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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늘은 어제의 거울

모든 오늘은 어제의 집합체이다. 내일 없는 오늘은 있어도 어제 없는 오늘은 신생을 제외하곤 없다. 오늘 내가 하는 모든 몸짓과 생각은 좋든 싫든 어제의 결과물이다. 앙다문 입술, 조심성 없는 매무새, 무심한 위로의 말, 주춤거리며 멀어지는 발길, 재바른 손놀림, 자주 흘리는 눈물, 위선에 찬 악수, 쏘다녀 비릿해진 머릿결, 전의를 상실한 눈빛…. 이 모든 것들은 축적된 어제가 내보낸 오늘 삶의 무늬들이다. 오늘을 이루는 이 무늬결이 단단하거나 부서지는 건 어제 역시 단단하거나 부서지기 쉬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늘을 산다고 믿지만 실은 어제에 갇혀 산다. 오늘을 버리고 싶다는 것은 어제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이고, 오늘을 부여잡는 건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완곡한 바람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였으므로.삶이란 이처럼 어제와 오늘이 얽힌 유기적 총체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소설`어제`에서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는 지난한 삶을 무심한 듯 냉정한 필치로 그린다. 장식 없고 건조한 그녀의 문체는 화려하고 다사로운 문체보다 훨씬 더한 감동을 준다. 창녀의 딸이라는 과거도, 노동자라는 현재도 연인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주인공의 막막함. 거기다가 연인과 같은 아버지를 뒀다는 혼자만의 비밀까지 감당해야 하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제외하곤 어디서도 제 운명을 이해받지 못한다. 끝내 고통스런 어제인 연인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 독자로서 가슴이 아픈 건 운명의 가혹함이라는 신파가 아니라 산다는 것의 비루함에 이야기의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결코 과거를 파먹으며 자학하지 않는다. 사랑을 포기한 그 자리엔 현실이란 오늘이 배치되어 있다. 말하자면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이 떠나도, 더 이상 꿈꿀 이유가 없어도 인간은 어떻게든 현실과 타협해서 살아가게돼 있다. 다만, 어제에 발목 잡힌 오늘이 그 어제를 영원히 밀어내지는 못한다. 어제에 저당 잡히는 걸 견딜 수 있는 건 그것이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9

사과의 계절

창 너머 은행나무 가로수들, 달린 잎보다는 떨어져 뒹구는 잎들이 더 많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계절 속절없이 가고 있다. 이맘때면 백만 번이라도 사과를 다시 하고픈 아이 한 명이 떠오른다. 은행잎 날리고, 찬바람 돋던 어느 오후였다. 현관 앞 복도에 세워둔 자전거가 없어졌다. 새 것이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딸내미를 위해서라도 되찾고 싶었다. 그 즈음 아파트 단지 안에서는 자주 자전거가 없어졌다. 분명 상습 절도범이 계획적으로 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 미치자 자전거를 찾고 싶은 것 이상으로 그 절도범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졌다.아파트 관리실의 협조를 얻어 CCTV를 확인했다. 엘리베이터 안을 비추는 화면에 드디어 자전거 도둑이 떴다. 한데 화면 속 얼굴은 아무리 봐도 내가 열고 있는 논술교실의 회원이었다. 모범생이었지만 화면에 그렇게 나온 이상 믿을 수밖에 없었다. 캡처한 사진을 그 아이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그 아이 짓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애 모습이라고 그 아이가 확인해주었다. 선명치 않은 화질을 믿고 착하디착한 아이를 자전거 도둑으로 오해 하다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이었다.사과를 한다고 했지만 내 사과는 충분치 않았다. 사과라는 건 상대가 온전히 받아줄 때까지 해야 한다. 하지만 진심을 전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몇 년 뒤 한 고등학교에 특강을 나갔을 때 그 아이를 만났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 아이를 보자 반갑고 미안한 마음에 계속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외면했다.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사과를 했지만 상대방이 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사과는 계속되어야 할 것이었다. 당시 무조건적이고 깔끔한 사과를 하지 못했던 내 맘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한참 지난 일이지만, 노란 은행잎 뒹굴고 찬바람 스미는 날이면 내 컸던 실수와 미흡했던 사과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몇 번이고 계속해도 모자랄 나의 사과./김살로메(소설가)

2012-11-08

아줌마 단상

우리 사회에서 아직 `아줌마`라는 말은 긍정의 의미보다는 부정의 의미가 더 강하다. 처음부터 나쁜 의미로 쓰인 건 아닐 것이다. 아주머니에서 출발한 그 말은 친척이나 가까운 이웃의 부인네를 친숙하게 칭할 때 두루 쓰이는 말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제는 사전조차도 `아주머니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의 아줌마를 오늘 대로변에서 목격했다. 한 남자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것도 분에 차지 않는지 핸드백으로 남자의 가슴팍과 어깨 등을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발길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재혼 가정인 모양인데 딸 혼사 문제로 낮술한 잔씩 한 김에 실랑이를 벌이는 듯했다.아줌마의 여러 이미지 중 `그악스러움`이 담긴 얘기는 옛날에도 있었다. 구한말 때의 여행가 새비지 랜도어는 우리의 아줌마 관찰기를 이런 내용으로 기록했다. 꿔 간 돈을 갚지 않은 포졸이 오리발을 내민다. 채권자 남편이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자 구경만 하고 있던 아내가 빨래방망이로 포졸을 때려 실신시킨다. 정신 차린 포졸이 달아나자 끝까지 쫓아가 포졸을 얼음판에 쓰러뜨리고 얼굴을 물어뜯기까지 한다. 보다 못한 새비지 랜도어가 말리다가 무릎을 얻어맞아 달걀만한 혹이 생겼다나.예나 지금이나 `아줌마`는 약간은 그악스럽고 조금은 불편한 이미지로 그려지나 보다. 하지만 양성 평등론과 여성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그 말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리게 되었다. 남성의 그악스러움과 불편부당함은 `아저씨`로 한정되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어머니, 엄마`가 주는 이미지만큼 성스러운 위상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아줌마도 여성인 만큼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만 국한되지 않기를 희망해본다.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이라면서 아줌마들 힘을 돋우는 여성 단체도 있지 않은가./김살로메(소설가)

2012-11-07

도나도나 그리고 존 바에즈

`도나도나`란 포크송은 반전(反戰)가수 존 바에즈가 불러 유명해졌다. 구슬픈 가락의 그 노래는 물론 그녀가 처음 부른 건 아니다. 유태인 작곡자와 작사자가 따로 있고 곡에 얽힌 사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 이웃을 지켜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마차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는 송아지의 슬픈 눈은 맥없이 수용소로 잡혀가는 유태인들을 가리키리라. 들을 때마다 가사에 나오는 송아지, 제비, 바람, 농부의 이미지가 하나의 그림처럼 떠오른다.속박된 송아지의 슬픈 눈앞에는 가없이 자유로운 바람의 웃음(어쩌면 비웃음일지도)과 맘껏 나는 제비의 날갯짓이 펼쳐진다. 송아지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런 송아지의 눈빛을 보는 달구지의 주인인 농부가 말한다. “억울하면 날개 달고 제비처럼 날아보지 그랬니”라고. 자유가 소중하다면 나는 법을 배우라고.훗날 기타 든 존 바에즈가 이 노래를 자기화해 불렀을 때, 비폭력 저항 및 자유에 대한 상징의 기치와 매우 잘 어울리는 노래가 됐다.온몸으로 읊조리듯 고백하는 목소리와 시적이고 구성진 노랫말 때문에 귀가 절로 열린다.특히, 후렴구인 `도나도나` 부분은 묘한 여운이 남는다. 후렴구 도나도나는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원곡에 충실하자면 절대자인 구원자를 의미할 것이고, 시적인 가사에 충실하자면 이탈리아 말로 `부인`이란 뜻도 있다니 그렇게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를 갈구하는 노랫말로 보자면 단순한 추임새 기능으로 봐도 무방하다.도나도나를 떠올린 건 얼마 전 `존 바에즈 자서전` 신간을 만났기 때문이다. 미화된 찬사만이 아니라 치부와 약점마저 오롯이 담겨있는 이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출간기념회 겸 고희를 넘긴 존 바에즈가 전 세계를 돌며 구슬프게 읊는 자유의 노래를 한 번 들어보고 싶다. 상상만으로도 도나도나해진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6

여성의 범주

한 심리학자가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여성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이 발언 때문에 각종 매체가 시끄럽다. 아마 `최초의 여성 대통령론`을 펼치는 박 후보의 정체성에 브레이크를 걸고 싶었나 보다.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된다. 하지만 정치 문제를 벗어나, 언제 어디서나 내가 여성이라는 것을 한 때도 잊은 적 없는 나 같은 시청자는 금세 흥분지수가 높아질 만하다. 황상민 교수의 논지는 대개 이렇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생식기가 아니라 역할의 차이이다. 여성의 대표적 역할은 결혼하고 애 낳고 그 애를 키우는 것이다. 박 후보가 결혼을 했나, 애를 낳았나? 학교 다닐 때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대우받는데, 결혼하고부터 여성들이 차별 받는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여성의 차별을 이야기하기가 사실 힘들다.이 말 속엔 모름지기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시집살이도 해보고, 남편 보필도 제대로 해봐야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나아가 모성을 잃어서도 안 되며, 온갖 세파에도 끄덕하지 않은 불굴의 의지를 경험한 경우라야 진정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마초적이고 폭력적인 여성관을 어떻게 저리 쉽게 방송에서 드러내고 떠들어댈 수 있을까.세상의 모든 여성은 다만 여성일 뿐이다. 결혼하고, 애 낳고, 단맛 쓴맛을 경험해봐야 꼭 여성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한정된 의미의 여성은 전 여성의 반에도 못 미친다. 결혼 안 한 여자, 아이 안 낳은 여자, 세파에 시달려보지 않은 여자도 부인할 수 없는 여성이다. 모성이 없어도 여성이요, 심지어 여자라고 자기 정체성을 확신하는 단순 생물학적 남성도 여성이라 할 수 있다.여성의 범주는 마초적 성향의 남자 잣대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 여성이면서도 남성적 시각으로 같은 여성을 바라보는 치들과 더불어 내가 가장 혐오하는 부류가 저런 시각의 보유자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5

지옥과 천국

업무 차 타지에서 온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본 그녀는 무척 야위었다. 통통하게 볼 살이 올랐을 때만을 기억한 내겐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다이어트나 운동을 해서 뺀 살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극심한 스트레스가 주범이라고 실토했다.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은데 관계에서 오는 갈등으로 마음고생이 심하단다. 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맞다. 타인은 지옥이다. 희곡`출구 없는 방`에서 사르트르가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 남자와 두 여자가 있다. 그 셋은 한 호텔 같은 방에 배정을 받는다. 출구 없는 그곳에서 세 명은 평생 같이 살아야 한다. 이 호텔은 다름 아닌 죽은 자들의 감옥인 지옥이다.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불바다는커녕 고문조차 없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그들 서로가 불바다요, 고문자라는 것을. 끓는 납에 넣는 것보다 부젓가락으로 쑤시는 것보다 더한 지옥이 타인이었던 것.싫든 좋든 타인과의 관계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타인이 필요악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나타나`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해주니 얼마나 위안이 될 것인가. 비록 `닫힌 공간`이라는 전제가 있긴 하지만 통렬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누구에게나 현실은 힘겹고, 관계는 피로하다.그렇다고 타인 없는 천국이 가당키나 한가.`타인이 곧 지옥`이긴 하지만 `타인 없는 천국`도 삼일천하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를 비틀어`혼자만의 방`이란 희곡을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더한 지옥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타인은 지옥인 동시에 천국인 셈이다. 물론 지옥이 아닌 천국일 때의 타인이 더 많다. 그 힘으로 우리는 일상을 버텨낼 수 있다.살이 빠질 만큼 상처 입으면서도 우리가 타인의 지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 운명 때문이다. 상처와 치유 즉, 지옥과 천국의 다른 이름인 그대 타인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2

능견난사(能見難思)

송광사행은 처음이었다. 천 리 밖, 상상으로 그리기만 했던 경내엔 가을 풍광이 완연했다. 잘 물든 단풍잎마다 햇살이 고르게 박혔다.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는 객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품 넓은 절집의 한 점 풍경이 되어 지친 몸 반나절쯤 풀었다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터였다. 구내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다양한 사료들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은 굳어졌다. 그 중 입구 쪽의 그릇더미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그릇 자체는 지극히 평범해보였다. 얇고 둥근 청동제 접시인데 고려시대 것이었다. 공양 바리때로 쓰였는데`능견난사`(能見難思)라 했다.`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 이치를 알기가 어려운 일`이란 뜻이다. 그릇 이름치고는 유별나고 심오했다.고려 때 원나라에서 가져왔단다. 주조법이 특이해 위로 포개도, 아래로 맞춰도 딱 들어맞는단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모든 것이 수제이던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숙종 임금이 그것과 똑같이 만들라고 했지만 장인들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나. 그래서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의미로 그런 이름이 붙었다.`보기엔 쉬워도 만들기는 어려운` 것 중의 또 하나가 글쓰기이다. 어느 정도 눈이 트이면, 잘 된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은 금세 알 수 있다. 하지만 읽는 눈이 열렸다고 쓰는 것이 절로 되는 건 아니다. 보는 눈과 쓰는 눈의 차이만큼 글쓰기의 괴로움이 따라 붙는다. 쓰는 이의 이런 노고를 알기에 인터넷 서점에서 책 평가용 별 개수를 물어오면 웬만하면 다섯 개 전부를 준다.커뮤니티 활동이 자유로운 인터넷 시대엔 작가나 비작가의 경계가 없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잘 쓰는 모든 이들은 내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다. 글쓰기야말로 능견난사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좋은 글이 쓰기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송광사 `능견난사`를 통해 다시 깨친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1-01

카레닌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나 있다. 내게 있어 그 경우는 동물을 키우는 것에 관한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시간을 상상하면 어깻죽지에 날개가 돋는 듯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루기 힘든 그야말로 상상일 뿐이다. 그들을 돌보기엔 내 성정이 게으르고, 알레르기성 체질이라는 핑계거리마저 마련되어 있지 않은가. 평생 함께하지 못할 그들에게 애도의 장이라도 마련해보련다. 영화 `프라하의 봄`을 다시 본다. 십 년도 훨씬 넘은 영화인데 너무 길어서 몇 번이나 보다가 중간에 포기했었다. 원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현대사에 기반을 둔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면 영화는 그저 그런 스토리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원작과 연결하려는 그 어떤 목적도 없었다. 다만 `카레닌`의 존재에 오래토록 여운이 남는다.카레닌은 여주인공 테레사가 키우는 개 이름이다. 테레사의 사랑은 의심하는 사랑이고, 욕망하는 관계이며, 질척이는 무거움이다. 이 모든 원인 제공자는 바람둥이 남편 토마스다. 하지만 그 누군들 무거움의 껍질을 벗고 세파에 가볍게 내던지며 사는 그를 원망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 사랑의 본질은 실연에 있고, 치졸함에 있으며, 실패에 있다. 영원 회귀니 불변진리니 하는 건 부질없다. 이런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는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카레닌을 등장시켜 끝까지 독자를 심란하게 만든다.카레닌으로 대표되는 개의 사랑은 이해관계가 없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사랑 따윈 뭔지도 모른다. 괴롭히지도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고 기대조차 없다. 저울질도 탐색도 없으며 파괴와 집착과도 멀다. 거기 그대로 변함없이 있을 뿐이다. 가변하는 인간이 불변하는 개에게 해줄 수 있는 위대한 축복은 안락사이다. 믿음이 보장되지 않는 인간끼리는 쉽게 할 수 없는 최대의 선물인 카레닌의 안락사. 죽음으로써 시퍼렇게 살아있는 카레닌의 순정이 거대한 돛으로 걸려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31

립스틱 트라우마

립스틱을 선물 받았다. 보기엔 오렌지색인데 칠하고 나면 입술이 선홍색으로 바뀐다. 다양한 세상에 살다보니 화장품에도 요술이 적용되나 보다. 실은 립스틱을 포함한 화장품에 큰 관심이 없다. 기초화장품에다 꼭 필요한 색조화장품, 일 년에 몇 번 쓸까 말까한 향수 두어 종류가 가진 화장품의 전부이다. 립스틱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건 치장하는 걸 귀찮아해서이다. 그래도 다른 이유를 찾자면 어릴 때의 어떤 영향 때문이다. 그 시절 대개 그랬듯이 부모님은 알뜰한 살림꾼이셨다. 돈을 낭비하거나 재물을 허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가까운 친척 중에 소비를 미덕으로 아는 이가 있었다. 그 집 처마에 걸린 마늘은 말라 비틀어져 있었고, 제대로 말리지 않은 연탄은 부서진 채 마당에 뒹굴었다. 부모님은 말했다. `저렇게 살면 큰일 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런 소리를 들었으므로 나는 커서 살림을 못할까 걱정하는 아이가 되어갔다.어느 날 그 집 화장대에서 예닐곱 개 정도의 립스틱을 본적이 있다. 색깔별로 놓인 그 `구찌베니`를 보는 순간, 부모님께 세뇌당한 어린 뇌는 그 친척이 정상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나중에 커서도 구찌베니 따위를 많이 사는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알뜰한 것과 구찌베니 숫자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세상을 알아가면서 부모님처럼 알뜰하게 산다고 잘산 것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그렇게 실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연 중 알뜰 콤플렉스가 마음 깊이 자리 잡은 모양이다. 립스틱 한 통을 후벼 팔 때까지 써야 직성이 풀리는 건 그 영향 때문일 것이다. 못 마시는 술은 노력해도 늘지 않듯이, 립스틱 하나도 낭비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트라우마 때문이다.큰맘 먹고 갈색빛 감도는 매직 립스틱을 더 사야겠다. 아니 색깔별로 맞춤한 립스틱을 마구 갖춰도 좋겠다. 깊어가는 가을, 요술 같은 여자로 변신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김살로메(소설가)

2012-10-30

허점

오늘도 나는 칠칠치 못했다. 서울행 가족나들이를 해야 했다. 이주 전 일박이일 일정으로 남편이 잠자리를 예약한다고 했을 때 그러려니 했다. 그날이 문학기행과 겹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매사에 꼼꼼하지 못하고 덜렁대는 편이다. 도대체 두 가지 일을 생각하지 못한다. 문학기행과 서울행은 각기 다른 일정이니 날짜도 당연히 다르다고만 생각했다. 출발 하루 전에야 두 일정이 겹친다는 것을 알았다. 한심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라야 말이지. 둘 다 빠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문학기행 중간에 순천까지 남편이 데리러 오는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만 소화하는 기행이 즐거울 리 없었다. 눈은 송광사 단풍에 머물렀건만 마음은 자책의 방망이질로 따끔거렸다.무사히 서울에 도착했다. 기숙사에서 급히 나오느라 아들은 속옷과 양말을 챙기지 못했다. 모전자전이다. 야무지지 못하고, 질질 흘리고, 잘 갈무리하지 못한다. 땀이 많은 체질이라 속옷 갈아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시무룩하다. 이때를 대비했을까. 남편이 아이의 속옷과 양말을 내놓는다. 녀석의 얼굴이 환해진다. 면봉과 치실, 간식까지 꼼꼼히도 챙겨왔다.남편의 준비성 하나 만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니 단점이 없을 수 없다. 남편도 나만큼 약점이 있다. 소심하고, 잘 삐치는데다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면이 때론 이해가 안 되고 갑갑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 칠칠치 못한 점을 커버하는 한, 그 약점은 큰 게 아닌 게 돼버린다. 억울한 면도 없지 않지만 어쩌랴. 내 허점은 잦고 드러나지만 그의 약점은 뭉근한데다 숨어 있으니.부부는 서로 달라야 잘산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허점투성이 내 기질을 남편이 공유하고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싫다. 갑갑하더라도 나와 다른 약점을 가진 상대가 훨씬 낫다. 다른 사람끼리 보듬고 살라고 조물주는 남녀를 만든 건지도 모른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9

시청(視聽)과 견문(見聞)

울산 반구대 암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포항 칠포리 암각화를 본 뒤였기에 그 둘을 비교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늪, 들, 물, 잎 등 오랜만에 순도 높은 자연 풍광을 만났다. 암각화는 댐 건너 먼 풍경으로만 보였다. 답사 온 한 무리의 학생들이 앞 다퉈 망원경으로 호수 건너를 관찰한다. 고래, 사슴 등 그림이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쪽으로 나뉜다. 보인다고 소리치는 쪽은 소수지만 목소리가 크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는 쪽은 다수지만 목소리가 작다. 안 보이는 쪽의 소리가 작은 건, 꼭 봐야 하는 것을 남들은 봤다는데 자신은 못 봤으니 주눅이 들어서 그렇다.그들 틈에 끼어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수면에 직각으로 내리뻗은 절벽단층만 보일 뿐 암각화는 렌즈 어디에도 상이 맺히지 않는다. 세월에 풍화되어 그림이 흐릿해진 걸까. 아님 안경 없이 봐서 그런 걸까? 땀까지 흘려가며 망원렌즈와 씨름하고 있는데 현장지킴이 아저씨가 말을 건넨다. 뭘 봤다는 학생들은 착각한 거란다. 암각화는 얼마 전 태풍 때 수위가 높아져 물속에 갇혔단다. 갈수기에나 드러날 텐데 그나마 이끼나 먼지가 껴 제대로 된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단다.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견문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을 말한다. 시청과 견문은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 우리는 `시청`하면서 `견문`했다고 착각한다. 아무 것도 본 것이 없는데도 `시청`이라도 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 본 사람이 흘려 본 사람을 이기고, 흘려본 사람은 제대로 본 사람을 앞선다. 그런 부조리한 상황이 곳곳에서 연출된다. 제대로 보고 듣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시청에 머물 게 아니라 견문을 넓히는 연습이 무던히도 필요한 나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6

저녁밥상

열정을 다하는 주변인들을 보면 배울 게 참 많다. 그들은 시간을 아껴 쓰며, 약속을 잘 지키고, 사람을 귀히 여긴다. 여기까지만 해도 존경받을 만한데 체력까지 관리를 하는지 웬만해선 지치지 않는다. 수도 없이 많은 그들의 장점 가운데 가장 부러운 게 단단한 체력이다. 하기야 그들이라고 체력이 좋을까?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지만 성실한 열정 하나로 견뎌내고 있는 것이리라. 조금만 무리를 했다 싶으면 드러누워야 하는 저질 체력을 가진 내가 그들을 벤치마킹하려니 힘겹기만 하다.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면서도 집안일까지 척척해낸다. 몸이 하난데 어찌 저리할 수 있을까 싶다. 나로서는 흉내조차 내기 힘든데 그들은 몸 사리지 않고 일을 즐긴다. 욕심을 내 며칠 그들을 따라해 보지만 몸살과 비염만 도진다. 평소 운동을 즐기지 않다 보니 체력의 한계만 느낄 뿐이다.요 며칠 새 무척 바빴다. 냉장고는 텅 비었는데 밖에 나갈 일은 많다. 현명한 사람들 같으면 민첩하게 몸 놀려 남편 저녁밥상 정도는 차려놓고 나가겠지만 그것조차 여건이 허락지 않는다. 남편 끼니 하나 차리지 못하면서 바깥으로 돌아 얻는 게 뭘까 자괴감이 인다. 그렇다고 행동 패턴이 쉬 바뀔 리 없다. 급하게 즉석김밥 한 줄 사놓고 집을 나서기 일쑤다. 한 집안 가장의 밥상 치고는 너무 볼품없다. 손수 끓인 라면국물에다 식은 김밥을 적셔 마지못해 씹고 있을 남편.짠한 맘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다행히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좋은 향이 난다. 예의 성실한 열정의 향으로 오감을 자극하니 내게도 에너지 넘칠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향 쌌던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 묶은 새끼줄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했다. 열정과 좋은 향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장점을 배우고 있으니, 언젠가는 그들처럼 소박하고 정갈한 밥상 제대로 챙길 날도 오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0-25

이중자화상

인간만큼 단순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동물도 없다. 이 모순된 양상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화가가 에곤 실레이다. 표현주의 화가인 그는 뭉크나 클림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유명한 그림`이중 자화상`을 접할 때마다 인간 본능의 이중성을 잘 표현한 것 같아 절로 공감이 된다. 그의 그림 세계는 독특하다. 특히, 이중자화상은 인간이 맞닥뜨릴 수 있는 모순된 상황을 잘 포착하고 있어, 인생 전반에 대한 그의 혜안이 돋보인다. 그림 속 실레는 두 개의 얼굴로 관객을 내려다본다. 각각 경계와 호기심을 상징하는 두 얼굴이 아래위로 뺨을 맞대고 있다.연필에다 약간의 수채화를 덧칠한 그의 이중자화상은 섬뜩하리만큼 양면성인 인간 정서를 대변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힌다. 위쪽 얼굴그림은 호기심과 연민이 서린 눈빛이고, 아래쪽 것은 분노와 욕구불만이 담긴 눈빛이다. 마치 한발 물러서는 경계와, 두 발 다가서는 호기심을 가진 게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부지불식간에 분열된 화가의 자아는 그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관객들을 우롱하는 듯하다. 두 개의 얼굴 그림은 약간의 이완과 아주 많은 긴장이 필요한 곳이 이 세상이라고 일깨워준다. 경계 없이 이완된 눈빛과 위태한 적의의 눈빛이 공존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해준다.아울러 모든 관계의 갈등은 서운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 눈빛은 가르쳐주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해줬는데 상대는 왜 이렇게 밖에 안 해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이는 왜 저렇게 생각할까.` 이런 부질없는 감정 때문에 부부 사이에 금이 가고 친구 사이가 싸늘해진다고 말하는 것 같다.그림 한 점에서 인간 정서에 대한 기본 내공을 기른다.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이중자화상을 제대로 깨치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운 일상을 기대할 수 있다고 그림은 말해준다. 세상을 향한 경계와 호기심이 조화된 저마다의 이중자화상을 잘 갈무리할 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4

그다음 날

세상은 넓고 보는 눈은 다양하다. 따라서 섣불리 경계를 치거나 단정을 지어선 안된다.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순간 잘되던 일도 꼬여버린다. 나와 다른 생각일수록 더 옳다는 자세로 세상일을 바라보면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넓은 눈을 가지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일상사는 늘 부딪힘의 연속이다. 정치마당도 마찬가지다. 대선을 앞둔 여러 소식을 보자면 한마디로 저마다 옳다. 후보자도 유권자도 각각 저들만 바른 목소리이고, 나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일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제대로 된 정책은 나오질 않고 곡절 많은 정쟁만 넘쳐난다. 모두 정책에 대한 서늘한 칼날보다 정쟁에 대한 영양가 없는 입씨름만 보탠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부추기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다. 좀 더 창의적이고 느슨한 기운들이 넘쳐났으면 좋겠다.에드바르트 뭉크의`그다음 날`이란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이 20세기 초 오슬로 국립미술관에 걸렸을 때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팔은 늘어뜨린 채 소파에 널브러진 술 취한 여인의 그림이 이해받기란 힘들었다. 술 마신 다음날의 번민어린 실체를 뭉크는 말하고 싶었겠지만 여론은 예술가의 진정성 따위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잣대가 가리키는 현상만을 볼 뿐이었다.취기에 젖은 이 못된 여자가 쉴 만한 장소는 국립미술관이 아니라는 냉소적인 기사에 여론이 열광할 때, 멋진 반전을 이끌어낸 미술관장의 한 마디가 가슴에 꽂힌다. `그림 속 여인이 깨어나면 물어보겠다. 이곳이 쉴 만한 곳이냐고. 그러나 지금은 자게 내버려 둬야 한다. 그녀가 있는 것이 미술관의 영예가 될지 치욕이 될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라고.옌스 티스 미술관장 같은 통 크고 열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식견 좁고 지혜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이 쉽게 눈 틔울 수 있었으면. 보는 만큼 알게 된다. `그다음 날`을 발견해내는 아량 넓은 견자의 시선이 부러운 날들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23

말을 알아듣는 꽃

춘향전은 초등학생들에게도 필독서로 권장된다. 우리 고전이니 어릴 때부터 당연히 읽혀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도 별 고민 없이 아이들 논술 교재로 활용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질문에 당황하기 일쑤다. 오늘도 호기심과 장난끼가 반반인 아이가 연거푸 질문을 한다. 변 사또가 춘향이더러 수청을 들라고 하는데 수청이 뭐예요? 게이샤가 나아요, 기생이 나아요? 수청이 뭐냐고 묻는 건 진심어린 질문이고, 게이샤와 기생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장난을 흉내 낸 것이다. 그런데 두 질문 다 기생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영향이라고 딱히 말할 순 없지만, 어릴 때부터 기생에 대한 단편적 이미지를 우리가 학습해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기생은 수청이나 드는 존재는 아니었다. 수청이란 말은 본디 관리가 숙소에서 잠을 잘 때 마루 즉, 청에서 심부름을 하며 수발을 들어준다는 뜻이다. 물론 춘향전에서의 의미는 수발만 드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생의 주된 임무는 노래와 춤을 넘어 시와 서예 등으로 뭇 잔치를 흥겹게 하는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만능 엔터테이너 개념이었다. 예술인이자 재능가인 그들은 해어화(解語花)로 불렸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인데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그렇게 일컬었다. 미인을 뜻하는 이 말은 나중에 기생까지 아우르는 말이 됐다.말을 알아들을 만큼 총명한 예능인이었던 기생의 이미지가 격하된 것은 일제 강점기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게이샤 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이라도 있었을까. 일본인들은 우리의 기생 문화를 폄하하고 왜곡했다. 멋들어진 예능인의 위상에서 술이나 따르는 하급 작부 이미지로 변질시켰다. 수청이 뭔지, 게이샤와 기생을 비교하기에 앞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기생 문화에 대한 진실부터 접근해야겠다. 말을 알아듣는 종합 예능인이 기생 그들이었다고. /김살로메(소설가)

2012-10-22

키치

벽화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도시를 여행하더라도 그런 마을 하나쯤은 쉽게 만난다. 지저분했던 도시 뒷골목은 깨끗이 붓질된 채 벽화마을이란 테마 관광지로 거듭난다. 명화가 모사되거나 풍속화가 재현되거나 과장된 풀꽃이 내려앉은 긴 담벼락. 햇발 내리쬔 담벼락이 다사로울수록 예견된 담장 안 진실이 궁금해진다. 남들 다 아름답고 정돈되었다고 칭송하는 그 풍광이 내게는 키치(kitsch)스러움의 한 예로 떠오른다. 담박하지 못하고 삐딱한 시선이 송곳날이 되어 벽화를 찌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도중 누군가 물었다. `키치`가 뭐예요? 말하자면 벽화마을에 그려진 화사한 그림이나 SNS를 장식하는 음식점 순례 사진 같은 것 아닐까요. 한마디로 보이거나 보이기 위한 것이지요. 이상하리만치 즉각적인 대답이 내 입에서 나온다.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 뒷골목 담장에 감쪽같이 고흐의 해바라기가 모사되어 있다. 그 옆으론 실제보다 더 선명한 장미넝쿨과 금세 마을을 버리고 날아갈 듯한 천사의 날개까지 걸려있다. 하지만 골목의 실체는 벽화가 보여주는 과장된 낭만을 담보하지 못한다.저 먼 골목 끝, 한쪽다리 절단된 중년 아줌마의 목발 짚은 뒷모습과 입구 가까운 첫 집, 빼꼼 열린 녹슨 대문 사이로 폐지더미를 묶는 할머니의 손등이 이 마을 벽화의 진실이라고 말해준다. 밀란 쿤데라 식이라면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다. 보이는 벽화야말로 거짓 즉 키치이고, 뒤에 숨은 목발 짚은 뒷모습과 폐지더미 위 손등이야말로 실체 즉 진실이다.그림 뒤에 숨은 진실이 어둡거나 감추고 싶을수록 그 벽화는 총천연색을 자랑한다. 레스토랑 화려한 음식이 소셜네트워크 사진 속에서 빛난다는 건 우리들 마음이 공허하다는 증거이다. 저속하고 가짜인 키치가 아프고 공허한 실체를 위무하는 아이러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0-19

불온한 독서

책이 없었다면 여성들의 삶이 어땠을까? 인간사 이래로 여성 삶의 진일보를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독서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 가정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책 한 권이 있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한 때 여성의 독서가 지극히 위태로운 것으로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음을 고찰한다. 근대 이전의 유럽 여성들은 세상에 대한 대범한 호기심을 갖는 것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고급한 것은 남성의 차지였으니 독서 또한 남성 전용이었다. 따라서 책 읽는 여자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불온한 혐의가 짙었다. 이 불온한 자유주의자들은 가슴 속에 화약고 한 짐씩을 안고 살았다. 남성의 거울로 비추어볼 때 그 시대 여성의 독서는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은 남성 고유의 영역인데, 더 많은 것을 여성과 공유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소수 엘리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팽배했다. 종교 서적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천성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여성에게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와 드넓은 우주 질서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을까.억누를수록 여성들은 유쾌한 고립행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독서야말로 세상과 소통하는 멋진 통풍구라는 것을 안 이상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숨어서 책 읽는 여자들이야 말로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니었을까.이제 여성에게 독서는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책 때문에 불온해진 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진다면 그 보다 나은 독서의 진가가 어디 있겠는가. 덜 불온한 여성일수록 더 상처받는다. 상처 많은 여성들이 한 권의 책에서 힘을 얻는다면 이 또한 독서의 효용이 아니겠는가. 과감하고 불온한 독서일수록 그 파장은 크고 깊다. /김살로메(소설가)

2012-10-18

입시 단상

입시철이 다가왔다. 대학 입학 전형을 들여다보려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수시와 정시로 원서 방식도 갈라지는데다, 수시전형은 입학사정관제, 국제 전형, 과학 전형, 학교장 추천 전형, 일반 전형 등 다양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이걸 다 이해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을까 싶다. 대학 한 번 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만 든다. 우리 세대 입시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때는 학력고사 점수에다 내신 성적만이 평가 기준이었다. 기준 배치표를 보고 자신이 받은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 및 학과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입시 절차 때문에 골치 아플 이유는 없었다. 융통성은 없었지만 단순 명쾌한 그때 입시 방식에 머물러 있는 수험생 학부모로서 요즘 대입 전형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한계가 따른다.아들 녀석이 전하는 입시 관련 의견은 반은 이해하고 반은 알아듣지 못하겠다. 들을수록 헛갈리기만 한다. 결국 `니가 알아서 하라`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말로써 완전 자율권을 부여하고야 만다. 고급 정보를 찾아나서는 열혈 엄마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그 대열과는 한참 먼 행보를 하자니 걱정과 후련함이 동시에 인다.학생 스스로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주변을 살펴보면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을 정도로 자기소개서에 시달리는 엄마도 있다. 자정 넘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입시생은 그것을 쓸 시간도, 의지도 없다. 내신 성적을 따져가며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것도 학부모 몫이다. 비싼 돈 들여 전문가에게 자기소개서를 부탁하는 학부모도 있다.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학생과 학부모 나아가 학교까지 힘들게 하는 이런 입시 방식은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자녀와 학부모가 동시에 수험생이 되는 것, 이것이 대학교나 교육부가 원하는 입시방식이 아닌지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7

청라언덕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가곡 `동무생각`은 전 국민의 애창곡이라 할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의 이 가곡은 언젠가부터 `청라언덕`이라는 지명 덕도 톡톡히 보고 있다. 청라언덕을 지척에 둔 채, 수없이 `동무생각`을 불렀어도 그것이 대구 동산동의 특정 지역을 지칭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그때만 해도 본격적인 근대 대구 문화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전이어서 청라언덕이 조명받기에는 일렀는지도 모른다.포항시립도서관에서 마련한 `근대 대구 골목 투어` 문학기행에 합류하면서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청라언덕을 둘러볼 수 있었다.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성장한 중심지이다. 지난 100여 년간 지역 문화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호흡 공간이다. 청라(靑蘿)란 `푸른 담쟁이`를 말한다. 여전히 담쟁이 넝쿨은 선교사가 살던 붉은 벽돌집 주위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대구가 근거지였던 박태준 작곡가의 학창 시절 연애사를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로 짓고, 박태준 본인이 곡을 만든 것이 `동무생각`이다. 노랫말 속 청라언덕에 피는 백합은 근처 신명여학교 학생이었다고 해설사가 전해준다. 한데 최근 이은상 시인의 고향인 마산에서도 청라 언덕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청라(靑羅) 즉, `푸른 비단`이라는 뜻의 이 언덕은 마산만이 보이는 노비산을 지칭한다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자못 흥미롭다.의미 부여만 제대로 한다면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은들, 마산에 있은들 어떨까 싶다.두 예술가의 정신만 오롯이 되살릴 수 있다면 청라언덕은 둘이어도 큰 무리는 아니다. 지명의 소유권 보다 청라언덕이라는 고유한 문화 이미지로서의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하다. 문화 상품으로 재탄생되는 청라언덕을 두 예술가도 반기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0-16

바람만이 아는 대답

올해 노벨 문학상은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에게 돌아갔다. `홍까오량 가족`이 그의 대표작인데, 소설 앞부분은 영화 `붉은 수수밭`의 소재가 되었다. 동양권에서 수상자가 나오니 친근감과 동시에 질투가 인다. 수상자 못지않게 후보군에 자주 오르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간다. 고은, 무라카미 하루키, 밥 딜런 등인데, 그 중 밥 딜런에게 귀와 눈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수로 알려진 사람이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니 생뚱맞으면서도 신선하다. 밥 딜런은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장식 어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6,70년대를 선도했던 저항 가수답게 메시지가 있는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사회참여 및 반전에 관한 노래를 주로 불렀으니 노랫말이 자연스레 무겁고 의미심장하게 흘렀다. 그렇게 지은 여러 노랫말이 노벨상을 타도 좋을 만큼 문학성이 있으니 해마다 후보에 오를 것이다. 밥 딜런의 가사에 관한 평론이 발표될 정도이니 괜한 제스처는 아닌 모양이다.몇몇 가사를 검색해봤다. 솔직히 문학성이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비약과 은유가 심한데다, 정돈되지 않고 장황한 느낌이다. 영어 원문을 봐도, 번역된 우리말 가사를 봐도 그렇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외국인이 우리말 원문과 자국어로 번역된 것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문화와 언어가 다른 상태에서 `시적인 가사`를 제대로 짚어내기란 어렵다.한데 그의 대표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들으면 왜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베트남 전쟁 참상 등을 겪은 세대답게 반전 메시지가 주는 노랫말이 시적이고 서늘하다.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김살로메(소설가)

2012-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