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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타인의 취향

타인의 취향을 업무나 사람됨의 평가 잣대로 삼아선 곤란하다. 그것이 먹을거리일 경우는 특히 그렇다. 말은 이렇게 해도 타인의 먹거리 취향에 대한 저마다의 편견이 있긴 하다. 매운 걸 못 먹는 사람을 보면 맺고 끊는 게 불분명할 것 같고, 급하게 먹는 이들은 성격도 불같아 뵈고, 국물을 남기는 이들을 보면 지나치게 건강을 챙기는 사람 같아 보인다. 내게도 그런 편견이 있긴 하다. 무조건 커피를 멀리하고 녹차나 매실 등 웰빙 음료만 찾는 사람들을 보면 건강 염려한(念慮漢)이 아닐까 하고, 음료수 하나 고르는데도 오랜 고심을 하는 걸 보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그건 타인의 취향일 뿐 시비 걸 마음은 추호도 없다. 커피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크게 마시지도 않고, 녹차를 좋아하지 않지만 자주 마시기도 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마실 거리는 다만 마실 거리일 뿐이다.아메리카노 커피 심부름 때문에 진보 정치계 한 쪽이 떠들썩하다. 회의 중 비서진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킨 것도 못마땅한데, 매장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를 사오게 해 마신다는 게 문제란다. 뭐 이런 코미디가 있나 싶다. 생각하는 게 다른 계파들끼리 정파 싸움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노동자와 민중을 생각하는 당의 커피는 꼭 셀프 믹스커피여야만 하나? 노동자는 스타벅스 매장 같은 데서 아메리카노나 캐러멜마키야토를 마시면 안 되나?주입되고 세뇌된 뿌리는 편견이라는 잎사귀를 낳는다. 노동자와 민중의 먹거리 취향에도 계급이 있어야 하나? 굶어죽는 시대도 아닌데 자신들의 잣대로 타인의 취향을 재단하는 이 저급 코미디만도 못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진보든 보수든 커피는 커피일 뿐이다. 취향대로 마시면 된다. 이름 좀 구린 아메리카노면 어떻고 좀 비싼 매장 커피면 어떠리. 사회는 진화하는데 사고가 퇴보하면 그 그룹은 갑갑한 소굴로만 남을 뿐이다.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 한 잔이 제대로 생각나는 하루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2

집 밥

요리가 대세인 시대를 사는 것 같다. 텔레비전을 켜면 예능과 드라마 못지않게 요리 천국이다. 고든 램지, 제이미 올리버, 빅마마 같은 전문가들이 나와 눈부신 요리 세계를 보여준 지도 오래 되었다. 즐기면서 잘하는 분야가 있다는 건 부럽다. 요리를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조리대 앞에 서는 게 두렵다. 자신이 없으니 밥상 차리는 일은 언제나 가슴 짓누르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텅 빈 냉장고를 보며 한숨지을 때가 많다.그래도 외지에 갔던 아이들이 돌아오는 격주말이면 신경을 쓴다. 그렇게 해서라도 부족한 모성을 보상 받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중복되지 않게 식단을 짜가며 요란을 떤다. 아침엔 초밥, 점심엔 냉면, 저녁엔 피자, 다음날 아침엔 고깃국, 점심은 스파게티, 저녁은 삼겹살. 내가 봐도 평소의 내가 아니다. 한 끼 준비하고 나면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돌아서 한 끼 차리고 나면 지쳐 드러누울 지경이다. 화장실을 자주 가긴 했지만 아들이 잘 먹어주니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그런데 저녁 운동을 갔다 온 부자가 속내 이야기를 한다. 집 밥이 그리웠는데, 아들이 먹은 건 집 밥이 아니라 요리였다나. 이것저것 신경 쓰는 엄마한테 미안해서 솔직하게 말 못했는데 아들이 바란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소박한 밥상이란다. 식구끼리 먹는 밥은 돌밥도 찰밥으로 보이고, 푸성귀도 산삼 되어 넘어간다나. 구수한 된장찌개에 시원한 열무김치, 그 정도가 진정한 `집 밥`이란다.`한 밥에 오르고 한 밥에 내린다`는 어른들 말씀에 기대, 잘 먹여야 한다는 과장된 모성을 발휘한 게 도리어 소화 불량을 불렀던 것이다. 바깥 더운밥보다 내 집 식은 밥이 낫다는 단순한 원리를 왜 몰랐을까. 집 자체가 최고의 밥이고 엄마 자체가 최선의 반찬이라는 생각을 왜 깨치지 못했을까. 보상 심리가 차려낸 오지랖 밥상 앞에서 괜히 쑥스러워지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21

야구 열풍

우리 지역에서도 프로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 야구 경기장이 생기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반갑기만 하다. 게임이 진행된 지난 이틀 동안 환히 밝힌 조명탑만 보아도 가슴이 설렜?? 관전을 하는 행운을 누리진 못했지만 텔레비전 중계를 보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꿈에라도 포항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적 느낌이긴 하지만 포항에 대한 첫 인상 중에 하나가 `축구 도시`라는 것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 축구 구단이 있고, 전용 구장도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라지만 어느 누구도 축구만큼 야구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야구 경기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조금 의아했다.나와 동시대를 지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숨 막히게 재미있던 고교야구 중계 관전을 거쳐 프로야구 개막 시대를 온 청춘으로 맞이한 때가 있었다. 그 추억 때문에라도 야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자연스레 발현되는 것이다. 한데 이제 포항에서도 그 시절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축구와 더불어 야구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야구장 건립이 고맙기만 하다.많은 예산을 들인 만큼 그 활용도를 높일 수 있었으면 한다. 질 높은 국내외 야구 경기를 적극 유치하고, 무엇보다 연일 꽉 찬 관중석인 만큼 새 경기장에서 하는 프로 게임 수가 계획했던 것보다 늘어났으면 좋겠다. 증축 계획이 있다니 표를 못 구해 안타까운 일도 빨리 해소되기를 바란다. 나아가 우리 지역민을 위한 프로야구 구단도 생겨난다면 더할 게 없겠다. 경제적 문화적 효과를 넘어 도시 브랜드 상승효과까지 누릴 수 있는 이 열기가 지속되기를. 스포츠를 통한 도시 이미지 제고도 나쁠 건 없지 않은가./김살로메(소설가)

2012-08-20

잘 넘어지기

하루에도 수십 번 넘어진다. 말실수로 후회하고, 오해로 상처 받고, 앞서 짚어 난감하고, 이루지 못해 번민한다. 일상은 넘어짐의 연속이다. 넘어진다는 건 지극히 인간적이다. 따라서 잘못이 아니다. 자주 넘어져도 좋으나 잘 넘어져야 한다. 사람의 별에서 구석자리 하나 세내어 살면서 잘 넘어진다는 건 위안 받을 너른 가슴을 만나는 걸 말한다. 유도나 레슬링 경기를 보면 넘어뜨리는 것 못지않게 넘어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운동 경기와는 달리, 심리적으로 넘어질 때는 잘 받아주는 주변이 있어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라는 말도 넘어질 때 잘 받아주는 걸 의미한다.일본영화 `카모메식당`을 봤다. 외롭고 상처 입은 캐릭터들은 헬싱키에 차린 카모메식당에 와서 제 슬픔을 부려놓는다. `세상 어디에 있어도 슬픈 사람은 슬프고, 외로운 사람은 외롭지요` 핀란드 숲 넓은 배경을 안고 사는 그들은 마냥 평화롭고 여유 있게 살 줄 알았는데 저마다의 사연으로 식당 창문 앞을 서성이는 걸 보고 일본인 식당주인이 읊조리듯 하는 말이다.이국의 길모퉁이 작은 식당엔 외톨이 청년, 버림받은 여자, 아픔을 간직한 자, 외곬 중년남 등 이웃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넘어지기 쉬운 영혼들이 모여든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카모메식당은 정갈하고 상큼한 매력으로 손님들을 매혹한다. 그곳엔 마법 같은 루왁 커피와 주먹밥 그리고 시나몬롤빵이 있다. 하지만 절대강자는 역시 넘어지기 쉬운 영혼들을 보듬는 주인의 따뜻한 시선이다. 잘 넘어지려면 잘 받아줘야 한다. 카모메식당이야말로 힐링의 원조가 아닐까./김살로메(소설가)

2012-08-17

사죄와 유감

또 다시 광복절이다.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은커녕 그들의 태도는 무성의와 몰염치로 일관한다. 징용자와 위안부 문제 등 해결해야할 숱한 과제들은 모른 체하고 교과서 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한쪽은 마음에서 우러난 사죄를 필요로 하고 그들은 유감을 표시함으로써 면죄부를 대신했다고 생각한다. 2차 대전 종전 후 유럽에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통해 비교적 과거 청산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독일의 진심어린 사죄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아시아의 도쿄 전범 재판은 통치권 국가의 이해관계 때문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사죄는커녕 관례상 쓰는 `유감`이란 말을 듣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이번 런던올림픽에서 `독도 세리머니`를 펼친 박종우 선수 해프닝에 대해 대한축구협회가 `사죄` 이메일을 보냈다고 일본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사죄가 아니라 `유감`이었다는 협회 측의 해명이 있었지만 그것마저 넌센스다. 박종우 선수를 보호하고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지 않은 관계자들의 상황은 이해하지만 불필요한 제스처임에는 틀림없다. 우발적이고도 우연한 사건에 대해 올림픽위원회에 소명할 의무는 있을지언정 정치적 문제로 이슈화시켜 시비를 건 일본에게 빌미를 제공할 필요는 없었다.`유감`(regret)은 두루뭉술한 미안함 정도를 나타내는 외교 수사이고, `사죄`(apology)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때 쓰는 표현이다. 박종우의 경우 사죄는커녕 유감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문제를 삼는다면 관중석에서 날아온 `독도는 우리땅` 종이를 들고 경기장을 뛴 우리 축구선수가 아니라 욱일승천기가 디자인된 유니폼을 입은 일본 체조선수여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그 문양보다 더 의도적인 정치행위가 어디 있는가.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시점에서 그들이 통상적인 유감이 아닌 진심어린 사죄를 해야 하는 건 독도가 우리 땅인 것만큼이나 자명한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16

피스토리우스

그에게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턴을 받을 때부터 꼴찌였던 레이스를 역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주자로 나선 그에게 관중들은 환호했다. 이번 런던 올림픽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는 순간이었다. 남자 육상 1600m 계주 결승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앵커로 나선 의족 스프린터 피스토리우스. 그의 질주를 통해 지구촌 사람들은 인간 존엄과 불굴의 의지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다리 절단 장애인이 패럴림픽을 넘어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의족을 찼다는 건 그의 외적인 모습일 뿐 실제 그는 몸이 불편하다는 의식을 거의 하지 않는단다. 무릎 아래 뼈가 없이 태어난 그는 돌도 되기 전 종아리를 절단해야 했다. 자라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패배의식 같은 걸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단다. 처음부터 그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 많고 적극적인 보통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족 덕이다.`패배자는 결승선을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달려보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갓난아기 때 써 뒀다는 어머니의 이 한마디는 그의 평생 좌우명이 되었다. 가족의 긍정적이고 열린 시선이 그를 낙천적이고 도전적인 청년으로 이끌었다. 장애인 선수가 아니라 육상선수일 뿐이라는 그의 신념이 마음자락을 잡아끈다.탄소섬유 보철의 달리기 효과를 주장하는 일부 시각을 잠재우고 올림픽 무대에 섰다는 것 자체로 그는 주목 받아 마땅하다. 스스로 바라보는 만큼 타인도 그 사람을 바라봐준다. 당당한 자기만의 길을 내며 달리는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치타 닮은 그의 의족을 곁눈질할 게 아니라 여름밤 서늘한 바람 같은 그의 영혼을 보듬을 일이다. 어떻게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하루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13

뫼르소의 태양

강렬한 태양을 벗어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은 일탈을 꿈꾼다. 고작해야 계곡이나 바다 찾아 물 한 번 담그는 정도의 일탈이겠지만 일상의 틀을 훌훌 벗어난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거다. 그도 잠시 결국은 세상이 원하는 삶, 가족이 바라는 생활, 본인 스스로가 규정한 테두리 속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다.하지만 여기 제대로 된 일탈 종결자가 있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문제적 인간 뫼르소. 엄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 연애를 하되 깊이 사랑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하며, 타는 듯한 태양빛에 홀려 살인을 저지르는 사내다. 평범하고 규범적인 인간 군상과 자신이 왜 다른지조차 자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천상 자유인. 자신이 일탈적 선상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않는 실존적 인간형이다.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뫼르소에겐 사랑, 도덕, 가족애, 신념 그리고 종교 같은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가 늘 입에 달고 사는 말은`아무래도 상관없어`이다. 도덕적으로 계산할 줄 모르고, 종교적 원죄의식엔 물들지도 않았다. 애초에 인간에 관한 연민이나 사회가 부여한 관습이나 질서에서 자유로운 인간일 뿐이다. 우발적 살인으로 재판정에 섰지만 자기변명마저 혐오한다. 자신을 위한 재판이건만 자신도 타인이 되어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한 여름에 이 작품이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격렬하게 이마에 내리꽂히던 뫼르소만의 실존적 태양 때문이리라. 실존주의는 누가 뭐래도 개별자의 삶을 우선한다. 타인에게 상처나 방해 없는 실존이라면 나도 기꺼이 그 배에 승선하리라. 개별자의 자유의지가 존중되는 사회야말로 가장 건강한 집단이라 생각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솔직하기 위해 타자에게 유해한 손짓을 가한 뫼르소는 부조리한 상황극의 주인공이 되기엔 2프로 부족한 감도 없지 않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10

편견이라는 모자

누구나 자신만의 거울로 세상을 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자기가 꾸려온 삶의 방식대로 사물과 사람을 본다. 객관적 눈을 가졌다고 자부할수록 실은 편견이라는 잣대가 웃자란 경우일 때가 많다. 각자 경험한 만큼 사물을 평가하고, 스스로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람을 평가한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할수록 그 경계는 실체가 없다.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카페에 들렀다. 휴가철이라 다들 산과 바다로 떠났는지 실내에는 우리밖에 없다. 심심했는지 곁자리에 앉은 사장이 슬쩍 우리 수다에 끼어든다. 눈치를 보더니 본심을 얘기한다. 테이크아웃해서는 안 되는 팥빙수를 사간 고객이 카페 전용 빙수 용기를 돌려주지 않는단다. 몇 호에 사는지도 모르는 그 손님 하나가 주민들 이미지를 다 흐려놓았다고 흥분한다. 업주 입장에서 양심불량인 그 손님이 서운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주민들 이미지까지 판단하는 건 섣부르다 싶다.영국의 수필가 알프레드 가드너는 그의 작품`모자철학`에서 이런 인간의 속성을 잘 묘파했다. 작품 속 모자가게 주인은 모자 크기(머리크기)로 손님을 판단한다. 변호사나 선장 등 전문직 종사자는 머리가 크고, 일용직이나 육체노동자 등 단순직종인들은 머리가 작다는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마찬가지로 금융업자는 돈의 유무에 따라, 가구상은 의자의 질에 따라, 미식가는 요리 솜씨에 따라 상대를 재단한다는 것이다. 가드너식대로라면 카페사장은 빙수 그릇을 되돌려주느냐 아니냐의 잣대로 사람을 판단했다.사람은 이해하고 소통하는 관계이지 판단하고 평가하는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한데도 우리는 세상을 제 안의 눈으로만 본다. 그 눈은 결코 객관적이지도 선명하지도 않다. 편견이라는 모자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못하겠지만 그 모자가 온전하지 않다는 것만이라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보고 싶은 사실을 볼 뿐, 봐야할 진실을 보는 데서는 언제나 멀리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09

간고등어

어릴 적 풍경 하나. 어스름이 깔리면 삼삼오오 오일장에 나섰던 사람들의 귀가 행렬이 이어진다. 흙먼지 날리며 신작로를 따라 막차가 지나간다. 차비 몇 십 원이 아까워 대부분 버스조차 타지 못하고 걸어서 귀가 중이다. 차바퀴가 뿜어내는 신작로 흙먼지만 애꿎게 손사래로 걷어낼 뿐 묵묵히 남은 귀갓길을 재촉하고 있다. 아낙들은 똬리에만 의존해 큰 소주병을 머리에 이었다. 제수품이나 생필품이 담긴 보자기를 양손에 들었으므로 남는 손이 없다. 등유가 담긴 그 병은 간들간들 위태롭기만 하다. 하지만 절대로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묘기를 넘어 신기한 일로 내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 있다.남정네들은 얼큰하게 취했다. 소 판 돈으로 두둑해진 허리춤의 그들 손엔 새끼줄에 엮인 간고등어 한 손이 들려 있었다. 옴팡지게 깊은 내륙에만 살아왔던 사람들은 비린 고기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냉장 시설이 마땅찮던 그 시절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간고등어였으리라. 차비와 맞바꾼 비릿한 손끝을 풀어 한 집의 가장은 어린 자식과 늙어가는 노모를 위해 한 끼 밥상을 부풀렸다. 그렇게 간고등어는 어린 시절 최고의 찬이었다.안동 간고등어 업계가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진다. 모두 욕심 때문이다. 덜 노동하고 더 얻고 싶은 욕구는 편법 영업이라는 병폐를 낳았다. 타지역에서 완제품을 들여와 포장만 하거나, 아예 상표를 빌려주고 대여비만 챙기기도 했단다. 이런 과정에서 원산지도 불분명한 저질 수입산이 덤핑 판매되기도 했단다. 무늬만 안동간고등어가 유통된 셈이다.그때는 안동간고등어라는 이름조차 없었다. 그저 시골 사람들에겐 최고의 찬일 뿐이었다. 한 가계를 책임진, 취한 아비가 오일장에서 돌아온다. 새끼줄에 엮인 한 손의 간고등어를 흔들며 사립문께부터 제 새끼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그 무구했던 시절로 상혼을 되돌리기를 바라는 건 너무 동화적일까./김살로메(소설가)

2012-08-08

띠지를 연민함

주문한 책들이 배달됐다. 맨 위의 것 한 권을 집어 올리는데 종잇조각이 너덜거린다. 책을 감싸는 띠지다. 강렬한 붉은색의 띠지는 다섯 권 중 네 권에나 둘러져있다. 더위 탓일까. 성가시게만 보이는 띠지를 보고 있자니 자원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띠지의 존재이유는 광고 효과 때문일 것이다. 서점에서 손수 책을 고르던 시절에는 그 시각적 덕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종 커뮤니티가 활발하고 인터넷 서점이 발달한 지금에는 그 효과를 장담하지 못한다.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띠지 문구를 보고 구매욕을 발동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그래도 띠지를 굳이 변호하자면 장식효과 및 책 보호 역할도 한다고 할 수 있다. 일정 부분 책갈피 기능도 담당해준다. 하지만 띠지의 모든 기능을 설명해도 실용적 측면에서는 그다지 와 닿지 않는다.대부분 책 주인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하고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신세다. 본문용보다 빳빳한 재질에다 컬러 인쇄까지 해야 하니 그 제작비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3000부 기준에 권당 100원 쯤 든다니 비용 대비 그 효율성이 미미하다.띠지 문화는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있단다. 일본에서 출판마케팅 기법으로 90년대 후반부터 활용했는데 우리 업계가 흉내 낸 거란다. 누구를 위한 띠지일까.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봐도 출판업자들의 자기 위안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관행처럼 굳어온 악습을 과감하게 뿌리칠 용기가 없는 건 아닐까.좋은 책은 화려한 띠지가 퍼뜨려주는 게 아니다. 책 내용이 말해줄 뿐이다. 자원, 시간, 인력을 낭비하면서까지 띠지를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모양새에 비해 효과는 미미한 띠지. 유통 기한 십초의 운명인 띠지를 연민하는 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07

시간에 대한 단상

올림픽 경기가 한창인 요즘 오심 논란 때문에 분노하는 네티즌들이 많다. 예선전 실격 선언 해프닝으로 경기 흐름을 놓쳐버린 수영의 박태환, 힘 있는 자의 어필 한 번으로 승리를 번복당한 유도의 조준호, 짧은 일초의 시간이 멈춰버려 눈물바다가 된 펜싱의 신아람.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인간이야말로 참으로 치졸한 동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아람 선수의 펜싱 경기 오심 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일찍이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친 이는 따로 있었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그의 유명한 그림 `기억의 고집`에서 시간을 지배하려는 예술가적 욕망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앙상한 올리브 나무에 널린, 축 늘어져 흐물거리는 시계. 단단한 금속성 물체의 유연한 흐트러짐을 통해 정확하고 빈틈없이 맞물리는 세계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예술 용어 중에 `낯설게 하기`라는 기법이 있다. 익숙하고 상식적인 것을 전혀 다른 것으로 조합해 이미지의 전복을 꾀하는 것인데 달리의 그림에서 녹아내리는 시계 이미지는 그 좋은 예이다. 난해한 형식 속에 시간을 휘거나 연장하고픈 내면적 욕구는 일상적이고 맹목적인 습성을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좋은 시도이다. 예술로서 그 가치는 충분하다.하지만 스포츠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야이다. 나아가 인간의 복잡미묘한 예술적 감흥에서 현실 감각을 찾게 하는 매개물이 되어주기도 한다. 오죽하면 경기 결과를 측정할 때 천 단위 초까지 쪼개가며 정확성을 도모하려 하겠는가. 소중한 일초의 시간을 명징하게 다스리는 것도 스포츠 정신에 포함된다. 시간을 지배하려는 장난은 스포츠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스포츠는 모호함이 용인되는 예술이 아니라 명쾌한 실존의 방식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8-06

올림픽 정신은 어디에

올림픽을 지켜보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수영, 유도, 펜싱에 이르기까지 유독 우리나라 선수들과 관련된 오심이 뉴스를 장식한다. 각종 스포츠 경기 때마다 오심 논란은 있어왔으나 이번 올림픽만큼 심한 적은 없었다. 해프닝을 가장한 견제, 이해할 수 없는 결정 번복, 초유의 시간 끌기 등 심판들의 다양하고도 몰염치한 행태를 보면서 과연 올림픽 정신이 살아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 물신주의로 변해가고 있는 올림픽을 확인하는 일은 씁쓸하기만 하다. 아시다시피 올림픽의 표어는`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다.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탱 남작이 이 말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았을 당시엔 그 어떤 정치적 목적도 국가적 차원의 욕심도 없었다. `올림픽은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 라는 그야말로 순수한 덕목의 올림픽 정신이 있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페어플레이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이 올림픽 좌우명은 이제 올림픽 선서에서나 남아 있게 되었다.언제부턴가 스포츠도 힘의 논리에 좌우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올림픽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국력 과시와 경제적 암투의 장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크게 봐서 그 누구도 올림픽에 참가하는 데 그 의의를 둔다고 말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명예와 부를 안겨주는 개인적 영광 때문에 4년간의 정열을 바치는 건 그래도 애교로 봐줄 만하다. 그 도가 지나쳐 또 다른 이익을 바라는 단체나 국가의 목소리가 스포츠 정신보다 우위를 점할 때 그 순수성은 사라지고 만다.늦지 않았다. 아직 레이스는 반 이상 남았다. 더 이상 스포츠 외적인 것으로 휘둘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참가자와 참관자 모두 순수하게 게임 자체에 매혹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올림픽 정신다운 것이 아니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2-08-03

내 슬픔을 지는 자

인디언 속담에서는 친구를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정의한다. 우정에 관한 경구 중에 이토록 가슴을 저미는 말이 있을까. 흔히 친구가 슬플 때 위로하는 건 쉬워도 기쁠 때 느꺼이 웃어주기는 더 어렵다고 한다. 인간 속성 상 동정하기는 쉬워도 인정하기는 어렵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내 슬픔을 등에 져줄` 정도라면 동정과 인정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참된 우정이 아닐까. 연예계 잘 나가는 걸 그룹 한 팀이 왕따 사건에 휘말렸다. 당사자들 간의 불만이 SNS를 통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급기야 기획사 측에서는 왕따 대상이 된 한 명을 방출하기에 이르렀다. 휴머니즘적 접근보다 경제 논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기획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변명할 것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제공해주는 여러 사실을 진실로 캐는 데 일가견이 있는 네티즌들이 두고 볼 리 없다. 기존 멤버들의 안티 카페를 개설해 왕따 당한 당사자 구명 운동에 나섰다. 며칠 만에 몇 십만 회원이 모였다니 유래 없는 일이다.세상은 다변화되고 빨라졌다. 이제 우정마저 그 도도한 물결에 휩싸여 허울로만 남는 지경이 되었다. 오직 앞서야 한다는 강박으로 우정도 친구도 뒷전인 채 물질의 노예가 되기를 부추김 당한다. 더 나은 미래, 더 좋은 생활이라는 미명하에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를 세상은 요구한다. 그 심한 예가 연예계라 할 수 있는데 어린 연예인들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해온 기획자들은 인성이나 가치관 등 사회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은 안중에도 없어 뵌다.왕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건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것이다. 가해자 역시 또 다른 피해자가 되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왕따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언제나 상황의 논리와 관련이 있다. 왕따의 배경이 되는 구조적인 문제부터 생각해볼 문제이다. 길지 않은 인생,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를 한 명이라도 더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2-08-02

폭염 나기

▲ 김살로메(소설가) 무더위가 한창이다. 잇달아 폭염특보가 발효 중인데 우리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재해 현황 지도를 보면 온통 진보라색을 띄고 있다. 이는 폭염주의보를 넘어 폭염경보에 해당된다. 이런 현상이 적어도 8월 중순까지는 계속될 터이다. 불쾌지수와 싸우고 열대야를 견딜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는데, 신문사로부터 기고 요청이 들어왔다. 흔쾌히 응했지만 한편으론 긴장감으로 서늘해진다. 부담감과 설렘으로 이 칼럼을 시작하는 걸 나만의 피서법으로 삼는다. 부끄럽지 않은 여름나기가 되도록 내 오감을 한껏 열어, 두루 세상 읽기에 나서본다.시사와 화젯거리에서 풍속과 이웃까지 내 마음결이 닿는 것이면 어떤 것이라도 찾아 나설 것이다. 열중하는 집단의 목소리도 살피겠지만 절절한 개별자의 소통 의지도 놓치고 싶지 않다. 멀리 보는 담대함과 가까이서 살피는 섬세함이 함께 하는 글이 되도록 할 것이다. 거기엔 눈치 볼 시류도, 따를 유행도 없다. 다만 본질적이고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독자들과 호흡하고 싶을 뿐이다. 이 짧은 지면이 가끔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고 때론 차가워진 심장을 데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열대야가 지속될수록 책임감으로 손끝은 예민해진다. 내게 이보다 더한 피서가 어디 있으랴. 더러 넘치거나 모자랄 내 글이 새로운 지면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약력 경북대 불어불문학과 졸업2004 영남일보 신춘문예 소설`폭설`당선포항문인협회 사무국장 역임, 문화관광부 `파견 작가`활동공저 소설집 `버릴 수 없는 것들의 목록`(북스토리)

2012-08-01

카드뮴 공포

`카드뮴`이란 금속성 물질의 명칭은 그리스어인 `카드메이아`에서 유래된 말로 주기율표 제 2B족에 속하는 금속원소 (원소기호 cd)이다. 1817년 독일의 한 화학자에 의해서 시판중인 탄산아연 속에서 발견된 것이라 한다. 화학적으로 말하자면 카드뮴은 금속 광택이 나는 청색을 띤 은백색의 부드러운 금속으로 가열하면 산화물이 된다고 한다. 지난해 국민의 건강을 연구하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이 낙지 머리에서 기준치를 넘는 카드뮴이 검출됐다는 보고가 있어 낙지의 안정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염려가 커진 적이 있다. 몸이 둥글고 몸빛은 회색이나 주위의 빛에 따라 색이 바뀌는 여덟 개의 발이 달린 연체동물이다.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많이 서식하는 것으로 위험한 것이 있으면 먹물을 품고 도망가는 어류로 장어(章魚)라 부른다. 건강은 물론이요 우리의 생명에 까지 위험도가 높다는 낙지에 관한 시비가 전문가에 따라 그 견해가 달라 시식가들만 어리둥절해 겁을 내고 있는 실정이다. “매일 두 세 마리씩 낙지를 먹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검역원이 있는가 하면 그러나 카드뮴이 체내에 쌓이면 단백뇨(단백질 성분이 많은 소변)가 나타나며 혈압이 오르고 신장이 망가지게 된다고 의학전문의가 말한다. 이상의 전문가들의 소견을 종합하면 소량섭취는 허용이 되고 과다섭취는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 먹는 일반인은 낙지에 관한 두려움을 떨치고 괜한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 좋긴 좋은데 매일 먹지 말고 많이 먹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비브리오 세균처럼 공포에 질린 소비자 보다 상인들의 피해가 늘고 있다고 한다. 낙지나 문어를 가끔 먹는 사람은 전혀 문제가 안되지만 자주 먹는 사람은 머리(내장)에 카드뮴이 상대적으로 많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머리를 버리면 값은 어떻게 매길런지. /손경호(수필가)

2012-07-31

발본색원한다

어느 나라이든 비슷한 현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통치자가 바뀌거나 사법부의 수장과 경찰의 총수가 새자리에 앉을 때 마다 하나 같이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어떠한 부조리도 발본색원하는 정책을 펴겠다”고 대성일갈한다. 그때마다 국민들은 새로운 기대를 가지고 나라의 정체성이 정도(正道)로 가고, 치안이 안전하며 질서있는 사회, 공정한 사회가 되길 기대한다. 발본색원이란`폐단의 근원을 아주 뽑아서 없애 버리는 것`을 뜻한다. 언제나 우리 정치는 약한 자, 빈한 자가 올바른 처우를 받지 못하고, 유전(有錢)은 이기고, 무전(無錢)은 피해를 보는 일이 거듭되고 있다. 돈없고 가난하고 무지한 시골사람도 잘 사는 세상을 모두가 기대하고 있지만 이제는 중산층도 무너지고 있다. 부조리를 아주 없애겠다는 의지만 강하지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과의 관계가 공사(公私)로 구분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농경사회 이후 마을 단위로 씨족사회를 이루며 살아왔기에 눈에 보이지 않은 집단형성이 분명하다. 그래서 지연·혈연·학연 등의 인맥으로 살아온 정이 크게 작용한다. 위의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은`맥`을 못춘다. 우리 말에 법망(法網)이란 말도 있다. 범죄자에 대한 법률의 제재를 물고기에 대한 그물에, 거미에 대한 거미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사회적 부조리의 거미줄에 걸린 사람은 누구이며, 몇이나 되는가. 거미줄에 걸린것은 힘없는 하루살이나 잠자리, 파리, 모기가 걸리지 힘센 독수리나 참새는 걸리지 않는다. 언제나 약자나 가난한 자만 피해보고, 능력있고 돈있는 힘센 자는 걸리지 않는다. 뿌리뽑는다고 장담하지만 언제나 가지 치기에 급급하다. 뿌리 뽑지 못하는 것은 그 뿌리가 땅속(인간관계)에 깊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한다. /손경호(수필가)

2012-07-30

어느 누렁이의 일생

모 일간지 신문에 농가의 최고 재산이요, 식구나 다름 없는 한 황소에 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누렁이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전남 강진의 한 농촌마을에 기르던 서른 한 살 배기 한우가 그 주인공이다. 24년간 주인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새끼 16마리를 낳아 4남매의 교육비를 보탰고, 주인과 함께 농사일을 거들었다. 사람으로 치면 80세 이상의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한 누렁이를 주인은 집 근처 따뜻한 양지 밭에 묻어 주었다. 동민들과 같이 장례를 치르고, 군민들은 누렁이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무덤 앞에 비석까지 세울 계획이라 한다. 평생 멍에를 맨 채 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새끼를 낳아 살림에 보탬이 됐던 누렁이는 제 할일을 다하고 생을 마감했다. 소의 죽음에 이처럼 유별난 감정을 표시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우리나라에 구제역의 만연으로 300만 이상의 소와 돼지가 매몰됐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몇 년씩 정성으로 기른 어미소와 함께 송아지까지 생매장해야 했던 농민들의 정신적 충격을 어떻게 풀어줘야 할 지 답답하기만 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우리에게 애절한 사연을 주고 간 누렁이 농가의 소박한 이야기는 동물로 태어난 생명체의 목숨이 존귀하다는 진리와 교훈을 일깨워 주고 갔다. 주인에게 비록 아픈 상처만 남기고 갔지만 전염병으로 스러진 수많은 가축들의 생명도 너무 고귀한 것이었다.불가에서는 “살생하지 말라”고 했다. 생명이 있는 존재는 모두 고귀하기 때문이다. 비록 약육강식이라는 진리 앞에 약자가 희생을 당하지만 이 땅에 태어난 생명체는 저마다 사명이 주어진 상태에서 살아간다. 특히 가축은 인간에게 자신을 고스란히 바치고 짧은 생을 마감하는 존재들이다./손경호(수필가)

2012-07-27

종이학을 접어 보내며

십장생(十長생)은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는 열 가지 사물, 즉 해·산·물·돌·구름·소나무·불로초·거북·학·사슴을 말한다. 그 중 학은 흰빛의 화려함을 나타내는, 냇가에 서식하는 두루미다. 일본이 지진과 쓰나미로 절망과 공황에 빠져 있을 때 그 누구보다 용기를 갖고 현장에 가 생존자 구출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준 구조대원들의 모습에 일본인들이 감사와 감동을 잊지못해 정성껏 접은 종이학 125마리가 한국 외통부로 전달됐다고 한다. 한국 구조대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아 일본인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돕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는 것이다.일본 전설에 어떤 마음씨 착한 노총각이 덫에 걸린 학을 구해 줬더니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 아내가 됐다는 이야기에서 `은혜를 갚는 학`이란 아이디어를 얻어 동네 아줌마들이 정성껏 접은 종이학이었다. 이들이 보낸 종이학과 편지는 지진 한 달 후 서울 외교통산부에 도착한 것이란다. 외통부는 일본에서 구조활동에 참가한 119구조대원 105명과 외통부 인도지원과 직원 2명을 초청해 종이학을 전달할 예정이라고 한다.현해탄을 건너온, 천사가 보낸듯한 종이학 125마리는 양국의 우정을 잇는 큰 선물로 받아들여 진다. 학은 모습처럼 희고 순결하며 깨끗해 숭고한 지조를 가진 선비에 비유되곤 한다. 학은 새 중의 신선이라고 한다. 모습을 보면 속세의 어지러움을 잊게 하고, 그 소리를 들으면 아름다운 음악보다 더 신비롭다. 달 밝은 밤이면 홀로 노송 가지에 앉아 잠을 자는 등 격이 높고, 고고한 자태이다. 종이학은 오래전부터 젊은이들이 정성들여 접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애정의 표시요, 프로포즈였다. 존경하는 분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마음이었다. 그 이유는 깨끗하고 순결한 학의 품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종이학엔 생명이 있어 보인다./손경호(수필가)

2012-07-26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10월3일 개천절은 우리나라 건국 기념일로, 국경일로 경건하게 보내는 날이다. 개천절을 기념하는 개천절 노래가사 중에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노랫말이 있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요, 백의민족이며, 언어가 같고, 역사와 문화가 같은 세계 유일의 나라이다. 932회나 되는 외세의 침략에도 나라를 지켜온 민족으로, 6·25라는 한국전쟁에서 다시 일어섰으며, `동방의 등불`이란 칭호를 갖고 있다. 전쟁 후 50년이 지나자 그동안 외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바뀔 만큼 경제가 부흥하고, 나라의 국방력도 튼튼해 졌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47개 신생국 중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 였던 대한민국은 최단 기간에 경제발전과 민주정치를 이룩한 자랑스런 국가로 발전했다. 특히 국민소득이 70달러를 넘지 못했고, 문맹률도 77%였던 나라가 1963년 1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고, 2011년 12월 수출 5천156억 달러, 수입 4천860억 달러로 무역규모 1조16억 달러를 기록했다. 미국, 독일, 중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9번째로 1조 달러 달성 국가가 됐다.그러나 북한을 추종하고 찬양하는 종북파들은 나라의 발전을 폄훼하고, 주한미군철수, 국가보안법철폐, 북한식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면서 나라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나라의 정체성인 태극기와 애국가를 무시하고, 애국선열에 대해 묵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국론을 분열시키며, 나의 조국을 부정하는 일도 서슴없이 행사한다.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면 사회가 혼란스럽고 단결하기가 힘이 든다. 안전에서 파멸로 나아가기를 갈망하는 몇몇 분열자의 책동이 날로 거세지고 있다. 허리띠를 졸라 매고 단합하고 단결해야 할 시기에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이다./손경호(수필가)

2012-07-25

탕음식을 즐기는 민족

우리나라는 국토의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러싸여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날씨가 추운 겨울에서부터 여름에 다다를 때까지 탕(湯)종류의 음식을 즐겨 먹는다. 바닷고기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대구탕, 아귀탕, 그리고 복어탕이다. 이 중에 값으로 따지면 복어탕이 비싸고 귀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복어탕은 복어의 종류에 따라 값과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참복, 밀복, 까치복 등 그 종류도 다양하지만 복어요리는 전문적인 자격증을 갖추지 않고서는 요리를 할 수 없다. 복어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어 자칫하면 생명에 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균은 고온에 끓이면 소멸되지만 복어독은 아무리 높은 온도로 끓여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어 미식가는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즐긴다. 한마디로 복어탕은 먹고 죽어도 좋을 음식으로, 묘미가 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복어알에 들어있는 독은 적게 먹으면 입술 주위나 혀가 마비되고, 구토를 일으키지만 일정량을 넘으면 치명적이다. 그런 위험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복어탕을 선호할까? 아마도 그것은 복어요리의 맛에 매혹되기 때문이다. 많은 복어 애호가들의 한결같은 얘기는 복어는 생선이지만 맛이 쫄깃하고 담백해 탕의 국물맛이 기막히다는 것이다. 비린내가 나지 않고 시원한 맛이 천하일품이라는 것.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즐겨 먹는 해산물에도 복어가 반드시 낀다. 게와 성게, 그리고 복어다. 나라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미인이란 뜻의 고사성어로 `경국지색`이란 말이 있는 데, 복어는 이 말과 연관이 있다. 기가 막히게 맛있지만 자칫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음식이니 나라를 망칠 수도 있는 미인에 비유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어요리가 더더욱 일품요리로 대접받는 것일 지도 모른다. 복어는 먹고 싶고, 목숨은 아깝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일게다./손경호(수필가)

2012-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