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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긍정의 에너지

다양한 게 사람 캐릭터이다. 잇속만 챙기는 사람, 자기 것을 한없이 퍼주는 사람, 자신을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사람, 소견이 좁은 사람, 아량이 넓은 사람, 착한척하지만 의뭉스러운 사람, 냉정하게 보이지만 속 깊은 사람, 냉소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람, 한없이 밝아 경계가 없는 사람 등 저마다의 주어진 개성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한살이를 꾸려나간다. 사람이란 동물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여러 캐릭터 중 어느 한 쪽만 가진 사람은 없다. 신이 인간을 이중인격자로 설계해놓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지만 유독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잇속만 챙기는 치는 아니지만 냉소적이고, 배려는 잘 하지만 소견이 좁고, 나사 몇 개씩 풀린 허점투성이 생활 패턴이지만 경계 또한 분명한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들은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만 하다.인격이란 게 어느 정도는 훈련과 수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성을 넘어선 천사표를 가슴에 단 사람들은 훈련과 수련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궂은일, 힘든 일을 자처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안 해도 되는 일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놓고 생색조차 없다. 자연히 모임의 실질적 리더가 되는데, 사람 마음을 얻는 것보다 귀한 선물은 없기에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이 끓었다 내렸다 하는 나 같은 이에게 그들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가만히 보면 그들은 제 맘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한다.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큰 짐이 밀려와도 의연하기만 하다. 맘 속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웃고, 베풀고, 배려한다. 괜히 그들에게 좋은 기를 얻기 위해 바람결을 빌려 옷소매 한 번 스쳐보는 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2

풍경이 가르친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가끔은 책을 덮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때 그 길이 보인다.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 글공부를 한다. 잘 익은 밤처럼 토실토실한 남의 글을 읽기도 하고, 덜 말린 대추 같은 누글누글한 제 글을 다듬어도 본다. 남의 좋은 글을 읽을 땐 감탄하고 부러워할 입과 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숙제로 내놓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한다. 남보란 듯 합당한 이유가 생겨 떳떳이 결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글 좀 잘 써보고자 모였는데 글이 제 발목을 잡아 버린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있을까? 결실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 왔는데도 우리들의 글쓰기는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수고 없이 좋은 글이 나올 리 없다. 그럴수록 책상 앞에 앉으면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괴로움이 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쓰려고 용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글이 되지 않을 때는 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다.활자 빽빽한 종이 대신 아름드리 소나무 둘러치고, 늦은 민들레가 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이름 붙여 야외수업. 오늘 만큼은 숯불 삼겹살과 소주 한 잔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 밋밋한 평화보다야 울퉁불퉁한 들끓음이 글 소재로는 낫지 않던가. 연필을 버려야 할 적당한 타이밍이었을까. 출석률도 좋은데다 여유가 넘친다. 유머가 길을 트니 배려가 뒤따른다.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때론 책을 버리고 풍경 속에 흠뻑 젖어야 길이 보인다. 푸성귀 뜯고 씻던 시린 손, 쉴 자리 마련하려 굽히던 연한 무릎, 연기 마셔가며 모닥불 피우던 잔기침 소리, 바람막이로 서서 따뜻한 물 끓여내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내고 있었다. 글이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풍경 속에 글이 있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1

마음이 아플 때

몸 아픈 것과 마음 아픈 건 많이 다르다.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몸 아픈 건 물리적 처방과 시간이 주어지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하지만 마음 아픈 건 심리적 처방과 시간이 주어져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몸 아픈 건 온전히 나만의 문제지만, 마음 아픈 건 몸 아픈 것과 달리 사람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연예계 절친 두 명이 불화설에 휩싸였다. 단순한 연예계 가십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그들 일련의 행보가 자신들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인의 위상으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한 명은 `강남 스타일` 노래 한 곡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콘서트로 번 돈 대부분을 세상 약자를 위해 내놓는 기부 천사로 활동 중이다.둘 사이가 불편하게 된 건 개인적인 문제겠지만, 한 사람이 너무 잘나가면 남아있는 다른 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꿈에도 그려보지 않았던 빌보드 차트 일위를 넘볼 때 다른 한 사람은 뉴욕 타임스퀘어 거리에`기억하시나요`라는 위안부 관련 광고를 올렸다. `강남 스타일`이 언론에 도배될 때 정작 `기억하시나요` 에 관한 보도는 단신으로 처리됐다.남보라고 선행하진 않겠지만 남들이 알아줄 때 선행도 신이 나는 법이다. 당사자 간 갈등이 있는 상태에서 선행마저 관심 밖으로 몰리니 마음을 다칠 수밖에 없다. 다친 맘을 보듬어줄 생각은 없으면서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만 쏟아낸다. 당사자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질 않는가.인간은 갈등하는 동물이다. 당사자 어느 한 쪽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인간관계에는 항시 존재한다.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한 위안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온다. 어느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지만 약자가 느끼는 고통이 더 크니 그게 문제이다. 이래저래 인간관계는 힘들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0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보인다. 무엇보다 반갑다. 국회 문방위 소속 의원들이 법률안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는데, 내년부터 한글날이 복원돼 법정 공휴일이 될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한글날은 휴일이 너무 많아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기업들의 권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설움을 당했다. 경제 논리에 의해 몇몇 법정 공휴일이 추억 속으로 사라질 때 한글날만은 살아남기를 바랐다. 청춘시절 한때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임을 해온 이유도 있었지만 한글날 같은 의미심장한 날이 경제 논리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한글은 만든 날, 만든 이, 만든 의도 등이 문헌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그 중 우리는 창제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했다는 세종대왕의 말은 진실이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 의도도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통치권을 확보하고 싶은데, 기득권 언어인 한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누릴 호사가 일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옮아가는 것은 꿈에도 원치 않았다.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신하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피지배층과 효율적인 소통을 원했던 왕권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신권의 견제 사이에서 태어난 부산물이 훈민정음이었다. 일반 민중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 세종대왕의 전략적 문자 혁명은 정작 당시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후세대인 우리가 오롯이 그 은덕을 누리는 건 아이러니이자 행운이다.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되었으면. 그리하여 그날 하루 만이라도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의의를 살피고, 말글 하나 된 민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 없는 백성은 생각하기조차 싫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9

느리고 깊게 읽기

속독(또는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한 답은 없다. 취향의 문제인데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습득해야 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에 관심이 많으면 자연히 속독 쪽으로 치중하게 된다. 반면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서 문맥 하나하나에서도 소우주를 발견할 만큼 의미를 부여하는 치라면 정독이 어울린다. 속독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독이 되는 사람들은 많다. 그건 이상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다독자이면서 정독하는 사람들은 드문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책 읽기의 고수들이다. 책에 관한 온갖 정보와 리뷰를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서점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밥벌이로서 직장이 있을 터인데, 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니 저들이 사람일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나 같은 이는 차선책으로 적게 읽어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많이 읽으면서 얕게 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나. 고수가 못될 바에야, 한 달에 삼십 권 읽는 것보다 세 권을 제대로 읽는 게 더 나은 독서법일 테니까.제대로 읽는다는 명분하에 내게 눈도장 찍힌 책들은 대개 지저분해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매료된 상태에서는 밑줄 긋지 않을 수 없고, 접고 싶은 부분 또한 시시각각 나타나며, 옮겨 적고 싶은 구절엔 별표들이 넘쳐난다. 책이 더러워진 만큼 애정의 강도도 높아진 것이다. 한 번 읽고 책장 안에 모셔진 것보다 느리게 보듬어 닳은 것이 제대로 사랑받은 것들이다.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읽는이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함, 그것이 제대로 된 읽기이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김살로메(소설가)

2012-10-08

식중독

이번 명절에는 소위 역귀성이라는 걸 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그런지 정체 구간 없이 수월하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사정이 달랐다. 오후 한 시 쯤에 나섰는데 열 시간 꼬박 도로에만 갇혀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원 없이 자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지만 시간이 남기만 한 귀갓길이었다. 귀성이든, 역귀성이든 이제 명절 교통 체증은 당연한 것이 되어가나 보다. 너무 늦은 귀갓길이라 각각 당신들 댁에 머물고 계신 어머님과 친정 엄마께 들른다는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날 두 분을 뵈러 다시 대구로 출발했다. 느끼한 명절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을 되살리는 데는 회가 제격이다 싶어 포장 주문해 갔다. 어른들이 좋아하기도 하지만, 따로 요리할 필요도 없는 편리한(?) 효도법이기도 했다.느끼하던 입안이 개운해졌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모두 난리가 났다. 구토, 설사, 오한, 근육통, 고열, 두통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회를 먹은 십여 명 대부분이 두어 시간 만에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지사제와 항생제를 처방받거나, 밤새 움켜쥔 배를 안고 온 방안을 누비거나 했다.무엇보다 두 어른과 친구분들께 너무 미안하고 맘이 불편했다. 항생제를 덜 쓴 횟감이 오면 그럴 수 있다면서 횟집에서도 사과를 해왔다. 그쪽에서도 의도적으로 폐 끼치자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그 횟집을 찾진 않겠지만 왜 그런 생선을 썼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틀 꼬박 앓으면서 생각한다. 선의의 행동에도 오류가 따를 수 있다고. 그 오류는 우연에 의해 생기지만 그 파장은 의도하지 않게 커질 수도 있다고. 세상일은 절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저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우발적 상황에 따라 우리 일상은 휘어지고 꼬일 수 있다. 닥치면 당해야만 하는 치명적 우연이 우리 삶을 관장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 조심만으로 안 되는 게 세상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5

공짜는 없다

미국 격언에`There is no free lunch`라는 말이 있다.`프리 런치`란 서부 개척시대에 술집에서 내놓던 점심을 말한다. 일견 공짜로 보이지만 실은 비싼 술값 안에 끼니 값까지 포함되어 있다. 모 경제학 책에도 이런 예화가 나온다. 경제에 대해 알고 싶은 왕이 학자들에게 책을 쓰라고 지시했다. 수십 권의 완성된 책을 보자 질려버린 왕은 한 권으로 줄이라고 했다. 그것도 길었다. 단 한 줄로 줄이라고 하자 배고팠던 학자들의 요약문은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것이었다나.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을 못하거나,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짜에 혹할 때가 있다. 유명 대학 음료 사업부라며 콜 센터 직원이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온다. 내가 속한 모임에 판촉 행사 차 직원이 잠깐 들르겠단다. 십여 분 시간만 내주면 되고 부담 느낄 필요가 없는데다 점심 도시락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마라고 약속을 해버렸다.일식 도시락 앞에서 판촉 직원이 멘트를 한다. 그 어떤 강매도 강압도 없었다. 나름 정중했다. 난공불락인 아줌마 고객들을 상대로, 한 가계의 책임자이자 직장인인 그가 최선을 다한다. 맘이 짠하다. 눈치껏 주변을 살피니 다른 사람들 맘도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블루베리 음료를 무턱대고 사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어릴 적 제 아비를, 지금의 제 남편을 보는 것 같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목도한 우리들은 도시락에다 코를 박은 채 별 말이 없다. 이런 먹먹한 분위기였으면 차라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각자의 도시락을 밀어낼 때, 단내 나는 판촉남, 아니 한 집안 가장의 말끝이 흐려지고 손끝 또한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코 공짜 점심은 없었다. 여태껏 먹은 밥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한 끼의 점심./김살로메(소설가)

2012-10-04

개천절

알고 지내는 필리핀 친구가 있다. 귀화한 지 몇 년 되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우리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도 낯설다. 그녀가 묻는다. 개천절이 뭐냐고? 모국어를 맘대로 구사하는 사람들끼리도 개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난감한데, 이방인 출신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군이 최초로 우리나라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평소 그런 순수한 의미보다는 합법적 공휴일이구나, 하는 실리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도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다. 애매모호하기만 한 광복절이란 이름이 그들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개천절은 오롯이 제 정체성을 살피는 것과 연관이 깊다고 내가 말한다. 유수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뼈대 있는 기념일. 하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정작 우리는 잊고 산다.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 개천절이다. 하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의 본뜻은 100여 년 앞선 기원전 2457년 환웅 시대로 소급된다.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날이 음력 시월상달 초사흗날이었다. 상달은 으뜸달을 말하는데,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시월이 상달이 되는 건 당연했다.개천절은 이처럼 건국 신화의 경축일이자,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근거하는 자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시월상달은 당연히 음력이었겠지만 그것을 따지는 건 단군 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일반 시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일 년에 한 번쯤 되새겨 보는 날은 필요하다. 그런 자긍의 뿌리가 올해로 4345년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2

프라이데이와 방드르디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이름을 참 센스 있게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험 항해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그런 경우이다. 앞부분의 항해와 난파 과정, 무인도 표류와 정착 분투기 등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오직 프라이데이가 나오는 장면부터 눈길이 확 끌린다. 금요일에 발견하였다고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인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노예. 로빈슨 크루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림자 역할에 머문 프라이데이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갈증을 성찰한 작가 미셀 투르니에가 전혀 다른 프라이데이를 창조해냈다.`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란 재구성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18세기 초, 로빈슨 크루소가 나온 당시는 백인과 영국과 문명인과 기독교가 세계관의 기준이 될 때였다. 그러니 계몽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들은 자기들 기준 밖의 것은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흑인 원주민 프라이데이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패러디 작에서는 프랑스 말로 금요일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란 이름이 프라이데이 대신 등장한다.프라이데이가 단순하고 착한 노예였다면 방드르디는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주체자였다. 프라이데이가 수동성을 의미할 때 방드르디는 능동성을 부여받았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투르니에 작품에서는 방드르디의 협력자이자 야만의 자연인으로 순응한다. 세계관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에 미개와 문명의 경계가 어디 있냐고 질문해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할 때 그 구분법은 휘파람 부는 날의 미세한 심장의 떨림을 알아차리는가, 개미에게도 그들 고유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바람 부는 언덕의 풀냄새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을 눈치 채는가 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가늠자를 들이대 줄 나만의 `금요일`을 찾아 옷깃 한 번 여며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8

단춧구멍에 들꽃을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으리라. 그의 중편 소설`토니오 크뢰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고뇌가 숨어 있다. 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본다.동급생 미소년 한스를 해바라기하지만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라는 가혹한 교훈을 얻을 뿐이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소녀 잉에를 맘에 품지만 상대는 악의 없이 무심할 뿐이다.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는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토니오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겨우 열네 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정돈되고 명상적인 부르주아 아버지와, 자유롭고 정열적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운명적으로 시민 계급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토니오 크뢰거. 그는 두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 예술가 그룹에서는 경멸과 환멸을, 시민 계급에서는 굴욕과 패배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부러워해 마지않던 시민성을 경외와 긍정의 시선으로 수용한다. 시민 계급의 밝음을 사랑하고 질투하는,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겠다고 고백한다.토니오 크뢰거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다고 믿는 우리들 자화상이다.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은 채 단정히 책을 읽는 아버지와, 만돌린을 들고 거리의 악사로 나서는 집시 풍의 엄마가 공존하는 게 고뇌하는 사람의 마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7

햄버거 가게 높임말

바쁘다는 핑계로 패스트 푸드를 애용할 때가 있다. 해로운 게 너무 많이 들었다지만, 맛있는 데다 무엇보다 간편하니 찾을 수밖에. 요즘은 차를 타고 주문하는 `드라이브 쓰루`라는 편리한 제도도 있어 할인 스티커를 챙겨 가며 활용하는 편이다. 햄버거 가게에 가면 영양가 낮은 음식을 먹는다는 불안감보다 더 불편한 게 있다. 근무자들의 언어 습관이 그것이다. `고객님, 이번에 새로 나온 치킨 버거세요.`, `오늘 특별세트 메뉴는 새우버거세요. 점심시간이라 할인되십니다.` 하나 같이 저렇게 말한다.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다가 자꾸 듣다 보면 실소가 나온다.종업원 입장에서는 고객은 왕이니 무조건 높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친절하고 공손한 표현을 찾다 보니 높임말 어미인 `시`자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 `-시-`는 주체의 동작이나 상태를 높일 때 쓰이는 어미인데,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 주체의 사물까지 높여서 말하기엔 우스꽝스럽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최대한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그런 언어 습관을 낳은 것이다.햄버거 가게를 예를 들어서 그렇지 보험회사, 백화점, 병원, 은행 등 서비스가 요구되는 직종에서는 어디든지 그런 어법을 만날 수 있다. 처리하는 데 2, 3일 걸리세요. 이 옷이 더 비싸세요. 이쪽으로 가시면 병동이 나오세요. 이 상품 이율이 더 높으세요. - 과잉 친절이 베푸는 높임말 향연을 듣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대접 받고도 놀림 받는 찜찜함을 업체 측에서는 알 리 없다.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한 자도 없고, 그렇게 말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준 이도 없는 자연발생적 화법이므로.항공업계나 백화점 등에서 고객들의 이런 불만을 접수하고 고쳐나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런 작은 실천이야말로 고객 감동 서비스가 아니겠나. 소비자만 제대로 높여줘도 고마운 일이다. 그들이 취할 상품까지 높일 필요야./김살로메(소설가)

2012-09-26

장갑 낀 시인

적재적소에 맞는 단어를 활용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은 언제나 앞서간다. 나들이 차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비장하고 서정적인 시 한 편이 흘러나온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외국어 낱말`이라는 산문시였다. 간략한 내용은 이러했다. 폴란드는 지독하게 춥다며, 라고 한 프랑스 여인이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이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일 폴란드인은 멋들어지게 대답하고 싶었다. 내 조국에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쓰고, 달빛이 방안을 비출 때 비로소 장갑을 벗는다고. 시 속에는 황량한 부엉이 소리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노래가 있다고. 꼭 밟은 눈 더미 위에다 잉크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긴다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직접 도끼로 호수에다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다고.하지만 정작 시인은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생각나지 않고 `고드름`과 `바람구멍`도 확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폴란드 거기는 무척 춥다면서요?` 라고 묻는 여인에게 저토록 섬세한 시 대신 `뭐, 대충 그렇죠.`라고 짧고 냉랭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외국어 낱말로 시적 심상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인은 말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바람결처럼 자유자재로 언어를 다루는 그녀의 서정적 확신에 심장이 떨렸다. 추위를 견디며 시를 쓰던 쉼보르스카를 상상하느라 서툰 외국어 때문에 소통에 힘겨워하는 그녀는 뒷전일 정도였다. 모국어로 충분히 좋은 시를 썼으니 까짓것 외국어 낱말에 좀 서투르면 어떤가.평범한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주무르지 못하는 건 내 안의 정서가 외국어 낱말처럼 서툴기 때문이다. 두껍게 언 마음 호수에다 도끼로 바람구멍 한 점 내고 싶다. 그리하여 장갑 낀 쉼보르스카 여사처럼 바다표범과 고드름을 맘껏 불러내고 싶다. 은밀한 결구로 화룡점정 하나 찍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또 가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5

먼지가 되어

가수 김광석이 있었지.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덤덤하면서도 슬퍼보였다. 기타와 간주용 하모니카가 잘 어울리던 남자. 하모니카 목걸개 장치가 제 운명의 덫처럼 보이던 남자. 끝내 불운을 넘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등져버린 남자. 너무 일찍 전설이 돼버린 포크 가수. 그가 죽은 지 십 년도 훨씬 넘었지만 팬들 가슴 속에선 언제나 부활 중이다. `서른 즈음에`같은 경우엔 금세기 최고의 노랫말과 노래가 될 정도였다. 그가 전설이 되고, 그의 노래가 신화처럼 붙박이는 동안, 대구 방천시장엔 벽화로 만든 그의 거리까지 생겨났다.만인의 김광석은 거기까지였으면 싶었다. 나 혼자만의 욕망일 한 곡쯤은 숨겨두고 싶었다. 그의 사후 앨범 `노래 이야기` 첫 번째 수록곡인 `먼지가 되어`가 그런 노래였다. 노랫말 주인도, 작곡자도, 노래의 원주인도 그가 아니었다. 라이브로 리메이크한 그 노래는 김광석 것 아닌 것이 김광석에게 와서 듣는 이의 감성을 후벼 파는 그런 종류였다.그 노래가 검색어 앞 순위를 다투고 있다. 모 방송 가수 발굴 프로그램에서 경쟁자끼리 듀엣으로 불렀는데 화제가 되었단다. 뒤늦게 동영상 화면을 찾아봤다. 난리 날만하다. 락 버전으로 부른, 두 도전자의 하모니에 눈과 귀가 뚫렸다. 김광석의 담담함도 좋지만 젊은 듀엣의 패기도 만만찮았다. 먼저 그 진가를 발견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갈 때의 야릇한 서운함 같은 게 잠깐 밀려왔다. 하지만 진작 누군들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인가.혼자만 간직하고픈 것일수록 만인의 것이 되기 쉽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적극 광고나 해야겠다. `시를 써 봐도 모자란 당신`이 생각나는 이들아, `먼지가 되어`를 다섯 번만 들어 보라. 김광석의 라이브도 좋고, 젊은 듀엣의 도전곡도 상관없다. 가을맞이 선물로 이보다 맞춤한 감성 충전제는 없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4

바라매 아니 뮐쌔

태풍 산바가 휩쓸고 간 자리는 나름 심각했나 보다. 온종일 집안에 갇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로수들이 요동쳤고 강물이 둔치까지 삼키긴 했다. 하지만 태풍이 올 때면 늘 있는 일쯤으로 여겼다. 요즘 유행하는 시스템 창호가 바람소리마저 막아주는 바람에 창 너머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그림 속 풍경처럼 대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서 본 거리도 깨끗했다. 나쁜 공기를 몰아낸 덕인지 하늘 역시 맑고 드높았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서야 무심하게 맞을 태풍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숙사 천장에 비가 새고, 마당에 물이 차오르고, 벽 틈으로 비가 스며들고.집으로 돌아오면서 아파트 화단 풍경을 보고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조경수 중 삼십 퍼센트 정도는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었다. 신생 아파트라 심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었다. 트럭에 실어 올 때의 모습 그대로 뿌리가 친친 감겨 있었다.가로수나 조경수가 넘어지는 건 나무 잘못도 태풍 잘못도 아니다. 사람 잘못이다. 숲 속 나무가 강한 바람에 넘어진다는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그 뿌리 단단히 내렸기 때문에 태풍조차 넘보지 못한다. 하지만 가로수의 운명은 그렇지 않다. 옮겨 심는 과정에서 밑동을 동여맨 고무 밴드 때문에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아 쉽게 넘어지는 것이다.뿌리 내리기 쉽지 않은 건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다. 맘속 뿌리는 작은 비바람에도 흔들리기 쉽고, 어떨 땐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도 한다. 어느 순간 동여맨 고무밴드가 스스로를 옭아매 뿌리 내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라고 조상들은 노래했다. `곶 됴코 여름 한` 그날을 위해서라면 제 몸 옭아맨 끄나풀부터 걷어내야 한다. 강한 바람은 뿌리 얕은 나무를 데려가지 아무리 작더라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뜨리지 못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1

차칸남자 대 착한남자

드라마 한 편의 제목이 이슈가 되고 있다. 현재 방영중인 KBS 수목드라마의 원 제목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이다. 한데 방송사는 보도 자료를 통해 다음 회부터는 `차칸남자`에서 바른 표기법인 `착한남자`로 타이틀을 바꿔 올린단다. 시청자들의 정서를 고려하고 올바른 국어사용에 대한 공영방송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란다. 제목을 바꾼 진짜 이유는 한글 관련 단체들의 압력 때문이다. 그들은 `차칸남자`가 우리말을 파괴한다며 항의 공문을 방송사에 전달했다. 국립국어원 역시 개선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보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방송사의 올바른(?) 제목 바꾸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 참으로 융통성 없고, 경직된 사회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나는 한 때 한글전용 학생운동을 한 전력이 있을 만큼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한글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표기법에 맞는 글자를 고집하면서까지 작가의 창작 의도를 방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칸남자`와 `착한남자` 사이는 `무릎팍도사`와 `무르팍도사` 만큼의 거리가 있다. 더 비유하자면, 피카소더러 불분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 대신 분명하고 이해 가능한 구상화를 그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맞춤법을 따지며 시비를 걸기 전에,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살짝 비트는 표기법조차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다지 건강한 사회는 못 된다. 바른 국어사용만이 국민 정서 함양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 소통이 되는 사회를 꾸리는 게 더 급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0

사소한 것은 없다

무슨 일이든지 직접 겪고 나서야 공감하기 쉽다. 커피를 즐겨 마셔도 속 쓰리지 않고, 불면에 시달리지 않던 호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언니는 커피를 마실 때면 지나치게 신중했다. 하루에 두 잔 정도 마셨다면 아무리 입맛에 당겨도 더 이상 마시질 않았다. 면도날로 오려내듯 속이 따끔거리는 데다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젊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셔도 속이 쓰리기는커녕 잠만 잘 잤다. 언니가 별나다고 치부했다.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요즘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커피를 마시면 속이 콕콕 쑤시고 불면의 밤도 각오해야 한다. 이 오묘하고 불쾌한 경험이 잦아진 뒤에야 언니가 헛말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당사자가 겪어 보기 전에는 완전하게 공감하기 힘든 것이다.병적인 징후까지는 아니지만 나는 고소공포증을 느끼는 부류이다.`바이킹`이란 놀이기구가 처음 나왔을 때 주제도 모르고 올라탔다가 혼비백산을 한 적이 있다. 얼마 전 대둔산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몇 십 미터 이상 가파르게 뻗은 철제 사다리를 오기 하나로 도전했다가 눈물바다가 됐다. 되돌아설 수도 없는 그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는 심정은 끝없는 지옥 밑바닥을 헤매는 것과 같았다. 허벅지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옥죄어왔다. 공포심의 절대 풍경이 있다면 그것이 아닐까 싶었다.이런 이야기를 하면 고소 공포 체질이 아닌 사람들은 이해를 잘 하지 못한다. 그것쯤이야 한다.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 없으니 공감하기 쉽지 않아서 그렇다. 그걸 탓할 수는 없다. 다만, 세상엔 하찮은 것도 사소한 것도 없다. 아픔은 아픔이고, 공포는 공포일뿐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덜 아프고, 내가 느끼지 않았다고 덜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섣불리 사물이나 대상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 사소한 것이란 아무 것도 없으므로./김살로메(소설가)

2012-09-19

세상의 온도

불편해야 진실에 가깝다. 따뜻하고, 다감하고, 온화한 거리엔 희망이 넘쳐나긴 한다. 하지만 그 희망은 대책 없기 일쑤고 진실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다. 좋은 생각 가득한 월간 잡지를 읽는다고 세상이 좋은 것으로 넘실대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삶의 실체는 언제나 도덕적, 미적 판단을 유보한 뒷골목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낭만성이나 연민의 눈길을 앞세우지 않은 채 그곳에 발 디뎌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쉽게 생의 뒷골목을 들여다 보려하지 않는다. 구차하고 불편부당한 현실에 현미경을 들이대면서까지 제 영혼을 구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파랑새를 찾는 틸틸과 미틸처럼 희망이란 아득한 꿈을 찾아 나서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게 더 나은 삶이라고 은연중 배웠기 때문이다.하지만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에서도 여전히 세상은 희망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고 말한다. 너저분하고 적나라한 화면은 트라우마 깊은 감독 내면의 분신처럼 다가왔다. 관람자는 불쾌하고 불편한 화면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평범한 눈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삶의 넌더리를 날 것으로 훑어대는 불친절한 카메라의 눈. 어쩌자고 감독은 저 비루하고 음산하고 가학적인 구원의 세계로 우리를 잡아끄는가.불편하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지난한 세월, 감독에게 뱄을 상처와 아픔의 철학이 세상을 향해 공명 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 나온 그가 말했다. `음침하다`는 세간의 그의 영화 선입견에 대해 `영화는 제가 바라본 세계이고, 제가 본 세상의 온도를 표현한 것`이라고.세상은 살아내는 자마다 다 다르고, 그 삶을 바라보는 온도 또한 각자 다르다. 평범하고 미온적인 온도보다 싸늘하고 냉정한 온도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건 언제나 김기덕이 말하는 방식이다. 불편해도 내가 김기덕 영화를 신뢰하는 이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8

바위에 새기는 말(言)

사람은 기록의 동물이다. 욕망하고 기원하는 것을 마음에만 새기면 누가 알아 줄 것인가? 맘과 맘으로만 신을 만날 수 있었다면, 인류사를 통틀어 그토록 많은 신을 위한 제단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간절한 약자로서 신 앞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존재였다. 신에게 보낼 그 소망의 말들을 새기는 게 선사시대 사람들의 최대 고충 중 하나였다. 문자가 없던 그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 흔적 남기기가 바위에 뭔가를 새기거나 그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영원에 호소하고 싶었던 그들은 그렇게 암각화를 우리 곁에 남겼다.볕 좋은 날이었다. 지인들의 안내로 칠포리 곤륜산 기슭 암각화를 보러 갔다. 바위에 새긴 마음의 소리를 대하는 첫 느낌은 `너무 먼 당신`이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고래, 거북, 사람 등 실체가 확실한 그림만 상상하다가 추상적이고 모호하기만 한 그림을 만나는 순간 당황했다. 잠시나마 이 바위그림이 청동기시대 이후 까마득한 시간 여행 중이라는 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멀리서 봤을 땐 의자 같아 보였으나 가까이서 보니 방패나 실패 또는 칼자루 모양 같았다. 무슨 그림인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기야 조상들이 내던져준 추상의 의미 앞에서 구상적 실체를 의문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림의 숨은 의미 찾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지모신일 거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의 말씀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도 않았다.다만 그 옛날부터 사람은 생각하고, 기록하기를 욕망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 좋고 산 밝은 그 터전에, 하염없이 소원하고 기원하는 실체적 진실로서 우리 조상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숙연해지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7

김기덕의 신발

김기덕 감독이 화제다. 영화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쾌거 못지않게, 수상식 때 입은 옷과 신었던 신발까지 관심을 받는다. 대충 틀어 올린 은빛 머리칼과 소박한 듯 허름한 갈색톤 개량한복은 무척 잘 어울렸다. 사진 기자들이 찍어 올린 낡고 구겨진 신발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김기덕답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제 참석용으로 급히 산 그 한복은 이백만 원이 훨씬 넘는데다, 구겨 신은 운동화 역시 스페인 산 유명브랜드로 삼십 만원이 넘는단다. 일견 남루해 뵈는 그의 패션 감각을 동정했던 사람들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전 패션이야말로 김기덕을 더욱 김기덕답게 표현했다고 나는 믿는다.영화제는 다가오고 옷은 적당히 입어야겠고, 아무데나 들른 곳이 고가의 옷집이었을 뿐이라고 감독은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다. 신발까지 갖춰 신는 게 귀찮아, 이미 내 몸이 된 것 같은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갔을 지도 모른다.`예술가란 언제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 귀에 들려오는 것을 마음 한 구석에 솔직하게 적어놓는 열성적인 노동자다`라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다. 이 말을 김기덕 감독에게도 빗대볼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일관되게 자신에게 귀 기울였으며, 그 마음 한 쪽을 솔직하게 스크린에다 담은 열성적 노동자였다. 그런 사람에게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예술은 누가 뭐래도 사기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사기를 쳐서라도 희망 또는 진실에 이르고 싶은 것이다. 그 노정에 편하게 구겨진 신발 한 켤레쯤 있어야 되는 건 당연하다. 감독도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술가에게도 각자의 영역이 있다. 깨끗하고 반듯한 구두를 신고 시상대에 오를 사람은 많다. 김기덕은 뒤축 접힌 낡은 운동화를 신을 때 제격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4

눈썰미

눈썰미가 없어서 곤란할 때가 많다. 한 마디로 오해 받기 쉽고, 그 때문에 자책하기 일쑤다. 우선 주부로서 보자면, 냉장고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른다. 겨자 소스나 케첩이 든 칸을 찾아내지 못하고, 캔맥주가 남아 있는지 없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매번 나는 헤매고 금세 다른 식구들은 잘도 알아낸다. 딱 보면 아는데 왜 모르는지 이해가 안 간단다. 사람 보는 눈썰미라고 예외일 리 없다.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않는 한, 몇 번 본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수십 번 봤더라도 환경이 달라지면 알아보지 못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주 본 동네 병원 의사도 가운을 벗으면 알아보지 못한다.오늘도 그랬다. 독서클럽 한 회원이 오래 전에도 나와 같이 독서 모임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 상대방이 더 당황했다. 내 눈썰미 없음이 또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사람을 잘 기억해주는 것도 인간관계에 대한 예의가 될 수 있을 터인데, 같은 상황에서 한쪽은 세세한 것까지 기억하고 다른 쪽은 눈치조차 못 챈다면 그보다 민망하고 미안할 데가 있을까.이러니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 다음에 저 사람을 못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강박 관념이 생기는 것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면서, 왜 기억하면 좋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걸까? 지우고 싶은 것은 지우고 떠올리고 싶은 것만 남기는 마법의 약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해본다. 사람이 완벽하면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질질 흘리고, 풀썩 주저앉고, 쩔쩔 매봐야 진정 산다는 것의 숭고함을 알게 된다. 완벽한 일상만 꾸린다면 세상이 제 위주로 움직인다고 착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명민한 눈치 때문에 피곤해지는 것보다 차라리 어설픈 눈썰미가 가져다주는 자책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위안해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