하고 비선형적 형태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위기 상황, 이를테면 IMF 사태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프래질이 되어 버린다. 반대쪽에 안티프래질이란 공고한 영역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 사이 프래질을 예측하고(어쩌면 그런 상황을 만든 사람들) 대비한 이들은 고스란히 반사이익을 챙긴다. 유용한 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이익을 챙긴 안티프래질의 사람들은 위기의 주범이지만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비선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상황이라는 면죄부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무지한 일반인들일 뿐이다.프래질을 감지하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 익숙해지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저자는 말한다.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안주에 자족하지 않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단다. 한마디로 속아 넘어가지 않는 전략이 요구되며, 우리 스스로 안티프래질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밖에 없다. 깨지기 쉬운 일반인이 단단하기만 한 글로벌 이익 집단과 싸워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 알고 대처하려는 투지만으로도 불씨가 될 수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9

섣부른 해석

사물은 그 자체로써 제 `실존`을 증거한다. 물론 그 실존하는 현상에도 `본질`은 있다. 하지만 단순히 보기만 하는 상태에서는 그것의 본질까지 꿰뚫어 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착각한다. 내 눈은 바르게 보고 있으며, 나아가 본질까지도 파악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향한 의심의 잣대가 관대할 때 우리는 곡해와 아집에 빠지기 쉽다. 오랜만에 바닷가 나들이를 갔다. 산보 코스에서, 잰걸음으로 걷다 보니 조금 이르게 집합지인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행들을 기다리며 친구와 비어있는 장애인용 주차장의 뒤턱에 퍼질러 앉아 이른 봄 햇살을 쬐고 있었다. 잠시 뒤 차 한 대가 후진해온다. 운전석의 아가씨는 세련된 이미지에다 도도한 분위기다. 친구랑 나는 동시에 중얼거렸다.“장애인증을 제시해보라 할까? 멀쩡하게 생겼고만 주저함도 없이 이곳에 주차하네.” 그 말을 하던 순간의 내 속내는 장애인을 위한 정의감도 뭣도 아니었다. 장애인도 아니면서(!) 하필이면 휴식 중인 우리 앞자리에 매연을 뿜어가며 주차할 게 뭐람, 하는 괘씸한 감정이 먼저였다.운전석에서 내리는 아가씨를 본 순간 나는 얼음이 되고 말았다. 세련된 그녀는 분명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더 놀란 건 보조석에서 내려 그 아가씨를 에스코트 하는 이는 다름 아닌 건장한 훈남 청년이었다. 짧은 시간에 내가 저지른 판단의 오점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외관이 풍기는 인상과 장애가 무슨 상관이며, 건장한 청년 대신 불편한 여성 장애인이 운전대를 잡을 수도 있는 상황 -이를 테면 운전 연수 -이 있다는 걸 왜 깨치지 못했을까.습관화된 어설픈 깜냥으로 본질을 겨냥하면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명제를 이 사소한 경험에도 적용하고 싶어진다. 모든 건 그대로 있다. 다만 내 눈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물은 내 식으로 가공된다. 내 주석에 따라 물이 되기도, 기름이 되기도 하는 게 풍경이다. 실존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허술한 눈으로 본질을 낚으려는 이 위험하고도 어리석은 판단이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2-18

오늘을 봄날처럼

한 번씩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섣부른 희망에 대한 기대감으로 오늘 이 순간을 너무 얕잡아 봤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제 생애의 정점이나 절정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르다. 십대의 순수한 기억을 가진 이라면 그때가 가장 되새김질 하고 싶을 것이고, 청춘의 격정을 호사스레 누린 사람이라면 이십대야말로 놓치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고 회상할 것이다. 경제적, 사회적 성취감을 이룬 장년이라면 그때야말로 인생의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들은 언제나 과거형으로 나타난다. 무슨 말인고 하니 희망했던 그 순간은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이뤄진 희망이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식구들과 소박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고, 땀 흘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별 탈 없이 친구들과 정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는, 누리는 그 순간에는 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순간이 최상의 날이었음은 내일이 된 뒤에야 실감하곤 한다. 왜냐하면 욕망하고 희망하는 인간인 우리는 언제나 내일만을 기약하기 때문이다. 어제 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는 당연히 내일이 낫다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 더한 절정의 날도 오기 어렵다.오늘 하루 몸살로 온몸이 나른해진다거나, 타의에 의해 의기소침해진다거나, 모든 게 부질없어 보이는 순간이 온다면 그제야 지금까지의 제 삶이 얼마나 절정의 순간이었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희망하고 염원하는 건 인간의 장점이다. 그렇다고 어제와 오늘을 버리면서까지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건 어리석다. 어제와 오늘 없는 내일이 어디 있으랴. 내일을 꿈꾸는 것보다 오늘이 내 생의 봄날이라는 생각이 우선이다. 그토록 희망하는 내일 아침이 와도 오늘 소박했던 하룻저녁보다 낫다는 법은 없다. 오늘 하루가 내 삶의 봄날이라는 명랑한 생각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킨다. 그래야 혹시라도 원하지 않는 아침을 맞았을 때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이 역시 아름다운 봄날이라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나./김살로메(소설가)

2014-02-17

노력 없는 글쓰기는 없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인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서 독자를 설득시킬 수만 있다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쓰는 이나 읽는 이, 두 쪽 다 만족할 수 있는 글쓰기를 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다. 쓴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재능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는 오히려 기술에 가깝다. 이는 공부가 재능이 아니라 기술인 것과 같다. 쓴다는 것에 대해 지나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이 재능이나 예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가기도 한다.하지만 이는 글쓰기에 대한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어디에나 예외는 있다. 그리하여 드물게 예술가적 재능을 발휘하는 작가들이 나타나는데 그건 그야말로 특별한 경우이다. 그러니 쓰고 싶다면 미리 기 꺾일 필요는 없다.글쓰기는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 다만 재능이 덜 필요한 만큼 감각과 열정은 더 갖추도록 해야 한다. 예민한 손끝과 묵직한 엉덩이가 그 준비물이다. 그 두 도구를 활용해 읽고 쓰기만 하면 된다. 우선 `예민한` 감각으로 다른 사람의 잘 쓴 글을 베껴 쓰기부터 한다. 좋은 시나 산문을 읽고 베껴 쓰기를 하다 보면 감이 온다. 지속적인 이 연습은 자연스레 나만의 문체와 나만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이때도 사람들은 착각한다. 머리(재능)와 가슴(감각)이 글을 쓰게 하는 줄. 단언컨대 글을 쓰는 원동력은 그 둘 다 아니다. 쓰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묵직한` 엉덩이다.글 한 번 쓰고 싶은가? 우선 취향에 맞는 책을 읽어라. 좋은 글을 쓰고 싶은가? 잘 된 글을 필사하라. 글을 오래토록 잘 쓰고 싶은가? 당장 엉덩이부터 의자에 앉힌 뒤 손가락을 자판에 올려라. 그리고 두드려라. 네 튼실한 엉덩이가 의자 깊숙이 묻히고 더 이상 예민해질 손끝이 없어질 정도로 글쓰기에 푹 빠진 당신은 온몸으로 이렇게 적을 것이다. 글쓰기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기술)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가장 매혹적인 작업 중의 하나라고./김살로메(소설가)

2014-02-14

3초 만에 하는 일

사랑에 관한 표현을 할 때 흔히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고 말한다. 사랑을 한다, 고 말하면 왠지 싱거운 느낌이 들지만 사랑에 빠진다, 고 묘사하면 왠지 그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기분이다. 사랑은 하는 것도 맞고 빠지는 것도 맞겠지만, 왠지 사랑은 `빠져야` 제 맛인 것 같다. 이런 감정은 사람이 지닌 편견과도 무관하지 않다. 심리학자들의 오랜 연구 끝에 우리는 입맛에 맞는 각종 정보들을 많이 얻어왔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첫 3초면 충분하다는 가설이다. 이 말이 옳은가 그른가는 별개로 치더라도 그런 생각에 우리가 영향을 받는 것만은 사실이다. 누구나 그 첫 3초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스무 살 시절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누군가와 협업해야할 일이 있었다. 소개 받은 그 친구는 도도하게 예쁜 인상이었다. 얼굴선은 부드러웠고 이목구비 또한 또렷했지만 눈빛이 너무 강렬했다. 3초는커녕 1초도 걸리지 않아 나는`그녀는 너무 도도해. 가까워지기 힘들 거야.` 라고 결론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본 그녀는 무척 상냥하고 속이 깊었다. 어릴 때 다친 한 쪽 눈을 머리칼로 가리다 보니 나머지 한 눈이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비쳤던 것이다. 3초의 잘못된 판단을 자책하며 당황했던 그 때를 잊을 수 없다.심리학자들이 말하는 3초의 판단이, 편견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온당한 상황이 되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순간의 판단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기로 이미 결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했다, 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은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는 것 없이 곧장 사랑에 빠지기 때문이다. 여러 번 만난 뒤에는 사랑을 하는 것이지 사랑에 빠진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사랑 앞에서 속수무책일수밖에 없는 건 순간의 그 힘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이다.3초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만 새길 수 있다면 그 3초의 판단을 애써 무시하지 않아도 좋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3

적당하기

인간은 결속의 동물이다. 무리 만들기를 좋아하고 네 편 내 편 구별하기를 좋아한다. 나아가 유교권 국가일수록 단일종족이라는 환상이 깊을수록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로 경계 짓기를 즐기기도 한다. 그것이 지나치면 객관성을 잃게도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스포츠와 관련 있다. 예를 들면 김연아의 완벽한 점프에 일본인들이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면, 아사다 마오의 불완전 점프에 우리 중 누군가는 조목조목 반박하게 된다. 이 정도야 사실 관계 증명을 하는 것이니 넘어간다 치지만 대개 서로 인신공격성 발언에다 국가 간 모독성 발언으로 그 수위가 높아진다. 괴물 되는 건 순간이다. 괴물은 우리 맘속에 분명 존재한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그것은 오로지 행동함으로써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꿔 말하면 인간의 모습만큼 괴물의 형상에 가까운 것도 없다. 그것의 형식은 옹졸한 국수주의나 지나친 애국주의 나아가 위험한 호전주의로 나타난다. 내가 너보다 옳고, 우리가 너희보다 낫다는 그릇된 신념이 그렇게 만든다. 나는 그르지 않고, 우리 가족은 부도덕하지 않으며 우리 국민성은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상대라고 성급히 결론 내릴 때에 그만큼 쉽게 괴물이 되는 것이다. 욱일승천기 번득이며 온 거리를 뛰어다니고, 독도는 저들 땅이라고 지치지도 않고 우기는 일본의 극우자들 모습이 그 좋은 예이다.자애며 가족애며 조국애도 현상 자체를 보는 눈에 앞설 수는 없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은 인류 공영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 집단의 옳음과 우위를 한정하는 뜻으로 쓰일 수는 없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는데 능통한 인간이긴 하지만 불멸의 신념처럼 그것을 한쪽에선 주입하고 다른 한쪽에선 세뇌당해야만 하는 사회여서는 곤란하다. 사람은 사람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패 짓는 것의 가치와 긍정 위안은 분명히 인정할 만하다. 적당한 무리 짓기야 인간사 권장할 일 아니던가. 다만 도가 지나치면 네 편 내 편 할 것 없이 금세 괴물이 되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2

폭설 단상

오랜 만의 폭설이다. 한낮이 가까웠음에도 사위가 온통 흰빛 적요의 난무이다. 창을 통해 보이는 가까운 대로엔 차들이 멈췄다 섰다를 반복한다. 이마저 고요한 풍경화 같다. 꼭 닫힌 창 너머로 움직임만 보일 뿐 소리 한 점 들리지 않는 이 모순적 평화가 낯설기만 하다. 차들의 느린 행렬, 갓길에 멈춰선 트럭, 이차선에서 비상등을 켠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미니밴, 헛바퀴 굴러 갓길과 삼차선에 비스듬하게 꽂혀버린 버스 등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눈 오는 날의 실상은 낭만적 정서보다 현실적 불편함이 더 크구나. 폭설은 사람을, 풍경을 기어이 삼키고야 마는구나. 오디세우스는 10년간 끌어 온 트로이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부하들과 귀향선에 오른다. 온갖 시련들이 그들을 기다렸다. 그 중에 바다 요정 세이렌이 사는 섬을 지날 때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현혹되어 배가 좌초되거나 사람들이 물에 뛰어내리기 때문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았다. 노랫소리를 포기하지 못하겠기에 자신의 몸은 밧줄로 돛대에 묶어 줄 것을 부탁했다. 만일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겨워 스스로 풀어달라고 청한다면 더 단단히 묶으라고 명령했다. 그 결심 덕에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노래도 들으면서 무사히 그 섬을 지날 수 있었다.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오디세우스 군단이 현혹되듯이 일 년에 한 번 구경할까 말까 한 눈을 우리는 내심 낭만적 정서로 기다린다. 하지만 그 눈의 꼬임은 현실적 불편함이 되어 자칫하면 생명에 지장을 가져올 수도 있다. 오디세우스처럼 제 몸을 묶어 외적 결속을 꾀하면 좋으련만 밥벌이의 현실이 그걸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속을 위해 그저 길을 나서야 한다. 게다가 원치 않아도 암초를 만나거나 물에 뛰어내려야 하는 위험이 떡하니 기다리기도 한다.낭만적 정서만 기대한다면 내 몸을 묶어서라도 눈 구경을 할 수 있으련만 현실 속 눈 풍광은 그것과는 한참 멀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여전히 눈은 내리고 차들은 거북이 운행 중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11

평판에 대하여

절대 도덕을 실천하는데다 완벽한 염치를 가진 이가 있을까. 반대로 절대 모순을 보여주거나 완벽한 악행만 일삼는 이가 있을까. 누군가를 일컬어 옳은 삶만 산다고 규정할 수 없듯이 또 다른 사람더러 나쁜 삶만 산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에는 평판이란 게 따라 다닌다. 불완전하기만 한 존재들끼리 서로를 판단하는 우습고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다. 어느 누구도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소한 것에서 타자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진다. 자신에 대한 공정한 평가는 내리기 어려워도 타자에 대한 평판은 무서우리만치 객관화하는 게 사람이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타인의 누적되는 양심 불량의 행동들을 보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좋아질 수가 없다. 한 번 잘못된 평판은 되돌리기 어렵다. 좋은 말은 십리를 가다 끊기지만 나쁜 말은 천리를 가고도 힘이 남는다. 찬란한 타인의 미덕에는 덤덤해질 수 있지만, 사소한 남의 실수는 악행으로 번지기를 바라는 게 사람의 마음보이다.한 예를 들자.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나간 한 사람에 대해 한 부류에게는 그가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다른 부류에게는 원래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깜박 잊은 거라고 변명해줬다. 마지막 부류에게는 어떤 의견도 제시하지 않았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는 정보를 접한 참가자들은 그가 지불하지 않은 음식 값을 실제보다 높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사람에 대한 평가는 집단적 교류 속에서 이뤄지고 부정적 평가일수록 날개가 빨리 달린다. 평판은 맞장구에 그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누군가를 안 좋게 얘기했을 때 그 얘기에 맞장구를 치는 순간 집단 전체는 그를 나쁘게 보게 된다. 반면 맞장구 대신 그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변호를 한다면 처음 부정적인 말을 꺼낸 사람의 말은 어느 정도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타자에 대해 소극적인 부정의 평판에 가담하긴 쉬워도, 타자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의 평판을 위해 팔 걷어 부치기는 얼마나 어렵던가?/김살로메(소설가)

2014-02-10

왼쪽 자리

영화를 볼 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자리는 뒤쪽 중앙의 왼쪽 통로 쪽이다. 중앙의 중간 자리부터 예매되는 것에 비하면 내 취향은 약간 특이하긴 하다. 이번에 `겨울왕국`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예외였다. 동석한 딸내미의 주장에 의하면 애니메이션은 화려한 영상이 감상의 포인트이니 가운데자리가 낫겠다고 했다. 일리 있는 말이라 쉽게 동의했다. 중간 자리를 꺼리는 나름의 이유는 오직 개인적 경험에 연유한다. 우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다. 깜깜한 곳, 전후좌우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면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건강 검진 때 MRI 기계 안에서 단 몇 초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경험과 유사한 느낌이랄까. 숨이 막히고 심장이 조여 온다. 뭉근하게 주리를 틀리듯 온몸이 조금씩 꼬이기 시작한다. 두 번째는 요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혹시 콜라 한 잔이라도 들이켜게 된다면 그날 컨디션에 따라 상영 중간에 화장실을 가게 될 수도 있다. 옆 사람의 의자사이를 지나가야 하니 민폐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자리가 안정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자리는 앞사람들의 빽빽한 몸피와 들쑥날쑥한 머리 라인 때문에 화면이 잘 안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졸음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피곤한 날인데다 취향마저 내 것이 아닌 영화를 보게 될 경우 십중팔구 초반 십 분은 졸게 된다.뒤쪽 통로 쪽에 앉으면 갑갑하지도 않고, 고개도 눈치껏 돌릴 수도 있고, 화장실 가기도 쉽고, 졸더라도 덜 들킨다. 그러니 그 자리야말로 내겐 안성맞춤인 셈이다. 한데 오랜만에 앉은 가운데 자리는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전신이 갑갑해져오고, 화장실도 가고 싶고, 앞사람 머리에 가려 자막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피곤했는지 설상가상으로 졸음마저 몰아쳐 그 좋은 화면을 두고 잠깐 졸기까지 했다. 딸내미가 창피하다며 내 허벅지를 꼬집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진작 왼쪽 뒤 통로 자리라고 확실하게 말할 걸. 편하게 이기적으로 길들여지는 것의 이 익숙함과 무서움이라니!/김살로메(소설가)

2014-02-07

실패를 위하여

성공과 실패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일견 명백해 보이는 답 앞에서 가끔은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성공담이 넘치는 사회이다. 한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업종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예술계든, 산업계든, 학계든, 연예계든 현실적인 성공을 눈앞에 둔 사람이어야 한다. 대중들이 그에게 열광하기 시작한다. 매의 눈을 가진 출판 업계가 가만있을 리 없다. 속된 말로 `물건 되겠다` 싶으니 재빨리 움직인다. 기획, 집필,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을 낸다. 이름값에 비례해서 책은 순식간에 동이 난다.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쏟아진다. 저자는 하루아침에 성공담의 주인공이 되어 바삐 불려 다닌다.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느덧 신화의 경지에 이른다. 또 다음 책을 기획하고 집필해야 한다. 대중의 관심을 지속하려면 이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효 기간 5년 미만인 그 성공기는 또 다른 기획품에 의해 제 자리를 물려줘야 하는 운명을 맞고 만다. 대중은 누군가의 성공담을 소비하는 데서 만족하지 그 성공담 자체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공만을 바라는 이런 현상이 바람직한 사회상일까. 성공담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실패담이다. 누구나 성공만을 얘기한다면 나머지 대다수의 성공하지 못한 삶은 잘못된 것일까. 남의 성공을 보면서 희망의 자긍심 못지않게 열패감도 생기는 게 사람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자식 자랑하는 옆집 아줌마는 한 사람이고, 들어주는 아줌마는 아홉 명이다. 옆집 아줌마의 나 홀로 큰 목소리 때문에 나머지 아홉의 풀죽은 목소리가 `소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성공이다, 스펙이다, 신화다 등등으로 흉흉한 현실이 안타까울 때도 있다. 충분히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는 이들 앞에 너무 많은 `성공담 기획 상품들`이 쏟아지는 건 아닌지. 99퍼센트의 실패담이 깃털만큼의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성공담이라면 무슨 소용일까. 실패 없는 성공이 어디 있나. 성공만 권하는 사회에 괜히 종주먹 한 번 날리고픈 아침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06

어리석은 게 아냐

세상에서 가장 맘대로 되지 않는 감정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랑이라 말할 테다. 사랑은 어리석음이요, 유치함이요, 수치요, 절망이요, 나락이다. 사랑을 일컬어 현명함이요, 세련됨이요, 자긍이요, 희망이요, 천국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겉보기 사랑을 하거나 사랑이란 말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셰익스피어도 말했다. `사랑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사랑에 빠질 숱한 후대인들을 위한 그의 경고는 옳았다. 지구촌 어디에나 사랑 때문에 눈물로 지새는 인간적인 사람들이 넘쳐 나기에. 사랑에 눈시울 붉어진 개그우먼이 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짝사랑 경험을 고백한다. 공감하되 웃음이 나온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누가 도와줄 수 없고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웃음보다 자기연민에 겨운 날이 더 많은 건 그 `대상`은 내 감정과는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별개인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되니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가.사랑 자체는 환희의 꽃일지 모르지만 사랑이란 감정은 고행의 절벽과도 같다. 그래서 오늘도 사랑 때문에 힘겨운 누군가는 핸드폰 문자를 수십 번 확인하고, 울리지 않는 현관 벨 소리에 귀를 곧추 세운다. 무분별하지 않은 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에 빠진 자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 흩어지는 분수거나 날아가는 포탄처럼 속수무책의 감정이어야 사랑이지, 고요한 찻잔 속의 물이거나 반듯한 나무 한 그루의 이미지라면 온전한 사랑일 수 없다. 감출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어리석음의 향연이라니!사랑에 빠지는 건 쉬워도 그것을 벗어나기란 어렵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누군들 어리석고 힘들지 않을 것인가. 일단 사랑에 빠지면 곁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 따윈 소용없다. 자신이 투자한 에너지와 눈물이란 원석이 `시간의 흐름`이란 보석으로 가공 된 뒤에야 그 허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 보석은 고맙게도 평생 삶의 지침서 같은 반려의 반지가 되어준다. 그러니 까짓 것, 어리석은 그 사랑에 한 번쯤 된통 당한다 한들 진실로 어리석다 할 것인가./김살로메(소설가)

2014-02-05

거품은 제때 걷어내야

뭇국을 끓인다. 간편해 보이지만 제 맛을 내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니다. 우선 양지 부위 고기를 찬물에 담가 핏물을 뺀다. 무는 반개 정도 어슷썰기 한다. 반듯한 깍둑썰기보다 자연스러워 보이는데다 맛도 잘 스며들기 때문이다. 찬물에서 건진 양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끓는 물에 넣는다. 한소끔 끓으면 거기에다 무를 넣고 이십여분 중불로 끓인다. 중간에 소금 간을 한다. 기왕이면 천일염이 좋다. 마지막에 다진 파와 다진 마늘을 넣고 오분 정도 더 끓인다. 먹기 직전 식성에 따라 청양 고추를 넣기도 한다. 쓴 글대로만 하면 제법 시원한 뭇국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몇 번의 뭇국을 끓이면서 실패한 경험이 이 단상을 쓰게 했다. 일견 완벽해 보이는 저 레시피에 실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뭇국의 맛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제때 거품을 걷어내는 일이다.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해 충분히 고기 핏물도 뺐고, 주재료도 일부러 기름에 볶지 않았다. 그래도 아차하면 텁텁한 맛이 난다. 바로 거품 때문이다. 불순물이 모여 몽글몽글 거품으로 끓어오르는데 귀찮다거나 깜박한 나머지 제때 걷어내지 않으면 실패한 뭇국이 되고 만다. 때깔도 지저분하고 맛 또한 텁텁하다. 제 맛을 내기 위해선 지키고 선 채, 넘치기 전에 불을 조절하고 거품을 걷어내야 한다. 타이밍을 놓쳐 국물이 넘치면 가스레인지와 냄비 뚜껑이 지저분해지고, 거품 또한 걷어내지 못하면 국물맛이 엉망이 되고 만다.끓어오르는 화는 넘치기 전에 내 안에서 먼저 걸러야 하고, 해야 할 숙제와 미뤄둔 청소는 그때그때 하는 게 몸과 맘에 가볍다. 결심한 그때가 최적의 타이밍이다. 때를 놓치는 것만큼 찜찜한 것도 없다. 이미 식은 국 앞에서 그 맛을 원망해봤자 소용없다. 국물 맛을 잘못 낸 건 거품 제대로 걷지 않은 내 잘못이지 식재료 탓이 아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제때 거품을 걷어내지 못하고 빈둥거리다 허둥대는 자화상 하나 식은 뭇국 속에 얼비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4-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