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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키치

벽화 마을이 늘어나고 있다. 어떤 도시를 여행하더라도 그런 마을 하나쯤은 쉽게 만난다. 지저분했던 도시 뒷골목은 깨끗이 붓질된 채 벽화마을이란 테마 관광지로 거듭난다. 명화가 모사되거나 풍속화가 재현되거나 과장된 풀꽃이 내려앉은 긴 담벼락. 햇발 내리쬔 담벼락이 다사로울수록 예견된 담장 안 진실이 궁금해진다. 남들 다 아름답고 정돈되었다고 칭송하는 그 풍광이 내게는 키치(kitsch)스러움의 한 예로 떠오른다. 담박하지 못하고 삐딱한 시선이 송곳날이 되어 벽화를 찌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이야기하는 도중 누군가 물었다. `키치`가 뭐예요? 말하자면 벽화마을에 그려진 화사한 그림이나 SNS를 장식하는 음식점 순례 사진 같은 것 아닐까요. 한마디로 보이거나 보이기 위한 것이지요. 이상하리만치 즉각적인 대답이 내 입에서 나온다.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 뒷골목 담장에 감쪽같이 고흐의 해바라기가 모사되어 있다. 그 옆으론 실제보다 더 선명한 장미넝쿨과 금세 마을을 버리고 날아갈 듯한 천사의 날개까지 걸려있다. 하지만 골목의 실체는 벽화가 보여주는 과장된 낭만을 담보하지 못한다.저 먼 골목 끝, 한쪽다리 절단된 중년 아줌마의 목발 짚은 뒷모습과 입구 가까운 첫 집, 빼꼼 열린 녹슨 대문 사이로 폐지더미를 묶는 할머니의 손등이 이 마을 벽화의 진실이라고 말해준다. 밀란 쿤데라 식이라면 `앞은 파악할 수 있는 거짓이고, 뒤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이다. 보이는 벽화야말로 거짓 즉 키치이고, 뒤에 숨은 목발 짚은 뒷모습과 폐지더미 위 손등이야말로 실체 즉 진실이다.그림 뒤에 숨은 진실이 어둡거나 감추고 싶을수록 그 벽화는 총천연색을 자랑한다. 레스토랑 화려한 음식이 소셜네트워크 사진 속에서 빛난다는 건 우리들 마음이 공허하다는 증거이다. 저속하고 가짜인 키치가 아프고 공허한 실체를 위무하는 아이러니!/김살로메(소설가)

2012-10-19

불온한 독서

책이 없었다면 여성들의 삶이 어땠을까? 인간사 이래로 여성 삶의 진일보를 담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독서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런 가정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책 한 권이 있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작가는 한 때 여성의 독서가 지극히 위태로운 것으로 취급받던 시대가 있었음을 고찰한다. 근대 이전의 유럽 여성들은 세상에 대한 대범한 호기심을 갖는 것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고급한 것은 남성의 차지였으니 독서 또한 남성 전용이었다. 따라서 책 읽는 여자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불온한 혐의가 짙었다. 이 불온한 자유주의자들은 가슴 속에 화약고 한 짐씩을 안고 살았다. 남성의 거울로 비추어볼 때 그 시대 여성의 독서는 백해무익한 것이었다. 세상을 지배하고 호령하는 것은 남성 고유의 영역인데, 더 많은 것을 여성과 공유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었다.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소수 엘리트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불과 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은 팽배했다. 종교 서적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독서를 한다는 것은 천성을 거스르는 행위였다. 여성에게도 새로운 세상에 대한 욕구와 드넓은 우주 질서에 대한 갈증이 있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았을까.억누를수록 여성들은 유쾌한 고립행위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남성이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독서야말로 세상과 소통하는 멋진 통풍구라는 것을 안 이상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숨어서 책 읽는 여자들이야 말로 페미니스트의 원조가 아니었을까.이제 여성에게 독서는 더 이상 위험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책 때문에 불온해진 만큼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커진다면 그 보다 나은 독서의 진가가 어디 있겠는가. 덜 불온한 여성일수록 더 상처받는다. 상처 많은 여성들이 한 권의 책에서 힘을 얻는다면 이 또한 독서의 효용이 아니겠는가. 과감하고 불온한 독서일수록 그 파장은 크고 깊다. /김살로메(소설가)

2012-10-18

입시 단상

입시철이 다가왔다. 대학 입학 전형을 들여다보려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수시와 정시로 원서 방식도 갈라지는데다, 수시전형은 입학사정관제, 국제 전형, 과학 전형, 학교장 추천 전형, 일반 전형 등 다양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이걸 다 이해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있을까 싶다. 대학 한 번 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만 든다. 우리 세대 입시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때는 학력고사 점수에다 내신 성적만이 평가 기준이었다. 기준 배치표를 보고 자신이 받은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 및 학과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입시 절차 때문에 골치 아플 이유는 없었다. 융통성은 없었지만 단순 명쾌한 그때 입시 방식에 머물러 있는 수험생 학부모로서 요즘 대입 전형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한계가 따른다.아들 녀석이 전하는 입시 관련 의견은 반은 이해하고 반은 알아듣지 못하겠다. 들을수록 헛갈리기만 한다. 결국 `니가 알아서 하라`는 다소 무책임해 보이는 말로써 완전 자율권을 부여하고야 만다. 고급 정보를 찾아나서는 열혈 엄마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그 대열과는 한참 먼 행보를 하자니 걱정과 후련함이 동시에 인다.학생 스스로 대학과 학과를 결정하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주변을 살펴보면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을 정도로 자기소개서에 시달리는 엄마도 있다. 자정 넘어 학교에서 돌아오는 입시생은 그것을 쓸 시간도, 의지도 없다. 내신 성적을 따져가며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것도 학부모 몫이다. 비싼 돈 들여 전문가에게 자기소개서를 부탁하는 학부모도 있다.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학생과 학부모 나아가 학교까지 힘들게 하는 이런 입시 방식은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자녀와 학부모가 동시에 수험생이 되는 것, 이것이 대학교나 교육부가 원하는 입시방식이 아닌지 모르겠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7

청라언덕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 가곡 `동무생각`은 전 국민의 애창곡이라 할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의 이 가곡은 언젠가부터 `청라언덕`이라는 지명 덕도 톡톡히 보고 있다. 청라언덕을 지척에 둔 채, 수없이 `동무생각`을 불렀어도 그것이 대구 동산동의 특정 지역을 지칭한다는 것은 예전에는 알지 못했다.그때만 해도 본격적인 근대 대구 문화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전이어서 청라언덕이 조명받기에는 일렀는지도 모른다.포항시립도서관에서 마련한 `근대 대구 골목 투어` 문학기행에 합류하면서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청라언덕을 둘러볼 수 있었다.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성장한 중심지이다. 지난 100여 년간 지역 문화 변천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호흡 공간이다. 청라(靑蘿)란 `푸른 담쟁이`를 말한다. 여전히 담쟁이 넝쿨은 선교사가 살던 붉은 벽돌집 주위를 휘감아 돌고 있었다.대구가 근거지였던 박태준 작곡가의 학창 시절 연애사를 이은상 시인이 노랫말로 짓고, 박태준 본인이 곡을 만든 것이 `동무생각`이다. 노랫말 속 청라언덕에 피는 백합은 근처 신명여학교 학생이었다고 해설사가 전해준다. 한데 최근 이은상 시인의 고향인 마산에서도 청라 언덕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청라(靑羅) 즉, `푸른 비단`이라는 뜻의 이 언덕은 마산만이 보이는 노비산을 지칭한다는데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자못 흥미롭다.의미 부여만 제대로 한다면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은들, 마산에 있은들 어떨까 싶다.두 예술가의 정신만 오롯이 되살릴 수 있다면 청라언덕은 둘이어도 큰 무리는 아니다. 지명의 소유권 보다 청라언덕이라는 고유한 문화 이미지로서의 스토리텔링이 더 중요하다. 문화 상품으로 재탄생되는 청라언덕을 두 예술가도 반기지 않을까./김살로메(소설가)

2012-10-16

바람만이 아는 대답

올해 노벨 문학상은 중국 소설가 모옌(莫言)에게 돌아갔다. `홍까오량 가족`이 그의 대표작인데, 소설 앞부분은 영화 `붉은 수수밭`의 소재가 되었다. 동양권에서 수상자가 나오니 친근감과 동시에 질투가 인다. 수상자 못지않게 후보군에 자주 오르는 작가들에게 관심이 간다. 고은, 무라카미 하루키, 밥 딜런 등인데, 그 중 밥 딜런에게 귀와 눈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가수로 알려진 사람이 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니 생뚱맞으면서도 신선하다. 밥 딜런은 노래하는 시인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그런 장식 어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6,70년대를 선도했던 저항 가수답게 메시지가 있는 노래를 부를 뿐이었다. 사회참여 및 반전에 관한 노래를 주로 불렀으니 노랫말이 자연스레 무겁고 의미심장하게 흘렀다. 그렇게 지은 여러 노랫말이 노벨상을 타도 좋을 만큼 문학성이 있으니 해마다 후보에 오를 것이다. 밥 딜런의 가사에 관한 평론이 발표될 정도이니 괜한 제스처는 아닌 모양이다.몇몇 가사를 검색해봤다. 솔직히 문학성이 있는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비약과 은유가 심한데다, 정돈되지 않고 장황한 느낌이다. 영어 원문을 봐도, 번역된 우리말 가사를 봐도 그렇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외국인이 우리말 원문과 자국어로 번역된 것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문화와 언어가 다른 상태에서 `시적인 가사`를 제대로 짚어내기란 어렵다.한데 그의 대표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을 들으면 왜 그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된다. 베트남 전쟁 참상 등을 겪은 세대답게 반전 메시지가 주는 노랫말이 시적이고 서늘하다.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타인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너무 많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만이 알고 있지.`김살로메(소설가)

2012-10-15

긍정의 에너지

다양한 게 사람 캐릭터이다. 잇속만 챙기는 사람, 자기 것을 한없이 퍼주는 사람, 자신을 포장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사람, 소견이 좁은 사람, 아량이 넓은 사람, 착한척하지만 의뭉스러운 사람, 냉정하게 보이지만 속 깊은 사람, 냉소적이고 경계가 있는 사람, 한없이 밝아 경계가 없는 사람 등 저마다의 주어진 개성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한살이를 꾸려나간다. 사람이란 동물은 오묘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에 위에 열거한 여러 캐릭터 중 어느 한 쪽만 가진 사람은 없다. 신이 인간을 이중인격자로 설계해놓고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대체로 우리는 양면성을 지닌다. 하지만 유독 긍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 있다. 잇속만 챙기는 치는 아니지만 냉소적이고, 배려는 잘 하지만 소견이 좁고, 나사 몇 개씩 풀린 허점투성이 생활 패턴이지만 경계 또한 분명한 나 같은 사람이 보기에 그들은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만 하다.인격이란 게 어느 정도는 훈련과 수련을 통해 연마할 수 있다. 하지만 보편성을 넘어선 천사표를 가슴에 단 사람들은 훈련과 수련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그렇게 태어난 것 같다. 궂은일, 힘든 일을 자처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잃지 않는다. 안 해도 되는 일까지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놓고 생색조차 없다. 자연히 모임의 실질적 리더가 되는데, 사람 마음을 얻는 것보다 귀한 선물은 없기에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하루에도 열두 번 변덕이 끓었다 내렸다 하는 나 같은 이에게 그들은 좋은 본보기가 된다. 가만히 보면 그들은 제 맘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한다. 작은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고, 큰 짐이 밀려와도 의연하기만 하다. 맘 속 주인이 원하는 대로 웃고, 베풀고, 배려한다. 괜히 그들에게 좋은 기를 얻기 위해 바람결을 빌려 옷소매 한 번 스쳐보는 날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2

풍경이 가르친다

책 속에 길이 있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가끔은 책을 덮고 풍경 속으로 들어갈 때 그 길이 보인다.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 글공부를 한다. 잘 익은 밤처럼 토실토실한 남의 글을 읽기도 하고, 덜 말린 대추 같은 누글누글한 제 글을 다듬어도 본다. 남의 좋은 글을 읽을 땐 감탄하고 부러워할 입과 맘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의 글을 숙제로 내놓아야 할 날짜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한다. 남보란 듯 합당한 이유가 생겨 떳떳이 결석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글 좀 잘 써보고자 모였는데 글이 제 발목을 잡아 버린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이 있을까? 결실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 왔는데도 우리들의 글쓰기는 지리멸렬하기만 하다. 수고 없이 좋은 글이 나올 리 없다. 그럴수록 책상 앞에 앉으면 압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즐거워야 할 글쓰기가 괴로움이 된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쓰려고 용쓴다고 되는 게 아니다. 글이 되지 않을 때는 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다.활자 빽빽한 종이 대신 아름드리 소나무 둘러치고, 늦은 민들레가 피는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이름 붙여 야외수업. 오늘 만큼은 숯불 삼겹살과 소주 한 잔도 풍경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 밋밋한 평화보다야 울퉁불퉁한 들끓음이 글 소재로는 낫지 않던가. 연필을 버려야 할 적당한 타이밍이었을까. 출석률도 좋은데다 여유가 넘친다. 유머가 길을 트니 배려가 뒤따른다.책 속에 길이 있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다. 때론 책을 버리고 풍경 속에 흠뻑 젖어야 길이 보인다. 푸성귀 뜯고 씻던 시린 손, 쉴 자리 마련하려 굽히던 연한 무릎, 연기 마셔가며 모닥불 피우던 잔기침 소리, 바람막이로 서서 따뜻한 물 끓여내던 환한 미소, 이 모든 것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만들고 내고 있었다. 글이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풍경 속에 글이 있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1

마음이 아플 때

몸 아픈 것과 마음 아픈 건 많이 다르다.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몸 아픈 건 물리적 처방과 시간이 주어지면 어느 정도 해결된다. 하지만 마음 아픈 건 심리적 처방과 시간이 주어져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몸 아픈 건 온전히 나만의 문제지만, 마음 아픈 건 몸 아픈 것과 달리 사람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연예계 절친 두 명이 불화설에 휩싸였다. 단순한 연예계 가십으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그들 일련의 행보가 자신들 의도와는 상관없이 공인의 위상으로 넘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한 명은 `강남 스타일` 노래 한 곡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콘서트로 번 돈 대부분을 세상 약자를 위해 내놓는 기부 천사로 활동 중이다.둘 사이가 불편하게 된 건 개인적인 문제겠지만, 한 사람이 너무 잘나가면 남아있는 다른 한 사람은 소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 꿈에도 그려보지 않았던 빌보드 차트 일위를 넘볼 때 다른 한 사람은 뉴욕 타임스퀘어 거리에`기억하시나요`라는 위안부 관련 광고를 올렸다. `강남 스타일`이 언론에 도배될 때 정작 `기억하시나요` 에 관한 보도는 단신으로 처리됐다.남보라고 선행하진 않겠지만 남들이 알아줄 때 선행도 신이 나는 법이다. 당사자 간 갈등이 있는 상태에서 선행마저 관심 밖으로 몰리니 마음을 다칠 수밖에 없다. 다친 맘을 보듬어줄 생각은 없으면서 언론은 자극적인 보도만 쏟아낸다. 당사자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질 않는가.인간은 갈등하는 동물이다. 당사자 어느 한 쪽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인간관계에는 항시 존재한다.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한 위안과 고통은 동전의 양면처럼 따라온다. 어느 누구도 잘못하진 않았지만 약자가 느끼는 고통이 더 크니 그게 문제이다. 이래저래 인간관계는 힘들기만 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10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한글날을 다시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움직임이 보인다. 무엇보다 반갑다. 국회 문방위 소속 의원들이 법률안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는데, 내년부터 한글날이 복원돼 법정 공휴일이 될 수 있을지 기대가 크다. 한글날은 휴일이 너무 많아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기업들의 권유로 1991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설움을 당했다. 경제 논리에 의해 몇몇 법정 공휴일이 추억 속으로 사라질 때 한글날만은 살아남기를 바랐다. 청춘시절 한때 한글을 아끼고 사랑하는 모임을 해온 이유도 있었지만 한글날 같은 의미심장한 날이 경제 논리 때문에 뒷전으로 밀리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한글은 만든 날, 만든 이, 만든 의도 등이 문헌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그 중 우리는 창제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했다는 세종대왕의 말은 진실이다. 물론 거기에 정치적 의도도 어느 정도 깔려 있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통치권을 확보하고 싶은데, 기득권 언어인 한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반면, 기득권층은 자신들이 누릴 호사가 일반 민중에게 조금이라도 옮아가는 것은 꿈에도 원치 않았다.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신하들이 훈민정음 반포를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피지배층과 효율적인 소통을 원했던 왕권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신권의 견제 사이에서 태어난 부산물이 훈민정음이었다. 일반 민중과의 소통을 간절히 원한 세종대왕의 전략적 문자 혁명은 정작 당시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후세대인 우리가 오롯이 그 은덕을 누리는 건 아이러니이자 행운이다.한글날이 다시 공휴일이 되었으면. 그리하여 그날 하루 만이라도 훈민정음 창제의 역사적 의의를 살피고, 말글 하나 된 민족으로 살아가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되새기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 없는 백성은 생각하기조차 싫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9

느리고 깊게 읽기

속독(또는 다독)이냐 정독이냐에 대한 답은 없다. 취향의 문제인데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습득해야 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에 관심이 많으면 자연히 속독 쪽으로 치중하게 된다. 반면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면서 문맥 하나하나에서도 소우주를 발견할 만큼 의미를 부여하는 치라면 정독이 어울린다. 속독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독이 되는 사람들은 많다. 그건 이상할 것도 부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다독자이면서 정독하는 사람들은 드문데,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책 읽기의 고수들이다. 책에 관한 온갖 정보와 리뷰를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 서점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넘쳐난다. 밥벌이로서 직장이 있을 터인데, 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니 저들이 사람일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많이 읽으면서 깊이까지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되는 나 같은 이는 차선책으로 적게 읽어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많이 읽으면서 얕게 읽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나. 고수가 못될 바에야, 한 달에 삼십 권 읽는 것보다 세 권을 제대로 읽는 게 더 나은 독서법일 테니까.제대로 읽는다는 명분하에 내게 눈도장 찍힌 책들은 대개 지저분해져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에 매료된 상태에서는 밑줄 긋지 않을 수 없고, 접고 싶은 부분 또한 시시각각 나타나며, 옮겨 적고 싶은 구절엔 별표들이 넘쳐난다. 책이 더러워진 만큼 애정의 강도도 높아진 것이다. 한 번 읽고 책장 안에 모셔진 것보다 느리게 보듬어 닳은 것이 제대로 사랑받은 것들이다.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게 읽더라도 깊게 다가와 읽는이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함, 그것이 제대로 된 읽기이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김살로메(소설가)

2012-10-08

식중독

이번 명절에는 소위 역귀성이라는 걸 했다. 새벽에 출발해서 그런지 정체 구간 없이 수월하게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올 때는 사정이 달랐다. 오후 한 시 쯤에 나섰는데 열 시간 꼬박 도로에만 갇혀 있었다. 운전하는 남편에 대한 배려도 없이, 원 없이 자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지만 시간이 남기만 한 귀갓길이었다. 귀성이든, 역귀성이든 이제 명절 교통 체증은 당연한 것이 되어가나 보다. 너무 늦은 귀갓길이라 각각 당신들 댁에 머물고 계신 어머님과 친정 엄마께 들른다는 계획은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날 두 분을 뵈러 다시 대구로 출발했다. 느끼한 명절 음식에 길들여진 입맛을 되살리는 데는 회가 제격이다 싶어 포장 주문해 갔다. 어른들이 좋아하기도 하지만, 따로 요리할 필요도 없는 편리한(?) 효도법이기도 했다.느끼하던 입안이 개운해졌다고 좋아한 것도 잠시, 모두 난리가 났다. 구토, 설사, 오한, 근육통, 고열, 두통 등이 차례로 이어졌다. 회를 먹은 십여 명 대부분이 두어 시간 만에 이런 증상에 시달렸다.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지사제와 항생제를 처방받거나, 밤새 움켜쥔 배를 안고 온 방안을 누비거나 했다.무엇보다 두 어른과 친구분들께 너무 미안하고 맘이 불편했다. 항생제를 덜 쓴 횟감이 오면 그럴 수 있다면서 횟집에서도 사과를 해왔다. 그쪽에서도 의도적으로 폐 끼치자고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시 그 횟집을 찾진 않겠지만 왜 그런 생선을 썼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이틀 꼬박 앓으면서 생각한다. 선의의 행동에도 오류가 따를 수 있다고. 그 오류는 우연에 의해 생기지만 그 파장은 의도하지 않게 커질 수도 있다고. 세상일은 절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저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우발적 상황에 따라 우리 일상은 휘어지고 꼬일 수 있다. 닥치면 당해야만 하는 치명적 우연이 우리 삶을 관장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 조심만으로 안 되는 게 세상일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5

공짜는 없다

미국 격언에`There is no free lunch`라는 말이 있다.`프리 런치`란 서부 개척시대에 술집에서 내놓던 점심을 말한다. 일견 공짜로 보이지만 실은 비싼 술값 안에 끼니 값까지 포함되어 있다. 모 경제학 책에도 이런 예화가 나온다. 경제에 대해 알고 싶은 왕이 학자들에게 책을 쓰라고 지시했다. 수십 권의 완성된 책을 보자 질려버린 왕은 한 권으로 줄이라고 했다. 그것도 길었다. 단 한 줄로 줄이라고 하자 배고팠던 학자들의 요약문은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것이었다나.미끼라는 걸 알면서도 거절을 못하거나,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짜에 혹할 때가 있다. 유명 대학 음료 사업부라며 콜 센터 직원이 몇 차례나 전화를 걸어온다. 내가 속한 모임에 판촉 행사 차 직원이 잠깐 들르겠단다. 십여 분 시간만 내주면 되고 부담 느낄 필요가 없는데다 점심 도시락까지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짜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마라고 약속을 해버렸다.일식 도시락 앞에서 판촉 직원이 멘트를 한다. 그 어떤 강매도 강압도 없었다. 나름 정중했다. 난공불락인 아줌마 고객들을 상대로, 한 가계의 책임자이자 직장인인 그가 최선을 다한다. 맘이 짠하다. 눈치껏 주변을 살피니 다른 사람들 맘도 같아 보였다. 그렇다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 블루베리 음료를 무턱대고 사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어릴 적 제 아비를, 지금의 제 남편을 보는 것 같은 가장의 무거운 어깨를 목도한 우리들은 도시락에다 코를 박은 채 별 말이 없다. 이런 먹먹한 분위기였으면 차라리 만날 약속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이었다. 반도 비우지 못한 각자의 도시락을 밀어낼 때, 단내 나는 판촉남, 아니 한 집안 가장의 말끝이 흐려지고 손끝 또한 떨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결코 공짜 점심은 없었다. 여태껏 먹은 밥 중 가장 값비싼 것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 한 끼의 점심./김살로메(소설가)

2012-10-04

개천절

알고 지내는 필리핀 친구가 있다. 귀화한 지 몇 년 되었는데 타국에서 온 사람들 대개가 그렇듯 우리말이 서툴 수밖에 없다. 당연히 우리 역사와 문화에도 낯설다. 그녀가 묻는다. 개천절이 뭐냐고? 모국어를 맘대로 구사하는 사람들끼리도 개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난감한데, 이방인 출신이 진지하게 물어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단군이 최초로 우리나라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뒤통수가 당긴다. 평소 그런 순수한 의미보다는 합법적 공휴일이구나, 하는 실리적인 생각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필리핀에도 독립기념일이 있는데 그것과 비슷한 것이냐고 묻는다. 애매모호하기만 한 광복절이란 이름이 그들의 독립기념일과 비슷할지 모르지만, 개천절은 오롯이 제 정체성을 살피는 것과 연관이 깊다고 내가 말한다. 유수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으면 갖기 힘든 뼈대 있는 기념일. 하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정작 우리는 잊고 산다.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최초의 국가 조선을 건국했음을 기리는 뜻으로 제정한 날이 개천절이다. 하지만 `하늘이 열린다`는 개천의 본뜻은 100여 년 앞선 기원전 2457년 환웅 시대로 소급된다.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 신시를 열어 홍익인간의 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날이 음력 시월상달 초사흗날이었다. 상달은 으뜸달을 말하는데,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시월이 상달이 되는 건 당연했다.개천절은 이처럼 건국 신화의 경축일이자,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근거하는 자긍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시월상달은 당연히 음력이었겠지만 그것을 따지는 건 단군 이야기가 신화냐, 역사냐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일반 시민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을 것이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는 것을 일 년에 한 번쯤 되새겨 보는 날은 필요하다. 그런 자긍의 뿌리가 올해로 4345년째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10-02

프라이데이와 방드르디

책을 읽다 보면 등장인물 이름을 참 센스 있게 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모험 항해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가 그런 경우이다. 앞부분의 항해와 난파 과정, 무인도 표류와 정착 분투기 등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오직 프라이데이가 나오는 장면부터 눈길이 확 끌린다. 금요일에 발견하였다고 이름마저 프라이데이인 로빈슨 크루소의 충직한 노예. 로빈슨 크루소를 넘어서지 못하고 그림자 역할에 머문 프라이데이는 연민과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갈증을 성찰한 작가 미셀 투르니에가 전혀 다른 프라이데이를 창조해냈다.`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란 재구성 소설을 내놓은 것이다.18세기 초, 로빈슨 크루소가 나온 당시는 백인과 영국과 문명인과 기독교가 세계관의 기준이 될 때였다. 그러니 계몽주의적 입장을 가진 그들은 자기들 기준 밖의 것은 모두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 흑인 원주민 프라이데이가 주체성을 확립할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패러디 작에서는 프랑스 말로 금요일에 해당하는 `방드르디`란 이름이 프라이데이 대신 등장한다.프라이데이가 단순하고 착한 노예였다면 방드르디는 당당하고 천진난만한 주체자였다. 프라이데이가 수동성을 의미할 때 방드르디는 능동성을 부여받았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투르니에 작품에서는 방드르디의 협력자이자 야만의 자연인으로 순응한다. 세계관의 전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세상에 미개와 문명의 경계가 어디 있냐고 질문해주는 것 같아 후련했다.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할 때 그 구분법은 휘파람 부는 날의 미세한 심장의 떨림을 알아차리는가, 개미에게도 그들 고유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바람 부는 언덕의 풀냄새만으로도 공기의 흐름을 눈치 채는가 등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가늠자를 들이대 줄 나만의 `금요일`을 찾아 옷깃 한 번 여며 보는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8

단춧구멍에 들꽃을

왜 이렇게 생겨 먹어서 사람들과 충돌만 일삼는 거지? 왜 선생님과 사이는 좋지 못하지? 왜 급우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서먹서먹하기만 하지? 왜 선생님들 하는 짓이 다 우스꽝스럽게만 보이지? 왜 얌전한 모범생이 되지 못하고 시 나부랭이나 끼적이다가 놀림감만 되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청소년기는 저런 생각으로 가득 찼으리라. 그의 중편 소설`토니오 크뢰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하다. 그 은밀한 고백 밑바탕에는 평범한 시민성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의 고뇌가 숨어 있다. 토니오는 기본적으로 아웃사이더인데다 깊이 보고 자세히 본다.동급생 미소년 한스를 해바라기하지만 `가장 많이 사랑하는 자는 패배자`라는 가혹한 교훈을 얻을 뿐이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한 소녀 잉에를 맘에 품지만 상대는 악의 없이 무심할 뿐이다. 평온하고 건전한 시민을 대표하는 한스나 잉에는 예술가적 기질로 길 잃은 시민이 되어버린 토니오와는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겨우 열네 살에 토니오는 자신의 길이 평범한 시민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자각한다.정돈되고 명상적인 부르주아 아버지와, 자유롭고 정열적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운명적으로 시민 계급과 예술가적 기질 사이에 방황할 수밖에 없는 토니오 크뢰거. 그는 두 세계 중 어느 곳에도 안주할 수 없다. 예술가 그룹에서는 경멸과 환멸을, 시민 계급에서는 굴욕과 패배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부러워해 마지않던 시민성을 경외와 긍정의 시선으로 수용한다. 시민 계급의 밝음을 사랑하고 질투하는, 인간적인 예술가가 되겠다고 고백한다.토니오 크뢰거는 조금은 평범하지 않다고 믿는 우리들 자화상이다. 단춧구멍에 들꽃을 꽂은 채 단정히 책을 읽는 아버지와, 만돌린을 들고 거리의 악사로 나서는 집시 풍의 엄마가 공존하는 게 고뇌하는 사람의 마음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7

햄버거 가게 높임말

바쁘다는 핑계로 패스트 푸드를 애용할 때가 있다. 해로운 게 너무 많이 들었다지만, 맛있는 데다 무엇보다 간편하니 찾을 수밖에. 요즘은 차를 타고 주문하는 `드라이브 쓰루`라는 편리한 제도도 있어 할인 스티커를 챙겨 가며 활용하는 편이다. 햄버거 가게에 가면 영양가 낮은 음식을 먹는다는 불안감보다 더 불편한 게 있다. 근무자들의 언어 습관이 그것이다. `고객님, 이번에 새로 나온 치킨 버거세요.`, `오늘 특별세트 메뉴는 새우버거세요. 점심시간이라 할인되십니다.` 하나 같이 저렇게 말한다.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다가 자꾸 듣다 보면 실소가 나온다.종업원 입장에서는 고객은 왕이니 무조건 높이면 좋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친절하고 공손한 표현을 찾다 보니 높임말 어미인 `시`자를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 `-시-`는 주체의 동작이나 상태를 높일 때 쓰이는 어미인데,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만 쓸 수 있다. 주체의 사물까지 높여서 말하기엔 우스꽝스럽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최대한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무의식이 그런 언어 습관을 낳은 것이다.햄버거 가게를 예를 들어서 그렇지 보험회사, 백화점, 병원, 은행 등 서비스가 요구되는 직종에서는 어디든지 그런 어법을 만날 수 있다. 처리하는 데 2, 3일 걸리세요. 이 옷이 더 비싸세요. 이쪽으로 가시면 병동이 나오세요. 이 상품 이율이 더 높으세요. - 과잉 친절이 베푸는 높임말 향연을 듣다 보면 피로감이 몰려온다. 대접 받고도 놀림 받는 찜찜함을 업체 측에서는 알 리 없다. 그렇게 말하라고 요구한 자도 없고, 그렇게 말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쳐 준 이도 없는 자연발생적 화법이므로.항공업계나 백화점 등에서 고객들의 이런 불만을 접수하고 고쳐나가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런 작은 실천이야말로 고객 감동 서비스가 아니겠나. 소비자만 제대로 높여줘도 고마운 일이다. 그들이 취할 상품까지 높일 필요야./김살로메(소설가)

2012-09-26

장갑 낀 시인

적재적소에 맞는 단어를 활용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은 언제나 앞서간다. 나들이 차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비장하고 서정적인 시 한 편이 흘러나온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외국어 낱말`이라는 산문시였다. 간략한 내용은 이러했다. 폴란드는 지독하게 춥다며, 라고 한 프랑스 여인이 날씨 이야기로 화제를 이끈다. 어쩌면 시인 자신일 폴란드인은 멋들어지게 대답하고 싶었다. 내 조국에는 시인들이 장갑을 낀 채 시를 쓰고, 달빛이 방안을 비출 때 비로소 장갑을 벗는다고. 시 속에는 황량한 부엉이 소리와 바다표범을 기르는 어부들의 노래가 있다고. 꼭 밟은 눈 더미 위에다 잉크 묻힌 고드름으로 서정시를 새긴다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직접 도끼로 호수에다 바람구멍을 만들어야 한다고.하지만 정작 시인은 프랑스어로 `바다표범`이 생각나지 않고 `고드름`과 `바람구멍`도 확신할 수 없다. 그리하여 `폴란드 거기는 무척 춥다면서요?` 라고 묻는 여인에게 저토록 섬세한 시 대신 `뭐, 대충 그렇죠.`라고 짧고 냉랭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외국어 낱말로 시적 심상을 표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인은 말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바람결처럼 자유자재로 언어를 다루는 그녀의 서정적 확신에 심장이 떨렸다. 추위를 견디며 시를 쓰던 쉼보르스카를 상상하느라 서툰 외국어 때문에 소통에 힘겨워하는 그녀는 뒷전일 정도였다. 모국어로 충분히 좋은 시를 썼으니 까짓것 외국어 낱말에 좀 서투르면 어떤가.평범한 우리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주무르지 못하는 건 내 안의 정서가 외국어 낱말처럼 서툴기 때문이다. 두껍게 언 마음 호수에다 도끼로 바람구멍 한 점 내고 싶다. 그리하여 장갑 낀 쉼보르스카 여사처럼 바다표범과 고드름을 맘껏 불러내고 싶다. 은밀한 결구로 화룡점정 하나 찍지 못하는 불면의 밤이 또 가고 있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5

먼지가 되어

가수 김광석이 있었지.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모습은 덤덤하면서도 슬퍼보였다. 기타와 간주용 하모니카가 잘 어울리던 남자. 하모니카 목걸개 장치가 제 운명의 덫처럼 보이던 남자. 끝내 불운을 넘어서지 못하고 세상을 등져버린 남자. 너무 일찍 전설이 돼버린 포크 가수. 그가 죽은 지 십 년도 훨씬 넘었지만 팬들 가슴 속에선 언제나 부활 중이다. `서른 즈음에`같은 경우엔 금세기 최고의 노랫말과 노래가 될 정도였다. 그가 전설이 되고, 그의 노래가 신화처럼 붙박이는 동안, 대구 방천시장엔 벽화로 만든 그의 거리까지 생겨났다.만인의 김광석은 거기까지였으면 싶었다. 나 혼자만의 욕망일 한 곡쯤은 숨겨두고 싶었다. 그의 사후 앨범 `노래 이야기` 첫 번째 수록곡인 `먼지가 되어`가 그런 노래였다. 노랫말 주인도, 작곡자도, 노래의 원주인도 그가 아니었다. 라이브로 리메이크한 그 노래는 김광석 것 아닌 것이 김광석에게 와서 듣는 이의 감성을 후벼 파는 그런 종류였다.그 노래가 검색어 앞 순위를 다투고 있다. 모 방송 가수 발굴 프로그램에서 경쟁자끼리 듀엣으로 불렀는데 화제가 되었단다. 뒤늦게 동영상 화면을 찾아봤다. 난리 날만하다. 락 버전으로 부른, 두 도전자의 하모니에 눈과 귀가 뚫렸다. 김광석의 담담함도 좋지만 젊은 듀엣의 패기도 만만찮았다. 먼저 그 진가를 발견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갈 때의 야릇한 서운함 같은 게 잠깐 밀려왔다. 하지만 진작 누군들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인가.혼자만 간직하고픈 것일수록 만인의 것이 되기 쉽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적극 광고나 해야겠다. `시를 써 봐도 모자란 당신`이 생각나는 이들아, `먼지가 되어`를 다섯 번만 들어 보라. 김광석의 라이브도 좋고, 젊은 듀엣의 도전곡도 상관없다. 가을맞이 선물로 이보다 맞춤한 감성 충전제는 없을 것이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4

바라매 아니 뮐쌔

태풍 산바가 휩쓸고 간 자리는 나름 심각했나 보다. 온종일 집안에 갇혀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로수들이 요동쳤고 강물이 둔치까지 삼키긴 했다. 하지만 태풍이 올 때면 늘 있는 일쯤으로 여겼다. 요즘 유행하는 시스템 창호가 바람소리마저 막아주는 바람에 창 너머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그림 속 풍경처럼 대했던 것이다. 다음날 나서 본 거리도 깨끗했다. 나쁜 공기를 몰아낸 덕인지 하늘 역시 맑고 드높았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었다. 사람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을 때서야 무심하게 맞을 태풍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숙사 천장에 비가 새고, 마당에 물이 차오르고, 벽 틈으로 비가 스며들고.집으로 돌아오면서 아파트 화단 풍경을 보고 제대로 실감하게 되었다. 조경수 중 삼십 퍼센트 정도는 뿌리째 뽑혀 넘어져 있었다. 신생 아파트라 심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었다. 트럭에 실어 올 때의 모습 그대로 뿌리가 친친 감겨 있었다.가로수나 조경수가 넘어지는 건 나무 잘못도 태풍 잘못도 아니다. 사람 잘못이다. 숲 속 나무가 강한 바람에 넘어진다는 소리는 잘 듣지 못했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그 뿌리 단단히 내렸기 때문에 태풍조차 넘보지 못한다. 하지만 가로수의 운명은 그렇지 않다. 옮겨 심는 과정에서 밑동을 동여맨 고무 밴드 때문에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아 쉽게 넘어지는 것이다.뿌리 내리기 쉽지 않은 건 우리 일상도 마찬가지다. 맘속 뿌리는 작은 비바람에도 흔들리기 쉽고, 어떨 땐 송두리째 뽑혀 나가기도 한다. 어느 순간 동여맨 고무밴드가 스스로를 옭아매 뿌리 내릴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라고 조상들은 노래했다. `곶 됴코 여름 한` 그날을 위해서라면 제 몸 옭아맨 끄나풀부터 걷어내야 한다. 강한 바람은 뿌리 얕은 나무를 데려가지 아무리 작더라도 뿌리 깊은 나무는 쓰러뜨리지 못한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1

차칸남자 대 착한남자

드라마 한 편의 제목이 이슈가 되고 있다. 현재 방영중인 KBS 수목드라마의 원 제목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남자`이다. 한데 방송사는 보도 자료를 통해 다음 회부터는 `차칸남자`에서 바른 표기법인 `착한남자`로 타이틀을 바꿔 올린단다. 시청자들의 정서를 고려하고 올바른 국어사용에 대한 공영방송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란다. 제목을 바꾼 진짜 이유는 한글 관련 단체들의 압력 때문이다. 그들은 `차칸남자`가 우리말을 파괴한다며 항의 공문을 방송사에 전달했다. 국립국어원 역시 개선을 요구하는 권고문을 보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방송사의 올바른(?) 제목 바꾸기가 맘에 들지 않는다. 참으로 융통성 없고, 경직된 사회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만 하다.나는 한 때 한글전용 학생운동을 한 전력이 있을 만큼 우리글을 아끼고 사랑한다. 하지만 한글을 사랑하는 것과 예술적 표현의 자유는 별개라고 생각한다. 표기법에 맞는 글자를 고집하면서까지 작가의 창작 의도를 방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차칸남자`와 `착한남자` 사이는 `무릎팍도사`와 `무르팍도사` 만큼의 거리가 있다. 더 비유하자면, 피카소더러 불분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 대신 분명하고 이해 가능한 구상화를 그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맞춤법을 따지며 시비를 걸기 전에, 작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인다. 살짝 비트는 표기법조차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다지 건강한 사회는 못 된다. 바른 국어사용만이 국민 정서 함양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경직된 사고를 벗어나 소통이 되는 사회를 꾸리는 게 더 급하다./김살로메(소설가)

2012-09-20