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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청(視聽)과 견문(見聞)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포항 칠포리 암각화를 본 뒤였기에 그 둘을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늪, 들, 물, 잎 등 오랜만에 순도 높은 자연 풍광을 만났다. 암각화는 댐 건너 먼 풍경으로만 보였다. 답사 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앞 다퉈 망원경으로 호수 건너를 관찰한다. 고래, 사슴 등 그림이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쪽으로 나뉜다.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은 소수지만 목소리가 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쪽은 다수지만 목소리가 작다. 안 보이는 쪽의 소리가 작은 건, 꼭 봐야 하는 것을 남들은 봤다는데 자신은 못 봤으니 주눅이 들어서 그렇다.그들 틈에 끼어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수면에 직각으로 내리뻗은 절벽단층만 보일 뿐 암각화는 렌즈 어디에도 상이 맺히지 않는다. 세월에 풍화되어 그림이 흐릿해진 걸까. 아님 안경 없이 봐서 그런 걸까? 땀까지 흘려가며 망원렌즈와 씨름하고 있는데 현장지킴이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뭘 봤다는 학생들은 착각한 거란다. 암각화는 얼마 전 태풍 때 수위가 높아져 물속에 갇혔단다. 갈수기에나 드러날 텐데 그나마 이끼나 먼지가 껴 제대로 된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단다.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견문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 시청과 견문은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시청`하면서 `견문`했다고 착각한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데도 `시청`이라도 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 본 사람이 흘려 본 사람을 이기고, 흘려본 사람은 제대로 본 사람을 앞선다. 그런 부조리한 상황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제대로 보고 듣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시청에 머물 게 아니라 견문을 넓히는 연습이 무던히도 필요한 나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6

저녁밥상

열정을 다하는 주변인들을 보면 배울 게 참 많다. 그들은 시간을 아껴 쓰며, 약속을 잘 지키고, 사람을 귀히 여긴다. 여기까지만 해도 존경받을 만한데 체력까지 관리를 하는지 웬만해선 지치지 않는다. 수도 없이 많은 그들의 장점 가운데 가장 부러운 게 단단한 체력이다. 하기야 그들이라고 체력이 좋을까?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지만 성실한 열정 하나로 견뎌내고 있는 것이리라. 조금만 무리를 했다 싶으면 드러누워야 하는 저질 체력을 가진 내가 그들을 벤치마킹하려니 힘겹기만 하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면서도 집안일까지 척척해낸다. 몸이 하난데 어찌 저리할 수 있을까 싶다. 나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데 그들은 몸 사리지 않고 일을 즐긴다. 욕심을 내 며칠 그들을 따라해 보지만 몸살과 비염만 도진다. 평소 운동을 즐기지 않다 보니 체력의 한계만 느낄 뿐이다.요 며칠 새 무척 바빴다. 냉장고는 텅 비었는데 밖에 나갈 일은 많다. 현명한 사람들 같으면 민첩하게 몸 놀려 남편 저녁밥상 정도는 차려놓고 나가겠지만 그것조차 여건이 허락지 않는다. 남편 끼니 하나 차리지 못하면서 바깥으로 돌아 얻는 게 뭘까 자괴감이 인다. 그렇다고 행동 패턴이 쉬 바뀔 리 없다. 급하게 즉석김밥 한 줄 사놓고 집을 나서기 일쑤다. 한 집안 가장의 밥상 치고는 너무 볼품없다. 손수 끓인 라면국물에다 식은 김밥을 적셔 마지못해 씹고 있을 남편.짠한 맘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다행히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좋은 향이 난다. 예의 성실한 열정의 향으로 오감을 자극하니 내게도 에너지 넘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향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묶은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했다. 열정과 좋은 향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장점을 배우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들처럼 소박하고 정갈한 밥상 제대로 챙길 날도 오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0-25

이중자화상

인간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동물도 없다. 이 모순된 양상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화가가 에곤 실레이다. 표현주의 화가인 그는 뭉크나 클림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유명한 그림`이중 자화상`을 접할 때마다 인간 본능의 이중성을 잘 표현한 것 같아 절로 공감이 된다. 그의 그림 세계는 독특하다. 특히, 이중자화상은 인간이 맞닥뜨릴 수 있는 모순된 상황을 잘 포착하고 있어, 인생 전반에 대한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림 속 실레는 두 개의 얼굴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각각 경계와 호기심을 상징하는 두 얼굴이 아래위로 뺨을 맞대고 있다.연필에다 약간의 수채화를 덧칠한 그의 이중자화상은 섬뜩하리만큼 양면성인 인간 정서를 대변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힌다. 위쪽 얼굴그림은 호기심과 연민이 서린 눈빛이고, 아래쪽 것은 분노와 욕구불만이 담긴 눈빛이다. 마치 한발 물러서는 경계와, 두 발 다가서는 호기심을 가진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분열된 화가의 자아는 그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우롱하는 듯하다. 두 개의 얼굴 그림은 약간의 이완과 아주 많은 긴장이 필요한 곳이 이 세상이라고 일깨워준다. 경계 없이 이완된 눈빛과 위태한 적의의 눈빛이 공존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해준다.아울러 모든 관계의 갈등은 서운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 눈빛은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상대는 왜 이렇게 밖에 안 해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이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이런 부질없는 감정 때문에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친구 사이가 싸늘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그림 한 점에서 인간 정서에 대한 기본 내공을 기른다.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이중자화상을 제대로 깨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그림은 말해준다. 세상을 향한 경계와 호기심이 조화된 저마다의 이중자화상을 잘 갈무리할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4

그다음 날

세상은 넓고 보는 눈은 다양하다. 따라서 섣불리 경계를 치거나 단정을 지어선 안된다.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순간 잘되던 일도 꼬여버린다. 나와 다른 생각일수록 더 옳다는 자세로 세상일을 바라보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넓은 눈을 가지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일상사는 늘 부딪힘의 연속이다. 정치마당도 마찬가지다. 대선을 앞둔 여러 소식을 보자면 한마디로 저마다 옳다. 후보자도 유권자도 각각 저들만 바른 목소리이고, 나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된 정책은 나오질 않고 곡절 많은 정쟁만 넘쳐난다. 모두 정책에 대한 서늘한 칼날보다 정쟁에 대한 영양가 없는 입씨름만 보탠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부추기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좀 더 창의적이고 느슨한 기운들이 넘쳐났으면 좋겠다.에드바르트 뭉크의`그다음 날`이란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이 20세기 초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걸렸을 때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팔은 늘어뜨린 채 소파에 널브러진 술 취한 여인의 그림이 이해받기란 힘들었다. 술 마신 다음날의 번민어린 실체를 뭉크는 말하고 싶었겠지만 여론은 예술가의 진정성 따위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잣대가 가리키는 현상만을 볼 뿐이었다.취기에 젖은 이 못된 여자가 쉴 만한 장소는 국립미술관이 아니라는 냉소적인 기사에 여론이 열광할 때, 멋진 반전을 이끌어낸 미술관장의 한 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그림 속 여인이 깨어나면 물어보겠다. 이곳이 쉴 만한 곳이냐고. 그러나 지금은 자게 내버려 둬야 한다. 그녀가 있는 것이 미술관의 영예가 될지 치욕이 될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라고.옌스 티스 미술관장 같은 통 크고 열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식견 좁고 지혜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쉽게 눈 틔울 수 있었으면. 보는 만큼 알게 된다. `그다음 날`을 발견해내는 아량 넓은 견자의 시선이 부러운 날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3

말을 알아듣는 꽃

춘향전은 초등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권장된다. 우리 고전이니 어릴 때부터 당연히 읽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도 별 고민 없이 아이들 논술 교재로 활용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오늘도 호기심과 장난끼가 반반인 아이가 연거푸 질문을 한다. 변 사또가 춘향이더러 수청을 들라고 하는데 수청이 뭐예요? 게이샤가 나아요, 기생이 나아요? 수청이 뭐냐고 묻는 건 진심어린 질문이고, 게이샤와 기생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장난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런데 두 질문 다 기생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영향이라고 딱히 말할 순 없지만, 어릴 때부터 기생에 대한 단편적 이미지를 우리가 학습해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기생은 수청이나 드는 존재는 아니었다. 수청이란 말은 본디 관리가 숙소에서 잠을 잘 때 마루 즉, 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수발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물론 춘향전에서의 의미는 수발만 드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생의 주된 임무는 노래와 춤을 넘어 시와 서예 등으로 뭇 잔치를 흥겹게 하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만능 엔터테이너 개념이었다. 예술인이자 재능가인 그들은 해어화(解語花)로 불렸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인데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그렇게 일컬었다. 미인을 뜻하는 이 말은 나중에 기생까지 아우르는 말이 됐다.말을 알아들을 만큼 총명한 예능인이었던 기생의 이미지가 격하된 것은 일제 강점기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게이샤 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이라도 있었을까. 일본인들은 우리의 기생 문화를 폄하하고 왜곡했다. 멋들어진 예능인의 위상에서 술이나 따르는 하급 작부 이미지로 변질시켰다. 수청이 뭔지, 게이샤와 기생을 비교하기에 앞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기생 문화에 대한 진실부터 접근해야겠다. 말을 알아듣는 종합 예능인이 기생 그들이었다고. /김살로메(소설가)

2012-10-22

키치

벽화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도시를 여행하더라도 그런 마을 하나쯤은 쉽게 만난다. 지저분했던 도시 뒷골목은 깨끗이 붓질된 채 벽화마을이란 테마 관광지로 거듭난다. 명화가 모사되거나 풍속화가 재현되거나 과장된 풀꽃이 내려앉은 긴 담벼락. 햇발 내리쬔 담벼락이 다사로울수록 예견된 담장 안 진실이 궁금해진다. 남들 다 아름답고 정돈되었다고 칭송하는 그 풍광이 내게는 키치(kitsch)스러움의 한 예로 떠오른다. 담박하지 못하고 삐딱한 시선이 송곳날이 되어 벽화를 찌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도중 누군가 물었다. `키치`가 뭐예요? 말하자면 벽화마을에 그려진 화사한 그림이나 SNS를 장식하는 음식점 순례 사진 같은 것 아닐까요. 한마디로 보이거나 보이기 위한 것이지요. 이상하리만치 즉각적인 대답이 내 입에서 나온다.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 뒷골목 담장에 감쪽같이 고흐의 해바라기가 모사되어 있다. 그 옆으론 실제보다 더 선명한 장미넝쿨과 금세 마을을 버리고 날아갈 듯한 천사의 날개까지 걸려있다. 하지만 골목의 실체는 벽화가 보여주는 과장된 낭만을 담보하지 못한다.저 먼 골목 끝, 한쪽다리 절단된 중년 아줌마의 목발 짚은 뒷모습과 입구 가까운 첫 집, 빼꼼 열린 녹슨 대문 사이로 폐지더미를 묶는 할머니의 손등이 이 마을 벽화의 진실이라고 말해준다. 밀란 쿤데라 식이라면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다. 보이는 벽화야말로 거짓 즉 키치이고, 뒤에 숨은 목발 짚은 뒷모습과 폐지더미 위 손등이야말로 실체 즉 진실이다.그림 뒤에 숨은 진실이 어둡거나 감추고 싶을수록 그 벽화는 총천연색을 자랑한다. 레스토랑 화려한 음식이 소셜네트워크 사진 속에서 빛난다는 건 우리들 마음이 공허하다는 증거이다. 저속하고 가짜인 키치가 아프고 공허한 실체를 위무하는 아이러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0-19

불온한 독서

책이 없었다면 여성들의 삶이 어땠을까? 인간사 이래로 여성 삶의 진일보를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독서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 가정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책 한 권이 있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한 때 여성의 독서가 지극히 위태로운 것으로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음을 고찰한다. 근대 이전의 유럽 여성들은 세상에 대한 대범한 호기심을 갖는 것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고급한 것은 남성의 차지였으니 독서 또한 남성 전용이었다. 따라서 책 읽는 여자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불온한 혐의가 짙었다. 이 불온한 자유주의자들은 가슴 속에 화약고 한 짐씩을 안고 살았다. 남성의 거울로 비추어볼 때 그 시대 여성의 독서는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은 남성 고유의 영역인데, 더 많은 것을 여성과 공유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소수 엘리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팽배했다. 종교 서적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천성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여성에게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와 드넓은 우주 질서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을까.억누를수록 여성들은 유쾌한 고립행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독서야말로 세상과 소통하는 멋진 통풍구라는 것을 안 이상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숨어서 책 읽는 여자들이야 말로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니었을까.이제 여성에게 독서는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책 때문에 불온해진 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진다면 그 보다 나은 독서의 진가가 어디 있겠는가. 덜 불온한 여성일수록 더 상처받는다. 상처 많은 여성들이 한 권의 책에서 힘을 얻는다면 이 또한 독서의 효용이 아니겠는가. 과감하고 불온한 독서일수록 그 파장은 크고 깊다. /김살로메(소설가)

2012-10-18

입시 단상

입시철이 다가왔다. 대학 입학 전형을 들여다보려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수시와 정시로 원서 방식도 갈라지는데다, 수시전형은 입학사정관제, 국제 전형, 과학 전형, 학교장 추천 전형, 일반 전형 등 다양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이걸 다 이해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을까 싶다. 대학 한 번 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만 든다. 우리 세대 입시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때는 학력고사 점수에다 내신 성적만이 평가 기준이었다. 기준 배치표를 보고 자신이 받은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 및 학과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입시 절차 때문에 골치 아플 이유는 없었다. 융통성은 없었지만 단순 명쾌한 그때 입시 방식에 머물러 있는 수험생 학부모로서 요즘 대입 전형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한계가 따른다.아들 녀석이 전하는 입시 관련 의견은 반은 이해하고 반은 알아듣지 못하겠다. 들을수록 헛갈리기만 한다. 결국 `니가 알아서 하라`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말로써 완전 자율권을 부여하고야 만다. 고급 정보를 찾아나서는 열혈 엄마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그 대열과는 한참 먼 행보를 하자니 걱정과 후련함이 동시에 인다.학생 스스로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주변을 살펴보면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을 정도로 자기소개서에 시달리는 엄마도 있다. 자정 넘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입시생은 그것을 쓸 시간도, 의지도 없다. 내신 성적을 따져가며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것도 학부모 몫이다. 비싼 돈 들여 전문가에게 자기소개서를 부탁하는 학부모도 있다.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학생과 학부모 나아가 학교까지 힘들게 하는 이런 입시 방식은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자녀와 학부모가 동시에 수험생이 되는 것, 이것이 대학교나 교육부가 원하는 입시방식이 아닌지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7

청라언덕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가곡 `동무생각`은 전 국민의 애창곡이라 할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의 이 가곡은 언젠가부터 `청라언덕`이라는 지명 덕도 톡톡히 보고 있다. 청라언덕을 지척에 둔 채, 수없이 `동무생각`을 불렀어도 그것이 대구 동산동의 특정 지역을 지칭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그때만 해도 본격적인 근대 대구 문화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전이어서 청라언덕이 조명받기에는 일렀는지도 모른다.포항시립도서관에서 마련한 `근대 대구 골목 투어` 문학기행에 합류하면서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청라언덕을 둘러볼 수 있었다.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성장한 중심지이다. 지난 100여 년간 지역 문화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호흡 공간이다. 청라(靑蘿)란 `푸른 담쟁이`를 말한다. 여전히 담쟁이 넝쿨은 선교사가 살던 붉은 벽돌집 주위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대구가 근거지였던 박태준 작곡가의 학창 시절 연애사를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로 짓고, 박태준 본인이 곡을 만든 것이 `동무생각`이다. 노랫말 속 청라언덕에 피는 백합은 근처 신명여학교 학생이었다고 해설사가 전해준다. 한데 최근 이은상 시인의 고향인 마산에서도 청라 언덕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청라(靑羅) 즉, `푸른 비단`이라는 뜻의 이 언덕은 마산만이 보이는 노비산을 지칭한다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자못 흥미롭다.의미 부여만 제대로 한다면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은들, 마산에 있은들 어떨까 싶다.두 예술가의 정신만 오롯이 되살릴 수 있다면 청라언덕은 둘이어도 큰 무리는 아니다. 지명의 소유권 보다 청라언덕이라는 고유한 문화 이미지로서의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하다. 문화 상품으로 재탄생되는 청라언덕을 두 예술가도 반기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0-16

바람만이 아는 대답

올해 노벨 문학상은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에게 돌아갔다. `홍까오량 가족`이 그의 대표작인데, 소설 앞부분은 영화 `붉은 수수밭`의 소재가 되었다. 동양권에서 수상자가 나오니 친근감과 동시에 질투가 인다. 수상자 못지않게 후보군에 자주 오르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간다. 고은, 무라카미 하루키, 밥 딜런 등인데, 그 중 밥 딜런에게 귀와 눈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수로 알려진 사람이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니 생뚱맞으면서도 신선하다. 밥 딜런은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장식 어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6,70년대를 선도했던 저항 가수답게 메시지가 있는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사회참여 및 반전에 관한 노래를 주로 불렀으니 노랫말이 자연스레 무겁고 의미심장하게 흘렀다. 그렇게 지은 여러 노랫말이 노벨상을 타도 좋을 만큼 문학성이 있으니 해마다 후보에 오를 것이다. 밥 딜런의 가사에 관한 평론이 발표될 정도이니 괜한 제스처는 아닌 모양이다.몇몇 가사를 검색해봤다. 솔직히 문학성이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비약과 은유가 심한데다, 정돈되지 않고 장황한 느낌이다. 영어 원문을 봐도, 번역된 우리말 가사를 봐도 그렇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외국인이 우리말 원문과 자국어로 번역된 것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문화와 언어가 다른 상태에서 `시적인 가사`를 제대로 짚어내기란 어렵다.한데 그의 대표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들으면 왜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베트남 전쟁 참상 등을 겪은 세대답게 반전 메시지가 주는 노랫말이 시적이고 서늘하다.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김살로메(소설가)

2012-10-15

긍정의 에너지

다양한 게 사람 캐릭터이다. 잇속만 챙기는 사람, 자기 것을 한없이 퍼주는 사람, 자신을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사람, 소견이 좁은 사람, 아량이 넓은 사람, 착한척하지만 의뭉스러운 사람, 냉정하게 보이지만 속 깊은 사람, 냉소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람, 한없이 밝아 경계가 없는 사람 등 저마다의 주어진 개성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한살이를 꾸려나간다. 사람이란 동물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여러 캐릭터 중 어느 한 쪽만 가진 사람은 없다. 신이 인간을 이중인격자로 설계해놓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지만 유독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잇속만 챙기는 치는 아니지만 냉소적이고, 배려는 잘 하지만 소견이 좁고, 나사 몇 개씩 풀린 허점투성이 생활 패턴이지만 경계 또한 분명한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들은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만 하다.인격이란 게 어느 정도는 훈련과 수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성을 넘어선 천사표를 가슴에 단 사람들은 훈련과 수련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궂은일, 힘든 일을 자처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안 해도 되는 일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놓고 생색조차 없다. 자연히 모임의 실질적 리더가 되는데, 사람 마음을 얻는 것보다 귀한 선물은 없기에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이 끓었다 내렸다 하는 나 같은 이에게 그들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가만히 보면 그들은 제 맘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한다.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큰 짐이 밀려와도 의연하기만 하다. 맘 속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웃고, 베풀고, 배려한다. 괜히 그들에게 좋은 기를 얻기 위해 바람결을 빌려 옷소매 한 번 스쳐보는 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2

풍경이 가르친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가끔은 책을 덮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때 그 길이 보인다.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 글공부를 한다. 잘 익은 밤처럼 토실토실한 남의 글을 읽기도 하고, 덜 말린 대추 같은 누글누글한 제 글을 다듬어도 본다. 남의 좋은 글을 읽을 땐 감탄하고 부러워할 입과 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숙제로 내놓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한다. 남보란 듯 합당한 이유가 생겨 떳떳이 결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글 좀 잘 써보고자 모였는데 글이 제 발목을 잡아 버린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있을까? 결실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 왔는데도 우리들의 글쓰기는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수고 없이 좋은 글이 나올 리 없다. 그럴수록 책상 앞에 앉으면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괴로움이 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쓰려고 용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글이 되지 않을 때는 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다.활자 빽빽한 종이 대신 아름드리 소나무 둘러치고, 늦은 민들레가 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이름 붙여 야외수업. 오늘 만큼은 숯불 삼겹살과 소주 한 잔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 밋밋한 평화보다야 울퉁불퉁한 들끓음이 글 소재로는 낫지 않던가. 연필을 버려야 할 적당한 타이밍이었을까. 출석률도 좋은데다 여유가 넘친다. 유머가 길을 트니 배려가 뒤따른다.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때론 책을 버리고 풍경 속에 흠뻑 젖어야 길이 보인다. 푸성귀 뜯고 씻던 시린 손, 쉴 자리 마련하려 굽히던 연한 무릎, 연기 마셔가며 모닥불 피우던 잔기침 소리, 바람막이로 서서 따뜻한 물 끓여내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내고 있었다. 글이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풍경 속에 글이 있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1

마음이 아플 때

몸 아픈 것과 마음 아픈 건 많이 다르다.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몸 아픈 건 물리적 처방과 시간이 주어지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하지만 마음 아픈 건 심리적 처방과 시간이 주어져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몸 아픈 건 온전히 나만의 문제지만, 마음 아픈 건 몸 아픈 것과 달리 사람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연예계 절친 두 명이 불화설에 휩싸였다. 단순한 연예계 가십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그들 일련의 행보가 자신들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인의 위상으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한 명은 `강남 스타일` 노래 한 곡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콘서트로 번 돈 대부분을 세상 약자를 위해 내놓는 기부 천사로 활동 중이다.둘 사이가 불편하게 된 건 개인적인 문제겠지만, 한 사람이 너무 잘나가면 남아있는 다른 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꿈에도 그려보지 않았던 빌보드 차트 일위를 넘볼 때 다른 한 사람은 뉴욕 타임스퀘어 거리에`기억하시나요`라는 위안부 관련 광고를 올렸다. `강남 스타일`이 언론에 도배될 때 정작 `기억하시나요` 에 관한 보도는 단신으로 처리됐다.남보라고 선행하진 않겠지만 남들이 알아줄 때 선행도 신이 나는 법이다. 당사자 간 갈등이 있는 상태에서 선행마저 관심 밖으로 몰리니 마음을 다칠 수밖에 없다. 다친 맘을 보듬어줄 생각은 없으면서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만 쏟아낸다. 당사자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질 않는가.인간은 갈등하는 동물이다. 당사자 어느 한 쪽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인간관계에는 항시 존재한다.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한 위안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온다. 어느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지만 약자가 느끼는 고통이 더 크니 그게 문제이다. 이래저래 인간관계는 힘들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0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보인다. 무엇보다 반갑다. 국회 문방위 소속 의원들이 법률안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는데, 내년부터 한글날이 복원돼 법정 공휴일이 될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한글날은 휴일이 너무 많아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기업들의 권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설움을 당했다. 경제 논리에 의해 몇몇 법정 공휴일이 추억 속으로 사라질 때 한글날만은 살아남기를 바랐다. 청춘시절 한때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임을 해온 이유도 있었지만 한글날 같은 의미심장한 날이 경제 논리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한글은 만든 날, 만든 이, 만든 의도 등이 문헌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그 중 우리는 창제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했다는 세종대왕의 말은 진실이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 의도도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통치권을 확보하고 싶은데, 기득권 언어인 한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누릴 호사가 일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옮아가는 것은 꿈에도 원치 않았다.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신하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피지배층과 효율적인 소통을 원했던 왕권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신권의 견제 사이에서 태어난 부산물이 훈민정음이었다. 일반 민중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 세종대왕의 전략적 문자 혁명은 정작 당시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후세대인 우리가 오롯이 그 은덕을 누리는 건 아이러니이자 행운이다.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되었으면. 그리하여 그날 하루 만이라도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의의를 살피고, 말글 하나 된 민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 없는 백성은 생각하기조차 싫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9

느리고 깊게 읽기

속독(또는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한 답은 없다. 취향의 문제인데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습득해야 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에 관심이 많으면 자연히 속독 쪽으로 치중하게 된다. 반면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서 문맥 하나하나에서도 소우주를 발견할 만큼 의미를 부여하는 치라면 정독이 어울린다. 속독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독이 되는 사람들은 많다. 그건 이상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다독자이면서 정독하는 사람들은 드문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책 읽기의 고수들이다. 책에 관한 온갖 정보와 리뷰를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서점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밥벌이로서 직장이 있을 터인데, 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니 저들이 사람일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나 같은 이는 차선책으로 적게 읽어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많이 읽으면서 얕게 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나. 고수가 못될 바에야, 한 달에 삼십 권 읽는 것보다 세 권을 제대로 읽는 게 더 나은 독서법일 테니까.제대로 읽는다는 명분하에 내게 눈도장 찍힌 책들은 대개 지저분해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매료된 상태에서는 밑줄 긋지 않을 수 없고, 접고 싶은 부분 또한 시시각각 나타나며, 옮겨 적고 싶은 구절엔 별표들이 넘쳐난다. 책이 더러워진 만큼 애정의 강도도 높아진 것이다. 한 번 읽고 책장 안에 모셔진 것보다 느리게 보듬어 닳은 것이 제대로 사랑받은 것들이다.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읽는이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함, 그것이 제대로 된 읽기이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김살로메(소설가)

2012-10-08

식중독

이번 명절에는 소위 역귀성이라는 걸 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그런지 정체 구간 없이 수월하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사정이 달랐다. 오후 한 시 쯤에 나섰는데 열 시간 꼬박 도로에만 갇혀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원 없이 자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지만 시간이 남기만 한 귀갓길이었다. 귀성이든, 역귀성이든 이제 명절 교통 체증은 당연한 것이 되어가나 보다. 너무 늦은 귀갓길이라 각각 당신들 댁에 머물고 계신 어머님과 친정 엄마께 들른다는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날 두 분을 뵈러 다시 대구로 출발했다. 느끼한 명절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을 되살리는 데는 회가 제격이다 싶어 포장 주문해 갔다. 어른들이 좋아하기도 하지만, 따로 요리할 필요도 없는 편리한(?) 효도법이기도 했다.느끼하던 입안이 개운해졌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모두 난리가 났다. 구토, 설사, 오한, 근육통, 고열, 두통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회를 먹은 십여 명 대부분이 두어 시간 만에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지사제와 항생제를 처방받거나, 밤새 움켜쥔 배를 안고 온 방안을 누비거나 했다.무엇보다 두 어른과 친구분들께 너무 미안하고 맘이 불편했다. 항생제를 덜 쓴 횟감이 오면 그럴 수 있다면서 횟집에서도 사과를 해왔다. 그쪽에서도 의도적으로 폐 끼치자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그 횟집을 찾진 않겠지만 왜 그런 생선을 썼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틀 꼬박 앓으면서 생각한다. 선의의 행동에도 오류가 따를 수 있다고. 그 오류는 우연에 의해 생기지만 그 파장은 의도하지 않게 커질 수도 있다고. 세상일은 절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저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우발적 상황에 따라 우리 일상은 휘어지고 꼬일 수 있다. 닥치면 당해야만 하는 치명적 우연이 우리 삶을 관장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 조심만으로 안 되는 게 세상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5

공짜는 없다

미국 격언에`There is no free lunch`라는 말이 있다.`프리 런치`란 서부 개척시대에 술집에서 내놓던 점심을 말한다. 일견 공짜로 보이지만 실은 비싼 술값 안에 끼니 값까지 포함되어 있다. 모 경제학 책에도 이런 예화가 나온다. 경제에 대해 알고 싶은 왕이 학자들에게 책을 쓰라고 지시했다. 수십 권의 완성된 책을 보자 질려버린 왕은 한 권으로 줄이라고 했다. 그것도 길었다. 단 한 줄로 줄이라고 하자 배고팠던 학자들의 요약문은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것이었다나.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을 못하거나,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짜에 혹할 때가 있다. 유명 대학 음료 사업부라며 콜 센터 직원이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온다. 내가 속한 모임에 판촉 행사 차 직원이 잠깐 들르겠단다. 십여 분 시간만 내주면 되고 부담 느낄 필요가 없는데다 점심 도시락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마라고 약속을 해버렸다.일식 도시락 앞에서 판촉 직원이 멘트를 한다. 그 어떤 강매도 강압도 없었다. 나름 정중했다. 난공불락인 아줌마 고객들을 상대로, 한 가계의 책임자이자 직장인인 그가 최선을 다한다. 맘이 짠하다. 눈치껏 주변을 살피니 다른 사람들 맘도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블루베리 음료를 무턱대고 사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어릴 적 제 아비를, 지금의 제 남편을 보는 것 같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목도한 우리들은 도시락에다 코를 박은 채 별 말이 없다. 이런 먹먹한 분위기였으면 차라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각자의 도시락을 밀어낼 때, 단내 나는 판촉남, 아니 한 집안 가장의 말끝이 흐려지고 손끝 또한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코 공짜 점심은 없었다. 여태껏 먹은 밥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한 끼의 점심./김살로메(소설가)

2012-10-04

개천절

알고 지내는 필리핀 친구가 있다. 귀화한 지 몇 년 되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우리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도 낯설다. 그녀가 묻는다. 개천절이 뭐냐고? 모국어를 맘대로 구사하는 사람들끼리도 개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난감한데, 이방인 출신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군이 최초로 우리나라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평소 그런 순수한 의미보다는 합법적 공휴일이구나, 하는 실리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도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다. 애매모호하기만 한 광복절이란 이름이 그들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개천절은 오롯이 제 정체성을 살피는 것과 연관이 깊다고 내가 말한다. 유수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뼈대 있는 기념일. 하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정작 우리는 잊고 산다.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 개천절이다. 하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의 본뜻은 100여 년 앞선 기원전 2457년 환웅 시대로 소급된다.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날이 음력 시월상달 초사흗날이었다. 상달은 으뜸달을 말하는데,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시월이 상달이 되는 건 당연했다.개천절은 이처럼 건국 신화의 경축일이자,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근거하는 자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시월상달은 당연히 음력이었겠지만 그것을 따지는 건 단군 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일반 시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일 년에 한 번쯤 되새겨 보는 날은 필요하다. 그런 자긍의 뿌리가 올해로 4345년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2

프라이데이와 방드르디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이름을 참 센스 있게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험 항해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그런 경우이다. 앞부분의 항해와 난파 과정, 무인도 표류와 정착 분투기 등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오직 프라이데이가 나오는 장면부터 눈길이 확 끌린다. 금요일에 발견하였다고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인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노예. 로빈슨 크루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림자 역할에 머문 프라이데이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갈증을 성찰한 작가 미셀 투르니에가 전혀 다른 프라이데이를 창조해냈다.`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란 재구성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18세기 초, 로빈슨 크루소가 나온 당시는 백인과 영국과 문명인과 기독교가 세계관의 기준이 될 때였다. 그러니 계몽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들은 자기들 기준 밖의 것은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흑인 원주민 프라이데이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패러디 작에서는 프랑스 말로 금요일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란 이름이 프라이데이 대신 등장한다.프라이데이가 단순하고 착한 노예였다면 방드르디는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주체자였다. 프라이데이가 수동성을 의미할 때 방드르디는 능동성을 부여받았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투르니에 작품에서는 방드르디의 협력자이자 야만의 자연인으로 순응한다. 세계관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에 미개와 문명의 경계가 어디 있냐고 질문해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할 때 그 구분법은 휘파람 부는 날의 미세한 심장의 떨림을 알아차리는가, 개미에게도 그들 고유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바람 부는 언덕의 풀냄새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을 눈치 채는가 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가늠자를 들이대 줄 나만의 `금요일`을 찾아 옷깃 한 번 여며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8

단춧구멍에 들꽃을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으리라. 그의 중편 소설`토니오 크뢰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고뇌가 숨어 있다. 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본다.동급생 미소년 한스를 해바라기하지만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라는 가혹한 교훈을 얻을 뿐이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소녀 잉에를 맘에 품지만 상대는 악의 없이 무심할 뿐이다.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는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토니오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겨우 열네 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정돈되고 명상적인 부르주아 아버지와, 자유롭고 정열적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운명적으로 시민 계급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토니오 크뢰거. 그는 두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 예술가 그룹에서는 경멸과 환멸을, 시민 계급에서는 굴욕과 패배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부러워해 마지않던 시민성을 경외와 긍정의 시선으로 수용한다. 시민 계급의 밝음을 사랑하고 질투하는,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겠다고 고백한다.토니오 크뢰거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다고 믿는 우리들 자화상이다.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은 채 단정히 책을 읽는 아버지와, 만돌린을 들고 거리의 악사로 나서는 집시 풍의 엄마가 공존하는 게 고뇌하는 사람의 마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